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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의 과거제도 연구-현대 공개채용제도와 비교하여
    조선시대의 과거제도- 현대 공개채용시험과 비교하여-**대학교 문과대학2003****** * *조선시대의 과거제도- 목차 -Ⅰ. 서론 ……………………………………………………………… 3pⅡ. 본론……………………………………………………………… 4p1. 조선시대의 과거제도 연구……………………………………… 4p(1) 과거제도의 운영 이유(2) 과거의 종류(3) 응시자격(4) 과목(5) 절차(6) 과거부정(7) 관직진출2. 현대의 공개채용시험제도와의 비교연구…………………… 12p(1) 현대의 공개채용시험제도 개괄(2) 조선시대 과거제도와 현대의 공개채용시험과의 비교Ⅲ. 결론……………………………………………………………… 16pⅣ. 참고문헌……………………………………………………………… 17pⅠ. 序論한때 필자는 2년간 휴학을 하고 9급 공무원 공개채용시험을 준비한 적이 있다. 현재는 합격하여 신규채용후보자 신분으로 발령만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평소 필자는 사학과 복수전공을 할 정도로 역사학에 관심이 많았는데, 당시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면서 옛날의 공무원시험 제도인 과거제도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네이버 웹툰(http://comic.naver.com)의 「호랭총각전」에서도 주인공이 과거시험을 보는 장면을 현대적으로 재구성 한 것이 있는데 네티즌들의 많은 인기를 끌었고, 필자 또한 재미있게 보며 흥미로운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한 생각이 본 주제로 논문을 쓰게 된 동기가 되었다.먼저 본고에서 중점적으로 논의하게 될 과거(科擧)라는 용어의 의미에 대해 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란, 시험 종류인 과목(科目)에 따라 거용(擧用)한다는 뜻으로 이는 전근대 시대에 관리로 채용할 인재를 선발하기 위해 실시한 시험이다. 관리를 채용할 때 시험을 보게 된 것은 중국의 한(漢)나라 때부터 시작되었으며, 한국은 신라 원성왕 4년(788)에 실시한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가 시초이다. 당시는 시험에 합격한 사람이 전원 관리로 채용되지는 못하고 보조적 역할을 하였을 뿐이다. 그께 이루어졌다. 관학은 조선조 질서 유지의 기본 틀인 주자학을 보급하는 중추적 역할과 함께 새 왕조에 필요한 새 인재를 양성하는 요람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이렇게 첫 왕의 즉위교서에서부터 언급할 정도로 조선시대를 개창한 신세력들은 과거제도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그 어느 제도보다 세심하게 정비하는 모습을 보였다. 과거제도는 단순히 왕이 쓸 수 있는 사람을 뽑는 제도로만 운영되는 게 아니라, 전제왕권을 확립하기 위한 수단으로 기능하였다. 국왕은 양반귀족들을 끊임없이 자기의 직속관료로 편입시키려 하였다. 따라서 왕권이 강화되는 시기에는 과거도 비교적 공정하게 실시되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과거는 반드시 왕권강화를 위해서만 실시된 것은 아니었다. 원칙적으로는 양반층 사이의 공정한 경쟁을 목표로 실시된 것이기도 하였다. 양반층만이 아니었다. 천인을 제외한 양인 이상의 사람이면 누구나 과거에 응시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이전 시대와 달리 귀족들의 정권 독점이 철저히 배격되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양반 지배층이 넓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양반들이 관직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통한 공정한 경쟁이 필요하였다. 이것은 그들 간의 세력균형을 유지하는 최선의 방법이었다.(2) 과거의 종류조선시대 과거에는 문과ㆍ무과ㆍ잡과와 문과의 예비시험으로서 생원시ㆍ진사시가 있었다. 문ㆍ무과와 생원ㆍ진사시는 양반들이 많이 보는 시험이었고, 잡과는 중인들이 많이 보는 시험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와서는 무과가 남발되어 일반양인들뿐 아니라 천인들까지도 많이 응시하였다.1) 문과문과는 정규시험인 식년시(式年試)와 특별시험인 각종 별시(別試)로 구분되어 있었다. 식년시는 문과뿐 아니라 모든 과거시험의 공통적인 정규시험으로서 3년마다 실시되는 시험이었다. 즉, 12지중 자(子)ㆍ묘(卯)ㆍ오(午)ㆍ유(酉)가 들어가는 해마다 실시된 시험이다.식년시는 세 차례의 시험을 치르게 되어 있었다. 초시(初試)ㆍ복시(覆試)ㆍ전시(殿試)가 그것이다. 문과 초시에는 향시진사시보다 우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후기로 갈수록 비중이 같아지다가 말기에 가서는 생원시보다 진사시를 더 중시하는 풍조가 생겨나게 된다.생원ㆍ진사시 초시와 복시에는 초장과 종장 두 차례의 시험이 있었는데 초장에는 진사시를, 종장에는 생원시를 실시하였다. 또한 각각 다른 날에 실시하였기 때문에 양시에 한꺼번에 합격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했다. 