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앞서 한 1200년대는 동아시아의 정세에 있어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이와함께 1600년대 또한 동아시아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중국에서는 淸이 드러서 중국을 통일 하였으며, 우리나라는 임진왜란, 병자호란으로 인해 국토가 피폐해지고 오랫동안 유지되어온 양반제의 모순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도쿠가와 이에아스가 에도 막부를 여는 등 봉건지배체제가 한 층 더 강화되었다. 여기에서는 이러한 변화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겠다.Ⅱ. 본론1. 중국⑴ 淸朝의 성립과 발전? 중국사에서의 淸朝의 위치淸朝는 중국 전체의 역사 속에서 그 위치를 살펴볼 때에 매우 독특한 왕조임을 알 수 있다. 우선 청조는 중국사의 마지막 왕조이고 청나라의 멸망으로 2천여년간 지속되어 오던 황제지배체제가 종말을 고한 시대라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물론 이러한 청조의 몰락은 20세기 세계사의 흐름과 때를 같이 한 것으로서 청조의 전제군주체제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이와 아울러 중국의 황제지배체제의 종말이 한민족 왕조가 아닌 이민족왕조인 淸에 의하여 막을 내렸다는 사실도 의미가 깊다. 아시아의 역사에 있어서 마지막 왕조는 중국에서 뿐만 아니라 인도의 무굴제국, 아랍세계의 오스만제국도 다 같이 이민족의 정복왕조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정복왕조로서의 청조가 중국의 마지막 왕조이며 이민족으로서 왕조체제를 끝냈을 뿐만 아니라 여진족 자체도 중국문화에 동화되어 자취를 감추었다는 것도 청조의 특성이라 하겠다. 정치적으로 한민족을 정복한 청조가 문화적으로 오히려 지배당하여 한문화에 흡수되어 버렸다는 사실에서 중국문화의 끈질긴 흡인력을 살필 수 있고 아울러 정복왕조에 의한 정치적 지배가 사회문화적 적응이나 수용 없이는 참으로 위험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역사적 사실을 청조에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끝으로 淸朝史는 중국의 황제지배체제의 가장 끝에 위치하고 있을 뿐 아니라 현 세기에 위치하고 있어서 과거의 모든 역사를 청조사를 통하여 재조명이 가능하하였다. 이에 청은 한인의 반발을 무력으로 탄압하고 특히 양주 등지에서 감행된 청군의 잔인한 무력탄압으로 한인의 반발은 고개를 숙이게 되었다. 변발이 한인의 외모를 만주인으로 바꾼 것이라면 華夷思想을 바꿔놓기 위한 사상적인 탄압이 바로 文字의 獄 이다.? 文字의 獄 : 사상통제적(思想統制的) 조치, 금서(禁書)의 발표, 필화사건은 중국 역대의 모든 왕조에서 흔히 나타난 현상으로 청나라에만 국한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때에 특히 심한 이유는 청나라가 한족(漢族)의 사상 ·전통과는 다른 만주인(滿洲人)왕조였기 때문이며, 당시 한족에게 팽배한 양이사상(攘夷思想)을 꺾으려는 청의 노력 때문이다. 옹정제는 《대의각미록(大義覺迷錄)》을 저술하여 청나라, 즉 만주 왕조의 정통성(正統性)을 주장할 정도였다. 필화사건의 예로는, 강희시대인 1711년 저술한 《남산집(南山集)》에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하여 일족(一族)이 모두 사형된 대명세(戴名世)사건, 옹정시대인 26년 향시(鄕試)에 출제한 ‘유민소지(維民所止)’라는 글 속에 옹정제를 참수(斬首)하려는 의도를 풍자하였다는 이유로 그의 무덤을 파헤치고 일족도 투옥된 사사정(査嗣庭)사건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이런 사건은 건륭시대에 가장 많았고, 가경(嘉慶) 연간 이후에는 고증학(考證學)의 융성 등으로 점차 줄어들었다.② 청조의 문화통제정책과 새로운 학풍청은 그 초기에는 反淸 무장세력에 대한 군사적 진압과 병행하여 지속적인 문화 통제정책을 강화하게 되었다. 청조의 중국지배와 문화통제정책, 그리고 변발호복의 강요에 대하여 한인 사대부들은 일찍이 역사에서 그 사례를 찾아 볼 수 없는 대재난으로 받아들였다. 즉, 청조에 끝까지 협력하지 않고 재야에서 학문연구에만 몰두한 정치개혁 사상가인 황종의는 명말, 청초의 왕조교체를 진단하여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비극적 상황으로 인식하엿다. 이리하여 한인에게는 명나라가 망하고 이민족왕조인 청조가 중국을 지배하는 정치적 현실을 단순한 왕조교체의 차원을 넘어 천하가 무너지는 비극적 상황으로 나 향신 그리고 상인, 지주층에게 집중되었고 농토를 상실한 영세농민은 불안정한 잡역에 종사하거나 유민화하면서 인구이동을 더욱 촉진시켜 사회불안을 한층 심화되어 갔다.2. 조선? 임진왜란 : 1600년대에 조선은 임진왜란으로 인해 국토가 황폐화되고, 붕당의 대립으로 인해서 양반사회가 분열되기 시작했다. 7년간의 전란으로 인해 조선은 인구의 감소와 대대적인 유망, 그리고 농지의 참담한 황폐는 조선 사회를 그 밑바닥으로부터 붕괴시켰던 것이다. 특히 농지의 황폐는 농민의 생활을 비참하게 만들었는데, 난후 전국의 경작면적은 종전의 3분의 1에도 못미쳤으며 왜군의 피해를 가장 많이 받은 경상도의 경우 6분의 1에 불과하였다. 이 위에 기근과 질병이 만연하여 농민의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국가의 재정 역시 악화되었고 조세의 파악 근거인 호적과 토지대장마저 소실되어 버렸다. 또한 사회적으로는 신분제의 해이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전쟁 초에 노비들에 의해서 노비문서가 소각됨으로써 조선신분제의 기반인 노비층에 대한 파악이 불가능해졌다. 또 전쟁 중에는 재정조달의 방편으로 국가에 곡식을 바치는 납속책이 시행되어 신분에 관계없이 수직하거나 면천시켜 주었던 것이다. 이제 양인이 양반이 되고 노비가 양인이 됨으로써 조선 전기의 엄격한 신분체제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문화재의 손실 역시 막심해서 경복궁 등 궁전과 불국사 등 수많은 사찰이 불타버렸다. 사고의 실록도 전주사고의 것 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소실되었으며, 이 밖에 많은 서적과 예술품들이 손상을 입거나 약탈당하였다. 다만 전쟁 중에 절강병법을 새로이 도입, 수용하여고, 화포 등 신무기를 개발함으로써, 전술, 무기의 발달은 촉진되었다. 임진왜란은 조선뿐 아니라 중국에도 큰 타격을 주어 명이 멸망하고 전란 중에 크게 성장한 여진족이 후금을 건국하는 와조의 교체가 일어났다. 