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일 아침 첫 차로 영주를 떠나 암사동 선사주거지로 향했다. 떠날 임시에 무거운 눈꺼풀을 이기지 못해 가벼이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잠시 잠을 청하였다. 수 시간 흘렀을까? 창살 속으로 비치는 햇살에 펼쳐진 들판들, 곳곳에 오른 산봉우리, 내내 따라오는 햇살의 눈부심에 도무지 눈을 감을 수 없다.어젯밤에 나의 옷자락을 잡고 애태우던 영주의 손자락은 언제나 마냥 나를 기다림이라. 지금 떠나 언제 돌아올지 모를 이별 없는 이 작별 앞에 쨍쨍한 햇살의 반어를 쓰고 있음은 나를 더 가슴 아프게 한다.언제 출발하였는지 모르게 기차는 나를 청량리역 까지 실어다 주어다 주고, 역에서 다시 수번에 지하철 정거장을 지나고 암사동의 발길을 재촉하였다. 발걸음을 할수록 서울의 더위는 초심을 잃어버리게 하고 있었다. 맑은 햇살이 이젠 원망의 덩어리가 되어 버리고 괜한 아이스크림 한 덩어리에 조금이나마 더위를 씻어 버린다. 다시 한 번 버스에 올라타 가깝지 않은 길을 성큼성큼 넘어서 암사동 선사 주거지에 다다랐다. 서울 시내에서는 찾아보기 힘들 푸르른 녹음이 하늘을 수놓고 길게 뻗은 검은 아스팔트 도로마저 녹음에 고개를 숙여 넓지 않은 고요한 혁명에 나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정겨운 풍경이었다. 게다가 고인돌 모양의 입구는 꽤나 내 눈을 끌게 만들었다.신석기 시대의 유적에 고인돌이라 어울리지 않은 조형물임에 불구하고, 이 고인돌을 만들 당시의 그 신선함은 아직까지 서려있는 듯 하다. 어림잡아 높이 약 5m 가량에 너비는 10m에서15m 정도로 덮개돌 위에는 비둘기 때가 숨죽여 있고, 받침돌 사이로 나 이외의 이 암사를 구경하고자 하는 인파로 북적 거렸다. 나에게는 신석기 유적에 고인돌이라는 것이 조금 아쉽게만 느껴질 따름이었다.고인돌 아래를 지나서고 조금 후 발걸음이 다은 곳은 움집들이었다. 수개의 복원된 그 속에서 과연 신석기인들의 생활에 대해 궁금증이 생기기 시작했다. 일렬로 줄을 선 움집들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현대인의 신장에 맞추어 원형의 1.5배의 크기로 제작하여 한결 보기는 수월 하였지만, 실제의 모습에 대한 아쉬움은 오래도록 남았다. 원뿔의 움집이 곳곳마다 하늘을 향해 소리칠 때, 신석기인들의 자연물 숭배 사상에 대한 모습을 잠깐이나마 엿 볼 수 있었다. 마치 중세 고딕 양식처럼 하늘과 가까워지려는 신석기인들의 모습은 인간들의 미래에 대한 본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듯 하였다. 실제로 보는 움집의 모습에서 이제껏 모르고 있었던 세상을 한 발 넓혀 간 듯 하였다.짚인지 갈대인지 마른 줄기 사이로 가지런히 놓여 있는 모습을 한껏 바라보았다. 원형에서 모를 죽인 네모꼴의 모양은 왜 인가? 하는 의문을 품게 하였다. 고대인들도 원형이 가장 완벽하다는 것을 일찍이 깨달았는 듯 하다. 오랫동안 기나긴 시간이 흐른 뒤에 정방형 꼴로 변한 모습은 오랜 시간 끝에 공간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자연스레 변한 것이었음이라.이 움집들을 거치어 그 끝에는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움집 하나를 온전히 열어 놓았다. 이 움집은 밖에서만 보던 곳의 내부의 모습까지 치부를 들추기며 볼 수 있어 상당히 새로운 느낌이 들었다. 중앙 화덕자리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까치구멍을 통해 빠져나가고 그물추가 천장에 고기와 함께 주렁주렁 열려 있어 신석기인들의 어로 생활에 대해서 한 번 더 생각할 가지게 하였다. 지표에서 약 50에서 100cm가량 파서, 추위와 더위를 이겨내기 위한 신석기 인들의 지혜는 역시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실을 실 감 하게끔 하였다.잠시 암사동 발굴 당시의 이건무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의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자.“서울 시민들이 머리를 식히기 위해 즐겨 찾는 강동구 암사동 유적공원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신석기시대 마을 유적을 복원해 놓은 곳이다. BC 5,000년에서 BC 3,000년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유적은 1925년 을축(乙丑)년 대홍수 때 빗살무늬토기 조각들이 발견되어 알려졌다. 조그만 토기 조각들이 수천 년의 역사를 읽어내게 한 것이다. 유적이 제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은 1970년대 초반 국립중앙박물관이 발굴을 시작하면서부터다. 발굴 조사에서는 먼저 층위와 집 자리 윤곽을 찾는 작업부터 했는데 이것이 무척 힘들었다. 햇볕이 내려 쪼이면 모래땅 전체가 하얗게 되어 도대체 윤곽을 찾을 수 없었다. 지게로 물을 길어다 뿌려가면서 땅 표면을 긁어 윤곽을 찾아 얼른 표시를 한 뒤 내부를 조사하였다. 발굴단원들 각자 집 자리를 하나씩 맡아 땅을 파 내려가면서 조사하였는데 거의 매일 새로운 유물과 유구(遺構ㆍ옛 구조물)를 대하게 되었다. 특히 탄화한 도토리나 새로운 문양의 토기, 그리고 벽체, 화덕과 같은 가옥의 구조를 찾았을 때는 모두 환호했다. 지금은 유적이 아파트 숲과 강변도로에 둘러싸여 있지만 30년 전 발굴 당시만 해도 암사동은 농사짓고 닭 돼지 등을 키우던 한적한 변두리 지역이었다. 그런데 행정구역상 서울이어서 출장비가 나오지 않았다. 출퇴근하기엔 시간도 부족해 돼지우리와 이웃한 조그만 방을 하나 빌려 단원 5~6명이 함께 자면서 조사했다. 심한 악취를 견디며 좁은 방에서 겹쳐 자다시피 하느라 고생이 많았다. 