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을 통한 영원한 행복-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을 이야기하며..-1. 서 론우리는 행복하다고 혹은 행복하지 않다고 말하곤 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있을 때가 행복이라고 말할 것이며 또한 어떤 이는 자신의 꿈을 이루었을 때를 행복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행복이라는 단어는 개인에 따라(경험, 가치관을 바탕으로 하여) 다양하게 사용되어지고 또한 이해되어 집니다. 이런 상황에서 ‘행복’이라는 정의를 내리기는 참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하지만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에 사람들이 가장 흔한 답변으로 제시하는 것은 아마도 부, 권력, 건강 등을 소유하는 것일 겁니다. 이러한 답은 동양이나 서양이나 100년 전이나 200년 전이나 오늘이나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바람과 욕구의 보편성을 통해 설명 할 수 있을 겁니다. 사람들은 부, 권력, 건강과 같은 것에 대한 욕구가 충족 되었을 때는 행복을 느끼지만 이 욕구가 좌절 되었을 때는 불행함을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행복의 개념은 우리에게 의심 없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그렇다면 우리는 왜 행복에 주목해야할까요? 이는 단순히 행복이 우리의 바람직한 모습을 나타내는 상태이거나 욕구 충족의 상태의 표현)이 아닌 인간 행동의 궁극적인 동기라는 점입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선 고대 윤리학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고대윤리학은 그것의 고유한 주제가 도덕이 아니라 최고선에 대한 물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최고선은 동시에 인간의 궁극적 목적이 되었으며, 모든 인간 행동의 결정적인 동기가 되거나 또는 적어도 지혜로운 사람의 행동의 결정적인 동기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바탕으로 하여 고대의 윤리학은 두 가지 이론을 제시하는데 하나는 쾌락이 최고선이라는 주장과 다른 하나는 최고선은 인생의 행복에 있다는 입장입니다. 이 두 이론들은 시간이 지나며 부분적으로 조금은 변화했지만 현제에 이르기까지 계속하여 그 지지 자들을 확보하고 쾌락주의와 행복주의) 것이든 나쁜 것이든 또한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그 모든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일일뿐이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벗어난 곳에서 실현되는 선이나 좋은 것은 공하하고 무의미한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참으로 선한 것은 참으로 좋은 것은 바로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실현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어떤 범죄자가 자신은 내세에서는 착하게 살겠다고 말을 하지만 , 어떤 이는 착하게 살아 사후에 복을 받을 거라 생각 하지만 이들의 생각은 모두 어리석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행복하고 싶나요? 불행하고 싶나요?”를 묻는다면 누구나 행복하고 싶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런 점 에서 정말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행복은 보편적 가치입니다. 그리고 또한 행복은 수단적 가치가 아닌 목적적, 곧 자체적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운동을 합니다. 우리는 운동은 왜 하냐고 물었을 때 건강하기 위해서, 아름다운 몸매를 위해서, 즐거움을 위해서 라는 여러 답을 할 것입니다. 여기서 운동은 건강, 몸매, 즐거움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기에 그 자체적으로 추구되는 것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행복은 다릅니다. ‘왜 행복해지려하니? ’라고 물었을 때 우리는 어떠한 명확한 대답을 들을 수 없습니다. 아마 대답을 듣는다면 “행복하고 싶으니까 행복하려하지. 당연한거 아냐?” 정도일 것입니다. 당연한 것. 그 자체로 좋은 것. 그러기에 행복은 모든 사람의 궁극적 목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행복은 현실적 삶에서 실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2. 행복에 대한 견해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삶의 모습을 세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그를 통하여 행복한 삶을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그런데 인간의 생활 형태에는 대체로 세가지가 있다고 본다. 향락적인 생활과, 정치적인 생활과, 관조적(觀照的)인 생활이 그것이다.)이 세 가지 삶은 각각 동물적 존재의 삶과 사회적 존재의 삶, 인간적 존재의 삶을 나타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선 첫 번째 향락적인 삶은 짐승들에게 알니다. 행복은 그 어떤 것도 결여해서는 안 되며 그 자체만으로 좋은 것입니다.우리가 자족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만으로 바람직한 생활-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는 생활을 하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우리는 행복이야말로 이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니는 행복이 모든 것 중에서 사장 바람직한 것이요, 다른 선의 하나에 속하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만일 선이 많은 선의 하나에 불과한 것이라면, 여러 가지 선 중에서 가장 작은 것을 보테더라도 그것은 보다 더 바람직한 덧이 될 것이며, 어떤 경우에고 선들 가운데서 보다 더 큰 것이 더 바람직한 것이 될 테니까. 그러고 보니 행복이야 말로 궁극적, 자족적이며 우리가 행동하고 있는 모든 일의 목적이라고 볼 수 있다. )행복이 최고선이라는 주장은 최고선이 자족적이어야 한다는 사실로부터 도출됩니다. 자족적인 것은 앞선 인용문에도 제시되었듯이, 그것만으로 선택할 만하며 또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는 상태이므로 우리는 행복이 이런 특징에 일치한다고 생각 할 수 있습니다.)