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서론본론-개념-플럭서스의 형성-메일아트-인터미디어(Intermedia)-사회성 (예술의 사회성과 플럭서스, 플럭서스의 고유의 사회성-플럭서스 행위예술-플럭서스 오브제-플럭서스의 특징(탈장르. 탈국가. 탈개념, 탈개인)-대표적인 플럭서스 예술가결론참고서론Fluxus를 정의 내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그 자체가 정의되기를 원치 않으며 미술사 속에서 하나의 양식으로 위치하지 않고 무시되어지는 경향이 있으나 그것이 미술사에 미친 영향이나 플럭서스의 행위 창조성의 형식들은오늘날 당연히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자격이 있음은 물론이다.본론* 개념-"플럭서스(FLUXUS)"는 흐름, 끊임없는 변화, 움직임을 뜻하는 라틴어로 1960년부터 1970대에 걸쳐 일어난 국제적 전위예술운동이다.-전통적인 예술형식과 스타일을 벗어난 예술가들의 생각 을 널리 알리기 위해 계획되었던 잡지의 제목으로서 매키어너스가 선택했다. 그 잡지는 발행되지 못했지만 플럭서스란 명칭은 1962년 매키어너스가 비스바덴에서 조직한 최초의 콘서트 시리즈인 에서 처음 사용되어졌다.- 플럭서스는 미래파나 다다이즘, 또는 초현실주의와 같이 하나의 양식이 아니라 하나의 심리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공동 목표를 위해 협력하는 조직적 화가 집단이라기 보다는 예술 시장과는 거리가 먼 예술가 개개인과 아웃 사이더들이 모인 지극히 자유로운 집단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해 낸 행위와 창조성의 형식들은 오늘날 당연히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자격이 생긴 것이다.특정한 방법론을 가진 일정한 회원으로 구성된 집단이 아니기 때문에 어떠한 원칙도 없다따라서 플럭서스에 참여한 예술가들은 집단에 소속되어있지 않고 플럭서스에 참여하기 위해 모였다가 각자의 활동지로 돌아가고 또다시 재회하는 자유로운 참여형식을 보여준다.-조지브레이트플럭서스에 대한 오해는 그것을 일정한 강령과 프로그램을 갖춘 그룹으로 보는데 있다면서 플럭서스는 원리도 방법론도 내세우지 않았고 단지 기존 예술매체간의 엄격한 경계를 무의미한 것으로 보고 이를 시 서베를린의 문화적 상황은 겉으로는 개방적인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상상력의 빈곤에 빠져 '20년대의 황금기'에 대한 향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고전주의적 취향의 문화를 지향하며 학문적인 지방예술을 답습하고 있어서, 플럭서스의 출현은 실로 시기적절한 것이었다.*메일아트-1964년 이래 플럭서스란 이름으로 불려진 현상은 세계 여러 곳에서 동시에 나타났다. 이렇게 각기 다른 대륙과 도시에 사는 예술가들 사이에서 동시에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사이의 몇몇 여행가들에 의한 전파나, 이제껏 만난 적이 없었던 예술가들 사이에 편지에 의한 교신으로 가능했으므로, 우편은 개념을 전세계적으로 교환하기 위한 매체가 된 것이다..-레이 존슨 같은 플럭서스 미술가들은 ‘우편 미술’을 시도했는 데 이는 우편 제도를 전달 방법으로 이용하는 미술로 엽서형태의 콜라주와 그 밖의 소규모 작품을 예로 들 수 있다. 플럭서스에서 탄생시킨 또 다른 미술은 때로는 우편 미술과 협력하여 행해지는 ‘고무도장 미술’이다. 즉, '메일 아트(Mail Art)'와 '개념 미술(Conceptual Art)'이 태어났던 것이다.-이와 같은 개념미술은 뉴욕에서 맥로우와 영이 매키어너스를 위해 편집한 '앤솔로지(An Anthology)'와, 쾰른에서 보스텔이 만든 '데꼴라쥬(De-coll/age)'잡지 등을 통해 처음 소개되었다.