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 목 명학 과학 번이 름담당교수제출일자‘에이브러햄 링컨을 읽고’목 차Ⅰ. 서문Ⅱ. 본문1.어린시절의 링컨2.변호사 링컨3.노예제도와 링컨4.대통령 링컨Ⅲ. 비평Ⅰ.서문나는 링컨이라 하면 미국의 유명한 대통령중 한 사람으로 노예제도 폐지를 통해 노예를 해방 시켰다는것과 암살을 당했다는 것이 내가 아는 링컨에 대한 전부였다. 이 책은 이러한 나의 무지함을 해소시켜줌과 동시에 링컨의 삶과 당시의 상황에 따른 링컨의 심리, 대처능력등 알지 못했던 링컨의 현실적인 삶을 알게 해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Ⅱ. 본문1.어린시절의 링컨링컨은 1809년 2월 12일 한 오두막집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인 에이브러햄을 별칭으로 에이브라 불리던 링컨은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어릴적 부터 글쓰기와 작문을 좋아했다. 링컨의 어릴적은 무척 가난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의 어머니는 9살 때 돌아가셨고 불안했던 살림으로 링컨의 누나인 새라는 가사와 부엌일을 맡고 링컨은 아버지와 함께 농사일을 맡았다. 가난으로 인해 제대로 가르침을 얻지 못하다가 조금은 늦은 나이에 못 다니던 학교를 다시 다니게 되었고 책을 읽는 법을 배우게 되었는데 그 후 부터는 나무그늘이든 방구석이든 언제 어디에서나 책에 몰두하였고 많은 양의 책들을 읽었는데 오죽했으면 그는 “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책에 있기에 내가 읽지 않은 책을 구해 주는 사람이 제일 좋은 친구다”라고 말할 정도 였다고 한다.가난한 사정으로 책을 사서 읽을 여유는 없었기 때문에 책 있는 곳은 어디든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책을 빌려 밤이든 새벽이든 책을 읽었다는 내용을 볼 때는 문득 그와는 대조적인 상황으로 충분히 여유 있는 환경에서도 만화책이나 재밌는 소설책이 아니면 책을 잘 읽지 않고 읽는다고 해도 한달에 2~3권도 읽지 못하는 나 자신이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한 그의 많은 독서량이 대변하듯 링컨은 젊은 시절부터 현명하고 정직했다고 한다.링컨은 젊은 시절 많은 경험을 하였는데 1832년 당시 인디언 추링컨은 변호사 시험에 합격을 하였다2.변호사 링컨링컨은 스프링 필드의 한 잡화점에 기거하면서 순회법정 2층작은방에 스튜어트와 동업하였고 스튜어트-링컨 법률사무소를 차려 변호사의 일을 시작하였다. 링컨은 법률에 관한 연설도 하였는데 1838년 1월 스프링필드 청년회원들에게 사람들의 법률을 무시하는 폭력행위를 비난하여 “혁명가들의 생명과 재산을 아끼지 않고 성취해 준 개인의 자유를 무시하는 악질분자들이 교회에 방화하고 상점을 약탈하며 남의 인쇄기를 강물에 던지고 신문인들을 총살하며 제 비위에 안 맞는 사람을 교살하고 화형 시키는 등 만행이 계속된다면 이나라는 오래 갈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링컨이 인권유린을 반대하는 최초의 연설이었다고 할 수있다. 이후 정계에서 연방의회 의원을 맡다가 사퇴하였고, 다시 스프링필드로 돌아와 헌돈과 함께 동업을 하였다. 무엇이든 빠르게 읽었던 헌돈은 여러 가지 자료를 찾는 일을 맡았고, 링컨은 그 자료를 꼼꼼히 읽고 변호하는 일을 맡았다. 링컨은 연방법원에서도 모든 소송 건을 맡아 일하게 되었는데 돈도 되지 않고 성격적인 면도 맡이 않는 채권 소송보다는 다른 소송건에 관심이 많았는데 특히 기계에 관한 특허권 같은 소송건에 흥미를 가졌다. 한번은 그가 시카고 연방법원에서 맡은 첫 소송건으로 물레바퀴 특허권을 가지고 있던 파커와의 호이트 소송사건으로 링컨은 당시 호이트 쪽 변호를 맡았는데 링컨은 호이트가 만든 기계는 파커의 물레바퀴를 무단 복사 한것이 아니라 전통적 수력 기본법을 이용한 발명품이라 주장하면서 예전 과거시절의 경험을 살려 자기 의뢰인 호이트를 열심히 변호 하여 승소 하였는데 링컨은 이 사건을 두고 “ 내가 변호한 소송 건 중에 제일 만족스러운 건이었다” 라고 말했다. 링컨과 헌트는 1861년 까지 같이 일을 하였는데 1849년 8월 첫째날에는 3개의 송사, 둘째날은 17개, 셋째날은 8개의 송사를 담당할 정도로 송사를 많이 담당하였고 일이 바빠짐에 사무실도 옮기게 되었다. 두 사람은 거의 모든 송사건을 담당하성적 측면에서 백인과 동등하다고 보지않는다는 점에서는 같은 생각이었지만, 흑인은 사람이다, 사람이 아니다라는 도덕적인 측면에서 링컨과 더글라스는 의견은 극명하게 갈렸다고 할 수있다.링컨은 노예제도를 반대함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노예제도 철폐는 흔들리지 않는 그의 정책이 되었다. 링컨이 국회 상원의원 선거에 공화당 후보로 선출되었을 때 노예제도는 문제는 이미 국가적인 이슈가 되어있었다. 상대 후보인 민주당의 더글러스는 노예 옹호론자의 시선을 의식해 노예제도에 대한 논쟁을 교묘히 피했다. 프리포트에서 그는 노예제도는 금지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연방 대법원의 드레드 스콧판결과 인민주권론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느냐는 링컨의 질문에 국민들이 노예제도를 지지하거나 반대 할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 라는 애매한 입장을 취했다. 링컨은 후보들의 소견을 밝히는 연설을 통해 왜 자신이 노예제도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이 논쟁의 진정한 쟁점은 마음 속 감정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이런 것입니다. 한 쪽에서 노예제도는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다른 쪽에서는 잘못된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노예제를 잘못된 것으로 인식하는 데서 나오는 감정은 공화당의 것입니다. 이런 감정이 공화당원의 모든 행동, 모든 주장에 깃들어 잇고, 또 모든 사업이 거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이유입니다! 더글러스의 불쌍한 혀와 내 혀가 침묵을 지킨다 하더라도 이 쟁점은 계속 될 것입니다. 옳은 것과 그른 것 사이에는 서로 투쟁을 부르는 상반된 두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하나는 군주의 신성한 권리를 역설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신이 일하고 고생하고 빵을 버는 데 내가 그것들을 먹는 것입니다. 