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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화는 나에게 무엇인가?
    이화는 나에게 무엇인가이제 졸업생이라는 이름을 달고 학교를 나선다. 입학할 때만 해도 “내가 과연 이 학교에 정을 붙일 수 있을까”하는 불안감이 들었다. 마치 내게 ‘절대 가까워질 수 없는 적’처럼 느껴졌던 이화여자대학교.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로만 느껴졌던 학교. 그런 학교에 6년 가까운 시간동안 머물렀다. (초등학교를 제외하면 가장 오래 다닌 학교인 셈이다.) 단순히 ‘내가 다녔던 대학교’라는 말로는 이화를 설명하기에 너무도 모자라다.사회로 던져지는 것이 무서워 6년간 거머리처럼 학교에 붙어있었다. 그 시간을 어찌 견디고 있었는가 하고 스스로도 놀랄 때도 있지만 아직도 학교를 떠나야 하는 시간을 유예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졸업은 즐겁고 후련한 일이다. 하지만 슬프고 지독히 두렵다. 이곳을 떠나지 않을 수 있다면 평생 있고 싶은 생각마저 든다. 원래 가장 가까워지기 힘든 친구와 친해지면 헤어지기도 가장 어렵다고 하지 않던가. 예전과 다름없이 여전히 덜렁거리고 특별한 능력 하나 가지고 있지 않은 걸 보면 이화 안에서 과연 내가 무엇을 했던 것일까 하는 회의도 든다. 하지만 이건 확실하다. 이화는 나를 예전과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고 내 몸에는 ‘이화인’이라는 피가 흐른다.1) 외로움과 독립심을 동시에 키워준 공간아이러니하게도 ‘이화’가 맨 처음 내게 가르쳐준 것은 바로 ‘외로움’이었다. 19년 동안 집에서의 안락한 생활을 뒤로하고 홀로 살아야가는 서울이라는 낯선 공간에서의 이질감을 통한 외로움도 그렇지만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나는 독립하고 싶었다. 부모님의 도움을 받지 않고 당당한 대학생으로 살아가고 싶었다. 그래서 바로 시작한 것이 바로 아르바이트였다. 그러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동아리나 학회를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400명이 넘는 학부 속에서 나는 그야말로 점과 같은 존재였다. 수업과 1학년 세미나를 들으며 친구들을 만났지만 그들과 함께 맛있는 것을 먹으러 다니고 즐겁게 대학 생활을 누리기에 ‘독립’에 대한 나의 욕심은 너무도 컸다. 일상은 바빴지만 그럴수 싶은 일을 찾아야 한다는 깨달음 역시 던져주었다. 남녀공학이나 전공별로 인원수가 적은 학교의 경우 새내기의 스케줄은 전적으로 선배들에게 달려있다. 선배들이 이끄는 대로 새내기들은 행사에 참여하고 정해진 친구를 만난다. 물론 이런 상황 속에서는 외롭지 않고 즐겁고 알차게 대학 새내기 생활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화의 새내기가 되어 처음 부딪히게 되는 이 외로움과 막막함이 나중에 학년이 높아지면서 ‘독립심’이라는 좋은 거름으로 변하는 것은 사실이다.만약 시간을 되돌린다면 이화에 처음 발을 내딛었던 새내기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그 때를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 때 이화 안에서 느꼈던 외로움과 삶에 대한 막막함이 인생을 진지하게 바라볼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기 때문이다.2) 다양한 학문적 관심을 키워 준 공간새내기 시절 느꼈던 외로움은 아마도 다양한 학문 분야에 대한 관심으로 채워진 듯하다. 교육학, 국악, 무용, 미술사학, 행정학, 언론정보학, 등. 물론 다양한 분야에 대한 관심과 높은 학점은 정비례하지 않았다. 하지만 도서관을 가득 채운 책과 이화에서의 다양한 수업은 고등학교 시절의 ‘공부’가 아닌 지성인으로서의 ‘학문’을 흉내라도 낼 수 있게 해줬다. 이화에서 국문학을 공부한 것은 행운이었다. 국문학을 가르치던 스승들과 그들이 쥐어줬던 수많은 책들은 못치기 어리고 콧대만 높던 문청(文靑)에게 ‘모자람’과 ‘그에 대한 부끄러움’을 깨닫게 해줬기 때문이다. 더불어 건축학, 무용사(史), 철학, 심리학 등 다양한 분야의 수업을 들을 수 있었던 것 역시 내게는 큰 행운이었다. 깊지 않지만 그래도 학문과 세상에 대한 다양한 관심을 갖게 된 지금의 나를 만든 것 역시 이화였다.3) 내가 여성임을 알게 해 준 공간‘이화’는 내가 ‘여성’이라는 사실을 처음 깨닫게 해 준 존재이기도 하다. 중고등학생 시절까지 나는 그저 ‘여성’이 아닌 한 집안의 딸이자 동생, 그저 학생이었다. 행운인지 불행인지는 모르지만 한 번도 내가 여성이라는 데 대해 깊이 생각을 해보주는 하나의 ‘성역’과도 같았기 때문이다.그러나 내게 여성임을 알려주었던 것은 이화 안에서의 수많은 수업과 책, 그리고 숨 쉬는 공기였다. 미술사학을 공부하든 철학을 공부하든 무용사를 공부하든, 이화의 선생님들은 항상 ‘여성’이라는 단어를 빠뜨리지 않으셨다. 그 어떤 과목에서도 여성이라는 키워드는 각 학문과 연결 지어 다시금 생각하게 하셨다. 우리는 의무적으로 어떤 분야든 여성이라는 키워드를 잊어서는 안됐다. 뿐만 아니라 이화라는 공간 안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여성을 차별하는 세상’을 바꿔야할 예비 혁명가로 성장하는 기분이었다. 이화에서 숨 쉬는 공기 하나하나가 ‘여성’으로서의 나 자신을 자각하게 해줬다. 여성학 수업을 듣지 않았더라고 해도 자신이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해도 이화라는 공간에서 공부하고 생활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페미니스트’가 되었고 페미니스트여야 했다. 내가 여성이라는 사실, 특히 대한민국에 사는 여성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준 이화. 여전히 차별받는 여성으로서 우리가 보듬어야 할 이 사회의 소수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려준 이화. 내가 이화인으로 살았던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은 가장 강력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4)사회 속에서 투쟁하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준 공간하지만 단순히 이화가 내게 준 것은 여성이라는 자각이나 다양한 분야에 대한 호기심만은 아니다. 