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에서 배운 사람을 잘 움직이는 법』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사람을 움직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사람의 마음까지 옮겨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대에는 그만큼의 이익도 따르지만 수많은 난관에 처하게 됨은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을 움직이는 방법을 중국의 고서인 사마천의 에 ≪사기≫나와있는 내용을 토대로 알아보도록 하겠다.▶모티베이션 이론의 이용가장먼저 모티베이션 이론의 이용이다. 모티베이션이란, 즉 동기부여를 중시하는 이론으로 인간에게 욕구가 일어나도록 만들어 주면 인간은 자발적으로 행동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교육의 장에서 이용되었던 이론이지만 요새는 경영분야에서도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장사하는 사람은 이 이론으로 고객의 구매력을 촉발하려 하고, 경영자는 종업원들의 근로의욕을 끌어내려 한다. 요컨대 동기부여란 자기가 의도하는 방향으로 다른 사람이 자발적으로 움직여 주도록 만드는 방법이다. 힘에 의한 강제가 아니라 심리적 조작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그렇게 유도해 가는 것이 그 요체이다. 그럼 사기에 나타난 동기부여의 사례를 알아보자.≪손자≫의 병법에도 동기부여 이론과 비슷한말이 나온다. 시형술(示形術) 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사람을 움직이려면 움직일 수 있는 상태를 만들어 주어야한다. 그러면 상대방을 끌어낼 수 있다. 상대방이 바라는 것을 보여 주면 상대방은 그것을 가지려 할 것이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유한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어 행동을 시킨 다음 이 쪽은 준비를 갖추어 그들을 기다리면 된다. ≪손자≫의 에 있는 이 말 중의 움직일 수 있는 상태의 제시 가 시형인 것이다. ≪사기≫의 에는 다음과 같은 좋은 예가 있다.-초나라 사람들은 낮은 수레를 좋아해 그 것이 일반화되어 있었는데 그것이 말을 매기가 불편해 장왕이 수레를 높게 만들라는 명령을 내리려 하였다. 하지만 재상인 손숙오가 반대했다. 그 이유는 명령이 적을수록 좋으니 구태여 명령으로 강 수레를 높게 고치게 되어있기 때문이었다. 왕은 손숙오의 말대로 하였더니 초나라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움직였고, 그 뒤 낮은 수레는 자취를 감췄다고 한다. 만일 왕이 명령을 내려서 수레를 높게 고치도록 강제했더라면 아마도 상당한 저항이나 불만이 일어났을 것이다.▶치수(治水)의 원리치수의 원리란 한자 풀이 그대로 물의 흐름을 다스린다는 것이다. 이것을 사람에게 적용하면 강제적으로 사람을 움직이지 않고 상대방의 심리를 이용해서 자연적으로 행동을 유도한다는 사고방식이다. 이것은 중국인의 전통적인 인간관리법의 기본자세이다. 예로부터 홍수는 중국인이 안고 있는 커다란 문제였다. 바로 그 홍수를 다스리는 치수의 방법이 인간관계를 조정하는 방법에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예로 하(夏)왕조의 시조인 우임금의 예를 알아보자. ≪사기≫의 에 의하면 당시 황하를 비롯한 여러 하천이 범람하여 홍수가 하늘까지 넘쳤다 고 한다. 우는 순(舜)임금의 명을 받아 치수공사를 맡았다. 순이 시행한 치수공사의 방법은 물을 막는 것이었다. 한문으로는 그것을 연(煙) 이라고 한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치수공사를 맡은 우의 방법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소(疏) 와 도(導) 의 방법을 취했다고 한다. 소 는 물길을 틔워 주는 것이고 도 는 그 물을 이끌어 주는 것이다. 물을 막으면 넘치지만 적당한 수로를 만들어 주면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이 사실에 착안하여 치수공사에 성공한 것이 우의 방법이다. 