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에 대하여개요수(數, number)는 수학에서 하나의 기본적인 개념이고, 수학의 개념과는 확실하게 구별해야 한다. 우리가 흔히 수라고 생각하는 숫자는 수를 나타내는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 인류가 수를 사용하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문명사회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상 생활에서 필수적으로 이용되는 차례, 양, 비율, 등은 모두 수를 써서 나타낼 수 있고, 우리가 가정에서 사용하는 크고 작은 물건을 비롯하여 상품을 생산하는 기계들, 교통 수단인 자동차, 항공기 등 모든 문명의 이기는 수와 식을 이용하여 설계하고 제작되는 것이며, 이들을 가동하는 데에도 수가 이용된다. 이와 같이 오늘날 널리 이용되고 있는 수의 개념을 인류가 언제부터 사용하기 시작하였는지 그 연대를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기록으로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숫자는 기원 전 28세기 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바빌로니아의 쐐기 숫자이다. 수의 개념은 자연수로 시작되어 정수, 유리수로 확장되고, 무리수는 우리에게 피타고라스의 정리로 잘 알려진 피타고라스(Pythagoras)학파에 의하여 발견되었다고 한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우주만물은 모두 수로 나타낼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 후 16세기에 복소수가 도입되었으며, 우리가 사용하는 실수 체계는 19세기에 확립되었다.수의 탄생에서부터 현재 수라고 불리우는 정수, 실수, 복소수 등에 대해서 살펴보도록하자.수의탄생수의 세계는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현실 세계가 아니고, '그림자'와 같은 기호의 세계이다. 예를 들어 수퍼마켓에서 물건을 사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계산대에 앉아 있는 아가씨는 내가 무슨 물건을 샀느냐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관심이 있는 것은 물건의 가격과 개수이다. 우리는 여기서 수가 지닌 중요한 특징 두 가지를 알 수 있다. 첫째는 수가 사물의 물리적인 성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다만 사물과 연관된 특별한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수퍼마켓에서 과자를 사든 생선을 사든 상관없이 계산대의 아가씨는 거기에 붙어있는 숫자(가의 중심각이 60도가 된다. 그래서 60을 기본으로 삼았을 것이다. 바빌로니아의 60진법은 후에 아라비아로 계승되고, 이어서 유럽까지 퍼져 16세기까지는 천문학이나 수학의 어려운 계산에 사용되기도 했다. 사실 60진법은 지금도 시간과 각도의 단위로 사용되고 있다.1시간=60분, 1분=60초, 1도=60'(분), 1'(분)=60"(초)그러나 메소포타미아에서는 0을 쓰지 않았는데 이 위대한 0이라는 숫자는 어떻게 태어났을까? 0의 탄생지는 인도이다. 오늘날 사용하는 10진 위치적 기수법을 만들어 낸 것도 인도인이다. 물론 그들이 사용한 기수법은 아직 완전한 것은 아니었지만 위치적 기수법의 원리(또는 자리잡기 원리)가 확립되어감에 따라 빈 자리를 나타내는 기호가 필요해진 것은 당연한 이치였던 것이다. 기원전 2세기경에는 불교에서 쓰는 말인 공(空)을 써서 지금의 0을 대신하였다. 