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신 의 작품은 여러 편 읽어 봤지만 같은 고전주의 시대의 몰리에르의 작품은 읽어볼 생각을 못했다. 무의식중에 희극은 비극보다 작품성이 떨어질 거라는 근거 없는 오해를 하고 있었다.『서민귀족』의 책장을 넘기면서도 분명 이 작품에는 귀족에 대한 풍자와 비판,연암 박지원의『양반전』과 비슷할 것이라는 또 한번의 편견을 가졌던 것이 사실이다.그러나『서민귀족』을 읽으면서 몰리에르가 우리에게 말하려는 것이 교훈과 풍자라는 데에 있다고 생각을 고정시킨다면 그가 우리에게 주려했던 희극적 감동이 반감될 듯 하다.주르댕의 의상은 크게 세 번 바뀐다.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그는 자신의 근원으로부터 멀어지고,점점 더 상상적인 세계에 깊이 빠져 들어간다.평상복 위에 실내복을 걸쳤던 처음의 의상이 2막 끝에서 궁정의상으로 교체되면서,주르댕은 귀족이 되겠다는 허황된 꿈에 의해 자기자신을 구경거리로 제공하는 인물이 된다. 주르댕은 귀족의 의상을 걸침으로써 귀족이 되었다고 생각하는데,그의 이러한 생각은 작품전체의 분위기 전환을 가능하게 한다.니콜의 참을 수 없는 웃음과 주르댕 부인의 야유는 그의 변신 욕구를 수용할 수 없는 합리적인 세상의 반응을 요약하고 있다.이후,귀족의상에서 더 기이하게 보일 수 있는 터번을 두른 터키식 의상으로 바뀌고 나서는 더 이상 웃음과 야유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사이 주르댕의 광기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한 주변인물들의 합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처음에 주르댕은 프랑스의 귀족이 되고자 했지만, 코비엘의 도움(?)으로 어떤 사회 계층인지 전혀 아는 바가 없는 마마무쉬가 됨으로써,그나마 현실에 자신을 약하게나마 묶어두었던 끈을 완전히 끊고 상상의 세계로 들어간다.이제 귀족이 되겠다는 주르댕의 광기는 비난받는 것이 아니라 주변사람의 적극적 참여가 있게 된다. 이렇게 주변 사람들의 전략이 갑자기 바뀐 것은 클레옹트가 뤼실에게 청혼한 것에 대해 주르댕이 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하고,그런 그의 생각을 변화시키기 위한 모두의 노력이 허사로 돌아간 3막 12장 이후이다. 그 이전까지의『서민귀족』은 주르댕의 허영을 부추기고 이용하는 사람들이 한 쪽에 있고,그를 설득하여 자신의 모습을 똑바로 바고 하려는 사람들이 다른 한 쪽에 서 있는 양상이었다. 그런데 3막 12장 이후 전혀 다른 방향에서 그의 허영을 충족시키면서 그것을 무해한 것으로 만드는 전략이 요청됨으로써,이제 적대적이던 두 진영이 암묵적 동의 아래 주르댕의 환상을 충족시키려 같이 노력하게 된 것이다.그러한 전략의 필요성을 제일 먼저 지적하는 인물은 바로 코비엘이다. 그는 주르댕 같은 사람을 설득하고 진지하게 대하는 태도가 아무 소용없음을 누구보다도 먼저 깨닫고,그에게 필요한 것은 설득이 아니라 한바탕 연극임을 간파한다. 처음에는 자신의 희망에 의해, 코비엘의 중개 이후에는 다른 사람의 도움에 의해 옷을 갈아입는 주르댕은 환상의 행복한 희생자 가 된다.
