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막 안의 감시자, 현대판 Big brother 은 누구인가 ?( ‘ 감시와 처벌 ’ 을 읽고 )2003 - 13269 윤 동 현1 . 머리말‘ 1984 ’ 라는 책에서 조지 오웰은 자신의 감정과 사상이 철저히 통제당하는 삭막한 사회를 그리고 있었다. 사회 구석구석이 보이지 않는 스크린에 의해서 조종당하는 사회. 특히 이 작품은 독재적인 지배 권력이 전체주의적인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개인들을 어떻게 억압하며, 감시하고, 처벌하는지를 소름끼치도록 세세히 묘사하고 있다. 1부에서는, 「당」이 사회통제를 위해 개개인의 행동 하나하나를 철저히 감시하는 것과, 사람들로부터 증오심과 공포심을 유발시켜 이를 체제유지에 필요한 에너지로 사용하는 것들을, 3부에서는「당」에 충성하는 인간을 만들기 위하여 한 개인의 의식을 개조해 가는 과정과,「당」이 가지고 있는 권력의 실체를 연결하여 보여주고 있다. 보이지 않는 권력에 의해서 개인은 결국 그들이 의도하는 바에 따라 조종당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 곳에서 나오는 빅브라더의 ‘ 보이지 않는 지배 ’ 가 이번 주 읽기 과제였던 푸코가 해석했던 ‘ 판옵티콘 ’ 의 우울한 실체가 아닐까? 살아가다 보면 언제나 단조로운 하루의 생활이 견딜 수 없을 만큼 답답하게 느껴진 적이 있을 것이다.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리는 듯한 단조로운 생활. 이러한 생활 속에서 우리 하나하나는 잘 돌아가기 위한 톱니바퀴에 끼워진 하나의 톱니로 만들어지고 있다. 톱니의 역할을 위해 교육받고, 시험보고, 기록되고, 조여진다. 우리는 자유나 평등 같은 관념적 개념으로 개인화 된 것처럼 만들어 놓는 그 교활함, 점차 강해지는 우리 같지만, 모든 것의 계획대로 하나씩 조립의 그날까지 만들어지고 있다. 작용하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볼 수 없다는 것은 얼마나 큰 공포를 자아내는지....... 푸코의 책을 읽고 나니 과연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이 정말 주체적인 것인지, 그것이 진정한 나의 선택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는지, 나의 실존에 대한 질문에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다. 처벌은 복수가 아니라 예방적, 교정적 성격을 갖는다. 이러한 사법체계의 그물망에 의해 권력은 보다 효율적으로 개체들을 통제하게 된다. 푸코는 이러한 처벌제도의 변화가 처벌에 대한 개선으로 이해되기보다는 더 잘 처벌하기 위한 것이며, 육체에 대한 가혹하고 직접적인 처벌이 ‘사법적 감금’으로 그 형태가 바뀐 것으로 본다.푸코는 18세기 후반에 감옥제도가 만들어지고 그것이 일반화되면서 보다 조직적으로 체계적으로 규율적인 사회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주목한다. 그는 감옥제도를 규율적 권력이 행사되는 전형적인 예로 보면서 이런 권력이 사회 전체에 침투해서 현대 사회를 규율적인 권력이 작용하는 사회로 만들어간다고 본다. 푸코는 이러한 매커니즘이 인간의 육체에 작용한다고 본다. 그리고 권력이 육체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를 특정한 목적에 맞도록 만들어내는 점에 주목한다. 즉 권력은 육체를 길들이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미시권력이라고 부른다.규율은 육체에 작용한다. 그것을 통해 규율은 개인들을 만든다. 이것은 개인들을 그 작용 대상으로서 뿐만 아니라 수단으로 간주하는 권력의 특수한 기술이다. 이때 개인들은 권력의 매개자일 뿐 그 주체가 아니다. 권력은 개인들을 억누르거나 금지하지 않고 훈련과 배분의 절차에 의해 그렇게 한다. 이러한 육체에 대한 권력의 작용을 통해 사회의 다양한 영역들 - 군대, 감옥, 병원, 학교-에서 규율이 생산, 수행되는 일정한 방식들에 주목한다. 규율은 개인들을 통제하고, 훈련시키며, 조직하는 기술을 통해 작용한다. 이때 개인의 육체는 경제적으로는 노동력을 지닌 대상이며 정치적으로는 복종할 수 있도록 훈련받는다. 이러한 규율은 개체들을 통제 가능한 공간에 배치하고, 활동을 통제하고, 훈련시키며, 개인들을 조직하는 기술을 통해 작용한다.이러한 기술 중 가장 이상적 모델은 일망감시장치 ( pan-opticon ) 이다. 벤담에 의해 1791년 제안된 이 장치는 내부에는 높은 중앙 탑이 있고 그 주변에는 원형으로 배치된 독방들이 있다. 중앙 탑에서는 선이 항상 자신을 보고 있다고 여기게 된다. 