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인을 통해 새로이 보는 실크로드『실크로드 이야기』 수잔 휫필드 지음 / 김석희 옮김‘실크로드’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단어가 떠오를까? 비단, 사막, 오아시스, 장건, 한나라, 동서 교역로 등으로 별다른 차이가 없을 것이다. 이는 대개가 중?고등학교에서 배운 지식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크로드는 이 몇 단어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는 곳이다. 일단, 실크로드는 우리의 생각처럼 하나의 길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이 곳을 통해 전래된 것은 비단뿐 아니라 소금과 양모 등 생활용품에서부터 비취, 유리등의 보석, 갖가지 종교이다. 게다가 여기에는 우리가 모르는 중앙아시아의 찬란했던 역사가 남아있다. 그럼에도 여기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부족한 것은 지금까지의 우리의 세계사 교육이 중국과 유럽의 강대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그 외 지역에 대해 소홀하게 취급한 까닭이다.이 책의 저자 수잔 휫필드는 실크로드의 역사에 새롭게 접근하다. 둔황 석굴 사원에서 발굴된 4만 여점의 문서, 티베트와 중국의 자료, 학자들의 연구 성과 등의 흩어져 있는 역사의 파편들을 모아 객관성을 확보하고 부족한 부분은 자신의 문학적 상상력을 절묘하게 조화시켜 실크로드에 얽힌 이야기를 소설처럼 되살렸다. 이 책을 통해 학교에서는 미처 배우지 못한 실크로드의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었다.◇ 프롤로그이 책에서 다루는 시기는 서기 750년부터 1000년까지 실크로드가 가장 번영을 누렸던 기간이다.(10세기를 고비로 교류의 중심은 바닷길로 넘어간다.) 중국사로 보면 양귀비와의 로맨스로 유명한 당나라의 현종부터 안녹산의 난을 거쳐 당나라가 망하고 새로이 송나라가 세워지기까지의 시기인 것이다. 지리적으로는 오늘날 우즈베키스탄 동부의 사마르칸트에서 중국의 시안에 이른다. 다소 생소한 지역이기에 실크로드와 그 주변국을 자세히 표시한 지도를 실어 독자들이 실크로드로 여행하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한 저자의 배려가 엿보인다. 이야기는 약 250년간 최대의 번영을 구가하던 실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점은 ‘나나이반다크’라는 이름의 의미가 ‘나나 여신의 노예’라는 것이다. 주인공의 생활 속에서 역사를 보여주는 것도 모자라 그 이름에 까지 당시의 상황을 반영한 것은 저자가 이 책에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병사 이야기두 번째 이야기는 티베트의 세그 라톤(747-790)의 이야기이다. 그의 이야기를 통해 당시 병사들의 옷차림과 생활, 전쟁 양식, 고선지 장군의 무용담, 실크로드의 전략적 중요성을 알게 해준다. 여기에서 눈에 띄는 것은 고구려 고선지 장군의 무용담이다. 상인과 목부의 이야기에서도 등장하지만 여기에서 자세히 서술되고 있다. 당시 중국과 티베트는 대등한 전력을 유지하며 파미르 고원을 넘어 인도로 들어가는 길과 실크로드의 지배권을 놓고 수십년 동안 싸우고 있었다. 저자는 고선지 장군이 ‘고구려 출신’임을 분명히 밝히며 그의 활약상을 전투상황도까지 동원해 설명할 정도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의 허를 찌르는 기동력과 전략이 그간의 열세를 딛고 중국이 그 지역의 지배권을 탈환하게 하였으며, 그때부터 티베트 장군들도 적장인 고선지 장군을 존경하게 되었다고 한다.또한, 지금까지 알고 있던 티베트와 다른 ‘티베트’를 볼 수 있다. 티베트 하면 달라이 라마가 떠오르면서 불교를 믿으며 고원에서 살고 있는 소수민족으로만 생각해 왔다. 지금의 중국의 일부로 편입되어 독립을 주장하고 있는 티베트가 이 당시만 하더라도 위구르와 중국에 버금가는 강대국으로 그들과 실크로드의 주도권을 놓고 전쟁을 벌였다는 점은 우리의 역사가 얼마나 중국 중심으로 교육되어 왔는지, 얼마나 중국의 시각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는지를 생각해보게 한다.?목부 이야기중국에 팔 조랑말 떼를 몰고 다니는 목부인 쿰투크(790-792)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쿰투크는 위구르계 투르크인으로 민족 특유의 넓적한 얼굴과 짙은 눈썹에 움푹 들어간 초록빛 눈을 가지고 있었고 오늘날의 터키어와 비슷한 위구르어를 사용했다. ‘돌궐’이란 이름으로 더욱 친숙한 끈으로 느슨하게 묶었다. 저고리는 어깨가 상당히 드러나도록 재단했으며 공주는 그 위에 다시 바닥까지 내려오는, 저고리와 대조적인 색깔의 긴치마를 입고 가슴을 끈으로 묶어 고정시켰다.’ 는 묘사는 당시 중국 궁중 여인의 옷차림을 눈앞에 그려지도록 만든다. 그녀가 위구르에 가는 여정을 통해 위구르의 자연환경과 당시 성관계에 대한 인식과 풍습을 엿볼수 있다. 또, 카간과의 결혼하는 모습을 통해 그들의 결혼 풍습, 중국 사신이 돌아가고 혼자 남자 쿠차의 음악을 즐기는 등의 그녀의 취미 생활을 통해 다시 한번 국제적인 문화를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무엇보다 이제까지 중국 정사의 기록과는 다른 위구르와 중국의 외교관계가 놀라웠다.?승려 이야기승려이야기에서는 어린 나이에 하나의 생활 방편으로 불문에 들어가 20대에 비구가 된 춧다(855-870)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실크로드의 교역물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값진 것은 종교였다. 많은 종교가 있었지만 그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것은 불교이다. 중국은 물론 실크로드의 세계에서 전성기를 누렸던 불교가 기복신앙과 결합되어 많이 변질된 모습과 우리에게 낯설지만 실크로드의 중심지중 하나였던 돈황의 모습이 펼쳐진다. 춧다가 중국 우타이산으로 순례여행을 떠나 천신만고 끝에 장안에 도착하는 모습은 천축국을 순례한 우리의 혜초를 떠올리게 한다. 혜초는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춧다는 실크로드에 매혹되어 떠나지 못하고 둔황에서 사람들에게 의술을 베풀면서 사는 모습에서 실크로드에 매혹되어 이곳에 머물렀을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기생 이야기쿠차 출신 금발의 라리슈카(839-890)는 기생이라는 특수한 신분 때문에 그녀가 살던 시대에 그러한 계층의 사람들이 어떠한 생활을 하였는지를 추측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라리슈카’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를 통하여 그 시대 유행했던 음악이나 화장법, 노래, 복식 등 일반 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된 문화의 형태를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라리슈카’가 살았던 시대에 중국에서는 중국 사상 가장 번성한 국가중의 하나것이다. 