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 박 국 ◎I. 서 론하박국서는 소 예언서의 여덟 번째에 속한 책으로 1:1에 나타난 표제에서 말하듯이예언자 하박국이 보았던 신탁이다. 예언자들의 신탁들은 대부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되 그들의 잘못을 꾸짖기도 하고 새롭게 개혁이 되도록 도전하기도 하며 현재의 사회적 정치적 상황을 해석하여 미래에 일어날 사건들에 대해서 제시하기도 한다. 또한 예언자의 기능에서 보더라도 예언자란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아서 제3자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경우에 따라서는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표제에서 신탁이라고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박국서는 문학적인 양식과 그 내용에 있어서 구약의 다른 모든 예언서와는 매우 다른 독특한 현상을 보이고 있다.일반적으로 거의 모든 구약의 예언서들에는메신저 양식이라고 불리는야웨께서 말씀하시기를이라는 문구가 나타난다. 하나님이 예언자에게 말씀하시고 그 말씀을 필요로 하는 다른 이들에게 전달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런데 하박국서에서는 문학적 양식에 있어서 "메신저 양식"이 나타나고 있지 않은 반면에 주로 그 삶의 자리가 예배이며 시편에서 주로 발견되는 개인 탄식시(1:2-4 12-17)와 하나님의 현현을 보여 주는 예언자의 찬양시(3:1-19)등이 주로 나타난다. 특별히 예언자가 청중들을 향하여 말하는 그의 활동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잘못을 꾸짖거나 개혁을 요구하는 직접적인 전달의 형태가 나타나지 않고 다만 하나님과 예언자 사이에 당시의 사회적 상황을 놓고 질문(1:2-412-17)과 대답(1:5-112:2-4)을 하는 대화의 형식과 하나의 독립적인 문학양식으로서 하박국의 비전이 핵심 내용으로 되어 있는 예언자의 시편(3:1-20)이 있을 뿐이다. 노세영 「성서주석-나훔하박국스바냐」(서울:대한기독교서회1998) p.157-158.또한 특별히 하박국서는 바로 하나님이 정말 이 세상을 정의로써 다스리시는가하는 신정론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 구약성서 중의 하나이기에 중요하다. 최종진 B.C. 612-586년 사이로 간주하려는 경향이 있다(Driver). 하지만 이 견해도 확실한 문서적 증거를 갖지 못하였다. 헤세드 종합자료 시리즈, p.191.젤린은 하박국서에 양식사적 방법을 적용시킴으로 하박국서 전체를 공적으로 제사에 사용된 통일성 있는 예배 의식문으로 이해했다. 일반적으로 그러하듯이 헬레니즘 시대를 도외시한다면 우리 역시 아무리 정확하게 계산한다 하더라도 B.C.625년과 587년 사이로 어림잡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연대추정이 가능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비록 1장 6절에 나오는 갈대아인이라는 명칭이 이차적인 것일지라도 실제로 그것이 잘 못 첨가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갈대아인이라는 명칭에 근거해서 추정해 볼 수 있는 시기의 상한선은 요시아 통치 말기인데 이시기에는 이방 세력으로부터 압박을 받았다고 말하기 힘들다. 그리고 B.C.598년에 있었던 제일차 유배는 하한선으로 잡고 있는 시기 이전에 속한, 그러나 본래의 것임에 틀림없는 단락들에는 그 어디를 보아도 일차유배에 대한 암시는 없는 것 같다. A. Weiser, K. Elliger, p.186.벨하우젠은 하박국서 3장을 제의적 시라고 보았으며, 시편의 일부라고 생각하였다. 더욱이 그는 본서의 기록 연대와 관련하여 본서는 포로 귀환 후에 이방에 대한 적개심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주신 사실에 대하여 찬송의 시를 지어 제사 의식에서 낭독한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그에 의하면 본서의 기록 연대는 B.C. 539년 이후라야 된다. 또한 둠의 가설이 비판된다고 할 때 헬라 시대를 제외한다면 본서의 기록 연대 하한선은 B.C. 4세기 이전이 된다. 이러한 일련의 주장들은 본서의 표제에서 본서의 기록 연대를 추정할 만한 연대기적 기록이 없기 때문인데, 이러한 사실로부터 엘리거는 본서의 수집은 이미 예언자의 생전에 이루어졌으나, 그 날짜를 기록하지 않은 이유는 당대에 연대기적 기록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엘리거는 본서의 기록 연대를 B.C.는 정결하신데도 이런 일을 허락하시는가 선지자는 물었다. 그 답변은 다음과 같이 비길데 없이 뛰어난 구절에서 찾아진다.“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2:4). 교만한 자들 즉 갈대아인들은 신앙을 갖지 못함으로 정죄된다는 것이다. 오직 살려고 하는 자는 누구든지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의 현저한 대조이다. 갈대아인과 이스라엘의 택한 자 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두 계급으로 갈라놓고 대조한다. 인간이 교만으로 가득 찬 사실은 자기의 멸망을 스스로 증거 하는 것이다. 갈대아인들의 그러했다. 즉 이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으나 자신들의 성취감으로 교만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살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 구절은 눈앞의 사태를 우선적으로 언급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도 바울이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진리를 표현하는 데에서도 정확히 사용되었다. 본질적으로 그 상황은 꼭 같다.하박국이 말한 생활은 단순한 지상의 생활이 아니고 가장 심오한 의미에서의 생활 즉 하나님과의 생활이다. 많은 비평가들이 이 점에서 선지자의 깊은 의도를 놓치고 다른 것을 보았다. 선지의 이 심오한 빛에서 우리는 원수에 대해 선고된 5가지 재앙의 연쇄며 또한 찬양의 송가(3장)을 이해할 수 있다. 에드워드 J.영 「구약총론」(서울:개혁주의신행협회, 1972) p294-295.Ⅳ. 기본적인 문제 및 논쟁1.하박국 1:2-4의 압제자의 정체하박국의 예언을 이해하기 위하여 반드시 대답이 되어야 할 질문 가운데 하나는 하박국1:2-4의 유다를 학대한 자가 누구냐라는 것이다. 이 압제자는 4절의 “악인”과 동일 인물이다. 이에 대한 답변은 두가지로 제시된다, 하나는 유다인들 중 일부가 자기 동족들에게 악을 행하였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 따르면 하박국의 문제는 유다 민족 내부의 동족들간의 사회적 불균형 때문이며 하나님께서 갈대아인들을 일으킨 것은(랍1:5-11) 유다 내부의 행악자들을 처벌하기위논문」 (부천: 서울신학대 신학대학원, 1995) p.5-8.