이러한 건축물은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으로부터 독립된 권력관계를 만들어내는 기계장치이다. 개체들은 자기 안에 권력의 감시하는 눈을 갖게 된다. 그들은 권력 관계를 내면화하여 스스로를 관찰하고 감시한다. 그들은 권력의 기준을 자기 자신의 기준으로 삼는다. 이때의 개인들은 철저하게 주체가 아닌 객체로써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이러한 감시장치는 감옥의 체계에 한정되지 않고 일반적인 감시 장치로 다양한 대상에 대해 이용될 수 있다. 이 장치는 그것에 어떠한 내용을 담더라도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이 장치는 광인, 환자, 죄수, 노동자, 학생 등 모든 개체를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어떤 경우에도 그 효과가 동일하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갇힌 자가 어린이라면 교육적 효과를 높일 수 있고, 노동자라면 작업을 효율적으로 진행시킬 것이다. 이처럼 이 장치는 다양하게 이용될 수 있으므로 이것을 일정한 수의 개인들을 감시하는 모든 시설에 적용할 수 있다. 그것은 죄수를 교화하는 효과, 병자를 간호하고 학생을 교육하며 광인을 가두고 노동자를 감시하거나 태만한 자들을 일하게 만드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이것은 공간 속의 신체 배치, 서로 관계를 맺는 개인들의 분배들을 결정하는 유형이 될 수 있는 것이다.푸코는 일망감시장치가 권력을 자동적인 것으로 만들고 비인격적인 것으로 만드는 점에도 주목한다. 이러한 권력은 비주체적이다. 이 권력의 근원은 특정한 인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권력 효과를 낳는 장치의 기능에 있다. 여기에서 누가 권력을 행사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누구라도 이 장치를 작동시킬 수 있다. 그것은 일정한 목표에 따라서 기능하지만 주체와 무관하게 작용한다.그러면 이 장치가 어떤 사회적 이익을 줄 수 있는가? 또는 이런 감시망이 어떤 이유로 정당화되는가? 벤담의 모델은 사회적 공리를 최대화하는 하나의 전략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일망감시장치 같은 기술을 보다 경제적이고 효율적으로 사용한다면 사회 전체의 있으며, 그 방식은 가장 신중하고 다른 기능과 밀접한 연결을 맺는다. 위계질서적 감시와 판단 같은 익명적 수단으로 집단을 조직한다. 결국 권력은 그 모습을 화려하게 드러내지 않으면서 권력이 작용하는 대상을 교묘한 방식으로 객관화한다. 요컨대 규율은 집단 다수의 유용성을 증대시키고 다수를 유용하게 만들기 위한 세밀한 기술적 고안의 집합체이다.또한 푸코는 규율적 감시를 설명하면서 이러한 감시의 체계화와 전문적인 요구로 사회과학이라는 탄생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인간의 심리나 사회구조, 인간 등을 분석함에 있어서 사회과학은 일정한 목적의 테두리 안에 가두어져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푸코의 관점으로 볼 때 지식은 인식하는 주체 속에서 자생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권력이 인간에게 투입되고 인간관계 속에서 형성된 것이라면, 인간을 연구하는 학문은 그 권력 속에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3 . 푸코의 관점에서 바라본 조지 오웰의 ‘ 1984 ’① 감시의 측면보통 억압적인 권력일수록 권력 자체의 정당성에 회의를 일으키기 마련이다. 반대로 정당성에 도전을 받는 권력은 그것을 억누르기 위해 억압적인 성격을 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전체주의 사회, 혹은 독재권력이 지배하는 사회는 그 정당성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을 회피할 수 없다. 그러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가장 편의적인 방법은 억압이다. 강력한 공권력을 바탕으로 개개인의 자유와 행동을 제한하고, 체제 거부적인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철저한 감시와 잔인한 처벌로서 사회 구성원들을 길들여 가는 것이다.‘ 1984 ’ 는 미래사회를 배경으로 하는 만큼 텔레스크린과 마이크로 폰이라는 독특한 감시체계를 등장시키고 있다. 