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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육사]한국 교육사의 변천과 역사교육의 바람직한 방향 모색 평가A좋아요
    1장 한국 교육사의 변천Ⅰ. 삼국시대의 교육1. 고구려고구려는 중국에 가장 인접해 있다는 지리적 조건과 언제나 중국과 밀접한 문화적 관계를 갖게 되었던 역사적 배경 속에서 삼국 중 제일 먼저 학교 교육이 나타났다. 고구려의 학교교육은 소수림왕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재위2년(372)에 설립한 태학에서부터 비롯되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태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하였다’고 되어있을 뿐, 태학의 교육이념, 학제, 교육내용 등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없다. 단지 ‘유학적 경전, 역사 서적, 한자 사전 등이 고구려에 있었고, 귀중하게 여겼다’는 중국의 기록으로 보아, 태학에서는 오경을 비롯한 유학경전과 유학적 명분을 강조하는 역사서를 주로 가르쳤을 것으로 판단된다.고구려에는 태학 이외에 방방곡곡에 경당이라는 지방 사립 초등교육기관이 있었다. 이곳에서는 평민층의 자제들에게 경전과 활쏘기 등을 가르쳤으며 우리나라 일반 민중교육기관으로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경당에서 나타나는 고구려 교육의 중요한 특색은 통경(문), 습사(무)라 하여 무인양성을 위한 교육을 일찍부터 중요시하여 실시하였다.2. 백제백제는 B.C. 18년에 건국하여 678년 간 존속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백제에 학교가 있었다는 문헌상의 기록은 없으나 일본 역사에 기록된 백제와의 문화교류로 보아 고도의 학술이 발달되었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박사제도를 통해 백제에 학교가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박사는 학식과 인품이 높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칭호로서, 대체로 교육활동에 종사하는 자에게 주어졌다. 그리고 실제로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 문헌에 박사들이 등장하는 시기에는 박사들이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이 있었다. 그런데 백제에 관한 문헌 기록에는 박사들이 등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백제에도 학교가 존재하였을 것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서기 375년 ‘박사 고흥을 얻어 기록을 갖게 되었다’는 기록이나, ‘박사 왕인이 285년 일본에 천자문과 논어를 전했다’는 기록이 그 예이다.3. 신라신라 사회에도 학교가지휘자와 그를 따르는 낭도로 구성된다. 그리고 화랑이 되는 조건은 14~5세에서 17~8세에 이르는 귀족 출신이어야 하되 동시에 강력한 도덕의식과 함께 수려한 외모를 갖추어야 했다. 낭도는 지배계급인 귀족의 청소년과 함께 평민 출신의 청소년으로 구성되었다. 화랑조직은 귀족과 평민이 함께 이룬 조직이었던 것이다.화랑도의 교육과정은 칼쓰기, 창쓰기 등의 무예를 연마하고, 산세와 물길이 조화를 갖춘 경치 좋은 곳을 찾아다니며 집단적으로 교육 수련활동을 하는 것이었다. 또한 춤과 시, 노래로써 풍류를 즐기면서 정서를 연마했다. 화랑도 교육은 문무가 일치되고 지?덕?체가 겸비된 교육이었으며,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육사적 의미가 크다.삼국통일 후, 신라는 중국과의 활발한 교류로 당의 국자감을 모방한 국학을 신문왕 2년(682)에 설립하였다. 국학은 신라가 갑자기 넓어진 영토와 증가한 인구를 다스리기 위한 통일정치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이에 필요한 인재양성과 관리양성을 목적으로 설치된 것이다. 통일초기에는 국학이 그 교육적 기능을 다할 수 있었으나 중엽에 와서는 독서삼품과라고 불리는 새로운 모습으로 되었다. 독서삼품과는 과거제도의 전신이라 할 수 있으며 인물등용방법이 문벌에서 실력으로 전환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Ⅱ. 고려시대의 교육고려 건국 초기의 학교교육은 전적으로 신라의 것을 계승하였기 때문에 독창적인 학교제도를 확립하지 못하였으며 성종대에 이르러서야 고려왕조로서의 학교제도를 갖게 되었는데, 관학으로서는 중앙에 국자감, 지방에 향교 그리고 사학으로서는 12도와 서당이 있다.국자감은 국가적인 종합대학의 성격을 갖고 등장하여 국자학?태학?율학?서학?산학 등의 다양한 교육과정을 포함했다. 실질적으로는 국자학이 고등교육기관의 성격을 띠며 과거제와 밀접한 관련 속에 발달했다. 교육내용은 유학경전(논어, 효경, 춘추3전, 예기2서, 주역, 시경, 상서)이었으며, 그 외 산술과 시무책을 익히게 하였고, 국어, 설문, 자림 등 한자관련 서적물의 읽기, 그리고 쓰기 등을 설고등교육기관으로 상류층 자제들의 과거시험을 위한 준비교육기관이었다. 그 수준은 국자감과 거의 비슷하였고 이 12도는 사립이었으나 국가가 감독을 하였는데, 이는 국가가 12도의 교육을 그만큼 중히 여긴 증거로 볼 수 있다. 설립된 시기는 각각 다르나, 주로 문종 이후에 설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2도의 시초는 1055년(문종 9년) 벼슬에서 물러난 최충이 자신의 집 사랑채에 사숙을 열어 후진을 양성한 데서 비롯되었다.고려시대에 지방의 서민층의 자제를 교육하는 초등교육기관이라고 볼 수 있는 서당에 관한 기록은 자세한 문헌이 없다. 그러나 송나라 서긍의 ≪고려도경≫에 나타난 기록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고려 때부터 서당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개인의 재능에 따라 천자문?통감에서부터 사서감경에 이르기까지 배울 수 있었으며, 여기서 뽑힌 사람은 향학에 진학하였다. 서당은 조선시대에까지 이어져 발전하였다. 서당을 교육사적 흐름에서 보면 고구려 시대의 경당이 어떠한 형태로든 민간 초등 교육기관으로 존립하였다가 고려시대에 서당이라는 이름으로 더욱 발전하여 조선시대에까지 이어진 것으로 판단된다.고려교육에 있어서 학교의 과목은 인물 등용문인 과거과목이었고 그 교육은 과거합격을 위한 교육이었으며, 교육의 주목적은 지도자적인 인재를 양성하는데 역점을 두었다.Ⅲ. 조선시대의 교육조선의 교육제도는 고려의 교육체제를 그대로 계승하여 고려시대의 교육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으며 관학으로서 중앙에 성균관, 지방에 향교, 사학으로 서당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제도는 각각 독립적인 것이었으며 국가적으로 유기적인 학교체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의 교육은 수기야인을 교육의 목표로 하고, 유교주의를 교육이념으로 일관하여 왔다.성균관 조선시대 최고 학부이다. 이는 태조 이성계가 설립한 것으로 조선 말기에 '경학원'으로 개편될 때까지 국학으로서의 위치를 잃지 않았다. 조선 초의 '학령'에 의할 것 같으면 "성균관의 학생은 사서오경과 제사를 항상 가까이 하며 노장과 불도를 멀리하게 했다.필요한 고급관리를 양성하는 데에 있었다. 여기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은 생원, 진사를 원칙으로 하였다.향교는 지방에서 유학을 교육하기 위하여 설립된 관학 중등교육기관이다. 설립목적은 성현에 대한 향사와 유생에게 유학을 교수함에 있으며, 아울러 지방문화의 향상 및 사풍진작 등 사회교육적인 기능도 지니고 있었다. 입학자격은 양반의 자제 또는 향리였으며, 16세 이상을 원칙으로 하였다. 교재는 소학, 사서, 오경을 중심내용으로 하여 근사록, 제사, 삼강행실 등도 쓰여 졌으며, 농어보가 잠업에 관한 서적이 사용되었다는 점으로 보아, 약간의 실업교육이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서당은 지방의 일반 서민계급의 자제들을 수용하여 교육하던 민간경영의 교육기관으로, 고려시대에 설립되어 조선시대에 계승된 사설 초등교육기관이었다. 