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次목 차 … 1그에게 들은 일본의 정신.- 『무사도(武士道)』 … 2태평양 너머의 나라를 바라보는 파란 눈. - 『국화와 칼』 … 4문제의식을 갖고 역사를 살피다. - 『19세기 동아시아의 패러다임 변환과 제국 일본』 … 6일본, 만화 『혐한류』로 죄의식의 족쇄를 벗다.- 『한국과 일본의 새로운 시작』 … 8그에게 들은 일본의 정신. - 『무사도(武士道)』아시아 중에 서양인이 좋아하는 나라 중 하나인 일본.일본의 문화 특유의 간결함, 소박함, 작음의 미덕과 타인에 대한 예의들이 서양인에게는 접해보지 못한 신선함으로 다가갔을 것이다. 5천엔 지폐의 인물이자 국제연맹 초대 사무차장이었던 니토베 이나조는 1889년경 라블레이 교수와 대화를 나누던 중 종교교육이 없는 일본에 대해 “종교가 없다면 대체 어떤 식으로 자손들에게 도덕 교육을 시키는 겁니까?”라는 말에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시작했다. 일본에도 종교와 도덕교육이 분명히 있었다. 다만 니토베 이나조가 선뜻 대답하지 못한 것은 서양처럼의 기독교 종교교육과 비교할만한 대표적 종교교육이 일본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젊은 시절에 배우고 그렇게 행동하도록 지시받던 것들이 훗날 무사도였음을 알고 그는 『무사도(武士道)』를 집필하기 시작했다.그가 그들에게 혹은 자신에게 말하고 싶은 일본의 정신은 무엇이었을까?무사도(武士道)의 기원은 일본의 봉건제와 일치하는데, 서양의 전사라는 직분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의 규범을 의미하기도 한다. 무사가 지켜야할 것으로 요구받거나 교육받는 도덕적 덕목의 예절로 수백 년에 걸쳐 이루어진 무사의 생활 방식이 유기적으로 엮어낸 결과물로 전해지는 예절이다. 일본의 무사는 가신 집단과 서열을 형성하고 큰 영예와 특권, 의무를 가지된 그들에게 점차 행동 양식에 대한 규범이 필요하게 되어 등장하게된 것이 무사도였다. 불교가 무사도에 끼친 영향이 컸는데, 그중에서도 선(禪)은 인간의 탐구심을 깨달아 자신과 조화시키도록 하였다. 또한 일본 고유의 종교인 신도는 주군에 대한 워지게 한다고 여겼고 그것이 없으면 인간은 짐승과 다를 바 없다고 했으며, 이는 유아시절의 교육에서 가장 먼저 행해지는 것이었다. 명예는 역경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자기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것에 있음을 알아차린 사람은 덕의 경지를 이룬 극소수뿐이다. 하지만 명예를 얻을 수 있다면 생명은 언제라도 가볍게 버릴 수 있는 것이라 여겨졌다. 충의는 주군에 대한 순종의 예이며 충의의 의무는 봉건 도덕의 특색이다. 주군이나 지도자에 대한 충성은 여러 환경의 사람들에게 도덕적인 끈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일본인이 생각하고 있는 충의는 다른 나라의 그것과는 많이 다른 것이다. 일본인들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충의’라는 덕목을 극도로 발달시켰기 때문이다. 이런 무사에게 있어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는 행위는 남자답지 못하다고 여겨졌다. 일본인의 웃음 또한 마음의 안정이 무너지고 평형을 되찾을 때 그것을 감추는 역할을 해왔던 것이다. 즉, 웃음은 슬픔이나 분노의 조정자이기도 한 것이다. 무사도는 명예의 문제와 관련된 죽음을 복잡한 문제 해결의 열쇠로 받아들였다. 대의를 안고 있는 무사에게는 다다미 위에서 편히 죽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며 바람직한 최후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할복은 하나의 법 제도였으며 동시에 의식 전례로 스스로의 죄를 갚고 과거를 사죄하며, 불명예를 씻고 친우를 구하며, 스스로의 성실을 증명하는 방법이었다. 자신들의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친 아코번의 ‘47인의 의사’들의 이야기가 가장 유명한데, 법제도 없었던 그 시기에는 할복과 복수로 질서를 유지하려 했었다.일본을 서양인에게 알리기 위해 자신의 민족을 되짚어냈던 책 『무사도』에 박수를 치고 싶다. 100년이 넘은 이 책에 세계인이 열광하는 이유는 미국에는 없는 오랜 역사의 축적, 그리고 서양의 기사도와 비교하여 정의롭게 그려내면서도 엄격하고 소박함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하지만 서양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무사도를 너무 미화한 것은 아닌지 읽는 내내 의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또 없었던 것은 아마 역사적 상황이 그녀와는 다르고 냉전체제 하의 거대담론을 지지하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성적소수자는 반역사적이지 않을까 하는 나의 생각이 편견이었음을 알았다.『국화와 칼』의 초반부를 읽으며 루스 베네딕트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이어졌는데 이 부분에서 루스 베네딕트는 미국의 역사성과 일본의 만세일계의 천황제를 비교하며 전쟁에 대한 인식을 말했다. 그런데 짧은 역사를 지닌 미국과 일본이 비교가 가능할까? 입헌군주제인 영국을 보면 의회제도가 점진적으로 발전했고 그들의 ‘왕은 군림할 뿐 지배하지 않는다.’라는 모토는 긴 역사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다. 일본의 자유민권운동이 1870년대부터 시작되었는데 1940년대에 과연 민주주의가 얼마나 발전할 수 있었을까. 즉 상징적인 천황에 대한 인식을 일반인이 비판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했는가를 간과한 것이다. ‘미국인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라든가 ‘미국 부인들과 같은 자유를 얻기를 희망할 것이라고 억측하는데 머무르고 있었다.’라고 표현을 한 것에서는 동양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느껴졌다. 또한 산업혁명의 진행이 느렸던 당시 일본군의 의료상태를 서양과 같은 것으로 요구하는 것이 타당한 것은 아닐 것이다. ‘절하는’ 것을 상대방이 자기 뜻대로 행동할 권리를 승인한다고 하고, 무사계급의 형성에 대해서 귀족과 서민 사이에 계급투쟁이 행해진 흔적이 전혀 없었다는 지적에서, 당시의 ‘수동적인 동양’, ‘동양의 정체성론’을 엿 볼 수 있었다. 이런 생각으로 이 책을 제대로 읽을 수 있을까 걱정이 되어 각종 서평에서 책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았다. 