이러한 순리의 다스림은 치수뿐만 아니라 정치의 이상이기도 하다. 인간은 힘으로 누르면 반발하지만 순리로 유도하면 자발적으로 행동한다. 그리고 이때는 상대방이 자기를 그렇게 행동하도록 유도하고 있다는 느낌도 갖지 않는다. 사람을 움직이는 최고의 방법은 자기가 조종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자발적으로 행동하게 하는 그것이다.▶남을 인정해주자인간의 행동에 동기를 부여하는 욕구 중 의외로 큰 비중을 갖는 것은 타인으로부터 이해 받고 싶다 는 욕구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타인으로부터 는 일도 못하게 되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자발적으로 행동하게 만들려면 그 사람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사기≫의 에 보면 예양이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진나라의 분열과 관련해서 죽임을 당한 옛 주인 지백의 원수 조양자에게 원수를 갚으려고 했다. 복수를 위해 예양은 일부로 죄인이 되어 미장이로 궁전에 들어가 비수를 품고 조양자를 죽이려 하였지만, 사전에 들켜 실패하였다. 이에 조양자의 측근들이 예양을 죽이려 하였지만 예양은 그는 의인이다. 내가 피하면 된다. 하고 예양을 풀어 주었다. 그러나 예양은 뜻을 굽히지 않고 다시 한번 조양자를 죽이려 하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잡히고 말았다. 조양자는 슬픈 마음으로 이제는 더 이상 풀어 줄 수 없다 하였다. 예양은 말했다. 당신은 나를 한번 용서해 주었소. 나도 이번에는 죽음을 달게 받겠소. 다만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당신의 웃옷을 얻어서 그것을 지를 수 있다면 여한이 없겠습니다. 조양자는 옷을 벗어 줬다. 예양은 비수로 그 옷을 세 번 찌른 다음, 이로써 지백의 은혜에 보답했다고 소리치며 자살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남에게 인정을 받고 싶다는 욕구가 충족되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예양과 같은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사람을 움직이는 심정적 요소현대에는 기업경영과 인간관리에 있어서 아직도 과학적인 방법이 그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것이 지향하는 것은 철저한 기능주의이다. 따라서 인간의 심정적 요소가 무시되어 인간소회라는 문제상황이 발생한다. 사실 과학이 아무리 빈틈없는 계산을 해서 대답을 내놓는다 해도 그것이 인간의 마음을 정확하게 측정할 수는 없다. 그리고 어떤 일이든 궁극적으로 그것은 그런 마음을 자기 존재의 기본 축으로 하는 인간이 해내는 것이다. ≪사기≫에서 부하 사병의 종기의 고름을 빨아 준 오자의 행동도 그런 뜻에서 깊이 새겨야 할 교훈이다. 똑똑하고 재능있는 인물이라 해서 사람들이 그를 따르지는 않는다. 사람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인격적 요소인 도량죽이기는커녕 자신이 존경받지 못하는 것은 내 덕이 모자라기 때문이라면서 그를 징병면제 받도록 해주었다. 그 젊은이는 훗날 곽해를 찾아가 사과했다 한다. 비록 상대가 무례했다 해도 화를 내지 않고 도리어 자신의 부덕함을 책망하는 곽해의 이 도량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계산으로는 측정할 수 없는 리더십이 바로 그것이다.▶심리 작전심리작전의 예로는 한 제국의 창업공신으로 뒤에 재상이 된 진평을 들수 있다. 적군의 최고 사령관인 항우 조차도 그의 그 교묘한 수법에 걸려 넘어졌을 정도이다. 항우가 고조한테 패배한 커다란 원인 하나가 지모가 뛰어난 부하 범증을 스스로 추방한데 있다. 항우로 하여금 범증을 내쫓게 만든 인물이 진평이다. 진평은 심리적 조작으로 적의 군주와 그 참모, 즉 항우와 범증 사이를 갈라놓고 만 것이다. 진평에 귀에 범증에 대한 헛소문이 퍼지게 하여 범증을 의심하게 만든 것이다. 진평은 이런 종류의 기술의 능해서 여섯 번이나 기이한 계략을 안출했지만 그 내용은 극비에 붙여져 전하지 않는다고 ≪사기≫의 편에 기록되어 있다.