역시 인간은 타인과의 교류를 해야 유연한 사고가 가능하고 스스로 고립되지 않아 발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비록 이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통일 신라도 이러한 교류에 참여하였기에 그토록 찬란한 문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500년 전과 1000년 전의 한반도인의 사고방식을 비교해보면 아마도 500년 전 조상들의 사고방식이 더 비탄력적이었을 것이다.?과부 이야기둔황의 과부 아룽(888-947)는 양친이 혼혈인으로 역시 실크로드의 주인공 중 한명이다. 저자는 그녀를 통해서 당시 중국의 평범한 여인네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그 때의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앓았을 만한 병과 그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 결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중국식 결혼 행사 절차, 부인들의 취미, 아이 키우는 방법 등이 그것이다. 죽을 아들이 축생도나 아귀도, 지옥도에서 환생하지 않게 해 달라고 관세음보살에게 불공을 드리는 모습에서는 이미 일반 사람들의 생활 속 깊이 뿌리 내린 불교의 또 다른 모습을 엿 볼 수 있었다. 특이한 것은 손자에게 재산을 물려주기 위해, 과거 산적에게 잡혀갔다 돌아왔다는 젊은이에게 빼앗긴 땅을 되찾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 당시 토지와 관련한 법률과 제도가 소개되어 있어 어려울 수 있는 부분이 친숙하게 다가왔다.?관리 이야기관리 이야기는 역법에 조예가 깊고 불심이 돈독해 뭇사람들로부터 칭송을 얻은 둔황의 관리 자이펑다(883-966)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그를 통해서는 당시 관리들의 생활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학교를 다녔으나 과거를 볼 정도의 실력을 갖추지는 못했다. 학교에서 교사를 하기도 하고 시도 짓다가 그의 아버지처럼 서리로 살았다. 계속 공부하여 역법을 만들어 박사에 임명되고 결국 '사비어대(賜緋魚垈)'를 비롯하여 더 많은 칭호를 받고, '행사주경학박사(行沙州經學博士)'로 임명되었다. 그가 얻은 칭호와 벼슬은 비록 중국 문관의 명칭을 사용하고는 있었지만, 그것은 그를 중국이 아니라 실크로드의 시민으로 자리매김해 주었다.(자이펑다. 영웅사관이란 ‘이순신이 거북선을 만들어 임진왜란에서 이길 수 있었다’라는 식의 역사 서술이다. 이러한 역사 서술은 사실은 단순화시킬 뿐 아니라 역사의 주체는 소수 엘리트이고 역사는 일반인과 거리가 먼 것으로 만든다. 이순신 혼자의 힘으로 임진왜란에서 승리한 것이 아니듯이 역사는 영웅에 의해서만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저자는 '장건'이라는 영웅에 의해 실크로드에 접근하지 않는다. 사료에 의거해 '살았었을 법한' 상인, 병사, 목부, 공주, 비구, 비구니, 기생, 과부, 관리, 화가 등을 주인공으로 선택했다. 이들은 모두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위인들이 아닌 온갖 세파를 온몸으로 막아내며 힘겹게 일생을 산 보통사람들이다.그래서 이 책은 당시 보통 사람들의 옷차림, 살던 집, 먹던 음식은 물론이고 취미, 전설, 결혼 풍습 등 그들의 생활상을 고스란히 이야기에 담고 있다. 이런 물질 생활의 밑바탕에서 그것을 지탱해 주는 보이지 않는 힘인 종교와 삶의 터전이 되는 주변의 자연환경에 대해서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선택된 자'들은 계율을 엄수하기 때문에 그들이 먹는 과일과 채소에 들어 있는 빛을 정제하고 트림을 통해 빛을 방출하여 사로잡힌 빛을 해방시켰다(특히 멜론과 오이에는 빛이 고농축되어 들어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라고 서술하여 종교 뿐아니라 그에 얽힌 실크로드인의 생활까지 보여주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다.이와 같이 당시 일반인 의식주에서 종교, 자연환경에 이르기까지 치밀하게 연결함으로써 당시의 다양한 풍속과 구체적인 삶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듯하고, 덕분에 이야기는 더욱 풍부해졌다.뿐만 아니라 당시 주도권을 둘러싸고 경쟁하는 주변의 강국들, 즉 서쪽의 이슬람, 북쪽의 투르크와 위구르, 남쪽의 티베트 그리고 동쪽의 중국이 벌인 정치적 쟁탈전과, 조세, 법률, 토지 소유 제도를 10명의 삶의 모습 속에 녹여냄으로써 역사의 흐름을 더욱 생생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중국뿐만 아니라 소그다니아, 티베트, 위구르, 둔황 등 실크로드의 여러 주변국가에서 태어한다.
4월 한달을 교생으로 바쁘게 보내고 나니, 어느덧 만개했던 꽃들이 지고 푸르른 녹음과 따사로운 햇볕이 세상을 뒤덮는다. 아마도 1796년 이 무렵, 수원에서는 화성의 마무리 공사로 한창 분주했겠지? 화성은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던 정조의 원대한 계획이, 그리고 그에게서 조선의 미래를 보았을 신료들이 꿈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다. 그들의 못다이룬 꿈의 자취를 좇아 수원으로 가는 전철에 올랐다.수원은 서울에서 전철로 1시간 남짓 걸리는 생각보다 먼 거리이다. 가는 길에 화성에 관한 책을 읽기도 하고, 밖을 보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수원역에 도착하여 플랫폼에 올라갔는데, 20살에 보았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기차와 전철의 정류장이 함께 있어서 인지 예전보다 훨씬 크고 탁 트인 느낌이 좋다. 달라진 모습 덕분에 어느 쪽 출구로 나가야 하는가를 꽤 고민했지만 말이다.이곳을 처음 오는 손님이라도 수원성에 찾아가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다. 수원성에서 나와 왼쪽으로 조금만 걸으면 수원관광안내소가 크게 자리 잡고 있으니 말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덕인지 수원성을 만나기 쉽게 되어 있었다.안내받은대로 13번 버스를 타고 화성행궁으로 향하는데, 문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화성의 남문 팔달문이란다. 도시의 한복판에 그것도 도로의 한가운데 외로이 서 있다. 본래 남문이면 화성의 정문이 되어야 하지만 임금의 행차를 먼저 맞이한다는 이유로 정문의 자리를 장안문에 내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이 그 시절보다 더 쓸쓸하고 지쳐 보인다. 대낮인데도 유난히 차가 막혀 그 앞에서만 10여분을 머무를 정도이니 이 문이 받게 되는 물리적, 화학적 손상이 얼마나 클 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래도 노쇠한 팔달문이 이토록 굳건한 것은 그 기초가 튼튼하기 때문이다. 팔달문은 약 4미터의 깊이로 파내고 모래를 다져서 기초하였단다. 