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ORT- 명, 조선, 가마쿠라 막부의 정치체제제출일 :강의명 :교수명 :학 과 :학 번 :이 름 :목 차Ⅰ. 명1. 명의 성립2. 명의 정치가. 홍무제의 정치나. 명나라 중앙정부의 조직 및 각 관직의 품계Ⅱ. 조선1. 중앙의 정치 체제가. 의정부 서사제와 육조직계제나. 비변사와 이조전랑 자대제2. 지방 행정 조직가. 관찰사와 수령나. 향리(鄕吏)와 토관(土官)다. 면리제3. 양반 관료제가. 유품(流品)나. 양반 관료제의 특징4. 과거제와 학제가. 과거제나. 학제Ⅲ. 가마쿠라 막부1.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2. 가마쿠라 막부 정치의 주요 개념가. 고케닌 제도나. 지토(地頭)와 슈고(守護)다. 싯켄(執權) 정치라. 가마쿠라 막부의 직제마. 은혜와 봉공Ⅳ. 참고자료Ⅰ. 명1. 명의 성립명의 태조 주원장은 원나라의 정치가 문란하고 국력이 쇠진한 틈을 타 한족 국가 부흥의 기치를 높이 내걸고 일어난 백련교의 한산동·유복통을 수령으로 하는 곽자흥의 부하가 되었다. 주원장은 차츰 공을 세워 두각을 나타내면서 장사성·방국진 등의 군웅을 물리치고 1368년 명나라를 세워 남경에 도읍하였다.홍무제는 원의 잔존세력인 북원을 제거하기 위해 몇 번 몽고에 원정군을 파견하였고 1388년에는 노몬한 부근에서 그 본군(本軍)을 섬멸하였다. 그 이후에도 자주 파병하여 내몽고의 요지를 점거하였다.2. 명의 정치가. 홍무제의 정치중국을 통일한 홍무제가 정치적으로 주력한 것은 첫째, 오랫동안의 전화에 시달린 백성들에게 휴식을 제공하여 생산을 촉진시킨 일이었다. 홍무제는 백성들에게 휴식을 제공하고 생산을 촉진시키는 정책으로 세금의 경감과 면세를 실시하였다. 특히 수리 사업에 주력하여 생산을 장려하고 백성들의 생활 안정에 역점을 두는 정책을 폈다. 동시에 측근 유자(儒者)들의 헌책(獻策)에 근거하여 몽고의 풍속, 습관의 일소를 꾀하였고 전통적인 유고의 이념에 의한 한민족왕조의 재건을 목표로 하였다.홍무제의 또 다른 정책으로서 특필할 만한 일은 행정기구를 정비하여 권력을 황제에게 집중시킨 일이의 부 수장. 조선시대의 참판과 비슷함.정 5품:각사난중(各司郞中)육부 아래의 경력사 (經歷司, 육부 아래의 실무를 담당한 부서. 한 부에는 각기 4~13개의 경력사가 존재했음.) 의 수장종 5품:각사외랑(各司外郞)각사난중을 보좌하는 관료.정 6품: 주사 (主事)실무 담당자종 9품: 사무 (司務)6부 내의 각종 사무업무를 담당하는 사무청(司務廳)의 하급관리종 8품: 조마기록을 담당하는 조마청의 1급 서기정 9품: 검매(檢枚)조마청의 2급 서기무급: 리 (理)육부의 잡무를 담당하는 하급 실무자. 육부에는 각기 47~183명의 리가 근무했다.도찰원(都察院)명나라 중앙정부의 감찰기관. 또한 관리의 임무수행능력을 평가하기도 했다.정 2품: 좌(左), 우(右) 도어사(都御司)도찰원의 장관정 3품: 좌(左), 우(右) 부도어사(副都御史)도어사의 부 수장.정 4품: 좌(左), 우(右) 첨도어사(僉都御史)도찰원의 보좌관종 6품: 경력 (經歷)도찰원의 기록을 담당한 관리.정 7품:감찰어사(監察御史)도찰원에서 실제로 감찰을 수행한 관리로 각기 관할구역의 감찰을 통괄했다. 감찰어사는 주로 지방의 성(省)을 맡아서 감찰을 수행했다. 도찰원에는 총 110명의 감찰어사가 존재했다. 조선시대의 암행어사와 비슷한 존재로 이들은 감찰결과를 직접 황제에게 보고했다.종 7품: 조마(照磨)도찰원의 서기국자감(國子監)정부에서 운영하는 교육기관을 총괄한 기관.종 4품: 제주(祭州)국자감의 총장정 6품: 사업(司業)학문연구를 총괄한 관리.종 8품:오경박사(五經博士경전을 연구한 학자.종 8품: 조교(助敎)국자감의 교수. 국자감에는 총 32명의 조교가 있었다.정 8품: 학정(學正)2급 강사.종 9품: 학록(學錄)3급 강사.과(科)6부의 감찰을 맡은 하급 감찰 기관. 과는 이과, 호과, 형과, 예과, 병과, 공과, 의 6개 부서로 나뉘어 각기 맡은 부의 문서를 검토했다. 과에서는 또한 각 부의 정책을 거부할 권한이 있었다. (정당한 이유가 있다면.) 과의 관리들은 품계 상으로는 하급관리였으나, 황제에게 직 때는 홍문관까지 합세시켜 삼사 합계를 하는 일도 있었다. 홍문관은 문한(文翰)을 관장하는 기관인데, 이 삼사는 고관은 물론 왕으로부터도 언론과 문필의 자유가 보장된 기관으로서 왕권의 전제와 관료의 전횡을 견제하고 있었다.의금부는 국왕의 직속 사법기관으로 왕명에 따라 왕족의 범죄, 국사범이나 반란 역모 등 중대 옥사, 사헌부가 탄핵한 사건, 강상(綱常)의 죄, 중외에서 장기간 처리하지 못한 사건 등을 다루었다. 이 밖에 왕의 교서 등을 짓는 예문관, 외교문서를 짓는 승문원, 시정을 기록하고 국사를 편찬하는 춘추관, 경적(經籍)의 출판을 관장하는 교서관(校書館) 등의 4관(四館)이 있었다.한편, 중추부와 오위도총부는 서반 최고의 정책 결정에 참여하는 기관이었다. 이 중에서 중추부는 군사상의 기밀을 관장하는 최고 관부였으나 곧 유명무실해졌다. 따라서 서반의 실질적인 최고 관부는 오위도총부였다. 그러나 그 장관인 도총관(都摠管)은 문관이 겸직하고 있었으므로 결과적으로 무반을 포함한 모든 권력이 문반에 집중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이 시대 정치 권력은 국왕을 정점으로, 의정부와 육조와 삼사가 서로 견제하면서 균형을 유지하였다. 국왕은 전제적 왕권을 가졌다고는 하지만, 의정부 합의제에 의한 의결권이나 대간의 간쟁 서경 등의 견제를 받았다. 반면, 의정부는 의결권을 행사하면서도 왕권의 견제를 받았으며, 육조는 행정권을 행사했지만 대간의 감찰권이 이를 견제하였다. 그러나 중기에 이르러 비변사의 설치와 이조전랑 자대제의 실시로 중앙의 권력 운영 방식은 크게 달라진다.나. 비변사와 이조전랑 자대제비변사는 1517년(중종 12)에 북방의 여진과 남방의 왜구 침입에 대비해 설치된 임시 군사 기구였다. 비변사의 설치는 중종 12년 6월 경술, 정광필·김웅기·신용개가 말하였다. 여진에 대비하여 성을 쌓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정승 가운데 한 사람이나 모두 함께 의논해서 조치하도록 하시고, 이름은 비변사라 하십시오. 라는 중종실록의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비변사는 잠시 폐지되었다있었다. 