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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술]샤갈
    Marc Chagall1887.7.7~1985.3.28마르크 샤갈은 아마 20세기의 모든 화가들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으면서도 거의 제대로 이해되지는 못한 화가일 것이다. 사실, 지금은 사라진 동유럽 유대 세계라는 유년기의 편협한 환경에만 집착한 화가가 그토록 큰 인기를 누렸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미스터리다. 그 인기의 주된 이유는 샤갈의 예술이 분명히 특수성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넘어 보편적 타당성을 지니는 정서적, 정신적 공감을 자아내는데 있을 것이다. 20세기의 주요 화가들 가운데 비극과 환희를 둘 다 추구한 사람은 그가 거의 유일하다. 그의 가장 독특한 작품은 어느 시대의 예술에서도 보기 어려운 ‘삶의 환희’와 쾌활하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또한 그의 많은 작품에서 볼 수 있는 낭만적 사랑에 대한 노골적인 찬미도 그만의 특성이다.대단히 독창적이며 정규 교육을 받지 않은 천재라는 샤갈의 일반적 이미지는 실상 그 자신이 조장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의도했던 것보다 외부의 영향을 더 크게 받았으며 비록 그의 작품은 양식에서나 화법에서 소박한 매력과 참신한 ‘원시성’을 보여주고 있지만, 샤갈은 극단적일 만큼 복잡한 인물이었으며, 80년에 이르는 긴 활동기간을 통해 몇 가지 매우 이질적인 문화와 다양한 기법을 두루 거친 화가였다. 그는 소박과 세련, 온건과 오만, 시기와 관대, 우울과 쾌활 등 외견상 모순적인 성격의 복합체였다. 따라서 그는 자기 작품에 대한 비판은 용납하지 못했으나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는 데는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샤갈의 작품 어느 것을 뜯어보아도 복합적인 재능을 찾아볼 수 있다. 대체로 그의 뛰어난 작품들은 시의 차원을 보여주는데, 이 점은 화가보다 시인에게서 더 큰 매력을 느꼈던 샤갈 자신이 늘 강조한 요소이기도 하다. 그와 동시에 샤갈은 늘 자신이 받은 예술적 영향력을 인정하거나, 자신의 작품과 기법에 관해 설명하는 것을 회피했다. 자신은 거의 직관적인 방식으로 작업을 하므로 합리적 분석이 불가능하다는 게 그바의 국립유대극장의 벽화장식을 담당하기도 하였으나,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맞지 않아 1922년 베를린, 1923년에는 파리로 돌아왔다. 이때부터는 유화 외에도 화상(畵商) 폴라즈의 의뢰에 따라 많은 판화를 제작하여 에콜 드 파리의 유력한 작가로 주목받게 되었다. 그리고 환상적인 작풍으로 초현실주의 미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나치스의 유대인 박해가 점차 격화되자 1941년 도미,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미국에서 지냈다. 1947년 다시 파리로 돌아와, 1950년부터는 남프랑스의 방스에 영주의 터전을 잡았다. 1948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전(展)에서 판화상을 받았으며, 유화, 판화, 벽화(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의 벽화, 파리오페라극장의 천장화 등)·스테인드글라스, 조각, 도기(陶器) 제작을 비롯하여 무대 장식 분야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활동을 하였다. 초기 작풍은 큐비즘의 영향을 받았으나, 점차 슬라브의 환상감과 유대인 특유의 신비성을 융합시킨 독자적인 개성을 강하게 풍겼다. 소박한 동화의 세계나 고향의 생활, 하늘을 나는 연인들이란 주제를 즐겨 다루었고, 자유로운 공상과 풍부한 색채는 보는 사람의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풀어주는 매력이 있다.◆ 초현실주의쉬르레알리슴이라고도 하는 초현실주의라는 말은 1917년 시인 아폴리네르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는 처음에 쉬르나튀랄리슴이라는 명칭을 생각했으나, 철학용어로 오해받을 것을 염려하여 초현실주의로 고쳤다고 한다. 초현실주의가 명확한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앙드레 브르통이 《쉬르레알리슴 선언》을 발간한 1924년부터이며, 1925년에는 이 운동의 첫 종합전이 파리에서 개최되었다.초현실주의는 이성(理性)의 지배를 받지 않는 공상 ·환상의 세계를 중요시한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초현실주의는 사실주의나 추상예술과는 대립되는 것으로 간주하기 쉬우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세밀한 묘사력은 사실(寫實)의 극치라고도 할 수 있으며, 또 A.마송, J.미로, M.에른스트의리트에 이르면 큰 바위덩어리를 공중에 띄워놓는다든지, 낮이 밤으로 변해 있는 등 정신의 전위(데페이즈망)를 볼 수 있다. 이렇게 기법에 있어서의 데페이즈망과 정신에 있어 그것이 초현실주의의 최대의 표현기능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대표적인 미술가로서는 그 밖에 Y.탕기, M.뒤샹, A.자코메티, 레오노르 휘니, J.B.파렝, 투아이앙 등을 꼽을 수 있다.샤갈의 작품은 대부분 19세기의 낭만주의와 20세기의 초현실주의의 사이의 작품인데 초현실주의에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고 또 혹자들은 초현실주의 화가로 분류하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낭만주의의 성향도 많이 가지고 있는게 사실이며 기법면에서 표현주의적인 성향도 약간은 가지고 있는 듯하다.샤갈의 대표적인 작품들의 전체적으로 비합리적인 설정은 초현실주의 정신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샤갈의 작품경향시인파리에 거주하는 샤갈의 한 보헤미안 동료는 샤갈을 '시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이 애칭은 어떤 관점에서 이 예술가가 후일 비평가나 미술사가들로부터 어떻게 평가될 것인가를 함축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화가-시인으로서의 샤갈의 정체는 앙드레 브르통이 그를 현대 회화에 '변형'을 성공적으로 도입한 조형 예술의 위대한 천재로 규정한 점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문화적이거나 종교적인 상징과 민속적인 이야기에 애정을 지닌 샤갈은 이러한 주제들을 회화에 끌어들였는데 이는 전통적인 주제를 거부하는 가장 급진적인 전위 미술가들에 의해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난 시적인 정신과 문화적인 해석이란 두 특징은 그 어느 것도 샤갈 작품의 완전한 의미를 설명하지 못한다. 