『국화와 칼』을 읽으며 나는 루스 베네딕트에게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 책은 매우 ‘객관적’이며 또한 일본 연구서 중 가장 ‘우수한’ 자료라고 평가되어 있었다. 남들의 평가에 움츠러졌으나 그것은 배움이 짧으니 어쩔 수 없고, 또한 서평이란 내가 잘 못 썼다고 해도 다른 사람의 이해방식과 동일하게 쓸 필요는 없다고 자위하면서 조심스레 책을 다시 펼쳤의무와 의리의 충돌, 의무와 인정의 갈등이 갖고 오는 일본인의 사고를 스스로도 정리해야 했던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메이지 시대의 군인칙유에 대해서 막연히 근대 국가에서 상비군으로서 자리 잡기 위해서 필요한 것의 하나라고만 생각했는데, 대절과 소절로서 충과 의리를 비견해서 자국민들을 설득하고자 했던 노력이 보였다. 이 즈음해서 성실, 그리고 다시 은혜를 설명했고 결론을 냈는데 일본인은 죄의 중대성보다 수치의 중대성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안타까운 것은 대동아에 실패한 일본의 분노가 이 때문이라고 마무리를 한 점이다.이 책은 후반부를 통해 일본인의 훈련을 고찰하며 새로운 것에 대해 ‘숙달’이라고 명명하며 일본인의 가능성을 말한다. 기독교와 비행기를 연결하는 여학생의 이야기에서 루스 베네딕트가 알아본 일본의 가능성이 종전 후 드러났고 아직까지도 일본사회에 어느 정도 유효하다는 점에서 그녀의 통찰력에 감복했다. 그녀는 일본인의 자기 훈련을 분명히 하기 위해 양육 방법도 연구했다. 육아에 있어서 부모님의 협박은 나의 경험과도 같은 부분이 있었고, 상대를 높이는 예의는 한국에도 적용되는 것이었다. 남자아이와 여자아이, 그리고 그들이 자라 남편과 아내로 어떻게 살아가는가, 그래서 결국 전쟁 후 그러한 일본인들의 일본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예측한다.일본인에 대한 심도 높은 고찰 결과, 혹은 한국전쟁 등의 상황으로 인해 일본은 많은 것을 지킬 수 있었다. 루스 베네딕트는 일본이 평화 국가로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는다고 끝을 맺었다. 하지만 일본의 자위대 출범, 여러 나라와 영토분쟁, 전후 보상처리를 하고 있지 않은 지금, 그녀는 하늘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래도 조금쯤은 그녀가 단호한 문장으로 끝내주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문제의식을 갖고 역사를 살피다. - 『19세기 동아시아의 패러다임 변환과 제국 일본』『19세기 동아시아의 패러다임 변환과 제국 일본』은 국가 간 외교관계에서의 근대로의 변화를 중국 중심의 에 대한 연구의 축적, 또한 고메이 천왕의 적시의 죽음으로 신정부는 유신을 단행할 수 있었는데 중국과는 확실히 다른 형태를 보인 것이다. 사실상 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라고 생각된다. 일본의 ‘국체’란 무엇인가를 교육칙어를 통해서 살피지만, 이것은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담론체계이다. 모호한 ‘국체’의 논의는 메이지 질서의 위기에 이르러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국가개조의 세 범주로 나뉜다. 1920년대의 불안은 1930년대 쇼와유신운동으로 흐르고, 천황기관설과 국체명징운동 등의 논란 끝에 정치 지도자들은 결국 자기 입맛에 맞는 ‘국체’를 제외하고는 다양한 사상들을 사상시키는 국가보안법을 제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완성된 ‘국체의 본의’는 이후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치르고, 해군조차도 이성을 잃고 열광한다. 정치가들도 대정익찬회로서 열광하고, 정부는 ‘신민의 길’로 일반인들에게도 열광하기를 요구하며 문인들조차 ‘근대의 초극’으로 열도는 집단열광으로 자기암시에 성공하기에 이른다.중국과 일본에서 만국공법을 어떻게 인식?수용했는지 확인하고 일본만이 제국주의 팽창을 하게 되는 과정에서의 국체론을 살피는 이 구성은 매우 논리적으로 독자를 배려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약자인 경험이 거의 없는 중국이 중화질서와 문명에 대한 자신감에서 만국공법을 저평가했을 것은 자명했다. 하지만 제국체제와 열국체제가 갖는 차이라는 관점도 있는데, 일본의 ‘역동성’을 서술하기 위하여 중국을 너무나 전근대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또 만국공법을 수용하는 동양의 모습이 주된 연구대상이지만 사실상 만국공법은 침략의 명분으로 작용한 것으로, 과연 서양 국가들이 청을 위협하던 시기에 이를 잘 활용했다 한들 인정해 주었을까. 책에도 공친왕의 역사 인식의 변화를 언급하였는데 중국의 수많은 지식인들이 과연 그것을 몰랐을지 의문이다. 또한, 과연 이 시기 일본과 중국을 비교하는 것이 타당한 것인지도 확신이 없다. 39쪽과 42쪽(=77쪽 표와 동일)의 표를 비교하면 일본이 청보다 국제법 관련 역서를 세 권다.
2010학년도( 2 )학기 과제물(온라인제출용)교과목명 : 일본문학의 흐름2학 번 :성 명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과제유형 : ( F ) 형○ 과 제 명 : 다음 주제에 대하여 대표 작가 및 작품을 예로 들어 서술하시오. 반자연주의 문학으로서의 탐미파, 시라카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문학의 특징과 역할반자연주의 문학의 특징과 역할[탐미파, 시라카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目 次머리말 … 1Ⅰ. 탐미파 … 1Ⅱ. 시라카바파 … 2Ⅲ.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 3맺음말 … 3다이쇼 천황의 재위기간이었던 1912년부터 1926년까지 약 15년간을 다이쇼 시대라고 한다. 다이쇼 시대 문화의 특색은 도시화의 진행과 교육의 보급에 의해 문화 주체로써 대중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었지만, 농촌에는 근대화가 보급되지 않아 문화적 격차는 여전히 좁혀지지 않았다. 자아해방의 욕구와 부락민 차별을 다룬 시마자키 도손의 『파계』와 프랑스 자연주의에 영향을 강하게 받은 다야마 가타이의 『이불』로 인해 일본의 자연주의는 성립하게 된다. 사회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담긴 서구의 자연주의에 비해 일본은 사회성의 결여와 허구성의 상실된 고백적 리얼리즘 문학인 자연주의를 극복하고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하려는 반자연주의 작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Ⅰ. 