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문가 요청 쿠폰 이벤트
*원*
Bronze개인
팔로워0 팔로우
소개
등록된 소개글이 없습니다.
전문분야 등록된 전문분야가 없습니다.
판매자 정보
학교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직장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자격증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판매지수
전체자료 14
검색어 입력폼
  • 만들어진 전통 발제문(서평포함)
    에릭 홉스봄 ,『만들어진 전통(The Invention of tradition)』과 광범위한 전통 만들기우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전통들이 ‘만들어진 것’이라는 생각을 예전부터 어렴풋이 해왔던 필자는 전통 만들기의 역사가 놀랍지는 않다. 그러나 한국사를 전공하면서 수많은 사료(史料)의 바다와 선학들이 이루어 온 연구업적과 관심 주제에만 빠져서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었던 지난날을 비추어 보니, 그동안 만들어진 전통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지 않았나 하는 반성을 갖게 된다.『만들어진 전통』은 1983년, 에릭 홉스봄과 비슷한 연구를 하고 있던 역사학자들이 참여한 공동의 결과물로 출판되었다. 이 책에 수록된 전통에 대한 일련의 연구는 1960년대 영국에서 시작된 ‘문화연구’가 1980년대에 문학, 인류학, 사회학, 정치학, 역사학, 여성학, 심리학 등 거의 모든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 양적·질적 팽창을 보이던 유행 속에서 이루어졌다. 따라서 이 책도 이러한 문화연구의 유행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인도와 아프리카의 사례가 함께 수록된 것을 통해 당시 문화사 연구가 공간적으로도 확대되고 있었던 연구경향을 엿볼 수 있다. 1980년대의 문화연구에 대한 관심은 “일종의 학문적 문화 광풍(a kind of academic culture mania)"로 표출되었고, 이러한 문화연구의 유행은 공간적으로도 확대되어 그 연구지역이 영미권에 국한되지 않고 인도를 중심으로 한 서발턴연구집단과 동아시아권에서의 ‘아시아적 가치론’으로도 나타났다. 한 마디로 규정할 수 없이 다양화된 문화연구는 텍스트주의, 다문화주의, 오리엔탈리즘, 포스트콜로니얼리즘, 포스트모던적 여성주의 등과 같이 다차원적인 모습으로 나타났다. ‘새로운 문화사(New Cultural History)’가 출현한 것은 이러한 문화연구의 숙성된 분위기에서였다. 육영수,「역사학의 ‘문화적 전환’: 서양적 기원과 한국적 전유」『역사민속학』14, 2002, p.260.이러한 ‘문화적 전환으로서의 역사학’은 몇 가지 공통점을 가진다. 첫째, ‘있는 기회라면 모두 잡으려고 한다.(p.288)”는 말이 이를 여실히 드러낸다.빅토리아 여왕 시기를 예로 들면, 당시 삶의 물질적인 측면들 대부분이 지녔던 고풍스러운 면모들과 이후 60년간 일어난 극적이고 혼란스러운 발전상들, 곧 선거권의 확대, 철도, 증기선, 전신, 전기, 전차 등이 현저하게 대조되었다. 이러한 변화, 위기 혼란의 시대에 '구시대적인 것의 보존', 곧 권력은 없지만 존경받는 군주를 영속성과 민족 공동체의 통합적인 상징으로서 의도적으로 의식을 통해 드러내는 것은 동시에 필요한 일이었다.(p.239)홉스봄은 만들어진 전통들에서 서로 중첩되는 세 가지 유형을 제시한다. 첫째, 특정한 집단들, 실재하는 것이든 인위적인 것이든 공동체들의 사회통합이나 소속감을 구축하거나 상징화하는 것들이다. 둘째, 제도, 지위, 권위관계를 구축하거나 정당화하는 것들이다. 셋째, 그 주요 목표가 사회화나 혹은 신념, 가치체계, 행위규범을 주입하는 데 있는 것들이다.(p.33) 결국 위정자들이 국가적 전통을 만들기 시작한 이유는 동질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근대 이전까지만 해도 동질성은 일부 엘리트 계급에만 있으면 되는 것이었지만 근대국가가 형성되고 구성원 모두가 느끼는 동질감의 강도가 곧 `국력`이 되면서 앞 다투어 전통을 만들어내기 시작한 것이다.홉스봄은 책 말미에서 유럽 전역에서 전통이 가장 활발하게 만들어진 19세기 말 20세기 초 ‘전통의 발명’에 존재하는 세 가지 국면들을 제시하였다.첫 번째 국면은 내구성을 입증한 그 시대의 새로운 관행들과 그렇지 못한 관행들이 엄연하게 구별된다는 사실이다. 공적의식, 대중화된 퍼레이드와 의례화된 대중 집회는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었고, 이 시기 이런 것들이 공식·비공식의 목표를 위해 확대 되었다는 점은 한국사의 경우에서도 나타난다. 순종의 경우 1910~20년대에 조선의 왕들이 의례적으로 행하던 국왕의 행차를 보다 더 확대 실시하고, 지역민들과 만나는 시간을 많이 가졌다. 여기에는 일제의 의도가 다분히 포함되어 있었던 것, 그 의도적인 작업이 정치에서든 사업에서든, 그러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그와 같은 조작이 존재하며 그에 맞서야 한다는 음모이론이 그 나름대로 그럴듯한 증거들을 갖출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조작들이 가장 성공적이었던 때는 특정집단의 절실한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관행들을 이용했을 때라는 점 역시 분명해 보인다.(pp.566-567)유럽에서 만들어진 전통은 그 이후에 만들어지는 전통에 또 다시 영향을 미치면서 새로운 전통을 창조하였다. 일본이 메이지유신 이후 영국의 귀족작위를 그대로 본떠 자신들의 귀족사회에 적용했던 것처럼, 식민지의 토착지배층의 지배구조를 그대로 활용하여 새로운 전통을 만들었다. 한국의 경우 식민지 조선의 왕실은 계속 유지되었으며,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한 지배계층은 작위를 받았다. 영국이 인도에서 만들어 나갔던 새로운 무굴의례와 같은 전통이 식민지 조선의 사례에서도 나타나지 않는지 심도있게 살펴볼 일이다. 이처럼 전통이 끊임없이 복제되는 것은 전통이 만들어졌고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다는 증거라 하겠다.홉스봄은 대개의 경우 대중오락에서 취향과 패션이 어느 순간 갑자기 ‘창출될’수 있는 여지는 매우 협소하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이용되거나 창출되기 전에 먼저 발견되어야 한고, 그것들을 돌이켜 재발견하는 일이 역사가의 몫이라고 말이다.