-플럭서스의 다국적 인적 구성과 초국가적 발생 배경 속에 내재된 세계주의의 본성-'삶과 예술의 조화'를 기치로 내걸고 출발한 플럭서스 운동은 이후 베를린·뒤셀도르프 등 독일의 주요 도시들과 뉴욕·파리·런던·스톡홀름·프라하·일본 등 유럽·미국·아시아 등지로 빠르게 파급되어 전세계에서 거의 동시에 나타났다.*인터미디어(Intermedia)라는 개념-플럭서스 작업 속의 친밀하고, 비 지속적(순간적)이고 고도의 시적인 성격은 추상미술 진영의 대작 위주의 영웅적이고 야심적인 그리고 성 차별적인 가치 시스템과 근본적으로 대립되는 것이다. 온갖 종류의 작고 일상적이고 친밀한 일상문화의 여러 흔적스하고 개방적인 경향을 특징으로 한다-.플럭서스의 변화표현 형식에서는 처음에는 다양한 재료를 혼합해 많은 미술 형식을 동시에 표현함으로써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희화적이고 개방적인 경향을 보였다. 즉 초기 이벤트들은 주로 극적인 요소 위주로 작품 활동이 이루어졌는데, 갈수록 이러한 요소들은 줄어들고 대신 구체적이고 시공간을 강조하는 개인적 경향으로 바뀌었다.-표현 형식에서는 처음에는 다양한 재료를 혼합해 많은 미술 형식을 동시에 표현함으로써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희화적이고 개방적인 경향을 보였다. 즉 초기 이벤트들은 주로 극적인 요소 위주로 작품 활동이 이루어졌는데, 갈수록 이러한 요소들은 줄어들고 대신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시공간시공간을 강조하는 개인적 경향으로 바뀌었다.조지 브레이트의 오르간 소곡의 지시사항에는 단지 오르간 이라는 단어 하나만이 등장한다. 오르간으로 무엇을 하는가는 전적으로 연주자 개인의 자유에 달려있다.플루트 독주라는 작품에는 해체/조립이라는 두 단어 외에 아무런 지시사항이 없다. 따라서 연주자는 악기를 분해했다가 다시 조립하는 단순한 행위로 만족할 수 밖에 없다. 또한 그의현사중주는 악수하기라는 지그히 비예술적인 일상행위를 지시하고 있을 따름이다.-플럭서스 이벤트는 산책하거나 나무를 태우는 단순한 동작에서부터 미니 텔레비젼으로 만들어진 브래지어외에는 거의 걸친 것이 없는 샬로트 무어맨이 첼로를 연주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무어맨과 백남준의 공동작품과 같이 대중의 관심을 끈 이벤트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플럭서스는 공연에만 국한되지 않았다.*사회성-예술의 사회성과 플럭서스플럭서스라는 명칭은 조지 마키우나스(George Maciunas)가 전통적인 예술형태와 양식으로부터 탈피하려는 예술가들의 아이디어를 소개할 시간잡지의 표제로 선정한 것이었다. 이 명칭은 1950년대 말부터 서서히 번져나가기 시작한 새로운 예술에의 욕구와 그 움직임을 대표하는 것이 되었고 일군의 실험예술가, 건축가, 작곡가, 디자이너들의 그집대성한 것이라 할 만했다. (비록 공연된 작품 상당수가 예전에 이미 발표되었던 것이긴 했지만.) 이 때 소개된 작품들 상당수가 이후 플럭서스 작품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만한 특성들 - 짧고 함축적인 구성, 익살스러운 놀이정신, 우연성, 소리의 시각화 등 - 을 이미 지니고 있었다.7)바이올린을 천천히 들어올렸다가 갑자기 내려쳐 부수어 버리는 백남준의 , 피아노를 톱질하고 분해하여 결국 산산조각 내는 필립 코너의 (도판2), 단지 불을 켰다 끄는 동작만 반복하는 조지 브레히트의 등은 세간의 화제를 불러모으기에 충분했다. 딕 히긴스는 1964년 섬싱 엘스(Something Else) 출판사에서 나온 자신의 저서 “Postface”에서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비스바덴 페스티벌의 멋진 점은 시간을 걱정할 필요가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즉, 우리는 다른 페스티벌에서라면 제외되었을 끔찍하게 긴 작품들 상당수를 공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에멋 윌리엄즈의 독일어 오페라 도 공연되었는데, 그것은 내가 경험한 가장 긴 45분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로 미리 정해진 숫자만큼 규칙적인 리듬으로 판을 두드리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8)비스바덴 페스티벌의 성공 이후, 플럭서스 작가들은 암스텔담, 런던, 파리, 코펜하겐 등의 주요 도시로 ‘선교활동’을 벌여나갔다. 