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시 내수침수 피해현황/원인분석/대책◈ 내수침수 피해현황{연도내 용19961997199819*************220032004인명(사망/부상)5/01/100/1이재민37세대130명15명563명33명54가구92명주택(반파/침수)/18/103/1/9/8/71/38수리시설2개소농작물5,586ha60.4ha215.61ha215.6ha114.6ha57.5ha60ha도로교량5개소1개소11개소비닐하우스920동0.2ha축·잠사48동기타시설146개소6개소1개소{◈ 내수침수 주 피해지역{{{{{{{{{{{{{◈ 내수침수 실태 및 피해사례 1121억원의 예산을 쏟아 부은 내수침수방지공사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는 2·3호광장 인근 거주 주민 들의 상습적 침수피해에 대해 집단적인 손해보상 청구와 감사원 감사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일고 있 다.특히, 목포시와 유사한 사례에서 대법원은 판례를 통해 대부분 주민들의 손을 들어 준 것으로 나타 나 집단소송이 제기될 경우 목포시의 패소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보인다.목포시는 121억 원의 예산을 들여 저지대 상습 침수를 해소하기 위해 2·3호광장 주변 4098m에 콘 크리트 박스 구조물과 1650㎜의 관을 묻는 '내수침수방지 시설공사'를 실시했다.{시는 고지대에서 내려오는 빗물을 입암천으로 직접 흘러들게 대형관을 묻고 남해 배수펌프장이 가동 하면 시간당 40㎜의 집중호우가 내려도 침수 피해는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으나 지난해 시간당 35㎜ 의 강우도 소화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올해 들어서는 상습적인 침수현상까지 보이고 있다.△ 상습침수는 올해만의 일이 아니다. 작년만해도 내수침수 방지공사가 끝난 직후 곧바로 침수가 또 터졌다.특히, 올해 초 목포시의회가 전문가 자문과 현장조사를 바탕으로 '설계변경과 시공방법' 등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 재시공 요구를 한데 대해 목포시가 수용의사를 밝히고도 재시공 명령과 벌점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져 법적 다' 고 판결했다.역시 1975년 12월30일 대법원 판례(75다1543)에 따르면 '땜 건설공사로 인한 유수장애로 경작지가 침수되어 경작인에게 손해를 입힌 경우 땜 건설자는 유수 소통을 위한 시설 기타 전답수침방지에 대 한 모든 주의를 다해야 하고 홍수가 났을 때의 공사로 인하 유수 장애로 경작지가 침수되어 경작인 에게 손해를 입힌 경우에는 손해배상책임을 면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이달호 목포시의회 경제건설위 간사는 목포시 문열상 도시건설국장의 보고를 듣고 "재시공과 보완, 지적개선은 엄연히 다른 단어이기 때문에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용당동 이달호 의원은 "손해보상 청구에 대해서는 침수피해 실태를 파악한 뒤 주민과 함께 대책을 강구할 것이다"고 밝혔 다.김종익 목포경실련 사무국장은 "시의 공사감독에 문제가 있어 침수를 막지 못한만큼 시민들이 자구 적인 차원에서 충분히 정신적, 물질적인 피해보상에 대한 소송을 할 수도 있다고 본다"며 "시가 부실 공사를 인정하고 책임자 문책과 시공업체에 기술벌점을 주는 등 재발방지 노력을 하지 않을 경우 감 사원에 '국민감사'를 청구할 것이다"고 경고했다.