진사시에서는 시와 부를 각각 한 문제씩 출제하였으나 후기에 와서는 둘 중 하나를 택일하는 방식이 되었으며, 생원시에서는 오경의(五經義) 1편, 사서의(四書疑) 1편을 부과하였는데 오경의와 사서의 각각 모두 통틀어 한 문제를 내 긴 논문을 쓰게 하였다.생원ㆍ진사시에 합격한 이들에게는 성균관 상재생으로 들어가 일정한 기간 동안 공부한 다음 문과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하지만 모두가 다 문과에 응시할 수는 없었다. 나머지 많은 생원과 진사들은 향촌에서 지방양반으로서 지방통치에 군림하였다. 그렇기에 비록 문과에는 급제하지 못하더라도 생원ㆍ진사가 되고자 애쓴 것이다.3)무과고려시대에는 숭문언무(崇文偃武) 정책으로 인해 무관을 양성하는 무학이나 무관을 선발하는 무과가 설치되지 않았다. 이는 지방의 반독립적인 무적 성격이 강한 향리세력을 누르고 중앙집권적인 문치주의를 확립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조선이 개창한 후, 태조는 즉위교서에서 문과와 아울러 무과도 훈련관(訓練觀) 주관으로 33인을 뽑도록 명하였다. 그리하여 태종 2년(1402) 1월에 조선시대의 첫 무과가 실시되었다.4)잡과조선시대의 잡과에는 역과ㆍ의과ㆍ음양과ㆍ율과 등 네 종류가 있었다. 각각 사역원(司譯院), 전의감(典醫監), 관상감(觀象監), 고율사(考律司)에서 담당하였다. 잡과는 식년시와 증광시ㆍ대증광시에서만 시행되었고 다른 별시는 없었다. 또한 잡과에는 전시가 없고 초시와 복시만 있었는데 초시는 해당관청에서, 복시는 역시 해당관청에서 그 관청의 제조(提調)와 예조당상(禮曺堂上)이 실시하였다. 시험과목은 전문서ㆍ경서ㆍ『경국대전』을 필수과목으로 하여 선발하였다.賦) 한 문제, 고시와 명(銘), 잠(箴) 중에서 한 문제를 출제하도록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명이나 잠을 출제하는 일은 거의 없었고 시와 부를 한 문제씩 내어 각각 50인씩 뽑도록 되었다. 또한 시와 부를 짓는 데도 일정한 격식이 있었으나 뒤에 응시자가 많아 시험지를 빨리 내야만 시관이 채점하고 늦으면 헛일이라 하여 격식보다 짧게 쓰는 이가 많았다.3) 문과초장의 경학시험에는 두 가지 고시방법이 있었다. 강경과 제술이 그것이다. 강경은 경서의 뜻을 말로 물어보는 구술시험이요, 제술은 경서의 내용 중에서 논문식으로 답안지를 써 내야 하는 필답시험으로 의의(疑義)라고도 하였다. 의의는 사서의와 오경의를 통칭한 말이며 강경에는 책을 보지 않고 물음에 답해야 하는 배강(背講)과, 책을 보고 물음에 답하는 임문고강(臨文考講)이 있었다. 식년문과의 종장은 조선왕조 일대에 걸쳐 책문(策文)을 시험 보았다. 중장의 고시과목은 자주 바뀌었으나 『경국대전』에는 부(賦)ㆍ송(頌)ㆍ명(銘)ㆍ잠(箴)ㆍ기(記) 중의 1편, 표(表)ㆍ전(箋) 중 1편을 시험보이기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부 1편, 표ㆍ전 중 1편을 시험보이는 것이 보통이었다.증광 문과의 초ㆍ전시는 식년문과와 시험 과목이 같았다. 그러나 복시는 초장에 부 1편, 표ㆍ전 중에 1편을, 종장에 대책을 보이고 사서삼경의 강경은 없었다. 별시문과는 초시와 전시만 있는데 초시에는 강경시험이 없고 초시 입격자에게 회강으로서 사서와 삼경 중에서 각각 1경을 선택하여 배강시켜 조 이상을 받은 자를 전시에 보냈다.(5) 절차과거시험에는 식년시와 별시가 있었다. 초기에는 식년시의 초시ㆍ복시ㆍ전시의 모든 시험을 식년 정월에서 5월 사이에 실시하였으나 시간이 너무 촉박하고 농번기에 시골의 수험생들이 빈번히 왕래하게 되어 농사에 지장을 준다고 하여 성종 3년(1472)부터 중국의 제도를 본따 초시를 상식년(上式年 : 식년 전 해)의 가을에, 복시와 전시는 식년 봄에 시행하게 되었다. 별시 중의 증광시는 새 왕이 즉위한 원년에 실시되는 것이 보통정을 정비하였다. 시험장 내에서 책을 끼고 있는 응시생, 남의 글 솜씨를 빌리거나 빌려주는 응시생은 모두 식년시에 응시할 수 있는 기회를 두 번 정지시키고, 특히 후자의 경우에는 곤장 100대와 노역 3년의 형벌까지도 추가했던 것이다.이러한 규정으로 보아 적어도 17세기 이전까지는 과거시험에서의 부정행위가 주로 시험장 안에서 응시생 사이에서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17세기 이후에는 과거시험에서의 부정행위가 좀 더 광범위한 곳에서 이루어졌다. 이제는 응시생이 미리 시험장 바깥에서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 답안지를 작성해 들여오기도 하였다. 아예 과거시험장에 글 잘 짓고 글씨 잘 쓰는 사람을 데리고 들어가 대신 짓고 쓰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외에 시험지를 빨리 내려는 협잡[旱呈], 책이나 커닝페이퍼 등을 가지고 들어가는 것[挾書], 시관과 짜고 특정인의 시험지를 알아보게 하거나 시험문제를 미리 가르쳐 주는 것[赫蹄], 시험장을 습격하고 시관을 구타하는 사건[科擧亂動] 등이 그것이다. 물론 이러한 부정행위가 발각되면 관련자가 대거 투옥되고 과거 합격이 취소되기까지 하였다. 이처럼 17세기 이후 과거시험에서의 부정행위는 돈과 권력이 뒷받침되거나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특정 정치세력이 정국 운영을 독주하거나 독주하기 위해 별시를 시행할 때 시험 부정은 더욱 심하게 행해졌다.그림 중 ,필자미상, 19세기, 국립중앙박물관왼쪽 그림은 중 부분이다. 과거시험을 치르는 모습인데 약간 특이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다. 한명씩 경건하게 앉아있는 것이 아니라 조그만 일산 아래 여러 사람이 모여 있는 모습인데, 후기로 갈수록 이렇게 팀을 지어 시험을 보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일단 전날 밤에 과거시험장의 문을 열면 힘센 무인인 선접군(先接軍)을 앞세워 화살처럼 빠르게 들어가 다투어 자리를 선점한다. 시험문제를 빨리 보고 답안지를 빨리 내야 합격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워낙 수험생이 많이 몰린 탓에 시험지를 빨리 제출하여 먼저 채점을 받은 이들 중에서 합격자가 많이
