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음악의 이해 수업시간의 감상문을 쓰기 위해 고른 두 번째 연주회의 제목은 “슈베르트 가곡의 밤”이었다. 급하게 볼만한 공연을 찾느라 호감가는 공연이 없으면 어쩌나 불안해하다 찾은 이 연주회는 한국 독일 연구외에서 준비한 연주회로 프로그램은 6명의 성악가들이 슈베르트의 수 많은 가곡중 18곡을 들려주도록 짜여 있었다. 어떻게 보면 딱딱하고 지루하다고 느껴질수 있는 가곡인데다, 가사라도 알아들을수 있음 좋으련만 무슨 내용인줄도 모르는 가곡을 어떻게 듣고 앉아 있을까... 걱정했었는데 공연전 나눠준 프로그램에 공연되는 모든 가곡이 한국어로 해설되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아직 적응되지 않은 상태에서 몇 곡이 순식같에 지나갔다. 워낙 곡이 짧은 것들인데다가,단체관람을 온 학생들의 성숙하지 못한 관람태도가 정말 정신없었다. 한 성악가당 3·4곡의 노래를 부르는데 한곡이 끝날때마다 박수를 치는 바람에 급기야 두 번째 무대에 선 성악가가 모든 노래가 끝나고 박수를 쳐 달라고 당부를 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렇게 집중되지 못한 상태로 몇 곡이 지나갔을때 우리의 귀를 집중시키는 낯익은 곡이 불려지기 시작했다. 바로 그 유명한 “마왕”이라는 곡이었다.말이 질주하는 정경을 그린 음산한 세잇단음의 전주로 시작하는 이 곡은 이야기하는 사람, 공포 에 떠는 아이, 그 아이를 안고 말을 달리는 아버지, 아이의 영혼을 빼앗아 가려는 마왕 이렇게 4 명의 목소리로 나뉘어 극적으로 노래된다.바람이 몹시 부는 밤, 어둠을 뚫고 사랑하는 아들을 꼭 껴안은 아버지가 말을 타고 달리는 모습 을 배경으로 이들은 대화를 나눈다.아버지 - 얘야, 뭐가 무섭니? 그렇게 얼굴을 파묻고아들 - 아빠, 말에 탄 저 마왕이 안 보이세요.관을 쓰고 긴 옷을 입은 저 마왕이아버지 - 얘야, 그건 단지 구름 모양을 한 안개란다.악마 - 착한 얘야, 이리 오너라, 나하고 재미있게 놀자꾸나, 저기 예쁜 꽃도 많이 피어 있고, 우리 엄마 집에는 금옷도 있단다.독일 전설에서 어린이에게 재앙과 불행을 가져오는 귀신으로 알려진 마왕은 이 작품에서 역시 아들의 영혼을 빼앗았고, 결국 아버지가 집에 도착했을 때 아들은 아버지 품안에서 숨을 거두고 만다.슈베르트는 그가 작곡한 가곡중 약 70여곡을 괴테의 시에 음을 붙여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곡은 괴테가 자신의 시에 곡을 붙인 무명의 작곡가 슈베르트가 보낸 악보들 중 맨 처음 호감을 보인 작품이라고 한다. 기본 지식없이 연주회를 들으면서 가사들이 너무 아름답고 거기에 너무나도 절묘하게 붙여진 음이 기가 막히다고 생각했었는데 역시나 그의 가곡의 가사들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70여 곡이 넘는 곡은 괴테의 시에서 , 그 외에도 F. 실러나 H. 하이네 등 문예사상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작가의 시에 곡을 붙였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로 슈베르트는 작곡을 할 때에 시의 가치를 판단하는 능력이 없었으며, 시를 잘 음미하지 않고 그냥 채용하였다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다고 하는데 슈베르트가 직접 지은것인줄 알았던 나도 살짝 실망을 하지 않을수 없었다.하여튼 이 “마왕”이라는 곡은, 괴테가 표현한 민요풍의 소박함과 단순함을 환상적인 멜로디와 함께 천둥, 폭풍우, 번개같은 낭만적인 혼돈으로 묘사했다. 또 이 곡은 훗날 리스트가 편곡하고 연주해서 더욱 유명해진 이 곡은 피아니스트들에게 체력의 한계에 도전 하게 하는 어려운 곡으로도 유명하다.그래서 그런지 연주회를 계속 들어면서 어떤 곡은 노래보다 피아노반주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되는등 반주의 차원을 넘어서 한 곡의 피아노 연주회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하는 곡도 여러곡 있었다. 물론 반주자와 성악가의 완벽한 호흡 때문에 더 부각되어 들렸을지도 모르지만 그냥 가곡의 반주라고 하기엔 아까울 정도로 멋진 연주도 들을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슈베르트 가곡의 특징 중 하나가 가곡 반주부에 단순하게 화음만 울리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반주부에서 그 시의 전체 기분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마왕”에서도 전주부에 말의 말발굽소리같은 연주로 긴박하고 음산한 분위기를 한껏 느낄수 있었다.또 기억남는 곡은 “물레잦는 그레첸”이란 곡이었다. 이 곡이 기억남는 이유는 아마도 애타는 가사와 반전, 거기에 부응한 성악가의 열정적 노래때문이었을것이다. 빙글빙글 돌면서 실을 뽑아내는 물레를 그려냈다는 피아노 반주도 인상적이었고, 사랑하는 이를 생각하며 그 걸음걸이, 얼굴의 표정, 이야기하는 모습을 그린가사는 내 마음까지 애타게 만들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것처럼 조금씩 감정이 고조되다가 '당신이 잡은 그 손길 아~ 그 키스' 대목에서 격정에 빠져드는데... 그 순간 반주마저 물레 돌리는 것을 잊은 듯 숨을 죽인다. 마지막에 “마음껏 그에게 입맞출 수 있다면, 그의 압맞춤에 내 몸 삭아 질지라도!”하고 성악가는 마치 아름다운 꿈을 꾸다 깬것처럼 한숨을 쉬며 목소리는 꺼지고, 물레도 멎어버린다. 순간 나도 숨이 멎어버렸다. 아마 제일 극적인 곡이었던 것 같다.우선 아직도 “가곡”이라하면 좀 어렵고 딱딱하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의외로 가곡도 한편의 오페라처럼 느낄수 있다는 사람들의 의식의 전환이 꼭 필요한것같다. 