특히 1963년 뒤셀도르프의 미술학교에서 있었던 “페스텀 플럭소룸 플럭서스 / 음악과 반음악(Festum Fluxorum/ Musik, Antimusik)”은 독일에서 열린 가장 큰 규모의 전시였다. 크냅쉬타인은 뒤셀도르프 축제가 “교조화(敎條化)되지 않은 상태에서 모든 갈등을 플럭서스의 기치 아래 통일시킬 수 있었던 최후의 대규모 이벤트”였다고 평가하고 있다.9)이 행사는 마키우나스가 작성한 “선언문”을 관객들에게 뿌리는 것으로 막을 열었는데, 그것은 “부르조와 세계의 구역질나고, ‘지식인 연하는’, 전문가적이고 상업적인 문화를 정화하라”로 시작하여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혁명가들이 통일된 전선과 행동으로 시스템이라는 것을 증명해 준다.* 플럭서스 오브제플럭서스 오브제들은 ‘출판’이라는 형식을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애초에 플럭서스란 명칭부터가 마키우나스가 “예술, 비예술, 음악, 비음악, 문학, 비문학 등등을 위한 국제적인 잡지”의 제목으로 생각해 두었던 것이었고, 심지어 마키우나스가 주도했던 초기의 플럭서스 공연들도 궁극적으로는 이 잡지를 선전하고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의도로 기획된 것이었다.10) 결국 이 계획은 끝내 실현되지 못하였으나 그 지향(指向)만은 플럭서스 작가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이어져 왔다.플럭서스의 첫 출판이라고 할 수 있는 “선집(An Anthology)”은 결국 마키우나스가 구상했던 잡지와 유사한 내용으로 등장했다. 이 책은 라 몬테 영과 잭슨 맥 로우가 편집을 맡고 마키우나스가 디자인하였는데 세계 각지에서 활동하는 26인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작품과 악보 등을 게재하고 있다. 여기에는 많은 장래의 플럭서스 멤버들도 기고했으나, 출판이 지연되어 1963년에야 빛을 보았다.이밖에도 1964년 딕 히긴스가 “섬싱 엘스 프레스(Someting Else Press)”라는 출판사를 차리고 자신의 작품 , 등을 단행본으로 출판한 일이나, 조지 브레히트가 1963년부터 실질적인 플럭서스 기관지 역할을 했던 “cc V TRE”라는 일종의 신문을 발간한 것도 이런 일관된 맥락 속에 있는 것이다.11)이렇게 출판을 중시하는 경향은 에멋 윌리엄즈나 마키우나스 자신처럼 구체시(具體詩)에서 출발한 작가들이 플럭서스에 존재했다는 점에서도 그 단서를 찾아볼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이런 출판 행위가 결국 작가들의 아이디어를 가장 광범위하고 또 민주적으로 대중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보는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사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오브제들 상당수가 이런 출판을 염두에 두고 제작된 것이기도 하다. 어쨌든 1965년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출판물, 오브제 그리고 여러 잡다한 플럭서스 ‘상품’이 디자인되고 만들어졌다. 이 시기에, , 시리즈가 제작되었.
