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무엇인가?- 역사학, 올바르게 이해하기인간들은 여러 가지 행위를 통해서 많은 사건들을 만들어 내었다. 또한 문자를 만들어 내면서 인간들은 그러한 일들을 문자, 즉 글로 남기고 싶은 욕구가 생기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되어진 '역사'라는 개념은 가장 오래된 개념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인류가 살아온 각 과정들을 안다는 의미에서 역사는 우리가 인문학을 공부하면서 가장 기초적으로 공부하여야 하는 부분일 것이다.역사학은 역사학의 개념을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언급한 E.H 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그의 저서로부터 출발한다. 이 이후로 그의 저서는 역사학을 공부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으로 읽어야 할 책이 될 정도로 역사학의 바이블로써 지난 수 십 년 간 많은 역사가들뿐만 아니라 인문학을 공부하는 많은 학생들에게 읽혀져 왔다. 이러한 E.H Carr가 제시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매우 복잡하고도 다양한 형태의 답변이 나올 수 있는 문제이다. 중세시대 이후 여러 학파들을 거치면서 역사학은 발전하였고, 역사학을 바라보는 관점, 즉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의 해답도 많이 바뀌게 되었다.이번 레포트에서는 4권의 책 - 「고양이 대학살」,「누구를 위한 역사인가」,「오리엔탈리즘」,「그들에게 국민은 없다」- 과 「메멘토」라는 비디오를 통하여 현재사적 의미에서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몇 가지 부분에서의 역사학에 대한 고찰을 해보려 한다.(1) 역사적 사실로 남는 것은 어떤 것일까?우리는 과거에 있었던 모든 사실을 역사라고 부르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사실들을 모두 역사화 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역사란 과거에 대한 하나의 담론이며 범주상 과거와는 다르다.‘)라고 한 역사가는 이야기한다. 역사학라는 개념은 인간이 활동했던 것에 관하여 연구를 하고 재구성해내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과거인 들이 행했던 모든 행동들을 관찰하여 연구할 필요는 없다. 분명 많은 과거 사건들 중에는 역사가가 생각하기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내용, 즉 론이 존재하고 있지만 어떠한 기준이나 가치관으로 방법을 택해야 하는지는 알리지 않는다. 이데올로기 영역은 각 시대의 이데올로기에 따라 역사적 사실은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적 의미란 원래부터 과거에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외부에 의해 과거에게 부여된 사실이라고 이야기한다. 역사는 항상 누군가를 위해 존재해 왔고, 그러한 누군가는 기득권층이었다는 사실이다. 역사가들에 의해 전달되는 우세한 입장은 사회 구성 내에서 보다 강한 지배집단의 이해를 대변하고 있다고 까지 보아도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관점에서 비추어 보았을 때 우리는 어떠한 과거 사건들이 역사화 되어지는 것일까?영화 「메멘토」에서 15분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린 주인공이 과거의 사실들을 기억이 날 수 있도록 자신의 몸에 문신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주인공은 자기가 15분 동안 겪은 일들 중에 그의 아내를 죽인 살인자를 찾는데 도움이 될만한 단서를 문신으로 남겼던 것이다. 이러한 것처럼 과거의 사실을 역사화 즉, 후세 사람들에게 남길 만한 ?꺼리?로 분류되는 기준은 ?필요성?인 것이다. 필요성에 의해 역사화 된다는 것은 역사가가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과정을 역사에서 찾는다는 것이다. 영화 「메멘토」에서는 그러한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은 ?아내를 죽인 살인자를 찾아야 한다.?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고, 그러한 목적에 부합되는 필요성에 의해 자신이 겪었던 사건들을 문신 또는 기록으로 남겼던 것이다.