이런 의식이 백성 위에 군림해 고혈을 짜는 군주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든, 아니면 다른 인종을 노예화시킨 것에 대해 미안해하는 인종에게서 나온 것이든, 똑같이 낡은 것입니다. “1858년 11월 2일 투표결과는 링컨의 득표수는 더글러스 보다 앞섰지만 당시 주의는 미국 군대가 수비하고 있었는데, 남부연합은 요새의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항구의 다른 요새들로부터 그곳을 위협했다. 링컨은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섬터 요새의 식량이 곧 바닥날 것이므로 지원을 하지 않으면 군대를 철수시켜야 할 것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그는 반대되는 2가지 조언을 받았다. 스콧 장군, 국무장관 윌리엄 H. 수어드 등이 요새를 포기할 것을 요청한 반면, 많은 공화당원들은 약함을 보이는 것은 당과 연방에 매우 좋지 않은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링컨은 섬터 요새와 플로리다 주의 피컨스 요새에 보낼 2개의 원조부대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링컨이 보낸 파견대가 섬터 요새에 도착하기 전에 남부연합 정부는 앤더슨 소령에게 요새에서 즉시 철수할 것을 요구했으며, 앤더슨 소령이 이를 거부하자 마침내 1861년 4월 12일 동틀 무렵 찰스턴 항구에 있는 남부연합의 포대는 발포를 개시했다.연방을 지켜야겠다는 입장이 확고했던 링컨은 이를 위해 남부연합에 강경히 맞서기로 했으며 섬터에서도 이러한 입장을 고수하는 편이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링컨의 원래 목적은 전쟁을 일으키는 것도 평화를 유지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연방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전쟁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생각이었으며,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단기전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링컨은 육해군 총사령관으로서 첫번째 중요 결정을 내려 섬터 요새에 군대를 파견하고 자원병 모집을 요청하며 항구봉쇄를 명령하는 등의 조치들을 취했다. 그러나 그러한 결정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는 전략안과 명령체계가 필요했다. 스콧 장군은 링컨에게 버지니아에서의 접전을 피하고 미시시피 강을 장악하여 남부를 거대하고 튼튼한 포위망으로 좁혀 들어가는 전략을 제시했다. 그러나 링컨은 다소 소극적이고 가능한 한 피를 흘리지 않으려는 스콧의 '아나콘다 계획‘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으며 전쟁에서 이기려면 적극적으로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는 스콧의 의견을 무시하고 버지니아 전선으로 바로 3월 링컨은 그랜트를 중장으로 승진시키고 북군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마침내 링컨은 대규모 합동공격이라는 자신의 구상을 실현에 옮길 적임자를 찾았다. 이제 북군의 병력과 물자는 육군장관 스탠턴이, 대통령에 대한 자문 및 장군들과 대통령 사이의 연결은 참모총장 핼럭이 각각 맡았으며, 모든 군대는 총사령관 그랜트의 지휘하에 있고 그 가운데 포토맥군은 미드가 맡았다. 이와 같이 링컨은 전면전의 방대한 전략을 실행에 옮기는 데 있어 모든 물자와 병력의 동원을 담당하는 최고사령부의 창설을 주도했다. 그는 군대를 총지휘하는 데 있어 해가 갈수록 수완과 효율성을 발휘했다. 전쟁을 치른 경험이나 전쟁에 대한 훈련이 없었기 때문에 그가 해낸 일들은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그는 케케묵은 군사이론에 구애받지 않고 군사적 천재성이라 말할 수 있는 현실적 통찰력과 상식을 적용하여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처음에 링컨은 노예제 폐지정책을 채택하는 데 주저했다. 그는 400만에 이르는 흑인들이 해방되어 국가의 정치·사회 생활에 들어올 경우 일어날 수 있는 문제점을 염두에 두었으며, 무엇보다 폐지론을 내세울 경우 경계주들이 남부연합에 합류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그럼에도 노예제 반대 감정이 높아졌을 때 그는 자신이 작성한 노예해방령을 들고 나왔다. 그의 제안에 따르면 각 주는 노예소유주에게 보상을 하고 노예를 해방시킬 수 있으며, 연방정부는 노예해방에 드는 재정적 부담을 주와 나누어 가진다는 것이었다. 또한 해방은 점진적으로 행해지며 해방된 노예는 해외로 집단 이주시킬 것이라는 점도 덧붙여졌다. 연방의회는 링컨의 안을 실행에 옮기는 데 드는 비용을 표결에 붙이고자 했으나 경계주들은 모두 이 안을 거부했으며, 흑인 지도자들도 자신의 동료들이 해외로 보내지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다.그러나 자신의 안건이 결국에는 통과될 것이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았던 링컨은 별개의 조처에 착수해 1862년 7월 22일에 초안을 거쳐 1863년 1월 1일 최종적인 노예해방령을 발표했다. 그가 전시의 대통령 권한