그의 작품은 풍부하고 자유로우며, 부분적으로 서유럽 미술 전통과 다른 문화적 전통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다.예술의 변형샤갈은 전위 예술의 서정 시인이었으며. 매우 추상적이고 파악하기 어려운 의미에 디자이너이자 뛰어난 무대 장치가였으며. 신전. 오페라 하우스, 강당, 미술관 등 거대한 규모의 서구 건축물의 벽화나 천장화를 그린 화가였다. 그는 또한 모자이크와 스테인드글라스에 새로운운 감정이 서로 융화하듯한, 샤갈의 독자적인 여성미 표현에 있어 최초의 기념할 만한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까만 배경 앞에 하얀 의상, 그리고 까만 장갑의 대조에서 기품을 느낄 수 있다.[병사와 촌 여자] 1911향수에 젖은 그는 고향 이야기나 풍습 또는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관심이 많았고 이렇게 상상력이나 기억력에 의존하여 제작을 했기 때문에 대상을 묘사적으로 표현하기보다 극단적인 데포르마숑에 의한 환상적인 화면을 구축할 수 있었고 독특한 그의 화풍을 구축하는 계기가 되었다. 파리에서 그가 그린 작품 중에는 병사가 여자를 희롱하는 장면이 더러 있는데 이 작품도 그 중 하나이다. 고향의 추상을 파고들음으로서 화면의 공간을 하나의 추상적 공간으로 심리적 깊이를 더해 가려는 의도를 알아볼 수 있다. 전경의 인물이 취하고 있는 손의 모양과 함께 우스운 포즈의 무언극이라도 하는 모양이 뒤쪽에 뛰고 있는 인물과 함께 유머러스한 화면을 만들고 있다.[러시아, 암소, 그리고 다른 것들에게] 1911파리에서 야수파의 강렬한 원색 구가(仇家)에 충격을 받은 그는 또한 입체주의의 영향도 받게 된다. 그러나 그는 그 자유롭고 다이나믹한 공간 취급의 방법을 자신의 환상의 세계에 결부 시키는 형식으로 입체주의를 소화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그는 당시 레제, 들로네 등이 살고 있던 몽파르나스 근처의 라 디슈(벌집이라는 뜻)라 불리던 보잘 것 없는 공동 주택에 살면서 자신의 세계에 전념했다. 거기에서 그는 시인 아폴리네르, 생드라르스 등과도 가깝게 지낼 수 있게 되었다. 그때 생드라르스의 시에서 힌트를 얻어, 구고 온 고향 비텝스크의 풍물을 그린 것이 이 작품이다. 유태인 교회도 보이는 주택가, 자신을 길러준 러시아 대지를 상징하는 암소, 목이 달아나고 있는 여인, 무지개 빛이 비낀 하늘 등을 중첩시킨 화면 구성은 입체주의의 적용이라 할 수 있겠다.[나와 마을] 1911 -앙데팡당전 출품작-파리에서 입체주의의 분석적 방법을 습득하고, 다시 들로네와 같은 화가의 빛을 동반한 색채 수 수법은 후일 렝스 성당이나 메쓰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제작에 되살아난다. 샤갈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그러하지만 인물의 표정에 있어서 음산한 면은 금단의 열매를 딴 악의 주제가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가축상인] 1912강렬한 황색 수레바퀴와 암말의 태내에서 투시되는 망아지는 윤회의 느낌을 준다.그러나 무의식적인 조형을 통해서 작가가 표현하려고 한 것은 고향에 대한향수인 것 같다. 이 그림은 항상 어린 마르크 샤갈을 데리고 도살업자에게 가축을 팔러가던 숙부 내외를 그린 것인지도 모른다. 도살의 광경이 그를 항상 전율케 했으나, 그의 그림에서 짐승은 언제나 축성되어 있다. 여기서도 부부의 얼굴은 앞을 보지 않고 여자가 지고 있는 가련한 작은 동물을 되돌아보고 있다.[바이올린을 켜는 사람] 1912꽃다발과 소, 닭, 서커스와 더불어 샤갈의 주요한 조형기호(造型記號)가 된 바이올린은 그가 고향에서 어릴 때부터 대하던 그의 생활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바이올린을 켜는 사람은 맑은 날에 지붕위에 올라가서 흥겹게 악기를 켜고 있던 작가의 어린시절 숙부들의 회상과 그리움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여기서 인물은 초자연적인 색채와 크기로 그려져 있으며, 지붕이라기보다는 지구를 딛고 서있는 천사처럼 눈이 내린 지구 저쪽의 마을을 배경으로 흥겨운 선율을 자아내고 있다. 오른쪽 아래에는 나무 위아래에 몇 마리의 새들이 그 소리를 즐기고 있고 왼편에는 화환을 들고 세 사람의 남매가 소리 나는 곳을 찾아 모여들고 있다. 명확한 흑백대조의 화면 속에 그의 유년기의 회상을 듣는 듯하다.[일곱 손가락의 자화상] 1913샤갈은 에펠탑으로 상징되는 파리 시내가 내다보이는 창문 앞에 자리잡은 화가의 모습으로 자신의 모습을 그린다. 이 화가는 머리카락을 멋있게 손질하고 단추구멍에 꽃을 꽂고 수를 놓은 넥타이를 맨 맵시 있는 신사 차림을 하고 있다. 그는 7개의 손가락으로 그림을 마무리하고 있는데, 이 그림은 그가 자신의 최고의 걸작으로 꼽은 《러시아에게, 당나귀에게, 그리고 타인들에게》이다. 한편 화가
    예체능| 2007.01.11| 17페이지| 2,000원| 조회(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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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이탈리아