이러한 역사서술은 중국대륙에서 쓰여졌던 역사서술의 방식에서 그 맥락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옛 중국에서는 역사가 현재 모든 활동의 심판 기준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현실을 과거를 통하여 바라보려는 목적성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필요에 의해 역사를 서술하였던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당시 유교 사상이 지배층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널리 퍼져 있었던 중국은 유교적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하게 된다. 당시의 역사가들은 사관(史官)이어서 관아에 속해있는 관료들이었다. 그'신'중심의 역사관을 갖게 되었다. 쉽게 말해 역사학이 '기독교적 성향'의 과거 사실만을 골라 역사적 사실로 취하는 시대가 도래하게 된 것이다. 이 때에도 마찬가지로 기득권자에 의해 역사가 만들어지게 된다.위에 예를 든 것처럼 과거 사실들은 오랫동안 기득권을 쥐고 있었던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 선택되어지고 역사화 되어 왔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는 대표성을 갖거나 이야기로서의 역사는 될 수 있었지만 현재의 일반인들과 공유할 수 있을만한 내용의 역사는 아니었다. 그 후 역사가가 정치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좀 더 폭넓고 자유로운 사고가 가능해짐으로써 한층 더 모든 이들이 수긍할 수 있는 역사로 변모해 나간다.(2) 역사를 바라보는 두가지 관점 - 미시사(신문화사)와 거시사포스트모더니즘적 사고방식이 등장하면서 거의 모든 학문에서 그 학문을 바라보는 시각이 훨씬 근대화되고 구체화되었다. 그러한 흐름 속에서 역사학도 예외는 아니었다.이러한 시대의 흐름에 맞춰 등장한 역사적 서술을 우리는 「미시사」라고 부른다. 미시사적 연구의 대표적인 사례를 우리는 「고양이 대학살」이라는 로버트 단턴(Robert Darnton)의 책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 책은 역사학에 관련된 책이라고 말하는 것이 어려울 정도로 지극히 전체사에서는 동떨어져 있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총 6장으로 이루어져 있는 책의 내용은 모두 18세기 프랑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그 어떤 곳에서도 역사적으로 이름이 알려졌을 만한 중요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 않는다. 이야기의 대상이 되는 것은 민담, 한 부르주아의 수기, 경찰의 감시기록, 백과전서 서문 등이며, 사건이라 할만한 유일한 것은 어느 인쇄공이 남긴 기록을 통해 우리에게 간접적으로 전해져 올뿐이다. 그나마 ‘별 것 아니어 보이는’ 기록들은 그 때 당시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과 거리가 멀어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단턴은 자신이 역사를 보는 관점이 새로운 역사서술의 한 방식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이야말로 새로운 역사적 진실에 한걸음고 이들의 사회적 성격을 규명하여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쓰기 시작했으며 정치?외교사보다는 사회?경제사를 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은 역사는 물질적인 토대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고 따라서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가 아닌가에 따라 계급을 규정했다. 그들은 계급적 투쟁을 역사의 중심으로 보고 역사적 사건들을 계급적 투쟁의 일환으로 간주하여 해석한다. 또 다른 흐름인 아날학파 역사가들은 변화하는 정치적 사건들보다 수백 년 간 변화하지 않는 장기 지속의 흐름, 예를 들면, 먹고 입고 살아가는 조건 등이 피지배층에게 갖는 의미가 더 크다고 보고 그러한 일상생활의 사회?경제를 역사의 대상으로 삼았다.사회사적 연구도 상당한 비판을 받게 된다.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은 하부적인 면 즉, 물질적인 면을 지나치게 강조한 것으로써, 그리고 아날학파 역사가들은 장기지속 아래에 개인들의 생활인 아래층위를 구속하였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정치사 중심의 역사서술에서 좀 더 보편적인 것으로 생각이 바뀌었긴 하지만 아직까지도 역사라는 큰 틀 아래 개별적인 것들은 포함이 되지 않았다. 