수령의 임기는 3년이고, 역시 출신지에는 임명되지 않았다. 수령의 임무는 대개 농업의 장려, 호구의 확보, 교육의 진흥, 군정(軍政)의 수비(修備), 부역, 사송(詞訟) 및 향리의 지휘 감독 등으로 요약된다. 수령에 대한 관찰사의 근무 평정은 4등급으로 중앙에 보고되었다. 이를 전최(殿最)라 하는데, 그 성적은 승진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당상관으로 승진하려면 반드시 수령을 역임해야 했으므로 수령의 근무 평정은 당상관 진출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한편, 관찰사나 수령의 부정, 토호의 불법, 민생의 상황 등을 살피기 위해 중앙에서 행대감찰 (行臺監察)을 지방에 파견하는 일이 많았다. 이른바 암행어사는 뒤에 이것이 제도화된 것이라고 한다.나. 향리(鄕吏)와 토관(土官)관찰사와 수령 밑에는 중앙의 육조 체제를 본떠 육방(六房)을 두고 지방 행정의 실무를 담당하게 했는데, 그것이 향리이다. 향리는 아전(衙前)이라고도 하였다. 비록 신분은 낮았으나 수령과 백성의 중간에 위치해 그 세력은 대단하였다. 지방의 중요 사무는 호장(戶長)과 이방 형방이 관장했으며, 이들을 일명 삼공형(三公兄)이라 하였다.조선 초기에는 관청의 기강이 엄해 향리의 부정 부패가 적었다. 그러나 중기 이후 기강이 해이해지면서 향리가 수령과 결탁, 마음대로 사욕을 채웠다. 사실상 토지나 녹봉을 주지 않은 제도상의 결함이 부정 부패의 요인이었다. 게다가 수령들은 대개 사무에 어둡고 임기가 짧았으므로 고정직인 향리가 지방 행정의 실권을 쥐고 튼튼한 토착세력으로 자리잡은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정약용(丁若鏞)은 이러한 수령과 향리와의 관계를 강류부전석(江流不轉石) 이라고 비유하였다. 수령은 흘러가는 강물과 같은데 향리는 구르지 않는 돌과 같다. 는 뜻이다. 수령은 행정 이외에 군직을 겸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행정적 속료(屬僚)인 이서(吏胥) 외에 군사 속료인 군교(軍校) 사령(使令) 등이 있었다.한편, 특정 지역에 토관의 제도가 있었다. 토관을 둔 곳은 평양과 영흥을 비롯, 육진(六鎭)과 경성 )과 참하관이 그것이다. 당상관은 정3품 중 문관의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상, 무관의 절충장군(折衝將軍) 이상의 고급 관료이다. 당하관은 정3품 중 문관의 통훈대부(通訓大夫), 무관의 어모장군(禦侮將軍) 이하의 관료를 말한다. 그리고 정5품 종6품을 참상관, 정7품 이하를 참하관이라 하였다. 참하에서 참상으로 오르는 것을 승륙(陞六)이라 하여 승진의 한 관문이 되었다.당상관은 고급 관료로서 인사권 포폄권(褒貶權) 군사권 등 여러 특권을 가지고 중요 국정에 참여할 수 있는 지위였다. 고려 귀족 사회가 불과 10여 인의 재추(宰樞)에 의해 국정이 의결된 데 비해 조선의 양반 관료는 많은 당상관에게 여러 특권을 부여하였다. 또 참상 이상이라야 지방 수령이 될 수 있었고, 수령의 역임은 당상관 승진의 필수 조건이기도 하였다.관직의 명칭은 계(階) 사(司) 직(職)의 순으로 나타냈다. 관직에는 정해진 품계가 있지만, 품계와 직임이 일치하지 않은 경우를 위해 행수법(行守法)이라는 것이 있었다. 즉, 품계가 높고 직임이 낮으면(階高職卑) 행(行), 그 반대로 품계가 낮고 직임이 높으면(階卑職高) 수(守)라 하였다. 문관의 인사는 이조에서, 무관의 인사는 병조에서 맡았으므로 이조와 병조를 합해 전조(銓曹)라 하였다. 관료의 근무 평정에 따라 승진 전보 퇴임 등 인사 행정을 했는데, 이를 도목정사(都目政事)라 하며 매년 6월과 12월에 시행하였다.두 전조에서는 후보자 3인씩을 전형해 국왕에게 천거하는데, 이를 삼망(三望)이라 하였다. 그리고 국왕이 그 중에서 적격자를 결정하는 것을 낙점(落點) 또는 비하(批下)라고 하였다. 관료의 임명에는 이 밖에도 서경이라는 절차가 있었다. 즉, 전조에서 해당자의 친족 외족 처족 등 3족의 부 조 증조 외조 등 4조(四祖)를 대간(臺諫)에게 보내어 3족의 4조에 하자가 없음을 확인받은 후에야 직첩이 발급되는 절차였다.나. 양반 관료제의 특징조선 시대 양반 관료제의 몇 가지 특징을 들면 다음과 같다. 인재 등용에서의 과거 중시, 엄격한 한품서같았다.
감상문- 를 보고 -제출일 :수업명 :교수명 :학 과 :학 번 :이 름 :‘트라우마’는 심리학적 용어로 정신적인 외상이나 영구적인 정신장애를 남기는 충격을 뜻한다. 보통 어릴 때 받은 심한 정신적 충격으로 성인이 된 후에도 그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말한다. 이 연극은 그러한 트라우마를 지닌 한 가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다.제목과 무대를 보고 ‘이 이야기는 비극이겠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무대의 뒷면은 책이 가득한 책장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후면 중앙에는 계단이, 후면 좌측에는 빨간 욕조하나가 핏빛 분위기를 풍겨냈다. 계단을 통해 무대의 높낮이에 변화를 주어 입체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빨간 욕조는 욕조뿐만 아니라 욕조 주변의 바닥에도 붉은 칠이 되어 있어 욕조에서 반드시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야 말 것 같았다. 전면 우측에는 찢어낸 종이가 철사로 휘감긴 의자 주변에 수북이 쌓여 있었고, 전면 좌측에는 매트리스조차 없는 딱딱한 침대가 놓여 있었다. 무대를 가득 메우고 있는 책, 종이, 양초, 전등 등의 오브제를 활용한 극적장치들은 극의 분위기와 전개를 암시하고 있었다.연극의 시작과 함께 불이 꺼졌다. 어두워진 시야에도 불구하고 조금 전에 보았던 무대의 잔상과 함께 흐르는 묘한 건반연주는 관객들을 긴장시키기 충분했다. 무대에 불이 들어오자 객석 바로 앞에 엉거주춤 서 있는 배우가 보였다. 얼핏 보아도 지친 기색이 역력한 담요를 둘러쓴 노인이었다. 그는 한참동안 관객을 쏘아보다가 2층으로 올라가 욕조 속에 들어가서 전등을 켰다. 