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통사강요 제 9장 봉건사회의 쇠퇴명 청 시대의 건립과 몰락요약을 하기에 앞서 본 9장에는 명 청의 건립과 몰락 농민 봉기 그리고 학자와 문학작품에 대한 많은 얘기를 하고 있다. 그 중 많은 학자들과 문학작품은 명 청 시대의 사회상과 정치상등을 얘기하고 비판하기도 한다. 정말 문학작품과 학자들의 중요성을 알 수 있었고, 아울러 기존에 내가 알고 있던 유명한 문학작품을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는 작품에 대한 유희의 폭을 넓힐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그렇지만, 제 9장에서 내세우고 있는 것은 봉건사회의 쇠퇴이기에 문학작품과 학자들의 대한 얘기는 아쉽지만 자세히 다룰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요약하고 말하고자 하는 바를 봉건사회의 쇠퇴에 초점을 맞추어서 문학작품과 학자들에 대해서는 내가 중요시 하는 초점과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물론 문학작품의 문학사에 대한 것이 초점에서 어긋난 다는 것은 아니지만, 요약에서는 약간의 참고를 하고 자세한 것은 개인적으로 아는 것 또한 나쁘지 않다고 생각 되었다. 기존에 근현대사 정치개론 등의 강의 시간에도 명 청의 시대상은 중국 역사에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배워 왔다. 요약을 하기에 앞서 처음 초점을 맞추는 것이 굉장히 어렵다고 느꼈다. 초점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얘기하고자 하는 바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기에, 고민을 하였고, 결국 최대한 역사적인 사건의 흐름, 중요하고 큰 사건의 흐름을 보다 유기적으로 연결하면서 요약을 하려 한다.명 청 시대는 중국 봉건 사회의 쇠퇴기이다. 명나라는 대략 1368년에서 1644년까지 276년간 12대에 걸쳐 16명의 황제가 즉위하였다. 청나라는 1644년에서 1911년까지 268년간 9대에 걸쳐 10명의 황제가 즉위하였다. 1840년 잉글랜드 식민주의의 침입으로 아편전쟁이 발발하자 중국은 점차 봉건 사회에서 반 식민 반봉건 사회로 전화해갔다. 1368년 주원장이 응천(지금의 강소성 남경시)에서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명으로 정하였다. 주원장, 즉 명 태조는 홍리고 성조 이후 명의 사회경제는 계속적으로 발전하였다. 개간과 이민 정책을 추진하여 북경 주변 및 북쪽 변방 지역을 더욱 개발해나갔다. 경제발전의 토대 위에서 명은 국내 각 소수민족과의 정치, 경제, 문화적 연계를 강화하여, 개원에 말 시장을 열어 동북의 여진족과 무역하였다. 소수민족 거주지에는 현지의 소수민족을 관리로 삼았다. 성조, 선종 때에는 여러 차례 '정화'를 서양 등지에 파견하였는데, 그의 최종 항해 기록은 콜롬부스의 아메리카 발견과 바스코다가마의 회망봉 도달보다 무려 반여 세기가 빠르다. 개국 이후 혜재, 성조, 인종, 선종에 이르는 약 67년간은 명대 초기로서 태평성세를 누렸지만, 개국이후로 농민봉기가 끊이지 않았으며 왜구가 빈번히 육지로 올라와 난동을 부렸다. 기록에 의하면 명대 초기에는 백여 차례의 농민 봉기와 농민 폭동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갈수록 환관들이 크게 총애를 받아 국정에까지 관여하게 되었다. 환관의 권력 비대는 명대 정치에 있어 오래도록 암적 요인이 되었다. 문화 방면에서도 주원장은 폭력으로 압제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명성조 때에도 사상통제의 수단을 취하여 호광 등에게 오경대전 121권, 사서대전 30권, 성리대전 70권을 편찬하게 하였다. 명초기 문화 방면에서의 창조적인 성과로는 대표적인 작품인 삼국지통속연의와 수호전 을 들 수 있다. 수호전은 삼국지통속연의와 함께 출현한 장편소설로 농민 봉기를 묘사한 문학작품이다. 북송 때의 양산박 농민 봉기의 묘사를 통하여 중국 봉건 사회의 농민 봉기의 발생, 발전 및 실패를 전 과정을 그리고 있다. 명초의 정치 상황 하에서 두 작품은 유포되기 어려웠으며, 16세기 전반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세상에 출판될 기회를 얻게 되었다. 1435년 영종이 즉위한 후로 경제, 헌종, 효종을 거치는 약 70년 동안은 명중엽의 쇠퇴기이다. 영종은 9세가 채 안된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다. 그는 원래 동궁에서 함께 공부하던 환관 왕진을 좋아하여 그를 사례태감에 임명하였다. 왕진은 어린 황제를 유도하여 무거운제가 발생하였다. 하나는 타타르의 남하였다. 또 다른 문제는 왜구의 노략질이었다. 세종 때는 재정 위기가 대단히 심각하였다. 세종 때에는 각지에서 인민들이 간헐적으로 봉기하였다. 목종 때 왜구에 대항한 명장 척계광은 북방에 배치되어 소주를 수비하였고, 신종 초 장거정은 재상으로서 관료 질서를 정비하고 법령을 통일하였다. 장거정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공적은 상세한 토지 조사와 일조편법의 추진이다. 조세제도를 개혁하여 각종 명목의 세금과 노역을 하나로 통합하여 은으로 환산 징수하는 일조편법을 전국에 시행하였다. 