가까이 가보지 못했으나 들은 바에 의하면 팔달문 바깥 남동쪽 오른 편 석벽에 공사한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이 문을 지을 때 선조들이 기울인 정성에 비해 너무도 대접이 소홀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팔달문을 지나 5분도 안되어 화성행궁에 도착했다. 주변에는 낮은 상가들이 들어서있고 차도 없어 한가한 느낌을 준다. 화성을 계란에 비유한다면 그 노른자위를 지키고 있는 곳은 단연 이곳일 것이다. 팔달산을 등지고 앉은 아늑한 모양세하며, 장안문, 팔달문을 좌우로 거느리고 있었을 행궁! 도시 한가운데 그것도 가까이에 이런 멋진 궁이 있다는 것을 수원 사람들은 자랑스럽게 여겨야 할 것이다. 토요일이라 신풍루 앞에서는 ‘정조의 꿈’이라는 인형극이 열리고 있다. 초등학생을 데리고 온 부모들이라면 참 좋은 구경거리가 될 거 같다. 본래 신풍루로 들어가지 못하는지, 아니면 인형극 때문인지 남군영으로 통하는 쪽문을 통해 행궁으로 들어가야 했다.세월에 빛바랜 기둥색을 기대했는데 만지면 묻어날 듯 선명한 색의 건물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일제 강점기, 일인들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지난 97년 복원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문득, ‘요새 건물처럼 페인트칠을 한 것은 아니겠지?’하는 생각이 든다. 복원을 하려면 전통 방식 그대로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아쉬움을 감추며 행궁의 중앙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봉수당’이라고 써있는 현판이 보인다.이곳은 행궁의 정당으로 지어진 곳으로 임금이 행차할 때마다 머무르고 평상시에는 부사가 자리하여 사용하였다고 한다. 봉수당은 그 가까이에 장락당과 이어 붙어 있다. 얼핏 보면 한 건물이지만 각기 다른 당호를 걸고 있으니 분명 다른 건물이기는 하다. 사이좋은 모자 사이를 나타내려고 이렇게 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화성에서 일어난 일 중에서 가장 큰 일이자 가장 큰 잔치를 벌인 곳도 이곳 봉수당이다. 화성 공사가 한창이었을 1795년 윤2월 정조의 어머니이자 사도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이 시작된 것이다. 봉수당 안에는 마치 그 순간이 멈춘 듯한 모습의 인형들을 전시되어 있다. 감격에 겨워 눈물 흘릴 혜경궁 홍씨와 그러한 어머니를 보며 자신의 의지를 더욱 굳게 했을 정조의 모습이 인형들과 겹쳐 보인다. 이 행사를 치른 다음, 원래 장남헌이란 이름에서 ‘봉수당’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효심깊은 정조가 어머니의 만수무강을 비는 마음에서 ‘목숨을 받든다’는 의미로 이름을 바꾸었을 것이다.혜경궁의 회갑연은 도시 외곽의 사도세자의 무덤과 함께 정조의 효성스런 마음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이것은 명분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수원에 신도시를 세우기 위한! 지금도 행정수도이전에 대한 반대가 만만치 않다. 서울에 경제적 기반을 두고 있는 기득권층이 자신의 이권을 잃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이런데 당시에는 오죽했을까? 아마도 정조는 반대를 물리치기 위해 유교 사회에서 최고의 가치인 효를 내세워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자 했을 것이다. 수원성을 통해 미약한 왕권을 강화시키고 자신의 이상을 펼치기 위한 군사적?경제적 기반을 마련하려고 말이다. 그렇다고 그의 효심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이런 생각에 빠져 화성행궁을 그 뒤쪽의 성벽으로 향했다. 가파르지는 않지만 언덕을 올라가는 것은 힘에 부친다. 그래도 마니산 첨성대의 계단 1000개를 올라갔던 때를 생각하며 위안을 삼아 본다. 성곽에 이르자마자 한숨 돌리고 나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성곽에서 내려다보는 주변 경치의 맛은 역시 일품이다. 성벽을 따라 걷는 것은 마치 산책로를 걷는 것과 같아 수월하다. 바로 옆에 이런 문화유산이 있고, 머리가 복잡할 때면 한가로이 산책도 할 수 있는 수원 사람들이 부럽다.성벽은 생각보다 낮다. 하지만 성벽 밖의 적군이 본다면 그리 녹녹치만은 않겠지? 성 안은 바닥이 높고 흙으로 길을 만들어서 낮아 보이지만 바깥은 제 높이가 다 보일 테니까. 이렇게 안쪽 벽에 흙을 쌓는 것은 군사들의 통행로를 위한 것만은 아니다. 버팀벽을 만들면 석재를 절약할 수도 있으니, 이것이 바로 하나의 돌로 두 마리의 새를 잡는 조상들의 지혜이다. 이런 성곽 축조 방법은 당시의 전형적인 것이었단다. 화성은 이렇게 당시까지 건축의 장점은 최대한 계승하되 단점은 보완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정조가 더 오래 살았다면 이런 건축 방식이 더 널리 사용됐을 것이라 생각하니 아쉽다.화성의 서문 화서문은 무지개 모양의 문 위에 팔작지붕의 정자가 앉아 있는 모습이다. 기이한 것은 문 앞쪽에 반달모양으로 벽돌을 쌓았는데 그 한 쪽이 터져있는게 아닌가? 그 옆의 망루에 가서 화서문을 바라보니 마치 찰흙으로 만든 양 자연스러운 곡선이 더 도드라져 보인다.화성은 그동안의 성곽과는 다르게 방어 기능을 함께 가지고 있다. 망루인 서북 공심돈이 그것을 말해준다. 공심돈은 성벽 높이와 같은 높이의 석재 위에 벽돌을 쌓아 올리고 그 위에 누각을 앉힌 것이다. 벽돌을 이용해서인지 공심돈 네모서리의 둥그런 곡선미가 살아난다. 처음 이것이 세워졌을 때 백성들에게는 하나의 경이로움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이루어낸 왕에게 희망도 걸었을 것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벽돌로 쌓은 벽 곳곳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 안에서 밖의 적을 감시하기도 하고 총이나 대포를 구멍에 내놓으면 딱 이라는 생각이 든다.원래 조선시대의 읍성은 단순히 출입을 통제하는 기능을 가졌을 뿐, 외적이 쳐들어오면 근처 산성으로 대피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수원성은 이전의 이중적 구조가 아닌, 방어 기능까지 갖춘 성곽이었던 것이다. 왜 방어 기능까지 필요했을까? 실학자 유형원은 수원을 ‘남쪽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길목에 있는 물자 유통의 요지’라고 했다. 이는 지금 수원이 경기도청을 안고 교통 중심지로 부상하는 것과도 연결된다. 상업 도시로 번창하기위해서는 산골에 있는 마을을 들로 옮겨야 했고 그리하여 방어 기능까지 필요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그런데 성벽을 유심히 보면 어떤 돌은 하얗고 반듯반듯한데 어떤 돌은 불규칙한 돌들이 맞물려 있다. 단순히 색의 차이는 아닌 듯하여 안내소에서 물어봤더니 수원성을 보수해서 돌 의 색과 모양이 차이나는 것이라 대답해주었다. 반듯하지 않아도 정조시대의 돌로 된 성벽이 그대로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돌에서라도 그의 자취를 온전히 느낄 수 있게….