전등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그는 ‘미’를 부르다가 잠이 든다.연극은 이렇게 대마에 중독되어 정신을 잃고 폐인이 된 아버지의 등장으로 시작했다. 이어 이란성 쌍둥이 ‘미’와 ‘광’이 등장하고, 그들은 알 수 없는 놀이를 반복한다. 외진 산장에 숨어 현실과 극단적으로 격리된 채 살아가는 이들에게 유일한 소통은 놀이의 반복과 책읽기밖에 없다. 천진난만하게 시작된 그들의 놀이는 서로를 죽이는 놀이까지 이어진다. 이들의 소통은 애매하고 모호하기 그지없었다.하지만 길 잃은 등산객인 ‘인’에 의해서 그 모호함이 풀린다. 약 3년 만에 손님을 맞이한 그들은 그들의 놀이에 등산객을 동참시킨다. 하지만 의사인 그 등산객은 ‘미’가 빈 산장에서 혼자 그림자놀이를 하고 있다고 말한다.순간 미가 처음 등장했을 때가 떠올랐다. 미가 촛불을 켜자, 그의 오빠인 ‘광’이 돌아왔다. 즉, 미가 촛불을 켬과 동시에 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아파서 잠들어 있던 오빠, 미에게 살해당한 오빠가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관객이 보아온 미와 광의 이해할 수 없는 둘이 한 몸이 되어서 노는 놀이까지 모든 것이 해석되었다. 그들이 한 몸이 되어 노는 놀이에서 관객은 미의 상반신과 오빠의 하반신, 혹은 미의 하반신과 오빠의 상반신, 혹은 둘이 엉켜서 노는 장면을 본 것이 아니라 ‘미’ 혼자만의 그림자놀이를 봤던 것이다.집사에 대한 기억에서 ‘파티’를 했다는 미의 대사로 말미암아 그들은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무정부주의자인 아버지가 결국 ‘양복입은 사람들’, 즉 정부요원들에 의해 밟히고 개처럼 끌려다니는 모습을 본 미는 그때 들은 애국가만 들으면 울게 된다. 결국 그 트라우마에 의해 애국가가 들리던 어느 날, 미는 오빠를 살해하게 된다. 그 후 체제 앞에서 힘을 잃은 아버지는 모든 것을 버린 채 딸을 데리고 외딴 곳의 산장으로 들어가서 살게 된다.폐인이 된 아버지는 체제의 거대한 힘 앞에 거세당한 부권의 상징이었다. 아버지는 그 곳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그 트라우마를 벗어던지지 못한 채 대마에 중독된 채 겨우 목숨을 연명한다. 폭력적인 세상에서 벗어나 자신을 가두고자 했지만 결국 그 사슬을 끊어내지 못한 채 등산객에 의해 묻어둔 ‘상처’, 즉 살인의 기억을 떠올리게 된 딸 ‘미’에 의해서 죽는다.미 역시 자신의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하고 인을 살해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텅 빈 무대 위에서 다시 광을 불러내어 익숙한 그의 목소리를 환각하며 불안정한 안정을 되찾아간다. 살인을 저지르는 그녀는 세상의 폭력이 낳은 희생양이다. 또 갑갑한 일상을 벗어나는 유일한 ‘소통’의 길이었던 책 속의 지식은 인에게 가하는 폭력의 질료가 된다. 여기에서 우리 삶의 비극과 모순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들은 문답에서 ‘진실을 한 번 보기만 하면 인간은 어느 곳에서나 존재의 소름끼치는 부조리를 깨닫게 된다. -니체’라고 했다. 슬쩍 지나가는 대사에 농축된 주제가 이제야 가슴에 와 닿았다.광기로 시작해 죽음으로 끝나버린 두 시간이었다. ‘폭력’에 관한 연극은 주로 잔혹극이나 부조리극의 형태를 띤다. G. B. Tennyson은 부조리극을 갈등의 해결이 중점이 되는 사실주의극과 다른 실험주의적극이며, 부조리극은 갈등의 해결보다는 제시에 그치는 작품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는 폭력이 노출과 상징에 그친 것이 아니라 간접적이나마 이야기의 서사성까지 표현해내지 않았나 싶다. 각종 오브제들을 활용한 -갑자기 튀어나오는 쇠사슬과 샤워기- 연극의 화려함, 그리고 현실과 환상의 모호한 경계로 인해 바로 깨닫기는 어려웠지만 곰곰이 생각해보자 유복한 집안, 그러나 집사영감의 억압아래 있었던 유년시절과 아버지의 권력상실, 그리고 미의 살인행위로 말미암은 트라우마가 생겨난 이유와 그로인한 아버지의 대마 중독과 미의 연쇄살인이라는 결과, 이러한 서사과정을 유추해낼 수 있었다.하지만 역시 극은 이야기가 아닌 여동생의 의식의 흐름을 쫓고 있었다. 자신이 살해한 광을 촛불을 켬으로써 환각으로 불러내고,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주지 않는 아버지와 인을 살해하고 다시 그림자놀이를 시작한다. 불운한 삶은 환상으로 이어지고, 환상에서 소녀를 현실로 이어주는 끈이 나타나면 그 끈을 잘라버린 채 다시 환상으로 돌아가 안심한다. 극은 공연 내내 주인공의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지워버림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묘한 스릴과 서스펜스를 자아내게 한다.
소설 분석과목명 :교수명 :학 과 :학 번 :이 름 :는 사랑에 아픔이 있는 두 남녀가 이야기를 교차시켜가며 인간관계를 표현한 글이다. 하지만 모든 이야기를 순서대로 풀어놓지 않는다. 소설은 여자와 남자가 부석사로 가기 위해 여자의 단골 카페에서 만나는 것부터 시작된다. 작가는 현실과 과거의 이야기를 교대로 연결시켜가며 현재와 지금의 현재가 있기까지 그들의 과거를 그려나간다. 이러한 구성방법은 이야기를 지루하지 않게 만든 탁월한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작가는 1월 1일의 만남에서 남자의 장갑을 본 여자가 P에 대해 회상을 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P의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P는 매년 겨울마다 여자에게 장갑과 목도리를 선물했으며 P와 사귀는 동안 알아낸 P의 특징들이 열거되어 나온다. 다음이 장갑을 통해 P를 회상하는 부분이다.장갑이 없는 자신의 맨손바닥을 비비는 그녀의 뇌리에 P가 스쳐지나간다. 