    ITALIA목 차Ⅰ. 국가개관Ⅱ. 이탈리아의 주요 도시1. 로 마- 성 베드로 성당- 바티칸 박물관- 트레비 분수- 스페인 광장- 콘도티 거리- 콜로세움- 콘스탄티누스개선문2. 밀 라 노- 공업도시- 패션- 문화유산3. 나 폴 리- 나폴리 국립 고고학 박물관- 카프리섬- 폼페이4. 베네치아- 산마르코대성당 [Basilica San Marco]- 모세 프로젝트- 베니스영화제5. 피사- 피사의 탑Ⅰ. 국가개관국가소개고대의 화려한 전통과 유물을 간직하며, 현대의 최첨단 패션과 유행을 잘 융합시키고 있는 이탈리아는 유럽 대륙에서 지중해 쪽으로 장화처럼 뻗어 나와 있다.지리유럽대륙으로부터 지중해쪽으로 긴 장화 모양을 하고 있는 길이 약 1,170㎞의 반도국가인 이탈리아는 반도와 시칠리아섬, 샤르데냐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 면적은 301,245㎢로 한반도의 약 1.4배정 도되며, 산지와 구릉이 많고 평야는 전국토의 1/5정도 밖에 안된다.지반이 불안정하여 지진이 잦으며, 시칠리아섬의 에트나산은 유럽 최고의 화산으로 화산운동을 하고 있는 분화구와 900여개가 넘는 기생화산이 있다. 북쪽은 알프스 산맥을 경계로 프랑스, 스위스, 오스트리아와 접하고, 서쪽은 시칠리아·사르데냐섬이 자리하고 있으며, 동쪽은 아드리아 해에 면해 있다.기후이탈리아는 4계절의 변화가 분명하지만,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로 전체적으로 우리나라 기후보다 약간 덥다. 그러나 북부지역은 아페니뇨 산맥의 영향으로 대륙성 기후를 나타낸다. 여름의 평균기온은29℃, 겨울의 평균 기온은 9℃정도로 온난하다.강수량은 연평균 600-1,000mm로 북부지방으로 갈수록 강수량이 증가한다. 강수일수는 계절적으로 편중되지는 않았으나 주로 가을에 많이 내리며, 여름에는 햇볕이 강렬하나 습기가 없어 지낼만하다.사회/문화공용어는 이탈리아어며 국경 주변에서는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섞어 사용하는 곳도 더러 있다. 외국인을 상대로 하는 관광지의 식당이나 상점, 호텔등 에서는 영어가 통용되나 일반 국민들에게는 거의 통하지 않는다. 국교는을 오크나무통에 넣어 1년동안 숙성시킨 다음 밤나무나 앵두나무 혹은 뽕나무로 된 작은 통으로 다시 옮겨 숙성시켜 만든다.와인과 마찬가지로 숙성된 기간이 길면 길수록 향기와 풍미가 좋아진다. 식초는 12년 정 도 장기간에 걸쳐 숙성시키면 강렬하고 농축된 맛을 낸다. 전통적인 발사믹 비네거는 감 미롭지만 다소 강한 신맛을 지니고 있다.이런 발사믹 식초는 '공작의 식초'라고도 한다. 11세기 모데나 지방을 다스리던 에스테 공작이 초대한 손님들에게 한 잔씩 마시게 했다 는 데서 유래되었다.5. 팔마산 치즈정식 이름은 "파르미자노 레자노(Parmigiano Reggiano)"로 파르므(팔마)지방에서 만들어 지는 치즈로, 치즈의 왕이라고 할 정도로 깊은 맛과 품위있는 풍미를 지녔다.현재 이탈리아 에밀리아 로마냐 지방에서 제조된 제품만이 공식적인 이탈리아 팔마산 치 즈이다. 덩어리 째로 판매되는 것을 구입하여 그레이터에 갈거나 치즈 나이프로 얇게 저 며서 쓰는 것이 좋다.보통은 시중에 나와있는 팔마산 치즈가루를 사용하게 된다.감칠맛이 깊고 달착지근한 맛이 있으며 저며 썰어서 그대로 먹거나 파스타나 리조또 위 에 뿌려서 먹는데 이탈이라 요리의 최후를 결정한다고도 할 수 있다.크림 소스와 토마토 소스, 베이컨이나 고기와는 맛이 잘 어울리지만 해산물류의 요리와 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해산물이 들어간 요리에는 뿌리지 않는다.6. 모짜렐라 치즈이탈리아 남부 캄파니아 주의 대표적인 치즈로 원래는 물소젓으로 만들었지만 요즘에는 거의 우유로 만든다.치즈 특유의 냄새가 없기 때문에 누구나 먹기 쉽다. 혀에 닿는 감촉은 매우 부드럽지만 고무처럼 탄력이 있어 씹는 맛도 적당히 즐길 수 있다.오일이나 비네거와잘 어울리는 치즈로 슬라이스한 토마토와 같은 두께로 썰은 모짜렐라 치즈에 바질과 올리브 오일을 곁들여 만드는 '토마토 모짜렐라 치즈 샐러드'는 이탈리아 샐러드의 대표적인 메뉴이다.나폴리식 피자에 반드시 들어가야 할 재료로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피자와 그라탱에 얹어 서 구워 먹는다.7. 올리브 성당로마의 테르미니역 옆에 있는 산타마리아마조레성당은 아주 오래된 5, 6세기 성당이다. 이집트와 그리스의 열주들이 실내에 즐비하게 줄 서 있다. 그 사이 넓은 중앙을 본회랑으로 삼고 있고, 좌우에 상대적으로 좁 은 회랑을 갖추고 있다.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성당. 5세기경에 세워진 장대하 고도 엄숙한 바실리카양식의 전형적 건물로, 이 터를 계시하느라고 무더운 팔월에도 눈이 쌓여 있었다는 전 설이 있다천정은 비교적 낮고 네모 무늬(우리말로는 우물 천정)로 장식되어 있다. 천정이 낮아 훤히 트이는 시원한 느낌은 없지만, 열주가 만들어 내는 강직하고 고전적인 느낌은 어느 성당 못지않다. 원래 이런 성당 벽면에는 지옥이나 묵시록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기독교가 공포를 이용해 사람들을 장악하던 시대였고, 아직 밝은 실내의 고딕 양식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5,6세기에는 천정을 평면으로 삼은 성당을 지었다. 무거운 천정 때문에 벽이 두꺼울 수밖에 없었다. 이집트 신전을 방불케 한다.?박물관과 갤러리Ⅰ. 바티칸 박물관바티칸의 산 피에트르 대성당에 인접한 교황궁 내에 있는 미술관이다. 역대 로마 교황이 수집한 방대한 미술품·고문서·자료를 수장(收藏)하고, 또 미켈란젤 로, 라파엘로 등의 대화가에 의한 내부의 벽화·장식으 로 유명하다. 창설은 율리우스 2 세(재위 1503∼ 1513) 때 벨베데레의 정원에 고대 조각이 전시된 것 으로 시작되었지만, 일반에게 공개된 것은 클레멘스 14세 치하인 1773년이다. 현재 본관은 피오 클레멘티노미술관·도서관·성(聖)유물관·회화관 등 많은 부분으로 나뉘고, 또 각실은 보르지아실(室)·라파엘로실·지도실이라는 특유의 명칭으로 불린다. 미켈란젤로나 안젤리코의 벽화로 유명한 시스티나성당·파오리나성당·니코로 5세 성당 등도 미술관의 일부로 여기는 것이 보통이다.세계에서 진귀한 예술품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바티칸 박물관은 르 네상스 시대에 교황들을 위해 지은 궁전 이었다. 1198년 교황 인노첸트 3세가 설립하여 4세기 동안이라도 벌어지면 순식간에 야외무대가 되기도 한다. 언젠가 우리나라 디자이너들이 이곳에서 패션쇼를 개최해 화제가 된 적도 있다. 이 광장은 주요 호텔들이 밀집된 지역의 중앙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17~18세기나 지금이나 여전히 방문객들로 붐빈다. 예전에는 거지들이 눈물로 애걸하는 거짓 편지로 부유한 여행가들의 호주머니를 노렸듯이 지금은 집시들이 관광객들의 호주머니를 노리고 있는 풍경조차 변한 게 없는 듯하다. 지금은 앉아서 한낮의 태양을 즐기거나 엽서를 쓰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는 대중적인 장소가 되었다. 스페인 광장에서 콘도티 거리로 이어지는 길 사이사이의 마리오레피오레 거리, 보카디레올 거리, 벨시아나 거리들도 세계적인 명품 매장들이 줄을 이어 들어서 있어, 특히 외모에 많은 투자를 한다는 이탈리아인들의 세련된 차림을 흘깃거리며 거리 구경만 해도 즐거운 하루를 보낼 수 있다.? 로마를 빛낸사람들로마가 지닌 매력 때문에 예로부터 수많은 외국인들이 로마에서 장기체류하거나 아예 눌러 살았다. 로마를 방문한 유명인들은 일일이 손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로마의 초기시절 이래 수많은 화가와 조각가, 건축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많은 소설가, 시인. 