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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율곡의 사회의식과 개혁사상
    율곡의 사회의식과 개혁사상1. 들어가며- -학문은 그것의 체계 자체로 평가받을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현실에서의 적절한 유용성을 지닐 때 비로소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이것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자연스럽게 학자들의 현실참여에 대한 평가도 결정될 것이다. 즉, 일반적으로 학문 자체로의 순수성을 강조한다면 학자들이 현실 사회의 참여보다는 연구와 후학양성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는 특히, 적극적으로 현실 정치에 뛰어들어 자신의 학문적 성취를 정책으로 연결하거나 그런 활동을 통해 정관계 고위직을 얻으려는 교수, 이른바 ‘폴리페서(polifessor)’를 부정적으로 평가할 것이다. 반면, 상아탑 등 사회와 유리된 공간에서의 이론에만 갇혀 있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에서는 학자들이 자신의 학문적 성취와 개인적 양심을 바탕으로 적극적으로 현실에 참여하여 사회를 개혁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조선 시대 최고의 유학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후자의 입장에 가까웠다. 즉, 율곡은 그 당시 주류 학문이었던 성리학을 공부하는 목적이 관념적 지식의 만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행동을 보다 성실하고 참되게 하기 위하여 그 시비와 선악을 정밀하게 분석하는데 있다고 주장한다. 율곡은 학문이 참다운 실학으로서 역할해야 함에 대해 선조(宣祖)에게 올린 계사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자계황씨(慈溪黃氏)가 말했습니다. ”몸소 실천하는 것을 바르게 하는 삶은 성리(性理)를 정밀하게 연구한다. 성리를 정밀하게 연구하는 것은 몸소 실천하는 것을 바르게 하기 위한 설계이다. 그런데 성리를 정밀하게 연구하고서 도리어 몸소 실천하는 것을 불문에 붙이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 말은 매우 절실하니 전하께서는 유념하시기 바랍니다.)또한 그는 또 다른 상소문을 통해 “학문은 올연(兀然)하게 단좌(端坐)하여 종일토록 독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학문은 다만 일용처사(日用處事)에 있어서 하나하나 이아닌지를 능히 스스로 알지 못하므로 독서하여 그 이치를 구하는 것입니다”)라고 밝히며, 합리적 정신을 바탕으로 한 학문적 실천을 강조하기도 하였다.이 글에서는 이러한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실천가이자 경세가로서의 면모를 중심으로 율곡의 사회 현실에 대한 인식과 그에 따른 정치의 정도에 대한 사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즉, 방대한 그의 사상 중에서 실천과 합리성을 강조한 경세론에 집중하여 그가 살았던 16세기 조선의 사회 현실에 대해 어떠한 인식을 하였고, 또 그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하여 학자이자 사회적 병폐를 개혁하고자 했던 사상가로서 어떠한 방향으로 국가를 이끌어 가고자 했는지에 관한 서술이다. 그리고 율곡의 경세론이 오늘날의 현실에 어떠한 의의를 갖는지에 대해서도 고찰하고자 한다.2. 율곡의 사회의식과 그를 토대로 한 개혁사상(1) 율곡의 기본적 의식 세계① 실천을 강조하는 실(實)의 추구앞서 밝힌 것과 같이 율곡은 현실 참여에 대한 노력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며, 그 자신 스스로가 현실의 폐단을 바로 잡고자 적극적으로 현실에 참여하고자 하였다. 그는 ‘수기치인(修己治人)=내성외왕(內聖外王)’을 추구하는 유학의 본래 목적을 바탕으로 하여, 정치 일선에 섰을 때는 일시(一時)에 도를 행하여 만민이 안락한 생활을 누리도록 하고 물러나서는 만세에 가르침을 베풀어 학자들로 하여금 대오각성하게 하는 이른바 ‘진유(眞儒)’를 만세의 사표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율곡에게 있어 과거에 합격하기 위한 경전 공부에만 치중하는 일련의 집단 뿐만 아니라 사화라는 질곡을 겪은 후 현실정치에 대하여 소극적이고 방관자적인 입장으로 일관한 사람들 또한 비판의 대상이었다. 그들 모두 참된 진유가 아니었던 것이다.② 민본주의 정치의식동서고금을 망라하고 위정자(爲政者)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그 사회에 속한 집단 구성원들의 안위와 평온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율곡이 살던 16세기의 조선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율곡이 주군으로 모신 선조 수업을 체계적으로 받지도 못하고 마음의 준비 또한 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거기에 잇따른 사화(士禍)를 겪은 뒤의 혼란한 상황속에서 사림파와 훈구파의 갈등과 대립이 지속되고 있었기에 선조로서는 두 정치세력간에서 중심을 잡기에도 버거운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율곡은 자칫 선조가 백성에 대한 선정(善政)을 베풀지 못할 것을 우려해 지속적으로 민본주의적 이념에 대해 의견을 피력했다. 그는 임금은 나라에 의지하고 나라는 백성하게 의지하며, 왕자(王者)는 백성을 하늘로 삼고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으니 백성이 하늘로 삼는 것을 잃으면 나라는 의지할 데를 잃어버리게 됨)을 강조했다. 이러한 율곡의 민본주의 사상은 “백성이 가장 귀중하고, 사직(社稷)이 그 다음이고, 임금은 가벼운 것이다. 그러므로 백성의 신임을 얻어야 천자가 된다”)라고 말했던 맹자의 민본주의 사상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③ 인권 의식율곡은 일반적인 백성들을 중시하는 민본주의 정치의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천시받고 소외된 계층에 대한 인권의식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율곡이 오늘날 흔히 받아들여 지는 의미에서의 ‘인권(人權)’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았겠지만, 당시 시대에 비추어 볼 때 비교적 높은 인권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즉, 율곡은 천민(노비), 서얼(庶孼), 사졸(士卒) 등의 인권과 권익을 신장시키기 위한 제도적 보완의 필요성을 강조 했다. 그는 노비의 직분이 비록 천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생명과 인권도 마땅히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서얼에 대해서는 그들을 활용해야 할 인적 자원이라고 주장함과 동시에 서얼에 대한 차별대우를 사회의 잘못된 관행으로 간주했다. 또한 사졸들의 복지와 인권에 관심을 가졌으며, 사졸을 잘 싸우게 하려면 우선 그들이 살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는 평범한 사실을 강조했다.)(2) 당대의 현실에 대한 진단과 그 해결책당시 백성들이 곤란을 겪고 있는 폐단에 대해 율곡은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일족절린(一族切?)하는 폐단이 첫째이고, 진상(進 폐단이 셋째이고, 역사(役事)가 공평하지 못한 폐단이 넷째이며, 이서주구(吏胥誅求)의 폐단이 다섯째입니다.)먼저, 일족절린의 폐단이란 백성들이 관리들의 극심한 부정부패를 견디지 못하고 몰래 도망을 갔을 경우, 그 친척들이나 이웃들에게 납세의 의무를 이전시켜 연속적으로 백성들의 납세 부담이 증가되는 것을 말한다. 진상번중과 공물방납의 폐단이란 각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는 제도인 진상과 공물의 실행 과정에서 그 지방에서 생산되지 않는 특산물을 부과하는데서 오는 폐단을 말한다. 즉, 납부해야 되는 특산물을 구하지 못한 백성들을 대신하여 관리들이 특산물을 대납해주고 그것의 수십 배에 해당하는 값을 빼앗아갔던 것이다. 