일본에서는 전쟁에 참여했던 서부 지방의 영주들이 몰락하고 동부의 영주들이 흥기하여 통일국가가 성립하였다. 또 조선에서 약탈해간 서적, 활자, 도공 등을 밑바탕 약속하는 한편 명과 단교를 하고 명을 칠 때 원병을 파견할 것 등을 약속하였다. 또 이 때 두 왕자가 인질로 잡혀가고 주전파 관리를 비롯하여 수 많은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는 비운을 당하였다. 두 번의 호란으로 청군에게 유린당한 서북지방은 극심하게 황폐되었고, 소중화를 자처하던 조선의 자존심은 여지없이 실추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청에 대한 적개심은 충천하였고 특히 효종 때에는 북벌이 국시로서 계획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정책은 국왕의 친위군과 수도 경비의 군사력을 강화하는데 그치고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그 후 18세기 후반에는 청의 발달된 문화를 수용해야 한다는 북벌론이 대두하여 청에 대한 인식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으며, 청에 대한 종속관계는 대한제국이 성립될 때까지 계속되었다.3. 일본16세기 후반에 눈부신 모모야마 문화시대를 이룩했으나, 또 한편 봉건지배가 강화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 막부를 열었고(1603), 해외무역이 성행했다. 그러나 기독교 금지가 원인이 되어 발생한 시마바라의 난은 막부로 하여금 쇄국정치를 시행하게 했다. (1639). 이후 일본은 나가사키 한 곳만 통하여 외계와 접촉을 하게 되었다. 약 반세기 동안에 걸쳐 여러 제도를 정비하고 굳건한 정권을 세운 일본은 평화시대가 계속되고 산업이 진전하면서 1700년 전후에는 겐로쿠 문화와 같이 발랄한 서민문화를 낳게 되었다. 그러나 사농공상의 신분제도등은 사회를 고정시키고, 또한 쇄국체제는 국외정세에 눈을 감게 하여 섬나라 근성을 형성했으며, 결국 세계로부터 외톨이가 되는 결과를 불러들였다.4. 오스만제국의 쇠퇴와 개혁술래이만 1세가 죽은 후 오스만 제국의 함대는 1571년에 에스파냐, 베네치아 등의 연합 함대와 레판토 해전에서 패했다. 그러나 다음해에는 지중해의 제해권을 회복했고, 오스만 경제는 여전히 유럽을 능가햇다.17세기에 들어서면서 하렘 정치의 폐해를 틈타서 고관이 권력을 쥐게 되었고, 관료와 상인은 자본을 축척했으며, 예니 체리는 비대사건 발생. 일본 에도막부[江戶幕府]시대 개막(~1867).?1604년 프랑스 동인도회사 설립.?1605년 인도 무굴제국에서 악바르 죽고 자한 기르 즉위(~1627).?1606년 터키, 신성로마와 시토바 토로크조약 체결. 포르투갈의 가톨릭 수사(修士) 베네딕트고에스, 인도˙동(東)투르키스탄을경유, 중국에 입국.?1607년 조선과 일본, 수교를 회복. 처음으로 통신사(通信使)가 일본국에 들어감.?1609년 네덜란드가 일본 히라도[平戶]에 상관(商館)을 설치.?1610년 네덜란드가 인도의 브리카트에 상관을 설치. 프랑스 선교사 토리고, 중국에 입국.?1611년 무굴제국에서 누르 자한이 황비(皇妃)가 되어 점차 권력을 휘두름. 명나라에서 동림당(東林黨)˙비동림당(非東林黨)의 당쟁 격화.?1612년 영국이 슬라트에 상관(商館)을 세움. 일본 막부, 가톨릭교를 단속.?1613년 일본 막부, 영국에 통상을 허가해 영국 상선이 입항.?1616년 누루하치가 한[汗]이 되어 후금(後金:후의 청나라)을 부흥.?1617년 터키에서 아흐메트1세 죽고, 무스타파1세 즉위(~1618.1622~23).?1618년 누루하치, 7대한(七大恨)을 내걸고 명(明)나라와 개전, 푸순[撫順]˙칭허[淸河]를 함락. 일본, 히라도[平戶]˙나가사키[長崎]의 무역제도 정비.?1619년 사루후의 싸움에서 누루하치가 명군을 대파. 네덜란드 자바에 바다비아시(市)를 건설하고 총독을 둠.?1620년 중국 홍환(紅丸)의 안(案). 광종(光宗) 즉위한 후 독살.?1621년 네덜란드 일본 히라도[平戶]에 상주상관을 설치.?1622년 중국 산둥[山東]에서 백련교도의 난 일어남. 네덜란드 함대, 마카오를 공격하고 이듬해에는 펑후도[澎湖島]를 점령.?1623년 터키에서 무라도4세 즉위(~1640). 암보이나의 대학살사건 발생(영국 세력의 구축).?1624년 네덜란드군, 타이완섬 점령(~1661).?1626년 무굴제국에서 장군 마하바트 한이 반란을 일으킴. 중국 후금군 닝언[寧遠]을 포위, 명군과 전쟁을 벌임.?1627년 .
Ⅰ. 서론우리나라에서 모더니즘의 처음 발생된 시기는 1930년대이다. 1930년대의 한국문학은 1920년대의 문학에 비해 훨씬 다양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데, 특히 소설의 경우 작가의 관심이 다각도로 표출되며, 작품의 깊이와 넓이가 눈에 띄게 확산되고 있었다. 작가의 관심이 수평적으로 확산되어 도시와 자연, 문명과 흙 및 농촌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 대량으로 나타나는가 하면, 수직적으로 심화되어 역사적 사실이나 가족사를 다루는 작품들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1930년대 문학에서 모더니즘의 여러 징후가 나타나게 된 것은 문학계 자체 내에서 일어났던 변화와도 연결된다. 이 시기에는 대학에서 영·미 문학을 전공한 사람들, 예컨대 김기림·최서재·이양하 등이 문단에 등장하여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서구의 현대문학, 그 중에서도 모더니즘의 이론을 도입, 소개하여 카프(KAFF)의 퇴조 이후 침체된 문단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1930년대 소설에서 모더니즘의 특징을 음으로 양으로 보였던 李箱을 위시한 최명익, 정인택, 허준, 그리고 단층파 의 제 작가들과 박태원, 채만식, 유진오, 이효석, 김남천 등은 그 대표적인 예가 된다.Ⅱ. 본론1. 모더니즘(Modernism)이란?모더니즘 소설은 아이디얼리즘이나 리얼리즘의 소설이 지니고 있는 형태, 예를 들어 모든 소설은 외부세계에 자리잡고 있는 인물과 인물들이 서로 얽혀서 어떤 사건을 통하여 기구한 운명의 이야기를 허무와 종말이 제자리에 놓이도록 엮어 짠 관습적 형태(conventional form)를 벗어나 자신의 내부세계를 탐험한다. 이것은 1930년대라는 닫힌 시대의 구조적 모순이 또 다른 모습으로 가장 민감하게 반영되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외부세계의 모든 질서를 거부하고 나타난 내부세계는 병든 의식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모더니즘은 리얼리즘의 유물론의 세계관은 말할 것도 없고, 로맨티시즘의 인간주의적 세계관까지 부정하며, 반전통적인 경향을 띠고 실험성과 전위성을 내포하기도 한다. 위에서도 언급하였듯이 1930년대 소설은 1920년대 소설에 비해 다양한 성격을 지닌 소설로 볼 수 있다. 