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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랑세기(위작설과 진본설)
    -필사본 화랑세기(花郞世記)는 진본인가 위작인가-현재 우리는 두가지의 『화랑세기』를 갖게 되었는데 그 하나는 1989년에 공개된 『화랑세기』(이를 초록본(抄錄本)이라함)와 1995년 4월에 알려진『화랑세기』(이를 모본(母本)이라함)이다. 본래 화랑세기는 김대문(金大問)이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있는데 그가 저술한 원본(原本)『화랑세기』가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현재 학계에 알려진『화랑세기』는 한학자(漢學者)인 박창화(朴昌和)가 일본 궁내성 도서료에서 근무하던 중 김대문의『화랑세기』를 접하고 이를 따로 베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박창화가 필사한『화랑세기』가 김대문의『화랑세기』의 필사본이 맞는지에 대해 학계에서는 초록본과 모본이 진본이냐 위작이냐를 두고 많은 논란이 있다.여기서 먼저 필사본『화랑세기』의 초록본과 모본에 대한 관계를 알아보자. 초록본은 모본의 일부를 발췌한 것인데 1989년에 공개된 초록본은 뒷부분이 결락되고 현재는 앞부분의 32면이 남아 있다. 그 안에는 서문에 이어 1세 풍월주(風月主)인 위화랑(魏花郞)에서 15세 풍월주(風月主)인 김유신(金庾信)전의 첫면까지 남아 있다. 그에 비하여 1995년에 알려진 모본은 4세 풍월주(風月主)인 이화랑(二花郞)전의 뒷부분 3면부터 책의 끝까지 남아 있다. 초록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그 하나는 풍월주 전기(傳記)의 본문이고 다른 하나는 그에 대한 찬(贊)이다. 한편 모본에는 전기(傳記)의 본문에 이어 찬(贊)이 나오는 것 같지만 그 뒤에 세계(世系)가 나오고 있어 초록본과 차이가 있다.초록본은 모본을 발췌한 것이지만 발췌비율은 일정하지가 않다. 가장 적게 발췌한 전기는 문노(文努)전으로 모본에는 2,400자가 있는데 초록본에는 281자 정도만 발췌하였다. 그리고 가장 높은 비율로 발췌한 전기는 호림(虎林)전으로 초록본의 본문이 274자인데 모본에는 305가 있다. 따라서 초록본을 만들 때 일정한 비율로 정하여 발췌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그렇다면 초록본과 모본을 두고 맞지 않다고 한다.②노태돈 교수의 주장 : 노태돈 교수는 박창화는 교육기관이나 전문연구기관에 종사하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많은 사서들을 섭렵하였고 국문 장편소설과 시를 짓는 등 빼어난 문학적 자질을 지녔다고 하며, 그가 청주사범학교에 한국사 강사로 출강할 무렵 그가 '최남선(崔南善) 군(君)이 사학자라지만 사료를 많이 보지 못하여 딱하다'고 한 말을 통해 그의 저술들이 허세만은 아니라고 한다. 또한 일본 궁내성 도서료에 10여년간 근무하면서 조선관계 고문헌 정리를 담당하였다고 한다. 그러만큼 그는 김대문의 화랑세기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런 그가 만약 필사본 화랑세기가 진본이라면, 모본이 지닌 가치는 초록본에 비할 바가 아님을 몰랐을리 없는데 그가 모본 외에 따로 초록본을 만들었다면 그것은 박창화가 나름대로 생각한 기준에 따라 모본의 완성도를 높히기 위해, 즉 보다 진본처럼 보이게 하기 위한 창작적 작업이며 때문에 초록본을 따로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위작의 증거라고 주장한다.→이종욱 교수의 반박 : 박창화가 쓴 것이 분명한 여러 역사관계 책들의 내용을 보면 신라사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법흥왕(法興王)대의 역사에 관한 『금천대제법흥진왕기(金天大帝法興眞王紀)』라는 책을 보면 관직(官職)과 관등(官等)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었다는 점,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직관(職官)조에 대한 이해가 없는 점 등을 예를 들었다. 또한 사료를 이해하는 안목이나 사료섭렵의 범위도 대단한 것이 아니었으며 신라사나 화랑도에 대한 높은 수준의 이해가 있던 것도 아닌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에 화랑세기는 결코 박창화가 창작한 책도 아니고 또 박창화에게는 화랑세기를 위작할 능력도 없었다고 주장한다.2. 용어를 통해 본 진위 논쟁①노태돈 교수의 주장 : 노태돈 교수는『화랑세기』에 나오는 궁주(宮主)·전주(殿主)·전군(殿君)·모계(母系)·야인(野人)·수노청예(首露靑裔)와 같은 용어에 대한 검토를 통하여 위작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덧붙여 부계(되기 시작하였는지 모르지만 필사자에 의해 조합되었다고만은 단정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②이종욱 교수의 주장 : 화랑세기의 5세 풍월주 사다함(斯多含)전에 무관랑(武官郞)이 도망을 하는 중 밤에 궁장(宮墻)을 넘다가 '구지(溝池)'에 떨어져 다쳤는데 얼마 안되어 죽었다고 나와 있다. 여기에 나오는 궁장은 왕궁인 월성(月城)의 담장이 분명하며 해지는 '적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성 밑에 파놓은 못 또는 물길'을 뜻한다고 하는데 이는 해자(垓字)를 가리킨다고 한다. 한편 월성의 주변에 구지가 있었다는 사실은 발굴을 통하여 알려졌으며 따라서 구지라는 용어를 통하여 화랑세기가 위작일 수 없다고 한다.→노태돈 교수의 반박 : 필사본 화랑세기 사다함 전에는 무관랑이 사다함의 어머니(금진낭주(金珍娘主))와 통정을 하였으며 사다함은 이를 알면서도 그 일을 무관랑보다는 자신의 분방한 성관계를 엮어나가던 어머니의 잘못이라며 어머니를 탓하고 탄식하였다고 했다. 그러나 무관랑은 낭도들의 비난등에 의해 괴로워하다 금진의 그늘에서 벗어나려고 담장을 넘어 달아나려다 떨어져 다쳐 병들어 죽었으며 사다함이 그를 애통해 하다 곧이어 주었다고 나와있다. 노태돈 교수는 무관랑이 담장을 넘다 다쳤을 당시 금진의 거처가 월성이었다는 증거는 없으며 사다함이 자기 어머니와 통정이 원인이 되어 죽은 무관랑을 애통히 하다가 곧이어 죽었다는 것이 사실성이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또한 당시 신라 청소년들 사이에서 우정이 중시되었던 것은 사실이나 동시에 그 우정은 믿음을 근거로 하는 우정이었다고 한다.3. 풍속적인 면을 통해 본 진위 논쟁필사본 화랑세기에는 마복자(摩腹子)에 관한 기사가 있는데 즉, 자신의 정부(情婦)가 낳은 타인의 아들을 자신의 마복자(摩腹子)로 삼는다는 것이 그것이다. 필사본 화랑세기에 의하면, 비처왕(毘處王)의 마복자(摩腹子)로 일곱이 있었는데 이들을 '마복칠성(摩腹七星)'이라고 했으며 이들 중에는 당시 유력한 귀족들의 아들이라는 이들 중에는 유명한 이사부(異斯夫)도 포함되어 있고 법흥왕도속(婚俗)에서도 우리가 상상키 어려운 형태가 있었을 것이라고 상정하기 쉽지만 실제 그런 가운데서도 그나름의 일정한 규범이 존재한다며 그 예로 취수혼(娶嫂婚)을 들었다.취수혼은 형이 죽으면 형수를 취(娶)하는, 나아가 적지않은 경우에는 부(父)의 생후(生後) 생모를 제외한 부의 처첩을 데리고 사는 혼속(婚俗)으로서 지구상의 다수의 지역에서 널리 행해졌다. 필사본 화랑세기에도 이 취수혼의 혼인양식을 담은 사례들이 여러군데 보인다. 이 취수혼 제도는 유교적 윤리관이나 현대인의 도덕율에 비추어 볼 때 음란하게만 여겨질 수 있으나 취수혼의 혼속에서도 그나름의 규범이 존재한다고 하였다. 