하지만 워낙 좋은 유적이라 발굴 작업이 즐거웠기 때문에 발굴 기간 중 시내에 있는 집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발굴 내용을 기록하는 ‘야장(野帳)’은 조사자에게 더없이 소중한 물건이다. 3차 발굴 때로 기억하는데 뒷간에 갔다가 호주머니 속에 넣어둔 야장을 그만 빠뜨리고 말았다. 그냥 버릴 수가 없어 바닥에 엎드려 천신만고 끝에 건져냈다. 그것이 돈뭉치였다 해도 그랬을까 싶다. 야장을 다시 옮겨 적는데 무척 애를 먹은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마지막 4차 발굴 때는 시국이 꽤나 어지러웠다. 전국적으로 운동권 학생들에 대한 수배령이 내려졌는데 이 파장이 발굴 현장에까지 미칠 줄은 아무도 몰랐다. 필자의 대학교 과 후배 Y씨가 학생운동의 거물로 수배 중이었는데 공교롭게 발굴단원인 한영희씨(작고)와도 고교ㆍ대학교 동기동창이었다. 경찰은 Y씨가 발굴 현장에 은신했을 것으로 보고 현장을 덮쳤다. 실랑이 끝에 한씨가 경찰서에 끌려가 밤샘조사를 받고서야 풀려나왔다. 4차례 발굴조사로 남한지역 최초의 신석기시대 마을 유적이 확인됐고 당시 생활상이 보다 확연하게 드러났다. 또 각 집 자리에서 출토된 목탄으로 여러 개의 방사성탄소 연대 측정치를 얻어 중서부 빗살무늬토기 문화의 시간적 틀을 구축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기도 했다. 요즘도 시간이 나면 암사동 유적 공원을 찾아가곤 한다. 30년이라는 세월을 순식간에 거슬러 올라, 몸은 힘들었지만 더없이 행복했던 발굴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위 글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 발굴 현장에서 이 암사 유적을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을 실감할 수 있다. 도대체 조그만 토기 조각하나에 왜 수 많은 사람들이 감격하고 눈물을 흘리는지 나로서는 예전에는 몰랐지만 이제야 비로소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 암사 유적에 좀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서울특별시 강동구 암사동(江東區 岩寺洞)은 한강가 아차산성을 강 건너로 바라보는 왼쪽 대지위에 자리한다. 유적이 처음 알려진 것은 1925년에 내린 큰 비로 한강이 넘쳐 유적이 잘려나가, 토기, 석기 등 유물이 많이 나타나게 되면서 부터이다.
1. 서론정치는 오늘날 대체로 선거나 의회를 중심으로 한 정당 활동을 가리키는 말로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정치에 대한 그러한 파악은 이른바 '제도정치권의 정치'만을 정치로서 간주하는 정치에 대한 매우 협소한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는 달리 정치를 보다 넓은 의미에서 파악한다면, 정치는 사회의 권력관계를 유지, 변화시키려는 인간들 간의 투쟁인 '권력투쟁'을 매개로 하여 인간들이 맺고 있는 사회적 관계를 유지, 재생산시키거나 변화, 혁신시키는 인간의 사회적 실천 일반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사용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고대사회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사회 정치 구성의 원리와 핵심 그리고 세계관등을 파악하여 오늘날의 정치 현안에 대해 대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특징적인 예로 삼균주의를 들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우리의 민족은 이데올로기의 혼돈의 상태에 접어들어 있었다. 반만년의 민족의 영토와 정신을 되찾기 위한 독립운동이 활발히 벌어지는 가운데 이를 이끌어갈 사회 정치의 구심적 핵심을 찾아야겠다는 자각으로부터 만들어진 삼균주의는 민족독립과 임시정부의 정치이념으로 채택 수용되면서, 독립운동이 목표로 한 민족국가건설 방안으로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각 시대의 시대적 상황에 맞게 사회정치 구성의 원리와 핵심도 변화한 것이다. 그렇다면 시대적 변천사항을 알아보도록 하자.2. 본론2.1. 고조선고조선으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신분사회는 혈연중심에서 능력을 중시하는 사회로 변모하였다. 고조선은 씨족제적 유제가 강인하게 잔존한 읍락공동체들을 계층적으로 편성한 바탕위에 지배와 예속 관계를 설정하였다. 기원전 4∼3세기에는 일정한 정도로 철기가 보급되어 있었다는 것과 또한 이에 따른 생산력의 발전에 상응하여 노예제적 국가가 상당한 정도로 발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관제는 그 당시 사회의 상부구조이기 때문에 관제를 해명하는 것은 사회의 사회경제 구성을 하는 주요한 방법의 하나이다. ‘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위만조선에는 조선상, 대신, 이계상, 장군,책이었다. 상 직위에는 상 한음, 조선상 노인, 이계상 참 등 여러 명이 있었다. 그런데 그 명칭을 자세히 보면 조선상, 이계상등 지역명칭이 첨가된 상과 그렇지 않은 상 한음과 노인의 명칭이 보인다. 이것은 조정과 지방의 상의 명칭이 다르다는 것을 말해준다. 위만조선에는 상외에 대신이 있었다. 이 대신이라는 말은 '큰 관리' 라는 뜻을 가진 것으로 상과동등하거나 상 밑에 위치한 고급관리로 인정된다. 이 외에 상설직의 관료로 상비군의 지휘자인 장군의 존재가 보인다. 왜냐하면 고대국가의 관직 중에서는 군사관련 관직이 가장먼저 분화하는 것이 보편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고조선의 지배체제는 왕을 중심으로 하여 중앙의 경상인 상, 대신직과 지방의 장관격인 이계상 등을 두고, 한편으로 무장 세력인 장군직을 두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때 중앙과 지방 모두를 상이라 하여 그 사이에 명칭상의 구별을 두지 아니한 것은 고조선 관제의 특성으로 볼 수 있다. 