그 목적은 사학 또는 행교에 입학할 준비교육에 있었으나 때로는 서당 자체에서 서당과 사학에 준하는 교육을 하는 경우도 있어 바로 생진과시험에 응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서당교육의 목적은 글자를 해독하는 능력을 길러 학문의 기초적 지식을 얻는 데 있다고 볼 수 있다. 서당에서의 교육은 맨 처음 '천자문'의 자서 교육에서 부터 유학, 동몽선습을 거쳐 소학, 논어, 맹자, 중용, 시경 등 경서와 고문진보 등의 문장독본과 수신서인 명심보감, 통감절요, 십팔사략 등의 사서를 습득하였다. 서당에서의 역사교육은 통감절요, 사략, 동몽선습에 의해 시행되는바, 15세 전후 남녀에게 읽히는 동몽선습이 새로운 역사서로 교재화 된 점이 주목할 만하다.조선 후기에 실학이 등장하여 종래의 역사 교육에서 탈피하여 한국사 교육을 역사 교육의 중심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 되었으나, 제도화되어 학교교육에 도입되지는 못하였다. 18세기의 실학자들은 역사를 하나의 독자적 학문분야로 인식하였다. 이에 따라 경사일체의 관념에서 탈피하였으며, 종래의 역사서술의 모범이었던 주자의 자치통감 강목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실학자들 중에는 유학 중심의 교육에 벗어나 독자적인 역사교육을 주장 허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실학자들의 역사 연구와 역사교육관은 그 후 개화기와 한말로 이어져 근대 역사학과 근대 역사 교육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Ⅳ. 개화기의 교육한일합방 후 일본제국주의는 한국을 강제로 식민지화하기 위해서 헌병?경찰제도를 채택하여 집합?결사?언론?출판 등의 활동을 금지하고 독립운동 진압에 온갖 힘을 기울이는 한편 학교에 대한 감시와 통제를 강화하였다. 또한 데라우치 총독은 조선교육력이 제정?공포(1911)되기 한달 전에 도장관에게 훈시를 통해서 교육보급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종래의 우리나라 교육이 공리를 숭상하고 실리를 천시하는 결행에 빠져 있었던 것을 지적하면서 시세와 민의에 알맞은 교육을 실시할 뜻을 표시하였다.중국 중심의 역사교육에서 벗어나 근대적 역사교육이 이루어진 것은 19세기 중반 이후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근대적인 국사 중심의 역사 교육이 학교 교육에서 필수 학과로 제도적 정착이 된 것은 1894년 갑오개혁이후이다. 일본의 압력에 의하여 1894년 갑오개혁을 단행하고 종래 교육 사무를 관장하던 예조를 폐지하고 학무아문을 두는 동시에 과거제도도 폐지하였다.1885년에서 1895년에는 세계역사, 각국역사의 과목으로 역사교육의 내용이 세 개로 확대되어 중국사 중심의 역사교육의 변화를 가져오고 성리학적인 가치관에 입각한 교육적 역사교육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 서서히 진행되었다.1895년에서 1905년에는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교육의 근대화를 위한 법제적 조치가 취해져 근대적 역사교육이 제도적으로 정착되었다. 이 시기에는 각급 학교의관제와 학교령이 제정?시행 되었으며, 전국 주요도시에 소학교가 설립되어 근대적 국민교육이 제도화되고 미션스쿨도 계속 늘어났다. 또한 각지에 뜻있는 인사들에 의해 많은 사립학교가 설립되었다. 이 당시의 역사교육의 초점은 한국사를 국민에게 교육하며, 민족의 주체 의식을 깨우쳐 주고 개화 문명의 수용을 위한 문화의 능력을 개발하는데 두었다.Ⅴ. 광복이후의 현대 교육교수요목시기(1946~1954)에는
    교육학| 2005.12.06| 6페이지| 1,000원| 조회(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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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평가B괜찮아요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E. J. 시에예스《제3신분이란 무엇인가》는 1789년 1월 초에 출판되었으며, 프랑스의 삼부회 준비 열기 속에서 시에예스는 이 책을 통해 프랑스의 장래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고 그 실행 방법을 지적했다고 할 수 있다.제3신분이란 무엇인가이 책은 다음의 세 가지 문제를 다룬다.1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모든 것.2 정치적으로 제3신분은 현재까지 무엇이었는가-무(無)3 제3신분은 무엇을 요구하는가-그 무엇이 되는 것.이 세 질문을 통해 시에예스는 프랑스의 전부하고 볼 수 있는 제3신분은 프랑스 정치사회에서 현재까지는 무의 존재였으나 삼부회를 통해 중요한 존재로 변신해야 한다고 역설한다.또한 다음과 같은 것을 논한다.4 각료들이 시도했던 것과 특권 신분들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제안하고 있는 것.5 우리가 행했더라면 하는 것.6 마지막으로, 제3신분이 합당한 지위를 취하기 위해 해야 하는 것.제1장 제3신분은 완벽한 하나의 국민이다.하나의 국민이 생존하고 번영하기 위해서는 개인들의 활동과 공적인 작용이 필요하다.개인들의 모든 활동은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1 농촌에서 이루어지는 노동과 관련된 모든 가정들이 하는 활동, 2 인간의 산업이 자연의 혜택을 발전시키고 원료의 가치를 두 배, 열 배, 백 배 증폭시키는 활동, 3 상인과 유통업자의 유용성의 활동, 4 학문적 직업이나 자유 직업에서부터 가장 사소한 것으로 평가되는 가사 노동까지 포함하는 활동이다.이러한 것들이 사회를 유지시키는 활동들로 제3신분이 뒷받침한다.공적 작용 영역에서 제3신분이 20분의 19를 차지하고 있으며, 특권 신분이 종사하기를 꺼리는 고된 모든 역무를 담당하고 있다. 공적 작용을 통해 높은 수입을 얻을 수 있는 지위나 명예직은 모두 특권 신분들이 점유하고 있으며, 이는 능력에 따른 종사가 아닌 신분에 따른 종사이다.제3신분만으로도 완벽한 하나의 국민을 구성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구비할 수 있다. 특권적 신분만 제거된다면 전체 국민은 보다 열악한 어떤 지위가 아니라 보다 존재라는 것이 너무나 진실된 표현이다.이 책은 제3신분에 대해 제3신분의 공민적 지위와 관련해서라기보다 헌법과 제3신분과의 관계와 관련해서다.삼부회에서 제3신분의 존재에 대해 살펴보자면, 삼부회의 대표들은 작위를 받은 귀족들이나 임기제 특권층이었으며 인민의 대표는 일정한 부담이나 직무에 대한 하나의 권리로 간주된다.세습귀족은 신귀족이 4대, 100년을 증명해야만 자신들과 같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허용한다. 그러나 법률적 차원에서 보면 어떤 수단·방법에 의해 출신을 은폐했건 또는 부당하게 귀족의 지위를 차지했건 간에 신귀족이나 구귀족이나 모두 동일한 특권을 향유한다.한 사람의 시민이 보통법에 반하는 특권을 취득하는 순간부터 그가 더 이상 보통의 신분이 아니라는 것은 명확하다. 그의 새로운 이익은 일반 이익에 반하는 것이며 그는 인민을 위해 투표할 자격이 없다.이러한 원칙에 따르면 단순한 임기제 특권층이라 하더라도 제3신분 계층의 대표로 부적합한 것은 마찬가지다.시에예스는 제3신분이 전체 국민이라는 생각을 항상 하기에 제3신분의 힘이나 존엄성을 감소시키려 한다는 것은 감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 그리고 모든 특권은 보통법에 반하는 것이 제3신분과 분리되어 있는 모든 임기제 특권을 폐지해야 할 필요성을 강력하게 의식하게 함으로써 전체 국민의 이익에 크게 기여한다고 한다.즉, 시에예스가 말하는 제3신분 내에서의 특권의 폐지는 권리의 상실이 아니라 권리의 복원이다.따라서 삼부회에 선출되었던 소위 제3신분의 대표들은 결코 진정하게 인민의 위임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었으며 삼부회는 귀족 정치에 불과 한 것이다.