가령 취수혼이 선호혼(選好婚)으로 행해지는 사회에서 시동생은 미래의 배우자가 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형수와 시동생간에는 평소에도 친말한 사이이며, 퉁구스족이나 만주족에선 남편의 생존 중에도 시동생과 성관계를 가지는 경우를 암묵적으로 묵인하는 예도 있지만 그러나 처가 남편보다 나이가 많고 항열이 높은 손 위의 사람과의 성적관계는 엄격히 금지되었다. 이는 약자(弱者)의 처와 그 혼인을 보호하기 위한 조처였다고 한다. 그리고 과부가 된 여인을 취하는 데도 친족관계에 따른 일정한 그 나름의 순서가 있으며 취수혼 혼속에서 보이는 이런 면은 원시사회나 고대사회에서 언뜻 보기에 문란하게만 여겨지는 풍속에서도 그 내면에는 그 사회의 기본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그 나름의 규범과윤리가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그런데 필사본 화랑세기의 마복자는 그와는 달리 윗사람이 아랫사람의 처를 유린하는 것을 공적으로 보장하는 것인데, 그 실제성에 의문을 두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며 따라서 화랑세기는 박창화의 창작의 결과물이며 위작이라고 주장한다.②이종욱 교수의 주장 : 화랑세기를 보면 정비(正妃)·소비(小妃)의 정처(正妻)·부처(副妻) 및 처(妻)와 첩(妾)을 구별하였다고 한다. 또한 그들에게서 출생한 자식들도 적서(嫡庶)로 구별하였다고 한다. 사통(私通)관계와 그러한 관계에서 출생한 사자(私子)·사녀(私女)를 종자들을 얻었고 마복자들은 비처왕이라는 정치적인 후원자를 얻었다는 사실을 뜻한다고 한다. 따라서 비처왕과 그의 마복자들의 관계를 가지고 화랑세기를 위작으로 몰아가기 보다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신라사회의 한 단면을 찾게 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이종욱 교수는 주장한다.4. 향가(鄕歌)를 통해 본 진위 논쟁필사본 화랑세기에 수록된 향가(鄕歌)는 필사본 화랑세기에 대한 진본설 입장의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되고 있으며 이와 동시에 위작이라는 가장 결정적 근거로 제기되고 있다. 이 향가(鄕歌)를 둘러싼 진위 논쟁을 살펴보자.①노태돈 교수의 주장 : 신라 때의 향가가 수록된 가장 늦은 시기의 책은 삼국유사이고, 향가가 고려말기 이후로는 지어짖 않았고 또 해독되지도 않았으며, 향가가 다시 해독된 것은 1929년 이후인데, 만약 필사본 화랑세기가 삼국유사보다 앞시기의 저술이라면 이 책은 김대문의 진본일 가능성이 커지며 설사 김대문에 가탁하였던 것일지라도 고려 중기이전에 쓰여진 것이 되어 큰 가치를 지닌다고 전제하였다. 그러나 만약 필사본 화랑세기가 삼국유사를 참조한 흔적이 있다면 항가가 해독된 시기를 고려할 때 이 책은 1930년대 이후의 것이 되게 되므로 노태돈 교수는 이에 근거하여 삼국유사에서 보이는 착오를 필사본 화랑세기가 되풀이 한 점을 지적하였다. 이 문제의 구절은 다음과 같다.①母曰只召太后 初名息道夫人 乃法興王女也.(필사본 화랑세기 6세 세종 條)②母只召夫人 一作息道夫人 朴氏 牟梁里英失角干之女.(삼국유사 왕력 진흥왕 條)③母英失角干之女 息途 一作色刀夫人 朴氏 妃知刀夫人 起鳥公之女 朴氏.(동 진지왕 條)그 중 ②를 해석하면, '진흥왕의 어머니는 지소부인(只召夫人)으로 다른 말로 식도부인(息道夫人)이라고도 하며, 박씨이고 모량리 영실각간의 딸이다'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①을 본다면, 진흥왕의 어머니는 지소태후(只召太后)는 법흥왕의 딸 김씨이기에 서로 다른 해석이 나온다. 여기에서 말하는 一作息道夫人 朴氏는 삼국사기에서 전하는 진흥왕의 비인 사도부인(思道夫人)
    인문/어학| 2003.06.11| 7페이지| 1,000원| 조회(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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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4운동
    레포트5·4운동 전후의중국과 제국주의과 목 명 : 한국의 문화와 예술학 과 : 사(史) 학 과학 번 : 1 9 9 9 0 0 6 5이 름 : 성 인 경제 출 일 : 03년 6월 ??일담 당 교 수 : 나 희 라 선생님들어가기 앞서...전세계적으로 본다면, 19세기 말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까 지의 약 20여년은 고전적인 제국주의 시기였다. 유럽 제국은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하였고, 이 과정에서 축적된 국내 자본의 투하와 식민 지 경영을 위해 군사력을 앞세우고 아시아와 아프리카로 밀려들어 갔다. 아시아 지역에서는 일본과 러시아가 이 대열에 끼어 들었다. 미국 역시 유럽보다는 한발 늦었지만, 1890년대가 되자 태평양과 동아시아 지역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면서, 이곳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중국은 대표적인 제국주의의 각축장이었다. 청일전쟁과 그 결과 맺어진 시모노세끼 조약은 제국주의 국가들로 하여금 각종 이권을 놓고 경쟁할 기회를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예상되는 중국의 해체에서 오는 이득을 각자 계산하며, 서로 도와주거나 견제하고, 혹은 방해하면서 쟁탈전을 벌였다. 제국주의 국가의 중국 침략 형태는 조차지 획득, 조계 설정, 세력범위 분할, 이권획득, 관세담보 등, 매우 다양하였다.본문에서는 5,4운동을 전후로 하여 그 전시기로 19세기 말 왕조쇠퇴기의 제국주의와 그에 대한 중국의 모습을 살펴보고, 새로 생겨난 중화민국과 서양열강과의 모습으로 나누어 서술하였다. 또한 5,4운동의 의미와 그 이후의 신문화운동으로 대표되는 사회질서 속에서의 중국인들의 변화하는 모습과 마지막으로 국민혁명 이후 국민당 정권내에서의 중국과 제국주의의 모습을 살펴보았다.들어가며...(19세기 말 제국주의와 중국의 대응)① 중국에 대한 외국의 재정 수탈1901년 이후 새로운 제국주의의 지배는 '세력권'에만 국한되지 않고 북경의 전체 재정 구조에까지 확대되었다. 1893년에까지 약 25종의 차관이 중국에 있는 외국 자금원으로부터 중국 정부 기관에 주어졌다. 지불하지 못한 취적인 요구들을 내용으로 하는 이 재정 수탈의 제국주의 시대는 더욱 조용하게 상업적 침투와 경제적 성장을 겪은 이전의 수십년 동안을 무색하게 하였고, 그 이후 애국적인 중국인들에게 모든 조약 체제를 '외국 제국주의의 멍에'로 여기도록 하여 씻을 수 없는 증오심을 심어 주었다.② 미국의 팽창과 문호개방1890년대의 미국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미국이 유럽의 열강들과는 달리 아시아에서 전쟁을 하지 않았고 식민지도 강탈하지 않았다는 점을 당당하게 자랑하였다. 확실히 미국인 선교사들과 무역상들은 주로 영국 해군이 중국에서 획득하고 유지해 온 특권들을 누려 왔다. 그런데도 그런 사실을 적어도 미국인의 눈으로 볼 때, 미국인의 활동이 유럽에서 '뒤엉킨 동맹 관계'를 회피한 것처럼, 동아시아에서도 '제국주의'를 회피하였던 것으로 되었다. 영국의 독자적인 주장인 초혜국 대우와 기회 균등에 의지함으로써, 영국이 받았던 증오나 책임도 없이 자유 무역에 대한 영국의 지배력으로부터 혜택을 입었던 것이다. 그러나 식민지에 대한 유럽 인들의 경쟁이 전개됨에 따라 새로운 팽창주의자적 경향이 역사상의 우연한 사건들과 얽혀 강대국인 미국을 똑같이 동아시아 무대에 서게 만들었다. 