신화 주인공의 기능과 기우제에 관하여...(의미. 원칙)건국신화는 그 나라나 민족의 신성성을 보장하기 위하여 주인공은 초월적인 존재로 설정되어진다. 그러나 그 내용이 불가능한 상황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며 실제로 그 당시의 생활상과 바람을 담고 있는데 신화의 주인공이 그 바람을 해결해 주는 역활을 하고 있다.또한 당시 그들에게 가장 절실한 바램은 생계유지로 풍년에 대한 기원이다.다음은 신화속에서 주인공들의 이러한 기능을 찾아본것이다.고조선 단군신화의 경우 단군이 신단수에 내려올 때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주몽신화의 경우 오이 마리 협보를 거느렸다는 내용이 있다.여기서 풍백 우사운사나 오이마리 협보는 모두 농사 관장신으로 신으로부터 권력을 부여받은 군주는 풍요를 보장하는 기능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또한 주몽이 부여에서 도망쳐 나오며 유화에게 오곡종자를 받아들고 내려와 나라를 세웠다는 내용에서 오곡종자는 주인공이 곡식관장신임을 증명하는 것이다.곡신관장신임을 보여주는 것으로는주몽 수로 혁거세 신화에서 주인공들의 난생에 대한 견해들 중에도 있다. 즉, 알의 모양이 곡식의 낱알 모양을 암시한다고 보는 것이다. 참고로 난생에 대한 그외의 견해는 태양의 아들임을 증거, 자궁 암시, 새의 토템을 의미 등이 있다.당시 신화 주인공의 기능이 풍요보장을 위한 것인 것처럼농사는 그들의 생계를 위한 중요한 일이며 비는 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기우제를 지냈다.기우제를 지내는 방법으로는 음양설(陰陽說)과 유감(乳柑)주술(呪術)이 있다① 음양설:모든 우주만물은 음과 양으로 이루어져서 이것이 조화을 이루어야 태평성대를 이룬다.양↑ --> 가뭄 : 북문만 통행, 남문은 차단. 검은색 옷 입도록.음↑ --> 홍수② 유감주술 : 비슷한 행위가 비슷한 결과를 불러들임.가뭄일 때 : 비오는 모양과 소리 흉내. 키로 물을 던진다. 나뭇가지 매달아서 물 떨어지게부정한 동물의 (개) 피를 제단에 올리면 씻기위해 비가 낸다. 산에 홑치마 입은 여자들이 단체로 올라가 방뇨( 부정한 여인이 소변 : 씻기 위해 --->여=수(水)==>음+소변==> 비)# 여성이 부정한 것이 아니라 여성의 피가 부정# 조선궁중의 역사 : 유감주술사 예) 짚으로 만든 사람
용의 상징: 용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으나 동남아시아이 모든 풍습에 용이 존재하고 있다.예를 들면 십간 십이지에 용이 포함되며. 방위를 나타낼 때에도 중앙을 황룡으로 좌측을 청룡으로 표현하고 있다.용의 의미용의 의미는 크게 수신, 사신, 군왕신이 있다.첫째 수신은 물을 관장하는 신이라는 의미로 용이 진노하면 가뭄이 된다고 믿었다.고려 때부터 행하던 의식으로서 조선시대에는 기우제를 11번 지내도 비가 오지 않을 때 12번째로 제관(祭官:정3품)의 주관으로 오방토룡제) 제사는 동 ·서 ·남 ·북 ·중앙의 오방토룡단에서 지냈는데, 동단은 선농단 옆에, 서단은 양화도(楊花渡) 옆에, 남단은 한강가에, 북단은 북교(北郊)의 여단(壇) 옆에 있었다. 이러한 제사는 1753년(영조 29) 왕명으로 금지되었다.를 지냈다흙으로 만든 토룡(土龍)을 채찍질해가며 5군데에서 동시에 지내는 기우제(祈雨祭)이다.그 외에도 수신에 관련된 것으로는 정월 대보름 풍습인 용알뜨기가 있다, 이것은 전날 밤에 용이 내려와 우물 속에 알을 낳는데 그 알이 들어 있는 물을 먼저 길어다 밥을 지으면 그 해 자기집 농사가 잘 된다고 하는 속신(俗信) 때문이었다. 용알을 먼저 떠간 사람은 그것을 알리기 위해 지푸라기를 우물 물 위에 띄워놓는다고 한다.둘째, 사신은 호법용으로 신을 수호하는 존재를 의미한다.불교가 성행하기 전까지는 인도에서 시작된 "나가"인 사신을 모셨으나 이후에는 사신을 불교에 귀의한 용. 호법용으로 정하였다.악법용(반대하면)으로 죽임을 당했다.그예로 혁거세 신화에서 대사의 존재와 대웅전의 부처님 양쪽에 용조각이나 벽화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셋째, 군왕신으로 국가를 수호하는 호국용이 있다.호국용은 신화주인공을 지키거나 나라를 지키는 군왕을 상징하며 신화주인공이 용에서 나왔음을 용안이나 용수 등에 비유하여 표현하기도 한다.따라서 국가가 성행시에는 용의 모습
