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학과문화이론-계속 영화를 보다가 끝나기 전에 이루어진 반전에 엄청 놀랐다. 그 인물이 한 사람이었다는 것에 말이다. 과연 이 영화 속에서 다루고자 했던 것은 어떤 것이었을까.영화를 보면서 신경쓰였던 부분 중 하나는 주인공 남자의 이름이 끝까지 불려지지도 나오지도 않았다는 점이었다. 단지 나레이터로 그의 목소리의 추이에 따라 이야기에 빠져들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끝의 반전이 더욱 놀라웠던 것 같다.주인공의 이름이 없다.......... 나레이션으로 깔리는 그의 음성만이 그가 살아있음을 나타내주는 것 같았다. 어쩌면 본인이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던 것일까. 그래서 우리가 스스로를 또한 대외적으로 우리 자신이라고 묶어 놓고 그에 따라 살아가게 되는 일상적인 한 예의 ‘이름’이라는 것의 의미가 주인공에게는 없었던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했다.일상적인 삶 속에서 그나마 고급류 가구, 물품 등에 집착하며 살아가는 주인공은 현대인의 모습을 담고 있다. 붐비는 도시 속에서도 공허한 몸뚱이로 홀로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 말이다. 우연히 접하게 된 심리치료의 자조클럽에서 주인공은 그 속의 사람들의 아픔까지 드러내는 진실함을 느꼈다. 또한 그것을 해소하기 위한 대화와 눈물로 그 동안의 무미건조한 삶과 그로 인해서 고통받았던 자신을 해방시키는 쾌감을 경험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이리저리 찾아다니게 되었지만 ‘말로’라는 여자 때문에 그 기쁨이 사라질 위험에 처하자 별 수를 내어서라도 참여하고자 하는 의지를 나타낸다. 그만큼 그 장소가 그에게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그만의 공간으로서 자리매김 했던 것이다. 그 공간을 침해 받았을 때 겪는 불쾌감. 이 역시 현대를 살아가면서 자신의 안락한 공간을 찾고자하고 침해받기 꺼려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 하다.주인공은 정신적 장애를 겪는 사람이다. 일명 ‘다중인격장애’라고 한다. 들은 바로는 이 장애는 자신의 모습에 대한 부정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지금의 이건 내가 아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을 여러 모양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주인공 역시 고리타분하고 반복적인 자신의 삶과 모습에서 일탈한 새롭고 다이나믹한 다른 자아를 만들어 살아왔다. 영화 속에서는 2개의 자아이지만 심한 사람의 경우는 몇십개의 자아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도 한다. 이러한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을까.이 전에 언급했듯이 다른 자아는 자신에 대한 부정에서 비롯된 모습이다. ‘나’라는 존재는 실재로는 딱 잘라 값으로 떨어지고 해명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묵시적으로 인정하면서 혹은 신체라는 구조체의 확인으로서 나라는 존재에 대해 신뢰하고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안정된 틀에 있어서 세세한 분석을 들어가게 될 경우에는 어마어마한 사태가 초래된다. 바로 ‘나’라는 것이 분명 있는 것 같지만 내 존재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존재하지만 부재한다는 것이 매우 혼란스러운 골칫거리가 된다. 아마도 주인공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전 부분에서 이러한 과정들이 진행되어 왔던 것 같다. 그래서 일률적인 흐름 속에 이어져 오는 자신의 모습의 혼란 속에서 또 다른 자아, 즉 자신의 새로운 욕구와 상황에 부합하는 세계 속의 자신을 끄집어 내기에 이른 것이다. 뒤늦게 다른 자아를 죽이려 자살을 시도하지만 결국은 깨끗한 자아 존재의 회복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뷰티풀 마인드’의 주인공도 이런 예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결국 자신의 쾌감을 실현 시키는 것도, 자신을 파괴하는 것도 내 안에 있다는 것이다. 