미국인들은 스스로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제국주의라의 영향을 받기 쉬웠던 것이다.미국의 팽창은 유럽의 열강들과 마찬가지로 복합적 요인들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값싼 수출 상품을 생산하는 공업체들의 발전, 국내 서부 변경의 소멸, 그리고 해외 선교 사업의 전통 등이 그것이다. 해군력에 대한 탁월한 제안자인 해군 대령 머핸이 말한 것처럼, 사회적 다원주의와 북유럽인의 인종적 우월성이 시장과 식민지와 해군 기지를 물색하는 점에서 다른 나라들에게 뒤지지 않는다는 근거를 제공해 주던 시대에, 미국은 '밖을 내다보고' 있었던 것이다.의화단의 봉기가 외국 군대들을 1900년 여름에 북중국과 만주로 들어오게 만들자, 중국이 한 국가로서 살아 남을 기회는 어느때보다 더 위태롭게 보였다. 그러므로 1900년 7월에 회람장의 형식으 지불금으로 완전히 저당 잡혔다. 예전에는 외국인 세무사들이 잣니들이 징수한 관세 계산서들을 북경 당국에 보고하였으나, 실제로는 중국인 세관 감독관들이 그 돈을 거두어들였다. 이제는 대부분의 성들이 독립을 선포하였으므로, 외국인 세무사들이 먼저 관세를 받아 총세무사를 통하여 외국의 채권자들을 대변하는 상해의 국제 은행단에 전달하도록 결정하였다. 그렇게 하여 세관 업무와 중국의 대외 신용 및 채무금 지불의 일관성은 모두 유지되었다. 상해에서 외국인 지위는 혁명을 맞이하여 더욱 강화되었으니 1911년 말에 영사단이 회심 아문을 지배하면서부터이다. 상해와 해관 수입에 대한 외국인 지배의 확대는 염무처가 영국인 총감독 아래에서 근대화된 것과 더불어 불평등 조약체제의 초기 양상의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양면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중국의 신용도가 유지되어 외국 차관을 촉진하였으며, 염세 수입도 크게 늘어났다.조약 체제의 또 다른 모순적인 공로는 어느 한 강국의 탐욕이 다른 모든 열강들의 경계심 때문에 어느 정도 전제되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제 1차 세계대전은 열강들의 관심을 돌려놓고 일본을 침략의 길로 들어서게 만들었다. 1914년 8월, 중국은 중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오쿠마 내각은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하였고, 일본은 독일의 세력권인 산동에 군대를 상륙시켜 중국의 중립을 우롱하였으며, 그곳에서 독일의 모든 지위를 접수하였다. 이것에 이어 일본은 1915년 1월 18일 원세개에게 5항목으로 된 21개조 요구를 비밀리에 내놓았다. 그중 제 5항은 일본에게 경찰, 무기 구입, 병기 공장과 복건성 개발에 대한 특정한 지배를 고문제도를 통해 허용함으로써 중국 정부를 지배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터무니없는 조건들을 외국 신문에 누설하는 상투적 방법을 이용하여 원세개는 일본이 제 5항을 '앞으로 토의할 사항'으로서 어쩔수 없이 남겨두게 만들었다. 그러나 5월 7일 일본의 최후 통첩을 받고 그는 제 1항목부터 제 4항목까지의 대부분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영국 공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의 동의를 얻어 놓고 있었다. 이 비밀 각서는 또 미국과 체결한 1917년 11월의 랜싱-이시이 협정에서도 묵인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1918년 11월의 제 1차 세계 대전의 종결은 군국주의를 이긴 민주주의외 승리라는 점에서 서방 세계에 기쁨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1919년 1월에 열린 파리 강화 회의에서 북경과 관동 모두를 대표한 중국 대표단은, 마치 윌슨 대통령이 그렇였듯이, 윌슨의 민족 자결 원칙과 공개 외교가 동아시아에서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1918년에 북경의 군벌 정권도 역시 산동 지역에서 갖는 일본의 지위를 승인하는 비밀 협정들에 서명하였다는 것이 드러났다. 중국의 유능하고 젊은 외교관들의 주장도 헛일이었다. 중국인의 대중적 관심은 전례없이 고조되었다. 수백의 해외 화교 단체들이 항의 전보를 파리로 보냈다. 학생들의 분노가 북경 정부의 비밀 거래 때문에 끓어오를 때, 일본을 산동에 그대로 둔다는 파리 강화 회담의 결정 소식이 전해졌다. 5월 4일, 북경에 있는 13개 학교에서 3,000명 이상의 대학생들이 천안문에 모여 선언문을 채택하였다. 잇달아 시작된 시위는 학생들이 한 친일 관리를 '매국노'라 하여 두들겨 패고 한 각료의 집을 불지르면서 폭력화되었다.5,4운동의 역사적 충격은 구 뒤에 전개된 학생들의 정치적 운동 계획에서 왔다. 북경의 학생들은 남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여학생들도 포함된 연합체를 조직하였다. 그들은 신문과 상인들로부터, 손문과 광동 정부로부터, 그리고 군벌 경쟁자인 안복파로부터 재빨리 전국적인 지지를 확보하였다. 비슷하게 조직된 다른 도시의 학생들도 시위를 벌였고, 일본 상품들을 배척하기 시작하였으며, 거리에서 연설로써 지지를 불러일으켰다. 학생들은 그에 대하여 정치적 활동을 하도록 자극하였다. 5월말과 6월초에 200개 이상의 도시에 있는 학교들이 학생들의 동맹 휴학으로 휴교하였다. 학생들은 반일 애국심의 기치 아래 자신들이 정치적으로 새로운 세력임을 보여 주었다. 완력에 대한 통역을 곁들었다. 버트런드 러셀은 거의 1년 동안 머물며 국가 사회주의를 옹호하여 폭넓은 독자층을 얻었다.계급과 신분으로 이루어진 전통적 유가 질서에 대한 공격은 해묵은 '삼강'의 타당성을 부인하였다. 그 공격은 상응하는 세 덕목을 국가와 가족 안에 있는 전체주의의 버팀대라고 비난하였다. 반 유가주의자들은 부모의 학대, 결혼에 대한 부모의 결정, 그리고 가족에 대한 청년 남녀의 에속을 공격하였다. 서양에서 이루어지던 여성들의 참정권과 동등한 권리들을 위한 운동에 발맞추어 아직도 주장하고 있듯이 유가 사상을 국가 종교로 만들려던 많은 보수주의자들은 점점 더 심함 반대에 부딪쳤다. 유가적 속성들 또는 예의 원칙들은 개인을 묶는 쇠고랑이라고 바난받았다. 불평등한역할들에 근거를 둔 사회적 조화는 저주받았다. 노신은 "중국 문화는 주인에게 봉사하는 문화이고, 주인은 수많은 사람들을 비참하게 희생시키면서 의기 양양해한다"고 적었다.유가 사상에 대한 공격은 고대 중국에 대한 비판적 재평가를 고무하였다. 북경 대학의 의고파 학자들이 경전의 신빙성을 다시 평가하였다. 또한 호적고 k이제 정체계에서 은퇴한 양계초는 '국고 정리 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리하여 그들은 고대의 철학자인 묵자, 중국의 불교, 백화 소설의 역사와 청대 사상을 다시 연구하였다. 중국의 유산에 대한 이러한 관심은 제 1차 세계 대전 이후 '물질주의'가 가져온 환멸 때문에 고조되었다. 파리 강화 회의에서 돌아온 양계초는 서양 문명의 정신적 파탄을 확신하였으나, 그것은 '정신적 굶주림'으로 말미암아 물질주의적으로 되어 메말라 병들기 시작하였다고 보았던 것이다. 토론의 전과정은 주제들의 시비 곡직을 하나하나 논의하였다. 종교는 검토와 옹호와 광범한 비난을 받았다. 세계 그리스도 교도 학생 연맹이 1922년에 북경에서 회합하였을 때, 전국적인 반 종교 및 반 그리스도 교 운동이 학생들 사이에서 조직되었다.지적이고 문화적인 혁명이 전통적인 질서를 극복해 냄에 따라 그것은 일관된 목표를 상실해 버렸다. 학문적 탐구,였다.