Ⅴ. 결론하박국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믿음이라는 구원의 요소 김희보. 「구약 하박국 스바냐 주해」(총신대학출판부. 1987) p.20.아래,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겠다. 바로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가 되신다는 것과 우리는 그것을 믿고 기다려야 한다는 신앙의 자세이다.1.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가 되신다는 것1) 역사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1) 악의 실재에 대한 문제하박국은 공의가 추락하고 강포로 인해 많은 선인에게 핍박이 가해진 것에 대한 분노와 불평을 하나님께서 활동하지 않으시다는 것으로 털어놓는다. 매튜 헨리 저. 홍정수 역. 「매튜 헨리 주석 시리즈(30)」 (기독교문사, 1982) p.185.하나님께서 분개해야 할 상황인데도 이상하게 침묵을 지킬 뿐 행동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마틴 로이드 존스 저. 박영옥 역. 「하박국 강해」(목회자료사, 1998) p.19.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하박국은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시기 때문에 악을 멸할 것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었다는 것이다. 매튜 헨리 주석 시리즈(30) p.202.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 예언으로 유다의 악함과 이 방(바빌론)의 악함을 그냥 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2) 예상치 못한 하나님의 섭리악의 실재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하박국에게 다음과 같은 답을 주셨다. 공의가 추락되고 강포에 휩싸이는 유다를 갈대아 사람을 일으켜서 심판하실 것이라고 하셨다. 이는 하박국이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것이다. 하박국은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매로 치신 다음에 크게 부흥시켜 주시리라고 생각했었을 것이다. 마틴 로이드 존스. p.21.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갈대아 사람을 통해 유다를 심판하실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러 일을 이루기도 하였다.(3) 흔히 사용되지 않는 하나님의 도구들성서는 갈대아(바빌론)인들을 ‘사납고 성급한 백성으로 자기의 소유가 아닌 땅을 침략하여 착위하는자들, 그 힘으비교 연구, 석사학위논문」, 연세대 대학원 (2001)14. 라영석, 「하박국의 통일성에 관한 연구, 석사학위논문,」 서울신학대 신학대학원 (1995)15. 박희석, 「쿰란 공동체의 성경해석 방법론 연구: 하박국 해석서(1QpHab)를 중심으로, 석사학위논문」, 장로회 신학대학교 대학원 (1995)16. 김상옥, 「사해 하박국 주석의 본문 및 해석 연구, 석사학위논문」,고신대 대학원 (1990)17. 김희보. 「구약 하박국 스바냐 주해」, 총신대학출판부 (1987)18. 매튜 헨리 저. 홍정수 역 「매튜 헨리 주석 시리즈(30)」, 기독교문사 (1982)19. 마틴 로이드 존스 저. 박영옥 역. 「하박국 강해」, 서울:목회자료사 (1998)20. H. Ray Dunning. 「비콘 성경 주석」, 보이스사 (1987)◎ 스 바 냐 ◎Ⅰ. 서론그리스도인들에게 역사는 단순히 우연한 자연적 사건들의 나열장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은혜와 권능을 드러내 보이시며, 사람들이 하나님의 주권을 경험하는 계시의 장인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역사의 궁극에는 하나님께서 영광을 얻고 그의 백성들이 승리할 것을 신앙하며 기대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신앙에는 심각한 신앙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런 믿음은 그리스도인들을 현재의 삶에 충실하지 못하게 만들었으며, 신앙의 교착 상태에 빠지게 할 위험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예배와 의식은 발견할 수 있으나 참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이런 현상이 이스라엘인들에게도 나타났었던 것을 구약성경을 통해서 확인 할 수 있다. 하나님의 파기할 수 없는 계약 백성으로 스스로를 인식하고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때때로 역사 속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응보 행위조차 계약을 영원히 해제하고 자신들을 멸하는 심판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방해 요소들을 제거함으로써 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하나님의 개별적인 징벌 행위요
1. 저자1886년 5월 10일 바젤에서 태어난 바르트는 베른베를린튀빙겐마르부르크 등 여러 대학에서 신학을 배웠고, 1909년부터 2년간 제네바의 개혁파 교회의 부목사를 역임한 뒤, 자펜빌 교회의 목사로 10년간을 섬겼다. 그 동안 종교적 사회주의운동에 참가하였는데, 1919년에는 신학계를 온통 뒤흔들다시피 한 저서 《로마서 주해(註解)》를 출판하였다. 이 책은 변증신학(辯證神學)의 시초라 할 수 있는 것으로서, 종래의 그의 입장이었던 리츨학파적인 자유주의신학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었다. 1921년 괴팅겐대학 교수로 초빙되어 신학을 강의하였는데, 1922년에는 투르나이젠, F.고가르텐, G.메르츠 등과 함께 잡지 《시격(時隔) Zwischen den Zeiten》을 발행, 이른바 변증법적 신학운동의 지도자가 되는 등 신학사상 큰 역할을 하였다. 그 후 뮌스터대학 및 본대학의 교수를 역임하다가 나치스의 대두로 쫓겨나, 스위스로 돌아와서 바젤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한편 그는 반나치스 교회투쟁에도 참가, 나치스에 영합하여 독일 기독교인운동으로 기울어진 고가르텐과 결별하고, 그와 함께 발행하던 잡지도 폐간하였다.그 후로 그는《오늘의 신학적 실존》《신학연구》등의 정기간행물을 발행하기도 하고 교회투쟁의 중요문서인《바르멘 선언 Barmen Declaration》의 기안도 하였다. 그의 대표작은 미완성으로 끝난 《교회교의학 Die Kirchliche Dogmatik》(1932∼1967)인데, T.아퀴나스의 《신학대전(神學大全)》에 비견되는 대작이다. 이 외에도 그는 많은 저서를 남겼다. 