고학년이 되어 진로를 고민하고 삶의 방향을 정하는 데 있어서 이화는 내게 중요한 길잡이가 됐다. 진덕규 선생님, 최성만 선생님을 비롯한 스승들은 항상 ‘사회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이 분들의 가르침만이 아니더라도 ‘이화’에서 사회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기회는 많았다. 내가 ‘이화여대에서 공부한 여성’이라는 사실은 하나의 의무감이자 책임감이었다. 단순히 나 하나만을 위해 살아가기보다 사회를 위해 그리고 남을 위해 나보다 약한 이들을 위해 살아가야 한다는 책임감 말이다.이화의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고민하던 시간들, 지는 해를 바라보며 앞으로의 길을 고민하던. 경쟁과 이기주의로 가득 찬 무서운 사회로부터 잠시라도 날 보호해줄 수 있는 공간. 학교에 있을 때면 항상 마음이 편했다. 내가 어떤 옷을 입고 다니든 어떤 행동을 하든지 이화는 편안했고 자유로운 공간이었다. 힘든 일이 있을 때면 학교로 저절로 발길이 향했던 것도 이화가 지닌 따뜻함과 편안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노을이 지던 강의실 창가, 중앙 도서관에서 밤을 새고 난 후 새벽을 맞으며 아침밥을 먹으러 가던 기숙사길, 영화를 보며 펑펑 울 수 있었던 시청각실, 책에 파묻혀 있다 잠이 들고 또 일어나 책을 읽었던 도서관. 이 공간들은 불안하고 외로웠던 나를 달래줬고 보호해줬다. 이화를 떠나 사회인이 되었을 때에도 난 힘들 때면 이화를 찾을 것만 같다. 집을 나갔던 탕자가 다시 고향에 돌아와 부모를 찾듯. 그리고 그 부모들이 어떤 말도 없이 그 탕자를 받아 주었던 것처럼 이화도 아무 조건도 없이 나를 그렇게 안아줄 것이다.6) 졸업 후 이화는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언젠가 한 선배에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화’라는 이름은 오히려 졸업한 후에 더욱 빛이 나게 된다고. 그 때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고 졸업 후 성공적인 삶을 사는 그들에게만 한정되어 있는 만족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졸업을 앞둔 지금 그 선배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이화인에게 졸업은 이화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이화’라는 이름을 크게 써 붙이고 세상에 뛰어드는 시작이다. 진덕규 선생님께서 하셨던 말씀처럼 이화에서 공부했다는 사실은 나에게 그리고 내 친구와 후배들에게 큰 짐이 될 것이다. 여전히 ‘이화’라는 이름은 이 시대 지성인으로서의 사회 변혁에 책임감을 가진 여성을 대표한다. 동시에 수많은 편견을 함축하고 있기도 하다. 우리는 그 짐을, 그 십자가를 지고 더욱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 그래야 그 짐이, 그 십자가가 세상에 희망이 되고 도움이 될 수 있다.신념을 실천하는 것보다 신념을 잊지 않는 것이 더 어렵다. 신념을 잊어 버리지만 않는다면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올바른 삶지식획득 . 사회화을 위한 場 교육과정에서는 하위단계 일수록 이러한 입장이 부각된다고 할 수 있다.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이 가져야할 공동체의 가치체계의 기초적인 요소를 배움으로써 아이들이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한다. 실질적인 것으로는 예의범절, 공중도덕 등을 배우고 국가나 민족의 우수성과 문화적 정체성을 주입 받음으로써 사회적 퍼스낼리티를 가질 수 있게 된다. 인간이 사회에서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독립하여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이 되는 직업과 직업선택을 위해 학교교육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한 사람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키워 나가는 생활에 장이라는 생각으로 확장되어 학교가 학생에게 의미하는 바는 자못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우리 학교의 현실은 학생들에게 충분한 기회 제공을 위한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고 보아진다. 사회가 요구하는 학생들의 자질을 기존의 학교 커리큘럼으로 소화해 내지 못함으로써 학생들에게 '학교무용'을 일으키고 더구나 학생들이 자발적인 요구나 소질개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함으로써 학교는 졸업장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 학생은 학교에서 동료들과 또래집단을 형성함으로써 또래문화를 만들어 나간다. 특히나 우리나라와 같이 학생들이 지역사회 활동, 종교 활동, 동아리 활동 등이 저조한 경우 특히 학교 내의 인간관계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같이 학생들이 학교 내에서 생활은 그들만의 특이한 문화를 만들어내는데 예를 들어 그들 사이에서만 쓰는 비어나 은어, 또는 유행하는 옷차림, 특정 연예인에 대한 팬클럽 활동 등은 학교 내에서의 또래집단 문화를 반영하는 것들이라 할 수 있으며 이러한 문화를 통해서 그들은 집단 내 동질성이나 정체성을 찾는다. 이렇듯 많은 역할을 하는 것이 학교이다. 내가 6년 동안 봐온 이화의 모습은 어느 정도는 학교의 역할을 다하기도 했지만 내가 이곳을 나가서 무엇을 할 지에대한 정확한 길은 가르쳐 주지 않았다. 단적인 예로 나는 국문학도로서 내 주
    인문/어학| 2008.12.27| 4페이지| 1,500원| 조회(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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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에서의 종교란?
