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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도 영유권 분쟁 평가B괜찮아요
    서 론독도 영유권 문제를 우리의 시각에서만 보면 그 객관성이 저하되는 것 같은 인상을 줄 우려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주된 쟁점을 도외시하고 사소한 쟁점에 얽매이거나 일본측이 왜곡된 사실에 기초한 억지 주장을 하는 것에 대하여 일일이 대응하는 것도 역시 객관성을 저하시킬 수 있다. 객관적 연구 방법은 역사적 사료에 기초하여 과학적인 분석을 하고, 건전하고도 정확한 판단을 내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하에서 일본측에서 일반적으로 주장해온 주된 쟁점에 관하여 간명하게 논하기로 한다.Ⅰ. '원초적 권원' (Inchoate Title)의 형성 여부(1) 가시적 인접성한국의 독도 영유권은 독도가 그 모도인 울릉도에서 92킬로 가량 떨어져있어서 울릉도 산 위에서 보인다는 가시적 인접성에 기인한다. 울릉도는 AD 512년 신라 지증왕때 이사부에 의해서 복속된 때로부터 한반도의 부속도서가 되었다. 한국에서나 일본에서나 독도가 울릉도의 부속도서로 인지하였고, 울릉도가 유사이래 한국의 영토이었으므로 독도는 울릉도의 운명에 따라 한국의 영토라는 것은 별도의 사실이 증명되지 아니하는 한 자명한 이치다. 일본인들은 1905년 독도 편입 직전까지도 독도와 울릉도를 松竹 한 쌍의 섬으로 파악하여, 각각 송도와 죽도라고 부르기도 하였고 후에는 이를 바꿔서 부르기도 하였다. 비록 인접성이 도서 영유권을 결정하는 절대적인 요소는 아니라고 하여도 가시적 인접성이 있는 경우에는 원초적 권원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며, 특히 가시적 인접성으로 말미암아 도서가 한 그룹으로 형성된 것으로 인지되는 경우에는 小島의 운명은 그 반대의 경우가 입증되지 아니하는 한 母島의 운명에 따라 결정될 수 있다.(2) '도해면허'와 관찬서 은주시청합기일본정부는 1618년 大谷과 村川 두 가문에서 막부로부터 울릉도의 도해면허를 취득하여 그후 매년 한번 정도 울릉도에 가서 어채를 하고 귀환하였다고 하며, 독도에는 울릉도에 왕래하는 도중에 기항하였는데 1661년경에는 大谷과 村川 두 가문에서는 독도에 정부와 협의 없이 도해면허를 발급해주었다면 일본 정부 자신이 당시의 국제규범이면서 국내규범인 해금을 위반한 것이 되어 모순이 된다.일본 정부는 大谷과 村川 두 가문에서 막부로부터 울릉도로의 도해면허를 취득하여 매년 한번 정도 울릉도에 가서 어채에 종사하였고 특히 독도에는 도중에 기항하였다는 점이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실효적 지배에 의한 무슨 원초적 권원같은 것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일본의 고유 영토였다는 것을 나타내주는 것처럼 주장하고 있지만, 독도 도해면허를 발급해준 지 6년 후인 1667년에 나온 관청 편찬서 은주시청합기에서 "戌亥 간에 2日 1夜를 가면 松島(=獨島)가 있고 또 1日을 가면 竹島(=鬱陵島)가 있다,------ 이 두 섬은 無人島인데 高麗를 보는 것이 마치 雲州에서 隱岐를 보는 것과 같다. 그러한 즉, 일본의 西北 乾地는 이 州로서 境界를 삼는다."라고 하여, 당시의 관리들과 어민들도 독도와 隱岐島 사이가 양국의 경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드러내 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설사 大谷과 村川 두 가문에서 도해면허를 얻어서 울릉도에 가서 어채를 하였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해금령이 내려져 있던 당시에 외국에 나가는 것을 특별히 허락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Ⅱ. 일본 정부가 인접성에 의해 조선의 영유권 설정(1) 德川幕府에 의한 조선의 독도 영유권 인정1693년과 1696년 울릉도와 독도에서 안용복 등 조선인 어부들과 일본의 어민들과의 충돌 사건으로 일본 중앙정부에서 이 松竹 兩島의 영유권 문제에 관한 논의가 있었다. 대마도 도주 宗義方이 1696년 1월 江湖에 伯耆州 태수와 함께 德川幕附의 관백에 가서 내조하였을 때 관백은 그의 執政 阿部農後守와 함께 이 자리에서 "지금 그 땅의 지리를 헤아려 보건대, 因幡州와의 거리는 160리쯤이고 조선과의 거리는 40리쯤이어서, 일찍이 그 나라 땅이라는 것이 의심이 없을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병력으로 임한다면 무엇을 요구하여 얻지 못하겠는가? 다만 쓸모 없는 조그마한 섬을 가지고 이웃나라와아와서 조선으로부터 온 역관을 불러 서찰로 이러한 취지를 전하고 1697년 정월에 중앙정부의 지시를 그대로 이행하여 裁判差倭 平成常을 동래부사 李世載에게 보내어 울릉도가 조선 영토이므로 다시는 침월이 없을 것임을 선언하는 취지를 말하였다.조선 정부에서는 이러한 일본의 입장을 문서로 남겨 분명하게 해두고자 이듬해 1698년 3월 예조참의 李善溥으로 하여금 대마도 形部大輔拾遣 平義眞에게 서계를 보내어 "우리의 영토는 지도에 실려있고, 역사적 문적이 또한 그러하니 일본에서 멀고 우리한테서 가까우므로 경계는 스스로 나누어지는 것이다"라고 역시 인접성에 따라 경계를 정하자는 일본측의 의견에 동의하고 松竹 兩島가 조선의 땅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역사적 자료에 비추어 이를 조선의 영토로 하는 것이 자명하다고 밝혔다. 이러한 조선측 서계에 대하여 1699년 대마도 形部大輔拾遣 平義眞은 전적으로 동의하고 이를 강호 덕천막부에 보고하겠다고 조선에 통보함으로써 양국 간의 울릉도와 그 부속도서인 독도에 대한 문제는 공문서의 교환 형식으로 해결이 되었던 것이다. 