어느덧 수원에 도착한지 2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화성의 정문이자 북문인 장안문에 도착했다. ‘장안’이라 하면 중국의 장안성이 떠오르는데, 혹시 정조도 수원성을 그에 견줄만한 도시로 키우겠다는 의지에서 장안문이라고 이름붙인 것은 아닐까? 아니면 제 2의 장안(서울)이라는 의미에서 일까? 어느 쪽이든 정조가 이곳에 많은 기대를 걸고 애정을 쏟았음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세계의 역사, 서울에서 만나다우리는 역사를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를 정확히 알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네가 걸어온 길을 보여주는 역사 유물의 수집과 보존이 중요하고, 박물관이 의미 있는 것이다. 지금, 세계 3대 박물관의 하나이며 세계 각국의 유물을 700만점이나 가지고 있어 가히 ‘세계 최대의 보물창고’라 할 수 있는 대영 박물관이 한국에 왔다. 그것도 대영박물관 해외전시 사상 최다인 330여점의 방대한 진품유물이 건너 온 것이다. 직접 영국에 가지 않고도 글로만 보고, 말로만 듣던 세계의 문명사를 가늠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임이 분명했다. 서둘러 인터넷으로 예약하고 박물관이 개관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드디어 대영박물관으로 가는 날! 왠지 모르는 설레임이 나를 사로잡았다. 가는 길이 멀지는 않았지만 길게만 느껴졌다. 대영박물관 한국전에 들어가는 매표소에는 부모님의 손을 잡은 아이들이 길게 줄을 서있었다. 나는 인터넷으로 예약한 덕분에 빨리 표를 살 수 있었다. 그리고 박물관을 대충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안내 설명이 되는 mp3를 빌려 귀에 꼽고 한가람 미술관을 바라보았다. 건물은 생각보다 외소했다. 그래도 저 안에는 세계의 온갖 유물이 전시되어 있으리라!전시물을 돌아보는데 3시간 정도 걸렸다. 유물 하나 하나 음미하면서 보고 싶었지만 조건 상 그럴 수 없었다. 9개나 되는 전시관이 휴게실 없이 주욱 이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정도 보고 지쳐 뒤 전시관의 유물들을 중요하다는 것만 본 것이 너무도 아쉽다. 각각의 유물들은 그 가치를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들뿐이다. 무려 330여점이나 유물들을 마음으로 느끼며, 머리로 생각하며 본다면 족히 4~5시간을 걸릴 법하다. 그런데 이것들을 하나의 코스로 전시했다는 것은 이번 전시회의 의미를 축소시킨다고 생각한다. 많은 유물들을 한 번 슥 보고 지나가는 것보다 몇 개 안되더라도 마음에 새기며 보는 것이 관람하는 사람에게도 더 낫기 때문이다. 주최 측의 배려가 조금 더 세심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 빠르게 보면 1850년대부터 시작된 도서관 열람 시스템으로 정보를 공유했기 때문에 지금의 서구 문명이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이미 고려시대에 서양보다 약 200년 앞서서 금속활자를 발명했고, 조선 세종에 이르러 우리의 글자를 가지게 되었다.(1446) 그러나 우리의 금속활자는 책을 대량으로 발간하는데 이용되지 않았고, 훈민정음은 대중적으로 사용되지 않아 글도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이는 당시의 지배층들이 정보를 독점하여 백성들을 용이하게 다스리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우리보다 늦지만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를 통해 서구는 우리보다 먼저 정보를 공유할 수 있었다. 이것으로 일반인들의 사고 수준을 한 차원 더 높아져 지금의 유럽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리고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1820년대부터 소장품에 대한 교육을 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우리 나라는 전국토가 박물관이라고 할 만큼 5000년의 문화 유산들이 가까이에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대부분의 국민들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는 듯하다. 심지어 그 옆에 도로와 철도를 놓을 만큼 문화 유산에 대해 무심하다. 일찍부터 문화 유산에 대한 교육이 있었기에 지금의 대영 박물관이 있는 것이다. 물론 옳지 못한 방법에 의해 모은 유물들도 있지만 말이다.대영 박물관의 역사관은 본격적으로 유물들을 보기에 앞서 유물에 대한 태도와 박물관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었다.문명의 기원! 신비와 전설의 고향~ 고대 이집트와 수단보면서 가장 행복했던 전시실은 고대 이집트와 수단관이었다. 그야말로 ‘유물의 향연’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커다란 포스터에 박혀있는 ‘이집트’란 단어는 심장을 고동치게 만들었다. 이집트! 한 때는 세계 모든 문명의 시작이 이곳이라고 할 만큼 대단한 문화를 가지고 있는 곳이 아니던가. 게다가 파라오의 무덤 피라미드, 수수께끼의 스핑크스, 태양의 아들 파라오는 소설이나 만화의 소재로 많이 이용되어 친숙하게 다가온다. 그럼에도 신행한 미라'라고 불리어지고 있단다. 흥미로운 것은 이 미라 보드에 얽힌 루머이다. 19세기에 이 미라 보드를 이집트에서 운반해온 영국인 4명은 요절하거나 부상을 당했고 그 외 많은 사람들에게도 이 같은 불행이 따랐다. 게다가 초기 이 미라 보드의 사진에는 그 얼굴 부분에 악의에 찬 표정의 이집트 여성의 얼굴이 나타나는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다는 해프닝도 있다. 가장 기상천외한 이야기는 한 미국인 수집가가 이 미라 보드를 구입해 1912년 타이타닉호에 싣고 미국으로 운송하던 중, 배가 빙산에 충돌해 침몰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집트 관련 소설과 영화에서 자주 써먹는 ‘미라의 저주’의 기원인 바로 저 미라관이었던 것이다. 미라의 저주가 이 작품과 관련된 것이라니, 문득 섬뜩해지기도 하였다.이집트에 관련된 영화나 만화를 보면 항상 왕족들 무릎에는 요염하게 앉아있는 고양이를 발견할 수 있다. 이집트에서 고양이는 죽은 뒤 미이라로 만들어질 만큼 숭배되는 동물 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은 여신 바스테트의 청동상이었다. 왼쪽 귀에 귀걸이를 달고 있어 당시의 장식 문화까지 짐작하게 해주는 고양이상은 너무나 매끄러워 마치 모조품인 것만 같았다. 아까 사자 머리의 세크메트나 바스테트 등 유독 동물의 머리를 한 사람(?)을 많이 볼 수 있었다. 그것이 성스러움이나 신을 상징하는 의미란다. 이것은 예술품뿐만 아니라 신화에까지 반영되었는데, 이것은 이집트 문명이 생겨났을 때의 토테미즘이 신화로 승화되어 계속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당시 이집트 사람들은 선사시대 우리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능력보다 강한 동물을 숭상했을 것이다. 