우리는 이러한 자족성을 혼자만의 생활, 유아독존의 상태, 외부와 분리된 상태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자족적’이라는 의미가 혼자만으로 충분히 고립적인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당부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성상 고립적으로 자족적일 수 없고 오직 공동체 안에서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사회적 안정과 사회구성원과의 화합은 한 개인의 발전과 행복에 있어 필연적인조건입니다. 행복에 대한 고찰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다루어질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닌 것입니다. 사회의 불행은 곧 개인의 불행으로 직결되기에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한다면 그 행복은 지속되지 못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타자를 무시하고서는 실현될 수 없는 것입니다.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행복은 공허합니다. 니체는 행복이란 타인과의 문제이며 진정한 행복은 행복을 선물하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다고 말했고, 성 토마스는 행복이란 덕을 행함으로써 주어지는 월하게 하는 상태에서 느끼는 내면의 기쁨이 행복에 수반되는 참된 쾌락입니다.그렇다면 인간이 가진 참된 기능이란 무엇일까요?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식물, 동물, 인간을 비교합니다. 삶은, 곧 살아있다는 것은 식물에게조차 공통적입니다. 그래서 영양과 생장은 삶의 고유한 기능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움직이는 동적인 삶, 아픔을 느끼고 감정을 가지는 감각적인 삶은 모든 동물에게 공통적이기에 인간만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이성의 능동적 활동. 그것만이 인간이 가진 고유한 능력입니다. 또한 이성은 광적인 집착이나 미신에서 벗어나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고 육체와 정신을 찾아주고 불행하고 극단적인 욕망을 피하게 해 주는 인생의 가이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지와 순진함에 근거한 행복은 수동적이기에 지속될 수 없으며 언제라도 파괴될 수 있는 근원적인 허약함을 가집니다. 따라서 이성적 사고를 배제한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참된 행복은 이성의 탁월함의 실현 속에서 생겨납니다. 그리고 이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에 따른 정신의 활동”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앞서 이야기했던 일과 이것을 연관 시켜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일을 통한 활동을 바탕으로 이성이 탁월성을 발휘할 때 그것이 바로 행복인 것입니다.5. 관조적인 삶이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장 행복한 삶이라고 말했던 관조적인 삶에 대해 이야기 해볼까 합니다. 1권에서 미루어졌던 관조적인 삶은 10권 7장에서 이야기 됩니다.그런데 행복이 덕에서 비롯된 활동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마땅히 최고의 덕에서 비롯된 활동이라야 할 것이다. 그리고 최고의 덕이란, 우리들 속에 내재하고 있는 최선의 부분의 덕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혹은 이성이라고 불리건, 혹은 그 밖의 어떠한 명칭으로 불리건 간에, 어쨌든 그 본성에 있어서 지배하고 지도하는 위지에 있는 고귀한 신적인 대상에 대하여 깊이 생각할 수 있다고(...), 그것이 순수한 관조적인 것임은 앞에서도 이미 말하였다.이것은 우리가 앞에서 말한 것과 일한 행복으로 제시하고 있기에 일원론적인 행복의 개념으로 여겨집니다. 과연 어떤 것이 맞는 것일까요?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묻는 것이 최고이지 않을까 싶을 만큼 아직까지도 많은 논쟁 속에 있습니다. )6. 행복과 외부적인 선우리는 지금까지 행복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해왔습니다. 이때 우리에게는 한가지 의문이 남습니다. 온몸이 마비가 와서 매일 집에만 누워 있어야 하는 사람이 정신이 바르다고 해서 우리는 그에게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며칠 굶어서 탈진 상태에 이르렀는데 그의 정신이 바르다고 해서 우리는 그에게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지극히도 현실주의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간과하지 않습니다.그러나 행복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분명히 외적인 여러 가지 선을 그 위에 더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적당한 수단이 없이는 고귀한 행위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그렇지 않더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행위는 친구나 부(富)나 정치적 능력을, 이를테면 도구를 사용하는 데서 이루어지며, 또 사람들에게 그것이 결여되면 행복을 흐리게 한다. 예컨대 좋은 집안에 태어나거나, 똑똑한 자녀를 두거나, 혹은 미모와 같이, 용모가 매우 추하거나 비천한 집안에 태어났거나, 고독하고 자식이 없는 사람은 별로 행복할 수 없으며, 또 자식이나 친구가 매우 고약하거나, 또는 설사 그들이 선량하더라도 죽여버 리거나 했을 경우에는, 사람들은 아마 행복에서 더욱 멀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런 호조건이 갖춰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어떤 사람들은 행운을 행복과 동일시하는데―다른 사람들이 덕을 행복과 동일시하는 것과는 달리 ―이것도 여기서 비롯되는 일이다. )계속 자족성, 자족성 하다가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말한 이 외부적 선은 도구적, 조건적이라는 것입니다. 결코 그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외부적 선들이 많이 필요하지는 않지만 부족하다면 완전한 .