그 후 덕천막부는 독도와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라고 확정하였고 이를 위반하는 일본인들을 극형으로 다스렸다.(2) 명치유신 후 일본정부가 조선의 독도 영유권 인정일본 외무성은 태정관의 결재를 받아 1869년 12월 일본 외무성 고위 관리인 佐田白募, 森山茂, 齊藤榮 등을 동래에 파견하였는데, 이들은 국교의 확대재개와 정한론의 가능성을 엿보고 돌아가 "죽도(울릉도)와 송도(독도)가 조선 부속으로 되어있는 시말"을 보고하는 가운데, "此儀松島ハ竹島ノ隣島"라고 하여 독도가 조선의 영토 울릉도의 屬島임을 밝히고 있다.일본 내무성은 1876년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던 바로 그 해에 일본의 국토의 지적을 조사하고 지도를 펴내는 사업을 실시하면서, 당시 島根縣 참사 境二郞으로부터 울릉도(=죽도)와 독도(=송도)를 島根縣에 포함시킬 것인가 말 것인가에 관한 질의서를 1876년 10월 16일자 공문으로 접수하고, 약 5개월에 걸쳐 元綠 年間에 조선죽도 외에 있는 一島가 송도(독도)라고 밝히고 있다. 태정관은 이러한 내무성의 질의서를 접수하여 검토한 후 1877년 3월 20일 "질의한 취지의 죽도 외 一島의 건에 대하여 本邦은 관계가 없다는 것을 心得할 것"이라는 지령문을 작성하여, 3월 29일 내무성에 하달하였다. 이를 접수한 내무성은 4월 9일 島根縣에 전달하였다.이리하여 일본 정부는 다시금 울릉도와 독도에 출어를 금하게 되었다. 1900년에 이르기까지 일본에서 출판된 거의 모든 관찬 지도들이 독도도 울릉도와 함께 조선의 영토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렇듯 한국에서는 물론 일본에서 발견되는 모든 공식 문헌에서 독도가 울릉도와 함께 조선의 영토라는 것을 선언하였으며, 일본의 영토라고 표시한 것은 단 하나의 문헌도 없다.Ⅲ. 선점이론에 의한 무주지 편입의 성격(1) 대한제국은 1900년 칙령 제 41호에서 이미 중앙 관제에 편입일본이 독도에 대하여 야욕을 품게 된 것은 1904년 러일전쟁이 시작되어 동해에서의 제해권이 문제가 되었을 때였다. 일본은 전략상 요충인 독도를 자국 영토로 함으로써 해전의 수행에 더 편리하게 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일본이 독도가 무주지라면서 일본영토로 편입하고자 한 것이 일본이 독도에 대해 없는 주권을 주장해 본 첫 번째 사건이었다. 일본이 독도를 무주지라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상 울릉도의 속도로서 항시 한국의 영토로 한국의 주권적 관할 하에 있었다는 사실과 1900년 10월 25일 관보에 게재된 칙령 제 41호를 통하여 독도가 울릉도와 함께 강원도에 소속되게 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반한다. 이 칙령을 선포하게 된 부분적인 목적은 1889년에 체결된 朝日通漁章程이 1900년 10월 3일에 개정되어 함경도,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의 海濱 3리에 이어 경기도의 海濱 3리를 포함하고 장차 이를 한반도 전체에 확대할 가능성이 있었고, 1900년 2월 14일에는 일본어민에게 捕鯨業約定書를 許與하여 그 실시 범위가 함경도, 강원도, 경상도의 海濱 3리를 포함하게 되자 울릉도와 독도의 海濱써 조선의 독도 영유가 만 천하에 공개되고 일본 어민들과 정부가 숙지하고 있었던 것인데, 그로부터 여러 해가 지난 1905년 1월 28일 일본 각의에서 독도를 무주지라고 하면서 한국을 무력으로 점령한 상태에서 한국과 협의 없이 일본의 영토로 편입한 조치는 주권국가의 영토를 절취에 의해 강탈한 범죄행위였다. 일본이 1905년 11월 17일 을사보호조약에 의하여 외교권을 강탈하여 독립국이 아닌 대한제국에 1906년 3월 28일에 가서야 지방관리를 울릉도에 보내어 구두로 편입사실을 통보하였다는 것은 통보의 적절한 절차를 따른 것이 아니다. 1905년 1월 28일의 일본 정보의 영토편입 조치는 어느 모로 보나 불법이다.Ⅳ. 연합국의 일본영토 분리조치에 대한 재론 가능성 여부(1) 카이로 선언과 '무조건 항복'에 따른 분리 반환 조치의 성격야욕과 폭력에 의한 우리 영토 독도의 절취행위는 1945년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여 카이로 선언과 포츠담 선언의 제 조건을 무조건 수락하는 '무조건 항복'을 함으로써 원상회복의 대상이 되었고, 연합국 최고사령관의 지령 제677조에 따라 폭력과 탐욕으로 일본이 절취 내지 탈취하여 반환하여야 할 대상으로서 일본으로부터 분리되어 미군정을 거쳐 1947년 11월 UN결의에 따라 한국이 1948년 8월 15일 독립하게 되자 한반도와 부속도서로서 반환되었다. 이렇듯 한국의 독립은 일본이 점령했던 여타의 영토와 달리 1951년 9월 8일 체결된 대일강화조약이 이루어낸 것이 아니라 이미 그로부터 약 3년전 연합국(Allied Powers)과 UN결의로 이루어낸 것이며 대일강화조약에서는 이를 단지 확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은 연합국이 일본의 '무조건 항복'에 의하여 취한 영토분리 등 제 조치와 유엔 결의에 의해 독립한 수혜국이다. 대일강화조약에 의해서도 한국이 이미 취득한 독립과 독립시 부여받은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인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수정할 수 없었던 것은 자명하다. 다만, 1951년 여름 대일강화조약을 준비할 당시 초안 단계