이 무렵 다양한 성격의 소설이란 수평적 확산이나 수직적 심화는 물론 무엇보다 탈이데올로기 성향으로 드러난 여러 가지 기교가 지배하는 소설을 가리킬 수 있다. 따라서 변화세력으로 대두된 모더니즘소설은 외면세계뿐만 아니라 내면세계의 문제, 곧 안과 밖의 상호작용에서 빚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더니즘의 기법은 너무나 광범하고 혼란스러워 한 두 마디로 단정지을 수 없는 형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모더니즘이라하면 시를 먼저 연상하는 것으로 통례되어 있으며 이런 사정은 서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1차세계 대전을 전후하여 나타난 의식의 흐름 (stream of consciousness)이나 카메라 아이 (camera eye) 기법 등을 구사한 심리소설이나 도시소설을 모더니즘에 수렵하고 있다.모더니즘이 성립된 시기는 1차 대전이 시작된 1914년을 기점으로 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 무렵 서구 여러 나라에서 음악·회화·문학 등에 걸쳐 각종 예술유파가 우후죽순격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던 데에서 비롯되었다. 이와 같이 명확한 개념으로 드러내 보이지는 못하지만 모더니즘이 20세기 현대 예술에 나타난 잡다한 경향을 통칭해서 매우 포괄적으로 쓰이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이러한 모더니즘에는 막연하지만 몇 가지 공통점을 발견 할 수 있다는 것이 최근의 지적이다. 모더니즘 일반에서 미학적 형태와 사회적 전망의 중요한 지향을 1미학적 자의식 또는 자기 반영성, 2동시성, 병치 또는 몽타즈 , 3패러독스·모호성·불확실성, 4 비인간화 와 통합적인 개인의 주체 또는 개성의 붕괴 등 네 가지로 나누어서 유진 런(Eugene Lunn)은 말하고 있다. 말하자면, 모더니즘은 현대문학의 여러 경향 중에서도 특히 전위적이거나 실험적일 뿐 아니라 의식적으로 반전통적인 성격을 띤다.2. 한국 모더니즘 소설1930년대 역사적 상승을 지속해 온 문학세대들의 힘의 방향에서 동시대 현실을 충실히 반영하고자 하였던 1920년대 중반 이래의 리얼리즘 문학이 이 시기에 이르러 침체되기 시작하고, 창작기술의 혁신과 문학형식의 변화를 추구하는 구인회 중심의 모더니즘 문학이 본격화되었다. 30년대 문학은 역사문학 전원문학 등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지만, 이 두 문학은 현실주의적 경향을 강하게 띠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문학들과 구분되는 점이 있다. 그러나 이 두 문학은 문학적 이념과 지향점이 다르기 때문에 실제 작품의 양상을 달리하면서 1941년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기까지 지속된다. 한국 모더니즘 소설의 작가로는 이상, 이효석, 박태원 등이 있다.1 이상 : 이상은 31년에 시「이상한 가역반응」을 발표하고, 서양화「초상화」로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상했다. 34년에는 조선중앙일보에 연작시「오감도」, 36년에 잡지 조광에 소설「날개」를 발표,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최재서는 이상의 소설 기법이 근대 문명의 현실, 근대적 인간의 상황과 근친성을 맺고 있음을 지적했다. 주체의 통합성이 파괴되고 개성 역시 파편화된 상황에 소설적 리얼리티를 부여하기 위해 여러 가지 기법이 실험되었다고 보았다. 김윤식 교수는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 문제로 고민하는 문인들은 우리 문학사에서 처음으로 근대를 파악했고,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동시에 초극하려 했던 이상을 재조명해야 한다 고 말한다. 한국문학이라는 지방성에 가두지 말고 세계문학의 반열에서 이상을 자리매김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또 시인 고은은 그의 「이상평전」에서 이상은 그의 시대를 정규적인 상황의식으로 인식하지 않고 그 자신의 고민을 시대에 만화처럼 투여함으로써 그가 산 시대 전부를 희극으로 몰수해버린 예술가의 광태를 유감없이 누릴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그는 매우 행복한 파산자였다 라고 쓰고 있다.2 이효석 : 호 가산. 강원도 평창 출생. 경성제1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영문과를 졸업하고, 1928년 조선지광 에 단편「도시와 유령」이 발표됨으로써 동반작가로 데뷔하였다. 계속해서「행진곡」「기우」등을 발표하면서 동반작가를 청산하고 구인회에 참여,「돈」「수탉」등 향토색이 짙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1934년 평양 숭실전문 교수가 된 후「산」「들」등 자연과의 교감을 수필적인 필체로 유려하게 묘사한 작품들을 발표했고, 1936년에는 한국 단편문학의 전형적인 수작이라고 할 수 있는「메밀꽃 필 무렵」을 발표하였다. 그 후 서구적인 분위기를 풍기는「장미 병들다」, 장편「화분」등을 계속 발표하여 성 본능과 개방을 추구한 새로운 작품경향으로 주목을 끌기도 하였다.「화분」외에도「벽공무한」 「창공」등의 장편이 있으나 그의 재질은 단편에서 특히 두드러져 당시 이태준·박태원 등과 더불어 대표적인 단편작가로 평가되었다.3 박태원 : 필명 몽보·구보·구보·구보·박태원이다. 서울 출생이며 경성제일고보, 도쿄 호세이대학 등에서 수학하였다. 1926년 조선문단 에 시「누님」이 당선되었으나, 소설로서의 등단은 1930년「신생」에 단편「수염」을 발표하면서 이루어졌다. 1933년 구인회에 가담한 이후 반 계몽, 반 계급주의문학의 입장에 서서 세태풍속을 착실하게 묘사한「소설가 구보씨의 1일」「천변풍경」등을 발표함으로써 작가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그의 소설에 있어 특기할 사항은, 문체와 표현기교에 있어서의 과감한 실험적 측면과, 또 시정 신변의 속물과 풍속세태를 파노라마식으로 묘사하는 소위 풍속소설의 측면이다. 이러한 특징은 그가 예술파 작가임을 말해주는 중요한 요건이다. 일제강점기 말에 발표한「우맹」「골목 안」「성탄제」등에도 비슷한 경향을 잘 드러내었다. 8·15광복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함으로써 작가의식의 전환을 꾀한 바 있고, 6·25전쟁 중 서울에 온 이태준·안회남 등을 따라 월북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서술된 작품 외에 단편소설「사흘 굶은 보름달」「애욕」「5월의 훈풍」, 장편소설 「태평성대」「군상」등이 있다.