한국에서 만들어진 전통에 대한 연구는 사실상 걸음마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그것도 주류 역사학자들이 아닌 인문학자들에 의해서 최근 들어서 조명되기 시작하였다. 임형택 외 지음,『전통, 근대가 만들어낸 또 하나의 권력』, 전통문화연구소, 인물과사상사, 2010.현재 한국의 전통문화라는 것들은 대부분의 경우 실상보다 허위의식에 가깝고 분별이 없거나 맹목적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의 만들어진 전통과 유럽의 만들어진 전통의 역사를 비교해 보는 시도는 현 시점에서 필수적인 작업이 아닐까 한다.현대 한국의 기층문화는 ‘전통의 단절’이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대중이 향유하고 있는 대부분의 일상문화 속에서 100년 이상못하고 있다는데 심각성이 더해진다 하겠다. 이런 점은 유럽의 경우와 다른 식민지적 특수성을 보인다고 하겠다.물론, 지금에 와서 사라진 전통들을 구체적으로 복원해서 일상문화 속에 다시 녹여보자는 것은 아니다. 사라진 전통은 이미 ‘전통’이 아닌 것이 되었고, 현재 보급된 만들어진 ‘전통’은 넓은 의미에서 우리의 ‘전통’이라 할 수 있으며, 일제 식민지시기 이전에도 ‘전통’은 항상 만들어져 왔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라져간 구래의 ‘전통’에 어떤 것이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 자체를 가지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한국은 진실로 뿌리 없는 국가가 되고 말 것이다.전통이란 것은 그 전통을 가진 구성원들에게 큰 자부심과 단결력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전통이 다른 사람들에게 호기심의 대상이 된다거나 찬탄의 대상이 되는 것만큼 기쁜 일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전통이 만들어지면서 사라져간 전통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홉스봄의 책을 통해 소개된 전통만들기의 역사를 추적해 나가면 자연스럽게 사라져간 전통들을 함께 찾아낼 수 있었다. 이와 같이 한국의 만들어진 전통을 추적하는 작업을 통해서 한국에서 사라져간 전통들 또한 그 모습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한다. 에릭 홉스봄을 비롯한 6인의 필자들이 만들어진 유럽의 전통이 어떻게 역사적 사실로 자리 잡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국민국가의 권위와 특권을 부추기기 위해 사용되었는지를 날카롭게 파헤친 것에 비한다면, 어불성설에 불과하겠지만 한국에서의 전통 만들기가 어떻게 만들어져 왔는지 필자가 알고 있는 몇 가지 사례들을 통하여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필자는 한국의 경우도 ‘전통’의 대부분이 19C 말~20C에 집중적으로 만들어졌다고 보고 있다. 영국이 인도의 역사와 문화를 잠식해갔던 방식과 일본이 식민지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잠식했던 방식은 상당히 유사하다. 영국인들은 인도의 예술과 기예가 서구의 기술과 기계제작품들에 직면해서 급격히 쇠퇴하는 시기에 접어들었다고 판단하고, 그들의 예술과 기예를 수집하변하는 실체로서의 전통이란 형이상학적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파악하고자 한 점이 돋보인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소재들은 책을 읽는 것으로 대신하고, 여기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몇 가지 사례들을 소개하려 한다.2. “목을 벨지언정 머리는 자를 수 없다” - 대한제국 시기-조선시대를 거치며 지배층문화와 지배이데올로기를 쥐고 있었던, 하지만 점점 설자리를 잃어가던-양반계층은 단발령을 포함한 일련의 대개혁이 자신들의 국가와 공동체에 위협이 될 것이라 판단하였다. 그들은 이 개혁을 반대하기 위해 ‘신체발부 수지부모’라는 문구를 가져다 기존과 다른 새로운 전통 이미지를 발명하였다. 바로 머리카락과 수염을 가위와 칼로 끊임없이 다듬었던 역사를 순식간에 터럭하나라도 건드릴 수 없는 전통으로 바꾸어 버렸던 것이다. 원래 상투는 유교의 가르침과 전혀 상관없이 고대로부터 내려온 전통풍습이었으며, 이 상투를 틀기 위해서는 머리를 다듬어야만 한다. 그리고 수염은 지속적으로 다듬지 않으면 밥을 먹을 수가 없다. 그러나 당시의 단발령 반대운동의 결과 현대인들은 조선시대 남자들이 이발과 제모를 전혀 하지 않았던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3. 국악과 연희 - 국악에는 정악과 민속악이 있다.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로 전락하였지만 왕가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궁중에서 향유되던 전통인 정악도 이왕직아악부에서 그대로 계승되었지만 식민지시기 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악기와 악공 대부분을 잃게 되었다. 그래서 정악의 원래모습은 복원한 부분이 많아서 현재 연주되는 정악이 원형이라 확신할 수는 없다. 그래도 정악은 문헌에 기초하여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연구 유지되고 있다.문제는 민속악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산조, 탈춤, 마당연희 등은 TV 드라마의 조선시대 사극에 자주 등장하여 조선시대의 전통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나, 실상은 대부분 19세기 말에 형성되기 시작하여 식민지시기를 거치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발전하였다. 구전을 위주로 전해오는 것들이 많기 때문에 19세기 이전 민속악의 모습
    인문/어학| 2014.10.06| 8페이지| 2,000원| 조회(385)
    미리보기
  • 구경꾼의 탄생 서평
