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있는 일제의 잔재에 관하여―광화문부제 : 『우리는 지난 백년 동안 어떻게 살았을까』를 읽고학 과 : 철 학 과학 번 : 199800121이 름 : 곽 기 영서론우리가 일반적으로 고등학교 국사 시간에서 주로 배우는 것이나 대부분 국사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거의 굵직굵직한 역사적 사건이나 왕조에 관한 일들이 대부분이다. 일반 서민 또는 집권층이 아닌 계층에 대한 모습은 잘 모른다. 『우리는 지난 백년 동안 어떻게 살았을까』는 그런 서민들의 생활 문화 위주에 관한 책이다. 특히 그 중 한국사에서 중세 사회에서 근대 사회로 변화하는 시기에 관한 책이다. 이 책은 문학부터 시작을 하여 관혼상제(冠婚喪祭)등 각종 사회 전반적인 근대화의 모습과 그에 대한 변화 후의 영향에 대해서이다. 하지만 근대화라는 개념은 기능론적 관점에서 말하는 분화 또는 성장의 개념 이외에도 그것이 사회구성원들에게 행복과 만족을 제공할 때 가치가 있는 것이다.{) 『한국 민족 문화 대백과사전』(한국 정신 문화 연구원, 1993)하지만 그러한 면보다는 오히려 한국적으로 근대화가 되기보다 오히려 서구적으로 변화되었다. 특히 지리적으로 가까운, 먼저 근대화가 된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러한 근대화는 우리의 것을 살리자는 의도에서 외세에 대한 반감으로 나오게 되고 사회적으로 혼란을 야기했다. 이런 혼란 틈에 우리는 일본과 서양 열강의 세력 하에 놓이게 되고 결국 한일 합방이라는 치욕적인 일을 맞이하게 되었다. 비록 이런 문제점이 아닌 좋은 면들도 있지만 한국 근대사에 일본의 식민지 하에 놓이게 되는 일을 야기했다. 그리고 광복 57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식민지 시절의 잔재가 오늘날까지 남게 되는 것은 문제이다. 그 중 「광화문 수난사」편은 그러한 면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경복궁(景福宮){) 경복궁(景福宮)은 『시경(詩經)』 주아(周雅)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복을 도우리라(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 에서 두 자를 따서 경복궁(景福宮)이라고 지었다.과 광화문(光化門){) 광화문(光化門)은 나라의 존엄과 문화가 만방에 널리 비친다(光被四表化及萬方)라는 말에서 생겨났다.의 역사(조선 총독부 건설 이전까지)왕권을 상징하는 큰 규모의 건물은 궁궐(宮闕){) 궁궐(宮闕)이라는 말은 궁(宮)과 궐(闕)의 복합어이다. 궐(闕) 의 형태는 높다란 석대 위에 2층 누각을 세운 것 이 일반적이다. 광화문은 그러한 조선 시대 궁궐의 정문 가운데 유일하게 궐문(闕門) 형식을 갖추고 있다.이다. 경복궁(景福宮)· 창덕궁(昌德宮)· 경회궁(慶會宮)· 창경궁(昌慶宮)· 덕수궁(德壽宮)은 조선 시대의 5대 궁이다. 그 중 경복궁(景福宮)은 조선 시대 최초의 궁궐(宮闕)이고 조선 왕조의 심장이다. 그리고 그 정문인 광화문(光化門)은 조선의 얼굴이다.{) 『우리는 지난 백년 동안 어떻게 살았을까』경복궁(景福宮)은 조선 왕조의 건립에 따라 창건되었다. 초기 조선 태조(太祖)가 즉위 3년째에 신 왕조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창건한 궁궐(宮闕)이다. 즉위 3년째(1394)에 공사를 시작하여 즉위 4년째(1395)에 완공을 했다. 후 정종(定宗)이 즉위하면서 도읍을 다시 개성으로 옮기어 궁을 비우게 되었으나, 제 3대 태종(太宗) 때 다시 환도하여 정궁으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1553)으로 궁은 전소되고 말았다. 그때 창덕궁(昌德宮)·창경궁(昌慶宮) 등 다른 궁도 모두 불에 타벼려 난이 끝나고 왕이 환도하였을 때 선조(宣祖)는 잠시 다른 곳에 임시 어소(御所)를 정하였다. 궁의 복구 문제는 왜란 후부터 계속 논의되었으나 실천에 옮겨지지는 못하였다. 1606년에는 광화문(光化門)과 근정전(勤政殿)등 주요 건물만이라도 우선 지을 계획을 세웠으나, 일부 대신들이 공사가 커서 1, 2년에 끝낼 수 없으므로 후에 일을 시작하도록 만류하여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여기에다 경복궁(景福宮)이 길(吉)하지 못하다는 의견{) 이것은 과거 경복궁(景福宮)에서 단종(端宗)이 쫓겨난 일이 있고, 중종(中宗) 때에는 조광조(趙光組)가 사정전(思 政殿) 뜰에서 왕의 친국(親鞫)을 받고 사약을 받은 일이 있은 것 등이 작용을 했던 것 같다.