또 교육을 통한 성숙한 공연문화를 누릴수 있는 자세도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이번학기에 이 수업을 통해서 처음 음악회에 갔었고 또 처음 가곡이라는것도 유심히 들어보았지만, 앞으로도 종종 기회를 찾아 풍부한 으악을 많이 들어볼 필요도 있을거란 생각을 했다.Franz Peter Schubert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오스트리아의 작곡가(1797. 1. 31 빈 - 1828. 11. 19 빈)'가곡의 왕'이라는 별명의 슈베르트는 빈에서 태어나 역시 빈에서 31세라는 짧은 생애를 마친 불운한 천재 음악가였다. 27세 연상인 베토벤과 같은 시기, 같은 곳에 살아서인지 그의 일생은 늘 베토벤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 당시 음악인들이 신처럼 공경했던 베토벤을 슈베르트 역시 흠모했는데, 베토벤이 사망하자 그의 관을 메고 비오는 빈 거리를 지나가던 음악인들의 행렬 속 에 눈물을 흘리던 슈베르트도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리고 베토벤은 슈베르트의 천재성 을 죽기 바로 직전에야 인정하게 되었는데, 죽음을 앞둔 그는 '왜 좀 더 일찍 슈베르트를 알지 못했던가'하고 한탄했다고 한다.
목 차Ⅰ. 서론1. 교육방송이란?2. 교육방송의 위치Ⅱ. 본론1. 교육방송의 역사2. 교육방송의 목표3. 교육방송 조직/운영4. 교육방송의 활용 기본 방향5. 채널편성6. 송신체계7. 교과 프로그램의 제작 과정 및 특징8. 해외 교육방송 현황Ⅲ. 결론1. 교육 방송의 공영화와 문제점2. 교육 방송의 정체성 확보를 위한 방안Ⅰ. 서론1. 교육방송이란?교육방송이란 텔레비젼과 라디오 그리고 여기에 속하는 통신매체를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학교교육 또는 사회교육을 위한 교육내용과 교육효과를 향상시키는 행위를 말한다.2. 교육방송의 위치교육방송의 정의를 방송을 운영하는 관점에서 보면 특수방송에 해당되는데, 이러한 특수방송은 전문적인 방송으로 일반적인 방송이 '불특정다수'를 대상으로 한다면 특수방송은 특정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특정한 내용을, 특수한 지역에서, 특수한 방식에 의해 방송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특수방송은 일반방송에 비해 제한된 형식과 청취자나 시청자, 그리고 제한된 방송망을 갖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특수방송에는 교육방송 외에 국제방송, 종교방송 등이 있다.교육방송을 두 가지로 크게 분류해보면 학교교육과 관계되는 ITV(Instructional Television)와 일반 사회교육에 관계되는 ETV(Educational Television)로 나누어 볼 수 있다. ITV는 특수내용을 특정한 시청자를 위하여 방송하여야만 효과적이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다가는 전파상의 손실이 있게 된다. 따라서 ITV는 교사가 이를 언제든지 수업의 진도에 맞추어 활용할 수 있도록 비디오 테입으로 만들어 확보하고 보급하는 기능이 더욱 시급하다 하겠다. 또한 특정인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방송을 송신할 경우에는 프로그램을 보충, 심화하여 주는 교재를 개발하여 시간적인 제약을 받는 텔레비젼 프로그램을 보완할 것이며, 또한 교육방송을 교육과정화하여서 이 교육방송 과정을 이수하면 공인되는 자격증을 습득할 수 있는 사회적 제도의 가능성을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사회 교육방송인 ETV에 있어 방식에 의한 송신체계, 컬 러방송)1977. 2. : 기구 송신체제 취소(교육방송 송신망의 지상 방식 전환 결정)1978. 7.26 : 교육방송의 KEDI-KBS 이원 체제화 (국무총리 지시각서)3기반 구축기 (1980-1989)독립적인 교육채널인 KBS 제3TV(UHF)와 KBS 교육라디오(FM)가 신설되면서 방 송을 통한 교육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 이 당시 한국교육개발원의 방송본부 는 학교교육 프로그램의 연구, 기획 및 제작을 전담하였으며 송출은 KBS의 시설 을 이용하였다.1980. 9. 1 : 「TV 고교 교육방송」제작으로 TV방송개시(한국교육개발원)1981. 2. 2 : 교육 전문 채널 KBS 제3TV(UHF)와 교육라디오(FM) 신설, 칼라 TV 방송 실시1989. 4.17 : 「TV 고교 가정학습」방송 실시4성장 발전기 (1990-1996)한국교육개발원 부설 교육방송이 KBS로부터 분리해 TV와 라디오 각각 하나의 채널을 운영하는 교육전문 전국 네트워크 방송국 EBS로 정식 출범한다. 이때부 터 학교 수업을 보충하는 프로그램은 물론 일반 교양 프로그램을 기획·제작함 으로써 국민의 평생교육을 선도하는 방송기관으로 발전한다.1990. 12.28 : 교육방송(EBS) 개국(한국교육개발원 부설),EBS TV(호출부호 HLQL-TV), EBS FM(호출부호 HLQL-FM) 등 두 개의 독립 교육 채널 운영1991. 11. 1 : 교육방송 자체 송출 개시5도약기 (1997- )교육방송은 한국교육방송원법에 의해 한국교육개발원으로부터 완전 분리되어, 편성·인사·재정의 자율권이 확보된 독립적인 방송기관으로 발전한다. 또한 디 지털 방식에 의한 위성교육방송을 시작함으로써 난시청을 완전 해소하고 고화질 의 질 높은 프로그램을 시청자에게 서비스하게 된다.1990.12.28 : 교육방송(EBS) 개국(한국교육개발원 부설),EBS TV(호출부호 HLQL-TV), EBS FM(호출부호 HLQL-FM) 등 두 개의 독립 교육 채널 운영1997. 1.13 : 한국교육방송원 연구{원가관리 시스템 구축 및 운영{효율적 공사 업무 체계 개발{평가 및 보상 체계의 개선{(www.ebs.co.kr 그림 참조)5. 