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상으로서의 광개토왕비문국사책이 모두 맞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한창 일본 교과서의 왜곡을 알게 된 이후부터였다. 앞으로 나라를 이끌어갈 주인공들에게 왜곡된 역사를 가르치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과거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것은 현재의 눈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것인지 진짜 역사적 사실이란 것은 단 하나의 가공을 거치지 않은 순수한 사실일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의문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심각해진다. 한·중·일 삼국이 모두 서로 조작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는 고대사로 가면 이것은 더 이상 역사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이데올로기의 문제, 정치의 문제로 확장된다. 따라서 일본 교과서의 왜곡문제는 일본과 한국의 문제만이 아니다. 근대 동아시아 문화가 왜곡되는 문제이며 자국 중심적인 역사를 공부한 학생들이 올바른 역사관을 갖기 힘들게 하는 문제인 것이다.책의 앞부분에서는 우리 나라의 역사는 일본을 의식하면서 해석되어왔고 일본의 역사는 서양인들을 의식해 존재해 왔다고 했다. 우리 나라는 일본이 우리를 신민으로 보려고 하는 것에 대항하여 항상 민족사를 일으키려 하였다. 일본에서는 서양에 보내기 위한 자료로서 역사서를 썼던 것이다. 그러한 역사서가 최초의 교과서 '국사안'의 원형이 되었다. 이렇게 고대의 역사는 다른 민족에 대한 우리민족의 우월함을 찾는 것으로부터 시작했고, 만들어지기 시작했다.왜 왕권’이 한반도 남부를 약 2백년 간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 설의 근거가 된 광개토왕 비문의 해석 차이는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꾸준히 제기됐다. 일본교과서 역사왜곡 문제로 한·일 관계가 미묘해지기도 했다.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고대사의 해석이 첨예하게 대립된 단적인 예가 바로 광개토왕 비문의 해석 문제이다. 광개토왕 비문은 고구려의 건국신화에서 시작해 동아시아의 유동적인 국제 관계, 고구려의 이민족 지배, 수묘인 체제, 고유법 등 여러 가지 문화적 모습을 응축시킨 고구려 문화의 결정체지만, 1천7백75자에 달하는 비문 전체가 해석되기보다는 유독있다.1889년 일본에서 출간된 「회여록」을 바탕으로 한 광개토왕 비문의 해석 중 문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渡, 破百殘□□新羅以爲臣民[백잔·신라는 본디 속민이었으므로 원래 조공을 하였다. 그런데 왜는 신묘년(391년)에 와서 바다를 건너 백잔·□□(임나)·신라를 쳐부수고 신민으로 삼았다.]일본 사학자들은 이 해석에 따라 적어도 4세기 말부터 야마토 정부가 한반도 남부를 예속시켰음을 주장해왔다. 사학자 시라토리 구라키치는 비문에 쓰인 왜와 고구려의 전투를 당시 교전 중이었던 일본과 러시아의 각축전에 비겨 근대 일본이 최초로 벌인 대외전쟁에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반면 정인보를 시초로 일본측의 해석을 정면으로 부정했던 한국사학자들은 비문에서 왜가 차지하는 비중을 줄여 고구려 우위의 정세로 해석하려 하였다. 사학자 김석형은 광개토왕 비문의 해당 구절을 왜 , 즉 일본에 대한 한민족의 압도적인 승리를 기록한 텍스트로 해석했으며, 이진희는 심지어 일제에 의한 비문 변조설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변조설이 설득력을 상당히 잃은 상태이므로 변조설은 사실상 의미가 없어졌다. 