그러다가 3, 4세기경에는 점을 찍어서 나타냈으며 7세기에 들어서 비로소 지금의 0이 등장하였다. 0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기호가 제 모습을 갖추기까지는 이토록 오랜 세월이 걸렸다.인도인이 발명한 숫자 1에서 9까지의 기호와 0은 아라비아를 거쳐 유럽으로 건너갔는데 15세기 말쯤에야 비로소 현재와 같은 형태를 갖추게 된다. 그러나 이 인도식 기수법이 순조롭게 전해진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것들의 유입은 그 이질감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편리하다는 이유만으로는 받아들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0이 등장하기 이전에는 어떤 자리가 빈 자리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그 자리를 그냥 비워 두었다. 예를 들면 102는 1 2로 나타내었다. 그런데 1 2를 12로 볼 것인지 102로볼 것인지 사람에 따라 혼란스러울 수 있는데, 차용증 같은 것을 작성할 때는 각 자리마다 명칭을 붙임으로써 혼란을 방지할 수 있다. 즉, 일, 십, 백, 천, 만, 억, 조, ...등의 단위를 사용하는 방법이 있다. 0이 없는 시대에는 이러한 편법을 사용해 왔다. 그러나 각 자리마다 이름을 무한정 붙여 나갈 수는 없다. 무한우리는 수를 반복해 더함으로써 얼마든지 큰 수를 만들어 갈 수 있다. 실제로 자연수는 1에서 출발해 계속 1을 더하는 연산을 반복함으로 계속 생성된다. 이와 같이 자연수는 수가 생성되는 '길'을 나타내고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명확히 말하지 않았으나 1, 2, 3, 4, 5, ...는 수학용어로서는 자연수의 집합 N을 나타낸다. 이것을 하나의 집합으로 간주할 때도 일반적으로 N={1, 2, 3, ..., n, ...}과 같이 쓰고 있다. 자연수의 집합 N이 1에서 출발하고 계속 1을 더함으로써 다음 수를 얻을 수 있다는 성질에 의해 생성된다면 이를 공리로 하여 자연수를 완전히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자연수의 공리 체계를 도입한 사람이 19세기 말 이탈리아의 수학자 페아노였다. 그러면 페아노에 의한 자연수의 공리는 어떤 것인가 알아보기로 한다.페아노의 공리는 자연수 집합 N의 부분집합을 S라 할 때,(1) 1 S(2) k S이면 k+1 이다.(1), (2)두 조건을 만족하면 S=N이다.자연수의 집합 N은 이 공리에서 알 수 있듯이 1에서 시작해 계속 연결해가는 징검다리와도 같다. 이 징검다리를 하나씩 하나 씩 건너가면 자연수는 서서히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이야기를 계속해 나가기 위해서는 1 앞에 징검다리의 출발점이 되는 0을 두는 게 훨씬 좋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0, 1, 2, 3, 4, 5, ...를 생각해 본다.그래서 지금 보폭이 5인 사람이 0에서 출발하여 5, 10, 15, ...로 징검다리를 뛰어간다고 해 보자. 이 사람이 213번 계속 더하면 되겠지만,5+5+...+5 (214번 5를 더한다)너무 복잡하므로 이러한 경우에 수학은 '곱하기'란 새로운 연산을 도입해 5*213=1065 라고 계산하는 것이다.이러한 방법으로 곱하기를 도입하면 5*213=213 *5는 좌연산과 우연산의 결과가 같아 교환법칙이 성립함을 알 수 있다. 결국 페아노의 공리를 써서 더하기, 곱하기를 정의하고 나아가수 없다. 