도래신화의 주인공과선진문물목차서론본론1. 만파식적2. 허황옥3. 탈해4. 연오랑과 세오녀5. 사소신화(성모성도)결론(오늘날 도래신화의 연결)신화내용도래신화의 주인공과 선진문물서론천강신화(淺絳神話)는 하늘로 부터 강림한 신의 이야기로 하늘 그 자체로서 신성성을 인정받는다. 예를 들어 해모수가 오지봉에. 혁거세가 양산에 수로가 구지봉에 단군이 삼위태백에 내려온것은 모두 천강신화이다.이에 반해 배를 타고 수평 이동하는 도래신화는 신성성을 인정받기 위한 도구가 필요하다이는 탈해신화. 허황옥 신화. 연오랑과 세오녀. 만파식적. 사소신화 가 있다.여기서 신성성을 위한 도구란 탈해신화에서 숯돌과 숯. 그외의 신화에서는 비단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선진문물을 상징하는 것으로 전자는 철기 문화를 후자는 직조기술을 의미한다.다음은 신화속에 나타난 선진문물에 대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본문첫째 만파식적은 신화는 아니지만 도래신화의 최초의 의미로 중요하다.신문왕이 감은사를 지은 해에 이견대(利見臺- 신문왕이 부왕인 해룡을 뵈었던 언덕) 앞 바다에서 작은 산이 왔다갔다 하는 일이 일어나자 왕이 사람을 시켜 그 섬을 살펴보게 하였다. 그 섬에 가보니, 산의 생긴 모양이 흡사 거북의 머리와 같았는데 그 산위에 한줄기의 대나무가 있는데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하나로 합하는 것이었다. 사신이 돌아와 왕께 본 대로 아뢰었다. 그 대나무는 삼국통일의 주역인 김유신과 문무왕의 합착을 의미하는 것이며 나라의 평안을 위한 선물로서 대나무를 잘라 만파식적을 만들도록 하였다. 만파식적은 파도를 잠재우는 피리로 이것을 불면 적이 물러가고 병이 사라지는 일이 일어났다.둘째 허황옥 신화이다.허황옥은 하늘이 정해준 가락국 왕의 부인으로 먼 아유타국에서 붉은 깃을 단 배를 타고 가락국에 도착한다. 허황옥은 비단바지를 벋어 망산제를 지내고 신분을 밝히지 않은채 왕과 하룻밤을 보내게 되어 왕비에서 지모신의 위치까지 오르게된다.여기서 허황옥이 지모신의 위치까지 오르게된 즉 신성성을 인정받게 된 계기는 선공이 일본 망명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략을 꾸민것이 지혜롭다 하여 자신의 맏딸을 내어 준다. 탈해는 후에 왕위에 오르게 되면 죽어서는 토암산에 안치되어 동악신으로서 신라 멸망때까지 제를 받게 된다.여기서 용성국 사람인 탈해가 왕의 사위에서 왕으로 또 산신으로 받들어지게 된 원인은 그의 지혜로움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숯과 숯돌의 상징적 의미 때문이다.이것은 쇠를 다룰때 쓰여지는 기구로 청동기 시대에 철기문화를 가져왔기 때문에 그 신성성을 인정받게 된것이다.또한 탈해가 가락국에 머무르지 못하고 신라에 정착하게 된 이유도 당시 가락국은 철주생산지로 철기문화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넷째는 일신과 달신인 연오랑과 세오녀이다.하루는 연오가 바다에 가서 마름을 따고 있는 중 홀연히 한 바위가 나타나 그를 싣고 일본으로 가 버렸다. 그 나라 사람들이 보고 이는 비상한 사람이라 하여 왕을 삼았다. 세오가 그 남편이 돌아오지 않는 것을 괴이히 여겨 찾아보니 남편이 벗어놓은 신이 있었다. 그 바위 위에 올라가니 바위가 또한 전과 같이 그를 싣고 갓다. 그 나라 사람들이 보고 놀라고 의아하여 왕에게 아뢰니, 부부가 서로 만나 귀비가 되었다.왕이 사자를 보내어 두 사람을 찾으니 연오가 말하기를 '내가 이 나라에 온 것은 하늘이 시킨 것이라 이제 어찌 돌아갈 수 있으랴. 그러나 나의 아내가 짠 세초가 있으니 이것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좋으리라' 하고 인하여 그 비단을 주었다. 사자가 돌아와 아뢰고, 그 말대로 제사를 지내니 과연 일월이 전과 같았다.여기서도 역시 선진 문물인 비단이 신성성을 위한 도구로 사용됨이 보여진다.다섯째 성도성모 즉 사소신화이다.