무종부터 신종 초까지 문학 방면에서는 이전보다 많은 성과를 이루어 산문, 희극과 소설 등에서 영향력 있는 작가와 작품이 출현하였다. 그들은 상이한 예술형식과 표현 각도에서 이 역사단계의 부패한 여러 측면들을 반영하였다. 몇 가지 방면에서의 문학작품들은 그 진보적 내용이 당시의 부패한 정치와 선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선비사력, 사상원, 서유기 등의 문학작품들은 당시의 첨예한 사회모순이 진부한 세력과의 충돌에 있어서 어떤 새로운 변혁을 요구하고 있었음을 반영하고 있지만, 이러한 사회모순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장거정이 죽자 신종은 마음껏 환락에 빠져 조정을 돌보지 않았다. 금 멸망 후 여진의 각 부족은 대대로 원, 명에 예속되어 있었다. 1583년 아이신지오로 부족의 누르하치가 건주 여진의 우두머리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누르하치는 후에 후금을 건국하게 된다. 후금은 중국 영역 내에서 명 황조 이외의 독립 지방 정권이었지만 그 때까지도 만주족이라는 명칭은 없었다. 누르하치는 부단히 세력을 확장해가는 과정에서 민호를 개편하고 성곽을 건설하였으며 문자를 창제하고 법률을 제정하였다. 또한 기존의 우록제도를 기초로 한 팔기제도를 발전시켰다. 누르하치가 건국을 한 후에도 신종은 방탕한 생활로 국고를 탕진하고, 환관을 파견하여 네 차례나 인민을 수탈하였으며, 영하, 조선, 파주에서 세 차례의 전쟁을 일으켰다. 세 차례 전쟁은 막대한 인력과 재력을 소모 시켜 명은 점점 제를 답습하는 것 이외에도 연납과 특과를 두었다. 연납은 돈이나 곡식을 바치고 관직을 얻거나 승급되는 것이었고, 특과는 박학홍사과, 경제특과, 효렴방정과 등의 시험제였다. 군사제도에 있어서도 청은 입관 초에 여전히 만인, 몽고인, 한인 팔기를 주요 병력으로 하는 동시에, 각 성마다 한인으로 편제한 녹영을 건립하였는데 장관은 만인이 담당하였다. 청의 군대는 인민에 대한 통치에 보다 더 큰 역점을 두었다. 청은 한족 지역에 대한 통치가 안정된 후 계속 변방의 소수민족 지역에 대한 통치를 강화해갔다. 강희 연간에 청 조정은 러시아의 침략에 대응책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청이 전국을 통일한 후 사회 질서가 상당히 안정되었다. 대체로 청이 강성했던 시기의 행정 효율은 명대보다 뛰어났다. 그것은 많은 부분을 명의 제도를 답습했을 뿐만 아니라 명의 실패를 교훈으로 주의를 기울였기 때문이다. 청대에는 인민에 대한 착취가 명대보다 줄었고, 청 황제 중에 환관을 총애하거나 여러 해 동안 조회에 참석하지 않는 황제는 없었다. 청 황제와 군기처의 관계는 명 황제와 내각의 관계보다 훨씬 밀접하였다.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청이 강성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데에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면에는 갖가지 모순들이 존재하고 있었고 이러한 모순은 결국 언젠가 표출되고야 말 것이었다. 학술문화에 대하여 청은 통치를 견고히 한 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통제를 가하였다. 첫째, 팔고문과 공자, 정주 숭배를 계속 제창 함으로써 인민의 사상을 제한하였다. 둘째, 청조에 불리한 서적은 조사하여 금지하였다. 셋째, 문자옥을 일으켰다. 넷째, 관청에서 주도한 책의 편찬을 통해서 학술활동을 통제하였다. 강희 이후 청의 문화정책은 학술문화의 발전을 완전히 통제할 수는 없었다. 문학에 있어서 홍승, 공상임의 극본과, 오경재, 조설근의 소설은 모두 우수한 대표작들이다. 특히 오경재의 유림외사는 탁월한 수준의 풍자 소설로 당시 사회에도 이미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이후 중국 풍자 소설의 반전에 기초가농정전서를 저술하였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사회생산력의 수준 및 그것의 발전 가능 상태를 반증한다. 명말 이후에도 과학기술은 부단히 진보하였지만 상술한 것과 같은 대규모의 저작은 보기 어렵다. 명 청시기 사회생산력의 발전과 계급투쟁의 지속은 노동력의 성질을 변화시켰다. 청초에는 장적을 폐지하였으며 더욱이 수공업 기술자에 대한 국가의 봉건적 속박을 폐지하였다. 명 청시기 노동력의 변화는 점차 봉건적 속박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명초에 방직업에서 처음으로 자본주의 맹아의 흑적이 출현하였다. 이것은 자유 노동력 시장이 이미 출현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청초 통일 활동 과정 중 동남 지역이 크게 파괴되어 자본주의의 맹아 상태가 소멸되었다. 명 청시기에 출현한 자본주의의 맹아는 수백 년을 지나면서도 시종 정상적으로 성장하지 못했는데 그 원인은 매우 복잡하다. 첫째는 중국의 봉건 사회에서의 역사 깊은 자급자족하는 경제구조의 완고성 때문이다. 둘째, 수공업 행방(동업자 조직)이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을 저해하였다. 셋째, 봉건 국가의 상업, 수공업에 대한 압박과 착취가 자본주의적 생산 발전을 방해하였다. 넷째, 수공업과 상엽이 항상 위험을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었으므로 봉건 소작료와 고리대가 더욱 큰 흡인력을 가졌다. 