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次Ⅰ.당의 건국과 당 정권의 성격Ⅱ.정관의 치Ⅲ.태종의 대외정책Ⅳ.태종의 정치철학Ⅴ.참고문헌Ⅰ.당의 건국과 당 정권의 성격당(唐)을 건국한 고조(高祖) 이연(李淵){) 당나라의 창업자(재위618∼626). 서위(西魏)·북주(北周) 시대에 활약한 이호(李虎)의 손자이다. 선비족(鮮卑族) 계통의 무장으로, 아버지 병(昞)이 일찍 죽자 7세 때 당국공(唐國公)의 작위를 이었다. 외숙모가 수(隋)나라 문 제의 후비(後妃)여서, 수나라의 귀족으로서 황제의 신변을 지키는 천우비신(千牛備身)이 되었다. 그 뒤 여러 주 (州)·군(郡)의 자사(刺史) 및 태수(太守)를 역임하였다. 수나라 말기에 다년간의 노역과징(勞役過徵)과 사치스 런 유행 등으로 백성의 생활이 피폐하였으며, 3차례의 고구려 원정에 양제(煬帝)가 대패하자 혼란에 빠졌다. 당 시 “양씨를 대신하는 자는 이씨”라는 말이 나돌자, 양제의 경계심 때문에 신변의 위험을 느꼈으며, 또 각지에 군웅이 봉기하여 천하를 노리는 형세를 보고 야심에 불타기도 하였다. 617년 북방의 군사적 요충인 태원(太原) 에 파견되어 돌궐(突厥)에 대한 방비를 담당하자, 그곳의 관료 ·호족과 결탁하는 한편 아들 건성(建成)·세민 (世民:후일의太宗)과 함께 군비를 갖추었다. 그해 여름 군사를 일으켜, 7월 3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태원을 출발 하였다. 북변(北邊)의 강적인 돌궐에 대해서는 저자세를 취하여 후원을 당부하였으며, 서남으로 진군하여 11월 에 수도 장안(長安)을 점령하였다. 명목상 양제의 손자를 추대하고, 자신은 당왕(唐王)이 되어 관중(關中)에 군 림하였다. 이듬해 양쯔강[揚子江] 기슭으로 피한 양제가 살해되자, 스스로 제위(帝位)에 올라 당나라를세웠다. 그 뒤 수년간 아들 세민의 활약으로 중원(中原)의 군웅 이밀(李密)·두건덕(竇建德)·왕세충(王世充) 등을 진압 하였다. 또한 수나라 초기의 개황(開皇) 제도에 의거하여나라의 제도를 갖추고, 새 왕조의 기초를 굳혔다. 626년 자식 간의 다툼으로 현무문(玄武門)의 변(變)이 일太上皇)으로 추존하였다. 이리하여 이연 자신은 대승상(大丞相)상·당왕(唐王)의 지위에 올라 정치 군사상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수 양제가 강남의 강도(江都)에 호위하던 금위군에게 살해되자 수를 멸하고 당은 건국하게 되었다(618).당의 건국 초기에는 그 지배영역이 관중지역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연은 정치적으로 양제의 실정을 쇄신하고 법령을 간소화하는등 민심을 수습하는데 노력하였다. 뿐만 아니라 남북조 이래 오랜 분열상을 보여온 강남지방의 통합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여 남조인사의 등용에 힘을 기울였다. 군사상으로도 각지의 할거세력에 대하여 원교근정(遠交近政)의 정책으로 개별적인 병합을 추진하여 통일의 사업을 주도해 나갔다.이렇게 건국된 당 정권의 성격은 위·진 남북조(魏·晋 南北朝)시대의 위에서 이어져내려온 북주(北周)부터 수(隨), 그리고 당(唐)으로 이어지는 3왕조는 그 명칭은 다르지만 국가창업의 중요 인물이나 그들의 지역 기반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수나라를 세운 양견(楊堅)이나 당을 건국한 이연은 남북조 시대에 세력을 지니고 있던 귀족(貴族)집단도 아니고 그렇다고 화북지방의 정복자인 북방민족(5胡)도 아니다. 이들은 관중지방을 중심으로 하고 출신성분상 새로운 계층에 속하기 때문에 사가(史家)들은 이들을 일컬어 관롱집단 이라고 한다. 북주·수·당의 개국공신층은 서위(西魏)의 우문태(宇文泰)가 실시한 관중본위정책(關中本位政策)에 의해서 규합된 관롱집단인물이다. 그 중심세력은 서위 이래 융합된 호한(胡漢) 민족의 무력재지자(武力才智者)들이며, 황실 및 공신들까지도 관롱집단의 핵심세력인 8柱國(大臣) 및 그들의 후손이다. 당은 이들이 주축이 되어서 이연을 옹립하여 창업한 국가이다. 또한 수의 양제와 당 고조 이연은 이종간이다. 뿐만 아니라 북주→수→당으로 이어지는 각 국가의 창업자는 매우 가까운 인척관계로 맺어져 있다. 따라서 북주·수·당의 3왕조는 그들의 인맥(人脈)으로 보나 출신지역으로 보나 그 성격이 매우 유사하다. 이들 관롱집단 유인하는 분위기를 자아냈다고 한다. 당연한 일이지만 당 태종 역시 역사적으로 유명한 군주나 지도자들처럼 그 자신도 걸출했지만, 그를 보다 훌륭하게 평가하도록 만든 것은 현명한 신하를 등용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개인적으로는 훨씬 훌륭하고 명철하더라도 교만하고 의심이 많으며 독선적이라서 신하를 골라 등용하지 않거나, 훌륭한 신하의 말을 수렴하지 못한 경우는 도리어 폭군이 되어버린 예는 역사적으로 많이 볼 수 있다. 더구나 인간은 그 본성이 누구나 자신에게 아첨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직간을 수렴하는 군주는 극히 드물었다. 아니 이런 풍토는 요즘처럼 인간이 평등화된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크게는 국가 전체, 작게는 사회적인 지도급 인사나 작은 회사 및 조직에 이르기까지 이런 직간 기피 현상은 만연하기 쉽다. 위인이란 이런 직간 기피증을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 아닌가 할 만큼 남의 훌륭한 의견을 듣는다는 것은 중요하다.당 태종의 재위 기간에는 생산력이 발전하고 사회가 안정되었으며 정치가 제대로 시행되어, 일대의 전장(典章)제도도 계속 정비되는 한편 사방의 민족과 국가들도 공주(共主)로서 추존하여 봉건사회로서는 보기 드물게 강력하고 안정됨을 나타냈다. 이것이 역사상 정관의 치세 라고 일컬어지는 시기였다. 여기에서는 태종의 이러한 정치를 4가지로 나누어 살펴보도록 하겠다. 허심호학, 지인선임, 근정구치, 직간용납이 그것이다.1 허심호학당 태종은 학문을 아끼고 학문 연구에 힘을 썼다. 문학관을 설치하고 사방의 문학 지사를 초빙하여 국가의 장래에 대하여 토론하였고, 홍문관을 설치하여 그곳에 원서 20만 권을 비치하고 정치의 득실을 과거 역사에서 찾아 토론하여 현실 정치에 반영하고자 하였다. 또, 교육 기관인 국학을 설치하여 학사를 많이 짓고 8000명의 학생을 교육하였고, 각국의 유학생을 무료로 받아들였다.당 태종은 경사를 배우는 데 노력하였다. 그는 위징 등을 임명하여 유가의 경전, 제자백가와 역대 사적의 주요한 내용에서 중요한 부분형제에게 24공신도를 능연각(凌煙閣)에 그리도록 명령하였는데, 이들 공신들 중 어떤 인물은 출신이 미천하고 어떤 인물은 소수 민족 중에서 발탁되었으며 어떤 인물은 멸망한 수의 옛 신하였으며, 심지어 어떤 이는 예전의 적군 등으로 그들의 출신은 다양했고 결코 왕부의 권귀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었다. 태종이 등용했던 인재를 다시 한번 살펴보면, 장손무기와 고사량은 인척이고, 방현령과 두여회는 동생인 진부에게 속해있던 사람들이고. 위징과 왕규는 형인 건성의 속하에 있던 사람들이고, 이정은 고조의 원수(적), 저수량은 설거의 부하, 이적은 이밀의 부하, 세남{) 자는 伯施이다. 관직은 비서감에 이르렀고, 永興縣子에 봉해졌으며, 사람들은 虞永興으로 칭하기도 했다. 