언제나 P에 대한 추억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인지. 겨울이 시작될 무렵이면 머플러와 새 장갑을 챙겨주곤 했던 P.공중전화 부스나 찻집에 놓고 오면 다시 새걸로 마련해주곤 했던 P였다. 그녀와 만나기로 한 사람들이 약속시간 이십분을 못 넘기고 돌아가버렸을 때도 그녀는 P를 생각했다. P는 단 한번도 그러지 않았으므로. 신호등 앞에서 길을 건널 때면 P는 눈은 찻길 쪽을 보면서 한쪽 팔을 뻗어 도로를 가로막곤 했다. 그녀를 보호하려는 자연스런 자세였다.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땐 반찬이 담긴 그릇들을 그녀 앞으로 밀어주었고, 밤길이면 그녀 혼자 보내는 법 없이 집앞까지 바래다주었다. 그게 여의치 않을 땐 집에 무사히 도착했는지 확인하는 전화를 한번도 거르지 않았다. 그녀가 머리가 아프다고 하면 그의 몸은 벌써 약국을 향해 돌아서 있었다. 그들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공인받은 커플이었다. 어쩌다 모두들 함께 어울려 캠핑이라도 갈라치면 친구들은 P와 그녀를 한 텐트에 몰아넣지 못해 안달이었다. 어느날 그가 다른 여자와 약혼을 하고 결혼을 할 줄은 친구들은 물론이고 그녀로서도 생각지 못했다. 수영복을 사러 갈 때조차 동행하는 P였기에 그녀는 다가올 미래 어디에나 P가 동행할 줄 알았다.P와 만나는 긴 시간동안 있었던 일들이 한 문단 속에 요약되어 있다. P는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을 했고, 이 회상의 내용은 작품 시작 시기보다 앞서 있으므로 소급제시 중 외적회상이 된다. 한편 바쁜 종업원을 뒤로하고 그녀와 남자는 길을 떠난다. 차에 탄 남자가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그녀의 개를 스스럼없이 만지자 그녀는 그가 친근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개를 얻게 된 경위에 대한 외적회상이 이어진다. 이것은 후에 나오는 그의 박PD에 관련된 개의 외적회상과도 연결되며 그에 대한 복선이라고도 할 수 있다.그들은 길도 모르면서 지도를 보고 부석사로 떠난다. 여기에서 또 외적 회상이 나오며 P에 대한 기억이 떠오른다. 그녀는 지도를 보지 않고도 어디든 찾아다니고 고속도로를 달리며 실컷 욕을 퍼붓기도 한다. 그녀는 그 울분이 P에 대한 것인지 세상에 대한 것인지 모른다고 말하지만 후에 나오는 모조리 어깃장을 놓아 버리고 싶은 충동 에 시달리는 것이 P때문이었으니, 그 울분도 P에 대한 울분이 아닐까?지도에 대한 외적 회상에서 돌아온 그녀는 남자가 지난 밤 잠시 검색했다면서 부석사로 가는 지방도로의 번호와 거리들을 외우는 것에 놀란다. 그녀가 남자에게 부석사 나들이를 제안한 것도 P때문이다. 부석사 가는 길도 모르면서 남자에게 전화를 걸었던 건 나흘 전이다. 로 시작하는 외적 회상에서 P는 그녀에게 꽃바구니를 선물하며 1월1일 5시에 찾아오겠다는 카드를 남겼다. 이 외적 회상은 P의 카드를 보는 그녀의 의식에 오가는 생각들이 끝없이 서술되는 멈춤이다. P를 만나면 성격상 마음이 누그러질 것 같았던 그녀는 남자에게 전화를 하고 꽃바구니와 카드를 없앴다.운전을 잘하냐는 짤막한 대화 뒤, 그녀는 다시 외적회상 속으로 들어간다. 기계치인 그녀가 P와의 결별 후에 면허를 한 번 만에 땄다. 남자는 말이 없고 그녀는 그를 만난 날을 회상한다. 아침에 산길로 산책을 하다가 야채서리를 하는 남자를 만났다.가지가 툭툭 잘린 플라타너스 길에서 그들은 여자가 싸온 도시락을 함께 먹는다. 음식을 맛없게 먹던 P에 비해 이 남자는 밥을 맛있게 잘 먹는다. 친밀감이 더해진 그녀는 그의 입가에 묻은 밥알을 떼어준다. 점심 식사 부분은 비교적 현재의 스토리가 길다. 외적 회상부분에 과거 시제가 사용된 것에 반해 정상적 연쇄 부분은 현재 시제가 쓰여서 현장감이 더욱 느껴졌다. 남자가 여자를 대신해 운전석에 앉는다. 여자는 약속을 지켰다면 지금쯤 P는 오피스텔에 와 있을 것 이라는 예상을 하며 풍경에 눈을 돌린다.국도는 곧 단조로워진다. 드문드문 눈에 띄던 식당들과 슬레이트 집들도 보이지 않는다. 구불거리지 않고 직선으로 뻗어 있는 국도 양변에 가로수들이 벌거벗은 채 서 있다. 가로수 뒤로는 황량한 논이다. 그녀는 직선으로 쭉 뻗은 국도를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내다본다. 이따금 만나곤 하던 강물은 이제 아예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물은 사라지고 양편에 겨울논들이 펼쳐져 있다. 논의 이곳저곳엔 추수를 마치고 걷어가지 않은 낟가리들이 모양새 없이 세워져 있다. 그 어느쯤에 기다랗게 서 있는 전신주에 참새들이 열지어 내려앉아 있다. 무엇에 놀란 것일까. 조용한 겨울하늘처럼 전신주에 별 기척 없이 조용히 앉아 있던 새들이 전신주를 탁 차고 허공으로 포르르 날아오른다. 말똥가리도 섞여 있다.여기에서 시간의 감속이 일어난다. 여자의 눈에 보이는 장면을 묘사하는데 이것은 감속을 통해 P는 정말 왔을까 라는 여자의 심리를 리드미컬하게 보여준다. 지금까지 1장에서 현재와 여자의 외적회상이 교차되었다면 2장은 주로 남자의 외적 회상이 교차된다.2장의 초입은 부석사로 떠나는 날 아침에 대한 남자의 외적 회상이다. 1월 1일 아침, 남자는 어린 시절의 꿈을 꾼다. 소년이 남자가 될 때까지 오직 한 사람, K에게밖에 보여주지 않은 옛 집에 대한 꿈이다. 이 외적회상은 이사 온 문간방에 대한 장면 묘사이다. 여자의 회상은 P에 대한 것이었고, 남자는 박PD를 회상한다. 박PD는 남자가 회사에서 동료로, 친구로 마음이 맞는 파트너였다. 하지만 자신의 수리부엉이 다큐멘터리를 음해한 사람이 박PD였다는 것을 감지한 다음 그는 회사를 쉬고있는 참이었다. 여자가 3시에 오기로 한 P를 피하기 위해 약속을 청했고, 남자는 5시에 오기로 한 박PD를 피하려 약속에 응했다.2장 역시 짤막한 담화를 사이에 두고 스토리가 삽입된다. 여자의 큰 손을 보던 그는 이번에는 옛 연인인 K를 떠올린다. 어디에나 어깃장을 놓던 여자의 거칠은 손과 아련한 K에 대한 기억이 상반되지만 동물의 시체를 보고 하얗게 질린 여자의 귀밑에는 솜털이 보송보송하다. 순간 혹시? 하며 가끔 문간에 놓여있던 따뜻한 음식들이 생각난다. 