변조설에 근거한 한일고대사의 해석은 사상누각이다. 왜냐하면 변조설이 잘못된 이론이라고 판정된다면 한국의 학계는 그 자리에서 무너져 버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사실 변조설이 등장하게 된 것도 이 32글자에 대한 해석이 우리에게 너무 불리하게 나왔다고 본다. 불리한 점을 보면.....- 왜 백제를 두고 백잔이라고 썼을까?- 우리 학계대로 신묘년 이후 기사가 고구려의 행위라면 왜 예전부터 고구려의 속민인 백잔 등을 다시 공격해서 신민으로 삼을까?- 왜는 도대체 누구일까?- 왜가 처들어 왔는데 고구려는 어찌하여 왜를 공격하지 않고 잔국 그 중에서도 이잔을 공격할까?(흔히 백잔은 백제의 비칭(낮춤말)이라고 하는데 이는 아직 비석에 대해 알지못하던 조선 말기에 나온 증보문헌비고에서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지 역사적인 고증이 되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이와 같은 문제점수 있는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광개토왕비문의 해석에 대한 나의 생각은 대체적으로 일본이 해석한 것에 대해 부정적이다. 몇 가지 이유를 들어 설명하겠다.첫째, 왜라는 실체는 일본사에서도 하나의 독립된 국가로 보지 않는다. 따라서 비문에 나오는 왜는 그렇게 중요한 나라 따위가 아니다. 오히려 왜는 실제 당시 건너온 군사집단이었다.둘째, 4세기 중엽에 일본에 고대 국가가 성립하여 바다를 건너 식민지를 가질 정도로 강대했었나? 라는 생각이 든다. 일본이 7세기까지 당에 갈 때 신라의 배를 타고 갔다고 한다. 일본 배는 평저선이라 파도에 약하기에 일본 해적 배도 봄여름에만 출몰하고 겨울에는 노를 저어서는 오지 못했다. 그런데 어떻게 몇 만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와서 200년이나 지배할 수 있겠는가? 거기다가 임나와 관련된 유물은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결락된 부분을 임나라고 해석하기에는 일본의 섣부른 해석이었다고 본다.셋째, 아주 특이한 것은 이 시기 신묘년(391년)까지 삼국사기에는 이와 관련된 기사가 하나도 없다. 아니 이 시기에 대한 기사 자체가 아예 없다. 마치 의도적으로 빼어놓은 것처럼 말이다. 언제, 누군가가 필요에 의해 훼손하였는지, 그냥 기사화하지 않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일본의 해석이 옳다는 것은 찾아 볼 수가 없다.넷째, 비가 오랫동안 풀숲에 묻혔다가 최근에 영희(榮禧)가 이를 발견하였는데, 그 비문 가운데 (고주몽)고구려가 땅을 침노해 빼앗은 글자는 중국인들이 모두 도부로 쪼아 내어 알아볼 수 없는 글자가 많고 그 뒤에 일본인이 이를 차지하여 영업적으로 이 비문을 박아서 파는데 왕왕 글자가 떨어져 나간 곳을 석회로 발라 알아볼 수 없는 글자가 도리어 생겨나서 진적한 사실은 삭제되고 위조된 사실이 첨가된 것 같다. 비문을 일본인들이 차지한 후 결락된 글자가 많아 졌다는 것은 비문의 변조가 있었음을 암시한다.광개토왕비의 왜 관련 부분을 훼손한 일본인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일에 일본군 참모본부가 개입된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A.D 가지고 온 쌍구가묵본이 A.D 1889년 6월에 「회여록」 제5집에 게재되어 외부에 발표되었는데, 그 쌍구가묵본에 왜 관련 부분이 집중적으로 결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사코오 대위가 쌍구가묵본을 만들어 일본으로 가져 왔을 당시 사코오 대위의 신분은 은밀하게 활동해야 하는 스파이 신분이었다. 또 사코오 대위가 가지고 온 쌍구가묵본을 참모본부 편찬과에서 학자들을 동원하여 해독하는데 약 5년 정도 걸렸다. 