다음으로 역사가 공평하지 못했다는 것은 군정(軍政)의 문제였다. 즉, 생계를 유지하는데도 바쁜 백성들이 군역에 종사한다는 것은 또 하나의 착취일 뿐이었으며, 그렇다고 군역 대신에 군포(軍布)를 납부하는 것 또한 적지 않은 부담이었던 상황에서 군역을 담당하는 관리들의 횡포와 부정이 잇따랐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서주구의 폐단이란 관리들의 뇌물수수가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있어 벼슬도 뇌물이 아니면 승진이 되지 않고, 소송도 뇌물이 아니면 판결이 나지 않는데 따른 폐단을 일컫는 말이다.이러한 사회적 폐단을 해결하고자 율곡은 ‘개공안(改貢案)’, ‘생이원(省吏員)’, ‘구임감사(久任監司)’라는 세 가지의 핵심적인 개혁 방안을 제시했다.) 먼저 진상?공물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서 공중 예산, 특히 사치성 소비에 대한 지출을 줄이고, 궁중의 재정 담당 부서를 재조정함과 동시에 백성들이 진상?공물로서 각 지역의 특산물을 납부하는 대신에 쌀로 납부할 것을 주장했다. 군정의 문란과 하급 관리들의 부패에 따른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서 율곡은 관리들의 복지수준을 높일 것을 주장한다. 오늘날과 비교하자면 IMF 이후 국가공무원들에 대한 보수 체계를 현실화하자는 주장과 비슷한 것으로, 그 당시 관리들이 보수 체계에 문제가 부정부패로 이어진다고 본 것이다. 즉, 율곡은 고정 급여가 없하는 대신에 향후 발생되는 부정부패에 대해서는 더욱 더 엄단할 것을 제시했다. 한편, 백성들이 납세의 고통과 관리들의 폭정을 견디지 못하고 떠나버려 황폐화된 고을이 많아짐에 따라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행정구역 통폐합을 통해 관리의 수를 줄임과 동시에 백성들의 공물 및 요역의 부담도 함께 줄일 것을 제안했다. 또 지방 행정 조직에 대한 정확한 감독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감사의 임기를 늘릴 것도 주장했다.또한 율곡은 다양한 시무책을 지속적으로 제시하였는데, 그 중에서 그가 48세가 되던 해에 선조에게 올린 「계미육조계(癸未六條啓)」가 가장 체계적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여기에는 어진이의 등용, 군대 양성, 국가 재정의 확보, 변경 수비의 강화, 전투용 말의 준비, 백성의 교육과 계몽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시무책 외에도 율곡은 공공기관 노비의 고통 해소, 서자의 벼슬길 허용, 노비의 해방, 언로의 개방 등의 정책을 건의)하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앞서 밝힌 대로 소외된 집단에 대한 율곡의 인권 의식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서 당시로서는 상당히 획기적인 것이었다.3. 나오며민본주의 사상과 인권의식을 토대로 현실의 폐단을 지적하고, 그러한 폐단을 개혁하고자 했던 율곡의 노력은 오늘날의 현실에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가장 먼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애민(愛民)의 정신이다. 국가나 사회를 통치하는 위정자에게 있어 애민의 정신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위정자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정치란 다양한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고 중재하여 최대다수의 사람들의 행복을 위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며, 그것의 기저에는 집단의 구성원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자리잡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에서 정통 유가의 사상에 기반하여―물론 민본주의적 정신을 강조하는 것이 유가의 사상 뿐만은 아니다―민본주의적 정신을 바탕으로 백성의 생활 개선에 대한 고민을 모색하고, 근대적인 인권 개념이 대두되기 이전에 소외된 집단에 대해 관심을 보여 그들을 일반 구성원 집단으로 포용다.
    인문/어학| 2007.12.30| 4페이지| 1,500원| 조회(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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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평]렉서스와 올리브나무
    토머스 프리드먼, 『렉서스와 올리브나무』, (창해, 2003)프리드먼의 세계화 주장에 대한 비판적 고찰 :『렉서스와 올리브나무』를 중심으로- -1. 들어가며냉전 시대의 종결이후 새로운 국제 체제의 양상에 관한 다양한 정의가 있었다. 그 중에서 1990년대를 지나는 동안 대다수의 공감을 이끌어 냈던 것은 냉전의 종식이라는 뜻을 담은 ‘탈(脫)냉전’이나 후쿠야마의 자신감 넘치는 ‘역사의 종말’도 아니었고, EU를 비롯한 ‘다극 체제’도 아니었다. 20세기 말과 21세기 초입의 오늘날을 규정하는 영예를 안은 단어는 바로 ‘세계화’였다. 물론 이전의 ‘냉전’ 체제가 역사상 최초의 현상이었던 것과는 달리 세계화는 역사상 최초로 나타난 현상은 아니었다. 그것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의 시기에 이미 자유무역의 기치아래 광범위하게 나타났었다. 그래서 프리드먼은 ‘세계화 2.0’)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오늘날의 세계화와 이전의 세계화를 구분한다. 즉, 현재의 세계화는 두 번째 세계화이고, 1900년대의 첫 번째 세계화 시대가 세계를 ‘큰’ 사이즈에서 ‘중간’ 사이즈로 줄여 놓았다면, 1980년대 후반이후의 두 번째 세계화 시대는 세계를 ‘중간’ 사이즈에서 ‘작은’사이즈로 줄여놓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두 번째 세계화가 어떻게 20세기 말에 이르러 냉전 체제를 대체하는 새로운 국제 시스템으로 자리 잡았으며, 아울러 어떻게 거의 모든 나라의 국제관계와 국내 정치의 틀을 형성하고 있는지를 고찰)한 책이 바로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책 전반에서 느낄 수 있는 미국에 의한 세계화의 정도를 감안할 때 『제너럴모터스(GM)와 올리브나무』가 아닌 것이 의외일 따름이다―이다.이 책에서 말하는 프리드먼의 주장은 명쾌하다. 먼저 세계화의 원동력은 3가지 민주화이다. 즉, 기술의 민주화(통신방식의 변화), 금융의 민주화(투자방법의 변화), 정보의 민주화(세계의 움직임을 인식하는 방법의 변화)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원동력으로 인하여 세계의 많은 장벽들이 허물어지고 있는 상황을 입어야 하는데, 이것은 국영 기업의 민영화, 재정 적자의 회피, 무역 자유화, 자본시장 규제 완화 등을 말한다. 또한 이러한 세계화의 흐름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므로 좋든 싫든 세계화의 흐름에 뒤처지지 않도록 모두가 참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와 같은 시각이 담겨 있는 『렉서스와 올리브나무』를 중심으로 하고, 여기에 속편의 성격을 지닌 『세계는 평평하다』를 참고하여 이러한 프리드먼의 세계화 담론에 대한 비판적인 고찰을 하고자 한다.2. 프리드먼의 세계화 담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1) 세계화가 유일한 답인가?세계화는 거부할 수 없는 거대한 역사적 흐름이며,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이른바 대세이자 유일한 답인가? 프리드먼에 의하면 그렇다. 그는 현재의 흐름은 계속 유지될 것이며, 세계화는 불가항력이라고 확신한다. 더 나은 생활수준을 원하는 매우 강력한 인간의 열망과 매우 강력한 기술이라는 두 가지 추진력이 세계화를 밀고 있기 때문에 세계화를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두 번째 추진력 즉, 매우 강력한 기술이라는 측면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세계적인 ‘통합과 교류의 확대’는 지속될 것이다. 