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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역사] 고려의 불교
    고려불교의 특징(정리1)고려불교는 고려시대 전체로 볼 때 삼국시대 이래로 현세구복적, 호국적인 성격을 띠고 국가를 비보하고 국리민복을 제공하는 신앙으로 옹호되었다. 교종과 선종이 융합하고 유교와 풍수지리사상과 결합하였다. 또한 불교를 국가권력에 예속시켜 통제하여 준관료기구로서 승록사를 설치하여 사원과 승려를 통제하였다. 승과를 실시하여 합격한 승려에게 승계와 토지를 지급하였다.고려 초 태조는 훈요 10조를 만들어 고려를 불교국가로서의 방향을 제시하고 사원을 세워 불교를 숭상할 것과 연등회와 팔관회를 개최하였으며 왕륜사, 광명사, 법왕사, 흥국사 등 10여개소가 건립되었다. 광종에 이르러 승과제도를 채용하여 급제자에게 법계를 주었고 은진관촉사 석불을 완성하였다. 또한 정치세력을 분열을 해결하고 국가적 안정을 도모하기 위하여 교,선의 대립통합을 시도하였다. 성종은 최승로 등의 유학자를 등용하여 연등회와 팔관회를 중지시켰으나 현종 때 다시 국가의 보호를 받아 융성하여 현화사를 창건하였다.고려중기 의천은 교선통합을 시도하였지만 교리적인 측면에서 완전한 통합이라기보다는 다만 교단의 통합에 그쳤고, 법상종을 의식한 정치적 통합의 성격이 짙었으며, 광종사후에 침체해있던 천태학을 부흥시켜 천태종을 개창하고 이를 중심으로 선종을 포섭하였는데 의천의 교선통합은 중국 화엄학에서의 교선일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천태종의 교관겸수를 채용하였다. 그 실천 수행법인 지관(온갖 잡념을 정지하고 지혜로서 사물을 관조하는)을 중시하여 선종의 그것과 비슷하였지만 기본적으로 법화경(천태종의 근본경전)을 정종으로 삼는 통일적이고 지적인 종파로서 왕권우위의 중앙집권적 귀족사회에 적합한 이념체계를 제공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의천의 불교는 귀족적 색채를 띠어 지방사회라든가 일반민에 대한 종교적 관심은 보이지 않는다. 이 때문에 원효의 교학적 측면은 높이 평가하면서도 불교대중화의 측면은 소홀히 하고 말았다.고려후기 최씨가 정권을 잡으면서 교종을 탄압하고 정책적으로 선종을 후원하였고 무신정권기에 이르러 신앙결사운동이 일어나고 선종의 부흥하였다.지눌은 이간의 심성에 대한 교리적인 분석을 토대로 정혜쌍수와 돈오점수를 주장하였으며, 수행의 최종적인 형태로서 간화선을 내세웠다. 지눌의 불교는 종래 대립관계에 있던 선과 교를 이론적으로 일치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실천하였다는 점에서 불교사상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지눌의 심성론은 지방의 지식인에 영향을 미쳐 지방향리 출신의 신흥사대부들이 성리학을 수용하는 바탕을 마련하여, 불교에서 성리학적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역할을 했다. 이후 혜심은 유불사상이 일치설을 주장, 유?불 타협을 시도고 지눌의 종지를 더욱 발전시키는 한편 최우 정권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대몽항쟁의 일익을 담당하기도 하였다.원갑섭기 이후 불교의 세속화로 타락하였다. 왕권과 결탁, 친원적 경향을 띠고 신비적인 영험과 공덕을 강조하였다. 권문세족이 불교교단을 장악하여 결사정신은 퇴색되고 점차 귀족적이고, 보수적인 불교로 변질되었다. 원간섭기 이후 불교계는 왕실과 권문세족과 다시 연결되면서 정치성향을 보였다. 충목왕 때부터 보우, 혜근 등에 의해서 원의 임제선이 도입되어 전통불교와 맥이 끊어지고 불교계의 새로운 주류로 떠올랐다.대장경의 조판 호국불교, 불교의 교리에 대한 정리와 불서를 널리 보급하기 위하여 간행되었다.초조대장경은 거란퇴치의 염원과 교리의 정리를 목적으로 만들어져 현종 2년경(1011년) 시작한 이래 76년간의 노력 끝에 선종 4년(1087년)에 완료되었다. 그러나 대구 부인사에 보관 중 고종 19년(1232)에 몽고 침입으로 손실됐다. 인본의 일부가 일본경도의 남선사에 보관되어 있으며, 근자에는 한국에서도 그 잔편이 발견되었다.