채널/편성1편성 기본 방침·EBS의 전문성과 차별성을 제고하는 방송·보다 많은 국민에게 보다 깊은 감동을 전하는 방송2EBS 교육방송의 채널별 편성 방향·EBS 지상파 TV창의력과 상상력 개발을 위한 유아·어린이 프로그램, 현장교육관련 프로그램인터넷·컴퓨터·벤처 등 정보화 관련 평생교육 프로그램·EBS 위성 1TV고등학생 대상 프로그램수업활동에 활용 가능한 영상자료형 프로그램청소년 대상의 직업교육과 인성교육 프로그램·EBS 위성 2TV초등학교, 중학교 대상 프로그램어린이 영어교육 및 유아, 초등학교 교사 연수용 프로그램·EBS FM 라디오외국어 전문채널 (영어, 제2 외국어 프로그램등)어린이·청소년 대상 인성 및 교양 프로그램·EBS 인터넷 방송풍부한 콘텐츠 제공, 동영상 활용으로 반복 학습, 방향 학습효과 (VOD 시스템)3채널운영{매체 구분편성 내용호출 부호채널 또는 주파수지상파T V평생교육HLQL-TV-서울,경기: VHF13, UHF43-기타 지역: 지역별 UHF라디오교육.문화정보 및 어학HLQL-FM-서울,경기,충청: 104.5MHz-기타 지역: 지역별 주파수위성EBS플러스1고등학교 교과--한국 디지털 위성방송EBS플러스2초.중학교 교과및 직업 교육--한국 디지털 위성방송4채널별 방송시간{매 체 별주 당방송시간1일 방 송 시 간월 ~ 금요일토요일일요일지상파T V116시간 20분오전 06:00~12:00오후 15:30~01:10(15시간 40분)06:00~익일 01:00(19시간)06:00~익일 01:00(19시간)라디오140시간05:00 ~ 익일 01:00 (20시간)위성EBS플러스1131시간 20분오전 07:00~익일 01:50(18시간 50분)07:00~익일 01:20(18시간 20분)07:00~익일 02:10(19시간 10분)EBS플러스2132시간 40분오전 06:00~익일 01:30(19시간 30분)07:00~익그램 중 필요한 경우 수준별로 제작하였다.· 핵심종합단계 : 기본 개념과 원리의 종합적이해· 심화단계 : 난이도가 높은 심추 문제와 심화 학습내용 중심2 관련 문항을 충실히 해설함으로써 문제 해결력을 기를 수 있도록 한다.3 학습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다양한 코너를 삽입하였다.4 내용과 관련된 동영상 자료를 충분히 활용하였다.5 EBS 인터넷 방송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하였다.8. 해외 교육 방송 현황1중국중국에서 최초로 방송 전파가 발사된 것은 1923년 1월 23일이다. 1992년 12월 라디오 발사 설비를 가지고 상해에 온 미국인 E.G 오스본이 중국 무선전공사광심전대를 설치하여 중국 대륙에 첫 전파를 발사했다. 방송 내용은 매일 밤 한 시간씩 영문 신문(대륙보)에서 제공한 뉴스를 전하고 일요일에는 종교성 프로그램도 방송했다. 그러나 중국 정부의 정식 승인을 받지 못해 그해 4월 방송을 중단했다.중국의 위성 교육 방송인 CETV는 1986년 10월 1일에 설립된 교육 전문 위성 TV 방송사로서 국가 교육위원회에 소속되어 있는 국영 방송사이다.CETV는 중국 대륙 전체와 인접 지역을 포괄하는 통신 위성 앱스터1호 를 이용한 위성 채널 3개와 베이징 일원을 수신 지역으로 하는 지상파 UHF 채널 1개를 운영한다. 3개 위성 채널의 1일 방송 시간은 48시간으로 UHF 채널로 방송되는 7시간을 합하면 1일 총 방송 시간이 55시간에 달한다.중국에서는 외국어, 부동산, 건강 등에 대한 풍부한 정보를 제공하는 교육 방송이 시청자들의 폭넓은 인기를 얻고 있어서, 상하이의 경우 교육 TV의 시청률이 17%에 달한다. 미디어 전문가들은 중국에서 교육 TV가 이처럼 성공할 수 있는 배경은 급변하는 사회에서 이에 적응하려는 사람들의 정보에 대한 욕구가 엄청나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또한 1가구 1자녀 출산 정책으로 대부분 한 자녀를 둔 중국의 가정에서 교육 방송은 자녀의 입시 공부에 가장 많은 정보를 제공해 주는 최고의 과외 선생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교 현장에서 직접 사용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중점적으로 육성할 계획인데, 이러한 계획은 벌써부터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Ⅲ. 결론1. 교육 방송의 공영화와 문제점교육방송은 창설된 이후 일관되지 못한 정부 정책 때문에 그 위상과 운영방식에 많은 혼선을 빚어왔다. 교육부 산하 교육방송원으로 되어 있는 위상을 특별법에 의한 교육방송공사로 독립시켜 자율성을 바탕으로 책임경영을 하게 하자는 주장이 다수의 의견인데, 공사가 되면 교육방송은 국영방송적 성격에서 공영방송으로 바뀌게 된다.99년 11월 EBS가 갤럽에 의뢰, 서울 부산 등 5개 대도시의 13∼60세 남녀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 의하면 고정시청자는 비록 31%에 불과했지만‘다른 방송사보다 신뢰할 수 있다’는 응답이 70.2%로 나타나 시청률은 낮지만 신뢰도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자료를 바탕으로‘공사화’의 숙원이 이뤄지면 보다 안정된 조건인 만큼 공영성에 기초해 신뢰를 잃지 않으면서 도 시청자의 다양한 욕구를 파고는 것이 가능하리라 생각되었다. 예를 들어 KBS, MBC, SBS 등 방송 3사에서 홀대받는 국악프로그램 등의 ‘틈새’를 파는 것은 물론, ‘교육’의 의미를 확장해 따로 책상 앞에 앉아 공부하지 않더라도 다양한 지적 또는 예술적 호기심을 해소할 수 있도록 하는 프로그램으로 승부하겠다는 전략의 수립이 가능하다.하지만 이러한 교육방송의 전망과는 달리 많은 문제점이 존재한다.그 하나는 재원확보이다. 99년 현재 정부출연기관 상태인 교육방송의 올해 예산은 662억8,300만원으로 정부출연금 35%와 출판 영상사업 등 사업수익 36.5%, 광고수입 13.2% 등으로 이뤄져 있다. 교육방송은 독립공사 첫해의 예산을 1,000억 원으로 상정하여 방송발전자금 400억원, TV수신료 400억원(교육방송은 시청자들이 내는 TV 수신료 2500원의 10%만 할당해주면(400억원) 재원의 상당부분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자체수익 및 정부보조금 200억원의 구성비로 꾸리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주.