이때 남자의 마음이 K에서 여자에게로 조금씩 움직인다. 그가 여자를 알게 된 것은 여자의 우편물 때문이었다. 그녀의 우편물에 관련된 사건들이 요약되어 외적회상{ 부석사, 2001년도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p57;4~p58;4으로 나타난다. 옆자리에서 잠든 여자를 보며 K와의 여행을 떠올린다. 이렇게 현실의 여자와 기억 속의 K가 번갈아 나타나면서 K에 대한 남자의 마음이 정리되어 여자에게 옮아가는 것이 아닐까.3장은 앞의 두 장보다 구성이 자못 신선하다. 남자는 집에 찾아왔을 박PD를 생각하다가 길을 잘못 들게 된다. 하지만 3장의 시작은 남자가 박PD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길을 잘못들어 자동차 바퀴가 진창에 빠진 일부터 나온다. 여자가 잠에서 깨어난 후부터 이 낭떠러지에 이르는 과정은 남자의 내적 회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장면에 대한 묘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국도에서 지방도로를 타고, 삼존불을 보는 행로가 요약되어 가속이 이루어진다. 이미 그들은 회상과 연결되어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 사이의 시간의 흐름은 중요하지 않다.
고려속요에서 조선시조까지신분에 따른기녀들의 문학妓 女제출일 :교수명 :수업명 :학 과 :학 번 :이 름 :{차 례1. 들어가는 글2. 妓生(기생) 혹은 妓女(기녀)3. 기녀문학 1 「청산별곡」과 주방기2 황진이의 시조와 영업기4. 마치는 글1. 들어가는 글조선시대의 妓女(기녀), 황진이가 남긴 시조 6수는 조선 시조문학의 걸작으로 꼽힌다. 더군다나 황진이의 시조는 고등학교시절부터 내가 좋아하는 문학작품 중의 하나이다. 그녀의 시조를 재해석하려고 다시 시조를 읽고 생각하는 도중에 몇 가지 의문점이 떠올랐다.작품 수가 적은데도 불구하고 그녀의 시조가 시조문학의 한 획을 그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기녀는 재색이 뛰어나고 풍류에도 소질이 있어야 한다고 알고 있는데, 그녀 말고 다른 기녀(혹은 기생)들이 남긴 시조는 없을까? 기녀문학은 조선시대에만 발전했던 것일까?이런 질문들의 답을 얻고자 조사를 해 보니, 역시 조선시대에만 기녀들의 문학이 발전했던 것이 아니었다. 고려시대에 이미 민요를 궁중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기녀들의 문학 활동이 활발했다. 여기에서는 고려속요에서부터 황진이의 시조까지 기녀들의 시조에 대해서 알아보았다.2. 妓生(기생) 혹은 妓女(기녀)춤 노래 또는 풍류로 주연석(酒宴席)이나 유흥장에서 흥을 돋우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관기(官妓) 민기(民妓) 약방기생 상방기생 등 예기(藝妓)의 총칭이다.그 원류(源流)는 신라 24대 진흥왕 때에 여무적(女巫的) 직능의 유녀화(遊女化)에 따른 화랑의 원화(源花)에서 발생하였다고도 하고, 정약용(丁若鏞)과 이익(李瀷)은 고려시대부터 생겼다 하여 백제 유기장(柳器匠)의 후예인 양수척(楊水尺)이 수초(水草)를 따라 유랑하매, 고려의 이의민(李義旼)이 남자는 노(奴)를 삼고, 여자는 기적(妓籍)을 만들어 기(妓)를 만드니, 이것이 기생의 시초 라 주장하고 있다.이 밖에도 전쟁 포로 중 부녀자의 노비화{ 부녀자의 노비화는 황산벌에서 신라와 전투하기에 앞서 계백이 내 처자가 노비가 되어 살아서 욕을 보는 것보다 차라리 쾌히 죽는 것만 같지 않다 { 삼국사기 47, 열전7 계백며 처자를 살육한 것이나 백제가 멸망하자 낙화암에서 떨어져 죽은 궁녀의 예에서도 알 수 있다., 사노비(私奴婢)의 매음녀화(賣淫女化:天官女의 경우), 신라시대의 가척(歌尺) 및 여악(女樂) 제자의 유녀화(遊女化) 등의 예를 추정할 수 있다. 고려 문종 때에는 팔관연등회(八關燃燈會)에 여악(女樂)을 베푼 것이 관기(官妓) 의 시초라고도 하며, 여악은 후에 창기희(唱技戱)로 발전하여 조선시대에 들어와 많은 관기가 생겨 태조가 개경(開京)에서 서울로 천도할 때 많은 관기가 따라갔다고 한다.관기는 궁중연회에 참가하던 敎坊妓(교방기)나 지방관아에 있던 地方妓(지방기)로 구분할 수 있다. 사기는 官(관)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영업할 수 있었고, 개인이 소유한 기인 家妓(가기)가 있었다. 조선시대의 관기 설치 목적은 주로 여악(女樂)과 의침(醫針)에 있었으며, 따라서 관기는 의녀(醫女)로서도 행세하여 약방기생, 또는 상방(尙房)에서 침선(針線:바느질)도 담당하여 상방기생이란 이름까지 생겼으나 주로 연회나 행사 때 노래 춤을 맡아 하였고, 거문고 가야금 등의 악기도 능숙하게 다루었다.서울의 무당과 관비 중에서 가무를 잘하는 자를 뽑았다.{ 고려사 125, 열전38 오잠노래와 춤을 잘하는 자를 선발했는데 이들은 궁중으로 들어오기 전에 중앙이나 지방의 여러 관아 · 학교 등에 예속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주로 잡다한 共役(공역) 임무를 맡 { 홍승기, 「천민」『한국사』5, 국사편찬위원회, 1981, 310쪽고 있었다. 여기서 잡다한 공역은 중앙이나 지방의 여러 관아 · 학교에서 필요한 방직 · 방적 · 주방 · 침선 · 약방 등이다.女妓로 말하면 그것을 하악이라 하는데 무릇 3등급이 있다. 대악사는 260명으로 왕이 늘 사용하는 것이다. 다음 관현방은 170인이요, 그 다음 경시사는 300여 명이다.{ 고려사 77, 지31 백관2이들은 궁중으로 들어왔다고 해서 궁중 연회에 바로 참가했던 게 아니라 음악기관에서 일정한 교육을 받아야만 했다. 대악사, 관현방, 경시사에 소속된 관기들은 위에서 말하는대로 3등급으로 나눠있었는데 가무교습의 정기적 검증을 통해 그 등급이 조정되기도 했다.{ 장사훈, 여명의 동서음악, 부진재, 1974, 14~17쪽또 서툰 정도가 심각한 자는 本役(본역)으로 환정되기도 했다.{ 세종실록 25년 9월 16일이 본역은 앞에 말한 잡다한 공역을 말한다.3. 