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재교육은 필요하다20031101 교육학과김규섭영재교육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야기, 사회적 이슈가 되었던 송유근의 대학입학이다. 송유근에 관한 이슈를 접할 때,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기를, 송유근이 유년시기에 겪어야할 다양한 만남과 관계짓기 등의 사회성 교육이다. 한 아이가 성장해가면서 각 시기에 따른 경험에 따라 성격이 결정되어진다고 말하는 여러 심리학자들의 이론을 보면 분명 부모와의 친밀감형성 다음으로 또래와의 사회성 경험등을 겪으며 점차 자아를 찾아가기까지 지금의 유근이 나이에 꼭 겪어야할 또래관계를 이어줄 어떠한 놀이경험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기에 초등학교에 보내졌다면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하지만 유근이는 특별한 아이다. 인간극장을 보신 분이시라면 유근이가 유치원에서 적응하지 못하여 집에서 따로 숫자와 글자를 가르치다가 아이가 잘 따라오고 배우는 속도가 빠른 것을 발견하여 초등학교 교과서를 가르치기 시작했다는 어머니의 말씀이 나온다. 만약 유치원에서 다른 아이들에 비해 행동이 늦고 기타 다른 부적응 행동을 보인 유근이를 계속해서 유치원에 놔 두었다면 어땠을까? 이런 아이들은 대게 혼자놀기를 좋아하고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해 다른 성격장애를 불러올 수가 있다. 부모님께서 아이가 다른 아이들에 비해 성장발육은 뒤지지 않으나 친구들 사이에서 잘 따라가지 못해 우리아이가 왜 이럴까 하는 걱정만 앞세워 아이를 기죽이기라도 했다면 어땠을까?맞춤교육이라는 것은 우리나라의 현 교육상황으로는 도저히 적용될수 없는 교육시스템이다. 예를 들자면 장애아이들이 다른 일반아이들 사이에서 함께 학교교육을 받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장애 아이들에게 있어서 일반아이들과 함께 생활하고 활동하는 것은 꼭 필요한 사회경험이다. 이는 일반 아이들도 장애라는 것이 또 다르게 다가오는 계기가 될 수도 있고 사회에 많은 시너지 효과를 가져 올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장애 아이들의 사고 능력이 다른 아이들과 다르기 때문에 소위 진도를 따라오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함께 교육 받사도 훨씬 더 복잡한 교육기획안을 마련해야만 하지만 근본적으로 지금의 현실에 그것은 어림없는 소리 즉 이상에 그치게 되는 것이다. 장애아동들이 장애아동들끼리 모여 특수학교에 다니는 실정은 안타깝기는 하지만 그 아이들은 또 그 안에서 사회생활을 경험하게 된다.다시 유근이의 경우를 보면 유근이는 반대로 학교진도가 너무 느려 학습동기가 오히려 떨어질 수 있는 경우이며 동시에 천재성을 가진 영재 아이라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일반아이들 사이에서 어떠한 사고를 경험하게 될지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다. 다시 말해 유근이에게 초등학교 교육이 득이 될지 실이 될지 확실히 아무도 알 수가 없게 된다. 진정으로 그 아이의 사회성과 기타 나아가 성인이 되었을 때 사회적응력을 배우게 되기를 바란다면 그 아이에 맞는 교육현실을 마련해 주면 되는 것이 아닌가. 즉 비슷한 영재 아이들과 함께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이 형성된다면 그 안에서 작은 사회를 경험하며 우리가 걱정하는 여러 문제들을 충분히 극복해 나갈 수 있을 것으로 본다.어찌되었든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그 안에서 충분한 성취감과 자기만족, 원만한 사회 적응 등과 함께 사회 안에서 도움이 될 수 있는 인물이 되고자 계속해서 학습동기 유발이 이루어 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영재교육에 대해 이런 비판이 있을 수 있다.“자식교육에 있어 성급하고 조급하며 안달이 나있다.” 하지만 자식교육에 있어서 관심을 갖고 지켜보며 길을 안내하는 것은 부모의 의무이며 권리이기도 한 신성한 것이다. 하루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아이를 조급하게 키운 것이 아니라 단지 안내의 역할을 했을 뿐이다. 사실 그 정도의 학습능력을 가진 아이라면 일반능력을 지닌 부모가 조급히 키운다고 해서 키울 아이도 아니다.“인간은 컴퓨터 CPU나 자동차 엔진같은 일개단일 부품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수학계산을 빨리하고 남들보다 각종 학업능력이 비상식적으로 빠르다고 해서 특정 부분만을 키워주려고 하는 것은 안타깝다”라고 할 수 도 있다. 하지만 이 금의 사회는 누구나 지식을 습득·가공·구성·새로운 정보를 창출할 수 있게끔 기초기본학습능력을 지니도록 교육목표를 두고 있다. 즉, 특정 능력의 집중향상을 경쟁의 관점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남과는 다른 자신만의 특성과 개성으로서의 자아정체감 및 효능감 증진의 수단 및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이세상은 비상식적인 학업성취도를 갖춘 아이가 이끌지 않는다. 에디슨, 아이슈타인은 학업성취도가 빠르지 않았다. 에디슨은 도리어 그 반대로써 열등생이었다. 세상에 내로라하는 과학자들, 세계를 놀라게 한 줄기세포의 황우석박사마저도 결코 우리가 말하는 영재 천재는 아니였다. 빌게이츠도 초중고를 거치지 않고 무섭게 어린나이에 대학을 가고 그런 사람이 아니였다. 그래서 영재교육은 필요치 않는다라고 하는 것은 무리다.”라는 주장에 대해선 거꾸로 생각하면 반대로 이 세상엔 유근이 같은 애들이 있는데 그런 영재를 키울 제도의 미비로 그런 영재가 사라져 간다고 할 수도 있다. 이것은 어쩌면 역차별로 볼 수 있다. 또한 에디슨과 아인슈타인, 빌게이츠, 황우석 박사의 경우만으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한다는 것이다. 무수히 많은 경우 중에 일부 케이스만을 두고 그 틀에 맞지 않아서 틀렸다는 식의 비난은 심각한 논리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게다가 짚고 넘어가야 할 우리가 범하기 쉬운 고정관념이 있다. 예를 들어 6세의 나이에 IQ가 150으로 나오면 그 발달속도라면 20세 정도 되면 최소한 IQ가 200 이상 될 거라는 추측이다. 