오늘 살펴보게 될《하나님의 말씀과 신학 Das Wort Gotte sund die Theologie》(1924)을 비롯하여《신학과 교회 Die Theologie und die Kirche》(1928),《지식을 구하는 신앙 Fides Quaerens Intellectum》(1931),《신의 인간성 Die Menschlichkeit Gottes》(1956),《복음주의 신학 입문 Einfuhrung엇이라는 것을 말해주며, 다섯 번째 글 “개혁교회의 교리적 과제”3)는 칼빈 계통의 개혁교회에게 짊어지워진 신학적 과제를 알려준다. 그래서 본 소고에서는 이를 배제하려 한다. 여섯 번째 논문 “사회(社會)속의 그리스도인”4)은 “종교 사회 회의”에서 강연한 초고로서 사회를 향한 그리스도인의 역할을 설명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현대의 윤리 문제”는 “윤리학”적 관심이 오늘날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러나 본인은 서두의 표제 즉, “의인과 성화”를 초점으로 하여, 각 논문들에 나타나는 연계성을 중심으로, 바르트가 사용한 용어들을 설명하고 그에 대한 세부적 논지들을 살펴본 후, 주관적 이해를 바탕으로 바르트의 개념들을 정리해 보았다.4. 용어설명1) 義認의인이라는 말은 ‘우리가 죄인으로서 화해되었다’는 말에서 ‘화해되었음’에 주목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아직 제거되지 않은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묵과로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행하신 것의 관점에서 이야기된 것이다. 즉, 은혜가 집행상 위에서 아래로 향할 때 우리는 의인(義認)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의인의 은혜는 우리의 삶을 이야기한다. 의인에서 하나님은 죽은 자에게 “살라!”고 말하시며, “있는 그대로 와도 좋다!”고 선포하신다. 여전히 죄인인 인간에게 하나님은 ‘그러나’로 다가오시며, 우리의 벗은 몸을 덮어 주는 의의 옷과 같이 “그러나의 하나님”은 주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죄인-사랑의 역사(役事)에 있어서 의인은 영원한 측면을 가진다. 의인은 은혜의 불가해한 한 활동의 영원한 즉 신적 측면이고, 중생과 회심, 선택과 소명,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과 인간에 있어서와 같은 관계에 있게 된다. 동일한 하나님의 엄숙성으로써 의인(義認)의 은혜는 우리를 크고 절대적인 결정 안에 세워놓으며, 절대적인 신적 결정 안에, 영원한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 안에 또 우리의 신앙과 복종을 역사하는 성령의 결정 안에 우리를 세워 놓는다.2) 聖化성화라는 말은 ‘우리가 죄인으로서 화해되었다’는 말에서‘죄인으로서’라는의는 확실성을 가지고 나타나기 때문이다. 또한 양심은 모든 사물의 최후적이고 가장 깊은 본질은 바로 그 의지라는 사실, 즉 하나님은 의로우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양심은 우리 안에서 계속 나팔을 불고, 우리를 계속해서 부른다. 그렇기에 우리는 조용히 그 소리를 경청해야 하며, 그제야 우리의 욕구와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의 의에 대해 양심이 무엇을 질문하가를 깨우칠 수 있다. 이것은 깨달음-경악과 놀람-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기쁨으로 가득 채우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체험을 가능케 하며, 이는 성령을 통해 보다 분명해 지며 완전해 진다.4) 앎과 의욕앎과 의욕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개념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용어이다. 은혜는 성령 안에서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현재를 의미한다고 바르트는 이야기 하는데, 이때 인간이 은혜를 붙든다는 것이 하나님 앞에 있음을 뜻한다는 것에서 ‘앎’을 이야기하며, 그것은 곧 하나님의 면전에 있고자 한다는 뜻에서 ‘의욕’을 설명해 준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의욕은 그리스도교적 복종의 불가해한 의욕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서 있음을 알고 그렇게 되기를 의욕 함으로써 은혜를 붙잡는다. 그래서 앎과 의욕은 나에게 있어서 내가 나를 죄인으로 즉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킨 자로 인식함을 뜻하게 된다. 여기서 나타나는 용어로 ‘달리’ 즉 ‘은혜 없이’라는 개념도 이해해야 하는데, 이는 은혜 없이 결단코 인간은 자신의 죄를 인식하지도, 화해할 수도 없음을 이야기한다.5. 논지* 주제: 하나님에 의해 이미 주어진 것, 화해의 수행으로서 죄 안에 서 있는 인간에게 전적인 하 나님의 은혜로만 ‘주어진’ 의인(義認)과 성화(聖化).바르트는 2중의 의도가 깃들어 있는 첫 번째 명제를 통해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것은 “의인(義認)과 성화(聖化)는 세례에서 그리스도인에게 통고된 은혜 곧 성령의 진리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가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선택받고 부르심을 받았다는 은혜의 수행이다”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첫째로 우리가 의인과 롭다 인정하고 성화하신다. 인간은 이러한 과정에 ‘기초’해서만 믿고 복종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그래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행동이 행해진 뒤에야 이에 근거한 인간이 믿고 복종하여 성화되는 것이다. 이것이 “은혜”이다.은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요, 우리에게 선언되는 말씀의 은혜이며, 율법(Gesetz)과 복음(Evangelium)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신적인 것, 즉 성령의 은혜를 통해 일어나는 위대한 선언이다. 그래서 선언된 은혜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셨고, 순전한 자비하심에 의해 우리를 자신에게로 이끄셨음을 이야기한다. 그 은혜는 곧 말씀의 은혜이고, 이는 소명을 확신하고 소유하기 위한 확증으로 세례를 유도시킨다. 