전세계적으로 가까워진 심리적?물리적 거리는 더욱 더 밀착되고 동시적인 하나의 흐름을 형성할 수 있을 정도로 연동화 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첫 번째 추진력에 대해서는 그것이 갖는 의미 자체는 인정할 수 있지만 그것이 꼭 지금의 세계화를 정당화하고 지속적으로 추진시켜 나갈 것이라는 데에는 동의할 수 없다. 물론 사람들은 더 나은 생활수준을 원하는 강력한 열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더 나은 생활수준을 향유하기 위해서 한 가지의 방법만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즉, 더 나은 생활수준이라는 추상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는 다양한 방법이 있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것 하나만이 마치 유일한 방법인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큰 오류이다. 앞에서 언급한 ‘황는 전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단 하나의 사이즈로 이루어진 ‘황금 구속복’을 입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개별 나라들의 경제 발전도나 구조가 상이한 상황에서 전면적 개혁을 통하여 자유무역이라는 기준에 적합하도록 체질을 개선한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꼭 그렇게 해야만 할 이유 또한 없다. 특히 프리드먼식의 유일한 세계화 모델은 이미 그 사이즈의 황금 구속복을 입고 있는 선진국들은 많은 혜택을 받고 있지만, 황금 구속복을 입지 못하고 있는 대다수의 후진국들의 경우 그것을 입게 되면 오히려 더 큰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면에 대하여 장하준 교수는 “만일 일본 정부가 1960년대 초 자유 무역을 주장하는 경제학자들의 말을 따랐다면 렉서스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또한 수출지향적인 자유무역의 성공이라고 평가받는 우리나라의 경우에 있어서도, 자유무역적 요소만으로 성공한 것이 아니라 정부 주도의 특정 산업의 육성과 지원, 관치금융에 가까운 금융자본 통제 등의 보호무역적인 요소를 병행하여 추진했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경제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다. 결국 오늘날 ‘통합’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점점 더 발전하는 세계화의 흐름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며 앞으로도 확장될 수 있겠지만, 단 하나의 사이즈만이 존재하는 황금 구속복을 입기 위하여 벌이는 자유무역이라는 세계화의 흐름은 저항할 수 없는 것이 아닐뿐더러 오히려 적절한 수정이 가해져서 다양한 사이즈가 준비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2) 세계화가 민주화와 평화에 진정으로 기여할 수 있는가?프리드먼은 자유무역에 의한 세계화가 평화와 민주화에 기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른바 분쟁방지에 관한 ‘골든 아치 이론’을 내세운다. 이것은 “어느 한 나라의 경제발전 과정에서 맥도날드 햄버거 체인이 들어설 정도로 중산층이 충분히 두터워지는 단계에 이르면, 그 나라는 맥도날드 국가가 된다. … 맥도날드 국가 사람들은 더 이상 전쟁을 원치 않으며 햄버거를 사는 줄에 서기를 선호한다. 그이다. 그들은 상품과 서비스를 적시에 배달하여 그로 인해 향상된 생활수준을 즐기기를 바란다”)는 주장이다. 골든 아치 이론이든 델의 충돌예방 이론이든, 결국 프리드먼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자유무역의 확대가 전세계적 평화를 가져오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경제적 성장을 이룬 나라에서, 그리고 그 경제적 성장이라는 것이 부의 불균등의 극대화로 나타나지 않는 전반적 성장을 이룬 나라라면 그 사회는 보수화되고 안정화 될 가능성이 높다. 또한 나라들간의 경제관계가 밀접해지고 복잡해지면 일종의 공동 운명체로서 서로 협력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경제적 성장을 어느 정도 이상 이룬 나라들 간의 전쟁 가능성이 낮다는 것은 아니다. 먼저 경제적 풍요를 누리고자 하는 국민들의 바람이 다른 모든 사안에 비해 항상 최우선시되는 것은 아니다. 렉서스를 소유한 사람일지라도 자신의 올리브나무에 대한 높은 가치 부여로 이에 대한 모독과 멸시를 참을 수 없는 경우에 얼마든지 충돌이 발생할 수 있다. 또한 나라간의 분쟁은 꼭 국민들의 의사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것과는 관계없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으로, 프리드먼은 위의 두 가지 이론에서 명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결국 세계화가 이러한 평화적 공존을 가능케 만들었다고 주장하지만, 더 나은 생활을 누릴 수 있게 해준 경제적 풍요라는 것이 꼭 그러한 세계화로 인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중국의 경우, 골든 아치와 델의 생산 공장이 있지만 그것이 황금구속복을 입는 프리드먼식의 자유무역을 상징한다고는 할 수 없다. 오히려 공산당 주도의 정책적 견제로 인해 큰 효과를 거두고 있다는 지적이 정확할 것이다. 결국 골든 아치와 델의 생산 공장이 있는 곳이라고 해서 분쟁이 없는 것도 아니며, 만약 그곳의 갈등과 분쟁의 가능성이 다른 곳보다 더 낮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꼭 맥도날드와 델의 영향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3) 세계화는 미국을 위한 것인가?프리드먼은 세계화가 무너질 수 있다는 싹쓸이(winner take all) 현상으로 인해 극대화되어가는 소득불균형을 비롯해서 산재해있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세계화는 프리드먼의 자신감과는 반대로 1970년대와 같은 보호무역의 도래라든지 세계화에 대한 더욱 극심한 반대라는 현상에 직면할 것이다.그런데 지속가능한 세계화와 관련해서 주목해야 할 것은 미국의 역할에 대한 프리드먼의 견해이다. 즉, ‘자애로움을 갖춘 패권국 미국’을 위한 세계화가 되어야 하며, 지속가능한 세계화라는 것이 결국은 미국의 국익에 부합되는 최적의 선택이라는 주장을 제기하는 것이다. 이러한 프리드먼의 견해는 책 전반에서 나타나며 아예 마지막 제4부를 세계화가 미국의 국익에 부합하며 따라서 선도적으로 그것을 지속가능하게 만들어야 함에 대한 정책제안까지 하고 있다. “세계 시민으로서 우리의 직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후퇴하고 있다기보다는 진보하고 있다고 항상 믿게 해주는 것이다. 그럴 때 세계화는 지속가능하다. 그리고 그것을 보장하는 커다란 책임과 많은 기회에 있어서, 미국과 비견될 나라는 없다.“)라는 자신감 섞인 태도는 물론이고, 심지어 테러와의 전쟁에 나서면서 대국민 담화를 통해 대통령이 말했음직한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도구를 갖추고 있다. 우리는 또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하는 책무를 안고 있다.”)라는 표현까지 거침없이 사용하며 미국을 위한 세계화이기에 미국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렉서스와 올리브나무간의 균형을 늘 유지할 수 있는 건전한 글로벌 사회의 가장 모범적인 모델인 미국은 ‘세계화가 지속가능하기 위해서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언제나 항상 최상의 여건에 있어야만 한다’는 식의 사고로 인하여 “세계화=미국화”라는 공식을 만들어 전세계적인 반(反)세계화 운동이 촉발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금과 같은 세계화를 앞으로도 지속시키기 위하여 개발도상국과 같이 아직 황금 구속복을 입지 않은 국가들에게 더욱 그것을 입히려고 강요하는 것은 결코 옳지 못하다. 그들에게 황금 구속복을 입히려고 하면 할수록것이다.
