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신앙과의 만남(독서보고서)Ⅰ 구약 성서의 복음논란에 여지가 많은 구약에 대해서 부정적 입장을 표명한 학자들을 살펴보면 마르시온은 구약의 하나님을 복수의 하나님으로 몰아세워 구약을 포기하였다. 구약을 사기의 연속으로 간주한 델리취에 이어 하르낙은 구약을 기독교 정경에서 제거하지 못한 것은 종교와 교회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 결과라고 보고 있다. 그리고 불트만은 “유산된 역사”로 구약을 치부함으로 신약까지는 불연속적이라고 주장했다. 바움게르텔은 복음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하지만 이러한 부정적 입장들에도 불구하고 구약과 신약을 연결시키려는 노력은 이어졌는데 대표적인 세 가지 모델을 살펴보면 첫째로, 약속과 성취 모델을 들 수 있다. 구약을 약속으로, 신약을 성취로 나눈 것인데 그에 따른 위험성이 있다. 둘째로, 모형론 모델을 들 수 있는데 구약이란 모형과 신약이란 원형의 대조를 통해서 구원 역사의 연속성이 드러난다는 주장이다. 셋째로, 기독론 모델을 들겠는데 구약성서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석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구약의 모든 부분을 그리스도와 연결시키는 것은 어렵다. 결론적으로 구약과 신약의 관계가 한 두 가지의 개념으로 설명될 수 없을 정도로 복합적이라는 사실이다.구약과 신약은 다음성으로 된, 전체를 형성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기독교 신앙에서 구약의 가치는 신약에는 없는 구약 고유의 본문에서 나온다. ‘아름다운 세상성’이라고 한 단어로 말할 수 있겠다. 구약은 삶의 거울로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살아나갈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다.Ⅱ 구약성서의 인간 이해 : 인간 복제에 대하여창세기를 살펴보면 인간은 동물과 밀접한 상태에 놓여 있다. 하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심사숙고에 의한 자기 결의에 의하여 창조되었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을 들을 수 있는 피조물은 인간밖에는 없는 것이다. 인간과 동물은 동등할 수 없는 피조물이다.인간은 인간에 의한 상호 존중과 사랑 그리고 섬김의 대상이지 인간의 다스림이나 조작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인간 생명의 조작은 인간의 존엄성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죄악이다.시편 139편이나 욥기 10 : 8-12절을 보면 인간의 생명의 주관자는 오직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주고 있다. 인간의 생명을 유지, 보존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신 것이다. 여자를 만드실 때에 아담을 깊은 잠에 빠뜨린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창조 행위에 사람은 관여할 수도, 참관할 수도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그럼으로 인간 복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반역일 뿐 아니라 하나님같이 되어보겠다는 바벨탑이다.Ⅲ 구약성서의 효 : 제5계명 연구제5계명은 인간 상호간의 관계를 규정하고 있는 윤리적 계명 중에서도 첫 번째에 속한 것이다. 이러한 부모 섬김은 하나님 섬김과 이웃 섬김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한다. 제5계명의 대상은 장성한 어른을 대상(자녀와 부모가 있는)으로 한다. ‘노인 봉양’은 부모가 그 수명을 다할 때까지 생존에 필요한 일체를 제공하며 장례까지 책임을 지는 물질적인 차원도 포함한다. 단순히 존경의 의미를 넘어서 구체적인 돌봄을 요구하는 것인데 이 계명을 지키게 되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땅에서 장수하며 죄를 속하게도 하는 축복을 얻는다.Ⅳ 구약성서의 예언자상 : 사무엘을 중심으로예언 활동은 사무엘의 등장을 본격적인 시작으로 보고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예언하는 모습에서 직업적인 모습으로 변모하기까지 시대별로 특징들이 나타났다.예언자의 역할을 볼 때 크게 중보 기도와 메시지 전달을 보게 되는데 사무엘의 모습을 통해 잘 나타난다.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게 하는 중보 기도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중보자는 기도 대상과 공동운명체를 이룬다는 사실을 알게 하였다. 또한 중보 기도는 쉼이 없어야 함을 보여주었다.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할 때는 청중이 듣던지 아니 듣던지 상관 말고 최고 권력자 앞에서도 당당히 전해야 한다. 또한 예언자들은 자기 백성을 위해서 먼저 기도하는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을 책망할 수 있는 자격과 권한이 주어졌다.우리는 이러한 예언자적인 사명을 잊지 말아야하겠다.Ⅴ 구약성서의 지혜 : 여인 지혜의 설교(잠 1 : 20 - 33)지혜는 여인 지혜로 의인화된다. 지혜의 배후엔 하나님이 계시다. 여인은 거리에서 창피함을 무릎쓰고 설교한다. 다수를 향한 지혜의 외침은 계속해서 외면되고 무시당한다. 마지막으로 가서는 소수를 향한 지혜의 호소를 보여준다.메시지를 간추려보면 성도들은 창피와 오해를 무릎쓰는 용기를 지녀야 한다.(20절) 책망이라는 사랑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23절)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때가 있다.(28절) 성도들의 야웨 경외는 세상에서 바르게 살기로 표현된다.(29절) 인생은 심은 대로 거두기도 한다.Ⅵ 구약성서의 회개회개란 한마디로 악을 멀리하고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하지만 그 회개는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결여되어 있으면 안 된다. 하나님께로의 돌이킴으로 정의할 수 있는 회개는 부부 관계나 부자 관계로도 묘사된다. 이러한 관계가 무너짐이 곧 떠나는 것이고 죄이다. 그래서 원래의 이상적 관계의 회복이 회개이다.이러한 회개는 온전히 하나님께 의탁하며 순종할 때 이루어진다. 