이러한 욕구에서 사회학적 연구보다 한 걸음 더 발전적?대안적 형태가 바로 신문화사(新文化史)이다. 이는 말 그대로 문화를 통해 역사를 바라보려는 시도이다. 문화라는 것은 더 이상 정치나 경제 같은 거대한 체제에 구속되어져 사회 다른 현상과 관련을 맺지 않는 순수한 무엇이 아니다. 문화 그 자체가 지금까지의 정치, 경제, 사회적 틀을 대신하여 역사를 바라보는 새롭고 신선한 틀이 되는 것이다. 계급을 결정하는 것은 계급의식 또는 계급문화이고, 농민들의 삶을 수백 년 간 지배해 온 의미와 상징의 체계. 즉 문화를 해독함으로써 그들의 삶에 대해 진정으로 알게 된다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새로운 역사연구 흐름을 미시사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이것은 그전까지 행해져 왔던 역사서술 방식과 대비시키기 위한 명칭이다.과거의 정치사나 사회사는 큰 범주에서 사회를 거시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라면 신문화사는 개별적인 인간들의 한다. 중국의 여러 소국들이 진나라를 보는 관점과 진나라의 관점, 이 두 가지의 관점이 그것이다.현재 세계사에서는 진시황이 중국 전역을 장악했다고 하여, ‘진시황’이라고 말하며 춘추전국시대로 혼란스러웠던 중국을 ‘통일’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진나라가 자신들이 역사를 만들 수 있게 되자 그들이 행했던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해 미화시킨 부분이 없지 않을 것이다. 영화 영웅은 그러한 입장 반대편에 서서 역사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진시황이 택한 법가 사상은 당시 정신적인 면을 강조해오던 다른 많은 소국들에 의해 비판받기 충분했었다. 또한 자신의 막강한 군대를 이용해, 오로지 중국을 통일하겠다는 신념하나로 다른 국가들을 말 그대로 ‘정복’한다는 것은 당시의 중국적인 정서에 맞지 않았다. 만약 진나라의 중국대륙 통일의 의도가 실패로 돌아갔다면 세계사는 지금과 많이 다른 방식으로 쓰였을 것이다.이처럼 역사를 보는 관점은 어떠한 사상이나 가치관을 통해 보느냐에 따라 과거 인물들이 그야말로 ‘영웅’이 될 수도 있고 ‘대역죄인’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역사를 보는 관점을 어떻게 갖느냐가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서구가 만들어낸 ‘오리엔탈리즘’에서 찾아볼 수 있다.‘오리엔탈리즘’을 “서구가 오리엔트에 관계하는 방식으로서 서양인의 경험 속에 동양이 차지하는 특별한 지위이자, 주체인 서양이 동양을 타자화하는 과정에서 생기 산물이다.”)라고 정의하였다. 즉,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단어는 서양사람들의 관점에서 바라본 동양의 모습이라는 뜻이다. 서양 사람들은 오리엔탈리즘적 사고방식을 통해 동양을 정적이고 신비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동양은 비개방적이고 폐쇄적이며 신비적인 곳이라고 말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동양의 서술에 그치지 않았고, 서양과 대비하면서 동서양을 흑백논리로서 이분화하였다. 당시 서양은 자본주의가 급속히 발달하면서 근대화되어가고 있었고, 돈이 곧 가치평가의 기준이었다. 그러한 입장에서 동양있다.
Ⅰ. 도 언‘동양사상’은 서양의 개인주의에 반하는 중국의 유가, 인도의 불가 등의 사상을 비롯한 여러 가지 말한다. 이러한 동양사상을 우리가 탐구하여야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첫째는 동양사상이 곧 우리나라의 역사나 사상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 한반도는 중국에게 무력적으로 지배당하기도 하고, 문화적으로도 크게 영향을 당할 수밖에 없는 중국 근방의 소국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하여 우리나라의 역사나 문화의 발전을 언급할 때에는 중국의 이야기가 빠질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둘째로는 우리나라 땅의 위치는 동양에 속해있기 때문이다. 인접국가인 중국이나 일본과 경제적 정치적 교류를 나누며 우리 동양세계를 21세기의 새로운 중심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우리의 목표일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지향점을 달성하기 위해서 동양의 역사적 흐름과 동양적 사상을 잘 인지하여야 하는 것이다.