바르트는 세례를 일컬어, 울며 항거하는 어린아이로서 그 아래 서 있었던 표징(Zeichen), 성령의 진리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교제에로 선택받고 부름 받았다는 표징, 즉 교회의 봉사를 통하여 하나님 자신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진 표징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오직 인간 편에서 죽음의 순간에 세례의 은혜 외에 의지할 것이 무엇이 있는지 반문하고 있는 것이다. 세례의 은혜는 그리스도에의 접목(Christo inserti)의 은혜이며 성령 안에 있는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현재이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이 신앙과 복종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붙듦으로써, 그는 자신을 죄인으로 인식한다. 스스로를 죄인으로 인식함으로써만, 그는 신앙과 복종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게 된다. 이는 인간의 회심과 하나님을 향한 결단의 문제로서, 인간의 앎(Wissen)과 의욕(Wollen)의 작용에 의해 신앙과 복종이 나타난다. 이는 앞서 용어정의에서 이해된 바와 같이 앎과 의욕을 통한 은혜의 수행을 이야기함을 살펴보았다.우리는 의인(義認)과 성화(聖化)에서 참으로 화해된다는 점과 화 죽으라 하고 죽은 자는 살 것이라 말함으로써 의인과 성화의 존립을 설명한다.의인과 성화는 둘 다 동일한 의미에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Werk)이다. 의인은 은혜의 불가해한 활동의 영원한 즉 신적 측면이고 성화는 그것의 시간적 측면인 것이다. 의인은 유일회적 사건으로서 참되며, 완전하고 충분하며, 어느 누구에게나 유효한 것이다. 그래서 의인으로서 하나님 은혜는 하늘의 별들처럼 위엄과 명료성을 가지고 우리 위에 있는 법적 행위(actus forensis)이다. 은혜는 시간적 측면도 가지고 있는데, 성화로서의 은혜는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시고 그의 말씀에서 육(肉)이 되신 사랑에 따라서 인간적 신앙 행위와 복종행위의 다양성, 불완전성, 상대성에로 들어온다. 그래서 성화는 물리적 행위(actus physicus)로 기술될 수 있다. 인간은 여전히 시간적 현실 안에 있으며, 이 현실은 죄된 것이다. 그렇기에 이 현실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이 현실 안에서 은혜는 우리를 성화시키는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말이다.의인으로서의 은혜는 절대적인 신적 결정 안에, 영원한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 안에 그리고 우리의 신앙과 복종을 역사하는 성령의 결정 안에 우리를 세워 놓는다. 우리를 대신하는 성령이 하나님께 응답하는 예는 의인의 절대적 결정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만으로(sola fide) 이 결정 안에 서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오직 믿음만으로 서 있을 수 있으며, 전혀 가능할 것 같지 않은 도약(Sprung)을 이룰 수 있다. “믿음만으로”는 절대 광적인 모험이 아니라 복종을 의미한다. 그것은 죄인 그 자체를 받아들이는 은혜에 힘입은 복종이다. 그래서 은혜를 통해 이 작고 상태적인 결정 안에 서 있음이 우리의 성화인 것이다. 우리는 성화 안에, 은혜 안에 서 있게 된다. 아니 거기로 들어가게 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참된 매어 있음을 발견하시는 데서 복종이 있고 성화가 있다. 우리는 그 자리에 서서 주림과 목마름으로 “주의 날.
Ⅰ. 서론하박국서는 다른 선지서와는 달리 매우 독특한 책이다. 일반적으로 거의 모든 구약의 예언서들은 예언자가 하나님께 받은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내용이며 양식적으로는 “메신저 양식( )”이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노세영 《교수논총》1997년 p. 33그러나 하박국서는 이 “메신저 양식”이 나타나지 않으며, 내용적인 측면에서도 하나님과 선지자 사이의 질답으로 구성된다는 점에서 다르고, 현실적인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기보다 현실 내면에 있는 철학적인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일반 선지서와 차이가 있다. 송병헌 “하박국서의 구조와 신학적 주제” [그 말씀] (서울: 두란노, 2001년 9월호) p.18또한 비교적 짧은 예언서임에도 불구하고 그 문학형태는 매우 다양하다. 이렇게 독특하고 다양한 성격을 갖고 있는 책이기에 그 내용과 구조에 관해 많은 의견들이 분분한 책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본 책의 정신(탈 신명기적 사상, 믿음에 의한 구원 등)은 신약성경과 종교개혁 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쳤음은 부인할 수 없다. 본서 2:1-4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정한 때에 종말이 임할 것'이며,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사도행전 1:7의 언급과 일치하며, 로마서 1:17과 갈라디아서 3:11에서는 본서 2:4이 인용되어 나타난다. 또한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의 주역들을 자극한 사상도 하박국의 자유정신이었다.Ⅰ.A. 저자본서의 저자에 대한 자료는 본서의 내적인 자료 외에 알려진 것이 없다. 랄프 스미드 지음, 채천석 옮김 「미가-말라기」, (WBC 32; 서울: 솔로몬, 1999), p.140그럼에도 전통적인 학자들은 하박국서 안에 통일성과 순수성이 보존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본서의 저자를 하박국으로 보는 데 의심하지 않는다. 특히 이들 학자들은 본서 3:19에서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라'라는 표현과, 본서 3장에 나타나는 ‘셀라’라는 음악 술어를 통하여 볼 때 예배 의식에서 사용되었다는 것이또한 하박국서의 메시지에 의하면 이스라엘에서는 여전히 왕(“기름 부음 받은 자” 3:13)이 그 기능을 담당하고 있으므로, 기원전 598년의 첫 번째 예루살렘 함락 사건이 아직은 반영되어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베르너 H.슈미트 지음, 차준희/채홍식 옮김 「구약성서입문Ⅱ」(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1) p.93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대략적으로 하박국 선지자의 활동시기를 BC. 621년과 BC. 599년 사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내용이 BC. 605과 597년 사이에 있었던 여호와 김의 통치 상황과 매우 흡사함을 알 수 있다.Ⅱ. 