이렇듯 고조선의 사회는 완전한 중앙 집권적인 고대국가라고 말하기 보다는 초기 부족사회를 갓 벗어난 부족 연맹체의 전신으로 볼 수 있다. 이 시대는 특정한 정치 이데올로기의 성립이 사회를 이끌어 나간 것이 아니라, 천신강림, 난생 등 신화적 요소와 자연과 동물의 숭배사상이 사회저변을 이끌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샤머니즘, 토테미즘과 같은 무속신앙 왕의 정치적 권력과 맞물려 ‘단군 왕검’ 이라는 새로운 제정일치적 사회 구성의 원리를 이룩하였다.2.2. 삼국시대고조선에서 삼국시대로 넘어오는데 있어서 가장 큰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음은 무속신앙에서 새로운 종교 불교의 도입을 들 수 있다. 이를 무불교대라고 하는데 이는 취약한 이전의 왕권을 새로운 종교의 수용으로 중앙집권국가의 기틀을 만드는데 있다 할 수 있다. 고조선과 부여사회의 구조는 우리나라 고대사회에서 원형적 의미를 지니며, 시공적으로 지속, 확산하여 삼국시기로 이어진데 역사적 의미가 있다. 국가형성 이후 고대국가의 발전은 크게 두 방향에서 이루어졌다. 그 하나는 다. 이들은 모두 고구려의 발전과정에서 왕실의 분화와 교체, 그리고 왕비족의 등장에 따른 모태사회의 분화로 인해 파생한 귀족세력이었다. 이 같은 현상은 백제와 신라에서도 살필 수 있다. 삼국의 귀족세력은 전쟁을 통해 자신의 경제기반을 확대, 재생산하고 있었다. 귀족세력은 분급받은 전쟁포로의 사역을 통해 전장과 식읍을 경영하는 대토지와 노예소유자였던 셈이다. 귀족세력의 토지지배방법은 인간노동력의 수취에 목적을 둔 다분히 고대적인 성격의 것으로 그들의 정치활동을 담보하는 경제기반이기도 했다. 삼국은 형성기에 복속된 소국에 대해 자치를 인정하는 대신에 경제적 공납과 군사적 동원의 의무를 부과하였다. 이와 같은 간접적인 지배방법은 직접 지배를 관철시킬 수 없는 국가적 역량의 한계에서 기인하는 것으로서 아직 지배체제를 질적으로 전환시킬 만한 수준에는 도달하지 못하였음을 의미한다.2.3. 통일신라당의 침략의지를 분쇄하는 과정에서 신라는 일종 민족융합정책을 착실히 다져 나갔다. 이는 종래 서로의 영역을 다투는 삼국시대의 그것과는 다른 것으로서 우리 민족에 있어서 새로운 변화였다. 사실 한민족이라는 의식이 신라의 삼국통일, 그리고 당나라와의 항쟁으로부터 상정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연유에서라고 할 것이다. 예를들어 무열왕은 백제를 멸한 660년에 백제의 관리들을 신라의 관직에 임용하였다. 또한 문무왕은 661년에 신라가 우술성을 공격하였을 때 무리를 이끌고 항복해온 조복에게 급찬의 관등을 내려 고타야군의 태수에 임명하고 파가에게도 급찬의 관등과 전택, 의물을 내리는 등 자못 백제의 인재를 신라의 정치체제에 수용하려 하였다. 백제인에 대한 융화정책은 고구려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신라는 당나라와의 전쟁을 벌이는 가운데 오히려 적극적으로 고구려 부흥군을 원조하거나 함께 힘을 합해 당나라 군대와 싸우는 한편으로, 신라에 합류하는 고구려 유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 하였다. 이처럼 백제, 고구려유민을 융화시키고자 하는 노력은 신라가 고구려유민과 합세하여 당나라와 싸우는 과정에 신앙적으로 신분을 뛰어넘게 하는 사상체계로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곧 7세기 이후의 보살사상에 입각한 보살계와 불성론, 아미타신앙 등은 종래의 업설 등과는 사유체계를 달리하는 것이었으며, 특히 불상의 조성 등과 같은 공덕을 쌓지 않고도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염불만으로도 윤회하지 않고 극락에 왕생할 수 있다는 아미타신앙은 일반민들에게 폭넓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불교사상의 유포는 통일 직후 민심을 수습하려는 국가의 의지와도 짝하는 것이었고, 사실 이러한 국가적 노력들이 있어 왔다. 당을 축출하고 새로이 정복한 지역의 민심을 아우르는 한편 신라는 신문왕 원년(681) 김흠돌의 난을 평정하고 귀족들에 대한 일대 숙청을 단행하였다. 이는 전제적 성격의 강력한 왕권의 확립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중고기의 통치방식 곧 귀족중심의 합의제적 정국운영 방식을 고수한 김흠돌 등의 세력에 대하여 중대의 왕권이 삼국통일 이후에 일어난 각종 사회적 변동을 수용하기 위해 이들 세력을 배제하고 새로운 시대에 걸 맞는 변혁을 모색하기 위한 조처였다고 생각된다. 신문왕대에 취해진 개혁 정치의 일단은 이러한 의미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곧 신문왕 원년(681) 시위부를 확대 개편하여 6명의 장군을 새로이 설치한 것이나 신라의 중앙 핵심군단으로 9서당을 점차적으로 정비한 것 등은 김흠돌의 난을 평정한 바탕위에서 가능했던 것으로서, 종래의 진골 귀족의 귀족적 전통을 부인하는 것이었다. 신문왕은 군사조직을 왕권 직속으로 만드는 한편,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국학을 정비하고 이들을 관료로 선발하는 관사로서 위화부를 설치하였으며, 저들에게 문무 관료전을 지급하고 다시 귀족들의 경제적 바탕이라 할 수 있는 녹읍(祿邑)을 혁파하였다. 관료의 양성과 선발제도의 정비 및 일단의 토지개혁은, 귀족들의 특권을 아우르고 학문적 소양에 바탕을 둔 새로운 관료군을 양성함으로써 왕권의 지지기반을 보다 확충시키고자 한 때문이었다. 한편 신문왕은 지방제도에 있어서도 개혁을 단행하였다. 곧 신문왕은 차별화 하였다. 여기에는 지방에서 성장하여 독자적 경제력과 무력을 가진 호족세력의 광범한 지원이 있었고, 유학과 선종불교, 도참사상 등 새로운 사상체계로 무장한 지식인 계층의 협조가 있었다. 