이 있어서 결국 왜란 후 경복궁(景福宮) 대신에 창덕궁(昌德宮)이 재건되기에 이르렀다. 그 후 계속 재건의 계획이 세워졌지만 결국 실현을 하지는 않았다. 결국 소실 된지 약 270년이 지난 1867년, 대원군(大院君)의 강력한 의지로 궁은 여타 궁궐(宮闕)의 규모나 격식을 훨씬 능가하는 대규모로 다시 세워지게 되었다. 궁이 완성되고 나서 1866년에 고종(高宗)은 경복궁(景福宮)으로 옮겼다. 그러나 이때 외국 열강들의 세력 다툼으로 나라가 혼란해져 1895년에는 궁 안에서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고종(高宗)은 이어한지 27년째인 1896년에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경복궁(景福宮)은 빈 궁궐(宮闕)이 되었다.{) 『한국 민족 문화 대백과사전』(한국 정신 문화 연구원, 1993)(아관파천, 俄館播遷) 그 후 한일 합방을 거치며 조선 총독부가 건설됨에 따라 경복궁(景福宮)은 많은 수난을 겪게 된다. 그 중 광화문(光化門)이 많은 수난을 당한다.광화문(光化門)은 1395년 경복궁(景福宮)을 창건할 때 정전(正殿)인 근정전(勤政殿)과 편전(便殿)인 사정전(思政殿), 침전인 경성전(慶成殿)·연생전(延生殿)·강녕전(康寧殿) 등을 지어 궁궐(宮闕)의 기본 구조를 갖춘 다음, 1399년에 그 둘레에 궁성을 쌓은 뒤 동·서·남쪽에 성문을 세우고, 동문을 건춘문(建春文), 서문을 영추문(迎秋門), 남문을 광화문(光化門)이라 이름지었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대원군(大院君)에 의한 경복궁(景福宮) 중건 당시인 1865년에 다시 지어졌다.{) 앞에와 같은 책그 후 역시 광화문(光化門)도 경복궁(景福宮)과 마찬가지로 저선 총독부의 건설로 수난을 당하게 된다.조선 총독부{) 원래 조선 총독부는 광화문 앞 육조 거리에 별도의 사무실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식 목조 건축이라 새로 손질할 부분이 많아 왜성대에 목조로 된 임시 가건물 세 체를 급히 지었다. 하지만 왜성대에 있던 건물의 터가 비좁아 많은 불편한 점들을 해소하지 못해 결국 경복궁(景福宮)앞에 새로 짖게 되었다.건설 후의 광화문(光化門)1910년 국권을 잃게 되자 일본은 궁 안의 전(殿)·당(堂)·누각(樓閣) 등 4천 여칸의 건물을 헐어서 민간에 방매를 하고, 1917년에 창덕궁(昌德宮)의 내전에 화재가 발생하자 경복궁(景福宮)의 교태전(交泰殿)·강녕전(康寧殿)등을 철거하여 그 재목으로 창덕궁(昌德宮)의 내전을 지었다. 그리고 조선 시대의 정궁인 경복궁(景福宮)의 정문으로 국가의 권위를 상징적으로 대변하던 광화문(光化門)은 민족 항일기인 1927년 문화말살정책(文化抹殺政策)의 하나로 조선총독부 청사가 들어설 때 건춘문(建春文)의 북쪽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후에 6·25 사변 때 폭격을 맞아 편전(便殿)인 만춘전(萬春殿)과 함께 불타버렸다.{) 『한국 민족 문화 대백과사전』(한국 정신 문화 연구원, 1993)광화문(光化門)은 중건된 지 60년 만에 경복궁(景福宮)의 정문 자리에서 옮겨진 것이다. 그렇다고 동문(東門)이 된 것도 아니고 그저 형식상의 문이 돼버렸다. 그것은 임진왜란에 불타버린 후 330여 년이 지나 다시 한번 일본에 의해 광화문(光化門)이 두 번째로 당한 수난이었다.6·25사변의 폭격으로 불타버린 광화문(光化門)은 문루는 불타버리고 석축만 남게 되었다. 15년이 지난 1968년이 되어서야 박정희 대통령의 특명에 의해 현재의 위치에 오게 되었다.남아있는 일제의 잔재1968년에 현재의 위치에 돌아온 광화문(光化門)은 지금 우리가 보는 그 광화문(光化門)이다. 겉보기에는 현재의 모습은 예전의 모습을 보는 것처럼 당당하게 그 자리에 서 있는 같이 보인다. 하지만 원래의 광화문(光化門)은 목조 건축물이었다. 지금은 철근 콘크리트의 현대식의 건축물이다. 또한 광화문(光化門)의 편액은 과거의 것과 같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門化光)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 읽는 방식대로인 오른쪽에서 왼쪽(光化門)으로 되어있다. 