    사회과학| 2003.09.03| 5페이지| 1,000원| 조회(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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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근리 양민학살 진상규명
    노근리 양민학살의 진상규명한국역사의 한 축으로 자리잡았던 비극적인 한국전쟁은 그 참상뿐만이 아닌 많은 숨겨진 진실들을 가지고 있다. 어느 누구의 승리도 아닌, 또한 많은 이들을 죽음과 그에 따른 피해로부터 자유롭게 할 수 없었던 한국전쟁은 지금까지도 그 피해를 고스란히 한반도의 국민에게 안겨주고 있다. 전쟁에서 알려지지 않은 비극적인 참상과 이유 없는 죽음은 수도 없이 많다. 남원지방이나, 문경, 그리고 우리가 지금부터 보고자하는 노근리에서 밝혀지지 않던 문제로 대두되는 예산에 이르기까지, 어이없이 많은 죽음들이 21세기 우리 앞에서 밝혀지고 있다. 책으로도 많은 관심을 일으켰던 실화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 의 저자이기도 한 정은용씨는 60년대에 미 정부에 노근리의 사건을 호소하였고, 여러 증인들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면서 충격을 안겨주었다. 전쟁과 이유 없는 학살, 또 그 안에 감추어졌던 역사를 조명해보자. 세계 2차 대전 이후, 일본에 의해 억눌렸던 한국은 해방의 기쁨을 맞보기도 전에 다시금 외국에 의한 지배논리에 휩싸이게 되었다. 국토는 두 강대국에 의해 분단이 되었고, 북과 남을 두 축으로 한 혼란기였으며, 그 과정에서 많은 통일의 노력과 아픔들은 그 실효도 없이 50년대의 비극적인 전쟁으로 이어졌다. 수많은 피난민이 발생하였고, 그 당시 화려한(?) 상륙작전이전 전 국민의 후퇴 물길 속에 우리의 손이 아닌 한 외세의 손에 자행된 학살사건이 있었으니 그 장소가 바로 노근리이다. 이 사건이 부각되는 이유는 그 주체가 그 당시의 적군이 아닌 쉬쉬하며 침묵해온 미군의 만행이라는 점이며, 그 안에서 어째서 이러한 학살이 조장되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누구나 아는 바와 같이 1950년 6월 25일 새벽, 의정부와 서울을 축으로 하는 2만의 병력이 남하하였고, 저지선을 방어하기에는 버거웠던 한국군은 단 2일도 강북선을 지켜내지 못하고 무너졌다. 이에 한국군은 한강의 다리들을 폭파, 한강 이남지역으로 후퇴하였으며, 수많은 피난민들이 발생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의 폭격은 많은 살상을 하게 되었고, 미군의 폭격은 한국군 병력에게도 가하여졌다. 한 달여가 채 안 되는 7월 20일 북한군의 대전 점령과 함께,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갔고, 그 과정에서 수없이 많았던 정치적인 사상범이나 미군에 의한 좌익사범의 처형 등 강제적인 만행이 이루어졌다. 초기의 한국전쟁의 양상은 그야말로 이남으로의 후퇴였고, 영문을 모르던 양민들은 일상에 전념하였으며, 그 도한 학살의 시초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미군의 대처는 열악했다. 정밀 훈련을 받은 북한군과는 달리, 미 정규군은 기초적인 군사훈련 역시도 제대로 수행되지 않았다. 전선에서의 이탈은 물론, 실전의 경험이 없는 장교와 병사들이었다. 여기서 노근리 지역에 투입된 군사들의 화력은 절대적인 열세에 놓여 있었고, 그들은 한국에 대한 멸시감을 갖는 관계의 군인들이었다. 한국전은 그 역사에서(쓰여진) 오류가 많이 보인다. 또한 그 과정에서의 비극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 베일 안의 장막을 걷어내는 것 그것이 남은 자들의 사명이다.충북 영동군 노근리 사건의 피해자 및 유족들은 한국전쟁의 정사에는 나와 있지 않은 비극적인 사건이 있다고 40년 전부터 계속 주장하여 왔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후 3일만에 북한군에 의해 서울이 함락되고 대전으로 임시 수도를 옮겼다. 7월 20일 대전이 함락되고 이어 영동읍 부근에서 전투가 임박한 때인 1950년 7월 23일, 미군이 영동읍 주곡리 마을로 찾아와 이곳에서 곧 전투가 벌어질 것이므로 피난을 가라고 소개령을 내렸다. 주곡리(영동읍) 주민들은 이웃 산간 마을인 임계리였다. 임계리에는 그 부락 원주민 외에도 주곡리 주민 및 다른 곳으로부터 피난 왔던 사람들 수백 명이 모여있었다. 7월 25일 해질무렵(오후 8시경), 갑자기 미군들이 임계리로 들어와 후방 안전지대로 피난을 시켜주겠다며 집합토록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그 날 오후 10시경 주곡리, 임계리 등의 마을 주민 500∼600명을 강제로 인솔해 임계리를 떠나 주곡리를 경유하여 임계리에서 4-5km 떨어진 하가리까지 이끌고 갔다. 한밤중이 되서야 피난주민들은 하가리에 도착했다. 미군들은 그곳 하천변 들판에 피난민들을 꿇어 엎드리게 한 후 그들 주위에서 총을 들고 감시를 하였다. 그 날 밤에 피난민 이봉용 등 7명이 미군의 총에 맞아 숨졌다. 7월 26일 아침이 되었을 때 피난민들은 미군이 모두 사라져 버린 것을 알았다. 피난민들은 인솔자 없이 대구 쪽으로 가는 국도로 따라 피난을 계속하였다. 피난민이 노숙지에서 6-7km 떨어진 서송원리 부근에 도착했을 때는 정오 무렵이었다. 갑자기 미군들이 다시 나타나 피난민의 길을 막고 경부선 철도 위로 올라가게 하였다. 피난민들은 철도를 따라 400-500m 가량을 걸어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지역까지 인솔되어 갔다. 그곳에서 미군들은 피난민들을 정지시키고 피난민 대열의 길이를 짧게 압축시킨 다음 대열 앞뒤에서 교차로 소지품 검사를 실시했다. 위험한 물건은 발견되지 않았다. 피난민들이 철로 위에서 쉬고 있을 때 미군 통신병이 어디론가 무전 연락을 취하였다. 