    현대사회에서의 종교의 역할과 의미유명한 문장 비평가인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는 「제 3물결(The Third Wave)」에서 인류 사회는 지금 제 2물결인 산업화의 단계를 지나 전자?정보 산업혁명이 이끄는 새로운 제 3물결 문명으로 접어들고 있다고 진단하고 있다. 이처럼 오늘 우리는 인류 역사상 과학과 기술 그리고 물질이 최고도로 발달한 그런 사회에 살고 있다. 문명의 혜택으로 우리의 삶은 모든 면에서 말할 수 없이 편해졌고 물질적인 성취도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그러나 오늘을 사는 우리가 과연 잘 살고 있는가? 아직도 인류의 미래를 염려하는 많은 사람들은 오늘의 세계야말로 인류가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심각한 문제에 봉착해 있으며, 그 심각성은 인류의 미래를 보장하기 어려울 정도라고 한다. 이러한 현대의 문제와 그 심각성을 실증적으로 보여 준「로마클럽)보고서」를 통해서 우리는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심각성을 살펴볼 수 있다.「성장의 한계(The Limits to Growth)」라는 공식 명칭을 가지고 1971년에 발표된 이 보고서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충격적인 것이었다. 보고서의 결론은 뜻밖에도 ‘앞으로 10년 내에 적절한 제동이 걸리지 않고 현재의 추세대로 성장을 계속해 간다면 지구는 100년 이내에 파멸에 이를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하나밖에 없는 지구에서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식량은 부족하게 되며 또 공업화를 촉진시킬 때 자원은 고갈되고 반면에 환경은 계속적으로 오염되어 마침내 성장의 균형이 깨지면서 그와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는 것이다.이 보고서의 충격은 두 가지 면으로 집약될 수 있다. 첫째는 ‘10년 내에 적절한 제동이 걸리지 않는다면’이라는 단서가 있지만, 100년 내에 지구의 파멸이 올 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다음으로는 과학과 기술, 산업의 성장이 인류의 파멸을 불러올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맹목적인 산업의 성장이 돌이킬 수 없는 인류의 재앙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그러면 현대가 안고 있는의 사활이 걸린 중요한 현안이다. 산업의 발달과 공업화의 촉진으로 자원의 수요는 급증하고 그 결과로 물과 공기가 오염되고 환경이 황폐화되고 있다. 지구의 온난화 현상, 오존층의 파괴, 산림의 황폐화와 사막화 현상은 이미 위험 수위에 도달해 있다. 뿐만 아니라 자연과 생물, 인간이 어울려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는 생태계는 날로 파괴의 길로 치닫고 있다.이러한 환경파괴의 문제는 인간의 무지와 욕망, 그리고 과학기술이 한데 어울려 만들어 낸 합작품이라고 할 것이다. 인간과 다른 생명 및 자연이 본래 뗄 수 없는 ‘하나’임을 모르는 근원적인 무지에서 인간만을 위해 자연과 다른 생명을 함부로 했고 그 과정에서 과학과 기술은 대량 파괴의 수단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이제 인류는 진정한 개발, 성장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만 된다.둘째, 현대가 앓고 있는 심각한 병으로 우리는 대량 살육과 핵전쟁의 위험을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지구상에는 지금 인류를 수십 번 죽이고도 남을 만한 양의 핵무기를 저장하고 있다. 그것도 인류의 평화를 위한다는 미명 아래 말이다. 동서의 냉전 분위기 해소되고 소련의 붕괴로 핵 문제가 나아진 것 같지만, 핵의 위험은 아직도 상존하고 있으며 그 위험은 핵이 쉽게 상품화될 수 있다는 사실로 더욱 가중되고 있다.셋째, 가치관의 전도와 그에 따른 도덕 질서의 붕괴이다. 가치관의 전도로 모든 것이 물질적인 기준으로 평가되고 있다. 사람됨이 아니라 얼마를 가지고, 무엇을 하는 가로 사람을 평가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는 도덕 질서의 붕괴와 타락으로 나타났다. 오늘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물질 만능주의와 생명 경시 풍조, 각종 범죄, 폭력, 부정부패 등 사회 병리 현상도 다름 아닌 이러한 병의 표출이다.끝으로, 우리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잃어버린 자기 상실, 즉 자아 상실의 병이다. 본래의 나를 잃어버린 사람은 온전한 삶, 온전한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 따라서 그가 엮는 인간 관계 및 다른 생명, 자연과의 관계 또한 온전할 수 없다. 핵전쟁다른 생명 및 자연과의 관계가 파괴된 모습으로 정리할 수 있다.그러면 이러한 문제들은 사상적으로 어떤 연원을 가지며 또 어떤 과정을 거쳐 나타나게 되었는가?우리가 오늘날 물질적 문명의 배경으로 모든 것을 둘로 나누어 보는 이원적(二元的) 사유의 전통은 서양 사상의 배경을 이루고 있다. 신으로부터 인간의 해방을 부르짖으며 일어난 르네상스기의 이른바 휴머니즘(Humanism, 인본주의)에서도 우리는 이와 같은 이원적 사유를 발견하게 된다. 즉, 휴머니즘의 ‘인간(Human)'은 다른 존재, 자연과 분리된 개체적 인간을 가리킨다. 휴머니즘의 이러한 인간 이해는 현재의 물질문명을 낳은 기초가 되었고, 급기야 오늘의 문제를 초래한 사상적 기반이 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어떤 과정으로 그렇게 되었는가? 감각과 지각을 중심으로 하는 개체적 인간을 인간 이해의 기초로 서구의 문명사는 감각을 중시하는 경험주의, 지각을 중시하는 합리주의로 발달하였고, 그것들의 토대로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이 다름 아닌 과학이요 기술이었다. 그 결과가 오늘의 과학문명, 물질문명인 것이다.그러나 이러한 서구 휴머니즘적 인간 이해는 간과할 수 없는 오류가 내포되어 있다, 본래의 성품, 본래적인 ‘나’가 우리들 존재의 바탕이라면 감각, 지각하는 나는 표층의 나에 불과하다. 그런데 서구 휴머니즘에서는 그 표층의 나를 인간의 전체로 보았던 것이다. 그런 천박한 인간 이해를 바탕으로 문명은 발달되어 왔고 결과적으로 오늘과 같은 문제를 초래했다.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잘못되었는가? 감각하고, 지각하는 객체적 인간을 기본으로 문명은 자연히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를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발달되어 왔다. 또 다른 하나는 자연과 다른 유기체를 마치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인 양 함부로 다루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명에서 현대가 앓고 있는 문제들은 필연적인 결과이다.현대가 안고 있는 문제의 극복은 어떻게 가능할까? 무엇보다도 먼저 필요한 것이 세계관의 대전환이다. 잘못된 세계관으로부터 모든니라 ‘하나’인 사상이다. 그와 함께 필요한 것이 실제 잃어버린 나를 회복하고 그렇게 해서 급기야는 나와 이웃, 인간과 다른 생명 및 자연과의 파괴된 관계를 회복하는 일이다.지금까지 앞으로 종교의 어떠한 방향이 현재 앓고 있는 심각한 문제에 대해 해결의 처방을 제시할 수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 종교의 본질과 사회의 문제점 대해서 살펴보았다. 결국 결론은 종교가 고유의 본질을 잘 살려서 현대의 문제를 해결해 가는 등불(수업시간에서 표현은 “잠수함의 새”)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종교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첫째, 종교는 오늘을 사는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를 돌이켜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계기를 통해 바른 삶의 자세를 가다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온 세계가 성장, 발전이라는 맹목적 질주를 앞다투어 하고 있고 현실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새로운 물건, 새로운 기계를 위해 스스로를 잃고 있다. 종교는 오늘의 세계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 ‘어디를 향해, 무엇을 위해 달리는가?’ 하는 물음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이 진정으로 잘 사는 길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하도록 해야 한다.둘째, 종교는 오늘의 세계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하나’인 세계관을 분명히 제시해 주어야 한다. 