    서평 : 바네사 R. 슈와르츠,『구경꾼의 탄생』이른바 근대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면 ‘세기말’로 이야기되는 19세기의 시선 혹은 시각문화의 탄생과정을 꼭 짚어보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바네사 R. 슈와르츠의『구경꾼의 탄생』은 세기말 파리에서의 대중문화 형성을 근대시각문화의 탄생이라는 주제의식으로 조명한 책이다.이 책은 저자의 박사학위논문 중 한 부분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 책에서 다루는 내용의 대부분은 감시에 대한 욕망과 평행하게 진행되는 관음의 욕망에 휘말린 구경꾼의 새로운 대중문화이다. 저자는 구경의 대상뿐만 아니라 구경의 주체로 등장하는 군중의 대중문화 분석을 통해 근대의 형성을 살펴보았다.1이 책은 파리로 대표되는 ‘도시 생활’의 구경거리화와 대중문화 출현의 상호 관련에 주목한다. 저자는 가장 먼저 오스망화로 대변되는 파리의 도시재설계가 현재 파리에서 볼 수 있는 가로망과 새로운 ‘대로문화’를 형성하는 요소로 꼽았다. 즉 오스망화가 파리 도시의 모더니티의 형성에 하나의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대도시의 대로화와 가로망화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떤 나라의 수도나 거점도시에서 볼 수 있는 보편적인 양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파리의 오스망화는 산업혁명 이후에 고도도 발달된 형태로 형성되기 시작한 상업자본주의의 폭발과, 일상이 대중소비를 위한 구경거리로 변해가던 경향이 나타나고 있었던 대도시 파리의 상황과 만나면서 근대적 시각의 형성에 기폭제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복잡한 요소들을 포함한 상업자본주의가 19세기 중엽 국가권력주도의 도시재설계작업과 결합하여 만들어진 것이 바로 이 책에서 말하는 ‘대로문화’이다.새로운 공간의 탄생은 공간에 얽힌 시선의 일대변화를 야기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대로가 파리의 군중에게 새로운 공간을 제공함과 동시에 각 계층이 가지고 있었던 기존의 시선들이 파괴되었다. 대신 새로운 구조물과 사람들이 오가며 빚어내는 대로의 교통흐름은 새롭게 변하는 구경거리를 제공함과 동시에 구경하는 사람과 구경 당하는 사람 사이의 경계선을 모호하게 만들어 새로운 관찰점을 제공했다. 여기에 대중언론이 일상을 선정적으로 만들어내어 확대 재생산함으로서, 도시의 경험을 기본전환 삼는 바라보기의 경험으로 정당화하게 만들었다.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을 선정적으로 가공하여 대량으로 보급함으로서 군중의 욕망과 욕망의 소비를 대중문화로 승화시켜갔던 것이다.2그리고 저자는 시체보관소인 모르그에 열광했던 파리 시민들의 모습을 부각시킨다. 애초에 경찰이 시체의 신원 확인을 목적으로 개방한 모르그가 19세기 후반기에 형성된 열광적인 시각문화의 한 형태를 보여주는 사례라는 것이다.저자는 시체보관고가 세기말 파리군중들에게 공개 되고, 군중들이 큰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19세기 과학이 수행했던 ‘광범위한 통제기능’과 관련이 있음을 언급한다. 저자가 말하는 모르그의 관심유발 요소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 요소들의 설명에는 다소 과한 점들이 있는 것 같다. 저자는 그 요소 중 하나로 죽음을 감싸고 있던 신성함이 벗겨졌으며, 사람들은 대중매체를 통해 시체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듣고 구경할 수 있었던 점을 꼽았다. 이러한 부분들은 당시 대중매체의 발달이라는 시대상과 맞물려 모르그 관람이 하나의 문화현상이 되었던 것은 맞을 것이다. 그러나 모르그에 전시된 시체의 모습이 영원한 것이었던 죽음을 현재의 사건으로 변형시켰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다. 저자도 말하고 있듯이 실제 육체라는 점에서 시신은 밀랍보다 더 좋은 구경거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시체는 모든 시대를 넘어서 좋은 구경거리이기 때문이다. 일례로 공개처형을 꼽을 수 있다.유사이래로 인류는 형벌제도를 마련하여 왔으며, 반인권적인 공개처형은 전근대뿐만 아니라 현대에도 몇몇 국가에서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있다. 무명이 발달했다고 자부하는 서구권의 많은 나라에서도 1930년대까지 수많은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공개처형이 이루어졌다. 시체의 전시는 이러한 공개처형의 구경과 비슷한 양상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프랑스에서는 18세기 말에 단두대가 개발된 이래 공개처형에서 단두대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19세기 프랑스의 많은 시민들이 단두대에 의한 공개 처형을 취미로 즐기고 있었다고 한다.그런데 저자는 “파리 모르그의 대중적 인기에 관한 논의는 묘지, 도살장, 처형장과 같이 죽이음이나 병적인 것들과 동떨어진 문제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과연 모르그에 시체를 구경하러 갔던 사람들과 그 이전부터 공개처형장면을 구경하던 사람들 사이의 차이를 이렇게 단순화하면서 단절시킬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저자는 “모르그는 대신 에펠탑, 샹송 가수, 카타콤과 같은 선상에 놓은 볼거리”라고 말한다. 물론 그 말에는 동의하지만 이를 강조하기 위해 처형장과 모르그를 단절된 현상으로 본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이 책에서 저자가 디오라마와 파노라마에서 영화에 이르는 시각적 대중매체 형성이 근대 시각문화 형성의 역사를 대변한다 것을 이야기하기 위한 사례로 모르그가 언급될 필요는 있었겠지만, 이렇게 책 내용에 과도한 비중을 할애하여야 했는지 아쉬움이 남는다.3필자는 이 책의 한국어판 제목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으나 책의 내용을 충실히 대변하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 역자들은 세기말 파리 대중의 시각적 욕망을 살리기 위해 ‘구경꾼의 탄생’이라는 제목을 붙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최근 한국사학계에서 활발하게 문제가 제기되고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근대의 탄생, 혹은 발견’을 염두에 두고 이렇게 번역한 것이 아닐까 한다. 이 책의 원제는 ‘Spectacular Realities’이다. 즉, ‘구경거리의 현실성’ 혹은 ‘구경거리화된 현실’ 정도 일 것이다.