그러니까 1을 소수로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소인수분해의 일의성과 관련이 있다. (일의성이란 유일성과 같은 의미로서 단 하나 존재함을 의미하는데, 즉 6을 예를 들면 6=2*3이나 6=3*2를 같은 경우로 보듯이 단 하나로 만 소인수분 해가 됨을 뜻한다.)다음에는 2를 남기고 2의 배수를 모두 그어 버렸다. 그 다음에는 3을 남기고 3의 배수를 모두 그어 버렸다. 또 5를 남기고 5의 배수를 모두 그어 버렸다. 이와 같이 계속하여 50까지의 자연수를 써 놓고 소수를 체치기 해낼 수 있다.그러면 에라토스테네스의 체치기 방법으로 모든 합성수를 그어 버릴 수 있을까? 즉, 소수의 개수를 모두 구할 수 있을까? 그런데 기원전 약 275년에 그리스의 유명한 수학자 유클리드는 교묘한 방법으로 소수의 개수가 무한하다는 것을 증명하였다.유클리드는 귀류법을 이용하여 증명하였다.그는 우선 '소수의 개수가 유한하다'는 것을 가정하였다. 그리고 모든 소수 2, 3, 5, 7, .. ., .P를 열거하고 P를 제일 큰 것으로 삼았다. 다음에는 한수 2 3 5 ... P+1을 제 일 큰 것으로 삼았다. 그 수는 의심할 바 없이 P보다 크다.여기에서 2 3 5 ... P+1은 어떤 소수로 나누어도 나머지는 항상 1이 된다. 즉 이 수 는2, 3, 5, 7, ... , P중 어느 한 수로도 나누어 떨어지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이 수는 P보다 큰 소수이다. 이것은 가설에 모순이다. 그러므로 수수의 개수는 무한하다.실수해석학을 떠받치고 있는 세계는 자연수와 같이 한발짝 한발짝 걸어가는 듯한 이산적 세계와는 다른 연속적 세계이다. 우리의 눈앞에서 전개되는 많은 자연 현상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연속적으로 변화해 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이제 이러한 연속적인 모습을 수학 속에서 실현하고 있는 수의 체계, 실수를 생각해 본다.'실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당황하는 사람들도 실수란 수직선 위에 표시되어 있는 수를 가리킨다고 하면 금방 이해가 갈 것이다. 수직선이란 직선 위그들의 주장에 따른다면 선분의 길이의 비는 반드시 정수의 비로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정사각형의 한 변과 대각선의 비는 정수가 아닌 무리수의 비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는 피타고라스학파의 존재 근거가 무너지는 큰 사건이었다. 현재 우리는 한 변의 길이가 1인 정사각형의 대각선의 길이는 2임을 잘 알고 있다 그리스인 들이 무리수를 수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이미 '무리비'를 이해했고, 이 '비밀의 수'가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수학의 수준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그러면 실수의 연속성에 관한 내용을 알아보자. 실수의 연속성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느낄 수 있는 흥미 있는 문제이다. 지금부터 무려 2300년 전의 제논은 4가지의 역설을 제기 했는데 여기서는 '날으는 화살은 날지 않는다.'라는 역설만 생각해 보기로 하자. 제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날으는 화살을 생각해 보자. 어떤 순간을 생각하면 이 순간에 화살은 멈춰 있다. 다음 순간을 생각해 보자. 역시 그 순간에도 화살은 멈춰 있다. 모든 순간마다 화살은 멈춰 있다. 한편 시간은 순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화살은 항상 멈춰 있다. 