    인문/어학| 2008.12.15| 18페이지| 2,000원| 조회(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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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한제국 성립의 배경과 과정과 의의 평가A+최고예요
    진ㆍ한 제국 성립의 배경과 과정과 의의Ⅰ. 진나라의 건국 배경과 과정1) 배경춘추시대의 170여 국은 200여 년 동안 서로 병합하는 과정을 거쳐 소국은 거의 멸망하고 전국시대에 이르러서는 일곱 개의 나라만 남아 각축을 벌이는 형세가 되었다. 이 7국이 후세에 칭하는 전국 칠웅으로서 진, 초, 연, 제, 한, 위, 조 일곱 나라였다. 이들은 최종적인 승리를 위하여 각기 부국강병을 목표로 내정개혁을 추진하면서 대규모의 장기적인 전쟁을 계속하였고, 결국 가장 변법정책에 성공한 진나라에 의하여 중국은 다시 통일되었다.다시 진나라가 건국될 무렵인 전국시대 말기의 상황을 보면, 주나라 때 정립되었던 봉건제는 하나의 씨족집단을 통치대상으로 보고 지배하였다. 초기 농경에서는 한정된 농지에서 농경을 하다 보니 공동체적인 생활이 필요했지만, 춘추시대 말 우경이 시작되고 철기의 보급이 이뤄지면서 경작지가 증가하게 되었고, 이제는 더 이상 공동체적인 농경이 필요치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씨족제는 가족단위로 분해되었다. 그리고 봉건제 시절 한 국가의 운영은 그 국가의 중심이 되는 씨족집단에 의해 좌지우지되며 군주의 뜻을 펼칠 수 없었지만, 전국시대에는 멸망한 나라의 귀족들이 유력자의 빈객이 되었고 유력자는 이러한 빈객들을 모아 세력을 키워나갔다. 그 세력을 바탕으로 이제는 씨족구성원의 입김 없이 독자적으로 나라를 운영할 수 있었고, 그 빈객들로 하여금 나라의 요직에 등용시켜 일을 맡김으로서 관료제가 성립이 되었다. 진나라의 군현제는 바로 씨족제의 해체, 관료제의 성립, 우경과 철제 농기구의 사용 등으로 인하여 이뤄진 제도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군현제는 왕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이 가능하게 하였고, 전국시대의 7대강국들은 강력한 국가를 만들기 위한 부국강병책으로서 100여 년간에 걸쳐서 경쟁적으로 변법을 단행하여 국내체제를 정비해 나갔다.2)과정본래 서북 변경을 본거지로 하고 있던 진나라는 춘추시대 목공(穆公)에 의해 중원의 제후에 필적하는 세력이 되었고, 전국시대 효공(孝公) 때 외국인이었던 상앙(商?)을 등용하여 변법자강의 개혁을 통해 강국이 되어 영토를 확대했다. 상앙의 개혁은 새로운 점령지에 대해 현제를 실시하고, 대가족들은 분가시켜 소가족으로 창설시켜 농업인구를 늘리는데 주력하였다. 또한 귀족에 대해 통제를 가해서 이로 인해 귀족의 미움을 사고, 효공 사후 상앙이 사형에 처하는 계기가 된다. 그의 사후 개혁은 뒷걸음질 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나라의 세력은 가장 으뜸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소양왕 시기에는 ‘연횡책’ 대신에 ‘원교근공(遠交近攻)’ 정책으로 전환하여 한, 위, 조를 침략해 한때 그 위세로 동방의 제나라와 함께 서제(西帝), 동제(東帝)로 불리기도 하였다. 한편 진나라가 유독 강성해지자 주나라는 열국을 ‘합종’하여 진나라를 칠 계획을 세웠고, 이를 안 진나라는 주나라를 공격해 곧 멸망시켰다.B.C. 247년에 즉위한 진왕 정은 재상 여불위(呂不韋) 등을 제거하고 이사(李斯)와 같은 인재를 등용하였다. 그는 법가의 이념으로서 나라를 다스렸으며, 대외적으로는 여전히 ‘원교근공’ 정책을 써서, BC 230년에는 먼저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조·연·초·위·제의 순으로 6국을 통일하였다.통일 이후 진왕 정은 ‘왕이라는 칭호는 멸망한 6국의 왕과 동등하기에 전 중국의 지배자가 된 군주의 칭호로 적합하지 않다.’고 하여 황제라는 칭호를 만들어 사용토록 하였다. 그는 시황제(始皇帝)가 되고, 그 후의 황제는 후세에 정해주는 시호 없이 2세·3세로 부르게 하였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국가가 된 진나라는 군현제(郡縣制)를 전국적으로 실시하였고, 각각에 군에는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였다. 이른바 중앙집권적 전제군주제가 완성된 것이다. 또한 각종 도량형, 화폐, 문자를 통일시키고, 황제의 권위에 걸맞게 거대한 궁궐(아방궁)과 무덤(여산릉)을 만들었다. 시황제는 북쪽의 흉노를 쫓아내어 만리장성을 구축하고 남쪽은 광동성·광서성에서 베트남 북부까지 정복하여 영토를 확장시켰다. 