그 얼마 후 경비행기(정찰기) 1대가 나타나 피난민들 머리 위를 몇 바퀴 돌고 갔으며 그로부터 한참 지난 후에는 미군 전투기 2대가 날아와 피난민들 가운데에 폭탄을 쏟아 붙고 기총 사격을 가하였다. 이때 수많은 사람들이 살상을 당했으며, 전 가족이 몰살된 가정이 다섯 가정이나 되었다. 미군 전투기가 돌아가자 폭격을 하는 동안 피신했던 미군들이 철로 위로 되돌아 와서 살기 위해 우왕좌왕 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총을 쏘아 많은 사람들이 살상 당했다. 살아남은 피난민들이 노근리 앞 쌍굴과 폭격현장 철로아래 배수로(작은 터널)와 철로변 아카시아 숲 속으로 숨었다. 배수로에 숨어 있는 사람들에게 미군들이 총격을 가해 수명이 죽었다. 그리고 미군들은 총격을 가하며 흩어진 생존자들을 모두 모아 큰 쌍굴 안으로 몰아 넣었다. 콩나물이 배긴 듯이 빽빽하게 비무장 양민들이 모여있는 터널 속을 향해 터널 입구 양쪽에서 미군들은 총을 쏘았다. 처음에는 쌍굴 입구 전면 300-400m 전방의 산중턱에서 기관총 사격을 가하다가 나중에는 쌍굴 전면 약 90m 전면까지 접근하여 마구 사살하였다. 미군들은 7월 26일 오후부터 29일 새벽까지 밤낮 총을 난사해 터널 내외는 수많은 시신들이 쌓였으며 개울물은 핏물로 변했다. 청장년 등 남자들은 밤을 틈타 도망했지만 아녀자와 노인들은 그럴 수 없어 희생이 컸다. 사건직후부터 이 사건으로 300∼400명 가량의 양민들이 살상되었다고 주장되어 왔다. 이 사건이 발생한지 50년이나 되어 정확한 피해규모를 확인하는데는 어려움이 있었으나 AP보도이후 한국정부의 진상조사가 시작된 후 영동군청에 정식 신고된 사상자 숫자가 248명에 이르고 있다. 이중 한국 측 노근리 사건 조사반의 조사보고서에 의하면 미군에 의해 살해된 피난민중 83%가 부녀자와 노약자인 것으로 나와 있다.피해자들의 증언을 조합하면 그 당시의 피해자들은 산속마을 특히 폐광에 은신 중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또한 피난을 빌미 삼은 미군은 그것도 교전 상황중이 아닌 곳에서 학살을 자행하였고, 또한 전날의 후퇴도중 7면의 양민을 사살하였다. 여러 가지 증언들을 조합하면 미군은 이미 많은 인명에 대한 인권유린을 자행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그들을 적군으로 오인하였다고 하여도 농기구 이외에는 아무런 무기를 소지하고 있던 양민들을 전투기의 폭격과 기총사격 등으로 폭살/사살 시켰다는 것과 그 학살이 60여 시간동안 장기적으로 진행되어갔던 시간들은 감히 변명할 수 없는 일이다. 청장년 등 남자들 다수가 사건 현장에서 탈출한 뒤에는 쌍굴 다리에는 어린이와 노인, 여성들만 주로 남아 있는 것을 알고도 이들을 굴에 가두고 사살을 목적으로 사격을 가했다는 것이 피해자들 증언의 핵심이다. 피난민들을 대피시킬 시간적인 여유는 충분히 있었다,,,,"피난민 사이에 적이 숨어있다고 생각했으며 노근리 사건은 인간 도살 행위(Wholesale Slaughter)였다" ----- 패터슨(Herman Patterson)"나는 피난민들과 작은 터널에 숨었다. 그런데 우리 쪽 군인들로 보이는 군인이 작은 굴로 총을 쏘았다. 나는 무사히 빠져 나왔다. 아군 중에 총을 쏘지 않은 사람도 있다. 나는 굴속에 그렇게 숨어 있어 있는 사람에게 총을 쏘지 않았다. 그들은 살고 싶어 숨어있는 인간에 불과 했다" ---- 델로스 플린트(Delos Flint)우리 대대 군인들이 피난민에게 총격을 가하는 것을 보았다. 어떤 사람도 통과시키지 말라는 명령이 내린 뒤였다. 나는 과연 이 피난민들 사이에 적군이 있는지 확신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우리 소총 중대원 들에게 총을 쏘지 말라고 했다. 그런 뒤 나는 어린아이를 발견해서 근처 쌍굴로 안내했다. 여기저기에 부상당하고 겁에 질린 한국인들이 있었다. 나는 어떤 위협도 느끼지 못했다. 첫째 날 그곳에는 아무 북한군도 없었다. 이것은 분명하다. 대부분 여자이고 어린아이들이었다. 노인도 있었다. ---- 로버트 캐롤(Robert Carrol)
    사회과학| 2003.09.03| 4페이지| 1,000원| 조회(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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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중 영화의 이해 감상문
    대중영화의 이해 를 읽고오늘날 서구 문화에서 극영화의 역할은 1930년대만큼 두드러지진 않지만 여전히 곳곳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영화 관객이 줄고, 이러한 관객의 감소를 이겨내기 위한 제작자들의 부담이 가중될수록 영화 산업의 관행들에도 여러 가지 변화가 있었는데 이런 변화는 이어서 문화적인 컨텍스트 내에서 개별영화들이 차지하는 위상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첫째로 영화산업이 블록버스터에 집중함으로써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규모가 작은 영화들이 일반에 얼려질 기회가 줄어들고 심지어 배급조차 힘들어지게 되었다. 두 번째는 상업적으로 성공해야 한다는 과중한 부담이 영화제작자와 배급자들을 억누름으로써 해당시즌에 흥행에서 대히트할 몇 안되는 작품만을 선정해 거기에 거의 모든 지원을 하게되는 추세가 생기게 되었다. 극영화는 1972년 재즈가수 라는 영화에서 처음으로 사운드를 도입하면서 발달하였다. 사운드의 도입으로 영화의 내러티브를 사실적이고 보다 복잡하게 짜 낼 수 있었다. 극영화는 리얼리즘 소설처럼 세계를 리얼리스틱하게 구축하려고 하며, 이를 위해 등장 인물에 심리적인 깊이를 더하고 그것을 실생활의 관념 속에 자리매김 한다. 