Classicism&Romanticism과 목 : 영국역사와 문학(1)학 과 : 사회교육학부/역사교육과제출일 : 2004. 5. 3학 번 : 20343160이 름 : 공혜진1. Classicism고전주의 문학의 본보기가 된 것은 당시 유럽이 알고 있던 유일한 이교문학(異敎文學)인 그리스·로마의 문학이었다. 그리하여 이탈리아에서는 호머(Homer, 1836∼1910)나 베르길리우스(Vergilius, B.C 70∼B.C 19)를 본떠 아리오스토(Ariosto, 1474∼1533)는 『광란(狂亂)의 오를란도』(1516)을, 타소(Tasso 1544∼1595) 는『예루살렘 해방』(1575)과 같은 서사시를 썼고, 사포(Sappho BC 610?∼BC 580?)와 핀다로스를 모방하여 페트라르카의 서정시가 읊어졌으며, 고대극(古代劇)을 흉내낸 비극과 희극이 만들어짐과 동시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연구가 시작되었다.이러한 기운이 프랑스에 전해지자, 특히 17세기에 접어들어서는 때마침 패권을 확립하려던 절대왕제(絶對王制)의 정치적 분위기의 영향을 받아 고대의 걸작에서 각 문학 장르의 법칙을 유도해 내어 그 법칙에 따라 창작함으로써 명작을 만들 수 있다는 교조주의적(敎條主義的)인 생각이 강해져서, 문학작품의 어떤 틀을 만드는 일이 성행하였다. 이렇게 해서 형성된 문학 이념을 요약해 보면, 첫째, 문학은 만인에게 공통되는 이성(理性)에 입각한 것이어야 하며, 감정이나 상상은 이성에 의하여 통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둘째, 문학에서 묘사하는 세계는 이성에 비추어 진실하며 또한 도덕적으로 선(善)이어야 한다(眞善美一體). 셋째, 그 표현은 어디까지나 우아하고 간결하며 균형 잡힌 것이어야 한다. 넷째, 이해하기 편리하도록 문학상의 장르를 분명히 나누어 그것을 혼용해서는 안 된다. 마지막으로 문학에서는 독자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초자연적인 사건(불가사의한 예상외의 사건)의 취급이 불가결하기는 하나 그리스도교의 기적만은 피해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문학 장르 가운데 가장 존금도 그들의 자발성을 손상시키지 않았다. 프랑스의 고전파 작가들은 그 이론적 주장에도 불구하고 우수한 서사시를 남기지 못했으며, 소시편(小詩篇)도 서정성이 결여되어서 서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 풍자시 이외에는 볼 만한 것이 없다. 그리고, 비극과 희극 외에 고대에는 없었던 격언(格言:라로시푸코), 회상록(레스 추기경과 생시몽), 편지(세비녜 부인) 등의 장르에서 걸작을 남겼고, 라파예트 부인은 뛰어난 심리분석으로 고대와는 다른 소설을 개척하였다. 설교로 유명한 보쉬에, 당시의 풍속을 풍자한 《갖가지 인간》(1688)을 쓴 라브뤼예르, 《텔레마크의 모험》(1699)을 쓴 페늘롱 등이 있다.1 유럽의 고전주의 문학유럽 문학에서 고전주의가 한 나라의 문화의 정수를 나타낸다고까지 일컬어질 만큼 완숙에 이른 예는 프랑스 문학 외에 달리 없으며, 그 장르는 극문학(劇文學), 그 중에서도 비극이었다. 프랑스 고전주의 문학의 전성기는 대략 1660∼1685년의 25년 간이지만, 이 시대에 그들의 문학이 전적으로 걸작으로만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며, 당시는 이에 반대하는 유파(流派:귀족 사교계 사람들)의 저항도 제법 강했다. 그러나 루이 14세의 만년 이후 그들의 문학이나 부알로(Boileau-Despraux 1636∼1711)의 문학이론의 권위가 침범할 수 없는 확고부동한 것이 되자, 18세기를 통하여 그들의 작품은 비견할 수 없는 본보기로서 존경을 받았다. 프랑스 고전주의는 영국·독일 문학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영국에서는 포프(Pope 1688∼1744), 애디슨(Addison 1793∼1860) 등을 낳았고 독일에서는 클로프시토크를 낳았다. 개성에 눈을 뜸과 동시에, 고전주의와는 반대로 이성보다는 감정이나 감각 ·상상을 중시하는 아베 프레보, 마리보, 루소, 디드로 등의 문학이 탄생하였지만, 프랑스에서는 정면으로 고전주의에 도전하려는 경향의 문학 주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고전파가 근거로 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전(原典)으로 돌아감으로써 프랑스 고전주의에 비판을 가한 것은 레난 시기이다. 올리버 크롬웰의 공화정이 무너지고, 찰스 2세가 왕위에 오른 때부터 존 드라이든이 죽은 1700년까지의 왕정복고 시기를 거쳐, 워즈워스(Wordsworth, 1770∼1850)와 코울리지(Coleridge)의 서정민요집인 『Lyrical Ballads』이 출판된 때까지를 신고전주의라고 본다.신성한 신의 율법에 의한 이상적인 국가를 실현하고자 한 노력이 수포로 돌아감으로써 정치·사회적인 회의와 환멸이 만연하여, 청교도에 대한 반발이 현저하게 나타났다. 상류사회는 시대의 풍습이 안일과 사치로 기울어 방종과 퇴폐에 젖게 된 반면에, 서민 중산층 계급은 혁명의 경험을 살려 종전의 권위에 대한 맹종에서 벗어나 자체의 세력을 구축해 갔다. 이러한 사회구조의 점진적인 변화와 더불어 찰스2세가 망명해 있었던 프랑스의 문화적인 영향이 본격화됨으로써 당시 전성기였던 고전주의의 흐름이 영국에도 밀어닥치게 되었다. 이 시대의 문학은 자연의 법칙을 따르는 일종의 규범이다. 조화와 질서를 갖춘 아름다움이 바로 선이라는 판단 하에 문학은 완벽하고 적격한 형식을 추구하게 된다.따라서 이 시대의 문학이 지향하는 것도 정치나 종교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이성과 상식의 지배였다. 이 점에 있어서 문학은 전시대의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엘리자베스조 문학의 상상, 열정, 영감의 세계와는 거리가 멀었으며, 대신에 이성과 상식이 강조되는 문학 장르인 풍자시, 풍습 희극, 비평적인 산문 문학이 두드러졌다.이 시기의 전반부인 왕정복고 시기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존 드라이든(John Dryden, 1631∼1700)이다. 그는 시, 극, 비평 등 당대의 주요 문학 장르를 골고루 다루었으며, 정치와 문학과의 결연에 민감했던 여러 문학자들의 선구적 존재이기도 했다. 그의 최초의 시는 크롬웰을 조상하는 것이었고, 왕정이 복귀하자 왕당파로 돌아섰으며, 계관 시인까지 되어, 국교를 옹호하는 시와 카톨릭교를 옹호하는 시를 쓰는 등 지조도 없고 신앙의 개종도 심했다. 이러한 드라이든의 현실 감각은 이 시대의 정은 특히 일상적인 생활에서 소재를 얻게 되고, 그들에게 친근한 인물을 다루는 소설의 발달을 촉구했다. 