속장경은 의천이 흥왕사에 교정도감을 설치하고 송, 요, 일본 등지에서 불경 등을 수집하여 불서 목록인 신편제종교장총록을 만들고, 4700여권의 불서 목록에 따라 간행하여 숙종 6년에 완성하였다. 신편제종교장총록은 상/중/하 3권으로 편성되었으며 총 1010부에 4700권의 저술이 실려 있는데 특히 원효 등 신라 고승들의 저술 400여권과 거란승 190권이 포함되어 있다. 대구 부인사에 보관 중 고종 19년(1232) 몽고 침입시 소실 현존되는 인본의 일부가 일본에 있으며 조선 초에 중수, 간행된 불서목록이 송광사에 현존하고 있다.팔만대장경의 재조는 최우가 강화도에 대장도감, 진주에 분사대장도감을 설치하고 고종 1236년에 시작하여 동왕 1251년에 완성하여 강화도 서문 대장경판당에 안치한 후 내 선원사로 이안되었고, 15세기에 합천 해인사로 이동, 보관중이다.팔만대장경은 내용이 정확하고 자체의 아름다움과 목판제작의 정교함이 최고수준으로 고려불교의 높은 수준과 문화의식의 반영하고있다.고려불교의 특징(정리2)신라말의 선문구산 개산 이래 한국의 불교는 다분히 선종에 기울어져 그것은 그대로 중당이후 중국불교의 경향과 일치하고 있다. 6조 혜능의 남돈 선이 금강반야경을 존중 그의 고향 조계의 보림사를 중심으로 하였고 스스로 인도의 달마의 계승자라고 자처하였는데, 한국의 선맥은 바로 이 남선의 조계종이다.고려후기 보조국사 지눌(知訥, 1157-1210)의 출현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고려 불교는 선교병립의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의천(義天, 1055-1101)은 고려에 천태종(天台宗)을 중흥시키고, 호국기원의 목적과 교학진흥의 뜻을 겸하여 《대장경》의 수집, 간행에 진력한 공이 컸으나 선·교 양종의 원융적인 회통에 미흡한 점이 아쉽다. 그러나 지눌이 신라의 화엄전통을 재인식할 수 있었던 것은 큰 성과이다.《진심직설 眞心直說》 등은 바로 그가 증득한 결론으로 고려불교의 수확이며 원효 불교의 르네상스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중선경교는 신라의 원효와 같은 현실세계에 과감히 파고드는 무애행의 실천이 없었다. 고려불교는 이후 다분히 기복적 산중 은둔적 불교, 궁중과 부녀자 불교로 전락되어 가는 경향이 있게 된다. 고답적인 산중 선불교나 교불교는 또 다른 형이상학을 낳아 민중과의 거리가 넓어졌다. 결국은 의례의 불교가 흘러넘치게 되었다. 몽고지배하에서 타락된 의례불교는 결국은 고려 멸망의 다른 한 원인으로 남게 된다. 그러나 고려조 455년 동안, 더 나아가서 이차돈의 순교 이래(528) 조선 태종(태종, 1401∼1418)이 배불정책을 단행하기까지 근 9백 년 동안이나 면면히 불교신앙이 활발하게 유지되어 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 중요한 이유는 조선조 이전에는 한반도에 불교에 대항할만한 다른 종교나 다른 이념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보아진다.문화적으로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민족문화를 남겼음은 고려불교의 위대성이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발명된 금속활자와 대장경조판의 현존은 인류 역사에 금자탑을 쌓는 쾌거가 되고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선도와 의례의 두 가지 정신이 생활에 밀착해서 고려청자 미가 창조되어 세계를 놀라게 한 것이다. 이 두 가지 문화적 유산은 불교로 함양된 고려인의 청정하고 충직한 마음의 결정이라 할 수 있다.수덕사 대웅전(국보49호)대웅전은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남향하여 앉아 있다. 장대석을 쌓아 이룬 축대 위에 의젓하게 앉은 이 건물은 1308년에 세워진 것으로, 안동 봉정사 극락전,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손꼽는 오래 된 건물이다.1937년에 해체 수리를 할 대 중수년대가 적힌 붓글씨가 발견되어 이 건물의 나이를 알게 되었다. 건립연대가 분명하여 우리나라 고건축의 기준이 되며 그 역사성과 아름다움으로 하여 국보 제 49호로 지정되었다.
