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451037 정준교시민의식 : 쓰레기 종량제한 드라마에서 쓰레기를 분리 수거 없이 몰래 버리고 도망 치는 범인을 잡기 위해 밤새우며 범인을 잡는 모습을 보았는가? 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나라에서는 이것이 웃음의 요소로 자리를 잡았다는것이다. 쓰레기 종량제의 정의는 쓰레기 배출량에 따라 그 처리비를 차등적으로 부과함으로써 쓰레기 배출량이 늘어나면 처리비도 그만큼 많이 부담하는 제도이다. 이 제도는 환경부는 1995년 1월 1일부터 쓰레기종량제를 전국적으로 시행하였다. 환경부는 종량제 적용대상 폐기물은 일반 가정과 소규모 사업장에서 발생한 생활폐기물,즉 일반쓰레기를 말한다. 배출자는 일반 쓰레기를 규격봉투에 담아 배출해야 한다. 규격봉투는 지정된 판매소에서 정해진 가격으로 구입하며 규격봉투에 쓰레기 처리수수료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규격봉투에 담아 버린 쓰레기에 대해서는 따로 수거료를 낼 필요가 없다. 또한 봉투값은 가정용 20ℓ기준으로 평균 290원 정도이지만, 지역에 따라 188원에서부터 403원까지 3배가 넘는 차이가 나는곳도 있다. 건축 쓰레기, 냉장고, 가구 등 대형 쓰레기는 동사무소에 신고하면 동사무소에서 나와 품목을 확인한 뒤 고지서를 발부한다. 대금은 금융기관에 납부한다. 이사를 하거나 도배 등 집수리를 한 뒤 나오는 건축쓰레기는 시멘트 부대나 마대자루 등에 담아 배출하는데, 이때도 동사무소 등에 신고해야 한다.이와 같이 정확한 규정이 있으나 법규 시행 15년이 지난 현재 모두 잘지켜 지고 있을까? 주택가 골목 여기저기에서 규격봉투가 아닌 일반봉투에 지저분하게 쓰레기가 널려져있는 광경을 쉽게 찾을수 있다. 이는 쓰레기 종량제가 우리사회에 완벽하게 적용되지 않았다는것을 의미하는것이다. 왜? 종량제 봉투가 아닌 다른봉투나 무단투기가 이루어지는것일까? 여러 문제가 있을것이다. 봉투 값이 비싸서나 혹은 귀차나서 등 여러 이유가 있을수 있다. cctv 설치 및 강화 계획도 있었지만 아직까지도 모두 해결이 된것은 아니다. 이처럼 법규를 위반 하게 되면 벌금형을 받게 되는데 벌금에 처하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 이처럼 관련법규의 처벌이 미흡하거나 없는 경우 시민의식으로 자발적인 참여가 이루어져야하나 그렇지 못한곳은 이처럼 지저분한 환경을 지켜보고 옆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다는것이다. 좀더 선진국으로 나아가는 이시점에서 우리의 선진화된 경제뿐만이 아니라 선진화된 시민정신도 발휘해야할것이다.
갈등원인 과 해결(노사문제를 중심으로)■과 목 명■담 당 교 수 님■학 과■학 번■이 름□ 갈 등○ 갈등의 원인갈등은 목적·이해 또는 아이디어 등과 관련하여 구성원 사이에 강한 불합의나 불일치가 있는 현상을 말한다.○ 노사갈등일단 조직론이라는 수업을 생각하며 갈등원인을 생각하던 도중 가장 적합한 갈등을 찾다 보니 노사 간의 갈등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노사갈등이 일어나는 이유는 분배과정에서의 관계에서 서로의 불만을 표출하기 때문에 노사갈등이 일어나게 된다. 또한 간단한 회의나 모임을 통하여 이를 표현할 수 있지만 불만을 표현하기위하여 파업이나 직장폐쇄로 까지 이어질 수 있습니다.노사갈등의 가장 주된 원인은 급여 문제가 가장 많았으며 정규직과 비정규직 문제 등의 다양한 견해를 보인다.○ 사 례1) 현대자동차 “원칙대로” vs “악법 반대”내달 1일 시행 놓고 초긴장다음달 1일로 예정된 근로시간면제(타임오프)제도 적용을 앞두고 현대자동차 노사 간에 팽팽한 긴장이 감돌고 있다. 노조는 개정 노동법을 사측이 고집할 경우 파국을 예고하고 나섰고, 사측은 작년 기아차처럼 원칙 대응으로 맞선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14일 금속노조 현대차지부에 따르면 노조는 최근 소식지를 통해 “타임오프는 노동조합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악법”이라고 규정하고 “이 같은 악법을 회사가 강행하려는 것은 4만5000명 조합원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으로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단결투쟁으로 깨부술 것”이라고 밝혔다.올해 임금 및 단체협상을 동시에 진행하는 현대차 노사는 이달 중 타임오프 적용을 위한 합의안을 마련해야 한다. 4월1일부터는 법에 규정된 유급 전임자 이외의 전임자에 대해 사측이 임금을 지급하는 것은 불법이기 때문이다.