사운드의 도입은 할리우드가 세계시장에 대해 헤게모니를 되찾는 효과를 가져왔으며, 미국 영화 산업에 있어 재정적인 보증의 성격을 바꿔놓았다. 활동 사진이 상업적인 목적에 이용되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에서 였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프랑스와 이탈리아, 독일과 영국에서는 작품 생산을 현저히 줄였다. 이 틈을 노려 미국은 다른 나라 공급자들이 지배하고 있던 시장에 침투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결국 전쟁 막바지에는 미국 영화가 세계 영화 생산의 85%를 차지했고, 이에 미국 영화 제작자들은 미국 관객들의 취향에 맞는 영화를 제작하는 데 관심을 두게 되었다. 거대한 국내 시장을 바탕으로 자본을 늘려가면서 미국의 영화사들은 자신들의 주도적인 지위를 이용해 영화 산업 구조를 수직통합으로 변화시켰다. 수직통합의 영향으로 회사 자본의 토대가 확대되었으며, 1920년대 이전부터 시작된 스튜디오 시스템이 진전되고, 공고해졌다. 그러나 미국의 시장은 수직통합의 불법 판결과 공황의 심화로 인해 큰 영향을 받았다. 극영화의 종말을 목격하는 것은 아니지만 20세기를 지배했던 오락산업으로서 그것이 누렸던 문화적인 헤게모니는 이제 잃어버렸다. TV가 가정에 보급되면서부터 영화 관객수는 전반적으로 하향 추세를 보였다. 1950년대 초반 즈음에 영화는 이미 그 문화적인 지배력을 상실하고 있었고, TV가 거기에 부채질을 했다는 점은 명백하다. 이런 TV의 위협에 대한 방안은 TV에 대항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었다. 또 다른 대응 방식은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약간 흥미로운 것인데 바로 기술의 혁신 즉, 와이드 스크린 형식을 선보인 것이다. 하지만 이 방법은 비용 때문에 데먼스트레이션 영화에 주로 사용되었고, 내러티브를 갖춘 극영화에는 이용되지 못하였다. 관객이 줄어든 이유 중 또 하나는 2차 세계대전 이후 10년 이상 거치면서 관객의 구성이 변했다는 점이다. 가족시장은 사라지고 청소년 시장이 그 자리를 메웠다. 시장 분할은 새로운 전제이다. 영화속에 다양한 관객층을 담으려는 경향을 반영하듯 멀티플렉스가 생겼다. 이러한 멀티 플렉스는 한국 영화 시장의 파이를 키운 일등공신이기도 하다.한국의 영화 시장도 이제는 대단한 규모를 자랑한다. 1999 년도부터 우리 영화는 급진적인 발전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우리 영화의 시장 점유율이 50% 까지 오르면서 스크린 쿼터의 존폐논란이 다시 한번 일어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제작되는 영화는 연간 60~80편, 연간 수입되는 외화는 400편을 넘어서고 있으며, 여기다 급속도로 커지는 비디오 시장까지 포함하게 되면 한국 시장에 공급되는 영화 물량의 증대는 가히 폭발적이라고 할 만하다. 웬만큼 영화광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도 이처럼 엄청나게 쏟아지는 신작들을 대충 훑어본다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굳이 영화관에 가지 않더라도 VCR등을 통해 손쉽게 영화를 볼 수 있게 됨에 따라 이제 우리 사회 어디에서나 영화는 화제의 중심에 놓인다. 영화가 대중적 담론의 중심에 놓이는 것과 함께 다양한 영화 작품들이 소개됨으로써 영화 애호가들의 층도 분화되고 있다. 예전부터 막강한 힘을 행사하던 할리우드 영화를 즐겨찾는 사람들도 꽤 많지만, 그 동안 별로 소개되지 않았던 유럽의 예술 영화나 중국, 대만 등의 아시아 영화들이 알려지면서 예술 영화 내지는 대만 영화의 고정 관객들도 점차 형성되어 가고있다.예술 영화에 집착하는 영화광들은 영화 속에서 인간과 세계에 대한 진지한 성찰의 태도를 찾으려는 경향이 있다. 이들의 영화인식을 세밀히 탐색해 들어가보면, 그 근저에는 작가영화의 신화가 도사리고 있는 것을 알게된다. 즉, 한편의 영화에는 그 영화를 만든 감독의 미학과 사상 또는 창조적인 비전이 담겨있으며, 좋은 영화란 그 작가의 목소리에 담긴 진정성에 좌우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영화를 단순한 오락물이 아닌 문학과 같은 예술로 위치시키는 장점이 있긴 하지만 영화가 생산되는 고유한 과정과 물적 토대를 무시하게 될 우려가 있다.프랑스 누벨 바그 비평가들에게서 기원하는 이른바 작가 정책은 제도권 문화에 의해서 부당하게 무시당해왔던 할리우드 장르 영화 감독들을 발견해 내는 데 공헌하긴 했지만 무분별한 작가숭배로 빠지는 우를 범했다. 파리의 시네마 테크에서 형성된 이들의 영화광적 감수성은 상업 영화권에서 작업하면서도 자신의 세계관을 드러내는 감독들이 있다는 것을 인식시킨 점에서 대중 문화로서 영화가 가진 매력의 중요한 부분을 설득력있게 제시해 준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나 이들의 다분히 과장된 작가에 대한 경도는 마치 영화로 현실을 대체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할 우려가 있다. 이들로부터 오늘날에까지 면면히 이어지는 이러한 영화 탐닉증이 사회 현상으로서의 영화를 이해하는 데에 무력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사실 미국의 할리우드에서부터 한국의 충무로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대다수 영화 감독들은 재미 라는 유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제작비를 대는 제작자와, 영화라는 상품을 소비하는 관객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규정할 수밖에 없는 감독들에게 있어 표현의 제약은 어쩌면 숙명일지도 모른다. 