한편, 유가 사상에 입각해 자신과 진나라를 비판하는 유생을 산채로 파묻고, 유가의 서적들을 불태워버리는 분서갱유사건을 일으키기도 하였다.Ⅱ. 한나라의 건국 배경과 과정1) 배경B.C. 211년 시황제는 통일의 위업을 돌아보려 나선 순행길에 병사하고, 그의 막내아들인 호해가 환관 조고의 힘을 업고 시황제의 유서를 위조해 황제에 오르게 된다. 본디 시황제는 변방에 나가있는 맏아들 부소에게 황위를 물려준다는 내용의 유서를 썼지만, 호해와 조고는 오히려 부소에게 불효의 죄목을 붙여 자결하게 하였다. 그렇게 이세황제가 된 호해는 조고를 낭중령에 임명해 조정의 모든 일을 그에게 맡기고 방탕한 생활을 즐겼다. 또한 아직 미완인 아방궁과 여산릉의 조성공사를 다시 시작하여 많은 인원을 주둔시켰고, 이 인원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지방 군현에 곡물 수송을 명하고 백성에 대한 수탈을 강화하였다. 농민은 부역과 수탈로 인해 점점 저항이 심해져갔고, 결국 B.C. 209년 변방 수비로 징발된 진승과 오광이 농민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변방의 임지로 가던 중, 미처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 홍수를 만나 길이 막히자 도저히 기한 내에 도달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렀다. 당시의 법은 정해진 시일 안에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할 경우 무조건 처형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진승과 오광은 '지금 도망가도 죽고, 봉기해도 죽을 수 있다. 이왕 죽는 것이 마찬가지 일 바에는 난을 일으켜 나라를 위해 죽는 편이 낫다'고 결심하고 일행을 선동해 반란을 일으켰다. 진승은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국호를 장초로 정했는데, 자신의 행동이 전국시대의 초나라를 재건하기 위한 것임을 천명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봉기한 지 얼마 안 되어 농민군은 정부군에 의해 크게 타격을 받았고, 지도자인 진승과 오광은 농민군 내분으로 인해 피살됐다. 봉기한지 겨우 6개월 만에 중국 최초의 농민운동은 종지부를 찍었던 것이다. 진승과 오광은 실패했지만, 이들은 진의 멸망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그들이 반란을 일으킨 틈을 이용하여 전국 각지의 귀족세력과 통일 전 진나라와 자웅을 겨루던 나머지 6국의 후예들이 진에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한편, 각지의 반란군 중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이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의 반란군이다.2) 과정항우는 숙천 출신으로 전국시대 말기 초의 명장인 항연의 손자로 대대로 명문가였으며, 숙부 항량과 암암리에 빈객과 젊은이들을 모아서 조직적으로 훈련시켰다. B.C. 209년 7월, 진승과 오광의 반란이 일어나자 항량과 항우도 태수를 죽이고 병사들을 모아 반진(反秦)의 기치를 들었다. 그들은 진승의 사후 초나라 회왕의 손자를 찾아 왕으로 추대하고 초의 부흥을 주창하였다.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군은 항우의 뛰어난 전술을 보고 점차 항우의 휘하로 결집하게 되었다. 한편 유방은 패현의 농민으로 부모의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가문 출신이었다. 그는 젊었을 때, 유협의 무리가 되어 유랑하다가 나중에 패현 부근의 하급 속리가 되었다. 하급 속리로서 일을 하던 중, 죄수를 인솔해 여산릉 조성 공사장으로 향했지만, 가던 중 너무 많은 이탈자가 발생해 처벌이 두려워 그대로 망명하고 자신을 따르던 패현의 젊은이들을 모아 거병해 반란군의 지도자가 되었다. 점차 병력이 증대되자 항우와 연합하여 초군으로 편입하였다.당시 초의 군대 내에서는 제일 먼저 진의 수도인 함양에 입성하는 사람이 진의 본거지인 관중의 왕이 된다는 약속이 있었다. 항우는 하북성의 반란군을 원조하기 위해 간 사이 유방이 결국 함양을 함락시켜 BC 207년 진나라는 완전히 멸망하였다. 항우는 뒤늦게 도착하여 진 왕궁의 보물을 약탈하고 궁전을 불태워버렸다. 그리고 회왕에게는 의제라는 껍데기뿐인 칭호를 주고 자신은 서초패왕이라고 칭하였다. 그러나 먼저 입성한 유방에게는 약속과는 달리 국경지역인 사천성의 조그만 땅의 왕으로 임명하였다. 이후 항우가 의제를 살해하자 격분한 유방은 역적 항우를 토벌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항우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전투에서는 항상 항우가 승리했지만 성격이 포악했던 항우는 점차 인심을 잃어가고, 반면 유방은 그와 달라서 인심을 얻고 그 주위에는 유능한 인재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결국 BC202 유방의 군대가 항우를 해하에서 포위하고 탈출하던 항우를 오강의 나루터로 몰아내 자살하게 하였다. 그리고 나서 유방은 그해 2월 여러 장수를 제압해 황제의 지위에 오르니, 이로써 한 제국이 성립하고 중국은 다시 통일기로 접어들게 된다.