또한 하나님 뜻에 위배되는 것으로부터 떠나야한다. 포로기 이후의 회개 촉구를 백성전체가 아닌 한 개인을 향한 선포로 나오고 있으며 율법 준수와 구체적인 실천으로 나타내야 한다. 한마디로 구약에서의 회개는 입술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이루는 것이다.Ⅶ 구약성서의 종말 신앙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종말론적이다. 이에 예언적 종말론과 묵시적 종말론으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예언자의 종말은 역사적 희망을, 묵시자의 종말은 초역사적 희망을 예시한다. 묵시서의 유일한 다니엘서를 보면 현실에 순응한 헬레니스트와 신앙을 고수한 하시딤을 찾을 수 있다. 역사를 초월하시는 하나님의째, 바람/폭풍으로서의 루아흐, 둘째, 사람의 루아흐, 셋째, 하나님의 루아흐로 분류 구원 사역에 하시딤의 신앙을 본받아야 하겠다.2부Ⅰ 예언과 영히브리 낱말 가운데 ‘루아흐’의 의미는 30여 가지 낱말로 번역하고 있다. 이 의미를 크게 세 가지 종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즉 첫째, 바람/폭풍으로서의 루아흐, 둘째, 사람의 루아흐, 셋째, 하나님의 루아흐로 분류될 수 있다.왕정 초기 시대의 예언은 대부분 하나님의 영에 의한 황홀경의 체험에 집중되었다. 하지만 과도기를 지나 예언적 영감은 더 이상 예언의 요소로 인정되지 못했다.포로기 이후엔 제3이사야와 스가랴는 영과 예언을 동일한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마지막 단계로서 요엘은 하나님의 루아흐가 더 이상 예언자에게만 국한되지 않은, 모든 이에게 주어지는 것으로서 영적 임재의 보편화 현상을 보여주었다.Ⅱ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의 메시지구약성서의 예언은 신약성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 ‘맡겨 주신 말씀을 전하기’라는 뜻이다. 예언서는 예언자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것이다.이사야의 핵심 메시지는 “예배 비판”과 “인간의 계산을 뛰어넘는 믿음”으로 크게 나눌 수 있겠다. 그저 형식에 지나지 않은 예배를 일상적인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윤리적인 요구를 실천하는 사람의 예배로 바꾸라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을 교회 안에 가두는 그러한 울을 범해서는 안 된다.예레미야는 유다 왕국의 멸망을 경험한 유일한 예언자였다. 예레미야는 윤리적인 부패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안전 의식에 만족하고 있는 것을 비난했다. 그는 예배와 윤리를 하나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교회는 성도의 삶을 무조건 인정하며 죄를 덮어주고 위로만 하는 곳이 아니다. 잘못된 삶의 태도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바로 잡아주는 곳이어야 한다. 에스겔은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우상 숭배”와 “사람을 찾습니다.”라는 두 가지의 메시지를 담았다. 변하지 않은 인간의 모습 속에서도 하나님께선 계속해서 찾고 계신다. 하나님께 합당한 자를..Ⅲ 예레미야의 상징 행동예언자들의 상징 행동들을 보면 현재의 삶에서 앞으로 일어날 사건을 취하여 선포하는 것이라는 것과 상징 행동자체보다는 그 행동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징 행동은 하나님의 행동을 소개하고 표현해 줌으로 예언자의 메시지를 강화시켜 주는 것이 주목적이다.예레미야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명령은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참으로 가혹한 것이었다. 그의 전 삶을 당신의 메시지로 만들기 위해 끌어들인 것이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뜻, 즉 심판이라는 유다의 미래 운명을 보여주었다. 또한 조문 금지와 장례 풍습의 금지 행동은 유다의 임박한 심판 상황을 앞서서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잔치 참여를 금지하였던 상징 행동은 인간 생활에 활력을 주고 기쁨을 주는 일들이 모두 사라지게 됨을 미리 보여준다.Ⅳ 예레미야의 편지포로들의 생활은 어느 정도 자유로웠으며, 나름대로의 계획된 활동도 허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광신적 애국주의에 사로잡힌 예언자들은 오래지 않아 본국으로 귀향할 수 있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희망 예언을 남발하고 있었다. 그들은 거룩한 땅에서 부정한 땅 바벨론으로 강제로 이송되었다. 제한된 영역 안에서는 장소 이동도 자유롭고 어느 정도 자유로운 생활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새로운 정착지에서 삶의 방향을 잃어버려 표류하는 유다 사람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 준 최초의 하나님 말씀이 바로 오늘의 본문이다. 예레미야는 곧 귀환할 것이라는 헛된 기대로 가득 차 있는 동족에게 애당초 그 꿈을 버리고 그곳에서 뿌리를 내리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이방 나라에서도 하나님과 교제가 가능하다는 점을 일깨워 준다. 마지막으로 그는 이방인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친다. 현재의 삶을 사는 우리도 그와 같이 타종교인과의 평화공존을 위해 기도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Ⅳ 제의시와 지혜서제 25장 시편1. 구약성서의 시문은 시편뿐만 아니라, 예언자들의 말과 지혜문학의 많은 부분에서 나타난다. 문장의 운율 즉 이른바 평행법이 기본을 이루는데, 히브리어에서는 운율과 사상, 형태와 내용이 거의 일치하기 때문에 구절의 끝과 문장의 끝이 대체로 일치한다.동의적 평행법, 대구적 평행법, 종합적 평행법, 점층적인 평행법으로 나누어 볼 수 있겠다.2. 시편의 거의 절반의 저자는 시인 다윗으로, 두 개의 시편(72;127)은 솔로몬의 것으로 돌려져있다. 하지만 시편의 기원 출처를 알리기 위함이라기보다 시가 시편으로 모아진 시기에 그 시에 대한 이해를 보여 주고 있다.3. 오래 전부터 시편은 아주 다양한 관점들에 의해서 해석되어 왔다.