영화사를 통틀어 보더라도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어느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영화로 빚어낼 수 있었던 운 좋은 감독은 그리 많지 않았다. 비교적 영화의 작가성을 인정해주는 유럽영화의 경우에도 어느 정도의 흥행 성공이 보장되지 않는 한 감독의 재량의 폭은 그리 넓지 않았다. 타계한 펠리니가 자신의 어린 시절의 환상 등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영화가 전 세계적으로 고정관객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이지 그저 예술성이 높기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작가는 전체로서의 영화 문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예술 영화만을 고수하든 대중오락으로서의 영화만을 받아들이든 어느 하나의 선택적 친화성으로는 많은 부분들을 잃게 되는 잘못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상품이자 예술이라는 영화란 매체의 거의 근본적인 양면성을 감안할 때 두 속성을 통일시킬 수 있는, 영화 문화를 바라보는 총체론적 입장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공감하게 될 것이다. 작가는 기본적으로 영화는 관객이 소비하는 어떤 것이라는 관점에서 이 갈등하는 영화 문화를 동시에 포괄하려 한다. 그는 영화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 부여하는 의미가 설혹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결코 의미의 독재 라는 상태로 떨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작가 영화의 신봉자들은 작가의 의미가 영화의 전부라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이는 구조주의 이후의 영화 이론이 보여주듯이 심히 의심스러운 것이 되어 버렸다. 작가의 의도가 영화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 중요한 지침이 될 수는 있겠지만 결코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영화를 현실 도피적인 오락적 수단으로만 보는 것도 영화에 담긴 이데올로기를 간과해 버릴 위험성이 있다. 이는 관객을 단순히 영화의 수동적 감상자로 위치시킨 후 기존 체제를 유지시키는데 기여하는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와 관념을 재생산하는 기능으로 한정시켜 비판적 읽기를 방해하는 기능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독후감/창작| 2003.09.03| 3페이지| 1,000원| 조회(5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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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소설] 김원일-마음의 감옥 평가D별로예요
    김원일의 마음의 감옥 을 읽고소규모 출판사를 경영하는 '나'는 4·19혁명을 겪은 소시민적인 지식인으로, 동생 현구는 대학시절 운동권에서 활동하다 사회운동에 뛰어든 1980년대 민주화 세대로 등장한다. 공산국가의 변화에 대한 관심으로 모스크바 국제도서박람회에 참가하고 귀국한 나는 동생 현구가 빈민운동에 앞장서다가 공무집행방해죄로 구속되어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6·25전쟁 당시 유복자로 태어난 현구는 1976년 긴급조치 위반죄로 감옥생활을 시작하여, 올 봄에는 달동네 재개발지역 강제철거과정에서 철거반원을 구타한 일로 투옥되어 병이 났다. 결국, 현구가 살아날 가망이 없게 되자, 현구 아내는 현구를 달동네로 옮겨 빈민장으로 장례를 치르겠다고 한다. 병원 밖에서는 동생의 귀가조치를 외치는 연대농성이 시작된다. 시간이 갈수록 농성은 격렬해지고, 경찰은 병원 안에까지 최루탄을 쏘아대는 혼란의 상황에서 나는 현구를 거주제한구역에서 운명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려 동생의 침대를 밀고 밖으로 달려나간다. 그제야 나는 4·19혁명의 그 날, 다같이 어깨를 겯고 경무대를 향해 내닫던 그 벅찬 흥분이 되살아남을 느낀다. 현구를 현실의 감옥으로부터 구출하여 그가 살아 숨쉴 '마음의 감옥' 한 칸을 마련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작품 속에서 김원일은 분단 현실이 주는 고통과 슬픔을 극명하게 드러내면서 그를 통한 화해, 진실을 추구하는 작품 세계를 보여 주었다. 그의 소설들은 삶의 현실에 대한 투철한 상황 인식을 바탕으로 하여 삶의 진정함을 그려내고 있다.마음의 감옥 에서 주인공인 나 는 진실한 삶으로 전환하게 되는데, 이점을 보여주는 것도 그의 소설이 지닌 삶의 진정함을 추구라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중산층으로서 방관자적 입장에 서 있던 나 는 동생의 순교자적 인생이 계기가 되어 핍박받는 사람들의 정당한 요구에 동참하게 되는 삶의 자세로 전환하고 있다. 이러한 삶의 전환은 6 25, 4 19 등의 우리 현대사를 고통스럽게 견디어 온 투철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하여 삶의 고통을 화해와 긍정의 시선으로 열망해 온, 진정한 삶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인문/어학| 2003.09.03| 1페이지| 1,000원| 조회(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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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형적인 미국인 감상문