인간과 다른 생명 및 자연이 다르다는 이원적 사유로 오늘의 문명은 발달되어 왔다. 결국 비좁은 인본주의에 빠져 자연과 다른 생명을 정복하고 착취하는 우를 범하였다. 그리고 결과가 환경과 생태계의 파괴라는 심각한 문제로 나타났다. 이제 이런 문제의 극복을 위해서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인간과 자연 및 다른 생명이 본래 둘이 아니라는 세계관이다. 나와 남, 인간과 자연 및 다른 생명이 모두 ‘하나’라고 보는 세계관을 분명히 제시하여 진정한 평화와 공존의 삶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종교의 시대적 역할이다.셋째, 종교는 자아 상실 및 혼란의 깊은 늪에 빠져 있는 오늘을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진정한 자아 정체성 확립을 도와야 한다. 우정한 자아 정체성의 확립을 도와 준다기 보다는 감언이설로 젊은이들을 꾀어 낼 뿐이다. 사람들은 현대의 종교가 타락하고 변질이 되었기에 믿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차라리 이단이 그들보다는 훨씬 인간적이고 자신들에게 솔직하게 다가온다고 말한다. 이단에 빠져서 집을 나가서 돌아오지 않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다. 이런 걱정스러운 사실들이 현대사회에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이단 외에도 많은 종교들이 자신의 제 역할을 올바르게 해 나가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넷째, 종교는 앞으로만 치닫는 과학과 물질문명에 제동을 걸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인간의 온전한 삶을 무시하고 파괴하는 과학과 물질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과학, 인간을 위한 물질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뒤바뀐 가치관을 바로잡는 일이다. 종교는 현대 사회가 앓고 있는 문제를 풀어 가는 구체적인 실천을 보여 주어야 한다. 핵전쟁의 불안과 공포를 제거하고 세계평화를 증진하려는 노력, 환경을 청정히 하고 생태계를 보존하는 일, 사회정의와 도덕질서를 선양하는 일, 그리고 우리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체계적인 일 등이 그러한 실천의 예들이라고 할 수 있다.나는 한 종교가 인간의 종교로서 가장 원만하고 완벽하게 제 구실을 다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종교 내에 두 가지 큰 기둥이 갖추어져 있어야 된다고 본다. 그것은 종교가 인간에게 그 존재의 궁극적인 행방을 밝혀 주는 일이며, 한편 인간이 그에 의해 현실을 살아 갈 삶의 기준이 되는 윤리를 제시해 주는 이 두 가지 일이라는 것이다. 전자에 있어서 인간은 궁극적으로 자기 존재가 의거할 안심의 영원한 근거를 얻는 것이며, 후자의 경우 그 자신 삶의 영원한 희망에 있어서 현재를 살아갈 삶의 방도와 기준을 얻게 되는 것이다. 한 종교가 위에 언급한 두 가지 큰 요소를 그의 양대 기둥으로 원만히 갖출 때 인간은 존재론적으로는 피안) 또는 성(聖)에 있어서 안심의 근거를 얻고, 윤리적으로는 차안) 또는 속(俗)에 있어서 현실을 자신 있게 살아가게 되것이다.
    인문/어학| 2008.12.27| 4페이지| 1,500원| 조회(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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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가복음 16:9-20
    막달라 마리아누가복음 16:9-209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 내어 주신 막달라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10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의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고하매11 그들은 예수의 살으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12 그 후에 저희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저희에게 나타나시니13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고하였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14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15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18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19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20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 쌔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요한복음 20:1-181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한 것을 보고2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3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쌔4 둘이 같이 달늠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아나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5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드러가지는 아니하였더니6 시몬 베드로도 따라 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7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줄 알지 못하더라15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라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하니(이는 선생님이라)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신약성서에서는 여러 가지로 고통을 받고 있는 여성들이 나온다. 12년 동안 하혈증을 겪어온 여인이나 장애인 여성이나 사마리아 여인 등 부정하고 약자였던 인물이었던 그녀들을 예수께서 구원해 주신 다는 것이 큰 줄거리 일 것이다. 그러면 막달라 마리아는 누구인가? 나는 이 복음 중에 나오는 마리아가 예수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복음을 읽다보니 그녀와는 다른 인물임을 알 수 있었다. 성모였다면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께서 돌아오셨다고 알리는 말을 믿지 않는 사람이 없었을 테니까.그러면 막달라 마리아 도대체 그녀는 누구인가? 그녀는 창녀라고 널리 알려져 있다. 혹자는 그녀가 성경을 음해하려는 세력들에 의한 중상모략으로 그렇게 알려져 있을 뿐 창녀는 막달라 마리아가 아니라 베르다 마리아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그녀가 창녀이건 아니건 나와는 그다지 상관은 없지만 예수가 부활하신 뒤 처음으로 알린 이가 마리아라는 사실은 놀랍다. 남성과 여성을 비교해 보면 여성이 신앙심이 훨씬 깊다고 하는데 그래서 일까? 여러 명의 제자들 그 누구보다 자신을 믿는 여인을 찾아 간 것일까? 어쩌면 이런 가정도 유추해 볼 수 있다. 그 당시에는 여성의 지위가 성서에 쓰여 있는 것처럼 낮지 않았던 것일지라. 남성중심의 역사를 녀의 생활이 결코 평범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많은 괴로움과 고통의 나날을 보내던 마리아의 영혼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인생의 장을 펼치게 된다. 그녀를 방탕한 길로 몰아 넣던 일곱 귀신이 다 떠나가고 육신의 병은 물론 정신적인 이상까지 깨끗이 고침을 받아 순수하고 온전한 신앙생활을 시작한다.“마귀의 종"에서 해방되어 “주님의 종"으로 충성을 다하는 마리아의 헌신적인 새 삶이 시작된 것이다. 큰 은혜를 받고 많은 용서받은 사람은 진실 한 사랑으로 보답한다. 예수님을 만난 이후 마리아는 늘 주님의 곁을 따르며 자신의 소유를 모두 바쳐 그 사역을 돕는다. 고향을 떠나 객지 생활을 하고 있는 여자로서 기업이 있을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3년 반 동안 계속되는 예수님의 사역을 도왔다는 것은 주님을 향한 그녀의 사랑과 충성이 얼마나 컸는가를 보여준다. 예수님께 대한 마리아의 일관된 사랑은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을 통해서도 드러나고 있다.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마저 모두 뿔뿔이 흩어져 도망한 위기의 상황에서 마리아는 아무 두려움 없이 “죽음의 자리"에 동참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아직 마리아에게는 사랑하는 한 인간의 죽음이었을 뿐이다. 