文詞와 書法에 뛰어나 구양순, 저수량, 설직 등과 함께 당초 4대 서법가로 불린다.은 수나라의 항장이었다. 이렇게 태종은 사람을 쓰는데 친소 관계를 따지지 않았고, 적이었더라도 능력이 있으면 등용하였다.한번은 태종이 대신 봉덕이(封德 )에게 인재를 추천토록 하자, 봉덕이는 오랫동안 천거를 하지 않고 말하기를 저의 마음에 끌리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뛰어난 인재가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태종이 말하기를. 사람을 쓰는 것은 용기(用器)를 사용함과 같아서 각기 그 장점을 취하는 것이니, 고대의 성세에 인재가 많다고 그때의 인재를 다른 시대에 차용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대가 인재를 보지 못할 뿐이지 어찌 지금 뛰어난 인재가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이 일화는 태종 자신의 인재 추천에 대한 입장을 설명해 주는데 그가 사람을 등용함에 반드시 만능의 인재를 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표현하고 있다.3 근정구치당 태종은 천하는 혹 가히 역(逆)으로써 얻을 수는 있으나, 가히 순종치 않음으로써 그것을 지킬 수 없다. 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역대 봉건 정치 학설의 학습을 매우 중시하였고, 늘 대신과 더불어 각 왕조의 흥망 성쇠의 경험과 교훈을 연구하였다. 태종은 특히 견에 따랐다. 그는 일찍이 대신 소우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어렸을 때 병기(兵器)를 좋아하였는데 마침 훌륭한 활이 십여 개 있어서 그보다 좋은 활을 다시는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었다. 근자에 궁장(弓匠)에게 보이니 좋은 활이 아니라고 하였다. 내가 그 이유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나무가 곧지 못하고 활줄이 낡아서 비록 활은 견고하다고 해도 화살은 바르게 날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비로소 과거의 안목이 부정확함을 알게 되었다. 나는 활과 화살로서 천하를 평정하였으나 실제로는 활을 사용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였던 것이니 하물며 천하의 일이란 매우 복잡한데 내가 어떻게 모두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그가 군신의 허심탄회한 충언을 요구하였음을 나타낸 것이다.태종은 거울이 없으면 자신의 생김새를 볼 수 없듯이 신하들의 간언이 없으면 정치적 득실에 관해 정확히 알 방법이 없다고 지적한다. 먹줄이 있으면 굽은 나무가 바르게 되고, 기술이 정교한 장인이 있으면 보옥을 얻을 수 있듯이 시세를 꿰뚫어 보는 혜안을 가진 신하의 충언은 군주를 바로 서게 할 뿐 아니라 천하를 태평성대로 만들 수 있다.또 한번은 그가 위징에게 군주는 어떻게 해야 밝음(明) 에 이를 수 있고, 어떻게 해야 어두움(暗) 을 판별할 수 있는가를 묻자, 위징은 대답하기를 양쪽을 들으면 밝고 한쪽만을 들으면 어둡습니다. , 또한 좋은 약은 입에 쓰고 충언은 귀에 거슬립니다. 라고 하여 태종에게 다수의 의견을 널리 받아들이고 소수의 아첨을 멀리할 것을 강조하였다. 위징은 군주의 면전에서도 직간을 할 수 있었던 충신이었다. 그는 당시의 정치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에서 전후 이백여 편의 상소를 올렸는데, 표현이 적절하고 이치에 맞게, 주저함이 없이 논설하여 다른 사람이라면 감히 하지 못할 이야기도 과감히 주장하였다. 후대 사람들이 그의 언론을 잡록하여 ≪간록(諫錄)≫이라고 하였다. 후에 위징이 병사하자 태종은 통곡을 하면서. 무릇 동(銅)으로 거울을 만들면 의관을 바르게 할 수 있고 옛점이다.
{목 차1)머리말2)포르투갈1.해외제국의 형성과 확장2.대서양 제도들의 식민지 사업3.조직과 통치3)스페인1.신세계의 정복2.대서양 제도들의 식민지 사업3.아메리카의 정치 및 행정기구4)맺음말1)머리말이베리아 반도, 즉 유럽 남서부 끝에 위치한 이 두 나라는 지중해 무역 으로 아무 이익을 얻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철저한 카톨릭 국가로서 이슬람인들의 재정복(Reconquista) 계획도 실행하였으며 무엇보다도 유럽 다른 나라에 비하여 일찍 통일 국가를 형성하였으므로 이 사업을 추진할 능력이 있었다. 물론 영국이나 프랑스도 강력한 왕권을 일찍 확립하였으나 영국은 북해무역 을 통하여, 프랑스는 지중해 무역 을 통하여 어느 정도 이익을 얻고 있었으므로 신항로 사업에 소극적이었고, 한자 도시 {) 중세 중기 북해·발트해 연안의 독일 여러 도시가 뤼베크를 중심으로 상업상의 목적으로 결성한 동 맹이었던 한자동맹에 소속한 도시를 말한다.들은 이 사업을 행할 만큼의 재력도 없었고 필요도 느끼지 못하였다. 따라서 탐험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첫 번째 시대와 이를 통해 유럽의 지평이 넓혀져간 과정에 관한 이야기에서는 당연히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개척자들이 주인공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중심으로 신대륙 발견 후 양국의 식민지정책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2).포르투갈지중해 중심의 유럽에서 대서양 중심의 유럽으로 넘어가는 긴 역사의 출발점에 세우타라는 도시가 있었다. 아랍인들에 의해 대서양 연안에 건설된 최초의 항구도시. 오늘날 국왕의 통치하에 있는 북부 아프리카 해안의 천연요새, 엄밀히 말해서 세우타는 지중해 연안의 도시였지만, 이슬람 세력이 지브룰터 해협을 거쳐 대서양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지리적 요건을 갖춘 곳이었다. 즉 이슬람 문명권과 기독교 문명권간의 전략적 요충지가 바로 세우타였다. 당시 포르투갈은 대서양 연안을 공유하고 있던 카스티야 왕국보다는 작은 나라였다. 하지만 카스티야 왕국은 아라곤 왕국과 힘을 합쳐 1492년 그라나다를 함락하기 이전까지는 해외로 작용한 것은 물론이다. 따라서 대서양을 종단하여 동방에 도달하고자 하는 엔리케의 국가적 프로젝트는 포르투갈인들의 공간을 대서양, 특히 아프리카 연안의 대서양으로 확장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동시에 엔리케가 파견한 범선의 하나가 서아프리카 해안을 돌아오면서 약간의 사금가루와 흑인 노예들을 싣고 오게 된다. 이로써 아랍 상인의 중간 이익을 배제하고 노예, 상아, 황금 등을 직수입하려는 숙원이 풀리게 되고 특히 흑인 노예 무역이 가져다주는 이익에 점차 포르투갈 인들은 빠져들게 된다. 따라서 이들은 향신료 무역에 앞서 아프리카 유역에 관심을 갖게 되고 점차 그쪽으로 세력을 확장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자그마한 왕국인 포르투갈에게는 드넓은 영토를 정복하거나 큰 규모로 식민 이주를 시킬 만한 인력이 부족했다. 