종말론적-메시아적인 해석은 이미 초기 유대교 시대까지 소급되고 고대부터 교회 안에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해석은 본문에서 근거를 발견할 수 없다.19세기에 생성 시기를 추론함으로써 시편을 해석하려는 역사적 해석이 확고한 위치를 얻었다. 하지만 연대 추정 역시 대단히 불확실한 것이다.모빙켈은 제의사적인 해석을 시도했지만 역시 불확실한 주장으로 받아들여진다.문체적 해석은 각각의 시편을 개인의 예술작품으로 간주하고, 언어와 구조에 있어서 통일된 단위로 이해하려 하였다. 전승의 중요성에 대한 판단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다.전승사적인 해석은 오경에서만 큰 성공을 거두었다.4. 시편이 사용했던 두 개의 중요한 양식이 짧은 예배 어투에 보존되어 있다.: 할렐루-야, 키리에-엘레이존1) 미리암의 노래는 이스라엘 찬양시 가운데 가장 간단하고도 가장 중요한 기본 형태로 이해한다. 노래나 찬양을 부르도록 많은 사람에게 권고하는 부분이 나온 다음에 키 즉 “왜냐하면”으로 시작되는 이른바 핵심 부분이 나온다.2) 탄원시는 하나님을 향한 것으로서 본질적인 의미에서 기도이다. 하나님을 부르는 간구가 핵심 부분으로 “간구의 노래”로 불린다. 전개 형식은 부름, 탄원, 간구라는 세 가지 부분으로 되어 있다. 탄원시도 찬양시처럼 본특징을 키나(Qina) 내지 장송곡의 요소와 결합시키고 있다. 저자가 몇 명인지는 불분명하고 예배를 위한 것은 아니었지만 곧 “금식예배” 및 애도예배 때 사용되었다.3. 소책자인 룻기 또한 고통 중에서의 하나님에 대한 탄원과 신뢰를 기록하고 있지만 완전히 다른, 즉 이야기체 서술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 “단편 소설”은 비극적인 곤경으로부터 시작해서 행복한 결말로 끝나는 아치형 구조를 이루고 있다. 룻기는 포로기 이후시대에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룻에 관한 이야기는 모범적인 행동, 의무감, 돌봄, 신의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4. 에스더서는 개별적인 장면들이 교차되는 구조를 지닌 “단편 소설”이다. 이 에스더 소책자는 현재의 형태에서 부림절의 제정을 제시하고 그 기원을 확증하려 한다. 에스더 이야기는 하나님의 이름을 피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야기의 줄거리는 하나님의 숨겨진 인도를 전제하고 있다.제 27장 잠언“지혜”는 일상적인 삶 속에서 올바른 길을 찾고, 사건과 사람에 대해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지혜의 목적은 위험과 화를 멀리하고, 생명의-정의롭고, 명예롭고, 성공적인-길을 찾기 위한 것이다.1. 지혜문학은 이스라엘만의 독특한 현상이 아니라, 고대 근동의 보편적인 현상이다. 잠언은 “고대 근동의 지혜가 이스라엘적-유대적으로 각인된 것”을 표현한 것이다.2. “유다의 왕인 히스기야의 신하들이 격언들 중의 한 부분을 편찬했다.” 그러므로 지혜는 왕의 궁정에서 육성되었다. 무엇보다도 교육은 가정 안에서 행해졌고 관료나 제사장 양성을 위한 학교에서 유래했으며, 후대에는 아마도 예루살렘에 자체의 교육기관이 있었을 것이다.3. 경험의 전수라는 목적을 위해 잠언은 다양한 화법을 사용한다.1) 행위-보상-관계, 교육적인 효과를 위해서 흑백묘사를 선호한다.2) 표상의 말 또는 비유의 말을 통해, 다양한 영역, 보통 자연계와 인간 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이 자주 서로 연결된다.3) 이러한 점은 표상의 말이나 비유의 말의 특정한 형태로 간주되는 숫자잠언에서도 해 바벨론의 지혜문학 본문들과의 접촉을 보여준다.4. 문체나 사상의 출발점을 통해서 볼 때 코헬렛은 잠언의 지혜와 친숙했고 잠언의 단어들과 통찰들을 수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의도에 있어서 상당히 모순되는데,첫째로, 지혜자는 결국 어떠한 “이익”도 없으며, 어리석은 자와 마찬가지로 죽는다.둘째로, 행위-보상-관계는 인생을 해명하지 못한다.이에 따라 개별적인 질서들에 관한 인식을 질문하지 않고, 인생 전체에 대해서 질문한다.제 29장 욥기1. 이야기 및 전설 속에서 욥은 그의 독실한 신앙을 유지하는 반면에, 시문으로 되어 있는 대화 부분에서 욥은 반항하고, 탄식하고, 고발한다. 이런 저런 차이점들로 해서 이야기와 시문은 한 사람의 저자에 의해 쓰여졌다고 할 수가 없다. 하지만 시문은 이야기를 전제하고 있다.2. 이 전설의 생성 연대는 아주 다양하게 설명되고 있는데, 한 견해에 의하면 두 개의 천상 장면들(1:6-12;2:1-7)은 후대의 첨가이다. 또 다른 견해는 욥기 2장은 단지 1장의 후대의 중복을 의미한다.3. 욥에 관한 전승은 분명히 초기의 이방적 기원들로 소급된다.욥에 관한 전설이 최초로 문서로 저작된 것은 분명히 포로기 이후 시대이다. 전체 욥기는 기원전 5세기에서 3세기 사이에, 말하자면 페르시아 또는 초기 헬레니즘 시대에 생성된 것이다.4. 이 책에서도 역시 후대의 개정들이 발견된다. 두 개의 삽입된 본문들이 쉽게 지적되어진다.5. 욥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지혜문학적인 요소들을 갖고 있다. 더욱이 지혜는 대화 부분의 지배적인 전통이다.6. 욥은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어떠한 재판관도 존재하지 않는, 즉 보다 상위의 어떠한 중립적인 법정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인식에도 불구하고, 욥은 하나님께 법률적인 결단을 촉구한다. 욥기의 원래 본문에서는 욥의 도전적인 연설 후에 바로 “폭풍으로부터의”하나님의 응답이 나타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욥에게 있어서 욥의 정당성을 인정해 주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훈계이다. 욥이 “자신의 주장을 철회할 때”, 반항하며 하터 야웨의 이름을 알게 되었고, 애굽의 부역을 하는 그 땅의 백성들을 해방시킬 수 있었다. 그 하나님은 이제 더 이상 가족이나 씨족의 하나님이 아니라, 백성의 하나님이다.(3:7-8, 16-17 J ; 3:9 이하 E)2.3. 시내산 전승의 단락에서는 전혀 다른 본질적 특징이 서술된다.: 함께 동행하시는 하나님은 산에 거하시거나 혹은 나타나시며, 약속의 말씀이나 행위 대신에 명령이나 법으로 계시를 내린다.2.4. 바다에서 일어난 추적자들로부터의 구원은, 예로부터 즉 이미 초기부터 야웨의 행위로 이해되었는데, 이는 전사의 개입 행위로 묘사된다.3. 구약 신앙의 특성이나 본질이 언제 그리고 어떻게 형성되었을까?3.1.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배타성을 요구하는 것은 여러 법전에서 나타난다. 이방 신들의 존재자체가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신들이 이스라엘을 위한 존재라는 점이 부인되는데 이를 단일신론이라고 한다. 