    인문/어학| 2004.10.10| 4페이지| 1,000원| 조회(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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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한국사찰의 가람배치 평가A+최고예요
    1. 가람의 성립과 배치1) 가람의 성립2) 한국의 가람배치2. 삼국의 불교와 가람배치1) 삼국 불교 전래의 의의2) 삼국의 가람① 고구려의 가람배치② 백제의 가람배치③ 신라의 가람배치④ 통일신라의 가람배치3. 고려의 불교와 가람배치1) 고려 불교의 의의2) 고려 불교의 가람배치4. 현존하는 한국사찰의 가람배치1) 백제 수덕사2) 신라 불국사3) 고려 봉정사1.가람의 성립과 배치유형1) 가람의 성립가람이란 인도어의 Sangarama로 한문으로는 승가람마(僧伽籃摩)로 표현된다. 승가(僧伽)란 중(衆), 람마(籃摩)란 동산의 뜻으로 이는 중원(衆園) 즉, 여러 승려들이 한데 모여 불도를 닦는 곳으로서 가람(伽籃)이라 부른다.인도에서 불교가 종교로서 안정과 번영을 이루자 탑이 대형화되고 장식이 화려해지면서 탑을 중심으로 하는 가람이 지속되다가 기원전 2세기경부터는 마치 이집트의 석굴신전의 출현과 같은 석굴사원이 유행했다. 이는 불교의식과 기도를 하기 위한 새로운 건축양식으로서의 내부공간이 필요해졌음을 뜻한다. 사리를 안치한 탑에서 사실적인 불상의 출현은 곧 불상을 모실 공간의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진 것이며, 이는 신앙의 대상은 석가모니로 변함이 없었으나 석가를 대신하던 사리와 탑이 형식적인 의식으로 밀려나게 됨에 따라 가람형성에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더욱이 중세에는 힌두교의 번성으로 말미암아 상대적으로 불교가 쇠퇴함으로써 사찰자체의 권위, 형식 등의 보호가 필요해져 가람도 넓은 대지위에 높은 담이나 회랑 등으로 둘러싸고 중안의 본당을 중심으로 그 전후의 중심축 좌우에 여러 건물들을 배치하게 되었다.사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구조물은 사리를 모신 탑과 불상을 모신 당우(堂宇)이다. 따라서 가람의 구성에 있어서도 탑(塔)과 당(堂)의 관계에 의하여 일탑일금당식, 일탑삼금당식, 또는 이탑일금당식, 무탑식 등으로 그 배치 형식을 분류하고 있다.2)한국의 가람배치의 유형우리나라의 고대 사원의 가람배치의 양식을 밝히는 노력은 광복 전 일본 사람들에 의하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평지가람에 비해 그 엄격성이 덜하고 기본적 지형이나 자연의 조건을 고려하여 건축되었다. 오늘날 구산선문의 선종가람이나 그 폐사지 그리고 조선시대로 이어온 통불교 중심의 여러 산지 가람을 통해서 그 면목을 볼 수 있다.2. 삼국의 불교와 가람배치1) 삼국 불교의 전래와 의의삼국시대는 원시사회에서 고대사회로 발달하는 시기이다. 따라서 무장이 지배자였던 제정일치의 원시 사회단계에서 제정의 분리가 이루어지며 전제군주인 왕이 등장한다. 이에 따라 정치제도도 병열적인 체제에서 일원적인 체제로 편제되고, 경제제도도 정복전쟁을 통하여 봉읍제인 식읍제가 발달한다. 그리고 사회제도도 지배층은 귀족과 생산을 담당하는 집단 예민으로 신분 분화가 되어간다. 사회가 변함에 따라 사상 문화도 사회를 이끌어가는 초부족적 정신인 불교사상과 불교문화가 발달하게 된다.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되는 시기는 고대국가가 발달하는 시기와 일치한다. 따라서 우리나라에 전래되는 불교는 왕즉불사상(王卽佛思想)을 중심으로 하는 중국의 불교가 전래된다.불교가 제일 먼저 전해진 곳은 고구려이다.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 전진(前秦)에서 순도(順道)가 와서 불상과 불경을 전한 때였다. 그보다 12년 뒤인 침류왕 원년(384)에는 동진(東晋)으로부터 마라난타(摩羅難陀)가 와서 백제에 불교를 전하였다. 마라난타가 들어오자 왕이 그를 궁내에 모시고 예경(禮敬))하였고 진사왕(辰斯王) 2년(386)에는 한산(漢山)에 불사(佛寺)가 이룩되고 승려 10인이 제도(濟度))되었다. 신라는 고구려의 스님 묵호자(墨胡子)의 개인적인 포교 활동으로 전해 졌다. 그러나 초기에는 이에 효과를 제대로 거두지 못하였고 박해 속에 끝났다. 521년(법흥왕8년) 남조인 양나라와 국교를 맺은 후 양나라 무제가 보낸 승려 원표에 의하여 비로소 신라 왕실에 불교가 알려지자 법흥왕은 불교를 수용하고 이를 진흥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귀족들의 반대로 인해 실패하였고 법흥왕이 총애하던 이차돈의 순교로 인해 정식적으로 불교가 공 청암리사지와 비슷한 형식인 1탑 3금당의 배치 형식과 탑은 팔각의 형식을 갖추고 있었다. 이로 보아 고구려 가람배치는 연구 보고서가 빈약하여 단정하기 어렵지만 그 배치에 있어서 탑을 중앙에, 그리고 탑의 동서 좌우에 각각 금당을 두고, 탑 북쪽에서 다시 큰 금당을 배치한 1탑 3금당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일탑삼금당식 가람은 후일 백제 군수리 사지에서 그 영향을 볼 수 있고, 신라의 황룡사지, 교려의 만복사지, 일본의 비조사지(飛鳥寺址)에 계승된다.② 백제의 가람배치백제는 침류왕 원년(384)에 스님 마라난타에 의해 전래되었다. 이듬해에 한산주에 불사를 창건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백제가람의 효시라고 할 수 있으나, 이때의 가람에 대해서 현재로서는 전혀 알 길이 없다. 그 후 백제는 공주 ? 부여로 남하하게 되면서 성왕에 의해 불교는 진흥되고, 그 19년(541)에는 양나라에 경전과 함께 공장(工匠) ? 