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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독일영화에 대해서,,
    독일영화에 대해서...Ⅰ. 들어가는 말독일문화는 우리에게 아직은 낯설다. 그래서인지 독일 영화도 처음에는 내게 무척이나 낯설게 다가왔었다. 그러나 이 4편의 영화를 통해 독일문화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게 되었고, 독일이 그다지 낯설지 않게 느껴지기도 했다.유로파유로파, 글루미썬데이, 양철북,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이 4개의 영화 모두가 나에게는 낯설고,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 많은 작품들이었다. 왜냐하면, 이 영화들이 내가 살아온 곳과는 다른 곳에 사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작품들이어서 그러한 것 같다. 내게는 무척이나 낯설어서 일까? 몇몇 장면들이 떠오르긴 하지만 영화를 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한번도 생각하지도 접해본 적이 없는 것에 대해 선뜻 이해가 가는 것도 이상할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한국이란 나라가 만들어 놓은 사상과 체계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어서 일 것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어서 생각이 다르고 행동하는 것이 다르지만 인간이란 그 자체는 변하지 않는 것 같다. 물론 이해가 안가고 낯선 부분도 많았지만, 본성에서 하는 행동, 즉 기본적인 것들은 나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아주 명확한 독일 문화와 우리 문화와의 비교보다는 내 느낌을 써내려 가면 그것이 바로 비교가 될 듯하다.Ⅱ. 독일의 영화를 통해 무엇을 알 수 있는가?1. 유로파유로파주인공 솔리가 히틀러와 생일이 같은 날 태어난 것부터가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영화였다. 이 영화에서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하게 해준 영화였다. 유대인으로서 살아남은 한 인간의 이야기 아니, 그런 시대에 살아가고 있어서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인간의 이야기랄까? 솔리는 독일인의 습격으로 누나를 잃고, 고향을떠나 폴란드로 갔다가, 다시 형과 함께 피하려다 혼자만 배를 타게 되어 허우적거리다가 소련군에게 구출되어 유대인, 폴란드인, 러시아인이 함께 수용된 고드노 고아원으로 보내지면서 살아가기 위한 일생을 시작한다. 거기서 솔리는 철저한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로 훈련되어진다. 아니 전쟁영웅이 되어 최고의 히틀러 학교에 보내지는 영광을 얻는다. 이 장면에서 나는 문화의 비교보다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타이밍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그 시간, 그 장소에 솔리가 거기에 있었기에 솔리는 영웅이 될 수 있었다. 조금만 더 일찍 투항했더라면 그는 배신자가 되었을 테니 말이다.히틀러 학교에 가서도 솔리는 독일인이 아니면서도 오히려 더욱 독일인처럼 되었다. 어쩌면 아니기 때문에 더욱 독일인처럼 했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신분이 노출 되어서는 안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신체검사 때도 아프지도 않은 생치아 하나를 희생하면서 걸리지 않음이 잘 보여주고 있다. 히틀러 학교의 선생이 유대인의 구별법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장면은 많은 것을 보여준다. 독일인도 아닌 솔리를 과학적 지식으로 그를 약간의 다른 피가 썩인 순수 혈통의 독일인으로 만드니 말이다. 독일인이 얼마나 과학 즉, 정해진 틀을 중요시 하는 지를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또한 정확하다고 하는 과학조차도 그저 그들의 이데올로기를 부각시키는 하나의 수단으로 보여지니 말이다. 어떠한 것도 진리 일 수 없다는 말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그저 모든 것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요리하여 말하는 것 밖에 되질않으니 말이다. 유대인의 특징을 말할 때는 경박한 어투로서 말하고, 독일인들을 설명할 때는 아주 부드러운 어투로 설명함으로서 극명한 대조를 보여주고 있다. 이 것 역시 말의 과학을 이용한 사람의 감정에 변화를 주는 것에 불과하니 말이다.독일인의 생각을 읽을수 있는 장면은 두 가지장면으로 충분하였다. 착하고 어여쁘게 나오는 레니의 유대인에 대한 감정의 표현과 순수 독일혈통의 아이를 원하는 것에서 너무나도 독선적인 그들을 볼 수 있었고, 전쟁 영웅으로서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는 솔리가 경찰서에 불려가는 장면에서 정말 우리와는 다르다는 것을 보았다. 확실한 독일인이나 그를 증명할 증서가 하나도 없다하여 경찰서에 부르니 말이다. 당시 상황이 평시가 아닌 전시임에도 말이다. 우연인지 또 한번 공중다쳤는지를 살피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우리와는 말이다.자보란 남자는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일정수준의 재산을 가진 사장이다. 그런 그에게 사랑하는 여자 일로 나가 곁에 있었으니 그것이 그에게는 비극인 것 같다. 물론 일로나의 곁에 안드라스가 나타난 후의 이야기다. 자보는 유대인으로서 아주 현실적이고 영리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시장에서 감자를 살 때와 안드라스의 음반 계약에서 그의 탁월한 협상능력을 보았다. 굳이 돈에 관한 것만이 아닌 것 같다. 계약이나 거래이외에도 사랑도 마찬가지다. 당신을 잃으니 반쪽이라도 가지겠다는 말에서 말이다. 비록 그는 그가 가진 재산과 가장 먼저 일로 나와 사귀었지만, 이미 일로나의 마음을 안드라스가 채우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유대인이라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생각으로는 그런 경우 포기를 하던 가 아니면 혼자만이 차지하려고 자보보다는 훨씬 많은 노력을 했을 것이다. 