1.1990년대 이전의 영화산업의 구조80년대까지 한국영화 제작의 주요 자금원이 된 것은 극장이었다. 각지방 배급업자로부터 미리 돈을 받아 제작비를 마련하는 이른바 ‘입도선배’의 시대였던 것이다. 한국영화의 최고 전성기로 알려진 60년대부터 시작된 이런 제작방식은 정부가 영화사의 수를 제한하는 동안에도 계속 지속되었다. 흥행자본을 제작에 투자하던 ‘입도선매’는 1988년 직배 실시와 더불어 변화의 조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독점적 외화수입으로 부를 축적했던 영화사들은 할리우드 직배사에 대항할 길이 없다고 판단, 제작편수를 줄여갔고 그러는 사이 비디오라는 새로운 매체가 안방으로 파고 들었다. 대기업이 영화업에 뛰어든 것은 비디오를 통해서다. 삼성, 대우 등 가전제품을 팔던 대기업은 비디오 시장에서 영화의 가능성을 보게 됐다. 그래서 1992년부터 두 회사는 한국영화에 투자하기 시작했다.2.대기업 자본의 진출 배경이런 상황에서 대기업의 자본이 영화산업에 진출한데는 몇 가지 원인이 있다.첫째, 비디오 유통업에서의 직배의 영향이다. 1980년대 중반부터 비디오 프로그램의 확보라는 측변에서 영화산업에 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있던 삼성, 대우,LG 등의 가전 3사는 1991년을 기점으로 비디오 시장에까지 헐리우드 영화사들의 직접 배금이 시작되자 대기업들의 프로그램획득이 총제적인 어려움에 닿게 된다. 당시 한국영화의 평균 제작비다 5~6억원 선이었음을 감안했을때 제작비에 육박하는 금약을 비디오 판권료로 지불하게 된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대기업으로 하여금 영화제작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도록 만들었다.둘째,수익창구의 증가이다. 1993년 CATV사업에 진출해 전문 영화채널을 가지게 되어 프로그램의 확보가 더욱더 필요해진 것이다. 거기다 위성방송사업에 대한 기대효과또한 컸다.셋째,새로운 인력과의 만남이다. 5차 개정영화법을 통한 제작 자유화 조치의 틈새를 뚫고 기존의 충무로 인력과는 다른 젊고 합리적인 기획자들이 등장하구 있었고, 이들은 자금 조달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 전통적인 충무로 자본 대신 대기업의 자본을 끌어 들였다.3. 대기업의 활동대기업의 본격적인 영화산업 진출은 삼성이 비디오 판권구입의 형식으로 투자한 1992년 익영영화가 제작, 신씨네 기획의 “결혼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 이영화는 그 해 한국영화 최고의 흥행수익을 올림으로써 이후 대기업 진출의 기폭제가 된다. 또 시간이 갈수록 대기업의 투자 형태가 비디오 판권 중심의 부분투자에서 1995년을 기점으로 전약투자로 바뀌어간다. 이는 대기업이 판권전체를 보유하게 되는 것이고 이를 통해 수익을 확보할수 있는 배급능력이 전제되어야 하므로, 이를 위해 대기업들은 자사의 극장 배급망을 만들어갔고, 그 과정에서 멀티 플렉스로 운영방식을 바꾼 기존의 성울 개봉관과 공동 운영 형식으로 몇 개관을 장기 임대하거나 새로 극장을 짓거나 서울 외곽과 지방의 극장들을 개봉관으로 승급히켜 나갔다. 또한 대기업의 전약투자가 늘어나면서 대기업 전속 개념의 제작사들도 등장한다. 대우는 씨네 2000, 선익필름, 삼성은 우노필름, 명필름, 프리시네마, 시네마서비스, SKC는 영화세상과 전속계약 및 독점공급계약을 맺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영솨한업에서 본격적인 의미에서의 배급업이라는 개념이 정착했다.그러나 1997 IMF와 함께 대기업은 영화산업에서 물러나기 시작한다. 실제로 영화산업은 생각보다 수익이 크지 않았고, 무억보다 흥행결과가 그들의 예측을 벗어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대기업이 제작보다 외화숭비에 더 많은 돈을 쓴 것은 당연했다. 적어도 한국영화보다는 외화가 흥행예상에 가까운 결과를 보였줬기 때문이다. 비디오 시장의 성장세도 90대 후반부터 반전됐다. 비디오 판권으로 안정된 수입을 얻는 것도 차츰 옛말이 되어 가자. 대우, SK,LG등이 영화에서 철수 했다. 비교적 과감한 투자로 1998년 유력한 메이저 배급사로 부상한 삼성영상사업단마저 “쉬리”가 엄청난 흥행을 기록하는 동안 해체 결정을 내리자 영화계의 대기업시대는 막을 내리는 듯 보였다. 비디오사업에서 시작하지 않은 CJ만 남게된 상황이다.4. 대기업의 영화진출의 긍정적 영향우선 대기업진출은 한국영화의 제작비를 증가시키고 제작편수를 감소시켰다. 한국영화의 경이적인 성장에는영화시장에 뛰어든 대기업의 풍부한 자금력과 안정된 배급,스크린 수의 증가,뛰어난 마케팅 전략 등이 지금의 한국영화 흥행의 결정적 인자로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또 대기업은 애초의 투자영역뿐 아니라 제작, 배급,상영,비디오등에 이르는 영역을 아우르며 수직적 통합을 실현해 나갔다. 그 과정에서 한국영화산업의 가장 후진적인 영역으로 남아있던 배급 및 상영영역의 합리화가 진척되었다고 볼수 있다.5.대기업의 영화진출의 부정적 영향대기업은 지금까지 예술성 강한 영화를 만들어 해외 유명영화제에 나가볼 계획을 실행한 적도 없다. 흥행성 높은 영화로 해외시장을 넘보려는 의지 역시 읽혀지지 않는다. 단지 근시안적인 상업성에만 집착을 보일 뿐이다.직접 제작을 하지 않고 제작비를 충무로 군소 영화사에 지원해온 대기업은 지원 유무 결정을 오직 시나리오에 담긴 흥행성과 유명 연기자 캐스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 결과 영상이 아닌 개그 수준의 말장난이 판치는 영화만 양산하고 제작비만 잔뜩 올려놔 군소 영화업자는 제작에 나설 엄두조차 내기 어려워졌다. 