즉, 지능발달속도가 나이에 정비례할 것이라는 착각이다. 비단 IQ 수치로 판단하지 않더라도 아주 어렸을 적에 놀라운 학업성취도를 보이는 천재성을 지녔으니까 영재교육을 꾸준히 지속하면 20세 정도가 되면 엄청난 수준에 도달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과연? 과거에 천재성을 보여 주었던 아이들이 변화된 모습을 보면서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이 말의 의미는 어렸을 적에 천재성을 보인다고 해서 그의 부모나 주변에서 기뻐하고 호들갑을 떨 내로라하는 불세출의 스타 2명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 선수의 이름은 한 사람은 미국의 칼 루이스이며 또 한 사람은 캐나다 출신의 벤 존슨이었다. 올림픽 100M 경기를 화려하게 수놓은 이 2명의 선수는 스타일이 전혀 달랐다. 벤 존슨은 스타트가 엄청 빨라서 출발하자마자 일단 타 선수들을 제치고 멀찌감치 앞서나가서 기선을 제압해 버린다. 하지만 결승점에 다다를수록 출발만큼 시원한 가속력을 발휘하지 못해 종종 역전 당하기도 하는 선수였다. 그런데 미국의 칼 루이스는 출발은 항상 불안할 정도로 조금 늦지만 결승점에 도달할수록 가공할 가속력을 발휘하여 여러 선수들을 제치고 결승점에서 1등으로 들어오는 선수였다.이 두 선수의 차이점은 우리에게 진정한 영재의 판별기준을 과연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를 넌지시 암시해 주고 있다. 우리 주변에는 겉으로는 범재처럼 보이지만 나중에 보면 발군의 학업성취도를 보이는 진짜 영재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심지어는 이들 진짜 영재들 중에는 태어난 지 수년이 지나고서도 한글은 커녕 우리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해 혹시 지능이 떨어지는 아이가 아닌가 하고 부모를 걱정시키게 하는 경우도 많다. 인간의 지능(학업성취도 포함)발달은 유아시기 부터 진행되다가 성인이 되는 20세 전후로 거의 모든 것이 완성된다. 우리가 어렸을 적에 키가 작은 아이가 고등학생이 되니까 갑자기 키가 부쩍부쩍 자라 다른 아이들 보다 더 커버리는 경우를 흔히 본다. 또한 초등학생 시절에는 다른 학생 보다 키가 컸지만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정작 별로 키가 자라지 않은 경우도 본다. 이렇듯 인간의 신체적 발달단계가 개인의 선천적 요인 및 후천적 환경 등으로 집중적으로 발달하는 시기(과정)가 개인별로 천차만별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지능 발달과정 역시 개인마다 천차만별로 다르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후천적 환경요인을 포함해서 신체적/지능적 수치의 총량은 이미 정해져 있다 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즉, 20세 까지 차지하는 총량이 미리 정해 진 것이라면 어렸을 적에 천재성(총 발달수치록 나머지 수치를 채우는 것에 불과하니까 발달이 더딜 수밖에 없다는 제로섬 게임의 원리가 작용된다고나 할까? 그런데 보통의 정상인 보다 특이하게 일찍 발달시기가 빨리 도래하여 급속히 진행한 후 세월이 지나면서 그 발달속도가 현저히 완만해 지는 아이(전자)가 있는가 하면, 어릴 적에는 발달이 현저히 늦어 학습능력이 뒤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세월이 지나갈수록 놀라운 학습능력을 발휘하는 소위 늦공부 터지는 아이(후자)도 있다. 하지만 정비례적으로 발달이 진행되는 경우는 별로 보지 못한 것 같다. 이 점이 좀 이상하지 않은가? 요즘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천재성을 보인다는 송유근의 뉴스가 혹시 전자에 해당하는 경우에 불과하지는 않은지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고 후자의 기대감에 이슈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의 지능의 급속한 발달시기는 결정적시기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관념적으로 그 시기가 빠른 것을 선호한다. 즉 그 시기가 빨라야만 영재로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사회적으로 커다란 학문적 업적을 이룬 존경하는 학자(과학자)들을 볼 때 의외로 어려서 천재교육을 받고 속성과정으로 정규과정을 마구 건너 뛴 그런 경우는 별로 없다는 것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오히려 진득하게 다른 또래의 아이들과 함께 뛰어 놀고 할 것 다 하면서도 정규 코스를 착실히 밟은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영재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 중 조급증은 버려야 한다. 출발은 조금 늦어도 갈수록 위력을 발휘하는 대기만성형 영재들이 실제로 훌륭한 업적을 남겨 우리 사회를 빛내는 경우가 더 많다. 주변에 어려서 천재성을 발휘한다고 흥분할 것이 아니라 끝까지 지켜보아야 한다. 그 아이의 영재성이 조로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유아시절이나 초등학생나이가 아닌 중/고교 특히 고교생 정도의 나이에 영재성을 발휘하는 학생이 최종적인 영재로 판별된다고 믿는다. 백년에 한명 나올까 말까하는 그러한 돌연변이성 영재를 보고 마음이 들뜨는 것 보다는 우리 주변에 숨어 있지만 조금의 세월이 지나면 곧 나.