Ⅰ. 서 론Ⅱ. 본 론① 비정규직에 대한 개념과 유형(1) 비정규근로자의 개념(2) 비정규직의 유형② 비정규직 노동자의 증가 원인(1) 기업의 고용형태의 변화(2) 산업구조의 변화(3) 노동시장의 변화③ 비정규직 노동자의 문제점(1) 임금 문제(2) 고용불안 문제(3) 숙련 등 인적자본 형성 기회의 박탈과 비정규직 고착화(4) 공정성과 평등성의 문제 유발(5) 비정규직의 고용증가로 인한 노동시장의 분단 초래(6) 노동기본권의 부정④ 비정규직 노동자의 문제점에 대한 해결방안 연구(1) 동일노동과 동일임금의 원칙 고수(2) 비정규직의 엄격한 제한(3) 근로기준법의 재정비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법적 보호(4) 비정규직 노동자의 차별제한과 노동행정의 강화(5)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사회보험의 적용⑤ 비정규직 장점의 극대화 전략(1) 전략적인 인재로의 활용(2) 비정규직의 교육과 인재육성(3) 인재고용 포트폴리오 전략의 구사(4) 비정규직의 지식경영과 학습조직의 접목Ⅲ. 결 론Ⅰ. 서 론레포트를 시작하며비정규직 노동자의 수적인 증가와 더불어 노동자들의 의식수준 향상에 따른 급여와 복지환경, 고용안정에 대한 욕구 또한 증가하면서 비정규직 문제는 사회의 큰 문제로 대두되었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이란 언제 일자리를 잃을지 모르는 불안감속에 살아가며, 가족을 부양하기는커녕 혼자 생활하기에도 빠듯한 임금, 게다가 차별과 무시를 당하며 인권마저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정규직과의 임금차이 또한 엄청나 노동자의 양극화 현상을 불러오며 비정규직 노동자와 그의 가족들은 조그만 충격에도 빈곤층으로 전락해버릴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있는 것이다. 소위 노동시장의 유연화라는 명목 하에 고용과 임금을 유연화하면서 이윤을 극대화 시키겠다는 기업들의 이기적 행태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 무엇보다 우선시 되어야 할 노동자들의 인권이 무시되고 있으며, 사회적 약자들을 더욱더 열악한 환경으로 몰고 가고 있는 비정규직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어지고 있다. 이는 복지사회의 목형이 특수고용 형태다. 특수고용은 고용계약을 맺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를 사업 주체로 꾸며서 사업자 대 사업자 형태로 계약을 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렇게 하면 고용주로서의 책임 하에서 완전히 빠져나갈 수 있다.특수고용이 확산된 직종으로는 학습지 교사나 학원 강사 같은 교육부문과 화물 운송이나 퀵서비스 등의 운송 부문을 비롯하여 수리 가사, 골프장 캐디, 보험설계사 같은 직종이 있다. 사용하던 제품이 고장 나서 연락했을 때 오는 수리 기사를 우리는 대체로 해당 제조사의 직원이라고 생각하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수리 기사는 해당 제조사와는 별도로 사업자 등록을 한 “사업주”이다. 캐디는 골프장 직원이 아니며, 학습지 방문 교사는 학습지 회사에 소속되어 있지 않다. 이들은 고용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사업을 하는 사업주체로 기업과 사업 계약을 맺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에 따라 특수 고용 노동자는 임금 노동자가 아닌 자영 노동자로 간주된다. 따라서 이들이 받는 돈은 임금이 아니라 상호 사업적 거래에 의한 것으로, 주로 “건당”계산되어 지급된다.② 비정규직 노동자의 증가 원인(1) 기업의 고용형태의 변화종전의 내부 노동시장에 의존한 평생직장 개념이 사라지고 인력관리의 유연성이 가속화되고 있다. 정보화 사회의 진전에 따라 채용 후 실시하는 직무교육에 의존하는 경향이 커졌다. 즉, 기업은 필요한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일단 채용한 후 전문기술을 습득시키는데 필요한 시간과 비용을 줄이고, 우수인력을 외부 노동시장에서 적기에 채용하고 저 숙련 인력은 주변부화 하여 비정규직을 계속 늘려간다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이에 따라 비정규직 근로자는 전체 취업자의 절반을 넘어서 52%에 달하고, 신규 취업자는 인턴사원제의 보급으로 인하여 비정규직화 되어가고 있다(2) 산업구조의 변화국내 경제위기 이후 기업에서는 장기고용관행의 퇴조와 평생직장개념이 희석되었으며, 정리해고의 도입과 직장 불안정이 증대되었다. 노동력 수요측면에서도 우리나라 기업의 구조조정추진으로 인적자원 합리화칙이 존중되는 범위 내에서만 허용될 수 있다(헌법재판소 판결). 이렇게 볼 때 동일노동-동일임금의 법제화 및 강제적용은 임금을 포함한 근로조건에 관해서는 근로자와 사용자가 자유의사에 의하여 결정한다는 사적자치의 원칙에 위배되는 조치는 아닌가 살펴보아야 한다.어쨌거나 이렇게 볼 때 정규직과 비정규직 근로자간의 차별대우는 그들이 창출하는 생산성에 차이가 있다면 지극히 정상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현재 비정규직 전체의 임금수준은 이미 위에서 설명하였듯이 정규직의 51% 가량이다. 물론 이는 직종이나 개별 노동자의 생산성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생산성을 고려한 임금수준에 대해서는 논란의 소지가 분분하고 각 기관마다의 의견도 서로 다른 형편이다.먼저 노동조합이 한국노동연구원의 조사를 인용하여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생산성을 고려할 때 비정규직의 합리적 기대임금은 정규직의 평균 61% 수준으로 추산된다. 비정규직은 최소한 10%포인트 가량 불합리한 임금차별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제조업체의 경우에는 비정규직이나 정규직이나 하는 일의 성격이 거의 같고 생산성에도 큰 차이가 없어서 차별의 정도는 훨씬 클 수 있다. 시장기능이 제대로 작동한다면 비정규직은 똑같은 일을 하는 정규직보다 오히려 더 많은 임금을 받는 것이 합리적이다. 후에 설명하겠지만, 비정규직은 임금문제 외에도 고용불안, 사회보장의 미비 등의 여러 다른 문제들도 안고 있는데 이에 대한 보상까지 얹어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정규직이냐 비정규직이냐는 노동자가 자신의 조건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될 것이다.(2) 고용불안 문제비정규 근로자는 근로계약의 개별적 내용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계약기간이 명시적 또는 묵시적으로 설정되어 있어서 임시적 고용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데서 고용불안의 문제가 야기된다. 고용계약기간을 이유로 기업주들은 비정규 노동자들을 언제든지 합법적으로 해고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법적으로도 비정규 노동자들은 ‘해고 예고’에서조차 제외되어 있는 실정이다. 그 뿐 아니라 하며, 이는 노동조합 운영에서 비정규직 조합원의 대표성 문제, 보다 넓게는 노동조합 민주주의 문제를 제기한다. 