또한 원래의 광화문(光化門)이라면 문(門)을 통해 경복궁(景福宮) 안을 들여다보면 근정전(勤政殿)과 그 앞의 근정문(勤政門)이 정확히 정면으로 보여야 할 것이다. 특히 중앙의 문을 통해 본다면 정확히 볼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광화문(光化門)이 근정전(勤政殿)과 일직선상의 위치에 있어야하는데 그렇지 못해서이다. 광화문(光化門)은 동쪽으로 약 3.5도 가량 어긋나게 위치해 있어서이다. 그 이유는 조선총독부 건물에 맞추어 광화문(光化門)을 다시 세워서이다. 조선 총독부 건물은 현재의 서울시청 건물에서부터 광화문(光化門)앞의 태평로의 일직선상에 지어서이다. 이 선상에 의해 원래의 경복궁(景福宮)의 선상을 어긋나게 하려는 의도였다. 그 후 1996년에 조선 총독부 건물이 철거되기 전까지 미군정 청사로, 중앙청으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계속 그 자리에 있어 자연스레 광화문의 위치에 조선 총독부 건물의 정면에 있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원래의 경복궁(景福宮)의 선상이 아닌 일제 시대의 그 선상에 맞추어 현재의 비뚤어진 위치에 광화문(光化門)이 놓여지게 되었다.
데카르트의 제일원리인 코기토를 통한 인식철학과 3학년 199800121 곽기영{제1성찰: 제일원리를 찾아서제2성찰: 제일원리를 위한 토대 마련제3성찰: 제일원리,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제4성찰: 제일원리를 통한 신, 보편적 진리,물질적 사물의 증명제5성찰: 제일원리에 대한 한계제6성찰: 제일원리를 통한 인식의 가능 범위제1성찰: 제일원리를 찾아서{1) 이 글은 데카르트의 『성찰』을 읽고 그에 대한 필자의 성찰이다.중세의 신 중심의 철학에서 근세로 넘어오면서 신 중심이 아닌 자아에 대한 철학으로 발전을 하기 시작한다. 이런 철학적 변화의 흐름에 효시는 데카르트이다. 물론 데카르트는 자아에 대한 철학을 하고자 한 것은 아니다. 데카르트의 철학이 하고자 하는 목표는 이성의 사용을 통하여 철학적 진리에 도달하는 것이다.{) F. 코플스톤, 『합리론』, 김성호 옮김, 서광사, 1996, p. 104또한 데카르트는 철학보다 앞서 수학, 기하학, 물리학을 먼저 공부를 하여 그의 철학은 수사학을 넘어서 인간 삶에 실질적으로 유용한 학문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데카르트의 철학에 대한 생각은 그의 저서 『철학의 원리』(Principia philosophiae)에서의 프랑스어판 서문, 피코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잘 나타나있다.철학이란 말은 지혜에 대한 탐구를 뜻하며, 지혜란 일상 생활에 있어서의 현명함을 의 미할 뿐만 아니라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의미하는 것인 데, 이는 삶을 위한 규칙을 갖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나 기술들을 고안해 내기 위해서다. 그러고 나서 나는, 그러한 지식이 그러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제 일원인들로부터 이끌어내져야 하며, 따라서 그러한 지식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이것이 원래 철학한다는 의미인데) 그 제일원인들, 즉 원리들에 대한 탐구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고 일렀을 것이다.{) R. 데카르트, 『철학의 원리』, 원석영 옮김, 아카넷, 2002, p. 524즉, 이러한 데카르트의 철학은 의 제일원리로 아무런 망설임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고 결정했다.{) R. Descartes, The Philosophical Writings of Descartes Vol 1, Translated J. Cottingham, R. Stoothoff, D. Murdoch,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5, p. 127을 필자가 번역하였다.