    인문/어학| 2006.12.07| 3페이지| 1,000원| 조회(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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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메이지유신의 배경과 과정과 의의
    메이지 유신의 배경과 과정과 의의Ⅰ. 메이지 유신의 배경1. 에도막부의 쇄국정책처음 에도막부는 유럽인과 무역을 하고 있었으며, 동남아시아까지 남하해서 무역을 하는 일본상인도 있었다. 그러나 유럽인에 의해서 전래된 크리스트교의 가르침이 막부의 지배질서를 파괴하는 것을 알고 막부는 크리스트교와 일본인의 해외무역을 점점 제한하고 심지어는 외국 선박의 일본 입항을 원천적으로 봉쇄했다. 하지만 오직 교역만을 추구하는 네덜란드와 오랜 사대국인 중국은 허용하였고 다만 활동반경을 나가사키의 데지마로 제한하였다. 그리하여 나가사키에서는 네덜란드 사람들에 의해 크리스트교 이외의 유럽의 신학문이 조금씩 들어왔고 막부 조정도 신학문에 호기심을 가졌지만, 쇄국정책은 200년 이상이나 지속하였다.2. 신분제의 동요18세기에 들어서면서 막번체제는 벌써 붕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중앙정부에서는 각 번들의 세력을 짓누르기 위해 영지와 에도를 번갈아 머무르게 하는 교대제를 실시하고 있었는데, 교대하러 에도에 갈 때마다 번들은 세력을 강조하기 위해 엄청난 돈을 사용했고 그렇기 때문에 번들은 대부분 재정난에 봉착해 있는 상태였다. 또한 일반무사의 궁핍은 더욱 심각해서 중, 하급 무사는 말할 것도 없고 상급무사도 극심한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왜냐하면 에도막부 이후 안정기에 접어들었고 전쟁이 없기 때문에 무사들은 할 일도 없기에 무사들의 봉급은 여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생활수준은 갈수록 높아지는데다 물가도 올랐던 만큼 무사계급의 궁핍은 당연한 일이었다.무사의 궁핍 이상으로 막번체제의 동요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은 농촌의 분해현상이었다. 원래 농촌은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했으나 화폐경제가 농촌에 침투하면서 농촌의 구조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대에 막번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실추된 막부의 권위를 세우고 지배계급인 무사의 경제적 우위를 확보하는 한편, 농촌경제를 안정시키는 것이 무엇보다도 시급한 과제였다.3. 개혁1716년 요시무네가 8대 쇼군에 취임해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는데, 이 개혁을 쿄호개혁(享保改革)이라고 한다. 그는 쇼군 독재정치를 시행하고 엄격한 검약령을 내렸다. 막부는 수입의 증가를 꾀하기 위해서 경작지 개발과 상품작물을 장려했으며, 또 산업개발에 도움이 되는 실학을 장려하기 위해서 한문으로 번역된 서양서적의 수입을 허용했다. 결과 재정은 상당히 회복세를 보였지만 농민들이 소작철폐운동을 일으켰기 때문에 개혁을 철회하고 사실상 지주, 소작인 관계가 확대되어 가는 것을 공인했다. 또 연공증진정책은 농민으로부터 강한 반발을 얻어 막부의 영에서 백성봉기가 자주 일어나게 되었다. 게다가 1732년의 쿄호의 기근은 물가 정책의 실패도 잇고 다음해 에도에서 빈민들의 폭동이 일어나는 등 정치가 동요되기 시작했다.막부의 개혁은 실패했지만 한편 각지의 번에서는 나름대로의 개혁에 몰두했다. 그 중에서도 서남일본의 대번(大藩)은 특히 열심이었다. 19세기 중엽, 이와 같은 뼈를 깎는 번정개혁에 성공한 것은 사츠마번(薩摩藩), 조슈번(長州藩), 사가번(肥前), 토사번(土佐藩)등의 큰 번들이었다. 개혁에 의해 국력을 충실히 하고, 권력 강화에 성공한 사츠마를 비롯한 번들은 막부 말의 정국에 지도적 역할을 맡는 토대를 닦았다.Ⅱ. 메이지 유신의 과정1) 페리 제독의 흑선(黑船)과 개항유럽에서는 산업혁명으로 인해 무역이 번창하고 있었고, 일본을 새로운 시장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19세기 중엽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쇄국정책의 일본에 대해 개국을 요구했다. 게다가 영국과 미국의 배들이 일본근해에 와서 물, 식량 등을 요구하는 일이 잦아지자 막부는 더욱 더 신중해져 이국선타불령(1825)을 내면서 개국론자들을 벌했다. 1853년에 미국의 페리 제독이 4척의 군함과 함께 에도에 가까운 우라가(浦賀)에 왔고, 막부와 에도(江戶)사람들은 대포가 있는 군함에 놀라 그것을 구로후네(黑船)라 부르며 두려워했다. 1854년 막부는 미국의 강한 요구를 받아들여 미국과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으로 막부는 외국의 배가 시모다(下田)와 하코다테(函館) 두 항구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하지만 무역은 아직 시작하지 않았다. 1858년 미국의 하리스가 시모다에 와서 미국과의 통상을 요구했고 막부는 조정, 다이묘들과 논의를 하였으나 반대에 부딪쳤다. 이 때 다이로(大老)였던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가 조정의 허가를 받지 않은 채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나가사키, 하코다테, 요코하마(橫浜)등의 항구를 열고 59년부터 무역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일본이 수입품에 대한 관세를 정할 수가 없고, 치외법권을 인정한다는 내용의 불평등조약이었다. 이어서 같은 내용의 조약을 네덜란드, 러시아, 영국, 프랑스와도 맺게 된다.2) 존왕양이와 도막파의 등장본래 쇄국정책은 무역으로 먹고사는 조슈번과 사쓰마번의 세력을 막부가 잡아두기 위해 시행한 정책이었다. 조슈와 사쓰마는 이러한 정책에 단연코 반대했고 막부와 번들의 관계는 좋지 못했다. 