제작비 상승 요인은 연기자 출연료. 한정된 인기 연기자를 잡으려다 보니 출연료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예전에 비해 제작비가 올랐지만 작품성이나 영화 완성도를 높이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박철수 감독은“영화 를 만들 때 어느 대기업에 공동제작을 제안했으나 흥행을 예측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했지만 완성 뒤에는 세계 배급을 실현했다”며 “대기업은 영화를 게임팩 같은 상품으로만 보지 말고 영화에 대한 존경심을 가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1.바로크음악이란?!르네상스음악에 바로크음악이 잇따르게 된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르네상스 음악은 일반사람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으므로 민중은 더 쉽고 친근해 질 수 있는 것을, 그것도 되도록 르네상스의 음악처럼 너무나 정돈되어 변화성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고 운동감이 있는 것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요구를 민감하게 알아차리고 새로운 바로크 음악을 만든 최초의 사람은 이탈리아의 피렌체에 있던 소장음악가들이었다. 그들은 대위법의 음악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더 간소한 음악의 필요성을 통감하여, 음악애호가인 바르디 백작 집에 모여서 새로운 음악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이 사람들은 카메라타(camerata)라고 하였다. 그들은 르네상스 정신에 따라 음악도 고대 그리스의 것부터 재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대위법 대신 단순한 선율에 간소한 화음 반주를 붙인 양식을 고안하였다. 이것은 소위 단음악이며 이것으로 바로크 음악이 시작된 것이다.(1600~1750)바로크음악은 장르적으로 관찰하면 성악에 대한 기악의, 교회음악에 대한 세속음악의 대두와 발전의 시대였다. 성악에서는 오페라·오라토리오·칸타타, 기악분야에서는 모음곡·트리오소나타·콘체르토그로소·변주곡 등이 즐겨 작곡되었다.2.바로크음악의 역사⑴ 초기(17세기 전반)바로크음악은 오페라의 성립과 함께 시작되었다.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걸쳐, 이탈리아에서는 언어의 극적인 표출을 목표로 하는 새로운 움직임이 있었다. 피렌체의 문인그룹 ‘카메라타’는 언어의 리듬에 지배된 독창에 의한 음악적 낭송(朗誦)형식이라고 해야 할 모노디양식을 만들어냈다. C.몬테베르디는 대담한 불협화음의 사용에 의하여 마드리갈에서의 드라마틱한 효과를 노리고, 그것을 제2의 작법(언어를 중시한 새로운 작곡법)이라 명명하여 새로운 음악적 태도를 표명하였다.피렌체의 모노디는 음악적으로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지만, 언어의 극적이고 자유스런 표출의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 이것은 오페라의 성립을 촉진시키는 중대한 요인이 되었다.오르페오》가 완성됨으로써 최초의 예술적인 바로크오페라의 탄생을 보게 되었다. 오페라는 그 후 베네치아악파·나폴리악파를 중심으로 발달하였다.한편 좀더 실내악적인 방향으로는 칸타타가 성립되었고, 모노디양식과 협주양식은 H.쉬츠에 의해서 독일에도 도입되었다. 그는 북방의 영향을 받은 폴리포니양식과 이탈리아로부터의 새로운 양식에 입각하여, 그 후 J.S.바흐에 이르는 독일 프로테스탄트음악의 길을 독일 중북부에 마련하였다. 한편 남독일은 지리적으로 가까운이탈리아오페라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칸타타 - 17세기 초엽에서 18세기 중엽까지의 바로크시대에 가장 성행했던 성악곡의 형식으로 이탈리아어의 cantare(노래하다)에서 파생된 말이다. 보통 독창(아리아와 레치타티보) ·중창 ·합창으로 이루어졌으나, 독창만의 칸타타도 있고 또 처음에 기악의 서곡이 붙어 있는 것도 적지 않다. 그리고 가사의 내용에 따라 세속(실내)칸타타와 교회칸타타로 대별된다. 칸타타는 17세기 초엽 이탈리아에서 생겨나 오페라에서 발달한 벨칸토 양식의 아리아와 서창풍(敍唱風)의 레치타티보를 도입하였다. 이탈리아에서는 주로 왕후 ·귀족들의 연희용으로 작곡된 독창의 실내 칸타타가 중심을 이루고 카리시미, 체스티, 로시 등을 거쳐 나폴리악파의 대가 알렉산드로 스카를라티에서 절정을 이룬다. 그 정형은 ‘레치타티보-아리아-레치타티보-아리아’라는 4악장 형식으로, 아리아에서는 화려한 콜로라투라의 기교가 구사되었다. 독일에서도 텔레만, 헨델이 이탈리아 형식의 실내 칸타타를 많이 작곡하였다.⑵ 중기(17세기 후반)이 무렵이 되자 기악이 눈부시게 발달하였다. 특히 바로크음악의 구성관(構成觀)을 구현한 트리오소나타의 작법이 완성되고, 이것은 형식 및 악곡의 구성원리가 되었다. 모음곡형식을 취한 실내소나타와 교회소나타는 대부분 트리오소나타로 작곡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발레에 중점을 둔 궁정오페라가 륄리에 의해서 전성기를 이루고, 또 류트·클라브생 음악도 그 감각적 색채를 연마해 나갔다.⑶ 후기(17세기 말∼18세기 중렐리·A.비발디, 독일에서는 G.P.텔레만·G.F.헨델·J.S.바흐 등 거장이 배출되어 바로크음악은 그 절정을 이루었다.3.바로크음악의 특징1)단선음악(Monody)의 발생 ☞ 오페라의 출현9세기부터 16세기까지 지배해 오던 음악적 통념은 대부분의 경우 몇 개의 성부가 얽혀서 이루는 복잡한 다성음악이었다. 이것이 17세기에 들어오면서 하나의 선율이 중심이 되는 독창양식으로 구조적변화가 일어났는데, 이 새로운 양식을 라고 한다. 