단지 우리는 후자의 공포와 불안으로부터 안전한 방어막을 치면서 살아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을 알려는 무모한 용기가 오히려 자신을 해치는 무서운 병기로 나에게 다가올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두려움을 애초부터 막기위해 현대인들은 더욱 바쁘게 그리고 더욱 열심히 다른 것에 집중하는 것인가 보다.어쩌면 그럭저럭 나라고 인정하는 내가 있다는 사실은 ‘무지 속’의 평화를 추구하는 꽤 영리한 ‘나’에게로부터 나온 방어막이므로 다행인 셈이다.
일상어와 통신어의 차이가 일상생활에 미치는 영향‘통신어’라는 것은 PC 통신의 과 언어의 에서 따온 글자로써, 사용자의 편의에 따라 변형된 한글을 사용하는 언어를 지칭한다. 이러한 통신어는 편의에 의해 만들어진 언어이기 때문에 엄격한 규칙성이 없을 뿐더러, 한글을 변형시켰기 때문에 통신을 자주 이용하는 주요층이나 어린 세대를 제외하고 완벽히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특별히 요즘 많은 신세대들의 통신어의 상태와 사용 상황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표현이 바로 ‘외계어’라는 것이다. 10대 네티즌들이 중심이 되어서 컴퓨터에서 이용할 수 있는 최대한의 알파벳이나 일본문자, 또는 갖가지 특수 문자를 혼합하여서 기존의 언어 형태를 파기하고, 그들만의 색다른 글자를 만들어 쓰는 것에서부터 구별되어진 언어 형태이다. 어른들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이라는 뜻에서 이런 명칭이 붙었다.기존의 언어와는 상이한 형태 때문에 인터넷상에서도 ‘언어 파괴’이냐, 아니면, ‘고유한 개성 표현’이냐를 놓고서 많은 공방전이 일기도 했다. 전자의 입장에서는 언어 순화와 고유어 지키기 차원에서 인터넷상의 카페 글이나 채팅시 언어를 제재하거나 이를 권유하는 운동을 펼치기도 하고, 후자에서는 통신언어와 일상 언어의 혼돈이 생각만큼 크지 않으며, 각자가 나름대로 조절할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하지만 무분별한 통신어의 사용과 범람이 단지 개성을 표현하는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 또,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심각한 언어상의 혼돈이 없을 것이라는 입장에 대해서는 많은 고려가 필요할 것이라고 본다. 이에 따라 우선적으로 통신어의 특성을 살펴보고, 그에 대한 긍정성과 문제성에 대해서 짚어보도록 하겠다. 더불어 문제에 대한 방안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고자 한다.1. 통신어의 대표적인 특징▶ 일상적인 대화에서 말과 함께 전달되는 송수신자 간의 표정이나 동작은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하지만 서로를 직접적으로 볼 수도 음성을 들을 수 없는 통신상에서 는 그것을 대신할 또 다른 매체들을 이용하게 되는 경이거나 채팅상으로 준비된 갖가지 이모티콘이나 플래쉬콘을 이용 한다. 또한, 편의성을 위한 언어의 변형이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다.1-1. 단어 변형① 탈락 현상- 일상적인 대화는 입을 통해 음성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지만, 컴퓨터 통신에서는 자 판만을 이용해야하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훨씬 느릴 수 밖에 없다. 음성으로 대화하 는 것보다 문자로 대화하는 것은 매우 느리게 느껴짐은 당연한 일이다. 이에 따라 대 화의 흐름이 끊기는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편의를 위해서 다양한 준말을 사용 하게 되는 것이다. 특별히 통신 언어는 구어에 가깝기 때문에 통신 어휘에서는 거의 준말을 사용하고, 표준어에서 인정하는 준말 이외에도 다양하게 사용하기도 한다. 더 욱 빠르고 간편한 사용을 위하여 탈락 현상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예) '설(서울), 젤(제일), '조아(좋아), 마니(많이)② 축약과 생략- 형태론적인 면에서 통신 언어의 탈락 현상과 더불어 대표적으로 나타나는 형태 변형 으로는 모음 축약 현상을 들 수 있다. 