탐 미 파19세기후반 서구에서 출현한 유미주의 사조의 영향을 받아, 추악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폭로하는 자연주의에 대항하여 미의 창조로 지상의 목적으로 삼아 자유스럽게 미적 세계를 그리려고 했던 탐미파 문학은 메이지 말기와 다이쇼시대에 등장하여 문단의 주류를 이루며 활동하기 시작했다.서구 유학으로 세기말 문학의 영향을 받은 나가이 가후의 『지옥의 꽃』은 졸라이즘의 영향을 받은 시대적 대표작의 하나인 이 작품은, 생명은 집안에 대해 반항적인 삶을 살고 있던 작가 자신의 자유를 향한 동경이 고동치고 있다는 점이며, 작품을 발문은 졸라이즘 선언으로 알려져 있다. 『아메리카 이야기』『프랑스 이야기』등의 작품을 발표하고 메이지 시대의 물질문명에 대한 비판을 강화해가는 가운데 차츰 전통적 에도문화에로의 애착을 심화시켜 시타마치와 화류계의 정취를 서정시와도 같은 풍속소설 『스미다강』을 발표하였다. 『냉소』등의 작품에서 에도 정서를 그려내면서 반자연주의 진영의 중심 존재가 되어 탐미주의 입장을 대표하는 동인지인 『미타문학』으로 여러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장을 제공했다. 그는 『솜씨겨루기』등에서는 급속한 시대적 변화, 관동대지진 이후 도쿄 풍물의 변화를 은둔자적 방관자의 눈으로 바라보았다.나가이 가후의 지원에 의해 문단에 등단한 다니자키 준이치는 철저한 탐미와 환상적인 여성의 관능미 묘사로 주목을 받았으며, 당시 자연주의 풍조에 반발하여 여성의 아름다운 육체 숭배를 기초로 한 퇴폐적인 미를 즐겨 그린 『악마』가 발표되면서 다니자키 준이치는 '악마주의 문학의 도입자'로 간주되었다.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세계를 그려낸 『문신』은 가학 혹은 피학적 변태 성욕과 여성의 발에 대한 풋 페티시즘, 남성 정복형의 여성에 대한 숭배는 다니자키의 문학 세계에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요소들이다. 그는 실제로 처제와의 염문과 제자 사토 하루오에게 아내를 양보하기로 각서를 작성해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그는 관동대지진 이후 관서지방으로 이주하여 일본 고전 문학에 경도하여 『세설』과 같은 일본적 정서, 아름다움을 전쟁이나 세상의 소란함과 대비하여 그리기도 했고, 노인의 성욕을 그린 다니자키의 독특한 성적 감수성을 집대성한 『열쇠』가 있다.그 밖에 탐미주의 작가로는 사토 하루오를 들 수 있다. 그는 일찍이 시대 비판적인 안목을 드러내었고, 독특한 개성을 확립, 미추는 물론이고 선악의 표준을 자신의 내면에게 추구하는 남다른 시적 정의감을 지난 동시에 예술지상주의자였다. 그는 스승의 아내를 사랑한 권태와 우울의 시인임 동시에 하이분의 작자였다. 하지만 1935년 이후 전쟁에 협력하면서, 특공대, 군신, 야스쿠니 신사, 아투섬의 옥쇄등을 주제로 선택하여 애국적, 제국주의적인 시가를 만들었다. 『이오오이와이』라는 시에서도 피어있는 사쿠라꽃과 지는 사쿠라꽃을 반복적으로 찬미하고 있다. 그러나 시인으로서의 그는 평명하고 아름다운 구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언어의 마술사였고, 전통적인 시 형식에 새로운 사상과 감정을 담았던 다이쇼 이후 손꼽히는 고전적인 서정 시인이었다. 『전원의 우울』『도희의 우울』등에서 단편과 수필 등의 산문에는 독특한 개성이 있었고, 비평가로도서도 탁월함을 보여주었다.Ⅱ. 시 라 카 바 파당시 카구슈인 출신인 상류층의 지식인들에 의해 『시라카바』는 1910년 4월에 창간되었다. 『시라카바』의 3인방은 무샤노코지 사네아츠, 시가 나오야, 아리시마 다케오로 대역사건 부터 관동대지진까지 일본의 가장 오래 발표된 동인지이다.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인류애와 이상적 사회를 추구하고, 윤리와 자아, 보편적 인간성과 예술을 존중하고, 현실보다는 계승?의지의 이상주의와 인도주의 문학을 보여주며 현실사회를 도외시하고 개인과 인류를 직접 연계하여 일본사회와의 괴리감을 보여주었다.『시라카바』의 창간 핵심인 무샤노코지 사네아츠는 톨스토이에게 강한 영향을 받았고, 개인주의 문학의 확립, 에고이즘의 대담한 긍정을 이룬 중심인물이기도 했다. 그의 『우정』은 낙천주의자인 작가가 그의 전 생애에서 가장 충실한 시기에 완성한 대표작으로 치밀한 구성과 쉽고 명쾌한 문체로 독자들을 매료시키는 연애의 명작이다. 복잡한 사고의 굴절 끝에 스스로를 격려하면서 성장하여 세상에 하나뿐인 개성적 인간이 되된 그는 개인주의 문학을 확립하고 에고이즘의 대담한 긍정을 이룬 인물이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후 반전의 희곡과 드라마를 쓰기도 했고 『새로운 마을』을 건설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동아 전쟁 사관』등의 전쟁 협력을 하기도 해서 공직 추방처분을 받기도 하였다. 그의 작품 중『인간만세』를 통해 어떤 것과도 조화할 수 있는 태평스러운 마음과 끝없는 유머로 정착되어 가는 작가의 원숙함을 보여줬다. 이처럼 무샤노코지 사네아츠는 동양 문인적 분위기에서 유유히 자신만의 페이스로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독창적인 작업을 해 가며 천수를 누렸다.시가 나오야는 생의 확립을 목표로 한 『오오츠 준키치』『성모퉁이에서』아버지와의 오랜 불화와 화해를 다룬 『화해』등으로 문단에서 지위를 확립하였다. 그는 오랫동안 객관적인 문체를 갈고 다듬어 주인공들의 민감한 반응을 명쾌하고 간결하며 직관적으로 묘사하는 데에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오랫동안 문학 활동을 하지 않다가 갑자기 수많은 작품을 봇물처럼 쏟아내기 시작하여, 훌륭한 단편작가로 명성을 얻게 되었으나, 글을 써서 생계를 유지한 적은 없었다. 『암야행로』는 가족의 갈등과 개인적 갈등에 직면한 주인공이 마음의 평화를 찾으려고 애쓰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고, 삶의 위기에 직면한 주인공의 행동과 심리, 감정의 움직임을 묘사한 그의 유일한 장편소설이다. 단편 『기노사키에서』는 자신의 정신 상태를 섬세하고 냉철하게 다룬 훌륭한 예이다. 그는 강인한 구성과 빼어난 묘사력으로 '소설의 신'이라 불렸다.소설가이자 평론가였던 아리시마 다케오는 서유럽 19세기 사실주의의 수법을 중후하고도 선명하며, 기독교적 인간애를 영과 육의 이원적 대립과 모순을 초월하여 탄생시키고자 하는 고뇌를 묘사하였다. 당시에 금기시되던 성욕문제를 본능을 지닌 자연스러운 인간의 모습으로 인식하면서 인간 내면의 본질적인 문제로 파악하고 본능애 속에 자아완성의 가능성을 추구했던 그는 사회주의 대두와 함께 사상적 동요를 일으켜 하타노 아키코와 함께 자살했다. 『선언하나』는 계급성을 벗어난다는 것의 어려움을 자각한 데서 생긴 부정과 절망의 선언이었는데, 당시 사회주의 운동의 지식인 멸시에 괴로워하면서 자신과 계급사회, 계급 운동 간의 관계를 성실히 추구한 글로 화재가 되었다. 대표작은 『카인의 후예』『출생의 고뇌』『한 여자』등이며 많은 작품이 바닥 깊은 허무감을 숨기고 있으며 신앙과 본능, 개성과 직업 등의 상극을 넘어 본능애의 긍정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인간의 강렬한 의지와 저항감이 느껴진다.