본문의 범위도입부에 이야기 한 대로 하박국서에는 많은 문학형태가 존재한다. 따라서 하박국서를 ‘서로가 느슨하게 연관된 명시선집정도로 읽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도전을 받게 된다. 임동원 “하박국서의 문학적인 고안장치 연구” [신학과 현장] (서울: 목원대학교 출판부, 2000년 제10집)p.142그 도전 중 가장 거센 것은 바로 하박국 1-2장과 3장간의 관련성 문제이다. 사해 사본의 하박국 주석에는 3장이 없다. 따라서 비평 학자들은 합 1, 2장만이 정경으로 인정된 것이 아닌가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비평 학자들의 면밀한 검토에도 불구하고 본서의 통일성에 관한 한 많은 학자들이 인정하였다. 그것은 첫째 제의적 문서라는 특징과 1-2장과 3장의 신학적 주제가 전혀 다르지 않고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에 기인한다. 노세영 《교수논총》1997년 p. 35많은 부분에서 논란이 있는 하박국서지만 그래도 그 구조에 대하여서는 거의 모든 학자들이 공통된 견해를 가지고 있는데, 그 구조는 아래와 같다.1. 예언자의 질문과 하나님의 대답(1:1-24[5])1) 표제(1:1)2) 예언자의 첫 번째 탄식 (1:2-4)3) 하나님의 대답 (1:5-11)4) 예언자의 두 번째 탄식 (1:12-17)5) 하나님의 대답 (2:1-4[5])2. 다섯 가지의 저주신탁 (2:5[6])3. 하박국의 시편 (3:1-19)하박국이라는 책 전b)a. 명령적 간구: 부흥 (3:2aβ)b. 청원적 간구: 긍휼 (3:2b)B. 하나님의 현현하심 (3:3-16)1. 하나님의 영광스런 임재 (3:3-7)a. 하나님의 영광스런 임재 (3:3-6)b.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예언자의 반응 (3:7)2(1'). 전사로서의 하나님의 임재의 모습 (3:8-16)a. 하나님의 위엄스런 임재 (3:8-15)b.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예언자의 반응 (3:16)1) 야웨의 현존하심에 대한 예언자의 상태: 두려움 (3:16a)a) 창자가 흔들리고 입술이 떨림 (3:16aα)b) 썩는 것이 내 뼈에 들어오고 처소에서 떨림 (3:16aβ)2) 야웨의 현존하심의 결과: 적의 침입 가운데 평안함 (3:16b)C. 하박국의 찬양 (3:17-19a)1. 예언자의 찬양 (3:17-18)a. 예언자가 처한 상황 (3:17)1) 나무에 열매가 없음 (3:17aα)a) 무화과가 무성치 않음 (3:17aα1)b)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음 (3:17aα2)2) 식물에 소출이 없음 (3:17aβ)a)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음 (3:17aβ1)b) 밭에 식물이 없음. (3:17aβ2)3) 우리에 짐승들이 없음 (3:17b)a) 우리에 양이 없음 (3:17bα)b) 외양간에 소가 없음 (3:17bβ)b. 예언자의 찬양 (3:18)1) 야웨를 즐거워함 (3:18a)2) 야웨를 기뻐함 (3:18b)2. 야웨에 대한 예언자의 믿음의 고백 (3:19a)a. 야웨는 힘 (3:19aα)b. 야웨께서 예언자를 높이심 (3:19aβ-γ)III(I'). 끝 표제 (3:19b)Ⅲ.B.1. 표제I. 하박국의 기도에 대한 첫 표제 (3:1)하박국은 1-2장을 통해서 하나님의 공의를 확신하게 되었다. 이제 그는 선하신 하나님께 대한 기도와 찬양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권능과 은총을 베푸셨던 과거의 일을 회상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을 속히 구원해 달라고 기도한다. 그는 변치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고백을 한다. 이 시와 병행되는 성경은 (신 33:2-5, 삿 5:4- 부흥 (3:2aβ)b. 청원적 간구: 긍휼 (3:2b)첫째 소문단은 예언자의 서론적 간구를 다룬다(3:2). 이 소문단은 완료형태로 표현된 예언자의 상태(두려움)를 다루는 부분(3:2aα)과 명령형 또는 미완료형태로 표현된 예언자의 서론적 간구 부분(3:2aβ-b)으로 구성된다. 예언자의 간구는 ‘수년 내에’라는 문구가 들어있는 두 개의 작은 부분으로 구분된다(명령형, 청원형).‘주께 대한 명성’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쉬므아카)는 일반적으로 그 소문의 인물들이 지리상으로 떨어져 있음을 시사하는 표현으로(욥 42:5) 주께서 알게 하신 계시의 내용을 가리킨다. 비록 이 단어가 간접적인 정보를 말할 때 사용되긴 했지만(욥 28:22; 나 3:19) 하나님의 계시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신적인 권위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하박국 선지자는 그 소문과 연관 지어 하나님께 간구한다.그의 간절한 기도의 첫 번째 내용인 ‘부흥케 하옵소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예후)는‘살게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히야’의 강한 피엘 명령형으로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것을 다시 살린다는 의미를 강하게 표현한다. 안유섭 「원어로 여는 성경」(서울: 프리셉트, 1999) p. 97-99 (참고. 부흥케 하옵소서라고 번역한 것은 매우 이상하다. 왜냐하면 부흥(復興)이라는 말은 쇠잔하던 것이 다시 일어나는 것을 의미하므로 원어와는 전혀 딴판의 말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부흥이라는 말은 성경 전체에서 이곳에 단 한번 나오는데 부흥사들은 부흥회 때마다 거의 단골로 합 3:2의 말씀을 인용하여 부흥의 뜻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곤 한다. 그러나 이 말의 원의를 알고나면 앞으로는 함부로 인용하는 일이 없어지리라고 생각한다.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기도는 현실적인 낙망과 심판에 처하여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하는 것으로 (출 32:10-12; 시 77:9)의 이미지를 그대로 반영한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현재 상태는 ‘진노’나 ‘혼란’에 처할 정도로 영적인 죽음 상태임을 잘 나타내며, 현로부터 오는 빛을 의미하였다. '광선'은 '광명'과 함께 하나님의 현현으로 인한 광채를 묘사한다. 이러한 표현은 시내 산에서의 하나님의 현현과 그 이후 하나님의 현현을 특징지어 주는 것으로(출 19:16; 20:18) 이러한 이해의 바탕 위에서 여호와는 온 세계를 비추시는 빛으로 인식된다. 그것은 화려함을 나타낸다기보다는 경의로움을 나타내는 것으로 심판을 예상하게 한다.따라서 5절은 하나님의 영광스런 임재와 함께 심판의 권능을 보여준다. '온역'과 '불덩이'는 거의 하나님의 주권과 심판의 직접적인 결과를 말한다(출 5:3; 레 26:25; 민 14:12; 신 28:21; 렘 29:17-19; 34:12-20).'