웃음을 나타내는 의성어에서도 많이 사용되고 있고 지나친 음운의 생략 형태도 많다.예) '드뎌(드디어), 셤(시험), '추카함다(축하합니다), 'ㅋㅋㅋ(크크크)'ㄱㅅㄱㅅ(감사감사)'- 조사가 생략되거나 뒤의 내용이 생략된 경우도 많다.예) '나이(가) 어리자너, 나 전주(에) 살아요' '나올 수 있는 사람 손(들어보세요)!▶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통신 언어가 문어보다는 구어에 가깝기 때문에 구어 처럼 보다 빠르고 편하게 말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자판을 덜 사용하 고, 그에따라 맞춤법도 간소화여 시간과 노력을 절약하려는 의도와 더불어 평상시 쓰 는 언어와는 좀 다른 것을 사용하는데서 느끼는 즐거움과 공유감도 그 원인이 될 것 이다.③ 첨가- 어미의 끝에 'ㅇ, ㅅ, ㅁ, ㅂ' 등을 첨가하여 사용하는 형태를 말한다. 'ㅇ' 첨가는 부드 럽게 문장을 끝맺거나 장난기 있게 말하는 경우에 사용한다. 또, 'ㅁ'의 첨가는 기원이 나 추측의 실하게 끝맺을 때나 강하게 뜻을 나타낼 때 사용한다.예) 하네용, '되세염(되세요), 아닌감' '하잇, 넵'1-2. 발음대로 적기① 대치- 통신언어는 어법에 맞도록 적는 규정을 무시하고 모든 언어를 소리나는 대로 적는다. 그와 동시에 어휘의 축약이나 생략이 극도로 함께 이루어지기도 한다.예) 축하(ㅊㅋ), 맞아맞아(마자마자)- 소리나는 대로 표현함에 따라 혼동하기 쉬운 모음들의 대치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먹(지)'를 '먹(쥐)'로,'좋(고)'를 '조(쿠)'로 발음하는 현상을 들 수 있다.- 종결어미 '-요'를 '-효'로 바꾸어 적는 형태의 의도적인 자음을 대치 현상도 있다.▶ 맞춤법을 무시한 편의성, 특정 단어를 강조하려는 의도, 상대방에게 막역함과 친근감 을 주려는 의도가 결합되어 나타난 현상이다.② 아라비아 숫자와 로마자, 영어로 인한 조합▶ 한글만을 다 칠 때보다 수고를 덜 수가 있다는 점에서, 색다른 개성의 표현의 시도라 는 매력 때문에 많이 사용하는 방법이다.- 발음의 유사성에 의하여 한글 대신에 숫자나 로마자를 사용하는 것이다. 숫자만으로 표 기하기도 하고 숫자와 문자의 조합으로 표기하기도 한다.예) '20000(이만), 밥5(바보), 바2(바이 : BYE)- 한글 대신에 로마자를 쓰거나 대화 중간 중간에 외국어를 섞어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이 중에는 어휘의 정확한 국적을 정의하기 힘든 것도 있다.예) '10C미(열심히), RU(are you), c8(욕설),‘하이루’(안녕하세요)= hi(영어) +루(한글이긴 하나 알 수 없음)1-3. 은어의 범람① 약어- 일상 언어에서도 간편하게 쓰고자 하는 의도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기는 하지만 통신언 어에서는 그 영역이 매우 광범위하고 다양하다.예) '정모(정기 모임), 즐통(즐거운 통신, 즐거운 통신 되세요), 당스(당연한 스토리),② 의미 변형- 이미 있는 언어를 이용하여 사용하는 경우가 많지만 의미는 매우 다르게 정의된다.예) '잠수'- 물 속에 잠겨 있음--두 사람만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 말없이 있것'유령'-죽은 사람의 혼령-채팅방에서 대화명이 없는 경우, 활동이 없는 회원1-4. 다양한 조판 부호와 이모티콘▶ 이모티콘(Emoticon)은 감정(Emotion)과 아이콘(Icon : 컴퓨터 프로그램 기능표시 형상) 의 합성어로 컴퓨터 자판의 문자와 기호, 숫자 등을 적절히 조합해 미세한 감정이나 특 정 인물, 직업 등의 의미를 간단하게 전달하는 사이버공간 특유의 언어이다. 여러 가지 특수 기호를 이용해 진정한 외계어의 형태를 보여주기도 한다.예) :-) 웃고 있는 모습(옆으로)0:-) 천사:-| 무표정#:-) 머리가 헝클어진 모습8-) 안경쓴 사람의 미소'よøぎㅎビλĦㅎコ_¤ 읍ㅎF_しち흐ロっㅉヴ횾 _≥∇≤☆(안녕 하 세 요, 오빠. 너무 멋 져 요. 웃는 모습)2. 통신언어의 장점① 통신언어의 사용은 시간절약을 위한 경제적 측면으로 보면 그다지 나쁜 것은 아니다. 신속한 대화를 요구하는 채팅 상황에서는 빠르게 컴퓨터 자판을 쳐서 대화를 진행하는 것이 편리하고 서로에게 예의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② 네티즌끼리의 의사소통에서 효과적인 전달을 가능하게 하고, 이를 통한 네티즌끼리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요소가 된다.3. 통신어의 문제점과 영향① 언어파괴라는 비난의 측면이다. 