따라서 육지 위에도 항구적인 무역거점이자 동방 해역의 해상권을 유지하기 위한 해군 기지로 역할할 요새들은 건설하고 있었다. 이처럼 포르투갈 제국이 이루고자 했던 또 실제로 이룩했던 목표는, 전략적인 위치에 자리잡은 해군기지들을 토대로 순수한 해상 제국(maritime empire)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 이러한 기지를 발판으로 삼고서 중무장한 선박과 대포로 인도양에서 해운을 장악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알아본 바와 같이 포르투갈은 다음과 같은 배경을 지니고 아프리카에 관심을 가지고 아프리카를 돌아 동방으로 가는 항로를 개척하며 제국을 형성해 나가기에 이른다.1.해외제국의 형성과 확장1505년에는 동{) 포르투갈이나 브라질의 귀인·고위 성직자의 세례명 앞에 붙이는 명칭프란시스코 드 알메이다(D. Francisco de Almeida)가 초대 부왕으로 부임하여 해안에 요새를 구축하고 바다를 지배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아프리카의 동해안과 인도에는 수많은 요새가 설립되었는데, 이 요새들은 미래의 해상 제국의 기반이 되었다. 아퐁소 드 알부케르케(Afonso de Albuquerque, 1509∼1519)는 동양에서 포르투갈 제국의 진정한 설립자였다. 알부케르케: 스페인과 포르투갈간의 로마교황의 중재로 대서양(大西洋)상에 새로운 분계선 을 정한, 사상 최고의 기하학적 영토조약이다. 조약의 동쪽으로는 모두 포루투칼이, 서쪽의 아메리카 지역은 스페인이 차지하기로 하였다. 그 경계선은 경도를 따라 일직선으로 그어졌다. 하지만 마젤란 의 여행과 함께 더불어 스페인 황제 카를로스 5세가 몰러카 제도의 소유권을 놓고 이 조약에서 한 정했던 스페인반구에 속해 있다고 고집함으로써 양국 간에 갈등이 생겼다.을 사라고사 협정{) 이 협정으로 스페인은 몰러카 제도의 소유권을 포기하였지만, 그 댓가로 포르투갈에서 위약금을 받 았으며, 태펴양에서의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세력권의 경계선은 몰러카 제도의 동쪽 18。의 자오선으 로 결정되었다.으로 해결하였고 인도의 부에 버림받고 있던 브라질로 눈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사실 브라질은 본국에 사탕수수를 공급하는 주요 식민지였다. 한편 이 당시부터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등의 선박으로부터 오랜 세월에 걸쳐 포르투갈인이 개척해놓은 항구가 공격을 받기 시작하여 경제적 위기에 몰리자 북아프리카의 요새를 포기하는 한편 인도에 확보하였던 땅을 확고히 하기 위하여 이제까지 해안 지대만을 고수했던 정책을 버리고 내륙으로 침입해 들어가 식민화하기 위한 재외 상관을 설치하였다. 또한 경건한 왕 이라는 별호를 지닌 동 주앙 3세는 해외 영토에서 전도 사업의 수행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이처럼 포르투갈 사람들은 크리스트교 신상의 확장을 위해 발길이 닿는 곳이면 어느 곳이나 선교사를 파견하고 교회의 건설과 복음 전판에 주력하였다.2.대서양 제도들의 식민화 사업마데이라(Madeira)-1419년에 마데이라의 한 섬인 포르토산투(Porotsanto)를 발견한 이래 식민화 사업 시작되었다. 마데이라에서는 초기에 염료 수출용 재목인 용혈수가 많이 수출되었고, 밀의 과잉생산현상도 나타났다. 15세기 중엽에는 사탕수수 재배가 성행하여 노예의 일손을 필요로 하게 되자, 나중에는 인구의 1/7을 노예가 차지하게 되었다. 15erde)와 상투메(Sao Tome)-1456년과 1471년경에 카보베르데와 상투메가 발견되지만 본국과 거리도 멀고 유럽인들에게 알맞지 않은 기후로 새로운 아조레스와 마데이라가 되지 못했다. 카보베르데는 노예교역, 대서양 항해의 지원 기지, 소량의 설탕, 면화, 그리고 염료와 소금 생산지로 알려졌을뿐이고 상투메는 브라질로 보내는 노예들의 보급처였고 설탕생산도 상당한 수준에 올랐다.미나(Mina)의 금-미나 해안이 발견되고, 그곳에서 많은 금이 본국으로 반입되자 동주앙 2세는 그 지역의 흑인들과 교역을 보호하기 위해 상조르지다미나 요새를 세우도록 지시했다. 피륙, 산호, 말 등과 교환으로 동 마누엘 왕 시절에 왕국의 전체 소득을 능가했던 미나의 금이 왕국에 유입되었다. 하지만 점차 금이 고갈되고 프랑스와 영국의 해적들이 개입하여 미나의 금 수익은 점차 감소되었다.3.조직과 통치광대한 식민 제국의 조직과 통치를 위하여 포르투갈 왕국이 취한 여러 가지 제도를 보면 다음과 같다.1대서양의 여러 제도들과 브라질에서는 카피타니아(식민지의 행정구) 또는 도나타리아(수증지)와 같은 봉건 제도하의 식민정책을 수행했다.2아프리카의 서해안에서는 페이토리아(재외상관)을 세우고, 관리는 총독이나 사령관이 세금을 징수하는 세금 관리인과 법률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청문관의 보호를 받으며 수행하였다.3아프리카의 동해안을 포함한 동양제국은 고아(Goa)에 수도를 정하고, 계급 조직에 의한 복합적인 기구를 운영해 나간다.즉, 부왕은 3년 임기로 군사, 재정, 식민 통치에 대한 절대권을 가지고, 그 밑에서 통치를 위한 총 보좌관격인 장관, 법률 문제의 책임자인 총청문관, 그리고 왕국의 독점권 수행과 세금 징수를 감독하기 위한 3명의 감독관을 두었다.인도국의 조직은 많은 식민지를 포함하고 있었다.1부왕에게 예속된 카피타옹(Capitao)이 다스리는 직접 지배권-고아(Goa), 보잠비크(Mocambique), 디우(Diu), 말래카(Malaca)2포르투갈이 요새, 재외 상관 또는 포르투갈인 상주 지가능성을 저울질하고 있었다. 이는 이미 포르투갈이 개척한 대서양연안에서는 경쟁하기 힘들었던 것도 작용하고 있다. 한편 스페인 제국의 목표는 포르투갈과는 달리 많지 않은 해군 기지를 발판으로 삼는 해상 제국만으로는 결국 충분치 못했다. 이를 위해 필요했던 일은, 정복과 식민지화, 그리고 필요한 노동력의 공급을 위한 원주민의 노예화였다.1.신세계의 정복발견과 정복 그리고 식민지화 같은 첫 단계들은 주로 개개 모험가들이 독자적으로 이루어낸 업적이었다. 탐욕적이고 거칠며 또 강인했던 그 정복자들은, 비록 그들 가운데 오래 살아 남아 부를 마음껏 누린 사람은 거의 없지만, 부를 얻기 위해 인디언과, 기후와, 그리고 그들끼리도 싸웠다. 그들은 대부분 스페인 왕으로부터 모종의 위임을 받았고, 자기가 정복한 땅에 대해 폭넓은 권리를 약속받았다. 그러나 봉건 귀족과 강력한 기사단들 그리고 자치 도시들의 희생 위에 가스띨랴에서 절대 왕정을 구축해 가고 있던 스페인 왕들은, 신세계에서 이제 갓 태어나고 있던 제국에 대한 통치권이 그들의 손아귀에 빠져나가거나 일종의 의사 봉건제에 의해 분해되도록 놔둘 마음은 전혀 없었다. 정복 사업이 끝나고 식민 정착이 시작되자마자, 국왕 정부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정복자들을 대신하기 위해 국왕 직속의 행정관과 재판관 그리고 재정관을 임명했다.2.신세계의 경제 정책식민 초기에는 농업 분야에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았다. 단지 금에만 관심을 가지고 밀과 그 밖의 산물은 본국에서 수입해 왔는데 신세계에서 점증적인 곡물의 부족은 경작을 필요하게 하여 일찍부터 밀, 채소, 과일 등이 소개되었다. 한편 유럽은 신세계에서 토마토, 옥수수, 담배, 사탕, 키니네 및 염료등을 수입하고, 반면에 스페인은 신세계에 곡물, 포토, 올리브, 쌀, 바나나, 밀감, 가축류 및 섬유등을 수출했다. 신세계의 공업 활동은 초기에 메트로폴리 제품과의 경쟁이 어려워 크게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나마 가장 발달된 산업은 면직 산업이었다. 원주민들의 직물과 현지산 양모는 품질이 나
