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 예전에 함께 영어를 배우던 분이 알제리인이어서 영화를 보기 전에 알제리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던 상태였다. 실제로 알제리는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프랑스의 식민지였고 알제리인 동급생도 영화 속 인물들처럼 불어를 아주 잘했었다. 몇몇 프랑스인들은 그가 프랑스에서 태어난 것으로 착각을 하기도 했었다. 반면에 한국은 약 30년간 일본의 식민지였는데 짧은 단어나 표현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일본어를 쓰지 않는다. 그것도 아프리카에 비해 짧은 식민의 역사 때문인지 민족주의 때문인지, 아니면 일본의 식민정책이 성공적이지 못했던 때문인지는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다.본격적으로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면 도입부에서부터 고문하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영화는 스토리의 뒤 부분이 먼저 등장하고 그러한 결말을 만들어낸 과정들이 나오면서 결국 앞에 소개되었던 최후의 폭발장면과 대대적인 폭동사태로 끝을 맺는다. 알제리전투는 몇몇 사회비판 영화들처럼 우회적이거나 풍자적이지 않고 직설적이며 감정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사실성을 살리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다만 편집의 문제 때문인지 영화의 중심인물인 알리가 해방군에 가담하게 된 경로가 조금은 매끄럽지 않았다. 그렇지만 어쨌든 그와 그의 동료들은 죽음도 불사하고 테러를 비롯한 활동에 뛰어든다.그들이 테러를 저지르는 동안 수많은 프랑스 인들이 피해를 입는다. 처음 경찰을 공격하던 그들은 점점 일반인들을 상대로 테러를 저지르기 시작한다. 대부분의 테러범들, 혹은 독립운동가들은 유화적인 방법으로는 국제사회로부터 관심을 얻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에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한다. 체첸의 테러활동도 비슷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비인간적이고 비이성적으로 보이는 테러범들은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매우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다. FNL은 민족주의라는 광기에 사로잡힌 집단이 아니라 프랑스의 식민주의가 알제리인들을 착취하고 있다는 뚜렷한 독립의 동기를 갖고 있다. 그들은 차근차근 자신들의 목표달성을 위해 차근차근 계획을 진행시킨다. 영화 속에서는 유엔 회의 기간에 테러를 자제하고 파업을 하는 등의 치밀한 면모를 보인다.반면에 영화 속의 프랑스인들은 테러를 저지르는 해방군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며 그들에 대한 분노의 감정만을 느낄 뿐이다. 오히려 프랑스인들이 더 감정적이고 비이성적으로 보인다. 실제로 테러와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특수부대는 몇몇의 해방군 지도자만 처리하면 모든 사태가 진정될 것이라고 쉽게 믿어버린다. 그러나 프랑스인들의 생각과는 달리 해방군은 대다수 알제리인들의 희망을 대표할 뿐이다. 해방군은 연령 성별에 상관없이 다양하게 조직되어있고 언제나 프랑스 경찰과 군대를 피해 은신하는데 일반 시민들의 도움을 받는다. 알제리인들에 대한 우월감을 느끼는 프랑스 인들은 알제리인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며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는다.프랑스인들은 ‘유럽’ 지역에서만 거주한다. 알제리 인들과는 전혀 다른 문화, 전혀 다른 공간에서 살고 있다. 그들에게 유럽지역은 알제리가 아니라 프랑스다. 프랑스는 너무 오랫동안 알제리를 점령해왔고 식민주의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 프랑스인들은 점령당하고 착취당하는 알제리가 원래 알제리인들의 땅이라는 사실을 부인한다. 