이런 와중에 중국이 아편전쟁을 통해 서구의 반식민지로 떨어져버렸다는 소식이 일본에 전해진다. 그러자 서구세력의 침입로에 위치한 서남의 토자마번들(조슈, 사쓰마)의 무사들은 서구세력의 군사적 침략의 위험성을 직면한 나머지 양이론을 들고 나온다. 1858년 7월 미일통상조약이 천황의 허락 없이 다이로인 이이 나오스케에 의해 조인되자, 그의 그러한 처사와 무력한 막부에 대하여 조정과 도자마번들로부터 격렬한 비난이 일기 시작하였다. 이이 나오스케는 그들 반대파에 대해 사형에 처하거나 엄한 벌로 다스렸고 이에 반감을 품은 반대파들에 의해 에도성의 사쿠라다몬(樓田門) 근처에서 암살당하고 만다.이처럼 허락 없이 조약이 조인된 것이 계기가 되어 막부의 외교정책에 반대론을 펴온 미토번과 조정으로부터, 존왕양이의 구호가 터져 나왔다. 그러한 구호는 현실적으로 서구열강으로부터 군사적 위협을 자각한 양이론자들과 그 동안 막부에 대하여 오랜 원한을 품어온 도자마번의 하급무사들에 의해 열렬히 받아들여졌다. 또 개국에 의한 국내경제의 혼란, 특히 물가폭등 등으로 인해서 농민, 도시민, 하급무사들 등을 통해서도 퍼져갔다. 그러다가, 1862년부터는 서남의 사츠마, 죠슈, 도사번 등의 무사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나갔다.3) 막부붕괴와 메이지 정부의 등장이러한 때 사쓰마와 조슈의 하급무사들 사이에 존왕론과 양이론이 결부된 존왕양이운동이 시작되었다. 결국 사쓰마는 영국의 함대와, 조슈는 영국, 프랑스, 미국, 네덜란드의 4개국 연합함대와 싸우게 되었고 이 전투에서 서양 열강의 힘을 알게 되자 자신들의 양이운동이 불가능함을 인정하게 된다. 이에 하급무사들은 막부를 쓰러뜨리고 천황중심의 정치를 실현하고자 하여 존왕도막운동(尊王倒幕運動)을 추진해 새로운 정부를 세우기로 비밀리에 약속하였다. 한편 막부도 두 차례에 걸쳐 조슈항을 공격했으나 실패하자 이에 하급무사들은 무력으로 정부를 쓰러뜨릴 계획을 추진했다. 이 무렵, 정치와 경제의 혼란으로 인해 에도(江戶)와 오사카에서 대규모의 폭동과 파괴가 발생했고 전국적인 농민반란도 일어났다. 이러한 가운데 중앙막부는 결국 1867년 대정봉환(大政奉還)의 뜻을 밝히고, 중앙막부에 대항하던 도막파의 저항을 무마하고자 한다. 이러한 대정봉환은 형식적인 의미에서 천황제를 유지하되, 실권은 유력한 다이묘가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1868년 1.3일 천황이 왕정복고를 선포하고 천황정부를 수립하는 메이지유신을 단행하게 된다. 그러나 신정부가 마지막 쇼군인 요시노부에게 관직을 부여하지 않고 그의 영지를 조정이 걷어 들이기로 결정하자 막부 측의 무사들이 불만을 품어 교토에서 전투를 벌이게 되며, 여기서 승리한 신정부군은 쇼군 요시노부를 치기 위해 에도로 향했다. 이 때 막부측의 가쯔카이 슈우(勝海舟)와 사쓰마·조슈측의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와 회담을 한 끝에 막부는 신정부군에 에도성을 돌려주고 그 대신에 도쿠가와 가문을 존속시켜 주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약 260년간 계속되어 온 에도막부의 정치는 이로써 끝을 맺게 되었다.
    인문/어학| 2006.12.07| 2페이지| 1,500원| 조회(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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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문학]현대시인론-김용택 평가A좋아요
    때 묻지 않은 순수함으로 세상을 노래하는 “섬진강의 시인”, 김용택Ⅰ. 들어가며Ⅱ. 김용택이 걸어온 길Ⅲ. 김용택의 시세계1. 농민의 곁에서, 농민을 섬진강에 투영시켜 노래하다 - 민중문학론2. 이 남자가 세상을 노래하는 방법 - 형식론3. 왜 그는, 갑자기 변해버렸을까? - 변모.Ⅳ. 나오며, 그리고 과제Ⅴ. 참고문헌Ⅵ. 노래로 만나는 김용택Ⅰ. 들어가며김용택은 선생님이다. 많은 작가들이 이름이 알려지면 대부분 전업 작가로서의 길로 들어선 반면 김용택은 선생님이기를 그만둔 적이 없다. 또한 김용택은 시골에 머무르면서 글을 쓰고 있는 보기 드문 작가이기도 하다. 문화의 중심지인 서울이 아닌 곳에서 쓰려지는 작품들이 쉽게 대중의 시선을 끌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김용택의 글 속에는 언제나 아이들과 자연이 등장하고 있으며 어김없이 그들은 글의 주인공으로 자리 잡고 있다. 풍요로운 자연 속에서 글을 쓰며 호흡하는 김용택은 아이들과의 글쓰기를 통해 아이들이 자연을 보고, 세상을 이해하는 시선과 교감하며 세상을 바라본다.그러나 연시에 무척 어울릴법한 섬세한 시어와 감성을 가지고 김용택이 바라보는 것은 아름다운 자연과 아이들만이 아니다. 김용택은 그 빛나는 시적 대상들을 아름다움을 가리고 있는 한국 농촌의 황폐함에 주목한다. 험난한 세월을 견디며 살아 왔으면 이제는 폐가만이 황량한 농촌 마을과 피폐해진 땅을 갈며 살아가는 사람들, 지난한 역사를 흘러오면서 억세진 어머니와 누이의 손등에서 김용택은 이 나라의 아픔을 발견한다. 그것은 산업화의 흐름 속에서 잊혔던 우리의 고향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름이 알려진 후에도 김용택이 고향 마을을 떠나지 않은 까닭은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한 것이다.이번 논의에서는 주로 민중문학에 초점을 두고, 김용택이 어떤 눈으로 농민과 농촌을 인식하였고, 어떤 방식을 통해 농민을 그려나갔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Ⅱ. 김용택이 걸어온 길김용택은 1948년 전북 임실군 덕치면 진메마을에서 태어났다. 소설책, 만화책 읽기를 좋아했으며 1969년 순창농림994), 《그리운 것들은 산 뒤에 있다》(1997) 등이 있다.Ⅲ. 김용택의 시세계1. 농민의 곁에서, 농민을 섬진강에 투영시켜 노래하다 - 농민문학론김용택의 출현은 70년대 김정한, 이문구 등이 소설에서 개척한 농민문학의 가능성을 바탕으로 한 80년대 시적 성과의 구체적 모습이다. 