각각 감시 카메라와 도청장치 역할을 하는 이것은 사무실, 집, 거리, 심지어는 화장실에도 설치되어 있어, 개인의 사생활이라는 것이 감시의 눈을 벗어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역설적 상황을 보여준다. 이것은 지배권력이 강제하는 여러 행위들을 각 구성원들이 잘 수행하고 있는가를 파악하기 위한 가장 직접적인 방법이다. 이 기억되어 있으면서도 필요에 따라 살인을 저지르는 상반된 행동이 범죄자들에게 보이는 것처럼, 법과 교화만으론 사회가 원하는 순응적 행동을 이끌어 내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지배권력에게 새롭게 선택되어진 사회통제 방법이 바로 감시라는 것이다.물론 이러한 감시는 텔레스크린같은 종류가 아닌 바로 사람과 사람에 의해 발생 ? 유지된다. ‘ 1984 ’ 에서처럼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직접 감시하는 것을, 푸코는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그에 의하면, 감시의 형태는 크게, 상급자의 하급자에 대한 직접감시와, 개인의 신상기록을 바탕으로 한 간접감시로 나눌 수 있다. 전자의 예로는, 학교 교실에서의 교사에 의한 학생통제를, 후자의 예로는 ( 특히 거대 )기업에서의 사원에 대한 통제를 들 수 있다. 사회조직이 수없이 세분화되고, 복잡해진 현대사회를 통제하는 데에는 개인에 대한 직접적인 억압보다,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장악하고 통제하는 것이 더욱 효율적이라는 말이다.하지만 결론적으로 살펴보았을 때, 보이지 않는 어떠한 권력에 의해서 개인의 삶들이 교묘히 조정당한다는 사실, 개인이 주체성을 잃어버리고 단순한 지배의 객체로 전락해버렸다는 사실은 조지 오웰과 미셜 푸코 모두 동의하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② 처벌의 측면앞서 말한 감시체계와 사상통제는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 선행되야지만 자신의 존재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즉, ‘ 1984 ’ 에서 독재권력으로 묘사되는 당이 개인에게 직접적으로 가하는 처벌이 있어야지만 개인들이 두려움을 가지고 당의 명령에 복종한다는 얘기이다.감시와 처벌에서 푸코는 서구 근대사회의 형벌제도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서술하고 있다. 중세시대에의 처벌은 몸에 대한 직접적인 가해가 주를 이루고 있다. 푸코에 의하면, 능지처참, 효수, 낙인찍기 등 몸에 대한 형벌을 공개처형식으로 대중에게 보여주고, 그 상황을 통해 대중들에게 공포감과 지배권력에 대한 두려움을 유발시켜 사회질서에 순응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처벌방식이,한다.
소유와 경영의 분리, 재벌 경영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을까 ?2003 - 13269 윤 동 현1 . 머리말지금까지 우리들은 분배의 문제에 대해서, 여러 가지 논의들을 계속했다. ‘ 동일한 경우에 동일하게 대우해야 한다. ’ 라는 분배의 정의에서부터, 부당한 분배인 외부효과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코스의 정의, 그리고 최소한의 인간적인 생활도 영위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사회적 자원을 좀 더 호의적으로 분배하고자 하는 복지주의적 이론에까지 모두 사회적 자원의 배분 문제와 관련되어 있었다. 이번 주 읽기 자료 역시 분배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부당한 경영에 의해서 소액주들의 재산권이 부당하게 침해되는 사실은 결국 그들이 주주로서 받아야 될 기업의 이익이 그 기업의 최대주주에 의해서 부당하게 왜곡된다는 문제이기 때문에 분배적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재벌은 이러한 측면에서 항상 비판받았다. IMF에 의한 빈부격차 증가 및 계열 기업간의 복잡한 순환 출자 및 피라미드식 경영구조는 소수의 대주주가 거대한 기업을 부당하게 지배하는 것을 손쉽게 했다. 이에 의해 발생한 소유권과 통제권의 괴리는 기업의 경영을 소수주주들에게 일방적으로 분리한 경향으로 몰고 갈 가능성이 다분하다. 책에서 지적된 국내 기업들의 여러 가지 사례들만 보더라도, 그러한 의심이 단지 ‘ 가능성 ’ 의 문제로 끝나지만은 않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전문 기업인에 의한 소유와 경영의 분리가 재벌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방책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2 . 