그렇기 때문에 혁명운동은 반동이고 독립시위는 폭동이 되는 것이다.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을 때부터 유럽인들은 인간으로서의 자기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원주민들을 타자로서 나와 분리하고 비인격화시켜야 했다.영화는 알제리가 1962년 독립했다는 자막으로 끝을 맺는다. 이제 알제리에 평화가 찾아오는 것일까? 알제리의 역사는 그렇게 순탄하지가 않았다. 외부의 적을 내쫓고 나자 이제 내부의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마치 조선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양대 진영이 해방 후 갈라졌던 것처럼. 내가 알던 알제리 인은 테러리즘을 피해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 알제리의 평화는 아직도 오지 않았다.
영화평-: 오스카는 1인칭 시점으로 스토리를 이끌어 나가는 존재다. 이야기의 초반에 갓 태어났을 때부터 생각을 할 줄 알았고, 지저분한 어른들의 세계를 증오하며, 스스로 자라지 않을 것을 결정하는 그는 완전하게 영특한 존재와 같이 등장한다. 그러나 영특한 아이는 체제 속에 편입되지 않는다. 애초부터 오스카의 피에는 반항적이고 반동적인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레지스탕트 운동을 하다가 평생을 쫓기는 신세로 살았으며 어머니는 남편이 앞에 있는 와중에도 버젓이 불륜을 저지르는 인물로 애인인 폴란드인과의 사이에서 오스카를 얻는다. 그리고 세 살 때 ‘양철북’을 선물한다.오스카는 사회가 규정하는 ‘자연스러움’ 인 성장을 거부한다. 그는 파괴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 그의 파괴는 보는 이의 속을 시원하게 해준다. 나치의 집회를 엉망으로 만드는 것을 시작으로 도시전체에 유리를 부숴 다른 남자와 호텔방을 드나드는 엄마에게 경고하고 교회에서 만난 아기 천사(혹은 예수?)도 치지 못하는 양철 북을 칠 줄 아는 오스카는 신의 아들같은 존재로 보이기도 한다. 자라지 않는 몸 때문에 징병대상도 되지 않는다. 그의 지독한 파괴의 능력은 자신의 어머니와 낳아준 아버지까지 파괴해 버린다. 그의 파괴력은 의도적이기도 하지만 타고난 것이며 때로는 그가 아직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기는 무지, 혹은 천진난만함이 오히려 파괴를 이끌어내기도 한다.그의 이러한 성격은 사회의 벽과 부딪히기도 한다. 자라는 것을 거부한 그에게는 병신이라는 꼬리표와 개구리를 넣은 수프가 대가로 주어진다. 어리기 때문에 겁이 없었고 그래서 뭐든지 할 수 있었던 오스카도 변화하기 시작한다. 그가 결정적으로 변화한 계기는 첫사랑을 아버지에게 빼앗겼던 사건 때문이었다. 그녀와 함께 있던 오스카는 놀랍게도 양철북과 떨어져 있었다. 그렇지만 몸이 자라지 않았던 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하고 아버지를 떠나는 선택을 한다. 양철북을 선택한 것이다. 새로 태어난 동생을 안고 오스카는 세 살이 되면 양철북을 사주겠노라고 약속한다.독일군의 악대로 들어가 자신이 우스개 거리로 만들었던 나치의 재롱둥이가 되어버린 오스카는 결국 사랑하는 여인에 대한 포탄으로써 모순적인 자아에 대한 응징을 받는다. 그리고 다시 단찌히로 돌아온다. 패망하는 독일과 함께 아버지도 사망하고 아버지를 묘지에 묻는 중에 오스카는 다시 선택에 기로에 놓인다. 양철북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다시 세상과 타협할 것인가? 선택은 오스카가 아닌 오스카의 동생의 손에 있었다. 오스카의 동생은 그에게 돌맹이를 던지면서 오스카로 하여금 이제 사회에 순응하며 살도록 한다. 연합군이 승리했기 때문에 더 이상 맞서 반항해야 할 파시즘도 없고 더구나 오스카의 동생은 레지스탕트의 피가 조금도 섞이지 않았다.다시 성장을 시작한 오스카는 단찌히를 떠나 새 출발을 하게 된다. 그러나 오스카의 할머니는 단찌히에 남는다. 할머니의 네 겹치마는 생산과 생명을 상징한다. 네 겹치마 안에서 오스카의 할아버지를 만났으며 네 겹치마를 따뜻하게 덥히며 가족들을 먹여 살렸다. 시대가 어떻게 변하든지 간에 생명과 생산은 그 자리에서 계속되는 것이다.