음악가, 망명자. 순례자, 종교 지도자, 철학자, 심리학자,인류학자들도 로마를 거쳐갔다. 그들의 오케스르라, 오페라, 그림, 스케치, 드라마, 문학작품등은 로마가 그들에게 끼친 정신적 영감을 보여준다.Ⅰ.화가와 조각가, 그리고 건축가16세기초, 교황의 거대한 건축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많은 예술가, 건축가들이 전세계로부터 로마로 모여들었다. 이들 중에는 우르비노에서 온 부라만테(1444-1514)와 라파엘(1483-1520), 페루자에서 온 페르지노(1450-1523), 피렌체(플로렌스)출신 미켈란 젤로(1475-1564)도 있었다. 이 예술가 들은 바티칸에서 일했으며 성베드로 성당의 설립과 시스티네예배당의 장식을 맡았다. 이들 예술가들은 흔히 좋은 대우를 받았지만, 그들은 또한 힘든 시절을 살아내야으로 매년 두차례 이탈리아 북부 산업도시 밀라노에서 열린다. 프랑스와 영국의 하청국가로 시작하여 그 노하우를 바탕으로 실용성과 착용성에 주안하여 옷을 만드는 특징을 가지고 있어서, “옷을 구경하려면 파리로 가고, 옷을 사려면 밀라노로 가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소재의 고급스러움으로 우아함과 세련됨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밀라노만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대표 디자이너· 조르지오 아르마니(Giorgio Armanani) : 80년대 딱딱하고 무거운 남성 정장을 가볍고 소프트한 언킨자켓으로 바꾸어 놓았다.· 지아니 베르사체(Gianni Versace) : 메두사 머리를 상징으로 하는 문장과 아름다운 색챌 유명하다· 지안프랑코 페레(Gianfranco Ferre) : 건축가 출신으로 의상디자인에 건축적인 개념을 도입시켰다.그외에도 매니쉬한 여성의 매력을 화려한 색채로 표현한 돌체앤가바나 Dolce & Gabbana, 나일론 소재를 사용한 명품 핸드백으로 유명한 프라다Prada 와 가죽소재의 아이템에서 출발하여 고급 핸드백을 제작한 구찌 Gucci를 대표적인 밀라노 컬렉션 디자이너로 꼽을 수 있다.>> 장소 및 개최 시기뉴욕과 런던 다음으로 그리고, 파리보다는 앞서서 2월말에 F/W 그리고 9월말에 S/S 컬렉션이 발표된다. 이탈리아 북부 산업도시 밀라노의 Fiera에서 대부분의 쇼가 진행되어, A,B,C,D,E의 각기 다른 방에서 컬렉션이 열린다Ⅲ. 문화유산밀라노에는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명승지가 많다. 흰 대리석의 고딕 양식 건축물인 밀라노 대성당, 브라만테의 손으로 다듬어진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교회, 이 교회 안에 있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벽화〈최후의 만찬〉, 오페라의 전당 '스칼라 극장' 등은 세계적으로도 이름이 난 곳이다.(1) 두오모(Duomo)- 밀라노 대성당(Duomo di Milano)두오모(Duomo)로 불리는 밀라노 대성당(Duomo di Milano)은 이탈리아 고딕 건축물 중 규모가 가장 크다.비스콘티 가(家)의 장 갈레아초 공작의 다.
    사회과학| 2007.01.11| 32페이지| 2,500원| 조회(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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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카소
    PicassoPicasso, Pablo (1881~1973)1. 피카소의 생애피카소는 스페인의 한 도시 말라가에서 1991년 10월 25일 태어났다.그의 아버지는 시골 학교 미술 교사였는데 자신의 아들이 10살 때 이미 그의 아버지를 능가하고 있음을 알고 정말 무서운 아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드디어 스페인 문화 중심지였고 유서 깊은 도시인 바르셀로나에 있는 론잔 미술학교 입학시험에서 14살의 나이로 한 달 걸려 그릴 수 있는 그림을 단 하루에 그려내어 모든 이들을 경악하게 하였다. 16살에 그는 모든 미술 콩쿠르를 석권할 정도였다. 1900년 19세인 피카소는 바르셀로나 뒷골목 [검은고양이] 선술집에서 첫 전시회를 열었다. 150현의 데생은 시인, 작곡가, 예술가 모습을 스케치한 작품으로 공개적으로 화가임을 선언한 전시회였다. 틀에 박힌 미술 감상법에 분노했던 피카소는 어느 새 예술가 모임의 중심인물이 되었고 그는 이미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로 소문이 났다. 그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에게 열광했지만 그를 싫어하는 사람은 그만큼 그를 경멸하기도 했다. 그는 특히 죽마고우 카사헤마스와 친했고, 그의 주변에는 늘 사람들이 들끓었다. 허물없는 솔직성과 남들이 도저히 모방할 수 없는 그만의 괴짜 기질이 그의 강력한 매력 중 하나였다. 피카소의 나이 19세 되던 1900년, 그는 전 세계 천재 예술가들의 집합소인 몽마르트로 떠난다. 스페인에서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프랑스어를 못해 파리 생활에 고전했지만 그에게는 원대한 꿈이 있었다. 10월 몽마르트 언덕 눈부신 가을, 모든 진보를 대표하는 도시 파리, 이 도시는 그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유일한 도시였다. 그는 또한 여기에서 폴 고갱, 반 고흐, 로드렉, 드가 등 대가들의 작품들을 박물관을 누비며 정열적 탐구욕을 보였다. 그는 특히 몽마르트 빈민가의 화가 로트렉에 관심을 기울였다. 또한 그는 그 당시만 해도 야만적이라고 거들떠보지 않던 페니키아 이집트 예술에 크게 매료 되었고 후에 그의 예술와즈 질로는 자유 분방한 여자로 법대를 다닌 지적 여성이기도 했다. 프랑스와즈도 아는 즈느비에브와 서로 모르게 두 여자와 따로 연인 관계를 맺어 그 후로 피카소와 완전히 헤어지는 계기가 된다.일곱 번째 연인인 자클린은 피카소보다 40년 연하의 여자로 절대 헌신형이다. 이 시기는 피카소가 최고의 명성을 누렸던 시기로 피카소 말년의 생애에 오직 작품에만 전념하도록 도와준 여자다. 이 시기는 피카소가 도자기 예술과 고전 작가의 재해석에 심취한 시기였다.3. 큐비즘20세기 초 야수파(포비즘)운동과 전후해서 일어난 미술운동으로 입체주의라고도 한다. 그 미학은 회화에서 비롯하여 건축·조각·공예 등으로 퍼지면서 국제적인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그 특질은 무엇보다도 포름(forme)의 존중에 있으며, 인상파에서 시작되어 야수파·표현파에서 하나의 극(極)에 달한, 색채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보인다.4. 