이러한 논리는 군주제라고 믿고 있는 프랑스가 루이 11세와 리슐리외 치하의 몇 년, 루이 14세 치하를 제외하고는 궁정 귀족 정치였다는 사실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궁정이란 무엇인가?프랑스의 모든 부분을 관장하며, 자기 계파에 의해 모든 것을 장악하고 공적인 활동의 모든 부분에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어디서나 행사하는 거대한 귀족 정치의 우두머리이다.시에예하지 않는다.제3신분 계층은 공민권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권리들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 권리들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권리들을 스스로 행사해야 한다.원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그 결과들을 최대한 도출해내는 것이 필요하다. 세 가지 신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선호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대표할 수 있게 해도 된다면 의회에는 단 하나의 신분의 구성원들만 있게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성직자 신분 혼자서 국민 전체를 대표하는 것도 허용될 수 있을까? 세 가지 신분층의 신임을 하나의 신분에게 맡기어 시민을 대표하게 하면 일개인이 삼부회를 대체할 수 있을까? 어떤 원칙이 불합리한 결과를 초래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위임권을 행사함에 있어 위임자의 선택을 제한하는 것은 위임자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논점에 시에예스는 두 가지 근거를 제시하였다. 첫 번째는 어는 것이 보다 신의롭지 못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직접적이다. 어떤 영역에서든 한계가 없는 자유나 권리는 있을 수 없으며, 모든 국가에서 법률은 일정한 요건을 규정하고 있는데, 이러한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누구도 유권자나 피선거권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따라서 무제한의 자유는 있을 수 없으며 피선거자격에 부과되어 있는 요건과 형평에 맞고 사물의 본성에 부합하는 법률이 대표자 선택에서 고려해야 할 모든 요건 중에서 제3신분에 의해 요구된 요건이 제3신분에게는 가장 중요하다.처음 두 신분의 구성원에게 오로지 일편단심으로 종속돼 있는 제3신분의 사람들이 공통 신분의 신임을 받을 수 있도록 묵인해서는 결코 안 된다. 종속적인 지위 때문에 그들은 공통 신분의 신임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여겨지나 일편단심이 명백하지 않을 경우에는 귀족들의 영향력은 이미 귀족 자신에게 무용한 것이 되므로 그들이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행사할 것은 매우 분명할 것이다. 이에 시에예스는 특히 봉건주의의 수많은 첨병에게 주의를 기울이기를 주장한다.제3신분은 제3신분을 대표할 만큼 명석하고 용기 있 귀족은 이제 어렴풋한 형체에 불과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 4 이 나라가 세상에서 가장 야비한 곳으로 비치려는 게 아니고서야 이러한 어렴풋한 형태가 아직도 헛되이 전체 국민을 두려움에 떨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을 몰라서는 안 된다.3. 세 전째이자 마지막 요구「삼부회에서는 신분별이 아니라 개인별로 투표할 것.」이 문제는 세 가지 측면에서 고려될 수 있다. 1 제3신분의 입장이다. 제3신분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요구가 다른 두 신분에 의해 야기된 불가피한 결과이다.2 특권 신분의 이익이다. 특권 신분은 자신들의 이익에 반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해 거부권을 가질 필요성을 대단히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이것은 제3신분에게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고 해롭다. 3 상식적 원칙에서이다. 모든 개별 이익과는 무관하게, 사회학을 형성하는 원칙들에 따라 이 주제를 고찰하고자 한다면, 새로운 면을 접하게 될 것이다. 가장 확실한 관념을 깨버리지 않고는 제3신분의 요구도, 특권 계급의 기득권 옹호도 받아들여질 수 없다.그러나 세 개의 신분이 개인별로 투표하는 것에 합의할 수 있을 지에 대한 답변을 부정적이다. 원칙에 의거하면 그들은 결코 동일하게 투표할 수 없으며, 개인별로도 신분별로도 투표할 수 없다. 따라서 특권층의 편을 들어주어 진실하고 정당한 것은 특권층의 힘에 있다고 말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관념을 그들에게서 뿌리째 뽑아버리는 것이 필요하다.제4장 정부가 시도한 것, 그리고 특권 신분이 제3신분을 위해 제안하는 것1. 지방 의회정부 각료 역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신분 제도를 폐지할 것을 계획했고, 지방 의회가 계획안을 작성했다. 이 계획안은 시민들의 개인적 신분을 고려한 것이 아니고, 재산 또는 현실 상태에 대해서만 다루고 있다. 이 지방 의회의 대표는 신부, 귀족, 평민으로서가 아니라 재산 소유주라는 자격에 의해서 참석할 수 있다.재산 소유의 등급은 세 가지로 구분되었다. 1 첫 번째 계층은 귀족이건 평민이건, 성직자이건 속인이건 차별 없이 포함하여 영주권을 보유의 저자들에 의해서 강력하고 열렬하게 옹호되었다. 왜냐하면 재능이라는 것이 지식의 독점적 사용, 오랫동안의 반복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횃불은 보다 높은 지위에 있어서 많은 사회적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사람들, 선천적인 활기가 그래도 덜 망가져 있는 사람들에게서 우선적으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첫 두 신분도 물론 제3신분에게 권리를 복원해주는 데 관심을 갖고 있다. 제3신분은 인민과 함께할 때만, 그리고 인민에 의해서만 자유로울 수 있다.조만간 모든 계급은 모든 계약 참가자들로 하여금 서로 마주 보고 감시하고 기속하게 하는 계약 내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4. 조세를 동일하게 부과하겠다는 약속명사회의는 세 신분에게 동일한 조세를 부담시키려는 의견을 공식적으로 피력했다. 그러나 제3신분이 그들에게 구하는 견해는 삼부회를 소집하는 방법이지, 삼부회가 취해야 할 논의가 아니었다.조세에 대해서는 제3신분은 귀족들도 자비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의에 의해서 조세를 납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귀족들에게 보통법에 복종하는 행위를 기대하고 있으며 이러한 문제가 다루어져야 하는 곳이 삼부회이며, 삼부회를 잘 구성하는 것이 오늘의 현안이라고 생각했다.시에예스는 법률은 인민에게 대항하기 위해서 특권 계급을 위해 제정되었으며, 제3신분에게 부과되는 모든 특별 세금은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5. 특권 신분들과 내각 공동의 친구들에 의해 제안된 타협책제3신분에게 치명적인 만큼 특권 계급과 내각에는 유용한 제안의 내용은 세금으로 간주되는 모든 것과 보조금을 개인별 투표로 결정하자는 것이다.6. 영국 헌법을 모방하자는 안최고위에 있는 300~400개 가문에 속하는 모든 귀족은 영국의 상원과 유사한 형태의 상원을 설치할 것을 갈망하고 있다. 그들의 자만심은 일반 귀족의 무리와 더 이상 뒤섞이지 않으려는 희망을 품게 하고 있다. 또한 고위 귀족은 기타 귀족들을 일반 시민과 함께 평민원으로 보내버리는 데 기꺼이 동의할 것이다.영국에는 헌법에 의해 입법권의 일부를 부여받은 사람들 외에는 특권한다.