단선음악은 독창과 반주의 선율이 뚜렷이 구분되어 있으며 반주는 극히 축소되어 몇 개의 간단한 수직화음으로 압축되었다. 그리하여 단선음악이 오페라를 탄생시키는 기초가 된 것이다.최초의 오페라는 1597년 시인인 리눗치니가 대본을 쓰고, 페리가 작곡한 모노디양식의 이지만, 그 악보는 대부분이 소실되어 전해져있지 않다. 그 후, 1600년 페리는 역시 리눗치니와 협력해서 고대 그리스의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체의 신화를 소재로 하여 를 작곡하였는데, 이것이 현재 남아있는 최초의 오페라문헌이 된다. 모노디음악이 그 전의 양식보다 훨씬 극적인 표현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은 1607년에 반토아에서 초연된 오페라 의 성공을 보면 알수 있으며 의 성공을 계기로 오페라는 피렌체에서 베네치아, 로마를 거쳐 나폴리에 까지 퍼져 나갔고, 뜨거운 오페라의 열로 이탈리아 전토는 휩싸이게 되었다.2)통주저음(숫자붙은 베이스)바로크시대의 음악은 비발디의 를 생각하면 잘 알수 있듯이 모노디음악을 주류로 삼고 있다. 모노디의 주역은 매력적인 선율이지만 잘 들어보면 반주의 화성도 꽤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화성은 언제나 저음(베이스)을 기초로 하여 거기에 화음을 겹치면서 구성되어 간다. 그래서 항상 저음부를 연주해 주는 악기가 있으면 매우 편리하다. 이것을 통주저음(General bass)이며, 보통 쳄발로가 담당한다. 또 베이스 음표 아래나 위에 화성의 성격을 숫자나 기호로 지시하기 때문에 숫자붙은 베이스라고도 한다.3)장조와 단조의 조성체계확립후기 바화성으로 발전되면서, 그것은 화성적 체계의 단순화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장조와 단조의 조성이 hgkrflq되면서 중심을 둘러싼 특정의 기능 관계가 성립되었다. 바로크시대의 작곡가들은 정지적화음인 으뜸화음과 활동적인 화음인 딸림화음사이의 대립을 이용하여 음악을 형성해 나가는 원리를 터득하였다. 따라서 기본조로부터 대조적인조로갔다가 다시 기본조로 돌아오는 음직임은 음악적 구조의 형성에 중요한 원리가 된것이다. (예를 들면, 1-5-1,1-4-5-1)장조와 단조라는 조성의 확립과 함께 이루어진 중요한 기술적 진보는 , 근사치의 음정을 실용적으로 고르게 나눈 음률인 평균률이 이루어짐으로써 모든 장조와 단조를 건반악기로 연구할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평균률은 작곡가들이 이용할 수 있는 화성적 가능성의 범위를 넓혔으며, 요한 세바스챤바흐는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각각 12개의 장조와 12개의 단조로 된 전주곡과 푸가로 된 2권의 (평균률 클라비어곡집)을 작곡하였다. 따라서 장조와 단조의 조성체계는 평균률에 의하여 드디어 융통성 있는 표현수단이 된 것이다.4.대표적 작곡가1) Johann Sebastian Bach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바흐는 대략 17세기 초엽에서 시작되는 바로크음악의 총괄자라고 할 수 있다. 바흐는 오페라를 제외한 당시의 거의 모든 음악의 영역에 손을 대었고, 거기에 작품생활 초기부터 만년에 이르는 50년 동안 양식적, 내용적으로 현저한 발전을 보였다.대표적인 양식요소로는 긴장감이 높은 변화화성의 사용, 늠름한 에너지가 충만해 있는 동기나 선율의 구성, 밀도가 높은 폴리포니, 극도로 확대된 선율법, 정밀한 메트릭(박절법), 단일 또는 소수의 소재에 의한 전체의 통일 등을 현저한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다. 또한 색다른 표현매체의 이디엄 교환과 색다른 양식이나 형식의 융합도 바흐의 음악을 형성하는 두드러진 특색이다. 다음으로 바흐의 두드러진 특색으로 편곡, 개작, 패러디의 세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바흐는 비발디나 텔레만 등 다른 작곡가의 작품도 작품을 만드는 것으로 바흐의 경우는 교회음악에서 교회음악으로, 세속음악에서 교회음악으로 패러디하는 두 종류가 있으며, 교회음악을 세속음악으로 패러디하는 것은 현재까지 별로 발견되지 않고 있다.바흐는 음악의 의식적인 혁명가는 아니었지만 그의 음악에는 용해, 융합과정에서 몇 가지 새로운 요소가 싹트고 있었다. 그의 작품에는 다가오는 고전음악파의 기법을 암시하는 요소를 자주 볼 수 있는 것이다. 바흐의 성악곡에는 교회칸타타, 세속칸타타, 수난곡, 오라토리오, 미사, 마니피카트, 모테트, 가곡 등이 있는데 가장 수가 많은 것이 칸타타이다. 기악곡에는 관현악곡, 협주곡, 실내악곡, 건반악기곡이 있으며 어느 분야에서도 바로크 음악의 총결산이라고 할 수 있는 걸작들을 많이 남겼다. 그리고 말년의 과 은 바흐의 대위법 예술의 정점을 보여주는 대작으로 대부분이 악기를 지정하지 않은 추상적인 성격을 지니며 일반적으로는 특수작품이라 하여 별개로 분류된다.2) George Friederich Handel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오라토리오 ≪메시아≫로 널리 알려진 헨델은 그때까지 음악의 모든 요소를 기반으로 하나의 새로운 음악 세계를 비약시켰다는 평을 듣는다.헨델은 의 대성공으로 인해 오라토리오 작곡가로 알려지고 있으나 명성을 얻은 것은 오페라 때문이었다.헨델의 오페라 주제는 다양하다.역사적인 내용, 신화적, 낭만적인 내용, 그밖에도 마법이나 요술 등 초자연적인 내용을 다룬 오페라도 있다.오페라의 아리아와 레치타티보는 다른 작곡가들의 배열과 다르다.헨델은 오라토리오를 음악극(music drama)이라고 부를 정도로 오라토리오에서도 오페라와 같은 극음악의 특징을 강조하고 있다. 헨델의 오라토리오는 성서의 종교성을 강조한 내용보다도 영웅적인 인물 묘사나 역사적 사실을 다룬 내용들이 더욱 많다.헨델의 오라토리오는 음악 구성면에서 오페라보다 합창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헨델 자신은 루터파 개신교인이었지만 바흐와는 달리 그의 교회음악에는 코랄이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헨델의 관현악 작품들 .