피카소의 작품 해석초기시대피카소는 말도 하기 전에 이미 그림을 그렸던 신동이었다. 두 살 때 그가 처음으로 한 말은 그림 그릴 도구를 달라고 “연필, 연필” 하며 조르는 말이었다. 스페인에서 평범한 화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십대 전반에 이미 사진처럼 정확하게 사생할 수 있었다. 1946년 아동 미술 전람회에 들른 피카소는 그 나이에 자신은 “라파엘로같이 그릴 수 있었지만 아이들같이 그리는 법을 배우는데 수년이 걸렸다”라고 회상했다.< The Picador > -1889년피카소의 알려진 그림 중 가장 최초의 작품으로 피카소가 8살 되던 해에 그려졌다.많은 부분이 손상됐음에도 피카소는 오랫동안 이 그림을 간직하고 있었다.청색시대 ( 1901 ~ 1904 ) - 가시적 리얼리티에 대한 관찰보다 정신적 가치를 더 중요시 한 시대.“내가 푸른색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죽은 카사헤마스를 생각하면서부터 입니다.”피카소가 보여준 최초의 독창적인 스타일은 가난하고 궁핍했던 시절을 통해 얻어진 것이었다. 1901~4년까지 계속된 청색시대란 명칭은 피카소가 차가운 인디고와 코발트블루를 즐겨 같아 보인다.그러나 여인은 이상하리만큼 씩씩한 포즈를 하고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놀라게 한다.피카소의 극과 극의 융합 능력을 볼 수 있는 좋은 예이다.장밋빛 시대 ( 1905 ~ 1906 ) - 사회적 비관주의에서 벗어나 서정적이고 개인적인 비애를표현.파리에서 완전히 정착한 피카소는 곧 첫 번째 애인 페르난드 올리비에를 만남으로써 그의 좌절감은 완전히 사라졌다. 이 시기부터 그는 세련된 장밋빛과 갈색 톤으로 어릿광대와 곡예사 같은 서커스 광대를 즐겨 그렸다. 시인 아폴리네르가 “모든 방향에서 바라 본 곡예사는 공간 속의 조각 작품 같다”라고 하였고 피카소는 인간의 몸을 모든 각도에서 관찰하기 시작한다. 장밋빛 시대, 즉 서커스 시대의 그림들은 감상적이고 로맨틱한 것이었다.< 곡예사 가족 >- 1905년이 그림에서 보듯이 피카소는 서커스 곡예에서 감흥을 받은 듯 매일 저녁 서커스를 보러 다녔고, 서커스 단원들에게 매료되어 수많은 그림을 그린다.6명이 구성된 무리로 사막과 같이 황량한 느낌이 드는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그림이다.사람들이 양쪽으로 나누어져 있고 왼쪽에는 여러 곡예사들과 꽃바구니를 가지고 있는 소녀가 있으며 그리고 오른쪽 끝에는 고독하고 앉아있는 젊은 여인이 있는데 피카소는 이러한 배치를 통해 각 인물들의 개성을 부각시키고 있다.피카소는 어릿광대와 곡예사를 하나의 상징으로 생각했는데 이들의 삶이 예술가가 처한 상광과 매우 비슷하다고 느꼈기 때문인데 그래서 에서도 예술가들이 자주 느끼는 고독을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피카소는 이들이 소외되고 고통 받고 있지만 타고난 재능이 있고 자신의 일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국풍의 오르가니스트 >- 1905년얼굴을 옆으로 하고 왼쪽 어깨가 강하게 불거져 있으며 양다리를 가지런히 하고 있는 이 늙은 손풍금 타는 사람에게서 젊은 피카소가 매혹 당했던 카다르니아의 로마네스트 미술을 연상시키고 있다.이 목 조각 같은 노인과 아직은 어리디어린 소년과의 대조를 준 것은 보는 이현을 발견했으며 그 모티브를 자신의 그림에 조합시켰다. 같은 해 그는 그의 획기적인 작품 을 그렸는데 이 작품은 미술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몇 안되는걸작 중의 하나이다.< 거트루트 스타인의 초상 >- 1907년피카소가 이 유명한 초상화에 착수한 것은 1905년이었다.그때 거트루드 스타인은 오랜 시간 동안 포즈를 취해 주었다.그런데 이듬해 봄이 되었을 때 피카소는 그 동안 그린 얼굴을 몽땅 지워버렸다.그에게는 그다지 탐탁치않게 여겨졌던 것이다. 그러다가 1906년 가을, 고솔에서 돌아온 피카소는 그동안 제쳐두었던 이 초상화에 다시 착수하여, 가면 같은 모습을 부여했다.매끈한 이마는 튀어나온 듯하고 윤곽은 개성이 없고 도식적이며 이목구비가 정연하다.이 초상화에 대해 거트루두 스타인은 이렇게 말했다."나의 여러 초상화 중에서 언제나 나의 모습 으로 남아 있는 유일한 것입니다."< 아비뇽의 아가씨들 >- 1907년입체파에 들어선 피카소의 대표작이다.흔히들 이 작품을 두고 20세기 회화 사상 가장 주목할 작품이라고들 하는 것은 이 그림에는 기하학적 포름으로 환원된 인체와 반추상의 형태가 나타난 까닭이다.화면에는 5명의 발가벗은 여인들이 기하학적 몸을 가지고 있다.대상을 다양한 각도에서 보고 조각을 나눈 뒤 한 화면에 종합하여 배열한 듯 하다.공간적 배경은 푸른색과 흰색의 기하학적 윤곽만을 표현하여 입체적인 느낌을 준다.가운데 두 여인은 최초의 구상 단계를 유지한 편이나, 양쪽의 여인 셋은 신체의 조각들을 섞어 조합한 듯한 모습이다.왼쪽 눈은 정면을 보지만, 오른쪽 눈은 4분의 3각도로 옆을 쳐다본다.또 등을 보이고 앉은 아프리카 가면을 쓴 듯한 여인은 정면을 응시한다.이 작품은 형태상의 문제도 있지만, 여성들의 근원적인 생명력의 강한 호소도 보인다.< 앉은 나부 >- 1908년앉은 나부로 되어 있지만 의자의 형태도 분명치 않아 실제로는 여인이 서 있는 것으로 보인다.또 실제로 여인인지 아닌지 볼륨 표현이 극도로 억제되어 있는 까닭에 남자로도 보여 진다.이 작품은 전있는 듯 밝게 처리되었다.하늘마저 세잔식의 각과 면으로 통일했다.입체주의가 본 궤도에 올라섰음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앙브루아즈 볼라르의 초상 >- 1910년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입체주의의 엄격성을 견지했음에도 모델의 얼굴 특징을 족집게로 집어낸 듯 부각시켰다.볼라르의 말에 의하면 자기 친구들은 이 그림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몰라 어리둥절해했지만 네 살 박이 친구 아들은 이 초상화를 보자마자 “볼라르 아저씨네”하고 말했다고 한다.순수한 눈의 직관력이 단박 초상화의 실체를 집어낸 것이다.이 작품은 실제로 볼라르가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기에 그의 개가 주인인 줄 알고 꼬리를 흔들며 달려갔다는 에피소드도 있다.신문에 실리는 정치가의 캐리커쳐처럼 벗겨진 이마, 불독을 닮은 코와 입 주위가 볼라르의 특징을 잘 잡아냈다.- 1911년이 그림의 제목은 특이하게도 화면 하단에 있는 Ma Jolie라고 하는 문자에서 따 왔다. 이 그림은 무얼 그린 걸까? 정답은 기타를 치고 있는 여인이다.하지만 우리는 이 그림에서 여인이나 기타의 형상을 식별해 낼 수가 없다. 대상은 극심하게 해체되어 배경 속으로 녹아들고 있다. 남아 있는 것은 화면 구성뿐이다. 피카소는 이 그림을 그리던 중 당시 유행하던 노래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들었는데 그 노래의 제목이 Ma Jolie였다. 그런데 문자는 사실 그림이 아니다. 그림이 색채와 선 같은 시각적 요소들로 무언가를 표현하는 예술이라면, 문자는 그림의 도구라기보다는 우리의 일상생활의 도구이다. 현실의 요소를 그림에 차용하고 있는 셈이다.이 그림을 통해 그는 불안정하게 해체된 형태들과 문자 같은 비회화적 요소들로 하나의 낯선 세계를 창조하고 있다.< 등나무 의자가 있는 정물 >- 1912년그림이 주는 견고함과 재질, 색깔의 실물성 등이 그림보다는 조각 같은 촉감을 준다.그림에 쓰여진 문자 Jou는 잡지란 말 Journal과 연결시켜 일상 생활의 친근감을 준다.이러한 그림 표면에 종이, 직물, 나무, 광물 같은 이물질을 부착하는 콜라주나 파겨있다.