기녀문학기녀문학의 평가는 으레 천민이되 사치가 허용된, 그리고 식자층을 상대하던 자 라는 데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이들의 시조는 일반 아녀자들과 달리 자신의 애환과 연정을 자유롭게 표출한 것을 기녀의 신분상 특징과 연계해서 설명해 왔다.여기에서 나는 기녀의 신분상 특징에 주목했다. 여러 종류의 기녀가 있었는데 기녀의 신분상 특징을 자유 라는 한가지로 보아도 되는 것인가? 물론 대답은 아니다 이다. 그러므로 기녀들의 문학도 그들의 신분상 특징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어야 한다.1 「청산별곡」과 주방기고등학교시절 「청산별곡」을 배울 때,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한 부분이 있다.가던 새 가던 새 본다 / 믈아래 가던 새 본다 / 잉무든 장글란 가지고 / 믈아래 가던 새 본다이 연에서 잉 무든 장글란 가지고 에서 잉 무든 장글 의 해석과 가지고 의 주체를 확정하는 것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고 배웠다. 그런데 이 화자를 주방에서 일하는 기녀로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이 잉 무든 장글 에서 장글을 장군{ 물, 술, 간장 따위를 담아서 옮길 때 사용하며 나뭇조각으로 통을 메듯이 짜서 만든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장글(장군)을 가지고 대동강의 강수(강물)을 떠다가 술을 빚으므로 잉 무든 장글 은 말 그대로 이끼가 묻은 장군이 되는 것이다.가다가 가다가 드로라 / 에졍지 가다가 드로라 / 사싶미 짐대에 올아셔 / 해금을 혀겨를 드로라앞서 청산별곡의 주체를 주방기라 정하면 이 연도 쉽게 해석이 된다. 즉, 주방기가 주방으로 가다가 사슴분장을 한 어릿광대가 장대에 올라 해금을 켜는 소리를 들은 것이라는 말이 된다.어듸라 더디던 돌코 / 누리라 마치던 돌코 / 믓리도 괴리도 업시 / 마자셔 우니노라이 연 역시나 주방기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운명, 잔칫날 잔치에 나가지 못하고 주방일을 하는 팔자를 누구에게 원망치 못하고 일을 하며 안타까워하고, 슬퍼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연회에 참석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재색과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미워할 이도 없는 것이다.주방기가 이 시를 읊조린 날은 단오날이었다. 명절날은 주방기가 특히나 더 바빠지는 날이다. 그러나 다음 연에서 주방기는 낮에는 단오와 관련된 이런 저런 행사들을 주변에 이링공 저링공 보면서 지낼 수 있다.이링공 뎌링공 힝야 / 나즈란 디내와 숀뎌 / 오리도 가리도 업슨 / 바므란 또 엇디 호리라하지만 낮에는 구경이라도 하지만 연회에 참석하는 기녀들과 달리 올 이도 갈 이도 없는 밤을 또 어찌지내련지 한탄하고 있다.2 황진이의 시조와 영업기冬至(동지)ㅅ딪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 내여,春風(춘풍) 니블 아레 서리서리 너헛다가,어론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冬至ㅅ딪 기나 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내여 에서 일년 중 밤이 가장 긴 동지는 화자에게 고통의 시간이기 때문에 화자는 그것을 버혀내여 서 어론님 과 오래도록 만남을 갖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만전춘별사」에서도 비슷한 구절을 찾아볼 수 있다.어름우희 댓닙자리 보와 님과 나와 어러주글 만뎡 … 情(정)둔 오다 밤 더듸 새오시라 더듸 새오시라.이 화자에게 오늘밤 은 더디게 새 기를 반복할 정도로 특별한 의미가 있는 시간이다. 날이 천천히 새기만 한다면 얼어죽을 각오도 할 수 있는 마음이다. 이 글에서 님과 나 가 만나는 공간은 어름우희 댓닙자리 처럼 온전치 않다.나는 위에서 본「만전춘별사」와 황진이시조의 구절이 그들의 입장을 절실히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동지섣달의 밤을 떼었다가 님이 오시면 꺼내고, 얼어 죽을지언정 날이 늦게 새기를 바라는 마음을 우리는 흔히 기녀들이 자신의 연정을 자유롭게 표출했다고 말한다.어름우희 댓닙자리 를 보자. 얼음 위에 대나무잎으로 만든 자리는 불안하기 짝이 없는 자리이다. 차갑고 안정적이지 못하다. 나는 이것이 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즉, 그들의 관계를 암시하는 말이 된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인정받은 부부가 아니라 비정상적인 관계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이와 기생자신은 날이 밝으면 헤어져야만 하는 사이인 것이다. 그러므로 시간이 더디가기를 빌고 또 빌었다고 할 수 있다.이것은 영업기의 목적과도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가혹한 훈련을 받아 능력을 기른 기생이 하는 일은 수익을 벌어들이는 것이었다. 기녀가 상대했던 사람의 가산을 탕진시켜 의관을 갖추지 못하게 할 정도로 수입에 신경을 써야 한다는 기생이 되어 남자에게 삿갓을 씌우지 못하면 명기가 아니다 라는 기녀속담이 있는 것도 영업기의 목적과 무관하지 않다.이런 영업기의 목적에 따르면 상대했던 사람의 가산을 탕진시켜야 한다. 그러나 이미 깊은 정신적 교감을 통한 사랑을 하는 사이이지만 그녀가 기생이기 때문에 하루가 지나고 또 그이와 함께 있으려면 다시 돈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고, 영업기 자신의 목적이기도 했지만 깊은 사랑을 나누는 상대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기 싫은 마음을 날이 더디 새기를, 혹은 동지 밤을 잘라내어 이불 밑에 두었다가 님이 오시면 꺼내어 쓰겠다고 표현해냈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