즉, 날아가는 화살은 실은 날지 않는 것이다. 이 것을 두고 역설이라 표현한 것은 화살은 실제로 날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수학에서 화살의 운동을 조사할 때에는 항상 시간을 t로, 진행된 거리를 x로 하여 x=f(t)라는 함수로 표현하고 이함수를 연구하고 있다. 이러한 방법으로 화살의 운동을 묘사해도 상관없다는 것은 수학의 입장에서는 제논의 역설을 부정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우리는 제논의 역설은 성립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 근거는 실수의 연속성에서 비롯된다. 실수의 연속성은 제논의 역설을 뒤엎을 수 있을 만큼 시공의 연속성을 확실히 표현하고 있다. 그럼, 실수의 연속성을 가정하고, 이에 따라 제논의 역설이 옳지 않음을 밝혀 보기로 하자. 우선 제논의 역설을 잘 살펴보면 '순간'이란 개념이 이 역설의 마디마다 나타나고 있음것일까?
제논의 역설어떤 양을 무한히 쪼갤 수 있거나 또는 그것이 매우 많은 개수의 쪼갤 수 없는 극소량들의 합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가정할 수 있을까? 첫 번째 가정은 그냥 받아들일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떤 것을 발견하는데 두 번째 가정을 이용할 때는 자칫 어떤 불합리성을 놓칠 가능성이 있다. 고대 그리스의 수학 학교들이 위의 두 가정을 이용하는 것을 발달시켰다는 증거가 있다. 두 가정 모두가 직면하는 약간의 논리적 문제점이 기원전 5세기경에 엘레아학파의 철학자 제논이 만든 네 개의 역설에 의하여 충격적으로 제기되었다. 수학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 이 역설을 어떤 양을 무한히 쪼갤 수 있다고 가정하든지 또는 많은 개수의 극소량들의 합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고 가정하든지 간에 운동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이 역설의 본질을 다음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이분법(The Diconotomy):만일 직선을 무한히 쪼갤 수 있다면 운동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직선을 통과하려면 우선 중점을 지나야만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사분점을 지나야 하고 또 그러기 위해서 팔분점을 지나야만 하는 등 무한히 많은 점을 지나야 한다. 따라서 운동은 시작조차 할 수 없다.화살(The Arrow):만약 시간이 더 이상 쪼개질수 없는 아주 짧은 순간들로 이루어져 있 다면 움직이는 화살은 항상 정지해 있다. 왜냐하면 매 순간마다 그 화살은 한 고정된 지점에 있기 때문이다. 각 순간에서 이 명제가 참이므로 화살은 결코 움직이지 않는다.그 후 제논의 역설에 대한 많은 해설이 주어졌는데 그들 대부분의 각 양이 극히 작다 하더라도 양의 무한개의 합은 무한히 크고 (그림생략), 그 크기가 0인 양의 유한 또는 무한개의 합은 0이라는 (nx0=0, x0=0) 통상적인 직관적 믿음에 도전한 것이었다. 그 역설을 만든 동기가 무엇이었든 간에 그것들의 영향으로 무한소가 그리스 논증기하학에서 배제되었다.그리스 철학자 제논은 그 당시 반박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역설을 내놓아 많은 사람들을 당황하게 했다. 이러한 역설들 때문에 그는 얼마나 인기가 없었던지 왕에게까지 미움을 받아 무참히 처형되고 말았다고 한다. 