▶위기에 호소하라사람을 움직이는 심리학적 방법의 하나에 위기에 호소 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상대방에게 위기감을 불어넣어 상대방이 그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행동하도록 하는 것이다. 전국시대에도 이 방법은 자주 사용되었다. 특히 즐겨 사용한 것은 유세자들 이다. 소진이나 장의 같은 사람이 그 대표자인데 이들은 각국의 군주나 제후를 설득할 때 이 방법을 썼다. 즉 먼저 긴박한 주변 정세를 설명해서 상대방에게 위기감을 불어넣고 다음에 상대방이 자기 말을 듣도록 설득해 나가는 것이다. 그 예로 한신의 배수의 진 을 들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도 사람을 위기상황에 몰아 넣고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행동을 촉구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집단적 가속도를 이용하는 방법인간은 저마다 다른 개성을 갖고 있다. 그런 인간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을 하나로 만들 필요가 있다. 손자병법에서는 그것을 원석지계(圓石之計) 라고 한다. 대세를 이용하는 방한 사람이 항우였다. 그래서 그는 진제국을 타도하난 과정에서 초기에는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원석지계와 함RP 지도자 또한 자신의 이미지를 잘 가꾸어 나가야 한다. 그럼 다음에서 이미지 만드는 기술에 대해 알아보자.▶이미지 만들기 기술한(漢)대에 있어서 시문의 제일인자라고 일컬어진 사마상여(司馬相如)도 젊었을 때 이미지 만들기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를 남기고 있다. 문학적 재능은 뛰어났지만 집안이 가난하고 직업이 없어서 젊은 사마상여는 불우한 나날을 보내고있었는데, 어느 날 그의 친구 왕길이 자신의 집에서 한동안 놀다가라고 초대했다. 상여는 여관에 투숙하고 있었는데 자심을 모시로 오는 지사를 돌려보내기 일쑤였다. 그 도시에 탁왕손이라는 부자가 그 소문을 듣고 상여와 지사를 초대하였다. 지사는 정시에 나타났지만 상여는 나오지 않자 지사가 직접 찾아가 데려왔다. 잔치분위기가 무르익은 뒤 상여에게 거문고를 부탁하였다. 처음에는 사양하다 마지못한 듯 뜯기 시작한 상여의 거문고 소리는 천하일품이었다. 그 소리에 탁왕손의 딸 문군이 상여한테 반해버렸다. 실을 이런 효과를 노리고 지사와 상여가 미리 작전을 꾸몄던 것이다. 그리하여 상여는 문군과 결혼하여 출세의 길이 열렸다고 한다. 그는 친구 왕기와 짜고 근사한 이미지를 만들어 냄으로써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새로운 인생을 개척한 것이다. 이 이야기는 ≪사기≫의 에 나온다. 또 다른 예로 ≪사기≫의 편에 나오는 주인공 진승의 에피소드가 있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이었던 진승은 젊어서 국경수비대로 징발되어 가는 도중 큰비를 만나 길이 막혔다. 예정된 날짜에 도착하지 못하면 사형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죽기보다 여기서 왕이 되는 길을 택하고 일행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계책을 꾸몄다. 붉은 글씨로 진승이 왕이 된다 고 쓴 헝겊을 고기의 배 속에 넣어 둔 것이다. 그 후 진승은 왕후장상이 어디 씨가 있는가.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다고 하며 사람들을 선동하였다. 진승이 꾸민 계략이 효과를 거둔 것이다이다.
【삶과 죽음에 대해...】삶과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모습은 모순적이라 말할 수 있다.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을 안 해 본 사람은 없을 것이며, 또한 삶과 죽음에 대해 제대로 생각을 한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게 과연 무슨 말인가?!....... 우리는 살아가면서 삶과 죽음에 대해 자신이 생각하기도 하고 주변에서 접하기도 한다. 지금 내가 사는 것이 삶이고 나 또는 남이 죽는 것이 죽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명백한 대답을 내놓기란 어려울 것이다.