    인문/어학| 2003.06.11| 8페이지| 1,000원| 조회(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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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엄사 평가B괜찮아요
    1. 개관-지리산과 화엄사지리산은 아주 먼 옛날부터 '3산 5악'의 하나로 숭상되었던 전통적인 산악 신앙의 본거지였다. 신라인들은 다섯 개의 중요한 산들이 그들의 국토를 동서남북으로 감싸고 있다고 믿었다. 중악 부악산, 동악 토함산, 서악 계룡산, 북악 태백산 그리고 남악 지리산이 그것으로 5악에는 중요한 산신들이 살면서 국토를 보호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 가운데 남악인 지리산 노고단의 산신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인 선도성모였고, 천왕봉 정산의 산신은 무당의 원조격인 마고성모였다.도교 사상이 중국에서 유입되면서, 지리산은 또한 도교의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 도교적 세계관에 의하면, 중국의 동쪽 바다에는 전설적인 삼신산이 있는데, 금강산의 봉래·한라산의 영주·지리산의 방장이라는 것이다. 방장산으로서의 지리산은 태을선인을 비롯한 여러 신선들이 사는 선계였다.불교가 전래되면서 지리산은 다시 불교의 성지로 탈바꿈된다. 신라인들은 전 국토를 온갖 보살들이 계시는 선택된 불국토라 믿었다. 예를 들어 금강산에는 법기보살이 계시며, 오대산과 지리산은 문수보살의 주처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런지 지리산은 수많은 사찰과 암자로 감싸진 거대한 불국토 만다라였다. 북쪽 기슭에는 실상사와 법계사, 동쪽에는 대원사, 남쪽에는 천은사와 화엄사, 연곡사, 쌍계사 그리고 지금은 사라져 이름도 전하지 않는 사찰들이 여러 골짜기에 둥지를 틀고 있었다.모든 신앙에서 중요한 성지로 여겼던 만큼, 지리산은 방대한 영역과 웅장한 자태를 지니고 있다. 지리산의 사찰 가운데 가람의 온전한 건축 모습을 보존하고 있는 곳은 실상사, 천은사, 화엄사, 연곡사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한국 불교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곳들이다. 구산선문의 하나로 거대한 실상산문을 이끌었던 실상사나, 이름 그대로 화엄종의 중요한 기지였던 화엄사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지리산은 하나의 산이 아니라, 수많은 봉우리들과 산맥들로 이루어진 지형적 복합체다. 「대도영지도」를 보면 여러 봉우리와 골짜기가 좋은 터전들을 마국사의 문인인 준소법사는 대각국사가 『속장경』을 간행하고 나서 화엄 전적을 모은 『원종문류』를 간행하는 데 참여하여 교정을 맡았다. 그의 직함은 화엄사 주지 젼현수교관의 학사문이었는데, 이는 그가 화엄학의 정통 계승자임을 말해준다. 이로써 화엄사는 고려시대에 들어서도 해인사와 함께 흥왕사, 불일사 등 개경의 중심 사찰과 더불어 왕성한 학맥이 전승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조선조에 들어 정책적인 탄압으로 불교게는 크게 위축되었다. 화엄사는 다행히 150결의 토지와 70인의 거승을 확보할 수 있었다. 36개 사원 중에서 전라도에는 선종으로 화엄사와 태인의 흥룡사, 교종으로 창평의 서봉사와 전주의 경복사가 있었으니 화엄사가 조선 전기 전통 사원 중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오랜 전통을 그나마 단절시키지 않고 다른 절들의 운명까지 업고 혜명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나, 어찌된 연유인지 화엄종의 주요사찰인 화엄사가 교종이 아닌 선종으로 분류되었다.〈임진왜란과 벽암대사의 대웅전 중창〉임진왜란으로 온 국토가 병화에 시달릴 때 화엄사도 잿더미가 되었다. 당시 화엄사에 머물던 승려들의 일부는 승병을 조직하여 왜적에게 분연히 대항하였고 일부는 토굴에 의지하여 터를 지켰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듬해 화엄사에 침입한 왜군은 유서 깊은 당우와 진장된 보물들을 모두 불태워 잿더미로 만들고 승려들을 학살하였다.임진왜란 당시 승병으로 활동하여 사명대사로부터 칭송을 들었던 명장 벽암대사는 인조 2년 (1624) 팔도총섭이 되어 승군을 독려하여 남한산성을 쌓은 지 3년 만에 마무리하였다. 그 공로로 인조 4년 '국일도대선사'의 예우와 의발을 예물로 받았으며, 3년 뒤에는 '대화엄종주'의 예우를 더 받았다. 그리고 나서 병화로 허물어진 사원 재건에 나섰다. 인조 8년에 화엄사 중건을 시작하여 7년 만인 인조 14년에 대웅전과 요사 일부를 완성하였다. 이렇게 완성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대웅전은 현재 화엄사에 남아 있는 건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계파대사의 각황세기 후반경 쌍탑식으로 구성 형식을 바꾸었다는 말이 된다. 무엇 때문에 가람의 형식을 바꾸었을까?화엄사에 얽혀 있는 이 모든 의문들을 해결할 만한 문헌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단지 현존하는 유적과 유물들 그리고 사적기의 단편적 기록을 토대로 추론이 가능할 뿐이다. 그 변화의 과정을 추적하는 가운데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우선, 몇 개의 중요한 변환기를 중심으로 화엄사의 건축사를 재구성해 보자.〈창건기-암자 수준의 가람〉화엄사는 544년 인도의 승려 연기조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한다. 창건 당시, 해회당과 대웅상적광전이라는 두 동의 전각을 세웠다고 하니, 이 때의 가람은 소규모 암자 수준이었던 것 같다. 창건기록에도 의문이 없지 않다. '대웅상적광전'이라는 금당의 명칭은 아무래도 후대에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대웅상적광전'이란 대웅저노가 대적광전을 합친 것을 의미하는 말로서 석가모니불을 모신 대웅전과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을 겸한 금당이라는 뜻이다. 