한편, 기존의 정규직 노동조합 이외에 비정규직 노동조합이 설립될 경우에는 단체교섭 기구의 구성이나 단체협약 요구의 결정 및 협상결과의 배분을 둘러싸고 양 노조 사이에 갈등이 나타날 수 있다. 양 노조가 서로 다른 상급단체를 갖고 있을 경우 노동조합 사이의 이해 조정 작업은 더욱 복잡해진다.(6) 노동기본권의 부정비정규직 근로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어 근로조건을 개선하려는 노력 또한 입법 또는 해석론에 의하여 제약을 받고 있다. 우리 헌법에는 “근로자는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을 가진다”고 명시되어 있으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이러한 노동3권은 말 그대로 ‘그림의 떡’에 불과한 실정이다. 현재 임시직 또는 계약직 근로자의 경우에는 사업장 단위 복수노조 금지조항에 의하여 노조조합이 불허되는 경우가 많으며, 파견근로자의 경우에도 복수노조 금지조항 또는 사용자성의 문제를 들어 노조설립이 불허되고 있다. 대부분의 파견ㆍ용역계약엔 노동조합이 결성되거나 파업을 하는 경우 계약을 해지한다는 조항이 들어 있는 형편이다.또 노동조합을 설립한 경우라 하더라도 사용자가 노동조합을 부정하거나 단체교섭을 거부한 경우에 실효성있는 구체수단이 마련되지 못하고 있다. 동시에 비정규직 근로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한 경우에는 기간만료를 이유로 재계약을 거부하거나, 사용업체가 ‘생산 차질’등의 이유로 용역ㆍ파견업체와 용역ㆍ파견계약을 해제하여 사실상 근로자를 해고함으로써 비정규직 근로자의 고용불안을 가중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계약직 노동자들의 경우 계약기간이 정해져있기 때문에 노동조합을 만들면 계약기간 동안은 그대로 두지만 계약기간이 끝나면 가차없이 짤라버린다. 현행법상으로 재계약 거부는 부당해고가 되지 않는 실정이다. 시설관리 노동자 30만 명은 ‘용역계약 만료’라는 이유로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다. 용역업체를 교체하는 과정에서 전 직원이 한꺼번에 길거리로 내몰리거나 자의적으로 선별야 한다. 현행 근로기준법은 근로감독을 명시하고 있으나 이의 적용에서 배제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여전히 무방비 상태에 처해 있다. 따라서 법제도 측면에서는 정당한 근로조건을 확보하도록 채용공고, 채용과정, 고용계약서 체결, 해고의 절차를 어길 경우 이를 시정토록 하거나 중징계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여야 한다.(5)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사회보험의 적용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사회보험이 명확히 적용되어야 한다. 사회보험은 일반 사회보험과는 달리 인적자원 개발 및 활용을 극대화함으로써 국가경쟁력을 확보함과 동시에 유사시에 노동자의 생계를 보장하기 위해 그 비용을 기업이 단독으로 부담하거나 노사 공동으로 부담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비용부담이나 행정적인 절차의 문제를 이유로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사회보험 혜택을 배제하는 것은 이러한 사회보험의 정신과 형평성에 어긋나므로 사회보험은 모든 노동자에게 적용되어야 한다.⑤ 비정규직 장점의 극대화 전략(1) 전략적인 인재로의 활용이제까지 비정규직은 정규직을 보조하는 차원이나 비용절감의 측면에서 고려되었고 논의도 그 점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되었다. 하지만 취업자 중에서 비정규직이 차지하는 비율은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고, 이에 따라 기업에서도 비정규직이 맡은 업무가 현장에서 직접 고객을 대한다는 점에서 이들의 경쟁력이 곧 기업의 경쟁력이라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다.이러한 비정규직의 역할증대는 물론 회사의 중요한 업무나 전문성을 가지고 정규직 이상의 성과를 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들에 대한 대우가 이제까지와 같은 방식으로 진행된다면, 비정규직 근로자들은 회사에 대하여 어떤 소속감도 가지지 못하면서 미래에 대한 어떤 비전도 없이 상실감 속에서 근무하게 될 것이다. 또한 이러한 근무자들의 비중이 많은 회사의 경우 조직분위기는 결코 활기가 넘칠 수 없고, 업무도 능률이 오르지 않는 악순환이 거듭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비정규직에 대한 새로운 인사제도의 구축이 필요하다. 또한 현업과 인 한다.
목 차1) 서 론1. 박정희는 누구인가?2. 박정희정권의 등장배경2) 본 론1. 박정희 개발독재의 성과◎ 국제적 배경◎ 국내적 배경◎ 박정희 정권의 정치적 의의와 그 성과2. 박정희 개발독재의 문제점3) 결 론1) 서론1. 박정희는 누구인가?우선 박정희에 대해 살펴보면 박정희는 1917년 6월 15일 경북 선산에서 태어났고 대구 사범학교를 졸업하여 신경군관학교에 입학한 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 졸업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집권기간은 18년으로 1961년 5월16일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는다. 정권을 장악한 후 윤보선 대통령이 하야하자 대통령권한대행을 맡는다. 그리고 1963년 12월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하여 1967년 재선된 후 장기집권을 위하여 1969년 3선 개헌을 통과시켰다. 그러다가 1972년 유신정권인 제4공화국 대통령에 당선된다. 새마을운동의 전 국민적 전개로 농어촌의 근대화에 힘쓰고 제5차 경제개발계획의 성공적 완성으로 국민들의 절대적 빈곤을 해결하였다. 그러나 장기집권에 따른 국민들의 민주화운동으로 그에 대한 지지도가 약화되자 긴급조치를 발동하여 정권을 유지하였다. 1974년에는 육영수 여사가 저격당하고, 이러한 정권의 위기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고 얼마 후인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의 저격으로 암살당했다.2. 