내 나이 21살. 지금까지 21년이라는 삶을 살아온 셈이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는데, 그렇게 따지면 내 삶 동안 강산은 2번 바뀌었을 것이다. 강산이 변하는데 내 삶이라고 변하지 않았겠는가! 21년 동안 겪은 변화 속에서 삶의 기쁨도 맛보았고, 슬픔도 맛보았다. 어쩌면 나보다 나이가 많으신 어르신들이 보기엔 고작 21년 살았으면서 세상 다 산 사람처럼 말한다고 할 수도 있지만, 세상사 사람이 모르는 법이니 내가 얼마나 더 산다고 장담 할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렇게 따지면 21년이란 길고도 긴 세월일 것이다.일단 내가 맛본 삶의 가장 큰 기쁨은 세상에 태어난 자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나에게 삶을 살아가게 해준 선물이기 때문이다. 물론 작은 것에서도 기쁨을 느끼며 살아왔다. 가족의 기쁨과 친구의 기쁨, 내가 이룬 모든 것들의 기쁨,,,등등 삶이란 살아볼 만한 것이며 아름다운 것이라고 여기며 살았다. 하지만 삶이란 것이 언제나 달콤하며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란 걸 알았다. 삶의 달콤함이 쓴맛으로 변하고 아름다운 것이 흉한 것으로 변하는 순간 그 이면에는 죽음이라는 것이 있는 것도 알았다.죽음이란 것을 생각하게 된 나이가 언제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나 또한 남들처럼 성적 때문에 고민도 해보고 사랑 때문에 고민도 하면서 죽음이란 단어를 떠올리게 된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죽음이란 의미를 몰랐기에 너무 가볍게 죽음에 내 삶을 내던지려 했던 것 같다. 사실 죽는다는 것은 산다는 것보다 더 어렵다. 또한 죽음이란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삶 또한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기에 죽음 또한 그 순리에 따르는 것이라 생각한다. 얼마 전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나의 이런 생각은 더욱 확고해 졌다. 할아버지의 연세가 적지 않은 건 알았지만 그렇게 갑작스럽게 돌아가실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병치레 한번 안 하신 분이셨는데 교통사고라는 한 순간의 사고 때문에 삶을 떠나 죽음으로 가셨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장례식장에서 많은 눈물을 흘리며 삶이란 허무한 것이며 죽음이란 나도 모르게 다가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무섭기까지 하였다.
사마천은 누구인가?사마천의 자는 자장(子長)이다, 용문(龍門)에서 출생하였고 그의 집안은 모두 관리를 역임하였지만 그리 높지는 않았다. 부친 사마담(司馬談)은 전한의 태사령(太史令)으로 문서, 역사기록, 천문관측 등의 업무를 관장하였다. 사마담은 한 무제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죽고 그는 이미 태곳적부터의 역사를 서술할 준비와 계획을 갖추고 있었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사마천에게 그것을 계승하라고 유언한다. 부친 사후 3년 만에 사마천은 태사령이 되었고 여러 자료들을 수집하고 많은 사료들을 읽었다. 그 후 7년 동안 사마천은 저작에 종사하였는데 그러던 중 '이릉(李陵)사건'이라는 불운을 만나 죽음에 직면하게 된다. 사마천이 사형을 면할 수 있는 길은 많은 배상금을 내거나, 궁형(宮刑)을 당하는 길밖에 없었다. 사마천은 많은 배상금을 낼 처지가 아니었기에 선택은 수치스럽게 궁형을 당해 목숨을 이어가던가 아니면 죽음을 당하는가 하는 것 중 하나였다. 사마천은 역사서술을 위해 궁형을 택했다. 에서 그는 궁형을 받은 후 심정을 이렇게 쓰고 있다. 是以腸一日而九回, 居則忽忽若有所亡, 出則不知其所往, 每念斯 , 汗未嘗不發有背沾衣也 그러나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 -이릉사건- 에 당당히 의견을 내세웠으며 궁형이라는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딛고 사기를 집필하였다. 