이는 유일신 사상의 전 단계로 볼 수 있다. 결국 배타적인 관계에 대한 요구가 점점 더 파급되어 가면서 다른 신에게는 어떠한 세력의 범주도 허용할 만한 공간이 남지 않았던 것이다.3.2. 고대 이스라엘의 주변 국가의 비교해 볼 때, 공간적이나 시기적으로 병행구가 없는 형상금지는 모든 법모음집에서 발견된다. 형상 금지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3.3. 구약은 역사적 사건을 아주 엄격하고도 철저하게 하나님의 행위로 이해하는데, 하나님의 행위는 동시에 하나님의 본질을 풀어서 기술한 것일 수도 있다. 아마도 구약 신앙의 배타성과 역사와의 관련성은 매우 밀접하게 결합되었을 것이다.4.1. 창조주에 대한 신앙은 아마도 기독교에게 전수된 구약의 주된 유산일 것이다. 대체로 후대의 포로기나 혹은 포로기 이후 시기에 나타난다. 하나님은 피조물들과 사람들을 창조하셨고 그들의 주인이 되신다.4.2. 기원적으로 하나님의 “왕권”이라는 표현 방식은 하나님의 배타성을 표현하기보다는, 오히려 광범위한 신들의 무리와 그들 사이에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는 왕적인 통치자를 지칭하는,나님과 왕 사이의 특별한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사무엘하 7장 14절)를 통해 잘 표현된다. 하지만 특히 아들이라는 칭호는 백성에게도 적용되었다. “너희는 야웨, 너희 하나님의 아들이다”(신14:1)라는 약속은 이스라엘의 행위의 책임을 지운다. 공동체는 “우리 아버지”라는 기도의 외침을 통해서, 구원자에게로 향할 수 있게 된다.7. 예언자들은 왕에게 약속의 말을 전하거나 위협의 말을 선포할 수 있었다.7.1. 이른바 8세기와 7세기의 문서예언자는 왕 혹은 왕권에 비판을 가한다.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스바냐, 예레미야의 말에서 구원은 없다고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7.2. 그 같은 급진적인 관점에도 불구하고, 아모스를 제외한 문서 예언자들은 마치 예루살렘이 포위당했던 시기에 예레미야가 땅을 사는 상징 행위를 보여 주었던 것처럼 심판과 더불어 구원을 말하기도 한다.8.1. 야웨 신앙은 또한 고대 근동의 영향을 받아 각인된 지혜사상에서도 서서히 나타난다.8.2. 시편은 다양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먼 곳에 계심과 가까이 계심, 하나님의 진노와 은총, 동시에 인간의 무력함과 존귀성도 증거하고 있다.9.1. 구약의 하나님 이해는 정적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완성되지 않은, 그리고 계속해서 탐구하는 진행적인 것이다.9.2. 이러한 하나님 이해는 광대한 넓이와 높이 그리고 깊이를 가지고 있다. 몰론 상호대립적인 것도 포함하고 있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며, 개개인의 하나님이며, 세상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시간의 시작과 끝을 포함하고 있다.하나님은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시기도 하신다. 그가 슬픔을 주셨을 때에도 그는 다시 긍휼을 베푸신다.9.3. 구약성서는 이스라엘만을 위한 배타적 성격이 아닌, 구약의 사상 안에서 특히 구약의 희망 안에도 이방 민족들을 포함시킨다.제 31장 구약성서의 통일성에 관한 질문“구약성서신학”에 대한 관점들“구약성서신학”은 두 가지 측면(성서 본문, 시대 상황)에서 결정된다.1. 19세기에 이르러 학자들은 구약안에서 있다.
Ⅰ. 서론야고보서 2장 14절에서 26절까지의 본문에는 믿음과 행위에 대해 여러 예화와 함께 소개하고 있다. 또한 바울의 견해와 야고보의 견해를 비교하여 진정한 믿음과 행위에 대해 좀 더 깊이 알아보려고 한다. 믿음이 있어야만 행위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행위가 나타나야만 믿음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Ⅱ. 본론1. 행함이 없는 믿음야고보는 믿음의 형제들에게 고백뿐인 믿음이 아무 유익이 없음을 경고하고 있다."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14절). 야고보는 여기서 거짓된 고백에 관해 말하고 있다...그는 "만일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면 "이 아니라 "만일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으로 그의 말을 시작한다(칼빈).고백 뿐인 믿음이란 사실상 참 믿음이 아니다. 그곳에는 행위가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믿음과 행위는 구분은 할 수 있어도 분리시킬 수 없는 것이다(워드, 박윤선). 어드맨과 워드의 말대로 진정한 믿음이라면 그것이 행위에 나타나지 않을 수 없다. 믿음에 따르는 행위란 사랑이 그 원리가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아무 유익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바울도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라고 하였다(고전 13:2). 칼빈도 [사랑이 없는 믿음은 유익을 주지 못한다]고 말한다. 또한 고백 뿐인 믿음은 그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 야고보가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14절 하반)고 했을 때, 그 믿음에 암시가 깊다. '그 믿음도 믿음이냐?'는 강한 반발이 내포되어 있다.)이상근 박사에 의하면 [믿음이란 머리나 입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이다. 마음으로 불신앙의 생활을 뉘우치며 자기의 혀를 자복하고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이고 거듭나는 것이다. 이런 자들에게 행위는 자연히 따라오는 법이다'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믿음의 증거는 순종의 행위이다.)야고보는 고백서 동정도 사랑도 아니므로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다. 오히려 그러한 태도는 "가난한 자에 대한 조롱이다"(칼빈).바클레이에 의하면 [유대인에게 있어서 구제는 최고로 중요한 일이다. 의는 곧 구제를 의미한다. 구제는 사람이 하나님께 심판을 받을 때에 그 사람의 방파제가 된다고 생각되었다. 