네티즌들만이 알 수 있는 말로 문법성을 파괴한 언어들 은 국어순화에 큰 장애가 된다. 탈락되거나 축약된 음운의 형태인 통신 언어는 실제의 생활에서 정서법(正書法)의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또한, 띄어쓰기를 무시하고 사용하 는 것은 맞춤법의 파기를 더욱 가속화 시키는 요소가 된다.예) "매일매일 ㅎㅐㅍㅣㄷㅔㅇㅣㅎㅏㅅㅔㅇㅕ !!!"② 통신언어의 사용은 에티켓에 어긋난다. 통신언어를 남발할 경우 상대방에게 불쾌감을 줄 수도 있다. 이렇게 쏟아지는 통신언어는 통신상의 환경을 어지럽히고, 그에 따른 시 각적, 심미적 언어공해를 일으킨다.③ 언어의 오용 못지않게 심각한 문제는 왜곡된 언어로 이루어지는 사이버 언어폭력이다. 홈페이지 게시판이나 E-mail 및 대화방이나 채팅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욕설과 인격모독 혹은 허위·비방하는 글들을 올 리는 것이 이에 해당되는데, 여기서 사용되는 갖가지 욕설은 언어 통제 망을 교묘히 피 하거나 우회해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욕설이 주는 직접성을 줄이기 위한 방법 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즉, 통신어가 이와 같은 환경을 더욱 쉽게 부추길 우려가 있다.예) c8, 시방새, '쉐리,쉐이(새끼), 넘,뇬(놈,년) 등의 욕설④ 사회적 방언의 일종으로서 그 사회를 떠나면 의사소통에 장애가 온다. 무분별한 은어의 사용은 정식적인 언어의 사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주 사용하지 않거나 생소한 사람 에게는 정보에의 접근이나 특정한 통신상의 작용으로부터 소외감을 가지게 만들 수도 있다.▶ 통신 언어는 컴퓨터 통신의 대화방이나 토론방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또, 짧지만 나름대로 즉흥적이고 재미있으며, 생생한 표현이 있다는 면도 있다. 하지만, 맞춤법과 문법을 무시한 언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다. 만약 계속 이런 언어를 사용한다면, 앞으로를 두고 볼 때, 어떤 것이 옳은 표현인지에, 맞춤법인지에 대한 혼란이 올 가능성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통신을 이용하는 많은 계층이 청소년이라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이러한 문제는 더욱 심각히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아직 온전한 문법 체계와 표현을 배우지 않은 그들에게는 불안정하고 그른 형태의 언어를 구축하는 교육적으로 악적인 요소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이다. 자유롭고 창의적인 언어의 생성이라는 매우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실제로 통신상에서의 언어는 파괴된 언어의 형태가 많다. 이와 더불어 언어를 사용하는 계층, 특히 일부 10대들에게 강하게 나타나는 언어 파괴 현상은 가족 간의 대화를 어렵게 하고, 세대 간의 대화를 불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 즉, 계층 간의 분화에서 더 나아가, 폐쇄적 인간관계의 강화를 부추기는데 기여한다는 것이다. 사용하는 통신언어가 맞지 않는 네티즌간있다.
Ⅰ. ‘프레이리’의 교육 철학만일 우리 스스로에게 당장 ‘지배와 피지배’, ‘억압’이 존재하는 곳을 생각해보라고 한다면 무엇을 떠올릴까? 아마도 불평등한 계층이나 정치적 통치 존재하는 특정한 형태로의 국가나 사회 집단을 떠올리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여기에 눈으로 볼 수 있는 존재는 아니지만,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로 실재하는 ‘교육’의 현장에 그 특징들이 내재해 있다는 사실을 접하게 된다면 어떨까. 프레이리는 이러한 정치적이고 계급적인 요소를 교육에 끌어들임으로써 진정한 교육의 의미를 생각해 보게 한다.그가 말하는 교육에서의 ‘교사와 학생의 관계’는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에 위치해 있다. 권력과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며 당파를 만들어 움직이게 하는 ‘정치 교육학’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프레이리는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것을 옳지 않게 보고, 결국 정치적인 성향을 띌 수 밖에 없는 교사의 입장을 인정한다. 