病주고 ‘藥’주는 사교육20031101 교육학과김규섭최근 천재 송유근 학생이 소위 말하는 영재교육이 아닌 자학자습으로 엄청난 교육적 이슈를 만들어내고 있다. 송유근 학생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영재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고, 공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무엇인가? 송유근 학생은 우리가 받아야만 하는 의무적인 공교육을 받지 않은 채, 훨씬 뛰어난 성취능력을 보였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또한 미국의 가장 갑부이며, 가장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빌게이츠 또한 정상적인 공교육의 길을 밟진 않았다. 우리가 왜 송유근 학생을 보면서 이슈를 만들어내며, 한편으로는 열광하는가? 이는 송유근 같은 흔히 말하는 천재가 앞서 이미 어떤 부를 창출한 빌게이츠처럼 우리나라의 경제·문화·사회적 측면에 있어서 위대한 일을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앞서서 일 것이다. 이는 한국교육이 무엇을 지향해야할 바를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평준화가 아니고, 지적 차별화를 통한 경쟁력확보가 중요하다는 것이다.교육은 비용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사회적 투자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경제적인 관점에서 보아도 100만명의 고용을 창출하고 있는 사교육 산업은 충분히 보호받아야 할 가치가 있지만, 교육 자체만으로도 그것이 국가의 미래경쟁력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현재 여당과 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일련의 사교육말살과 사회주의적 평등을 지향하는 교육정책은 재고되어야 한다. 송유근은 그들이 흔히 말하는 공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점을 들고 싶다. 그는 즉, 우리가 알지 못하던, 잘 알려고 하지 않았던 사교육이라는 루트를 통해서 그런 성취를 보인 것이다. 허나 대부분의 사람은 송유근이라는 학생을 어떤 우연적인 사건으로만 치부할 뿐이다. 그리고 다름아닌 사교육을 폄훼하고 있다. 사교육비용이 과다하다는 이유로 "학교내 학원운영"이라는 미증유의 실험적인 정책을 여당과 정부가 실시하고자 하고 그것을 떠밀고 있다. 학생들은 실험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저 또 한 번의 바뀜으로 막대한 교육예산을 쓰는 명분을 만드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유능한 사교육과 무능한 공교육의 현실은 정부스스로도 인정하면서, 사교육은 죽이고 공교육만 키우자는 논리는 어불성설(語不成說) 그 자체가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교육현실에서 공교육이 사교육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을 만큼 스스로 사교육과 경쟁해서 이기든가 적어도 존재의 압도적인 필요성을 스스로 입증한 이후의 문제일 것이다.그러나 생존을 걸고 뛰는 사교육을 무사안일로 무장한 공교육이 이길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무엇이 살아야하고, 무엇이 죽어야 하는가? 그것을 본질적인 문제들을 외면하고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이거나 이념적인 논리로 결론을 내려서는 국가의 미래를 잃는 것이다.교육의 현장은 정부가 직접 개입해서는 안되는 신성한 자리이다. 교육의 현장은 국가의 미래인 아이들과 청소년들이 지적·정서적·육체적으로 올바른 성장을 완성해가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그러한 자리들이 신성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보호하는 존재여야하지, 이 자리는 필요없는 자리고 저 자리는 필요한 자리라고 선택하고 없애는 존재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나는 아직 예비교육자의 신분이라지만, 나의 아이들이 그런 교육의 현장에서 교육받기를 원하고, 정부가 취사선택해서 만들어 놓은 것에 만족하고 의존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교육주체들의 자율성과 개별성이 충분히 보장받고 상호협력·보완해나가는 융통성있는 장이기를 바란다.사교육비가 10조를 넘는다고 해서 많다는 것은 무엇과 비교해서 그렇다는 것인지, 그렇게 많아서는 안 된다는 분명한 이유는 무엇인지, 사교육기관과 종사자들에 대한 후속조치는 무엇인지 교육의 선택권제한은 국민의 동의를 얻지 않아도 되는 절대선인지, 국익에 절대적으로 이익인지, 그 외에도 수도 없이 많은 부작용들에 대한 대책은 없어도 그만인지를 따져보아야 한다. 이에 대답할 수 없다면, 그저 또 한 번의 시도에 불과하며, 또 한 번의 손찌검에 불과한 그저 바뀜(변화라는 개념을 사용하기에도 적절치 않은)에 지나지 않는 일이 될 것이다.공교육과 사교육은 대부분의 국가에서 상호 보완하며 공생하는 것이 상식이다. 경제의 어려움을 사교육에 뒤집어 씌우려는 생각이 아니라면, 정치적으로 인기에 영합하려는 단편적인 생각이 아니라면, "보다 특별한 교육"에 대한 수요를 부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아이들이 저마다 다른 인격체이기 때문이며, 모자라는 것은 채워야하고 뛰어난 점은 더욱 키워주는 교육의 본래기능을 충실하게 수행하기위해 사교육이 수행하고 있는 역할들을 부정할만한 제대로 된 이유없이, 선진국에 비해 사교육비가 많다는 단편적인 하나의 사실만으로 부정해서는 안된다. 선진국의 공교육비용과 우리나라의 공교육비용의 비교는 왜 안 하는가? 선진국들 중 많은 나라가 공교육은 무상교육으로 행해진다. 게다가 우리나라 공교육비용은 사교육비용보다 적지 않다.사교육 목적 자체를 단지 대입 입시를 위해 탄생했다고 범위를 한정해서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분명 대입 입시 사교육이 성행한 것은 사실이나, 중등, 초등에서도 입시 사교육이 주를 이루고 있지는 않다. 또한 대입 입시는 분명 교육 수요자들의 “특별한 교육”에 해당한다. 그들 당사자의 필요로 인한 교육이다. 그 필요로 인한 사교육을 막는 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교육을 전면 금지한다고 과연 그것이 실현될까? 그에 대한 다른 방법이 바로 평준화다. 하지만 평준화는 교육의 목적도 수단도 될 수 없다. 기회의 균등은 교육행정의 중요한 목표와 방법이 되어야 마땅하지만, 평준화라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향해 본 적도 없고, 교육의 결과에 공헌을 한 것도 아주 미미할 뿐이다. 말 그대로 대충 비슷하게 만들면 배 아픈 것을 달래줄 수 있을지는 모른다는 안일한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교육이 지향해야하는 바는 부분적 또는 전체적으로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우위의 지적능력을 함양해서 지적경쟁력을 확보하는 목표와 전인적이거나 또는 부분적으로 미성숙한 인격을 성숙한 인격으로 성장시키는 지적성장을 통하여 사회가 필요로 하는 다양한 인재들을 길러내는 것이 목표라고 생각한다.