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들어가면서 ,화려한 오늘날의 사회 속에서 재화와 물질은 사회 구성원을 측정하는 척도가 되고 있다. 타인의 기준 뿐 아니라 스스로가 임의로 판단하는 사회적 계급으로 여기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의 고질적 문제점인 빈부의 격차에 대해서는 이론적으로는 기준을 세우지만 실상은 잘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가난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놀랍게도 우리는 스스로가 매우 부족한 상태에 있다고 생각한다. “잘 살기” 위해서는 더 많은 재화와 물질이 갖추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단언컨대 그 만큼의 필요가 충족되어도 우리는 같은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우리가 가난을 모르는 동시에 가난한 이들은 부가 어떤 것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정확히 말하면 ‘부’를 원하기 보다는 당장 내일 아침에 먹을 음식과 마실 물이 충족되기를 원할 뿐이다. 가난은 로맨스가 아니라 현실이다. 가난은 문맹, 부적절한 의료혜택과 질병, 뇌손상을 야기한다. 그들은 절망하고 매일을 희망에 목말라하며 살아간다. 우리의 상상으로는 그 고통을 이해할 수 없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물질의 정도를 예측할 수 없다. 그들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우리의 집안의 모든 가구를 없애고 입을 옷과 먹을 음식과 그밖에 우리가 당연히 여기며 누리고 있는 물질들을 모두 없애고 매일 매일을 먹을 것과 입는 것, 마실 것의 걱정으로만 연명해야 한다. 실로 부익부 빈익빈 시대는 물질의 차이 뿐 아니라 의식의 차이로 인해서 그 차이를 좁히는 데에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요구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의 인식은 얼마나 차이가 있을까?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서 꾸이는 것이니 (잠 19:17)” 라고 말씀하신다. 우리에게 정의를 요구하시고 그들을 위해 헌신할 용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그것들을 얼마나 갖추고 있을까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수많은 광고와 주변의 유혹들은 풍요로운 현실이 우리 삶에 주어지는 당연한 조건이라는 듯 유혹한다. 상상이 아닌 현실때문이라고 한다면 그들은 그러한 불평등한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재화의 평등을 위해 얼마나 기여하고 있을까.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중 하나이지만 서구의 주요 대외 원조 제공국 중 그 어떤 선진국 보다도 낮은 원조율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인의 69%는 미국이 다른 선진국들보다 대외 원조에 더 관대하다고 생각한다. 더 많이 가진 만큼 더 많이 베풀겠지 하는 생각은 각자가 갖고자 하는 관대한 이미지의 포장일 뿐이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그들의 수입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가난한 자들에게 베풀 마음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오히려 늘어나는 수입을 군사비용으로 지출할 뿐이었다. 이렇듯 풍요로움에 대한 자기만족과 합리화는 우리 사회에 있어서 조금의 도움도 되지 않았다. 우리의 정의는 어느 지점에 와있는가?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써 하나님의 정의를 얼마나 의식하고 살고 있는가?가난한 자를 도우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의 편에 서시고 예수님께서 언제나 가난한 자들의 친구가 되어 주시고 그들을 도우신 것은 그들을 편애하시기 때문일까? 부를 누리는 풍요로운 자들은 예수님의 친구가 될 수 없는 것인가?하나님은 출애굽의 역사 속에서 억눌린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해방의 역사를 이루셨고 그들을 자유롭게 해주셨다. 출애굽 때에 하나님은 경제적 억압을 종식시키고 노예들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역사하셨다. 물론 그것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출애굽 역사의 전말은 아니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은 언약과, 하나님 스스로를 계시할 수 있는 특별한 백성을 만들기 위함 이라는 중요한 이유 때문에 역사하신 것이다.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정착했을 때 그들은 언약의 율법에 순종하지 못하여 하나님의 정의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난한 자들을 학대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멸망시키셨음을 말한다. 우상 숭배 또한 멸망의 원인이기도 했지만 우리는 우상숭배라는 이스라엘의 영적 문제만을 기억하는 이유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눅 4:18-19)”예수님의 실제 사역은 누가복음 4장의 말씀과 일치한다. 문둥병자와 버림받은 여인들, 소외된 사람들을 섬기고 그들을 치유하는 데에 예수님께서는 삶을 바치셨다.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을 취하시고 육신으로 세상에 임하신 엄청난 역사의 새로운 시작점부터 가난한 자들, 억눌린 자들을 위해 그들을 해방시키시고 그들을 보호하셨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가난한 자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는 주된 이유다. 