따라서 이달 말까지 노사는 사측으로 부터 임금을 지급받는 전임자를 누구로 할 지와 노조가 직접 임금을 부담하는 전임자 수를 얼마로 가져갈 지 등에 대해 합의해야만 한다.문제는 노조가 개정 노동법을 악법으로 규정한 채 사측이 임금을 부담해야 하는 전임자 수를 줄이는 데 대해 반발하면서 현 수준을 유지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현대차 노조 관계자는 “제도를 적용한 지 1년이 지나면서 대기업 노조에 있어서 타임오프는 사실상 유명무실하다는 것이 밝혀졌다”면서 “악법을 앞세워 회사가 24년간 이어져 온 자율적 노사관계를 무시한다면 강력하게 대응할 것”이라고 말했다.반면, 사측은 법이 규정한 대로 타임오프제를 시행하겠다는 방침에서 한발도 물러서지 않고 있다. 원칙대로 제도를 시행하겠다는 것이다.윤여철 현대차그룹 부회장은 최근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회사가) 정해진 법을 어길 수는 없는 것 아니냐”면서 “지난해 기아차의 타임오프 적용 사례가 있는 것처럼 현대차도 법과 원칙에 따라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현대차 노조의 전임자 수는 사실상 전임자를 포함할 경우 단협상 노사가 합의한 90명 수준을 크게 웃도는 230여명에 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처 2011년 3월14일 헤럴드뉴스-이충희 기자/hamlet@heraldm.com)2) 금호타이어 외주인원 투입에 노사갈등금호타이어가 지난해 노사합의에 따라 정년퇴직으로 인한 결원을 외주사(도급) 인원으로 투입할 예정인 가운데 노조가 강하게 반발하고 나서 물리적 충돌도 우려되고 있다.9일 금호타이어에 따르면 이날 오후부터 광주공장 생산라인에 외주사 인원을 4개 교대조에 맞춰 1개조 당 16명씩 총 64명을 투입할 예정이다.사측은 지난해 말 기준으로 정년퇴직자 106명 등 모두 108명의 결원이 발생함에 따라 지난해 노조와의 임단협 합의에 따라 이를 도급으로 채우기로 했다.금호타이어 관계자는 "지난해 임단협에서 정년퇴직자가 발생하면 외주화하기로 이미 합의한 사항"이라며 "지난 1월 외주인원 전환배치 문제 등에 대해 노조와 대화를 시도했지만 원만하게 이뤄지지 않아 이날부터 인원을 투입하기로 했다"고 말했다.하지만 노조는 조합원들의 직무 전환 문제가 노사합의 사항임에도 사측이 일방적으로 도급사 직원을 투입하려 한다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노조는 사측이 도급사 직원들을 들여와 일반직을 투입해 교육을 하는 등 불법파견 형태로 진행되고 있어 이에 대해 현장에서 강력하게 항의한다는 방침이다.사측은 직원 150여명을 동원해 인력투입을 계획하고 있어 충돌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출처 - 2011년 3월 9일 mk뉴스 http://news.mk.co.kr)노사 갈등에 대하여 크게 두 가지의 사례를 보았다. 이뿐만 아니라 노사관계에서의 갈등은 아주 많이 진행이 된다. 하지만 언제나 해결 방안이 없는 것도 아니고 언제나 노조나 기업의 한쪽에 치우쳐서 해결이 되는 경우는 드물다. 이와 같이 노사관계는 서로 엇갈려있지만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같게 된다는 것을 사례를 통하여 알 수 있다.○ 노사관계의 해결노사분쟁이 발생하면 사회경제적인 손실이 막대하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지만 분쟁을 효과적으로 예방하고 생산적인 노사관계를 만들어 가는 방법은 실제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작년에 두산중공업, 철도청, 조흥은행, 화물연대, 현대자동차 등 대형사업장의 노사분규가 여과 없이 표출되어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유발했을 뿐 아니라 올 들어서도 비정규직 문제로 노동자의 자살과 주5일 근무제 도입과 관련한 노사간 대립 등 노사갈등이 증폭되고 있어서 상호 관계에 손상이 가지 않고 국가경제에 해를 미치지 않는 해결방법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노동자와 사용자는 추구하는 바가 서로 달라 기본적으로 노사갈등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데 권위적이고 불합리한 해결방식은 갈등을 증폭시키거나 미봉책에 그칠 수 있다. 우리나라의 노사 단체교섭은 기본적으로 기업별 교섭체제로 단위 사업장에서 단체교섭이 자율적으로 진행되고 있지만 불신에 기초하여 상호 입장을 관철시키는 과정에서 합리적 해결을 도출하지 못하고 노사간 갈등이 심화되는 경우가 많다.또 노사간 단체교섭이 결렬될 경우에야 비로소 노동위원회에 강제적으로 분쟁조정 받도록 되어있어 제도적으로도 분규를 예방하기 어려운 구조이다. 