고려는 이러한 새로운 인재를 세력기반으로 국가를 건설하고 이들을 고려의 지배층으로 수용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진골과 왕경에만 국한하던 혈족중심의 폐쇄적 사회구조에서 보다 넓은 지역과 인물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개방사회로 진전되는 길을 열었으며, 새로이 지배층으로 부상할 수 있는 유자격자가 전국적으로 광범하게 확대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처럼 중앙관계로의 진출이 허용되는 범위를 지방사회까지 확대하게 되면서 이에 알맞는 여러 가지 제도들이 만들어졌고, 다수의 관계진출 희망자를 공정한 경쟁으로 유도하는 장치로서 과거제도가 마련되었다. 고려의 국가 건설과정에서 보여준 이 같은 개방성은 고려 건국공신의 숫자만으로도 확인된다. 고려 태조의 건국공신이 2000명을 상회하였다는 기록은 광범한 지지 세력의 규합이 건국 과정에서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고려 중엽인 12세기에 이르면, 새로운 사회변동의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등 정치세력간의 갈등, 농민들의 유리현상 등이 당시 급박한 사회문제로 되고 있었다. 그 같은 상황 속에서 무인정변이 일어나 문반 대신 무반이 정치전반을 좌우하였다. 그러나 무인정권이 장기화되자 점차 문반관료가 무인정권하에서 성장하였으며, 왕정복고 이후에는 문반 중심의 정치체제로 복귀하였다. 그 과정에서 과거를 통하여 성장한 지방 향리층이 새로운 관료층을 형성하여 갔으며, 고려 전기의 문무반에 대한 차별적 관행은 거의 사라져, 문반과 무반이 함께 국정에 참여하는 명실상부한 양반체제로 나아가는 길을 열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려에서 추진한 개방성의 정도는 한국사의 발전과정에서 볼 때 상당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고려 건국 단계에서 열려진 정치참여의 기회는 왕권이 안정되고 중앙집권이 강화됨에 따라 점차 그 폭이 줄어들었다. 고려 왕실은 왕
Ⅰ. 서론···················································2ⅰ.전쟁이란 무엇인가?·······························2ⅱ.문화로서의 전쟁····································2ⅲ.전쟁발발의 한계····································3Ⅱ. 본론···················································4ⅰ.인간은 무엇 때문에 싸우는가?················4ⅱ.21세기 신전쟁 테러!······························4ⅲ.9?11 테러의 역사적 고찰·························5ⅳ.향후 또 다른 전쟁의 변화와 또다른 전쟁···6Ⅲ. 결론·····················································6참고문헌····················································7Ⅰ. 서론ⅰ. 전쟁이란 무엇인가?“전쟁은 다른 여러 수단들을 혼합하는 정치적 교섭의 연장이다.”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다. 전쟁이 만약 이 명제에 따라 정치적 수단으로서의 역할만을 해왔다면 세계의 전쟁사는 과연 어떻게 변화하였을까? 클라우제비츠의 생각은 국가와 국익 그리고 이 두 가지를 어떻게 달성할 것인가에 대한 합리적인 계산을 전제로 한 것 이었다. 전쟁은 인류의 기원만큼이나 오래되었으며 인간 심성의 가장 비밀스러운 자리에서부터 비롯된다. 그곳은 자아가 이성적인 목적의식을 잊어버리고, 자존심이 모든 것을 지배하며 감정이 우선하고, 본능이 절대자 노릇을 하는 자리이다. 하지만 클라우제비츠가 표현한 “정치의 연장으로서의 전쟁”은 서양 문화에 있어서 타협점을 표현하기 위해 선택한 하나의 개념일 뿐이다. 그의 국가론은 이 타협위에 존재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전쟁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클라우제비츠 스스로의 대답은, 문 뭐라 말할 수 없다. 처음 인류학자들이 도착했을 때 남아 있던 토착병적인 전쟁의 생존자들조차도 점차 줄어들고 있던 쇠퇴기의 모습으로써는 그들의 문화가 경험했을 진화에 대한 정확한 분석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만은 분명히 단언할 수 있다.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방식은 결코 폴리네시아의 문화적 목적에 이바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떤 서구 언어들의 의미에서도 자유적이고 민주적이고 역동적이고 창조적이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화는 태평양 섬 생활의 환경에 가장 완벽하게 어울리는 방식으로 지역적 수단을 일정한 목적에 적응시켰다.이스터 섬 사람들은 외부세계와는 단절된 가운데, 전면전을 통해서 스스로 고안한 치명적인 실험을 했다. 하지만, 줄루족은 자신들의 유목 생활에 필요한 초지의 확보를 위한 싸움에 의의를 두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전쟁이란 개념은 성립하지 않는 순수한 민족이었으나 샤카라는 완벽한 클라우제비츠주의자 덕분에 특정 생활방식을 유지하고 보호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으로써 군사제도를 창안하고 또한 그것은 놀라운 효율성을 발휘했다. 전사의 가치를 가장 우위에 두고 그러한 가치를 유목경제 보전에 연결시킴으로써, 또한 가장 강력한 구성원들의 힘과 상상력을 그들의 기력이 다할 때까지 불모의 군사적 속박 속에 가두어둠으로써, 줄루 문화는 주변 세계에 적응하고 진보할 기회를 스스로 거부한 것이다. 한마디로 줄루 국가의 흥망은 클라우제비츠의 분석이 지닌 중대한 결함에 대한 무서운 경고이다.