目 次Ⅰ.序論ⅰ.中世의 規定Ⅱ.本論ⅰ.中世의 始作-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의 成立ⅱ.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의 展開ⅲ.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成立과 發展ⅳ.전국 다이묘(戰國大名)의 成立과 近世의 始作Ⅲ.結論ⅰ.武家社會란 무엇인가?ⅱ.마치며Ⅳ.參考文獻Ⅰ.序論일본의 역사 속에는 오랜시간동안 무가 사회가 존재하였는데 보통 이 시기를 이처럼 규정하고 있다. 무사 계급이 군사력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권력과 조직을 가지고 행한 정치 형태. 일반적으로 12세기말의 가마쿠라 바쿠후 창립부터 1867년에도 바쿠후 멸망까지 약 700년 동안을 무가 시대라고 한다. 무가 정권은 아니라노 기요모리가 최초로 세웠지만 권력의 원천이나 정치 조직과 경제 기반이 귀족 정권과 유사하다는 이유로 이를 무가 정치의 범주로 포함시키지 않는다. {) 박경희, 연표와 사진으로 보는 일본사, 일빛, 1998, 쪽 137하지만 어떠한 시대를 이처럼 간략하게 정의내리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고 본다. 따라서 무가 사회가 존재하였던 중세시대 특히 가마쿠라·무로마치 막부의 사회에 대한 전반적인 특징을 살펴보며 무가사회가 과연 어떤 사회였는지에 대해 살펴볼까 한다.ⅰ.中世의 規定무가 사회에 대해 알아보기전에 이 사회가 존재했던 중세시대가 어떤 시대였는지에 대해 알아보겠다. 헤이씨(平氏)정권의 성립에서 에도막부의 멸망에 이르는 약 700년동안을 봉건사회라고 하며, 보통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의한 쇼쿠호오(織豊)정권이 세워진 것을 경계로 해서 전기(前期)와 후기(後期)로 나누어서 생각하고 있다. 중세라고 하는 것은 이 중 봉건시대 전기에 해당되는 것으로, 봉건시대 후기를 근세라고 하는 것에 대한 명칭이다..Ⅱ.本論ⅰ.中世의 始作-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의 成立1068년 즉위한 고산죠(後三條) 천황은 우다 천황이래 170년만에 후지와라씨의 외척이 아닌 자로서 천황의 자리에 올랐다. 치세는 겨우 5년이었지만, 강력히 추진한 천황 친정{) 그의 치세기간동안 1069년, 강력한 장원, 이에 무사를 끌어들여 항쟁하게 되었다. 1156년에 일어난 호겐(保元)의 난이 그것이다. 이 난으로 무사의 정치적 입장은 비약적으로 높아지고, 특히 미나모토가 다메요시(爲義)·요시토모(義朝) 부자의 싸움으로 세력이 약해지면서, 다이라씨는 기요모리(淸盛)를 앞세워 일족이 대거 조정에 진출했다. 더구나 1159년 헤이지(平治)의 난으로 미나모토씨의 세력을 수도에서 일소하고 중앙·지방의 군사력을 장악했다. 다이라씨 정권에 대해 위기감을 갖고 있던 구 세력은 고시라카와(後白河) 상황 아래 결집했는데, 그 가운데서도 강력한 무력을 자랑하는 사원·신사의 세력은 반 다이라씨적인 행동을 강화하고 있었다. 마침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를 비롯한 각지의 미나모토씨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보고 군사를 일으켰다. 다이라씨 정권은 1181년 다이라노 기요모리가 사망하자 2년 뒤 다이라씨는 수도에서 쫓겨났고 마침내 1185년 단노우라 전투에서 패하고 말았다. 그 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가마쿠라 정권이 성립하기에 이른다.{) 이상은 박경희, 연표와 사진으로 보는 일본사, 일빛, 1998, 쪽 72∼75 참조한편 호겐·헤이지의 난을 통하여 상황과 천황은 일찍부터 정무의 주도권을 놓고 미묘한 관계에 있었고 조정의 신하나 무사들도 각기 복잡한 대항관계에 있었는데, 군사력의 우열로 이러한 대항관계가 직접 판가름나는 정치구도가 성립되기에 이르렀다. 지엔이 말한 호겐의 난 후의 무사의 세상의 도래는 이러한 사태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아사오 나오시로외, 새로 쓴 일본사, 창작과 비평사, 2003, 쪽 154∼155ⅱ.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의 展開가마쿠라 바쿠후는 1183년 관동 지역의 지배권을 공인받고 1185년 슈고(守護)·지토(地頭)의 설치를 특허받음으로써 바쿠후의 기초를 다졌는데, 1190년 미나모코노 요리토모가 일본국 총추포사(日本國總追浦使)·총지토(總地頭)의 지위를 확인받으면서 쇼군이 고케닌을 이끌고 국가적 군사 경찰 기능을 담당하는 기구로서의 바쿠후가 확립되었다.{) 박경희, 연표0년이 이에 해당한다고 하겠다.가마쿠라 바쿠후의 정치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면 1199년 요리토모가 사망하고 아들 요리이에(賴家)가 쇼군이 되자 어머니인 마사코의 친정인 호죠(北條)씨가 세력을 뻗쳤다. 마사코는 요리이에의 재판권은 박탈하고 마사코의 아버지 호죠 도키마사(北條時政)를 중심으로 하는 13명의 유력 고케닌의 합의제에 의해 정무를 운영하여 고케닌의 동요를 막았다. 이로써 요리이에의 독재를 견제하고 마사코의 아버지 호죠씨가 세력을 뻗치게 되었다. 후에 마사코는 1203년 도키마사는 2대 쇼군 요리이에를 폐하고 사네토모를 쇼군으로 세우는 등 집권(執權)으로서 바쿠후의 실권을 잡았다. 이때 도키마사는 싯켄으로서 정치의 실권을 장악했는데, 이로써 싯켄정치가 시작되었다. 1219년 사네토모가 살해되어 미나모토씨의 정통이 단절되자 위기에 직면한 바쿠후는 섭관가에서 쇼군을 맞이하고 요미토모의 처 호죠 마사코가 실질적인 쇼군으로 정치를 운영하였다. 한편 조정에서는 고토바(後鳥羽)상황이 1221년에 호죠 요시토키를 토벌하라는 선지(宣旨)가 내려지고 바쿠후를 타도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하지만 막부측에 비하여 상황 측은 지휘계통이 정비되지 않았고 무사를 충분하게 조직하지 못하고 결국 막부측의 압승으로 끝나 난은 실패했다. 이것이 바로 조큐(承久)의 난인데 이 난 뒤에도 원정이 행해지고 그 밑에서 막부가 국가의 군사경찰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점에서는 난 이전과 이후에도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조정(원정)과 막부가 수행하는 국가기능의 분담관계는 난 이후 종래의 원정이 수행해 온 국가적 기능이 대폭 바쿠후로 이행되는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이상은 아사오 나오시로외, 새로 쓴 일본사, 창작과 비평사, 2003, 쪽 167∼168, 171∼174·박경희, 연표와 사진으로 보는 일본 사, 일빛, 1998, 쪽 129∼130 참조조큐의 난후 안정기에 들어선 바쿠후는 1225년 마사코의 사망을 계기로 집권 호죠 야스토키(北條泰時)를 중심으로 렌쇼·효죠슈제 등을 채용하여 합의 정치條時賴)와 도키무네(時宗) 시기의 토쿠소 전제는 주로 조정과 귀족에 대한 것이었으며, 사다토키(貞時)와 타카도키(高時) 시기의 그것은 고케닌에 대한 전제였다. 