중국천자의 딸인 사소는 중국에서 배를 타고 들어와 선녀들에게 비단을 짜게하고 붉은 빛갈로 물들여 그 남편에게 주어 신성성을 인정받았다.선진문물인 비단의 신성성으로 인하여 사소는 아들을 낳아 남쪽의 첫임금이 되었으니 혁거세와 알영 두성인이 그 시초일 것이며 서연산의 신모로 삼사중의 하나가 되어 산천제를 받게 된다.결론(오늘날 도래신화의알고 동생을 경주남산에 올라 불을 지펴 죽이려 했으나 이를 본 선덕여왕의 덕택으로 김춘추와 문희는 결혼을 하게 되고 문희는 왕후가 된다.유신은 자기 집 앞에서 춘추와 축국(축구와 비슷한 경기)을 하다가 일부러 춘추의 옷고름을 밟아 찢었다.이것을 기워준다는 구실로 자기 집으로 춘추를 데리고 들어간 유신은 보희에게바느질을 해드리라고 했으나 마침 보희는 무슨 일이 있어 나서지 못하고 동생 문희가 대신 일을 맡게 되니, '역사'는 이렇게 이루어졌다.문희는 결혼하기도 전에 춘추의 아이를 갖게 되니, 그가 훗날 삼국통일을 완성하는 문무왕 김법민(재위 661-683년)이다.예2) 작제건 탄생 설화언니 꿈 소변 개성일대 물바다 동생 진희 에게 꿈을 팔게 되고 이때 당나라 숙종의 방문이 이어지고 동침하게 되며 작제건 낳음 작제건은 진의의 자손이며 왕건은 그의 손자이다.이제건은 두 딸을 두었는데 두 딸을 두었는데 아우의 이름이 진의였다. 진의는 언니가 꿈에 오관산에서 다시 오줌이 천하를 잠기게 하는 꿈을 꾼 것을 비단 치마를 주고 샀다. 당나라의 황제가 잠저시에 송악의 보육가에 와 묵게 되었는데, 찢어진 옷을 깁는데 언니는 코피가 나서 아우가 대신한 것이 인연이 되어 동침하고 작제건을 낳았다는 내용이다이처럼 비단은 혼례의 결정적 계기로 사용되었다.설화(도래신화의 내용)석탈해신화탈해(脫解) 치질금(齒叱今) (또는 吐解叱師今)은 남해왕(南解王) 때 가락국(駕洛國) 바다 가운데 배가 와 닿았다. 수로(首露)왕은 신민들과 함께 큰 북을 치며 이를 마중하려 했으나 배가 곧 달아나 계림(鷄林)동쪽 하서지촌(下西知村) 아진포(阿珍浦)에 이르었다. (탈해가 수로왕과 왕위를 두고 다투다가 패하여 신라를 향해 배로 도망쳤다고도 한다.) 계림의 아진포(阿珍浦)에 도착한 배는 혁거세의 고기잡이의 어미 노파 아진의선 (阿珍義先)에게 발견되었다. 배를 기슭으로 끌고가 보니까 배 안에는 길이 20척에 너비 13척이나 되는 커다란 궤가 한 개 실려 있었다. 아의진선은 그 배를 끌어다 수림(樹林)밑에 두고, 아버지께서는 인연이 있는 곳에 도착하거든 나라를 세워 살라고 빌어 주셨습니다. 항해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붉은 용이 나타나 배를 수호해 주면서 여기까지 끌고 와 주었습니다.' 말을 마치자, 그 아이가 지팡이를 끌며 두 종을 데리고 토함산에 올라 석총을 만들고 7일동안 머무르면서 성중에 살만한 곳이 있는가 바라보니, 마치 초생달같이 둥근 봉강이 있어 지세가 오래 살만한 곳이었다. 내려와 찾으니 바로 호공의 집이었다. 이에 모략을 써, 몰래 숫돌과 숯을 그 곁에 묻고 이튿날 이른 아침에 그 집 문 앞에 가서 이것이 우리 조상 때의 집이라 하였다. 호공은 그럴 리가 없다고 하여 서로 다투어 결단치 못하고 관가에 고하였다. 관에서는 무엇으로써 너의 집임을 증명하겠느냐 하니, 동자가 말하기를 '우리는 본래 대장장이었는데, 잠시 이웃 시골에 간 동안 다른 사람이 빼앗아 살고 있으니 그 땅을 파보면 알 것이라'하였다. 그 말대로 파보니 과연 숫돌과 숯이 있으므로 그 집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때 남해왕이 탈해의 슬기 있음을 알고 맏공주로 아내를 삼게 하니, 이가 아니(阿尼)부인이었다.탈해는 궤짝 뚜껑을 열고 알의 껍질을 깨고 나왔다 하여 탈해(脫解)라 불렀다. 또한 까치에 의해서 아진의선(阿珍義先)에게 배가 발견되어 궤가 열렸다고 해서 까치의 글자 작(鵲)에서 조(鳥)를 빼서 성을 석(昔)으로 했다. 뒤에 신라의 제 4대왕이 되었으며, 탈해 임금 또는 토해 임금이라 불렀다.가락국의 허왕옥가락국의 신하들이 수로왕께, 자신의 딸들 가운데 예쁜 처녀를 골라서 왕후를 맞이하도록 하뢰자, 수로는 하늘의 명령을 받들어 이 땅에 내려왔으므로 자기의 짝이 될 왕후도 하늘로부터 명령이 있을 것이라고 하고는, 9간 가운데 유천간과 신귀간을 각각 망산도와 승점으로 보냈다. 