이런 명칭은 고려시대 이후에 등장하는 것으로, 각황전과 대웅전을 같이 가지게 된 후대의 상황을 정당화하기 위해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화엄십찰 시절-일탑일금당의 가람〉670년 의 상대사가 현 각황전의 전신인 장륙전을 건립함으로써, 화엄사는 대대적인 중창기에 접어든다. 의상은 왕명을 받들어 화엄사를 화엄십찰의 하나로 지정하고 크게 중수했다는 것이다. 3층 4면 7칸의 장륙전을 건립하고, 그 둘레에 돌로 새긴 화엄경을 둘렀다고 한다. 화엄십찰의 존재를 기록한 『삼국유사』에는 그 소재지가 6개소만 밝혀져 있다. 그런데 같은 책의 최치원이 찬술한 부록에는 11개소라고 기록되어 있어 서로 차이를 보인다. 아마도 화엄십찰이란 특정하게 정해진 열 개의 사찰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화엄 신앙의 중요한 사찰을 통칭하는 대명사였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기록마다 차이가 나는 것은 당연하다. 물론 지리산 화엄사는 두 기록 모두에 공통으로 수록되어 있는, 명실상부한 화엄의 중심 가람이었다.장륙전은 불상을 모신 금당이라기보앉아 있는 단 윗부분이 이때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단 위에 새롭게 건립된 건물이 지금과 같은 대웅전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만약 현재와 같이 석가모니를 모신 대웅전을 주불전으로 새롭게 건립하고, 대웅전을 기준으로 좌우에 쌍탑을 둔 가람 형식을 구축했다면, 이는 화엄사의 주된 신앙이 화엄 계열에서 다른 신앙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곧, 정치적으로 패배한 남악파의 본산 화엄사는 그 실질적 주인이 다른 종파 또는 다른 신앙 계열로 바뀌게 되었고, 가람의 건축 형식도 화엄계 일탑 형식에서 쌍탑 형식으로 바뀌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이를 두고 도선대사의 도참 사상에 따라 가람의 구조가 바뀌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보다는 화엄사의 주된 교학이 바뀐 결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선종 대본산으로서의 화엄사〉조선조가 개국하면서 불교계는 축소 통폐합의 시련에 직면하게 된다. 이 시기에 화엄사가 어떻게 변모했는지는 전하지 않지만, 1426년 선종 대본산으로 승격되면서 다시 영화로운 시기를 맞게 된다. 그런데, 교종의 핵심인 화엄십찰에서 선종으로 종파가 바뀌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신라 때 조성된 장륙전은 물론 석경 벽도 무사히 조선전기까지 보존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의 와중에서 화엄사의 모둔 전각들은 모조리 불타서 폐허가 되고 말았다. 화엄사 재건이 시작된 것은 전쟁이 끝난 지 37년 만인 1636년이었다. 이때 중창주는 벽암 각성선사로, 그의 정치적 역량에도 불구하고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일부만 겨우 중건할 수 있었다. 당시의 전국적 경제 상황이 그만큼 어려웠다는 증거이기도하다. 장륙전은 1702년에 와서야 중건된다. 원래 3층이었던 규모는 지금과 같이 2층 규모로 축소되었고, 내부 공간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바뀌어 중건되었다. 그러나 근본적인 가람의 틀은 바뀌지 않았다. 고려 초 증축된 ㄱ자 석단부라든가, 각황전과 대웅전의 규모와 위치 등은 그대로 이전의 예를 따랐다. 각황전 중건과 아울러 원통전을 중건했다. 원통전 역시 이전의 오래된 기단과 초석을 그대로우함이었다.보제루의 동쪽을 돌아 오르면 운고각과 적묵당 사이에 서게 된다. 이 지점은 중심마당의 남동쪽 모서리에 해당하며, 전체 가람을 바라볼 수 있는 이곳은 각황전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지점이다. 대웅전까지의 거리는 각황전까지의 절반에 불과하다. 2층 7칸의 큰 각황전은 멀리 보이고, 1층 5칸의 대웅전은 가까이 보인다. 또, 각황전까지의 중간에는 대석단이 가로막아서 각황전 전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반면 대웅전은 그 앞의 석단에 바짝 붙어 있어서, 대웅전의 전체 모습이 올려다보인다. 각황전이 대웅전의 2배 정도의 크기지만, 거리에 반비례하는 시각적 차이를 이용하여 결과적으로 두 개의 건물은 거의 비슷한 규모로 보이게 된다. 절대적으로 큰 차이가 있는 두 개의 건물을 상대적 시각으로 보이게 하여 동등한 중심으로 바꾸어 놓은 절묘한 건축적 장치다.각황전과 대웅전을 동등한 중심 건물로 부각시키기 위한 의도는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우선 두 건물 앞에 설치된 계단들이 차이가 난다. 건물 크기는 대웅전이 작지만, 계단은 더 크다. 또한 보제루 동쪽에서 보면, 가까운 대웅전의 계단이 훨씬 부각된다. 대웅전 쪽으로 시각을 유도함으로써 크기의 결점을 보완하려는 의도로 보인다.마당에 놓인 두 5층석탑의 위치에 주목해 보자. 형태가 비슷한 이런 형식의 쌍탑은 대웅전 앞 좌우에 대칭되게 놓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화엄사의 두 탑 위치는 좌우로 나란하지도 않고, 대칭적인 거리를 유지하지도 않는다. 보제루 동쪽-이곳을 시각점이라 부르자-을 중요한 기준점으로 보았을 때, 이 시각점에서 보면 동탑은 대웅전에, 서탑은 각황전에 소속된 것으로 보인다. 동탑은 정확히 대웅전의 중앙에, 서탑은 각황전의 중앙에 놓여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시각점-동탑-대웅전이 일직선상에 놓이고, 시각점-서탑-석등-각황전을 잇는 축선 역시 일직선을 이룬다. 마치 두 개의 일탑일금당이 시각점에 모여 있는 것과 같은 절묘한 양상이다. 이 역시 대웅전과 각황전을 동등한 두 개의 중심 전각으로다.