왜냐하면 교섭이 결렬되면 노사갈등이 심화되어 제3자 조정이 어려운 상태이고, 조정신청은 쟁의행위를 하기 전에 단지 거쳐야할 법적 절차로 간주하기 때문이다.더구나 공식적인 분쟁조정절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비용이 막대하다는 이유로 대형 분규에 대한 즉흥적이고 비전문적인 방식의 정부개입은 합리적이고 장기적인 문제해결이 되지 못한다.1) 갈등의 회피나 투쟁은 막대한 사회비용 초래심리학적 갈등이론에 의하면 갈등관계에 있는 상대방을 피하는 것이 상책이고 굳이 마주쳐서 상관해야할 때에는 힘이나 법을 이용해 싸워서 이기는 것이 사람의 본성이다. 사회적 갈등은 갈등관계에 있는 사람들 또는 집단을 회피하거나 싸워서 이기는 것만으로 해결하기엔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수반한다. 철도청과 화물연대 파업의 경우 정부는 문제가 심각해질 때까지 방치하고 있다가 뒤늦게 공권력에 의해 법적으로 대응하는 회피전략이라든가, 두산중공업, 조흥은행, 철도청 등의 분규 처리과정에서 나타난 노사간 대화부족, 사용자측의 힘에 의한 강행처리, 노동조합의 저지와 불법파업 등 전투전략, 그리고 네이스, 핵폐기장, 새만금문제에서 이해집단간 힘에 의한 입장고수라는 투쟁전략은 사회갈등을 회피하여 묻어두거나 싸움에서 승리로 해결하는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이렇게 갈등 집단 간 회피와 싸움은 당사자들에겐 이익을 극대화하고자 하는 전략일 수 있으나 결과가 상호피해로 나타나거나 사회전체로 볼 때 일반국민들이 피해를 보는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부담시키기 쉽다. 따라서 국가 경제적 입장에서 사회적 갈등을 합리적으로 조기에 해결하고 사회발전의 원동력으로 활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그렇다면 노사갈등의 합리적 해법은 무엇일까? 노사가 불신을 전제로 한 투쟁과 힘에 의한 해결보다 신뢰에 기초해서 이해관계를 충족시켜주는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것이다.이를 효과적으로 추구하기 위해서는 노사갈등이 악화되고 난 다음에 해결하기보다 예방하는데 노력해야 하고, 즉흥적인 정부개입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문제해결에 나서야 한다. 사전적이고 문제해결식인 갈등해결은 노사 간 상호 이해관계를 존중하고 조정하며, 노사가 공동으로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쟁점이 분쟁으로 발전되기 전에 예방하고, 상호 호혜적인 해결을 도출하는 것이다.미국, 영국, 캐나다, 뉴질랜드 등 선진국에서는 사후 분쟁조정을 통해서만 분규를 예방하는데 한계가 있음을 알고 분쟁을 사전에 예방하는 방법을 추구하고 있으며 문제해결식이고 상생적인 교섭방식을 채택하고 있다.2) 사전 조정과 지원이 분쟁 예방의 핵심예방적, 문제해결식 갈등해결이 가능하려면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리더십의 이해□말 머 리........1□리더십이란? (내가생각하는 리더십)........1□윈스턴 처질.......2□윈스턴 처질의 리더십........3□윈스턴 처질의 리더십이 시사하는바...10□글 을 마 치 며...............10□ 말머리우리 조에 리더가 없었더라면 리포트는 좀 더 힘들게 아니면 난항을 겪으며, 리포트를 작성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래서 우리 조는 먼저 리더십이 무엇인가?? 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고 리더십의 중요성을 찾아보기로 하였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리더십이 무엇인지를 토의를 통해 알아보았고 이를 리포트를 통하여 작성 하였다.□ 리더십이란?리더십이란 공동체의 목표달성을 위해 우두머리가 공동체를 이끄는 것으로 여러 리더십의 경향이 있다. 나는 이중 포옹력을 가장 선호하며 이것이 리더의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윈스턴 처질을 보며 리더십을 알아보도록 하겠다.□ 윈스턴 처질○ 처칠의 전반적 생애 (1874.11.30 ~ 1965.1.24)영국 공작 가문의 태생인 처칠은 부모님이 사교에 바빠서 그에게 무관심했고 그 자신도 학업에 대한 흥미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다소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라틴어나 희랍어 공부보다는 전쟁놀이를 더 좋아했던 그는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를 다녔으며 1895년에는 명문인 제 4경기병 연대에 입대했다. 