처형 당시 그는 형장에서 마지막으로 왕에게 직접 전해야 할 중대한 비밀이 있다며 왕에게 가까이 가서 왕의 귀를 물어뜯었는데 왕을 호위하고 있던 병사의 칼로 목이 잘려진 뒤에도 그의 목이 왕의 귀를 물고 있었다는 전설이 남아있을 정도니 그가 얼마나 집념이 강한 사람이었는가 짐작이 간다.제논의 역설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달리기 경주'이다. 이 역설은 거북이가 먼저 출발한 상황에서 아킬레스는 아무리 빨리 달려도 거북이를 따라 잡을 수 없다. 는 것을 논증한 것이다. 자세히 설명하면, 아킬레스가 자기보다 앞에 달려가는 거북이를 뛰어 쫓는다고 하자. 거북이의 걸음이 아무리 늦더라도 아킬레스가 원래 거북이가 있던 곳까지 따라왔을 때 그동안 거북이는 얼마쯤은 전진해 있다. 다음에 아킬레스가 다시 거북이가 있던 두 번째 지점까지 왔을 때도 거북이는 그래도 얼마쯤은 전진해 있다.이렇게 계속되기 때문에 아킬레스는 언제까지든지 거북이를 추월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제논의 역설이다.우리는 그의 결론이 분명히 틀렸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그의 논증 중 어디가 잘못된 것인지를 반박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이제 이해하기 쉽도록 숫자 값으로 하나하나 따져 보자.가령 아킬레스의 속도는 거북이의 속도의 10배라 하고, 아킬레스는 거북이의 100미터 뒤에서 출발하여 거북이를 따라잡는 것으로 한다. 아킬레스가 100미터 뒤에서 출발하여 거북이를 따라잡는 것으로 한다. 아킬레스가 100미터를 달려가서 본래 거북이가 있던 자리에 오면 그 사이에 거북이는 10미터만큼 전진해있다. 아킬레스가 또 10미터를 달려가서 거북이가 있던 자리에 오면 그 사이에 거북이는 1미터만큼 전진해있다.제논의 역설에서 간과하고 있는 사실은 '시간'이라는 항이 빠져있다는 것이다. 즉, 움직이는 거리는 항상 속도 시간 이어야하는데, 제논의 역설에서는 여기서 시간 이라는 것을 무시하고 있다는 점이다.즉, 아킬레스의 속도가 100m/s 이고, 거북이의 속도가 10m/s라고 하고, 거북이가 100m 앞에서 출발한다고 한다면 1초 후에는 아킬레스는 100m지점에 있고, 거북이는 110m지점에 있게 된다. 여기서 다시 0.1초 후에 아킬레스는 110m 지점에, 거북이는 111m 지점에 있게 된다는 것이고, 0.01초 후에는 아킬레스는 111m 지점에, 거북이는 111.1m 지점에 있게 되므로 항상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앞지를 수 없다는 것이다.
프랑스.. 부끄럽게도 나는 프랑스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 하지만 '서양 요리'라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프랑스 요리이다. 물론 프랑스는 요리 뿐 아니라 패션, 건축, 미술, 음악으로도 매우 유명하지만, 프랑스의 요리 문화는 예술과 역사만큼이나 전통을 가지고 발전해온 프랑스 문화의 큰 자랑중에 하나이다. 어릴 때부터 역사에 관한 관심이 없었고 중ㆍ고등학교 때에도 세계사는 배울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다른 나라 역사에 관한 상식이 부끄러울 만큼 없었다. 또 나에게는 어려운 부분 중에 하나이기도 했다. 이번 프랑스 문화와 예술이라는 수업을 들으면서 내가 정말 많이 무식하단 걸 깨달았는데 수업을 통해서 조금이나마 프랑스에 대해서 알게되고 관심도 가지게 되어서 참 좋은 계기가 되고 있는 것 같다. 프랑스에 대한 다른 다룰 이야기도 많은데 굿이 음식 문화를 선택한 이유는 음식에 대한 나의 관심도 때문이다. 꽤 긴 리포트가 될 것인데 너무 어려운 주제를 선택하게되면 너무 지루하고 힘이 들 것 같아서이다. 그렇다고 프랑스 음식의 애호가는 아니다. 프랑스 전통 요리를 아직 한번도 먹은 적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난 누구보다도 한국 음식을 좋아한다. 그러면서 무슨 외국 요리에 대한 관심이 있냐고 하지만 난 다른 나라들의 요리를 자세히 알면 알수록 우리 나라 음식 맛의 자부심과 함께 우리 나라에 태어난걸 복이라고 생각한다.