다섯째, 명 청 조정은 해외 무역을 엄격히 제한하였다. 본주의 맹아가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없었던 이런 원인들은 결국 봉건세력이 대단히 완고하여 자본주의 맹아가 아직 이러한 질곡을 돌파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으로 귀결된다. 명 청시기의 봉건적 생산관계는 사회생산력의 발전을 촉진시킬 수 없었지만 지연시킬 수는 있었다. 이와 같이 이미 부패한 사회제도가 새로운 사회제도의 탄생을 저지하고 있었던 것이 중국 봉건 사회 쇠퇴기의 가장 큰 특징이다. 명 청시기의 지주 계급은 매우 부패하였다. 부패 세력 하에서 신흥 생산 사업은 정상적으로 발전할 수 없었다. 명 청시기의 역사는 선진적 상태에서 낙후되어간 역사이다. 명 청 봉건세력은 인민을 진압하는 과정각한다.
민족 해방과 분단(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불꽃같은 삶)한국의 민족과 독립과 남과 북으로 나뉜 분단을 얘기하면서 우리 조상들의 한 맺힌 과거사는 당연한 듯 따라다니는 기억이 파편일 것이다. 김산에 대한 얘기를 하기에 앞서 이 아리랑이라는 책에 대한 얘기를 그냥 단순한 책으로 넘기며 얘기하는 것은 큰 실례이고, 오판이라고 여긴다. 읽으면 읽을수록 이 책은 단순한 일대기를 집필한 것이 아니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역사적인 자료로 가치가 있다고 충분히 여겨진다. 강의 시간에 우리가 수없이 배운 내용 또한 이 책에 적혀 있고, 중고등 학교 역사 시간에 접했을 내용들 역시 책에서는 리얼리틱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이 책은 사상에 관한 책도 아니고, 그렇다고 역사 자료도 아니다. 단지 김산이라는 조선인 혁명가의 생애를 기록하면서, 그 안에서 사상적 문제와 역사적 문제가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이데올로기적 편향과 좀 더 보편적인 가치에 대한 성실성을 구별해내야 하는 것이다. 난 지금 과거 우리나라의 일제시기에 독립을 위해 투쟁과 혁명을 인생의 전부로 걸었던 한 인물에 대해 얘기하고자 한다. 김산 이 이름조차 그의 많은 가명중 하나라고 님 웨일즈는 말한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점점 김산이라는 조선인 혁명가의 고난과 인내와 꿈을 볼 수 있었고, 점점 거기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과 일본과 중국 동아시아의 격동하는 역사적 흐름의 한 가운데 서있던 이 인물에게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고 어떤 일을 겪었는지 머릿속으로 그려보면서 책의 내용에 나를 던져본다. 제 3자의 입장으로 김산의 뒤를 소리 없이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며 난 그의 인생을 보았다. 어디까지나 지극히 내가 바라본 김산의 일대기이고, 또한 1920~1930년대 한 조선인 혁명가가 부딪히던 역사를 지금부터 얘기하고자 한다.책의 서장에서 나타나 있듯이 1937년 중국 옌안에서의 김산과 님 웨일즈의 우연한 만남에 의해 이야기는 시작 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이 책은 한 서구 지식인을 로도 의미가 충분하다. 김산은 님 웨일즈와의 만남에서 조선에 대한 자부심과 희망과 독립에 대한 열의를 뜨겁게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늘 굴하지 않고 투쟁하고 저항하는 조선인들은 결코 나약하거나 겁쟁이들이 아니며, 일본은 그런 조선인들을 두려워한다고 하면서, 강한 자부심을 나타낸다. 오늘날, 내 조국, 내 민족에 대한 이런 애국심과 자부심을 가진 이들이 일제강점기 하의 우리나라 조상들 보다 많다고 감히 논할 수 없을 것이다. 님 웨일즈는 김산에 대해 노트 7권이나 되는 자료를 정리하고 축약하고, 수정하였다. 하지만, 거의 원래 대화에 가깝게 하였다. 님 웨일즈와 김산의 이런 집필에 관한 일을 할 때, 님 웨일즈는 김산에게 말한다. “우선 당신의 개략적인 경력을 말하고, 그 다음에 당신의 젊은 시절에 대해 말해주세요.” “내 젊은 시절? 틀림없이 저는 이제 겨우 서른두 살 밖에 안 되었지요. 하지만 저는 내 젊음을 어디에선가 잃어버렸답니다. 어딘지는 알 수 없지만.......” 김산은 한창 싸움이 벌어지고 있던 어느 산속에서 1905년 3월 10일에 태어났다. 그리고 러/일 전쟁은 그 해 8월까지 계속 되었다. 식구는 총 11명이였다. 그리고 그를 언제나 뒷바라지 해준 건 어릴적 집을 나와 구둣방을 하던 작은 형이었다. 김산은 11살밖에 안된 어린 아이일 때 집을 나왔고, 그 후로 계속 혼자 살았다. 주린 배 옆에 3개의 국어사전을 들고, 일본으로, 만주로, 중국으로 떠돌아다니던 초라하고 열정적인 학창 시절도 있었다. 16세에서 22까지의 순수하고 헌신적인 열정에 불타오르던 낭만적인 혁명가 시절도 있었다. 그의 어린 시절에는 이동휘 장군은 그 시대 어린이들에게 우상 이였다. 그는 작은 형의 후원 속에 기독교계 중학교에 들어가게 되었고, 선생님은 항상 조선독립에 대한 종교적 문제를 논하셨다. 그리고 역사적인 사건인 1919년 3월1일 우리도 익히 알고 있는 3.1운동이 일어난다. 선생님은 당시 교단에서 열정적인 연설을 하셨고, 김산은 생을 살아가면서 잊지 못하였던 계속 기도할 뿐이었다…….