    인문/어학| 2004.06.13| 10페이지| 1,000원| 조회(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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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아름다운 집
    내가 과제로 선택한 2권의 책은 아름다운 집과 백범일지이다.두 권의 책은 한 인물의 탄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일대기를 적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위의 두 권은 한국 근대사를 따라 인물의 고뇌와 역경을 담고 있다.이 책들이 한국 근대사라는 공통점을 담고 있기에 이번 기회에 좀 더 그 시대를 들여다 볼 수 있었지만 아직도 사상과 수많은 조직들이 정리가 잘 안된다. 이 책들을 너덜너덜 할 때까지 보면 어느 정도 어렴풋이 알 수 있을까?내가 한국의 근대사에 큰 흥미가 없는 이유는 아마도 우리 역사의 어두운 부분을 너무 많이 담고 있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 시기는 외세가 아니면 한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사상적 추구가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총을 겨누며 지내 온 가슴 아픈 역사를 가득 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이 든다.그 시대의 애국자들의 모습은 시련이 와도 고통이 찾아와도 오뚜기처럼 벌떡 일어나 조국을 위해 희생을 한다.‘아름다운 집’이란 무엇인가?서점에서 이 책을 처음 만나보았을 때 손석춘의 소설인 ‘아름다운 집’이란 제목에서 아름다운 집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었고, 제목만으로 책의 내용을 가늠할 수 없었다. 다만 알고 있는 사전 지식이라고는 한국의 근대사의 한 부분을 담고 있다는 것이 전부였다. 또한 책의 표지에 칙칙한 색을 사용하고, 막연한 제목이 이 책에서 다루질 암울한 시대와 그로부터 빗어지는 정신적 방황을 암시해주는 것처럼 느껴져 이 책을 집어드는 내 손이 무겁게 느껴졌다.무엇이 ‘아름다운 집’일까?무엇이 ‘아름다운 집’이라는 건가?이에 대한 대답은 책 속에 들어 있다.“우리 아들이 혁명이 뭔지 알까?”“그럼요 왜 몰라요.”“우리나라 사람들이 모두 잘살게 아름다운 집을 짓는 거예죠. 맞죠?”‘혁명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한 아이가 말한 대답인 것이다.아이가 생각하는 혁명이라는 것의 정의는 간단하였다. 아니다. 간단한 것이 아니다.무언가 복잡한 듯 하면서 머리를 한방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혁명이 아름다운 집을 짓는 것일 수 있구나’이 책을 읽은 것은 한 인물을 통해 역사를 경험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좋았다. 주인공을 따라 가다보면 내가 주인공인 듯 그 역사적 사건에 빠져 들 수 있었다. 또한, 한 인물이 고뇌하는 사상적 갈등은 나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고 가슴 한구석을 답답하게 만들었다.이 책을 읽다보면 우리가 쉽게 알만한 인물들이 거론되기 때문에 일기의 주인공이 이진선이 실존인물인지 분간하기 힘들었다. 사실인지 허구인지 분간하기 힘든 책은, 아니다, 분간하고 싶지 않았다. 머리는 아닌데 가슴으로 사실이라고 믿어 버린 책, 믿어버리고 싶었던 책은 김진명이라는 소설가의 책 이후로 ‘아름다운 집’이 처음이었다.‘아름다운 집’은 이진선이라는 허구의 인물을 등장시켜 역사에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역사적 고증을 거친 자료에 의해 접근된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기라는 형식은 시간적 사실을 들어내기 때문에 언론인이며 작가인 손석춘이라는 저자는 굉장히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책을 완성하였을 거다.우리나라의 근대 역사를 보면 무수한 이들이 나라를 위해 많은 활동을 했다. 그들의 활약을 볼 때면 그 시대의 모든 사람들은 나라를 위해 내 자신은 기꺼이 던질 의향이 있었던 것처럼 생각된다.하나의 예를 들자면 3?1운동을 보면 수많은 민중들이 일제의 탄압에게 불구하고 한마음이 되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내 놓는다. 이 모습은 상상만 해보더라도 온 몸에 소름이 끼치고 가슴이 애리는 것이 그들의 정신을 높이 살 수 밖에 없게 만든다.내가 만약 그 시대 인물이라면 나를 희생할 수 있었을까?아마도 내가 그 당시 사람이었다면 그 많은 민중들 속에 함께 자리 잡고 있지 못하였을거다. 나에게 닥친 상황이 아니라 절실함이 없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 자리에 있을 것라는 확신은 없다. 어쩌면 ‘울며 겨자 먹기’로 참여했을지도 모른다.지금의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마음만은 애국열사이다. 단지, 마음만은......궁색한 자기 합리화일 뿐이다.애국열사들은 다들 자기 자신과의 싸움과 자기 연민, 자기 고뇌에 빠졌던 것 같다. 이 순간 윤동주가 떠오를 건 무엇일까?‘아름다운 집’은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이진선이라는 인물이 1938년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는 시기부터 1998년 10월 자살로 삶을 마무리 할 때까지의 일대기를 일기형식으로 담아내고 있다. 일기형식으로 그날그날 간단한 사건과 더불어 이진선의 그 시대적 사상을 함께 적고 있어 한 인물을 통해 한국 근대사를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이 책은 무거운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반해 쉽게 읽혀지고, 보다 수월하게 그 시대의 분위기를 느껴볼 수 있게 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이 작품을 다 읽고 난 뒤 소설의 내용이 사실일지, 허구일지 생각을 해보아야 했다.이 소설은 꼭 사실일 것만 같다. 그렇게 믿고 싶다. 일기라는 형식이 더 나를 이 책이 사실일 거라고 믿게 만드는 것 같다. 이 소설의 하루 하루의 사건이 그 날 그 날의 신문을 내가 펼쳐보는 것처럼 환영을 만들었다.이 책은 신문사 편집국의 한 기자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오면서 시작된다. 놀랄만한 자료를 보관하고 있다며 전해주고 싶다고 연길를 찾아달라는 편지를 무시하고 있던 차에 중국의 연길의 한 노인이 대뜸 전화하여 깜짝 놀랄 기록을 넘겨주겠다며 연길에서 만날 장소와 시간을 일방적으로 정해주고 전화를 끊는 바람에 기자는 반신반의하며 연길로 향하게 된다. 기자는 연길에서 만난 노인에게 낡아빠진 셀 수 없이 많은 작은 수첩을 받아서 돌아온다. 그 작은 수첩 안에는 이진선이라는 지식인이 장장 60년 동아 온몸을 던져 살아간 사랑의 길, 혁명의 길이 담겨져 있었다. 그는 이 낡은 수첩에 기록된 역사를 출판하기 위해 노트북을 두드린다.이진선의 일기는 다음과 같이 자기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나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우리 지금 어디에 있는가. 오늘 조선에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이진선는 연희 전문학교 시절에 우리가 익히 아는 윤동주를 만났고, 일본 유학생 시절에는 북한의 고위간부였다가 대한민국으로 망명한 우리가 알고 있는 황장엽을 만났으며, 조선 공산당 시절에는 자신의 정신적 지주나 다름이 없었던 박헌영을 알게 되었다. 조선의 혁명을 위해 함께 노력한 박헌영의 측근으로 언론에 몸담으며 혁명을 위해 활동했다. 