구속은, 강한 형태이건 약한 형태이건, 군복무의 공통적인 조건이다. 줄루족의 경우는 구속이 거의 극에 달했다. 과거의 군인은 구속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거의 노예나 다름없었다. 근대세계에서 노예는 개인적 자유의 완전한 박탈을 의미한다. 한편 무기의 소지나 사용권은 개인적 자유를 의미한다. 우리는 어떻게 한 인간이 무기를 소지하면서 동시에 자유를 박탈당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중세 무슬림 세계에서는 노예와 병사의 신분 사이에 아무런 갈등도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무라이들은 이 무기의 위협으로부터 자신들의 지위를 지켜내기 위해 방법을 고안했다. 그리하여 그 후로 약 250여 년간 그들의 권력을 누릴 수 있었다. 칼을 숭배하는 데에 내적 충실과 육체적 고난에 대한 무심의 경지를 강조하는 선종의 무예숭배 사상과 삶과 예술에 나타난 형식적인 것과 의식적인 것과 우아한 것에 대해서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는 문화로 행동과 태도 규칙에 의해 지배되며 화약무기의 냄새나는 기술이기보다는 예술의 힘과도 같은 힘이 그들의 사회를 지속시키려고 한 것이다.ⅲ. 전쟁발발의 한계전쟁에 대한 “영구적”이고 “일시적인” 요소들의 작용의 저변에 깔린 원인들은 너무나 복잡한 것처럼 보인다. 전사로서의 인간은 무한한 자유의지의 발휘하는 행위자가 아니다. 비록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인간은 관습과 물질적인 신중함이 인간행동에 부여해왔던 한계들을 보통은 무너뜨릴 수 있었지만, 전쟁에는 언제나 한계가 있었다. 그것은 인간이 그렇게 하려고 선택했기 때문이다. 리어 왕은 그의 원수들에게 욕설을 퍼부으면서, “아직은 나 자신도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반드시 온 세상이 두려움에 떨게 될 그런 일을 하겠노라”고 협박했다. 그러나 어려운 상황에 처한 다른 권력자들은 세상의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는 사실을 발견해왔다. 자금은 부족하고, 날씨는 나빠지고, 계절은 바뀌고, 친구들과 동맹국들은 등을 돌리고, 인간의 본성은 투쟁이 요구하는 힘든 고난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전쟁의 가장 큰 한계점은 인류의 절반이 여성이라는 점이다. 여성은 남성과 복잡한 화학적 상호 작용을 통하여, 남성 추종자들로부터 희생정신을 불러일으키고,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남자들을 찾으며, 어떤 경우로도 전쟁의 직접 참여를 벌이지 않는다. 여자들은 서로 전쟁을 벌이는 법이 거의 없으며, 어떤 군사적인 의미로도 남자와 전쟁을 벌인 적은 결코 없다. 만약 전쟁이 인류만큼이나 보편적이고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이제 전쟁이 전적으로 남성만의 행위라 것은 동물적 본능인 사랑의 쟁취를 위해 싸움을 시작하여 확대 해석한 것이 나는 전쟁의 한 원인으로 본다. 무엇 하나 인간 싸움의 근원은 제대로 설명할 수 없지만, 단 하나 밝힐 수 있는 것은 전쟁의 역사는 인류의 시작과 함께 계속되어서 인류가 망하기 까지 존속 할 것이라는 것이다.ⅱ. 21세기 신 전쟁 테러!테러리즘은 주권국가 혹은 특정 단체가 정치, 사회, 종교, 민족주의적인 목표달성을 위해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폭력의 사용 혹은 폭력의 사용에 대한 협박으로 광범위한 공포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특정 개인, 단체, 공동체 사회, 그리고 정부의 인식변화와 정책의 변화를 유도하는 상징적, 심리적 폭력행위의 총칭이다. 사전에서 말하고 있는 이 테러리즘이란 용어는 작은 의미에서는 클라우제비츠의 정치적 교섭의 연장의 한 선상에 있는 듯 하다. 하지만 정작 말하고자 하는 것은 현대에서 제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 후, 대규모의 전쟁의 발발은 줄어들고 있기에 테러라는 신 개념의 전쟁의 등장을 살펴보고 싶은 것이다. 테러리즘 정의상의 문제점을 분석하면서 제시한 학자들의 정의를 살펴보면 공통적인 요소들이 있다. 그것은 폭력 혹은 폭력사용에 대한 위협, 정치적 동기, 조직적인 사전준비, 무차별적인 공격양상 등이다. 그러나 점차 증가하고 있는 새로운 유형의 측면은 아무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테러리즘의 양태 자체가 시대에 따라 변화하기 때문에 소홀하기 쉬운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테러리즘의 정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지적되어 왔으며, 단순한 범죄와 구별 짓는 기준이 되어왔던 것은 정치적 목적의 유무였다. 그러나 최근에 발생하는 테러리즘은 보다 다양한 목적 하에 자행되고 있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는 테러리즘을 민족해방운동의 수단으로 효과적으로 이용했으며, 북아일랜드의 소수파 카톨릭교도가 주축을 이루고 있는 IRA는 표면상으로는 영토적 독립이지만 실제적으로는 다수파인 기독교 세력과의 종교적 분쟁수단으로 테러리즘을 이용하는 측면이 매우 강하다. 이스라 테러 앞에 무너지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미국의 주장은 자유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명목, 오사 마 빈 라덴 이라는 반 자유주의의 수장을 처단한다는 명목 아래 아프가니스탄의 공격을 감행한다. 그들의 이 같은 조치는 무엇에 의해 자행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과연 미국은 9?11 테러의 피해자인가? 