2010학년도( 2 )학기 과제물(온라인제출용)교과목명 : IT와 경영정보시스템학 번 :성 명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과제유형 : ( 공 통 ) 형○ 과 제 명 : 1. 운영시스템(OS;OperatingSystem)의 속성에 따라 컴퓨터시스템을 분류할 수 있다. 보통서버(Server)와 클라이언트(Client)로 구분되는 이 분류기준의 가장 중요한 속성은 어떤 것인지를 기술하시오.2. CPU를 구성하는 모듈(Module)들에 대한 분류에서 기본적인 세 가지 모듈을 제외하면MathematicalCo-processor를 추가로 들 수 있겠다. CPU를 구성하는 모듈 간에 통신을 위한 통로로 AddressBus와 ControlBus가 있으며, CPU와 외부메모리(Memory)를 연결하는 통로로 DataBus가 존재한다. CPU의 핵심적인 모듈 세 가지에 대해 명칭을 기술하고 그 기능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시오.目 次Ⅰ. 서버(Server)와 클라이언트(Client) … 21) 서버와 클라이언트의 속성2) 서버와 클라이언트의 관계3) 서버와 클라이언트의 차이Ⅱ. CPU의 세 가지 핵심 모듈 … 31) ALU(Arithmetic / Logic Unit)2) Register3) Control Unit컴퓨터 시스템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로 이루어져있다. 하드웨어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기계 본체를 말하는 것으로 중앙처지장치(CPU : 중앙집적회로), 보조기억장치, 입/출력장치로 구성되어있으며, 중앙처리장치는 또 주기억장치, 연산장치, 제어장치로 나눌 수 있다. 많은 컴퓨터 시스템을 구성하는 요소들 중에 서버와 클라이언트, 연산장치, 레지스터, 제어장치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Ⅰ. 서버(Server)와 클라이언트(Client)네트워크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조합을 서버(Server)와 클라이언트(Client)라고 할 수 있다. 클라이언트와 서버의자신이 원하는 것을 서버에게 요청한다. 그러면 서버에서는 클라이언트의 요청에 대해 처리를 하고 클라이언트에게 즉시 응답을 한다. 즉, 네트워크에서 데이터 처리를 요청하는 컴퓨터를 클라이언트라고 하며, 요청한 데이터를 처리하여 응답하는 컴퓨터를 서버라고 한다. 서버(Server)와 클라이언트(Client)의 속성, 둘의 관계와 차이점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1) 서버와 클라이언트의 속성▶ 서버의 개념서버는 다른 프로그램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말한다. 서버 프로그램이 실행되고 있는 컴퓨터 하드웨어도 서버라고 불린다. 서버의 종류로는 파일이나 프린터를 일괄적으로 관리하는 파일 서버, 웹 서버, 메일 서버, 데이터 서버 등 다양한 종류가 있다. 일반적으로 서버는 규모에 따라 많은 수의 클라이언트로부터의 접근을 허용하여야 하기 때문에 고속의 CPU 와 대용량의 메모리 성능을 요구한다. 프린터 제어나 파일 관리 등 네트워크 전체를 감시, 제어하거나, 메인프레임이나 공중망을 통한 다른 네트워크와의 연결, 데이터, 프로그램, 파일 같은 소프트웨어 자원이나 모뎀, 팩스, 프린터 공유, 기타 장비 등 하드웨어 자원을 공유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클라이언트의 수가 5~20대 정도인 소규모 LAN의 경우에는 1대의 서버로 충분히 모든 서비스를 소화할 수 있으나, 대규모 LAN의 경우에는 여러 대의 서버를 배치하고, 파일 관리는 파일서버, 프린터 제어는 프린터 서버, 인터넷 등의 외부와의 교환은 커뮤니케이션 서버가 담당하는 등 각각 역할을 세분하게 된다.▶ 클라이언트의 개념클라이언트는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컴퓨터를 말하며 서버로부터 서비스를 요청하는 로컬 시스템에서 동작하는 프로그램이다. 이는 사용자가 서버에 요청을 보낼 수 있는 기능을 제공하고, 요청을 보내고 난 뒤 서버가 보내오는 응답을 결과로 화면에 출력하는 일을 하며, 사람을 의미하기도 하고 브라우저를 뜻하기도 하는 두 가지의 의미가 합쳐져 사용하기도 한다. 클라이언트와 서버간의 대화는 대부분 HT을 WWW에 접속하고 FTP를 사용하고 IRC, 메일 등을 사용한다. 우리가 WWW에 접속을 하고 메일을 보내고 IRC에 접속하는 과정에서 유저들의 요구를 담고 있는 리퀘스트가 발생한다. 이런 리퀘스트들을 처리해 주는 곳이 바로 서버(server)이다.2) 서버와 클라이언트의 관계클라이언트 서버 시스템은 네트워크상에서 클라이언트로부터의 다양한 요구에 따라 서비스를 행하는 서버와 이들 서버에 직접 접속하여 갖가지 서비스를 제공받는 클라이언트가 연동해서 서로 역할을 분담하도록 구성하는 네트워크 시스템을 클라이언트 서버 시스템이라고 한다. 서버와 클라이언트 관계는 고정된 것은 아니고 접속을 하고자하는 곳이 클라이언트, 접속되는 쪽이 서버의 역할을 하게 된다.▶ 서비스 및 자원(Resource) 공유클라이언트/서버는 서비스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것은 하나의 어플리케이션을 서버 프로세스와 클라이언트 프로세스로 분리하는 것이다. 그리고 서버는 클라이언트에게 동시에 많은 서비스를 제공한다. 또한 서버는 클라이언트 공유 리소스에 대한 접근을 적절히 조절할 수도 있다.▶ 비대칭 프로토콜 및 위치 투명성서버는 수동적으로 클라이언트의 서비스 요청을 받고, 클라이언트가 요청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서버와 클라이언트 사이에는 일 대 다 라는 대응관계로 구성된다. 클라이언트 서버 시스템에서 클라이언트는 서버가 컴퓨터에 위치하고 있는지 확인여부 없이 서비스를 요청할 수 있으며, 서버는 클라이언트가 위치하고 있는 동일한 네트워크나 컴퓨터를 통하여 또 다른 컴퓨터에 위치할 수 있다.▶ 확장성클라이언트/서버 시스템은 수직 확장 또는 수평 확장으로 확장이 가능하다. 수직 확장은 더 뛰어난 성능을 가진 컴퓨터나 멀티 서버로 확장하는 것이며, 수평 확장은 새로운 클라이언트를 추가하거나 기존에 있는 클라이언트를 제거하여 약간의 성능 변화를 확장하는 것이다.▶ 무결성 및 이기종 호환성클라이언트는 독립적이다. 반면에 서버는 서버 코드와 서버 데이터의 수많은 값들 사이에 유기적플랫폼에서 자유롭게 서비스를 주고받을 수 있다.3) 서버와 클라이언트의 차이클라이언트 소프트웨어는 리모트 액세스가 필요할 때 일시적으로 클라이언트이지만 지역적으로 다른 계산 수행한다. 