그는 월북을 하였고, 박헌영과 사상이 달랐던 김일성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가지고 있다. 그가 김일성에 대해 부정적으로 바라본 것은 김일성 혼자만 혁명을 이룬 것 처럼 그를 영웅화하는 주변의 상황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혁명의 대표자인 박헌영과 김일성 중 누가 혁명의 완수자인가? 누가 대표자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주변 인물들의 의견은 분분했다. 그에 대해 그의 인생의 반려자는 대표자가 누가 되는 것은 상관이 없으며, 다만 혁명을 이루어 내는 것이 중요하다며 대표자 사이에서 고민하던 이진선을 깨닫게 한다. 결국 박헌영은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김일성이 대표자로 자리잡았다. 그는 그가 사랑하던 신여린를 만나 함께 혁명의 길을 가지만 6?25로 인해, 미군의 폭격에 의해 그의 사랑인 신여린과 아들 서돌을 눈앞에서 잃고 긴 인생을 괴로워하며, 그리워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이루어 질 수 없었던 최진이와의 안타까운 사랑에 또한 가슴 아파한다.이 책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최진이의 편지가 있다. 이 편지에는 놀라운 사실이 적혀 있다. 최진이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예전에 이진선이 최진이에게서 아이를 얻고 싶다는 생각을 잠시나마 한 적이 있었다. 최진이의 하나밖에 없었던 아들이 이진선의 아이였던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최진이의 아들이 혹시 이진선의 아들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들기는 했었지만, 직접 밝혀주니 다소 놀랍다.그는 그가 선택한 사회주의 활동에 대해 많은 갈등을 시간이 갈수록 하게 된다. 김일성이 주석이 되어 그를 중심으로 하나의 사상을 만들어 가는 것과 체제 유지와 정통성의 확립을 위해 역사와 사건의 날조, 권력의 부자세습 등의 북조선의 현실과 더불어 사회주의 체제였던 북조선의 주변국들이 하나 둘 무너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는 젊은 시절 그가 선택한 사상이 잘못 된 것이 아닐까하는 회의를 갖고 고뇌한다. 그가 신문사 기자를 대표하여 남조선을 방문했을 때 자유롭고 활기가 넘치는 사회를 보고 다소 걱정스러움과 부러움의 눈길을 보내었다. 남조선이 자본주의 체제임을 서울 올림픽대회을 통해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데 반하여, 북조선은 혁명 당시 잘살아보겠다는 의지와는 거리가 멀게 시간이 갈수록 혁명 당시의 활기는 찾을 수 없고, 세계가 자본주의 사상과 더불어 풍요로와 지는 시기에 배고픔에 시달리고, 어린 세대가 굶어 죽어 가는 모습을 보며 사회주의에 대해 비판하게 되고, 북조선이 적실한 사회주의 사상에 다가서지 못하고 잘못된 길을 가는 것을 바로잡지 못한 죄를 스스로에게 심판하여 그는 결국 자살을 선택하다.
    인문/어학| 2004.03.09| 5페이지| 1,500원| 조회(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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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부활하는 군단
    나는 후한 이전의 시대를 다룬 책들 중에서 웨난이 지은 ‘부활하는 군단’을 선택하였다. 부활하는 군단이란 진시황의 지하 군단을 말하는 것이다. 내가 진시황이라는 말을 언제 처음 접했을까?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는 중국 영화의 전성기였다. 중국 영화가 아닌 홍콩 영화의 전성기라 해야되는 건가? 과거를 짚어 나가다 보니 영화를 통해서 진시황의 존재를 알게 되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영화’ 라는 매개체의 힘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 아닐 수 없다. 그 어린 나이에 본 영화의 장면이 나의 뇌리 속에 박혀 나의 진로에 영화라는 영상물이 큰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을 부인 할 수 없다. 중국의 역사가 배경이 된 영화의 제목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침입자들이 진시황의 병마용갱에 들어섰을 때 실제 사람의 모습과 같은 상들이 즐비한 어마어마한 군단이 나에게 무언가 알 수 없는 짜릿함을 전달해주었다. 그때 당시에는 병마용(兵馬俑)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다만 그들의 거대함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용(俑)은 고대 분묘에서 부장하던 사람 형태의 인형, 상, 서주 시대에는 사람을 순장하는 관습이 성행하였으며 이후에는 사람의 모습을 본뜬 용(俑)을 부장하여 이전의 순장하던 습속을 대신하였다고 한다. 최초의 용(俑)은 추령이었을 것이며, 이후 흙이나 나무로 만들었고, 돌이나 도자기, 또는 금속으로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또 영화에는 진시황이 명을 받고 불로초를 찾으러 떠나는 긴 행렬은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진시황에 대한 영상이다.진시황의 일생은 정복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 기원전 230년부터 군사를 일으켜 그의 군대와 뛰어난 전술을 앞세워서 6개의 강국을 무너뜨려 중국 대륙을 최초로 통일하는 과업을 이루어낸 중국역사상 독보적인 존재로 평가받기도 하며, 한편으로는 폭군으로 부각되는 상반된 평가를 받기도 한다. 진시황의 출생은 특이한 점이 있다. 대 상인이었던 여불위가 권력을 얻고자 그의 애첩이었던 조희를 왕태손인 자초에게 주었다. 그러나 자초는 조희가친 집착 등에 관한 일들이 결국 진시황의 성격에 큰 영향을 끼쳤을지도 모른다. 진의 시황제가 이루어낸 업적은 많다. 중국통일을 이루어 낸 시황제는 중앙 집권적 전제정치체제를 수립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우선 그는 중국역사에서 황제라는 칭호를 최초로 제정하였고 전국을 하나의 통치체제로 편입시키기 위해 군현 제도를 실시하였다. 군현제도는 중앙집권적인 관료제 국가였던 고대 중국의 역대왕조에서 시행하던 군현 제도에서의 현(縣)은 이미 춘추시대(春秋時代)에도 존재하였으나, 그것은 단순한 비읍(鄙邑), 즉 소읍(小邑)이라는 뜻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춘추시대 말기가 되자, 각국 사이의 싸움이 격화하여 일반 서민에게도 군역(軍役)을 부과할 필요가 생김에 따라 이를 반대하는 서민의 저항을 누르고 국왕으로서의 지배권 확립을 강화하여 징발(徵發) ?징세(徵稅)를 강행하기 위하여 중앙으로부터 관리를 파견하고, 현을 재편성하고 직할지화하여 지배하게 되었다. 군(郡)도 현과 거의 같은 경로로 내려왔으며, 군과 현 사이에 본래는 통속관계가 없었으나, 군은 변경지역에 설치된 경우가 많았다. 또 통할지역이 넓었기 때문에 군 안에 몇 개의 현이 설치되면서 통속관계가 발생하였다. 이어 BC 221년에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는 전국을 통일하자 전 영역에 현을 설치하고 전국을 36군으로 구획하여 통치하였다. 이것이 중국 군현제의 시초로, 이후 시대에 따라 차이는 있었으나 지방통치의 이념은 청대(淸代)까지 거의 2000년 동안 군현제가 존속하였다. 시황제는 또한 문자의 통일을 가져왔다. 글자의 근본은 은나라의 갑골 문자였지만 글자의 형태는 달랐다. 시황제는 진나라의 소전이라는 글자의 형태를 천하의 문서로 정하고, 나머지 문자들을 폐지 시켰다. 그 폐지된 문자를 육국문자라고 하는데 분서갱유의 사건과 함께 소멸되었다. 같은 문자가 이용된다는 건 영토의 통일뿐만 아니라 국민의 사상을 통일시킬 수 있다는 의미로서 중요한 일이다. 