    전형적인 미국인 이라는 제목을 보고 난 미국을 구성하는 사람들은 지역뿐 아니라 민족적으로도 굉장히 다양하기 때문에 전형적인 미국인을 찾는다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미국이 과연 전형을 가진 나라인가 하는 의문도 들었다. 하지만 우리가 보기엔 다 똑같은 서양인 같아도 외국인들은 미국인을 쉽게 구별해 낸다. 또한 미국의 어느 지역에 살든 그리고 조상이 어디에서 왔든 미국인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자신들만의 고유한 특징 같은 것도 있다. 그렇다면 저자가 말하는 미국의 전형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진정한 미국인이란스스로 미국인이라고 의식하는 모든 시민을 말한다. 고향이 어디든 미국으로 이주한 많은 사람은 얼마 후 그렇게 느꼈고 오늘날에도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으므로 미국이란 나라의 전형적 특징은 도처에서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그는 미국의 전형을 유럽과의 대비에서 찾고있다. 저자가 독일인이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본문에 의하면 유럽 국가들은 언제든 자신의 정체성을 알아보기 위해서 또는 이를 거부하고 싶을 때면 과거를 들여다본다고 한다. 그러나 미국은 역사가 400 년 남짓되는 신생국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과거가 하나도 없는 국가였다. 다시 말해, 유럽에서는 보수적인 자화상과 개혁적인 자화상 사이에 벌어지는 경쟁이 전형적인 모습이지만, 미국에서는 하나의 자화상에서 경쟁이 일어난다. 그래서 미국은 한편으로 그 어느 나라보다 일치된 모습을 보여주지만, 다른 한편으로 독특하게도 보수적이면서 동시에 개혁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저자는 이 점이 바로 미국인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한다. 미국인들이 보여주는 집단행동이나 사고에는 그런 전형적 성향이 적나라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며 그들 스스로 그런 성향을 지니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예를 들면, 이라크 전쟁이 발발하기 전 미국 내에서는 반전시위를 하는 사람들과 전쟁의 타당함을 외치는 사람들의 모습이 함께 보였다. 한 나라안에서 너무나 대립적이고 모순적인 모습이 공존한 것이다. 또한 부시가 대통령 선거전을 펼칠 때, 그는 워싱턴 시민들을 마치 전혀 믿을 수 없는 사기꾼 집단이라도 되듯 이야기했었는데 이는 미국 국민의 심리를 교묘히 이용한 것이었다. 미국 국민들은 권력을 가진 자를 잘 믿지 않으며, 자신들의 정부에 대해 긍정적 청사진을 그리기보단 비판하는 것을 더 좋아했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은 정치가들을 직업적으로 실패한 사람이나 부패할 가능성이 높은 사람으로 간주하며 국내 정치에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다만 세금이 오른다거나 개인의 권리가 줄어들 경우에만 관심을 보인다고 한다. 이처럼 정치에 대해 무관심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대통령 선거시에도 확연히 드러난다. 미국의 대통령 선거하면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선출하는 자리인데도 이런 선거에서의 투표율이 50% 내외로 아주 저조한 편이다. 유권자 가운데 55% 이상이 참여한다는 것은 매우 드문 경우이며, 1996년에는 겨우 49%에 불과했다. 빌 클린턴도 알고 보면 유권자의 4분의 1에 의해 선출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정치에 대한 무관심은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주된 원인은 무엇보다 기본적으로 정부를 불신하고 경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국가적 위기에 맞닥뜨리면 또 기꺼이 대통령의 뒤에 서고, 성조기 아래 모인다. 이는 9.11 사태를 보면 잘 알 수 있다.2001년 9월 11일, 이슬람의 단체 알 카에다의 테러리스트들이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빌딩을 무너뜨리고, 워싱턴의 펜타곤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비행기가 건물을 관통하는 장면 등은 뉴스에 잡혔고 국민 대부분은 이를 보고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이 테러로 희생당한 사람의 수는 매년 미국에서 총기 사고로 사망하는 사람 수의 10분의 1에 불과하지만, 적들이 처음으로 철옹성 같은 미국이라는 요새를 침입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테러 사건은 국가의 가치 체계를 다지는 초석이 되었고 미국은 똘똘 뭉치게 된다. 9·11사태 이후 거의 모든 집에는 성조기가 걸렸다. 