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줄거리거울에 반사된 빛이 공주의 집 천장에 새 한 마리로 변하여 날아다니는 것이 첫 장면이다. '홍종두' 그는 형의 뺑소니 사고로 형 대신 감옥살이를 하다 출소한다. 반팔 차림의 그를 처음 맞이하는 것은 차가운 바람이다. 전에 살던 집에 가보았지만 가족들은 이미 몰래 이사를 가고 난 후이다. 고기 집에서 배불리 먹고 낼 돈이 없다고 하자 가게 주인은 그를 경찰에 넘긴다. 그래서 가족을 만나게 되지만 가족들은 그를 멀리한다. 뺑소니 사고를 당한 피해자의 집에 사과를 하러간 종두는 공주를 만나게 된다. 다음날 다들 이사가고 난 낡고 초라한 아파트 거실에 혼자 뎅그러니 남겨진 장애인 한 공주와 다시 만나게 된다. 그는 공주가 예쁘다는 생각에 그녀의 몸을 만지려 한다. 공주는 일그러진 몸으로 그를 거부하다 실신하고 만다. 종두는 놀래 전화번호를 남기고 도망쳐 나온다. 혼자 남은 공주는 밤마다 보이는 창문 밖 나무 그림자를 무서워한다. 그래서 그녀는 무서움에 떨다 종두에게 전화를 하게 되고 둘은 다시 만나게 된다. 종두는 마법을 걸어 나뭇가지 그림자를 없애준다. 둘의 사랑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둘은 서로는 '공주마마'와 '장군'으로 부른다. 공주마마의 장군이 된 종두는 그 뒤 공주의 집에가 공주와 놀아주기도 하고 같이 외출을 하기도 한다. 종두가 일하는 형의 가게에 데려가 짜장면을 같이 먹기도 하고 노래방을 가기도 한다. 공주는 늘 자기가 뇌성마비 장애인이 아닌 평범한 비장애인으로서 종두의 여자친구인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다. 그에게 노래를 불러주고 장난도 치고 많은 사람 앞에서 팔짱도 껴보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다. 그런 상상 중 가장 마음 아팠던 장면은 노래를 불러주는 장면이다. 공주와 바깥 나들이를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힘들어 쪼그리고 앉아 있는 종두의 뒷모습을 보며 그녀는 그에게 '내가 만일 하늘이라면'이란 노래를 불러 준다. 그런 그녀의 소망은 그녀의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공주의 오빠부부는 공주가 장애인인 것을 이용하여 장애인 아파트를 사고 검사관이 올 때만 공주를 데리고 간다. 그런 오빠부부보다 공주를 더 사랑해 주는 사람이 바로 종두였던 것이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종두와는 달리 오빠내외처럼 공주를 바라본다. 식당을 가도 공주가 보기 싫은 몸이 비틀어진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영업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종두가 어머니의 생신 잔치에 공주를 데리고 가족 모임에 간 날도 장애인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어떠한가를 알 수 있다. 종두의 가족들은 일그러진 몸을 가진 공주의 모습에 놀라 종두에게 화를 낸다. 그러나 종두는 가족들의 눈치에도 불구하고 공주에게 밥을 먹이고 사진도 찍게 하려 한다. 종두와 공주의 사랑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예쁘게 만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종두와 공주가 나들이를 갔다온 어느 날 공주는 종두에게 무섭다고 가지 말라한다. 그러고 그 들은 잠자리를 같이하는데 그 때 마침 오빠내외가 들어오고 만다. 종두는 졸지에 성폭행 범으로 몰리고 경찰서로 잡혀가고 공주는 오열한다. 공주가 울기만 할 뿐 진실을 말하지 못해 종두는 감옥으로 다시 가게된다. 종두는 공주 옆에 오랫동안 못 있어 줄 것을 생각하며 경찰서를 도망쳐 공주의 집으로 향한다. 공주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하는 일은 공주를 만나는 일이 아니였다. 바로 공주가 항상 무서워하는 나무 그림자를 만들어 내는 그 나무의 가지를 잘라내는 일 이였다. 종두가 나무 가지를 잘라내는 것을 본 공주는 그에 답을 한다. 공주가 밤마다 무서움을 떨치기 위해 듣는 라디오 방송을 크게 틀고 라디오를 힘들게 창문가로 옮기는 것이 공주가 할 수 있는 답 이였던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감옥에서 종두가 보내온 편지를 공주가 읽는 것으로 마무리짓는다.2. 감상'오아시스'라는 영화가 개봉하기 전 친구가 영화 개봉하는 첫 날 바로 보러 가자고 제의했다. 나는 왠지 영화의 색깔이 어두울 것 같아 많이 망설였다. 전과자와 뇌성마비 장애인의 사랑 이야기라고 들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영화의 색깔이 밝다고는 생각 못할 것이다. 그런 대부분의 사람에 나 또한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예고편에서 '문소리'의 연기를 보고, 두 배우의 밝게 웃는 표정을 보고 내가 생각하는 그런 어두운 영화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해서 이 영화를 보게 된 것이다.