소유와 경영 분리의 장점소유와 경영이 분리되면 우선 기업의 발전에 필요한 전문적 지식이나 경험, 품성을 갖춘 경영자를 활용할 수 있게 된다. 비록 기업의 창업자가 거대기업을 형성했을 때에는 과정이야 어떠했든 상당한 자질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으나 기업자산의 경영자를 직계자손 내에서만 선출한다면, 직계자손을 포함하여 많은 전문경영인 중에서 선출하는 것보다 성공확률은 낮아지게 된다. 즉 소유와 경영의 비분리는 기업이 건전하게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희박하게 하는 것이다. 둘째로, 개인 또는 가계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규모의 사업은 다수의 주주로부터 자금을 조달함으로써 효율적 규모의 사업을 전개할 수 있다. 이런 경우 다수의 주주 모두가 경영에 참여하기보다는 전문경영자에게 회사의 경영을 위임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셋째로 전문경영자는 생산기술, 원재료와 노동시장, 제품시장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저렴한 비용으로 수집할 수 있다. 따라서 주주들은 이런 정보를 개별적으로 비용을 들여 수집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직접 기업을 경영하는 주주가 자신의 지분을 다른 사람에게 양도할 경우, 주주가 갖고 있던 주식의 이전은 가능하지만 경영상의 노하우, 평판, 전문기술 등을 제대로 이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별도의 전문경영자가 기업을 경영할 경우 주주가 주식을 이전한다 하더라도, 기업은 계속 존속하게 되고 노하우나 평판, 전문기술의 축적이 이루어지게 된다.3 . 소유와 경영 분리의 단점하지만 이러한 소유와 경영의 분리가 재벌의 문제점을 완전히 해결하리라는 신념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운영자가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최선을 다해줄 것으로 기대하는 기업소유자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경영자 사이에 이해관계의 마찰이 존재할 수 있다. 영어 본문 The Managerialists 부분에서 나온 바와 같이 기업 경영자들은 기업의 최대 이익을 추구하는 것 보다 기업의 크기적 성장만을 비효율적으로 추구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이 뿐만이 아니다. 젠슨과 멕클링의 이론에 의하면 경영자가 기업을 운영하면서 가지게 되는 이익은 기업가치 상승에 따른 이익과 회사자원의 사적 사용에 의한 이익으로 나눌 수 있다고 했다. 이때 경영자의 소유 주식량이 그다지 크지 않을 경우, 그는 보다 적게 일하고 더 많은 낭비적 소비를 행하기 위해서 노력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주식을 100% 소유하지 않고 일부만을 소유함으로써 낭비적 지출의 일부만을 부담하고 그 효용의 100%를 즐길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소유와 경영의 분리의 문제점 중 또 다른 하나는 바로 정보의 비대칭일 것이다. 정보비대칭이란 경영자가 갖고 있는 정보와 투자자가 가지고 있는 정보의 양과 질이 차이를 보이는 상황을 말한다. 정보의 비대칭에 대한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어떤 기업의 주식이 현재 주당 10,000원에 거래되고 있다. 그러나 이 기업의 경영자들은 비밀리에 추진해 왔던 신제품개발이 성공적으로 완료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경영자들은 이 신제품개발의 정보를 자본시장이 알게 되면 주가는 15,000원으로 상승하여야 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은 정보비대칭의 전형적인 경우이다. 경영자들은 신제품개발의 정보를 알고 있고 자본시장의 주주들은 그 정보를 모르고 있으므로, 정보의 배분에 있어 경영자와 주주들은 비대칭적 관계에 놓여 있다. 이러한 경우 경영자들은 자회사 주식을 매입함으로서 과도한 이익을 챙길 수 있을 것이다.