그리고 사마천이 사기를 집필하는데 걸린 시간은 15년에서 20년으로 얼마나 큰 노력과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다. 그는 도서, 문서 그리고 자신의 견문 가운데서 사료는 광범히 수집해서는 가려서 선택했으며, 자신의 현지 조사를 통하여 사료를 대비해 보았고 문헌을 검토함으로써 기록상 혹은 전해들은바 중에 착오를 바로잡음으로써 저술의 신빙성을 드높였다.사기란 무엇인가?『사기』는 전국 시기 이전의 역사는 간략하게 서술하였고 전국 이후의 역사는 상세하게 서술하였다. 특히 한초 시기의 경제, 정치, 문화, 민족 관계, 국내외 왕래 등 여러면을 폭넓게 기술하였다. 『사기』는 역사 인물의 사적을 기록하는 방법으로써 역사적 형편을 반영하였다. 작자는 역사적 인물의 행위, 언어 심지어는 인물의 정신, 용모까지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이런 인물들은 모든 일정한 계급과 계층에 속하였는데 어떤 인물들은 이야기 식의 방법으로 실록(實錄) 하였으며 묘사와 서술에 있어서 애증이 분명한 뜨거운 감정이 주입되고 작자의 견해와 염원이 스며들어 있다. 그러므로 사기에는 생동하는 인물 형상이 많다. 이런 점만 보더라도 『사기』는 문학적 역사인가 하면 역사적 문학이기도 한 것이다.『사기』는 일정한 역사적 범주안에서 형형색색의 인문 형상을 서술하였다. 위로는 제왕에서부터 아래로는 창우(倡優), 점복(占卜), 농민봉기의 수령까지 각 계급, 계층의 인물 형상을 창조하였다.첫째, 『사기』는 음란하고 포악한 제왕들의 작태를 밝혀놓았다. 사마천은 덕치와 배치되는 학정을 실시한 하걸(夏桀), 은주(殷紂), 주려(周 )왕 및, 진시황과 같은 폭군들의 죄악을 규탄하고 그들의 멸망의 필연성을 드러내었다. 나아가서 그는 당시 이름난 군주에 대해서도 거리낌없이 견책하고 있다.둘째, 통치 집단 내부의 첨예한 모순과 그들 사이의 아귀다툼을 진실하게 반영하였다. 의 기록을 보면 여후(呂后)와 척희(戚姬), 즉 봉건왕조 내부의 후비들 사이의 내부의 모순과 아귀다툼이 얼마나 치열하고 참혹하며 야만적이고 비인도적이었던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후비들 사이의 모순과 아귀다툼은 최고 통치자인 황위의 계승권을 둘러싸고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폭로하고 있다.셋째, 『사기』는 중하층의 사람들의 우수한 품성, 용감한 영웅적 행위를 찬양하였다. 에서 후영(候 ), 주해(朱亥), 모공(毛公)과 설공(薛公)은 시급한 대목에서 위나라 공자 신릉군(信陵軍)을 도와 조나라를 구하고 위나라를 보존하며 진나라에 저항하는 일을 수행하였다. 사마천은 여기에서 문지기 출신인 후영의 지혜와 의리를, 주해의 비범한 완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또 사마천은 사기에서 당시 넉넉하지 못한 사람들을 구제하며, 남이 시급할 때 나서는 협객들에 대해서도 기술하고 있다. 당시 봉건 통치계급의 비난을 받는 존재인 협객들의 전기를 쓴 사마천의 사상 또한 높이 평가받을 만 하다 하겠다.넷째, 『사기』는 애국영웅들과 역사적으로 중대한 기여를 한 역사 인물들을 찬양하였다. 에서 인상여(藺相如)의 애국정신과 용감하고 슬기로운 품성을, 용감하고 정직한 품격과 애국정신을 소유한 이광(李廣)을, 에서는 굴원(屈原)의 애국정신과 그의 고결한 인격을 서술한 것에서 잘 드러난다.다섯째, 사회 현실의 암흑상을 폭로하고 인민들의 고통을 반영하였으며 나아가 농민봉기의 영수를 구가하였다. 사마천은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민중들의 질고를 직접 목격하였으며, 민중들의 정서를 들을 수 있었다. 민중들의 질고와 반항심을 야기시키는 근본원인이 토지의 집중과 무위도식하며 학정을 일삼는 관리에 있음 보았다. 그리고 통치계급의 가혹한 착취와 잔혹한 탄압은 민중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고 이는 곳곳의 농민봉기로 이어짐을 보았다. 사마천은 이렇듯 통치집단의 잔혹한 통치에 대한 폭로와 당시 농민봉기의 현상을 반영하고 나아가 진섭(陳涉)농민비기를 서술하였다. 진나라의 폭정에 반대하여 일어난 진섭(陳涉) 농민봉기의 정의성과 역사적 공적을 긍정하였으며 농민봉기의 영수인 진섭의 영웅적 형상을 서술하였다.사기 저술의 시대 배경은?진(秦)에 이어지는 중국의 통일왕조. 