따라서 사코오 대위가 아무리 유능하였다고 하더라도 학자들이 해독하는데 약 5년 정도 걸린 일을 사코오 대위가 비문을 본 즉시 바로 해독하여 청국인 모르게 비문 중 일본에 불리한 문구를 훼손하고 쌍구가묵본을 만들 수는 없었을 것이다. 즉, 사코오 대위는 비문의 왜 관련 부분을 훼손하지 않고 원 비문대로 쌍구가묵본을 만들어 일본으로 가져 왔다. 이는 사코오 대위가 쌍구가묵본을 만들어 일본으로 가져온지 약 10년이 지난 A.D 1895년(「회여록」 제5집에 게재되어 외부에 발표된지 6년 후)에 계연수님이 광개토왕비를 보았을 때 왜 관련 부분이 거의 손상되지 않고 있었다는 점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따라서 사코오 대위는 원 비문 그대로 쌍구가묵본을 만들어 일본으로 가져 왔고, A.D 1889년 6월에 「회여록」 제5집에 게재되어 외부에 발표된 쌍구가묵본( 왜 관련 부분이 집중적으로 결락된)은 참모본부 편찬과에서 변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A.D 1895년에 계연수님이 광개토왕비를 보았을 때 비문의 왜 관련 부분이 거의 훼손되지 않고 있었는데 그 이후에 변조한 쌍구가묵본대로 비문의 왜 관련 부분이 훼손되었다는 것은 A.D 1895년에 계연수님이 광개토왕비를 본 이후 일본군 참모본부에서 집안으로 사람을 보내어 변조한 쌍구가묵본대로 광개토왕비의 왜 관련 부분을 훼손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인들이 비의 왜 관련 부분을 훼손한 시기는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이겨 집안에 있는 광개토왕비를 장악한 A.D 1895년경으로 추정된다. 그 뒤 일본인들은 비의 전면에 석회를 발라 글자를 만902년에 북경의 금석학자 양수경이 입수한 탁본, A.D 1907년 4월에 프랑스의 동양학자 사반누가 입수한 탁본 등이다. 이 내등 탁본은 양수경 탁본과 거의 같은 특징을 갖추고 있었고, 새카만 바탕에 자형이 뚜렷하고 글자가 선명하게 나타나 있었고, 사반누 탁본에는 양수경 탁본에 없던 글자가 나타나거나 다른 글자로 바뀐 것이 있었다. 이는 일본인들이 내등 탁본을 만든 후 비(碑)에 다시 석회를 발라 글자를 만들어 넣거나 다른 글자로 바꾼 후 탁본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양수경 탁본에는 없다가 사반누 탁본에는 나오는 글자 중 하나가 "안라인수병" 뒤에 나오는 "만"자이다. 이는 1895년경에 집안으로 파견된 참모본부 편찬과 장교들이 변조한 쌍구가묵본대로 왜 관련 부분을 훼손하였다가 뒤에 전에 훼손한 "만" 자가 임나일본부 학설을 뒷받침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고 "만"자를 도로 만들어 넣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A.D 1883-1884년경에 사코오 대위가 쌍구가묵본을 만들어 일본으로 가지고 온 때로부터 10여년 내에 비문에 관한 글을 지은 일본인들은 모두 A.D 1889년 6월 「회여록」 제5집에 게재되어 발표된 쌍구가묵본을 인용하였고, 그들은 한결같이 사코오 대위의 신분을 극구 감추고 "某人(모인)" "某 日本人(모 일본인)" 등으로 적었다. 사코오 대위의 신분이 노출된 시기는 그로부터 30여년 후 참모본부에서 퇴역한 장교가 술기운에 입을 경솔하게 놀렸을 때이다. 이처럼 일본인들이 사코오 대위의 신분을 수십년 동안이나 극구 감춘 것은 사코오 대위가 만들어 일본으로 가지고 온 쌍구가묵본을 그후 일본군 참모본부 편찬과에서 변조한 사실이 사코오 대위의 신분이 노출됨으로써 들통 날 것을 우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에 이진희가 일본의 3차에 걸친 석회도부 작업이 있었다는 사실 등을 들어, 문제의 비문 중 왜(倭) 이하 도(渡)·해(海)·파(破) 등 4자를 믿을 수 없다고 하였다. 왜 에 대한 내용이 불리하다하여 다른 나라의 문화유산을 자신들 마음대로 석회도부 작업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