기독교인인 어느 조선인 지도자 한명이 서대문 밖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다. 왜놈들이 ‘기독교 신자니까 이렇게 하면 천당에 갈 수 있겠지’하며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었다. 나는 이 파멸을 본 이후에는 내 믿음이 깨어져버렸다. 나는 신은 분명히 존재하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내가 태어난 투쟁의 세계에는 별로 적용되지 않는 다고 생각했다.”(김산)당시 그의 충격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또한 기독교에 대한 그의 믿음에 큰 변화를 가져왔는지 보여주는 김산의 말 이였다. 운동당시 대중적 기반을 이룬 조직된 잡단은 기독교와 오랜 전통을 가진 천도교 둘밖에 없었다고 한다. 천도교는 중국에서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난 직후에 조선에서 일어난 투쟁에 기초하여 창립돼 조선인의 정치, 종교 단체를 말한다. 3.1운동은 조선의 민족대표 33인이 조직하고 지도하였다. 그리고 평화주의의 이 운동에는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기독교인들과 천도교인들이였다. 손병희, 최남선이라는 인물들이 대중적, 사상적 지도자 들이였고, 최남선이 기미독립선언문을 기초하였고, 33인이 여기에 서명한다. 이 평화 주의적 운동으로 일본은 매우 당황했고, 이래서 문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기존 조선에 관한 통치에 대한 변화가 온다. 그러나 이런 통치 수단의 변화 속에서도 기존 조선에 대한 억압과 만행은 여전하였다고 한다. 1919년 대중운동은 일어나지 않았고, 김산은 일본으로 떠난다. 그는 일본에서 일을 하며, 학교를 다녔고, 돈 많은 유학생들은 달걀껍데기, 자신과 같은 유학생들은 룸펜인텔리겐치아라고 불렀다. 그는 일본생활에서 일본의 공산당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고, 조선 기독교 청년회 같은 단체도 생기게 되었다. 일본인들과 함께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꿈을 키웠지만, 광동대지진이 발생하면서 수많은 조선인을 대량학살하면서 이 꿈은 깨져버리고 말았다. 1923년 9월1알 발생한 대 지진으로 일본은 수많은 인명피해와 식량난을 겪게 되었고, 국민들의 폭동을 사전에 막기 위하여 조선인 당의 반동으로 인해 김산은 충격과 함께 청년시절 유토피아적 환상을 깨게 되었고, 일본을 떠나기로 한다. 그는 조선에 돌아와 차비를 마련 한 뒤, 군관학교에 가기위해 홀로 700리를 걷는 도보여행을 시작한다. 이리하여 그는 그의 인생에 중요하고 큰 영향을 끼친 중국이라는 거대한 모험에 첫 발을 디디게 된다. 그는 1920년에 상하이로 갔다. 이즈음 박진과 동생들이라는 우수한 조선인 혁명가들과 만나고 그들과 함께 일을 하기도 했다. 그곳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의 편집을 이광수가 맡고 있었는데, 그를 도와 교정을 보면서 식자공으로 일하였다. 또한 안창호 김약산의 영향으로 의열단에 가입, 중국의 광주혁명에도 뛰어들게 된다. 김산은 이광수아게 일시적인 영향을 받았지만, 안창호한테서는 두 번째로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안창호는 김산에게 실제정치를 가르쳐 주었다.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은 금강산 승려 출신의 공산주의자인 김충창이었다. 이 사람은 그의 절친한 벗이자, 동료였다. 김충창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가르쳐 주었다. 세 번째로 커다란 영향을 받은 인물은 하이루펑 소비에트 지도자 펑파이였다. 펑파이는 야전에서의 혁명전술을 가르쳐 준다. 그리고 1921년 의학공부를 하기 위해 베이징으로 갔다. 잠시 집에 들렀을 때, 그는 어머니에게 여자를 소개 받지만, 대부분의 혁명가들이 불안정한 삶을 이유로 결혼을 하지 않는 것처럼 김산 역시 그러한 다짐을 한다. 이 시기에 무정부주의의 영향을 받아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과 레닌의 《국가와 혁명》을 읽고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기존에 그는 톨스토이의 영향을 받았었다고 한다. 1923년 상하이에서 공산청년동맹에 가입하였으며, 베이징에서 김성숙 등과 함께 공산주의 잡지인 월간 《혁명》을 발간하였다. 1924년에는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의 북경지부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중국은 쑨원을 중심으로 중국혁명이 일어나 좌익으로 급선회한 해였다. 이때 김산은 중국공산당의 고위 간부와도 교류하여 1925년에는 당시 중국공산주의운동의인들과 함께 광둥코뮌 건설에 참여하였으나 3일 만에 중국국민당의 공격을 받아 해륙풍소비에트로 철수하였다. 여기에서 북벌전쟁등 국공내전을 통해 그들은 분열되고 말았다. 그리고 1929년 해륙풍소비에트마저 국민당 측에 점령되자 그곳에서 탈출하였다. 그리고 김산은 다시 레이양으로 레이양에서 홍콩으로 가게 되었다. 도중 오성륜과 엇갈렸지만, 상해에서 김충창과 오성륜 과 다시 재회를 하게 된다. 