    독후감/창작| 2007.12.29| 4페이지| 1,500원| 조회(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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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평]오제명 외, `68․세계를 바꾼 문화혁명`, (길, 2006)
    [20세기 후반의 역사] 서평오제명 외, 『68?세계를 바꾼 문화혁명』, (길, 2006)‘문화혁명으로서의 68운동’에 대한 고찰- -1. 들어가며1968년 5월 프랑스 학생운동가의 체포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68운동)은 그 당시는 물론 이후의 70년대와 80년대,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큰 파장을 몰고 온 운동이었다. 68운동의 진원지였던 프랑스나 독일의 경우 정치적 사건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약 한달 만에, 그것도 정치?사회적으로 획기적인 법적?제도적 변화가 거의 없이 끝나고 말았다. 더욱이 68운동 이후 프랑스에서는 우파 정권이 들어섰고, 독일에서는 사민당이 집권하지만 혁명 세력의 요구를 기대만큼 수용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정치적으로 단명하였고 또한 실패한 68운동이 왜 그 당시는 물론 오늘날까지도 큰 의의를 가진다고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68운동이 지닌 문화적?사상적인 힘 때문이다. 즉, 68운동을 주도했던 세력들의 요구는 비록 현실정치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이후의 사회 전반에 있어 개혁적이고 민주적 그리고 탈권위적인 활력을 불어넣는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냈다. 저자들은 바로 이러한 점에 주목한다. 이들은 68운동이 “정치적으로는 단명한 사건이었으나, 이 운동의 세례를 받았던 사람들의 의식과 사고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침으로써 유럽 문화 전반의 지형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놓는 역사의 분수령”)이었다고 평가한다. 저자들은 68운동을 정치혁명의 측면보다는 문화혁명으로 이해하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 곳곳에 잠재되어 있던 변혁과 개혁의 욕구가 분출된 68운동이 사회 전반에 끼친 영향에 대해 살펴봄과 동시에, 그것이 오랜 시간동안 유럽 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이 책의 결론은 명확하다. 즉, 68운동은 하나의 이념에 사로잡히거나 또 다른 이데올로기를 지향하지 않았고, 이 운동의 주체는 즉각적인 정치권력의 장악을 목적으로 삼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68운동의 주체들은 낡은 체제를 전복할 가장 을 도모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68운동은 단순히 정치적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이후 유럽인의 삶에 끊임없는 변화의 원동력으로 자리잡았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렇게 문화혁명으로서의 68운동에 대하여 저자들이 주목한 부분에 대하여 살펴보고 이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고찰해보고자 한다.2. 문화혁명으로서의 68운동에 대한 평가(1) 기존의 질서에 대한 저항저자들은 우선 68운동의 주도세력들이 근대의 질서가 결국은 억압과 지배에 기반을 둔 것으로 이해했고, 이에 대한 전복을 시도했다고 말한다. 즉, 60년대 후반부터 제조업의 쇠퇴로 인한 유럽 전반의 경기 침체,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던 베트남 전쟁, 보수적이고 위압적인 사회질서 등의 사회적 환경 속에 놓인 68세대, 특히 고등교육의 양적 팽창으로 급속히 늘어난 대학생들이 점차 사회의 모순을 발견했고 기존의 권위와 질서에 대하여 강한 저항을 했다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반권위주의는 독일에서 권위적인 국가와 권위적인 인물에 대한 강력한 저항으로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아울러 기존의 대학이 권위주의의 상징이며 그 대학에 나치에 협력했던 인물들이 여전히 대학의 정교수로 자리잡고 있던 현실에 대한 분노의 표현이기도 했다. 이러한 사회적인 영향이외에도 68세대의 생애사적 측면의 특징의 결과로 인해 반권위주의적 형태가 나타났다는 시각도 있다. 즉, 68세대들은 전쟁 전후 상대적으로 분방했던 어린시기와 낡은 규범에 의해 통제된 1950년대의 청소년기를 보냈는데 이러한 서로 다른 경험은 단지 향유하던 자유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만이 아니라, 한편에서 이미 경험한 자유와 다른 한편에서 규범적인 행동 및 언어를 통해 준수되는 표준적인 일상 사이의 괴리를 자신의 몸으로 체험하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어린시기 상대적인 자유와 통제의 허술함 속에서 쌓은 경험에 기반하여 1950년대 이후 복귀되기 시작한 과거의 규범과 질서에 조소와 비웃음으로 반응하게 되었고, 68운동 또한 이러한 경험의 연장선상이라는 점을 지적한다.)이렇게 생애사적 경험에 사는 집단공동체를 통해 실제 현실로 나타나게 된다. 68운동의 주도세력 중에서도 급진적인 학생운동의 과정에서 설립된 주거공동체인 코뮌은 그들의 탈중심, 반권위, 자치(자율)의 실현이라는 측면을 잘 보여준다. 이들은 코뮌을 통해 남녀 성의 구분을 떠나 교대로 당번을 정해 청소, 설거지, 음식 준비, 육아문제들을 담당함으로써, 남녀의 전통적인 분업을 폐기하려고 했으며, 공동생산과 공동소비 등을 통해 연대와 집단의식을 회복하고 원시 공동사회의 복원을 꿈꾸기도 하였다. 이러한 코뮌에 대하여 이 책의 저자들은 “68운동의 이념이 새로운 주거와 생활 형태에 적용된 것이지만, 인간의 본질적 속성상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음”)을 지적한다. 이처럼 코뮌이라는 생활방식에서의 새로운 시도뿐만 아니라 68운동에서 전개된 성의 혁명, 문화적 해방 등 전체적으로 유토피아적 이상을 제시한 것들이 거의 모든 부분에서 지속가능하고 실천가능한 것들이 아님으로 인해 결국은 실패를 맞이하게 된다. 이처럼 68운동은 기본적으로는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기는 했지만 그것이 기존의 권력으로 제도화?정착화되는 결실로 나타나거나 기존의 제도권 질서의 몰락으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코뮌과 같은 직접실천에 의한 ‘일생생활에서의 혁명’을 몸소 실천했던 노력이었다. 바로 이러한 면모 때문에 68운동을 제도권 내로의 즉각적인 진입을 이루지는 못했지만―물론 독일의 경우 68운동을 겪으면서 녹색당이 활발하게 활동했고 결국 연립정부를 통해 정권을 잡기도 하였다―이후 지속적으로 기존 질서에 대한 저항과 시정의 결실을 차츰 이뤄갈 수 있었던 것이고, 저자들 또한 이점에 주목했던 것이다.(2) 새로운 사상의 흐름저자들은 68운동이 또한 20세기 전체 사유방식에 급격한 변화를 초래했다고 평가한다. 