화사(畵師)를 청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백제의 가람은 중국 양나라 불교문화의 영향이 매우 컸으리라 짐작이 된다. 대체적으로 공주 ? 부여 ? 익산 등을 중심으로 여러 사찰들이 창건되었는데 일부 사찰을 제외하고 대다수 사찰들은 평지가람으로 경영되었다고 보여진다. 백제의 평지가람으로 군수리사지, 동남리사지, 정림사지, 금강사지, 미륵사지가 발굴조사 되었는데 대체적으로 1탑 1금당의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가장 전형적인 백제 가람 배치는 탑을 중심으로 하여 중문, 탑, 금당, 강당의 건물 중심이 자오(子午)선상에 놓이도록 좌우대칭으로 배치하고 회랑을 돌린 것으로 그 예로서는 부여 정림사지와 백제 장인들에 의하여 지어진 신라 황룡사지 및 일본의 사천왕사를 들 수 있다.③ 신라의 가람배치삼국 중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부에 위치하였고 문화의 계통적 흐름으로 보아도 백제나, 고구려와 다른 문화를 형성하면서 미술표현에 있어 보수적 성향과 추상주의를 지녔다. 그리고 새로운 문화의 수용 면에서도 매우 보수적 성향을 지니면서 불교 수용과정에서 내부적 갈등을 가졌던 것으로탑에서 쌍탑으로 분화되면서, 탑이 갖는 상징성이 남고 실제적인 신앙의 대상으로는 불상이 강조되었다. 통일 직후에 만들어진 사천왕사, 감은사, 불국사 등은 일금당 쌍탑식 가람배치를 보여준다. 그 대표적인 예로 사천왕사지를 들 수 있다. 사천왕사지(사적8호)를 보면 신라 문무왕(19년, 679년)때 당나라 군사를 물리치기 위해 창건했는데 현재 중문지, 동서 쌍탑지, 금당지, 경루와 종루지가 남아 있다. 중심 축선을 따라 남쪽 중앙에 중문지가 있고 그 안의 양쪽에 동서 탑지가 좌우 대칭으로 있고 그 안쪽 중앙에 금당지가 있다. 금당지를 중심으로 좌우에 경루와 종루지가 있고 금당지 중심선 끝에 강당지가 있으며 그리고 중문지에서 시작된 회랑이 강당좌우까지 긴 장방형의 회랑으로 둘러싸인 전형적인 1금당 쌍탑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 배치 형식은 1탑식 가람배치에서 전형적인 쌍탑식 가람배치로 발전되기 전인 중간단계의 배치 형식으로 보기도 한다. 또 하나의 예로서 감은사지를 보면 통일의 주역인 문무왕의 유지를 받들어 신문왕이 완공한 것으로 높은 석축 쌓아 평지를 만든 후 중문, 금당, 강당을 일직선상에 배치하고 금당 앞 좌우 동서에 3층 석탑이 마주하도록 배치한 전형적인 쌍탑식 가람이다. 그리고 불국사는 3개 영역으로 대웅전, 극락전, 비로전의 구역으로 나뉘며 대웅전 영역은 석가여래의 피안의 세계, 극락전은 아미타불의 극락세계 그리고 비로전 영역은 비로자나불의 연화장 세계를 나타낸다. 한 가람 안에 여러 불전이 함께 조영한 예가 처음으로 나타나 불교 교단의 변화를 짐작할 수 있다.즉 여러 교파의 신앙체계가 종합화되어 있어 종합적 성격을 지니는데, 법화신앙의 석가모니불, 화엄종의 비로자나불, 정토신앙의 아미타불, 현세구복적 성격의 관세음보살이 함께 한다. 전체적으로는 이상적인 피안의 세계인 불국(佛國)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 중 중심영역은 대웅전 영역으로 청운교, 백운교와 중문(자하문), 금당(대웅전), 강당에 이르는 일직선의 축과 이를 둘러싼 회랑으로 구성되며 금당 앞마당에는어 선종의 부흥을 도모하는 신앙결사운동이 일어났다.당시 등장하였던 지눌의 심성론은 지방의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심성론은 지방 유학자나 신흥 사대부들이 성리학을 받아들이는 바탕을 마련하여 불교에서 성리학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역할을 하게 된다. 이후 혜심은 유불사상의 일치설을 주장하면서 유 ? 불의 타협을 시도하였고 그 사상은 최우정권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 대몽항쟁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계속적으로 발전하던 고려의 분교는 원간섭기로 들어오면서 불교는 세속화로 점차 타락의 길을 걷게 된다. 너무나 밀접한 왕권과의 결탁과 친원적 성격, 신비적 영험과 공덕의 강조, 거기에 권문세족이 불교교단을 장악하여 결사정신은 퇴색하고 보수적이고 귀족적인 색체로 변질되었다.고려의 불교는 초기부터 끊임없이 발전해왔다. 교리의 발전과 여러 교단의 성장 등은 상당히 긍정적인 면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말기 부패한 불교는 조선에 들어와 억압받기는 했지만 고려에서 최고의 전성기를 맞은 불교는 이후에도 계속 발전을 하게 된다.2)고려불교의 가람배치고려의 가람배치는 삼국시대의 삼금당 일탑식 가람배치와 남북국시대의 신라 쌍탑식 가람배치가 계승되었다. 변화된 것은 지금까지 금당으로 부르는 것은 대웅전(大雄殿)이라 하였으며 만세루(萬世樓)나 보제루(普濟樓)와 같은 이름의 누(樓)를 건립하고, 또 영산전(靈山殿), 응진전(應眞殿)과 같은 전각들과 토속신앙을 수용하기 위한 산신각(山神閣), 칠성각(七星閣)등을 건립하였다. 이처럼 새로운 기능의 전각들이 건축되는 사찰은 자연히 기존의 일금당 쌍탑식 가람이나 삼금당 일탑식 가람의 배치와 다른 배치를 이루게 되었다. 대부분 남북으로 긴 터에 남쪽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조계문, 해탈문, 불이문, 만세루와 같은 건물을 세우고 다시 넓은 대웅전 앞마당이 마련되고 이 마당에 석탑을 세우기도 한다. 또 이 마당 좌우에는 승려들이 참선하는 심검당(尋劒堂)과 승려들의 생활공간인 승방이 건립된다. 다음 이 마당 보다 좀더 높은 터에 대웅전을 세운다. 그리고 대 있다.