왜 학부모들이 사교육에 대한 수요를 줄이지 않는지 공교육을 불신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해보는 것도 중요해진다. 사교육비가 많고 적고는 사교육비를 부담하는 사람들이 생각할 일이지, 정치인들이나 언론에서 떠들 일이 아니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보다 아이키우기가 힘들다는 생각은 한 가지 원인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먹고살기 힘들다보니, 경쟁의 논리가 성장까지 지배하게 된 것인데, 그에 대한 책임이 어떻게 사교육에 있다고 할 수 있을까?그중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앉고 있는 사고 중 하나가, 과정으로서의 배움이 아니라 입시 · 평가의 결과만을 보고 과도한 사교육비를 지출하는 이유 즉, 맞춤형 사교육을 위해 돈을 투자하면 학업성취도가 오르고, 그로 인해 빈부와 사회적 지위의 재생산을 이룬다는 굳은 믿음이다. '잘 사는 집 자식이 공부도 잘 하더라', '돈을 많이 투자하는게 공부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 등의 사고는 소외된 계층이 계층간을 불신하고, 그 불신이 조장해낸 사회적 불화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자신보다 상위 계층에 대한 배앓이에 불과하다. 공부를 잘 하는 요인에는 잠재능력, 실천의지, 부모의 관심과 가르침, 좋은 스승, 친구관계, 체력 및 건강상태 등등 수많은 요인이 있는 것이다. 스타강사, 고액과외에 대한 환상을 버려야 한다. 공부를 위해선 결국,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책과 자료, 스스로의 학습의지, 무언가를 배워서 알게 된다는 희열, 그리고 모르는 부분을 질문하면 기쁨에 넘쳐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이 있으면 되는 것이다. 이것을 깨닫는다면, 사교육비를 많이 지출하는 친구들을 부러워할 필요가 전혀 없어지는 것이다. 불필요한 지출없이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가는 것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또 부정적인 우리의 사회적 관점을 변화시켜주어야 한다. 교육의 기능이 사회 이동에 기여하며, 그 사회 이동은 개인의 노력에 따른 사회적 산물로 보아야 한다. 그것은 정당한 것이며, 어느 정도의 지위의 불평등은 보상으로서 받는 것이다. 이것은 작금의 현실이며, 이런 사회에서 위와 같은 사고로 사교육에 대한 과도한 지출을 하는 것은 어떤 정체성적 과도기에 빠진 학부모, 학생, 학교 등의 교육 수요자들의 아노미로 인한 것이다. 사회이동도 자신이 가진 여력 내에서 효과적인 투입으로 최대한의 산출을 이루어야 하는 경영 마인드는 전혀 없이, 맹신도적인 믿음으로 낭비적 투입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공산주의적·재생산적·갈등주의 관점으로 사회를 변화시키지 않을 생각이라면, 이런 아노미는 어느 시간 유지될 것이며,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자체적으로 치유가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교육 패배주의에 빠지지 않은 주체성을 지닌 교육 수요자들이 계속적으로 나올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의 주변에는 그런 주체적인 교육 수요자들이 나오고 있다.작년·올해·그리고 내년에도 교육예산이 또 30조는 넘는다. 사실 한 번도 줄어본 일이 없다. 초등학교 교실만 10,000여개가 남아돈다. 학원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낭비이다. 사교육비용 자체가 낭비인 양 떠들지만, 같은 비용으로 올리는 효율을 비교한다면, 그게 비교가 가능이나 할까? 외국은 전력회사를 민영화하고 그것을 다시 여러 회사로 쪼개서 경쟁체제로 만들고, 연금을 민영화해서 운영의 경직성을 탈피하려고 하는 등 정부공공을 줄이고, 민간과 시장을 키우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경쟁 in 교육?Good~, Better and Better!!20031101 교육학과김규섭지금 교육계에서는 교원평가제라는 뜨거운 감자를 쥐었다 놓았다 하느라 정신이 없다. 이 교원평가제라는 것, 평가의 본질은 '차별과 경쟁'이다. 평가로 노력하는 교원에게는 사기를 북돋워주고, 딴눈을 파는 무능한 교원에게는 그만한 대우를 해주자는 것이다. 교육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경쟁을 유발하는 강력한 자극제다. 이처럼 당연히 도입됐어야 할 '경쟁' 개념을 국내 교원들은 당당히 무시하는 게 현실이다. 혼란의 1차 책임은 물론 구시대적인 집단 이기주의를 내세운 전교조 등 교원단체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최종 책임은 결국 교육부가 져야 한다. 교육행정의 최종 관리자가 교육부라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교육부가 지금까지 경쟁논리를 깔아뭉개는 듯한 태도를 보여 왔기 때문이다. 고교평준화, 고교등급제와 논술 금지 등 현 정부의 핵심 교육 이슈 중심에는 막연한 평등주의가 깔려 있다. 교원평가제를 도입하려는 교육부의 당초 목표는 학부모의 심정과 같았을 것이다. “경쟁이 왜 나쁘냐, 경쟁 없이 발전이 있을 수 있는가.” 그런데 정작 도입을 추진하면서 자기모순에 빠졌을지 모른다. 전교조 등 교원단체에 면죄부를 주자는 의도는 결코 아니다. 단지 교육부가 “교육 질이 높아지려면 경쟁은 필수적이다”라고 말할 자격이 있는지 궁금할 뿐이다.대학의 발원지는 유럽이다. 세계 최초 연구중심 대학은 독일에서 탄생했고, 파리는 세계 석학의 뜨거운 토론장이었다. 그러나 불과 100여 년이 흐른 현실은 어떤가. 전 세계 톱20 대학 중 17개가 미국에 있고, 노벨상 수상자 중 70%가 미국에 둥지를 트고 있다. 철저한 경쟁과 자금력의 산물이다. 유럽 정부들은 반(反) 엘리트주의, 평등주의를 금과옥조로 여겼다. 교육행정에 대한 불만이 폭발 직전인 학부모와 학생들이 "한국 교육은 원점부터 달라져야 한다"고 거침없이 말하는 심정을 느낄 수 있는 게 요즘이다.