개요Street Fashion(스트리트 패션)은 60년대 초반 런던의 일부 젊은 세대들을 주축으로 한 풍속에서 혁신적으로 태어난 패션이다. 젊은이들은 점점 노화되어 가는 영국의 폐쇄성을 풍속으로 포착하고 어른들을 놀라게 하는 상식이외의 복장을 하기 시작했다. 이 나름대로의 이유는 충분했다. 나날이 기울어져 가는 영국에 활력을 쏟아 붓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우리나라에서는 다양하고 혁신적이었던 60년대 청소년 문화가 당시 사회의 가치관과 생활 양식에 영향을 미쳐서, 젊음 지향적인 라이프 스타일을 야기 시켜, 활기찬 시대를 이루면서 또한, 다양하고 특이하게 구분 지워지는 스트리트 패션을 형성시켰다.대표적 청소년 하위 문화가 비트족, 모즈, 민속파, 록커즈, 런던식 사이키델릭파, 히피, 그리저, 스킨헤드 등이었으며, 70년대 초반에 걸쳐 활동하던 히피, 그리저, 스킨헤드 등은 70년대 중엽 이후에 펑크에 그 자리를 내어주게 되었다.60년대의 청소년 문화가 스트리트 패션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비트는 지식인 중심의 하위문화로 의복에 무관심한 듯하게 차려 입으면서, 검정색 일색의 차림을 즐겨하였다. 검정의상에 검정안경이나 베레모는 기성세대에 대한 저항의 표시이기도 했다. 모즈는 깔끔한 외모와 날씬한 스타일로 여성적 분위기를 표현하여 성도착증적 패션이 되기도 하였으나 여성들이 모방하여 유니섹스 스타일이 되기도 했다. 비틀즈의 초창기 모습과 롤링스톤즈의 스타일이다. 민속파는 시골생활을 동경하여 전원의 이미지를 표현한 농부복 스타일, 동양이나 남미의 민속의상 스타일, 집시스타일로 민속풍의 꽃무늬장식, 민속풍적 수공예장식, 천연염료, 천연섬유를 애용하였다. 록커즈는 노동계층의 청소년들이 거친 남성미를 표현하는 가죽재킷, 청재킷, 진바지 등 노동자의 복식을 그대로 입기도 하고, 징을 박거나 뾰족한 나이프같은 도구들이 장식된 옷을 입었다. 모터사이클과 부츠는 필수적이어서 모즈의 깔끔한 사무복장과는 달리 도전적 복장을 하였다. 런던식 사이키델릭파는 활기찬 런던의 모습리저는 록커즈와 비슷한 이미지로 징이 박힌 옷으로 체인, 프린지, 뱃지, 기장 등이 무수히 장식된 가죽재킷으로 거친 노동계층의 남성미를 표현하였다. 주석헬멧이나 가죽모자도 장식하여 착용하였다. 스킨헤드는 말아올린 진바지, 작업용 부츠, 멜빵, 짧게 깍은 머리 등으로 노동자의 공격적이고 격렬한 이미지를 나타냈다. 학교로부터 거부당한 자아개념을 노동으로 회복하려 하였고, 육체노동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표시하는 복장을 하였다.70년대 중엽 이후 크게 자리잡은 펑크에 대해서는 앞으로 자세하게 살펴볼까 한다. 다른 스트리트 패션도 많이 있지만 펑크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려는 이유는 더럽고 혐오스러운 것으로 알려진 펑크를 펑크 족들이 선택한 이유가 궁금해서이다.앞으로 펑크의 의미에서부터 펑크의 역사, 펑크가 상징하는 것들과 복식 뿐 아니라 헤어, 메이크업, 악세사리, 패션에 끼친 영향까지 펑크에 대해 상세히 알아보고, 또한 2001년도에 우리 나라에서 펑크 패션이 유행했었는데 그 모습들과 이유에 대해서도 보려고 한다.펑크1. 정의펑크는 반항적이고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는 공격적인 패션을 말한다.