제2성찰: 제일원리를 위한 토대 마련데카르트는 학문에 있어 확고하고 불변하는 것을 세우려 한다면 모든 것을 철저하게 전복시켜 최초의 토대에서 다시 새로 시작해야한다고 한다.{) R. 데카르트, 『성찰』, 이현복 옮김, 문예출판사, 1997, p. 34또한 데카르트는 진리를 추구하는 자는 살아가는 동안 한 번은 가증한 한 모든 것에 관하여 의심해 보아야 한다고 한다.{) R. 데카르트, 『철학의 원리』, 원석영 옮김, 아카넷, 2002, p. 9데카르트는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기존에 가지고 있던 지식을 하나하나 열거하여 참임이 확실치 않은 것과 참임이 확실한 것을 구분을 하려고 한다. 즉 명석 판명한 지식만이 진정한 진리라는 생각을 기반으로 진리에 대한 토대를 마련한다. 하지만 이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에 데카르트는 기존의 지식이 의존을 하고 있는 원리부터 검토를 한다.데카르트는 자신이 지금까지 참된 것이라고 확실히 인식하던 사실들은 감각으로부터 또는 감각에 의해서 알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그는 그 유명한 꿈의 가설 을 제시한다. 즉 자신의 꿈을 통해 자신이 실제 경험하고 있는 것이 만일 꿈속에서 경험 것과 같을 경우, 어떻게 자신이 지금 경험하고 있는 사실이 명백히 참이라고 말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 의심을 한다. 데카르트는 꿈의 가설을 통해 감각을 부정하고 그 다음으로 개별적인 것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물질적 본성 일반 및 그 연장(extensio), 연장적 사물의 형태, 그것의 양, 그것의 크기와 수, 그것이 존재하는 장소, 그것이 지속하는 시간과 같은 보편적인 것들을 부정한다.{) 같은약되는데 그것이 바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는 말이다.{) A. 케니, 『데카르트의 철학』, 김성호 옮김, 서광사, 1991, p. 51이 명제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방법서설』에서 나와있으며, 『성찰』에서는 나는 있다. 나는 현존한다.(ego sum. ego existo) {) R. 데카르트, 『성찰』, 이현복 옮김, 문예출판사, 1997, p. 43로 나와있다. 또한 데카르트의 다른 저서 『철학의 원리』에서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ego cogito, ergo sum)는 누구든 순서에 따라 철학하는 자가 만나는 최초의 인식이고 모든 것 중에 가장 확실한 인식이다. {) R. 데카르트, 『철학의 원리』, 원석영 옮김, 아카넷, 2002, p. 12이러한 데카르트의 명제는 『성찰』에서 두 가지 방법으로 증명이 된다. 첫 번째, 이 전능한 악마가 감각을 통한 사실은 허구이다라고 설득을 한다고 하더라도 이 전능한 악마가 설득을 하려는 대상이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이 내용은 다음과 같이 『성찰』에서 나온다.내가 만일 나에게 어떤 것을 설득했다면, 확실히 나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지는 모르지만 아주 유능하고 교활한 기만자가 집요하게 나를 항상 속이고 있다고 치자. 자 이 제, 그가 나를 속인다면, 내가 있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그가 온 힘을 다해 나를 속 인다고 치자. 그러나 나는 내가 어떤 것(aliqiud)이라고 생각하는 동안, 그는 결코 내가 아무것(nihil)도 아니게끔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이 모든 것을 세심히 고찰해 본 결과, 나는 있다, 나는 현존한다(ego sum, ego existo)는 명제는 내가 이것을 발언할 때 마다 혹은 마음속에서 품을 때마다 필연적으로 참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R. 데카르트, 『성찰』, 이현복 옮김, 문예출판사, 1997, p. 43-44두 번째, 전능한 악마가 자신을 기만하여 필연적으로 남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사유라고 한다면서 명제를 증명한다. 우선 데카르트가 자신의확실하다.