이러한 동양의 역사적 흐름들을 잘 이해하고, 이것이 우리나라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탐구하고, 현재 우리 사회의 성격을 파악하여 앞으로 어떤 식으로 현재의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나 장점들을 보완,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나가야 할 것이다.여기에서는 동양사상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유학에 대해서 유학을 집대성 한 공자의 일생을 중심으로 분석해보고자 한다.Ⅱ. 본 론- 『공자, 인간과 신화』와 동양사상의 이해....공자는 기원전 약 500년경에 중국의 노나라에서 태어나 당시로서는 장수인 70여 년을 살다 죽었다. 그러나 2500년이 지난 지금 까지 그의 탄생은 잊혀지지 않고 있다. 무엇이 공자라는 한 인간을 아직까지 기억하게 하고 그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공자가 살고 있었던 시대는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굉장히 혼란스러웠던 춘추전국시대였다. 왕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각국의 제후들은 다른 나라의 땅을 노리고 있었고, 국내에서도 정치적인 반란이나 폭도들이 일어나 매우 불안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계층들은 일반 서민들이었다. 지배 계층들은 서민들의중국 전역으로 전파되었고, 지배 계층의 존립 목적이 백성들을 위한 것이라는 관념은 곧 상식이 되어 지배계층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지배 계층은 자신들이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싶어했기 때문에 공자의 사상을 변형, 왜곡시키려 노력하였다.이런 이유로 하여 공자에 관한 확실한 사상의 기록은 남아있지 않는 듯 하다. 기원전 100년 경 만들어진 ‘史記’에서 공자의 정통 사상을 조금 엿볼 수는 있으나 이 역시 저자인 사마천의 주관적 의견이 개입되었을 여지가 크기 때문에 알 수 없고, 그의 언행들을 묶어 놓은 ‘論語’ 역시 단순히 그의 언행을 모았을 뿐이지 그의 주장이나 정통적 사상을 알 수 있다고 하기에는 곤란하다. 또 공자를 신적으로 미화(美化)시키기 위하여 공자의 제자들이 여러 가지 전설적인 일화를 삽입해 넣음으로써 그의 행적들 중 전설의 부분을 가려내는 일 역시 쉽지 않다고 할 수 있겠다.우리는 공자를 다루기 이전에 동양, 즉 중국 역사의 시초와 그 발전사를 다뤄볼 필요성이 있다. 중국의 역사는 商왕조부터 시작된다. 商은 발달된 청동기 문명을 가지고 있었으나 정치경험이 부족한 周왕조에게 무력적으로 굴복하고 만다. 周는 정치경험의 부재로 ‘봉건주의적’ 정치방식을 채택하고 시행하였으나 몇 대가 지난 후 서로의 상호협력성이 부족하여 이내 멸망하게 된다. 이러한 周사회의 몰락은 곧 고대사회의 붕괴, 그전까지 유지해오던 덕, 천명, 효제등의 전통적 고대 중국 사상과 가치관의 몰락을 의미하였다. 그 후 춘추전국시대가 시작되었고, 공자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공자의 고향인 魯나라는 소국이었기 때문에 여러 강대국에 휘둘리게 되었다. 이는 지식이나 논리보다 힘을 중시하는 윤리까지 등장하게 되면서, 서민들을 갈수록 고달파져만 갔다.이러한 나라에 살고 있었던 공자는 어린 시절의 자신을 미천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교육도 받았고 음악과 궁술에 관심을 가질 만큼 여유가 있었던 것을 보면 그의 조상은 하급이나마 귀족이 아니었나 한다. 공자는 젊은 시절 창고지기나 목것이라 공자는 하고 싶어했으나 그의 제자들이 반대하여 무산된다.공자는 완벽한 인간이었다. 그는 슬퍼할 때 슬퍼할 줄을 알았으며, 남을 꾸짖어야 할 때 꾸짖었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일화들은 공자라는 인물을 단순히 그의 감정을 다른 외부적인 요인없이 제대로 표현할 줄 아는 한 인물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그의 제자는 22명쯤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초기 제자 중에서는 제자라기보다는 단순한 친구로서 그를 따르는 사람도 몇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사람들이 평범한 한 인간다운 인간이었던 공자를 맹목적인 문도로 만들었던 것에는 이유가 있다. 첫 번째로 공자의 매력적인 성격이었을 것이다. 그는 거의 모든 분야에 통달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으나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했으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 알았다. 