아울러 18세기 문학은 대체로 도시 취향적으로 흘렀고, 특히 초기의 왕권의 쇠퇴와 양당 제도의 확립으로 인하여 시민의 정치적 의식이 고양되어 영국의 저널리즘이 촉진되었으며, coffee house에서의 정치 및 문학 담론을 위한 분위기가 마련되는 계기가 되었다. 18세기 소설은 영국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근세 시민계급이 나은 전형적인 문학 장르로서의 효시이기도 하다. 18세기 문학의 대표적 장르인 소설의 선구적인 작품은 다니엘 디포우(Daniel Defoe)의『로빈슨 크루소(Robinson Crusoe)』이다. 무인도 표류라는 상황을 역이용한 영웅적인 모험담과는 반대로 영국적인 시민 정신의 일면을 보여주었다. 조나단 스위프트(Jonathan Swift)의 『걸리버여행기(Gulliver's Travels)』는 유사한 여행담이지만, 전자의 사실주의와는 달리 인간의 삶에 대한 통렬한 풍자가 특징이다.그러나 본격적 근대소설은 다음 세대의 작가들인 사무엘 리차드슨(Samuel Richardson)과 헨리 필딩(Henry Fielding)에 의해서 성립되었다. 근대소설의 시조는 리차드슨이다. 그는『파멜라(Pamela)』를 쓰게 되었다. 내용은 간단하지만 편지 형식으로 부모에게 보내는 상세한 글은 길고 지루해서 현대의 독자는 읽기가 어렵다. 그러나 당시 일반 대중에게는 대단한 평판을 얻었다. 『파멜라』가 인기가 있었고 최초의 영국 소설로 인정받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플롯이 단일한 행동을 중심으로 전개된 것이다. 이전의 스토리들은 주요 인물을 중심으로 그의 출생에서 죽을 때까지의 일들을 작가의 선택 없이 길게 늘어놓는 것이었으나, 리차드슨은 내용을 일정한 기간에 집중시켰고, 아울러 극적인 플롯을 짰던 것이다. 둘째는 당시의 새로운 방법인 젊은 남녀관계를 묘사하고 여성심리를 상세하게 해부한 것이다. 리차드슨은 인도주의 작가로서 정숙한 여인으로 파멜라를 내세웠으나,. 다음 작품 『톰 존스(Tom Jones)』(1749)는 필딩의 걸작이다. 이 작품에서 그는 플롯 전개에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 주인공 톰이 여행 중 여러 곳에서 많은 모험을 하지만, 이 소설은 단순한 악한소설이 아니라 복잡한 구성 속에서도 등장 인물의 성격이 잘 표현되어 있고 사건과 유기적 관계를 이루며 줄거리와 연계되어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는 통일된 소설이다.시의 분야를 보면, 왕정복고시기에 드라이든이 차지했던 자리를 이어받은 '영웅대구(heroic couplets) 라는 시형의 전통을 완성시킨 알렉산더 포프(Alexander Pope)를 18세기 전반의 거물로 들 수 있다. 그는 이 시기의 시대정신의 완벽한 구현자로서 이성과 형식의 원리를 시문학에 도입하여 간결하고 명료한 에피그램 형식의 시형을 능숙하게 다루었다.18세기는 이성과 상식, 그리고 형식에 의존하고 신고전주의적 범주에 속한 시대이며, 자연과 등진 도시 문학의 영위가 특징이다. 그러나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자연에의 귀의를 시의 본질로 삼으려는 움직임이 서서히 생겨났다. 이는 낭만주의의 도래를 알리는 기운이었다.2. Romanticism1798년 출판된 『서정민요집』Lyrical Ballads을 기점으로 1832년 월터 스코트(Walter Scott)가 죽은 때까지를 일반적으로 낭만주의 시대라고 부른다. 18세기 후반에 본격화되기 시작한 근대적 혁신은 산업혁명의 결과로 부의 축척과 증대에 따라 사회적 불평등의 징후가 나타나고, 도시화의 경향이 가속화되었으며, 중산층이 세력을 확보함으로써 자아의 해방과 인간성의 자유를 구가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18세기 합리주의의 부정과 이성과 형식을 존중하는 신고전주의 신조에 대한 도전으로 나타난 낭만주의는 상상의 강조와 인간성의 무한한 해방을 역설하게 된다. 형식과 도덕적 가치판단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 내면의 솔직한 감정이라는 자각에서 나온 감정의 자연스런 분출과 자유로운 상상력인 것이다.낭만주의의 전성기는 19세기의 첫 30년간으로 이 시기를 두 가지 특성으 있다.
Ⅰ. 서론1200년대는 중국사를 비롯한 동양에서 뿐만 아니라 서양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기점이 된다. 동양에서는 중국에서 징키즈칸이 등장하여 금을 멸망시켰고,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중기 무신정권이 들어서는 시기였다.(1170) 일본에서는 가마쿠라 막부가 성립되었고(1191) 이 시기의 서양에서는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이슬람과 교역하기 시작하여, 이슬람의 영향으로 상공업, 대학 등이 등장하고, 자본주의가 시작되었다. 여기에서는 1200년경의 동양의 정세에 대해 알아보고 그 후 400년간 어떻게 변화했는지 살펴보자.Ⅱ. 본론1. 1200년대의 동아시아 정세⑴ 중국 - 징키즈칸의 등장과 그 후1200년대의 중국은 송나라와 원의 교체기였다.唐代까지만 해도 몽골족은 보잘것없는 작은 부락사회에 지나지 않았다. 당에서는 몽골족을 蒙兀室韋(몽올실위)라고 불렀으며 현재의 자치구 동북방의 홍안령 지대의 오르콘강 상류에 흩어져 생활하였다. 이들의 초기 거주지는 기후와 토지 조건이 극히 열악하였으므로 들쥐를 잡아먹는 비참한 생활을 하면서 어렵게 유목생활을 하였다. 그런데 몽골족 부족사회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 것은 9세기 중반 위구르제국의 붕괴와 함께 시작된 몽골고원의 정치적 격변 때문이다. 서기 840년 키르기족에 의해 위구르왕국이 붕괴되자 대규모의 민족이동이 시작되었고, 이 때 동북방면에서 몽골초원으로 내려오면서 몽골족이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몽골족은 풍부한 목장지대가 있는 이곳의 새로운 자연 환경 속에서 커다란 발전을 이룩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12세기 후기에 이르면서 여진사회가 급격히 한화해감에 따라 금나라의 군사력이 현저히 약화되기 시작하자 이 틈을 이용하여 몽골의 발전이 가속화되었다.① 몽골제국의 정복전쟁칭기즈칸 생전의 대외원정은 기본적으로 약탈전을 일관하고 있다. 약탈전은 영토와 인민을 정복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력에 의해 필요한 물자를 획득하고 상대방을 군사적으로 굴복시키려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인명살상과 도시파괴의 규모는 엄청나게 클 수밖에 없었다. 몽였다. 그러나 헌종의 사망과 왕위다툼으로 남송의 정복은 세조시대로 넘어가게 되었다.