우선 오아시스에 나오는 종두는 사회나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인물이다. 그가 출소했을 때 입었던 옷이 종두가 감옥에 들어갈 때 입었던 그 옷이라니.. 그가 언제 출소하는지 관심도 없고 언제 출소하는지 알았다해도 면회를 한번도 안 간 것이니 가족들이 종두를 외면했다는 말밖에 안 된다. 그런 그는 세상 밖으로 나오자마자 어머니의 옷을 사고 자기를 피해 숨어버린 가족을 찾아 헤매인다. 아무리 큰 죄를 지었다해도 가족인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알고 보면 형을 위해 대신 들어간 것인데, 종두는 형을 위한 마음으로 그 컴컴한 감옥살이를 했는데 형은 동생에게 고맙다는 말조차 하지 않고 쓰레기 취급을 한다. 형수가 종두에게 "미안한 말인데요, 난 정말 삼촌이 싫어요, 정말로 미안한 말인데요, 삼촌이 안 계실 때는 살 것 같았어요."라는 말을 하였을 때 나는 화가 났다. 종두가 그녀에게 무슨 잘못을 하였길래 가족을 사랑하는 종두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일까?우리의 세상은 언제나 그래왔듯 지금까지도 전과자에게는 차가운 세상인 것이다. 열심히 살아보려는 종두에게 기회조차 주지 않고 더 삐뚤게 나가게 만들어 버리는 세상이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이다. 전과자는 일을 해도 안되고 사랑을 해도 안 된다. 숨조차 쉴 수 없다. 그런 세상에서 내가 살고 있다는 것이 너무 가슴 아팠다. 오아시스의 '종두'는 그런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무리를 대표하는 인물 이였다.또 한 명의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무리, 바로 장애인이다. 공주는 이런 장애인을 대표하여 이 영화에 나온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천장을 날아다니던 흰 새, 그것이 공주의 상상이 였다는 것을 나중에 알고 나서부터 그 장면이 잊혀지지 않았다. 공주가 원하는 것은 공주의 상상 속에서나 가능했다. 모든 장애인들이 하고 싶어하는 것 바라는 것은 정말 다 상상 속 에서 밖에 할 수 없을까? 그 바램이 큰 것도 아닌데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노래를 불러주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장난도 쳐보고 사랑하는 사람의 팔짱을 껴보는 그런 소박한 소망이 장애인들에게는 이룰 수 없는 일이라는 사실이 너무 슬펐다. 나를 더더욱 슬프게 했던 건 공주의 오빠라는 사람이다. 혈육인 그녀를 이용만 할 뿐 온전한 맘만으로 사랑을 주지 않았다. 자기의 이익만 챙길 뿐 이였다. 그것도 자신의 동생, 장애인이라는 것을 이용하여 말이다. 어떻게 그런 가증스러운 행동을 할 수 있을까? 공주가 성폭행을 당했다며 종두를 죽일 놈으로 몰아가는 모습이 너무나도 가증스러웠다. 진정으로 공주를 사랑해 준 건 종두였는데 동생을 이용하고 버려 둔 오빠라는 사람이 그런 종두에게 욕을 할 수 있는 것인가 말이다. 그 사건 하나로 피해 보상금을 받으려하는 오빠내외는 이기적이고 물질만 추구하는 요즈음 의 우리 삶을 단편적으로 보여 주는 것 같다. 이 영화의 클라이막스 부분은 정말 안타까움 그 자체였다. 종두가 공주를 성폭행 하였다는 이유로 경찰서에 잡혀갔을 때 공주가 장애인이 아니 였다면 종두가 강제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을 텐데 공주가 울부짖기만 할 때 너무나 안타까웠다.경찰관이 종두에게 "저런 애를 보고도 성욕이 생기디?"라고 물었을 때 보통 사람들의 편견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생각했고, 공주를 무슨 이상한 동물처럼 보는 것 같아 화가 났다. 종두와 공주가 식당에 갔을 때도 사람들의 시선은 그러했고 종두의 가족 모임에 갔을 때 종두의 가족의 시선도 그러했다. 더러운 쓰레기처럼, 혐오스러운 무엇을 보는 시선 이였다. 장애인이라 해서 마음마저 장애를 가진 것은 아닌데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은 장애인을 사람도 아닌 사물처럼 취급하는 것 같았다. 사랑도 모르고 감정도 없고 생각도 못하는 그런 살아있지도 않은 것처럼 말이다.전과자라는 이유 하나로 장애인이라는 이유하나로 그들이 겪는 고통은 무척이나 컸던 것이다. 그런 둘은 서로의 아픔도 이해 할 수 있고 서로를 사랑 할 수도 있다. 그들은 서로를 '공주마마'와 '장군'으로 불렀다. 그 호칭을 듣는데 마음이 참 미묘했다. 공주라는 이름.. 공주가 자기 이름이 '공주'라고 종두에게 말할 때 극장의 사람들은 웃었다. 물론 나도 웃었다. 왠지 공주라 하면 얼굴도 정말 예쁘고 날씬한 여자라는 고정관념이 우리들의 머리 속에 박힌 탓일 것이다. 