◆ 돈키호테는 어떤 사람인가?세르반테스는 서문에서 이 작품의 목적은 '허무맹랑한 기사소설을 붕괴시키는 것'이라고 간접적으로 말한다. 그 영향이 강해서 인지「돈키호테」가 단순히 기사도 문학에 대한 풍자 또는 패러디라는 접근도 많고 주인공 '돈키호테' 역시 구시대를 답습하는 시대착오적인 인물로 평가된다. 그러나「돈키호테」가 단순히 기사소설을 비방하기 위해 나온 작품이라면 기사소설의 쇠퇴와 더불어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또한 이 작품을 읽어나가면서 주인공 '돈키호테'를 단순한 광인으로 치부하기 어려운 점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자신의 정신적 이념을 위해 엄격한 자기 절제와 통제를 할 뿐 아니라, 고행을 서슴지 않는 돈키호테의 자세를 통해서이다. 이러한 모습은 언젠가 성서에서 보았던 십자가 요한을 생각하게 해 주었다. 이 글에서는 돈키호테와 십자가 요한과의 구체적인 비교를 통해 돈키호테가 우리에게 진정으로 전하고자한 메시지를 탐문해 보고자 한다.요한의 '어두운 밤'이라는 시에 보면 "눈에 뜨이지 않고 나갔다."는 대목이 나온다. 돈키호테의 처음 대목에도 "아무도 자신을 보지 않도록...들판으로 나갔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둘 다 사랑하는 사람으로 표현되는 삶의 지향점, 즉 자신의 신념의 현실로 변화되는 순간을 찾아 나서는 고행과 자기정화의 모험의 시작은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나가야 한다는데'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자기를 벗어나 자기가 구원해야 할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순간의 모습이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마법에 걸린 상태에서 둘시네아를 찾으려는 돈키호테는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그 존재를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다. 그러나 돈키호테에게 둘시네아의 실존의 문제는 현실의 삶에서 큰 의미가 없다. 오히려 그녀가 존재함에 대한 확신이 중요하다. 비스카야인과의 대결 전에도 한번 만나보지도 못한 둘시네아를 '나의 영혼의 힘'이라고 칭하는 절대믿음을 보여주며 모레나 산에서의 고행에서도 "나의 사랑하는 이여 어디 계십니까? 나의 아픔이 느껴지지 않습니까?"라고 외친다. 이러한 돈키호테의 모습은 "사랑하는 님이시여 어디에 숨으셨습니까? 흐느낌 속에 저를 놓아두셨으니"라는 십자가의 요한과 매우 닮아있다. 십자가의 요한이 님을 찾을 때도 사랑하는 님의 실존을 구체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 역시 중요한 것은 실존에 대한 구체적인 파악이 아니라, 확신인 것이다.모레나 산에서의 고행에서 미코미코나 공주의 부탁을 받고 거인을 처치하기 위해 내려온 돈키호테는 술 부대를 터뜨리는 모습으로 희화화되기도 하나,우리는 여기에서 사회의 그릇된 질서를 바로 잡으려는 돈키호테의 굳은 의지를 목격한다. 요한 또한 맨발의 갈멜 수도회를 설립하여 교회내의 개혁운동의 주역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사회구조 속에 닮아있는 두 인물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극은 막이 오르면서 노쇠한 리어가 국토를 3등분하려 세 딸에게 물려주려는 데서 시작된다. 그 과정에서 핵심적인 부분은 막내딸 코딜리아가 왕의 효성 서약 요청에 대해 고집스런 거부 반응을 표시하는 대목이다. 자기차례가 오기 전 두 언니들이 입에 담은 아첨에 반발한 것이다. 그녀가 대답하는 극히 짤막한 한 마디, 없어요. 는 당돌하기 짝이 없다. 초조한 왕은 다른 대답을 재촉하지만 코딜리아는 없어요 란 말을 일관한다. 코딜리아의 없어요 와 없음에선 없음만 나올 뿐이다. 라는 리어의 대사에서 받은 느낌은 애정의 진실성 또는 늙은 왕의 노망끼 따위의 통속적 접근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것이 'nothing'속에 함축되어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었고 이를 통해서 리어왕과 코딜리아의 갈등, 또한 그 의미에 대해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코딜리아의 두 언니 고너릴과 리건은 부왕에 대한 그들의 효심을 계량적으로 표현하는데 마치 경쟁하 듯 했다. 거기에 대한 코딜리아의 반발이 없어요. 이었다면 리어가 기대한 것은 언니들이 한 것처럼 수량적인 것에 다름없다. 그로서는 0에서는 나올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숫자놀음은 다음에 계속되는 장면들에서 리어에게 가혹한 복수를 가하게 된다. 나라를 양분하여 두 딸에게 갈라준 후 그가 원하는 100명의 수종은 고너릴과 리건에 의해서 50에서 25, 그리고 끝내는 0으로 그 숫자가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결과는 없어요 를 단순히 0으로 밖에 이해하지 못한 그의 판단착오에서 비롯된 것이다.리어가 자초하게 된 인간적 결함은 이 0 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nothing'을 발단으로 하여 그는 광기에 몰리고 집을 뛰쳐나가 비바람 치는 광야에서 포효하고 입은 옷을 찢어발기고 글자그대로 nothing'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요약해 주는 것은 광대의 대사이다. 