때문에 신들이 대부분 동물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서양 문명의 근원! 그리스와 로마지금 서양인들이 일상 생활에서 사용하는 나르시시즘, 아킬레스 건 등의 용어는 그리스?로마 신화에 그 기원을 둔다. 이렇게 현대 서양인들의 정신적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와 로마관은 매혹적인 아름다움으로 다가와 유독 기억에 남는다.무엇보다 중앙에 서 있서 발견되었으나 그리스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이 흉상은 머리 왼쪽으로으로 돌린 황제의 영웅적인 나신을 잘 묘사하고 있다. 우아한 머리칼과 수염처리는 주로 조각끌로 처리되었다. 새겨진 홍채와 파여진 눈동장 등의 눈 처리 형식은 초상 조각상에 잇어서 이 시대에 처음으로 도입된 형식이라고 한다.흉상으로만 봐도 멋진 안티노스는 그의 우아함과 아름다움으로 곧 황제가 그를 총애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나일강으로 올라가는 여행에 동행하는 동안에 익사하자 그의 죽음에 망연자실했던 황제는 이어서 안토니스를 신이라고 공표했고 그를 숭배하는 의식이 특히 로마 동쪽 지방을 통해서 널리 퍼졌다.처음 만난다! 고대 근동유럽인의 시각에서 가까운 동지중해 지역은 근동이라고 불리고 있다고 한다. 고대 근동관이라 했을 때는 어디인지 막연했지만, 이곳은 이집트와 함께 인류 문명의 서막을 열었던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찬란한 유물들을 전시한 곳이었다. 이집트와 항상 비교되는 4대 문명 발상지의 또 다른 곳! 이곳에는 어떤 유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여왕의 수금이었다. 내가 들면 가슴 높이 까지 올 것 같이 큰 수금은 기원전 2600~2400년 우르 지역에서 발견된 것이란다. 이것은 여왕과 함께 순장당한 10명의 여인 중 한명의 손길이 닿아 있었다고 하는데, 수업 시간에 들은 내용이 생각났다. 문명 일원설에서 3가지의 전파 경로중 한가지 길의 특징이 순장이었다. 이는 우리 나라의 부여에서도 보이고 우륵에 대한 소설인 ‘현의 노래’에서도 봤던 것이다. 멀리 메소포타미아에서도 순장이 행해지고 있었다니…. 시기 상으로 본다면 아마도 이 곳을 거쳐 우리나라에 이른 것이겠지만 문화의 힘이란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같이 순장되던 여인은 마지막까지 처량한 소리로 연주했을텐데, 그 애절한 수금의 소리는 어떠한지 듣고 싶다.근동관의 여인상은 마치 이집트와 같았다. 두 손은 가슴에 가지런히 모으고 옆을 보지만 몸은 정면을 하고 있었다. 코가 높고 눈은 크고 깊으며 머리는 물결무늬가 과거 왕의 영혼을 불어넣는 역할도 했단다. 그것이 된 후, 캄우드나 야자수 기름으로 문지르는 것은, 상 내부에 있는 왕의 혼령을 해방하기 위해서라고 했다.모두 비슷해 보이는 왕의 상에는 각각의 왕을 표시하는 상징적 문양이 대좌에 조각되어 있어, 이것에 따라 어느 왕의 상인지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 아프리카 인들에게 왕은 혁신과 발명을 주관하는 자로, 예를 들면 철공과 관계가 있던 왕의 상에는 모루가 조각되어 있단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모자, 검, 벨트, 팔찌 등을 하고 있었다.아쉬운 점은 이러한 아프리카만의 독특한 문화가 지금은 거의 단절됐다는 것이다.세계 유물들을 통해 엿보는 문화 교류서로 다른 관에 전시되어 있어도 하나의 실로 이어져 있는 유물들이 심심치 않게 보였다. 현대 서양의 문화는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그리스, 로마, 헬레니즘 세계의 문화가 하나의 실타래로 이어져 만들어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계속해서 보이는 뱀 모양의 장신구라든가 유명한 인물의 얼굴을 새긴 금화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앗시리아의 사람들은 사자를 숭배하여 그 수도 니네베 또한 사자의 성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사자 석상이 유명하다고 한다. 그 가운데 하나인 것 같은 죽어가는 사자의 부조를 통해 엿볼 수 있는 이들의 ‘사자 숭배’의 태도는 12~13세기 십자군에 의해 서유럽에 전파되어 각 왕가의 문장의 ‘사자’로 나타났다.그리고 이집트의 다양한 신은 그리스에 전해져 역시 다신교라는 공통점을 갖게된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은 인간을 중심으로 한 인문주의가 발달해서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을 한 올림푸스의 12신으로 나타난다. 즉, 그리스 문화가 이집트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해도 자신만의 색이 반영되어 이집트의 것과는 또 다른 색깔이 나는 것이다. 이렇게 문명이 교류되는 것은 일방적이지 않다. 받아들인 측에서는 나름대로의 변용이 일어나고 자기화하여 독자적인 문화가 수립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문화도 그랬고 중국의 문화조차 그러했다.‘미라의 초상화’은 이집트의 것이었으나,.
[ 의열 투쟁 ]I. 의열단 이전의 의열 투쟁1. 을사조약 이후의 의열 투쟁1905년(광무 9년) 11월 17일에 일본이 우리 나라의 식민지화 계획의 예비 수단으로 대한 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기 위해 강제로 맺은 조약을 맺게 되니 이것이 을사조약이다. 러·일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은 우리 나라에 대한 식민지화 정책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어, 궁궐을 포위하고 무력 시위를 벌이면서 을사조약 체결을 강요하였다. 조약은 대한 제국의 외교권을 일제가 행사하고, 그 일을 맡아 볼 통감부를 서울에 두도록 하는 등의 5개 조의 내용이었다. 그 결과 일본의 통감부가 설치되어 외교권 박탈은 물론 내정까지 지배하게 되었고 국내의 외국 공사관과 해외의 우리 나라 공사관이 폐쇄되었다. 을사조약의 진상이 알려지자, 온 국민은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며 조약의 파기를 주장하는 운동을 전국적으로 일으켰다.이에 대한 대응으로 이한응, 조병세, 민영환 등은 순국의 길을 택하기도 하였으며, 나인영)·오기호) 등은 5적 암살을 기도하였고, 장인환은 1904년 외부 고문관으로 임용되어 일제의 침략 행위에 앞장선 스티븐슨을, 안중근은 조선 총독부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였다.2. 3?1운동 직후의 의열 투쟁 -(1) 의열 투쟁 본격화의 배경3?1운동 이후 다수의 독립운동자와 일반 대중은 비폭력 시위항쟁이 갖는 한계를 절감했고, 폭력수단을 총동원한 지속적인 투쟁에 의해서만 일제를 구축하여 독립을 얻을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에 따라 무장 독립 운동 단체와 독립군 부대들 조직 구성에 박차를 가했으며, 군사활동이 불가능한 지역을 염두에 둔 강력한 폭력투쟁의 방법도 따로 강구되었다. 