인큐베이터는 스스로 인간으로 변신했다.나는 결혼하면 아들 셋만 낳을거야. 멋진 이름도 다 지어 놓았다니까..언제까지나 엄마 아빠랑 살수 없다는 사실과 더불어 사람은 크면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는다는 사실을 현실로 받아들일 나이가 된 이후부터 지금까지도 내가 농담 할만한 분위기에서 진심을 담아 진담으로 하는 말이다. 내가 그 말을 하면 그게 사람 마음대로 되냐? 다 하늘의 뜻이야. 처럼 운명론을 말해주는 사람, 너 닮은 딸은 시집 못 갈 것 같아서? 삼신 할머니 협박하게? 정도로 장난 섞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 등이 있지만 누구도 왜? 라는 질문을 심각하게 던지지는 않는다. 반면에 난 꼭 딸 둘 만 낳을거야. 를 입버릇처럼 말하는 친구에게 사람들은 심각한 얼굴로 왜? 라는 질문을 던지지 나에게처럼 장난 섞인 말을 건네지는 않는다. 딸은 자랄수록 친구 같자나. 엄마도 많이 이해해주고, 이쁜 짓은 얼마나 많이 하는데.. 친구는 열심히 피력하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시큰둥한 것이 사실이다. 오히려 세상 물정 모른다며 안타까워 할 뿐이다.내 친구의 생각을 도저히 이해하고 받아들 일 수 없다는 표정. 그 표정은 아주 예전부터 많이 보아왔다. 애가 어떻게 되우? 사람들의 질문에 이은 딸 둘인데요. 라는 엄마의 대답에 반사적으로 이어지는 대답은 하나 더 낳아야겠네. 였다. 정말 한치도 틀리지 않았다. 그때마다 엄마는 또다시 둘이면 충분하죠. 대답했고 이 대답에 할머니들은 혀를 차며 안타까워하며 어쩌면 그런 생각을 할까 하는 생각이 표정에 여지없이 드러났다. 그런 표정은 보는 나로써도 큰 상처였다. 그놈의 아들이 뭐길래. 우리 엄마가 그들에게 불쌍한 이로 취급되어야하는가. 정말 나름대로 심각했다. 무조건 아들 셋이라는 나의 굳은 의지는 그런 과거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가끔 든다.꿈꾸는 인큐베이터 라는 처음 제목을 들었을 때 난 왠지 희망적인 이미지를 그릴 수 있었다. 내가 텔레비전에서 본 인큐베이터는 세상에 조금 일찍 나온 아이들의 소중한 생명줄이자 삶의 공간이였기에 그 초반 내가 본 그녀는 뭐하나 부족할거 없는 중산층 전업주부였다. 넉넉한 경제 사정에 아이들 말썽 없이 잘 자라주고 가족들 중 아픈 사람 없고 남편의 외도도 없고 내가보기에 그녀는 요즘 드라마에 나오는 그런 온갖 불행한 요소 중 어느 것 하나 가지고 있지 않은 행복한 여자였다. 자신이 여유가 있기에 동생도 신경 써 줄 수 있는 것이지 자신이 여유가 없고 힘든데 그것이 가능할 일은 없다. 하지만 소설이 전개 될 수록 그녀에게 무엇인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처음 그녀에게 무엇인가 있다고 느낀 부분은 투명한 유리창을 가린 커튼의 동화적인 무늬가 문득 병원 신생아 실을 연상시켜 나는 문득 가슴이 울렁거렸다 이었다. 한번도 실제로 본적은 없지만 텔레비전에서 내가 보아온 신생아실은 평온과 순수가 가득한 천사의 나라였으며 아이들을 보는 사람들의 행복한 표정은 그 곳이 얼마나 좋은 곳인지를 말해주는 것이었다. 그런 신생아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울렁거린다는 그녀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녀에게 낯선 그녀의 향기가 느껴졌다고나 할까?소위 말하는 딸딸이 아빠인 그와의 두 번의 대화. 그 대화는 소설 전개의 중심의 축이면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남자의 입을 통해 말하고 있다. 그녀를 다시 말해 그녀는 이 사회의 가치관을 대변하고 있고 남자는 잘못된 사회 가치관을 비난하는 입장이라고나 할까? 첫 번째 대화에서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난 그녀의 불안정과 어둠을 막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수다가 걷잡을 수 없었던 것 보다 더 지독하게 수치심을 걷잡을 수 없었다. 마치 실수로중한 자리에서 속바지를 까내였다가 치켜올린 것처럼 황당하고 망신스러웠다. 다행히 그가내 치부를 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나는 속으로 그럴 리가 없어, 저 자식은 시방 능청을 떨고 있는 거야 라고 은근히 겁을 먹고 있었다.그녀의 치부는 무엇이며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만드는지 난 그때까지도 알지 못했다.그녀에게 무엇인가 있을거라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때까지도 그녀는 내게 뭐 부족할거 딸을 죽여야 했던 것이다. 진실을 알고도 솔직히 난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수많은 여인들이 자행하고 있는 일이 아니던가. 물론 그럴 수도 있다고 그 행동이 잘 한 것이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냥 많이 벌어지고 있는 일이기에 익숙하다는 정도이다. 그녀의 과거를 알고 나니 그녀가 남자에게 했던 이야기 한마디 한마디가 쉽게 아들이 있는 사람의 여유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수단 방법 안 가리게 되는거죠, 그까짓 것.상처 뿐이겠어요. 모욕이고 모독이죠. 그래야 부인도 별수 없이 아들 낳을 방도를 강구하게 이거죠.음양의 조화인지가 신의 영역을 벗어난지 오래라는 것도 모르는 주제에 잘난 척하긴,순진한 탓일거야.수단방법은 여아 낙태였으며 그까짓 것이라는 것은 그녀 스스로를 위로하는 말이었으며 남편의 말에 상처가 아닌 모욕과 모독을 느끼고 방도를 강구했던 것은 그녀 자신이었던 것이다. 남자와의 대화는 그를 약올리거나 바보스럽다고 말하는 것보다 어쩌면 자기 고백에 가까웠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말을 들으며 그녀는 시어머니가 아들 손자 타령을 하게 된 것이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갑자기 재산가가 되고 나서부터였다는 점, 여아살해에 남편이 암묵적 공범자가 된 것이 그의 '물욕'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깨닫는다. 이로써 그녀는 "대를 잇는다는 건 핏줄도 성도 아니고 결국은 상속권"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남아선호사상이라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가 사실은 끊임없이 물질적 욕망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의 이해와 맞물려 있음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아들이 없다는 것은 결혼 생활의 중대한 결석 사유라는 것이라고 당당히 말하며 아들이 그냥 집안의 왔다 갔다 하는 것만 봐도 좋고 그 애가 눈에 안보일 때도 그 애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떳떳하고 자랑스러울 수 있었던 그녀에게 그러한 인식의 변화가 얼마나 큰 충격과 혼란 허탈함을 가져다주었을지 우리는 조금이나마 상상할 수 있다.그녀의 이야기를 다 알고 내게 있어작품 속에 있는 것 중에 가장 큰 의미 변화를 가져온 것은 일탈 정도로 여겨졌다. 그녀에게 있어 영화 속 주인공은 먼 나라 이야기 그녀가 결코 경험 할 수 없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 작품을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사람이 사람을 저 정도로 미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영화이다. 그녀는 무슨 이유로 그런 영화를 한번도 아닌 여러번 보고 있을까? 그녀가 정신 차리고 보지 않으면 스토리를 제대로 못 따라가는 영화치여서라고 보기엔 그 영화는 너무 강렬하다. 나치 유태인의 전쟁보다 국군과 인민군의 전쟁보다 더한 영화인데 어련하겠는가. 