이제 아저씨는 에누리없는 영이여. 소인은 아저씨 처지보다야 낫고 말고. 소인이야 그래도 바보이긴 하지만 아저씨는 맹탕이라니까! 광대의 이 말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헌신짝처럼 버린 리어에 대한 통렬한 야유이다.그러나 이러한 극한 상황의 시발점이 된 코딜리아의 없어요 는 사실 여러 가지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인간다움의 진정한 가치 즉 애정,연민,자비심 등 여러 가지 것들을 함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언니들의 아첨과 허위에 찬 언어의 과잉에 침묵에 가까운 언어밖에는 사용할 길이 없었다. 그것이 nothing'이라는 한 마디였다면, 이제 모든 것을 버리거나 빼앗겨 남은 것이라고는 알몸뚱이 밖에 없는 광야의 리어에게는 상실되었던 인간적 가치에 도달하기 위한 열쇠가 되는 것이다. 그는 상실을 통하여 뒤늦지만 깨달음을 얻는다.그 과정은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도 nothing'의 비극적 의미를 강조한 5막에서 죽은 코딜리아의 시체를 안고 등장할 때 그가 절규하는 대사는 다섯 번이나 되풀이되는 절대로 라는 낱말의 연속이다. 절대로 되돌릴 수 없는 코딜리아의 죽음 즉,그렇게도 소중한 인간다움의 모든 가치의 원천이었던 코딜리아의 상실을 앞에 두고서 마지막 nothing'이 던져주는 의미는 단순한 죽음만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리어에게 이 세상에서 모든 의미 있는 것들의 상실을 표상하는 것이다.
2. 유토피아에서 인상깊은 제도와 그 의미 03040046 이가영세상이 혼란스럽고 민중들의 삶이 궁핍해 질 때마다 유토피아에 대한 이야기는 떠돌게 마련이다. 우리 나라의 미륵신앙이나 서구의 천년왕국은 초인간적이고 신학적인 방법으로 이상향을 제시하였고, 개인의 인격수양을 통해 지상낙원을 구현하고자 한 아르카디아 역시 민중이 꿈꾼 낙원 중의 하나이다. 수많은 유토피아와 달리 모어의 유토피아는 우리에게 신선하게 다가온다. 아마도 그 이전의 이상향들과는 달리 현실에서 인간이 겪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고 인간의 고뇌가 바탕이 되어 만들어진 독특한 제도와 그 제도의 구체적 실행방안을 제시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글에서는 유토피아 속에서 인상깊었던 제도와 그 의미를 생각해 보려고 한다.칼막스의 공산주의를 살펴볼 때 그가 살았던 19C의 열악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듯이 유토피아 안의 공유제도를 보기 전에 모어가 살았던 당시의 영국사회의 배경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장미전쟁으로 황폐해진 영국에 일어난 인클로저는 농민들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다. 생존권도 보장받을 수 없는 농민의 삶을 목격한 모어는 유토피아에서 공산주의 체제를 주장한다. 모어는 귀족 중심의 유토피아가 아니라 계급과 빈부의 차별이 없는 모든 사람이 평등한 이상적인 국가를 설정한다. 모든 것이 공동의 소유로 되어있는 유토피아에서 금전적인 속박에서 벗어나 정신적 해방을 실현시키려 한 것으로 보인다.유토피아에서는 모두 같은 옷을 입음으로써 인간의 허영을 단속한다. 또한 모든 보석을 유아의 장난감으로 삼음으로써 보석이 유치하다는 사회적 관념을 심게 만들며, 같은 방식으로 금 역시 요강이나 타구를 만드는데 사용함으로써 지저분한 이미지를 부여한다. 사회적 문제를 개인의 인격문제와 연관 시켜 풀어나가기 보단 인간성의 한계를 인정하고 법과 제도의 개혁을 바탕으로 해결하는 것이 인상적이다.유토피아에서 개인의 신념체계 안에서 선택한 종교는 모두에게 존중받는다. 종교가 인간의 삶에 자유를 주고 행복을 줄 때 의미 있는 것이라면 오늘날 종교는 많은 곳에서 인간에게 불행을 안겨주는 아이러니로 우리에게 비춰진다. 모어가 살던 그 당시에도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종교가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로써 사람들의 삶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수단으로 작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유토피아에서는 종교의 자유를 강조한다. 이와 함께 인간의 본성을 억압하는 종교는 좋지 않은 것으로 말하고 있고 이러한 종교를 믿는 사람은 간접으로 비난받고 있다. 중세시대의 종교관에 대한 비판의식을 찾아 볼 수 있다.유토피아에선 결혼전 선을 볼 때 나체를 선보이도록 되어있다. 이것은 인간을 정신적 존재로만 파악하려는 중세 사상에 대한 코믹한 반발이 아닌가 싶다. 인간이 정신적일 뿐만 아니라 육체적, 자연적 존재라는 것을 강조한 것 같다. 인간의 육체를 인정한데 이어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 - 식욕, 성욕에 대해서도 긍정적이다. 식욕과 성욕 같은 본능적 욕구는 르네상스 이전까지 억압당해 온 것이 사실이다. 유토피아에서는 인간의 감각적이고 즐거움이 부여된 여러 행위들을 죄악으로 보지 않고 신의 뜻에 합치되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고 있다.