이들 시기의 정치를 각기 전기 토쿠소 전제정치, 후기 토쿠소 전제정치라고 부른다.{) 이상은 아사오 나오시로외, 새로 쓴 일본사, 창작과 비평사, 2003, 쪽 178∼180 참조한편 이 시기는 원의 두 차례의 침입이 있었다. 비록 원의 침입은 실패로 끝났으나 이 전쟁이 막부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먼저 규슈 일원에 막부의 지배력이 강력하게 침투해 갔다. 이와함께 공가정권에 대한 무가정권의 우위가 한층 강화되었다. 그렇지만 전투체제 속에서 고케닌의 족적 결합이 변화가 나타나고, 전후 포상급여 처리 등의 문제와 함께 고케닌 층의 막부에 대한 불만이 나타나서, 몽고 내습이후 막부정치의 성격은 크게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동경대교양학부 일본사연구실 편 김현구 공역, 일본사개설, 지영사, 1998, 참조화폐 경제의 발달과 원의 침입으로 곤궁해진 고케닌을 구제하기 위해 내린 1297년의 덕정령도 고케닌령에 대한 통제 강화의 일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도쿠소 전제에 대한 고케닌의 반발, 고케닌의 곤궁과 바쿠후의대책 실패, 슈고의 강대화, 아쿠토(惡黨)의 행동 등은 바쿠후의 지배를 흔들리게 했다. 한편 1242년 바쿠후가 황위 계승에 대해 간섭하여 고사가(後嵯峨) 천황을 옹립한 것이 단서가 되어 지묘인(持明院)·다이카쿠지(大覺寺)가 서로 대립했다. 다이카쿠지 계통의 고다이고(後醍 ) 천황은 바쿠후에 불만을 품고 1321년에 250년 동안 계속되어온 원정을 폐지했다. 1324년 쇼츄(正中)의 정변, 1331년 겐고(元弘) 정변을 거쳐 1333년 바쿠후를 멸망시켜 조정측이 집권하는데 성공하기에 이른다.{) 박경희, 연표와 사진으로 보는 일본사, 일빛, 1998, 쪽 130∼131이 시기에 문화에 대해 살펴보면 무사들이 정치상의 지배 계급이 된 것은 문화 방면도 청신한 공기를 불어넣었다. 조정 귀족(公家)들이 문립하고 교토를 탈출한 고다이고(後醍 ) 천황이 요시노에 들어가 남조를 열었을 때부터, 1392년 무로마치 바쿠후의 주도로 남북 양조가 합쳐질 때까지를 남북조 시대라고 한다. 1335년 호죠 도키유키(北條時行)가 관동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난을 평정하기 위해 가마쿠라에 들어간 아시키가 다카우지가 고다이고 천황에게 등을 돌리므로써 겐무(建武)의 신정은 파국을 맞이했다. 관동에 입경한 다카우지는 격전을 거듭한 끝에 교토를 점령하여 1336년 고묘 천황을 세웠고, 요시노로 달아난 고다이고 천황은 그 곳에서 조정을 열었다. 이후 약 60년 동안 요시노의 남조와 교토의 북조가 양립하여 격렬할 전투가 계속되는데 이것을 남북조 내란이라고 한다. 이 내란은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滿)가 무로마치 바쿠후 3대 쇼군이 된 무렵부터 종식되기 시작하였고 유력 슈고 다이묘들도 바쿠후를 따르게 되었으므로 아시카가씨에 의한 전국지배가 거의 완성되었다.{) 박경희, 연표와 사진으로 보는 일본사, 일빛, 1998, 쪽 165요시미쓰는 집사 호소카와 요리유키(細川賴之)의 도움으로 내란 수습에 실권을 흡수하고 야마나(山名)씨, 오우치(大內)씨 일족의 반란을 계기로 유력한 슈고들을 억압하고 남북조 통일에 성공하여 바쿠후의 최전성기를 실현시켰다. 바쿠후의 지배 기구도 요시미쓰 시대에 완성되었다. 이어 4대 쇼군 요시모치(義持)의 치세에도 안정을 보였지만 1416년 가마쿠라 쿠보(鎌倉公方) 아시카가 모치우지에게 불만을 가진 관동관령 우에스기씨가 가마쿠라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쇼군의 권력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원래 무로마치 바쿠후는 군사적·재정적 기반에서 슈고들을 압도할 정도로 강력하지 못했으며 천황·조정·사원·신사의 권한을 흡수하면서도 그 권위를 그대로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쇼군의 권력은 전제적 측면을 갖고 있었지만, 내란 동안 권한이 강화된 유력한 슈고들의 연합 정권이란 성격도 강했다. 한편 추첨으로 뽑힌 6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足利義敎)는 중신들을 억누르고 관료 집단인 부교닌을 중용해서 직접 참조
Ⅰ.머리말이번 기회에 한국의학사에 대한 글을 쓰게 되었는데 글을 쓰기 앞서 소위 반만년 역사라는 긴 시간동안 우리나라에서 발전해나간 의학사에 대한 내용은 짧은 내용을 통해 알아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고 생각됐다. 따라서 고대에서 조선시대 즉 서양의학이 들어오기 전까지를 중심으로 각 시대별로 질병관과 보건의료제도의 발전과 특징에 대한 개략적인 내용을 알아보기로 하겠다.Ⅱ.고대국가의 성립과 의약의 발생1.고대국가의 형성과 질병관질병은 귀신, 또는 초자연적 힘에 의해 발생한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옛말에 질병을 덧 , 탈 , 들었다 , 입덧 , 배탈 , 병이 들었다 함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질병을 맡은 귀신이 인체에 침입함으로써 질병이 일어나고 그것을 몸밖으로 내쫓음으로써 질병이 치료된다는 관념이 깊었던 것이다. 따라서 병을 치료할 때는 질병의 치료를 어떤 전지전능한 힘을 가진 신에 의존하거나 귀신과 대화를 하고 병을 일으키는 역신 을 물리칠 수 있다고 하는 무당과 같은 존재에 의뢰하였다. 반면에 민중들 사이에서는 섭생과 수양의 부족 때문에 질병에 걸리게 된다는 소박한 자연과학적 질병관이 자신들의 경험을 기초로 하여 발전하고 있었다. 민중들은 질병을 보이는 그대로 느껴지는 그래도, 경험을 토대로 하여 자연적 원인에 의한 것으로 보았다. 이와 같은 고대의 질병관은 그 시대의 보건 위생발전과 직결되기 때문에 중요하다 할 수 있다.2.질병에 대한 대책과 약물요법의 발전우리 겨레가 고대국가에서 발전시킨 치료법 가운데 특기할 것은 돌침 요법과 뜸 요법의 발견·이용이다. 이런 내용은 『황제내경·소문편』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1930년대 함북 경흥군 웅기면 송평동의 석기시대 유적 발굴에서 얻어낸 돌살촉·돌침·뼈침 등이 우리나라 돌침법을 물리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또한 『황제내경·영추편』의 기록을 볼 때 돌침 요법과 함께 약물요법 역시 성행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한편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병리인식이 따라야 하는데 이에 대한 고대국가의 기록은 없다. 