박정희정권 등장배경4.19혁명 이후 분출하는 국민적 욕구를 충족시키기에도 역부족이었던 민주당 정부는 정권당 세력 내부에서 신구파라는 정파적 갈등까지 겹쳐 효율적인 정부를 이끌어 나가지 못하고 위기 관리 능력의 한계를 보여준 정부로 평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이승만 정부 아래에서 쌓여 있던 국민의 불만이 각종 시위로 폭발하였지만, 민주당 정부는 강력한 개혁 의지를 보여주지 못하였다. 오히려 민주당은 정쟁을 일삼았으며, 결국 일부의원들은 민주당을 탈당하여 신민당을 결성하였다. 이에 따라 장면내각의 힘은 상당히 악화 되었으며, 개혁 또한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였다. 더욱이 당시 경제 상황이 매우 어려워 130여만 명에 달하는 경제활동인구여명 및 사병 3.500여 명과 함께 한강을 건너 서울의 주요기관을 점령하였다.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여 전권을 장악하면서 군사혁명의 성공과 6개항의 혁명공약을 발표하였다.군사정변은 초기에 미8군사령관 매그루더 야전군사령관 이한림 등의 반대로 잠시 난관에 부딪히지만, 미국정부의 신속한 지지표명, 장면내각의 총사퇴, 대통령 윤보선의 묵인 등에 의하여 성공하였다. 5.16혁명이 장면정권을 무너뜨렸을 때 대중적 항의가 없었던 이유 중에는 장면 정권의 무능력에 대한 국민 대중들의 무언의 동의도 한 몫을 하였다.2) 본론1. 박정희 개발독재의 성과박정희 개발독재의 성과와 그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때 당시의 국제적, 국내적 그리고 정치적 , 경제적 움직임에 대한 지식이 필요한데 이를 살펴보면◎ 국제적 배경세계경제는 2차 세계 대전 미국의 자유무역정책(Free Trade Policies) 과 무역의 세계화 로 개발도상국들이 국제무대에서 선진국으로 상승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었다. 특히 세계자본주의는 1950~1960년대 지속적인 호황을 맞아 동아시아 신흥공업국에게 유리한 조건이었다. 또한 당시의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이해관계는 매우 정치적이었으며 미국은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 반공의 최전선인 남한과 대만에 막대한 원조를 제공하고 친미반공정권이 권력을 유지하는 것을 도왔다. 이는 남한과 대만의 지정학적인 위치가 경제발전에 이점으로 작용한 것이다. 이처럼 동아시아 신흥공업국의 존재는 냉전에서 기인했다. 그리고 미국의 케네디 정권은 자본주의적 방법에 의해서도 전후 사회주의권 국가들이 달성한 경제성장을 상회할 수 있다는 모범적인 사례를 동아시아지역에서 창출하려고 했다. 때문에 미국시장을 열어주었고 신흥공업국은 수출지향산업화전략을 채택하게 되었다. 이는 경제성장에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게다가 당시 동아시아에는 조직적인 국제분업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 특수로 고도성장을 이룬 일본의 기업들은 점차 일본 내 생산비용이 상승하자(일본내 환경오염의 우려도 영향을 미침) 동 노동탄압,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무력화 등을 꾀하였다. 그리고 반프롤레타리아 가구의 형성을 조장하는 정책을 펼쳤다. 저임금 유지정책으로 저곡가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며 농촌인구의 광범위한 이농을 유도하고 이들을 도시의 저임노동력으로 동원하면서 열악한 임금조건과 불안정한 고용조건으로 이들과 농촌가족들과의 지속적인 경제관계의 유지시켰다. 이를 통해 저임금으로도 노동력을 안정적으로 재생산할 수 있게 하는 전략을 추구했다. 마지막으로 조국의 근대화라는 기치 하에 성장제일주의를 민족주의와 가족주의로 연결시키면서 국민들의 자발적인 동원을 효과적으로 이끌어냈다. 폭압적 강제로 민주주의 억압, 반공주의를 이용한 노동탄압으로 급속한 자본의 축적을 이루면서 국민들에게 한국전쟁과 과거 가난의 기억을 상기시키며 독재정치에 대한 국민적 저항을 무마시킨것이다. 이로서 한국의 산업화는 정치적 민주주의와 분재의 정의를 무기한으로 연기시키고 성장제일주의로 치달았다. 또한 독재정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충효사상과 가족주의 중심으로 유교적 전통을 재구성하고 정치이데올로기로 활용했다. 유교적 가족주의와 가부장주의로 체계회한 지배이데올로기는 산업화를 위한 국민동원과 노동통제를 효과적으로 이루어내게 한 방편이었다.한국의 개발독재체제 및 발전과정에서 중요한 점은 한국경제의 초고속성장의 핵심에 가족이 있다는 점과 전통적인 불평등한 젠더관계가 발전과정에서 중요하게 활용되었다는 점이다. 한국의 노동자들이 엄청난 고통과 학대를 참으려 했던 것은 자기 가족을 위해서이다. 한국전쟁 등 비극적 근현대사 속에서 한국인들은 가족을 중심으로 생존을 유지하고 그 가혹한 시대를 견딜 수 있었다. 믿을 것은 가족밖에 없었다. 가족은 한국인들의 의식과 무의식의 심층에 깊이 뿌리내리게 되고 운명공동체로 강력하게 각인되었다. 이 과정에서 한국에는 가족을 위한 자기희생적인 윤리, 혈연중심의 배타적인 가족주의가 생성되었다. 군사독재정권과 자본가들은 이러한 한국인들의 가족주의 의식을 권력유지와 자본축적을 위해 철저히 이용하였다. 또 하제무역 체제의 호황으로의 빠른 편승과 수출을 위해 국내에 부족한 사회 인프라를 보충하여 한국 경제의 안정화의 꾀하기 위함이었다.재벌 위주 경제 성장은 하향식 경제성장 모델로서 위에서부터의 발전과 그 파급효과를 통해경제 성장을 도모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박정희는 군사정권이 정권을 다시 민간인에게 돌려 준다는 뜻의 민정이양과 함께 최대의 목표로 삼은 것은 ‘가난의 극복과 자립의 달성’이라 할 수 있다. 당시의 사회 인프라의 부족과 식량난으로 볼 때 상향식 개발, 즉 아래로부터의 개발을 단행 한다는 것은 총체적 난국의 입장에 덥친격으로 빈곤의 악순환을 초래 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며 국제적 흐름에 빠르게 편승하기 위한 조치로써 재벌위주의 경제 개발은 ‘최후의 수단’ 내지는 ‘선택권 없는 카드‘였다. 빠른 인프라의 확충을 위해서 직접 정부의 힘으로 움직일 수 있는 몇몇 경제 인사들을 조정함으로써 그 효율성을 극대화 하기 위함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방향과 그 성과들을 나열해보면5.16 이전의 경제개발 계획 1954년 자유당 정권 시 원조획득 및 그 배분을 위해서 '경제부흥5개년계획'을 수립한다. 