같은 해에 쿠바 반란 진압작전에 참가한 그는 런던의 '데일리 그래픽(Daily Graphic)'에 관전기를 기고하였고, 그 후 사관으로서 인도에서 근무하는 동안 공부에도 관심을 가져 철학, 경제학, 정치학 등의 고전을 혼자 읽으며 내면을 닦았다.그는 1898년 수단원정, 1899년 보어전쟁에 참가하여 종군 기사를 신문에 발표하였는데 보어전쟁에서는 포로가 되었으나 탈출에 성공하여 국민적7년에 군수장관으로 다시 입각하였고 1919년에는 육군 장관 겸 공군장관이, 1921년에는 식민장관이 되었다. 이후 노동당의 세력이 확장됨에 따라 그가 소속되어 있던 자유당은 노동당 내각을 지지하였는데, 이에 사회주의적 개혁을 반대했던 처칠은 자유당에서 나와 다시 보수당으로 돌아갔다.그는 1924년 보수당 볼드윈 내각의 재무장관이 되어 자유무역주의를 주장하고, 영국의 파운드화를 금본위제로 복귀시켰다. 그런데 이 정책은 디플레이션, 실업, 광부의 파업, 1926년의 총파업을 야기했고 이에 대해 처칠은 강경한 조치를 취하는 한편, 정부 견해를 강하게 시사하는 '영국 관보(British Gazette)'의 간행을 직접 조직하고 지도하였다. 1929년의 보수당 내각 총사퇴 후 10년 동안, 그는 각외에 머물러 있으면서 주목할 만한 저서들을 통해 저술가로서 성공하였다.그는 프랑스, 소련과 동맹을 맺을 것을 주창했는데, 이데올로기상 반소(反蘇)주의 입장이었던 그가 이런 주장을 한 것은 나치 독일의 군사력이 영국의 안전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주장은 제2차 세계대전 직전에 이르러 그 정당성이 인정되기 시작하였으며, 1940년 노르웨이작전 실패로 사임한 체임벌린의 후임으로 총리에 취임하였는데 전시 중에는 노동당과의 연립내각을 이끌고 루스벨트, 스탈린과 더불어 전쟁의 최고정책을 지도하였다.그러나 그는 전쟁이 끝날 무렵인 1945년에 포츠담 회담을 마무리 짓지도 못한 채 총선거에 패배하여 실각하였다. 이후에는 야당 당수로서 정치활동을 계속했으며 국제정치상으로는 동서 양극화 시대의 도래를 예견하고 반소 진영의 선두에 서서 1946년 미국 미주리주 풀턴에서의 연설에서는 ‘철의 장막’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처칠은 1951년 다시 총리에 취임하였고 자유방임주의의 원칙에서 무역, 가격, 통화 등의 문제를 해결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역사와 전기 등의 산문에도 뛰어났던 그는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1953년 '제2차 세계대전 회고록'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보이질 않을 것 같다.□ 윈스턴 처질의 리더십○ 처칠의 일화· 탁월한 전술과 외교능력윈스턴 처칠을 설명할 때 붙는 수식어는 전쟁 영웅, 뛰어난 웅변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저술가 등이 일반적이다. 특히 그는 앞에서 살펴 본 것처럼 전쟁에 있어서 뛰어난 능력을 보였으며, 그러한 능력은 양차 대전이 발생했던 시대 상황 아래서 최대한으로 발휘되어 정치가로서의 유능함을 인정받는 데 더없이 좋은 조건이 되어 주었다.외교적으로도 치밀했던 처칠은 제 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 성공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미국 지도층과 관계를 돈독히 했으며, 특히 용기를 좋아하는 미국인들의 특성을 이용하여 어떤 힘든 상황에서도 결코 비굴하지 않았다. 또한 진주만 사건 이후 바로 루즈벨트 대통령과 끝없는 대화를 통해 미국의 엄청난 인적 물적 자원을 100퍼센트 전쟁에 활용해서 전선에 투입했다. 이에 더하여 폭군 스탈린을 잘 회유하여 소련군으로 하여금 몇 십만이 넘는 나치 독일 전투 사단을 동부 전선에 묶어 두게 하여 노르망디 상륙 작정을 준비하기도 하는 등 외교 면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이렇듯 위기 상황에서 탁월한 전략과 외교적인 능력을 구사하여 영국은 물론 연합국에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다주었다는 점에서 그는 20 세기의 가장 뛰어난 리더 중 한 명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비범한 연설 능력또 한 가지 그의 리더십에 대한 평가에서 빠지지 않는 것은 그의 비범한 연설 능력이다.