그 후 예수님의 묘를 지키던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을 최초로 목격하는 영광을 누린다. 다시 살아나시어서 자신의 이름을 정답게 불러주시는 예수님의 음성에 마리아는 놀라움과 기쁨에 어쩔 줄을 모른다. 그러나 죄 중에 잉태되어 죄악 중에 출생한 한 죄인일 뿐인 마리아는 예수님을 알아본순간 “랍오니"(선생)라고 부른다.성령 세례를 받지 못한 “육에 거한 인간"은 자신을 구원해 주실 메시야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 이후로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보인 마리아가 오순절날 성령 강림을 기다리며 기도하던 여인들 가운데 함께 있을 것임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여인으로서의 평범한 행복을 추구하기 보다는 좁고 험난한 생명의 길로 택한 마리아의 이름은 예 사람들과 어울려 식사교제를 가졌으며, 가부장적 가정을 유지하는 사회적 유대에 대해 과감한 공격적 표현을 펼쳤다. 예수가 세상에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제자들을 불러모았을 때, 여성들은 그 가운데서 현저한 위치를 차지했다. 막달라 마리아, 마르다와 마리아, 어머니 마리아 등의 이름은 로마의 가부장적 사회의 문학적 관습과 언어라는 장벽을 뛰어넘어 기독교 이야기 가운데 아직도 언급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바울의 선교 가운데서도 여성들은 잘 알려진 복음 전도자들, 사도, 지도자들, 예언적 권위의 담지자들이었음을 성서는 증거한다.여성들의 지도적 역할에 대한 증거로서는 초기 기독교도들의 모임이 가정에서 모였다는 것이다. 초기 기독교에 있어서 여성들은 가정 교회에서 지도자의 위치와 역할을 감당하였다.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도 예루살렘에서 헬라 유대인들의 가정 교회를 이끌고 있었다. 옥에서 갇힌 베드로가 천사에 의해 쇠사슬이 벗어진 후에 이를 알리기 위해 찾아간 곳이 바로 마리아의 집이었다. 또한 압비아도 다른 두 사람과 더불어 골로새의 가정 교회를 이끌어간 역할을 담당했다(몬 2). 라오디게아에서도 교회는 눔마의 집에서 모였다: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골 4:15).고고학으로 발굴된 비문을 통해서 여성 사제가 있었음을 알 수 있고, 바울의 편지에서도 바울의 도시 선교사역에 헌신한 여성들을 만날 수 있다. 바울이 마케도니아의 첫 관문인 빌립보에서 기도할 곳을 찾았을 때, 성문 밖 강가에 모여 기도하러 모인 여성들을 만날 수 있었으며 그 중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루디아의 온 집안이 다 세례를 받았다. 이 사실은 루디아가 그 집안에서 가졌던 권위를 대변해주고 있다. 빌립보 교회가 이렇게 여성에 의해 건립되었고, 또한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빌 4:2)는 말씀은 빌립보 교회가 여성의 지도력 하에 놓여 있었음을 시사한다.로마 교회에서도 역시 9명의 여성들의 이름을 들어 그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브리스가, 마리아, 유니아, 드루배나, 드루보사, 버시, 루포의 어머니, 율리아, 네레오의 자매(롬 16장). 이들 여성들이 목회 사역에 있어서 남성들과 다른 열등한 사역을 감당했다는 그 어떤 결론도 정당화 될 수 없다. 이들 가운데 유니아는 “사도들에게 유명히 여김을 받는”(롬 16:7) 인물이었다. 유니아는 4세기의 교회의 영웅적 인물로서, 크리소스톰은 유니아를 콘스탄티노플의 기독 여성들이 본받아야 할 사도라고 말하였다.200년 이상을 기독교는 성전/교회라는 공적인 영역이 아닌 가정이라는 사적인 영역에서 활동이 벌어진 사적 영역의 종교이었다. 기독교는 도시국가의 정치적 삶이 아닌 공동체의 가정적 삶에 관심을 가졌다. 이러한 가정적 교회에서의 여성의 역할은 두드러진 것이었다. 하지만 3세기에 접어들면서 기독교는 공적인 종교라는 궁극적 형태를 향하여 발전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공적인 형태로 발전된 기독교는 제도화의 과정을 거쳐서 공적인 지위나 역할이 남성의 전유물이라는 공적-사적 이데올로기를 더욱 강화하게 되었다. 따라서 여성의 사적인 부끄럼과 정숙함과 조용함이 강조되었다. 예수 운동에 있어서 지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여성의 리더쉽이 기독교가 로마의 국가 종교가 됨으로써 점차 주변으로 밀려나게 되었고 어쩌면 희생양이 되었다. “세상에 복음을 전한다”고 주장하는 교회가 가난한 자들과 소외된 자들에게 그들의 지위와 인격을 회복했던 예수의 복음의 유산을 되돌아봄으로써 이제 새로운 21세기를 맞이하여야 되겠다.예수님의 몸에 향유를 발랐다고도 알려지는 하는 막달라 마리아.그 내용을 살펴보면 이와 같다. 유월절 엿새 전에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베다니로 가셨다. 그 곳 사람들은 예수님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는데 마르다는 시중을 들고 나사로는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은 손님들과 자리를 같이하였다. 그때 마리아가 아주 값진 나아드 향유 약 300그램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아 드리자 온 집 안 아니다
    인문/어학| 2008.12.27| 5페이지| 1,500원| 조회(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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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니아 연대기감상문
    나니아연대기얼마전의 겨울, 극장가는 「나니아 연대기」라는 북유럽 신화 기반의 판타지 영화가 화제였다. 반지의 제왕, 그리고 해리포터를 뒤잇는 또 다른 판타지 대작이라고 평하는 이도 있었고 놀라운 CG효과를 조명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나니아 연대기」는 표면적으로 보이는 ‘판타지’라는 장르 외에 이면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작가인 C.S.루이스는 신실한 기독교인이고, 기독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집필된 「나니아 연대기」에는 그의 신앙관과 기독교적 배경이 녹아들어있는 것이다.C.S.루이스는 소설가이자, 시인이었고 또한 영문학자였다. 기독교로 회심하고 난 후 쓴 「나니아 연대기」가 기독교적 세계관과 성경의 진리를 토대로 한 기독교 작품임을 루이스는 분명히 했다.) 「기독교와 세계」의 의의는 강의를 통해 기독교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 그 본모습에 대해 접근 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종교인인 나로서는 종교적 색채가 강해 작가의 변증이 강하게 부딪히는 일반 기독교 서적에 비해 「나니아 연대기」가 종교적 기반 아래 씌여진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거부감이 적다고 판단했다. 기독교 신앙에 생소한 나에게 문학적 요소를 통해 루이스가 자신의 신앙관을 어떻게 함축하고 있는지, 「나니아 연대기」에서 그는 어떤 방식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다. 소설을 토대로 기독교에 접근하고, 루이스에 대한 신앙관은 「순전한 기독교」를 통해 알아갔다. 그 외 필요한 자료는 주로 기독교 관련의 포털 사이트에서 얻었고 기타 종교 서적을 참고했다.영국은 제 2차 세계대전이었고 4남매는 전쟁을 피해 디고리 교수의 시골 별장으로 가게 된다. 술래잡기를 하다 루시는 한 옷장 속으로 숨게 되고, 그 옷장 깊숙한 곳에서 100년 동안 크리스마스가 없는 나니아 마을을 발견하게 된다. 루시는 톰누스와 친구를 하게 되고 하얀 마녀를 피해 나니아 마을에서 나오게 되는데 나니아 마을에서 그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현 생활에서는 정작 100초도 지나지 않았다. 며칠 뒤 를 위해 희생하면 부활한다고 얘기를 해주고 아이들을 등에 태우고 하얀 마녀에 의해 얼었던 사람들과 동물들을 구해 준다. 그 사이 전쟁은 시작 되고 아슬란은 구해준 사람들과 동물과 함께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결국 전쟁은 아슬란의 승리로 끝나고 루시, 수잔, 피터, 에드먼드는 왕과 여왕이 된다. 그렇게 20년 정도가 흐르고 말을 타고 놀고 있던 4남매는 자신들이 처음 나니아 마을에 처음 왔을때의 장소에 도착하게 된다 . 그렇게 다시 옷장에 들어가게 되고 옷장에서 나왔을 때는 다시 처음 나니아에 들어갔던 원래의 모습을 하게 된다.「나니아 연대기」는 하나의 대 서사시이다. 역사, 문학, 신화 등 광범위한 분야의 깊은 지식을 갖고 있던 루이스는 「나니아 연대기」에 자신의 인문학적 지식을 농축시키며 동시에 기독교적 배경을 「나니아 연대기」안에서 자연스럽게 풀어내고 있다. 성경에서 보아왔던 익숙한 선악의 구도 등이 나니아 안에서 펼쳐지고 있다. 