이후 1959년 부흥부가 작성한 '경제개발3개년안'이나 장면정권의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수립되었으나 각각 4.19혁명과 5.16쿠데타로 인하여 중지되어 버린다.1961년 쿠데타 후 경제개발계획 추진을 위한 국내 경제 통제권을 확보한 군사정권은 그 후경제기획원을 설치하고 동시에 종합경제재건 5개년 계획을 발표하게 되고 이는 약간 수정되어 1962년 1월 '제1차 5개년계획'으로 확정 발표된다.박정희 정권은 일본과의 관계개선을 적극 추진하여 1962년 중앙정보부장 김종필과 일본 외상 오히라 사이에 유?무상 원조를 합쳐 5억 달러를 일본이 지급할 것을 합의하게 된다. 1965년에는 한?일간에 국교가 정상화되기에 이름. 이러한 한?일간의 관계개선과 함께 국내 독점재벌과 외국 독점자본의 합작이 추진되게 된다.1965년 5월 박정희는 미국을 방문하여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 문제를 매듭짓게 통해 급속히 성장하게 되며 이에 따라 기존의 대재벌인 삼성, 럭키금성, 쌍용 그룹에 더하여 60년대 이후 현대, 대우, 한진, 선경, 대농, 코오롱, 롯데, 금호, 국제상사, 대림, 한일합섬 등 새로운 재벌그룹이 부상한다.재벌의 비대화와 더불어 재벌이 전체 고용 및 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율도 크게 상승하게 되며 65년 한일회담 이후 1979년까지 15년간의 변화를 살피면 고용에서 차지하는 재벌기업의 점유율이 31.3%에서 43.6%로 증가한다. 대부분의 업종에서 그 비율이 크게 상승하였으나 특히 전자기기, 수송용기기, 섬유, 식품에서 그 집중도가 높았다. 재벌기업을 중심으로 생산의 집적과 집중은 더욱 강화되고 이는 시장에 대한 독점적 지배를 높이고, 독점적 고이윤 획득을 가져오게 된다.2. 박정희 개발독재의 문제점박정희 정권시절 한국 경제의 양적 성장은 그 자체만으로도 사회에 엄청난 힘을 발휘해왔는데, 동아시아의 가치 또는 한국적 가치에 대한 논쟁, 유교적 자본주의에 대한 논쟁, 그리고 개발독재라 말할 수 있는 박정희 군사정권에 대한 평가 논쟁 등 한국 근대화 과정에 있어 논쟁의 핵심은 경제적 성공과 관련이 있었다.이런 한국 경제의 급성장 과정에는 재벌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지난 40여 년 동안 재벌은 한국경제의 급속한 성장과 함께 했었고 이 재벌은 한국 경제 구조를 설명하는데 절대적 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 때부터 재벌은 정계와 맞물려 경제적 측면뿐 아니라 정치에 까지 확장해 정경유착을 통한 불법지배체제 형성의 문제점을 보여주었다.박정희 시대의 개발독재체제는 국가와 재벌 간의 발전지배연합을 통해서 산업화와 경제성장이라는 목표를 달성했다. 재벌의 형성은 1950년대 귀속재산 불하, 원조물자 특혜배정 등 비생산적 지대에 근거하여 시작됐지만, 본격적인 공업화와 연계된 재벌체제의 형성은 1960년대 경제개발과 함께 이루어진 것이다.이 시기 국가-기업간 관계는 권위주의적인 수직적 관계로서 ‘지도받는 자본주의’의 성격을 띠었다. 즉 정부는 은행 국유화를 것이다.
1. 여행지 선정 취지 및 동기이번 해외여행 계획으로 정한 이유는 어릴적부터 보던 일본만화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어릴적 드래곤볼,슬램덩크등 유명한 일본만화 보며 자랐는데 심지어 어린나이에 돈이 없던 시절 적은용돈을 꼬박꼬박 모아 만화책을 사보기도 할정도 였다 여하튼 나는 만화에 완전히 빠져버렸고 심지어 중학교때는 만화가가 꿈일정도로 만화를 좋아했다.이런 일본만화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일본문화에게도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일본드라마, 일본영화들도 많이 찾아보면서 막연히 일본여행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던 나로서는 이번 여행지의 선정으로자연스레 일본을 생각했다2. 여행을 통한 달성 목표우선 나는 해외여행경험이 전혀 없으며 비행기를 타고 가장멀리 나간 것 은 제주도가 전부이다 우물안 개구리 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나라를 떠나 다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눈으로 보고 경험한다는 것 자체가 내인생에서 귀중한 경험이 되고 피와살이 될거라 생각한다 짧은 기간의 여행을 할 때에는 계획을 세우는 것이 필수인데 그래야 더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우선 나는 2박 3일의 기간동안 일본의 어느 지역을 여행할지를 먼저 골라야 했다. 짧은 시간동안 일본이라는 나라를 알아야 한다면 무엇보다도 그 나라의 수도를 가보는 것이 제일 좋을 것 같았다. 일본에도 문화의 도시도 있겠고, 산업의 도시도 있겠지만 수도는 그 나라를 상징으로 나라의 힘과 모습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기때문에 나는 도쿄로 2박 3일의 일정을 꾸리게 되었다.도쿄시내만 보는 대도 여행지가 많아서 선정이 곤란할 지경이지만 우선은 가장 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는 코스로 여행계획을 세워봤다. 일본은 패션, 게임, 디지털 기기의 최신화로도 유명한데 이쪽으로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했던가. 짧은 여행 기간이지만 그 동안 책, 영화, 드라마 속 에서만 보아왔던 곳들에 가능하면 가볼 생각이다.2박 3일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일본행 비행기는 오전으로, 한국행 비행기는 오후 것으로 잡았다3. 여행 계획 전 기초상식1) 여권 만들기 - 군 제대 후 가족들과의 해외여행을 위해 미리 만들어 두었다2) 비자 발급받기 - 비자는 여행하고자 하는 나라에서 타국인에게 발급하는 자국의 입국 허가증으로 최근 우리나라는 많은 나라들과 비자 면제 협정을 맺고 있으며, 이들 국가들은 단기간의 여행 때는 비자가 필요치 않다. 일본은 2006년 3월 1일 이후 90일이내의 단기체재를 목적으로 일본에 입국하기를 희망하는 한국인 (취직 또는 취업할 의도를 갖고 입국하는 자는 제외)에 대해 사증을 취득하지 않고 입국을 인정하는 조치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단기 여행자는 따로 비자를 발급받을 필요가 없다.3) 입국심사 - 2007년 11월 20일부터 일본에서 새로운 입국심사를 실시하고 있다.일본에 입국하는 16세 이상 외국인은 지문 및 얼굴 사진 등록을 해야만 한다.