    인문/어학| 2004.10.10| 12페이지| 3,000원| 조회(1,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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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대-1960년대는 거의 모든 현대문화의 기틀이 마련된 시기라고 할수 있다. 영화, 음악, 패션 등등에서 새로운 시도와 문화가 만들어졌다.영화우선 영화의 문화를 살펴보면, 1962년 1월 법률 제995호로 한국 최초의 '영화법'이 만들어 진다. 하지만 법제정의 강제성만큼이나 제도적으로 영화 내용에 제동을 거는 장치가 되고 말았다. 비단 한국영화 뿐만 아니라 외국영화의 수입에도 외화 절약이라는 명목을 내세워 관객의 보는 권리마저 제한한 제도였고 앞선 영화의 접근을 사실상 막아버린 셈이 되고 말았다. 이 영화법은 당시 71개사에 이르던 영화사를 16개사로 통폐합시켰고 신규등록 여건을 엄청나게 강화 시켰다. 그 결과 64년 의 활동은 영화법을 개정하기에 이르렀고 그 이후 오늘날까지 6차에 걸쳐 영화법이 개정되었다. 본 영화법은 스크린 쿼터제 등 긍정적인 한국영화 보호책도 있었지만 영화 검열의 대폭 강화는 한국영화의 작품제작 경향을 변화시키게 된다. 유현목의 , 이만희의 등은 개작 명령을 받았고 등은 사회 목적에 어긋난다고 해서 심한 가위질을 당했다. 이 밖에 박종호의 , 신상옥의 , 이형표의 등의 작품은 외설 혐의 시비를 받아 검찰에 입건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가운데서도 몇몇 감독들은 의식이 뚜렷한 창작활동에 이바지하게 되어 자못 멀어져 가려는 관객을 되돌려 세우는 데 공헌했다. 유현목은 등으로 그의 위치를 다졌고, 신상옥은 에 이어 에서 그 나름대로의 영상미를 시도해 보였다.김기영의 , 김수용의 , 이만희의 등 역시 높은 수준의 작품으로 개성이 뚜렷한 작가들로 인정받았다.이 밖에 문예물이나 오락 위주의 영화는 작품 전체의 수만큼 많았는데, 현실을 벗어난 안이한 영화들은 점차로 국적불명의 내용으로 치닫고 만다.60년대 멜로드라마는 서민층의 생활, 또는 가정을 중심으로 한 여러가지의 생활 현실을 반영했다. 신상옥의 , 홍성기의 , 박상천의 , 김수용의 , 유현목의 , 김기영의 등 전후 세대간의 거리와 윤리적 갈등, 생활 현실의 어려가치 때문에 흥행은 보장되었고 외화 수입 쿼터를 싸고 계속 신경전을 벌이게 된다. 또한 영화의 검열 기준을 강화하는 한편 합작영화의 기준을 명시하여 위장 합작영화 방지와 그 밖에 배급 업무를 담당하는 ?영화배급협회?를 설치 운영케 했다.검열은 긴급 조치에 위배되는 것은 가차없이 잘라내었는데, 사전 대본 심의와 실사 심의가 공존했다. 이 때문에 사회적, 시대적 리얼리티와는 거리가 먼 영화들이 양산될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 나타난 돌파구가 호스티스물 등이었다. 이장호의 에 이은 호스티스물의 범람은 삶에 대한 냉소, 육체적인 자유 추구, 여성의 상품화라는 소비성 강한 사회 풍조가 크게 대두된 것이다.우수 영화를 만들어 스크린 쿼터의 보상을 받는 제도는 60년대에 이어 문예영화를 양산하는 지지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리얼리즘 계열의 영화는 사라지게 되었고 사회의식이나 작가의 비판은 당국의 강력한 통제하에 자취를 감추었다. ?우수 영화는 국책 영화? 라는 의식의 팽배로 대부분의 관객이 신파물, 호스티스물에만 시선을 돌리는 사이에, 여전히 ?국난을 극복한 위인?을 다룬 영화나 독립 투사의 활약, 반공 영화, 계몽 영화들이 우수 영화로 지목되고 보상이 주어져 영화계는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되었다. 영화계는 산업화하지 못했고 소수의 영화 자산가를 만들어 내면서 영화감독들에게는 박탈감을 안기고 영화에는 질적인 퇴보를 가져왔던 것이다.2. 유신 정권 하의 작품 경향이 시대에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손쉽게 관객을 사로 잡을 수 있는 가벼운 내용의 영화들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60년대 말에 제작되어 폭발적인 흥행을 기록한 정소영의 의 속편(1969-1971)들과 그 아류작들이다. 류의 최루성 멜로 드라마들은 고정적인 여성 관객들을 확보하는 수확을 얻는다. 하지만 이러한 작품들이 과연 당대의 리얼리티를 얼마나 반영하고 있느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긍정적인 답을 내리기 어렵다. 60년대 청춘영화의 계보 역시 고교생이나 대학생들의 학창시절을 코믹하고 낭만적으로 그린 하이드, 벨벳, 쿄듀로이 등 다양한 소재의 미니 스커트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나타난 핫팬츠가 약간의 변화를 일이켰다.1970년대부터 패션산업의 국제화가 시작되어 많은 유명한 디자이너들이 개발도상국가로 라이센스 시장을 개척하기 시작하였으며 밀라노가 새로운 패션의 고장으로 인식되기 시작하고, 일본 패션계가 급부상하였다. 