나의 주장은 한정된 자원을 보다 집중해 소수의 세계적인 선도 인적자원을 육성하는 것이 국가경쟁력 제고 차원에서 올바른 방향일 수 있다는 점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김진표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경쟁은 조직생명력과 발전의 원천’이라고 믿는다. 허나 나는 다만 교육분야에서도 경쟁원리가 작동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경제분야의 경쟁력과는 다른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판단한다. “높은 교육열을 잘 활용하지 못하고 좋은 대학, 인기학과 진학에만 몰두한 나머지 엄청난 사교육비를 지출하면서도 창의적인 인재를 키우지 못하고 교육에너지를 소모적으로 써버린다는 점”을 꼬집고 싶다. 우리의 교육열이라는 하나의 교육 시스템을 너무 소모적인 자원 낭비로 몰고 가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렇게 허술한 교육 시스템에서도 우리는 잘해내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경쟁이다.교육 내에서 경쟁의 원리는 학습자 및 교육수요자들 뿐만이 아니라 교육주체 및 행정당국에서도 적용된다. 교육 수요자들이 교육이라는 테두리에서 경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거대한 틀로 보자면 ‘성공적인 세계화’라고 볼 수 있겠다. 이를 위해서는 우수한 교육제도와 외국어 구사능력이 필수며, 또 글로벌 경제 시대에는 지식이 가장 중요한 보물이기 때문에 수준 높은 교육을 통해 뛰어난 역량을 갖춘 핵심 인재를 길러내는 역할이 중요하다. 이는 우리 교육제도에서 충분히 해내고 있는 부분이다. 현재 해외 우수한 인재들, 특히 스포츠 인재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단 하나, 경쟁을 통해 선발된 우량한 엘리트를 배출하면서 그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또 곳곳에 우리의 경제와 문화를 알리고 있는 여러 유수의 인사들이 우리 교육의 열악한 환경 속, 경쟁을 통한 가치를 빛내고 있는 것이다.좁게 보아서 교육 경쟁을 피부로 느끼는 바와 같이 자칫 나태해질 수 있는 대학 생활에 대해서 어떤 이정표를 마련해준다. 사실 영어공부가 왠 말이냐, 토익주관 회사인 ETS의 많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토익열풍은 가히 환상적이다. 그 환상적인 영어 열풍에 관해서는 사실 많은 단점과 우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스스로를 다질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 있다. ETS회사가 토익을 보라고 광고를 하는가? 아니다. 이는 경쟁이라는 관점에서 우리 스스로가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 갈수록 심화되는 경쟁속에서 조금 더 세련되고 예리한 평가방법이 도입되기 위해서도 이런 경쟁심화 체제들이 따르고, 우리들은 더욱 스스로를 단련하고 ‘가치’를 높이고 있다. 이는 세계화 속에서 우리의 ‘몸값’을 올리는 하나의 방편이므로 그렇게 자책하고 태만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특히 학생들의 경쟁에 관해서 굉장한 논란이 많다. 이번에 접한 소식 중에, 대학 입시에 최선을 다하다 도가 지나쳐 반사회적이며, 계층간의 탈락감·소외감을 조장하는 급훈이 생겼다며 논란을 만들고 있다. ‘끝없는 연습만이 살길이다. 10시간:서울대, 8시간:연대, 7시간:이대’, ‘대학가서 미팅할래, 공장가서 미싱할래.’, ‘10분더 공부하면 마누라가 바뀐다.’, ‘네 성적에 잠이오냐?’등의 급훈이 대학을 서열화하며, 사회적으로 갈등과 불안을 초래한다며 급훈을 개선하라고 한다. 허나 교육행정부와 사회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 당사자들은 이러한 급훈들은 하나의 자신만의 문화로 여기고 그것에 만족하고 노력한다고 한다. 이런 급훈을 보면서 자신의 뜻을 다잡고, 노력하고, 애쓰는 그들의 마음을 모른 채, 오히려 경쟁에 관해서 부정적인 생각만으로 일관한 경직된 사고관이 드러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또한 이러한 경쟁을 통해 우리는 하나의 기쁨을 얻을 수 있고, 그것이 거대해지면 ‘신화’로 여기며 뿌듯이 여기고 자기만족을 성취할 수 있는 긍정적인 시너지효과를 얻어낼 수 있는 것이다. 이 긍정적인 효과는 아무리 부정적인 영향과 루머, 좌절 등의 패악을 끼치기는 하지만 반대로 우리의 살아가는 에너지를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경쟁이 없다면 사는 재미가 있을까? 병아리도 혼자서는 모이를 잘 먹지 않다가 한 마리를 우리에 더 넣어주면 더 활기차다고 한다. 물론 그 시스템에는 최적의 수가 있을 것이다. 이 최적을 찾는 것. 이것이 시스템이 할 일이다.그러면 말할 것이다. 위에 예를 든, 병아리들. 병아리가 한 마리가 있다면 모를 것이나, 두 마리 세 마리 네 마리가 되면 먹이를 위해 경쟁을 하고 그 수가 늘수록 스트레스등을 받을 것이라고. 그리고 경쟁을 없앤다면, 경쟁으로 인해 받던 스트레스등을 해소할 수 있을까?나는 직관적으로지만, 조심스럽게 NO라고 대답한다. 왜냐하면 경쟁에 참여하는 개체는 시스템에 순환적으로 상호작용을 하고 끊임없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시스템은 열린 체계인가 닫힌 체계인가라는 의문에 도달한다. 강제되지 않는 각 개체의 선택에 맡겨질 수 있는 민주적인 시스템은 열린 체계로 보는 것이 옳다. 즉 우리는 열린 체계이고, 이 열린 체계는 시스템이 스스로 붕괴하지 않고 진화를 할 수 있다. 그래서 경쟁스트레스를 제어하려는 의식자체가 민주적이지 못한 사고라고 나는 단정한다. 경쟁이 그 끝을 차고 올랐다면 열린 공간에서의 개체, 즉 우리들은 자체적으로 탈출구를 찾을 것이다. 우리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진화적으로도 우리는 그러했고, 현재 우리의 삶은 그것을 하나의 지향점으로 나아가고 있으니까. 우리는 커봤자 닭대가리라 불리는 병아리가 아니다. 그것은 확실하지 않은가?경쟁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각중 원천적인 사회적 배경으로 인해 경쟁이라는 것이 수단으로 사용된다는 것이 있을 수 있다. 즉, 대학입시 경쟁을 좋게 보고 싶어도, 이미 형성된 학벌주의 때문에 경쟁의 끝은 학벌주의의 폐해로 제대로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공주교대라는, 그것도 교육학과라는 최고의 학군으로 경쟁자들이 모여도, 교육부 내지 교육시스템이 여타의 제도하 산하들을 선별, 선발, 그리고 적절한 지원을 해준다면 굳이 교육학과를 선택하지 않아도, 굳이 공주교대를 선택하지 않아도 소질·적성·능력에 맞는 선택배분이 되어, 경쟁은 적절히 배분될 것이며, 학군은 흥망으로 인해 서로 바뀔 수 있고, 그것으로 돌고 돌 수 있다. 즉 경쟁은 이런 순환환경을 제공할 수 있으며, 그것이 적절한 시기에 이루어진다면 혁신이며, 정체되어 있고 타이밍을 잘 잡지 못하면 부패되어 척결의 대상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현재 우리의 교육상황은 바로 순환이 정체되어 있다가 한번에 물꼬가 터지면서 겪는 혼란이며, 결국 경쟁의 긍정적인 시너지 효과를 이룰 수 있다고 본다.