즉, 독일에서는 비판이론으로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해체론으로 표출된, 이성중심주의적 사유방식에 대한 근본적 회의라는 것이다. 먼저 독일의 경우 이성을 통한 역사의 무한한 진보라는 낙관주의의 폐기를 선언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노 등의 사상가들의 저작들에 나타난 일부 요소가 학생운동 세대에 상당히 매력적으로 보였으며, 이는 68운동의 이념들을 만들어나갔던 인물들의 진술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영향관계를 절대시하여 68운동이 비판이론의 실천이었다는 결론에 대해서는 부정한다. 오히려 68운동을 주도했던 학생들이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즉 불만스러운 현실을 타개할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비판이론의 일부를 끌어들였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말한다. 결국 “68운동은 비판이론의 현실적 적용이 아니라 저항의식을 가져다준 다양한 지류 가운데 중요한 한 요소”)정도로 보아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프랑스도 마찬가지로 68운동을 전후하여 해체론이 새로운 지적 담론으로 자리잡고 있었지만 68운동이 이러한 특정 사상을 채택하거나, 특정 이데올로기를 실현하려 했던 것이 아니었으며, 단일한 거대 이념이나 거대 사상의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 있었다고 지적한다. 장 폴 사르트르, 루이 알튀세, 미셸 푸코 등이 68운동의 사상적 형성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친 사상가로 거론되기도 하며 실제로 그들 자신이 68정신을 이론적 혹은 실천적 측면에서 충실하게 계승해나가면서 68정신의 핵심 계승자로서 평가받고 있기는 하지만 결국은 68운동이 체계적 사유의 틀을 벗어나 있었던 것이다.이처럼 독일과 프랑스를 비롯한 국가들에서 각각 비판이론과 해체론이 주도적인 사상적 입지에 있었기 했지만 68운동이 오직 그것들의 실제적 실천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화두로서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68운동을 거치면서 그 파급력과 호소력이 커진 다양한 사상들은 68운동 당시 뿐만 아니라 이후에 지속적으로 사회에 영향을 미치며 새로운 사상운동의 근간이 되었다.(3) 예술분야에서의 다양한 시도68운동을 문화혁명으로 평가하는 가장 큰 이유는 68운동이 단순히 정치적 항의와 비판이라는 전통적인 의미의 정치성을 넘어 새로운 관점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68운동 과정에서 다양한 문화적인 풍 삶의 전복을 촉진하려는 시도를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이념적으로는 기존의 체계, 질서, 가치관의 급진적 전복과 대중의 혁명적 의식의 고취를 지향하는 현실비판적인 선전적?선동적 허항 혹은 참여 예술이 부상한다. 동시에 예술 내적으로는 기존 질서에 영합한 제도예술, 개인적인 고립 상태에 빠져 있는 ‘부르주아’ 고급예술, 전통적인 예술규범을 준수하는 순수예술 등을 거부하고, 거리미술, 거리극, 해프닝 등과 같은 일반 관객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대중적 예술과 예술의 대중화를 시도한다.)이러한 정치성에 주목하여 저자들은 모든 형태의 억압과 지배, 소외로부터의 급진적인 인간해방을 내세웠던 68운동의 주도세력들이 예술 분야에서 시도했던 실험과 방법에 대해서 소개하고 평가한다. 먼저 영화에 있어서는 영화계가 영화 자체의 쇄신뿐 아니라 영화를 통한 기성사회의 전복을 꾀하는 혁명적인 시도를 감행했다. 특히, 정치적?사회적 의식을 가진 영화인들은 혁명적 영화단체를 결성하여 영화를 통한 변혁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했다. 미술분야에 있어서는 지배계급의 억압적 힘이 예술가에게 사회적인 특권을 제공하고 이로 인해 예술가가 눈에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갇히게 된다는 점을 미술계 인사들이 깨닫고 이를 개선하고 타파하기 위하여 거리미술과 설치미술 등을 통한 관객 참여의 놀이미술 등 미술의 대중화를 위한 노력을 펴게 된다. 연극계에서도 연극의 제도와 연극 자체를 바꾸려는 시도가 함께 이루어졌다. 집단창작과 같은 새로운 창작 방식에 의한 연극을 만들고, 관객과 배우가 분리된 기존의 객석 구조를 바꿔 관객들이 극에 쉽게 동화될 수 있게 하였으며, 일상극과 기록극이라는 새로운 내용을 시도하였다. 이외에도 대중음악의 경우 도발적이고 반항의 의미로서의 음악이 활성화되었고, 해프닝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참여예술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예술에서의 다양한 혁명적 사건들이 68운동 당시에만 잠시 발현되었던 것이 아니라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다양한 변용과 수용이 있었기 때문에 68운동이 비록 정치적
    독후감/창작| 2007.12.29| 4페이지| 1,500원| 조회(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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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웨덴 복지모델 형성의 역사적 배경
    스웨덴 복지모델 형성의 역사적 배경논문 요약본 논문은 1938년에 체결된 찰츠요바덴 협약과 1951년에 제안된 렌-마이드너 모델을 두 축으로 하는 스웨덴 복지모델을 조합주의적 성격의 계급타협으로 정의하고, 이것이 가능했던 역사적 배경에 대해 고찰한다. 스웨덴 복지 모델은 크게 세 가지 배경속에서 모색되고 발전할 수 있었다. 먼저 근본적으로 노동자?자본가?사민당 모두가 계급타협은 제로섬 게임이 아닌 상생할 수 있는 Win-Win 게임이 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하여 공감대를 형성했다. 둘째, 1870년대 이후 급속한 산업화의 결과 복지국가를 추진할 수 있는 경제적 여건이 조성되었고, 1920년대 말과 1930년대 초의 세계적 경제 공황을 겪으면서 노동자 계급의 인식 전환과 사민당 정부의 케인주주의적 정책 추진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극단주의를 피하고 대화와 타협을 위주로 하는 다원주의적이고 조직화된 사회문화적 배경으로 인해 계급간 타협이 보다 수월하고 원만하게 이루어 질 수 있었다.Ⅰ. 머리말지난해 9월 16일 스웨덴에서 실시된 총선에서 중앙당, 자유당, 기독민주당, 온건당 등 4개 당이 연합한 스웨덴 우파연합이 승리를 거두었다. 이로써 90년대 이래 12년간 집권해왔던 사민당은 정권을 넘겨야만 했다. 한때 복지국가의 전형처럼 여겨져왔던 스웨덴이지만 이제 전세계적인 신자유주의 조류 속에서 이전과 같은 국민적 지지를 얻는 데 실패한 것이다. 물론 지난해의 총선 결과가 곧 스웨덴식 복지모델의 영원한 종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지난 8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세계적 조류로 잡아가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물결 속에서 스웨덴식 복지모델의 또 다른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처럼 ‘스웨덴=복지제도의 천국’이라는 등식이 오늘날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20세기 초반 이래 복지국가의 한 전형을 제시했고 또 수 십년간 효과적으로 운영했던 스웨덴의 경험은 높이 평가 할만하다. 