그녀는 인식하고 있지는 못했지만 그녀는 중절 수술의 암묵적인 동조자인 남편을 미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동조자인 시어머니와 시누이에게는 자신도 그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표출하고 있었지만 남편에 대한 미움은 그녀의 무의식 깊게 자리잡고 있었다고나 할까? 영화 속에서 남자가 아내의 구두 나부랭이를 톱으로 자르는 장면에서 그녀는 그 구두가 아들의 몸뚱이가 되는 끔찍한 상상을 하는데 이는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이는 그녀가 아들에 가진 애뜻함과 애정의 관점에서 이해하기 힘든 점이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 애정과 애뜻함에서 이해를 하고 싶다. 그녀에게 있어 아들은 바로 그녀 자신이라 할 수 있다. 아들이 잘리어지는 상상은 바로 자신이 잘리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또 그렇게 함으로써 무의식적으로 중절 수술에 대한 죄의식에 대한 자기 형벌을 주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난 또 그녀와 이야기 나눈 남자에 대해 말하고 싶다. 의식이 깨어 있는 참 멋진 남자라고 사람들은 말 할 것이다. 성비 불균형의 결과로 손해나던 장사가 수지 많은 장사로 변했을 뿐 여성을 상품화 취급하긴 마찬가지며 수지가 맞을수록 상품화는 더 심화 될 거라는 날카로운 미래 비판, 아비의 의식의 저 밑바닥엔 과연 내 자식일까 하는 의구심이 도사리고 있어 그것을 위해 여자는 아이가 아빠 닮은 것을 강조하고 부계의 성으로 부양의 의무를 씌운 거라는 고개가 끄덕여지는 성씨론 까지 그의 발언은 소설을 읽으면서 몇 번이나만들었겠냐는 그녀의 말에 그도 어느 정도 인정을 하지 않았던가. 만약 그에게 아들이 하나 있다면 그의 지금과 똑같이 말을 할 것인가? 아니 처음부터 그녀와 그의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대화가 이루어졌다 한들 슬픈 이 현실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 졌겠는가. 어쩌면 그냥 그런 생활에 지루함을 느낌 유부녀의 가벼울 일탈을 그린 그냥 그런 불륜 소설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또 만약 남자가 아닌 다른 여성이 남자의 역을 한다면 극이 전개 될 수 있었을지 조차 확신이 서지 않는다. 모든 여자가 그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우선 그녀는 어쩔 수 없었던 여성의 삶을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있기에 여자가 남자의 역을 맡는다면 설득력이 조금은 떨어지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작품 속에 빼놓을 수 없는 또 다른 인물은 그녀의 동생이다. 어떤 이들은 동생을 남자를 만나게 되는 빌미를 제공하는 이 정도로 생각하지만 내 생각에 그런 빌미는 다르게도(가벼운 접촉 사고, 분실물 습득 등) 얼마든지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그녀는 그녀가 그리는 이상적인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자기 실속만 챙기고 언니에게 받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얌체 같은 모습이 보이지만 그녀는 당당하게 자기 일을 하며 사회 속에서 자리하고 있는 여성인 것이다. 그 모습은 운전이 단지 집사람의 딸 효도 수단으로 소개되는 연애를 못하는 이유로 배우자에 대한 죄책감 사회적 편견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집에만 있어서 누군가와 만날 기회가 없다는 것이 꼽히는 언니와는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물론 전업주부에 대해서 비하 할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다. 동생이 가지고 있는 주체적 모습을 말하고 싶은 것뿐이다. 난 또 동생이 만약 첫아이를 아들이 아닌 딸을 낳았다면 이라는 가정을 한번 해 보고 싶다. 그래도 하나만 낳아서 잘 기르겠다고 공언 한 것처럼 더 이상의 아이를 낳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녀가 그렇게 하도록 주위 사람들은 그녀를 가만히 두었을까? 그녀에게도 아들 낳고 먹는 미역국과 딸 낳고 먹는 미역국다.
같은 하늘 아래의 과거, 현제,미래...전주에 살았을 때는 일년에 한 두 번 박물관을 가서 혼자 놀고 오곤 했었다. 사람들은 왜 하필 재미없는 박물관에 가서 그것도 혼자 놀고 오는 것이냐며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나에게는 소중한 취미 생활과 내가 참 좋아하는 일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광주에 온지 일년 반이 지나도록 광주 박물관을 한 번도 가보지 못했었다. 아직도 낮설은 곳이 많고 길도 잘 몰라 쉬이 어디를 움직이지 않은 이유도 있지만 박물관을 생각할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그런 것이지 않나 싶다. 그리고 하나 더 하자면 게을러진 이유도 있겠지...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날씨. 남들은 박물관 가는 게 뭐 그리 좋냐고 물을지 모르겠지만 박물관을 향하며 난 꼭 소풍 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날씨가 발걸음도 더 가볍게 했다. 파란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서있는 참 단정하고 깔끔한 박물관 건물, 건물부터 우리 한국적 향기가 물씬 느껴졌다. 어느 지역을 가나 국립 박물관 건물은 거의 비슷비슷하게 생긴 것 같다. 한국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좋은데 꼭 그리 판에 박은 듯 지어야 하는지 약간 아쉬움이 느껴졌다.가장 먼저 간 곳은 불교 미술실 이었다. 호남의 역사와 문화 시간에 전남지역의 불교 발달이 상당했다는 것을 배웠던 후에 난 호남의 불교 문화에 적지 않은 관심이 생겼기 때문에 주의 깊게 둘러보게 되었다. 많은 불상, 탱화, 사리구들 중 가장 내 눈길을 끌었던 것은 고려시기의 폐사지 서오층 석탑사리기 이었다. 어떻게 그 작은 사리함에 4명의 보살과 여러 개의 작은 종들이 달려 있을 수 있는 것인지.. 보살들의 생생한 표정과 섬세한 옷 주름의 표현, 지붕의 꽃잎 하나 하나가 너무나도 또렷했다. 언젠가 본 역사스페셜에서도 이런 사리함의 섬세함에 놀란 적이 있는데 이 사리함 역시 그에 맞먹을 정도로 섬세하여 정교했다. 청동 소탑(고려시기)역시 섬세하게 지붕의 주름까지 잘 표현되어 있었다. 2층이 없이 플라스틱 모형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아쉬웠다. 그 옆의 작은 단.정말 알 수 없는 일이긴 하다. 전시실에 가장 많은 수를 차지했던 것은 바로 불상들이었다. 불상들은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지난 학기 수업시간에 들었던 다양한 보살들의 설명을 떠올리게 해주었다. 그중 유독 눈에 띄는 보살은 잘록한 허리에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옷자락을 가지고 있는 불상이었다. 그들은 유연함과 따뜻함이 느껴졌다.죽 불상들이 전시되어 있던 것을 보다 갑자기 나타난 갑옷 입상에 깜짝 놀랐다. 