벤 사람(Ben Sirach)는 "물은 타오르는 불길을 끌 것이며 구제는 죄를 속량한다"고 쓰고 있다(집회의서, Ecclesia-Sticus;3:30). 토빗(Tobit)서에는 "구제하는 일에 열중하는 사람은 나는 구제로 인하여 당신의 낯을 보게 되리라고 씌어있는 그대로 하나님의 얼굴을 볼 것이다"라 씌어 있다(4:8-10)]고 한다.그러나 야고보가 의미하는 것은 단순한 구제 행위로 의나 혹은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며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야고보가 말하는 행위란 어디까지나 믿음에 따르는 행위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원리로 하는 구제이다. 우리가 복음을 믿는다면 반드시 복음의 정신을 현실 속에 구체화시키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야고보는"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17절)고 규정하고 있다.바울은 같은 의미의 말을 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갈5:6)이어서 야고보는 믿음과 행위를 별개의 것으로 주장하는 자들을 공박한다.2. 행함으로 나타나는 믿음18절은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로서 문제는 "혹이"가 누구를 지시하는가에 열쇠가 있다. 이스톤에 의하면 야고보는 바울 이전 그리스도인들이 행함없는 믿음을 가르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그 반대자(혹이)를 바울주의자로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포티트는 그 자신이 동의하지는 않지만 어떤 주석가들의 주장을 소개하고 있다. 즉 [야고보가 행함없는 믿음을 주장한 바울의 교훈을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공격하고 있었다고 한다. 결국 야고보가 바울을 오해했었다는 것이다. 이스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야고보는 후기뢰, 충성, 감사 그리고 사랑이다]라고 하여 믿음에 행위가 동반됨을 보여주고 있다(갈5:6).윌리암즈도 [바울은 죄에서 자유한 자들이(믿음에 의해) 죄의 삶을 계속해야만 한다는 것을 논박한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롬6:15) 그는 믿음이란 사랑에 의해 역사해야만 하고 또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고 하여, 믿음에는 사랑의 행위가 동반됨을 보여 준다. 결국 [바울과 야고보에 있어서 신앙의 증거는 사랑의 행위의 삶에서 명백해진다는 것이다](포티트, 고전 13장 혹은 롬12장).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혹이" 를 바울 또는 바울주의자로 보는 것은 옳지 못하다. 흑기는 "혹이"를 가리켜 [14절에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하고와 대조하여 다른 한 사람을 가정하여 이를 반박하는 것 곧 너의 믿음은 행위없는 믿음이고 나의 행위는 믿음에서 난 행위다]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오히려 야고보에 반대하여 어떤 이는 믿음만을 어떤 이는 행위만을 별도로 소유할 있다고 하는 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야고보는 이러한 반대자의 공격에 대해 믿음과 행위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 반박하고 있는 것이다(이상근, 바클레이, 윌리암즈) 한마디로 야고보가 강조하는 핵심은, 보이지 않는 믿음이란 그에 따르는 행위로만 입증된다는 것이다(어드맨, 이상근, 칼빈, 윌리암즈).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그의 믿는바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에 옮기지 않으면 그의 믿음은 이미 믿음이라 할 수 없다. 야고보는 행함없는 믿음,고백 뿐인 믿음이 참된 의미에서 믿음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 결정적으로 논증하고 있다."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19절).김철손과 이상근박사에 의하면 하나님을[한분으로 믿는 것과 한분이신 하나님을 믿는 것은 아주 다르다. 전자는 단순한 지식이요 이해이며 후자는 산 미음이다. 원래 "하나님은 한분이신줄 믿느냐"하는 것은 유대인의 기초 신조이었다(신6:4-9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여 두려워 떠는 것이다. 이 악령적 신앙은 요컨대, 지식 뿐의 신앙, 단순히 교리 또는 신앙개조의 신앙으로 회개와 복종이 따르지 않는 신앙이다.]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을 주장하는 자에게 그러한 믿음이 헛것임을 일깨워 주기 위해 구약 성경의 아브라함과 라합을 실례로 들고 있다.3. 의롭다하심을 얻는 길야고보는 결정적으로 행함이 없는 믿음을 주장하는 자를 가리켜 "허탄한 사람"이라고 논박하고 또한 그러한 믿음을 가리켜 "헛 것"이라고 단정짓는다. "허탄한"이란 케노스이며, 내용이 없이 텅빈 것(김철손, 이상근)으로 영적 생명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이상근, 헨리).또한 이 낱말은 열매없는, 효력없는 등의 뜻을 갖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허탄한 사람"이란 영적 생명이 없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헛 것"이란 아르게로서 쓸모없는 상태에 있는 것이다(김철손). 즉 행함이 없는 믿음이란 쓸모없는 믿음이요 따라서 없는 것이나 같다는 것이다. 이와같이 논박한 야고보는 곧 이어 믿음과 행위의 관계를 명백하게 결론짓기 위해서 구약 성경의 대표적 인물인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방 여인으로 기생인 라합을 들고 있다. 이 두 사람에게서 공통점을 찾는다면 그드르이 믿음이 행함에서 입증되었다는 것이다(박윤선).야고보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리는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것이다(21절). 이것은 창세기 22장에서의 예증이다. 김철손에 의하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신앙의 유무를 시험하시어(창22:1) 그의 아들 이삭을 바치는 행위를 보시고 이를 아브라함의 믿음의 증거로 삼아 기뻐하시고(창26:5) 이 행위로써 그를 의로운 자라고 선언하셨다]는 것이다.