③ 몽골제국의 分封制度와 정복전쟁몽골제국은 역사상 그 유례가 없는 동서세계에 걸친 대제국이었다. 뿐만 아니라 몽골의 정복전쟁은 칭기스칸 시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대를 이어 지속적으로 계속되었다. 이와 같은 몽골제국의 지속적인 정복전쟁의 원인은 바로 유목사회에 존재하는 약탈물의 분배라는 전통이 몽골제국에서도 계속되어 정복지의 分封이 바로 약탈물의 분배라는 형식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칭기스칸은 정복전쟁에서 얻은 영토를 자기의 것으로 생각하였고 이는 유목사회의 전통적인 관념에 바탕을 두고 있는 약탈물 분배와 그 성격을 같이 하고 있다. 따라서 정복지가 확대되면 될 수록 분배되는 영토와 영민도 증가되는 것이고, 이와 같은 정복지의 分封이 바로 몽골제국의 지속적인 정복전쟁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제국의 판도를 극대화시키는 결정적인 작용을 하였다. 처음 칭기스칸은 몽골제국을 건설하여 그의 子弟들에게 分封을 실시하였다. 이때 토지와 영민을 동시에 나누어 주었는데, 유목사회의 분봉에는 土地보다는 인민이 훨씬 중요성을 갖는다. 그것은 유목집단은 상황에 따라 항시 타지역으로 이동하기 때문이다. 칭기스칸은 친족 이외의 군공이 있는 功臣에게는 은결을 내리고 감형의 특권과 봉록, 그리고 천호장이나 만호장의 직책에 임명하여 소속 유목민을 돌보는 권한을 부여하였다. 즉, 칭기스칸은 자기의 일족에게는 유목민 소유권을, 그리고 공신들에게는 유목민 관할권만을 나누어 준 것이다. 칭기스칸 시대의 이러한 분봉은 정복지가 증대되고 그 지역에서 징수되는 물자가 늘어나면서 나누어주는 대상이 유목지대에 국한하지 않고 농경지역으로 까지 확대되었다. 태종과 헌종시대에 북중국에서 인구조사를 실시한 뒤 分土分民을 실시한 것이 바로 그 실례이다.그러나 이러한 分封은 배타적인 소유권을 전제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분봉은 곧 지방분권화를 촉진하면서 중앙집권화에 역행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하여 중앙과 지방의 끊임없는 대통치가 갖는 특징은 유목민의 욕구가 그대로 분출된 약탈적 성격과 함께 그러한 욕구를 억제하고 정복지 漢人의 전통적인 관행을 존중하는 두 가지 통치방법이 서로 대립과 균형을 반복하면서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태종대의 호구조사와 세재개혁으로 한인세후가 갖고 있던 민정과 재정권이 몽골인 군주와 역하영주에게로 넘어가게 되었고, 민정도 군주가 파견한 다루가치가 감독하게 되었다. 하지만 남송을 정복한 이 후 원의 세법은 달라지게되었다. 화북지방에는 몽골제국시대의 세법을 그대로 적용한데 비해 새로 정복한 강남지방에는 중국의 세법을 실시하였다. 이와 같이 통일 국가 내에 두 가지 세법이 지역에 따라 실시되었다는 점에서 세법의 특성을 찾을 수 있고, 이는 또한 元朝의 이중적 성격이 세법에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元代의 東西文化交流몽골제국에 의한 대제국의 출현으로 동서문물의 교류가 활발하게 촉진되었다. 그것은 광대한 제국의 성립으로 동서교통을 방해하던 장애요소가 제거되었을 뿐만 아니라 제국통치를 위한 교역로의 개척과 역참제의 정비 등이 동서문화의 교류를 촉진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원대에는 민족의 차별정책으로 한인의 문화활동은 제한되었다. 뿐만 아니라 몽골민족은 군사력에 의한 세계제국의 건설에 따라 무력에 대한 절대적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만심이 강하여 몽골지상주의가 문화면에도 반영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몽골인은 중국을 정복하기 이전에 서방세계의 이슬람인, 위구르인과의 접촉을 통하여 서방의 문화수준이 결코 중국에 떨어지지 않음을 알기 때문에 중국문화보다는 서방무화를 좋아하게 되었다.⑵ 고려(무신정권기~몽고항쟁시기)① 문벌귀족정치의 폐해 - 1200년대에 한반도에는 고려 건국돼 존속되고 있었다. 고려는 1170년에 일어난 무신난으로 인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무신난 이전 고려에서는 귀족정치가 전개되고 있었다. 고려 귀족사회는 문종(1046~1083) 때 전성기를 이루고 이는 그 후 1세기 동안 계속되었다. 이 사이에 귀족정치가 전개되었는 비해서 무반에 대한 차별이 심하였다. 귀족은 문반직을 가지고 정치권력을 차지하였고, 심지어는 군대를 지휘, 통솔하는 병마권까지도 장악하여 무반은 다만 문신귀족정권을 보호하는 호위병의 지위로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이로인해 1170년, 의종이 문신들과 함께 도현원으로 놀러 갔을 때 호위한 무신 정중부 등이 쿠데타를 일으켜 문신들을 살해하고 의종을 폐지하고 정권을 잡아 무신정권이 수립되었다.③ 무신정권의 전개 - 무신정권은 1270년 임연부자가 몰락할 때까지 곡 100년간 지속되었다. 무신정권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성격이 변화하였고, 이를 형성기, 확립기, 붕괴기의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처음 무신정권의 형성기는 정중부가 무신란을 일으켰을 때부터 1196년 최충헌이 이의민을 제거하고 집권할 때까지를 말한다. 이때에는 아직 무신정권의 기반이 확립되지 못하여 무인집정의 지위가 불안정하였고, 중방을 통해 정치가 이뤄졌다. 이후 확립기는 최충헌-최우-최항-최의에 이르는 4대 62년간의 崔氏 정권기로 과감한 전제정치로 무신정권의 안정을 다졌다고 할 수 있다. 이때에는 敎定都監이라는 독자적인 정치기구를 만들고 막대한 사병을 조직하여 자신의 무력기반으로 삼는 등 자체적인 권력기반을 확립하여 전형적인 무신정권의 형태를 갖추었다. 또한 문신을 보호, 등용하여 이들의 행정적인 능력을 이용하였다. 붕괴기는 최의가 김준, 임연에 의해 제거되면서 시작되었다. 1258년 최의가 제거된 후 김준이 무인집정이 되어 정권을 잡았으나 1268년 임연에게 다시 빼앗기고 이것이 다시 그의 아들 임유무에게 전승되었으나 당시 몽고의 간섭으로 인해 무신정권의 종속이 불가능하였다.④ 농민 ? 천민의 난 - 고려에서 이시기는 농민과 천민의 난이 일어났던 시기이기도 하다. 농민과 천민의 봉기는 양반관리들의 정치적 반란과는 달리 사회경제적인 모순에 의한 하층민들의 반항이었으므로 민란이라고 할 수 있다. 무신란으로 정권을 잡은 무인들이 토지를 겸병함으로써 농민들은 민전을 빼앗기고 또한 지방관리의 가렴주구그 세력을 규합한 고다이고]에 의해 1333년 바쿠후는 붕괴되었다. 미나모토에 의한 바쿠후가 가마쿠라에 존속한 기간을 가마쿠라시대라고 하는데, 그 시대에는 신흥 무사계급의 성장과 더불어 정토종)을 비롯한 많은 신흥종파가 일어났다. 