상해 임시정부는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1919년 9월 재편 후 전투적인 방향으로 독립운동 노선의 가닥을 잡아갔다. 그러한 항전의 일환으로 일제 요인을 섬멸하고 반민족 분자를 응징해 갈 것이라는 결의를 천명하였는데, ‘7可殺’범주를 설정하여 그 판결 기준과 내용을 공표한 일이 그것이다.‘비무장에서 무장으로’라는 독립운환으로 의열투쟁을 전개한 양상과 신채호, 이외영 등과 같이 무정부주의운동과 제휴한 의열투쟁, 그리고 개인적으로 일제의 원흉을 제고코자한 조명하 등의 의열투쟁 등 다양한 양상을 띠고 독립투쟁이 전개되었다.II. 의열단1. 의열단의 성립3 ? 1 운동 전후 해외로 망명한 독립지사들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강력한 무장 조직체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만주 중국 동북지방에만 하더라도 많은 독립운동단체가 성립되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의열단’이다. 1919년 11월 10일 만주 길림성 파호문 밖 중국인 반모의 집에서 성립)된 의열단의 명칭은 “정의(正義)의 사(事)를 맹렬(猛烈)히 실행”한다는 뜻으로 의열단 공약 제 1조에서 나온 것이며, 단원 중의 단장격인 의백(義伯)은 김원봉이 추대되었다. 초기의 의열단원은 대체로 김원봉의 동향출신이 많이 규합되었는데 그 중 김원봉, 이종암, 한봉근, 김옥 등은 경남 밀양(密陽) 출신의 동향인으로 길림에서 동거하고 있었다. 이들은 당시 설립된 독립단체들의 미온적인 활동을 개탄하고, 급진적 독립운동을 표방하여 헌신적 독립운동단체로서 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무장부대로서 의열단을 조직한 것이다.의열단 조직 직후 발표된 공약 10조(참고자료)에서 보이듯이 의열단의 행동방략은 과격한 비밀결사를 통한 민족독립의 성취를 목표로 하였고 그 행동지침은 매우 엄격하였다. 그리하여 의열단은 먼저 암살대상으로 ① 조선총독 이하 고관 ② 군부 수뇌 ③ 대만(臺灣) 총독 ④ 매국노 ⑤ 친일파 거두 ⑥ 적탐(밀정) ⑦ 반민족적 토호열신(土豪劣紳) 등을 선정하였는데, 이것이 뒤의 ‘의열단의 7가살(七可殺)이 되었다.의열단은 조직형태가 비밀에 부쳐진 결사적 조직으로서 이후의 암살, 파괴 공작을 전개하여 일제 당국에 타격을 가하게 되지만, 그 단원은 소수정예주의에 의한 조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민족운동자 중에서도 많은 인물이 의열단과 직 ? 간접적으로 연계를 갖고 있는 경우도 있었으며, 또한 다른 독립운동단체와 협를 나누는 틈을 타 단총(短銃)의 방아쇠를 당겼으나 이 순간 앞으로 나선 영국인 신혼부부 중 부인이 맞아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전중은 그대로 자동차로 향하였다. 제 2선을 맡은 김익상은 차에 오르는 전중을 향해 권총 2발을 쏘고 폭탄을 던졌으나 총탄은 그의 모자를 관통하는 데 그치고 폭탄은 불발이 되었다. 제 3선의 이종암은 차를 향해 재빨리 폭탄을 던졌으나 역시 불발이었다.이리하여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김익상, 오성륜은 체포되었다. 오성륜은 4월 1일 밤에 일인 죄수 전중충일(다나까 다다이찌)과 함께 탈옥에 성공하였으나 김익상은 사형을 언도받았다가 20년 징역으로 감형되어, 21년만에 고향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일본형사에게 연행된 채 암살을 당하는 불행한 최후를 마쳤다.(6) 종로경찰서 투탄 및 효제동의거1923년 1월 12일 종로경찰서 구내에 폭탄을 투척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의거의 주인공은 의열단원 김상옥이었다. 그는 삼판통(후암동) 고봉근의 집에 은신하고 있다가 탐지되어 수십의 일경에게 포위되었다. 이에 김상옥은 단신으로 종로경찰서 유도사범 전촌(다무라) 형사부장을 사살하고 그 밖의 수 명에게 중상을 입힌 후 포위망을 뚫고 남산(南山)으로 향하였다.김상옥은 18일 금호동(金湖洞)에 있는 안장사(安藏寺)에서 승의(僧衣)를 빌려 입고 효제동(孝悌洞) 이혜수의 집에 은신하였다. 그러나 일경에 의해 이곳마저 탐지되어 22일 아침 기마경찰 등 1천여 무장경관에게 포위당하였다. 김상옥은 이날도 단신으로 적과 접전 3시간만에 서대문(西大門)경찰서 경부 율전청조(구리따) 외 수명을 사살하고 총탄이 다해 최후의 일발로 조국의 독립을 기원하면서 34세를 일기로 자결하였다.(7) 제 2차 암살 ? 파괴계획1923년 초 조선총독부, 조선은행, 경성우체국, 경성전기회사 그리고 총독 재등(사이또)과 정무총감 수야(미즈노) 등을 대상으로 하는 의열단의 대암살 파괴계획이 진행되고 있었다. 곧 상해조계에 비밀폭탄제조공장을 두고 각국인을 초빙하여 고성능의 폭탄을 제조하여 신채호쳐 21명의 한국인 청년을 수용 교육하여 한국내 적화공작을 위해 밀파하였다.한편 의열단은 국민당 정부와의 연결을 유지하면서 쓴 「창립 9주년을 기념하면서」라는 격문에서 일제 타도, 민족적 협동전선의 구축, 통일적 독립당의 완성, 세계혁명과의 연결 등을 주장했다. 그러나 1929년에 김원봉의 공산주의자와의 제휴는 의열단원 중 많은 민족주의자의 반발을 사 단원들이 이탈함에 따라 겨우 잔당에 의해 명백을 유지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1929년 12월 2일, 해체 성명서를 내고 스스로 해체하게 되었다.그 후 1931년 만주사변(滿洲事變)이 일어나자 김원봉은 북경에서 남경(南京)으로 다시 활동무대를 옮기고 중국 내 항일감정이 비등해지는 기회를 이용해 중국과의 합작에 의한 항일독립운동을 달성하기 위해 의열단을 부활시켰다. 이에 의열단은 공산주의자와의 관계를 끊고 중국국민정부와의 항일공동투쟁을 제의하기에 이르렀다.이리하여 우선 혁명투사, 독립운동의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1932년 10월 설치된 것이 조선혁명간부학교였다. 여기서는 독립운동의 지도자를 양성해 이를 조선과 만주의 각지에 밀파하여 대중조직을 만들고 반만항일공작에 종사케 하자는 것이었다.한편 중국 내에 있어서 한국인 독립운동단체를 결집하여 대동단결을 목적으로 하는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이 1932년 10월 상해에서 성립되었다. 발기인은 5당이 참가하여 처음 가맹단체의 협의기관으로 출발하였으나 1934년 3월 제 2차 대표대회를 거치면서 그 연장선상에서 1935년 6월 남경에서 각 민족주의 단체의 대표회의가 개최되고 의열단을 중심으로 14명이 전권대표가 되어 7월 5일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이 발족됨으로써 신당결성과 함께 의열단은 사실상 해체되었던 것이다. 이후 의열단의 후신격인 민족혁명당을 이끌어 나간 김원봉은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를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김구와의 합작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1942년 12월 김원봉은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의 부사령이 되고, 이어서 1943년에는 다.ㄷ. 한인 애국단의 성립1931년 무렵의 상해 독립운동전선은 대단히 착잡하였다. 