다은 없고 『일본서기』권 19에 그나마 약간의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여기서 의박사와 채약사가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백제에서는 의약이 분업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백제에 의박사와 채약사를 함께 보냈다는 것은 의술과 약물 이용을 통합적 입장에서 배합시켜 나가는 보건 의료사업을 전개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본서기』권 20에는 주금사를 일본에 보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주금사란 경문을 외우고 기도를 드리는 방식으로 질병치료와 예방을 맡아하는 전문가이기 때문에 이 기록은 백제 정부가 주금사 제도를 통해 종교적이며 미신적인 의료행위를 보장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3신라-『삼국사기』권 39 잡지 8 「직관」중에는 신라에 약전 이라는 의료기관이 있는 것과 의료직제로써 내공봉의사, 국의, 공봉복사 등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삼국유사』권 2 「아도기라」의 조에 신라 미추왕 3년(264년)에 성국공주가 병을 앓았는데 무의가 다스리지 못하므로 서방에 사람을 풀어 의사를 구하였다 라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은 신라에 무의 제도가 있었던 것을 의미한다. 이로써 신라는 옛날의 주술사적 제도를 활용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지금까지 살펴본 바로는 여전히 미개한 원시사회의 마법시대에는 의술과 무당의 주술적 의료행위가 섞여 있었다. 그 뒤 의술은 점차 무당들의 미신적 의료행위에서 순전히 의료사업만을 전문적으로 하는 의사가 떨어져 나오게 되었다. 이렇게 의약의 1차 분화가 이루어졌고 이것이 계속 발전하여 후에 의료사업과 약무사업으로 분리하게 되는데 이것을 의약의 2차 분화라고 부른다. 여기서 주지할 것은 백제에서는 이미 2차 분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으로 의약 발전사에서 높게 평가해야 한다. 또 한가지는 세 나라의 구료제도, 즉 자선의료사업을 위한 일정한 기구와 직제가 있었음을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엿볼 수 있는데 이 역시 상당한 수준에서 정비된 보건의료제도가 있었음을 보여준다.2.질병관의 발전과 위생적인 생활 기풍의 고양먼저 질병관의 발전에 대해 살펴보면 질병의 본태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약전은 경덕왕이 보명사 로 이름을 고쳤다가 그 뒤에 다시 약전으로 복고하였는데, 그 기구 조직을 보면 사지 2명, 사가가 6명, 종사지가 2명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약전이 순수한 약무만을 다루는 기관이 아니라 보건의료사업 전반을 담당하는 기관이였다는 것은 보명사란 명칭이 사람들의 생명을 보호하는 기관이란 뜻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약전 이외 의료사업을 담당한 의사들의 벼슬 이름으로 국의, 공봉의사, 내공봉의사, 의관, 의박사 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중 의박사의 기록에 대해 잠시 언급하자면 의학교의 설치를 통해 국가적인 의사 양성체계가 서 있다는 것은 빈번한 전쟁에서 생기는 부상자와 군인들이 앓게 되는 질병에 대한 의료상 대책을 취하기 위해서라도 의사의 양성은 필수조건이었던 이유였는데 이것이 통일신라 보건의료제도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역사에서 국가적 정규의사양성사업에 대한 첫 기록은 692년이 되는 것인데 눈여겨볼 만한 것은 자주적 특색이 엿보인다는 것이다. 이는 이웃나라들에서 진행된 의사양성 사업과 비교해보면 뚜렷해진다. 이 밖에도 이 시기에는 자선의료사업이 삼국시대보다 한층 체계를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이 시기의 질병관에 대해 알아보면 당시의 의약교재와 일련의 사료들에 질병관이 반영되기 때문에 어느정도 확실히 알 수 있다. 이때는 앞선 시기의 선 사상과 외래종교인 불교의 영향으로 질병은 초자연적인 힘, 즉 병을 일으키는 역귀 의 침입, 또는 그 어떤 신 의 작란으로 생각하는 질병관을 지녀 기존의 신비적, 미신적 질병관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질병의 원인을 내적·외적요인으로 나누는 과학적 인식으로 주목되는 질병관이 나타났다. 이전 시기까지는 질병은 외적 즉 초자연적 현상으로 보는 것이 주였지만, 삼국을 지나 통일신라 시기에 이르면 내적 요인에 대한 질병의 이해가 활발해진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 질병의 내적 요인으로 정신적 요인이 중요시되었다는 기록이 보.2.고려 보건의료제도의 특징고려 보건의료제도의 특징을 꼽을 때 첫째, 국왕을 비롯해서 귀족과 특권층에 복무한 의료직제가 많이 늘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앞선 시기에 비해 훨씬 정비 강화됐다. 이는 신라와는 다르게 중인과 지방의료기관으로 나누어지고 자선의료기관도 존재하였다. 마지막으로 고려에는 보건의료관제 벼슬아치 수가 급증하였다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의사 양성 및 의사 등용제도가 존재하였는데 930년때 서경에 의학원 을 설치하고 6부의 성생도들을 모아 의술과 복술을 가르친데로부터 시작한다. 고려시대 의학교육은 정치적 목적을 띠고 있고 내외적으로 의학 교류가 활발한 가운데 상당히 높은 수준에서 진행됐다는 것이다. 또한 고려의 통치자들은 저들의 생명과 건강에 대한 지대한 관심 때문에 다른 기술직종에서는 실시하지 않았던 과거법을 오직 의사선벌에만 적용하였다. 이와 동시에 고려시기의 의료일꾼들의 신분과 사회적 대우는 상당한 정도로 보장되었다.3.향약의 발생과 발전향약이란 우리 고유의 의약을 말한다. 고려의 통치자들을 신라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의 귀중한 약재와 그 진가를 알아보려하지 않고 덮어놓고 중국의 당재 만을 선용하였다. 그것은 고려 중기 이후에 더욱 심화되어 있었다. 즉 의약 사대주의에 젖어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 품질에 있어서도 우리의 것이 훨씬 우수하였다. 이같은 사실은 고려의 애국적 의료 일꾼들의 큰 반발을 사게 되었다. 당시의 빈민 대중은 값비싼 당재 따위는 알지도 못하였으며 남의 나라 치료법 같은 것에는 애당초 관심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지배층들이 흔히 벌여놓던 미신적 행위인 부처에 공양할 경제적 여유도 없었다. 따라서 빈민 대중은 질병 치료에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고향산천에 풍성하게 널려있는 약초와 약재였고 동시에 실천과 경험에 의해 우리 것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됨에 따라 질병치료에 향약 을 자신있게 이용하였다. 