미국의 속셈은 모르겠지만, 어찌됐던 겉으로나마 평화와 인권을 부르짖던 알량한 허울마저 벗어던지고 이젠 ‘전쟁’이란 단어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아프가니스탄의 보복 공격을 합리화 시킨다. 부시 행정부의 고위 관료들은 틈만 나면 전 세계를 향해 위협적 말투를 삼가지 않고 내뱉는다. 미국은 국제 법을 초월한지 이미 오래고, 그들 자신의 말과 행동이 오직 국제 사회에서 통용될 뿐이란 것을 강조한다. 부시 행정부의 으름장 앞에서 세계는 눈칫밥을 먹으며 두려움에 떨고 있다. 특히 아프가니스탄과의 전쟁에서 입증된 미국의 가공할 파괴력을 목도한 이후 세계는 미국 앞에 조용해지고 있다. 미국의 이러한 태도에는 석연치 않은 대목들이 많이 있다. 앞뒤가 너무 잘 들어맞는 알리바이에 대한 본능적인 의심에서일까? 9?11 테러로 정당성을 삼고 그로써 모든 것을 설명하는 미국의 태도를 지켜보자면 마치 미국이 9.11 테러를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너무나도 완벽하게 이용해 먹는 미국의 모습이 어딘지 미심쩍은 탓이다. 과연 미국은 9?11 테러의 희생자인가? 테러가 벌어진지 수개월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그 진상의 명백성은 불투명하다. 부시 정부의 감추기 행각은 이미 들통 나 버렸지만, 더 이상의 해명을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공화당과 백안관의 탄저균 사건 역시도 그들의 당 소속 국회의원들에게는 전혀 피해를 입지 않은 것만 보아도 부시 정부의 치부는 들어난 것인데 말이다. 사건의 원인으로 봤을 때, 이 사건은 미 군수 사업업과 대외 확장 과정에서 생긴 문제이고 미국의 국가들을 대하는 이중적 잣대에 의해 나타난 약소국의 반발이다. 더 나아가 미국의 막강한 힘을 감안하면 사
보 고 서제 목: 이방인과 함께한 24시간의 진화과 목 명:학 과:학 번:이 름:제 출 일:2003년 9월 7일 (일)담당교수:참고 서적: 아버지들의 아버지-Bernard Werger 저우리의 선사문화(Ⅰ),(Ⅱ)-이융조, 우종윤, 길경택, 하문식, 윤용현 저서론························3본론························5결론························5각주························6우리는 누구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며,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더 이상 신의 영역에서 벗어난 생명의 신비, 그 신비의 바다에서 우리가 찾아가야 할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여기 내가 말하고자 하던 바이다. 현생 인류와 그 조상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미싱 링크의 존재는 생명의 진화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열쇠가 된다고 본다. 오랫동안 풀지 못했던 미싱 링크 존재 역시도 어느 누구의 발발도 불러일으키지 않으며, 서서히 이루어져야 한다. 오래 전부터 잠들어 있는 예전의 호기심을 일깨운 후, 그것을 충족시키는 방식으로 말이다. 낯선 타지에 홀로 올라와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서 이루어지는 공존의 방법과 그에 따른 진화의 과정은 오늘 하루 이루어지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풀어나가기로 하겠다. 피카니아의 시작에서 어류, 양서류, 파충류, 포유류를 거쳐 인간에 이르기까지 살아남기 위해 진화된 선택의 구조는 어떤 의미를 부여 할 수 있을까? 진화하지 못하고 자연 도태되어 버린 종들의 생존 전략의 선택은 왜 실패 하였을까? 하지만 나는 끝내 발견할 수 없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에 대한 답을 나는 알지 못한다.새벽 4시에 수면을 포기하면서까지 영화를 보았다. 보기전과 본 후의 느낌이 변치 않아서 다행히 잠을 자지 못하였다는 것에 대한 큰 불만은 없었다. 나름대로 친해졌다고 생각하는 기숙사의 형들과 밤을 지세우면서 약속한 바는 아침 8시에 일어나 같이 밥을 챙겨 먹자는 약속이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형들의 알람시계 몫은 언제나 내가 도맡아 할 수 밖이었다. 나는 새벽 4시에 잠자리에 들면서도 8시에 일어나자는 의식을 끊임없이 심어 주었다. 이윽고 8시는 다가오고 그 의식 덕분에 8시에 별 무리 없이 일어날 수 있었다. 언제나 겪는 일이지만, 깨워주는 데에는 항상 약속의 딜레마에 빠지게 마련이다. 약속에 의해서는 깨우는 것이 마땅하지만 막상 깨우려하면 깨우지 말라고 하며 발버둥을 친다. 형들의 유아기적 퇴보의 행동, 아니 자궁 회귀 본능의 모습을 보면서 어쩔 수 없는 자괴감에 빠지곤 한다. 결국 ㉡natural selection에 의해 나는 홀로 밥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인간의 진화에 있어서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현재 나란 것은 무리를 이루고 있지 않은 한 개인일 뿐이고, 만약 한 명이라도 더 일어나서 둘 이상의 사람이 깨우려 했다면 무리를 따라 모두 일어나 같이 아침 식사를 할 수 있었을 것을 하지만 불행히도 나에게는 아직 사회의 일원이지 못한 개인으로 미약한 존재일 뿐이었다.측은한 마음에 아침 식사로 제공된 두유를 몰래 빼내어 형들에게 주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또 다시 선택의 길에 놓이게 되고 말았다. 그야 말로 바르지 못한 다른 무리들에 의해서 그들의 두유를 모두 챙기면 또 다른 피해자들이 생긴 다는 것이다. 따라서 직접 수고 하지 않은 우리의 형들에게 당연한 결과로 받아들이라 생각하고 두유 절도 행각은 포기하고 말았다. 