몇몇 시인들도 나름대로 농민의 삶을 다룬 시들을 발표했으나, 대부분 지식인의 주관적 울분이나 세태묘사 등으로 기울고 말았지만 김용택은 과거 농민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들이 지식인의 주관적 농촌 파악으로 인해 단지 소재로만 함몰해 버리는 한계를 극복하고, 농민 주체에 가까운 농민을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으로도 큰 의미를 갖는다. 여기서 농민 주체란 온전한 농촌 전체의 삶을 대표하는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삶의 기초적 근거를 농촌에 두고 있으며, 항상 농민들과 생활하는 가운데서 경험이 체화되어 형상화된 김용택의 시는 다른 어떤 작가의 작품보다도 이런 농민 주체의 개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초기의 김용택은 낭만적 현실인식에서 출발하여 현실 비판으로 발전하는 길목에 서있는데, 특히 시적 자아는 ‘집짓기’와 ‘길 찾기’ 사이에서 방황을 거듭하는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실날같은 가는 샛길로 샛길로 가서마지막 샛길 끝에말이라도 걸면 금방 쓰러질 것 같은슬픈 초가 한 채아무도 가지 않고이따금 내가 가다가 해 져서길 잃고 길 없이돌아온다?길? 전문위의 시에서 보이는 것처럼 시적 화자는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고 있다. 거창하게 표현하면 사상이나 세계관의 집짓기를 하고 있는 모색의 단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상당한 기간 동안 그것을 찾지 못하고 갔다가 돌아오는 행동을 반복하고 있다. 이런 시들 속에서 ‘나’로 대표되는 시적 화자는 슬픔과 외로움의 정조를 표나게 드러내고 있다.하늘은 청명합니다고산길을 걷습니다울 너머 핀 개나리꽃을 보며움막이라도, 내 집 한칸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세 기둥을 세워 받치고한 기둥은 닿지 않습니다짓지 못한 노란 초가집이 천천히 허물어지는 슬픔,다시 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집짓기와 길 찾기의 체험을 통해 농촌 현실의 열악함과 구조적 모순을 탐구하기 시작한 시인은 그 문학적 매개로서 ‘섬진강’, ‘꽃산’,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향토와 농민들과 같은 구체적 소재들을 시로 형상화하게 된다.그대 이제 물 깊이 그리움 심었으리.기다리는 이 없어도 물가에서돌아오는 저녁길그대 이 길 돌멩이, 풀잎 하나에도눈 익어 정들었으니이 땅에 정들었으리.더 키워 나가야 할사랑 그리며하나둘 불빛 살아나는 동네멀리서 그윽이 바라보는그대 야윈 등어느덧아름다운 사랑 짊어졌으리.「섬진강3」 中초기에서 보이던 ‘먼’ 그리움은 이 시에서 ‘눈 익어 정든’ ‘돌멩이’와 ‘풀잎’ 등 ‘이 땅’에 있는 대상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으로 전이된다. 서러움, 기쁨, 행복, 사랑 모든 것이 ‘물 깊이 그리움’으로 심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 시에서 그리움의 공간적 거리는 ‘먼’ 곳에서 ‘지금 이곳’으로 그리움의 대상은 ‘먼’ 것에서 ‘이 땅’으로 현실화되어있다.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쌀밥 같은 토끼풀꽃,숯불 같은 자운영꽃 머리에 이어주며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어둠을 끌어다 죽이며그을린 이마 훤하게꽃등도 달아 준다흐르다 흐르다 목메이면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섬진강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일어서서 껄껄 웃으며무등산을 보며 그렇지 않느냐고 물어 보면노을 띤 무등산이 그렇다고 훤한 이마 끄덕이는고갯짓을 바라보며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섬진강1」전문'가문 섬진강'의 이미지는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그 존재를 위협당하는 섬진강의 모습을 환기할 뿐 아니라 근현대사의 질곡 속에서 애잔하게 목숨을 이어 온 민초들의 삶을 환기시킨다. 시인은 ‘애비없는 자식’/‘퍼간다고 마를 강물이 아니다’라는 표현처럼 어둠은 밝음에 의해 지양되고 있다. 이렇게 그의 시가 농촌의 현실에 대해서 느끼는 슬픔의 정조를 ‘섬진강’으로 대표되는 농민적 삶의 넉넉한 낙관으로 극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이런 농민적 삶에 대한 건강한 낙관은 적극적으로 변주되어 적에 대한 풍자와 해학 그리고 개혁의지로 표출된다.군수한테 잘못 뵈면 주민들만 손해보니민주적으로다가 청소허고 퇴비허고 어쩌고저쩌고이래라 저래라 정신 못 차리게 울러대며이장 반장 교대로 숨이 넘어가더라한 사람이 이 회원 저 회원이니회원 회원이 다 모여야 그 사람이 그 사람이어서풀 벨 사람은 늙고 병든 몇몇이요무든 당원 이장에다 반장 개발위원장에다예비군 소대장에다 새마을 지도자 부녀자회장에다 된장이니고추장에다가 순창장 관총장에다가임실장 장도 장도 많은 장들은사타구니에 방울소리가 나게 이리 뛰고 저리 뛰고요리 뛰고, 정신 못 차리게 고살이 불이나게뛰어 댕기니어허 저 난리가 무신 난리당가「풀피리」 中이 시가 보여준 풍자와 해학은 시인에 의해 예리하게 포착된 농촌현실과 맞물려 가해자인 단순히 대상을 희화화하는 것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다각적인 실상을 파악하게 해준다. 이 시는 단순히 ‘적’에 대한 적개심만을 강조하는 관념시가 아니다. 정감 있는 사투리와 익숙한 판소리 리듬의 사설에 실어 현실을 다각적으로 탐색하게 해준다.네가 잠 못 이루고 이쪽으로 돌아누울 때나도 네 쪽으로 돌아눕는 줄 알거라.우리 언젠가 싸워내게 보이던 고운 뺨의 반짝이던 눈물우리 헛되이 버릴 수 없음에이리 그리워 애가 탄다.잠들지 말거라 깨어 있거라먼데서 소쩍새가 우는구나.우리 깨어 있는 동안사월에는 진달래도 피고오월에는 산철쭉도 피었잖니.우리 사이 가로막은 이 어둠잠들지 말고 바라보자.