한편, 27일 하루 집중호우로 석현동과 용해동 일대 농경지 55ha가 침수됐고 상동과 죽교동에서는 주 택가 축대가 무너졌으며 주택 1채가 반파 됐으며 주택 24채, 상가 14채, 도로 10여개소가 침수됐으 며 내수침수방지공사가 완공된 최근 3년 간 피해를 합산할 경우 그 규모는 커질 것으로 보인다.{◈ 내수침수 실태 및 피해사례 2△ 맨홀 뚜껑을 밀어낼 만큼 하수 역류는 폭 발적이었다{△ 하수 역류로 웬만한 차량바퀴면 모두 빠져들 홀이 생긴 위험한 도로를 지나가고 있다.{△ 위험한 도로를 지나치는 차량{△ 솟구치는 물의 힘은 수십킬로그램의 맨홀 뚜껑도 한낱 종이짝에 불과했다.{△ 취재팀이 맨홀 뚜껑을 사고를 막기위해 옮겨놓고 있다. 하지만 워낙 무게가 나가 옮기는 것도 쉽지 않았다.{△ 맨홀뚜껑을 옮겨 놓은 후에도 물은 콸콸 지하에서 쏟아 져 나왔다{△ 하수처 3자간 협의에 의한 설계를 임의 변경한 후 공사를 시공하므로써 절차상과 내용상에 명백한 잘못이 있었다.. 발주처 관리감독에 대하여☞ 일상적인 하수관리 계획 및 퇴적물 조사과정에서 면밀한 조사 및 검토가 소홀했고, 입암천 준설 설계시 기본 전제로 하였으나 이를 시행하지 않았다. 또한 발주청은 건설공사의 게획, 설계, 발주, 감리, 시공, 사후평가 전반을 총괄하는 책임이 있음에도 2002년 2, 3호광장 일대 의 침수이후에 침수의 근본적인 원일을 밝혀 재발방지를 위한 노력을 하기보다는 침수원인을 일방적인 관리부실로 미봉하기 위하여 허위보고를 하는등 침수원인을 밝히기 위한 시공, 설 계, 감리와의 대책회의도 한번 없이 안이하고 나태한 자세로 일관해 왔다. 또한 설계변경과정 에서 시공사 측 요구에 의하여 감리자, 그리고 발주처 3자간 협의에 의하여 임의설계 변경하 였으나, 100억원이상 공사에서 공법 및 설계변경시 지방위원회 심의를 받아야 하고 이를 감 독하는 목포시장은 시공, 설계, 감리에 대하여 총체적인 지휘 및 감독을 하여야 함에도 공사 비 50억원이상 공사는 책임 감리가 책임이 있다하여 감독을 소홀이 한 잘못을 발견하였다.. 역사이펀 임의설계 변경 및 시공문제에 대하여☞ 압력수로로 설계된 고지배수로 관로의 역사이펀 설치에 있어서 원 설계는 45도 완만한 유선 형이었으나 민원처리 및 시공상 편의를 위해 90도 각도의 하월곡절형으로 변경 시공하므로 역사이펀 지점에서 유속이 급속히 감속되고, 성남약국 앞 역사이펀 박스를 원설계 암거박스 3m×1.7m에서 1,800mm pc관 2열로 교체하므로서 통수능력을 격감시킨결과, 3호광장 사이펀 및 구배가 완만한 성남약국 앞 사이펀지점에서는 각종 토사와 부유물이 쌓여 물 흐름을 방해 하여 가장 큰 침수 원인이 되었다.. A-라인 관로 설계변경(공법) 문제점에 대하여☞ 고지배수관로가 시작되는 목포경창서 아래 철도부근에서 시작하여 3호광장에 이르는 구간 (box 2.2m×1.7m)588m 지점 가운데 523m를 1,650mm 도 원 설계3m × 2m 암거관로에서 4.2m×1.5m 암거관로로 변경하여 50cm 높게 시공함으로서 토사퇴적이 용이할 뿐만아니라 토출부 방향이 입암천 상류부로 되어있어 물의 흐름에 역행됨으로 배수에 지장을 주고 있다.. 배수체계☞ 저지대인 2, 3호광장 일대의 저지대에 내린 유수의 배제는 신설빗물편프장에 모아져서 입 암천으로 연결되는 배수로를 통해 유입후 입암천 상류에 유입후 남해 배수펌프장을 통해 최종 배수중이며, 신설 배수펌프장 용량을 적정화 하기위해 자연배수가 가능한 고지대의 우수는 별도의 압력수로를 통해 입암천에 유입시키도록 배수체계가 구축되어 있다.. 