또한 그는 어느 날도 가게를 닫지 아니하겠다는 것은 유대인이면서도 자신이 처해서 살고 있는 헝가리에 잘 적응하고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토록 영특한 유대인인 자보가 일로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의 인생은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한다. 사랑의 힘이 아니었다면 그렇게도 무조건적으로 그를 희생하지도 그런 어려운 상황에 놓여지게 자신을 내버려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스가 자신의 레스토랑에 와서 음식 메뉴의 이름을 잘못 얘기한다 해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살아가는 것이나 나치의 소령이 되어 나타난 한스와 그의 동료 앞에서 “의안이 더욱 친근해 보인다”는 농담으로서 자신을 방어할 줄 아는 그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는 독일과 우리와의 유사성이 있는 듯하다. 남에게 맞추기보다는 자기의 고집대로 자신의 아는 것이 곧 진리인양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말이다. 마지막에 기차를 타고 갈때는 정말 자보가 불쌍하였다. 죽음이 그를 태연하게 하였는지 한스의 배신을 알면서도 당해야한 자신의 반성인지를 몰라도 만일 자보에게 일로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더라면 자보의 생고통에 휩싸여 갔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일로나를 만남으로 자신의 원하는 해답을 음악을 통해 얻었으니 말이다.이 영화에서 한스는 아주 전형적인 독일인으로 등장한다. 일로나의 생일날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독일의 신기술인 카메라를 가지고 와서 자랑함은 아주 잘 표현해주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일로나에게 청혼했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강물에 뛰어들어 자살하려한 것을 구해준 자보에게 그가 빛진 것을 단한번의 권총으로 죽음에 몰린 자보를 구해줌으로서 계산은 끝났다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겐 이해되지 않는다. 우리는 한번 은인은 영원한 은인인데 말이다. 그가 어떤 잘못을 하더라도 모든 것을 덮어줄 만큼 말이다. 그러나 이들은 달랐다. 한스의 일로나에 대한 사랑은 받아들여지지 않음으로서 사랑이 아니라 단순히 한번은 정복해야만 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듯하다. 자신의 아내와 자식이 있음을 강조하면서도 목말라 하는 것을보면 그러하고, 자보를 잡아가면 일로나가 자신에게 올 것을 악용한 겁탈에서 볼수 있다. 한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비프롤만 고집한다. 그것도 자신만의 언어로서 말이다. 어쩌면 그또한 독일인의 독선일수 도 있지만, 변함없는 일로나에 대한 갈망이 아닐까 싶다. 이렇듯 한스에게는 일로나를 사랑하게 되든 안하게 되었든 그가 살아가는 데에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았을 듯하다.글루미 썬데이에서 가장 독일인의 질서의식을 보게 된 것은 역시 타이핑을 치는 여급의 법전 타령이다. 어느 하나도 법전을 벗어날 수 없음은 합법적이고 완벽한 한 듯하게 보이지만 것은 강력한 힘 앞에서는 적용 받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독선적인 것을 보여주고 있다. 나치를 위한다고는 하지만 자신을 위해 돈을 챙기고 살아남기 위해 도움이 될 만한 인물만 살려주는 것은 독일인들이 우리와 같이 집단적인 삶이 아니라 개인적인 삶의 발달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3. 양철북양철북의 시작은 뇌리에 파고드는 북소리로 시작한다. 그리고 넓디넓게 펼쳐진 감자밭에서 감자를 구워먹는 아낙의 치마 밑으로 도망가던 남자으로는 오스카가 북을 치면서 나치의 청년들의 합주를 망쳤듯이 그에 대항하는 것으로 등장한 것도 같다.오스카가 서커스구경을 하고나서 그 일원인 난쟁이와 대화 하는 것은 참 인상적이다. 그 들을 보면서 남들과는 어우릴 수 없는 대신 그들만의 능력이 있어야만 살아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또한 그들은 보통 사람들과 같은 곳에서 세상을 보지 않는다. 좀 더 아래에서 바라본다. 남들과는 다른 아래에부터의 시각으로 말이다. 서커스단에 입단하라고 하지만 오스카는 자기는 구경꾼으로 있기를 원한다고 한다. 이 말은 오스카 자신은 그들과는 다르다는 말을 하는 듯하다. 자신도 난쟁이 이지만 자신은 스스로가 성장을 멈춤으로서 된 그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말이다.이 영화 양철북에서 등장하는 소시민들이 물질만을 추구하여 결국은 그것이 폭력을 등장하게 하였다고 하는데, 그런 폭력의 장면은 여러 군데에 등장한다. 이는 어쩌면 1차대전후 만들어 놓은 당시의 시대상을 어쩔 수 없음을 역설하기도 하는 듯하다. 당시의 물가는 돈을 한수레 가득 싣고 가고 커피한잔 제대로 마실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였는데 이를 나치, 즉 히틀러가 등장하여 안정시켜가고 있었음은 사회에 폭력을 인정한다는 말 일수 있다는 것이다. 주거건물 안뜰에서 개구리를 삶은 냄비에 오줌을 누고 그것을 오스카에게 억지로 먹이며 즐거워하는 아이들은 그 모습이 천진한 만큼 당시 인간 속에 숨어있는 잔인함을 그로테스크하게 그려내고 있다. 더욱이 오스카를 괴롭히는 아이들은 같은 계층의 아이들이었으며 그것도 모자라 집단적이었다는 사실이 소시민의 폭력성을 더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오스카가 3살 되던 날 키를 재는데 꼬마 아이를 문틀에 기대게 하고 키를 표시하기 위해 단도를 사용한 것, 오스카의 가족이 바닷가에서 뱀장어를 잡는 광경을 목격하는데 바다에서 건져낸 것이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끔찍한 죽은 말의 머리인 것을 보게 되고 그것을 먹고 살찐 수십 마리의 뱀장어들, 그리고 또 그 뱀장어를 맛있게 먹는 장면은 역겹하다.
    독후감/창작| 2006.11.27| 9페이지| 2,000원| 조회(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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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감상문]`음식남녀` 를 보고,,, 평가A좋아요