그 후 김산은 베이징으로 떠난다. 그 후 김산은 조선인의 중국공산당 입당 을 주도하다가 1930년 11월과 1933년 4월 2차례에 걸쳐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는데, 2차례 모두 곧 석방되자 일본의 스파이로 의심받아 중국공산당에 다시 가입하지 못하였다. 1934년 중국에서는 장정이 시작되었다. 그는 북경으로 탈출하여 당의 북부지구위원회에서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중국여인 조아평과 결혼하였다. 1936년 상하이에서 김성숙과 함께 조선민족해방동맹을 결성하였다. 그 후 옌안의 군정대학에서 가르쳤으나, 1937년 김산은 백색지구에 남겨두고 온 자신의 아내 자오아핑이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들었고, 이 시기에 헬렌 스노우를 만났다. 1938년 중국공산당에 의해 반혁명 죄와 간첩죄로 처형되었다. 님 웨일즈는 옌안을 끝으로 김산에 관한 어떤 소식도 듣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문화혁명이 끝난 후 김산이 부당한 죽음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김산의 아들 고영광은 중국공산당에 김산에 대한 명예회복조사를 요청 하였고, 1983년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조직국은 공식적으로 다음과 같이 결의했다.‘김산의 처형은 특수한 역사 상황 아래서 발생한 잘못된 조치였다. .…….본 결의에 의해. 그에게 덮어 씌어졌던 불명예가 제거되며 그가 지녔던 명예를 모두 그에게 되돌린다. 또한 이로써 그의 당원자격은 회복된다.’ 1981년 님 웨일즈가 고영광에게 캉성에 대해 얘기하였고, 김산은 희생자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다. 그리고 김산의 복권으로 님 웨일즈의 설명이 믿을 만하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 된다. 마무구비
한자의 조자원칙-육서흔히 한자는 사물의 형상을 그대로 본떠서 만든 글자가 많고, 자형을 보기만 하면 그 뜻이 드러나기 때문에 상형문자 혹의 표의문자라고 한다. 특히 한자의 자체가 완전히 부호화되기 이전의 고문자에서 이 같은 현상이 두드러진다. 우리가 한자를 논할 때 육서라는 명칭과 만나게 되는데 육서는 일반적으로 한자를 만드는 여섯 가지 방법이자 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육서는 한나라 학자들이 기존의 한자 자형결구를 분석한 후 그것을 여섯 가지로 귀납 정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육서는 사람들마다 순서와 명칭도 다 다르기 때문에 한나라 고문 경학가의 학설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그럼 지금부터는 육서의 설명과 예를 들어보기로 한다.1-상형상형은 말 그대로 어떤 구체적인 사물의 형상을 본 뜬 글자이다. 日의 갑골문은 태양의 윤곽을 그린 것, 木 은 나무의 형상, 水는 흐르는 물의 모양, 馬는 말의 전신, 漁는 물고기를 본뜬 것이다.*기타 예2-지사지사란 형상 혹은 부호로써 추상적인 개념을 나타낸 글자이다. 상형보다는 형상성이 감소하고 부호성이 두드러진 것을 특징으로 순수 약정 부호의 성격을 지닌 것과 기존의 상형자 에 지시성의 부호를 덧붙여 구성된 것이 있다. 순수 약정 부호의 성격을 지닌 것의 예로는 숫자나 上, 下 가 있다. 그리고 기존 상형자에 지시성의 부호를 붙여 구성된 것의 예로는 本근본 본(木에 뿌리부분에 선을 그어 뿌리 표시), 刃칼날 인(刀에 점을 찍어 칼날 표시)등이 있다.*기타 예3-회의회의는 뜻을 표시하는 형부와 형부가 결합되어 구성된 것으로 休쉴 휴 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人과 木자로 구성되어 사람이 나무에 기대어 쉬는 것을 말한다. 采캘 채 역시 爪와 木으로 구성되어 나무에서 손으로 뭔가를 딴다는 의미를 나타낸 것이다.*기타 예囚〔죄수 수] 의 사람이 갇혀 있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炙〔구울 자]는 고기를 불에 굽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好〔좋아할 호]는 여인이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이니 아이가 좋아한다는 뜻이다.炙〔구울 자]는 고기를 불에 굽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4-형성형성은 형부와 성부가 합쳐져서 구성된 것으로 형성자는 뜻의 범주를 표시하는 것으로 형부와 문자의 소리 부분을 나타내는 성부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가장 합리적으로 소리와 뜻을 표시할 수 있다. 쉽게 말하자면 형성은 모양(形 : 뜻)과 소리(聲 : 발음)로 뜻 부분과 소리 부분을 구분하여 결합하는 방식의 글자이다. 형성은 한자 표음화의 발전 규율이 그대로 반영된 조자 방법이다. 본문에 나온 예를 보면 알 수 있다.*기타 예仙〔신선 선〕仙은 人과 山의 합자姓〔성 성〕 姓은 女, 生의 합자住〔머무를 주〕 住는 人과 主의 합자5-전주전주자는 모두 한 글자가 두 가지 직무를 담당하고 있어서 문자 고유의 기능인 변별력이 떨어지는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가차의나 인신의를 지니고 있는 글자의 다중 배역을 해결하고 문자 고유의 변별력을 높이기 위해 새로운 글자를 만드는 과정에서 적용된 원칙이 바로 전주인 것이다. 전주는 모체가 되는 기존의 글자에 뜻을 표시하는 편방을 부가하여 새로운 글자를 생성시키는 과정에서 적용된 원칙이며, 그 종류는 본의가 가차의에 빼앗긴 경우 형부를 더하여 구별한 것과 기존의 글자가 담당하는 자의가 많아서 형부를 덧보태어 역할 분담을 한 것 등 두 가지 이다. 쉽게 말하자면 전주는 새로운 글자를 만드는 원리가 아니라 기존의 글자를 의미 변화로 활용하는 원리이고, 이미 만들어진 글자를 그 본래의 뜻① 발음은 변하지 않고 뜻만 변한 것