    독후감/창작| 2014.10.06| 4페이지| 1,000원| 조회(202)
    미리보기
  • 문화정치 문화전쟁 서평 평가A좋아요
    서평 : 돈 미첼,『문화정치 문화전쟁 : 비판적 문화지리학』돈 미첼의 “당신은 누구이고, 권력과의 관계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은 평소 지속적으로 품어온 질문이지만, 이것을 필자의 연구 속에 녹이기에는 그 동안 관심도가 낮지 않았는가 하는 반성을 해본다.이 책은 1990년대 후반의 영어권 문화지리학과 문화연구의 누적된 성과를 바탕으로 집필되었다고 한다. 저자가 이 책을 집필할 당시에는 거의 20년에 걸친 문화연구에 대한 흥분의 도가니 속에서 사회과학과 인문학을 휩쓴 ‘공간적 전환’은 1990년대부터 문화지리학에 대한 질문들을 지성적이고도 정치적인 의제들의 최상부로 올려놓는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영국에서 대처주의가 승리한 이후 학자들의 연구가 무의미한 주제에 표류하고 있기 때문에 저자는 보다 현실적이고 절실한 주제들에 대한 천착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미첼은 상당히 강고한 문화유물론자나 문화정치경제학적 입장에 가깝다고 보이는데, '전통적인' 영국문화연구의 전통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글에는 마르크스적이면서도 포스트모더니즘 적인 자세가 마구 얽혀있다. 이는 실제 현실공간이 사적·공적으로 마구 얽혀있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공간 자체가 불완전성을 강하게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돈 미첼 처럼 기존의 문화지리학의 이론들을 비판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고, 돈 미첼의 이론 역시 그가 바라는 바처럼 비판적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이러한 관점에서, 미첼은 한편으로는 지리학과 인류학에서 유행하던 문화 관념, 일종의 초유기체적 실체로서 문화를 겨냥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탈정치경제적인 의미생산, 텍스트실천, 삶의 방식 추구와 같은 좁은 의미의 문화 개념을 비판하고자 한다. 궁극적으로 미첼이 의도하는 바는 정치경제적 조건, 특히 현대 자본주의와 그 변동 하에서 공간과 지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투쟁을 검토하는 것이며, 이를 문화전쟁 혹은 계급전쟁의 관점에서 재정의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공간과 지리 연구를 일신하고 나아가 기존 추상적인 문화연구에 구체성을 부여하고자 하였다. 여기서 구체성이란, 기존 문화연구와 정치경제 문제설정에서 공간 관점이 부재하거나 당연히 주어진 것으로 여겼다는 점이고, 반대로 공간과 지리 연구도 문화연구와 정치경제적 입장을 경시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여하튼 대부분이 논쟁적인 글이라 많은 사례가 제시되고 있다.1부 '문화의 정치학'은 일종의 이론적 소개와 논쟁을 다루고 있고, 미첼이 문화를 보는 관점, 즉 문화유물론이 정리되어 있다. 2부는 경관(landscape)이라는 지리학과 공간연구의 대상을 문화투쟁의 관점에 서술하였다. 한국으로 치면, 각종 박물관이나 광화문 광장의 이순신, 세종대왕 동상과 관련된 문제, 혹은 청계천의 전태일 다리와 관련된 일련의 사건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3부는 섹슈얼리티, 젠더, 이주, 인종, 국가와 민족, 권리, 영토 등과 관련된 주제들을 다룬다.이 책은 공간을 매개로 문화에 대한 정치경제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돈 미첼은 먼저 문화지리학이라는 분야가 너무나 다양한 내용과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는 가운데 자신은 하나의 관점, 즉 ‘비판적'관점을 선택한다고 밝히며 글을 시작한다. 돈 미첼은 신자유주의로 표상되는 글로벌 체제의 불평등한 분배구조를 지리학자들이 더 이상 외면할 수만은 없기 때문에, 사회적 약자들이 점점 더 절박한 생존의 문제에 내몰리는 상황에서 한가하게 ‘헛간의 유형’이나 ‘울타리 기둥’과 같은 무의미한 주제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권력을 가진 세력은 문화라는 강력한 이데올로기로 자신들의 자본 축적을 정당화하려고 필사적으로 달려든다. 그 지점에서 문화는 정치가 되고, 투쟁의 대상이 되고, 현실이 된다.문화전쟁은 이렇듯 실재하는 전쟁이다. 문화전쟁은 영토와 경제력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군사전쟁과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문화전쟁은 아이덴티티, 사회적 가치, 의미에 대한 통제를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군사전쟁과 사뭇 다르다. 