나의 생존을 위해 남을 잡아먹어야 하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오히려 진화의 순행의 이치에 맞겠지만, 일보 역행은 이보의 전진한 진화의 단계라 생각하고 또 다른 공존의 길을 모색한 것이다.서양 문화사 10시 수업에 늦지 않으려고 자전거를 이용하였다. 강XX형과 함께 자전거를 달리기 시작했다. 겨우겨우 시간에 맞춰 수업에 들어갔건만 교수님의 지각이었다. 그리고 내가 얻은 것은 구석진 맨 뒷 자석. 예상되는 결과였지만, 이런 방법으로선 도저히 앞자리의 획득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강XX형과의 관계에 있어선 새로운 길로서의 미래의 발판을 마련한 셈이기도 하다. 늦었지만 같이 동행을 통해 포기해야만했던 앞자리에 대신 무리의 동질성은 한층 견고해졌기 때문이다. 내심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중의 일원으로서 나의 존재도 이제 자리잡아가고 있는 것이다. 밖에서는 ‘필승 코리아’ 등의 붉은 악마 응원 소리가 들리고 수업은 계속 강행되었다. 불행은 이 수업의 시험이 수요일로 결정나버려 수요일은 시험 3개를 치르게 되는 낭패를 보게 된 일이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내 존재는 빠진 고리를 조금씩 밝혀 가는 과정이기도 하였기에 수요일의 악몽은 숙명으로 받아들이기로 하였다.수업을 마치고 일부러 길고 완만한 경사진 길을 자전거로 마음 것 달렸다. 가까운 거리를 두고 그 내리막길의 기분을 느끼려고 애써 수고를 하였다. 난 벌써 유희를 즐기고 있는 것이었다. 분명 정신적인 진화의 단계가 성립했다는 것이다. 우습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언제부턴가 내리막길은 꽤나 즐거운 것 중의 하나가 되고 말았다. 돌아와 보니 이XX형은 아직 자고 있었다. 나는 조금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나도 우리란 것을 알았기에 우두머리에게 용기를 내어 홀로 잠을 깨웠다. 우두머리는 너그러이 아량을 베풀고 다른 형들과 그리고 나와 함께 점심을 같이 먹었다. 나의 존재도 이젠 없어서는 안돼는 것이었다. 참고기의 ㉢척색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도 생존의 진화된 선택 구조를 발견했음에 분명한 것이다.오후 1시 수업은 현대시의 이해라는 과목, 계단을 오르는데 우리과 소속의 CC를 보았다. 처음에는 그냥 친구인줄로만 알았던 녀석들이었는데, 이제는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나 보다. 나 역시 그 사랑이라는 것을 해보 싶었다. 제 2의 진화를 위한 도약 준비 중인 내 모습이었다. 인간의 원초적 본능 앞에 거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간 한다. 오히려 사랑을 통해 더욱더 사회속의 나로써 확고한 위치가 형성되어 가고 보지 못했던 나의 또 다른 모습을 잃어버린 반쪽이를 통해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벌써 우후 2시 수업이다. 지구와 환경 비디오 시청 시간이다. 이 에세이의 자료를 받는 시간이기도 하지만, 나에게 있어선 나의 나비를 볼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기도 하다. 오늘도 그녀가 와 있었다. 기뻤다. 인류의 진화에 있어서 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많은 것들이 변모해왔다고 본다. 유인원들의 교미가 새로운 교미 방법의 시도를 통해 직립의 형태를 취하면서 본능적 씨뿌리기와 수태 작용을 벗어나, 집단간의 화해, 정복, 융화에 이르기까지 성이 사용되지 않은 곳이라곤 찾아보기 힘들 정도이다. 나의 그녀의 이름은 아직까지 알지 못하였지만, 그녀를 본 것만으로도 나의 행동에 많은 변화를 가져온 것은 분명 함이다. 그것이 실패가 된다 할지라도 지금의 내 모습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저녁 식사 때가 되었다. 얼마나 배가 고프던지 밥맛은 무척 달았다. 늦은 밤에 있을 라면 파티에 사용될 공기 밥을 구하기 위해 창피함을 무릅쓰고 밥을 도시락에 눌러 담아왔다. 다른 무리들로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았겠지만 우리 그룹의 생존을 위한 필연적 행동이었다. 사냥을 나가서는 사냥감의 목표를 정하기 마련이다. 그 대상이 되는 것은 병들거나, 늙거나 혹은 어린 것들이다. 그런 것들은 어쩔 수 없이 새로운 무리들의 사냥감이 되기에 충분한 자격을 가졌다. 우리에겐 그 공기 밥은 어린 새끼 누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 새끼 누는 무리의 생존에 꼭 필요한 것이다.
청백리제도의 사적 고찰1. 서론오늘날의 대한민국의 정치는 고위 정치인들의 일신과 일가를 위한 정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돈으로 관직을 사고파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정경유착과 황금만능주의적 사고의 부패한 정치인들의 사고는 청백리를 예우했던 우리의 기본 정신과 크게 어긋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청백리란 과연 무엇이며 청백리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미에 대해 알아보고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에 대해 고찰해보자.고대 이래로 공직에 몸담고 있던 관료들은 크게 淸吏와 潑吏群으로 양분할 수 있겠는데, 전자는 낭리로서 나라와 民生을 위해 헌신하며 본인과 가정의 희생을 감수했던 사람들이며, 후자는 이와는 반대로 一身의 영달은 물론, 一家의 번영을 위해 公益을 저버리고 국가와 국민을 외면하던 汚吏와 같은 부류이다. 