문화는 계층적으로는 귀족에서 무사로, 지역적으로는 교토에서 각 지방으로 확산되었다. 가마쿠라 바쿠후가 무너진 뒤 고다이고왕은 왕 독재에 의한 관료국가의 수립을 기도하였으나 무사계급의 반대에 부닥쳤다. 무사 출신의 아시카가다카우지가 새로운 왕을 옹립하여 북조를 세우자 한동안 남북조가 대립하는 내란이 지속되었으나, 결국 아시카가가 승리하여 1336년 교토의 무로마치에 바쿠후를 세웠다. 그러나 무로마치 바쿠후는 처음부터 기초가 취약하여 내분이 잦더니, 마침내 중앙정부로서의 위력을 상실하고 교토를 중심으로 한 일개 지방정부 체제에 불과한 처지가 되었다. 바쿠후에서 임명한 슈고는 점차 독립하여 임국을 영지화하고 슈고다이묘,즉 슈고의 신분에서 성장한 다이묘]가 되었으며, 다시 그들이 완전히 독립하여 상호 항쟁하는 전국(戰國) 다이묘가 됨으로써 전국시대로 접어들었다. 무로마치 바쿠후가 명맥을 유지한 1572년까지를 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라고 하는데, 그 시대에는 전국시대가 겹치기도 하여 고대에서 전해 내려온 문화재를 많이 상실하였으나, 반면 귀족화한 무사계급에 의해 기타야마문화[北山文化]·히가시야마문화로 불리는 문화가 일어나고, 또 화폐경제의 발전에 따라 일어난 도시의 상공업자들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다도, 가도[꽃꽂이], 노가쿠, 수묵화 등 새로운 문화가 일어났다.⑷인도13세기 초부터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이민족(異民族)이 인도에 들어왔으며, 그 후 5세기 동안 그들과 그 후계자의 국가가 인도에 뿌리를 내려 인도 태반의 토지를 통치하고 그때까지의 지배체제를 계승하면서 점차 독자적인 체제를 구축하였다. 보통 이 시대를 중세라고 부르고, 그보다 이전의 시대를 고대라고 부른다. 이슬람교는 7세기 이래 아시아에서 발달한 종교로, 이미 13세기에는 확고한 다.
Ⅰ. 중세 초기의 문학과 예술이 시기는 크게 연대로 보면 500에서 1000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700년대에 샤를마뉴가 통치하면서 학문도 부흥하게 된다.1. 문학중세 초기의 서유럽인은 문학 분야에서는 거의 업적을 내지 못했다. 이는 기독교인 가운데 글을 쓸 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쓸 줄 아는 사람은 대개 순수한 문학 활동과는 거리가 먼 수도사나 사제였기 때문이다. 라틴어로 된 몇몇 뛰어난 역사 서술이 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비드의「저작」과 샤를마뉴의 전기를 쓴 아인하르트의 작품을 들 수 있다. 이 시기가 끝날 무렵 게르만 어 또는 라틴어의 여러 방언들(romance어)에 바탕을 둔 속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는 대개 처음에는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던 것이었다. 이와 같은 속어 문학의 예로는 앵글로-색슨 서사시「베오울프(Beowulf)」를 들 수 있다. 8세기 경에 처음으로 기록으로 옮겨진 이 시는 유럽 서북부 게르만인의 고대 전설을 수록하고 있다. 이는 영웅적 모험 이야기로 이 서사시의 배경이 된 시대는 기독교 이전 시대이지만, 저자는 이 시에 기독교적 이상주의의 몇몇 특징들을 첨가했다.「베오울프」는 앵글로-색슨어 또는 고대 영어로 된 시의 효시라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잉글랜드 사회 및 중세 초기의 그들의 선조들의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기 때문에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2. 미술중세 초기의 미술사는 예술 활동의 대부분이 해당 지역에 평화가 오거나 국왕의 후원이 있었던 짧은 기간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산발적이고 단편적이었다. 중세 초기 미술의 최초의 작품들은 6세기와 8세기 사이에 아일랜드의 수도사들에 의해 산출되었다. 아일랜드 수도사들은 특히 필사본의 채색화(삽화)에서 철저히 反고전적이고 초현실주의적인 양식을 발전시켰다. 이들이 남긴 것으로 현존하는 작품은「켈즈의 書(Book of Kells)」인데, 이는 삽화가 곁들여진 복음서로서 미술사상 가장 정교한 장식 예술품 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아일랜드 수도사들은 후대에 아무런 영기지 않은 채 쇠퇴했고, 그 후 카롤링 르네상스 예술품들이 등장했다.3. 중세 초기 예술의 특징중세 초기 예술은 지역적으로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샤를마뉴 시대의 예술은 대부분 고전적인 모델이었지만 야만족의 장식 예술이 지닌 생동감을 간직하고 있었다. 샤를마뉴 제국이 쇠퇴하고 난후 중세의 예술도 쇠퇴 되었다. 하지만 10세기에 들어서면서 각 지역에서 새로운 예술적 유파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은 잉글랜드 파였는데, 이들은 필사본 채색화에서의 유려함이 강조되었다. 독일파의 경우는 좀더 장중했지만 극단적인 종교적 환희를 전해주었다. 북에스파냐파는 기독교적 특징을 간직하긴 했지만, 이슬람 장식예술 양식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이국적이고도 독자적인 양식을 창조했다.Ⅱ. 중세 전성기의 문학과 예술1. 문학1 라틴 문학 - 서정시중세 전성기의 문학은 다양하고 생동적이고 인상적이었다. 성당 학교와 대학에서 문법 공부가 부활된 결과 몇몇 뛰어난 라틴 시가 탄생되었다. 그 중 세속 서정시는 12세기에 유력 시인(Goliards)들에 의해 발달하였다. 유력 시인들은 기도문을 풍자적으로 개작하고 복음서를 희화화한 자유 분방한 시인들이었다. 그들의 서정시는 변화하는 계절의 아름다움, 노상에서의 태평스런 생활, 술 마시고 노는 즐거움, 그리고 특히 사랑의 즐거움을 찬미했다. 이들은 주로 방랑하는 대학생들로 쾌활하고 풍자적인 시를 주로 썼다. 또한 이들은 기독교의 금욕적 이상에 대해 최초로 분명히 거부하는 태도를 보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2 속어 문학 - 서사시라틴어의 사용에 덧붙여 속어인 프랑스어, 독일어, 에스파냐어, 이탈리아어 역시 문학적 표현의 수단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처음에는 속어 문학의 대부분이 영웅적 서사시의 형태로 서술되었다. 대표적인 예로 프랑스의「롤랑의 노래」, 독일의「니벨룽겐의 노래」, 에스파냐의「시드의 시」등을 들 수 있다. 이 작품들은 사실상 모두 1050년에서 1150년 사이에 처음으로 지어졌다. 이 서사시들은 남성적이지만 못한 전사들의 사회를 묘사하였고, 주제는 주로 영웅적인 전투, 명예, 충성 등이었다. 