    예체능| 2006.12.27| 18페이지| 2,000원| 조회(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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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돈에 당당한 여자가 아름답다
    돈에 당당한 여자가 아름답다.이건홍 지음 조선일보사 20021. 여성의 벽을 뛰어넘어라.홀로서기를 실천하라. 여성이 남성보다 능력이 뛰어남을 보여줘라. 디지털 시대의 특성을 최대한 활용하라. 일할 때는 프로 의식을 가져라. 직업에 귀천이 없음을 증명하라. 외모보다 실력을 가꾸어라.2. 재테크 설계, 20대부터 시작해도 결코 빠르지 않다.재테크는 행복을 창조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라. 젊었을 때 돈을 벌어라. 무에서 유를 창출하라.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라. 생활 재테크에 더 주력하라. 빨리 저축해서 오래 구려라. 사소한 것도 소홀히 하지 마라. 평생의 저축 계획을 세워라. 20대부터 50% 저축법을 실천하라. 재산을 두 배로 만들기까지의 시간을 줄여라. 위험부터 생각하고 투자하라. 기반 다지기에 주력하라.3. 경제의 흐름을 이해하면 돈이 보인다.경기를 읽고 투자하라. 금리의 흐름을 파악하라. 경제 지표의 상관관계를 이해하라. 인플레 대비책을 세워라. 돈의 흐름을 보는 안목을 길러라.4. 종자돈 모아 100배 불리기.확정금리 비과세 상품을 이용하라. 종전의 개인연금신탁 등을 활용하라. 비과세 상품의 투자 순위를 정하라. 금융상품을 활용한 연말정산 준비는 미리 하라. 실생활과 관련 있는 연말정산도 챙겨라. 자신의 여건에 맞는 적금을 선택하라. 목돈은 생계형 저축에 투자하라.5. 틈새상품에도 관심을 갖다.공격적인 여성은 퓨전형 금융상품에 관심을 가져라. 공모주, 실권주 청약을 노려라. 부동산투자신탁으로 수익률을 높여라. 경기 쇠퇴기에는 채권을 활용하라.6. 간접투자에도 관심을 갖자.간접투자의 개념과 종류를 이해하라. 안전성을 고려해 원금보존형 펀드 등을 이용하라. 펀드 투자전략을 반드시 지켜라. 적립식 펀드에 장기 투자하라. 맞춤형 펀드를 활용하라.7. 도전하자! 직접 해보는 실전 주식투자.때를 가려서 투자하라. 지점매수 원칙을 꼭 지켜라. 주식은 파는 예술임을 명심하라. 관성의 법칙을 아고 투자하라. 시장의 심리를 연구하여 정석투자를 하라.8. 20대부터 시작해도 결코 빠르지 않은 내 집 마련 전략.먼저 청약통장에 가입하라. 수도권 신도시 청약을 노려라. 무주택 세대주 우선공급제도 등을 활용하라. 수익형 부동산에 관심을 가져라. 집을 싸게 사려면 경매를 노려라.9. 돈을 싸게 빌리기 위해 꼭 알라두어야 할 대출 재테크.주택이 있다면 주택담보대출을 받아라. 전제사금은 신용보증서담보대출을 이용하라. 빚은 최대한 줄여라. 고금리 대출은 저금리 대출로 갈아타라. 예금 대출 부동석을 지켜라. 내 집 마련은 생애 최초 주택구입자금대출 등을 이용하라. 나에게 맞는 신용대출을 이용하라.10. 꼭 알아두면 돈 되는 세테크 정보.자금 출처의 기준을 알아둬라. 기준시가의 시가표준액을 이해하라. 각종 세금을 절약하라. 증여나 상속에 대비하라. 세제 혜택이 많은 임대사업을 노려라.11. 20대부터 시작해도 결코 빠르지 않은 확실한 노후 설계.노후 대비는 20 대부터 하라. 연금 불입액을 늘려라. 연금 수령액을 예상하라. 퇴직제도의 변화에 대비하라. 퇴직금 운용 원칙을 지켜라.사람들은 대부분 부자가 되고 싶어 한다. 이 책에는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여성들을 위해 재테크에 필요한 정보와 지식을 제공한다. 재테크에 대해서 전혀 모르던 나에게는 다소 어려웠지만 읽어가면서 나의 삶의 질과 행복지수를 높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누군가 나에게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성공과 행복이라고 마한다. 성공과 행복의 기준이나 가치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성공의 시준은 자신의 일에 만족하는 것이고 행복의 가치는 그 일에 보람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와 함께 모든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인생을 아름답게 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우리나라 인구의 반은 여성이다. 그러므로 여성이 경제력의 반을 차지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실제로 여성의 경제력은 빈약하기 짝이 없다. 여성의 ‘개발지수’는 높은데 ‘권한지수’는 매우 낮다고 한다. 이것은 여성에게 교육의 기회는 제공하면서 일할 수 있는 기회는 주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환경에 지친 젊은 여성들은 스스로 부자 되기를 포기하곤 한다.돈을 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떤 방법으로 지키고 키워나가느냐 하는 것인데, 여성 특유의 섬세함과 꼼꼼함 그리고 인내력이 재테크와 연계되면 경제를 받쳐주는 토양이 되고 국가 경쟁력의 주춧돌이 될 것이라고 한다.그런데 우리 사회에 만연된 소비 풍조를 좇아 사치와 낭비를 하는 여성들이 많아지고 있다. 또한 일부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일단 쓰고 보자는 소비 지상주의가 최고의 가치가 되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이삼십 대 신용불량자가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고 있고, 이 중 여성도 한몫을 하고 있다.