영화 보고...처음 영화가 시작되면 과거 중국의 도박장의 풍경이 화면을 가득 메운다. 그 가운데에서 유난히도 눈에 띄는 사람, 바로 주인공인 부귀 역의 갈우다. 빼빼마른 몸에 빡빡깍은 머리, 참 볼품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도박장의 모든 이들은 그런 부귀를 상전 모시듯 떠받든다. 이 장면에서 이미 부귀와 그의 아내 가진의 비극은 시작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도박에 미쳐 집을 통째로 용이에게 빼앗겨 버린 부귀...집을 빼앗긴과 동시에 부귀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의 부인(가진)은 아이를 데리고 집을 나가버리고 아버지마저 돌아가시게 된다. 이미 삶의 희망을 잃어버린 부귀이지만, 고통은 사람을 성숙하게 만든다고 했던가? 그는 남은 노모를 모시고 열심히 일하며 살아가며 그런 부귀를 위해, 가진은 아이들을 데리고 다시 돌아온다. 이에 힘입은 부귀는 용이를 찾아가 돈을 구걸하고, 용이는 그런 부귀앞에 먼지투성이의 상자를 내어 놓는다. 마치 보물상자를 연상케 하는 낡은 나무 상자안에는 뜻밖에도 그림자 연극재료가 들어있다.부귀는 그림자극을 공연하던중 자신의 친구인 춘생과 함께 국민당의 포로로 잡히게 된다. 무지한 이 두 젊은이는 그렇게 삭막한 중국의 근 현대사를 몸소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오히려 무지하기에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이 두 젊은이 앞에 국공내전은 어찌보면 재미있기도 하다. 국민당이니 공산당이니 이들에게는 도대체가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국민당이든 공산당이는 그저 살려만 주면 되는 것이다. 우연찮게 공산군들 앞에서 벌어지는 그림자 연극. 비록 자동차 헤드라이트에 비춰지는 그림자 극일 지언정 이들 부귀와 춘생앞에 다시금 희망이 싹튼다. 영화의 전반에 걸쳐 가장 감동을 주는 장면을 꼽으라면 나는 이 장면을 꼽고 싶다. 중국의 근 현대사의 가장 큰 획이라 할 수 있는 1.국공내전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장예모 감독은 이렇게 웃음으로 포장해 관객에게 선물하고 있었다.국공내전에서 우연하게 혁명을 해버린 부귀는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때부터 영화는학교로 향하는 길에 "닭이 커서 거위가 되고, 거위가 커서 양이되고, 양이 커서 소가 된다". 라고 아들에게 이야기하는 부귀. 불도는 의아해 하며 묻는다. "그럼 소가 크면 뭐가 되나요?" "소 다음엔 공산주의지". 아무 생각도 없이 박통, 박통만세를 외치던 우리의 70년대가 떠올라 자조할 수 밖에 없는 대사다. 험난한 대약진 운동을 해쳐 나가는 그들에게 공산주의만큼 절실한 것이 있었을까? 이미 그들에게 있어 공산주의는 사상을 넘어 종교이다.이런 행복한 모습도 잠시, 불도는 구장의 차에 죽음을 맞이하고 아들을 잃은 슬픔에 오열하는 부부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구장 춘생. 운전을 좋아해 공산당의 운전병으로 혁명에 참가한 춘생은 구장이라는 직책에 올라 있었고, 아이러니 하게도 친형과 같은 부귀의 아들을 죽여버린 것이다. 사람 목숨을 빚진체 살아가는 춘생. 아들은 잃어 버린 부귀와 가진. 앞으로 일어날 현실의 풍파 앞에 이 사건은 또 어떤 사건을 불러일으키게 될지.다시 화면은 60년대로 넘어간다. 이제 장성해버린 딸 봉화는 절름발이 기술자 만이희와 결혼을 하게 되고, 아무것도 모른체 즐겁게 모택동 동지 만세를 외치는 이들을 보며, "이 행복은 또 얼마나 갈까?" 하고 생각해 본다. 이제 모든 고통의 순간을 이겨냈다고 생각하며 행복한 결말을 기대하고 있을 두 주인공들에게 장예모 감독은 혹독한 마지막 시련을 준다. 이것이 바로 훗날 천안문 사태로까지 이어지는 문혁, 즉 3.문화대혁명이다. 그동안 마을을 지도해 오던 읍장과 이름있는 사람들은 모두 주자파로 몰리게 되고, 이 문혁의 바람앞에 춘생도 예외일 수는 없다. 해산을 위해 병원을 찾은 봉화는 문화 대혁명으로 인해 의사도 없이 출산을 하게 되고 결국 과다출혈로 숨지게 된다.영화의 마지막. 40여년에 걸친 인생의 풍파를 헤쳐온 노 부부에게 혼자된 사위와 어린 손자녀석은 삶의 전부이다. 밝은 미래를 예견이라도 하듯 병아리를 한아름 안고 등장하는 손자와 병아리의 집을 마련해 주기위해 다시금 잊고 있었던 그림자 연극 상장를 꺼내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보이는 부귀에게도 하나 재주가 있었으니 바로 그림자 연극에서 기타와 같은 악기를 들고 노래를 부를는 재주이다. 영화의 초반부에 도박장에서 그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하여 도박장의 모든 이들에게 박수갈채를 받아내던 부귀의 모습에서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볼 수 있다. 그림자 연극. 그것은 천으로 앞을 가리고 뒤에서 불빛을 비추어야만 그 그림자로 생겨나는 연극이다. 결국 연극의 실체는 그림자인 것이다. 분명 눈에는 보이지만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실체가 없는 그리자가 바로 실체인 것이다. 보물상자안의 그림자 연극재료를 등장시켜 관객으로 하여금 일말의 희망을 심어준 장예모 감독, 하지만 그런 관객의 기대를 비웃기라도 하듯, 이야기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떨어진다. 부귀의 그림자 연극 천막을 불쑥 뚫고 들어오는 번뜩이는 물건. 그간 현실을 잊고있던 영화에 국공내전이 멋지게 등장하는 장면이다. 