영화를 볼수록 공주는 외모는 아닐 지라도 마음만은 정말 공주 같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종두 역시 가족들이 자기를 처치 곤란한 쓰레기처럼 보는데도 공주만은 자기를 장군이라 불러 주며 의지하고 종두의 모든 것을 믿어 준다. 난생처음 받아보는 믿음에 공주를 더 사랑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두 주인공의 사랑이 아름답게 가장 아름답게 보인 장면은 종두가 공주의 창문 밖 나무를 베어주던 그 장면인 것 같다. 나는 그 장면에서 울고 말았다. 경찰서를 어렵게 도망쳐 나와 간 곳이 공주의 집이 였고 힘들게 그 집 앞까지 가서 공주를 늘 무섭게 만든 나무를 베어 버리는 장면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둘은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시민의 정부혁신론 이 책에는 크게 5개의 이야기가 나온다.먼저 첫 번째 이야기에 3명의 규수가 나온다.그중 세 번째 규수 콩쥐가 바로 21세기형 정부, 미래정부의 바람직한 모습을 시사한다.콩쥐가 쌀로 떡을 만들어 팔고, 그 수입원으로 다시 쌀을 사는 것을 되풀이하여 쌀을 늘려간다. 이는 가치 창출력을 지닌 정부를 시사한다.그리고 임금님은 사랑하는 왕자의 신부를 뽑는 과정에서 전국의 모든 규수에게 알리고자 하였다. 이는 정보를 공유화 함으로서 투명한 정부를 만들고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다.두 번째 이야기에는 이상국가와 현실국가가 나온다.우선 왼쪽 길은 평등을 오른쪽 길은 자유를 나타낸다. 어떻게 보면 북한과 남한을 생각할 수도 있겠다.첫 번째 나그네가 선택한 왼쪽 길은 원한다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국가, 빈부의 격차도 경쟁도 없는 완벽한 사회 복지 국가이다. 가장 이상적인 낙원에서 첫 번째 나그네가 얻은 것은 배불리 먹고 영원히 죽는 결과였다. 이는 극단적 사회 민주주의 또는 공산주의는 결국 붕괴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두 번째 나그네가 선택한 오른쪽 길은 21세기의 가장 특징적 현상으로 예상되는 자유와 경쟁이 치열한 사회이다. 이 사회는 평등한 사회보다는 경쟁력있는 사회를 지향한다. 이는 사회에서 보장받을 수 있는 기회가 점점 줄어든다는 말이다.세 번째 이야기에는 인간의 3가지 유형(거미형, 개미형, 꿀벌형)이 나온다.이 3가지 인간 유형은 정부 공무원의 공무 행위에 비유하여 비교할 수 있다.그중 가장 필요한 인간 유형은 단연 꿀벌형일 것이다. 자신의 일을 신명나게 열심히 하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는 사람이 이에 속한다. 하지만 현 정부에서 꿀벌형 공무 행위를 찾아보기는 어렵다.이 꿀벌형의 정부 공무원이 많아야 정부 혁신에 도움이 될 것이다.네 번째 이야기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사냥개가 나온다.여기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우리 현시대의 대통령으로 볼 수 있겠다.이승만, 박정희, 김영삼 이들 모두는 시민의 선택에 의해 자신들의 능력을 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시민의 선택 기준은 그 시기마다 크게 달랐다. 이승만을 선택하였을 때는 국가 생존을 위해, 박정희를 선택하였을 때는 경제 발전을 위해, 김영삼을 선택하였을 때는 정치발전을 위해서 였다. 때로는 그 기준이 명쾌하기도 하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을 만큼 이상하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것은 가장 합리적인 시민의 선택기준이었다고 생각해 본다.마지막 다섯 번째 이야기에는 애벌레가 나비로 변하는 이야기가 나온다.책에 나오는 애벌레가 나비로 변하는 과정은 과거 정부가 현재, 그리고 미래 정부로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 같다.이야기에서 곤충학자의 손에 의해 고치의 작은 구멍이 넓혀졌던 것처럼 누군가 나타나 갑자기 21세기의 작은 문을 크게 열어 줄 것을 기대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것은 첫 번째 애벌레처럼 오히려 매우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시민을 위한 진정한 민주주의의 틀 속에서 미래 지향적 가치관으로 시민들은 정부를 혁신시켜야 한다.21세기의 주인은 시민이다.대가 없이 사회를 위하여 봉사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며 그것이 주인으로서의 도리이다. 또한 시민은 자신의 권리를 당당히 요구하고 찾아야 한다. 정부는 시민의 의무와 권리를 위하여 혁신되어야 한다. 시민이 주인이며 그 주인들이 제대로 일을 할 수 있도록 성실히 돕는 청지기의 역할을 정부는 하여야 한다. 이런 정부가 바로 시민의 역량을 몇 배로 늘리는 부가 가치형 정부이며 시민 협동적 정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