    독후감/창작| 2006.12.18| 3페이지| 1,000원| 조회(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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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랑스, 파리 관광계획
    PARIS1. 프랑스뭐라고 단 몇 마디로 압축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다양성을 가지고 있는 나라이다.건축, 패션, 과학, 음식, 예술 등 어느 것 하나 창조성이 깃들이지 않은 것은 존재가 치마저 거부하는 프랑스!빛나는 태양과 풍요의 은혜를 듬뿍 안은 대자연, 개성을 중시하는 이지적인 국민성, 생명력을 추구하는 예술성, 무언가를 기대하며 찾는 이방인을 말없이 품어주는 포용 력, 그것이 프랑스인이 가진 오만하면서도 세련된 자긍심이다.다른 문화나 언어에 대해서 배타적이라는 말은 프랑스에 대해 좋지 않은 선입견을 주어처음에 프랑스인을 경계하게 만들었는데, 시간이 지날 수록 괜한 정보를 듣고 와서 좋은프랑스인 들과의 만남을 놓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만난 프랑스 사람들은 모두 친절했고 모두 상냥했다. 어디서도 문화 우월주위에 빠져 이방인을 무시하는 프랑스인을 만나지 못 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세느강 주변을 따라서 늘어서 있던 건물들과 그 건물 안에서 보았던 그림, 유물, 프랑스의 역사 그대로 보인다. 어떤 사람들은 세느강이 한강보다 훨씬 못하다는 이야기들을 한다. 그건 그 강만을 보고 한 말이다. 세느강에서 눈여겨 봐야 하는 것은 강물이 아니라 강을 끼고 있는 그들의 역사이다. 파리에 도착했을 때 가졌던 설레임보다 돌아온 지금 프랑스의 이야기를 들으면 더 설레인다.1)민족대부분의 프랑스인 들은 과거 여러 시기에 걸쳐 중동과 아프리카로부터 지중해를 건너오거나 중앙 아시아와 북유럽으로부터 유럽을 가로질러 이주해와 영구적으로 정착한 다양한 이민들의 후손이다. 이러한 이주 외에도 수세기에 걸쳐 수많은 전쟁과 장기간의 이민족 점령을 겪었으며, 특히 20세기에는 다른 대륙에서 유럽으로 몰려드는 이민들의 주요목적지가 됨으로써 더욱 다양한 인종들이 모이게 되었다.2) 언어국어인 프랑스어는 전국 어디에서나 쓰고 가르친다. 농촌지역에서는 여러 가지 방언이 널리 쓰인다. 동부와 북부에서는 독일어와 관련 있는 알자스어와 플랑드르어(네덜란드어)가 쓰이며, 남부에서는 라틴어의 영향을 박 아주머니 (성함 : 정순현), 에펠탑 민박등 많이 있다.4.캠핑장프랑스의 휴양지 어디서나 볼수 있으며 강가나 호수, 해안 등지에서 쉽게 접할수 있다. 여름에만 영업하는 곳도 있다.5.아파트주요 도시에서는 아파트를 빌릴수도 있으나 비싼 편이고, 단기 여행자들에게는 적합하지 않다.◈ 프랑스의 화폐1. 프랑스의 화폐단위프랑스의 화폐단위로는 프랑(franc)과 상팀(centime)이 있다. 1프랑은 100상팀에 해당 한다. 프랑스와 이웃하고 있는 벨기에도 화폐단위가 프랑인데 그것과 구별하기 위해 환전소에서는 보통 French Franc(프랑스프랑 : FF)으로 표기한다.2. 통화1) 프랑스의 지폐20프랑, 50프랑, 100프랑, 200프랑, 500프랑 등 5종류가 있다. 최근들어 50프랑 100프랑 그리고 200프랑과 500프랑은 새로운 디자인의 지폐가 나와 통용되고 있다. 프랑스의 기존 지폐들은 크기가 너무 큰 단점이 있었다. 그러나 새로 나온 지폐들은 예전의 것들에 비해 색도 화려하고 크기가 작아져서 웬만한 지갑에 알맞게 들어간다. 주의할 점이 하나 있다. 상점은 물론 아무 은행에 가더라도 환전이 가능하다. 우리나라는 새 돈이 나와도 오랜 기간동안 쓸 수 있지만 프랑스는 몇 달 간의 유효기간만 허락하고 그 이후는 중앙은행에서만 새돈으로 바꿀 수 있다. 이 유효기간이 지나면 일반상점에서는 받지 않으니 옛날 돈을 가진 사람은 먼저 중앙은행에 가서 새돈으로 바꾸어야 한다.2) 프랑스의 주화5상팀, 10상팀, 20상팀, 50상팀(1/2프랑), 1프랑, 2프랑, 5프랑, 10프랑, 20프랑 등 9종류가 있다. 상팀주화는 노란 구리로 만들어져 있으며 두께가 얇은 것이 특징이다. 프랑동전은 주철로 만들어져 색이 희다. 동전들에는 대부분 공화국의 상징인 마리안느(여신상)이 새겨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들 주화에서 특히 지니고 다녀야 할 것은 2프랑짜리와 10프랑짜리이다. 2프랑짜리는 거리나 공공장소의 공중화장실을 쓸 때반드시 필요하며 10프랑짜리는 거리에 주차할 때 주차표장된 샴페인은 어떤 요리에도 적당하여 음식의 맛을 돋우어 주며, 식사를 멋지게 끝내고 싶을 때는 코냑, 아르마냑, 칼바도스, 마르크를 마시는 것이 좋다.◈ 파리에서 기타사항(화장실)1) 유료 화장실우선 우리나라의 지하철에는 화장실이 있어서 요긴하게 쓰이지만 파리의 지하철에는 화장실이 없다. 이 점은 파리를 처음으로 찾은 유학생이나 관광객이 가장 이상하게 여기는 점중의 하나이다. 백화점이나 큰 상점에도 화장실이 없는데 이것은 정확히 말하면 무료화장실이 없다는 것이다. 화장실 앞에는 근사하게 차려입은 아주머니나 아저씨들이 돈을 받는다. 요금은 보통 1프랑에서 2프랑 정도이다. 에펠탑 같은 곳에도 화장실이 있지만 돈을 받으니 정말 치사한 일이다. 사정이 이러니 어디를 나서기 전에는 반드시 화장실에 가서 미리 용무를 봐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또 한 가지 방법은 거리에 설치된 간이화장실이다. 이 화장실은 2프랑짜리 동전을 넣으면 문이 열려 사용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파리의 자동판매기들은 상당수가 동전교환장치가 되어 있지 않다. 2프랑이 아니면 문을 열 수가 없다. 따라서 다른 동전은 몰라도 2프랑짜리 동전은 반드시 지니고 다녀야 한다. 파리에선 인심이 야박해 화장실을 유료로 이용함은 물론이고 시간이 되면 자동으로 문까지 열린다.2.