정보비대칭 현상에서는 역선택의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 구매자들이 상품의 품질에 대하여 충분한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할 경우 좋은 상품과 나쁜 상품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상품의 가격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하는 문제를 역선택의 문제라고 한다. 역선택의 문제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로서 은행의 대출결정을 들 수 있다. 만일 은행이 기업들의 신용상태에 대하여 아무런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하고 기업들만이 자신의 신용상태를 잘 알고 있을 경우, 은행은 미래의 채무불이행을 우려하여 모든 기업들에게 높은 금리를 매기려 할 것이다. 그런 경우 신용상태가 건실한 기업들은 높은 금리로 돈을 빌려서 사업하지 않고 신용상태가 나쁜 기업들만이 높은 금리라도 돈을 빌려서 사업하려 할 것이다. 결국 이러한 정보비대칭하에서 대출금리가 신용상태를 반영하여 결정되지 못하고 금융시장은 위축하게 될 것이다. 결국 이러한 정보비대칭 하에서 대출금리가 신용상태를 반영하여 결정되지 못하고 금융시장은 위축하게 될 수 있다.
이단의 흐름을 쫒아서 함께 한 1000년의 역사‘ 동방기독교와 동서문명 ’ 을 읽고2003 - 13269 윤 동 현과거부터, 어떠한 문제에 대한 다수와 소수의 의견 대립은 흔히 발생했던 사회적 문제 중 하나였다. 이러한 갈등 상황에 있어서 다수와 소수의 의견을 종합, 가장 균형적인 결론을 도출해내는 것은 누구라도 인정할 수 있는 사회적 옳음이었고, 인간이 추구해 온 정의의 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 이상적인 사회가 손쉽게 이루어졌던가? 과거는 물론이고 현재까지도 다수결의 우위를 앞세운 중우정치가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냉혹한 현실이 아닐까? 소수의 이익을 보호해주기 보다는 다수의 강압적 논리로 소수의 이익을 묵살하고 다수의 의견을 강압적으로 적용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현재 우리들 ‘ 다수 ’ 들의 입장인 듯싶다. 여전히 만연하고 있는 성적 소수자에 대한 편견, 동남아시아 인부들에 대한 착취, 장애인들에 대한 무관심 등이 모두 소수자에게 다수의 기준을 강조하는 잘못된 현상, 다수의 소수에 대한 폭력이라고 생각된다. 이번 기회에 읽은 김호동 교수의 ‘ 동방기독교와 동서문명 ’ 의 주제는 이와 같이 배척당하고, 억압받았던 기독교의 ‘ 이단 ’ 들이 중심이 된 이야기였다. 즉 중앙아시아라는 ‘ 변방 ’ 지역을 주무대로 한 이단 기독교도들의 발생, 융성 및 쇠퇴의 역사가 방대한 자료와 유려한 문장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 과연 서구 기독교 문명만이 처음부터, 그리고 언제까지나 정통이고 그 나머지는 변방과 이단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 라는, 지금까지는 너무나 당연하게만 느껴졌던 물음이 제기될 정도로, 종교적 소수자인 네스토리우스교가 겪어야 했던 정치적 탄압 및 그들의 1000년의 역사가 한편으로 안타까웠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흥미로웠다.이 책의 내용들은 대부분 나에게는 낯익은 이야기가 아니었다. 서양하면 기독교, 동양하면 유교와 불교를 떠올렸던 그런 편협한 지식으로는 동방의 ‘ 기독교 ’ 라는 주제 자체가 생소했다. 그렇기 때문에 많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 책들의 흥미진진한, 대서사시와도 같은 광범위한 역사 ( 유럽에서 아시아를 연결하는 네스토리우스교도들의 광범위한 역사 ) 는 손에서 책을 놓을 수 없을 정도로 인상 깊었다. 사람은 누구나 어떠한 배울 점, 또는 공감할 수 있는 점을 책에서 찾을 수 있을 때, 그 책에 매료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고난과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들의 신념을 굳게 지키며 동방으로의 순례를 멈추지 않았던 그들의 결의는, 이 책을 단순한 역사적 지식의 습득을 위한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현대인들이 가져야 할 하나의 덕목을 제시함으로서 철학서적 가치를 가진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내가 따분하게 느껴질 지도 모르는 이 책을 정독하게 만든 힘이 아니었나 싶다.