이를 본 사람이면 1933년 이후의 독일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이 같은 ‘국가적 최면상태’는 노란 리본으로 재현되고 있다. 미국에서 노란 리본은 이제 애국심의 상징이 됐다. 그러나 저자는 미국과 독일 두 나라 국민의 애국심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독일의 애국심은 국가 지도자에 완전히 복종하는데 있었지만, 미국의 애국심은 위기에 처했을 때 정부에 대한 불신을 접고 전체를 위해 노력할 준비가 돼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애국심에는 권위주의나 전체주의 같은 성향이 전혀 없다. 말하자면 미국의 애국심은 굴종하지 않고 모두 함께 속해 있다는 느낌의 표현일 따름이다. 미국인들에게 종교와 애국심은 사적으로 은밀한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전체의 내면 세계에 속한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고백해도 문제가 없는 것이다. 순전히 감정일 뿐이니까.미국이 세계 테러리즘에 맞서 싸운 최근의 활동에 관한 논평을 읽어보면, 일단 미군에 인명 피해가 발표하면 국민들은 외국에 대한 정치 개입을 그만두라고 말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다만 제2차 세계대전처럼 어쩔 수 없이 방어해야 하는 전쟁의 경우에만 국민들은 희생할 준비를 한다. 따라서 앞으로 한국전이나 베트남전, 걸프전처럼 미국이 추구하는 가치를 위해 '전도사 같은' 전쟁을 일으키면, 미국 정부는 국민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얻기는 힘들 것이다.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이득을 위해 전쟁을 일으키려 한다면 동의를 얻기는 더욱 어려울 것이다. 미국인들은 석유를 둘러싼 전쟁이나 상거래를 확실히 하기 위한 전쟁보다는 악의 국가에 맞서 싸우는 전쟁을 더 선호한다. 만일 미국인들이 무기를 들고 축복의 섬을 떠날 일이 생기려면, 선교사 같은 임무가 있어야만 할 것이다. 미국은 지금 전 세계의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테러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미국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더욱 미국적으로 보인다. 저자는 이런 미국의 기질을 미국인의 사고와 느낌을 지배하는 두 가지 뿌리인 청교도주의와 계몽주의에서 찾고 있다. 청교도주의에는 이미 계몽주의 성향이 들어 있었고, 계몽주의에는 청교도주의로 급변할 수 있는 성향이 내재해 있었다. 이렇듯 모순적인 것이 주는 긴장감으로부터 미국인들은 힘을 얻는다고 한다. 특히 루터파 신교도와 달리 신약성서가 아니라 구약성서를 지침으로 삼는 청교도주의자는 자신들의 신이 선행을 보상하는 인자한 분이 아니라 신비스러운 여호와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오늘날까지도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특별한 임무, 즉 암흑에 싸인 세계에 자유와 민주주의의 빛을 전해야 할 임무를 띠고 있다고 믿는다. 저자는 미국인들의 이 같은 무의식을 지적한다. 자신들을 선택받은 민족으로 생각해 자신의 이익이나 가치관에 어긋나는 상대를 악으로 간주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은 인디언들에게 행한 부당한 행동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기는 하지만, 국가의 집단적인 무의식 속에는 과거나 지금이나 자신들의 행동이 옳았다는 이데올로기가 살아 있다. 비록 유대인들처럼 자신들을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공공연하게 말하지는 못하지만, 미국인들은 무의식적으로 점점 그 점을 확신하고 있다. 그런 확신은 숙명을 믿는 청교도들의 믿음으로부터 나온 것인데, 즉 성공은 신이 내린 축복이며 따라서 선택받은 자들만이 성공한다고 믿는다.9. 11 사태 이후 '십자군 전쟁'이라는 말이 대통령의 입에서 한 번 나오기는 했으나, 더 이상 그 단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오사마 빈 라덴에 대한 작전 이름으로 '무한 정의'라는 표현을 사용하더니 얼마 후 '항구적 자유'라는 말로 대체했다. 무엇보다 미국 정부는 세계의 선교사나 경찰관의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바로 그 역할이야말로 국제 정치적인 사건 뿐 아니라 미국의 가치관이 미국에게 요구하는 역할이다. 또한 '악의 축'에 대항해서 혼자 싸우겠다는 조지 W. 부시도 그런 경향이 있다. 미국은 고조된 긴장을 조절하고 싶다면 국제연합(UN)이나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의 결정에 복종할 수도 있다. 그러나 미국은 타협이 아니라 균형 또는 안정을 원한다. 그런데 상대보다 자신이 우월해야만 확실한 안정이 보장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미국은 외교상 우위를 점하려 한다.
    독후감/창작| 2003.09.03| 4페이지| 1,000원| 조회(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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