나니아 연대기는 나니아같은 나라가 존재하고,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인간이 되셨던 하나님의 아들이 거기서는 사자가 되었다는 가정)에서 출발된 작가의 기독교적 신앙이 문학적 상상력과 결부되어 나타난 소설인 것이다. 나니아 연대기안에는 많은 기독교적 상상들이 숨어있다.특히나「사자와 마녀와 옷장」은 그러한 성격이 도드라지는 영화이다. 나니아의 통치자 위대한 사자 아슬란은 예수 그리스도를 형상화한 것이다. 어느 여자아이가 루이스에게 아슬란의 또 다른 이름을 묻자 “산타 할아버지와 같은 날 내려오셨고, 자신을 가리켜 위대한 황제의 아들이라고 하시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대신해 자신을 내주시고, 악한사람들의 비웃음 속에 죽임 당하시고, 다시 살아나신 분의 이름을 한번 생각해보고 내게 알려주렴.” 이라고 답장을 보냈다고 한다.)마녀에게 지배당하여 겨울만 존재하는, 크리스마스는 존재하지 않는 왕국은 기독교에서 말하고 있는 예수에게 구원받기 전 인간 세상을 뜻하는 듯 싶다. 후에 마녀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아슬란이 얼음동상에 입김을 불어넣자 이들은 되는 노아의 방주, 아슬란을 통해 보는 예수 그리스도, 선과 악의 대결, 기독교와 비기독교 사이의 갈등 등- 이 드러나기는 하나 「나니아 연대기」는 기독교 교리를 설파하는 책이라기보다는 기독교와 소통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는 다리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작품을 성경에 대조시키며 일일이 들어맞는 부분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작가가 의도하는 바가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기독교적 상상을 작품 안에 불어넣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것같다. 루이스는 「나니아 연대기」가 다만 기독교가 무엇인지 보여주고, 기독교에 대해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는 교량 역할이 되기를 바랐던 듯 싶다. 4남매가 나니아에서의 여정을 통해 아슬란에 대해 더 알게 되었듯이, 「나니아 연대기」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 더 알게 되기를 바라지 않았을까. 실제로 루이스의 작품을 통해 기독교에 귀의하게 되었다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나니아 연대기」는 비 기독교인들에게 비교적 거부감 없이 다가갈 수 있는 소설이다. 「나니아 연대기」는 나니아라는 세계를 실제 재현한 듯한 철저한 세계관과 종족, 그리고 작가로서의 문학적 역량이 충분한 소설이다. 독자층을 어린아이로 설정했기 때문에 잔혹할 수도 있는 전투 장면은 상당 부분 생략되었지만 각 장면마다 세심하고 따뜻한 묘사가 되어있다. 굳이 기독교적 측면에서 조명하지 않더라도 소설 자체의 가치가 높다. 소설만으로도 충분히 작품을 즐길 수 있고 종교적 의미를 염두에 둔다면 좀 더 깊이 있는 해석이 가능한 것이 「나니아 연대기」가 일반인에게 거부감 없이 다가갈 수 있는 가장 큰 요인이다.물론 그와 동시에 소설 안에 들어있는 기독교인으로서의 목소리가 당혹스러운 부분도 있다. 하지만 본격적인 기독교 서적도 아닌 소설의 형식을 띄고 있는 작품이기에 독자가 비종교인이라면 약간의 여유가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하지만 실제 나에게 부딪혀 오는 종교는 내가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 많다. 나는 비종교인이다. 유신론의 주장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무신론다. 종교인에게 무신론을 인정해달라고 하는 말은 종교인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에 반하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인정하지 않고 종교로 설득하려고 하는 행동도 비종교인 입장에서는 당혹스럽다. 각자 가지고 있는 생각의 근본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충돌인 것 같다.또한 나니아연대기에서 인상 깊게 다가온 인물이 있는데 그가 바로 아슬란이다. 아슬란은 절대선을 상징했고 어떤 측면에서든 절대자와 비슷한 캐릭터의 모습을 보였다. 아슬란은 태고 적부터 존재했다. 책을 전반적으로 살펴보면 아슬란에 의해서 창조된 나니아 세계는 아슬란에 의해서 통치되었던 평화로운 왕국이다. 마녀의 봉인을 풀었던 교수로 인하여 나니아는 끝도 없는 겨울의 시대를 맞게 되는데 이런 왕국의 어려움을 감지한 아슬란은 결국 나니아로 돌아오게 된다. 사건이 진행되면서 에드먼드의 배반자 처리일로 마녀가 아슬란을 대면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마녀가 옛적 법률(언약)을 주장하며 에드먼드를 넘길 것을 주장하자 그 법률이 만들어 질 때부터 자신(아슬란)이 존재하였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아슬란은 태고 적부터 존재했던 전능한 존재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아슬란은 무소불위하다. 네 아이가 마녀를 물리치고 예언이 성취되자 케어 파라벨 성에서 네 아이는 즉위식을 갖는다. 그런데 즉위식이 끝나자 아슬란은 유유히 혼자서 바닷길을 거닐며 어디론가 떠난다. 그런 아슬란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루시의 눈가는 촉촉이 젖어 가는데 그녀의 곁에 다가온 톰누스씨는 루시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때가 되면 돌아오실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결국 이 말의 뜻은 모든 것은 아슬란에게 달려있고 언제 어디서든 그의 의지가 있을 때에 다시 나타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아슬란은 구원자이다. 성경을 살펴보면 예수그리스도는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그 죄를 모두 대속하고 아담이후 죄에 억눌려왔던 모든 인간들을 자유롭게 한다. 더구나 악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사망권세를 부활로써 온다. 아슬란도 아이들의 즉위식 후에 홀로 길을 떠나는 부분과 매우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다분히 C.S 루이스에 의해서 만들어진 세계가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예수님을 믿지는 않지만 나는 아슬란에 대하여 생각할 때 마다 필연적으로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단순히 기독교차원의 교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남의 죄나 허물을 위해서 대신 죽어 줄 수 있는 이가 이세상의 몇이나 있을까?’ 하는 말이다. 요즘 신문이나 미디어 매체들을 살펴보면 듣기에 불쾌한 소식들이 매번 나의 귀를 괴롭힌다. 선한 모습으로 남을 위하여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은 손해를 보는 듯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남을 위하여 자신의 것을 희생한다는 것은 더욱 어려워진다. 이런 냉정한 현실 속에서 우리들은 어쩌면 자신만의 아슬란을 만들어 놓고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경제적으로 빈곤한 이들에게는 로또 복권이 아슬란이 될 수도 있고 불치의 병으로 죽어가고 있는 이들의 경우에는 한때 잠시 잠깐 황교수가 아슬란 이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 가운데 우뚝 서있는 나의 경우에는 아슬란은 무엇인가?’ 라고 자문한다면 확실히 무엇이라고 대답하기가 곤란하다. 물론 나의 신앙심에 비례한 믿음을 근거로 대답은 할 수 있지만 좀 더 본질적인 접근을 하자면 아직 나의 아슬란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기에 오늘도 나의 아슬란을 찾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중이라고 말하고 싶다.기독교를 비롯하여 많은 종교가 비종교인에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점은 기독교를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기독교인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기독교 중심주의적 태도, 다른 것을 틀리다고 받아들이는 협소한 시각, 기독교가 진리라고 하는 오만함 등은 절대로 진실된 기독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비종교인에 대해 이해하려는 시도도 없이 전투적인 태도를 취하는 기독교인들은 존재한다. 어째서 기독교에 대해 이해하고 다가오기를 바라면서 그들은 기독교 외의 다른 것에는 귀를 막고 눈을 돌리는 것일까. 나는 기독교에 .