발해는 왜 한국사인가?※ 목 차 ※1. 서론1> 고구려사, 발해사의 왜곡2> 한국사의 미아, 발해사2. 본론 - 발해사는 왜 한국사인가?1> 발해의 건국 - 건국자의 혈통2> 인구구성3> 성터4> 기와5> 전불6> 무덤7> 사료를 통해 본 계승한 국가8> 이외의 증거들3. 결론4. 참고서적 및 사이트※ 본 문 ※1. 서론1> 고구려사, 발해사의 왜곡“고구려족은 중국 동북지방의 소수 민족이며, 고구려는 중국역사의 일부이다."2003년 6월 사회주의 체제인 중국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을 대변하는 것으로 알려진 광명일보 역사면 전면에 걸쳐 실린 글이다. 더구나 중국 사회과학원 산하 ‘중국변강사지 연구중심'에서는 고구려 뿐만 아니라 고조선, 부여, 발해는 물론 현재의 한국까지 연구하는 『동북공정』이라는 프로젝트를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추진하고 있다. 동북공정이란 중국 동북지방의 역사와 현황에 관한 대형 학술 과제로 ‘동북변강역사여현상계열공정’(東北邊疆歷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의 줄임말이다. 우리말로 ‘동북 변강(국경지역)의 역사와 그에 따라 파생되는 현상에 대한 체계적인 프로젝트’로 옮길 수 있다. 한마디로 동북공정은 현재의 중국 국경선 안에서 일어난 모든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만들겠다는 중국의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다.이미 중국은 지난 20년 동안 1,000여 편이 넘는 고구려·발해 관련 논문들을 꾸준히 연구 발표하고 고구려가 중국 변방의 역사였음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중국사회과학원과 동북 3성(요령성, 길림성, 흑룡강성)이 추진하고 있는 ‘동북공정’ 연구사업은 2002년부터 200억 위안(우리 돈 3조원)을 집중 투자한 대규모 연구 프로젝트인 것이다.고구려사 왜곡으로 중국이 얻는 것은 무엇인가? 고려대 최광식 교수는 “2001년 북한이 평양에 있는 고구려 유적을 유네스코를 통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려 한 것과 같은 해 재중동포에게 국적을 제공하려 한 남한의 움직임이 중국이 고구려사 왜곡에 뛰어 든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고 설명한다.중국의 역사 왜곡이 한반 해석을 주는 유적, 유물들은 공개하지 않고 있다. 남북한 학자들의 접근을 배제한 채 독단적인 유적, 유물 발굴과 연구는 결국 발해사의 연구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2> 한국사의 미아, 발해사우리 나라 사람에게 발해사라 하면 대부분 막연한 느낌을 가지게 된다. 사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쭉 발해사가 우리나라 역사라고 배워왔지만, 막상 남는 것은 얼마 없다. 기껏해야 발해는 통일신라시대에 만주에 있엇던 대제국이었고, 대조영이 그 나라를 세웠다는 정도만 기억할 뿐이다.왜 우리는 발해사를 이렇게밖에 알지 못하는 것일까?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첫째는 자료의 부족이다. 발해가 거란에 멸망당한 뒤 그 유민들이 강제로 요동반도에 이주되고, 수도였던 동경성은 불에 타버려, 발해인들이 자기의 역사를 후세에 전해줄 길이 없었다. 더구나 한 왕조가 망하면 다음에 들어서는 왕조가 그 역사를 정리해주는 것이 관례인데, 발해의 경우는 그렇지 못하였다. 만주 동부 지역은 발해가 망한 뒤 황량한 버판으로 남아 있다가 한참 뒤에야 새로운 왕조가 등장하였다.그래서 발해인들이 남긴 기록이라고는 1949년, 1980년에 발견된 두 공주의 묘지가 있을 뿐이다. 그박에는 발해와 교류가 있었던 중국,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에 단편적인 자료들만 남아 있어, 발해사 연구의 기본 자료들이 되고 있다. 자연히 발해사 실체를 파악하기란 매우 어려운 과제일 수 밖에 없다.둘째는 우리나라에서 발해사에 대해 본격적으로 연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자료의 부족보다는 이것이 더 큰 원인이다. 남아 있는 자료가 적다고 해서 발해가 우리나라 역사라고만 되뇌고 앉아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발해는 현재의 만주 동부 지역에 중심을 두면서, 남쪽으로 한반도 북부지역까지 미치고, 북쪽으로 흑룡강(러시아의 아무르강)에 미쳤으며, 서쪽으로 요동까지 미쳤다. 또 동쪽은 동해안에까지 이르렀다. 지금으로 따지면 발해의 영토는 중국의 만주, 러시아의 연해주, 북한의 대부분 지역에 걸쳐 있었던 대제국이었다. 중국 당나라 역사여의 별종이다.' 의미는 구당서의 고려별종과 같은 의미로 해석 되어진다.고려 시대 발해 관련 사서를 참조한다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제왕운기이다. 삼국사기는 삼국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이기에, 발해 부문은 생략 되어 있다. 하지만 삼국유사는 별도로 '말갈,발해전' 이라 하여 발해 역사를 포함시키고 있으며, 제왕운기는 발해를 한국사 내로 편성 시키고 있다.삼국유사에 나온 내용을 보자.三國史云,儀鳳三年高宗戊寅 高麗殘類聚 北依太伯山下.國號渤海.開元二十年間 明皇 遣將討之. 又聖德王三十二年玄宗甲戌 渤海靺鞨越海侵唐之登州.玄宗討之.又新羅古記云 高麗舊將祖榮大氏 聚殘兵 立國於太伯山南 國號渤海.)여기서 삼국사는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말한다. 즉,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를 저술할 때 삼국사기를 참조한 것이다. 이 글에서 중요한 인용 사서가 나오는데, 바로 '신라고기'이다. 일연 스님은 당시 전해져 내려오던 '신라고기'를 인용해서 대조영의 출신을 설명하고 있다.