이것도 보살의 한 사람인가 하며 안내를 보니 근동사천왕상의 하나임을 알게 되었다. 이미지가 뭐라고 할까. 이렇게 말하면 안될지 모르겠지만 보고 있자니 서유기의 저팔계가 생각이 났다. 약간 심술궂은 표정과 토실토실한 얼굴 거기에 뚱~ 내민 배 때문이었다. 그렇게 따지면 옆의 보살상은 삼장법사라는 것일까? 우리가 절 입구에서 자주 보았던 게 사천왕이라는 게 안내의 설명이었다. 법이나 중생을 지켜주고 중생에게 이익이 되는 좋은 일을 한다나.. 생긴 것보고 무엇을 평가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다시 한번 되새기는 순간이었다.개인적으로 불 상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금동 보살 좌상이었다. 지긋이 감은 눈과 곱게 다문 입술..다른 불상들과 비슷한 표정인데도 불구하고 왠지 특별하게 느껴졌다. 아무리 옆에서 시끄럽게 하여도 미물이 유혹해도 전혀 미동도 안 할 느낌이라고 할까? 그래서 그런지 불상의 옷 선도 무겁게 떨어지고 있었다.작은 불상들 보다 돌로 된 큰 불상을 보니 눈이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형태도 형태이지만 크기가 주는 느낌도 무시 못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큰 불상을 보고 좋아하다 내 눈에 들어 불상이 있었으니 바로 몸에 지니는 불상이었다. 그래도 앞전에 보았던 작은 불상들은 작아도 손가락 하나 크기 이상이었는데 그 불상은 새끼손가락 한마디 정도의 크기였다. 솔직히 이름이 불상인 것을 알고 보았으니 불상으로 보이는 것이지 그냥 모르고 보면 작은 동조각 정도로 보일 것이었다. 정말 그 불상은 돋보기가 필요했다. 불상을 몸에 지닐 정도로 불심이 깊었던 옛 사람들에 한 개성적인 작품도 많았다. 두꺼비와 놀고 있는 하마 선인 같은 경우 자유분방함과 호탕함이 느껴졌다. 하마선인은 선인이라고는 하지만 선인적인 위엄 있는 모습보다는 옆집 아저씨와 같은 느낌이었고 개구장이 같은 느낌도 들었다.(배나오고 머리 벗겨진 개구장이. 정말 특이하다.) 특히 하마 선인의 어깨에 있는 두꺼비는 제목을 보고 두꺼비인지 알았지 그전에는 이게 무슨 생물일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했다. 머리 생긴 것이나 이빨을 보면 이구아나 같았지만 그 지역이 이구아나가 사는 곳인지 확실하지 않았기에 그리고 이구아나는 왠지 동양적인 정서에는 부합하는 듯 하다. 이구아나 친척인 도마뱀 정도로 생각했는데 두꺼비라니 그렇게 길쭉한 두꺼비로 있단 말인가. 자꾸 웃으면 보다보니 귀엽기도 했다. 동물들의 불분명한 정체성의 말이 나와서 말인데 전시회를 보는 도중 이게 뭘까 하는 고민에 빠지게 하는 동물들이 마니 나왔다. 꽤나 한다는 분들의 그림이기에 전시되었을 것인데 그렇게 현실감이 없는지.. 아니면 그 생물들이 진화한 것일까.. 생물들의 정체성 추론이 회화 감상에 재미를 더해주었다.영화로 널리 알려진 장승업의 화로 영모 병풍 은 평면의 그림이지만 새들의 경우 계속 날개짓을 하고 있는 것과 같은 생동감이 느껴졌다. 참새를 노려보는 독수리의 눈빛은 내가 봐도 서늘하기만 했다. 전체적으로 생물들이 눈빛이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생기를 표현하기 가장 좋은 수단이 눈이라는데 장승업은 그것을 잘 살리고 있는 듯 했다. 정선의 한호제경은 섬세하고 고즈넉한 한가로움이 느껴졌는데 보고 있자면 강촌마을에 부는 시원한 바람이 보이는 듯 했다. 수묵화들을 보며 어떻게 먹물의 농담만으로 저렇게 다양한 색감과 명암을 표현할 수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내게 그리라면 하얀 것은 종이요 점은 것은 먹이네 딱 이말 전도 밖에 안 나올 것이다.세 번째로 찾아간 전시실은 선사실 이었다. 박물관에 가면 가장 대충 보는 전시실이었으나 이번에는 천천히 열심히 보았다. 주변지역과 문화교류의 증거라고 하는데 이 지 정도였으니 말이다. 광택이 있는 까만 돌도 전시되어 있었는데 흑요석제라고 했다. 토기는 빗살무늬토기로 단순했다.구석기에서 신석기의 변화도 놀라웠지만 신석기에서 청동기 시대의 변화는 더 놀라웠다. 청동칼들은 돌칼과 비교 할 수 없을 만큼 예리하고 날렵했다. 토기의 모양도 다양해져 있었다. 청동기 시대 유물들은 고등학교 때 책에서 본 것들이 많았다. 반달돌칼과 가락바퀴도 그러한 것 중의 하나였다. 예전에 반달돌칼을 보면 위쪽의 두 개의 구멍의 용도가 궁금했었는데 이번에 보니 거기에 끈을 매어 잡기 편하게 한 것 같았다. 가락바퀴는 클 줄 알았는데 실제로 보니 작았다. 신석기 때의 장신구는 조개껍데기나 돌을 갈아만든 정도에 불과 했으나 청동기 시대는 옥같은 것일 이용해 만들어 훨씬 예뻤다. 청동기 유물 중에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가지 방울이었다. 모양도 귀여웠고 검은 바탕이 하얀 선으로 섬세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방울보다 장식품이 아닐까 깊었는데 아래쪽에 소리 구멍이 있는 것으로 봐서 방울이 맞기는 맞는거 같았다. 사람이 달고 다니기엔 좀 크다 싶었다. 할 수 있다면 꺼내어 한번 흔들어 보고 싶었다. 어떤 소리가 날지 무척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맑은 예쁜 소리가 날거 같았다.철기시대의 철기 물건들은 녹이 슬어 언뜻 보면 청동기 시대의 이전 물건 같았다. 금동관이 전시되어 있었지만 금칠이 벗겨져 금동관보다는 청동관에 더 가까운 색을 띄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왕관들을 보면 서양보다 길고 나무의 가지 모양을 띠고 있는 것이 많은 것 같다. (서양은 성의 모습을 따라 한 것 같다.) 그게 나무처럼 자라 가지를 뻗는 것처럼 나라가 발전해 많은 문화를 전하고 나라의 번성을 기원하는 마음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옹관묘 역시 호남의 역사와 문화의 시간에 공부한 적이 있었다. 수업시간에는 그냥 우리가 흔히 볼 수 잇는 장독대의 크기이려나 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컸다. 그렇게 만들다보면 항아리 스스로 무게를 견디지 못해 쓰러질 듯 싶었다. 옛 기술로 그렇게 큰 해 바다에서 묻혀 있었을 바다유물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보존 상태가 좋았다. 특히 목제품도 남아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나무가 물 속에서도 썩지 않고 어떻게 그렇게 좋은 상태를 유지했는지 궁금했다. 전시실에는 다양한 중국의 도자기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도자기의 색도 참 다양했다. 난 청자 백자 이 두 가지의 정도만 떠올렸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백자도 아이보리색, 아주 하얀 백자, 상아색 등 아주 다양했으며 독특한 색을 지니는 도자기도 많았다. 군호 지방의 청색도자기는 정말 맑고 산뜻한 색감을 가지고 있었다. 바다를 떠올리게 하는 색이었다. 정말 예뻤다. 건요 지방의 흑유 자기는 모던하고 단정하게 느껴지는 느낌이 참 좋았다. 색만큼 모양도 다양했다.다음으로 고려자기, 조선백자 전시실이었다. 우리의 도자기 기술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고려청자의 맑고 깨끗한 옥색은 너무나도 예뻤다. 앞 전시실에서 본 중국의 청자에 비해 단연 돋보이는 색을 지니고 있었다. 