여기서 주목할 것은 행위가 믿음의 증거라는 점이다(어드맨, 바클레이). 이상근 박사는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창15;6). 또한 그의 믿음은 독생자(허락의 의미에서)를 바침에서 입증되었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그 행함이 그를 의롭다 한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이상근 박사는 [야고보가 말하는 믿음이란 반드시 행함을 동반하여야 한다. 또한 그가 말하는 행함이란 믿음에서 난 것이지 단지 율법적이나 수양적인 것은 아니다. 이런 행함이 믿음을 온전케 한다는 것이다]라고 설명하는데, 아작 행위로 나타나지 않은 믿음은 믿음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인지, 즉 믿음 자체가 이미 행위를 내포하고 있는 것인지(박윤선), 아니면 믿음이 있어서 그 믿음을 근거로 해서 행위가 따라 나오게 되는 것인지가 명확하지 않다.이 점에 대해서 김철손이 잘 설명해 준다. [믿음은 하나님에 대하여 진정한 마음에서 나고, 믿음에서 나는 행위는 마음에서 밖으로 역사한다. 참 믿음은 반드시 이 두 면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아직 행위로서 밖에 나타나지 않은 믿음이 (이것과 행위로 나타날 수 없는 죽은 믿음(17절) 과는 천양지차다. 이 차이에 주의하라) 믿음의 본질로서 불완전하다는 것은 아니다(사람이 믿음만으로 의롭게 된다(롬3:28).그러나 이 믿음이 그 역사를 나타냄으로써, 그 목적을 이룰 수 있게 되며 (곧 온전케 되다)본질과 활동을 갖춘 뜻에서의 완전한 것이 된다.]야고보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23-24절)라고 말한다.바울과 같이 야고보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주장을 한다고 할 때, 또 하나의 어려운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그것은 야고보 자신이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24절)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곧 문자적으로는 바울이나(엡2:8-9,롬1:17) 개혁가 루터의 '오직 믿음'(sola fide)의 기치와 배치된다. 그러나 그 배치는외관상이요 내용은 아니다.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여기서 야고보가 말하는 믿음이란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는 고백 뿐인 믿음(14절),신조를 승인하는데 불과한 사탄적 믿음(19절),행함이 따르지 않는 죽은 믿음(1이다.
빌링엔(Willingen)회의에서 하나님의 선교 개념을 이렇게 채택했다.“선교란 구원받은 전 피조물 위에 그리스도의 주권을 세우려는 포괄적인 목표를 가지고 아들을 보내심 곧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것이다.”이 ‘하나님의 선교’를 읽고 본인이 느낀 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의지에 대해 책의 전 부분에 걸쳐 강조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선교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어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나라에 우리를 동참시키는 것이 바로 그 목표하는 것이다.이에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의 도구로만 표현되어 있다. 교회 자체로는 그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는 것으로 이해했다. 사도적 직분을 얘기할 때 교회도 하나의 선교의 도구라는 뜻이다. 세상과 구별된 모습으로 하나님의 선교의 임무를 이루어간다는 건 본인에게 큰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결국 선교에 한 부분을 담당해야 할 교회가 세상과의 대립과 그 속으로 들어가 영혼구원을 위한 어쩔 수 없는 문화포용의 구별은 어려운 선택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교사명을 사람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으로 극복해 나가야할 것이다.우리의 죄에 대한 문제와 사탄의 권세를 해결하시는 구원사역을 하나님의 부름심에서 발견하였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려면 결단이 필요한데 회개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회개는 세상에서 주님의 나라로 전향하는 단계이다. 이 나라는 주님의 사랑으로만 가능한 선물이며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실현된다.하나님의 선교는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의 선포를 하는 것이며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설 수 없다. 이 부활의 증인으로 사도를 얘기할 수 있다. 사도는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행정, 담당하는 것은 감독이 했다. 우리는 특정한 선택받은 사도가 아니더라도 사도적 직분을 수행하는 제자가 되어야 한다.하나님의 선교는 바로 제자를 만드는 데 목적이 있다. 또 사도적 직분을 교회가 담당하게 되었다. 중요한 건 이 부활의 메시지, 복음을 기독인이든지 공동체든지 하나님의 선교에 쓰임받는 도구인 것이다. 그 일을 인도하시고 충동하시며 도우시는 성령이 늘 함께 하신다. 이렇듯 하나님의 선교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모두 관여하시고 일하신다. 나는 지금까지 사람의 생각과 능력이 어느 정도는 관여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번 계기를 통해 하나님의 선교는 전인격적이고 주권적인 하나님의 능력과 계획하심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결론을 얻었다.모든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선 구원의 목표가 그리스도의 교회로 모으는 것이다. 개인의 구원을 위해선 그 개인의 환경인 민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민족성을 인식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필요하다. 