    독후감/창작| 2008.12.27| 6페이지| 1,500원| 조회(8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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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밀양감상문
    영화 ‘밀양’ 감상문주인공 ‘신애’는 불행한 여자다. 피아니스트의 꿈을 버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지만 남편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 남편에게는 애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남편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그래도 신애에게는 하나뿐인 아들 ‘준이’가 있었다. 신애는 남편의 고향인 경남 밀양에 내려가서 준이와 다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로 결심한다.신애가 아들 준이를 데리고 밀양으로 내려가던 길. 갑자기 차가 고장난다. 신애는 카센터에 전화를 하고 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밀양에 있는 카센터 주인인 종찬이 나타난다. 신애는 종찬에게 밀양이 어떤 곳이냐고 묻는다. 종찬은 특유의 능청스러운 말투로 밀양은 그리 좋지 않은 곳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신애에게 밀양은 ‘비밀의 볕(밀양)’처럼 마지막 남은 작은 희망과도 같은 곳이다.신애는 밀양에 도착해 피아노 학원을 연다. 밀양 주민들에게 개업 인사를 다니고 주민들과도 친해진다. 옷가게 주인에게는 ‘내부 인테리어를 바꾸면 손님이 더 많이 올 것’이라고 조언도 하고 약국 주인과도 스스럼없이 친해진다.신애는 다시 시작하는 밀양에서는 이제까지처럼 기죽지 않고 당당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더 좋은 집을 찾기 위해 땅 보러 다닌다, 좋은 땅을 사는 데 투자해야 한다는 등의 허풍 섞인 이야기를 늘어 놓는다. 신애는 준이를 웅변학원에 보내고 웅변학원 원장 딸인 중3짜리 소녀와도 인사를 나눈다. 준이의 웅변 발표가 끝난 후 신애는 웅변 선생, 주민들이 있는 자리에서 좋은 땅이 나와서 보러 간다면서 자리를 뜬다.이후 신애는 동네 여자들과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회식을 마친 후 동네 여자들과 노래방에 간 신애는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집에 들어온다. 그러나 집에 가보니 아들 준이가 보이지 않는다. 신애는 준이가 평소 좋아하는 숨바꼭질을 한다고 생각하면서 준이에게 빨리 나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때 집으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준이를 데리고 있다는 유괴범의 전화였다.신애는 준이가 유괴되었다는 사다. 하지만 유괴범의 얼굴은 너무도 평안해보인다. 유괴범은 자신도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고 있다고, 주님이 이 못난 사람을 용서해주셨다며 평화로운 미소를 짓는다. 유괴범의 이런 반응에 충격을 받고 교도소 밖으로 나온 신애는 꽃을 바닥에 떨어뜨리며 쓰러진다.이후 신애는 변한다. 교회에도 나가지 않고 그녀가 그렇게 사랑하던 하나님도 믿지 않는다. 신애는 절규한다. 내가 아직 용서하지 않았는데 왜 하나님이 먼저 그를 용서하냐고. 신애는 그 후부터 하나님, 신과 대결하기로 결심한다. 신애는 물건을 훔치기도 하고, 교회의 야외 예배 중에 김추자의 ‘거짓말이야’라는 노래를 틀어놓기도 하고 약국 장로를 유혹해 그와 관계를 맺으려 하기도 한다. 예배 중에 의자를 두드리며 소란을 피우기도 하고 자신을 위한 기도회가 열리고 있는 집 창문을 돌을 던져 깨뜨리기도 한다. 신애는 그 때마다 하늘을 바라보며 신에게 지지 않으려 한다. 결국 신애는 손목을 긋고 자살을 시도한다.신애는 병원에 입원하고 그녀의 동생이 밀양을 찾는다. 그녀의 동생은 퇴원하는 신애를 무미건조하게 챙긴 후 다시 서울로 떠난다. 그녀의 곁에는 언제나 그렇듯 종찬이 함께한다. 머리 자르고 싶다는 신애의 말에 종찬은 신애를 미용실에 데려간다. 그 곳에서 신애는 자신의 머리를 잘라주는 소녀가 유괴범 즉 웅변학원장의 딸임을 알게 된다. 신애는 머리를 자르던 도중 밖으로 뛰쳐나온다. 종찬에게 왜 하필 자신을 이 미용실에 데려왔냐며. 신애는 집으로 돌아와 마당에 앉아 혼자 머리를 자른다. 그녀를 따라 들어온 종찬은 거울을 붙잡고 신애가 머리 자르는 것을 도와준다. 그들의 옆, 구석진 마당 한 쪽에는 작은 햇볕 한 조각이 마당을 비추고 있었다.얼마 전, 안양 초등학생 살인 사건의 용의자가 사형 선고를 받았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는 재판 과정에서 아이들을 살해한 데 대해 진심으로 죄책감을 느끼거나 눈물을 흘리는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자신의 내연녀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그는 내연녀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 눈물을남들의 수십 배가 넘는 고통이, 또 어떤 사람에게는 남들의 몇 배가 넘는 행운과 행복이 주어진다. 두 사람의 인생은 별 차이가 없는데, 두 사람 모두 열심히 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불행과 행운의 차이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왜 꼭 신은 아픔을 통해 가르침과 위안을 주려는 것일까.영화를 보는 내내 신애의 입장에서 이 수많은 물음들이 머릿 속을 떠다니며 나를 괴롭혔다. 특히 절정은 신애가 용서해주기 위해 유괴범을 찾아갔을 때 유괴범의 대사였다. 아이의 엄마인 나조차 용서하지 않았는데, 왜 신은 누구 맘대로 이 죄많은 인간을 용서하는 것일까. 신애가 느낀 분노를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하지만 이 복잡하고 수많은 물음 속에서 어렴풋이 단 하나의 답을 낼 수는 있었다. 신이 사랑하는 아이를 빼앗아가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고 죄인이 신에게 용서를 받는 것. 