고려청자가 귀족적이며 우아하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청자 탁잔과 전시의 자잘한 꽃무늬는 아름다우며 소박하게도 느껴졌다. 할 수만 있다면 정말 훔쳐다 집에 가져가고 싶었다. 그 예쁜 잔에 녹차를 마시면 10배는 맛있을 같았다. 청자 장고라는 이름이 붙은 전시물에서 난 멈칫했다. 도자기의 색깔이 청자보다는 백자에 색을 입혀 장식한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청자와 백자의 기준에 대한 혼란으로 내 머릿속은 어지러웠다. 청색을 띄고 있기에 청자라 부른다 이런 나의 생각은 잘못된 것일까? 장고라는 이름도 날 의아하게 만드는 것 중 하나였다. 채편으로 두드리는 악기 장구를 장고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사실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아니 모양 역시 장구와 비슷했지만 깨지기 쉬운 도기에 어떻게 가죽을 씌우고 끈으로 묶어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완벽한 장구의 형태로 만든다는 것인지 난 이해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소리는 일반 나무로 만든 장구 보다 좋을 것 같기는 했다.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는 가정 하에 말이다. 청자매병 은 버드나무 하다.
그녀의 그림자는 웃었다.허생전을 처음 읽었던 것이 중학교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내게 허생의 처는 자신의 학문을 위해 정진하는 남편을 돈벌어 오라고 쫓아낸 나쁜 아내일 뿐이었다. 좀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돈만 밝히는 돈벌레, 소크라테스의 악처라고나 표현할까? 그건 비단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허생전에서 허생의 아내는 이름도 기록되지 않은 채 단지 누구의 아내라는 존재로서만 한자리를 허락 받고 십년을 기약하고 독서에 전념하는 남편의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귀찮은 불평을 늘어놓는 존재로밖에 취급되고 있지 않다. 그리고 왜 그녀가 그래야 했는지, 그녀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허생이 한번 집을 나와 그의 대사업을 시작하자마 그 아내라는 존재는 아예 서술자의 시야 밖으로 밀려나 버리고, 기껏해야 남편이 죽은지 알고 그가 떠나던 날을 제삿날로 제사를 치룬다는 이야기가 동네 여인의 입을 통해 잠깐 비추어질 뿐이다. 그런 작품 현실이 그녀를 한국의 대표적 악처로 만들었다. 그리고 나 역시 그녀에게 악처라는 이름으로 돌을 던졌었다. 하지만 난 오늘 그녀를 안아 줄 수 있다. 그리고 그녀에게 돌을 던지는 다른 이들에게 이 여자가 돌을 맞아야 하는 이유는 결코 없다 라고 큰 소리로 말할 수 있다. 오늘의 이런 날 만든 작품이 바로 이남희의 허생의 처 이다.허생의 처 는 허생이 집을 떠나고 그녀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여준다. 그녀는 기다렸다. 굶기를 밥 먹듯 하며 무작정 기다렸다. 들어오면 밥이라도 한술 해주려고 입쌀을 구해 두기도 했고 매일 사랑방을 청소하고 간간히 불도 때고, 장마철 전후로 서책을 바람쐬어 말려 두고, 의복은 금방이라도 입을 수 있게 매만져 두며 기다렸다. 내겐 이해 할 수 없는 행동이기만 했다. 둘 사이 어떠한 신뢰도, 애정도 없었던 상태에서 일언반구 없이 집 나가 소식도 없는 남편을 왜 기다린단 말인가. 만약 나였다면 그 입쌀로 내 배를 체우고 사랑방은 남에게 세주고 서책과 의복은 팔아버리지 않았을까 싶다. 나에게 너무 한다는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허생의 처는 나와 달랐다. 그리고 그녀는 아직 그녀 어머니 그림자 속에 있었다.그녀의 어머니는 (어머니이라 칭하겠음) 그 시대가 원했던 여인이라 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자결하라는 끔찍한 남편의 말에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안위보다 집안의 대를 생각하는 아내. 자신도 모자라 자기 배로 낳은 딸에게까지 그 도리를 가르치는 어머니. 그리고 수모를 당하자 자결하는 여인. 실로 완벽한 여성이 아닌가? 이런 어머니와 비교할 수 있는 또 다른 여인이 바로 서모이다. 수모를 당하고도 살아 남은 서모는 그 시대가 손가락질하는 여성이었을 것이다. 우리나라가 예의지국이란 칭송을 얻은 이유를 전란 속에서 여자들이 정조를 지켜서라 말하는 어머니 기준에 서모는 그 이름을 부끄럽게 하는 여자였음에 분명하다. 우리나라가 예의지국이라 불린 이유가 그 때문인지는 이번에 처음 알았다. 하지만 어쨌든 난 서모에게 손을 들어주고 싶다. 그녀는 살아 남아서 자식들을 돌보고 집안을 이끌었다. 난 어머니가 오히려 무책임하게 느껴질 뿐이다. 남은 자식들을 조금이나마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절대 죽음을 택하지 못했을 것이다.그녀는 백중절에 절에 불공를 드리러 갔다가 변을 당한다. 쉽게 말해 그녀 어머니가 죽음을 택하기 직전의 상태에 놓인 것이다. 앞서 말한 허생을 기다리는 행동도 어머니의 그림자 속에 있다고 설명이 되지만 그것을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은 그녀의 꿈과 끈이라는 소재이다. 이 둘은 그녀가 어머니처럼 죽음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끈은 지금 복잡한 그녀의 심리 상태를 시각화시킬 수 있는 대상이자 그녀의 죽음의 수단이기도 하다. 이런 마음은 끈은 어느 구석인가 숨어 독사처럼 달려들어 무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와 같은 그녀의 말에서도 잘 드러난다.그녀의 주위사람들을 살펴보자. 죽음까지 생각하고 있는 그녀에게 그녀를 위로해주거나 이해해줄 사람은 누구도 없었다. 시할머니는 허생이 집 나간 이유를 다 그녀 탓으로 돌리고 있으며 그나마 허생의 처를 가장 잘 이해 할 수 있는 입장일 것 같은 시댁 형님은 강태공 아내의 이야기를 하며 시집간다고 팔자를 고치는 것은 아니라며 참고 살라고 또 다시 기다리라고 말 할 뿐이다. 같은 여자의 입장에서 그녀들은 허생의 처를 이해 할 수 없는 것일까? 허생의 처에게는 차라리 그녀들 보다 길에서 등을 두드려주던 낯선 농부 여인이 더 고맙고 가깝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싶다.그녀는 아이를 가지게 된다. 집접적으로 아이를 가졌다고 서술되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길에서 토하는 행동과 동생의 말에 놀라는 모습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일이다. 원치 않은 관계에 이은 임신. 그건 끔찍한 일임에 틀림없으나 그녀에게 있어 난 오히려 잘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스스로 어머니라는 이름을 가짐으로서 그녀는 어머니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이를 가짐으로써 그녀는 삶의 이유를 찾고 허생의 그늘에서 벗어나 아이를 위해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을 위해 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나는 단 한가지를 알고 있는데 난 앞으로는 그걸 따라 살 것이에요. 