화폐에 있어서도 진나라의 화폐가 통용되었다. 도량형을 엄격히대다수의 백성들은 크고 작은 죄를 범하여 대규모의 토목 공사에 끌려나와 무상으로 노동력을 제공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진나라의 법률에는 형기에 관한 조항이 없었으며, 형기가 완료되면 석방된다는 규정도 없었다. 이러한 상황과 무리한 사업으로 진나라에서는 각 지방의 반란들이 끊이지 않았다. 후에 진나라의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던 진승, 오광의 난도 사실은 만리장정을 쌓은 고통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일이야 어찌되었건 만리장성은 지구 밖의 우주에서 보아도 만리장성이 보인다 하니 사람의 피를 재물로 받쳐 만들기 했지만 위대한 업적이라 말할 수 있겠다. 얼마 전 수업 시간에 교수님께서 NASA 측이 우주에서 만리장성이 보인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는데, 그럼 만리장성이 우주에서 보인다는 말은 어디서 흘려 들어오게 된 것일까? 다음에 오는 글을 진시황의 업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진나라의 기록이 아닌 것은 모두 불태우고 제자백가의 책은 모조리 몰수하여 불에 태웠다. 이것이 분서이다. 옛것을 언급하여 현실 정치를 비판하는 모든 사람은 처형했다. 진시황을 비방하는 유생들을 붙잡아 구덩이 속에 생매장했는데 이것이 바로 갱유이다. 또 개인적인 꿈으로 불로장생을 꿈꾸었다. 그 역시 인간인지라 모든 세상이 자신의 발아래 있을지라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3000명의 사람을 시켜 불로장생의 약을 구하라고 했지만 찾을 수 가 없었다. 그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이 세상에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약초가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그는 자신의 능묘를 건설하였다. 제왕의 능묘를 건설한다는 것은 당대의 가장 큰 토목 공사였다. 그는 13세 진나라의 왕위에 오르는 것과 동시에 능묘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당연히 현대적인 기계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던 고대에 그처럼 거대한 건축물을 짓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많은 인력과 시간이 필요하였다. 제왕이 생전에 짓기 시작한 능묘의 완공 기간이 길면 길수록 그 능묘의 주인이 더욱 오래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처롭다.유물이란 인류가 남긴 자연 또는 사회 또는 사회 활동의 자취로, 그것이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간에 또한 선진적이든 후진적이든 간에 각기 서로 다른 영역에서 한민족의 생존과 번식, 투쟁과 발전, 그리고 그 민족의 사상과 과학 수준을 드러내 준다. 그것들은 언제나 그 민족과 더불어 전 인류가 보호, 연구 이용해야 하는 진귀한 역사적 보물이다. 지배 왕조가 바뀌었다고, 또는 복수의 일념으로 그 시대를 대표하는 귀중한 문화를 파괴하여서는 안되며,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문화재를 도굴하여 해외로 빼돌리는 사람들은 이해 할 수도 없을뿐더러 나라에서 그들에게 무거운 벌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하다. 글의 내용과는 상관이 없을지 모르겠지만 나의 평상시 생각으로 문화재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기술을 빼돌리는 산업 스파이는 엄히 다스려야한다. 나라를 사랑하고 아낄 줄 모르는 사람은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1974년 봄, 극심한 가뭄으로 서양촌에서는 물을 구하기 위해 땅을 파헤치기 시작하였다. 1m정도 팠을 때 붉은 토양이 나오자 주민들은 벽돌을 굽은 가마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4m까지 팠을 때는 이 세상을 놀라게 할 세계 8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등장하게 될 거대한 지하군단과 마주하게 된다. 1974년 3월39일 진시황릉 병마용의 첫 번째 파편이 출토되었다. 항아리가 완전한 형태를 들러낼 무렵 그들의 생각이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눈앞에 있는 것은 항아리가 아닌 머리 부분이 떨어져 나간 사람 모양의 도기 인형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진용을 함부로 다루고 있었을 무렵 우물을 파기 위해 파놓은 구덩이 아래에서는 더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지면에서 5m쯤 되는 깊이에서 청전(靑?)이 깔린 평평한 바닥이 나타나는가 하면 녹슨 청동 화살과 망가진 노기(弩機)3개가 발견된 것이다. 이는 지하 군진이 2000년 뒤의 인류에게 보내는 첫 번째 신호였다. 고향에 와서 휴가를 보내고 있던 신화통신사의 기자 인안온이 진시황릉의 출토리 떨어져 있었고 진시황릉 주위에 진나라의 귀족 무덤이 수없이 분포되어 있었기에 선뜻 답을 내리기 힘들었다. 얼마 후 조각난 도용의 몸체 앞에 전혀 녹슬지 않고 새것처럼 빛나는 동극(銅戟)이 발견되어 용갱과 진시황릉의 관계를 풀어 주었다. 동극 의 머리 부분의 안쪽에 선명하게 다음과 같은 진귀한 명문이 이었다. ‘삼년상방여불위조시공섭승의공조’ 여기에서 말하는 3년은 진시황 3년을 말한다. 동극과 명문의 출현으로 병마용갱이 진시황릉의 부장품이라는 중요한 근거가 마련되었다. 진용의 출현은 한 위대한 시대 정신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갱에서 발견된 진용들은 얼굴이나 표정이 생생하며 각기 다르고 머리를 묶은 형태까지도 다양하여 전혀 판에 박은 듯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모든 진용을 보면 그들의 성격, 연령, 지위를 가늠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간혹 상태가 안 좋은, 표정이 이상하거나 비례가 안 맞는 진용들의 모습이 보인다. 이러한 일이 일어난 이유는 진용을 만든 장인인들이 자원자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강제 징집이 되어 억지로 진용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며 고된 노역으로 지쳐가고 있었기에 그들의 감정이 진용에 그대로 나타나 일그러진 모습을 하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악부종이 발견되었는데 무늬가 세밀하고 분명했으면 호화스럽고 또한 아담하여 야금술의 발전이 상당했음을 밝혀 주는 좋은 증거이다. 진시황릉의 병마용갱에 배열된 병진으로 볼 때 진나라 보병은 숫자도 많았고 원거리 공격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과 더불어 당시의 군사 지휘자들 또한 보병과 전차, 기병을 적절하게 배합하여 여러 병과끼리 합동으로 작전을 펼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 고대의 전쟁에서 전차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은나라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차부대의 방대한 군진은 진나라의 전차. 특히 용갱에서 발견된 형태의 경전차에서 볼 수 있듯이 전쟁의 발전이나 전술상의 변화에도 전차는 쇠퇴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개량되고 발전되어 독립된 병과로 발아니다.