중국의 세계문화 유산에 대한 감상문을 쓰면서 주제를 선정하는데 큰 난관에 봉착 하였다. 과연 어떤 주제가 흥미를 가지고 논할만한 가치가 있는지 또 어떤 문화유산이 사람들에게 거부감 없이 친근하게 받아들여질지에 대한 고민은 계속 이어졌다. 그러다가 결국 한번쯤 들어봤을 만한 중국의 만리장성을 조사하게 되었다. 처음 발표를 했던 중국의 노산에 관한 감상문을 쓸까 하였지만, 그보다는 누구나 알고 있는 만리장성에 대해 보다 자세하고 재미있는 글을 쓰고 싶었던 것이 나의 욕심이다. 만리장성을 생각하면 다른 이들은 모르겠지만, 난 자연스럽게 우리의 천리장성을 떠올렸다. 어릴 적부터 늘 천리장성은 만리장성과 같이 하나로 묶여 있었다. 사실 이번 감상문을 쓰면서 만리장성과 천리장성을 비교하며 써볼까 하였지만, 눈에 보이는 전개 속에 지루함만 이어질 것이라 여겨져 개요에 대한 고민이 한창이었다. 그러다가 마침 만리장성과 천리장성에 대한 자료들을 수집하면서 재미있는 자료를 찾게 되었다. 나의 호기심을 증폭 시켰고, 또한 그 자료에 대한 진실여부를 알아가는 재미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 자료에 대한 진실여부를 떠나 거짓이더라도 한번쯤 꿈꿔 볼만한 재미있는 자료라고 판단이 되었고, 중국인들과 한국인들이 알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하는 궁금증에 천리장성과 만리장성에 대한 비교가 아닌 전혀 새로운 방식의 감상문을 쓰게 되었다. 내가 감상문을 쓰면서 주로 말할 것은 우리나라의 천리장성과 만리장성은 같다는 주장에서부터 시작된다. 물론 진실의 여부는 정확한 조사에 의해서 판단될 것이지만, 어느 정도의 객관성을 느꼈기에 이렇게 글을 옮겨본다. 그럼 지금부터 만리장성과 천리장서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 보도록 하겠다."不到長城非好漢(만리장성에 가보지 않으면 호한이 될 수 없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만리장성(萬里長城)은 진의 강력한 통일제국체제가 낳은 상징적 산물이다. 베이징에서 서북쪽으로 약 75km쯤 떨어진 곳에 교통이 편리하다는 뜻인 "사통팔달"에서 이름이 유계선의 역할도 했다. 오늘날 말하는 서쪽 감숙성의 가욕관에서 시작하여 요녕성 압록 강변에 이르는 635만m 길이의 성벽은 대부분 명나라때 지어진 것들이며, 만리장성에 설치되어 있는 가드레일과 케이블카는 좀 더 편하고 색다른 여행을 할 수 있게 해 준다. 이제는 흘러간 역사의 자취가 된 장성은 세계 7대 건축물, 8대 불가사의로 꼽히는 세계적인 유적지이다. 또 만리장성은 이른바 "세계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 거대한 명성을 만들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던 사람들이 일을 하다 죽으면 그 자리에 묻혔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교통덕승문에서 919번 버스(15분마다 1대)/ 전문에서 1번 버스/ 북경역 동가에서 2번 버스/ 역사박물관 서문에서 2번 지선버스/ 동대 교에서 3번 버스/ 서직문, 동물원에서 4번 버스/ 평과원에서 관광전용 4번 지선버스/ 전문서쪽 택시정류장에서 관광전용 5번 버스/ 전문에서 관광전용 8번 버스가 모두 팔달령 만리장성까지 간다.버스의 첫차 시간은 오전 6시 30분이며, 장성까지 40분정도 소요된다. (관광전용버스의 경우 만리장성과 명13릉까지 포함해서 50위안이다)= 입장료 (변동 가능성 있음)45위안(학생: 22.5위안)총연장은 약 2,700km로 우주에서 보이는 유일한 인공 건축물이다. 그러나 최근 미국의 NASA의 보고에 따르면 우주에서 보이지는 않는다고 한다. 중국의 거리 단위 리(里=0.5km)로 환산하면 1만 리를 넘기 때문에 '만리장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진시황이 흉노족의 침입에 대비해 10여 년 간 쌓았으며, 현재의 모습은 명나라 때 완성되었다. 10여 년 전부터 케이블카가 운행되고 있다. 또한 만리장성은 영국 BBC 방송이 선정한 죽기 전에가 봐야할 50곳 중 한 곳이기도 하다.-만리장성의 기원만리장성의 기원은 춘추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만리장성이라는 말이 문헌에 나타난 것은 전국 시대이다. 그때 제에서 비롯되어 전국시대에는 연 조 위 초 등 여러 나라가 장성을 구축하였다. BC 221년 중국을 통고하게 구축되어 있으며, 성의 외면은 구워서 만든 연한 회색의 기와로 덮여 있다. 내부는 점토를 붙여 딱딱하게 만들었다.팔달령 부근은 높이 약 9m, 너비는 윗부분이 약4.5m, 아랫부분이 9m가량이며, 총안이 뚫려 있는 톱날 모양의 낮은 성벽이 위쪽에 설치되어 있고 100m 간격으로 돈대가 설치되어 있다. 