실제로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많은 국가들이 스웨덴 복지모델을 벤치마hn-Meidner) 모델'이라는 두 가지 큰 축에 의해 성립되었다는 점이다. 먼저, 1938년 블루칼라 노동자 전국 조직인 LO(Landsorganisationen; 노동자총연맹)와 사용자 대표인 SAF(Svenska arbetsgivareforeningen; 스웨덴고용주총연맹)가 체결한 찰츠요바덴 협약의 핵심 내용은 노조가 임금인상 요구를 자제하는 대신 임금협상을 개별기업 단위가 아니라 중앙조직으로 단일화하자는 것이었다. 이 협약의 체결을 통해 LO와 SAF로 대변되는 노동자 계층과 자본가 계층은 거듭되는 반복의 관계에서 벗어나 서로간의 협력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계기를 이끌어 냈다. 결국 이 협약은 “사회주의로의 조기 애행을 위한 ‘물질적 기반 확대’라는 사민주의 연합의 이해관심과 ‘생산성의 증대’라는 자본의 우파적 이해관심이 협력적?호혜적 관계를 이루면서 배태된 교섭의 산물“)인 것이다.다음으로 1951년 LO 소속의 경제학자였던 렌(Gosta Rehn)과 마이드너(Rudolf Meidner)에 의해 제안된 렌-마이드너 모델은 높은 수요는 인플레이션을 초래하기 때문에 높은 수요의 유지를 통해서는 완전고용을 이룩할 수 없다는 가정에 기초하여 연대임금제와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 그리고 엄격한 거시경제 정책 등을 제시했다. 물가안정과 경제성장, 완전고용,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을 통한 산업구조 재편 등을 동시에 추구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렌-마이드너 모델은 첫째, 제한적 재정정책을 통해 한계기업을 압박하고, 동일노동?동일임금의 연대임금정책을 통해 고이윤기업에서의 임금상승을 억제함으로써 인플레를 억제한다. 둘째, 한계기업에서 발생하는 실업은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으로 해결하고, 임금억제 대신 높은 수준의 복지를 제공한다. 그리고 높은 복지비용은 법인세보다는 소득세와 간접세를 통해 조달함으로써 기업의 부담을 줄이고 성장을 촉진한다. 셋째, 연대임금정책은 인플레 억제 외에도 노동자들간의 임금격차를 줄임으로써 계급연대를 촉진하는 한편, 제한적 제정정책과 더불어 산업의 합소기업이나 수공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은 낮은 임금을 받게 됨으로 인해서 노동자계급 내의 분화가 심화)된 것이다. 노동자계급 내의 이러한 분화는 자연스럽게 LO 내?외에서 노동자계급의 분화를 방지하는 대안들에 대하여 모색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노동자계급 내의 분화는 결국 노동자계급의 단결성을 저해할 것이며, 이것은 곧 계급성을 대표하는 영향력의 축소로 이어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 사이의 임금 격차가 심화되고 이것이 노동운동의 힘을 근본적으로 약화시키는 분열로 치닫게 하지 않기 위해서 다양한 대안들이 제시되었고, 실제로 이후 렌-마이드너 모델을 통해 연대임금제라는 결과로 이어졌다.)(2) 자본가계급(SAF)의 경우자본가계급의 경우에 있어서도 먼저 1932년 사민당 정부의 등장을 변화의 계기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더욱이 1932년에 이어 1936년에도 사민당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면서부터 사민당 정부의 중?장기적인 지속이 예견되었고 따라서 이에 맞춰 적절한 협력적 대안을 마련해야만 했다. 즉, 노동자의 권익 신장을 위한 노력을 중점적으로 추진할 사민당 정부와 갈등으로 일관할 것인가 아니면 협력적 타협으로 나아갈 것인가에 대한 선택이 필요했던 것이다. 물론 자본가계급, 특히 LO에 대항하기 위하여 1902년 결성된 SAF에게 있어 사민당 정부 이전의 보수당 정부 시절이 더욱 자신들의 이해를 관철시키기가 수월했을 것이다. 하지만 LO와 사민당의 이니셔티브에 의해 주도되었던 다양한 정책들, 그중에서도 특히 연대임금제도는 오히려 SAF의 이익에 크게 부합할 수 있다는 공감대가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 이것은 SAF 조직의 구성을 살펴보면 그 이유가 분명해진다. 전통적으로 스웨덴은 일부 대기업의 산업지배력이 높은 경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몇 해 전부터 존경받는 기업으로서 삼성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하나의 모델로서까지 제시되었던 발렌베리(Wallenbery)를 비롯한 소수 대기업이 스웨덴 경제를 이끌어 나갔던 것이다. 발렌베리의 경우 오늘날 스톡홀름증권 내세웠으며 또한 노동자들에게 공장에서의 노동위원회와 산업민주주의에 관한 법의 제정을 약속하는 등 급진적인 정책을 제시했다. 하지만 대공황의 영향(대공황을 비롯한 경제적 배경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속에서 대량실업 문제의 해결이라는 현실적인 요구를 외면한 비현실적이고 실현불가능한 유토피아로 받아들여져서 노조의 지지를 획득하는데 실패하였다. 오히려 보수당들은 볼세비키 혁명의 위험성과 재산의 사회화에 대한 위협을 역선전하여 사민당은 1928년 선거에서 가장 큰 패배를 경험하였다.)이러한 실패를 극복할 수 있었던 정책 캐치프레이즈가 바로 ‘인민의 집(Folkhemmet)’이다. 이것은 당시 사민당 당수였던 한손(Per Albin Hansson)이 1928년 의회연설에서 스웨덴의 장래를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경시하거나, 그 희생으로 이득을 얻거나 하는 자가 없으며,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거나 약탈의 대상으로 하지 않는 좋은 집”에 비유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한손은 국가와 가정을 연계하여 ‘인민의 집’이라는 개념을 제시함으로써 좋은 가정은 공동체와 연대에 의해 특징 지워지며 좋은 국가 역시 이러한 가정과 마찬가지임을 역설하였으며, 동시에 국가는 착취의 도구가 아니며, 경제력을 지닌 사회적 존재라는 점을 부각시켰다.) 이 개념은 가부장제적 함의 때문에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1930년대에 들어 사민당 내?외부에서 공감대를 얻었다. 그 후 1930년대에 사회복지부 장관을 역임한 묄러는 이 담론을 보다 구체화시켜 사회복지정책의 원칙을 제시하였고, 실제로 이를 정책으로 옮기는 개혁―인민 보험, 복지정책의 보편적 적용, 복지국가 운영의 지방분권화 등―을 추진했다.) 이 ‘인민의 집’ 이라는 개념을 통해 사민당은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복지를 위해 노력할 것임을 표현했고, 이러한 인식하에 이전의 급진적인 개혁이 아닌 실용적인 개혁 방안을 제시하면서 결국 1932년 선거에서 42%의 지지를 얻어 최초로 다수당으로 거듭나는 성과를 거두게 된다.이처럼 사문제였다. 이 중에서도 특히 실업문제가 심각했다. 