    인문/어학| 2003.06.11| 11페이지| 1,000원| 조회(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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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교사] 한국 종교문화사 요약 및 문제제기
    《한국 종교문화사 요약 및 문제제기》제 1장 선사 및 삼국시대의 종교문화Ⅰ. 종교문화의 전개1. 신석기 시대의 종교문화구석기시대-불의 사용, 사냥행위, 사용된 도구 등신석기시대-어로와 수렵, 그리고 다양한 야생식물의 채집, 다양하고 발전된 도구, 장신구, 조각품, 팔지 등의 예술품, 무덤유적 등을 통해 신서기 인들의 종교모습을 추측문제제기-1. 당시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동물을 사냥대상으로 파악해 식생활, 의생활에 주 로 사용하였는데 이런 동물을 숭배의 대상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2. 신서기 시대의 종교문화를 파악하는데 있어서 사용할 수 있는 자료 및 유물의 한계점을 지적했는데 구석기 시대 사람들이 살았던 동굴에서의 벽화를 통해 종교적면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지않을까?2. 청동기, 철기시대의 종교문화초기청동기-제정일치사회: 청동의기, 신화와 의례로 정치권력과 종교권위를 동시에 소유 하고 권력정당화를 뒷받침할 수 있었던 유력집단이나 개인이 등장후기청동기, 철기시대-제정분리사회: 청동방울과 거울은 주술종교적 의기로서 종교직능자 가 존재를 뒷받침, 암각화를 통해 특별하고 성스럽게 여기는 종교 적 공간개념이 나타남문제제기-1. 종교의식에 사용된 청동의기는 주로 지배층에서 사용했는데 지배층이 경제적, 정치적, 종교적 지배력을 가지고 있던 당시, 종교의식에 사용된 청동의기는 주 로 지배층에서 사용했는데 이를통해 당시 피지배층에까지 종교관념 및 활동들 이 확산되거나 대중화될 여지가 있었을까?2. 초기청동기시대, 계급형성을 통해 지배계급이 등장 하고 국가 출현 단계에서 과연 지배자가 정치적, 종교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을까, 오히려 종교적 역 할 수행은 미흡하지 않았을까?3. 고구려의 종교문화고구려의 고분벽화는 고구려의 종교 모습을 잘 보여주는 종교자료이다. 이를 통해 고구려인의 불교세계 및 내세관, 천문학 수준등을 알 수 있으며 이 벽화를 통해 고구려인의 종교 특성은 한국인의 종교관념의 원형을 보여준다.문제제기-1. 고분벽화가 당시 고구려인의 지향성을 보여준다는데 고분벽화의미로서 존재의 근거를 설명함과 동시에 한 나라의 건국이라는 역사 사실을 전해주기도 하며 이것은 대체로 하늘에 대한 고대인의 신성한 경험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고대인의 하늘경험은 삶의 규범을 제시하는 원천, 삶의 준거틀, 원초적이면서 동시에 보편적인 종교경험이다. 이것은 제천의례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문제제기-1. 고대인들의 건국신화를 통한 종교경험이 원초적이고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지배층에 의해 강제되어졌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2. 단군신화를 통해 동물이 인간이 되길 희망하는 부분을 동물숭배라고 볼수 있는 가. 오히려 인간을 다른 동물(금수)과는 다르고 인간을 우상화하며 동물을 천시 한 당시의 모습을 반영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2. 고대 제천의례고구려의 동맹, 부여의 영고, 삼한의 천신의례, 예의 무친 등은 고대에 나타나는 제천의례로써 우리사회 고유전통으로 행해진 천에 대한 의례이다. 이것은 하늘에 대한 의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중심으로 여러 신을 모시는 공동체나 국가전체 의례라고 할 수 있고 이러한 한국 고대의 제천의례를 농경과 관련지어 수확의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문제제기-1. 고대국가 성립에서 국가주관으로 행해진 제천의례는 하늘을 숭배하는 종교의식 의 하나로 보여지나 실제 그 이면적으로는 왕권강화 및 왕에 대한 숭배, 감사 의 목적이 있지 않았을까?2. 제천의례가 왕권강화 및 정치지도자로서의 권위와 지배력을 정당화하고 강화시 켜주는 역할도 수행했다면, 본래 순수한 종교적 기능은 잘 수행될 수 있었을까?3. 원효와 의상원효와 의상 : 치열한 구도행과 대중교화를 행함. 원효에 이르러 해동의 불교교학은 최고의 수준에 도달했으며, 6세기 중엽부터 중국에서 신라에 분격적으로 공급되기 시작한 각종 경전에 대한 이해가 총합적으로 재정리, 새로운 해석과 교판이 이루어짐. 의상은 화엄교를 신라에 전했을 뿐 아니라 그 사상과 신앙을 널리 교육함으로써 화엄학이 한국에서 가장 중심적인 교학이 되는 기초를 마련함. 그의 주요한 활동은 제자를좌절되고 변질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몽골은 개경 환도 이후 고려에 지속적으로 종교 간섭을 자행하는데, 대표적인 예로 지배기 내내 사경승, 불경지, 불화, 대장경 등을 요구한 것을 들 수 있다. 한편 원 지배하의 고려에서 가장 커다란 사상 변동은 주자학의 유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문제제기-1. 외세간섭의 영향을 종교발전의 부정적인 면이 아닌 선진문화의 수용의 측면으 로 긍정적으로도 바라볼 여지는 없는가?2. 주자학이 국가 지배이념으로 되넋은 더 이후의 일인데 그렇다면 주자학이 들어 올 당시에는 고려내에서 주자학의 역할이 미비하지 않았을까. 또 내부의 모순 해결을 위한 주자학의 활용도가 과연 얼마나 높았을까?5. 불교계의 신앙결사운동불교계에서 과거의 사치와 안일에서 벗어나 새로운 신앙운동으로 불교를 혁신하려는 움직임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이 집단 신앙운동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신앙결사운동이었다. 하지만 수선결사와 백련결사로 대표되는 고려후기 불교계의 신앙결사운동은 13세기중반 대몽항전기를 거쳐 원 지배기로 접어들면서 서서히 퇴조한다.문제제기-1. 당대 불교의 타락을 불교자체의 타락이 아닌 불교 수행자 및 그것을 이용하여 정권안위를 꾀하였던 위정자들의 타락으로 구분해야 하지 않을까?2. 신앙결사운동의 한계성이 명백한데 그로 인해 불교의 자리가 위축되지 않았을 까?6. 성리학의 도입14세기초부터 사회세력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신진사대부세력은 성리학을 이념기반으로 고려사회를 전면적으로 개편하고자 하였으며, 이러한 신진사대부세력의 성리학적 사회개혁은 조선왕조가 개창되면서 완수되었다. 성리학 도입은 11세기중엽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당시 고려사회가 안고 있던 심각한 사회모순과 동아시아 정세도 성리학을 수용하는데 하나의 계기를 제공하였다.문제제기-1. 당시 성리학의 도입은 일반인 내에서 거부감이나 갈등을 일으키지 않았을까. 또한 유교의 뿌리가 내려지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까?2. 조선의 통치 이념은 유교였지만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불교적 문화가 크 게 시기 불교정책은 16세기 이후로는 철저하게 불교교단이나 공식활동을 무시하고 배척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후 3세기에 걸쳐 중하층 승려를 중심으로 탁발문화와 재공양의식의 정비를 통해 민중의 곁에 다가서고 사원경제 자체를 자립적으로 일구어냄으로써 국가의존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등 이전에 볼 수 없던 불교문화를 창출하였다.