전투는 사회적 소수자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일어날 수 있다. 샌프란시스코의 게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인,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사람, 독일의 유태인, 보스니아의 평화주의자, 밤 10시에 지하철에 홀로 서 있는 여인, 땅이 없는 농민들은 자신들의 아이덴티티를 경계짓고 확정짓기 위해 투쟁한다. 그것은 우리가 생활하는 지리적 환경에 의해 영향을 받고, 그것에 영향을 주는 변증법적 과정이기도 하다. 그래서 현실은 지리학자가 문화전쟁에 개입할 수밖에 없는 문화정치의 현장이 되는 것이다.중국문화, 미국문화, 유럽문화, 중세시대문화, 예술문화, 인터넷문화 등 우리는 문화란 단어를 생각보단 잘 쓴다. 그리고 우리는 문화가 어떤 걸 뜻하지는 제대로 설명은 할 수 없지만 알 수는 있다. 이 책은 이런 생각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문화는 지리와 뗄 수 없는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걸 설명하면서, 현재까지 이뤄진 많은 것들을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문화에 대해 이 책에선 좀 더 규정적이고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문화는 사람과 지리와 언제나 함께했음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아직은 대중에게 생소한 분야인 문화지리학을 설명해 줌으로써, 우리가 그동안 무심코 넘어갔던 것들에 대해 무심코 넘어가지 않도록 잘 인도해준다.돈 미첼은 자신이 이런 비판적 관점을 선택한 것은 자신이 비판적인 것처럼 독자들이 똑같이 자신의 주장에 대하여 전적으로 비판적이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한국은 21세기에 들어와서 신자유주의가 심화되고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세계 체제 속으로 통합되는 속도가 더욱 빨라지고 있다. ‘문화전쟁’이나 ‘문화정치’라는 개념을 돈 미첼의 비판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한국의 역사와 최근 한국의 현실을 이해하고 분석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권력과 민중의 상호작용 속에서 만들어지고 변화하여 온 공간의 역사를 살펴보는 작업은 국내에서도 이미 상당수 진행되고 있다. 먼저 지역공간에서 이루어진 역사에 초점을 맞추는 지역사 연구가 활발히 시도 되었으며, 2000년대에 들어와서 도시사와 도시문화를 함께 살펴보는 연구들이 시도되었다. 조선시대 서울 도시의 변화상에 얽힌 역사를 연구한 고동환 고동환,『조선시대 서울도시사』, 태학사, 2007.
    독후감/창작| 2014.10.06| 4페이지| 1,000원| 조회(172)
    미리보기
  •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 서평
    서평 : E.P.톰슨,『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서양 근대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데다, 평소 노동사나 사회사 분야에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었던 터라 E.P.톰슨의『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을 읽는 것은 쉽지 않았다. 산업혁명 이후 영국역사에 대한 배경지식이 거의 부재한 탓에 가독성이 떨어지고, 각 인물들과 사건들의 연결고리를 이어나가는 작업에 상당한 곤혹을 겪어야 했다. 필자의 입장에서 원본을 일일이 확인 할 수 없는 방대한 사료를 동원해 1000페이지 가까이 풀어낸 방대한 내용들은 읽고 난 후 소화불량에 걸리게 만들고 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영국의 노동계급 즉, 기층 민중의 한 축을 이루고 있던 어떤 계급의 종교적 배경, 습속과 전통을 담고 있는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문학적, 역사적 소양이 필요할 것이다.이 책은 산업 사회의 문턱에선 노동자들의 역경과 끈질긴 투쟁의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생생한 삶의 드라마로 풀어내었다는 평가를 듣는다. 톰슨은 이 책에서 1780 ~ 1832년에 이르는 50여 년 동안에 걸친 영국 노동계급의 성장사를 서술하였는데, 그가 서문에서 “이 책은 차례대로 이어지는 서술이라기보다 관련된 주제들에 대한 연구들을 모은 것(상권 p.11)”이라고 말하였듯이 처음 읽는 필자 같은 독자에게 난해한 구성을 가지고 있다.톰슨은 먼저 노동계급의 형성에 영향을 준 민중적 전통을 17세기 이전부터 유행하던 종교적 전통에 대한 소개 등 문화적 관행으로 내려오던 민중적 전통을 고찰한 후 산업혁명 기간 동안의 사회적 관계들의 변화를 검토하였다. 