몇 가지 대표적인 특징을 찾아보면,- 바지- 캐주얼화의 가속화- 신체와 건강에 대한 관심으로 기능복 도입- 남성의 패션에 대한 관심 증가- 유니섹스룩70년대에 들어와 여성 파워가 강해지면서 많은 여성들은 사회참여에 대한 의식이 높아지고 직업을 중시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베이비 붐 세대들은 70년 대 전반에 20대 후반이 되어 결혼이나 직장을 찾음에 따라 보수적인 스타일을 찾게되어 '젊은 소녀' 스타일에서 '젊은 여성' 스타일인 성숙한 감각으로 바뀌게 되었다. 또한 어깨가 넓은 역삼각형의 실루엣의 정장이 여권신장 운동과 여성의 사회진출과 맞물려 인기가 있었다.이브생로랑이 르스모킹이라는 팬츠슈트를 소개한 이 후 짧은 퀼로트의 형태로부터 앞에 주름이 잡힌 고전적 테일러드 바지와 배기 형태 등이 다양하게 등장하였다.또한 입기 쉽고 편안하며 활동적인 패션 즉 Functional Fashion이 정착하여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는 레이어드는 긴 스커트 위에 짧은 스커트를 입거나 손목길이의 소매옷에 소매를 자른 옷을 덧입거나 원피스 위에 에이프런형의 원피스를 덧입는 등 의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레이어드는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의복으로 저렴한 가격의 의복을 층층이 겹쳐 입어 색상이나 소재 등의 다양한 효과를 낼 수 있다. 이러한 레이어드 스타일을 기본으로 한 복고풍의 Romanticism이 주류를 이룬 것은 70년대 전반부였으며, 전체적으로 헐렁한 이국풍의 빅룩도 유행하였다. 후반부에는 같은 레이어드 스타일을 기본으로 하면서 기발한 현상의 펑크 패션이 유행하였다.심지나 안감이 없는 비구조적이며 캐주얼한 복식형태가 주류를 이루어 '캐주얼화가 가속화' 되의 그러한 대표 작품으로는 (1984), (1984) 등을 꼽을 수 있고 이는 1990년대에 들어서서는 다른 감독들에 의해 보다 경쾌하거나 경박한 모습의 영화로 드러나게 된다.한국형 액션영화. 한국의 액션영화는 나름대로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한국영화의 전설로 불리는 나운규의 1920년대 작품 에서 출발한 긴 연륜을 갖는다. 이런 액션영화는 1960년대부터 오랫동안 암흑가 액션, 반공액션, 월남전 액션 등으로 계속 버전을 바꾸며 존속되어 왔던 것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1980년대에 들어서서는 액션영화와 홍콩의 무술영화를 취합한 영화가 등장하게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작품이 이두용의 시리즈였다. 스타급 가수와 미녀들의 출연 그리고 코믹한 상황 설정에 힘입어 이러한 류들은 한때 80년대의 각광받는 장르가 되는 듯 했다. 하지만 몰려드는 홍콩의 필름 느와르와 할리우드의 엄청난 액션영화들은 그런 영화의 성장을 더 이상 용인하지 않았다.1970년대 한국영화의 비극은 관객들이 수용할 수 있는 서술과 한국영화가 만들어내는 서술과의 거리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970년대 말에 요절한 70년대의 대표적인 감독 하길종은 "한국영화는 세계 속의 어디쯤 있는가? 아무 곳에도 없다. 싹도 없고 잔해도 없다. 설익은 모방과 지저분한 상흔만이 있다. "고 질타하였다. 그 역시 이러한 비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비판은 정당한 것이었다. 1980년대의 새로운 영화는 이러한 하길종의 비판정신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것은 곧 '아버지의 영화는 없다. '는 것이었고 여기에 새로운 군사정권의 등장과 이들이 자행한 1980년 5월 광주의 참혹상이 가세하였다. 그래서 80년대 한국영화는 바로 이 '새로움'과 '싸움'에 관한 것이었다.임권택의 (1980)와 (1981)에 의해 80년대 한국영화의 조용한 출발이 이루어지고 있을 때, 이장호는 약간 소란스럽게 80년대를 장식하였다. 이장호의 다섯 번째 작품이자 몇년 간의 강제된 휴지기 이후에 나온 (1왔던 주제를 해석하는 또 다른 방식일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이 다룬 분단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과 형식미는 이장호와 배창호의 성과를 영화 내적으로 한꺼번에 넘어서는 듯 하다. (1996)음악http://my.netian.com/~gnal/minga_history_80_1.html대중성 획득한 운동가요 시대80년대는 소수 운동권 학생들의 노래 문화에 불과했던 민중가요가 비로소 대중적 기초를 확립한 시기로 기억될 것이다. 