문제제기-1. 조선불교의 모습중 왕실의 번영과 안녕을 위해 불사를 일으킨 예도 있지 않나?2. 불교탄압에 대한 승려들이나 민간인들의 반발이나 저항은 없었는가?5. 조선중후기 불교의 재편조선 중기 이후 불교는 교학과 수행 측면에서 재래의 선종이니 교종이니 하는 종파적 틀에 얽매여서는 생존해 나갈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승려의 교육과 수행이 함께 이루어지는 선교겸학의 전통이 새롭게 형성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따라서 외전인 유학에도 밝으면서 경전인 내전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선종법손의 대강백을 많이 배출하여 주요 교과에 대한 주해서 내지 지침서인 사기를 많이 저작하여 조선후기 승려의 기본 교육 틀이 완비되었다.문제제기-1. 유교가 정치적 이념으로서는 자리잡았지만 종교적 이념으로서도 자리가 잡혔다 고 할 수 있는가?2. 불교계는 조선사회의 탄압에 대한 역작용으로 오히려 종파에 더 단단히 얽매이 려는 경향도 있지 않았을까?6. 유교사상의 다변화와 실학의 등장조선시대 유교의 주류는 주자학이었다. 그러나 실학은 17세기말부터 기존 주자학의 교조주의적 폐쇄성에 반발하여 제도 개선책에서 출발하여 근대 상공업과정치적 민주주의의 이상을 쌓아 당대의 사상을 풍성히 하였던 것으로, 정치 실권을 차지하지 못해서 좌절되기는 했지만 그 영향력은 지속적으로 이어져 이후 개화사상까지 영향을 미쳤다.문제제기-1. 실학을 역사발전단계로 나누어 구분하는데 이 구분을 명확하게 나눌 수 있었을 까. 실학자들은 오히려 전 부분에 걸쳐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지 않았을까?2. 실학과 종교와의 관련성을 짚어볼 수 없었을까?7. 서학의 유입과 신앙집단의 형성조선 후기 서학 수용은 조선 천주교회 창설과 로 나타날 수 있었을까?5. 마을의 변천과 신앙 구성14세기에서 15세기에 자연촌 단위의 독자적 행사조직으로 변모되면서 초보적 기층조직이 발생한다. 16세기 이후로는 유교 예제가 지방에서 실현되는 형태은 동계의 하부단위로 통합된다. 18세기 중반이후로는 소위 양반마을과 독립되거나 새로이 생성된 신촌등 민촌이 발전하면서 독자적인 마을조직이 새롭게 정비되며 조선시기 마을에서 이루어졌던 신앙생활은 크게 보아 세시풍속과 평생의례, 그리고 불교와 무속으로 구분할 수 있다.문제제기-1. 민간신앙과 조직을 연구할 때 마을 단위의 각종 결합형태를 통해 그 관계를 밝 히기에는 한계가 있지 않을까?2. 불교가 민간에게 신앙의역할을 담당한다고는 하나 그 영향력이 컸을까?제 4장 근대의 종교문화Ⅰ. 종교문화의 전개1. 근대 종교지형의 성립서구 근대성, 사회의 적합성이나 정체성에 관계없이 종교영역에 자유경쟁체제를 불러온 정교분리원칙, 그리고 특정종교를 사회에 정착시켜 준 공교육제도 등의 도입은 근대 종교지형 형성에 가장 직접적인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한국의 근대종교는 한국 전통종교는 전통을 계승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고 서구 기독교가 수용되면서 전통과 근대의 갈등관계가 형성되었고 종교의 불균등 발전이라는 파행적 결과를 가져왔다.문제제기-1. 불교 승려들이 의병운동에 참여한 일도 있는데 이것을 전통종교가 외세극복을 위한 현상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2. 천주교의 등장때와는 달리 기독교의 수용을 전통과 근대 종교의 갈등의 시발점 으로 보는 이유는?2. 동학의 발생과 발전최제우는 동학을 기왕의 유,불,도 그리고 천주교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도요, 학이며 후천운수를 지닌 도로서 후천개벽을 이루어낼 수 있는 천명을 부여받은 도로 선포하였다. 그러나 최제우의 순도 이후 지하화한 동학은 해월 최시형의 교단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1890년대 들어서는 삼남지방 전역에 걸쳐 교세가 널리 확산되었다. 그러나 동학농민전쟁이 외세와 이에 결탁한 수구세력의 폭력적인 진압으로 '교조신원'하였다.
    인문/어학| 2003.06.11| 18페이지| 1,500원| 조회(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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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치윤의 해동역사 평가A+최고예요
    1. 韓致奫의 生涯 12. 19세기 초 『海東繹史』의 역사적 배경및 문제제기 13.『海東繹史』편찬에 이용한 資料 24.『海東繹史』의 體裁와 內容 31)『海東繹史』의 體裁 32)『海東繹史』의 內容分析 4①「世紀」의 分析―『海東繹史』의 한국사 체계 4②「志」의 分析―『海東繹史』의 문화사 이해 5③「考」의 分析 75.『海東繹史』의 史學史的 지위 9《참고문헌》1. 한치윤(韓致奫)의 생애(生涯)1765년(영조 41) 본관은 청주(淸州). 자(字)는 대연(大淵), 호(號)는 옥유당(玉 堂). 헌납 덕량(德良)의 손자로 통덕랑 원도(元道)의 아들이며 고령신씨(高靈申氏)를 어머니로 하여 한성(漢城) 남부(南部)의 나동(羅洞)에서 출생했다. 그에게는 치규(致奎)라는 9살 위의 맏형이 있었다. 아버지 원도는 본래 벼슬을 갖지 못했으며, 진사(進士), 생원(生員) 같은 자격도 얻지 못했다. 그러나 한치윤의 가계(家系)는 평민(平民)은 아니었다. 그의 가계(家系)는 조선 초 훈구파(勳舊派) 가문에서 출발하였으나, 사림(士林)이 득세하던 성종조(成宗朝) 이후로 점차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여 16세기 말 동서분당(東西分黨)) 동서분당(東西分黨) : 선조 8년, 김효원과 심의겸이 이조전랑 자리를 두고 대립하였던 일.이 나타난 이후로는 동인(東人)·남인(南人) 계열에 속하여 권력의 핵심에서 점차 멀어지게 되었다.1789년(정조 13) 한치윤이 25세가 되던 해에 진사(進士)에 합격했으나 이해 백씨(伯氏) 치규(致奎)가 4살 난 조카 진서(鎭書)를 혈육으로 남긴채 34세의 약관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는 등 가세의 빈곤으로 그 이상의 과업(科業)을 중단하였다. 처사(處士)로서 일생을 바치기로 작정한 한치윤은 서울 지방의 청류(淸流) 양반들과 교유하면서 독서와 학문에만 전심했다. 유득공(柳得恭), 김정희(金正喜)를 위시하여 홍명주(洪命周), 이해응(李海應), 김유헌(金裕憲), 심영석(沈英錫) 등의 북학파(北學派) 인사들과 친분을 맺었다. 그의 족형(族兄)이자 죽란시사(竹欄詩社)의 일원인 한치응(韓도 그들은 신비주의적인 말세(末世) 사상에 젖어 있을 뿐이었다. 이러한 시기에 그들의 욕구를 다 반영하지는 않았지만, 18세기에 꽃피었던 실학(實學)의 전통을 계승하여, 이를 좀더 근대적(近代的), 민중적(民衆的)인 방향으로 발전시킨 학자들이 있었다.) 실학은 근대 지향을 전제로한 민족의 존립과 번영을 강조하는 것으로써 중화중심을 탈피하려 하였으며 그러한 의식을 작품에 반영하려 하였다.몰락양반과 중인층(中人層)이 그들이었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그 중에서도 가장 우뚝한 대표적 학자이다. 새 문화운동은 사학(史學) 분야에서도 예외일 수 없다. 정약용도 사학 분야에서 중요한 공헌을 한 이지만, 사학 전문가는 아니었다. 사학 분야에서 가장 탁월한 업적을 낸 이는 한치윤과 그의 조카 한진서 이다. 이 두 사람은 평생 오직 사학에만 전심한 최초의 사학 전문가이다. 18세기 말의 안정복(安鼎福)도 당시로서는 뛰어난 사학자(史學者) 였지만 경학(經學)에의 관심을 다 버리지는 않았다. 이에 비한다면 한치윤·한진서는 경학에서 완전히 독립된 사학자로서 특이한 위치를 차지한다.