앞서 서술한 것과 같이 1870~1910년 사이에 100만명 정도의 인구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는 등 대량의 이민으로 인해 실업 문제가 일정 부분 자연스럽게 해소되었던 것에 반하여 1920년대 들어서는 대량 실업 사태―실업률은 가장 높았던 1921년과 1922년에 각각 26.6%와 22.9%였다(자세한 수치는 아래의 표 참조)―에 직면했던 것이다.[표1] 스웨덴의 실업률년 도*************9*************0*************9*************7실업률(%)7.37.24.04.04.65.55.426.622.912.510.111.012.212.0년 도*************9*************4*************9*************1실업률(%)10.610.211.916.822.423.318.015.012.710.810.99.211.811.3자료 : 안재흥, “스웨덴모델의 형성과 노동의 정치경제”, 『한국정치학회보』, 제29집 3호, 1995. 502쪽.(2) 경제공황급속한 산업화의 후유증으로 발생한 인플레이션과 대량 실업의 문제는 경제공황의 발생으로 인해 더욱 그 심각성을 더하게 된다. 1929년 10월 24일에 뉴욕 주식시장의 붕괴로 시작된 최악의 경제공황으로 인해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등을 비롯한 선진국들은 물론 칠레, 브라질 등 남미의 여러 국가들까지 경제위기에 직면하였다. 수출위주의 산업구조였던 스웨덴에게 경제공황은 말 그대로 직격탄이었다. 경제공황의 여파로 실업률이 다시 크게 높아졌고, 생산마비에 따른 경제위기를 겪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위기는 곧 또 다른 기회이기도 했다. 즉, 경제공황으로 인하여 발생한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스웨덴 복지모델의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첫째, 노동자 계급의 인식 전환이다. 경제공황 이전만 하더라도 노동자 계급들은 기본적으로 생산합리화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그 당시 대량생
    사회과학| 2007.12.30| 11페이지| 2,000원| 조회(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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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실천적 이론가 정약용』 서평 평가A+최고예요
    삶의 고통과 그것을 이겨낸 다산의 의지와 소신-『실천적 이론가 정약용』을 읽고 -1. 들어가며- -여기 인생의 대부분을 고통과 인고의 시간으로 보내야만 했던 한 인간이 있다. 아홉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자신을 한없이 신뢰하고 사랑했던 임금은 자신의 뜻을 이루기도 전에 갑자기 서거하였으며, 6남 3녀의 자식 중에 모두 여섯 명을 땅에 묻어야 했을 뿐 아니라 교옥과 사화로 작은 형과 막내 형을 잃음과 동시에 그 자신도 18년간의 유배 생활을 감내해야 했던 인간. 그가 바로 조선 최고의 실학자이자 사상가로 추앙받는 다산 정약용이다. 물론 그에게도 영광의 시간은 있었다. 그는 남원 부사를 지낸 아버지 밑에서 6남 4녀 중 4남으로 태어나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고향마을 마재에서 부족한 것 없는 유년시절을 보냈다. 또한 스물두 살이 되던 해에 소과에 합격하여 처음 만났던 정조 임금 밑에서 충실하고 신뢰받는 신하로서 자신의 소임을 다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영광의 시절이었던 그의 인생 1막 이후에는 고통의 시간들로 점철된 2막이 기다리고 있었다.그런데 정약용이 겪었던 기나긴 고통의 시간보다도 그의 인생이 그 2막에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 더욱 놀라운 점이다. 그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절망하면서 인생을 낭비하지 않았다. 18년간의 고통스러운 유배기간 동안 학자로서 학문에 정진하고 백성과 나라를 위한 고민을 거듭하며 자신의 사상세계를 완성했다. 한 명의 학자를 넘어 한 인간으로서 굳건한 의지와 소신으로 시련을 이겨낸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와 같이 굳건한 의지와 소신으로 자신에게 닥친 시련을 이겨낸 정약용의 삶이 갖는 의미와 교훈에 대해 짚어보고자 한다. 다산 정약용의 평전인 『실천적 이론가 정약용』의 내용을 토대로 촉망받는 정치가로서, 학자로서, 그리고 가장으로서 살았던 그의 삶을 의지와 소신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살펴보는 것이다.2. 다산의 삶 속에서의 의지와 소신(1) 학문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정약용에 대한 평가에서 무엇보다도 중요시 되는 것은 바로 학자로서의 정도다. 그리고 이러한 저작의 대부분이 그가 유배생활을 하고 있을 때 완성된 것이기에 더욱 대단한 것인데, 이에 대해 금장태 교수는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정약용이 다산초당에서 완성한 저술은 경전과 직접 연관된 것이 232권이요, 경세론을 저술한 것이 96권이니, 이것만 합쳐도 328권에 이르는 거대한 탑이다. 그러나 그 경전해석이 열어 준 정밀한 고증과 창의적 사유의 세계가 지닌 사상사적 중요성과 경세론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제도개혁의 정신이 지닌 비중을 고려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거대한 탑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거대한 산봉우리로 솟아올랐다고 해야 할 것이다.)특히, 그는 변방의 유배지라는 극한 상황에서의 사색과 경험을 학문적으로 승화시키기도 하였는데, 그가 강진생활의 초기에 저술한 『상례사전』과 『주역사전』이 대표적이다. 스스로 고독한 시련에 처했을 때 죽음과 삶의 문제에 대한 인식을 진지하게 심화시키고, 롤러코스터처럼 자신의 운명이 순식간에 극에서 극으로 뒤바뀌는 상황을 경험하고 나서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면서 세상의 이치와 운명이라는 의미를 가슴속 깊이 진정으로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정약용 자신도 이 두 가지 책에 대해 자기 생명처럼 소중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는 『두 아들에게 보여 주는 가계(示二兒家誡)』에서 두 아들에게 “『상례사전』과 『주역사전』만 전하여 계승할 수 있다면 나머지 것들은 페기한다 하더라도 괜찮겠다”)라고 말할 정도로 강한 애착을 보이면서 이 두 책을 계승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아마도 그 자신의 절실한 경험과 남다른 사색의 깊이 속에서 완성한 것이었기에 다른 어떤 저술보다도 강한 애착을 가졌던 것으로 생각된다.이처럼, 촉망받던 관료로서의 지위에서 쫓겨나 교옥과 사화로 친형제를 잃고 가족과 생이별을 하여 생면부지의 낯선 땅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해야만 했던 상황에서도 굳건히 자신의 학문 세계를 완성해갔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정약용의 위대함에 대한 충분한 근거가 될 것이다.