    인문/어학| 2004.03.09| 6페이지| 1,000원| 조회(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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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백범김구
    ‘백범 김구’라는 역사의 인물은 어렸을 때부터 쉽게 위인전기를 통해 누구나 접해 보았을 것이다. 나 또한 가물거리는 기억을 되살려 보면 백범 김구에 대해서 초등학교 때 처음으로 접했다. 그 어린 시절부터 접했던 김구에 대해 지금에 와서 새삼스레 그의 자서전 ‘백범일지’를 통해 무엇을 더 얻을 것이 있나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이 책을 선정하여 읽게 된 것은 어느 정도 일찍이 접해 본 적인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일종의 나의 자만심이 비롯된 것이 아니었나 생각이 든다. 책을 읽을수록 이 책을 너무 쉽게 보았다는 사실과 함께 불만감이 엄습해 왔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책장을 넘기면서 제일 먼저 들었던 생각은 ‘김구 선생이 1800년 때 인물이었어?’였다. 백범 김구가 19세기 말의 인물은 건 알았지만, 동학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시기에 존재했을 거라는 생각은 미쳐 해본 적이 없다. 이러한 무지는 나의 잘못이라는 걸 인정한다. 나는 근대사에 그다지 흥미가 부족하다. 이것은 내가 국사라는 과목을 처음으로 접한 중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변함 없는 거다. 조선 왕조에서도 고종부터는 나의 흥미를 유발하지 못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일제와 관련된 사건이 등장하는 시기에 흥미를 갖지 못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왜 흥미를 갖지 못하는 것일까? 너무 많은 항일 투쟁 단체가 나를 버겁게 해서일까?백범 김구의 자서전을 꿋꿋이 끝까지 읽은 지금은 그나마 책을 읽기 전에 나를 짓누르던 답답함과 막연함이 어느 정도 걷힌 것 같다. 책을 통해 항일 단체를 접한다는 사실은 다른 매개를 통해 얻는 지식보다 빠르게 흡수되는 듯 한다. 나에게 있어 부족했던 시대의 한 부분을 조금이나마 들여다 볼 수 있는 계기여서 좋았다. 우습지만 뿌듯함이라는 단어를 사용해도 괜찮을까?‘백범일지’ 보물 1245호 라고 한다. 백범일지가 갖는 문화적 의미가 크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백범일지는 독립운동가였던 김구 선생이 유서 대신으로 쓴 자서전으로 상?하권으로 구성되어있다. 이 책은 김구 선생이 두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글을 로의 인생이 기구할 조짐이었는지 유례 없는 난산을 통해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김구 선생의 어렸을 때 이름은 창암, 김창암였다. 그는 굉장한 개구쟁이로 자신을 이유 없이 매질한 아이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칼을 들고 찔러 죽일 결심을 했지만 이 사실이 들켜서 오히려 실컷 얻어맞고 칼을 빼앗기기도 했으며, 엿을 사먹기 위해 아버지께서 사용하시는 좋은 숟가락을 분지르기도 했고, 떡을 사 먹기 위해 엽전 스무 냥을 들고 나가다가 종조부에게 들켜 매질을 당하기도 하였다.그의 아버지의 학식을 겨우 이름 석 자 쓸 줄 아는 정도였고, 기골은 준수하고 성격이 호방하였다. 음주는 한량이 없고 취하면 양반을 때려, 1년에도 여러 번 관아에 구속되는 소동을 일으켰다. 넷째 삼촌은 할아버지 장례식에서 행패를 부려 가족회의 하에 앉은뱅이로 만들기로 하고 발뒤꿈치를 자르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양반에게 할아버지가 곤욕을 당한 일이 일어나자 학문을 연마하여 상놈에서 벗어나고자 글공부할 마음이 간절하여 아버지께 간청하였다. 아버지는 양반의 자제가 무시할 꼴을 못 보겠다며 문중과 인근 상놈 친구의 아동을 몇 명 모야 서당을 하나 만드셨다. 아이들 중에 그가 제일 뛰어났지만 갑작스런 아버지의 전신불수로 공부를 중단하게되었다. 아버지의 병이 어느 정도 호전되자 다시 배움의 열정으로 불타게 되었다. 그러나 가정이 빈한하여 고명한 선생을 찾아가 배울 형편이 되지 못해 먼 친척 정씨에게 부탁하여 그는 ‘면비학동’으로 배움에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임진년(1892년 17세) 경과를 해주에서 거행한다는 공포가 있자 정선생은 그를 과거 시험에 데리고 가기를 원했다. 어렵사리 과거 준비를 마치고 시험장에 들어섰지만, 과거 시험의 부조리에 불쾌감을 안고 집으로 돌아와 서당 공부를 그만 두게 된다. 이에 아버지는 관상공부를 권하였다. 그는 과거장에서 얻은 비관에서 벗어나기 위해 관상을 공부했는데 관상학을 하면 할수록 자신의 관상의 비관하게 되었고, 마음이 좋은 사람이 되기 확보하고 있었고 팔봉 접주인 그가 선봉으로 임명되어 훈련을 하고 있었다. 이 때 경성의 모 대신의 원조와 황해 감사의 지도 아래 벌써 동학 토벌에 나서 신천지역의 동학 토벌에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는 안태훈이 그에게 밀사를 보내서 ‘나를 치지 않으면 나도 치치 않는다’, ‘어느 한족이 불행에 빠지면 서로 돕는다’는 밀약을 성립하게 되었다. 창수는 구월산 패엽사로 군대를 옮겼는데, 구월산주변에는 이동엽이란 접주가 있는 동학군이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부대는 인근마을에서 노략질을 일삼았다. 그런데 그의 부하 가운데 이동엽의 부하가 되는 자가 증가하여 그의 세력은 나날이 줄어들었고, 최고회의는 기회를 보아 창수의 몸을 보전하기 위한 방책으로 동학 접주의 감투를 벗기기로 결정하였다. 어느날 이동엽이 전군을 이끌고 김창수의 부대를 침공하여 육박전으로 벌였다. 해월 선생이 임명한 접주이니 동학의 정통인 김창수를 이동엽은 죽이지 못하고 영장 이용선을 죽였다. 그는 난을 피해 장연군 몽금포 부근의 동네로 옮겨 세 달간 은거하였다. 