황허 강서쪽 부분은 전을 사용하지 않고 햇빛에 말린 벽돌을 많이 사용해 매우 조잡하다. 청대에 들어와 보수를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의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허물어진 곳도 있다.-만리장성이 건립된 목적진을 멸망시키는 것은 호이다. 백성들의 원성은 높아져도 성벽은 낮아질 줄 몰랐네. 허나 누가 알았으랴 아버지 말을 거스르고 형까지 죽인 호해가 술사들이 말하던 호였음을. 만리장성은 북방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한 것이다. 그냥 싸우면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에 긴 성을 쌓은 것이다. 처음에는 진시황제가 흉노족을 막기 위해서 시작했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 증축, 연장되었다. 진시황제는 전국을 통일하고 난 다음 전 국민을 동원할 수 있는 자극이 없었다. 전쟁 이후에 국민 동원을 위해서는 명분 있는 동원이 필요했고, 수도 방어를 위한 장성 건립을 명하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실제로 중국을 위협할만한 세력도 없었고, 흉노의 공격이 있다 하더라도 산성은 필요 없었다. 왜냐하면 흉노는 기마 민족이었기에 산은 산성 없이도, 방어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중국은 통일 이후에 비전 부재의 혼란을 우려해서 국민 동원의 명분하에 장성을 만든 것이다.-만리장성의 시대적 변화와 특징만리장성은 중국 역대 왕조가 변경을 방위하기 위해 축조한 대성 벽으로써 보하이 만에서 중앙아시아까지 지도상의 총연장은 약 2,700km이나, 실제는 약 6,400㎞(중간에 갈라져 나온 가지를 모두 합하여)에 걸쳐 동서로 뻗어 있는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토목공사 유적이다. 춘추시대 제가 영토방위를 위하여 국경에 쌓은 것이 장성의 기원이며 전국시대의 여러 나라도 이에 따랐다. 진시황제는 중국 통일 방치되었다. 장성이 현재의 규모로 된 것은 명나라시대로, 몽골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였다. 오늘날 관광 대상이 되고 있는 바다링 근처의 장성은 높이 8.5m, 두께는 밑 부분 6.5m, 윗부분 5.7m이며, 위에는 높이 1.7m의 연속된 철자형 담인 성가퀴를 만들고 총안을 냈고, 120m 간격으로 돈대를 만들어 군사의 주둔과 감시에 이용하였다. 청대 이후에는 군사적 의미를 상실하고, 단지 본토와 만주·몽골 지역을 나누는 행정적인 경계선에 불과하게 되었다.-만리장성으로 인한 피해당시 진시황은 만리장성 공사 이외에 아방궁 축조 등으로 백성의 고혈을 쥐어짜고 있었다.*피해일화-옛제(齊)나라에 맹강녀라는 여인이 살았다. 그녀는 남편과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남편은 만리장성 축조에 징집되었다. 이후로 한참을 기다린 그녀는 남편이 3년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자 불안한 마음에 집을 떠나 만리장성 축조 현장으로 갔다. 그러나 그곳에서 남편이 일하다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맹강녀는 그 앞에서 한스럽게 울기 시작했다. 그러자 만리장성의 한쪽 성벽이 무너졌다고 한다. 이 당시 진 나라의 인구는 약 2천만 안팎이었는데, 궁성과 능묘 건축에 징발된 사람이 150만, 요새 오령(五嶺)을 지키는 이가 50만 명, 흉노를 방어하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는 일에 수십 만 명이 동원됨. →전체 인구의 1/10이상이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다.지금까지 위의 글에서는 만리장성의 설명과 더불어 기원 건축적 특징, 시대적 특징 피해일화정도까지 알아보았다. 만리장성은 누구나가 다 알겠지만, 진시황이 건설했다고 알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그런 진시황은 왜 만리장성을 건축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중국을 통일하고 막강한 전제통치를 하던 진시황에게 장성의 의미는 방어 외에도 또 다른 의미가 있을 것이다. 서책이란 서책은 모두 불살랐던 '분서갱유'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반란을 두려워했던 진시황은 사상적 통제 외에도 수많은 전쟁포로와 지식인, 백성을 통제할 수단이 필요했을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 처음에 언급하였듯 진시황이 쌓은 것으로 알고 있는 만리장성이 사실 고려가 세운 천리장성이라는 자료를 찾게 되었다. 우선 천리장성에 대한 설명을 하자면 천리장성은 11세기 초 고려의 북쪽 변계(변계)에 쌓은 성이다. 천리장성의 축조는 일시에 축조된 성이 아니라 1014년(현종 5)에 동서북 방면 요새지에 부분적으로 성책을 쌓았던 것을 1033년(덕종 2) 8월 평장사 유소가 왕명을 받들어 변계에 관방을 처음으로 설치하는 연결 작업으로써 완결된 것이다. 