아, 보이잖니파란 하늘 화사한 햇살 아래바람 살랑이는 저 푸른 논밭화사한 풀꽃들에 나비 날지 않니.(아, 너는 오랜만에 맨발이구나)이제 머지 않아 이 얇아져가는 끕끕한 어둠 밀려가고허물 벗어 식은 자칫하면 개인의 감정세계에 자아를 폐쇄하기 쉬운 일반 서정시의 한계를 집단 전체의 현실 또는 운명을 역사적 원근법의 지평에서 형상화함으로써 극복하려는 욕망의 소산인 것이다.그러나 장시는 내면의 서정성을 압도하는 강렬한 서사적 충동과 그 길이로 말미암아 시인이 목적하는 의미와 정서 전달에 심각한 장애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 점을 극복하기 위해 김용택은 특히 특정 인물과 대상의 약전(略傳) 혹은 짧은 일대기로 불릴 수 있는 형식과, 판소리, 서사민요, 사투리 구사 등의 방법을 통해 당대 현실을 능수능란하게 조감하고 있다.우선 전자에 해당하는 예로 「섬진강4-누님의 초상」, 「섬진강23-편지 두 통」, 「섬진강24-맑은 날」, 「섬진강25-아버지」 등을 들 수 있다. 이 작품들은 주로 그의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 등과 같은 육친의 삶을 시적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러니만큼 시적으로 재현된 그 삶들의 질감은 매우 생생하며, 그들을 향한 시인의 진솔한 애틋함 역시 폭넓은 공감을 불러일으키기에 모자람이 없다.또 그렇게 보낸 몇 해 봄을 언제 죽을려고 했었냐는 듯 참으로 말짱하게 살아나시곤 하셨지만 할머님은 죽을 때를 향해 자연스럽게 삶의 어느 끝에서부터 차근차근 죽음으로 자기를 이끌어가셨습니다. 뒷산 귀목나무처럼.할머님은 이따금 방문을 열고 마루에 앉은 나더러 여러 가지 이야기 끝에마다"내가 죽으면 내 간을 꺼내보거라내 간이 있는가 다 녹아부렀는가."할머님이 살아나신 저 배고픔과 한숨과 시달림과 빼앗김, 저 눈물 많은 세상 세월도 이제 밥 먹을 일 외엔 일을 다 빼앗겨버리고 죽음의 근처에 다다라 가시며 할머님은 죽음의 한 고비를 넘어설 때마다 그렇게 말씀하시곤 하셨습니다.「섬진강24-맑은 날」 中이 시에는 할머니의 죽음을 맞은 시적 자아의 감회가 임종에서 매장에 이르는 상례 절차에 맞추어 절제된 어조로 토로되고 있다. 또한 이 시는 산문시형과 단형 서정시형의 교차적 배치, 마을 사람들의 사투리와, 할머니의 죽음에 적절히 조응하는 자연과 사물의 대담한 구사를 통것이다.
    인문/어학| 2006.12.02| 10페이지| 1,500원| 조회(6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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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사와 불교 서평
    A.E.라이트 저, 양필승 옮김. 『중국사와 불교』, 1994, 서울, 신서원국어국문학과200310879 이인빈이 책은 중국에게 있어서는 외래 종교인 불교가 중국 사회에 어떻게 유입되고 어떠한 경로로 쇠퇴했는지 통시적으로 서술된 책이다. 또한 불교를 통해 한 시대부터 송 초기까지의 시대상과 그 시대인의 사상적 면모까지 엿볼 수 있는 글이다.먼저 한나라 시대에는 정치적으로 통일 시기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안정적인 삶을 살았기에 그다지 종교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었다. 그저 지배층에서만 통치이념으로써의 유교이념을 신봉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위, 진, 남북조시대라 불리는 혼란기에 접어들면서 혼란을 이겨낼 수 없는, 평화기에만 필요한 유교에 대해 당시 지식인들은 비판을 가하였고, 그 대신 현실 도피적인 도교가 유행하였다. 하지만 이도 오래가지는 못하였고 저 멀리 인도의 종교인 불교가 중국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외래 종교였기에 유입 초반 불교는 포교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끊임없는 연구와 불교의 중국화는 이러한 장벽을 뛰어넘기 시작하였고, 내세를 중요시하는 불교의 속성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혼란기의 중국인들에게는 깊은 감명을 주었기에 불교는 급속도로 전파되었다. 이후 수, 당 시기에는 아예 국가가 나서서 불교를 장려했으며 찬란한 불교문화의 시대를 이룩하게 된다.하지만 당 말기 불교의 본거지인 인도에서의 불교 쇠퇴는 중국까지 영향을 미쳐 중국 내로의 불교 유입이 중단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국가 내에서도 불교의 타락을 경계하는 무리들이 늘기 시작했다. 또한 안사의 난을 겪으며 지식인들은 잊혀진 유교경전 속에서 혼란을 타개할 방법을 모색하였고, 그들은 진부한 옛날의 유교에 불교의 형이상학적 문제를 곁들여 신유학을 일으키게 된다. 그리하여 지배층은 신유학으로써 혼란을 타개하고 송 제국을 건설하여 유교로써 사상의 체계를 바로잡으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민중 속에는 중국화 된 불교가 널리 퍼져있는 상태였고 이로써 이중적인 사상체계가 만들어졌다.이후 불교는 유교에 밀려 계속 억압받다가 근대기에 서구의 침략을 받은 후 아시아 종교인 불교를 통해 범아시아주의를 이끌며 서구에 대항하려 했지만, 실생활과는 상관없이 형이상학적 문제나 탐구하는 불교는 당시 사람들에게 매력을 끌지 못했다. 또한 외래 종교라는 점이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근대 중국에서는 환영받지 못했다. 이렇게 현대의 중국은 결국 종교와는 상관없는 길을 걷고 있지만 불교는 중국인의 사상과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키워드가 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독후감/창작| 2006.12.02| 1페이지| 1,000원| 조회(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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