여기서 톰슨은 증기동력과 면방직공장과 같은 산업혁명이 가져온 경제적, 기술적 변화에 따른 예정된 결과로 노동계급이 형성되었다고 간주하는 기존의 틀을 배격하였다. 그는 경제사적 사실 못지않게 정치사, 문화사적인 사실이 노동계급의 형성이며 공장제도의 자동생산물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즉, “노동계급은 만들어진 것 만금이나 그 스스로를 만들어냈다(상권 p.273)”는 것이다.톰슨은 농업노동자, 장인, 직조공 등 여러 부류의 노동집단을 차례로 검토하면서 이들이 외관상 매우 잡다한 경험과 투쟁을 보여주었지만 사회적 생산관계의 측면에서 볼 때 실은 동일한 길을 걸어왔음을 논증한다. 그가 밝혀내고 있는 산업혁명의 공통 경험은 “경제적 착취와 정치적 탄압”이었으며, 이는 “피착취자들을 사회적, 문화적으로 뭉치게 하는 데 이바지 하고 있었다(상권 pp.277-278)”산업혁명기의 생활수준에 대해서 톰슨은 생활수준에 대한 계량적 측정과 물품, 주택, 수명 등 생활 양식 전반에 대한 주관적 인식 사이에 괴리가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자신이 산업혁명기의 사회적 관계의 핵심으로 파악한 ‘착취’란 단순히 도덕적 가치판단에 따른 추상적 고안물이 아니라 실제로 착취를 경험한 사람들에 의해 ‘느껴진’ 것이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1840년대 노동자들은 그들의 50년전의 선조들보다 ‘물질적으로 나아졌으나’, 이러한 약간의 물질적 향상을 그들은 하나의 파국적인 재난으로 체험하였다(상권 p.294)”는 것이다.이어서 톰슨은 민중적 급진주의의 문제로 돌아가서 노동계급의 형성을 여러 측면에서 논증하였다. 그는 우선 웨스터민스터에서의 급진주의 정치적 발흥에 이어, 러다이트 운동, 1810년대 말 헴프든클럽, 펜트리지 봉기, 피털루학살 등 소위 민중적 급진주의의 영웅적 투쟁을 분석한 다음, 1780년대의 자꼬뱅 운동과 1816~1820년의 급진적 민중봉기 사이에 지속적인 지하운동의 전통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전통은 1820년대를 “개인 및 집단이 산업혁명과 민중적 급진주의의 경험을 이론화하고자 한(하권 p.365)” 시대를 낳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노동민중의 주체적인 경험세계를 바탕으로 계급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그리고 톰슨은 1830년 프랑스혁명의 영향, 1832년 선거법 개정운동에서의 정치적 각성을 통해 마침내 노동계급이 형성되었다라고 결론지었다. 그는 여기서 ‘하나의 노동계급’이 아니라 잡다한 ‘노동계급들’만 존재했을 뿐이라는 기존의 주장을 반박한다. 1830년대에 이르면 이미 다른 계급들의 이해관계와 상반되는, 노동대중 집단들 사이의 동일한 이해관계에 대한 의식이 싹텄으며, “토대가 굳건하고 자기의식적인 노동계급의 제도들, 노동계급의 지적 전통, 노동계급의 지역공동체 패턴, 노동계급의 감정구조가 있었기(상권 p.272쪽)” 때문이다. 즉, “노동계급은 이제 더 이상 형성 중에 있지 않고 이미 형성이 완료된(하권, p.496)” 것이다.
    인문/어학| 2014.10.06| 3페이지| 1,000원| 조회(198)
    미리보기
  • 왕오천축국전을 통해 본 인도·중아시아의 불교현황
    『往五天竺國傳』을 통해 본 인도·중아시아의 불교현황- 대당서역기 와의 비교를 중심으로1. 머리말2. 慧超의 서역 기행 前後의 시대상황3. 慧超 방문 지역의 불교현황(1) 중천축(2) 남천축·서천축(3) 북천축(4) 중아시아4. 맺음말1. 머리말아시아의 고대 및 중세사에 불교가 끼친 영향은 엄청나다. 초기 불교는 호국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정치권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퍼져 나갔다. 불교는 아시아 각지 의식주에 커다란 변혁과 같은 문화변용을 일으킴과 동시에 각지에서 문화변용을 받기도 하면서 아시아 전역의 문화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기원 전?후 중국에 전해진 불교는 후한 말 동서교역이 활발히 전개되면서 일반 민중 사이에도 침투하게 되었고, 위진남북조시대의 사회 혼란을 만나 널리 퍼져나갔다. 오호십육국시대를 거치면서 서역의 고승들이 중국에 들어와 경전 한역에 종사하였으며, 중국에서도 불교의 신앙에 깊이 심취한 열렬한 신자들이 나타났다. 이들 중에는 불교의 고향인 天竺으로 가서 직접 불교유적을 순례하거나, 사원에서 연구하거나, 중국에 빠져있는 경전을 가져오려는 이들도 나오게 되었다. 4세기 말에서 8세기 사이 다수의 漢僧들이 인도에 간 것은 이러한 까닭이었다.)입축승의 수는 매우 많았으나 대다수가 不歸의 객이 되거나, 기록을 남기지 못했으며, 그나마 기록을 남긴 이들 가운데 法顯, 惠生, 玄?, 義淨, 悟空, 및 慧超 등의 여행기만이 전해진다.) 이들의 여행은 당시 실크로드의 실태를 전해주는 소중한 기록들로 각각 그 시대의 인문·지리 정보와, 불교 현황에 대해 알려준다. 