교사의 권한과 의무는 어디까지인가?우리의 권한을 높이고 그에 관한 의무를 다해야 한다.20031101 교육학과김규섭우리가 흔히 말하길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라고 한다. 거기다 한마디 덧붙여 그것은 옛날 말이 되었지 현대에는 통하지 않는다고들 한다. 그러면 옛날에는 지금과 같은 생각을 했던 것일까? 하긴 했을 것이다. 허나 오늘날과 같은 고도의 심각성은 없었다고 본다.스승은 인생의 선배이며, 경험자로 ‘고수’다. 또 후배들에게 경험을 전해주는 전달자이며 안내자다. 그런 분들께 ‘취급’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존경으로써 대했다. 그런데 작금의 현실은 어떠한가? 가까운 인터넷 포털사이트를 돌아다녀보아라. ‘교사’라고 검색을 해보아라. 뉴스든, 게시물이든, 덧글이든 교사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쓴 글을 찾기 쉬운가 부정적으로 쓴 글을 찾기 쉬운가 보아라. 십중 팔구가 아니라 구구가 교사들을 힐난하고 비아냥거린다. 이런 상황에서 교사의 권한을 논할 것이며 의무를 논하겠는가.요즘의 부정적인 인식의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도 직업정신의 하락에서 보인다. 이 직업정신이란 단어조차 예전의 관점으로 보자면 분명 교직에 관해서는 부정적인 뉘앙스가 있다. 현실을 반영한 단어임에도 불구하고 왜 직업정신이 하락했다고 보는가? 그 이유가 있다.예전에는 교직이 인정을 받지는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교직을 택할 때에는 아마도 좀 더 교직에 관해 심사숙고 한 사람들이 들어오지 않았나 싶다. 정이 많고 인간적이고 다양한 인성과 감정, 사고를 지닌 계층을 형성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교직이, 공무원이라는 이름의 거품으로 많은 경쟁자가 달라붙어 교직의 인물의 단일화를 초래했다고 본다. 좀 더 공부에 매진했고, 이해타산이 빠르고 약은 사람들이 교직의 입구에 몰린 것이다. 그렇게 경쟁이 심화되고 보니 더욱 자신을 매질해서, 임용고시라는 것에 필요한 이론과 지식을 외우고 찍는 등 이론만 빠삭해졌고, 좀 더 교직에 관해 자신의 입장을 정리해보는 사색의 시간이 줄어들었던 것이다. 또 아는 것이 많아졌지만, 이해관계를 따지고 주위의 눈치를 보느라 몸은 굼떠졌으니 행동실천은 안하고, 자신의 이익에 관한 것에는 목소리를 높이게 되었다. 또 과연 사설학원을 다녀서 만들어진 것이 정녕 교사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자신의 진로와 내적성찰에는 등한시 하면서 그렇게 이익만 쫓게끔 만들어놓은 체제 안에서 순하게 길러진 교사가 있고, 그 교사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고 있는 사회가 과연 교사를 좋게만 바라볼 수 있을까?이렇게 만들어졌지만, 그래도 주체성을 지녔던 교사들은 또 하나의 난관에 부딪힌다. 그들을 억압하며 만들어가려하는 체제안에서 꿋꿋이 버텨와 자신만의 투철한 교육관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 교사들일지라도 이것은 피하기 어려운 것이다. 바로 ‘권태감’이다.이상하다. 왜 교사 사회는 술을 많이 먹는가? 교직에 나간 선배들이 교직에 폭주가 일상화되었다고들 한다. 그렇게 잊어버리고 싶은 일들이 많은 것일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그런 모습이 현실에 대한 하나의 태도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답답한 현실. 한마디로 교사는 위에서 떨어지는 지시만 잘 따르면 만사형통이다. 학교는 교장의 명에 따라 움직이기에, 교무회의 때 교사들이 내놓은 의견은 늘 '참고자료'일 뿐이다. 결정은 늘 교사들의 회의 자리와 다른 곳에서 이루어진다. 여기서 대학 교육학 시간에 배운 대로 '교사는 교육의 주체'라고 의욕을 부리는 교사는 화를 입는다. 3년이 안된 교사는 직원회의 때 발언하지 말라는 말이 교무실의 유행어라고 하니. 이 철저한 순응주의 시스템에서 그 속의 구성원들은 현실에 '작용할 수 없는 힘'이기에, '기술자'가 된다. 자기 삶의 이상을 실현시키는 일이 없는 교육은 교육자에게 단지 고단한 단순노동의 되풀이가 된다.현실은 답답하다. 그런데 무언가 할 것이 없다. 그렇다면 그 현실은 '도전할 대상'이 아니라 '잊고 싶은 꿈'이 되는 것이다. 일제 시대 후반기 식민지 지식인들이 자기 존재를 실현시킬 공간을 잃어버리자 술과 퇴폐로 세월을 보냈듯이, 그런 허망함이 한세월 교단을 휘감는 것이 아닐까? 주어진 상황에서 주어진 일을 처리하기만을 요구받을 때 그 집단은 자기 일에 대해 꿈을 꾸지 않는다. 기술자 역할을 강요받고, 의욕은 죽는다. 꿈이 없으니, 사소한 예절이나 따지는 쫀쫀한 인생들로 낙후된다. 조선후기 사대부가 초기의 진취성을 잃어버리자, 예절이나 따지면 서로 헐뜯고 하던 퇴물로 전락했듯이 고리타분해진다. 무기력의 진짜 원인은 '강요된 적응' 때문이다.교사가 교사답기 위해, 나는 국가에게 맨 먼저 교직자로서 명예와 권한을 달라고 요구하고자 한다. 그리고 국가에 뿐만이 아니라, 교육에 참여하는 모든 주체들에게 요구하고자 한다. 한 가지는 교육에 관한 의사결정을 할 때 정당한 사유없이, 그러나 이유가 있더라도 일단 전문가로서의 교사의 결정을 받아들이는 '교사 존중'이고, 또 한 가지는 교육내용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전문적 권한'이다.그러나 그와 함께 교사들의 문화운동이 진행되지 않으면 상황은 나아지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교육부가 교사연구모임 500곳에 연구비를 500만원씩 지급한 일은 참 잘한 일이다. 