영원한 산'과 '무궁한 작은 산(언덕)'은 지상에서는 위엄과 영원성과 안전성의 상징들이지만(창 49:26; 신 33:15)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님을 나타낸다(욥 9:5). 여기서는 영원하고 무궁한 하나님을 크게 두 각시키기 위해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였다.B. 하나님의 현현하심 (3:3-16)2(1'). 전사로서의 하나님의 임재의 모습 (3:8-16)a. 하나님의 위엄스런 임재 (3:8-15)b.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예언자의 반응 (3:16)1) 야웨의 현존하심에 대한 예언자의 상태: 두려움 (3:16a)a) 창자가 흔들리고 입술이 떨림 (3:16aα)b) 썩는 것이 내 뼈에 들어오고 처소에서 떨림 (3:16aβ)2) 야웨의 현존하심의 결과: 적의 침입 가운데 평안함 (3:16b)전사로서의 하나님의 임재의 모습은 야웨께서 말을 타시고, 바다(악의 세력)를 이기셨음을 보여주는 표현(8, 15절)을 테두리(inclusio)로 하여 묘사된다. 하나님의 현현과 전쟁에 대한 환상(3-15절) 이후에, 예언자 하박국은 2절에서 말한 바와 같이 자신의 고백을 다시 말한다. 이것은 문학적으로 구조적 뼈대의 역할을 한다.이 부분에서 2번 사용되는 ‘흔들렸다’는 단어 ragaz는 3장 2절(진노)과 7절(흔들리도다)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이것을 통하여 볼 때 예언된다.
1. 서론최근 많은 곳에서 웨슬레 신학의 상실로 인해 전반적인 위기를 맞게 되었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왜 웨슬레 신학의 상실이 전반적인 위기를 가져왔는가? 그것은 바로 기독교 신학의 중심이 구원론이고, 그 구원론의 핵심은 성결론이며, 이 성결론-성결, 성화, 기독교의 완전-은 웨슬레 신학의 중심 사상이기 때문이다. 이 성결은 웨슬레 신학의 중심일 뿐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기에 웨슬레 신학의 상실은 기독교 신앙의 위기와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이렇듯 본 책은 웨슬레 신학의 위기, 특히 한국에서의 웨슬레 신학의 위기-요한 웨슬레의 일생과 그의 신학에 대한 연구와 자료의 부족으로 인한-에 동기가 되어 저술 되었다. 성결교회는 웨슬레 신학의 가장 중요한 특징인 성결을 믿고 지켜 체험하고 전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는다. 그렇기에 성결교회는 이 성결의 도리를 전해야 하는 의무가 있으며, 이것은 19세기 후반부터 자유주의 신학에 물들기 시작한 감리교회와는 달리 초기의 웨슬레의 사상에 한한다.1980년부터 성결론에 대한 연구는 3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졌다. 첫째, 전통적인 웨슬레 신학의 입장에서 이루어졌다. 이 연구의 대표로는 3권으로 된 「그리스도인의 성결에 관한 탐구」가 있다. 둘째, 사회 윤리적 입장에서 이루어졌다. 이 공식적 모임은 1977년 옥스퍼드 대학교 링컨 대학에서 모인 제 6차 옥스퍼드 메도디스트 신학 연구 협의회이다. 한편 레온 힌슨은 복음주의적 입장에서 웨슬레 성화론과 사회 개혁의 연관성을 연구하였다. 마지막 셋째, 에큐메니컬 입장에서 타 교파와의 비교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그리스도의 성결에는 세 가지 측면이 있다. 첫째, 우리가 받아야 할 은혜로서의 면 둘째, 생활되어져야 할 삶의 방식으로서의 면 셋째, 이해해야 할 진리로서의 면을 말한다. 본 책은 세 번째 진리의 면에 대한 하나님 재해석을 하려고 한다. 해석자의 관점과 강조점에 의해 복음이 재해석됨으로 진리가 새롭게 발견되듯이 그리스도인의 성결에 관한 진리도 다양한 관점에 의해 모든 부분을 총괄하는 교리이다. 한 마디로 기독교를 기독교 되게 해주는 교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이 교리는 오늘날도 끊임없이 연구되어야 하며, 이 교리에 대한 깊은 이해가 절실하다. 이러한 성결론과 삼위일체론의 이해와 연구를 통하여 하나님의 성결에 대한 깊은 이해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초대 교회에 있었던 가장 큰 논쟁은 단일신론과 종속론을 통하여 야기되었으며, 이런 이단 사상이 정죄되고, 거기에 대한 반론이 확립되면서 삼위일체론이 정결 되었다.단일신론을 이야기 한 이단파에는 첫째, 시베리우스가 있다. 그는 양태론 또는 양식적 신론으로 불리는 주장을 했는데 그에 따르면 하나님은 단일한 실체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존재 안에는 구별이 없으며, 단일체인 하나님은 세 가지 상이한 형식 또는 양태로 자기를 나타내신다는 것이다. 둘째, 아리우스가 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피조물이고 중간존재자이며 영원하지 못한 존재이기에 예수를 하나님이요, 구주로 믿고 예배하는 기독인들은 모두 우상 숭배자로 보았다.이러한 이단에 맞서 정립된 전통 삼위일체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아다나시우스는 성령도 성부의 본질에서 나온다고 보았다. 만약에 그리스도의 영이 피조물이라면 그리스도도 또한 피조물이 된다고 말하였다. 둘째, 어거스틴은 단일성에 중점을 두었는데 성부, 성자, 성령은 완전한 신적 실체로 동일하며 따라서 삼위일체는 한 하나님이라고 하였다.현대신학자들은 이러한 삼위일체를 어떻게 말하였을까? 우선 칼 바르트에 따르면 삼위일체는 삼위의 일체성과 일체의 삼위성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그에 따르면 삼위일체론의 문제점은 삼위를 세 인격이라 말하지 않고, 일신론적 전통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폴 틸리히는 삼위일체론을 상징의 삼위일체라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모든 생명은 삼위일체적이며, 그 이유는 동력적 힘과 유한한 형식과의 결합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몰트만은 삼위일체론을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출발한다고 보았다.본래 삼위일체론은 그리스도의 구원 은혜로 가능해진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 역시 삼위적이다. 삼위적인 은혜의 개념에서 보면 성부 하나님은 창조주시요, 성자 하나님은 구속주요, 성령 하나님은 성화자이다. 창조, 구속, 구라고 성화는 서로 구분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와 인간의 구원에서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창조주, 구속주, 성화자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은 그 모든 활동이 인간의 구원을 목표로 한 것이며, 이러한 구원 사역이 죄인에게는 바로 은총이다.3. 