이것은 그의 권위를 더욱더 빛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 다른 정치적인 이유로 그의 추천장과 교육이 출세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사실 공자의 제자중 21명이 관직을 얻었으며 1명은 그 자리를 거절했다고 한다. 이는 당시 공자의 사상이 거의 모든 백성들에게 적용되는 일괄적인 도덕률이었기 때문에 이를 무시할 수 없었던 지배계층이 백성들에게 인심을 얻기에 좋은 효과를 거두었을 것이다. 공자의 초기 제자들은 사회 개혁에 힘을 썼지만, 후기 제자들은 사회 전체의 개혁보다는 개인의 수양에 더 힘을 쓰게 되었다.공자는 교육이라 해봐야 귀족들의 가정교육이 거의 다였던 사회내에서 일반 평민에게도 최소한의 성의만 보이면 제자로 맞아 들였기 때문에 기인이라고 하기에 충분했다. 그의 교육목표는 단순한 출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인간이 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훌륭한 정치는 기술이 아니라 인성과 덕을 길러야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道를 깨우치라고 늘 강조했다. 그의 교육의 방법은 단순히 어떠한 주제에 대해 논쟁을 하고 질문을 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으며 그런 방법을 통하여 그들의 유대는 더욱 깊어졌다. 항상 겸손했던 공자는 이러한 이유로 자 중요히 여긴 것은 독서였다. 그의 수많은 인용어구와 묵가조차 그를 책으로만 공부한 독학파라고 인정하는 데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정치적, 사회적 위기가 닥친 인간들은 인간의 본래 인간성을 회고해 보면서 인간 자체의 이해보다 근원적인 것을 의논하게 되었다. 공자는 이것은 天이라고 명명하였다. 이러한 天은 공자의 종교관을 엿볼 수 있는 좋은 매개체이다. 공자는 절망에 빠졌을 때 ‘天이 나를 버렸다’ 라고 말하면서 어느정도 종교에 대한 신념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이것이 天이 절대적인 것이거나 항상 정의의 편에 서서 덕을 지지해 준다는 것은 아니었다. 天에 대한 더 이상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天이라는 종교적 신앙은 깊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 공자는 ‘군자의 관심은 도를 행하는 것이다. 빈곤 따위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사람이 道를 행하는 것이 중요하지 다른 외부적 요소는 중요하지 않다고 하였다. 즉, 종교적인 부분에까지 자신의 생각을 투자할만한 여유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앞에서도 말했듯 공자는 인간의 행복과 존엄성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던 사람이다. 그는 서민들이 비참한 춘추전국시대의 시대상을 앞선 周 왕조의 문화를 단순한 추종이 아닌 상식에 맞게 찬양하였다. 공자가 생각한 세상은 백성을 덕으로 인도하고 예로써 질서를 바로 잡는 세상이다. 四海同胞로 대표되는 이런 생각은 민주주의적인 사고와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그러나 오늘날의 민주주의와 공자의 민주주의가 다른 점은 공자가 그런 사회를 접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지나치게 백성을 신뢰했다는 것이다. 공자는 모든 잘못은 군주에게 돌렸고 군주가 선량하고 유능하기만 하다면 백성은 할 바를 다한다고 했다.하지만 이렇게 공자가 발전시켜놓은 유학사상은 공자 직후에 성립되어 유가를 통렬히 비난하고 나선 묵가를 통해 보면 공자 이후의 유가는 이미 상당한 변질을 가져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묵자가 유가의 운명론을 비난하고 나섰다는 점이나 지나치게 옛것을 무조건 모방한다고 비진나라 멸망이후 몇 년의 혼란기를 다시 거친 후 한고조(유방)가 유교적 이념으로 다시 한번 중국을 통일하면서 결국 유가의 사상이 그 이후 중국을 지배하게 되고 멀리 유럽까지 알려지게 된다.하지만 중국이 근세에 들어오면서 서구문명과 부딪치게 되고, 중화민국이라는 새로운 성격의 정부가 탄생하게 되면서 유교적인 사상은 많이 소멸되고 만다.- 『동양철학, 서양철학과 어떻게 다른가?』의 내용과현대판 유교윤리에 대해서...[ 책의 내용 중 10장과 11장의 내용을 요약하여 현대사회에서 유교를 어떻게 해석하여야 하는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요 몇 년간 사회적으로 큰 변동이 일어남에 따라 본래 20세기 초.