사용자에 의해 호출되고 한 세션에 대해서만 실행하며, 사용자의 개인용 컴퓨터에서 실행한다. 다시 말해, 클라이언트 프로그램은 서버로부터 서비스를 요청하는 로컬 시스템에서 동작하는 프로그램으로 클라이언트 프로그램은 제한된다. 사용자에 의해 시작되고 서비스가 완료 될 때 종료된다. 클라이언트는 능동적으로 서버와 접속을 시작하고 필요한 만큼 여러 서버에 액세스할 수 있지만, 한 번에 하나의 리모트 서버에 능동적으로 접속하게 된다. 이는 특정 하드웨어와 복잡한 운영체제 불필요하게 된다.반면, 서버 소프트웨어는 하나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특수 목적, 특권 프로그램으로 동시에 여러 리모트 클라이언트가 처리 가능하며 시스템 부트시 자동적으로 호출되고 여러 세션에 걸쳐 계속해서 실행된다. 공유된 컴퓨터에서 실행하고, 임의의 리모트 클라이언트로부터 접속을 위해 수동적으로 대기하며, 임의의 클라이언트로부터 접속을 받아들이고 단일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는 강력한 하드웨어와 복잡한 운영체제를 요구되게 되는 것이다. 이 서버 프로그램은 무한 프로그램으로, 프로그램이 동작하고 나서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계속해서 동작한다. 클라이언트로부터 들어오는 요청을 위해 대기하고, 요청이 도착하면 이 요청에 응답한다.Ⅱ. CPU의 세 가지 핵심 모듈CPU는 크게 세 가지로 구성되는데, 데이터의 산술 연산 및 논리 연산을 실행하는 산술논리연술장치(Arithmetic / Logic Unit), 프로그램상의 명령어를 실행하는데 필요한 데이터 또는 명령어를 저장하고 전송하는 레지스터(Register set), CPU 내에서 시간 및 제어에 필요한 각종 제어신호를 발생시키거나 송/수신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제어 장치(Control Unit)로 구성된다. 이번 장에선 CPU의 세 가지 핵심 모듈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도록퓨터시스템의 다른 요소들인 제어장치, 레지스터, 기억장치 및 I/O장치는 사실상 ALU에 의해 처리될 데이터를 가져오거나 그 결과를 저장하고 출력시키는 역할을 한다. ALU의 내부 요소들을 알아보면, 연산을 하고, 수의 이동, 연산결과에 대한 부호 부여 및 비교, 사사오입 등을 담당하는 연산부분과, 명령의 연산 처리를 변경하기 위한 조작을 담당하는 논리부분이 있다.산술 연산장치란 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을 말하며, 논리 연산장치로는 AND, OR, NOT등을 수행한다. 또한 시프트 레지스터(shift Register)는 비트들을 좌측 혹은 우측으로 이동시키는 기능을 가진 레지스터이고, 보수기(complementer)는 데이터에 대하여 2의 보수를 취하며, 상태 레지스터(status Register)는 연산 결과의 상태를 나타내는 플래그들을 저장하는 레지스터이다. 이 요소들에 의해 처리될 데이터들은 레지스터 혹은 기억장치로부터 ALU로 입력되고, 그 결과는 일반적으로 레지스터들 중의 하나에 저장된다.ALU는 연산의 결과에 따라 상태 레지스터내의 해당 플래그들을 세트하는데, 이 플래그들은 조건 분기 명령어 혹은 산술 명령어들에 의해 사용된다. 입력 데이터에 대하여 연산 수행할 내부 요소의 선택과 ALU내외로의 데이터 이동을 제어하는 신호들은 제어 장치로부터 제공된다.2) Register레지스터는 CPU 내부에 위치한 기억장치로서, 플립플롭으로 구성되어있으며, 바로 사용하거나 연산 결과로 출력된 자료를 임시로 저장한다. 액세스 속도가 컴퓨터의 기억장치들 중에서 가장 빠르지만, 레지스터는 내부 회로가 복잡하여 비교적 큰 공간을 차지하기 때문에, 많은 수의 레지스터들을 CPU의 내부에 포함시키기는 어렵다. 따라서 지정된 용도로만 사용되는 특수목적용 레지스터들과 적은 수의 일반 목적용 레지스터들이 포함된다. 레지스터의 개수는 프로세서 아키텍처에 따라 상당히 가변적이나 일반적으로 프로세서에는 누산기가 하나 이상 있다. 누산기는 연산을 수행할 때 오퍼랜드를 저장하는 레지펴보자.
중세 산문문학의시대적 배경과 특징目 次머리말 … 1Ⅰ. 중세 일본의 시대적 배경 … 1Ⅱ. 산문문학의 유형 … 2Ⅲ. 중세 산문문학의 특징 … 3맺음말 … 5오늘날 ‘일본의 전통문화’ 또는 ‘일본적 미의식’이라고 불리며 또한 그렇게 평가받고 있는 일본의 문화유산의 많은 부분이 문화사적으로는 ‘중세문학’, 역사적으로는 가마쿠라(鎌倉)시대에 싹이 트고 무로마치(室町)시대에 완성되거나 그 골격이 형성, 확립되었다. 노(能)는 600년 이상을 한 번도 단절되지 않고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고, 일본문학에서 각각의 장르를 대표하는 작품?장르가 중세의 문학 활동을 통해서 성립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를 지니는 일본 중세의 문학에 대하여 산문 분야에 한정하여 중세의 시대적 배경을 간단히 개괄하고 그 속에서 형성된 산문문학의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Ⅰ. 중세 일본의 시대적 배경중세에는 장원의 발달과 함께 흥성한 무사계급이 귀족계급을 압박하게 되고 호우겐의 난(保元の亂)을 계기로 점차 武家社會로 이행하게 된다. 미나모토(源), 타이라(平), 호죠(北條), 아시카가(足利) 씨의 영고성쇠와 함께 근세로 넘어가는 혼란스러운 시대인 것이다. 죠큐의 변(承久の變), 겐무의 신정(建武の新政), 남북조의 대립 등은 지나간 시대의 영광을 꿈꾸는 귀족들의 덧없는 저항이기도 했다.鎌倉 막부 시기의 동아시아는 동북방 유목민족의 흥기로 송과 고려의 대외관계가 매우 혼란하였다. 막부가 성장하게 되는 경제적 이유 중 하나가 이러한 혼란기를 이용한 무역의 호황이었다. 또한 室町 막부의 성립시기 역시 동아시아는 원명교체와 여말선초의 혼란기로),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滿)는 왜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조선과의 교린정책과 명과의 감합무역으로 외교관계를 정리하였다. 활발한 무역정책의 전성기 때에는 명, 조선 뿐 아니라 남쪽의 오키나와 해상 세력, 당시 독립국가인 류쿠 왕국까지 무역을 전개하였고, 더 나아가 동남아시아와도 무역을 재개하여 막부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막부가 귀족을 누르고 권력을 민중이 소박한 신앙심을 갖게 되었을 때, 현밀불교는 불교의 자비로 민중을 해방시키기는커녕 일반민중의 종교의식이나 사생관까지도 사로잡아 결국은 경제적으로도 속박하였고, 그러한 중세봉건권력으로 전생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Ⅱ. 산문문학의 유형)① 軍記物語 : 『平家物語』 『太平記』 기타(『義?記』『平治物語』『保元物語』『會我物語』 등)② 歷史物語 : 『水鏡』『?鏡』『愚管抄』③ 日記文學 : 『とはずがたり』④ 紀行文學 : 『海東記』『東?