일본 전국의 27개 공항과 126개 항만에서 일제히 시행되는 새 입국심사제도에 따르면외국인은 입국심사대에서 양손 둘째손가락(검지)을 지문 판독기에 올려놓고 지문 채취 절차를 밟는 동시에 지문 인식기 상단에 설치된 카메라를 통해 얼굴 사진을 촬영해야 한다.단, 재일동포 등 특별 영주자와 16세 미만, 외교 및 공용 목적 방문자, 국가 초청자 등은 지문 채취가 면제된다.4) 여행자보험 신청하기 - 여행자보험이란 해외여행을 위해 집을 출발해서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도착할 때까지 우연히 발생한 사고나 질병, 배상책임 손해, 휴대품 손해, 비행기 납치 등을 보상받을 수 있는 보험으로 해외여행의 필수품이다. 개인 해외 여행자보험의 경우, 만 1세 이상 70세 미만의 여행자들이 가입할 수 있으며, 2개월 이하 단기간 여행하는 경우에 가입할 수 있다. 보험료는 해외여행 날짜 수에 따라 달라지며 보통 5일짜리 해외여행의 경우 보험료는 약 1만 원 정도이다.5) 정보수집 및 일정세우기 - 일본 여행 관련 서적이나 인터넷을 활용하여 도쿄에 대한 여행정보를 수집한다. 그리고 여행 총 일정에 맞게 둘러볼 관광지를 선정하고, 숙소, 교통편, 예산 등에 대한 계획을 통해 여행일정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6) 여행경비 예산 짜기 - 여행경비 준비여부가 여행자체를 결정하는 주요 요인인 만큼 어느 수준으로 여행할 것인지 고려한 후, 여행경비 예산을 짜는 것이 중요하다. 출국 전에는 여권과 비자발급비와 더불어, 항공권이나 각종 준비물을 구입하는 경비가 소요된다. 현지에서의 기본경비는 숙박비와 식비, 관광입장료, 교통비, 쇼핑 등이 주요 지출항목이다.7) 여행경비 환전하기 - 여행경비를 마련했다면 현지에서 사용할 수 있는 화폐로 바꾸어야 한다. 유럽처럼 여러 도시를 여행하면 어느 나라 돈을 어느 정도 바꿀지 고민이 되겠지만 일본은 모두 엔화로 환전하면 된다.8) 배낭여행 가방 싸기가방은 우선 꼭 필요한 것 위주로 넣고, 작고 가벼운데 현지에서 구입하려면 비싼 것은 가져간다. 그리고 무겁고 부피가 큰 것은 용량을 줄이고 가격 차이가 많지 않다면 현지에서 해결하는 게 좋다.또한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이동을 하기 때문에 가방은 바퀴 달린 기내용 가방보다는 멜 수 있는 배낭이 좋을 것 같다. 모든 짐을 다 넣을 수 있는 배낭 이외에 지도나 수첩, 여권, 지갑등 귀중품을 넣어가지고 다닐 작은 가방도 하나 준비한다.4.여행일정첫째 날 일정간략하게 첫날의 이동노선을 표시해보면,인천공항에서 9시 반 비행기로 출발? 첫날 11시 반 나리타 공항 도착? 공항에서 입국수속마치고 나옴? 12시 반 정도에 전차를 타고 우에노역에 2시정도 도착, 긴자선을 타고 아사쿠사로 이동? 해떨어지기 전까지 아사쿠사를 구경(2시간 정도)? 근처에서 식사를 해결? 저녁에는 아사쿠사 ?草吾妻橋에서 수상버스를 타시고 오다이바까지 감(버스보다는 경치감상에는 수상버스가 더 좋을 듯 해서)? 오다이바 도착(어둑어둑해짐)? 레인보우 브리지 야경구경, 오다이바 해상공원구경.시간이 더 있다면, 그쪽에 있는 관람차도 한번 타고, 토요다시티(자동차전시관, 무료)도 구경하고, 쇼핑몰도 구경하고 그래도 시간이 남는다면, 후지TV 구경도 해야겠다. 단, 전차가 끊기기 전에 숙소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11시 전에 지하철을 타고 숙소가 있는 신주쿠로 가야겠다.첫날의 여행지들을 간략히 소개해보면, 아사쿠사는 아사쿠사역에서 도보로 7분 거리에 있다. 아사쿠사는 보통 ‘산자사마(三社樣)’라고 불리는 신사로, 사전(社殿)은 에도초기의 대표적인 건물로 에도막부 3대 장군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가 지은 중요문화재라고 한다. 매년 5월 행하여지는 산자마쓰리(三社祭り)는 에도 3대 축제의 하나로 꼽히며, 이 때는 아사쿠사 전체가 열기로 들끊는다. 우선 아사쿠사에 도착하기 전에 100여개의 전통상가가 밀집해 있는 나카미세도리 관광을 할 수 있다. 이 거리에 들어서기 전에 ‘가미나리몬’이라는 거대한 등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아사쿠사의 상징으로 통한다. 가미나리몬에서 도쿄에서 가장 큰 사찰이라고 하는 아사쿠사 센소지까지 다양한 일본 전통 가게들이 늘어서 있다고 하니 맘에 드는 수공예품이 있다면 하나 사도 좋을 것 같다.첫날 일정으로 사찰관광을 선택한 이유는 사찰에는 그 민족 고유의 정서가 녹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본에 갔다면 일본 정취를 마음껏 느끼고 오는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여행사에서도 신사나 사찰 등을 관광코스로 많이 넣는 것이 아닐까?또 이 사찰은 에도시대에 지어졌다고 하는데 에도시대하면 나는 사무라이가 떠오른다. 무협지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그 책들의 배경이 되었던 에도시대의 건축물을 보면 좀 더 그 느낌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다음으로 오다바이로 향했다. 오다바이는 도쿄만을 건너 위치한 아름다운 인공섬이라고 한다. 개발 중인 미래도시라고 하는데, 고전적인 것을 봤다면, 다음으로 미래적인 일본의 모습을 보는 것이 좋을 듯해서 오다바이를 골랐다. 날씨도 어둑해지는데 이곳의 야경은 특히 유명해서 일석이조인 것 같다. 전망을 보기 위해 대관람차도 타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야경은 더 멋있고, 여행의 풍미를 한껏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레인보우 브릿지와 해상공원 등 오다이바에서는 볼거리가 너무 많아서 빨리 움직여야 할 것 같다.둘째 날 일정둘째 날의 이동노선아침 일찍 지브리 미술관 구경? 2~3시에는 다시 이동, 이날은 동경시내 관광 : 지브리 미술관 갔다가, 동경타워? 그 근처 롯본기 히루즈도 구경? 시부야 ? 하라주쿠 ? 긴자 돌아다니면서 구경둘째 날 일정의 컨셉은 일본의 힘이라고나 할까?! 일본의 애니메이션이나 첨단 시설들, 패션! 모두 일본이 세계에서 파워를 보여주고 있는 것들이다.평소 미야자키 하야오의 만화를 좋아해서 둘째 날 첫 일정은 지브리 미술관으로 정했다. 일본은 애니메이션 강국이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가 보아온 만화영화의 대부분은 일본만화였던 것 같다. 특히, 미야자키 하야오는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감독으로 그의 만화영화 중 여러개가 우리나라에서도 개봉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천공의 성 라퓨타’나 ‘하울의 움직이는 성’,‘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원령공주’ 등등 많은 작품들을 좋아한다. 애니매이션이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상업적으로 큰 가치가 있음을 일본은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도 기술은 뛰어나니까, 일본의 상업적 노하우들을 보고 애니메이션 시장을 더 발전시킬 수 있었으면 좋겠다. 건물이 아기자기하고 꼭 동화 속에 놀러온 것 같은 기분이 들 건물들이다. 사진 찍기도 아주 좋을 것 같다.