{) 같은 책 p. 46이 두 가지 방법을 통해 데카르트는 자신의 명제를 증명한다. 데카르트는 이 명제를 제일원리로 놓아 그 외 세계에 대한 인식의 일반적 규칙(regula generali)을 정한다. 즉, 그 일반적 규칙이란 오직 명석 판명하게 지각하는 것은 모두 참이다.{) R. 데카르트, 『철학의 원리』, 원석영 옮김, 아카넷, 2002 p. 38에서 데카르트는 명석한 지각(perceptio clara)과 판명한 지각(perceptio distincta)이 무엇인지 정의한다. 명석한 지 각은 주의를 집중하는 정신에 현전하고 명백한 지각이며, 판명한 지각은 명석한 지각이 면서 동시에 다른 것과 분리되고 구별되는 직각을 의미한다.데카르트는 이러한 일반적인 규칙을 통해 다시 자신이 앞서 부정한 것들을 차례로 증명한다.제4성찰: 제일원리를 통한 신, 보편적 진리, 물질적 사물의 증명데카르트는 자신이 발견해낸 제일원리를 통해 자신이 부정했던 것들의 역순으로 다시 그것들의 현존을 증명해낸다. 그 처음으로는 신의 관념에 대한 현존이다. 신의 관념에 대한 현존은 사실 데카르트가 이성의 현존을 증명한 후에 그 외 모든 것에 대한 증명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신의 관념에 대한 현존을 증명하는 부분에 있어 몇 가지 오류가 있다. 이것은 순환 논 증이라는 비난을 받는다. 이것에 대해 이후에 다시 설명을 하겠다.데카르트에 의하면 신의 관념은 무한하고 비의존적이며, 전지전능하며, 나 자신을 창조했고, 또 다른 것이 존재한다면 그 모든 것을 창조한 실체 {) R. 데카르트, 『성찰』, 이현복 옮김, 문예출판사, 1997, p. 69이라고 한다. 데카르트는 이러한 신의 관념이 만일 참이라면 자신의 본성 속에 이러한 관념이 나온다고 할 수 없기에, 필연적으로 신의 현존을 증명해야 자신의 존재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데카르트는 이러한 필연적으로 증명해야 하는 이유를 스스로 밝힌다.나 자신이 실체인 한 나는 실체의 관념을 갖고 있지만, 나는 유한하기 때트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신의 현존에 대해 증명을 하는 것이다.유한한 것인 나에게 파악되지 않는다는 것은 무한한 것의 본성에 속하기 때문이고, 또 내가 이 무한한 것에 대해 갖고 있는 관념이 내 안에 있는 관념들 가운데서 가장 참되고 가장 명석 판명한 관념이기 위해서는 내가 이 관념을 이해하고(intelligere) 다음과 같 이 판단하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R. 데카르트, 『성찰』, 이현복 옮김, 문예출판사, 1997, p. 71-72반면 두 번째 방법은 신의 관념을 가진 이성 또는 정신이 현존한다는 사실에서 신의 현존을 증명한다는 것이다.감각적인 사물의 상에 의해 내 정신의 눈이 흐려지면, 나는 나보다 더 완전한 존재자의 관념이 왜 반드시 실제로 더 완전한 존재자로부터 유래해야 하는지를 쉽게 상기하지 못한 다. 그러므로 이 관념을 갖고 있는 나 자신이 이 존재자가 현존하지 않을 때에도 현존할 수 있는지를 탐구해보자{) 같은 책 p. 73즉, 신이 현존하지 않았을 때 신의 관념을 갖고 있는 정신이 현존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을 통해 증명한다는 것이다. 이 방법은 다시 앞에서 방법적 회의에서 사용하던 열거·제거 방식을 사용한다. 데카르트는 우선 자신의 현존이 어디서 출발을 하는지에 대해 열거한다. 그것은 자기 자신, 부모님 그리고 신보다 덜 완전한 것이다. 만일 정신의 현존이 자신에게서 직접 나왔다면, 자신 안에 있는 신의 관념을 통해 자신은 신과 같이 완전한 존재가 되었을 것이기에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제거한다. 다음 부모님에 대한 것인데, 이는 자기 자신만이 현존을 하기에 부모님이라는 존재는 연역적으로 증명을 해낼 수 없기에 또다시 제거된다. 또한 신보다 덜 완전한 존재는 신이 가진 완전성과 무한성에 대한 관념을 가질 수 없기에 또다시 제거된다. 결국 신의 관념을 가진 존재는 정신일 뿐이며, 이 사실로부터 신의 관념을 가진 정신은 현존하기에 신의 관념이 현존한다고 한다.이렇게 데카르트는 신의 관념에 대한 현존을 증명해낸다. 그 후 그는 보편적 진리들을 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