따라서 11세기 후반부터 점차 우리나라 약재에 기초한 체제를 새우려는 애국적 진보적 지향이 대두되고 12세기의 백관지에 마정목축을 담당한 관청으로 사복사 , 전구서 , 봉차서 등을 들 수 있는데 사복사는 말에 관한 일반 행정을 총괄하고, 전구서는 말을 제외한 농우를 비롯한 목축을 관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구 즉 궁중의 수레와 말을 관장하는 봉차서가 따로 있었다. 고려의 이러한 제도는 군마와 농우를 비롯하여 집짐승을 기르는데 관한 행정조치를 등한하게 생각하지 아니하였던 것을 짐작할 수 있으려니와 그와 아울러 목축들의 질병을 치료코자 하는 수의학적 지식의 보급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을 것으로 보인다.Ⅵ.조선시대의 보건의료제도1.조선의 건국과 보건의료제도14세기 고려를 무너뜨린 이성계에 의해 건국된 조선은 초기에 어느정도 일정한 보건의료 발전이 왔다. 먼저 보건의료 발전에 미친 사회적 영향으로는 근로민중들의 신분상 처지가 어느 정도 개선됨에 따라 근로민중들의 창조적 노동이 일정하게 성장하였다는 것, 그리고 과학기술과 문화가 현저하게 발전하면서 의약학도 높이 발전한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훈민정음의 창제인데 이는 의약지식과 기술을 보다 광범한 민중들이 가질 수 있게 함으로써 건강과 생명보호를 위한 투쟁에서 민중의 힘을 증대시켰다. 또한 국문의약책을 쓰는데도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도 조선 통치자들이 실시한 보건의료 분야에서의 개량정책이나 고려의 불교에 비해 조선시대 유교는 어느정도 현실적인 문제들에 대하여 관심을 돌렸던 것도 한 영향으로 보여진다. 1485년에 제정 반포된 조선 기본법전인 경국대전에 보건의료제도가 법제화되어 그 체제가 완성되었다. 먼저 이성계 집권 직후 보건의료기관으로서 전의감, 혜민국, 대비원을 설치하고, 그것들을 동반에 속하게 했다. 이것은 고려의 보건의료 정책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그리고 점진적으로 각 지방의 계수관마다 의원을 설치하여 채약정부를 배치해서 약재의 채취와 조달사업 및 치료사업을 맡도록 하였다. 그리고 1397년 중앙에 '제생원'을 설치하였고 이는 후에 1461년 혜민서에 통합되었다. 자세히 들어가 조선시대의 의료직제에 대렸다.
미국사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무엇이 있는지 고민하다가 선택한 영화가 콜드 마운틴이다. 유명한 배우들이 주연을 맡았고 미국사에서도 가장 중요하다는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였기 때문이다. 콜드 마운틴은 안소니 밍겔라 감독이 프레지어의 소설인 을 소설을 각색한 대작으로 주드 로, 니콜 키드먼, 르네 젤위거가 주연을 맡은 영화이다. 또한 이 영화의 미술감독인 단테 페라티는 1860년대의 분위기와 느낌을 내고자 자연조명을 최대한 활용하였고 역사적 사실에 입각하여 의상, 남북전쟁의 진지와 마을의 건축물 등을 제작하였다고 한다. 아이다가 4년간 시련을 이겨내고 살아가는 배경이 되는 블랙코브농장도 19세기 미국의 전통적인 남부 농장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따라서 이 영화는 당시 시대적 배경이 잘 표현되어 있다.처음엔 전쟁영화인줄 알았는데 사실 초반에 나오면 전투를 제외하고는 주인공인 인만이 탈영하여 아이다를 찾아가는 과정이 주로 나온다. 하지만 곳곳에 당시 시대적 사회상을 담고 있고 인만과 아이다의 애절한 사랑이 잘 표현하고 있다. 영화를 보는 관점은 여러 가지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번엔 남북전쟁이 배경인 만큼 얼마나 그 시대의 역사적 사실을 잘 표현했는지를 중점으로 보기로 하고 역사적 순서에 맞게 영화를 장면을 대입하는 방법을 취하여 설명하도록 하겠다.먼저 살펴볼 장면은 전쟁신이 끝나고 나오는 장면이 아이다가 콜드 마운틴으로 이사오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는 아이다와 인만이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지는 장면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이 장면 중 인만과 그 친구들이 일하는 과정에서 남북간의 대립이 나타나고 있다. 이 장면의 대화에는 “이 못을 북침이라 칭하겠다”, “난 이 못을 북군 대가리라고 할래”, “절대로 링컨 지지는 하지마” 와 같은 대사가 나온다. 이는 남북과의 갈등을 잘 나타내는 장면인데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대적 배경을 알아야 한다.이러한 갈등의 가장 큰 이유는 노예제도에 대한 문제이다.) 당시 미국의 북부는 면직공업 중심으로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있었고 이를 통해 섬유공업과 아울러 제철공업과 기계공업의 발전까지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한편 남부는 1793년 휘트니가 발명한 조면기가 남부가 면 목화제배에 적합한 기후를 가졌다는 내적 조건을 기반으로 남부의 면생산에 새로운 활로를 열고 있었다. 북부는 산업혁명을 통한 자립적 경제체제를 확립하는 한편 남부는 면생산의 노동력을 주로 노예제도에 의지했으므로 더욱 노예제도를 강화하였고 이로서 북부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독특한 사회상을 보이게 된다. 한편 17세기에 이르러 사회개혁가들은 노예제도를 현실문제로 커다란 관심을 갖게 되고 특히 로이드 개리슨의 ‘해방자’라는 신문 발행을 시작으로 후에 노예제 폐지운동으로 전환되기에 이른다. 당시 북부는 노예제도가 거의 폐지된 상태였지만 남부는 오히려 강화하는 추세였기 때문에 남부와 북부간의 노예제를 통한 갈등이 생기고 남부는 이에 반발하게 된다. 특히 멕시코와의 전쟁 후 캘리포니아가 자유주로 연방에 가입하자 자유주와 노예주의 수적 대립은 16대 15가 되어 자유주와 노예주의 동수유지를 통해 정치세력의 균형을 유지하려 했던 남부 입장에서는 커다란 타격이 된다. 또한 1840년 반노예제도 운동도 다시 활기를 띄게 된다. 그리고 노예제 폐지를 주장한 링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남주의 영수 격인 사우스캐롤라이나주는 더 이상 연방에 머물러 있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판다하여 이 주를 필두로 6개의 주가 연방 탈퇴를 선언하고 제퍼슨 데이비스를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남부연합을 만들었다. 이러한 갈등과 분열이 결국 남북전쟁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영화가 30분정도 진행되면 교회에서 찬송가를 부르다가 청년들이 모두 빠져나가는 장면이 나타나게 된다. 여기서 한 사람이 “노스캐롤라이나가 연방을 떠났어” 라는 말을 하게 된다. 