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월의 삶? . 소월의 출생과 고향.⊙ 출생김소월(본명 김정식)은 1902년 구성군 왕인동에 있는 외가에서 태어남. (그가 고향인 정주 곽산에서 태어나지 않은 이유는 소월의 어머니가 산기가 가까워 오자 시부모가 그녀를 친정으로 보내 출산케 했기 때문이다.)⊙ 고향환경이 아름답고 일제 이전부터 민중운동의 중심지였던 평북 정주.? . 소월의 가족환경(1) 증조모 일붕댁소월가의 면모를 일신한 노마님. 남편 김기하(소월의 증조부)와 둘째 아들을 일찍 잃었지만 몰락해가는 가문을 억척스럽게 일구어 경제적 성공을 거둠. (소월의 증조모는 경제적 수완뿐만 아니라 한문 초서로 편지를 쓸 정도로 글공부도 했고 음식 솜씨도 좋았다고 한다.)(2) 조부 김상주가문의 대표자로서 권위를 가지고 가문의 대소사를 관장. 일찍 개화하여 단발을 하고 신문명에도 눈을 떴지만 끝내 유교적 세계관으로 가문을 지키고자 함. 소월의 총애했으나 소월이 성장하며 의견차이로 거리가 생기고 끝내는 불화. (이러한 관계는 소월 문학의 형성에 중요한 모티브의 하나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3) 부친 김성도소월의 부친인 김성도는 소월의 문학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특별히 기억해야 할 인물인데 일찍이 김씨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나 기대를 모았으나 불의의 사고를 당해 정신질환자가 됨으로써 소월에게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줌. (명랑하고 총명했던 유년기의 소월이 나이를 먹을수록 우울하고 고독해하는 내향적 성격으로 변모했던 큰 원인은 부친의 정신질환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4) 어머니 장씨시집온 지 4년 만에 남편이 정신 이상을 일으키자 오직 소월에게만 기대를 걸고 의지하여 정도 이상의 사랑을 줌. 솜씨가 좋아 집안의 사랑을 받았지만 배운 것이 없었고 그것은 소월과 어머니 사이에 대화의 단절을 가져옴. 소월은 모친의 맹목적인 사랑에 심리적 부담감을 느꼈으며 특히 문맹인 어머니와의 대화에서 오는 단절감은 소월을 몹시 고독하게 만들었음. (소월의 고독감은 그의 선천적인 성격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이와 같은 부친과 모친었던 사람이었다.)1923년은 소월이 시인으로서 큰 명성을 얻은 해. 소월이라는 필명이 문단에서 크게 주목.(소월에 대한 문단의 평은 호의적인 것이었고 그만큼 1923년은 소월에게 좌절과 명성이 함께 했던 한 해였다.)서울에 체류하다가 안서가 주선해 준 동아일보 지국 개설을 약속 받고 귀향.(5) 죽음의 길1924년 고향으로 돌아온 소월은 조부가 경영하는 고아산일을 돌보며 지냄.소월을 유일하게 이해해주던 계희영이 부군을 따라 평양으로 이사를 했고 소월은 외롭고 적막한 생활로 더욱 침울해짐.처가인 구성으로 삶의 터전을 옮김. (비정상적인 가정환경과 도덕적으로 책임질 수밖에 없었던 아내, 이미 기울기 시작한 가산과 궁핍한 생활, 무능한 자신에게 떠맡기어진 장손으로서의 책임, 그 무엇보다 자신이 지닌 성격적 결함 등등은 연약한 소월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처가인 구성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 것은 이러한 중압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1925년 소월의 첫 사업으로 동아일보 지국을 개설했지만 경영 미숙으로 부진.1925년 진달래꽃 시집 발간 이후 차츰 창작활동 역시 부진해짐.1926년 생활고로 인해 시인과 생활인의 삶을 병행하지 못하고 시에서 손을 뗌. 그 해 오순의 죽음과 1927년 유일한 문우였던 나도향이 요절하자 삶의 의욕을 잃어버림. (죽음에 대한 충동을 처음으로 강하게 느낀 것도 이 두 사람의 죽음 때문이었다고 보인다.)1927년 결국 동아일보 지국에서 손을 떼고 마지막 생존 방편으로 고리대금업에까지 손을 대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음. (한국의 대표적인 서정시인인 소월이 생계를 위해 고리대금업에까지 손을 댔다는 사실은 놀랍고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는데 이것은 생활인으로서의 소월이 자기 삶의 현실적 경영을 위해 얼마나 처절하게 몸부림쳤나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1929년 9월 시인 이장희의 자살소식을 들음. 이장희의 죽음은 소월의 자살충동을 좀 더 심화시키고 구체화시키는 계기가 됨.1932년 일본 관헌의 요시찰 대상으로 지목되어즉 한이 표현된다. 시 한편을 예로 들어 알아보자.나보기가 역겨워가실 때에는말 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영변에 약산진달래꽃아름따다 가실길에 뿌리오리다가시는 걸음걸음놓인 그 꽃을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나보기가 역겨워가실 때에는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이 시는 연인과의 이별을 제재로 한 작품이다. 그런데 시적 자아는 이별에 있어서 상반된 행동을 보인다. 떠나는 길에 진달래꽃을 뿌려주며 축복하는 듯 하면서도 죽어도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는 결의를 나타내는 것이다. 역겹다는 단어를 보면 이별의 원인이 시적 자아의 잘못인 듯하다. 그래서 자신의 책임일지 모르는 이별에 대해서 자책하며 참아내려는 모습 또한 보여 진다. 하지만 화자는 한편으로 그러한 사실에도 이별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강한 미련 혹은 집념의 감정을 가진다. 즉 절망과 미련, 원망과 자책이라는 서로 모순된 감정의 복합구조가 잘 나타나 있는 것이다. 