환상으로 가득찬 그림자 연극의 천막 안으로 현실의 칼날이 비집고 들어와 헤집어 놓음 으로써 관객은 다시한번 부귀의 험난한 미래를 예상하게 된다.두 번째로 재미있던 것은 아주 중요한 순간에 등장했던 만두이다. 먼저 아들 불도의 죽음에서도 만두가 등장했었다. 가진은 항상 힘들어도 웃음을 잃지않는 아들을 위해 20개의 만두를 싸주었고, 결국 먹지도 못하고 죽어버린 아들의 주검 앞에 새로이 만두를 바친다. 이처럼 봉화의 죽음에서도 만두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데. 어렵사리 모셔온 의사선생에게 부귀는 만두를 선물한다. 주자파로 몰려 3일을 굶은 이 의사선생에게 만두를 선물하고 딸을 좀 부탁한다고 말하는 부귀를 보면서 왠지 모를 초조함을 느끼게 되는데, 아니나 다를까? 의사는 만두를 먹고 체하게 되고, 다시 물을 먹여 진정시는 부귀. 하지만 곧 의사는 복통을 일으키고, 손 한번 써 보지 못한체 딸의 죽음을 바라 보기만 해야하는 불쌍한 부귀. "결국 또 일 저질렀구만." 탄식이 절로 나온다. 왜 하필 만두였을까? 좋은날 기쁜날, 경사스러운날 해먹는 만두. 하지만 영화에서 만두운 시장개척의 필요성에서 일본이 가졌던 중국내의 이권을 자신들이 가지기를 원했고, 또한 아시아에서 공산주의 세력의 확장을 바라지 않았으므로 국민당을 지지, 내전이 일어나는데 한 몫을 담당했다. 그리고 공산주의 세력을 대표하는 소련 역시, 코민테른을 통해 중국 공산당에게 많은 지령을 내리고, 경제적으로 후원하는 등 많은 활동을 하고 있었다. 또한 서서히 고조되어가는 세계의 냉전의 분위기는 국민당이 정전협정 이후에 공산당을 공격하는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2)전개일본이 패망한 1945년 8월 이후, 국민당과 공산당은 내전에 곧바로 돌입하게 된다. 물론 모택동과 장개석이 참여하는 中京交涉이 열리기는 하였지만, 그 것과는 별도로 각처에서 양당간의 전투는 산발적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1946년 1월 국-공 양당간의 정전협정이 미국의 중재로 이루어지긴 하였으나, 국민당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7월 공산당에 대한 동북 지역 총공세에 나서게 된다. 이후 1947년 초까지는 어느정도 국민당의 우세로 전투가 진행되었으나, 수많은 군사적-정치적 요인들로 인해 서서히 전세는 바뀌기 시작하여 1947년 5월에는 공산당의 전면적인 반격이 진행되고, 48년 9월 제남-평진등에서의 국민당 주력군의 패배로 사실상 공산당의 승리가 확정되었다.3)결과49년 초에 장개석과 국민당 지도부는 패배를 인정, 재빨리 대만으로 후퇴하게 되고, 1949년 10월 1일, 중국공산당은 모택동을 영도로 하여 천안문 광장에서 사회주의체제국가인 “ 中華人民共和國”의 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했다. 그리고 수도를 북평으로 하되 이름을 북경으로 고치었으며, 오성홍기를 국기로 정하였다.4)국민당(國民黨)의 패배 원인1. 戰略의 허술국민당군은 한 곳에 군사력을 집중시키기보다는, 보다 넓은 지역에 군사력을 분산시켜 배치하는 경향이 있었다. 한 번에 너무나 많은 지역을 점령하려는 국민당의 이런 의도는, 전장에서 국민당군에 공산군을 만났을 때, 언제나 전력에 있어 열세를 면치못하는 결과를 낳게 했다. 일명 것선을 길게 장악하고 점마찬가지였다. 또한 지방군의 군인들은 중앙군과 비교하여 자신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였고, 중앙당국이 그들을 공산군과 싸우게 하여 그들을 쓸어 없애고자 본거지 省을 떠나 싸우게 했다고 믿을 정도였다. 이러한 중앙과 지방간의 괴리는 사기를 저하시켜 지방군의 공산당으로의 투항을 촉진시켰으며 계속적인 패배를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5)공산당(共産黨)의 승리요인1. 군사적인 면에서의 압도공산당은 절대로 전투에서 서두르는 법이 없었고, 불리하다고 생각이 될 때는 언제든지 철수하는 융통성을 보였다. 국민당의 군대가 관료적인 면이 강했던 것과 비교해 본다면 정반대의 특징이었다. 그리고 공산당은 지역을 점령당하더라도 개의치 않고, 오히려 그 점령으로 인해 국민당의 군사력이 분산되는 것을 기다리는 전술을 썼다. 1948년 중반 공산당의 총공세에서 국민당이 참패할 수 밖에 없었던 것도 이러한 전술에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좀더 세밀하게 군사적인 면을 들여다 본다면 첩보활동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공산군은 국민당군의 주둔지 어디든 첩보망을 심어놓아서 국민당의 움직임을 언제든지 파악하고 있었고, 심지어는 공산당의 첩자가 국민당군의 최고위층이 되어 공산당에게 크게 이익을 준 적도 있었다. 또한 승급과 강등을 철저히 전공에 따라 하였기 때문에 관료주의에 물들어 있는 국민당군과 비교해서 월등한 사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2. 알맞은 정책들의 제시공산당은 국공내전중 토지정책을 발표함으로서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성공하였다. 일본이 항복한 후 국민당과 공산당과의 적대가 심화되었을 때 공산당은 지주가 국민당 반동파와 결합하고 것농민이 절실히 토지를 요구한다겄라는 사실에 부흥하여 기존의 소비에트 내의 토지개혁을 정지하고 것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에게 분배하는겄 토지정책으로 전환하였다. 1946년의 것5.4지령겄이나 1947년 9월에 발표된 것토지법 대강겄등에서 나타난 이러한 공산당의 정책전환은 공산당 자치지구뿐만 아니라 경제정책에 실패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던 국민당 대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