결국 교회는 지방색을 띄게 될 것이며 여러 가지 우려를 낳을 것이다. 하지만 진리의 내용인 복음에 대한 신앙은 항상 변질되지 않는 것이다.교회라는 공동체는 복음을 선포하는 선교적 사명과 제자를 가르치고 훈련하는 제자양육이 있어야 한다. 이 모두가 하나님의 선교를 위한 교회의 직분이다. 또한 선교의 명령은 말씀을 유일한 선교의 방편이라 말하고 있다. 부활은 설교의 중심에 있다. 그리고 교회의 교제나 친교도 선교의 방편중의 하나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교회는 불신앙과 끊임없이 싸우고 있다. 인간이 구원을 받으려면 공동체 안에서 훈련을 통하여 이루어야 한다. 훈련을 통해 사도직을 감당한다면 세상과의 대립과 싸움이 어려운 일이 아닌 것이다. 교회는 세상과의 대립 때문에 언제나 고난 속에 노출되어 있다. 그 고난은 오히려 축복이다. 고난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을 따르게 됨으로 하나님의 사역에로의 동참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을 얻는 것이다. 나는 고난의 고통에 대해 초점을 맞춰왔기 때문에 고난은 형벌이라고 까진 아니더라도 세상이 얻고 있는 결실이나 결말로 이해해왔다. 하지만 선교에서도 고난은 필연적으로 드러나며 오히려 고난 속에서 온전히 순종과 봉사하는 모습을 갖추게 되며 예수님의 모습을 닮게 되는 것이다. 신앙공동체가 그 훈련의 과정을 겪어내야 함은 주어진 임무인 것이다.
- 목차 -포스트모던 사회에서의 선교신학의 발전전망들어가는 말Ⅰ. 모더니즘 시대의 선교신학Ⅱ. 포스트모더니티 시대에서의 선교신학의 전개Ⅲ. 복음주의 선교신학에서 신학적 상황화의 가능성Ⅳ. 오순절 선교의 부흥에 대한 복음주의적 관점포스트모더니티와 한국교회 - 나아갈 방향들어가는 말20세기에 들어와서 기독교 선교는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이 변화는 근본적인 구조의 변화까지를 포함할 정도이므로 자주 패러다임의 변화(paradigm shift)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된다. 선교활동의 면에서도 이전의 선교역사에 견줄 수 없을 정도의 커다란 변화와 성장이 있지만 선교신학의 면에서 더욱 괄목할만한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다. 복음주의 신학은 자체 신학적 사고 및 논리의 발전에 따라서 변화해가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복음주의와 다른 신학사조의 대두에 따른 변증적, 방어적 방법으로 자신의 신학적 견해를 발전시켜 나가곤 하였다. 그러므로 최근의 복음주의 선교신학의 동향을 주로 1960년대 이후, 특히 웁살라 총회 이후의 에큐메니칼 그룹의 선교신학에 대한 방어적 활동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곤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에큐메니칼 그룹의 선교신학의 대두 자체가 실제로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대두에 따른 시대적 변화였다고 본다면 최근의 복음주의 선교신학의 동향을 포스트모던 시대의 특성들에 따른 반응으로 살펴볼 수도 있다.모더니즘 시대의 선교신학모더니즘의 정의가 무엇인가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견해가 있는데 협의로는 금세기 초반 내지는 중반부터 태동되어진 문화와 예술 각 분야에서의 모더니즘 운동을 지칭하지만 18세기부터 진행되어온 계몽주의의 역사적 전개와 유산을 모더니티(Modernity)로 볼 때 모더니즘은 계몽주의적 가치를 더욱 극대화시키려는 의식화 운동이라는 보다 폭 넓은 역사적 의미로 해석한다(Harvey 1989, 28, 배국원 1992, 87-88).) 철저히 이성에 근거한 지식을 신봉하는 계몽주의가 데카르트에 의해서 문을 열게 되자 이 영향은 곧 신학의 영역에도 치명적인 영향을 압도되면서 모더니즘과 혼합주의를 받아들이게 된 시대적 사조의 승리라고 하겠다.예루살렘 회의의 현대주의적 견해의 승리에 대해서 복음주의자들은 1938년 마드라스 회의에서 대반격을 가하였고 마드라스 회의는 나름대로 복음주의 선교신학과 현대주의 선교신학의 종합을 지향하면서 예루살렘 회의의 종교혼합주의적인 경향을 분명하게 거부하였다. 이 대회는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회와 개인 모두의 성취를 의미하면서 다시 한번 복음 전도를 강조하게 되었지만 이것은 엄밀하게 말할 때 복음주의적이라기 보다는 칼바르트의 신정통주의 신학의 기초 위에서 현대주의와 복음주의를 종합하려는 시도였다고 보인다. 칼 바르트는 하나님의 심판과 절대적 초월성의 신학에서 출발을 하고 있다. 그래서 바르트는 호킹과는 정반대의 위치에서 타종교를 평가하는데 기독교를 포함하는 모든 종교를 다 심판의 대상으로 보았다, 그는 종교와 믿음을 분리, 대조하는 데 단 기독교만은 하나님의 창조와 선택, 의인화와 성화 때문에 믿음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는 새 종교를 등장시킨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를 폐지한 것이라고 하였다(Bosch 1985, 196). 여기에서 바르트는 종교혼합주의에 반대하는 선교의 타당성을 주장하게 된다. 그러나 이곳에서 칼 바르트의 신학이 기초를 이루었다는 것은 신학적 모더니즘이 이미 당시 선교신학의 기조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1930년대에 들어와서는 복음주의는 근본주의와 구분되어지기 시작하였다. 프란시스 쉐퍼는 근본주의를 복음주의의 극우파로 지칭하고 있다. 마드라스 대회는 광의의 복음전도를 주장하면서 사회와 개인 양자의 구원을 주장하였지만 이어 발생하게 되는 세계 제2차대전과 초기 이런 주장을 하던 지도자들의 은퇴와 죽음으로 광의의 복음전도는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당시까지만 해도 "복음전도"라는 말은 아직 그 전통적인 의미를 간직하고 있었다.이어 개최되는 1947년의 휘트비 대회는 C.H. 닷드의 성서신학이 주류를 이루고이후의 선교신학의 위기상황에서는 피터 베이어하우스가 복음주의 선교신학의 투사로 등장하게 된다. 그는 1970년 발표된 프랑크푸르트 선언에서 7가지 기본 요소를 제시하면서 복음주의적 신학을 주장하였다. 첫째, 선교의 근거는 부활한 주님의 명령 안에서만 찾아져야 한다. 둘째, 선교의 주목적은 인간화가 아니라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가 아니면 구원이 없다. 넷째, 영원한 속죄는 선포, 회심, 그리고 침례를 통하여 받는 것이다. 