紀行』『十六夜日記』『筑紫道記』『白河紀行』⑤ 隨筆文學 : 『徒然草』『方丈記』⑥ 物語文學 : 『苔の衣』『夜寢覺物語』『小夜衣』⑦ 說話文學 : 『沙石集』『古今著聞集』『撰集沙』『宇治拾遺物語』『寶物集』⑧ 기타산문문학 : お伽草子Ⅲ. 중세 산문문학의 특징첫째, 중세 산문문학을 단순한 시대 구분을 가지고 작품을 시대별로 나누는 것이 힘들다는 측면에서, 같은 시기의 소설 같은 이야기는 중고, 설화는 중세라는 성격이 있다. 『곤자쿠모노가타리슈(今昔物語集, 12세기 초)』와 『우지슈이모노가타리(宇治拾遺物語, 13세기 초)』라는 대응관계 뿐 아니라 불교적 색채나 문체 면에서 생각하더라도 『今昔物語集』를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 11세기 초)』와 비교하면 『헤이케모노가타리(平家物語)』가 더 가까운 내용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원정기(1086~1156)는 기본적은 平安시대에 속하지만 문학적으로 볼 때 오히려 鎌倉시대와 가까운 경향이 있다고 하겠다. 원정기 문학은 개인적인 감회나 취향을 내포하게 되는 경향이 현저해졌으면서도, 주관이 강조되기는 하되 인간으로서의 보편성을 지향하려는 문학자의 내적 갈등이 병존한다. 이는 『쓰레쓰레구사(徒然草)』의 상고취향이 平安의 정서를 잇는다는 점에서 인정된다. 그러나 平安시대를 대표하는 『源氏物語』와 중세를 대표하는 『平家物語』는 문체도 사상도 내용도 크게 다른 작품이다. 대표작의 성격 차이가 시대구분을 결정한 것이다.둘째, 중세의 정치세력의 변화가 문학에 반영되었다. 무사들의 시대가 도래하지만 귀족들은 정치서 읽혔다. 특히 『平家物語』의 문체는 한문을 풀어 읽는 듯한 어조에 일본어 특유의 음률을 바탕에 깔고 있는 중세 산문의 새로운 정형을 이루었다.셋째, 사회적으로 서민사회가 성장해가는 것과 축을 같이 하여 문학의 중심이 귀족에서 서민층으로 확대되어 가는 과도기적인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오토기조시(お伽草子)와 설화문학이 그것인데, 귀족문학과 궁녀문학이 쇠퇴하고 이를 대신하여 서민문학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단편구전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お伽草子는 근세소설 우키요조시(浮世草子)로 발전하게 된다.중세는 설화의 전성시대라고 할 수 있는데, 승려와 귀족, 무사, 서민 등 불교와 세속의 모든 계층을 주인공으로 삼고 그들의 생활이나 행동을 다채롭게 묘사하고 있다. 특히 『우지슈이모노가타리(宇治拾遺物語)』에서는 중세의 인간관을 엿볼 수 있다. 많은 선행 설화가 왕조에로의 회고와 종교적 교훈으로 그려져 있는 것에 비해, 『宇治拾遺物語』는 철저하게 인간 중심적이며, ‘권선징악’의 측면이 아니라 도덕적 이상을 추구하는 중세적 인간상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넷째, “중세는 종교가 사회를 뒤덮은 시대이다. 중세의 문학도 또 종교와의 관계를 빼고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어서, 양자의 관계는 참으로 넓고, 또한 깊은 것이다.”라고 평가)할 만큼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특징을 지닌다. 그렇다면 헤이안 정토교와 法然, 親鸞 등의 정토종과의 차이를 논하는 일은 불교사상적 측면 뿐 아니라 중세문학이 구 불교 소산인가 아니면 가마쿠라신불교라 불리는 민중불교의 소산인가 하는 문제와도 직접 연결되어 있다. 아직까지도 논란에 있으나, 당대인들이 전란을 체험하며 인생의 무상함을 느껴 스스로 앞다투어 정토교에 귀의했다고 하는 종래의 분석은 당대의 여러 문제점, 그 배경과 원인에 대한 분석을 방기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판단된다. 불가는 당대를 말세로 규정하는 말법사상을 유포하고 이를 왕법불법상의론)과 접맥시키는 등의 방법으로, 스스로 위기를 당할 때마다 불가 뿐 아니라 조정의 위기임을 강조하여 문제해즉 지옥관념의 침투와 그에 따른 墮地獄의 공포가 淨土願生을 위한 積善을 활발하게 하여, 막대한 불사가 사회 여러계층의 일상생활 내부에 정착해 간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지옥의 공포를 민중의 마음에 확실히 심어준 것은 『往生要集』 등의 문학과 민간전도자 히지리(聖)의 영향이 컸다고 생각된다. 문학에 등장하는 히지리 등은 불교적으로 미화되어 있고, 현재도 성스러운 존재로 간주되고 있으나 그들이 문학의 성립에도 관여하였던 중세문학의 사상과 그 영향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할 것이다.마지막으로 다섯 째, 중세문학의 본질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등장한 말법사상, 무상관, 혼구정토 사상이 그 근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중세라는 시대가 만들어낸 혼란과 고통이 중세인들로 하여금 無常感을 느끼게 했고, 그 허무한 무상감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無常觀이 성장했다는 경과를 중세문학의 생명력, 자생력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무상감을 극복하기 위해서 무상관이 중세인들의 미의식으로까지 발전하였으며, 그 미의식에 입각한 자연관, 인생에 대한 통찰과 생사관, 시대에 대한 비판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중세의 문학인 것이다. 또한 그러한 ‘觀’과 ‘의식’에 중세적인 아름다움이라는 가치가 부여되고 있기에 중세의 수필문학이라는 하나의 장르가 인정된다.『호조기(方丈記)』에는 무상에 바탕을 둔 한 중세 지식인의 哀歌로서의 아름다움과 슬픔이 있는데, 이것이 ‘詠嘆的 無常觀’이다. 그리고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무상을 마주보려는 태도를 통해서 무상을 받아들이고 나름대로 소화하려는 『徒然草』의 무상을 ‘自覺的 無常觀’이라고 한다.) 이는 ‘感’에서 ‘觀’으로의 전개이며, ‘觀’은 미의식, 자연관으로까지 발달한 결과, 한정된 아름다운, 제한적인 아름다운, 억제된 아름다운에서 화려함을 찾으려는 오늘날 일본적인(중세적인) 아름다움으로까지 이어진다. 겐코(兼好)가 유한성에서 무한성을 찾아냈듯이 중세 문학과 문예는 절제를 통한 최대한의 주장을 美로 여기게 된 것이다. ‘常住하지 않는 것’에 대한 ‘感’는 인간의 영위를 통해서 그 틈새에 보이는 인간성의 본질을 전면에 내세운 드라마를 무상과 운명과 인과라는 불교적인 시점에서 구축하고 있다. 전쟁의 기록과 전투 장면의 묘사에 많은 것을 할애하는 초기 軍記物語 작품군과 『平家物語』를 차별하는 기준도 여기에 있다.일본은 한반도와 비교할 때 국제적 역관계의 영향을 덜 받는다는 지리적 여건을 가진다. 