그가 정계에 입문하게 된 계기도 연설을 통한 것이었고, 그가 하원에서 처음으로 인정을 받기 시작한 것도 연설을 통해서였다. 선거를 치를 때마다 그의 연설 능력은 선 거민들에게 큰 힘을 발휘했고, 무엇보다도 전쟁 상황에서 영국 국민들을 격려했던 것도 연설을 통해서였다. 처칠은 상황을 묘사하고, 입장을 표명하고, 용기를 북돋우는 이야기 방법을 알고 있었고 모든 행동의 중심에 청자들을 위치시킬 줄 알았다. 그는 세계무대에서 행동가로서 이야기함으로써 국민들게 말했다.“저는 이 정부에 참여하게 되신 분들에게 말한 것처럼 의회를 향해서도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것은 피와 눈물, 그리고 땀뿐이라고. 우리는 지금 너무나도 비참한 시련을 겪고 있습니다.……”처칠은 국민들에게 영국이 직면하고 있는 상황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말함으로써 전쟁의 공포와 시련을 겪고 있는 국민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였다.· 뛰어난 저술가처칠은 청년 시절 쿠바에서 보낸 기간 동안 모험 여행의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런던의 ‘데일리 그래픽(Daily Graphic)'에 관전기를 보내는 것으로 저술 활동을 시작하여 평생 20여 권의 저작을 남겼다. 어린 시절 공부에 전혀 흥미가 없었던 그는 인도에 머무는 동안 비로소 공부에 관심을 가지고 철학, 경제학, 정치학, 종교 등에 관련된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었는데 이것이 훗날 그의 문장 및 연설의 격조 높은 어법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처칠은 여러 신문에 많은 기고를 했는데 그 글들은 좋은 반응을 불러왔고 그 중 상당수가 출판되었다. 1920년대 중반에는 의회를 잠시 떠나 있는 동안 제 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자전적 역사서 ‘세계의 위기(The World Crisis)’를 쓰기 시작하여 출판하였고, 1930년대에도 ‘나의 반생(My Early Life)’과 ‘말보로: 그 생애와 시대(Marlborough: His Life and Times)’를 완성하여 저술가로서 성공하였다. 또한 대역사서 ‘제 2차 세계대전 회고록(The Second World War)’을 집필하였고 은퇴 후에는 그의 주요 저작인 ‘영어 사용 민족들의 역사(A History of the English-speaking Peoples)’를 출판했다.이 중에서도 선조에 대해서 쓴 ‘마르코폴로 전기’나 ‘제 2차 세계대전 회고록’은 널리 인정받는 명문으로, 정치가로서는 최초로 195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영국인들이 그를 ‘최고의 영국인’으로 생각하는 배경에는 이런 그의 개인적인 능력도 큰 영향을 미쳤다.○ 처 맡았다. 자유당에서 처칠은 식민차관 외에도 애스퀴드 내각의 내무장관, 해군장관, 군수장관, 육군 장관, 공군장관, 식민장관을 역임하며 남아프리카의 새 헌법 제정, 그리고 아일랜드 문제의 해결에 있어서 탁월한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그러나 보수당과 자유당 사이에 서로 정권을 주고받던 시대는 1914년으로 막을 내렸고, 새로운 사회주의 세력인 노동당이 20세기 초에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종전 후 처음 치른 총선거에서 자유당은 3위로 떨어졌고 노동당은 2위를 차지하여 연립정권의 이름은 그다지 매력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보수당은 사회주의에 대항하는 중앙당으로서 연립정권을 계속해 나갈 것인가 아니면 연립정권을 포기하고 정쟁으로 복귀할 것인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중앙당을 제창했고 중도 정책을 가지고 선거전을 치르려하였으나 낙선하고 말았다.1923년의 총선의 결과는 각 당의 지도자들을 고민스럽게 만들었다. 특히 애스퀴드의 자유당은 의석수로 따지면 가장 약했지만 결정권을 쥐고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자유당 당수는 노동당 내각을 지지하기로 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처칠은 행동에 결단을 내리게 되었다. 진보적인 중도 정당의 깃발 밑으로 반사회주의 세력을 규합하려는 목표를 세웠던 그의 입장에서 볼 때 자유당 정부가 혁명 세력과 연합하는 것은 대단히 불만족스러운 것이었고, 그는 이것이 자유당으로서는 취할 수 없는 자세라고 생각하여 이에 대해 강경하게 항의하였다. 당시 정계에서 애스퀴드가 내린 결정에 대하여 객관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거물이 바로 처칠이었다고 한다.그 후, 최초의 노동당 내각이 성립되자 처칠은 사회주의와 결탁하여 때가 묻어버린 자유당의 이상을 더 이상 지지할 수 없다는 결의를 굳히게 되었고 반사회주의자로서 자신에게 남겨진 길은 보수당과의 협력뿐이라고 생각했다.그는 우선 무소속으로 선거에 입후보하였으나 이때 정계의 비난과 공격을 도맡아서 받았고, 변절자라는 욕을 먹었고, 지위를 얻기 위해서는 주의와 주다.