성경 전체에 걸쳐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을 입히시고 보호하시고 치유하신다. 그러한 하나님의 정의는 구약 뿐 아니라 신약속에서도 예수님의 공생애 삶을 통해서도 반증된다. 가난한 자들, 힘없는 자들을 보호하는 것은 하나님의 부탁이나 제의가 아닌 명령으로 표현됨으로서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이 그들에게 있음을 알 수 있다. 더욱더 적극적인 표현으로서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과 하나님을 동일시하신다.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등의 잠언의 말씀은 우리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역사를 이루실 때 특별한 도구로 택하신 대부분의 자들은 가난한 자들과 부족한 자들이었다.그에반해 부유한 자들은 하나님의 정의 안에서 배척당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누구를 차별하시거나 적을 두지 않으신다. 그렇다면 왜 부유한 자들에게는 그렇게도 엄히 다스리려 하셨을까? 왜 가난한 자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셨을까?역사는 현재를 반증한다. 성경이 과거와 진리의 기록이라는 이유로 현재와 동떨어진 이해를 요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과장된 해석이다. 현실은 어떠한가, 서두에서 보았듯이 부유한 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들의 늘어가는 수입을 경제의 평등을 위해 쓰지 않는다. 생각만 그렇게 함으로서 그들의 풍요로움을 의식 혹은 무의식적으로 정당화. 이것이 하나님께서 부유한 자를 멀리 하시는 첫 번째 이유라고 나의 임의대로 구분지어보겠다.우리는 부족할 때에, 어려울 때에 하나님을 찾는다. 성경은 사유재산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는 열심히 일하고 노력하여 얻는 상을 값지다고 말씀 하시면서도 부를 멀리하라고 말씀하신다. 우리에게 있어서 돈은 어떠한 가치가 있는가? 재산은 생활을 영위하게 해주면서도 우리의 필요를 채워줌으로써 부족함을 채워주기도 한다. 부족한 것이 채워질수록 끝없이 늘어나는 것이 인간의 탐심이며 하나님을 잊게 되는 것 또한 인간이다. 염려하지 않는 삶은 곧 하나님과의 관계에의 망각을 낳는다.“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눅 12:16-21)”예수님께서는 농부의 비유를 통해 모든 소유가 하나님에게서 난 것임을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역을 과소평가 하곤 한다. 신앙과 현실사이에 거리를 두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역은 경제생활 까지도 지배하신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역이며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경제생활 또한 하나님의 정의를 구하고 그것에 충실해야 한다. 희년을 선포하신 것 또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경제 정의를 말한다.부유한 자들이 그들의 소유를 가난한 자들과 공평히 나누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회주의를 두둔하시기 때문이라는 서투른 판단은 오류를 낳는다. 하나님께서는 사유재산을 인정하신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사유재산이 있음에도 불없는 운명을 타고 났다 라든지 지나친 평등에 의해 사회주의에 빠진다든지 하는 등의 비성경적인 세계관이나 경제관념은 우리에게 더욱더 성경적인 관념을 촉구한다.재난을 통해 가난해진 자도 있다. 태풍과 지진, 홍수 등의 자연재해는 피할 수 없었던 자들로 하여금 가난과 궁핍한 삶을 야기한다. 이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책임이 없다. 단지 그들을 도와야 할 필요성만이 요구될 뿐이다. 발달된 과학기술이 가난한 자들에게 미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들에게 필요한 적절한 과학기술은 그들이 그것을 습득하고 이용할 때에 가난을 줄일 수 있는 한 가지 방책이 될 수도 있다. 권력의 불평등은 물질의 불평등을 야기한다. 오늘 날에는 풍부한 식량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주로 갖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그것을 전혀 누리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 이것이 가장 부한 자와 빈한 자의 급격한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권력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부패하는 경향이 있으며 빈곤을 낳는 부당한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제도가 생겨나게 된다. 빈곤의 근본 원인 중 하나를 이해하려면 어떻게 불평등한 권력이 사회적 죄 혹은 구조적 불의를 자라게 하는지를 반드시 알아야만 한다.오랫동안 지속되었던 식민 정책은 세계의 경제가 기울도록 만들었고 권력을 가진 나라의 권력 남용은 가난한 나라로 하여금 점점 더 커져가는 부채의 위기로 내몰았다. 가난한 나라는 한없이 가난할 수밖에 없고 권력을 가진 나라는 권력에 비례한 부를 소유하게 된 것이 이 세계의 경제 원칙인 것처럼 둔갑해버렸다. 개발도상국들은 분명 빌린 외채에 대해 오용하기도 하고 낭비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한 원인들이 그들의 가난을 대표하는 전체적인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부채를 상환하느라 자기 나라 어린이들이 받아야 할 기본적인 교육의 기회마저 줄여가고 그들이 당장 먹을 음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부유한 나라에 음식을 공급하는 기이한 현상마저 생기게 되는 구조적 불의는 가난한 나라로 하여금 점점 더 심한 가난을 만들었다.또 다른 문제는 그러한 구조적 불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