이는 남북전쟁이 시작되자 사태를 관망하던 남부의 버지니아, 아칸소, 테네시, 노스캐롤라이나의 4개주가 연방을 탈퇴하고 남부연합에 참여하게 되는 사실을 나타내는 대사이다. 그리고 모든 청년들은 환호성과 함께 전쟁에 참여하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실제 전쟁은 길었고 참혹했다.영화의 앞으로 돌아가 잠시 초반에 나오는 전투신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 전투는 1864년 7월 30일 실제 전투를 배경으로 한 것인데 이것은 일명 크레이터 전투로 무려 3주에 걸쳐 촬영하였다. 특히 포티그라푸에서 참호를 파고, 진지를 만들고 군대식 간이 병원도 만들었다. 제작진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세트는 거대한 분화구인데 그 규모는 깊이가 9m-15m이며, 폭은 18m-24m, 길이는 51m 규모로써 당시의 실제 분화구를 똑같이 재현한 것이다. 근접 촬영을 위한 구덩이도 만들었다. 한 번에 무려 350명을 죽이면서 전투의 시작을 알린 신호탄이기도 했던 진지 폭발 장면은 특수효과 전문가인 트레버 우드에 의해서 기획됐다. 우드는 이 장면을 위해 4,000 리터의 가솔린과 100kg의 고성능 폭발물질을 투입했다. 폭발하는 순간 허공에 분출하는 흙먼지 장면을 효과적으로 연출하기 위해 우드는 모래와 먼지, 나뭇조각, 나무껍질 등을 혼합한 소품들을 이용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장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부분적이나마 당시의 전술 양상에 대해 알 수 있다.블루(Blue)대 그레이(Gray) - 이것은 남북전쟁의 또 다른 표현이다. 실제 영화에서도 북군은 청색의 군복을, 남군은 회색의 군복을 입고 있다. 그리고 전투신에서 북군이 뭉쳐서 남군을 향해 돌격하는 장면이 있다. 요즘은 화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은폐?엄폐물을 이용하거나 우군지원사격하에 교대전진하는 것이 일반적이 보병의 전술이다. 이점을 생각해볼 때 이러한 돌격은 무모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는 밀집대형 돌격이 주요 공격 형태였다. 소총(머스켓)의 사거는 100야드(90m)다. 그리고 발사 속도는 1분당 1~2발 정도였다. 총을 쏜 뒤 다음 총알을 장전할 때까지 최소 30초 이상이 걸렸다. 따라서 밀집대형을 통해 화력을 집중하고 싸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지속되면서 연발 소총의 등장으로 인해 병사들이 참호에 눌러 앉는 참호전이 최초로 생겨나게 된다. 영화에서도 남군이 진지를 구축하고 대기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시기에 대포와 대포술도 엄청나게 향상하였다. 또한 철조망의 등장으로 이 현상은 서로 더 심해지게 된다. 이는 무기의 발달로 생긴 결과로 근대 전쟁과 현대 전쟁의 전쟁사의 획을 긋는 전쟁이 바로 남북전쟁이다.한편 이 전투신은 영화 내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즉 인만이 중대한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다. 인만은 이 전투를 통해 전쟁의 참혹성과 무차별 살육,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과 귀중한 생명을 명분 없이 소모하는 비극을 목격하고는 전쟁에 등을 돌리고 탈영을 결심한다. 그리고 부디 살아서 돌아오길 기도하는 아이다를 향해 험난한 대장정을 시작한다.영화가 진행되면서 전쟁의 비극적인 요소가 차츰 나타난다. 전쟁은 몇 년간 지속되었고 마을의 여러 장정들은 전쟁에서 전사하게 된다. 그리고 마을에 남은 여자나 전쟁에 참가하지 못한 남자들은 전쟁은 힘들게 생활을 꾸려나간다. 아이다 역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려운 생활을 하게 된다. 특히 아이다의 경우는 혼자 힘으로 무엇인가를 이룩하지 못한 채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된다. 실제 전쟁도 이처럼 비참했다.당시 남군과 북군모두 전쟁이 장기전으로 흐를것은 예상하지 못했다. 전쟁이 일어날 당시 연방을 지지한 북부는 모든 면에서 연방에서 탈퇴한 남부를 압도하고 있다. 북부 23주는 인구가 2,200만이었으나 남부는 11주에 인구는 백인이 550만, 흑인이 350만으로 모두 합쳐 900만이었다. 공업생산력에서는 자본 총액이 북부가 9억 5,000만 달러였는데 비해 남부는 1억 달러에 지나지 않았고 광업 자원의 대부분도 북부에 있었다. 수송에서도 북부가 남부를 압도하였다. 이처럼 인적자원과 산업력에서 남북 간에는 격차가 있었다. 한편 남부에서는 우수한 장교진과 자신들이 수비한다는 입장에 있었기에 유리한 점이 있었다. 따라서 전쟁을 길게 보지 않았다. 하지만 장기전 양상을 띠면서 하지만 장기전 양상으로 흐르자 양쪽모두 병력을 더 모집하게 된다. 북부는 다수의 보상금을 지불하는 지원병제에 병력동원을 의지하였으나 그것만으로는 병력이 보충되지 않아 1863년 3월에 징병제를 실시, 복무연한을 3년으로 하고 25~45세 사이의 청장년을 징집하였다. 남부도 처음에는 지원병제였다가 인적 자원이 너무 부족하여 1862년 북부보다 먼저 징병제를 실시하였다. 복무연한은 북부와 같았으나 징집연령은 크게 달라 처음에는 18~35세 사이로 뒤에는 17~50세 사이로 연장하였다. 이러한 징병제는 많은 물의를 일으켰다. 북부에서는 300달러를 지불하면 대리징병을 인정했으므로 뉴욕 시에서는 이에 항의하는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남부에서는 북부와 비슷한 대리징병 말고도 식량확보와 군수품 전달을 구실로 수많은 면세조항이 있었는데 특히 20명 이상의 노예를 소유한 농장주를 면제하였다. 그러므로 남북전쟁은 ‘부자의 전쟁에 말려든 빈자의 싸움’ 이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 또한 여성들의 입장에서는 전쟁으로 인해 남성 인구가 감소했다. 전쟁 후 대부분의 남부 주는 여성 인구가 남성 인구보다 훨씬 많았다. 그 결과 미혼 여성이나 미망인들 상당수가 직업을 가져야했다. 따라서 여성들은 전쟁 중에 가정적이지도 전통적이지도 않은 일을 해야 만했다.영화의 끝은 인만으로 탈영을 하고 천신만고 끝에 콜드마운틴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영화 내내 마을에서 전쟁을 주도하고 탈영병을 잡았던 티그일당과 격투 끝에 모두 죽이고 자신도 총을 맞고 죽음에 이른다. 그리고 마지막은 전쟁이 끝나고 살아남은 자들의 만찬과 아이다의 독백과 함께 영화는 끝나게 된다. 독백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우리가 잃어버린 건 결코 되찾을 수 없다.땅이 치유가 되기엔, 너무 많은 피가 흘렀다.마음도 치유가 되지 않을 것이다.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과거와 화해를 하고. 과거로부터 배우는 것이다.이 독백은 감독이 영화를 만든 의도가 무엇인지를 잘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