이 책은 크게 4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저자는 이러한 구성을 통해서, 동방의 기독교의 전파과정과 번영, 그리고 그것의 쇠퇴를 차근차근 묘사했다. 이 책의 첫 장 ‘ 사제왕 요한 ’ 은 유럽인들이 동방의 기독교 문화에 대한 전설을 믿게 된 배경부터 그런 과장된 전설이 생겨나게 된 근원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었다. 십자군 전쟁의 전황이 갈수록 악화되어가던 12세기 중반, 기독교 진영의 사기를 고조시켜 줄 만한 새로운 소식이 서구사회에 퍼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저 머나먼 동방에서 거대한 기독교 제국을 다스리고 있는 사제왕 요한이라는 사람이 곧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진격, 이슬람을 공격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소문이 자연적으로, 또한 다분히 의도적으로 전 서구 유럽에 전파되게 되면서 그들은 이슬람 세력의 격파를 위한 새로운 힘을 충전할 수 있었고, 또한 하루 빨리 사제왕 요한이 나타나 저 사악한 이슬람 세력을 성지에서 몰아내 줄 것을 기대했다.하지만 저자의 설명에 의하면 그러한 소문은 정말 ‘ 소문 ’ 에 불과한 것이었다. 물론 중앙아시아에는 기독교를 신봉하거나 적어도 기독교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 유목민족들이 존재했다. 하지만 역사적인 사료로 보았을 때, 그 세력을 일망타진할 정도로 강대한 제국은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적극적으로 이슬람을 공격하여, 성지를 회복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도 않았다. 저자에 따르면 서구인들이 거대한 제국이라고 믿었던 사제왕 요한의 나라는 금에 패배한 용의 잔존 세력인 서요였고, 이슬람세력과의 전투는 그들이 서쪽으로 도주하던 도중에 셀주크 투르크의 군대를 케타완 전투에서 격파한 것을 과장해서 전달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고 했다. 결국 사제왕 요한의 나라는 ‘ 황금의 나라 ’ 라고 여겨졌던 동방에 대한 또 다른 환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소문을 단지 허무맹랑한 오해로만 파악할 수는 없다. 이러한 서구인들의 동방에 대한 인식은 결국 동양에 대한 호기심을 증폭시켰고, 동서 문명의 활발한 교류를 촉진시켰던 것이다. 이 수업이 동서 문명의 교류를 역사적 관점에서 탐방하는 것이니 만큼, 이것이 비록 허무맹랑한 이해일지라도 이것이 동서 문명의 교류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두 번째 장, ‘ 동방으로 ’에서 저자는 사제왕 요한의 전설을 낳은 기독교 종파가, 정통 서유럽 기독교 사상이 아닌, 네스토리우스교였다는 사실을 밝힌다. 이 부분은 내가 기존의 알고 있던 세계사적 지식이 처음으로 언급된 부분이여서 더욱 흥미가 갔다. 네스토리우스교는 정통 서유럽의 기독교 사상이 아니었다. 아나타시아와의 교리 충돌로 인한 파문은 네스토리우스교의 유럽 포교를 불가능하게 했고, 결국 그들은 그들의 활동 무대를 동방으로 옮겨야만 했던 것이다. 삭막한 사막 환경과 정치적인 탄압, 그리고 박해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페르시아의 군주 야즈데게르드의 박해와 그로 인한 15만 명 이상의 순교자 수는 그들이 겪어야만 했던 고통을 단적으로 보여준 예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 동방으로 ’ 에서 그들은 이런 고통과 수난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순례를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의 신념을 동양 문화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당나라에까지 유입시킨 것이다. 하지만 포교의 용이를 위해 도입 변질 종교로밖에 인식하지 못하게 만들었고, 결국 당 말기의 정치적 혼란을 끝으로 중국에서의 네스토리우스교는 자취를 감추었다고 저자는 말한다.그러나 중앙아시아에서의 동방 기독교 세력은 아직 건재했다. 제 3장 ‘ 초원의 십자가 ’ 와 제 4장 ‘ 꺼져 가는 불꽃 ’ 은 바로 중앙아시아에서 번성했던 동방 기독교 세력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있었다. 