소월의 시에서‘풀 길 없는 맺힌 감정’즉 한은 이와 같이 모순되는 감정들을 해소할 수 없는 자기 갈등을 말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절망과 미련의 갈등이며, 이차적으로 원망과 자책의 갈등이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소월의 시에서 대하는 한이란 상대방을 미워하면서도 사랑하고, 긍정하면서도 부정하고, 이별하면서도 그것을 만남이라고 생각하는 모순의 감정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 고전 문학에 반영된 일반적 정서이기도 하며, 거문고나 판소리의 흐느낌, 동양화의 끊일 듯 끊어지지 않는 선의 감정이기도 하다. 소월은 바로 우리 민족의 심층에 전승되고 있는 이 한을 시화했고 그렇기 때문에 민족적인 공감을 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소월시의 한은 그의 작품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그런데 소월이 동시대의 다른 시인들에 비해서 보다 한의 감정에 연연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그의 부친이 정신이상자이고 가정에서 아무도 그를 이해해줄 사람이 없으며 장남으로서의 부담감과 원치 않는 결혼, 또 소월의 주위에 있던 여인들의 불행함, 그리고 식민지 지식에서 한 은 생애를 보낸 소월이었던 만큼 그들에 대한 연민과 그들의 시적 형상화는 어쩌면 자연스런 것이었는지 모른다.3)민요시적 특징그 당시 문단에서 소월의 시가 주목을 받았던 것은 1920년대 초기 시와는 차별성을 갖고 우리의 정서를 우리의 가락에 실어 향토색 짙게 노래했다는 점에서이다. 이러한 소월의 시를 안서는 민요조 서정시로 규정했고 당대의 문단 평도 그러한 입장을 가졌다. 실로 이런 소월시의 등장으로 인해 맹목적인 서구 수용의 문단풍토에 신석한 충격을 주었고 이를 계기로 우리 것과 우리 문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전기가 마련될 수 있었다.그렇다면 특징을 알아보기 전에 우선 민요시란 무엇일까? 민요시라 함은 전통시가인 민요와 현대시가 접목된 일종의 파생장르이다. 민요시도 현대시인 만큼 창작주체가 집단이 아니라 개인이라는 점에서 민요와 구별되지만, 민요조 가락이나 표현기법이 차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민요에 가깝다. 다시 말해 민요시는 개인의 창작이로되 시정이나 기법이 민요에 접맥되어 있는 장르이다.소월의 시에 나타난 민요적 징후로는 율격을 들 수 있다. 소월시의 율격은 7· 5조 3음보가 기본을 이룬다. 위에서 보았던 는 전편이 7· 5조 3음보로 이루어져 있다. 이와 같이 7· 5조 3음보가 수월시의 기본 율격이다. 물론 자유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정형률을 토대로 한 시는 대게 이 율격을 유지하고 있다. 때로는 2음보 율격이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소월시의 주를 이루는 2음보 및 3음보는 바로 민요의 기본 율격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이렇게 볼 때 소월의 시는 우리 전통 민요의 율격을 토대로 하여 창작됐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소월은 이 민요 율격을 토대로 하나 이에 머물지 않고 이를 다양하게 활용함으로써 율격 변형의 새로운 장을 열어놓고 있다. 다음 시들이 그 좋은 예이다.어제도 하루밤나그네집에까마귀 까악 까악 울며 새웠오오늘은또 몇십리어디로 갈까----불연듯짐을나서 산을 치달아바다를 내다보는 나의 신세여!배는 떠나 하늘로 끝을 가누나!----이 시들시를 쓰지 않았음에도 민족의 시인이 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소월을 민족의 시인이라고 일컫는 데는 두 가지 뜻이 내포되어 있다. 그것은 첫째 그가 민족 시인이라는 뜻이고 둘째는 민족주의 시인이라는 뜻이다. 전자는 문화적 개념이며 후자가 정치 사회적 개념인 것이다. 소월이 민족 시인이라는 말은 그의 시가 한민족의 심층에 전승되는 무형의 가치에 기초를 두었다는 뜻이다. 우리는 그의 시에서 한국인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감수성, 한민족의 집단 무의식에서 발원하는 감수성을 느낀다. 앞에서 언급했던 소월 시의 특징들과 그의 인생과 사고방식 등은 모두 한국인의 전통에 내재하는 민족혼의 표현이라고 보아야 한다. 소월의 시가 널리 읽혀지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한편 소월의 시는 분명 그가 구체적으로 현실을 직시하고 식민지인의 불행과 슬픔으로 노래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의 가슴에 하나의 불빛을 켜주었다는 점에서 그의 시는 민족주의 시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과 같은 작품에서는 조국을 빼앗긴 지식인 한을 나타내고 의 경우 일제에 전답과 곡식을 수탈당한 식민지 농민의 설움을 그려냈다. 이러한 시들은 그의 유일한 시집 『진달래꽃』에 수편 수록되고 있으며 그의 새로 발견된 그의 유고 시들 중에서 다수 존재한다.3. 시 감상?---------------------------------------------------------------? Ⅰ. 먼 후일먼훗날 당신이 차즈시면그ㅼㅐ에 내 말이 『니젓노라』당신이 속으로 나무리면『무척그리다가 니젓노라』그래도 당신이 나무리면『밋기지 안아서 니젓노라』오늘도 어제도 아니잇고먼훗날 그ㅼㅐ에 『니젓노라』( 「 開闢 」게재 - 1922 )?----------------------------------------------------------------?민요조 서정시의 대표 시이다. 진달래꽃과 함께 한의 정서를 나타내는 시로써, 「學生界」창간호에서 처음 활자화 되었고, 1922년 8월 「開闢」에 발표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