왕망(王莽)이 세운 신(新)나라에 의하여 잠시의 중단이 있어, 그 이전에 장안(長安)을 수도로 하였던 한을 서한(西漢,前漢), 낙양(洛陽)에 재건된 한을 후한(後漢,東漢)이라고 한다. 한왕조는 기본적으로는 진나라의 국가체제를 계승하여 전국통치의 조직은 군현제를 기본으로 하였다. 그러나 한왕조의 수립은 진(秦)말의 난 이래의 여러 집단의 지도자와 유방 직속 부하들의 협력에 의한 것이어서, 유방은 이들 공신(功臣)과 그의 일족을 제후왕·열후(列侯)로서 각지에 봉건하였다. 유방의 치세 중에 공신인 왕들은 모두 멸망하고, 왕은 결국 유씨 일족(劉氏一族) 출신자에 한하는 것이 한왕조의 정제(定制)가 되었다. 유방이 죽은 뒤 황후 여씨(呂氏)와 그 일족에 의한 궁정정치의 일시적 혼란이 있었으나, 문제(文帝)·경제(景帝)의 시기에 한왕조의 지배체제가 안정을 되고 한왕조의 중앙집권적 전제통치의 체제가 완성되었다. 한편, 무제 시대에 한제국은 대외적으로 크게 영토를 확대하였다. 북방의 흉노 세력을 고비사막 이북으로 물리쳤고 동방으로는 한반도에까지 진출하고, 또 남방으로도 출병하여 한나라의 영토는 안남에까지 미치었다. 서방에서는 장건(張騫)의 원정을 계기로 서역(西域) 제국 을 복속시키고, 중국과 서방과의 교통로인 이른바 '실크로드'가 개척되었다. 이와 같이 무제의 치세는 사상 최대의 대제국이 건설된 전성기였으나, 반면에 제국(帝國)의 모순이 표면화하기도 하였다. 특히 대규모의 원정, 토목 사업, 궁정의 사치 등으로 국가재정의 파탄을 초래하자 이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증세(增稅), 화폐제도의 개선, 소금·철·술의 전매제, 균수법(均輸法)·평준법(平準法)등의 재정정책이 취하여졌으나 재정의 불균형을 구하는 효과는 있었지만, 주로 농민에게 과중한 부담이 되어 사회적 모순이 심화되었다. 한편, 무제의 장기에 걸친 독재적 통치기간 중에 3(公)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정부 기관이 명목화하게 되고, 황제 측근자들이 정치의 실권을 잡는 경향이 생겼다. 특히 원제(元帝) 이후는 외척(外戚)·환관(宦官) 등 근신(近臣)이 항상 국정의 실권을 잡게 되어 궁정정치는 급속히 부패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외척(外戚) 왕망(王莽)이 8년에 평제(平帝)를 독살하고 제위(帝位)에 올라, 국호를 신(新)이라 하고 한왕조는 일단 멸망하였다.한나라 문화는 춘추전국시대에 형성된 각 분야의 문화를 보다 발전시켰는데 그후 중국의 전통적 문화의 기본적 양식으로 형성된 것이 많다. 그리고 학술·사상의 분야에서는 도가사상과 법가사상이 유행였으며, 특히 후자가 전제적 통치의 현실면에서 지도이념으로서의 지위를 차지하였다. 무제의 치세에 동중서(董仲舒)의 헌책(獻策)으로 오경박사(五經博士)가 설치되어 유교의 국교화가 비롯되었다. 이런 경향은 원제(元帝)의 시기부터 결정적으로 되어, 유교는 국가통치·사회질서의 기본적 이념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하고, 후한시대로 계승되었다.사마천 사기의 문학성은?첫째, 등장하는 많은 인물을 각각 형상화하여 그 개성을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한편 자기의 주관적인 애증의 감정으로 사실을 자기방식으로 서술하였다. 따라서 누구나 인물을 대면 금방 그의 개성이 떠오를 만큼 묘사에 심도를 다했다. 그리고 인물을 묘사함에 있어 강렬한 정감을 노출시켰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역발산 기개, 항우(項羽). 진시황제를 저격했던 자객(刺客)의 대명사, 형가(荊軻). 배수진, 토사구팽(兎死狗烹)으로 유명한, 한신(韓信). 제갈량을 능가하는 군사전략가 장량(張良). 영원한 우정의 상징 관포지교(管鮑之交)의 주인공 관중(管仲)과 포숙아(鮑叔牙) 등 이상의 인물에 대해 우리가 현재 갖고 있는 전반적인 이미지는 거의 대부분 『사기』로부터 유래된 것이다. 사마천은 인물성격을 보다 노출시키기 위해 상호조명법(相互照明法)과 대체법(代替法)을 쓰고 있는 것도 특징이다. 말하자면 어느 인물을 풍자하기 위해 인물의 전기가 아닌 다른 전기를 통해 풍자를 보여주는 방법을 상호조명법이라 하고, 다른 조대의 다른 사건으로 이조대의 사건을 대체하는 방법을 대체법이라 할 수 있다. 바로 한무제의 잔학성(殘虐性)을 에 자주 노출시키거나 에 서로 보완적인 방법으로 묘사함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