(2) 고통받는 백성들에 대한 연민과 관심우리는 그동안 사회적 불 ‘국민을 위한 정치’를 선보이겠다는 정치인들의 발언은 계속되며, 위압적이지 않고 유연하면서도 청렴한 싱가포르의 공무원들과 같은 국가 관료집단으로 변모하겠다는 정부의 발표를 많이 접했다. 하지만 이상은 이상일뿐 이 모든 것이 현실과는 무척 요원하고 공허하게만 느껴질 뿐이다. 물론 사회가 진보함에 따라 이전 세대의 사회에서 나타났던 사회적 문제들이 많은 보완과 발전을 거친 것은 사실이겠지만, 완벽한 이상향으로서의 제도를 완성하고 그것을 운영해 나가는 일은 어느 세대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항상 지속될 수 밖에 없는 사회적 과제일 것이다.다산이 살았던 300여년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오늘날의 잣대로 18~19세기 사회 특히, 정치 제도와 그것의 운영을 판단하는 것은 무리가 있겠지만, 많은 사회적 모순과 부조리가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다산은 고통받는 민생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들의 생활상에서 많은 분노를 느꼈다. 그는 정조의 촉망을 받던 시절, 보름이 채 안 되는 짧은 기간이긴 하였지만 경기도 북부지역으로 암행어사를 나간 경험이 있었다. 그곳에서 다산은 도처의 백성들이 모두 극한의 궁핍에 빠져 있음을 확인하고 시대적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고, 그러한 백성들의 고통이 대부분 지방 수령과 아전들의 탐욕과 착취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이렇게 고통받는 백성들의 모습을 라는 시를 통해 “줄줄이 고을문 걸어들어가서 입쳐들고 죽가마 앞으로 모여드네, 개돼지도 버리고 마다할 것을 사람으로 엿처럼 달게 먹누나”)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뒤 서른여섯 살이 되던 해에 황해도 곡산부사로 부임하게 되면서 다시금 참혹한 백성의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이때 다산은 많은 지식인들이 자신의 이상과 가치관을 현실 세계에 적용시켜 사회적 완성을 향해 나가고자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사회적 폐단을 바로잡고 자신의 이상을 실천하려 노력한다. 그는 스스로가 목민관이 되어 한 고을을 맡아서 실행하였다. 규정과 괴리가 있었던 척다. 이처럼 민생 행정을 위한 제도적 기틀을 정비하고, 민생에 실질적인 혜택이 돌아가도록 합법적이고 효율적 행정을 시행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다산의 이런 면모는 강진의 유배지에서도 이어진다. 그는 그곳에서도 고된 노동을 하는 수고로움에도 불구하고 관리들의 착취로 헐벗고 굶주리는 농민들의 참혹한 생활모습을 또다시 발견하게 된다. 이쯤되면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분노와 그로 인한 좌절을 겪게 될 것이다. 자신이 그동안 노력해 왔던 바와는 상관없이 눈 앞에는 고통받는 백성들의 현실이 놓여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은 당대의 정치 현실속에서 속절없이 관직을 박탈당하고 유배지에 있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썩을 대로 썩은 국가의 현실을 뒤집어 버리자는 과격한 혁명적 생각이 싹트거나 매일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모든 것을 포기하고 술로써 일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산은 자신의 불운을 탄식하고 주저앉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더 부정부패가 충만해지는 국가를 걱정하는 의로운 선비로서, 절망적인 고통속에 허덕이는 백성에 대한 애정을 가진 지성인으로서의 면모를 잃지 않았다. 자신의 학문 세계를 완성하는 데 있어 이러한 현실에 대한 고민과 통찰을 반영하였고, 구체적 실천 방안을 모색했다. 또한 경세서를 비롯한 저술 이외에 문학을 하는 데 있어서도 이러한 정신을 구현하고자 하였는데, 다산은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에 분개하지 않는 시는 시가 아니다.”라고까지 말하였다)고 한다.(3) 가족에 대한 애틋한 사랑정약용은 분명 사랑의 시를 노래하거나 시대를 앞선 자유인으로서 로맨티스트적인 면모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해 최종고 교수는 다산과 함께 같은 시대를 살았던 대문호인 괴테를 비교하여 “괴테는 여성에 대해 거침없이 적극적으로 표현한 지성적 쾌남형이었던 반면, 다산은 사랑의 감정을 윤리적으로 승화하여 절제된 방식으로 표현한 선비적 군자상이었다.”)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활활 타오르는 정열의 애정은 아니지만, 다산은 자신의 곤궁다하고자 하였다. 물론 집안의 형제 가운데 한 사람은 처형되고 두 사람은 유배를 가서 풍비박산이 된 상황에서 한창 공부에 전념해야 할 두 아들은 생계를 위해 농사를 배워야 하는 처지가 되었고, 아내는 식량이 떨어져 가재도구를 팔아서 써야 하는 형편이었기에 경제적 곤궁을 가져오게 한 책임을 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가장의 공백으로 인하여 가족을 경제적 곤궁으로 몰고간 책임 그 이상으로 정신적으로 훌륭하게 가장의 역할을 해냈던 것은 높이 평가받을 수 있다.특히, 유배지에서의 시간 동안에 서신을 통해 두 아들에게 끊임없이 학문과 인생에 대한 가르침을 주었다. 공부를 해야 하는 원론적 이유부터 세세한 공부 방법까지 일일이 열거하였고, 효도를 강조함으로써 그를 통해 자신이 부인을 옆에서 보살피지 못하여 부족한 애정을 채워주려 하였으며, 실학자답게 경제관련 지식을 강조함과 동시에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실천을 독려하였다. 그 중에서도 “술맛이란 입술을 적시는 데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장성한 아들의 술 마시는 절도를 걱정하고 이를 훈계하는 부분에서는 부성애의 면모가 더욱 돋보인다. 또한 학문을 함에 있어서 다른 사대부의 자제들처럼 과거에 합격하기 위한 공부만을 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기를 바라며 “폐족 중에 뛰어난 글재주를 가진 사람들이 자주 나오는데, 이는 다름이 아니라 과거 공부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절대로 과거에 응시할 수 없다 하여 스스로 좌절하지 말고 경전(經傳)에 힘과 마음을 써서 집안에 글공부를 하는 사람이 끊어지지 않게 하기를 간절히 바란다.”)라고 힘주어 말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지속적으로 두 아들에게 가르침을 주었던 다산의 마음은 아테네에서 유학하고 있는 아들에게 서간문 형식으로 『의무론』이라는 책을 써서 그의 아들에게 도덕적 선과 유익함에 대한 가르침을 주었던 키케로의 그것과 같았을 것이다. 물론 폐족의 위기속에서 더욱 더 절실한 부성애의 마음이 있었을 것이며, 고통속에서도 흐틀어짐 없이 옳은 자세에 대해 훈계하는 것이 누구
    독후감/창작| 2007.12.30| 4페이지| 1,500원| 조회(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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