나는 열살때 전란을 겪었고 그 와중에서 뼈저리게 느꼈어요. 당신은 무엇 때문에 십 년이나 기약하고 독서했지요? 당신은 대답할 수 없으시지요! 난 말할 수 있어요. 그건 사람이 살고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을 보다 좋은 세상에서 살게 하려는 때문이라고요. 난 그렇게 하고 싶고, 꼭 할 거예요이런 그녀의 마지막 말은 그녀의 의지를 잘 보여준다.허생의 처를 읽으며 가장 우선 되었던 감정은 안타까움이었다. 그 안타까움은 한번 읽고 두 번 읽고 작품을 여러 번 읽을수록 커져갔다. 10번을 읽었을 때는 답답하고 힘들어하는 허생의 부인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오는 것 같았다. 정말 남일 같지 않았다. 나중에 허생의 부인이 허생에게 절연하자고 말할 떠는 나까지 주먹이 불끈 쥐어 졌으니 말이다. 그리고 바로 그거야. 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튀어 나왔다.기다리고 참고 인내하고 희생하며 살아야 하는 삶. 한 여자로서가 아닌 어느 집 며느리, 어떤 이의 아내, 누구의 어머니의 삶만을 살아야 했던 삶. 그 시대 그건 허생의 처만이 겪었던 일은 아니었다. 그런 여인들의 모습은 여러 문학 작품에서 나타난다.우선 내가 가장 말하고 싶은 작품은 한무숙의 이사종의 아내 이다. 이사종은 황진이의 많은 남성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정분을 나눈 남자였다. 황진이가 여자로서 찬연한 매력을 발하고 이사종 같은 사람이 그 매력의 여택을 나누는 동안 이사종의 아내는 어떤 삶을 살았겠는가. 요즘 나오는 티비 드라마에서처럼 쫑아 가서 머리채를 잡아 흔들었을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허생의 처와 마찮가지로 기다릴 것 뿐 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그녀는 정도의 기대하는 수준으로 퇴각하게 된다. 어떻게 보면 자복이라도 바라는 면에서는 허생의 처보다는 처지가 낫다고 할 수 있을까?
1.들어가며..지혜를 사랑함 ( Philo-sophia)이라는 본뜻을 지닌 철학을 인생의 의의, 세계의 본체 등 궁극의 근본 원리를 연구하는 학문 이라고 한다. 여기서 나는 질문을 던져 본다. 인생이라는 단어를 말할 수 있는 주체는 무엇이며 세계를 이루고 있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바로 인간이다. 인간 이외의 다른 것에 대한 연구, 예컨데 신 혹은 물질 등등의 문제가 철학에서는 더 중요하며 더 우선시켜야한다고 주장도 있다. 철학에서 다루어지는 모든 문제는 상호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철학의 무엇을 주 로하여 어떤 것을 먼저 다룰 것인가를 일도양단(一刀兩斷)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어떤 문제를 통해서도 우리는 철학적 탐구를 출발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문제가 철학의 다른 문제들에 비해 더 긴급하게 해명되어야할 문제라구 말할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자신에게 있어서 인간 이외의 것을 바라보는 전망대이기 때문이다. 칸트는 자신의 『논리학 강의 편람』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의 의의와 중요성을 다음처럼 강조하고 있다. 즉 그에 의하면 철학의 모든 분야는 다음의 네 가지 물음을 축으로 하여 돌고 있다.1.나는 무엇을 알수 있는가?2.나는 무엇을 행할 수 있는가?3. 나는 무엇을 바랄수 있는가?4. 인간이란 무엇인가?첫 번째 물음에 대해서는 형이상학(形而上學)이, 둘째 물음에 대해서는 윤리학이, 셋째 물음에 대해서는 종교가 그리고 마지막 물음에 대해서는 인간학이 해답을 준다. 그런데 칸트에 주장에 의하면 앞의 세가지 물음은 마지막 물음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이 세 가지 물음의 답은 마지막 물음의 답에서 나올 것이라는 것이다.몽테뉴(Michael de Montaigne,1533~1592)는 자신의 저서 『수상록』에서 인간은 세상의 모든 것을 연구하면서도 인간 자신에 대해서는 연구하지 않는다고 불평하였다. 하지만 많은 철학자들은 인간에 대해 수많은 글과 책 주장을 남겼으며 일반 사람들도 살아가며 인간이란 무엇인지 한번쯤은 질문을 던은 모든 사물이 공통으로 갖는 그 무엇으로 사물이 공통으로 갖는 그 무엇으로 사물들은 모두 그 공통의 성질을 나누어 갖고 분유하고 있으며, 어떤 방식으로든 그것을 반영하고 있다. 선 자체 란 우리의 일상 세계의 특징과는 구별되며, 분명한 것은 그것의 타당성이 인간의 판단에 좌우되지 않는 다는 것이다. 다른 형상들처럼 그것은 객관적으로 실재하며, 그에 대한 인간의 믿음에 영향받지 않는다.절대 기준인 형상이 세계를 요청함으로써, 플라톤은 지식과 믿음을 나누는 중요한 구별을 할 수 있었다. 형상은 지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성상 불완전한 믿음을 갖는다. 우리는 수시로 마음을 바꾸며 잘못을 범한다. 그렇지만 플라톤은 참된 지식은 사물의 본성에 의거해야 하며 어떤 방식으로든 그것과 연계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식을 소유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정의상 언제나 올바르게 행위하려고 하며, 따라서 플라톤은 자신의 도덕철학과 정치 철학을 자신의 형이상학 위에 세우려고 하였다.민주 정치가 최선의 정치 형태가 아니었던 까닭은 그것이 대중의 변덕스러운 믿음에 좌우되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플라톤은 통치자라면 실재(본질)에 대한 지식을 소유해야 한다고 믿었으며 『국가』에서는 그는 철학자 왕 이라는 엘리트를 만드는 교육 프로그램을 제시했다. 철학자 왕만이 정의의 본질을 알고 올바른 기준에 의해 모든 일을 판단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은 보편적 관심을 갖고 통치하게 된다.플라톤의 체계는 이원론적이다. 그는 두 개의 세계, 즉 감각의 세계와 불변의 객관적 진리를 보증하는 참된 형상의 세계가 있다고 믿었다. 이렇듯 현실을 초월하는 비물질적인 형상의 셰계가 있다고 믿었다. 이렇듯 현실을 초월하는 비물질적인 형상의 세계를 강조하는 것은 신비롭기까지 하지만 우리의 일상세계를 초라하게 만든다. 플라톤은 영혼을 눈에 비유하고 진리를 빛에 비유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진리와 존재가 비추는 곳, 이곳이 머물러 있을 때 영혼은 이해를 하고 자각을 하게 되어, 지성을 지닌 것처럼 보이보이며, 그것은 그가 지금 갖고 있는 믿음의 근거가 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소유하고 있지만 아직 깨닫지 못한 잠재적 지식을 우리의 마음 전면에 나타난 지식과 구별함으로써 인간의 무의식적인 측면의 중요성을 일깨울 수 있다.플라톤은 물질 세계의 비영속성에 대해 신랄히 비판하였고, 자신의 『국가』에서 물질세계에 참된 존재가 있다고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오로지 형상만이 정말로 참되며 타당한 지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믿음은 쉽게 변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존재와 비 본재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불안정한 것이다. 