계획강우강도☞ 시설비 투자와 침수에 따른 피해를 고려하여 하수도 시설기준에서 제시한 재현빈도의 강 우강도식을 이용하였다.♣ 계획 강우 강도 검토{{{I}_{10}=375/{t}^{0.51}{구 분빈 도적용강우강도식설계시 강우량(mm/hr)2002.8.7시우량(mm/hr)비 고간선관거10년{{I}_{10}=375/{t}^{0.51}펌프장30년{{I}_{10}=434/{t}^{0.51}. 당초설계는 입암천 취부소가 없는 상태에서 수리수문검토가 된 입암천 수위를 근거로 저지와 고지배수로가 계획이 되었고, 고지대 배수계통의 하류부는 기존암거를 이용하되, 토사퇴적이 많아서 준설과 구조적인 보수를 전제하였고, 성남약국에서 3호광장을 거쳐 철로 교차점까지 의 구간은 암거와 관 및 3개의 역사이폰으로 계획되었고, 저지대 배수는 2,3호 광장 저지대를 별도의 배수계통을 통해 입암천 상류로 배수하되, 자연유만으로는 배수가 불충분하므로 빗물 배수펌프장을 건설하도록 계획되었다. 그러나 남해배수펌프장 유수지와 입암천 토사퇴적으로 인해 배수펌프장의 배수효과가 저하된데다, 입암천 취수보와 하천정비과정에서 축소된 하상 단면 때문에 입암천 수위가 과거보다 상승되었고, 저지 배수로의 배수조건이 악화된 상태이 고 고지ㅐ수로 하류부는 입암천 유출부에 하천수 역류를 방지하기 위한 0.5m 높이의 턱이 설치되어 있고, 유출방향이 입암천 수로대 상이 (+)2.75m 이상지역만 배수가 가능하나 대상구역이 3m이상인 철도노선 구간이어서 문제 없다. 역싸이폰구간 토사퇴적으로 폐쇠될 경우 / 고지배수로를 통한 배수가 불가능해지므로 고지대 강우 유출수가 지표면을 저지대로 흘러내려 저지배수가 과부하로 인한 부분침수가 가 능하다. 입암천 및 남해배수펌프장의 경우 2002. 8. 7 강우와 계획강우에 대해 남해배수펌프 장과 유수지의 수리용량과 입암천 수문분석결과 고지배수로 유출부 수위는 설계수위 (+)0.28m에 비해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설계규모(통수능)와 실재강우상황의 규모 분석☞ 실재강우상황의 초기부터 노면에서 분류가 발생하였던 상황으로 보아 호우 규모에 크게 관계 없이 통수시스템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선행강우 등에 의한 통수단면적의 감소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지배수 수리시설의 수리학적 분석☞ 고지배수관로의 하류부 경사가 극히 완만하고 입암천과 남해배수펌프장 유수지와의 관계에서 배수효과를 발휘할 소지가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 시설현황에서 저수배수관로 시설을 통과하는 2곳의 under pass 구조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현황의 시설은 원설계와는 달리 설계변경이 이루어진 것으로 변경과정에서 원설계자의 의견 개진은 없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러나 원설계자와 책임감리자가 동일한 회사에 소속된 점 으로 보아 어떤 형태로든 변경 내용의 확인은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현장의 시공조건에 알맞은 시공상의 편의를 목적으로 한 설계변경이 상세한 분석 없 이 감리자의 허가로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로는 저지배수관로의 하부로 통과한 under pass 구조를 싸이폰구조로 보 았던 것으로 실제로는 싸이폰 성능이 충분하게 발휘되지 않는구조이며, 싸이폰 구조라고 하 더라도 간헐적인 또는 선행강우유출 초기와 말기에는 개수로 흐름이 되어 급격한 유속 감소 로 상류에서 유입되어 운송된 각종 토사가 퇴적하는 것에 대한 대비가 전혀 없다.☞ 선행강우 다.