다섯째, 선교의 뚜렷하고 구체적인 과제는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된 사람들로서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여섯째, 구원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나, 비기독교 종교를 따르는 자들은 믿음, 회심 그리고 침례를 통해서만 그 구원에 임할 수 있다. 일곱째, 교회의 선교는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계속되는 것이다(김명혁 1987, 411-18). 베이어하우스는 프랑크푸르트 선언에 의해서 W.C.C.의 신학이 이전 괘도로 회귀할 것을 기대하였지만 1973년 W.C.C.는 방콕에서 열린 W.C.C. 제8차 세계선교대회에서 더욱 급진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에밀리오 카스트로는 "복음주의적 선교의 시대는 지나갔고 세속적, 사회주의적, 범 세계종교적 선교의 시대가 도래하였다"고 선포하면서 구원의 개념을 인간화라든지 중국의 문화혁명이나 아프리카의 해방운동의 관점에서 해석하였다(김명혁 1987, 94-96). 이는 현대주의 사조의 영향에 따라서 성서의 절대 권한이 이들을 조절할 수 없게 됨에 따라서 빚어진 귀결이었다.복음주의자들은 이에 대한 대응으로 1974년에 로쟌 세계복음화 국제대회를 개최하면서 당면한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의 도전에 반응하는 복음주의 선교신학을 정립하게 된다. 이 대회에서 존 스트트는 선교, 복음전도, 대화, 구원, 그리고 회심과 같은 용어들의 성서적 주석을 에큐메니칼 그룹의 사용과 구분 지었는데 이곳에서 그는 "선교"를 복음전도와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 양자를 다 포함하는 넓은 의미로 재해석하였다(Stott 1 in Theology of Mission 에서 현재의 특징을 한마디로 포스트모던 패러다임의 등장이라고 이름하고 있다(Bosch 1991, 349). 그가 이와 같이 이름한 이유는 최근 들어서 다음과 같은 이전의 모더니티의 특성에 도전하는 성향들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로는 모더니티의 가장 핵심인 합리성(合理性)의 개념이 변화, 확장되고 있다는 것이다(Bosch 1991, 352). 금세기 초반 이성주의의 대두로 인하여서 종교는 커다란 위협을 받게 되었고 이 위협 하에서 조만간 종교는 사라질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금세기 말에 다가가면서 발견하는 것은 회교, 힌두교, 불교 등의 세계의 종교들이 다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도 마찬가지로 성장하고 있는데 특히 유물론과 이성론을 근거로 하는 공산치하 지역에서 기독교가 괄목하게 성장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이것이 모더니티의 대두로 인한 종교의 개인화, 사유화 현상에 따른 사회의 압력을 감당하지 못해서 생기는 반작용 내지는 완충효과라고 할 수도 있지만 현대의 종교의 부흥은 이런 설명 이상의 현상이다. 오히려 이것은 합리성이라는 것이 인간 삶의 근거가 되는 기반으로서는 불충분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합리성의 확장의 한 방법은 언어가 절대적 정확을 의미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는 과학의 법칙을 인간의 언어가 완벽하고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음과 마찬가지로 신학적 진리도 결코 언어로 완벽하게 정의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신학과 과학은 둘 다 탐구의 대상(probe)이지 증명의 대상(prove)은 아니라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티는 과학은 본질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적대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기 시작하였다.)두 번째로는 주관-객관 구조(subject-object scheme)를 넘어서게 된 것이다. 자연을 객관화시키고 물리적 세상을 인간의 의지에 종속시키는 구조는 불행한 결과를 불러일으켰다. 결국 인간은 스스로 우리들의 세계를 폐쇄체계로 만들고 자신들을 기계의 일부분으로 만들은 것이다(Hieb영향이라고 본다. 복음주의 신학이라도 시대적 사조의 영향을 받는 것은 불가결한 일이고 신학은 시대사조의 영향과 도전에 대응하며 발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단순한 시대사조의 유행적 반향이어서는 안되고 성서와 건전한 복음주의적 교회 전통에 부합되는 실속있는 발전이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시대사조에 따른 신학운동에 대하여 복음주의적 관점에서 꾸준한 비판적 검토와 반성이 필요하다고 본다. 위에 언급된 몇 가지 대표적 복음주의 선교신학의 동향에 대해서 이러한 검토와 비판을 간략하게 나마 시도해보고자 한다.복음주의 선교신학에서 신학적 상황화의 가능성상황화 개념의 등장은 현 시대의 시대적 사조의 영향이 절대적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첫째로는 기독교의 탈서구화 현상에 의한 것이었다. 이 근저에는 포스토모더니티에 의한 발달과정 사고의 붕괴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실제로 오늘날 복음적 기독교인의 거의 70%이상이 제2/3세계에 위치하고 있다(Johnston 1994, 35). 둘째로는 문화인류학의 발달과 자기 위치 정립, 그리고 기독교 선교에서 문화인류학을 수용하게 됨에 따른 문화인류학적 영향으로서 문화의 상대성 개념의 확산을 지적할 수 있다. 셋째로는 포스트모더니티의 특징중의 하나인 사실(fact)과 가치(value)간의 분명치 않은 구분이다. 이는 가치중립이 없이 모든 것이 해석에 따른 편견을 가짐을 지지하는 것으로서 역시 상황화 등장의 기조가 되어졌다. 70년대 초에 상황화의 개념이 처음 나왔을 때 복음주의의 반응은 한마디로 경계와 거리감이었다. 비록 로쟌 I에서 뱡 카토에 의해서 이 용어가 복음주의 그룹에서도 일찍이 사용되었지만 에큐메니칼 측에서 처음 사용되어진 이 용어에 대한 거부감은 그후 여러 곳에서 표현이 되어졌다. 그러나 윌로우뱅크 회의에서 상황화의 성서적 정당성이 입증되어지면서 서서히 복음주의 그룹도 이 개념을 받아들이게 되었다.이 용어자체의 수용에 이어서 제기된 다른 문제는 복음주의 선교신학에서는 상황화 중 외부적 요소에 대한 상황화인 문화적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