그것은 문화를 유입한다면 지속시키고 발전시키는 힘이 외부적 조건보다 내부적 역량에 의존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일본의 중세라는 시기가 가지는 특수성은 아마도 일본의 정체성을 형성하면서 약 700여년을 지배한 무가시대의 시작에 있을 것이다. 이 시기에 서민계급이 성장하고, 현재 일본의 기층문화를 일구어내었다. 중세 산문문학의 가장 큰 현재성은 『고콘쵸몬쥬(古今著聞集)』와 『다이헤이키(太平記)』 등으로 인해 대중화한 천황제 이데올로기가 통일권력에 의해 다시 부활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것은 중세 산문문학이 일본의 역사적 발전 위에서 여러 가지 특징을 갖고, 그럼으로써 더 깊은 의의를 지닌다는 것을 말해준다. 문학적 특징은 시대적 배경과 함께 고찰되어야 하는 것이다.參考文獻연민수 편, 일본역사, 도서출판 보고사, 1998이경희 편 (한국일어일문학회), 모토가타리에서 하이쿠까지, 글로세움, 2003문명재, 일본설화문학연구, 도서출판 보고사, 2003서정완, 일본 중세 문학의전개와 죽음의 미학, 인문학연구 제8집, 2001마츠모토 신스케(松本眞輔), 일본문학사와 중세, 일본사상 제4호, 2002최문정, 일본 中古?中世 문학의 사상적 배경의 재검토, 일어일문학연구 제47집, 2003최충희, 한국에서의 일본중세문학연구의 현황 및 그 비판적 점검, 일어일문학연구 제52집, 2005엄인경, 『쓰네노부슈(?信集)』와 『쓰레즈레구사(徒然草)』, 일본학보 제67집, 2006역사자료검색 홈페이지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시대적 배경 부분 실제 제출 분‘중세’는 일반적으로 1192년 미나모토 요리토모(源?.
동남아시아 역사의 여명‘인도차이나’, 유럽인들이 동남아시아 지역을 일컫는 또 다른 이름이다. 이곳은 지리적으로 인도와 중국 사이에 있고 문화도 그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지역은 나름대로 다양하고 풍부한 문화를 가꾸어 왔을 뿐만 아니라, 바닷길의 주요 길목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인도네시아에서 발견되는 인류의 조상 가운데 하나인 자바 원인의 뼈는 그들의 오랜 역사를 증명한다. 인도차이나 반도를 가로지르는 강 주변에서는 신석기 시대부터 농사가 시작되었다. 차츰 관개 기설을 만들어 논농사를 지었으며 계단식 밭도 곳곳에 마련하였다. 항해술도 매우 발달하여 기원전 3세기 무렵 돌무덤에서는 자체적으로 만든 벽화와 유리 제품만이 아니라 지중해가 원산지인 구슬이 나오기도 하였다.이렇게 나름의 문화적 바탕이 있었기에 동남아시아는 중국과 인도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그들과 사뭇 다른 모습을 보였다. 가부장제 사회의 특징을 지닌 유교와 한자 문화가 전해졌어도 모계 중심 사회는 계속되었고, 힌두교의 영향을 받았지만 카스트 제도는 멀리하였다. 서아시아의 이슬람, 심지어 서양 세력의 침략을 받으면서도 고유의 토착 문화를 유지하였다.동남아시아 지역에는 베트남 북부의 동선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을 표준으로 하는 청동기 문화가 기원전 7세기경부터 발전하였다. 이 문화의 가장 특징적인 유물은 청동북인데, 남중국과 동남아시아의 대부분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청동북에 그려진 각종 문양은 남방의 해양 문화 계통에 속한다. 이처럼 아주 이른 시기부터 토착 문명의 요소가 싹텄음에도 불구하고 고대 도시 국가의 성립이 늦은 것은 동남아시아 역사의 수수께끼로 남아있다.동남아시아는 아시아 대륙 남단의 반도부와 해상의 여러 섬(도서부)들로 구성된다. 이 지역은 대체로 열대 지방에 위치하여 일찍부터 벼농사를 주로 한 농업이 발달하였다. 지리적으로는 무역풍대에 위치하여 해상 무역이 발달하였으며, 여러 민족이 계속 이동한 탓에 민족 구성이 매우 복잡하다.유적과 유물로 보면, 이 지방은 일였다. 정치의 틀을 제대로 갖추고 다스렸으며, 당 중기 이후 바닷길을 이용한 동서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상업의 요충지로 믈라카 지역에서 발전하였다.) 말라카 해협에 항구를 건설하였고 수마트라뿐만 아니라 자바, 말레이 반도까지 손을 뻗쳤다. 7세기 후반 인도에 유학한 중국 승려 의정)은 스리위자야에 10년 이상 체재하며 산스크리트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그가 귀국한 후 쓴 여행기에 의하면, 스리위자야에는 1000명 이상의 승려가 있고 불교학의 수준도 인도에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스리위자야의 불교 건축물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9세기경에는 앙코르 왕조 자야바르만 2세의 도움을 받아 1000명의 대승불교 승려가 이곳으로 건너와 사원을 세우기도 하였다. 스리위자야 왕조는 수마트라 섬을 근거로 8~10세기를 전후하여 번성하였으며 처음에는 불교와 힌두교, 뒤에는 이슬람교를 수용하였다. 13세기에는 15개의 위성국을 거느리며 발전하였으나, 14세기에 접어들면서 국력이 약해져 마자파히트 왕국에게 자리를 내주었다.자바에도 인도 문화가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중국의 승려 법현)이 5세기 초 인도에서 돌아가는 길에 자바에 들렀는데, 거기에 많은 브라만이 있었다고 적고 있다.8세기경에 나타난 자바 지역의 샤일렌드라(사이렌드라) 왕국은 보로부두르 불탑으로 유명하다. 772년 자바 섬 중앙(자카르타 구릉지대)에 세운 대승불교 사원으로 탑의 집합체이면서 그 자체가 거대한 탑 모양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채롭다. ‘보살의 10계단 위에 善을 쌓은 탑’이라는 뜻의 대규모 탑으로, 대승불교 경전이 아로새겨진 조각과 당시 생활 모습을 묘사한 흔적들이 인상적이다. 7층의 방형 기단 위에 원형의 불상단을 3층 올린 독특한 형태의 불교 유적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방형 기단의 부조는 불경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것으로 모두 1,460개가 있다. 원형의 불상단에는 종 모양의 불상감 속에 72체의 불상이 사방을 향해 모셔져 있다.) 샤일렌드라 역시 활발한 무역여인을 신체적으로 구속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너무나 자명한 진리가 식민지 베트남에서는 한낱 공염불에 불과했던 것이다.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지역적 동질성과 과거 경험을 바탕으로 동남아시아 국가연합(ASEAN)을 만들어 협력 체제를 갖추고 있다. 이들이 겪었던 과거 경험은 무엇일까?동남아시아는 자연 자원이 풍부하고 지리적으로는 동서 해상무역의 요지에 위치하여 경제적, 전략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지역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이 지역은 신항로를 통하여 아시아로 진출한 서양 세력의 표적이 되었다. 