아모레스 페로스: 영화는 각각 소제목이 있는 세개의 스토리로 구성된다. 그리고 하나의 스토리가 진행되는 동안 가장 처음 자동차가 충돌하는 장면에서 어떻게 주인공들이 만나게 되었는지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충돌사고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유명모델인 발레리아이다. 그녀의 차에 타고 있던 개는 하얀색인데 그녀에게 사고가 나자마자 흰 개 리치는 누군가에 의해 적절히 맡겨진다. 그러나 옥타비오의 검은 개는 그냥 길바닥에 버려질 뿐이다. 버려진 개는 새 주인이 생기고도 한동안 이름이 없이 지낸다.개의 색깔은 주인의 삶은 반영하는 것 같아 보인다. 검은 개 코피를 키우던 옥타비오의 가족은 가난에 시달리고 돈을 벌기 위해 옥타비오의 형은 마약거래, 강도 짓을 하고 다닌다. 옥타비오는 코피를 이용해서 투견으로 돈을 벌려고 해보지만 수잔나는 돈을 챙겨 형과 함께 달아나고 단단히 한몫잡으려던 옥타비오의 계획도 파멸로 끝이 난다. 옥타비오는 형과 사랑, 돈, 모든 것을 잃게 되고 무엇을 시도하든 그의 삶은 한치도 나아지는 것이 없다.반면에 다니엘과 발레리아는 부족할 것이 없어 보인다. 다니엘은 아내와 쉽게 이혼했고 사랑하는 발레리아와 전망이 좋은 집에서 행복하게 살 것만 같았다. 그러나 구멍이 난 나무바닥은 앞으로의 불행을 암시한다. 옥타비오가 끌던 차에 받힌 금발의 발레리아는 한쪽 다리를 고정시킨채 꼼짝도 못하게 되고 그녀의 흰 애완견 리치도 구멍아래로 사라져 버린다. 사라진 애완견을 찾던 발레리아는 마루바닥 아래에 있던 검은 쥐들을 보고 혹시나 쥐들이 리치를 해칠까봐 점점 애완견의 안전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끙끙거리며 마루바닥을 벗어나지 못하는 개의 모습은 교통사고현장에서 유리창을 두드리며 신음을 흘리던 발레리아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며 다니엘과의 갈등이 점점 깊어지는 동안 그녀는 한쪽 다리를 잃게 되고 다니엘이 마루바닥을 부숴가며 찾아낸 리치는 잔뜩 지쳐서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어있다.한편 엘 치보에게 치료받은 코피는 본능적으로 주인이 키우던 다른 개들을 모두 물어 죽이고 엘 치보는 주워온 검은 개에게 분노한다. 그러나 그는 분노를 표출할 뿐 코피를 죽이지 못한다. 개는 훈련 받은 대로 행동했을 뿐이며 지금까지 그것이 유일한 생존의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게릴라였던 그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 가족을 버리고 싸웠지만 결국 실패했고 코피가 투견장에서 상대편의 개를 물어 뜯었듯이 엘 치보는 옷을 입고 밥을 먹기위해 청부살인을 택한다. 그러나 마지막 임무를 완수하려던 그는 죽은 개들을 태워버리고 나서 마음을 바꾼다.영화를 보는 내내 폭력과 살인이 난무하지만 공권력이 제대로 작동하는 장면은 거의 없다. 단 한번 경찰들이 은행강도(옥타비오의 형)를 진압하는 장면이 등장하지만 작은 가게와 시민들을 제대로 보호하는 경찰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가난한 하급계층은 정부에게서 아무런 보장도 받지 못하고 그들의 범죄가 공권력에 의해 저지를 받지도 않으면서 그들의 범죄는 싸움의 본능을 익힌 투견의 공격행동처럼 일상화된다. 그들은 나무바닥 아래에 사는 검은 쥐들처럼 더럽고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며 바닥 위에 사는 사람들 에게는 위협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정부와 공권력은 구멍이 난 바닥처럼 고쳐지지 못한 채 아무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다.
씨티 오브 갓: 시티 오브 갓의 화자인 부스까페는 그가 어렸을 때부터 보고 들어온 시티 오브 갓의 역사를 연대기 순으로 이야기한다. 정확히 말하면 청소년들의 마약과 범죄, 경찰의 부패에 대한 이야기이다. 코믹한 이야기 전개도 살인과 복수가 뒤얽힌 빈민가의 절망적인 상황을 희석시키지는 못한다. 빈민가에는 두 가지 선택만이 존재한다. 범죄의 소굴에 뛰어들어 그곳에서 최고가 될 것인가? 아니면 공부로 출세해서 그 지긋지긋한 도시를 탈출할 것인가? 아이들은 대부분 전자를 택한다. 그 쪽 길이 훨씬 쉬워 보일뿐더러 건강한 몸만 있으면 아무나 받아주기 때문이다.그러나 불법이 판치는 그 곳에도 법칙이 있고 세대가 있다. 