    음식남녀 를 보고.....사실 이 영화는 이번 수업을 통해 보기 전에 몇 년 전쯤 고등학교 중국어 시간에 본 적이 있던 영화였다.그때에도 선생님이 중국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음식문화를 제대로 알아야한다고 하시면서 이 영화를 보여주셨던 기억이 난다.그때 꽤 인상 깊게 보았던 영화라 대충의 줄거리며 감동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번 시간을 통해 다시 한번 보게 되니 느낌이 그때와는 많이 달랐다.몇 년이 지나 조금은 더 폭 넓은 지식과 깊어진 생각을 가지고 보게 되니 그때 느꼈던 감동과는 많은 차이가 느껴졌다.그래서 더욱 재밌고, 감동 깊게 볼 수 있었던 영화였던 것 같다.이 영화를 보여주신 몇 년 전의 중국어 선생님이나 지금의 교수님의 의도처럼 이 영화를 보면서 중국 사람들의 음식문화를 접해볼 수 있었고, 그들의 음식에 대한 조금은 남다른 생각들을 잘 알 수 있게 되어서 뿌듯하기마져 했다.한나라, 하나의 문화권을 이해하는데는 그들이 무엇을 먹고, 어떻게 먹고, 왜 먹는가의 문제로 해석해보면 쉽게 다가갈 수 있다는 생각이 이 영화를 보면서 들었다.음식은 모든 문화적 현상과 관련되어 있다 라고 했던 한 학자의 말도 떠올랐다.특히나 중국은 음식의 종류와 양이 광대하고, 음식문화가 매우 발달되어 있는 나라라서 더욱이 그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이 영화의 시작은 세 자매의 아버지 주 선생이 가족과의 만찬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시작되는 첫 장면에서부터 중국문화의 분위기가 강하게 느껴졌다.단촐한 네 가족의 저녁만찬에 너무도 많고, 고급스런 음식들이 차려지는 것을 보면서 약간은 이해하기 어렵기도 했다.과연 저 많은 음식들을 4명이서 다 먹을 수는 있을까?그러면서도 식탁에 차려지는 맛깔스럽고, 군침 도는 음식들을 보면서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그러한 화려하고 맛깔스런 음식들로 가득 차려진 화려한 식탁의 분위기와는 다르게 주선생과 세 자매의 분위기는 약간은 어색하고, 조용해서 아이러니한 느낌도 받았다.평소 몇 마디의 대화 없이 자기 일을 하며 살아가는 가족들이 일주일에 한번 갖는 저녁만찬을 통해 식탁에 둘러앉아 음식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면서 느껴지는 것이 참 많았다.음식이 가족간의 단절된 대화를 이어지게 해주고, 가족 안에서 빚어지는 남녀간의 갈등, 구세대인 아버지와 신세대인 세 자녀의 갈등을 음식을 매개체로 하여 그려지는 모습을 보면서 음식에 대한 생각을 달리 가지게 되었다.단순한 음식이 그렇게 큰 역할을 하고 있는지는 미처 몰랐었다.세 자매의 아버지인 주 선생은 국빈만을 상대로 하는 대만 어느 호텔의 최고 요리사이지만 점점 미각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러면서 가족의 만찬을 위해 음식을 만들고, 음식을 만들면서 기쁨을 느끼는 그를 보면서 존경심이 드는 한편에 측은한 마음도 들었다.아버지의 마음을 몰라주고 자기 일들에만 바쁜 세 딸들이 약간은 얄미워 보일정도로..처음엔 주선생의 각기 다른 삶을 살아가는 세 딸들은 홀아비로 늙어가는 아버지의 애처러운 모습은 안중에도 없는 듯 보였다.그러나 그들 각자에게도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이 느껴졌고, 그들의 삶 또한 어느 면에서는 아버지만큼이나 힘들어 보였다.학교 선생님은 큰딸은 젊은 시절 한 남자에게 시련을 당하고 오랜 시절을 홀로 지내면서 노처녀로 늙어간다. 보면서 조금은 탁 막힌 그녀의 모습에 갑갑한 마음 마져 들 정도였으나 같은 학교 체육선생과 조금은 어리 숙한 사랑을 만들어 가는 그녀를 보면서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젊은 시절 그녀는 한 남자에게 시련을 당한게 아니라 단지 상상 속에서 혼자 사랑하고 혼자 시련 당했던 것이었다.조금은 충격적인 사실이었지만 이해가 안가는 일은 아니었다.둘째 딸은 소위 잘나가는 캐리어 우먼으로 대단히 개방적이고, 지적인 능력의 소유자였다. 거기에 외모까지 아름다워 부러움마저 느끼게 하는 여성이었다.그러나 그런 그녀도 몇 년을 고생해서 모은 돈으로 아버지와 가족에게 벗어나고자 집을 샀지만 그만 사기를 당하는 실수를 저지른다.겉보기와는 다르게 여리고, 착한 여자라는 느낌을 영화를 계속 봐가면서 느낄 수 있었다.아버지가 싫어하는 패스트푸드점에서 알바를 하던 셋째 딸은 대단히 발랄한 느낌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언니들을 제치고 제일 먼저 남자와 동거를 시작하고 아기까지 얻게 된다.이러한 대단히 평범해 보이면서도 대단히 독특한 가족의 모습을 보면서, 또 그들을 함께하게 이어주는 음식들을 보면서 느끼는 재미는 생각보다 컸다.이 영화에서 대단히 충격적이었던 장면은 주 선생이 자신의 생일잔치에서 세 자매와 옆집 금영가족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했던 고백이었다.주 선생이 금영과 결혼하겠다고 말한 충격선언은 그 영화속의 가족들만이 아니라 나에게도 대단히 큰 충격이었다.금영은 자기 딸 또래의 젊은 여자인데..영화를 보면서 주 선생에 대해 존경과 호감을 가지고 있던 나에게 그를 다시 보게 만드는 장면이었다.
    독후감/창작| 2006.11.27| 3페이지| 1,500원| 조회(7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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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사] 태조, 성종, 광종의 정책
    고려왕들의 정책차 례Ⅰ. 서론Ⅱ . 본론1. 태조의 대호족정책2. 광종의 왕권강화책3. 성종의 체제 정비4. 성종의 체제 정비Ⅴ. 결론Ⅰ. 서 론羅末麗初의 왕조교체기에 있어서 정치 사회적 변동을 주도한 세력은 주지하던 바와 같이 호족이었다. 신라 하대에 중앙 진골귀족들의 상쟁(相爭)으로 정치활동이 약화되고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상실되자, 토착적인 촌주층의 성장이 두드러지고, 또 지방으로 밀려난 중앙귀족 출신자나 군진세력이 점차 지방호족으로 독립할 수 있게 되었다.초기에는 중앙관료의 지위를 차지한 호족이라 할지라도 자신들의 근원적인 지방의 세력기반은 여전히 확보할 수 있었고 그 규모도 대단한 것이었으며 각자 별개의 통치조와 사병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고려초의 왕권 강화와 중앙 집권화는 이들 호족세력에 대한 통제에 의해서만 가능하였다.여기서 태조, 광종, 성종의 호족에 대한 정책을 알아보고자 한다.Ⅱ . 본 론1. 태조의 대호족정책태조가 건국한 후 그에게 부과된 가장 큰 문제는 호족들을 회유?억압하는 일이었다. 