중반까지 유지하고 있던 유교적 가치관의 새로운 정립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유학사상 즉 공자의 사상은 오늘날 우리들이 살고 있는 민주 사회에 비추어 보았을 때 어떠한 문제점이 있을까? 첫 번째로 공자의 학설은 ‘당대’의 사회적 변화만을 철학적으로 설명하였다. 또 유학사상가들이 언급한 민주주의의 개념과 현대의 개념이 다르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현재에 가장 중요한 ‘경제’의 내용을 그때엔 고려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단순한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조화만을 생각하면 되었었다. 그렇기 때문에 시중지도(時中之道) - 시기에 적중해야만 가치가 있다는 뜻 - 적인 이론을 창조해내어야 한다. 또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로 확대시켜 새로운 시대의 가치관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가족윤리에도 연결지어진다. 전통사회에서의 혼인이나 가족이란 그 시대가 농경시대였기 때문에 농작하는 것과 관련된 추수나 파종시기의 축제 예식이 많았다 하지만 농촌 중심의 사회도 급박하게 변하게 도시 중심의 산업 사회로 이전되어지면서 새로운 가족윤리의 정립이 필요하게 되었다.Ⅲ. 평 론 및 분 석위와 같은 공자의 사상은 오늘날 우리에게 여러 가지 교훈점을 준다.첫째로 현재 ‘복지정책’에 부합되는 인간의 행복과 존엄성에 대한 내용은 우리에게도 큰 시사점을 제공해 준다. 현재도 우리나라의 정책을 보면 개개인의 복지다.
1. 도언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중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으며 성장하였다. 중국의 선진 사상이나 제도를 쉽게 접할 수 있었고, 이는 곧 한반도 여러나라에게 있어서 큰 도움이 되었다. 이러한 중국의 문화 전반에 걸쳐 영향을 끼친 사람과 서적을 고르라면 서슴없이 공자(孔子) 와 공자의 언행들을 모아 놓은 논어(論語) 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논어는 유가(儒家)의 성전(聖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서< 대학(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 >의 하나로, 중국최초의 어록이기도 하다. 고대 중국의 사상가 공자(孔子)의 가르침을 전하는 가장 확실한 옛 문헌이다. 논어는 공자와 그 제자와의 문답을 주로 하고, 공자의 발언과 행적을 이야기하는 식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논어는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공자가 직접 자신의 사상을 서술해 놓은 것이 아니라 그의 제자들이 그의 언행과 행적을 기록 해 놓은 것에 불과하므로 해석을 어떤 방식으로 하느냐가 상당히 중요한 논쟁거리가 된다. 현대인들은 이것을 단순히 학문적 대상이나 통속적 처세훈으로 읽어왔지만 이 책에서는 선(禪)을 통해 다각적으로 논어를 살펴봄으로써 논어를 보다 논어자체로 이해 하는 데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2. 논어와 선 의 요약과 해석논어는 논어를 읽어 그 자체에서 해석해 낸다고 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보다는 그때그때 상황에 맞추어가면서 읽어야 한다. 즉, 논어를 서양의 책 읽는 방식, 즉 실증적이거나 객관적인 자세로 읽는 것이 아니라 논어가 지시하고 있는 바를 정확히 감지해내는 방향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중국식의 '선'은 "큰 도는 들어가는 문이 따로 있지 않고 수없이 많은 길이 있다.'라고 정리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유교를 교학 자체로 배우는 것은 무척 고루하고 딱딱할 수 있다. 유학은 실천으로써 생활 안에서 스며들게 하여야 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교학으로써 유학은 효나 예와 같이 지극히 윤리적인 것을 모두 규범화, 구체화시키게 된다. 하지만 논어를 '선'11)이 그 대표적인 글귀인데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비는 아비답고, 아들은 아들답다 라고 해석이 된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상당히 딱딱한 인간관계를 강조하는 비인간적인 덕목들이 될 수도 있지만, 이는 그때 당시의 사고방식으로는 무위가 작용한 자연스런 선의 흐름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특히 논어에서 강조되었던 효(孝) 의 이야기에서는 살아 계실 때나 돌아가셨을 때나 예 로써 대하라고 하였다. 