{중앙아시아 소수민족의 생활과 문화▣ 누란국 민족의 생활과 문화☞ 약 2,000년전 서역에 누란이라는 작은 나라가 있었다. 누란이 동양역사에 그 이름을 나타낸 것은 기원전 120 ∼ 30년께. 그 이름이 역사에서 사라진건 기 원전 77년. 이로 미루어 보면 겨우 50년 정도의 짧은 기간, 누란왕국은 존재 한 셈이다. 누란왕국은 타클라마칸 동북의 어떠한 샘물도 살수 없는 문자그 대로 주검의 사막에 둘러싸인 페허다. 누란은 환상의 나라일 수밖에 없다. 양 관에서 1,600리 떨어졌고, 장안에서는 6,100리나 떨어져있다. 호구수는 1,570 호에 인구는 14,100명, 정병이 2,912를 헤아렸으며 도시의 주민은 아리아계출 신이며 상당힌 높은수준의 문화민족인데 이지역에서 발굴된 사료인카로슈테 이 문자의 목판, 헬레니즘양식의 목각등이 증명하고 있다. 염분이 많은 모래 에 뒤덮여 농경지가 귀하고 옥이 생산되며 갈대, 성류, 호동, 백초가 많이 나 온다. 주민은 목축에 종사하며 수초를 따라 생활한다. 노새를 기르고 낙타도 많다. 전쟁에 능하며 마치 약강과도 같다. 이곳 주민들은 중국 돈황 옥문관을 떠난 위치에 자리잡은 최초의 이민족 국가로 볼수 있다. 이나라의 번영은 동 서무역의 중계지로서 중국과 가장 가까운 지리적인 잇점을 충분히 활용한 때 문임인 것으로 생각된다. 중국이 서역을 국가로서 관계를 맺기 훨씬 전부터 타림분지의 남도와 북도의 여러나라들은 이미 중국과 서방쪽을 연결시키는 무역중계지로 번영해 왔다고 보는 것이 옳다. 누란은 퇴락하고 메마른 고장 이며 평민의 의복은 조잡하고 한인을 닮았다. 국왕은 불교를 선봉하고 있었 으며 승려는 4,000여명이었다. 모두가 소승불교였다.누란은 퇴락하고 메마른 고장이며 평민의 의복은 조잡하고 한인을 닮았다. 국왕은 불교를 선봉하고 있었으며 승려는 4,000여명이었다. 모두가 소승불교였다. 누란국의 후신인 선 선국의 도음 우니성은 호수가 1570 인구가 14,000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곳 은 국가라기보다는 도읍이나 정착지 정. 해발 900미터에서 1,100미터 높이에 있으며 강우량은 연평균 37mm이고, 기온은 6,7월중 낮에는 40도를 넘지만 겨울에는 영하 30도로 내려간다. 하루의 기온차는 격심하다. 인구는 1944년에 1904명이었고, 1949년에 2,000명이었는데 해방 이후부터 인구 증가율이 높아 져 1979년도에 13,160명으로 조사되었다. 에치나기에는 한족 이외에 몽고족, 회족, 티베트족, 투족, 다푸루족, 러시아족, 만주족 등 7개 소수민족이 살고 있다. 그중에 몽고족이 4,000명인데 그 70%가 토르후트 몽고족이다. 에치나 기에서는 토르후트 몽고족의 유목이 왕성하며 가축수도 1944년에 낙타 3,000, 말 1,000, 소 1,000, 염소 21,000, 양 9,000, 노새 1,000마리였다. 그런데 1979년 에는 낙타 32,885, 염소와 양이 1,471,115, 기타 합쳐서 145,200마리였다. 이지 역에는 낙타가 말보다 많고 염소가 양보다 훨씬 많았다.우리가 찾아갔던 토 르후트몽고인도 에치나에서는 말보다 낙타 사육이 더 쉽고 적합다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었다. 에치나기에는 동방홍, 소고노르, 코루나이, 온토콘, 사하토 레이등의 인민공사(집단농장)이 있다. 