그가 새로이 나라를 열었다 하나 지방 각처의 호족들은 후삼국의 혼란시대와 다름없이 독자적 무력과 경제적 지반을 보유하여 독립적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또 왕건과 전장에서 고락을 같이한 호족출신의 諸將(제장)들도 전쟁에 의한 포로, 노획물 등의 이익을 분점하고 사병을 거느린 채 자기의 세력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서 정국의 불안을 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태조가 즉위한 그 해에 왕의 측근 인물인 마군 장군(馬軍將軍) 환선길(桓宣吉)의 반역이 일어나고 이어서 다시 마군장군 유흔암의 모역(謀逆)이 발생한 것은 그와 같은 정국의 불안을 반영한 사건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는 저항하는 호족세력을 억압하는 한편으로 그들과의 타협과 연합을 통해 왕권의 안정을 꾀하였다. 우리들이 고려 초기의 정권 형태를 흔히 호족연합정책(豪族聯合政策)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는 호족들에 대한 몇 가지 시책을 폈다.첫째, 호족 통합정책으로 결혼정책(왕건은 모두건은 6명의 왕후와 23명의 부인을 맞고 있는데 이는 대체로 정략결혼에 의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왕건은 각 지방의 유력한 호족출신 관료의 딸들과 혼인함으로써 그들과의 결합을 굳게 하려 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호족들의 입장에서도 딸을 왕에게 주어 외척으로서의 지위를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혼인정책과 더불어 유력자들에게 王氏의 姓을 하사하여 擬制家族的(의제가족적)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연합을 굳게 하는 賜性政策(사성정책)도 비슷한 범주로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 실제로 그와 같은 예로는 江陵 將軍(강릉장군) 金順式(김순식)이 王順式(왕순식)으로 되었다든가, 또 좀 후대의 인물이지만 청주의 호족출신인 李可道(이가도)가 王可道(왕가도)로 된 사실 등을 들 수가 있다.둘째, 호족통제정책으로는 基人制度(기인제도), 事審官制度(사심관제도)를 들 수 있다.기인제도 설정의 근본 목적은 지방 향리세력의 견제에 있었다.-향리의 자제를 선상(選上)하여 경성에 인질로 삼고, 또한 출신지의 일에 대한 자문에 대비하게 하였다. 한편 호족의 자제가 중앙 관리로 진출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이를 기인제도라 한다. 국초에 중앙에 올라온 호족들의 자제를 잘 대우해 주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기인제도는 국왕과 호족과의 호혜적인 관계에 바탕을 둔 제도였다.사심관 제도는 간접적인 지방 통제 정책으로서 당시의 공신들은 거의가 호족출신으로서 중앙 귀족화 되어 있었지만, 그 본관에는 여전히 전통적인 세력기반을 가지고 있어서 그 지 방에서 지배적인 지위를 확보하고 있었다. 따라서 중앙에 진출하여 보다 밀접한 관계에 있어 보게 함으로써 지방에서의 호족의 전횡을 견제하게 하였다. 이는 지방세력을 재지 토착세력과 중앙 진출 세력으로 구분하여 상호 견제하는 간접적인 통치방식을 취하였 다.※사심관의 기원은 태조 18년에 신라왕 김부가 고려에 항복해 오자 김부를 경주의 관 으로 삼아 부호장 이하의 관직 등에 관한 사무를 관장케 한 데서 비롯되고 있다. 그 이후 다른 공신들도 각각 그 출신지의 사심관으로로 삼게 한 것으로, 태조는 지방 호족세력들의 이탈을 방지하고 자 시행하였다. 기인의 성격은 후대로 내려갈수록 변질되어 그 지위도 격하되었지만 태 조 대에는 개경에 기인으로 거주하고 있던 각 지방호족들의 자제를 우대하였다. 이는 당시 호족세력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하여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고 나아가 후백제 견훤과 의 군사적 대립에서 우위를 점하고자 한 것이다.마지막으로, 정계(政誡) 1권, 계백료서(戒百寮書) 8편을 작성하여 중앙관료와 지방 호족세력에게 군주에 대한 신하의 도리를 규정하여 중앙 집권화의 정신적 기반을 삼으려 한 것이다.2. 광종의 왕권강화책호족 세력에게 억눌림을 받던 왕권은 光宗朝에 이르러 비로소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즉, 그는 정종의 내단을 받아 즉위한 이후 26년간 재위하거니와, 그간 왕권의 강화를 위한 제 개혁을 단행함으로써 그 기반을 다지는 것이다.광종은 처음 즉위하여 7년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에는 온건한 방법으로 호족세력을 무마하면서 서서히 왕권의 안정을 모색하여 갔다. 그가 즉위한 8월에 국초에 공역자를 고정하여 4역자에게는 쌀 25석, 3역자에게 20석, 2역자에게는 15석, 1역자에게는 12석씩을 하사하고, 이를 例食(예식)으로 삼게 한 것은 그 일 조처였다고 생각된다. 이는 국초 이래의 호족출신 세력에 대한 회유책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그는 광덕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세워 자주적인 일면을 보이는 한편 밖으로 중국왕조, 특히 후조와의 외교교섭을 통하여 새 국왕으로서의 지위를 높이는 등 정치적 기반을 닦는데 힘썼다.이리하여 어느 정도의 토대가 잡히자 그는 7년부터 11년에 이르는 5년 동안에 호족세력을 억압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데 필요한 제도적인 조처를 취하였다.그 첫수가 왕9년(956)에 시행한 奴婢按檢法(노비안검법)이었다. 노비안검법이란 원래는 노비가 아니었으나 전쟁에서 포로로 잡혔거나 빚을 갚지 못하여 강제로 노비가 된 자들을 판별하여 이전의 상태로 되돌려 주는 것을 말한다.그러나 이 노비안검법은 많은 부작용을 기도 하였다. 즉 노비안검법은 호족과 공신들의 세력을 약화시 키는 데에는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원인이 되어 신분 질서가 문란해졌을 뿐만 아니라 정계의 혼란을 가져오기도 했던 것이다.이어서 왕9년(958)에 과거제도 실시하였다. 후주의 귀화인 쌍기의 건의-무적(武的) 기질이 있었던 호족세력을 약화 시키고 군왕에 대한 충성을 전제로 한 유학자들을 관료로 선발하여 왕권의 안정을 꾀하려 한 것이 목적이었다. 과거는 주지하듯이 문예나 유교 경전의 능력을 시험하여 그 성적에 따라 관인을 등용하는 제도로, 이것은 국초 이래 커다란 정치적 비중을 가지고 있던 무훈공신들을 약화시키는 대신 군주에 대한 충성을 본분으로 하는 신진인사를 기용함으로써 왕권을 안정시키려는 목적에서 실시한 것이다.