이동엽은 벌써 잡혀가 사형을 당하고 각 군의 동학군은 거의 소탕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당시 왜병들이 동학당을 수색하는 중이라 화를 피하기 위해 청계동의 안진사에게 몸을 기탁하게 되었다. 청계동에서 생활하면서 안진사와 담론을 하며 시간을 보내던 와중 안진사의 집을 방문한 고능선이라는 학자로부터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 어느날 고능선은 창수에게 청나라에 가서 사정도 조사해 볼 겸 청나라로 가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권유하게되고 이에 창수는 청나라로 떠날 결심을 하게 된다. 그러던 중 예사롭지 않은 참빗장수인 김형진을 만나게 되고 그와 함께 청나라를 향해 가던 도중 벽동사람 김이언이 힘과 용기가 남달리 뛰어나고 학식도 풍부하다는 소문과 함께 그가 지금 청나라의 원조를 받아서 의병을 일으키려고 도모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김창수와 김형진은 서로 따로 가서 김이언을 만나보고 그의 사람됨을 알아보고 거사의 뜻이 있는지 관찰했다. 그는 창수와는 의병을 그와 인연을 잇기란 정말 어려운 것인지 그의 일생에서 오고가던 혼담이 깨지는 일은 종종 있었다.청나라 금주에 있는 서옥생의 집을 방문하기로 하고 가는 도중 묵었던 여관에서 왜인을 발견하고 국모의 원수를 갚는다면 김창수는 왜인은 죽이게 된다. 이 사건으로 해주옥에 갇혔다가 인천감옥으로 이송되게 된다. 감옥 안의 불결함과 찌는 듯한 여름 날씨에 그는 장티푸스에 걸려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되고 그만 자살을 시도하게 된다. 심문이 거듭될수록 그의 의기 있는 모습이 소문을 타서 그를 방문하는 이들이 늘어갔다.그는 옥중에서 독서를 하면서 함께 갇혀 있던 자들을 교육했으며 소장을 지어주며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황성신문에 그를 사형에 처한다는 기사가 실리게 되고, 사형 날이 다가와도 그는 태연한 듯 평상시와 다름없이 지내고 있었다. 사형집행 시간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더니 고종의 명으로 사형 집행이 취소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하지만 그의 출옥 소식은 들리지 않자 창수는 왜인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감옥에서 죽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감옥에서 만난 조덕근, 양봉구, 황순용, 김백석과 탈옥을 한다.옥을 탈출한 김창수는 도피를 하게되고 옥중에서 알게되었던 사람들을 찾아가 노잣돈을 얻어가며 지내게 된다. 삼남지방을 돌아보는 차에 김형진의 매형을 만나게 되고 그만 김형진이 죽었다는 비보를 전해듣게 된다. 사찰에서 점심을 사 먹고 있다가 만나 자 마곡사란 절에 가길 권하기에 함께 동행했다가 김창수는 하은당에게 자신의 상좌가 되어 달라는 부탁을 받게 되고, 삭발을 하고 원종이라는 법명으로 중이 된다.인천옥에서 탈출하던 날 작별했던 부모님의 안위가 궁금하였던 김창수는 금강산으로 사거 경전의 뜻을 연구하고 , 일생 충실한 불자가 되겠다는 구실로 마곡사를 떠나게되고 봉원사에서 사형인 혜명을 만나 동행하게 된다. 혜명의 덕으로 부모님과 재회를 하게 되고 부모님이 그가 탈옥한 후에 옥에 갇히게 된 사실도 전해 들었다. 김창수는 걸시승으로 생활하다가 절 생활을 할 의사를 버리를 드시게 했지만 결국 아버지는 그의 효심을 저버리고 세상을 떠났으며, 탈상 이후 예수를 믿고 신교육을 장려하기로 결심을 하게되었다. 담사를 마친 후 그와 약혼하기로 한 여인이 그만 감기로 죽게된다.김구는 장련읍 사직동으로 이사를 하고 오진사 집 큰사랑에다 학교를 열어 학생을 가르치며 예수교를 선전하였다. 학교가 점차 발전하여 그는 공립학교 교원이 되었고, 최준례와 약혼을 한 뒤, 그녀를 경성 경신학교를 유학보냈다.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사방에서 의병이 일어났으나 실패만 거듭되고 있었다. 그는 에버트청년회 총무의 직임을 받았다. 에버트청년회는 겉으로는 교회사업처럼 보였지만 속으로는 순전히 애국운동이었다.장련을 떠나 그의 나이 33세 때 서명의숙의 교사가 되어 농촌의 아동을 가르쳤다. 그 후 양산학교의 교사로 근무하였다. 그는 종산에서 딸이 태어났는데 안악으로 데리고 온 후 바로 죽고 말았다.언억에서 사범강습을 마치고 양산학교를 확장해서 중학부와 소학부를 두었다. 김구는 최광옥 등 교육자와 힘을 합쳐 해서교육총회를 조직하였으며 각 군을 순회하며 교육 운동을 하였다. 순회하던 중 해서의병을 토벌하던 요새인 읍내 관사가 모두 왜인에 의해 점령된 광경을 보고 분노가 치밀어 환등회를 열고 ‘한인이 일본을 배척하는 이유는 무엇인다’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다가 경찰에 연행되었다.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아침에 신문에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 의해 피살당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를 보고서 어렴풋하게 그가 구류 당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는 해주에 도착한 즉시 투옥되고 안중근 집안과 각별한 관계에 있었지만 이번의 하얼빈 사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나서야 풀려 날 수 있었다.정치적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를 결성하였고, 만주에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장교를 양성하여 광복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토지와 가산을 팔아가며 자금 모으기에 열중하던 중 안중근의 사촌 동생인 안명근이 찾아와 자신을 도와달라고 하였으나 김구는 그를 붙잡고 만류하였다. 후에 안명근이.
    인문/어학| 2004.03.09| 5페이지| 1,000원| 조회(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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