이에 임시정부는 국무회의를 거듭해 대책을 논의한 결과 군사작전을 능가할 공포작전으로써 특무공작을 추진할 것을 채택하여 일제에 철퇴를 가하고, 전세계에 임시정부의 존재를 현양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특무대라는 명칭으로 이를 추진하기로 하고 김구에게 일체를 맡기고 그 결과만 정부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이것이 후에 한인애국단이라 불리게 되었다.우선 애국단은 임시정부 산하의 가공단체로 임정이 그 실체였다. 이봉창이나 윤봉길이 모두 거사 직전에야 애국단에 가입하고 선서를 한 후에 곧바로 거사에 돌입하는 것으로 보아 실체를 가진 조직체로 볼 수 없다. 애국단은 임시정부의 별동대의 성격을 띤 것이다. 한인애국단의 조직은 비밀이었기 때문에 당원들은 상호간의 연락, 결속보다는 주무자인 김구의 지시에 의하여 자기에게 맡겨진 임무를 실천, 완수하도록 하였다.애국단의 활동은 ‘독립을 목표로 일본만을 상대로 투쟁하되 국제분쟁이 야기되는 것을 원치 않으며 자주적으로 전개’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자금조달은 미주와 하와이 교포들에게 호소하고 중국측으로부터 군자금을 받아 운영했으며 인물의 확보는 자금보다 더 어려운 문제였다. 요컨대 한인애국단의 활동은 미주로부터 모금된 많지 않은 자금을 가지고 김구 주변의 소수의 인사들을 주축으로 상당히 불리한 여건 하에서 전개된 것이었다.2. 한인 애국단의 의열투쟁(1) 이봉창의 도쿄의거1932년 1월 8일에 한인애국단의 이봉창이 도쿄에서 일제 천황에게 폭탄을 투척하였다. 비록 천황을 폭살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그 파급효과가 대단히 커서 사실상 침체된 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이봉창은 1900년에 용산에서 태어났다. 24세 되던 해에 3?1운동을 용산에서 목격하였고, 이에 크게 자극을 받아 큰 뜻을 품고 일본으로 향했다. 그는 일본 오사까에서 일인의 습속을 익혀 후에 일인으로 행세해도 아무도 몰라 볼 정도였다. 1931년 1월 일본을 떠나 상해에 도착다.
명말청초 조선의 사상적 변화1. 실학사상의 형성 배경실학자들은 자신이 처해 있던 현실세계의 분석을 통해서 주자설에 입각한 성리학이 현실과 괴리된 것으로 판단했다. 곧 실학자들은 성리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왕도정치론을 존중했지만, 주자 유일 기준은 거부했던 것이다. 그들은 성리학에 대체될 수 있는 경세론으로 육경고학에 기초한 왕도정치론을 제시했다. 조선 후기 사회에 이르러 성리학적 왕도정치론을 반대하고 실학적 왕도정치론이 제기된 데에는 일정한 배경이 있다. 즉, 실학사상의 성립 배경에는 조선 후기 사회의 해체가 강화되어나가던 내재적 상황이 주된 역할을 담당했고, 일부 외래적 요인도 함께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그런데 오늘날 실학 으로 규정하고 있는 사상의 경향에 대해 학문적으로 관심을 표명하기 시작했던 일제시기에는 이 사상의 형성 배경으로 청조 문물의 수용이나 서학의 전래와 같은 외래적 요인들을 주로 주목했다. 그 후 실학 의 개념을 정립시켰던 해방 직후의 학계에서는 대부분이 식민사관 극복론과 민족사에 대한 주체적 인식 논리에 따라 내재적 발전론의 입장에서 실학의 발생원인을 추구하게 되었다.한편 1970년대에 이르러 실학발생의 원인에 대한 재검토 작업이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실학 발생의 내재적 요인과 함께 외래적 요인에 대한 균형적 인식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주체적 인식을 강조하기 위해서 외래적 요인의 인정을 거부하려는 경향을 경계했으며, 주체성의 문제는 수용의 태도나 방법에 관한 문제이지 외국의 영향을 받았는지 여부에 대한 결과의 문제가 아님을 확인했다. 그리고 한 민족의 역사는 그 민족의 자생적 능력에 의해서 추진되고 전개되는 것이지만 밖으로부터의 외적 요인이나 변수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여기에서는 기존의 연구성과들을 기초로 하여 실학사상 발생의 원인에 대해서 검토해보고자 한다.1) 내재적 배경실학사상 발달의 내재적 요인으로는 우선 조선 후기 사회의 경제적 변화와 발전 현상을 주목할 수 있다. 17~18세기 이래 농촌 사회주적 토지소유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가 하면, 지주의 토지소유 자체는 인정하고 경영의 전환과 소작 조건의 개선방안을 모색하기도 했다.아울러 양란 이후 상품화폐경제의 발전 역시 실학사상 발생 배경의 하나로 작용하고 있었다. 특히 18세기 이후 상품화폐경제의 발전과정에서 서울이 상업도시적 양상을 짙게 띠게 되자 이에 영향을 받은 일군의 실학자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상업과 수공업의 새로운 동향을 주목하면서 18세기 이후 서울의 도시적 분위기에 걸맞은 유통을 중시하는 경세론을 펴게 되었다.이와 함께 조선 후기의 사회계급적 변동 역시 실학 발달의 원인으로 들 수 있다. 전쟁 후의 조선 사회는 중세적 신분질서가 비교적 폭넓게 붕괴해갔고, 그것은 대체로 양반의 일부와 대다수의 농민층이 경제적으로 몰락해가는 하향성과 서민층의 일부가 신분상승을 성취하는 상향성으로 나타났다. 이런 변화에 직면한 일부 진보적 성향의 사상가들은 사회적으로 하향과정에 놓여 있는 양반층의 생계대책과 함께 상향과정에 들어선 서민층의 이익을 보장하는 문제에 주목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실학자들은 사회현상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대책을 모색했고, 이를 통해 현실개혁적 실학사상이 형성되었던 것이다.조선 후기 실학사상이 성립하게 된 또 다른 배경으로는 성리학을 본위로 한 조선 사상계의 지형이 바뀌고 있었던 점을 들 수 있다. 성리학은 15세기 조선왕조의 사회질서를 수립하고 이를 유지하는 데 가장 근간이 되었던 사상이다. 성리학은 조선 후기 사회에서도 조선왕조의 대표적 사유형태였으며, 경세론으로 의연히 작용하고 있었다. 더욱이 양란 후의 조선 사회는 모든 분야에 걸쳐 그 부조리가 드러나 변화의 조짐이 나타남에 따라 전면적이고 본질적인 개혁이 필요했다.이러한 상황에서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에 이르러서 조선의 사상계에서 성리학의 학풍을 추구하면서도 주자 유일 기준의 입장을 벗어나서 새로운 기준에 입각한 학문경향이 나타나기도 했다. 한백겸(韓百謙), 이수광 등으로 대표되는 이러한 경향의 학인들은 당시 성리학계에서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한 사회질서가 동요되던 당시의 사상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그리하여 경화사족을 중심으로 한 경화학계 일각에서는 기존의 성리학적 의리지학을 반성하는 새로운 학문적 지향이 제기되었다.이렇게 성리학의 자기극복과정에서 실학이 나타나게 된 것은 실학자 대부분이 성리학적 지식을 기본 교양으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술한 바와 같이 실학자들은 적극적으로 성리학을 부정하거나 거부하지 않았다. 