지금까지 『해동역사』는 『동사강목(東史綱目)』(안정복),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이긍익)과 더불어 조선후기 실학자(實學子)의 삼대사서(三大史書)로 평가되어 왔으나 의외로 그 연구는 한적한 편이다. 워낙 부피가 커서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점도 있으나, 지금까지의 관심은 주로 그 백과사전적 체재(百科事典的 體裁)와 문헌고증적(文獻考證的) 편찬 태도에만 집중된 감이 있다. 이 책이 사서(史書)로서의 가치를 정당하게 인정받으려면, 그러한 외형적 문제보다는 편찬자들이 무엇을 목적으로 하여 한국사를 어떻게 이해하려고 했으며, 그러한 역사인식이 사학사(史學史)의 전후 문맥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무엇이냐의 문제일 것이다.3.『해동역사(海東繹史)』편찬에 이용한 자료(資料)『해동역사(海東繹史)』는 고증학적 방법에 의해 쓰여진 고서(古書)인 까닭에 자연히 이용자료가 많고, 자료에 대한 찬자의 비판적 해석이 첨가된 등 많은 유서(類書)들이 발간되었는데, 『해동역사(海東繹史)』는 이러한 유서(類書)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여기에 고증학적인 측면이 가미됨으로써 유서(類書)의 수준을 한단계 뛰어넘었다고 할 수 있다.「지(志)」 다음으로 분량이 큰 것은 26권으로 된 「고(考)」로서, 그 중에서 「지리고(地理考)」가 15권으로 가장 비중이 크다. 사서(史書)의 체재상 「고(考)」라는 형식이 도입된 것도 특이하거니와, 그만큼 이 책은 사실고증에 역점을 두었다는 점에서 획기적 의의를 갖는다.끝으로, 『해동역사(海東繹史)』의 앞부분에서 다루어진 「세기(世紀)」는 16권으로 분량상으로는 가장 적다.『해동역사(海東繹史)』의 체재와 관련하여 정작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찬자의 「술이불작(述而不作)」의 태도이다. 「술이불작(述而不作)」은 해석보다 자료를 앞세우는 편찬방식이다. 따라서 그것은 정치적이기보다는 학구적이고, 이념적이기보다는 실증적인 편사(編史) 방법이다. 한치윤 자신이 범례(凡例)나 서문(序文)을 직접 쓰지 않은 것도 이러한 태도와 관련된 것은 물론이다. 그가 이러한 편사(編史) 태도를 갖게 된 것은, 그 자신 명분(名分)에 대한 상대적 무관심의 표현인 동시에 역사를 도덕(경학)에서 분리하여 독립된 학(學)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은 것이다.그러나 한치윤이 「술이불작(述而不作)」의 실증적 객관적 술사(述史) 태도를 보여 주었다 해서, 『해동역사』가 단순한 자료집으로 만들어 진 것은 아니다. 자료의 필요한 부분에 안설(按說)이라는 제목하에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여 인용자료에 대한 비판·검증·보완을 시도하고 있을 뿐 아니라, 자료의 분류입목(分類立目)에 이미 찬자의 주관적 역사의식이 어느정도 반영되어 있다. 다만 그 주관이 이론적으로 제시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 사서(史書)로서의 한계성이 드러나고 있다.2)『해동역사(海東繹史)』의 내용분석(內容分析)①「세기(世紀)」의 분석―『해동역사(海東繹史)』의 한국사 체계『해동역사(海東繹史)』에서 우리가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단군조선(檀 것으로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해동역사(海東繹史)』는 삼국(三國)의 입국(立國)순서를 통설과 바꿔 놓았을 뿐 아니라 「인물고(人物考)」에서도 고구려 20명, 백제 30명, 신라 20명을 수록하여, 『삼국사기(三國史記)』열전(列傳)에서 고구려 10명, 백제 3명, 신라 56명으로 구성해 놓은 틀을 근본적으로 뒤바꿔 놓았다. 이는 취급자료의 차이에서 온 결과이지만 어쨌든 신라중심의 삼국상(三國像)을 깨뜨린 것은 획기적 의의를 갖는다.삼국(三國) 다음에 통일신라(統一新羅)를 따로 설정하지 않고, 그 대신 발해(渤海)를 독립된 「세기(世紀)」로 서술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발해시조 대조영(大祚榮)이 고구려후예냐 말갈족이냐는 중국측 기록에도 양설이 있고, 우리나라 학자들도 의견이 엇갈려 왔는데 한치윤은 고구려후예설을 따라서 당당하게 한국사에 편입시킨 것이다. 이점은 「발해세기(渤海世紀)」의 성격과 관련하여 주목할 사항이다.『해동역사(海東繹史)』는 발해(渤海) 다음에 고려(高麗)를 서술하고 끝으로 가라(加羅)) 가라는 가락국이라고도 불리며 가야를 칭한다. 김수로왕을 시조로 하며 후에 신라에 병합되었다., 임라(任羅)) 임나는 변한 지역의 한 부분으로 후에 신라에의해 멸망하였다., 탐라(耽羅)) 탐라는 바다 섬나라로서 제주도를 칭한다., 태봉(泰封)) 태봉의 수도는 철원으로서 왕은 궁예이다., 후백제(後百濟)) 후백제의 수도는 전주로서 왕은 견훤이었다., 휴인(休忍)) 휴인은 신라 동쪽에 위치하며 삼한의 한 종족으로서 백제에의해 멸망하였다., 비유(沸流)) 압록강 바깥쪽에 도읍을 세웠고 고구려에의해 멸망하였다., 정안(定安)) 정안은 마한의 한 종족이다.등 8개국을 「제소국세기(諸小國世紀)」로 묶어서 서술하였다. 고려는 혈통상으로는 고구려와 연결되지 않지만 지역적으로는 고구려의 후계국가라는 전제하에서 「고려사」에 누락된 사실들을 많이 보충하였는 데, 「고려도경」등 중국측 자료에 잘못된 기사는 「고려사」를 표준으로 하여 바로 잡기도 하였다. 침략할 때 이용한 해로(海路)를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으며, 「병지(兵志)」에서 임진왜란 때 조총(鳥銃) 때문에 고생한 사실을 상기시키고 국방력 강화의 한 방법으로 무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해동역사(海東繹史)』의 지(志) 중에서 또 하나 강조되어야 할 것은 「예문지(藝文志)」다. 「예문지(藝文志)」는 어느 지(志)보다도 분량이 많은데, 경적(經籍)과 시문(詩文)을 비롯하여 서법(書法)·비각(碑刻)·그림 등 여러 분야에 걸쳐 한·중·일 3국간의 문화교류에 관한 자료가 폭넓게 수록되어 있다. 이 「예문지(藝文志)」를 통해서 동아시아 3국간의 문화교류사에서 우리나라의 지위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 부각되고 있다.「예문지(藝文志)」에 실린 기사들은 단순한 목록학(目錄學)의 수준을 뛰어넘어 직접 본문(本文)을 수록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특히 시대별로 따진다면, 지금까지 가장 빈약한 자료밖에 전하지 않던 백제 관계 예문(藝文)자료가 비약적으로 보완된 것은 특기할 만하다. 또 결과론적인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예문지(藝文志)」는 우리 문화가 중국의 영향만 받은 것이 아니라 영향을 준 것도 있고, 중국인의 눈에 높은 문화국으로 비쳤으며 특히 일본에 대해서는 일방적으로 문화를 전수하는 관계였다는 것을 보여준다.일본에 대한 우리의 문화전수 사례는 비단「예문지(藝文志)」에서만 밝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교빙지(交聘志)」의 '통일본시말(通日本始末)'에서도 일본의 서적·유교·기용(器用)·공기(工伎)등이 모두 백제로부터 건너갔다는 사실을 한치윤 자신의 안설(按設)로써 설명하고 있다.이외에도 천문(天文)·기후(氣候)·역(曆)에 대한「성력지(星曆知)」, 동이(東夷)·고조선으로부터 조선조에 이르는 기간의 악제(樂制)·악기(樂器)·악가(樂歌)·악무(樂舞)에 관한 자료인 「악지(樂志)」, 형제(刑制)를 다룬 「형지(刑志)」, 석교(釋敎)·사찰(寺刹)·명승(名僧)에 대한 「석지(釋志)」가 있다. 특히 불교를 이단으로 취급하는 성리학자(性理學子)의 입장으로서는 「석지(釋志)」의 설정은 었다.
    인문/어학| 2003.06.11| 12페이지| 1,000원| 조회(1,0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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