안티고네-크레온 뒤집어보기아이스킬로스, 에우리피데스와 더불어 고대 그리스 3대 비극작가인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왕과 연결된 그리스의 고전으로 아테네의 발전 시기에 쓰여진 작품이다. 작가는 복잡하고 모순된 요소를 통찰력 있고 심오하게 표현하며, 모순된 요소간의 충돌을 통해 비극적인 진리를 제시하고 있다. 소포클레스의 작품은 신과 인간, 국가와 개인의 모순된 경험을 통찰력 있게 그려낸다고 평해진다. 이 작품에서 역시 안티고네는 개인의 양심, 천상의 법, 크레온은 국가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여지고 이 둘 간의 갈등이 주된 이야기이다. 하지만 안티고네를 세밀하게 읽어보면 일반적 평가와는 다른 개인적 특성과 성격이 발견되고 이 글에서는 이것을 토대로 하여, 다른 시각에서 두 인물의 대립구도를 살펴보고자 한다.안티고네는 그리스의 많은 비극이 그런 것처럼 인간과 신의 대질을 그 테마로 하고 있다. 직접적이고 경험 가능한 인간세계와 관조적이고 종교적인 신앙영역 천상계의 대결이다. 크레온이 선포한 명령은 아무리 잘못한 일을 한 자라도 인간으로서는 존엄하므로 보통사람과 똑같이 묻어줘야 한다는 하늘의 명령에 반한 것이었다. 하지만 크레온은 이 자연법적 명령에 반항함으로써 자기권력을 과시하려 하였다. 그의 권력은 남용되었고 결국은 아내와 자식을 잃고 권력까지 잃고서 죽은 바나 다름없는 삶을 살게 된다. 이것이 그가 받은 형벌이다. 이 글에서 안티고네는 크레온의 아집과 국가주의에 의해 희생된 희생량으로 묘사된다. 오빠의 시신을 거두기 위해 죽음도 두려워 하지 않는 그녀의 처연한 모습에서 우리는 인간존엄성의 정의와 양심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연 안티고네는 효성과 우애의 뛰어난 표본으로 정의와 양심의 수호자이고, 크레온은 모두를 불행의 덫으로 내몬 고집 센 통치자이기만 한 것인가?안티고네가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묻으려고 했을 때 여동생 이스메네는 이렇게 애원했다. 그럼 최소한 몰래 하기라도 해.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고... 나도 입 다물게. 하지만 안티고네는 고집했다. 아니 모든 사람들에게 큰소리로 말해. 만약 네가 입을 다물고 있으면 난 널 더 미워할거야. 이는 안티고네가 단순히 신의 명령을 따른다는 것 이상의 목적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게 해준다. 알리지 않고 조용히 의식을 치르고 매장함으로써 핏줄에 대한 예의를 다하고 양심을 지킬 수는 없는 일이었을까? 어쩌면 안티고네는 처음부터 시신의 매장 보다는 체포당함으로써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선왕의 핏즐임을 크레온과 온 시민 앞에 시위하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또한 고위적으로 크레온에게 잡힘으로써 그에 대한 경멸감과 증오를 드러내고 그를 갈등 상태에 빠뜨림으로써 복수하려 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