특히 이 가운데 독립된 기행문으로서 갖추어져 있는 것은『佛國記』,『大慈恩寺三藏法師傳』,『大唐西域記』, 그리고『往五天竺國傳』에 불과하다.이 중『往五天竺國傳』을 쓴 慧超는 新羅僧이었다. 신라 시대에는 많은 승려들이 구법 수행차 入唐했지만 불교의 발상지가 天竺(인도)인 만큼 천축으로의 순례와 求法行역시 중요하고 신성한 의의를 지니고 있었다.) 『왕오천축국전』은 1908년 敦煌석굴에서 프랑스의 동양학자대국인 摩揭陀國(마가다Magadha)의 首府 巴連弗(파탈리푸트라P?taliputra)에도 불사 50여 곳에 더 많은 천사가 있었고) 佛敎大鎭 曲女城에는 불사(백여 소, 승도 만여 명)보다 훨씬 많은 이백 여소의 천사가 자리하고 있었다.)그렇지만 이와 같은 외도의 잠식과 형이상학적이고 탈민중적이며 번쇄한 敎學(Abh?dharma)불교의 폐단에서 오는 쇠퇴를 막기 위한 자구책도 보인다. 그것은 초기 불교의 한계성을 극복하려는 大乘佛法(Mah?y?na)와 그 변형인 密敎(Vajray?na)의 대두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때까지 불교가 아직 잔존하고 있던 곳에서는 대체로 대승과 小乘(H?nay?na)이 여건에 따라 輕重을 달리하며 병립하고 있었다.) 혜초 때 마게타와 갈나급자에서는 대승과 소승을 俱行하였다.) 파련불의 경우 법현 때는 대승이 우세하다가, 의정 때는 오히려 소승이 극성하는 다변상을 보였다. 현장 때 나란타의 大覺寺는 大乘上座部를, 피라날사와 사위성은 小乘正量部를 배우고, 곡녀성은 대승과 소승을 함께 배우고 있었다. 의정 때 대각사의 서편에 있던 迦畢試國寺는 소승 학자들의 聚居處로 북쪽에서 온 많은 승려들이 駐錫하고 있었다.한편, 중천축에는 혜초가 4대 탑으로 꼽는 불교 유적이 있었다. 혜초는 이 4대 탑으로 舍衛國 給孤?의 탑, 毗耶離城 菴羅?의 탑, 迦毗耶羅國의 탑, 三道寶階를 꼽고 있다. 이들 유적의 당시 모습을 잠시 살펴보고 넘어 간다.1) 舍衛國 給孤?혜초가 소개만 하고 자세히 언급하지 않은 舍衛國은 불타가 25년간 머물면서 중요한 설법을 하고, 祇洹精舍(제타바나 비하라Jetavana Vihara)를 비롯한 주요 불교유적도 있는 곳이다.) 또한, 이곳은 브라만교의 연고지이기도 하다. ?奴娑尼(Janusani)가 일찍이 이곳에서 브라만 書院을 운영한 바 있다. 자이나교에서는 슈라바스티를 찬드라푸르(Candrapur, 月光城)라 하는데, 여기서 두 祖師가 탄생하였으며 교주 마하비라(대웅)도 이곳을 여러 차례 순유하고 우안거를 지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암라원에는 현장이 방문했을 때 그나마 3~5개소만이라도 남아서 얼마간의 승려와 신도들이 모여 있던 것이 혜초 때는 탑만 있고 사원은 황폐화되어 승려의 그림자조차 없었다.) 가비야라국에 대해서는 “성은 이미 폐허가 되어 탑은 있으나 승려는 없고 백성도 없으며”) “길가에는 도적이 득실거려 그곳으로 예불하러 가기란 매우 어려웠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급고독원에 대해서는 절도 있고 승려도 있는 것을 보았다고만 간략히 언급될 뿐이다.) 다만 중천축의 왕성인 葛那及自(가냐쿱자Kany?kubja, 카나우지Kanauj)에는 사원이 있고 왕과 수령 등이 三寶를 공경하고 믿고 있었다.)(2)남천축·서천축불교가 쇠퇴·침체하던 중천축에 비해 남·서·북천축의 사정은 달랐다. 대부분의 지방에 사원·승도의 수가 여전히 많았고 왕에서 백성까지 불교를 敬信하여, 외도의 집요한 잠식에도 불구하고 교세를 떨치고 있었다.남천축국(현 나시크Nasik 일대)은 ‘절과 승려가 많고’ 왕과 수령, 백성들이 삼보를 극성스레 공경하고 대승과 소승을 구행하고 있었다.) 혜초가 방문한 남천축국은 바타피(V?t?p?, 伐他毗, 일명 B?d?mi, 波陀密)를 수도로 하고 나르마다(Narmad?) 강 이남의 남부 인도를 지배하던 서찰루키아(西Ch?lukya, 西遮婁其) 王朝(543~757)를 말한다. 현장은 『대당서역기』에 이곳을 마가랄타국(摩訶剌侘國, 마하라스트라Mah?rastra)이라고 하면서 견문록을 남겼다. 이에 따르면 이 나라 사람들은 학예를 좋아하고 사교와 정법 모두 신앙하고 있었다. 가람은 1백여 곳에 승도는 5천여 명인데 大小二乘을 겸하여 학습했다. 반면 천사는 1백여 군데 있었으며 이도인들이 아주 많았다.)현장이 방문했을 때 오천축국 내에서 중천축의 마갈타와 함께 2대 학술의 중심지였던 남천축의 摩臘婆國(말라바M?lava)은 사원 수백 소와 승도 이만여 명을 보유하고 소승정량부 교법을 주로 전수하고 있었다.) 그 밖에 案達羅國에는 사원 20여 곳과 승도 삼천여 명이,) 恭建那補羅國에는 사원 백에 1천 여호가 있을 뿐 10여 곳의 사원과 파괴된 탑 유적만이 남아 있고, 그 밖에 천사 백여 곳에 異道가 잡거하고 있었다.) 그러나 혜초가 방문했을 때는 양상이 달라져 있었다. 비록 왕과 사병들은 돌궐인(흉노인)이고 바라문(婆羅門, 브라만Brahman)도 섞여 있었지만, 왕을 비롯해 왕비, 왕자, 수령 들은 각기 절을 지어 삼보를 공경하며, 왕은 해마다 두 번씩 財施와 法施를 행하는 대법회인 ‘無遮大齊’를 거행하고 있었다.) 5세기 초 법현이 찾아갔을 때는 대부분이 소승이었으나,) 대승과 소승이 구행하고 있었으며 불교의 고사가 깃든 유적을 중심으로 불교신앙이 활발하게 행해지고 있었다.