플라톤은 일상세계의 실재성에 대한 전면 부정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기는 했지만, 일상 세계가 영원불변하는 형상의 세계에 비하여 거의 무가치하다고 주장한 것만은 분명하다. 여기서부터 인간의 영혼이 그것을 구속하는 육체에 비해 훨씬 더 가치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파이돈』에서 플라톤은 육체가 영혼의 진리 추구를 방해한다고 주장한다. 육체적 감각과 욕구로부터 자유로운 영혼이야말로 진지(眞知)를 염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2) 인간의 본성-고귀한 영혼과 천박한 영혼의 싸움-플라톤이 이론적 지식만을 강조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소크라테스를 비롯하여 플라톤에게 지식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이었다. 소크라테스가 지식과 덕을 동일시했던 것은 우리가 옳다고 알고 있는 것을 언제나 실행에 옮긴다고 낙관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렇게 행위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다름 아닌 무지이다. 플라톤이 형상론을 제시하게 된 주된 이유중의 하나는 우리에게 객관적 도덕 기준을 제시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정의와 선에 대한 절대적 기준이 이 세계 속에서 완전히 반영될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그러한 기분에 대한 지식을 다시 획득해야 한다.플라톤이 물질의 세계를 참된 실재로 보지 않은 것은 우리의 관심이 다른 영역에로 돌려져야한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사물의 존재 방식과 일치된 삶을 살고자 한다면, 우리는 도덕적으로 그리고 지적으로 그러한 실채에 라톤은 이성이 각 부분을 지배해야 한다고 믿지만 그 각 부분이 본질적으로 평등하다고 믿는다. 이성은 말들을 풀어 줄 수는 없으며, 그 말들을 계속 인도해야한다. 여기서 목적은 조화와 화합에 있어야 하며, 다른 모든 것을 희생시키면서 이성을 추구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인간의 특질 중에서 합리적인 부분과 비합리적인 부분의 관련성은 플라톤류의 이론이 언제나 직면하는 문제이다. 이성을 앞세우며 진리를 어떤 차원에 자리 잡게 하면 현실세계와 현실 세계에서의 욕구를 무시하는 경향이 생긴다. 플라톤은 이러한 경향이 인간 심리라는 측면을 고려해 볼 때 매우 불공평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성적 욕구가 우리의 욕구에서 주된 역할 을 담당함을 인정한다. 마부의 이미지는 그것을 통제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은 이성을 순수성과 연결 시키기도 하며, 이성의 참된 고향을 형상의 세계로 묘사하기도 한다. 그래서 영혼의 이성부분은 다른 부분들의 인도자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 영혼 자체이기도 하다. 만일 영혼이 육체적 욕구로만 채워진다면 영혼의 불멸에 문제가 생기게 된다. 영혼이 육체와 분리 될 수 있어야 동물과 공통되는 부분이 없어질 것이다.플라톤은 영혼은 실체이며 그것의 실체성은 인간 자신의 실체성과 동일시되었다.{) *영혼에 대한 다른 생각# 영혼은 실체가 아니라 우유성 즉 신체의 부수적 현상이다.-유물론자, 원자론자, 신실증주의자, 마르크스주의자 주장.# 영혼은 영혼 그 자신의 존재 활동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완전한 실체이지만 이경우 영혼의 실체성이 곧 인간 자신의 실체성과 동일시 되지는 않는데, 그것은인간은 영혼 외에 또한 신체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토마스 아퀴나스, 신 토마스 주의자들 (마리탱, 질송, 드 피난스)그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도적적인 것이고 부분적으로는 인식론적인 것이다. 즉 윤리적 측면에서는 이 세계에 대한 열망이 그 이유로 제시되고, 인식론적 측면에서는 경험으로부터 나올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절대적 진리의 소유가 그 이말미암아 어느 정도 변한다는 것이다. 그는 영혼을 바다의 신에 비유하여, 수족이 파도에 의해 상처를 받으면서도 바다의 신이 보이지 않는 것은 해초와 두터운 표피로 감싸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영혼은 현실 세계에서는 그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지만, 지혜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 본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영혼의 이러한 삼분설은 육신을 가진 영혼에 대한 매력적인 견해일수도 있다. 그러나 영혼의 근본적인 운명을 생각할 때 이러한 견해가 갖게 되는 약점을 플라톤은 인정하고 있다.육신을 영혼의 감옥으로 보는 플라톤의 견해로부터 반복적으로 나오는 하나의 이미지가 있다. 플라톤의 이원론은 분명히 비물질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대비시키고 있는데, 물질적인 것에다 세상의 모든 악을 결부시키는 것은 자연스럽게 보인다. 물질의 일시성과 가변성 때문에 플라톤은 진리의 원천을 다른 곳에서 찾았던 것이다.그러나 영혼이 파멸될수 없는 것이라고 해서 본래적으로 선한 것은 아니다. 비물질적인 영혼이 말 그대로 여러 부분들 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플라톤의 영혼 삼분설은 수시로 발생하는 내면의 갈등에 대한 관심에서 나온다. 우리의 선택이 어김없이 도덕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다. 그래서 플라톤이 주장하는 내용의 전반적인 핵심은 무엇이 정말 선하고 정당한가를 파악할 수 있게 하는 적절한 교육을 받지 않고서는, 우리가 옳게 되는 것이 우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수시로 구제불능의 잘못 된 길로 빠지기도 한다.인간의 영혼은 악과 절연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식을 소유하지 못함으로써 악의 온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에 대한 판단은 우리 자신의 밖에 있는 어떤 기준에 따라야 한다. 우리가 어쩌다가 무엇이 옳다거나 좋다고 믿게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그 무엇이 옳거나 좋게 되는 것은 아니다.플라톤은 우리의 내면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심각하게 생각하지만, 그의 관점은 피안의 세계에 있다. 우리의 참된 본성은 궁극적인 실체에 대한 지식으로 나오는 이성적인 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