대학축제문화매년 5월이 되면 각 대학교에서는 축제의 장이 열린다. 흔희 대학교의 축제를 대동제라고 부르는데 대동제는 클 대(大) 한 가지 동(同) 때 재(際)로 글자 본연의 뜻과 같이 크게 하나로 모이는 축제라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대학교는 이전 초, 중, 고등학교와는 달리 전공과 분야에 따라 여러 단대로 나눠지며 단대 별로도 수많은 과로 나눠진다. 학생 수로 따지자면 전체적으로 몇 천, 또는 만 단위로 그 수가 많기 때문에 행사나 이벤트를 한다고 해도 각 과 별로 진행하기 때문에 같은 대학교라고 하더라도 학생전체가 같이 참여 하는 매우 드물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점에서 대학교의 축제는 서로가 한 마음으로 뭉쳐 화합 할 수 있는 취지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이번 대구대학교 축제의 모습을 보면 물풍선던지기, 동전던지기등 놀이 이벤트, 솜사탕, 계란빵, 과일주스, 아이스크림 판매와 요구르트 빨리 마시기 등의 먹거리 이벤트, 단체 미팅이나 영화 상영, 댄스?가요대회 등의 여러 이벤트가 축제 프로그램으로 마련되었다.대학교 축제는 평소 학교생활을 하면서 볼 수 없었던 여러 이벤트와 함께 술이 빠질 수 없는데 축제3일 동안은 학교 안이 거의 주점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주점은 각 과의 집부들이 주축이 되어 직접 술과 안주를 팔며 운영을 하고 손님은 각각의 친구들이나 과의 선후배가 거의 대부분이며 주점에서 파는 안주는 가격이 좀 비싼 편 이고 여러 가지 서비스도 일반 주점에 비해서 떨어진다. 하지만 이러한 주점들은 술과 함께 옛 친구들이나 지인과 소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고, 여러 사람들과 만남의 장을 제공해줌으로서 대학교축제를 활기차게 만드는 긍적적인 효과도 있지만 밤새 술을 마신다던가, 과도한 술로 인하여 위험한 사고도 초래 할 수있는 부정적인 효과도 있다는 점에서 양명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다음으로 대학교축제에 참여하는 학생들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가장 큰 관심사는 축제 때 오는 연예인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학교 축제 때 찾아오는 학생들의 대다수는 축제=연예인 오는 날로 인식하고 있으며 각 학교마다 어떤 연예인이 오느냐에 따라 대학교축제의 흥행이 갈리게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번 대구대학교의 축제에는 가수 에일리, 에이핑크, 포미닛이 왔었는데 각 가수들의 인기에 비례하듯 가수들을 보기위해 모여드는 학생들의 수도 차이가 많이 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렇듯 축제에 대한 연예인의 비중은 엄청나기 때문에 학생들은 인기가수 일수록 가격이 비싸다는 것을 알면서도 인기 있는 가수가 오지 않으면 실망하거나 축제에 참여하지 않기도 하며, 축제기간 중 인기 있는 연예인이 오는 날에만 학생들이 몰리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이라고 볼 수있다.이처럼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야 할 대학교 축제에서 연예인 중심의 대학교축제가 되어버린 원인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는데 그 첫 번째로는 인기 있는 연예인의 초청이 학교 간 경쟁요소가 되었다는 것이다. 소위“영화계의 블루칩”이라는 말처럼 영화의 흥행을 위해 최근에 트랜드가 되는 톱스타를 기용한 영화 제작을 통해 흥행을 이뤄내듯이 각 대학교에서도 축제의 흥행을 다투듯 인기 있는 연예인의 초청은 대학교간 경쟁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라 할 수잇다.두 번째로는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연예인의 유무가 학생들의 축제 참여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각 학생들에 따라 다르지만 과 생활, 동아리, 봉사활동등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학생들이 있는가 하면 성격이나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학교와 관련된 행사에 소극적으로 참여하는 학생들도 많기 때문에 축제를 기획하는 총학생회 측에서는 사람들의 관심과 참여를 증가 시킬수 있는 연예인들을 초대하여 학생들로 하여금 축제에 대한 참여도를 높이기 위함이라 할 수있다.세 번째로는 연예인을 통한 대학교의 홍보효과로서 다른학교에 비해 인지도가 떨어지는 대학교에서는 축제를 통해 인기 연예인을 초대하여 학교의 인지도를 높이는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하는데 재정이 그다지 좋지 않은 학교에도 불구하고 학교 홍보를 위해 유명연예인을 섭외한다. 정작 연예인에 섭외되는 비용은 학생들의 등록금으로 이루어 지는 것인데 학생들은 연예인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그것에 들어가는 비용에 대해서는 무관심해지는 경향이 있다.언제부터 대학축제에 연예인을 초청하게 됬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대학축제에서 연예인은 빠질 수 없는 필수요소가 되었는데 대구대학교의 게시판에만 보아도 축제 때 어느 가수가 오는가를 묻는 글들이 많이 올라오는 등 많은 학생들이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