□ 말 머 리일단 지난번 레포트 과제의 선정에서 토론의 입장이 강한 내용을 레포트 선정을 하였다면 이번에는 설득 입장이 강한 내용의 과제를 선정하였다.교원단체 명단 공개에 대한 찬 · 반토론 으로써 공개에 대한 우측면의 입장을 대립하여 설명한 KBS심야토론 04월 24일 방송분을 보고 리포트를 작성하였습니다.이 방송을 시청하면서 여러 가지 많은 대화가 오고 갔지만 결국은 같은 이야기를 계속적 반복이 되었다. 저는 교원단체 명부가 공개 돼야 된다는 생각을 갖고 본 방송을 시청 하였습니다.□ 토론자의 구성토 론 자경 력비 고조전혁제18대 국회의원 (한나라당, 인천 남동구 을)찬성국회 교육과학기술 위원회 위원인천대학교 경제학과 교수최재성17,18대 국회의원 ( 민주당 경기도 남양주시 갑)반성국회 교육과학기술 위원회 위원국회 정치개혁 특별위원회 위원이명희공주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 교수찬성자유교육연합 상임대표교육과학기술부 미래교육공동체포럼 운영위원장엄민용전국 교직원노동조합 대변인반성경기도 양곡 고등학교 교사(전) 전교조 경기지부 수석부지부장이경자공교육 살리기 학부모연합 상임대표찬성교육과학기술부 학부모정책 자문의원(전) 인간교육 실현 학부모연대 사무국장김명신함께하는 교육시민모임 공동회장반성문화연대 공동대표(전) 교육연대 운영위원장○ 토론자 구성에 따른 나의 견해일단은 먼저 6.2일에 있는 지방 선거에 대하여 본의 아니게도 이야기를 안할 수 없다고 생각이 든다. 이이야기가 왜 중요하게 대두가 되냐는 생각은 일단 여당과 야당의 의원들의 대립해서 나와서 대립을 한다는 것 자체부터 선거에 의한 표심을 얻기 위한 공략이 아닌지 의심스럽다.또한 전교조 인원의 대변인인 현직 교사가 나와서 토론에 참여 한 것은 아주 적절하였다고 생각이 든다. 하지만 다른 교원단체의 교사가 나와서 찬성입장을 표방하였다면 좀 더 적절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이유인 즉 공개가 되도 상관이 없는 다른 교원단체의 교사이지만 찬성은 하지 않는다는 것을 표방하고 있다고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대체적으로 만족스런 토론자 구성인 것 같다.□ 주 제○ 교원단체 명단 공개 어떻게 볼 것 인가?조전혁 의원 입장 - 찬성일단 학부모의 교육권에 대한 알권리 이다. 또한 우리 자녀들의 좋은 교육을 받기 위한 평가이며 교원들의 교원단체 활동은 교육 활동의 일환이기 때문에 학부모와 국민들은 알아야 한다.국회의원으로써의 역할과 임무에 충실하였으며 법원 판결은 양측 입장이 엇갈렸고 그것에 따른 판사의 의견은 인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정치적 결단을 한 것이다.면책특권을 사용하여 국회의원으로써 회피를 할 수 있었지만 자신 스스로 그것을 이용하지 않았고 이에 따른 민·형사 책임도 질것이다.이명희 교수 입장 - 찬성교원 명단 공개는 학부모와 국민들에게 정보와 사실을 제공하는 일이다. 이로써 교육관련 정보의 공개를 토대로 우리 교육을 투명하고 책무성을 갖게 만들어 좀 더 좋은 교육을 만드는 일이다.명단 공개로 전교조에 대하여 많은 사실을 알 수 있는 계기 이며 법적 문제가 아직 판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법적문제를 논의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또한 국민의 여론과 여망을 받아 대변하는 것이 국회의원의 의무로써 공개를 한 것은 잘한 것이다.전교조 소속 교사들은 계기 교육을 실시하였다. 또한 이로써 우리 자녀들이 국가에 대한 잘못된 인식 및 사고를 교육 받아 왔다. 전교에 의한 정치적 갈등이 사라져야 할 것이다.이경자 위원 입장 - 찬성전교조의 폐해를 알고 있는 학부모 입장에서 공개는 당연히 해야 마땅한 일이다. 또한 전교조가 이렇게 법적 문제까지 끌고 가는 행위는 무엇인가 그들의 떳떳하지 못한 행위에 대한 표현이다.교육이란 것은 국가가 교사에게 위임한 권리이며 우리들의 세금으로 급여를 받는 교사들의 교원단체 명부 공개는 당연한 것이다. 또한 공개명부를 확인 후 국민들은 확신이 생겼다.엄민용 대변인 입장 - 반대공개 차체가 인권을 무시한 행동이며 법원의 행위에 대한 월권행위이다. 