펑크(punk)는 속어로 '시시한 사람, 재미없는 것, 불량소년 및 불량소녀, 겁쟁이, 풋내기'라는 의미로 그 말의 뜻이 지닌 뉘앙스와는 달리 과격하고 파괴적인 것이 특징이다.70년대 거리 패션을 풍미했던 펑크스타일은 70년대 중반 영국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펑크 패션이 발생한 것은 미국이지만 이를 정착시킨 것은 런던의 젊은이들이다. 런던의 펑크 패션은 1970년대 중 후반에, 오일쇼크로 일자리를 잃은 노동계층에 의해 주도되어 권위체제에 대한 저항으로 나타났다.머리를 핑크나 그린으로 염색하고 기분 나쁜 메이크업을 한다. 개의 목끈, 안전핀, 면도기를 액세서리로 하며 고무나 플라스틱제 팬츠, 마이크로 미니스커트, 플라스틱과 네트 셔츠, 저속한 메시지가 프린트된 티셔츠 등을 착용한다. 극히 일부 젊은이들에 한정된 펑크 패션은 점차 일반 패션에 영향을 주어 안전핀이나 면도칼의 액세서리가반항하는 구체적인 의지의 표현으로서 반 문화, 안티 패션을 등장시킨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70년대 후반에 등장한 펑크 패션은 표현하려는 것의 태도를 포함한 인간정신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또한 펑크는 하이패션에 새로운 감각으로 신선함을 던져주었고 현대패션의 흐름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2. 펑크 특징⊙ 과격함이 없는 펑크는 펑크가 아니다.일자리를 잃은 젊은이들이 기성 사회에 대한 불만은 파괴를 통해 폭발했고 그 표적은 짖꿎게도 패션에 표출된 것이다. hippy가 전원적이고 목가적인 옷차림을 즐겼던데 비해 펑크는 도전적이고 공격적인 옷차림을 시도했다. 성난 사자의 갈기모양, 하늘을 향해 곤두세운 헤어스타일등...⊙ 불량끼가 없는 펑크는 펑크가 아니다.세계최고의 전통과 권위를 자랑하는 영국, 그 권위가 오히려 젊은이들의 반항심을 극단적으로 표현하게 하는 촉매제가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파괴가 없는 펑크는 펑크가 아니다.- 구조에 대한 부정 실험실속의 돌연변이처럼 소매, 칼라, 몸판이라는 구별조차 애매한 그 런 타입의 옷도 펑크의 이름 아래에서는 시민권을 주장한다.- 고정관념에 대한 부정 펑크는 우리가 갖고 있는 고정관념을 조롱한다. 펑크의 이름 아래에서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웨어링에 대한 부정 스커트 차림에 군화를 신 듯이 옷 입는 방식을 얌전하게 따를리 없다.⊙ Extravaranza '유별난'이란 뜻으로 엉뚱하고 유별난 스타일의 대명사이다. 일상적이고 평 범한 스타일과 전혀 다른 전위적인 스타일로써 어떻게 해서든 별난 모습으로 보이게 하려는 패션으로 파괴적인 메시지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펑크패션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도발에서 시작해 도발로 끝나는 Punk sexy펑크는 도발이다 특히 펑크로 표현되는 색시의 경우는 더욱 더 그렇다. 옷입는 방식을 깡그리 무시하고 소재의 상식을 뒤엎으며 멀쩡한 옷을 찢어서 걸레를 만드는 펑크 섹시는 온통 도발뿐이다.3. 펑크의 상징펑크는 그 자신들의 소속감을 위해 펑크를 상징하는 문자나 기호를 곳곳에 표시함으전위 패션의 요소로서 패션에 가능성을 부여하고 있으며, 새로운 미와 매력을 창조하려는 인간의 근원적인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펑크가 패션에 미친 영향은 크게 기존의 미의 개념에의 도전, 장식의 개성화, 그 리고 펑크 감각의 전환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미의 개념에의 도전으로써 패션에 도입된 펑크 감각은 단정하지 못한 복잡 미묘함 속에서 새로운 미와 매력을 창조하려는 의지로써 나타난다. 