그런데 낭리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낭리를 우리는 보통 ‘淸白吏’라고 부르지만, 엄격히 말하면 淸白吏란 맑고 깨끗한 벼슬아치라 해서 모두 부르는 호칭은 아니며, 국가로부터 淸白吏에 錄選되어야 진정한 의미의 청백리가 되는 것이다. 이미 상고시대나 고려 시대에도 청백리에 대한 개념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은 여러곳이 있으나 조선시대에 이르러서야 청백리로서의 위치를 점하게 된다.2. 본론2.1. 청백리의 개념청백리 제도는 조선조에 관리들 중에서 청렴결백한 사람만을 선발하여 후세에 길이 거울삼게 했던 관기숙정을 위한 제도였다. 여기에 선발되기 위하여는 엄격한 자격 심사의 심의를 거쳐 임금의 재가를 얻어야 했다. 또 녹선이 되면 그 자손들도 부조의 음덕을 입어 벼슬길에 나갈 수 있는 특전도 주어졌다. 그러다 숙종 이후로는 이들 청백리의 자손이 너무 불어나 三相과 고관이 추천하여 대개 5명 정도가 특채 등용되었는데, 그럼으로써 청백리가 많이 난 씨족들은 그것을 큰 자랑으로 삼았다.청백리는 생존시에 선발되는 일도 있고, 죽은 뒤에 피선되는 경우도 있는데, 살아서 청백리가 되는 것은 청백리라 하지 않고 廉謹吏라 불렀으며, 죽은 뒤에 녹선되는 것을 청백리라 하였다. 그러나 청백리의 선발은 어느 왕대나 있었던 일이 아니며, 『經國大典』에도 명문화된 적이 없어서 왕이나 관료들 간에는 청백리의 개념조차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했다. 즉, 청백리와 염근리가 같은 것인지 아니면 다른 것인지 이것조차 정확히 알고 있지 못해서 정신들간에 논란이 있기도 하였다. 결국 살아 청백리에 녹선되는 것을 염근리라 하고 염근리가 죽어 피선되거나 죽은 뒤에 피선되는 경우를 청백리라 하였다.2.2. 청백리제도의 시행배경청백리제도가 조선조에 들어와서 비로소 제도로서 채택, 시행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양반관료제사회의 성격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왕조를 이끌어가는데 있어 직접?간접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세력이 선비계층 이었는데, 이들 선비의 守則이 바로 ‘四維’이었다. 사유란 예?의?염?치를 말하는 것으로, 나라를 유지하기 위한 네 가지 지켜야 할 법도이다. 이 법도는 중국에서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옛날부터 강조되어 왔으며, 특히 성리학에 바탕을 둔 조선조에 들어와서 더욱 그러했다. 그리하여 조선왕조는 개국과 때를 같이하여 예?의?염?치를 법제화하여 민풍을 교화시키는데 힘을 기울였다. 이러한 청백리제도는 국가의 기강이 잠시라도 풀리게 되면 汚吏의 확산을 근본적으로 극소화시키기 위하여 마련된 것의 하나이라고 할 수 있다.2.3. 청백리의 선발기준청백리를 선발하는 데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치게 된다. 국가가 청백리 선발의 필요성을 느낄 때 국왕이 청백리를 선발하라는 명을 의정부에 내리면 의정부의 새 정승과 육조의 판서들이 논의하여 각 도에 공문을 하달하고 청백리로서의 자격이 될만한 사람들을 추천하여 보고토록 한다. 청백리 선발 대상에는 현직관원 뿐 아니라 전직관료나 이미 사망한 사람들도 추천대상이 되며, 이러한 진행은 주로 이조에서 담당한다. 청백리가 될 수 있는 자격은 지방관만이 아니고 중앙관료들도 해당되며, 중앙관과 지방관을 막론하고 2품 이상이면 청백리를 천거할 자격을 갖추게 된다. 청백하다는 명성이 널리 알려져 있는 인물들을 선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나 극히 인원이 제한되어 있어 최종 선발까지는 많은 논란이 되풀이되기 일쑤였다. 또한 매왕대마다 선발하는 것도 아니어서 청백은 물론 시대로 잘 타고나야 청백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청백리로 선발된 인물들은 공가나 사가에 일체 폐를 끼치지 않고 깨끗하고 검소한 것을 생활철학으로 삼고 살아갔으며, 청백리의 선발기준도 이러한 면을 중시했던 듯싶다. 그렇다면 청백리를 뽑게 된 동기는 무엇일까. 그것은 사치를 서로 숭상하며 재물을 탐하는 풍습이 성행하여 더 이상 사풍이 타락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즉 청백한 관리를 청백리에 녹선하여 생존한 사람은 염근리로 벼슬을 높여주거나 상물을 내리고, 이미 사망한 사람은 청백리로 삼아 자손에게 후대함으로써 염치를 일깨워서 무너진 사풍을 권려하기 위해서였다.2.4. 청백리 및 그 자손에 대한 예우2.4.1. 청백리에 대한 예우염근리와 청백리의 명예는 비록 값진 것이었으나, 그들은 청백하게 살아온 만큼 개인은 말할 것 없이 그에 딸린 가족들도 함께 가난을 이겨내야 했다. 그 대가로 그들에게 특전이 주어졌다.2.4.2. 청백리 자손에 대한 특전염근리는 살아있는 청백리라 생존시에 본인이 특전을 받게 되지만, 청백리는 이미 사망한 뒤에 피선된 것이라 그 자손들이 특전을 받게 된다. 대체로 청백리 자손에게 주어지는 특전은 嫡長후손에 해당한다. 적장에게 주어지는 것은 청백리인 조상의 제사를 받들 수 있도록 경제적인 뒷받침도 마련해 주기 위함이었다. 만약 적장손이 끊어지면 제사를 모시는 지손을 대신 錄用하였으며, 그 밖의 자손에게는 벼슬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적장손이라고 해서 최소한의 학덕을 갖추지 아니하면 벼슬을 주는 것을 꺼려했다. 낮은 관직이라면 모를까 목민관이라도 되면 백성을 다스릴만한 학식과 덕망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청백리 자손에 대한 특전은 그들에게 벼슬을 주는데 목적이 아니었고, 현직관료와 장차 선비들에게 염치를 아는 풍토를 조성할 수 있도록 이끌어가는 한편, 후대인으로 하여금 그것을 본받아서 훌륭한 청백리가 계속 나올 수 있도록 권유화기 위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