홀연히 바다 서쪽에서 붉은색의 돛과 기를 단 배가 오고 있어서, 유천간이 횃불을 올려 육지에 알리고, 신귀간이 대궐로 달려가서 왕께 아뢰니, 왕은 9간들로 하여금 맞이하도록 하였다. 왕후가 9간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라 나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배를 타고 떠나 증조와 반도를 찾아 얻은 다음, 이제 감히 용안을 가까이하게 되었습니다." 하고 이르자,왕은 "나는 성스러워 미리부터 공주가 올 것을 알고 신하들의 청을 따르지 않았소. 마침 공주가 스스로 왔으니 다행한 일이오."하고 드디어 혼인하여 두 밤을 지내고 하루 낮을 지낸 뒤에 그녀가 타고 온 배를 본국으로 돌려보냈다.왕은 왕후와 함께 수레를 타고 대궐로 돌아와서 왕후 일행의 처소를 정해 주고, 가지고 온 보물들은 내고에 두어서 왕후가 늘 쓸 수 있도록 하였다. 9간들의 명칭이 소인이나 농부들의 칭호와 같다고 하여, 아도를 아궁, 여도를 여해, 피도를 피장, 오도를 오상, 유수와 유천은 각각 유공과 유덕으로 고치고, 신천과 오천은 신도와 오능으로 바꾸고 신귀는 음은 바꾸지 않고 훈만 신귀라 고쳤다. 또 계림의 직제를 취해서 각간, 아질간, 급간의 품계를 두었으며, 주나라의 법과 한나라의 제도를 받아들여 관직을 정했다. 그리고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니 교화가 엄숙하지 않아도 위엄이 서고 정치는 엄하지 않아도 다스려졌다. 왕이 왕후와 더불어 하늘과 땅, 해와 달처럼 음양의 조화를 이루었다. 혼인하던 해에, 왕은 곰을 얻는 꿈을 꾸고 태자 거등공을 낳았다. 189년 3월 초하루에 왕후가 157세의 나이로 죽으니 온 백성들이 슬퍼하며 구지봉 북쪽 언덕에 장사하고서, 왕후의 은덕을 잊지 않으려고 배가 들어온 바닷가를 기출변, 처음배에서 내린 도두촌을 주포촌이라 하고, 바지를 벗은 언덕을 능현이라 하였다. 왕은 왕후의 죽음을 슬퍼하다가 10년 뒤에 1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연오랑과 세오녀신라 제 8대 아달라(阿達羅)왕 즉위 정유(丁酉)에 동쪽 바닷가에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의 부부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연오가 바다에 가서 마름을 따고 있는 중 홀연히 한 바위가 나타나 그를 싣고 일본으로 가 버렸다. 그 나라 사람들이 보고 이는 비상한 사람이라 하여 왕을 삼았다. 세오가 그 남편이 돌아오지 않는 것을 괴이히 여겨 찾아다.
The Wall 2 감상문(동성애에 관하여)목차1. 서 론2. 본론(줄거리)3. 결 론(감 상){서론동성애라는 용어가 우리나라에서 자주 사되었던 것은 아마도 88올림픽을 전후 해서정도일 것이다. 그 이후 국내에서도 AIDS 환자가 급속히 증가하였고 더불어 동성애란 용어도 같이 언급되었으며 그에 따른 관심도 대단했다.당시 에이즈는 동성애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 주로 발병하였으므로 동성애자는 세기의 저주인 에이즈를 불러일으키는 역겹고도 위험한 존재로 인식되었다.물론 최근에 와서는 동성애가 직접적 원인이 아니라는 결과가 밝혀졌고 동성애에 대한 젊은이들 사이의 인식도 많이 너그러워졌지만. 당시 인식의 여파와 한국에서의 보수적인 성에 대한 태도에 의해 아직까지 그들이 세상을 향해 나설만한 여건은 마련되어지지 못하고 있다.이러한 의미에서 The Wall Ⅱ는 동성애자들을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다수의 어쭙잖은 정의에 의하여 세상의 벽에 부딪힌 사람들의 모습과. 세상 속으로 한 걸음 나아가려는 그들만의 노력을 보여준다.{본론The Wall Ⅱ(If These Walls Could Talk 2/1999/미국)는 ‘더 월’의 후속작으로 낙태에 관한 이야기에 이어 이번에는 동성애를 다뤘다. 