동방흥 인민공사는 에치나기 정부가 있 는 다란쿠부의 동남쪽에 있으며 인구 1,400의 대규모 조직이다. 토르후트 몽 고족과 한족이 함께 지내던 집단 부락이 있으며, 밀과 옥수수를 경작하고 있 다. 노르후트족은 파오라고 불리우는 집을 편리한 곳에 한 채 또는 몇채 짓 고 염소, 양을 방목하고 있다. 사막지대에서는 물기가 있는 곳에서는 타마리 스크나 호양나무가 자라는데, 이 나무는 높이가 10미터가 너는 대목으로 자 라며 수십그루씩 숲을 이루기도 한다. 파오는 이나무 그늘에 짓는데, 호양나 무는 건축재료나 가구재료로 사용되고 마른나무는 연료로 사용된다. 토르후 트 몽고족은 예부터 이 지역에 정착해서 살지는 않았다. 주로 타루바가타이 지방에서 유목 생활을 했다. 17세기 때에 쥬갈족이 강력해져서 이 지역에스, 타지크, 몽고, 가자프, 오로샤, 타타르, 만족 실로 소수민족의 잡거지대이다. 온통 불모의 바 다에 둘러싸인 도시로 작은 입자의 모래가 지리를 메우고 있따. 하지만 땅은 비옥해서 사람들은 농업과 목축으로 생계를 잇고 있다. 야르칸드 역시 당나 귀의 도시였다. 당나귀 떼 속을 걷고 있는 남녀 모두가 두툼하게 옷을 입고 있고, 경장을 한 사람은 찾아볼수가 없다.호오탄은 한이나 당의 사서에 서역남도 강국으로 등장하는 케리야의 고지다. 연구서에 의하면 기원전 2세기경에 벌써 동서 무역의 중계지로서 번영했었 고, 이란계, 인도계의 다채로운 문화의 꽃이 피었던 국제도시였다. 배화교도 퍼져있었고, 독자적인 언어도 갖고 있었던듯하다. 시대가 흐름에 다라 불교도 성행하고 절도 많이 세워져 훌륭한 불교미술이 태어남으로써 서역남도에 특 수한 문화권을 형성했었다. 그 번영은 11세기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여전히 사진의 도시오. 토담집의 도시인 호오탄은 토담집 지붕들은 모두 평평하다. 거리의 건물들은 모두 황색, 창들은 갈색 아니면 청색으로 칠해져 있다.구라파어족이 살고있는 곤륜의 옥에는 현재 인구 5만명, 작은입자로 된 모 래의 도시오, 대추나무가 많은 도시다. 중심가를 걸어보아도 한산하다. 건물 은 백, 황, 청의 어지러운 제멋대로의 색으로 칠해져 있고 집도, 가게도, 길도, 통행인도 모두 모래섞인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사짇속에서 귀걸이를 단 위구르인 아가씨가 나타난다. 이곳 역시 당나귀의 도시다. 여자의 복장도 가 지각색, 화려한 색과 무늬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어쩐지 성장을 하고 있는 듯 한 느낌이 든다.▣ 니야 소수민족의 생활과 문화☞ 지금의 니야는 대추나무, 포플라나무 가로수가 있는 한가하고 조용하고 밝은 도시다. 거리에서 만나는 여인들의 옷은 갖가지 색인데 정말 아름답다. 근대 적이기도 하다. 스카프, 웃옷, 쉐타, 스커트 할것없니 모두가 청,홍,백 원색으 로 되어있다. 그리고 모두 귀걸일르 달고 있다. 위구르아가씨쪽은 스커트 밑 에 바지를 입고 있는 것이 다를뿐이 뿐만 아니라 목초지, 식수림지대도 여기에 포함된다. 강의수량은 전년의 곤륜산맥 강우량 과 그 해기온으로 결정지어진다고 한다. 위구르사람들의 주식은 난 이라 불 리는 빵이다. 밀가루를 반죽, 편편하게 만든 것을 아궁이에 넣어 굽는다. 그 저 그것뿐이다. 야채나 고기등을 섞어 넣는것도 아니고 조미료를 넣는것도 아니다. 천년전부터 같은 제조법을 고수해 오고 있다. 집은 벽돌로 지어졌고 벽은 흙으로 되어있다. 집과 접해 있는 포도밭 넝쿨 밑에 토대가 있고 거기 에 주단이 펼쳐져 있다. 이곳은 가장의 권위가 대단하다.▣ 위구르마을 호오탄 소수민족의 생활과 문화☞ 호오탄지구 인구는 150만명이다. 