하지만 이 정치적인 입장은 다름을 인정하고 학생 관점을 가지도록 유도하는 것에 그 의미가 있다는 점에서 그 입장을 달리 한다. 그의 입장을 극명하게 나타내기 위해 대비된 개념은 바로 ‘은행 저금식 교육’이다. 이 교육 하에서는 교사와 학생, 세계와 인간이 이분법적으로 나뉘는 것에서부터 모순을 갖는다. 이들의 관계는 교사의 입장에서 지식을 많이 가진 자와 없다고 여겨지는 자 간의 지식의 단순 전달과 유입, 축적을 도모하는 관계로서 정립된다. 즉, 학생의 지식에 대한 무지를 전제로 하여 지식을 가진 교사의 존재와 권위가 성립되고 정당화 되게 된다. 그리고 그 입지를 더욱 견고하게 하기 위해 교사는 자신의 설명적인 지식과 이분법적이고 억압적인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전수하며, ‘순고한 양’으로 만들기에 전념한다. 억압자의 틀에 맞춰진 세계에 순응하고 적응하면서 성장하는 사람을 성공적인 사람으로 여기며 교육하고 있는 것이다.하지만 이러한 교육관은 진정한 교육의 의미를 찾게 할 수도 없고, 학생들에게 필요한 진정한 가치의 지식을 증진시켜 주는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설명적 지식을 축적하게 하는 은행 저금식 교육의 방침으로는 변화하는 세계에 대한 이해와 상호 작용 속에서 살아가 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비판적 사고’를 길러주지 않을 뿐더러 그렇게 수혜자로서 길들여진 학생들이 미래에 필요한 학문을 발전시키는데 과연 적합한가에 대해서도 고려해봐야 할 부분이 될 것이다. 또한, 교육의 실제적인 목적이 학생들에게 많은 지식과 정보를 알도록 한다는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은행 저금식 교육으로는 선별적이고 한정적인 설명의 교육 체계가 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면 이 교육의 모순성을 더욱 극명히 알 수 있다. 진정한 교육은 이러한 이분법적인 이데올로기와 설명적인 지식의 축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 내재해 있는 인식의 눈을 뜨게 하고, 유동적으로 대처하며 성장하도록 이끎으로써 성취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억압적인 이데올로기 속의 모순적인 교사와 학생의 관계를 극복하기 위해 제시된 교육적 방법은, 바로 ‘대화’이다.대화가 필요한 이유는 이 대화를 통해서 억압된 이데올로기 속의 교사와 학생 간의 관계가 무너질 수 있고, 학생들에게는 단순히 자신의 존재가 세계 속에 적응해야만 하는 소극적인 존재가 아닌 변화하는 세계에 대한 인식을 깨치고, 본래의 나만의 의식 세계를 형성하는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참된 인간으로 거듭나게 도와주기 때문이다. “참된 말을 하는 것은 세계를 변혁시키는 것이다.”라는 의미는 현실 속에서 꾸미지 않은 실제적인 것들을 나에게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이름 짓기(naming)’를 함으로써 자신의 의식과 외부 세계로의 변화를 꿰 하며, 자신의 존재 입지를 더욱 굳히게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물론, 이름 짓기에는 말과 성찰과 행동의 삼박자가 고루 갖춰진 상태로 이루어져야 하고, 이를 통해서 한계적인 상황이 될 수 있는 현실을 인식하고 극복하려는 의지로 세계 속으로 빠져들어, 변화하려는 움직임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름 짓기가 인간이 당연히 행사해야 할 권리임에도 불구하고 은행 저금식 교육에서는 헛되고 과장적인 현실 인식을 유도하며 그 권리를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게 한다. 참된 말로 세계를 의미 있게 이름 짓고, 다시 세계를 매개로 교사와 학생간의 자유로운 대화가 보장되며, 그 속에서 형성되는 신뢰가 서로를 자유롭고, 힘 있게 하는 것임을 모두가 인지하는 것이 중요한 교육에서 필요한 대화의 목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대화에는 구속이 아닌 자유로움을 인정해주는 행위의 사랑이 필요하며, 더불어 서로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겸손한 태도를 겸비해야 한다. 