마약두목이 되려면 일단 판매부터 시작해서 단계를 밟아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위험한 일들을 오랜 세월 거친 뒤에야 목표에 다다르지만 승리는 오래가지 않는다. 총 싸움이 너무도 흔한 빈민가에서 세대의 교체는 굉장히 빨리 이루어진다. 그들이 사망하는 나이는 국가 평균수명의 반의 반도 안되어 보인다. 그나마 이제 겨우 들어온 꼬마도 총격에 끼어들어 사망하는 경우가 태반이다.총을 들고 있는 어린아이의 모습은 국가무질서와 비 인권화의 상징과도 같다. 어린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무기를 만지지 못하도록 규제하는 사람은 전혀 없다. 아이들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것인지도 모르며 살인에 길들여져 간다. 아프리카에서 무장단체에 소속된 어린 병사는 대부분 처음부터 강제로 총을 잡을 것을 강요당한다. 그러나 브라질 빈민가의 아이들은 그것이 동경 때문이든 복수 때문이든 스스로 범죄자가 될 것을 선택한다. 생존자체가 목적이 되는 사회에서 피해자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가해자가 되는 편을 택하는 것이다. 그렇게 때로 몰려다니는 가해자 집단은 금권과 폭력으로 때로는 경찰력까지 무력화시킨다.그나마 그들의 양심에 정당성을 부여해 줄 수 있는 행동이란 부자들을 상대로 하는 강도 짓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부자들(모텔에서)과 경찰공무원들, 지식인 집단(부스카페가 드나들던 신문사의 기자들)은 모두 빈민가의 아이들과 피부색도 다르고 생활환경도 전혀 달라서 특히 잠깐 동안 부스카페가 신문사를 방문하는 장면이 등장할 때면 상당한 이질감이 느껴진다. 빈민가의 주민들과 아무것도 공유하고 있지 않아 보이는 그들은 한 몫 잡을 수 있는 좋은 범죄의 대상이다.그러나 여기에도 선택의 여지는 있다. 중심화자인 부스까페는 양심의 선택에 따라 혹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위해 오히려 즉각 강도 짓을 저지르지 못하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계속 핑계를 만들어댄다. 처음에는 버스요금을 받는 마네 갈리나가 너무 착해서, 두 번째는 가게 종업원이 너무 예뻐서, 세 번째도 차를 태워준 백인이 너무 사람 좋아 보였기 떄문에 그 날밤 한탕을 포기한다. 부스카페는 범죄로 가는 길과 타협하지 않고 양심을 지키는 길고 타협했다. 심지어는 형의 원수인 제 페게노에게 복수하는 것도 포기한다.반면에 마네 갈리나는 복수를 위해 자신의 신념을 점점 잃게 된다. 처음 갱단에 합류할 때 그가 세웠던 원칙들은 점차 현실과 타협하게 되면서 깨어지고 그나마 남은 그의 양심에서 나온 동정심은 복수라는 이름의 총알로 되돌아 온다. 첫 장면에서 도망을 가고 있던 닭 한 마리는 죽어가는 친구들을 보며 빈민가를 탈출하고 싶어하던 부스까페와 마네 갈리나의 모습과도 같다. 어쩌면 그 곳에 사는 주민들 전부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닭을 몰며 잡으러 다니는 아이들 앞에 닭 한 마리의 모습은 약하고 불안해 보인다. 도망치고 있던 닭은 거대해 보이는 힘과 사회구조의 그림자 속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갱단이 다시 전투를 시작하면서 닭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결말은 보여지지 않은 채로 영화는 끝이 난다. 제 페게노의 절친한 친구인 베네는 아주 평화롭게 빈민가를 떠나는 것처럼 보였지만 운명은 그가 행복하게 탈출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부스까페는 계속해서 행복을 이어갈 수 있을까? 마네 갈리나는 후에 어떻게 될까? 한가지 분명한 것은 두 사람이 시티 오브 갓에서 한 발짝 물러난 뒤에도 사회는 변하지 않을 것이며 다음 세대를 통해서 폭력과 비극은 계속 된다는 것이다. 체 페게노가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은 언뜻 해피엔딩처럼 보이지만 총을 든 꼬마들의 모습은 그저 세대가 바뀌었을 뿐 나머지는 아무것도 변화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영화의 처음 시작은 대 농장주의 아내 엘레나가 막내 딸을 출산하면서 시작된다.