이는 어찌 보면 무척 고루하게 느껴질지 모르나 자신을 나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에 대한 기본적인 예라는 측면에서 무위의 자연스러운 흐름이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장례식에서의 예를 사치스럽고 웅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검소하게 하여 장례식에서 슬픔을 다함께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정리한 것에서 그 근거를 더욱 명확히 알 수 있다. 이러한 여러 사례들을 통하여 논어란 유학의 사상을 담아내고 있는 책은 고루하지만 무위로써 채워진 유(有) 란 것을 알 수 있다.유학사상, 노장사상 그리고 불가사상의 세 가지의 사상의 이야기는 간단하게 공자와 석가가 씨름을 하는데 노자가 그 심판을 보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공자와 석가가 씨름을 하면 공자, 즉 유학의 힘이 훨씬 세기 때문에 공자가 승리하게 된다. 하지만 심판인 노자는 '공자가 삼세(三世)를 알지 못하니 석가가 포복절도하여서 진 것이다.'라고 하여 석가편을 들어주게 된다. 유교의 사상은 윤리적, 정치적, 현실적인 반면 노장사상은 종교적, 탈정치적, 초현실적, 은둔적인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유학이나 노장사상만으로는 한계점이 있다는 것을 잘 말해주며, 이 유학은 불가의 '공'이라는 세제를 통해 씻어내야 만이 '선(禪)'에 다다를 수 있음을 이야기 해준다.논어에서 '안다'라고 하는 것은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자체를 의식하고 있는 것이 아는 것이다. 라고 정의하였다. 서양에서는 앎에 있어서 실재하는 지식의 소유를 중요시한 반면에 동양에서의 앎의 정의는 부지(不知), 의 문제를 다루었다기보다, 도(道)를 얻는다는 것 자체가 생사에 얽매이지 않은 탈각한 상태라는 것을 언급하면서 죽음에 대해 남성적인 단호함과 별것 아니라는 평범함을 말하고 있다. 어찌되었건 생사나 지·부지에 대해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삶 자체를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논어를 선(禪)의 안목에서 바라본다는 것은 실증적이고 인간중심적이고, 합리주의적으로 보기보다는 앞서 말했듯이 자연스러운 해석을 통해 생활 속에 녹여야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선의 입장에서 논어를 바라본다면 그 의미가 한층 깊이 있어지게 된다.중론의 주장은 A는 A이다라는 명제를 세우면 그 명제는 부정되어 A는 A가 아닐 때에만 진실이라는 것이다. 이는 유와 무를 초월한 것이며,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것이 진실이 되는 세계이다. 즉 부정을 반복하다가 부정될 수 없는 것을 진리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중론의 의미이다. 이와 반대로 유식이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부정적인 면이 아니라 긍정적인 면에 역점을 두어 진리를 찾는 방법이다. 이는 삼성삼무성설로 잘 표현될 수 있는데, 삼성삼무성설이란 우선 처음에 무언가를 긍정하면 다음에 그것을 부정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의타기성과 반계소집성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의타기성은 다른 것에 의해 일어나는 마음이고, 반계소집성은 다른 것과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두루 헤아려서 생각나는 마음이 모인 것이다. 또 유식에서 말하는 원성실성이란 긍정도 부정도 미칠 수 없음을 나타내며 이 자체가 원만하게 성취한 참된 존재의 방법을 나타내고 있다. 번뇌의 집착으로부터 해방되면 자신이 보고있는 그 자체로 해석할 수 있게 된다. 의타기성에 있어서 변계소집이 아닌 것, 즉 원성실성 자체로 돌아가는 것에 있다.본격적으로 논어의 입장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한다. 우선 중국 현재 유학에 큰 영향을 미친 불교에 대한 전래상황을 알아보아야 한다. 전한말 후한초에 이르러 불교가 전래되었다. 그 이후 송대에 들어 선종만이 남고 불교공자 가정의 분위기는 교양이나 정신적인 예식과 같은 제의와 전통을 중요시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공자의 가르침을 유학 그 자체라고 말할 수는 없다.유학에서 중요하게 여겼던 천(天)의 사상은 인간에 즉하여 있고 언제나 접할 수 있다. 초월적이면서도 내재적인 것이다. 