그중 95%가 위구르족이라한다. 나머지 5% 를 한족, 회족, 타지크족, 기르기스족, 하자크족, 우즈베크족이 차지하고 있다. 여기서는 위구르족이 소수민족이 아니고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절대민족이다. 호오탄지구 중심 오아시스인 호오탄현 인구는 18만명, 그리고 네거리인 구루 팍을 중심으로한 시가지는 그중 5만명이 살고 있다. 호오탄은 예로부터 가장 양질의 옥시 산출됨으로써 이름을 떨쳐 왔다. 기원전부터 중국 역대 왕족, 귀 인이 다투어 호오탄옥을 탐냈던 것이다. 옥신앙이라고도 할만큼 당시의 옥숭 배는 대단했는데 그 양태의 단면을 1968년에 발굴된 중산왕의 『금루옥의』 에서도 볼수가 있다. 당시 사람들은 옥을 몸에 지니고 매장되면 유체가 썩지 않는다고 믿었다. 『금루옥의』는 그와같은 옥숭배, 옥애착이 가장 잘나타나 있는 예라 할 수 있다.『금루옥의』에 사용된 2,489장의 연녹색 옥판 역시 서 역, 즉 호오탄산임이 틀림 없다고 한다.호오탄에서는 오후 2시부터 4시사이가 휴식시간이다.이 시간만되면 사람들은 어디서나 서있던 그 자리에 벌러덩 자빠져 잠이들어 버린다. 이곳은 시간을 재는 척도가 다른데 우리들이 아무리 서둘러도 즉 30분이내에 도착하려고 하 는 거리도 이곳 사람들은 반나절이고 하루 고를 소요하면서 천천히 걸어간 다. 결코 서두르는 법이 없다. 위구르사람들은 이슬람교를 믿알수 있다. 인도 사람처 럼 선이 뚜렷한 얼굴, 이마가 넓고 광대뼈가 튀어나와 있는 티베트의 얼굴, 코가 높고 남빛 눈의 여성 등 구구각색이다. 몇세기에 걸쳐 투푸판을 말달려 다니던 갖가지 민족의 피가 그녀들 속에 흐르고 있는 것이다. 투루판의 포도 의 역사는 오래되며 고창국시대의 유적에서 발굴된 비단에도 포도가 빛깔도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집의 특징은 길가보다도 낮은 위치에 만들어지는 반 지하의 방이 있는 점이다. 이곳 투푸판은 서역아넹서도 중국의 중원문화가 가장 짙게 그림자를 남겨놓고 있으며,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지역이다.▣ 토크슨현 소수민족의 생활과 문화☞ 토크슨현 전역의 인구는 10만명, 시가지에는 1만명이 살고 있으며 민족은 위 구르족, 한족, 회족이다. 보리를 중심으로 한 농업이 중요한 산업이라고 한다. 토크슨에는 외국인의 출입이 거의 없다. 거리 중심의 십자로에는 일용 잡화 품을파는 상점과 문화관이라고 불리우는 일종의 집회장이 늘어서 있다. 하얀 빛깔이나 검정색의 동그랗고 작은 모자를 머리에 얹어 놓은 남자들. 빨강이 나 노란색의 스파프로 머리카락을 묶은 여자들. 길게 늘어뜨린 천으로 얼굴 을 가리고 있는 노파도 보였다. 당나귀의 차와 자전거가 좁은 거리를 점령하 고 있다. 때때로 질주하는 트럭의 클랙슨 소리가 요란하다. 높게 무성한 가로 수, 엷은 자색의 모래먼지에 온통 휩싸여 있다.▣ 천산 백성의 생활과 문화☞ 유목민은 몽골계의 토르후트족이다. 양고기의 큰덩어리, 모기향과 같은 모양 을 하고 있는 빵, 그리고 유구르트, 두꺼운 융단위에 가부좌를 하고 앉으면 , 우선 건배가 시작된다. 술은 우유주, 야크의젖을 발효시켜 용기에 넣고 아래 에서 데운다. 알코올 도수는 청주정도이다. 폭 2m가량의 시내에서는 여자들 이 세탁을 하고 남자들은 밧줄을 가지고 말에 올라타고 그뒤에서 말의 무리 들을 쫓고 있다. 얼굴생김새는 우리들과 비슷하다. 매일 마시는 전차는 지금 투푸판에서 말이나 낙타로 10일이나 걸려서 운반해 오고 있다. 여기서 전차 란 벽돌처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