더 나아가 인간이 의미 있는 세계를 만들고 재창조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서 수평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쌍방적인 배움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교육적 관계에서 필요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진정한 인간, 억압된 상태에서 자유롭게 해방된 인간으로써 현실에 대한 관심과 비판과 변화를 주도하는 비판적 사고의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그러나 한국의 전통적인 교사들은 이러한 교육과는 거리가 있다. 마치 낙수 하는 원리를 거스를 수 없다는 듯이, 가르침은 일방적으로 진행되고, 역행은 이치에 맞지 않은 것으로 여겨졌다. 고등학교 때 나이 많으신 선생님들을 떠올려보면, 수업 시간에 책만 읽고 아주 무미건조한 학습의 이야기만 하셨던 것 같다. 물론 연륜에 의한 포용력과 삶의 지혜가 많으신 분도 계시지만, 전통적인 틀에서는 벗어나지 못하시는 것 같다. 예로 왼손 잡이였던 남동생과 대화도 없으신 채 부정적인 인식 체계로 몽둥이로 때려가면서 고치셨던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자신의 인식과 세상의 전통적 기준을 고수하시는 면모를 엿볼 수 있었다. 지금은 왼손 잡이에 대해 긍정적인 평도 있는데, 이러한 시대적 변화의 흐름을 생각해보려고도, 학생을 이해해보려고도 하지 않으셨던 것 같다. 단지 자신의 것이 옳은 것이며, 커가는 아이들에 의해서 권위가 침해 당해선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신지 접촉의 거리를 두려고 하셨던 것 같다. 이러한 교사와 학생 간의 무미건조한 관계는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정과 사랑을 느낄 수 없게 만들 뿐만 아니라 지식의 전달에 있어서도 비 효과적인 영향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발표나 갖가지 수행평가와 협동학습 등의 다양한 아이들의 입장과 의견에 귀 기울이는 시간을 계획하거나 선호하지 않음으로 교사와 학생의 대화의 통로가 막히는 경우도 생길 수 있을 것이다. 지식의 단순한 전달과 위압적인 교사의 태도, 그리고 서로 간의 의사 소통의 단절은 프레이리가 원하는 진정한 인간화를 위한 교육에는 맞지 않는 문제점이 될 수 있다.프레이리의 해방적인 교사와 학생 간의 평등성, 더 나아가 역할의 전복을 이룰 수 있다는 견해는 매우 급진적인 교육관으로 생각할 수 있다. 또한 교육을 지나친 권력의 구조로 파악하여 전제했다는 것이 사상의 전개에 무리수로 작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평등적인 구조와 자유 성을 위한 초점이 일관되고, 교육의 본래의 가치가 인간을 주체화하며, 그 안의 가능성들을 열어 변화시키는 것에 있다는 것을 생각한 접근이기 때문에 잠시 잊혀질 수 있는 교육의 방향을 다시금 재정검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경보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교육에서 지식을 전하는 것은 당연히 중요한 부분이다. 다만 전하고 받는 사람의 관계가 평등한 위치 속에서 자유롭게 교제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하며, 지식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물질적인 논리성에 의해 흐르는 것이 되어선 안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서로 다른 입장을 표현하고 수용하게 하면서 상호에게 유익이 되는 방향으로 끊임없이 왕복하고 가치를 창조하게 하는 존재로서의 지식이 정립될 때 평등한 관계와 보다 의미 있는 교육이 실현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Ⅲ. 듀이, 프레이리, 루소의 교육적 목적 개념 및 교사상듀이는 교육의 목표가 축적된 지식과 정보의 총체를 학습자에게 주입하여 사회화 하는 것에 집중하는 전통적 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지식을 전달하되 학생들의 경험과 관계가 있는 것을 교육적 내용에 고려하여 가르쳐야 한다는 진보적인 교육의 입장을 첨가하여 절충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즉, 학습자의 실제 ‘경험’과 관련된 필연적인 교육적 경험은 이 두 입장의 매개로 작용하여, 미래를 준비하고 건설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는데 필요한 요소가 된다는 것이다. 