간다라 서쪽에 있는 葛諾歌에 세운 큰 절은 일찍이 대승불의 論師 무착(无着, 아상가Asanga, 310~390)과 그의 동생 天親(世親, 바수반두Vasubandhu) 보살이 살던 곳으로서, 당시도 대탑에서는 늘 빛을 발하고 있다고 했다. 성 동남쪽은 부처가 尸毗迦(시비카Sivika)의 왕이었을 때 비둘기를 놓아 보냈다는 고사와 부처가 머리와 눈을 던져 다섯 夜叉에게 먹였다는 고사가 깃든 곳으로, 여전히 사원과 승려가 있어 공양하고 대승과 소승이 함께 행해지고 있었다.)(4) 중아시아혜초가 북천축을 지나 중앙아시아에 들어섰을 때, 비록 일부 지역이 대식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으나 불교는 여전히 활기를 잃지 않고 있었으며, 불교 전파의 西界가 명확했다. 간다라 북쪽에 위치한 烏長國(우디아나Udy?na)에는 사원은 물론, 승려가 속인보다 많았으며 왕은 삼보를 숭상하고 있었다.다.성들은 조그만 몫만을 자기 집에 남겨두어 의식에 충당하고, 많은 몫을 절에 시주하며 매일 齋를 올려 공양 할 정도로 극성스러웠다.) 법현 때는 500소의 사원이 모는 소승)이었으나, 현장 때에는 1400소의 사원에 1만8000명의 승려가 있을 정도로 교세가 늘어났고) 이미 대승으로 개신하였으며, 혜초 때에 이르러서는 오로지 대승만이 성행하면서 불교가 부흥하는 양상을 보였다.)오장국 북쪽의 拘衛國(치트랄Chitr 열반처 구시나가 황폐화되어 승려조차 없는 등 대부분의 지역에서 불교가 쇠잔해버렸다. 남천축에서는 각종 학파와 교파가 난립하면서 힌두교에 힘겹게 대응하고 있었지만, 안달라국 같은 곳은 힌두교 교세가 이미 불교를 능가하고 있었고, 서천축의 경우 15개국 중 12개국에서 이미 외도가 성행하여 불교는 거의 사라졌다.그러나 북천축과 중앙아시아는 비록 돌궐을 비롯한 호족들의 치하에 있고, 대식의 내침으로 많은 지역이 파괴되었지만 불교가 활성화되어 8세기 전반의 일시적 부흥을 주도하고 있었다. 북천축의 사란달라와 가섭미라, 건타라와 중앙아시아의 오장국, 토화라 등 주요 불교국을 비롯해 해초가 가는 곳마다 ‘足寺足僧’하고 왕에서 부터 백성에 이르기 까지 모두가 삼보를 敬信하고 있었다. 일찍이 현장이 방문했을 때는 돌궐의 폐불정책으로 말미암아 황폐화한 10여 곳의 절터밖에 없고 이도만이 잡거하던 건타라에는 왕과 수령들이, 돌궐 치하의 계빈국에는 백성들이 저마다 절을 지어 삼보를 공양하고 있었다. 당이 경영하는 구자나 언기, 우기도 外僧과 漢僧이 함께 활약하여, 많은 사원과 승려를 보유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불교가 이미 그 발원지인 천축으로부터 북쪽으로 중심을 옮겨가고 있었으며, 그 연장선상에서 중아시아와 동아시아로의 불교전파가 적극적으로 이뤄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둘째, 불교의 大乘化 추세이다. 주지하다시피 기원전 1세기 무렵 태동한 대승불교는 기원후 5~6세기까지 소승불교에 비해 여러모로 열세였다. 그러나 8세기 초반부터 적어도 북천축과 중아시아에서는 교세나 교단 운영에서 대승이 크게 부각되면서 불교의 대승화 추세를 보인다. 혜초 당시 대승이 당당하게 소승과 어깨를 견주면서 구행하고 있었던 사실을 원전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었다. 혜초가 대승과 소승의 분포상황을 언급한 22개국 중 11개국에서는 대승과 소승이 병존하고, 그 밖의 7개국에서는 소승이, 4개국(모두 중앙아시아)에서는 대승이 獨行하고 있었다. 소승 일체유부의 대본영이었던 가섭미라도 대승과 소승이 구행하고 있09
    인문/어학| 2009.11.10| 18페이지| 1,000원| 조회(453)
    미리보기
전체보기
받은후기 2
2개 리뷰 평점
  • A+최고예요
    0
  • A좋아요
    1
  • B괜찮아요
    0
  • C아쉬워요
    1
  • D별로예요
    0
전체보기
해캠 AI 챗봇과 대화하기
챗봇으로 간편하게 상담해보세요.
2026년 04월 17일 금요일
AI 챗봇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 AI 챗봇입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8:23 오후
문서 초안을 생성해주는 EasyAI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의 20년의 운영 노하우를 이용하여 당신만의 초안을 만들어주는 EasyAI 입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작업을 도와드립니다.
- 주제만 입력하면 AI가 방대한 정보를 재가공하여, 최적의 목차와 내용을 자동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 장문의 콘텐츠를 쉽고 빠르게 작성해 드립니다.
- 스토어에서 무료 이용권를 계정별로 1회 발급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체험해 보세요!
이런 주제들을 입력해 보세요.
- 유아에게 적합한 문학작품의 기준과 특성
- 한국인의 가치관 중에서 정신적 가치관을 이루는 것들을 문화적 문법으로 정리하고, 현대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기술하세요
-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