또한 이것은 국회의원으로서 법을 무시하는 행동이다. 그리고 법원의 입장이 다른 이유는 판결 자체가 다른 내용이었다. 이에 따라 두 개의 판결은 어긋나 있는 것이다.전교조의 모순되고 편견을 가지고 생각한다면 전교조의 나쁜 점만 이야기 할 것이다. 좋은 점도 많고 좋은 일도 많이 행해였다. 그러므로 이것을 나쁜 점만 가지고 공개를 해야 한다는 것은 잘못된 시각이다.최재성 의원 입방 - 반대전 세계적으로도 법률적 위반이며 국제법상에도 법률적 위반 행위이다. 또한 합법적 구성인 교원단체에 대하여 편 가르기를 하는 것은 갈등을 재촉하는 행위이다.공개를 하여 얻는 이익이 무엇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으며 공개를 하는 단체들은 전부 자신이 원해서 스스로의 선택으로 공개를 한 것이다. 또한 편견적 시각을 버려야 한다.
한국의 문화유산융·건릉을 다녀와서...융·건릉을 가면서.일단 글을 쓰기전 2권의 책을 구해 와서 자료 조사에 착수를 하였다. 먼저 『조선 왕조 잠들지 못하는 역사 1?2』라는 책과 『글쓰기 이론과 방법』이라는 두 권의 책을 읽게 되었다. 사실 전부 읽지는 않았다. 필요한 부분을 메모하고 필요한부분만 요약하였다.날씨가 화창한 5월의 어느 월요일 아침부터 부산하게 준비를 하여 일찍부터 나갈 차비를 마치고 융·건릉으로 출발하였다. 융건릉에 도착하였을 때 나는 무기력에 빠지고 말았다. 월요일은 정기 휴일입니다의 팻말이 눈에 들어왔을 때……. 나는 한숨을 쉬며 집으로 돌아 와서 휴식을 취하며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다음날 아침 다시 융·건릉으로 향하여 두 번째 방문을 시작 하였다. 먼저 들어가기에 앞서서 물 한 병을 사고 티켓을 사러 매표소로 향하였다. 티켓의 가격은 천원이었는데 예전에 초등학교를 다닐 때 왔을 때는 300원이였는데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며 입가에 미소가 매쳤다. 이 곳 융·건릉을 방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초등학교 때 중학교 때 소풍장소로 몇 번 방문을 했었다. 이곳에 와서 보물찾기도 하고 친구들과 어울려서 밥도 먹던 기억이 희미하게나마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사실 놀기 바빠서 견학의 의미에서의 관람에 대해서는 생각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수업시간에 배운 것을 토대로 잘 관찰해보겠다 하며 입구를 통과 하였다.역사적 의미.한 왕조가 500년 이상 지속되었고 재위한 모든 왕과 왕비의 능이 온전히 남아 있는 사례는 세계사에서 조선 왕릉이 유일하다 과거의 현재를 이어주며 살아 숨 쉬는 역사의 현장이 조선 왕릉이다.북한 소재 2기를 제외한 조선왕릉 40기가 유네스코UNESCO(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2009년 6월 22일~30일 스페인 세비야에서 열린 제 3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 위원회에서 최종 결정되었다. 세계문화유산은 인류전체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인정돼 국제 사회의 보호와 삼시를 받는다. 유산등재는 그 민족의 역사와 문화 속에 인류 공영의 가치를 지녔다는 인증으로 대한한 영예다. 광광자원으로 활용되고 국가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효과도 누린다.『조선 왕조 잠들지 못하는 역사 1?2』인용』융·건릉이란?융릉 - 추존 장조와 현경왕후의 능장조(1735?1762, 사도세자)는 제 21대 영조의 둘째 아들이자 제22대 정조의 생부이다.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서예와 무예가 뛰어났으나 영조를 대신하여 정치업무를 보게 되면서 노론과 마찰을 빚게 되었고, 나경언의 고변으로 결국 뒤주에 갇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1762년 영조는 28세 나이에 죽은 세자를 슬퍼하면서 사도라는 시호를 내렸다. 사도 세자의 아들 정조가 즉위하자 존호를 장헌으로 올렸고 1899년에 장조로 추존되었다.현경왕후는 영의정 영풍부원군 홍봉한의 딸로 1744년 세자빈에 책봉 되었다. 사도세자가 세상을 뜬 후 혜빈, 정조 즉위 후에 궁호를 혜경으로 올렸다. 혜경궁 홍씨의 자전적 회고록이자 궁중문학의 백미라고 평가받는 “한중록”을 남겼다. 1899년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면서 헌경왕후로 추존되었다.건릉 - 조선 제22대 정조와 효의왕후의 능정조는 추존장조의 둘째 아들로 1776년 제21대 영조가 승하하자 왕위에 올랐다. 