무료 화장실1) 호텔 화장실 이용하기에펠탑에 잔디가 있는 곳에서 왼쪽으로 길을따라 쭉 가면 ‘힐튼 호텔’이 보인다. 여기에서 손님처럼 그냥 들어가서 지하로 내려가면 된다. 정말 깨끗하고 사람도 없어 마음껏 사용할수 있다..2) 에펠탑에 있는 화장실.에펠탑에 있는 화장실 입구에 책상이 있고 그 위에 작은 접시가 있다. 얼핏 보면 돈을 놓는 곳이란 말인 것 같지만 무료 이다. 여기에 있는작은 접시는 화장실을 청소하는 분이 팁을 받기위해 놓아둔 것이니 특별히 자신이 돈이 남아 돌지 않는이상 낼 필요가 없다.3) 까페 화장실 이용하기.파리를 관광하시다가 급하시면 가까운 카페로 가세요. 손님이 많은 카페는 그냥 들어 가서 볼 일을 보구 나오면 된 일품이며, 건물의 외벽에 조각된 여러 부조와 내부의 장미의 창이 볼 만하다. 높이 69m 의 탑 위에서의 보는 파리 전망도 빼놓을 수 없는 코스이다.일요일 저녁 6시 30분의 파이프 오르간 연주는 종교 음악의 신성함을 일깨워 주고 잠시 세속에서 신성한 시간을 얻게해 준다.성당탑과 납골당보물관박물관오픈매일08:00~19:00매일 09:30~19:30,10~3월은 17:00까지월~토 10:00~18:00수,토~일14:30~18:00입장료무료어른 35F, 18~24세 20F어른 25F,18~24세 15F어른 25F,18~24세 15F◈ 퐁뇌프 다리 (PONT-NEUF)불어로 '퐁(pont)'은 '다리'라는 뜻이고 '뇌프(neuf)'는 '새로운'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러니까 말 그대로 해석하면 '새로운 다리'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말뜻과는 반대로 퐁뇌프는 현재 파리 센강에 놓여진 다리중 가장 오래된(400년) 다리로 손꼽히고 있는 '낡은 다리'이다. 또한 퐁뇌프는 센강에서 가장 긴 다리로 길이가 238미터, 폭이 20미터에 달한다. 이 다리가 놓여진 16세기까지만 해도 파리의 센강을 가로넘기 위해서는 예외없이 시테섬(ILE DE LA CITE)을 지나야 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센강을 왕래하는 나룻배를 이용해야 했는데, 그나마도 궂은 날이나 밤에는 왕래하는 배를 찾아보기 힘들었다고 한다. 시테섬에는 4개의 다리가 이미 설치되어 있었는데 당시만 해도 모두 낡고 파리시의 팽창으로 인해 증가하는 왕래객들을 수용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에 따라 파리시민들의 불편은 자못 커졌고 결국 1577년 국왕 앙리3세(HENRI III)가 시테섬 끝쪽에 다리 하나를 증설할 것을 명했고 1607년 국왕 앙리4세(HENRI IV)에 의해 완공되었다. 공사기간이 대략 30년 걸린 셈인데, 중간에 왕위후계 문제를 두고 내전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앙리4세가 생각한 다리의 모습은 당시까지 내려오는 전통과는 달리 가옥이 없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영화 '노트르담의 꼽추'에 나오는 다리들을 보면게 방관할 수 없었다고 한다. 특히 미적 가치와 대상들을 추구하는 예술가들의 반대가 많았다고 한다. 파리의 아름다운 하늘에 한 점 티끌이 되지나 않을까 염려했다고들 한다. 에펠탑의 건설은 점차 구시대와 현대의 싸움, 추함과 아름다움의 싸움으로 번져나갔다.◑ 에펠탑은 공모전 당선작에펠탑이 탄생하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1886년 5월 1일 "샹드 마르스 위에 철로 된 3백미터 높이의 탑을 짓기 위해 후보작들을 현상공모한다"는 내용을 담은 법령이 공포되었다. 당시의 사람들은 산업혁명 이후의 근대 기계 문명을 반영하는 가장 상징적인 물질이 바로 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철로된 건물을 공모했고 3백 미터의 거대한 탑을 지은 이유는 당시까지 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어떠한 건물도 감히 넘보지 못하는 월등히 높은 기념물을 지음으로써 다른 나라 사람들의 기를 죽여보겠다 생각이 담겨져 있었다. 당시까지 가장 높은 건물은 미국 워싱턴에 있었는데 높이가 1백70여 미터였다고 한다. 대부분이 너무 공상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떨어지고 세 응모작만이 본선에 올랐다고 하며 그중 ‘에펠‘ 이라는 사람이 제안한 것이 최종적으로 뽑힌 것이라 한다.◑ 건축가 구스타브 에펠(Gustave Eiffel)사실 에펠탑이 세워지기 전만 해도 사람들은 이 탑이 과연 정상적으로 완공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을 가졌다고 한다. 당시의 기술로 이처럼 높은 탑이 세워진다는 데에 대해 의심을 가졌던 사람이 많았던 모양이다. 이처럼 불가능하게 여겨졌던 에펠탑이 지금의 위용을 발휘하게 된 것은 7백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현상공모에 당선된 구스타브 에펠(Gustave Eiffel)이라는 인물이 있었기 때문이다.구스타브 에펠은 에펠탑의 건설을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을 무마시키고 설득하기 위해 프랑스인들을 향해 "에펠탑이 있음으로 해서 프랑스는 3백 미터 높이의 깃대에 국기를 휘날릴 수 있는 유일한 국가가 될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고 한다. 과연 그의 말대로 에펠탑은 미국의 엠파이어 스테이트빌딩이 건설된 19다.
    생활/환경| 2006.12.18| 22페이지| 1,500원| 조회(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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