위치와 범위는 옛 국내성 경계의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으로부터 시작해서, 동쪽으로는 지금의 의주 지역인 위원·흥화·정주·영해·영덕·영삭·정융·영원 및 그 부근의 평로·맹주(맹주;지금의 맹산), 그리고 삭주·운주(운주; 지금의 운산)·안수(안수; 지금의 개천)·청새(청새; 지금의 희천) 등의 13성(《동국여지승람》과 《고려사절요》는 14성이라 함)을 거쳐 함경도의 영흥(영흥) 지역인 요덕(요덕)·정변(정변)·화주(화주) 등의 3성에 연결되어 동쪽으로 바다에 이어진다. 그러나 이미 1014년에 서북방면에는 용주(용주)·철주(철주; 지금의 철산)·안의진(안의진; 지금의 구성)·청새진·위원진·인주(인주)·영덕진 등의 성과 동북방면에서는 의주(의주; 지금의 덕원)·영평진(영평진; 지금의 영흥?)·요덕진·상음현(상음현; 지금의 안변)·현덕진(현덕진 ;지금의 영흥)·용진진(용진진; 지금의 문천) 등의 성을 보축 또는 신축하였다. 《고려사》에 의하면 이 성의 총길이는 1,000리에 걸치는 석성(석성)이며, 높이와 두께는 각각 25척이라 하였다. 본래의 명칭이 어떠했는지 기록상 분명치 않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속칭 ‘만리장성’이라 했고, 현재는 흔히 ‘고려장성(고려장성)’, 또는 ‘천리장성’으로 불린다. 이 처럼 만리장성은 천리장성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 또한 그런 말을 주장하게 하는 자료들은 아래의 자료들과 같다.고려사6권-세가-정종시월축장성어''서북로''송령 동이액변구지충.◀고려가 장성을 축조. 장성=만리장성실이다.
어린 시절, 동화를 꿈꾸며..그 아이를 본 건 그 아이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일할 사람을 구한다는 광고를 보고 찾아 갔을 때의 일이다. 난 돈이 필요했다. 내가 그토록 원했던 이 홍콩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난 어머니와 함께, 그리고 어린 동생과 설거지를 도와가며, 돈벌이를 찾고 있었다. 그 때부터 청과 나의 인연은 시작 되었다. 그 아이는 자신의 아버지의 가게에서 거절당한 나에게 찾아와서, 동업을 제안 하였다. 돈벌이가 필요했던 나는 그 아이의 말을 들으면서 다른 생각이지만, 어쩔 수 없이 시작을 하게 되었다. 그 아이는 나에게 “팁은 7:3으로 으로 나누자, 내가 사장이니까 내가 7인거야”라는 말을 하였다. 나는 “공평하게 5:5로 하자 공평해야지” 라고 말하면서 약간의 의견 대립이 있었지만, 곧 그 아이는 나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대신 복종이라는 명분하에……. 난 사실 불법 체류자로 홍콩에 와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청과의 계약 이후에도 난 늘 경찰을 보면 늘 피하기만 하였다. 사실 계약이긴 하지만, 즐거웠다. 지금 이렇게 떨어져서 그 어린 시절을 떠 올려보면, 분명 내가 좋아하고 꿈꿔 왔던 홍콩에서 청과의 만남은 나에게 살아가는데 활력소가 되었고,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그 시절을 떠 올리면 흐뭇한 웃음이 나오나 보다. 비록 마지막에 그 녀석은 나와 동생에게 작별인사를 하러 간 것이 아니라 엠블런스를 쫒아 땀을 뻘뻘 흘리며 간 녀석이지만……. 그래도 지금 생각하면, 그 시절 그때의 추억은 청이 있었기에 행복했나 보다. 내가 꿈꾸고 동경했던 홍콩에서 정말 나는 살아나가려고 발버둥 쳤다. 꽉 막히고, 비좁고, 더러운 그 골목에서도 우리는 같이 있었기에 행복했다. 데이빗에게 오줌으로 만든 레몬주스를 줬을 때도, 골탕 먹이는 그런 장난이 은근히 재미가 있었다. 사실 나중에 데이빗이 당뇨에 걸렸단 소리를 듣고, 그게 우리의 장난 때문인 것 같아서 겁이 나긴 했었다. 그 골목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 그 중심에 청이 있었다. 그리고 그 청을 통해 난 홍콩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 같다. 물론 결국엔 홍콩이 반환되기 전 잡히긴 했지만, 청과의 만남은 나에게 동경의 대상이던 홍콩을 알아가게 해준 큰 계기였다. 청을 떠올리다 보니, 청과의 관계가 어긋나게 되었던 일이 떠오른다. 청이 형을 찾으려고 하다가 아버지에게 그 사실을 들켜 혼이 나고 도망쳤을 때, 숨겨줬지만, 청의 아버지의 말에 난 겁이 났었다. 그러다가 청이 숨은 냉장고를 청네 아버지가 눈치 채고 청을 끌고 갔을 때, 그 때 청의 눈빛은 날 원망하고 있었다. 숨어서 청이 벌 받는 모습을 보면서 청과 눈이 마주 쳤을 때, 난 숨을 수밖에 없었다. 날 많이 원망했겠지…….그게 청에게 미안하긴 했다. 사실 난 잘못이 없었는데…….청한테 그걸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이렇게 청과의 즐거운 시간들은 결국 그 사건 이후로 청과 내가 멀어지게 되었고, 청과 나는 헤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시간의 연속 속에 결국 내가 경찰에 잡힘으로써 그 동화같이 행복했던 어린 시절은 끝이 나게 되었다. 내가 그때 경찰에 잡히지 않고 청과 재회 하여 다시 전처럼 즐겁게 지냈으면……. 그리고 내가 불법체류자의 신세가 아니라 청과 같은 위치에 서서 그와 만났다면 우리의 미래는 어땠을지 하는 생각을 종종 해 본다. 퍽이나 아름다웠고 즐거웠던 어린 시절을 꿈꾸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