성부 하나님과 성결웨슬레의 신론은 하나님의 거룩함과 사랑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 거룩과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이라기보다 하나님의 본성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 성결의 근원은 바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본성에 근거한다. 인간의 성결은 하나님의 거룩성에 근원을 두며, 그 분의 명령과 약속에서 현세적인 성결의 필연성과 가능성을 발견한다. 성결한 하나님의 영광은 삼위 하나님의 영광이며,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거룩케 하는 근거가 된다고 보았다.웨슬레는 하나님의 거룩성과 동시에 그의 사랑을 강조했다.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사랑하시는 것이다. 사랑은 관계적이며 동시에 역동적이고, 실제적인 힘이다. 사랑은 타락의 두려움을 제거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게끔 만든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승리의 비결은 바로 성결, 곧 사랑을 말한다.인간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로 가능한데, 이것이 바로 은총이다. 하나님의 은총은 인간 성결의 동력원이 된다. 웨슬레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총은 “모든 사람 안에서 자유롭게, 그리고 모든 사람을 위해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를 말한다. 웨슬레는 은총의 보편성과 구속의 보편성을 믿었으므로, 칼빈주의의 제한적 속죄설과 무조건적 선택설에 따른 이중 예정설을 배격하였다.양자됨은 자녀의 특권을 부여받게 한다. 그러나 이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은 “나-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뿐만 아니라, 동시에 “나-이웃”이라는 수평적 관계를 형성하게 한다. 구원론에서 볼 때적을 통틀어 모든 만물의 창조자시며, 소유자시요, 통치자로서 절대적인 권리를 소유한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성결은 하나님의 주권이 신적 주권이 되게 하는 기본이다. 둘째, 전능성이다. 하나님은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을 무엇이나 행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전능은 거룩한 능력이며, 사랑으로 역사하는 능력이다. 셋째, 전지성이다. 하나님은 자신과 또 모든 사물에 관해 완전한 지식을 가지며 그것은 현재에 대한 지식뿐 아니라 미래에 대한 지식도 포함된다. 넷째, 편재성이다. 공간을 초월한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무한성이라 할 때, 무한성을 피조물과의 관계에서 놓고 볼 때 편재성이라고 한다. 편재성이란 하나님이 그의 피조물이 있는 곳에는 어디든지 존재함을 말한다.구속사는 하나님의 구원 행동사를 가리키는데, 창조라는 큰 역사적 사건을 시발점으로 하여 재창조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하나님의 계속적인 사역을 구원을 위한 역사로 보는 것을 말한다.18세기에는 이신론 곧 자연신론이 성행하던 시기였으며, 이 때의 하나님은 창조를 하였으되 섭리는 하지 않는 시계공 같은 하나님으로 이해되었다. 인간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따라 창조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창조주처럼 거룩하였고, 자비하였고, 완전하였고, 사랑이어서 사랑 안에 거하였다.창조주 하나님은 동시에 통치자, 섭리자이시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은 피조물의 창조 뿐 아니라, 통치와 섭리에도 그 바탕을 이루고 있다. 섭리란 하나님이 그 지으신 세계를 보존하며, 돌보시며, 다스리시는 활동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웨슬레는 구원이라는 것을 현재의 구원과 궁극적인 구원으로 나누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구원이란 것은 현재의 구원을 지칭하며, 이는 칭의와 성화를 의미한다. 웨슬레는 그 중에서도 성화에 강조점을 두어 구원론을 전개하였다웨슬레가 종말이나 심판, 지옥에 관하여 설교한 것은 한 가지 목적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죄인들을 회개 하게끔 하여 그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것, 즉 선교의 동기 섬기며, 교제하도록 만들어졌으나, 범죄함으로 이 관계는 깨어지고 말았다. 이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오신 분이 그리스도이며 그 분이 예수임을 고백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인 것이다.1738년 웨슬레는 이상하게 마음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했는데 그것이 유명한 그의 올더스게이트 회심의 경험이다. 이 체험은 그가 그리스도와 만난 체험이며, 그 만남의 결과 그의 신앙관은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의 공로에 대한 신뢰로 바뀌게 되었다.웨슬레의 성서적 성결론은 그리스도 중심이며, 성결의 삶은 바로 그리스도 중심의 삶이다. 성결의 유지는 그리스도 중심적일 때 가능하다. 즉, 순간 순간 예수를 의지하는 그리스도 중심의 생활에서만 가능하다.성육신은 속죄의 근거이면서 동시에 성결의 근거로써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성육신은 하나님의 성결을 인간의 영역 안으로 도입한 중요한 사건이다. 즉, 성육신하신 성자에 의하여 인간의 성결이 가능케 되었으므로, 이것은 성결의 은총이라 해석할 수 있다.하나님의 말씀이신 성자가 아버지와 동일한 본질을 타고 나셨으나, 동정녀 마리아의 태내에서 사람의 본성을 취하였다. 그러므로 두 가지 전적으로 완전한 본성 즉, 신성과 인성이 하나의 인격으로 연합되어 절대로 나누어지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는 오직 한 분 그리스도이시며, 참 하나님이시며, 또한 동시에 참 사람이다.그리스도의 신성은 그의 인간적 의와 거룩함의 근원이 된다. 그리스도의 의는 신적인 의와 인간적인 의 양자로써 신약에서 예수의 성결은 그의 신성과 인성 모두의 거룩성을 나타낸다.중보자 그리스도는 예언자, 제사장, 왕이라는 세 가지 직분을 가진다. 웨슬레는 예언자 그리스도에게서 구약 완성과 함께 계속성을 확인하였다. 