그리고, 960년 백관(百官)의 공복(公服)을 제정하였다. 자(紫), 단(丹), 비(緋), 녹(綠)의 4색으로 원윤 이상은 비삼(紫衫), 중단경 이상은 단삼(丹衫), 도향경 이상은 비삼( 緋衫), 소주부 이상은 녹삼( 綠衫)을 입게 하였다. 이들에 의한 복색의 구분은 일정한 위계질서에 따른 상하의 등급을 나타내는 것이 틀림없고, 그것은 곧 광종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관료체제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백관의 공복 제정도 왕권의 확립과 밀접한 관련이있는 것이었다.왕 11년 개국공신계열의 대립된 지방의 군소 호족세력(비공신계열)으로 이들은 과거를 통하여 관계에 진출한 신진관리를 비롯하여 쌍기 등 중국의 귀화인으로 가문의 기반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광종은 이들 비공신 계열의 관료를 기반으로 大相(대상) 俊弘(준홍), 王同 등 구신(舊臣), 숙장(宿將)들을 숙청하였다.광종은 이와 같은 숙청을 전후하여 侍衛軍(시위군)을 크게 강화하고 있다. 즉 그는 州郡에서 풍채있는 자를 선발하여 入侍케 함으로써 자신의 군사력을 증강시켰던 것이다. 광종은 역시 왕11년에 徇軍部(순군부)를 軍部(군부)로, 內軍(내군)은 掌衛部(장위부)로 개편하는 등 일련의 군제 개혁문에 위에서 설명은 하지 않았지만 그의 재위시에 처음 사용되기 시작하는 중국식 문 산계나 9품관제의 채용등도 그와 표리관계에 있음은 물론이다. 이제 광종의 개혁정치를 거 치고 난 이후의 왕권은 적어도 중앙에서만은 호족세력을 억누르고 그 위에 군림 할 수 있 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즉위년에 주현의 세공액을 정한 사실에서 짐작되듯이 지방의 실태 파악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광종조는 고려왕조의 확립 과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시기였다.3. 성종의 체제 정비성종은 전대왕들의 경우와는 달리 주로 신라 육두품계통의 유학자들을 중용하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崔承老(최승로)였다. 그는 본래 경주 출신으로 신라가 항복할 때에 아버지와 함께 경순왕을 따라 고려에 들어와 일찍부터 벼슬을 한 사람이었다. 그는 성종 원년에 유명한 시무책을 올렸는데 그 대부분은 성종이 직접 국가의 정책에 반영하였다. 전체 시무책 가운데 8조목(제2?4?6?8?10?16?18?20조)이 불교에 대한 비판으로 일관되고 있는 것은 그와 같은 입장의 표명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이것들은 모두가 성종의 관심을 불교적인데서 유교적인 곳으로 돌림으로써 자기의 유교적 정치이념을 실현시키기 위한 필요에서였다고 풀이된다.성종은 중앙집권적인 정치 형태를 구상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생각은 상주하는 외관을 파견 할 것과(제7조)지방의 호우세력을 억제해야 한다는(제17조) 건의에 잘 보이고있다. 백성을 다스리는 것은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 집권화 된 통치권력이어야 하며, 그것이 분산됨으로 해서 인민들이 괴로움을 받아서는 안 된다.이처럼 그는 중앙집권적인 정책을 강조하였고 또 그 최고권력자로 국왕을 지목하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왕권이 지나치게 강대해져도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가령 그가 시무 제3조에서 시위군졸의 수를 줄일 것을 건의하고 있는 것은 그로 인해 왕권이 전제화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점은 이미 광종에게서 깊이 경험한 때문이었다. 최승로는 광종과 같은 있었다.
    인문/어학| 2005.04.20| 6페이지| 1,500원| 조회(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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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조선시대의 양반 평가A좋아요
    조선시대 양반문화< 목 차 >Ⅰ. 서 론■ 양반(兩班)의 개념Ⅱ. 본 론< 양반(兩班)문화의 내용과 형식 >■ 양반(兩班)의 형성■ 양반(兩班)의 특권■ 양반(兩班)의 생활Ⅲ. 결론■양반사회의 신분변화Ⅰ. 서 론< 양반의 개념 >- 양반이라는 용어의 본래 의미는 조정에서 의식 등이 치러질 때, 그곳에 참석하는 현직 관료들을 총칭하는 것이었다. 고려, 조선 시대에 걸쳐 국왕은 중국 역대 왕조의 황제를 모방해서 의식 등에서는 남쪽을 보고 관료들을 대했는데, 국왕을 향해 오른쪽 즉 동쪽에 문관이 위치하고, 왼쪽 즉 서쪽에 무관이 늘어서는 것이 관례였다. 양반의 ‘반’은 열을 의미하는데, 양반은 두 가지 열, 즉 문관들이 늘어서는 동반과 무관들이 늘어서는 서반의 총칭이었던 것이다.관제상의 문무 양반체제로 발전하는 것은 995년(성종 14) 고려가 당나라의 문?무산계(文武散階) 제도를 받아들이면서이다. 이때의 문반은 정치, 무반은 군사를 담당하고 있었을 뿐 문?무반(文武班)에 대한 차별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제도는 당의 제도를 그대로 채용한 것이기 때문에 실정에 맞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문반 위주로 되어 있었다. 이러한 불균형은 1390년(공양왕 2)에 무과(武科)가 설치되고, 92년(태조 1) 문?무산계가 제정 실시되면서 다소 보완이 되었으며, 1436년(세종 18) 무산계에도 정종(正從) 9품이 제정되면서 문?무산계가 갖추어져, 《경국대전》에서 성문화되었다. 이로써 조선조 양반체제의 제도적 기반이 되는 문?무산계는 확정되었고, 관제상의 문?무반이라는 의미의 양반개념도 확고한 제도적 근거를 가지게 되었다.양반의 개념은 관료체제가 정비됨에 따라 문?무반직을 가진 사람뿐만 아니라 그 가족과 가문(家門)까지도 양반으로 불리게 되어 그 의미가 확대되었다. 가부장적인 가족구성과 공동체적인 친족관계 때문에 양반관료의 가족과 친족도 양반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이러한 추세는 음직(蔭職)과 과거(科擧)를 통한 관직의 세전(世傳)과 폐쇄적인 혼인관계를 통해 심화되었다고 그들은 농장을 개발하면서 지주로서의 기반을 굳건히 하고, 성리학적 소양을 쌓아 체현하면서 새 왕조의 사회 교화를 책무로 자임하는 사족으로서 자신들을 정립시켜 나가며 성리학적 가치질서를 실현하고 국가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국가 공인의 사회적 지주(支柱)로 등장하게 된다. 그들이 바로 양반이다.