간혹 여성이 등장하기도 하였지만 그들은 남성들에게 종속되어 있었다.3 트루바두르(troubadour, 음유시인)12세기의 프랑스에 등장한 트루바두르 즉, 음유시인과 궁정 로망 작가들은 주제와 형식면에서 서사시와는 전혀 다른 문학 양식을 도입했다. 이들은 남 프랑스로부터 온 궁정 시인으로서 프로방스어라고 알려진 프랑스어의 방언으로 시를 썼다. 이들은 서사 시인들의 형식보다 한층 세련된 형식을 가졌고, 그들의 서정시 중 가장 우아한 것(낭만적인 사랑)을 주제로 처음 다루었다. 또한 이들은 여성을 정신, 육체적 기쁨을 줄 수 있는 경이로운 존재로 이상화시켰다. 대개의 경우 이 시인들은 자신들이 쓴 시의 위대성의 근거를 사랑에서 얻어진 영감으로 돌렸다. 그들은 사랑이 너무 쉽게, 또는 자주 충족될 경우에 그들의 사랑이 마력을 잃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낭만적인 욕구충족 보다는 간절한 동경을 더 자주 시로 읊었다. 연애 서정시를 주로 쓰던 이들은 다른 여러 종류의 짤막한 시들을 쓰기도 했는데, 이는 주로 음담패설이나 무기를 다루는 솜씨, 동시대의 정치 사건에 대한 언급, 종교문제에 대한 사색 등을 다루었다. 그러나 그 주제가 무엇이든 음유시인들은 항상 재치 있고 혁신적인 표현을 구사했다. 남 프랑스의 트루바두르에 의해 시작된 문학적 정통은 북프랑스에서는 트루베르(trouveres)에 의해, 독일에서는 미네징어(minnesingers)에 의해 이어졌다. 그들이 일으킨 혁신은 그후 서정 시인들에 의해 온갖 서양 어들로 발전되었다.4 설화시의 등장12세기 프랑스 문학에 나타난 또 다른 중요한 혁신은 로망이라고 알려진 긴 설화 시들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이 시들은 매력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며, 인물 묘사에서 탁월했다., 그 주제는 대개 사랑과 모험이었다. 어떤 로망은 고전 그리스의 주제를 정교화한 것이지만, 가장 유명하고 잘된 작품은 아서왕에 관한 것들이었다. 아서왕에 관로서 최초의 위대한 작가는 북 프랑스의 크레티앵 드 트루아였는데, 그는 새로운 형식의 창안에 많은 기여를 했으며, 주제와 태도에서 혁신적 요소를 도입했다. 즉, 트루바두르가 짝사랑과 혼외의 사랑을 찬양한데에 반해, 크레티앵은 결혼 안에서의 낭만적인 사랑의 이상을 처음으로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는 또한 주인공들의 행동뿐만 아니라 생각과 느낌까지 묘사했다.5 우화시중세 전성기의 모든 설화가 형식이나 내용에서 로망처럼 높은 경지에 이르렀던 것은 아니다. 새롭게 등장한 매우 색다른 설화 형식은 우화시(fabiaux)였다. 우리가 아는 우화는 이솝의 도덕적인 동물이야기에서 훈도나 교훈이 목적이었지만 이는 여흥을 위한 짧은 읽을 거리로 발전했다. 우화시는 매우 거칠거나 때로는 유머가 넘치고 낭만적이지 못한 방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어 갔다. 또한 많은 작품들에 反성직적 경향이 강해 수도사나 사제들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우화시는 非궁정적 이어서 새로운 도시민 계층만을 위해 쓰여진 것으로 간주되곤 했다. 우화시들은 점증하는 세속화 경향을 표현했다는 점, 그리고 리얼리즘을 처음으로 드러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러한 경향은 후에 보카치오와 초서에 의해 완성되기에 이른다.⊙단테의「신곡」 : 단테의 신곡은 오래 전부터 내려온 구속, 즉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사후의 축복받은 삶을 이루어낼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2. 건축1 로마네스크 양식로마네스크 양식은 10세기에 시작되었지만 완숙된 것은 11, 12세기전반이었다. 이 시기에는 종교적인 개혁 운동에 힘입어 수많은 새로운 수도원들과 대형 교회들이 건축되었다. 이 건축 양식은 모든 건축적인 디테일을 획일적인 체계 속에 엄격히 종속시킴으로써 교회 건축물을 통해 신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이 양식의 기본 특징으로는 둥근 아치, 돌로 쌓은 거대한 벽, 커다란 홍예받이(창과 창사이의 벽), 작은 창문, 수평선의 강조 등을 들 수 있다. 단조로운 내부 장식은 의 모자이크나 프레스코 벽화로 보완되었다. 그리고 기독교 예술에서 매우 중요한 혁신이 이루어져 건물 내 외부에 조각 장식이 도입되었다. 또 최초로 실물 크기의 인물상이 건물 전면에 등장했다. 인물상들은 실제 이상으로 장중하고 길게 표현되었지만, 강한 호소력을 가지고 있으며, 인물상 조각에 대한 관심이 부활했음을 처음으로 보여 주고 있다.2 고딕 양식12, 13세기를 거치면서 로마네스크 양식은 고딕 양식으로 대치되었다. 고딕 양식은 로망이 등장한 것과 같은 시기인 12세기 중반에 프랑스에 등장하였고, 로마네스크 양식보다 한층 더 세련되고 기품 있고 우아했다. 이 양식은 가장 복잡한 건축 양식 중 하나로 그 기본요소로는 뾰족한 아치, 궁륭과 늑재를 이용한 둥근 천장, 그리고 플라잉 버트레스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장치들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둥근 아치와 붙박이 홍예받이로써 할 수 있는 것 보다 더욱 가볍고도 높은 구조물을 가능케 했다. 이 외에도 높은 첨탑, 장미꽃 무늬 창문, 섬세한 트레이서리 무늬, 정교하게 조각된 전면 등을 들 수 있다. 성당의 장식은 외부에 집중되어 있는데,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과 정교한 나무 세공과 제단을 제외하면 내부는 간소하고 엄격하게 처리되었다. 흔히 많은 사람들이 고딕 성당의 첨탑을 보고 순수하게 금욕적 내세성을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크게 잘못된 것이다. 고딕 성당에는 가끔 종교적 의의를 찾아볼 수 없는 일상 생활의 풍경을 담은 스테인드 글라스가 장식되곤 했다. 또한 예수, 마리아, 성인 등의 고딕 조각상들이 당시 중세 유럽의 어떤 조각상보다도 훨씬 자연스럽게 표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에 대한 관심과 자연에 대한 관심이 더 이상 죄악으로 간주되지 않는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도한 고딕 건축은 도시인의 자부심을 표현한 것이기도 했다. 성당은 예외 없이 도시에 위치했고, 공동체 생활의 중심이자 그 도시의 위대성을 표현한 것이다. 새로운 성당이 건립될 때는 시민 모두가 참여했고, 시민들은 성당을 자신들의 재산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