특히, '신라고기' 는 고려 이전에 저술된 것으로 추측 되는데, 당대의 신라인이 국경을 접하고 있던 발해의 건국자를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구당서와 후대에 쓰여진 신당서보다 신빙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신라고기의 신빙성을 높여주는 것은 다음 두 사료이다. 이 두 사료는 그가 무장 출신이라는 사실을 잘 반영하고 있다.사료1> 구당서 하 199.祖榮驍勇善用兵)사료2> 발해고 군고 4.高王諱祖榮,震國公子也,嘗爲高句麗將,驍勇善騎謝)대조영은 말갈족의 혈통을 이어받은 인물로 생각된다. 신라시대의 최치원은 “발해의 원류를 따져보면 본래 속말 말갈족의 무리였으니, 처음에 혹처럼 아주 조그만 집단이었다가 마침내 번성하게 되었다”고 서술하였다.말갈족들은 만주의 중부와 동부, 그리고 러시아 연해주에 걸쳐 있었던 종족이었다. 대조영은 여러 말갈족 가운데 속말말갈 출신이었다. 이들은 만주에서 세력을 키우다가 일부 세력이 때로는 고구려에, 때로는 중국에 흘러 들어갔다. 대조영의 집안은 바로 고구려로 들어온 집단이었다. 당나라 역사서에 “본래 속말말갈로서 권2 총략 하 부분을 살펴보자."또 재당학간승 영충 등이 덧붙여 보낸 글을 받들어 전하였다. 발해국은 고려의 옛 지역에서 일어났는데, 천명개별천황7년 고구려 국왕 고씨가 당에게 멸망 되었으며, 그 후 천지진종풍조부천황 2년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하였다. 화동 6년에 당에서 책립받았다. 그 나라는 사방 2천리이며, 주.현과 관역이 없으며, 곳곳에 촌리가 있는데 모두 말갈 부락이다. 그 백성은 말갈인이 많으며, 토인은 적다. 모두 토인이 촌장이 되었으며, 대촌에는 도독, 다음에는 자사이며, 그 아래는 백성들이 모두 수령이라 부른다. 토지는 극도로 춥고, 물이 있는 논(수전)이 마땅치 않다. 자못 풍속에 글을 안다.")현재 알려져 있는 발해인은 유민까지 합쳐서 모두 380명이다. 왕족인 대씨가 117명으로 가장 많고, 그 다음으로 고씨가 63명이고, 왕씨가 30명, 장씨가 20명, 양씨가 8명, 오씨가 13명, 이씨 21명, 하씨가 4명 등이다. 대조영이 어느 계통의 인물인지 논란이 있으니, 잠시 제쳐두고, 신하들만을 부석하며 고씨가 전체의 47.5%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에서 유력한 가문을 이룬 고씨들이 있지만, 발해 고씨는 거의가 고구려 고주몽의 자손이다.따라서 국정 운영을 담당했던 사람들의 절반 가까이가 고구려인이었다. 일본 역사 기록에 “그 나라는 말갈이 많고 고구려인이 적지만, 고구려인들이 모두 이들을 지배하고 있다”고 되어 있고, 최치원은 “옛날의 고구려가 지금의 발해가 되었다”고 하지 않았는가.곧 지배층은 대부분이 고구려인이었고, 촌장이하 부락의 주민들은 말갈인이었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두번째로 발해 멸망 후에 발해인, 여진인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즉, 발해인과 여진인은 발해가 존재한 시대에도 이들 두 민족은 분리 되어 있었다는 주장이다. 그럼 이들 발해인은 누구이며 여진인은 누구인가? 발해인으로 불리워지는 사람은 고구려 후손들이고 여진인은 바로 말갈인을 지칭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배층은 고구려인, 피지배층은 말갈인이라는 개념이 등장한 것이다. 한 해야 한다.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고구려를 계승한 고구려의 후예인 지배층이 말갈계를 통치한 국가가 바로 발해라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지배층으로 진출한 적지 않은 말갈인들을 간과해서는 안되지만, 전체의 50%에 가까운 수의 고구려인 지배층은 발해가 고구려의 습속에 의해 통치되었다는 것을 뜻한다.3> 성터발해의 성터에는 평지성과 산성이 있는가 하면, 중심되는 성을 방어하기 위한 보루나 차단성도 있다. 성을 쌓는 재료로 볼 때에 토성, 석성, 토석혼축성이 있다. 평지성은 토성이 대다수이고 산성은 석성이 대부분이다. 평면상으로는 장방형, 방형, 부정형 등이 있다.발해 성터에 대한 연구로서 고구려 및 당나라 성과 비교하여 발해성의 변화 과정을 언급한 것이 있다. 발해성은 성산자산성과 영승유적처럼 초기에는 평지성과 산성이 결합된 방어체계를 보여준다. 이것은 집안의 환도산성과 국내성의 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그러다가 8세기 중반 이후에 당나라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장안성을 모방한 평지성 중심의 방어체계로 전환하였다. 이러한 예는 동경성을 비롯하여 서고성, 팔련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성산자산성하지만, 성터의 변화로 발해의 성격을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우리 나라에도 많은 당나라의 풍습들이 들어와 일부는 사라지고, 일부는 남기도 했다. 이것은 당나라, 즉 중국이 그 당시 동양에서 제일 발전한 나라였으며, 큰 제국이었기 때문에 그 문물은 당연히 타국에게 전해지기 마련이다. 성터가 중기 이후에 당나라의 형식을 따른다고 해서 발해가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는 것은 너무 성급한 판단이다.환도산성4> 기와발해의 유물 중 고구려적인 양상을 보이는 것 중 두드러진 것이 지붕을 장식하였던 막새기와이다. 연꽃무늬를 한 막새기와가 대부분인데 이러한 모티브는 고구려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 분명하다.연꽃잎을 배치한 막새기와는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 특징적으로 발달하였는데, 발해의 막새기와는 부조가 뚜렷하고 힘이 있는 고구려의 것을 계승하였다. 다만 고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