그들은 사림세력으로 중앙정계와 각 군현으로 진출하면서 그들의 입지를 강화하고 군현단위 향촌사회 지배의 정통성과 정당성을 확립하고 과시하며 자신들의 결속을 다지고 그 주도하에 농민층의 교화와 향촌사회에의 안착을 꾀하였다.조선 전기에는 재생산구조의 저자립성으로 인해 농민들이 많은 것을 지주층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특히 그것은 병작반수라고 하는 전호경영의 전형적인 형태로서 광범하게 존속하고 있었다. 또한 마찬가지로 저자립성으로 인해 유망하기 일쑤인 농민층을 공동체적으로 결속해 향촌사회에 안착시키는 일은 곧 지주사족의 지배기반의 확보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이에 따라 지주사족층이 중앙정계와 각 군현단위 향촌사회에서 16세기 이래 특히 적극적으로 추진해 간 것이 향약의 보급운동이었다.향약은 성리학적 지배질서를 향촌사회에 실현코자 하는 자치규약으로 고안된 것이나, 조선사회에서는 성리학적 윤리규범 그 자체에 독특한 사회적 해석이 가해지면서 그것이 향약에 수용되어 가며 그 해석의 핵심은 주(主)?노(奴)의 관계를 군(君)?신(臣)의 분(分)과 같은 충(忠)으로 극단화시켜 강조한 점, 사족과 일반 농민과의 관계를 오륜 가운데의 장(長)?유(幼)의 분(分)인 제(悌)로 해석하여 확대 적용한 점, 그리고 사족신분 상호간의 관계를 역시 오륜의 붕우(朋友)관계로 해석함에 따라 종래까지의 혈연, 학연 따위 좁은 유대관계를 상대적으로 불식하고 국가사회를 주도해 가는 보편적 주체로서의 자신들을 인식하려고 하였다.그러한 인식은 성리학적 사회윤리규범의 확산, 향약의 보급과 함께 향촌사회가 실제로 지주사족의 주도하에 운용되고, 그 집중으로서의 국가 정치가 그들에 의해 장악되면서, 조선왕조 일대를 규정하는 전형 격하시켰다. 그리하여 조선 초기에 이르러 지배신분은 상급 지배신분층인 양반과 하급 지배신분층인 중인으로 양분되게 되었다. 이에 조선 초기의 사회신분은 양반, 중인, 양인, 천인으로 대별되었다.양반은 고려시대부터 지주요 노비주로서 과거시험등을 통하여 계속 관직을 차지하였고, 그들끼리 폐쇄적으로 통혼함으로써 지배신분층을 구성하게 되었다. 더구나 조선시대에 이르러 지배층이 양분화하여 양반과 중인이 갈리게 되자 양반과 양인의 신분차는 더욱 현격하게 되었다.조선 초기에 이르러 향리, 서리, 기술관, 서얼, 토관, 장교 등은 중인층으로 격하되었다. 양반은 이들 중인들에게 복잡한 행정 실무와 업무를 일임하고 그들은 시문을 즐기고 수기치인의 방도를 궁구하는 데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양반은 중인을 일반 백성들의 불만을 막아내는 완충벽으로서의 역할을 하도록 한 것이다. 중인들은 양반정권에 기생하면서 양반들로부터 여러 가지 차별대우를 받았다. 이 때문에 양자간에 마찰이 일어나는 경우도 많았고, 그들의 행정업무를 이용하여 부를 축적하는 경우도 많았다.그러나 이들도 과거나 입공을 통하여 양반으로 상승할 수도 있었고, 양반 중에도 중인의 직종에 오랫동안 종사하면 중인으로 격하되기도 하였다.뿐만 아니라 양반, 중인, 양인, 천인의 네 신분층 간에도 신분이동이 일어날 수 있었다. 양반이 반역죄를 지면 노비가 될 수도 있고, 가문이 몰락하여 양인과 마찬가지로 될 수도 있었으며, 오랜동안 아전으로 종사하면 중인으로 떨어지기도 하였다. 또한 양인이나 중인이 과거나 입공을 통하여 양반이 될 수도 있었고, 극히 드문 일이기는 하지만 노비가 공신이 되어 양반으로 상승할 수도 있었다. 즉 신분간에 카스트적인 장벽이 놓여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분간의 이동이 일반화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사회변동과 역사발전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양반층에 편입되어 갔다. 그리하여 양반층의 특권이 희석되는 반면에, 양반층 내의 대가, 세가, 향반, 잔반 등의 구분이 생기게 되었다. 즉 조양인들은 과거응시 절차에 있어서도 양반보다 까다로웠다. 과거 응시자들은 응시서류로서 호적과 보단자(保單子)를 내게 되어 있었다. 4조(祖)(증조, 조, 부, 외조) 안에 현관(顯官)이 있는 양반은 보단자를 낼 필요가 없었으나, 4조 안에 현관이 없는 양인은 보단자와 아울러 지방에 사는 경재소원 3인, 서울에 사는 사람은 해당 부(部)의 관원 3인의 추천서를 제출하도록 되어 있었다. 양인이 이들의 추천서를 받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양인이 전혀 문과, 생원?진사시에 응시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집안이 넉넉하고, 여건이 갖추어진 사람이면 문과에 급제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수는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물론 양반은 가문의 혜택으로 관리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공신이거나 3품 이상의 고위관료일 때는 자식이나 사위 중에서 1명을 간단한 시험을 거쳐 관리에 임용했다. 그러나 5품 이상의 관료이면 그 자제에게 관직을 준 고려와 비교하면, 조선에서는 가문의 혜택으로 관료가 될 수 있는 인원이 대폭 축소되었다. 게다가 조선시대에는 음서로 특채되어 관직에 나가봐야 하위직에 머무를 뿐 고위관료는 될 수 없었다. 조선시대에는 관직 중에서도 권력의 최정점인 재상의 반열에 오르려면 자신의 실력으로 과거시험을 통과해야만 했다. 따라서 조선의 양반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과거시험에 합격하려고 노력했다. 조선에서 능력이 없는 자는 양반신분을 유지할 수 없었으며, 자신부터 4대 조상까지 그 사이에 관리가 없으면 그 집안은 양반신분에서 탈락되기도 했다. 따라서 조선의 양반은 신분이 하락하여 중인, 양인, 심지어는 노비로도 신분이 전락할 수 있었다.2. 군역제- 조선시대의 군대는 대체로 신분에 따라 다양하게 편성되었다. 양반의 군대로 볼 수 있는 갑사, 별시위, 내금위, 충의위, 충찬위, 도성위, 호익위 등이 있고, 일반 양인은 정병, 그리고 천인은 잡색군이나 속오군 등에 편성되었다. 조선시대의 군대는 신분에 따라 편제된 까닭에 각각에 대한 차별대우가 존재하노비는 양반의 사회적 권위와 경제적 여유를 제공해 주는 주요한 생활근거였다. 노비의 봉사가 있음으로해서 양반은 생산노동에 직접 종사하지 않고 학문과 관직에만 종사하여 조선사회의 지배층으로 군림할 수 있었다. 또한 스스로는 육체 노동을 하지 않았던 양반층에게 그들의 수족인 노비는 불가결한 존재였다. 노비를 소유하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양반으로서의 사회적 인정을 받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노비는 양반의 수족으로서 양반 가정 내의 여러 잡일을 수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양반이 소유한 경지의 노동력으로서도 중요한 존재였다. 