경험을 매개로 한 교육은 보다 나은 질의 경험, 즉 교육적 경험을 계속적으로 가능하게 한다. 이를 위해서 교사나 교과에 대한 결정이 학생들의 경험과 관계하여 정해져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교사의 적극성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 연결성을 찾기 위해서는 아이들의 경험을 분석하는 과정이 있어야 하며, 그를 통해 교과나 자신의 교수 방법의 효율성을 극대화시킬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학생의 개인적인 요소와 환경적인 요소를 잘 파악해서 경험을 이끌 수 있는 교육적 환경을 제공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현재의 경험이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경험의 조건들과 습관들을 형성할 수 있는 요소이기 때문에 철저한 분석과 관찰이 필요로 하게 된다. 옳지 못한 습관이나 경험의 상황이라고 한다면, 직접적인 강압적으로 교육하는 것이 아니라 의도하는 목적을 위한 경험의 환경을 제공함으로써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고 언급한다.반면 프레이리는 교사와 학생 간의 매우 급진적인 교육의 목적을 지니고 있다. 듀이와 같은 경우에는 선생님의 위치가 매우 중요하고, 학생보다 일방적인 적극성을 가지고 환경을 유도하고 있는데 반하여, 프레이리의 교육의 교사는 아이들의 가능성에 대해서 무한한 신뢰와 인정을 보내고 있는 것 같다. 그리하여, 교사가 일방적으로 주고 책임지는 ‘능동자’로서의 역할 뿐 아니라 학생에게서도 색다른 것을 배울 수 있는 학생 같은 ‘수동자’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호 작용의 형태는 듀이가 교실 속에서 이루어지는 학생과 교사, 그리고 교과에 구비된 모든 상황들 간의 상호 작용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했던 부분과 흡사한 개념임과 동시에 더 구체적이고 확실한 구조 파악의 초점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Stevie Smith 'Not Waving But Drawning'- 차가운 무관심, 그래서 더 추운 죽음 -죽음 앞에서 아무도 내 곁에 없다면? 그야 말로 가장 불행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한 사람이 어이없게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 사람들의 눈이 있는 곳에서 말이다. 이 시에서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과 그 것을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사람들, 관찰자는 매우 먼 거리에 있는 것 같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또 관찰자는 딴 나라 이야기 하듯 담담히 그 장면을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을 본다.이 시는 매우 간단한 표현들로 쉽게 설명하고 있고, 그 단순함처럼 시 상황 속의 사람들과의 관계는 매우 단순하다. 사람 사는 맛이 인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텐데, 여기에서의 사람들은 아주 냉혹한 느낌마저 든다. 딱히 뭐라고 집어서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지만 죽은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어떠한 동정도 시선도 없이 냉담한 이유들을 추측하며, 늘어놓고 있다. 신음 소리를 내며 갈아 앉는 사람을 향한 그 누구의 관심의 물음과 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손을 흔드는 것이 아니라 물에 빠지고 있는 거’라는 죽어가는 이의 외침 속에서 도움을 청하는 간절함과 동시에 포기의 쓴 웃음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리라.