그렇게 아래에서 기운이 꿈틀거리게 해야 한다. 잘못된 교사가 나오면 경쟁에서 뒤쳐지게 하겠다는 말을 하기 이전에, 권태로운 교사가 생겨나는 시스템을 고뇌하는 일이 먼저이다. 그런데 이러한 고뇌보다 행정편의주의적 제도가 생겨나는 현실이 안타깝다. 그것이 바로 교사체벌에 관한 법적 규제이다. 이것으로 과연 교사의 권한이 사는가?체벌은 교사에게 어떤 물리적인 힘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이 체벌이란 것은 구타, 따돌림, 비난과 욕설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며, 이러한 체벌은 개인에게 육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심각한 고통을 준다. 또한 이러한 행위는 사회의 발달로 광범위하게 발생하고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제도는 가시적으로 체벌이 행사되는 경우만을 줄이게 될 것이며 한정적인 범위 안에서만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효과가 오히려 또 다른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아동의 또 다른 일탈이다.왜냐하면 청소년들의 문제행동을 저지르는 이유는 대부분 가정 불화, 가정 교육의 부재, 물질적 욕구불만, 친구관계 등 주변 환경의 여건 및 사정으로부터 받는 정신적 스트레스로 인한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이 해결 되지 않은 한 근본적인 문제는 여전히 사회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국 이런 갈등과 고뇌는 다른 방식으로 표출될 가능성이 짙다.반면에 이러한 제도의 취지는 결국 체벌로부터 피해를 받는 아동은 보호하고 반대는 보다 강한 규제와 처벌을 하겠다는 것으로 비춰진다. 이는 일탈행동을 하지만 사회적 약자에 속하는 아동 일부를 범죄자라고 낙인을 찍어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풍조를 조장할 수 있다.따라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행정 편의 주의적 발상에 기초하여 체벌의 발생률을 줄이려는 양적 측면에서의 접근이 아니라 아동을 특정한 잣대로 분류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그들의 입장과 처지, 외부 환경 등에 관심을 가지고 개선시켜서 정서적으로 불안정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바로 이러한 고민으로부터 교사의 권한이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체벌은 교사로서의 권한으로 정당하다. 하지만 체벌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것으로서, 그 효과는 단발성이며 교사와 학생간의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그러므로 많은 고민과 함께 교육 주체들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체벌에 관해서 생각해봐야 하는 시점으로 보인다.
게임중독 아이들에게 교사가 먼저 다가서자교육문제특강 8주차 주제 : 컴퓨터 게임에 중독된 아이들 ”교사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개선해야 한다“”정보화에 따른 부수적 현상이므로 가정에서 할 일이다“20031101 교육학과김규섭컴퓨터 게임은 이미 우리 사회에서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국내 최초로 게임 방송 온게임넷이 들어온 뒤에, mbc game, itv, 겜블 티비등 게임 전문 방송국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고, 지금은 온게임넷과 엠비씨 게임방송국의 양대산맥체제로 흘러가고 있다. 게임중독이 아니더라도 소일삼아, tv 프로그램중 볼것 없는 시간에, 밥을 먹는 도중에 짬을 내서라도 청소년, 아이들, 그리고 어른들 할 것없이 게임방송을 시청하고 있다. 심지어는 예전에 온게임넷에서 주최한 sky배 스타리그 결승전이 열릴 때에는 십만명의 인파가 해운대에 몰리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렇게 보편적인 문화의 형태로 발전된 게임을 왜 부정적으로 보게 되었을까? 왜 아이들은 게임을 하게 될까?흔히들 게임을 하면서 자아실현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아동과 청소년들은 무언가를 통해 자신의 욕구 발달을 시도하는데 게임이 바로 이런 욕구를 실현시켜 주는 장이 된다고 믿는다. 많은 종류의 게임이 있고 그 중에는 온라인 게임이 있지만, 가장 중독 경향이 높은 것은 역할 수행 게임(Role-Playing Game, RPG)이라고 한다. 물론 상당수의 시뮬레이션 게임들도 인기가 있고 중독되는 청소년들이 있지만, 리니지와 메이플 스토리 등 같은 역할 수행 게임이 훨씬 더 중독적이라고 한다. 이런 게임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경험치가 쌓이면서 레벨이 올라가기 때문이다.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다. 한창 흥행중인 스페셜 포스나 여전히 흥행중인 스타크래프트. 스타크래프는 상대방과 싸우고 이기면서 올라가는 전적(승-패), 그리고 화려한 컨트롤 실력과 게임 전체를 장악하고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은 나름대로 자아성취감을 줄 수 있다고 믿는다. 마찬가지로 액션게임인 스페셜포스 또한 마찬가지다. 이것은 일인칭 총싸움이라고 명명할 수 있으며, 일회성 유흥으로 즐기는 것이 아니라, 군대식계급 즉, 훈련병-이등병-일등병-하사-중사에서 대령-마침내 쓰리스타까지를 도입했다. 그 계급에 따라 달라지는 실력과 총의 구분은 아이들의 혼을 쏙 빼놓기에 훌륭하다. 또한 게임을 통해 강력한 소속감을 느낀다. 길드, 클랜, 혈맹 등의 모임은 청소년들의 강력한 소속집단 중 하나다. 게임에 중독된 많은 청소년들이 그나마 유지하고 있는 현실에서의 대인관계는 이런 길드나 동호회다. 청소년들이 많은 카페와 동호회에서 주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강력한 소속감을 느끼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간혹 청소년들이 자발적으로 게임을 중단하지 못하는 이유도 강력한 길드나 동호회 때문인 경우도 있을 정도다. 