이 모든 것이 인간의 마음 속과 머릿 속에서 나온 것이지 하나님, 신에게서 직접 나온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애초부터 신이라는 존재를 찾고 종교를 만든 것은 인간이었다. 신, 하나님은 애초부터 그냥 그 자리에 있는 존재였다. 한 마디로 신을 이용한 것은 인간이라는 뜻이다. 누가 더 불행하고 누가 더 행복한 이 비대칭 불균형의 논리 역시 수많은 우연과 인간들 간의 보이지 않는 상호작용이 만들어낸 것이지 신이 의도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온갖 부조리와 고통, 불공평이 판치는 이 세상, 운명을 만든 것은 신이 아니다. 신은 그저 거기 있을 뿐이다. 아니 오히려 신은 인간의 이러한 복잡한 운명의 사슬을 어찌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삶의 부조리와 고통을 풀 수 있는 존재 역시 결국 인간이다. 신의 힘을 빌어 우리에게 주어진 고통을 위안하고 어루만지는 것 역시 인간이 운명을 헤쳐 나가는 하나의 방법이다. 모든 열쇠는 인간에게 달린 것이다. 신애가 부도덕한 행위를 저지르며 하나님과 대적하던 그 방식까지도.종찬 - 사람만이 이유는 ‘햇빛의 존재’보다 그 ‘과정’에 있다. 햇빛 자체는 별 볼일 없다. 작품 마지막 초라한 마당 한 구석을 비추는 한 조각 햇빛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햇빛은 애초부터 신애의 마당에 존재하던 것이었다. 신애가 미처 몰랐을 뿐. 종찬 역시 신애가 밀양에 내려왔던 그 순간부터 항상 신애의 곁에 함께 했다. 또한 그가 신애에게 구원이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는 그저 동네 카센터 주인이며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와 밥 한 번 먹는 게 소원인 흔해빠진 남성일 뿐이다. 종찬이 숨은 햇빛인 이유는 신애가 그의 존재를 깨닫게 되는, 즉 신의 구원을 찾아 헤매며 괴로워하던 그 과정에 있는 것이다. 만약 신애가 밀양에 내려오자마자 종찬의 구애를 받아들이고 준이와 셋이 살았다면 신애는 그저 흔해빠진 지겨운 일상을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온갖 고통과 절망을 겪고 난 후 종찬의 소중함을 깨달았기에 그 과정에서 그녀는 숨은 햇빛의 소중함을 깨닫고 정신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교회 - 모든 것은 신이 아닌 인간의 잘못‘밀양’은 오늘날 한국 교회를 비롯한 종교, 그리고 종교를 믿는 이들에게도 중요한 숙제를 던져준다. 우리는 구원을 바라며 종교를 믿는다. 원수마저 용서하라고 하시던, 죄 많은 이들까지도 자녀로 받아들이시던 주님에게 용서받기를 바라며 회개하고 또 기도한다. 하지만 종교를 믿는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예수님이 이러한 메시지를 통해 우리에게 바란 것은 ‘우리가 용서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해주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세상 사람들이 원수를 용서하고 죄 많은 이들을 용서한다면 세상은 평화로워질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용서받는 것’에만 집착해 죄를 짓고도 신에게 용서를 구하기에만 급급하다. 이러한 행동은 괴로운 마음에 위안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단순히 용서받기 위해 종교에 의지하는 것은 오히려 문제의 본질을 흐리고 자신의 잘못을 덮어버리는 꼴이 될 수도 있다. 종교는 용서받기 위해 믿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용서하기 위신은 믿음 안에서 위로받으며 살아남는 것이 우선이었던 것이다여기서 기존 기독교의 죄와 ‘죄사함’이라는 용서의 코드를 살펴보면, 그것은 철저히 신과 개인이라는 에서 빚어지는 것들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내 죄를 신께 자백하면 신은 내가 어떤 죄를 지었든 간에 한없는 용서를 해준다는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더 깊이 한 번 생각해보면, 누군가가 죄를 지었다는 것은 그 죄로 인해 고통을 받는 타자도 같이 발생한다는 사실도 우리는 알 수 있어야 한다. 즉, 죄가 있는 곳에는 필연적으로 한도 같이 있다. 인간은 관계망에 놓여 있다. 이러한 관계적 사태에서 죄와 한은 동전의 양면인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죄사함은 신과 개인의 1대1 관계가 아니라 신과 죄인과 그 죄로 인해 고통 받은 이웃이라는 에서 고찰되어야 진정으로 그 죄와 죄사함이라는 용서와 치유가 이뤄지는 것이다.물론 신과 개인의 1대1 관계에서 죄사함을 얻을 수는 있다. 하지만 만일 그것만으로 그친다면 그것은 관념적일 뿐이고, 실상은 아편적인 것이 될 뿐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죄 짓고도 그저 기도로 고백만 하면 스스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는 죄사함을 받았다고 심리적으로 여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궁극적인 문제 해결이 못되는 아편일 수 있음을 신애가 기독교로 귀의하게 되면서 잘 보여주고 있다. 신애는 자신에게 있는 고통스런 아픔들이 평안하게 잘 해결되었다고 교인들 앞에서 은혜스러운 간증체험 마냥 고백한다. 물론 많은 교인들도 “아멘, 주님 감사합니다”라고 화답한다. 하지만 그것은 제대로 된 치유가 아니었던 것이다.더군다나 신애 자신이 평안함을 찾았다는 교인이면서도 무심코 살인자의 딸이 거리에서 맞고 있는 장면을 보고도 이를 외면하고 지나가는 모습에서 우리는 기존 기독교가 주는 평안이라는 게 얼마나 얄팍한 허위임을 예리하게 간파할 수 있다. 궁극적인 죄사함 즉 진정한 구원과 용서와 치유는 신과 나라는 1대1 관계에서가 아닌 에서 현실화됨을 잊지 말아야 한다.다.
    독후감/창작| 2008.12.27| 8페이지| 1,500원| 조회(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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