즉위 직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라고 천명하고 아버지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 노력을 다했다. 문무를 겸비했던 정조는 규장각을 두어 학문 연구에 힘쓰고, 장용영을 설치하고 수원 화성을 쌓는 등 조선의 중흥을 이끌었다. 또한 탕평책을 계승하여 붕당정치의 폐해를 막기 위해 힘썼다.효의왕후는 좌참찬 청원부원군 김시묵의 딸로 1762년 세손빈에 책봉되었고,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지성으로 모셔서 영조의 총애를 받았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 외었다.융·건릉을 관람하며먼저 융·건릉을 들어가며 관람정보를 얻고 관람 포인트라는 곳을 보며 관람에 대해 어떻게 할 것인지를 생각 하며 거닐던 중 처음 눈에 들어 온 것은 융릉 건릉 이라는 표지판 이였다. 나는 먼저 융릉으로 출발하였다. 조선 왕조 잠들지 못하는 역사라는 책에서 융·건릉에 오면 당연히 융릉부터 구경을 하게 되고 융릉이 더욱더 뛰어나다고 한다. 그리고 건릉은 그에 비해 조각 등이 좀 더 뒤떨어져서 건릉을 관람을 안하는 경우도 있다 고한다.몇 분을 걸어서 내려가던 중 곤신지라는 작은 연못이 나의 눈길에 들어왔다. 걸음을 멈추고 곤신지 부근으로 이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곤신지는 원형의 연못으로 용의 여의주를 상징하는 것으로 아버지를 연모했던 정조가 제작 하였다고 한다. 사진에는 연꽃과 여러 식물이 보이나 내가 도착하였을 때는 아쉽게도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날씨가 아직 안 풀려서 식물이 있을 시기가 아니었다.) 그래도 그 주위를 돌며 한 바퀴 들으며 아쉬운 맘을 달래며 다시 융릉으로 이동하였다.금천교를 지나 홍살문을 통과 하며 웅장함에 감탄하였다. 글을 쓰며 수업시간에 배운 홍살문이 떠올랐다. 신성한 곳임을 보여주기 위함 이라했던 교수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견학은 홍살문을 배우기 전에 가따와서 배우고 갔었으면 좀 더 잘 알았을 텐더라는 생각을 하였다.이곳은 수풀과 나무와 어울려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홍살문 앞으로 정자각까지 비석을 깎아 길을 만들어 놨는데 이 길을 참도 라고 불리며 신도와 어도로 나뉜다. 신도는 신이 다니는 길이며, 어도는 왕이 다니는 길이라 하는데 신도가 어도보다 약간 높게 만들어 졌다고 한다. 이것을 보며 나는 신이라 생각하며 신도의 길로 길을 따라서 융릉을 보러 올라갔다. 참도의 중반쯤 수라간과 수복방이 위치하고 그 위로 정자각이 위치하게 되는데 수라각과 수복방은 문이 잠겨 있어서 주변 건물을 보며 신기한 것을 발견하였다. 온돌을 지피기 위한 굴뚝이 수복방 뒤편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예전 시골에서 볼 때는 아궁이가 따로 주방 옆에 있었는데 좀 특이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좀 아쉬웠던 점은 문화유산에 새로 만들었는데 시멘트가 보이고 너무 현대적으로 만들어져있어서 조금은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그 후 정자각으로 향하였다. 정자각에는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어 계단위로 올라가는데 꽃모양의 장식에 눈에 들어왔다. 꽃으로 화려하게 문양을 새긴 계단 이였다. 그 계단을 따라 정자각 위로 올라가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자각의 구조와 나무들은 참 정교하게 만들어졌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문양들이 독특하게 여러 색을 사용하여 만들어져있었다. 여기 저기 정자각을 둘러보며 정자각 뒤편 너머로 이동하는 도중 내 눈에는 이상한 팻말이 보였다.여기까지만 관람이 가능하며 그 위의 능은 관람이 불가하다는 비공개지역 팻말과 함께 나를 저지 하였다. 능에 와서 능을 구경을 못한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한 기분이 들었다. 그 위의 비석이나 인석 등을 관람을 해야 이곳에 왔었다는 표식이 되는 것 아닌가? 그냥 여기서 돌아가야 한다는 아쉬움에 살짝 넘어가서 구경을 할러든 차에 경비 아저씨에게 걸려 들어가면 안 된다는 제지를 받고 서야 죄송합니다를 연신 외치며 물러 설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