우선 제 3장에서는 사제왕 요한 이야기의 기본 모델이 된 웅그트 부족에 대한 이야기부터, 기독교를 보호하면서 대제국을 이루었던 몽골제국에 대한 이야기까지, 다양한 기독교의 모습들이 책을 통해 소개되었다. 특히 몽골제국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적 문화들은 상상하기 어려운 것들이었기 때문에 더욱 흥미로웠다. 제 4장에서는 이러한 동방 기독교 문명의 전설이 전설로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었다. 저자는 이 부분에서 중앙아시아에서의 동방 기독교 문화의 쇠퇴 이유를 4가지로 들었다. 첫째 원 제국이 라마교를 신봉하게 되면서 기독교의 지위가 점차 낮아지게 되었고, 둘째 원을 몰아낸 명의 유교적 복고주의 정책이 중국 내의 기독교 기반을 무너뜨렸으며, 셋째 일 칸국의 이슬람적 영향력이 강해지면서 기독교의 세력을 약화시켰고, 마지막으로 흑사병의 창궐로 간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신앙 공동체 자체를 소멸시켰을 뿐만 아니라 육로를 통한 동서 교류를 마비시켜 그들의 경제적인 기반마저 없애 버렸다는 것이 그것들이었다.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이 책은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소재를 다룬 책이 아니었다. 현재의 다수를 점하고 있는 서구의 정통 기독교와 배치되는 동방 기독교의 역사를 재조명했다는 것에서 우선 이 책의 의의를 찾고 싶다. 우리는 역사를 바라보면서 너무나도 쉽게 동양과 서양을 가르고 이곳과 저곳의 역사를 가르며 주류와 비주류의 문화를 가른 채 주류의 문화만을 추구해 왔다. 하지만 문화라는 유기체적인 산물을 단순히 이분법적 사고만으로 분류해, 하나만을 쫒는 행위는 절대로 바람직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첫 번째 수업시간에 자체가 유럽 문화권이라는 하나의 가치를 기준으로 세계를 양분한 이분법적 사고인 것이다. 모든 것을 양분하여 하나만을 추구하는 비균형적인 관점을 버리고 조화롭게 세계를 인식하는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 소수의 문화 역시 다수의 문화와 마찬가지로 그 나름대로의 논리와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볼 때 다수의 문화에 관심을 가지는 것 만큼 소수의 문화에 관심을 가지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음으로서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주체적인 역사인으로서의 실크로드 유목민족들을 체험할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중앙아시아에 대한 역사적 지식도 없었거니와 고등학교 교과시간에 배웠던 중국사에 등장하는 부정적인 유목민족들의 모습 때문에 유목민족들에 대한 나의 견해는 대단히 부정적이었다. 내가 생각했을 때 유목민족들은 ‘ 발달된 문화를 향유하지 못한 채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는 야만적인 부족들, 또는 무력을 통한 약탈로 생계를 유지한 무질서한 민족들 ’ 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이번 독서과제를 계기로 완전히 바뀌었다. 유목민족들도 그들 나름대로의 문화와 관습을 가지고 생활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인식했기 때문이다. 서방으로부터 전래된 동방 기독교 문명을 수용하고 그것을 표현하는 모습, 그리고 그것을 중국 및 동방으로 전파하는 그들의 자세는 다른 여느 민족들과 다를 바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동방 기독교라는 하나의 매체를 통해 서양과 동양의 문화를 연결해 주는 전령사적 구실을 했다. 하나의 문화를 주체적으로 수용한 뒤 그것을 다른 곳으로 전파하는 일이 역사적으로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 본다면 내가 이전에 가졌던 이런 생각이야 말로 근거 없는 편견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객관적인근거를 바탕으로 한 분석이 아니라 편견과 선입관을 바탕이었기 때문이다. 실크로드와 중앙아시아, 그리고 유목 민족들은 단순히 동서 문명을 연결해 주었던 객관적인 환경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문화를 전파하며 향유한 존재였다는 것을 확실히 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