흔히 ‘서울의 봄’ 이라 부르는 79년 박정희 사망 이후부터 80년 광주항쟁의 기간동안 70년대 후반 형성된 민중가요들은 대중적으로 확산되고 독자적인 노래문화의 하나로 정착하게 된다. 80년 초 중반 민중가요의 주류를 이룬 형식은 단조행진곡이다. 70년대의 포크를 대신하여 80년대에 단조행진곡이 민중가요의 주류를 차지하게 된 것은 80년 광주민중항쟁의 경험에서 비롯된다. 군대를 동원해서 민주화를 외치던 수많은 시민들을 학살했다는 사실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특히 학생들의 충격과 패배감은 더욱 깊었고 그것을 극복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광주’의 경험을 통해 이러한 사회적 모순의 본질이 보다 뚜렷하게 드러났고 사람들의 자기결의는 한층 더 강해졌다. 이제 사색적인 분위기의 ‘포크’는 사람들의 굳은 결의를 달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보다 집단적이고 전투적인 노래가 필요하게 되었다.82년 선보인 은 가장 널리 보급된 단조 행진곡의 전범이 되었다. 뒤를 이어 등의 노래가 쏟아져 나오면서 단조행진곡은 80년대 민중가요의 주도적인 양식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들 단조행진곡에서 그려지는 핵심적 내용은 직접적인 투쟁의지다. 이러한 투쟁의지의 이면에는 슬픔과 괴로움이 짙게 깔려있고 그 자체로 단조행진곡과 더불어 느리고 비장한 단조서정가요들도 나오게 되었다 등 약 3-40여곡의 노래가 이러한 풍으로 분류될 만큼 많이 발표되었다. 70년대 보기 드물었던 단조의 서정가요들이 이시기에 급증한 것은 직접적인 싸움의 현장에서 부를 수 있는의
    인문/어학| 2003.06.09| 15페이지| 1,000원| 조회(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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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학] 골품제도
    골품제도신라 때 혈통의 높고 낮음에 따라 관직 진출, 혼인·의복·가옥 등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 규제를 한 신분제도.본문세습성이 강하고 신분간의 배타성이 심한 것이 특징이다. 신라 국가 형성기 이래의 정치체제 및 사회발전 과정에서 정비되어, 이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에도 장기간 존속하다가 신라의 멸망과 함께 소멸되었다.이것은 왕족을 대상으로 한 골제(骨制)와 여타의 사람을 대상으로 한 두품제(頭品制)로 구분된다. 원래 신라는 경주에 자리잡은 사로국(斯盧國)의 6부(部)를 중심으로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복속시키면서 성장하였다. 그 과정에서 복속된 소국의 지배층 가운데 일부를 경주로 이주시켜 지배층인 6부에 편입시키고, 다른 일부는 원거주지의 촌주(村主)로 삼아 복속지역 통치에 이용하기도 하였다.6부체제를 특징짓는 이같은 신라 초기의 정치체제는, 지증왕대 이후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는 6세기 초반에 해체되었다. 520년(법흥왕 7)의 율령(律令)반포는 6부체제가 해체된 뒤 왕을 중심으로 하는 일원적인 관료제를 지향하는 과정에서 나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율령을 반포할 때 원래의 신라인과 경주 지역으로 이주해온 지배층에 적용한 신분제가 골품제로,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관등제와 직결되어 있었다.신라의 관등제는 경위(京位)와 외위(外位)의 이원적 체제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골품제의 적용을 받은 경주인들은 중앙관직에 진출하여 경위를 지급받았다. 반면에 지방인들은 골품제 적용대상에서 제외된 채 중앙정계에 진출하지 못하고 외위만을 받았다.골품제는 모두 8개의 신분층으로 구성되었다. 먼저 골족은 성골(聖骨)과 진골(眞骨)로 구분되었으며, 두품층은 6두품에서 1두품까지 있었는데 숫자가 클수록 신분이 높았다. 그러나 이 가운데 3두품에서 1두품까지는 기록에 전혀 보이지 않는데, 아마도 율령 반포 초기에 일반 평민을 3등분하였다가 현실적으로 구분할 필요성이 거의 없게 되자 곧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성골은 골족 가운데서도 왕이 될 수 있는 최고의 신분이었다. 