그러므로 양반은 어떻게 해서든지 많은 노비를 확보하려 하였다. 노비는 토지와 함께 양반에게 가장 주요한 재산이었다. 그들은 되도록 많은 노비를 확보하기 위하여 노비신분법을 마련하였다.양반은 노비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기 위하여 법제적으로 이들을 천인화하고 양반과 노비와의 관계를 하늘과 땅, 위와 아래의 지배?복종관계로 묶어 놓았다. 따라서 노비가 양반상전에게 대항하거나 양반여자를 간통하였을 때는 극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양반이 잘못을 하였을 경우 매를 대신 맞기도 하였다. 또한 노비에게는 종모법이 실시되었다. 가부장적인 가족 구성을 원칙으로 하는 조선사회에 있어서 가계는 반드시 부계를 따르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노비에게만 유독 모계를 따르게 한 것은 노비를 가축과 같은 재물로 보았기 때문이다.2. 봉제사와 접빈객- 양반들의 생활 신조로서 가장 중요시된 것은 ‘봉제사’와 ‘접빈객’이었다. 봉제사는 조상에 대한 제사를 빠뜨리지 않고 정중히 지내는 것을 뜻하며, 접빈객은 친족과 벗을 비롯한 방문객을 정중하게 대접하는 것을 뜻한다.여기서는 조선시대 양반인 오희문(1539-1613)의 을 실례로, 봉제사와 접빈객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겠다.먼저 봉제사에 대해 살펴보자. 오희문은 1년간 28번이나 되는 제사를 지냈다. 이것은 월 평균 두 번 이상의 비율이다. 제사 한번 치르는 데에도 그 준비를 수일 전부터 시작해야만 하기 때문에 오희문의 일상 생
    인문/어학| 2005.04.20| 9페이지| 1,500원| 조회(1,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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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사] 붕당정치
    붕당정치Ⅰ. 서론-조선시대에는 핵심적인 권력층에서 배제된 채 초야에 묻혀 있던 사림세력이 成宗 以後부터 서서히 중앙정계에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기존 勳舊勢力의 견제나 배척 또한 만만치 않아 종국에는 네 번에 걸친 士禍로 비화되었다. 이러한 士禍의 여파로 士林勢力은 그때마다 큰 타격을 입었지만 乙巳士禍를 주도했던 소윤 정권이 중종비 文定王后의 죽음과 함께 몰락함으로써 政界의 主導權을 잡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先祖代에는 政界의 主流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도 强硬派와 穩健派의 對立 등 의견충돌이 있게 되었다. 그러한 대립?갈등이 확대되어 드디어는 朋黨을 이루어 대치하는 양상으로 치닫게 되는데, 이렇게 시작된 政治를 朋黨政治라 한다.여기서는 朋黨論, 朋黨政治의 成立과 發達, 朋黨政治의 變質과 衰退, 그리고 이러한 朋黨政治가 발생한 원인을 알아보고 그 결과로서 평가를 해보고자 한다.Ⅱ. 붕당론-16世紀 後半 政權을 장악한 士林은 政治의 中心을 王에서 士林으로 바꾸어 버렸다. 이는 매우 중대한 意味를 지닌다. 中國의 경우는 우리 나라보다 훨씬 앞서서 士林 政治論이 登場하였으나 中國의 마지막 왕조인 청조가 멸망할 때까지 한번도 政治의 主導 勢力이 臣下로 移動한 적이 없었다. 이 部分에서는 中國과 우리 나라에서의 朋黨에 대한 認識과 朋黨의 意味 및 朋黨 政治論 등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朋黨은 儒敎 政治思想에서도 당초에는 禁忌의 대상이었다. 中國의 경우, 漢·唐 時代까지도 政治는 君主 한 사람의 것이라는 認識이 강하여, 君主 앞에서의 臣下들 간의 朋黨은 거의 罪惡示되다시피 하였다. 漢代의 당고의 화는 바로 그러한 觀念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그런데 宋代에 들어와서 그러한 朋黨觀은 바뀌게 된다. 집단, 무리로서의 朋黨은 政治에서 부정될 수 없는 것이란 前提 아래, 구양수의 ?朋黨論? 및 朱子의 이른바 ?引君爲黨說?등과 같은 새로운 해석이 제시된다.歐陽脩는 우선 朋黨을, 公道의 실현을 추구하는 자들의 모임인 ‘君子의 黨’과 私利 도모를 일삼는 ‘小人의 우리 歷史에서도 그것에 뒤이어 朋黨觀 또한 달라지게 된 변화가 확인된다.Ⅲ. 붕당정치의 성립과 발달(1) 사림의 대두와 정치체제의 변화여기서는 16世紀 士林의 執權 過程과 東?西 分黨까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士林의 정치참여는 단순한 관료로서가 아니라 朋黨이란 政治勢力으로 이루어졌는데, 전술한대로 그것은 지금까지의 國王中心의 政治構圖와는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정치세력으로서의 朋黨은 정국운영의 구도를 朋黨 相互間의 力學關係에 두었고, 이를 건전하게 이끌어가기 위하여 性理學的 체계에서 정치적 이념을 모색, 도덕적 정통성을 희구하였다. 따라서 朋黨의 정국운영은 士林이 하나의 特權的 集團으로서 양반사회를 보다 강도 있게 구축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는 데서 그 意味가 크다고 하겠다.士林派가 擡頭하기 시작한 것은 15世紀 後半의 일이었다. 士林은 문자 그대로 선비의 숲이란 뜻으로서, 현직 관료보다는 在野의 知識人을 포괄하는 용어이다. 詞章보다는 經學에 뜻을 두었던 이들이 중앙정계에 등장한 것은 成宗 때로 보아야 한다. 이에 대한 이의는 거의 없다.그들은 成宗의 왕권 강화 의도에 부합해서 언론계로 진출을 해서 勳舊勢力을 공격했다. 士林이 중앙 정계 진출을 모색한 것은 勳舊勢力이 권력형 부정을 저지르면서 재향 中小地主인 이들 士林의 社會?經濟的 基盤을 위협했기에 自救策으로 나온 것이다. 士林이 정계 진출을 모색할 당시 成宗은 勳舊勢力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는 상태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强化하기 위해 1478年(成宗 9)에 藝文館에서 弘文館을 분리하였다. 곧 弘文館에 經筵權을 두어 士林을 등용한 후 勳舊勢力을 견제하였다. 이에 士林이 부합해서 정계의 진출이 이루어 진 것이다.이후에 士林勢力은 네 차례에 걸친 士禍를 당하게 된다. 燕山君의 朋黨에 대한 인식은 漢·唐代에 中國에서 朋黨을 인식하던 것과 같았다. 이런 否定論的 認識이 강하여 朋黨을 조직했다는 이유로 士禍를 일으켰다. 中宗代에도 趙光祖 등이 政治를 이끌어 보기도 하지만 이들 역시 士禍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정계에서 탄핵된다系가 궁극적으로 정치적 우위를 획득함에 따라 자연히 해소되게 된다. 즉 宣祖 卽位 무렵부터는 士林系의 우세 아래 歐陽脩, 朱子의 朋黨論이 정론의 자리를 확실히 정하게 된다.