또한 동성애자들 중에서도 남성이 아닌 여성을 담고 있으며 이들을 동물과 같은 미개의 것으로 보지 않고 편견 없이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영화 The Wall Ⅱ 는 한 집을 배경으로 1960년대부터 2000년까지 시대를 거슬러 올라오며 미국사회 레즈비언 커플의 성적정체성을 독립된 세 편의 이야기를 통해 보여주고자 한다.첫 번째 에피소드는 200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아이 갖기를 간절히 원하는 동성애자 커플의 이야기이다.이들은 신문에 실린 정자판매소 광고를 보고 정자를 구입, 인공수정하여 임신에 성공하게되는데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그녀들이 사회적 편견과 사회적 인식에 대항하여 사회 속으로 한 걸음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그러나 임신의 성공과 함께 동성애자들의 승리로 이야기가 끝이 나고 있지만 한편으로 사회의 편견이라는 커다란 벽 앞에서 겪게될 아이를 생각하면 이들의 행동이 옳은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가령, 동성커플이 게이던가 레즈비언인가에서 출발하여 이 부부가 형성한 가족관계의 발달, 사회적 승인, 자원의 출처, 금전, 성, 권력을 처리하는 방식에 있어서 여러 가지 문제점을 내포한다.대인관계상의 지지가 한정된 채 커플이 된 동성애 커플과 동성애 부모는 대체로 어떤 사회적 지원도 받지 못하며. 이성간의 배우자들은 의료보험, 수업료 할인, 조직체의 특혜 등 처음부터 사회적 혜택을 입지만, 장기간의 동성애 부부는 어디에도 등록을 할 수가 없다. 동성애 커플의 자녀는 수업료 할인이나 다른 의료혜택을 받을 수 없다. 대부분의 종교기관이나 교육기관까지도 동성연애자들이나 동성애 부모에게는 지지를 보내지 않는다.두 번째 에피소드는 레즈비언 그룹이 바라보는 또다른 동성애자 트렌스에 대한 시선을 보여준다. 레즈비언 자신들은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내려 노력하고 있지만 자신들이 사회에서 당한 앙갚음이라도 하려는 듯 또 다른 소수 트렌스에게 조롱과 야유를 보내고 있다.편견의 벽은 그들에게도 있었던 것이다.세 번째 에피소드는 196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50년을 동반자로 살았던 두 명의 여성노인에 관한 이야기다. 파트너가 죽자 주인공 여성은 집의 소유권은 물론이고 함께 저축했던 재산과 두 사람의 추억이 담긴 유품마저 모두 파트너의 유가족에게 빼앗기는 상황에 처한다. 법이라는 다수의 정의가 소수의 동성애자들에게 얼마나 가혹한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으며 법의 역할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게 한다.즉 법은 동성애 혹은 이성애가 정의로운 것인지, 동성혼을 인정해야 하는 것인 지에 대한 윤리적, 이념적 논쟁에 앞서 개인의 생존과 사회적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이들을 어느 정도, 어떻게 보호해줄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결론이상은 영화속에서 보여지는 동성애에 관한것이다. 그러면 이제는 시선을 현실인 우리에게 돌려 보도록 하자동성애는 이제 남의 나라 문제만은 아니다. 도시청년의 60%가 동성애적 성향을 갖고 있다는 미국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96년에 이미 우리나라도 추정 수치로 40만 명의 동성애자들을 가진 나라가 되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입에 담는 것조차 금기시 되어 오던 동성애가, 이제는 대학가에서 서클 활동을 통하여, 국내 통신이나 인터넷의 동성애 사이트를 통하여 공공연하게 확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