진골 역시 왕족으로서 신라 지배계층의 핵심을 이루면서 모든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성골과 진골은 원래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성골과 진골 모두 왕족 출신으로 원래는 진골만 존재하였다. 그러던 것이 진흥왕의 태자인 동륜(銅輪)계의 후손들이 자신들을 다른 진골들과 구분하기 위해 성골이라 부른 것으로 보인다. 동륜의 손녀이자 진평왕(26대)의 장녀인 선덕여왕(27대)이 여자로서 왕위에 오를 때, 왕위계승의 근거를 “성골의 남자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그러나 진골 출신 가운데 처음으로 왕위에 오른 태종무열왕(29대) 김춘추는 진지왕(25대)의 손자였다. 그리고 김춘추의 아버지이자 진지왕의 아들인 용수(龍樹)는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를 때 생존해 있었다. 똑같이 진흥왕의 후손인 용수와 선덕 중 선덕만이 성골이었다는 점은, 용수와 구별되는 선덕여왕 계열에서 동륜을 시발점으로 하여 다른 가계와 구분하기 위해 자신들의 가계를 신성화시킨 결과인 것으로 추정된다. 불교에서의 진종설(眞種說)과 전륜성왕(轉輪聖王) 이념은 이같은 성골의식이 대두될 수 있는 사상적 배경을 제공하였다.진골 아래의 6두품에서 4두품까지의 신분층 역시 경위에 진출을 할 수 있는 상급 신분층이었다. 이 가운데 6두품은 진골에 비해 관직 진출 및 신분상의 제약이 다소 강했지만, 전체적으로는 '득난(得難)'으로 불릴 정도로 귀성(貴姓)이었다.5두품과 4두품에 대한 기록은 거의 전하지 않으나, 국가기관의 잡다한 실무는 이들에 의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골품에 따른 신분 등급은 고정된 것이 아니어서, 진골의 신분이었다가도 경우에 따라서는 한 등급 강등되어[族降一等] 6두품이 되는 사례도 있었다.골품제도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신분에 따라 맡을 수 있는 관등의 상한선을 규정한 것이다. 신라 17개 관등 가운데 제1관등인 이벌찬(伊伐飡)에서 제5관등인 대아찬(大阿飡)까지는 진골만이 할 수 있었고, 다른 신분층은 대아찬 이상의 관등에 올라갈 수 없었다. 신분에 따른 관직 임명시 제기되는 하급신분층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상한 관등에 몇 개의 관등을 더 세분해서 두는 중위제(重位制)가 실시되었으나 골품제 자체의 근본적인 한계를 극복하지는 못했다.
    인문/어학| 2003.06.09| 3페이지| 1,000원| 조회(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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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학] 임나일본부설의 비판
    <임나일본부설의 비판)☺임나일본부설이란...일본의 야마토왜[大和倭]가 4세기 후반에 한반도 남부지역에 진출하여 백제․신라․가야를 지배하고, 특히 가야에는 일본부(日本府)라는 기관을 두어 6세기중엽까지 직접 지배하였다는 학설로 이는 일본이 날조한 대표적인 식민사관 의하나이다.☺임나일본부설의 근거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는 일본서기, 광개토대왕비문, 송서의 기록, 칠지도 등이 있지만 일본서기와 광개토대왕비문의 기록을 자세히 알아보겠다.☞일본서기의 기록임나일본부설의 증거물 가운데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720년에 편찬된 일본서기이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신공황후가 보낸 왜군이 369년에 한반도에 건너와 7국과 4읍을 점령하였고, 그후 임나에 일본부가 설치되었으며, 562년에 임나가 신라에 의해 멸망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신공황후가 정벌한 7국의 지명을 고증한 결과 그곳이 당시의 가야지역이었으며 따라서 임나는 가야를 가리키는 것이라 한다. 뿐만 아니라 일본서기에는 백제․고구려․신라․임나의 사신들이 왜에게 공물을 바치는 장면이 수도 없이 나온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7세기 중엽에 천황의 권위가 확립된 후 천황가를 미화하기 위해 편찬된 책으로서, 일본학계 내에서도 그 신빙성에 대해 여러 방면에서 비판이 제기되고 있고, 대체로 5세기 이전의 기록은 신화적인 전설로 간주되고 있는 실정이다.
    인문/어학| 2003.06.09| 6페이지| 2,000원| 조회(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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