(2) 붕당정치의 발달朋黨政治의 發達期라고 하면 비교적으로 朋黨政治의 장점이 부각되던 때, 즉 肅宗代의 換局이 있기 전까지를 意味한다. 이 시기의 가장 큰 특징은 朋黨政治의 원칙이 지켜진다는 데에 있다. 그 원칙이란 자신이 정권을 잡았다고 다른 黨派를 배척하지 않고 言官에 등용해서 스스로 견제가 가능하도록 조치해 놓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시기는 비록 黨派가 여럿으로 나누어지기는 하나 비교적 부정부패가 없는 깨끗한 政治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朋黨政治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상호견제가 이루어짐으로 인하여 가능하였다고 할 수 있다.16世紀 戚臣政治는 先祖의 즉위로 일단 외형적으로 종식된다. 그러나 宣祖와 光海君代는 16世紀의 戚臣中心의 정치가 17世紀 士林의 朋黨政治로 옮아가는 과정의 過渡期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先祖 즉위 후의 政局은 정치의 주도권이 士林系에게 완전히 넘어간 것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이것은 잘못된 인식으로 보인다. 舊 政治의 핵심인 戚臣이 제거된 상태에서 士林系의 진출이 상대적으로 용이해진 것은 사실이나, 그 진출이 혁명적 수단에 의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戚臣政治 아래서 성장한 舊臣類의 다수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사실 앞 시기의 勳臣?戚臣 중심의 政治가 존속한 기간이 70여 년이나 되었으므로, 舊 體制的 요소의 척결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宣祖 8年의 東?西 分黨은 이러한 관점에서 볼 수 있다. 沈義謙의 중용 문제를 둘러싸고 나타난 대립은 결코 우연이라고 볼 수 없다. 김효원을 중심으로 한 신진의 士林들은 명종비의 동생인 심의겸을 戚臣으로 몰아 배척하였다. 그런데 沈義謙은 평소 士林을 옹호하여 많은 士林들을 정계에 등장시키기도 한 인물이므로 그의 후원을 받은 士林들이 오히려 김효원을 비판하고 沈義謙을 두둔하는 입장을세 아래 南人과의 공존체제가 성립될 수 있었던 것은 양자가 서로 公道의 실현을 위한 노력을 가지는 朋黨이란 것을 인정하는 바탕에서였다. 이러한 견해는 너무 긍정적 인식이라고 생각이 되기도 하지만 상대 黨派에 대한 적극적 보복행위는 보이지 않았고 또한 山林制度의 확립을 통해 정치여론이 체계적으로 수렴되었기에 黨爭 否定論은 수정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黨爭 否定論者들은 흔히 ‘四色 黨派’라고 하여 치열하게 싸운 듯이 표현하지만 조선조에서 한번도 四色 黨派-北人?南人?老論?少論-가 함께 존재한 시기가 없었다. 이는 黨爭 否定論의 억지를 잘 나타내주는 부분이기도 하다.肅宗代에 들어와서 換局이라는 형태가 있기 직전까지는 이러한 원리가 비교적 잘 지켜졌다. 두 차례의 禮訟論爭이 있기는 했으나 이때에도 원리는 지켜져서 상대 黨派가 일정 수 등용되었다. 이후에 朋黨政治의 원리가 변질이 되기 시작하여 換局이라는 정치 형태를 맞이하게 된다.이때까지는 責任政治의 具現으로 민란이 적었고 어느 정도 전란의 피해를 극복해 나갔던 시기라고 볼 수 있다.Ⅳ. 붕당정치의 變質과 衰退(1) 朋黨政治의 變質17世紀 전반기에 性理學的 朋黨政治의 구현을 본 朝鮮王朝의 政治는 그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새로운 변동을 겪게 된다. 朋黨間의 공존 의식이 무너지면서 어느 정파이든지 간에 一黨專制의 성향이 강하게 발휘되어 政爭이 격렬해지는 양상을 보인다. 즉 일단 한번 정권을 잡으면 상대 당파에 철저하게 보복하는 파행적 政治行態가 계속된다.政局의 변동이 잦은 17世紀 후반은 社會經濟的으로도 변화가 많은 시기였다. 약 반세기여 전에 몇 차례의 외침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던 농경지도 이 무렵에 이르러서는 거의 복구되고 또 貢納制度의 폐단을 없애고자 새로 실시된 大同法도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하고, 국제 무역에서도 약 반세기 전에 日本과의 국교 재개가 이루어진 이후로 누리게 된 중개무역의 이득이 점차 비중이 높아갔다. 이처럼 질적인 변화를 가져오기에 충분한 經濟 變動이 다방면에 걸쳐 일어났던 만큼 社會的 變化도 자연히 것은 이러한 새로운 경제변동에 직면하여 名分論 위주의 종래의 性理學的 정치운용이 한계에 부딪치게 된 것을 뜻한다. 보다 확대된 새로운 재부 획득의 기회를 둘러싼 정치적 이해관계가 종래의 朋黨간의 공존의식에 균열을 일으키고, 나아가서 學派가 곧 政派라는 종래의 朋黨要件마저 퇴색시켜 놓았던 것이다.(2) 蕩平策의 擡頭와 特質肅宗?景宗 연간의 政爭의 격렬성은 士禍를 능가했다. 이 속에서 戚臣의 비율은 계속적으로 높아져 갔고 王權은 다시 弱해져가기 시작했다. 이에 肅宗은 蕩平을 추구하기에 이른다.원래 朋黨政治의 원리가 지켜지는 속에서의 王權은 朋黨間의 대립을 기반으로 하여 절묘하게 강화되어 왔다. 그러나 그 균형이 무너지면서부터는 王權이 서서히 臣權에 침해되는 현상이 일어났다. 그 속에서 肅宗은 王權의 강화를 위해서 蕩平을 모색하였으나, 肅宗의 蕩平은 王 스스로가 편당적 조처를 취함으로서 蕩平 본래의 意味를 잃었다는 한계를 지닌다.景宗의 보호 속에서 간신히 왕위에 오른 英祖는 즉위 후 바로 蕩平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그의 즉위를 도왔던 老論을 처음에 등용해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했다. 그 사이 자신을 지지하는 蕩平派를 육성해서 즉위 5年 후부터 본격적으로 蕩平策을 추진하게 된다. 英祖의 蕩平策은 肅宗때와는 달리 비교적 여러 黨派를 골고루 등용했다. 그의 이러한 蕩平策은 正祖에게도 계승이 되어갔다.그러나 英祖와 正祖代의 蕩平도 역시 한계가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英祖 역시 자신을 지지했던 老論을 중용했던 것은 사실이며 또한 英祖 즉위 후에도 換局은 있었다. 正祖 또한 南人을 중용했었다. 그러나 蕩平策은 나름대로 큰 의미를 지닌다.양대의 政治는 결코 개별적인 취향의 산물이 아니라 시대적인 조건의 결과였고, 李麟佐의 亂 이후 朝鮮王朝의 政治는 새로운 사회경제적 변동에 따라 性理學的 朋黨政治가 한계에 부딪쳐 國王이 政治를 직접 주도하는 것이 하나의 새로운 방향으로 잡혔던 것이다. 이처럼 양대의 政治는 朋黨間의 대립을 억제하고 國王權을 신장한 점에서 확실히 새로운 것이었다.蕩平策이다.
    인문/어학| 2005.04.20| 7페이지| 2,000원| 조회(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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