그리스도는 구약 예언의 완성일 뿐 아니라, 모든 예언 활동의 마침이 된다.제사장은 사람의 대표자로 하나님 앞에 서서 사람을 위하여 제사하고 간구한다.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의 특징은 그는 제사장이면서 자기 자신이 희생 제물도 되신다는 점이다.그리스도의 왕적 직분은 모든 피조물에 대한 통치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가장 커다란 상실은 바로 ‘지도자의 부재(不在)’이다. 이러한 현상은 사람들로 하여금 올바른 방향을 찾지 못하게 하고, 목적과 가치를 잃어버린 죽음으로의 인생을 살아가게 만든다. 따라서 더 이상의 기대나 삶의 태도는 발견되지 않으며, 하루하루를 그저 무의미(無意味)한 인생들로 채워나가게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진정한 지도자의 표상(表象)을 생각하고 발견해야 하며 그 길을 쫓아 나가야 한다. 그러한 인물을 성서적으로 찾아본다면 탁월한 지도자로서 성경에 나타난 느헤미야를 말할 수 있다. 느헤미야는 수산궁 아닥사스다 왕의 술시종으로서 대단한 권력과 위치를 자랑하는 인물이었다. 당시 술시종은 왕이 먹는 모든 음식을 시식하고 왕이 만날 사람을 사전에 심의하는 막강한 세력과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기에 그의 위상은 하늘을 찌르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가 얼마나 성실하고 신뢰를 받았지 짐작할 수 있는 반증으로서, 그의 조직능력과 행정능력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느헤미야 2장 6절에는 그가 왕뿐만 아니라 왕비에게도 인정받았음을 설명해 준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겸손했으며, 온유했고 철저했다. 그럼 여기서 느헤미야에게 나타난 특징들을 성경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자.어느 날 느헤미야는 자신의 동족들이 큰 환난을 만나 능욕을 받고 예루살렘은 훼파되고 성문들은 소화되었다는 슬픔의 소식을 접하게 된다. 그러자 느헤미야는 울며 금식하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간구했다. 이것은 그의 사역의 시작이 기도로 시작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그는 그의 사역의 마지막 역시 기도로 끝마치는 무릎의 사람이었으며,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인물이었다. 그의 리더십은 하나님을 의지한 것이었으며, 이것은 순종을 통한 성취로 나타난다. 그러나 느헤미야가 기도만 하고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는 무계획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철저한 현실주의자로 사실을 직시하고 용감하게 이를 대처하였으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지켰다.(p41) 그는 계획하고 기도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가 왕에게 성을 중건하기 위한 허락을 받아내는 과정-유다 총독에게 조서를 내려 달라는 것과 삼림 감독 아삽에게 조서를 내려 재목(材木)을 주게 하는 것-과 문제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밤중에 현장 조사를 나가는 장면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p47~8) 이것은 행정력의 필수 조건이 되는 수집과 파악, 연구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목이다.느헤미야가 예루살렘으로 왔을 때의 상황은 열악했다. 모든 사람들은 바벨론 포로생활을 함으로 도덕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부패하여 좌절의 상태에 빠져 있었고, 이러한 위기의 상황 속에서 느헤미야는 지도자가 되었던 것이다.(p38) 그러나 리더십이 “어떤 목적 달성을 위하여 의사소통 과정을 통한 개인들 간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시도이다”(p9)라고 한다면, 느헤미야는 이러한 부분에서 탁월함을 드러낸다. 그는 명령형 리더십을 가졌으나, 함부로 사람을 대하지 않았고, 명령이전에 설득하고 대화하여 동기 부여를 하므로 추종자로 하여금 자원하게 하였다.(p67)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의 행정력 가운데 탁월한 점은 그가 설득형 리더십을 발휘했다는 사실이다. 아무런 희망도 없이, 절망과 배고픔에 살고 있던 백성들을 느헤미야는 설득시켰고, 끝내 성벽을 중건했던 것이다.느헤미야에게 있어 주목할 만 한 점은 고난에 동참하는 참여형 리더십을 발휘했다는 사실이다.(느1:4) 특별히 그는 백성들의 죄를 자신의 죄로 인정하고 동일시함으로서 책임성 있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준다.(느1:6) 그는 훨씬 편안한 삶을 영위하면서 생활할 수 있었음에도 그 자리를 마다하고 슬픔과 눈물의 장소로 자신을 투여시킨 것이다. 또한 그는 일을 분담하고 조직을 만드는 지도자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45개의 집단을 구분하여 성벽 450m를 중수하였고, 52일 만에 그 엄청난 공사를 마쳤다.(p49) 그는 위임형 리더십을 발휘하여 예수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사람을 세울 줄 아는 자였던 것이다. 느헤미야는 각자의 능력에 맞추어 일을 분담시켰으며, 그에 따른 적절한 교육을 동반하였다. 그래서 그는 사람을 세울 줄 아는 지도자였고,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수행해냈던 것이다.느헤미야는 문제와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이 탁월했던 지도자였다. 그는 자신을 조롱하는 자들을 기도로 다루었고 개의치 않았다. 또한 반대하는 자들은 무시하고 폭력을 행하는 자는 기도와 함께 파수꾼을 세워 해결한다.(p50) 일의 규모가 크고 공사 기간이 길어지면서 낙심한 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을 때,(느4:10) 느헤미야는 어려움을 서로 나누므로 무거운 짐을 가볍게 한다. 내부의 갈등도 심각했다. 식량의 부족 문제가 생겨나기 시작했고 가정의 문제와 높은 세금의 문제, 관원들의 착취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이러한 상황을 유심히 관찰하고 파악하여 강력한 리더십으로 바로잡는다.(p52) 이러한 정황으로 비추어 우리는 탁월한 지도자는 결코 선한 일을 하다가 중단하지 않으며, 고정관념이나 사회 관습을 파괴시키고, 지도자 스스로의 본 보기를 보임으로써 일을 진행시킨다는 사실이다.(느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