그것은,⊙ 펑크 감각에 전통 문화를 도입함에 따른 뉴 펑크감각의 구축⊙ 아방가르드한 스트리트 패션의 출현에 아이디어의 근원으로써의 역할⊙ 창작법이 착용자에 의해 응용되어짐에 따르는 기존 패션룰의 파괴⊙ 소프트한 감각의 소재에 펑크의 거친 감각을 삽입시킴에 따른 새로운 소재의 콤비네이션⊙ 새로운 감각의 메이크 업, 헤어스타일에 따른 미적 이미지의변화 등으로 표현되고 있다.장식의 개성화로써 펑크감각은 강한 감각성을 추구하는 현대패션에 중요한 요소로 나타나고 있다.⊙ 장식용 지퍼의 출현⊙ 견장사용의 급증⊙ 고급스러운 소재와 현대적 감각의 절충에 따른 새로운 감각의 악세사리 등펑크감각은 반 지성적이며 반 현실적인 괴벽스러움이 점차 현대 예술 경향에 맞추어 세련된 환타지로 나타나고 있다.⊙ 포스트 모던 감각과 합류함에 따른 본래 펑크적 히스테리를 유모어로서 대체⊙ 주변의 생활 용품을 활용하는 감각의 부여⊙ 펑크적 소재를 도입해 아이디어 확대에 따른 감각의 승화 등으로 나타난다.4. 헤어 스타일모히칸족 헤어스타일이 대표적이다.스파이크 헤어머리를 분홍색, 오렌지색, 초록색의 형광 물감으로 물들여 그들의 가장 순수한 생명력의 상징으로 혹은 커다란 가능성의 상징으로 쓰였다.5. 메이크업눈 언저리를 멍든 모습으로 그러 거나 눈 주위에 검은 웅덩이 모양으로 선을 두르 고 눈 꼬리는 날카로운 방추형으로 그리는 드라큘라형 화장을 하였다. 검은색 얼굴에 검은색으로 점이나 문양을 그려 넣거나 까만 입술 색을 칠하는 것으로 외관상 문명 파괴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6. 악세사리남자의 경우 자물쇠 너덜 너덜하게 찢기도 하여 파괴적으로 무질서하며 인간의 정서가 없어 보이는 기괴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지퍼를 될수 있는 한 많이 달고, 가는 가죽끈, 체인, 멜빵들을 수평으로 늘어지게 함. 장식용 금속징이나 여러가지 뺏지들, 혹은 작은 팬던트를 무질서하게 달고 있다. 하의에는 주로 검은색의 판타롱을 입는데 그 옷은 뒷족이 쳐져있다.8. 패션에의 영향⊙ 기존의 미의 개념에의 도전⊙ 장식의 개성화⊙ 펑크감각의 전환펑크 감각에 전통 문화를 도입함에 따른 뉴 펑크감각의 구축, 아방가르드한 스트 리트 패션의 출현에 아이디어의 근원으로서의 역할, 창작법이 착용자에 의해 응용되 어지게 함에 따른 기존 패션 룰의 파괴, 소프트한 감각의 소재에 펑크의 rough한 감각을 투입시킴에 따른 새로운 소재의 콤비네이션, 포스트 모던 감각과 합세함에 따 라 본래의 펑크적 히스테리를 유모어로 대체, 장식용 지퍼의 출현, 견장 사용의 급증 등으로 나타난다.9. 펑크 패션의 종류1970년대에 시작해서, 1980년대 패션을 대표하는 펑크룩이 지난 2001년도에 많은 디자이너들에 의해서 재현되었는데 현대에 와서 어떻게 연출되고 또 이러한 패션이 나타나게 eh된 배경에 대해서 조사해 보았습니다.⊙ 꾸뛰르 펑크스터드(금속 징), 지퍼, 가죽 벨트 등을 기본으로 하는 펑크룩을 피트한(몸에 꼭 맞는) 스타일로 고급스럽고, 정돈되게 표현했다.⊙ 엘레강스 펑크좀 더 심플하고, 우아하게 표현한 블랙 & 화이트의 펑키룩이다.여성스러운 원피스에 펑크룩의 기본인 가죽점퍼를 화이트로 매치 시키거나,(왼쪽) 심플하게 정장 스타일을 표현한다거나,(가운데) 좀 더 여성스럽고 캐주얼하게 부드러운 니트 소재로 한쪽 어깨를 섹시하게 드러내고, 레깅스 스타일의 팬츠를 입고,(오른쪽) 바이커 장갑이나, 선글라스, 벨트와 부츠나 핀힐 등.액세서리로 이미지를 강조하고 있다.⊙로맨틱 펑크좀 더 여성스럽고, 로맨틱하게 표현한 펑키 룩이다.80년대 가수인 신디 로퍼를 연상케 한다. 퍼프(부풀린) 소매나 러플 등, 주름진 디테일을 기컬렉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