게다가 청소년들은 강력하고 지속적인 자극을 추구한다. 아이들은 이미 기성세대의 문화와는 다른 차원에서 매체에 대한 감수성이 발달되어 있다. 현란한 플래시가 어지럽게 느껴지지 않고, 자극적인 화면이 혼란스럽게 지각되지도 않는다. 이미 글을 쓰는 필자도 마찬가지다. 화려한 영상과 그래픽 그리고 머리를 어지럽게 하는 소음등은 게임에 몰입되게 되면 자연스러운 것이 된다.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염려스럽기 그지없는 상황에서도 말이다. 그렇게 게임에 몰입되고 중독되면 시각, 청각, 촉각, 감각, 모든 감각을 쓰면서 받는 스트레스와 시력의 피로등은 일단 접어두게 된다. 오히려 그런 것들을 즐긴다는 것이다.이렇게 게임을 하는 이유를 알아보았다. 하지만 게임을 한다고 무조건 게임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중독’이라는 거대한 마력. 그렇다면, 어떤 중독성을 지니고 있을까?게임을 하다가 심장마비로 죽은 사람이 있다. 며칠동안 씻지도 않고 먹는 것도 대충대충 떼우다가 죽는 사람도 있다. 게임 중독에 걸린 아이를 나무라다가 차마 보지못하고 자살한 어머니가 있다. 그래도 아이는 게임을 한다. 이런 뉴스와 신문 기사를 심심치않게 볼 수 있다. 개인의 생활을 망가뜨릴 정도로 게임에 몰입하게 하는 흡입력을 지니고 있다. 게임은 폭력성을 지니고 있고, 그 폭력성에 아이들이 물들어간다. 아이들이 즐겨하는 게임은 폭력적인 것이 많다. 예를 들어 한때 논란이 불거졌던 국민게임 스타크래프트에서 테란이라는 종족은 인간이다. 그 인간이 죽을 때 시체가 터지면서 바닥에 피를 뿌린다. 이것이 여론의 질타를 받고 패치형식으로 그 피를 하얀 물로 바꾼 적이 있다. 그런데 지금은? 어느 피씨방을 가건 여전히 붉은 피가 바닥을 흥건히 적신다. 왜? 하얀 피를 뿌리는 패치가 된 스타크래프트가 인스톨된 컴퓨터에서는 게임을 하지 않는 다는 피씨방 업주의 이야기다. 즉, 그런 폭력성은 곧 돈이라는 것이 성립되는 것이다. 아이들이 폭력성을 즐김으로 인한 현상이다. 그리고 그러한 것에 빠진 아이들은 아닌 것에는 혐오감을 느낄 정도로 물들어 있다. 또한 게임은 지나친 경쟁과 권력욕, 소유욕을 자극한다. 허나 역설적으로 지나치게 경쟁과 권력욕을 자극하는 게임은 게임이 아니다. 리니지의 경우 전투 중심의 게임이다. 게다가 혈맹이라는 조직을 통해 서로를 보호하는 방식을 취하다 보니 게임의 원래 목적보다 혈맹간의 패싸움 양상으로 게임이 변질되기도 한다. 또한 생존을 위해 돈과 아이템이 필수인데 아이템의 희귀성으로 그 아이템을 갖고 싶은 엄청난 욕망을 불러일으켜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스타크래프트의 경우 친구들끼리 삼삼오오 모여서 팀을 먹고 게임을 하는데 단순히 즐기려는 게임이 아닌 언제나 팀이, 그리고 내가 이기려는 양상으로 변질되어 아이들끼리 승부욕을 자극해 싸움을 일으키곤 한다. 또한 이기기 위해서 승부를 위해서 아이템, 케릭터의 해킹의 문제가 생겨난다. 예를 들어 스페셜 포스와 같은 것은 이기기 위해서 일명 ‘꼼수’들이 생겨서 큰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다행히 스페셜 포스를 주관하는 업체가 열심히 캠패인을 벌이는 동시에 제재조치를 취하고 있지만, 일단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기에 근절하기가 상당히 애를 먹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문제다. 승자는 패자를 놀리고 자존심을 뭉게버리며 패자는 그런 승자에게 앙심을 품곤 한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것이 한때의 게임상에서 끝낸다면 그것이나마 괜찮을지 몰라도 아이들은 현실과 가상세계의 분간이 어렵기 때문에 사회 현실, 교실 현실로 돌아와서 문제가 붉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그렇다면 위와 같은 문제를 지니고 있는 아이들에 대해서 정보화의 부수적인 현상이므로 가정에 맡겨야 할까?일단 나의 입장에서는 ‘아니올시다’ 이다. 왜 공교육이 생겼으며 많은 아이들이 학교에서 교육을 받는 것일까? 분명 의무교육이라는 제도적 측면이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교육은 가정으로부터 학교로 이양되는 분업화 과정에 있다. 맞벌이 부부가 많은 현대 사회에서 아이들에게 세심한 배려는 힘들 수 있다. 게다가 하루의 반정도를 학교에서 보내는 아이들에 대해서 학부모가 어찌 신경을 쓸 수 있는가? 물론 가정에서 충분히 게임중독에 관해 터치를 할 수 있다. 많은 아이들에게 학부모들이 컴퓨터를 할 수 있는 시간을 어느 정도 정해서 지키도록 요구한다. 여기까지는 가정의 영향이 미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면 집 밖에서는? 아이들이 학교 수업을 끝낸 방과후의 지도는 어찌할 것인가? 게임의 특성상 혼자하는 게임보다 여럿이 즐길 때 재미가 증폭되는 게임이 많다. 그래서 아이들은 준거집단을 이루고 집단별로 행동하는데 그런 또래집단에게까지 가정이 어느정도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부모가 게임중독된 친구들과 놀지말라고 강요해야할까? 그랬다가는 아이들과 부모의 사이가 점점 멀어질 수 있다. 가정은 아이들의 안식처야 하지 아이들을 내모는 벼랑끝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을 대행해줄 것이 바로 교사라는 것이다. 교사도 다른 일을 맡고 있고, 업무가 과중되기야 하겠지만, 사회에서 어느정도 게임중독에 관련한 치료 시스템이 구축되기 전까지는 교사가 선행해야 할 것이다.또한 이런 게임중독은 강압적으로 막는다고 막아지는 것이 아니다. 꾸준하게 점진적으로 개선해야 나갈 어떤 집단상담의 일환일 수 있다. 가정에서 아이들에게 내릴 수 있는 훈계는 매우 개별적이고 미시적이다. 하지만 중독의 형태가 집단적으로 일어나는 게임중독일 수록 집단상담을 통해 개선해나가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 아동이 자기와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주고, 그것을 통해 서로 역할모델이 될 수 있다. 다른 아이들로부터 피드백을 받는 다면 강압적인 형태보다 더 기꺼이 받아들 일 수 있을 것이다. 비슷한 문제를 겪는 아이들을 보며 보편성을 얻고, 안도감을 느끼면서 이루어지는 상호작용 체험을 통해 아이들을 좀더 쉽고 편하게 개선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