라고 서술하여 인간과 자연의 연속적인 인간관으로 표현하였다. 천(天)사상의 기원에 대한 연구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천에 대한 앎 자체가 알면 알수록 점점 멍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천 자체를 아는 데에는 인간의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천을 대할 때의 태도를 바꿔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천의 명을 아는 것을 지천명(知天命)이라고 한다. 공자는 50세 때 천명을 알았다고 했다. 이러한 천명은 세 가지 방법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첫 번째로 천이 인간에게 부여한 인간 불성의 작용이고 두 번째로 이 세상에 태어난 사명 그리고 세 번째로 인간의 한계를 알아차리는 운명론적인 관점이 그것이다. 공자는 인간이 본래의 성으로 돌아가면 천(天)에 다다를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천은 인간에 내재되어 있고, 천(天)은 초월성과 내재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60세에는 이순(耳順)은 남의 말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다. 란 뜻으로 다른 사심이 없이 있는 그 자체를 듣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깨달음과 이해의 최고봉으로 일컬어진다. 70세에는 종심(從心)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이는 마음이 뜻대로 행하여도 도(道)에 어긋나지 않는다. 이것은 주관적 마음과 객관적 법칙이 합치된다는 것뿐만 아니라 자연스럽게 자기 본래의 성(천성(天性))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정확한 중용을 할 수 있는 단계라 할 수 있겠다.진정한 의미에서 현실적, 인간적, 실존적인 인간의 자각은 공자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공자는 인(仁)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 지(知)는 사람을 아는 것이라고 표현하면서 인간관계에 역점을 두었다. 이처럼 도(道)라고 하는 것은 구체적인 사람의이다. 논어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서, 인의 내용을 담아내고 있는 논어는 무조건적으로 의무적이거나 엄격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는 유학이 주자학으로 변모하면서 인간 욕망을 부정하는 주자학의 사상에 따라 논어도 그렇게 해석된 것이었다. 오히려 논어에는 편안하고 관대한 면이 있는 것이다. 이는 공자가 자신이 가장 아끼던 제자가 죽은 후 공자가 통곡을 했다는 구절에서 자연스러운 인간성을 너그러이 긍정하는 논어의 사상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인은 극기복례를 통하여 자기 사심을 극복하고 자신을 다스려야 얻을 수 있다.유교와 노장사상의 차이점에도 주목을 하여야 한다. 유교의 대표주자로 불리는 공자도 제자의 탈정치성, 즉 노장사상에 대해 감탄을 했다고 한다. 이는 논어 안에 노장적 성격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노장사상의 요점은 만물제동으로 표현할 수 있는데 이는 유한한 만물을 초월하여 모든 것이 동일하다는 생각이다. 대표적으로 장자는 미인과 나병환자를 동일하다고 하여 미추의 구분을 두지 않았고, 이외에도 유와 무, 선과 악, 생과 사를 구분하지 않아 유한한 존재들을 초월하였다. 또한 노장사상은 유학의 유위 즉 인의예지를 부정하며 인위나 작위를 없애야 한다는 무위중심사상을 이야기했다. 노자와 장자의 사상은 미묘한 차이를 보이는데 노자는 자연 그대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한 반면 장자는 유위를 행하는 유위자연을 주장했다. 또한 노자는 물은 유에서, 유는 무에서 나온다고 표현했지만 장자는 그럼 무는 어디서 나오는가? 에 의문점을 가졌고 인식론적으로 파고들었다.유학은 송대와 명대에 들어 각각 주자학과 양명학으로 발전하게 된다. 사실 주자학은 주자(朱子)가 정리하기 이전에 정명도나 정이천과 같은 사람에 의해서 주자학의 핵심 내용인 성즉리(性卽理)와 같은 사상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주자는 본격적으로 송대 신유학의 흐름인 이기이원론을 주장하게 된다. 이 이기이원론은 본성은 리(理) 이고 작용하는 주체는 신체라고 하는 기(氣) 임을 주장하면서 리 자체가 순수하여야 한다고 역설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