서구세력의 동남아시아에 대한 관심은 교역로의 확보 때문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음식과 깊은 관련이 있다. 요리에 즐겨 쓰였던 향신료는 로마 시대에 유럽에 전해졌다. 동남아시아는 후추, 정향 등 향신료의 주산지로 향신료는 동방 무역을 통해 유럽에 전해졌으며, 육류의 부패 방지와 음식의 맛을 내는 조미료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서아시아에 오스만 제국이 등장하면서 향신료의 값이 폭등하였다. 포르투갈이 처음 인도의 캘리컷을 거점으로 삼은 이유는 인도 후추의 집산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후추보다 더 중요하고 수요가 많았던 것이 동남아시아의 말루쿠제도에서 생산되는 정향과 육두구였다. 이 향신료 역시 요리에 사용되었지만, 정향을 증류해 생기는 기름은 화장품이나 약재로 사용되었으며, 독특한 향과 매운 맛을 지닌 육두구는 지사제止瀉劑와 소화제消化劑로 애용되었다.향신료 외에 유럽 국가들이 필요로 했던 것이 설탕이었다. 로마 제정기에 유럽에 전해졌을 것으로 짐작되는 설탕은 감미료이기에 앞서 향신료이자 약재로 사용되었다. 19세기 이전까지 사탕수수에서 생산된 설탕은 기후의 변동이 크지 않은 열대나 아열대성 기후와 많은 양의 물을 필요로 하였다. 따라서 설탕을 대량으로 생산하기 위해 유럽 국가들은 신대륙에 노예 노동을 기반으로 한 사탕수수 농장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노예제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 19세기 유럽 국가들이 노예 제도를 금지하면서 동남아시아의 식민지에서 사탕수수가 활발하게 재배되었던 것이다인 미얀마 대신 영국이 식민 통치 시기에 붙인 이름인도네시아1850년 영국인 로간이 ‘인도의 섬 세계’를 지칭하기 위해 인도(Indo-)와 군도(-esia)를 합성한 명칭인도차이나인도와 중국 사이에 있는 지역이라는 프랑스의 합성어시암(타이)시암은 ‘미개한 야만인의 나라’라는 의미유럽인들이 붙인 동남아시아 국가의 명칭으로 당시 유럽인들이 동남아시아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갖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영국의 식민 통치 과정에서 많은 피해를 입었던)인도가 영국을 ‘미워 미워 미워’하지 않는 이유는 영국 통치의 긍정적인 영향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영국이 도입시킨 의회 제도, 철도 제도, 교육 제도를 인도는 고맙게 생각하고 법과 질서를 유지하고 산업 발전의 기반을 다진 것에도 좋은 점수를 준다. 각종 제도와 정책을 도입한 식민 정부의 목적이 순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알지만 결과적으로 인도의 근대화에 기여했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이옥순, ‘인도에는 카레가 없다’ 중에서)식민지에 부설하는 철도는 근대 교통 시설의 확충이라는 의미 이외에도 식민 지배와 착취를 위한 도구의 의미도 갖고 있다. “교통 기관은 아직까지는 갖추어지지 않았다. 파당 고지에 철도가 부설되면 음빌린 탄광의 석탄을 엠마하벤의 항구로 운반할 수 있다. 이 항구는 지금 석탄 무역으로 활기를 띠고 있다. 이제 철도가 생겨 수송이 용이해 지면 수마트라의 주는 자바와 맞먹게 되리라.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지역 철도 건설자의 일기 중, 1911)동남아시아의 독립과 20세기 이후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국제 정세에서 유럽의 쇠퇴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세계 대전 후 유럽의 식민지들은 독립 운동을 일으켰다. 유럽 국가들은 식민지를 쉽게 포기하려 들지 않았지만, 미국과 소련은 민족 자결권을 옹호하면서 식민주의에 반대하였다. 모든 식민지가 쉽게 해방되지는 않았지만, 냉전 시대 초기에 독립 국가가 속속 태어났다. 이들은 빈곤했고 통일된 세력을 형성하지도 못했지만, 세계 권력의 균형에서 새로운 변수로 작용하였다. 프랑스 정권을 잡았고 지하에 숨어 있던 라오스 공산당이 모습을 드러내어 라오스 인민민주공화국을 세웠다. 라오스는 베트남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여 1980년대 베트남이 이끄는 인도차이나 동맹(라오스·베트남·캄보디아)의 일원이 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 초반부터 베트남의 영향력은 감소했다. 1989년 최초의 총선이 있었으며, 1991년 새 헌법이 공포되었다. 이 헌법에 의하면 “모든 권력은 국민에 의한 그리고 국민에 의해서 나온다.”(제2조)고 명시되어 있으나 중국과 베트남의 경우처럼 라오인민혁명당(LPRP)이 정치권력을 완전히 독점하고 있는 폐쇄적 다원주의이다. 법적으로도 LPRP을 제외한 어떤 정당도 인정 되지 않을뿐더러 조직될 수 없다. 라오스는 1997년 미얀마와 함께 아세안에 가입하여 조심스럽게 국제사회로 나서고 있다.미국은 필리핀 경제의 대미의존도가 높은 것을 이용하여 비교적 폭넓은 자치권을 인정하는 편이었으나 필리핀은 계속하여 완전 독립을 요구하였다. 1930년 필리핀 공산당이 성립하고, 1935년 10년 후 완전 독립을 전제로 필리핀 연방이 조직되었다. 1942년 2차 세계대전 중에 일본이 점령하였는데, 1943년 필리핀의 독립을 일본이 인정하자 필리핀의 토착 엘리트 상당수는 일본군과 협력하였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잔혹 행위와 경제적 수탈로 민중들은 큰 고통을 받았으며, 같은 아시아인인 일본인 ‘해방자’보다는 이전의 주인인 미국을 지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미국과 필리핀 사회당 및 공산당)이 지휘하는 두 개의 게릴라 단체가 항일 투쟁을 계속하던 중 종전을 맞았다. 그러나 막상 미군이 필리핀에 진주한 다음 이들은 권력에 참여할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공산주의에 가깝다는 미군당국의 판단과 보수적인 토착엘리트들이 토지개혁을 요구하는 이들을 견제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일본에 협력했던 엘리트들이 보수적인 친미정책을 추구할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여 그들에게 정권을 넘겨주었고, 로하스 정권은 불안한 국내 정치로 인해 미국에 의존하여 99년간의 군사기지 조차와 미국인에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