이에 조선 후기 당시의 실학자들은 기득권을 장악하고 있던 성리학자들과 본격적인 갈등이나 대립을 겪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시대의 권력구조와 사회질서, 문화전통의 해석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여 전면적으로 반성?비판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이 때문에 실학사상은 조선 후기라는 중세사회 해체기에 등장한 이상사회의 중세적 재건논리였다는 특성에만 머물게 되었다.마지막으로 실학사상 발달의 또 다른 내재적 요인으로는 정치적인 면에서 전쟁 후의 조선왕조 사회가 직면하고 있었던 통치질서의 경직화 현상을 들 수 있다. 16세기경부터 일부 변질되기 시작한 조선왕조적 통치질서는 전쟁을 겪으면서 동요하기 시작했다. 집권층의 벌열화, 수취체제의 붕괴, 신분체제의 동요, 농본주의 생산체제의 일부 변화 등은 15세기를 통해 짜여진 조선왕조 본래의 경국대전적 통치질서에 상당한 수정을 가해야 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했다.전쟁 후의 조선 사회에는 전면적이고 본질적인 개혁이 요청되었으나 성리학적 왕도정치론에 침잠되어 있던 집권세력은 폭넓은 개혁방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다만 소변통론(小變通論)의 입장에서 보완적 체제유지책을 세우는 데 그쳤을 뿐이다. 그러나 일부 상대적 진보성향의 관료와 재야의 지식인들이 조선왕조 자체를 유지하는 범위 안에서 벌열세력을 억제하고 국가의 통치체제를 강화해서 민생을 안정시킬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고자 했다.여기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조선 후기 통치질서의 경직화 현상은 왕도정치론의 구현을 위한 현실적 대안들에 대한 사고를 요청하고 있었다. 그리와 같이 새롭게 전개된 일련의 상황에서 조선의 사상계에서는 전통적인 정통론과 화이론(華夷論)에 대한 재검토 작업의 과정 중 조선중화주의(朝鮮中華主義)가 일어나면서 소중화론(小中華論) 혹은 소화론(小華論)이 제시되었다.* 이 주장은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당시의 현실을 중화가 이미 소멸된 상황으로 규정했던 사실을 전제로 해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성리학을 기준으로 한 왕도정치론의 입장에서 조선만이 중화문화의 정수를 보존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리하여 이들은 조선의 학계가 다시 중국에 이를 전수시켜야 할 책임을 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다.국제정세의 변동으로 초래된 조선중심주의적 사고방법의 출현은 실학자들의 자아각성에도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 실학자들은 정통론과 화이론에 대한 재검토 작업을 진행하였고, 이 재검토 작업은 실학자 자신의 사상이 새롭게 정립되는 데에 적극적으로 기여했다. 한편 당시 국제정세의 변동은 서세동점의 현상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서세동점의 결과로 중국에 전해진 서학사상은 조선에도 전파되었다.* 그리고 17세기 이래 중국에서 간행된 각종 한문 서학서들 가운데 상당수가 조선에 전래되어 당시의 지식인들에게 읽히고 있었다.* 이 때 전해진 서학서 가운데에는 천주교 사상을 논하는 서적과 함께 수학?천문학?농학?측량?지도와 같은 과학기술 계통의 서적도 있었다.한문 서학서를 통해 실학자들에 흡수된 서학의 종교사상은 그들의 철학적 사유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조선 후기 서학사상을 수용한 지식인층은 대체로 성리학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며, 선진유학에 기초하여 원초유학적 입장에서 성리학적 가치체계를 변혁하고자 했다. 그들은 당시의 학문풍토가 지니고 있던 사변적 경향과 관련하여 한문 서학서 가운데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는 이편(理篇)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여기에서 주로 논하고 있던 내용은 원초유학의 신관(神觀)에 대한 수용을 뜻하는 보유론적(補儒論的) 천주교 신앙이었다. 보유론은 서학이 유학에 대립되는 사상이 아니라 유학의 은 서학의 자극을 받으며 천문학과 지리학 혹은 기하학 등의 연구에 박차를 가하기도 했다. 서양 과학기술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자는 주장도 제기됐으며, 서학서의 이론을 직접 적용하여 거중기(擧重機)와 같은 실용적인 토목공사용 기계를 제작하기도 했다. 서양 천문학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면서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는 인식이 확대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학문의 관심이 조선과 조선 문화로 돌려질 수 있었다. 즉, 실학이 조선중심적인 사유체계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에는 서양 천문학의 영향으로 인한 지식의 확대가 중요한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한편, 명말청초 중국의 실학적 학풍과 청대의 고증학도 조선 후기 실학사상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황종희(黃宗羲)?고염무(顧炎武)?왕부지(王夫之)?안원(顔元) 등에 의해 제시되었던 명말청초의 학술사상에서는 일종의 민족의식 과 민본의식 그리고 현실개혁의식 이 강하게 나타나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학문 경향에서 등장하는 개혁적 이상은 청조 지배층의 의도적인 왜곡으로 인해 변질되었다. 그 개혁적 이상이 거세되고 고증학으로 전환되었던 것이다.그렇지만 18세기 후반기 이후에 활동했던 조선 실학자들은 명말청초의 사상을 통해 자신의 개혁이념을 가꾸어나갔다. 한편 청조의 고증학(考證學)도 조선 후기의 일부 실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청조 고증학의 영향을 받은 실학자로는 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정약용?김정희?이규경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정약용이 청대 고증학에 대해 동조하기보다는 오히려 냉담하기조차 했던 사례에서 드러나듯이 조선 후기 실학에 미친 청대 고증학의 영향은 상당히 제한적인 것이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조선 후기의 실학은 고증학보다 명말청초의 학문 경향에 좀더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이와 같이 조선 후기 실학사상의 발생 배경은 내재적 요인과 외래적 요인으로 나누어 검토할 수 있다. 특히 조선 후기 실학사상의 발생 배경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은 내재적 요인이다. 실학사상이 조선 후기라는 장기간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