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그녀는 아들을 낳지도 못했고 심지어 남편의 아이가 아닌 자식을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남편이 심장마비로 사망했기 때문에 그가 소유했던 재산과 집주인으로서의 권리를 상속받는다. 남편의 죽음이 그녀에게는 면죄부가 된 것이다. 그녀에게 있어 강력한 억압자, 제재자가 될 수 있는 남편이 사망하고 아들도 없는 집안에서 아내는 가부장의 지위를 물려받는다. 사실 영화에서 남편이 등장하는 시간은 너무 짧기 때문에 그의 성격을 짐작하기란 쉽지 않지만 막내딸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그와 주변인물들의 반응을 통해서 남편이 속한 그 그룹내부의(혹은 멕시코 전체의) 남성우월주의 문화가 팽배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그러나 이렇게 남편의 지배에서 벗어난 엘레나는 가부장적 권위를 그대로 답습한다. 무표정한 그녀의 표정과 감정을 극도로 절제하는 모습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남성가장의 상징이다. 엘레나는 집안의 전통에 따라 막내딸 티타를 결혼 시키지 않기로 결심한다. 농경사회에서 자식의 존재, 특히 아들의 존재는 그 부모의 노년을 보장하지만 아들이 없는 입장에서 어머니를 돌볼 사람은 딸들 밖에 없고 그 중에서도 가족관계를 권력의 상하 관계로 봤을 때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막내딸이 그 부담을 떠 안게 되는 것이다.그리하여 티타는 가족 내부에서 가장 불합리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녀에게는 훗날 혼자 어머니를 돌볼 의무뿐만이 아니라 당장 가정 일을 도울 의무도 있다. 특히 티타는 늘 나이든 하녀를 도와 음식을 하는데 요리를 하는 일은 티타에게 하나의 의무이면서 동시에 의견과 감정의 표출도구가 된다. 사랑하는 남자를 언니에게 빼앗길 때도, 형부에게 성적인 욕망을 느낄 때도 티타는 감히 어머니께 반항할 용기를 갖지 못한다.그러나 그녀는 요리를 통해 마치 시위를 하듯 감정을 발산한다. 요리실력이 점점 향상되고 형부와의 성적인 접촉이 늘면서 그녀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을 통제하는 권력을 가지게 된다. 심지어 처녀인 티타는 언니의 분신과도 다름없는 아기에게도 젖을 물린다. 티타가 집안에서 두 번째 위치를 차지하는 큰 언니의 위치를 위협하자 엘레나는 큰 딸 로사우라 가족을 티타의 영향력 밖으로 이동시킨다.미국인 의사가 청혼을 했을 때도 티타는 권위주의적인 어머니에게서 탈출할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고 만다. 그녀가 선택한 것은 사랑이었으며 사실상 티타가 없는 가족이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엘레나가 아버지의 역할을 맡으면서 어머니의 역할을 맡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엘레나는 아버지와 같은 냉정함을 보이지만 사실 어떻게 보면 그녀는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빼앗겼다고 말할 수 있다. 둘째 딸이 사라지고 혼자 몰래 숨어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과 티타와 같은 삶을 살았다는 나레이션은(영화 진행이 매끄럽지 않아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내용인지 나오지는 않지만) 그녀의 숨겨진 후덕한 어머니가 되고자 하는 욕망을 암시한다.그러나 혁명기의 반군들이 나타났을 때 그녀는 마치 아버지가 된 것처럼 가족을 위해 총을 들고나선다. 결국 엘레나는 반군들에게 저항을 하다가 죽게 된다. 엘레나는 집안에 엄격하고 강한 가장이 있어야 한다는 사회적 인식을 극도로 내면화했으며 그녀의 딸 티타 또한 강한 모성애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가치에 대한 사회적인 가치를 내면화했다. 이는 마지막까지 전통성과 권위주의의 상징으로 대표되는 어머니의 망령이 따라다니는 장면에서 나타난다. 큰 언니의 딸을 결혼시키고 나서 형부와 부부관계가 되면서 관습을 깨트리려고 하지만 결국 전통과 권위를 벗어버리지 못하고 죄악에 대한 결과를 받아들이면서 파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