시의 외부로 나와서 시를 짓게 된 시대의 상황이 어떠했을까 생각해 본다. 급속한 산업의 발달은 인간의 생활을 보다 윤택하고 편리하게 만들어줌과 동시에 일률적이고 바쁜 삶 속에서 인간적인 여유를 누릴 시간을 허락해 주지 않았다. 그 이후 점차 인간 대 인간의 교제 보다는 발달된 문명의 매체들과의 접촉이 더 많아졌고, 결국 인간 소외의 현상까지 야기 시켰다. 이는 인간미의 상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바로 그 차가운 시대 상황이 시 속에서 한 사건으로 여실히 보여 지고 있었던 것이다.단순한 사건을 간단히 묘사한 듯 보이지만 그 안에는 사람들의 차가운 무관심에 대한 냉소가 깔려있다. 하지만 냉소의 비판은 어디에도 분명히 드러나 있지 않다. 다만, 독자로 하여금-그것이 내 상황이라고 한다면-‘사람이 죽는 것도 구분 못할까? 저럴 때까지 모르나?’ 라는 반문을 제기하게끔 만든다. 그러면서 죽어가는 이와 서술하는 이의 말을 자세히 보게 되고, 점차 단순한 사건을 담은 글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 당대의 상황을 돌아보지 않았을까 싶다.시를 자꾸 읽으면 읽을수록 어렵지 않아서 좋고, 간결해서 좋았다. 상황을 잘 상상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한 편의 비극을 보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이것이 바로 이미지즘 시의 매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에즈라 파운드의 시처럼 말을 축약해서 상황의 느낌을 전달하는 것과는 다르게 매우 서술적이면서도 차분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사회의 상황에 대한 생각을 움직이게 하는 힘을 내포하고 있어서 시의 매력이 더 한 것 같다.
영미 비평과 문화- 화 9, 목 78 -브르디외의 - 계급적 아비투스에 관한 고찰 -담당; 김종갑 교수님학과; 영어영문학번; 200210280이름; 장화목제출일자;2005.11.25.금계급적 아비투스에 관한 자가 진단정확한 출처는 희미하지만, 우연히 신문을 보다가 내 시선을 끌었던 빨간 샌들이 있었다. 보기에도 무척 화려하고 예뻐 한 번에 눈길을 끌었다. 또, 여자인지라 혹해서 무언가하고 자세히 봤더니만, 글쎄 120캐럿의 타원형 루비와 백금으로 장식된 20억짜리의 구두에 관한 기사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구두가 매우 인기이고, 한정된 물품이 부족해 예약을 받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 후에,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몇 백만원 짜리 핸드폰을 한정판매 한다는 기사도 보게 되었는데, 나의 눈은 가늘게, 그리고 나의 머리는 어느 새 좌우로 흔들며, 나와는 먼 얘기인 듯 신문을 확 넘겼던 적이 있었다.나의 이러한 반응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는 확실히 상류 계층은 아니다. 물론 그 물품들이 그 만한 가치가 있는 물건임에 여유로운 자들에게는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 나의 금전적 상황, 전반적인 경제적 삶은 그 만한 금전 가치를 쉽게 지출할 만큼 여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만일 그렇듯 여유로운 상황인데, 계급적으로 합당한 소비를 하겠는가에 대한 질문이 던져진다면, 또 상황은 긍정의 태도로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사실 백만원을 버는 사람의 10만원과 천만원을 버는 사람의 10만원의 값어치는 상대적으로 다르고, 상류층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들에게는 합리적인 소비가 될 수 있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실제로 내가 상류 계층의 삶을 보거나 영위해보지는 않았지만, 매체를 통해 혹은 재벌만큼은 아니더라도 돈 좀 쓴다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접하면서 막연히 그 보다 더할 것이라는 상류층의 모습들을 상상하고, 나름대로 구체적인 상황들의 규범을 규정짓게 된다.부르드외에 의하면 나의 이러한 모습은 쁘띠 부르주아지의 'recognition'의 한 모습으로, 또한 실제 부르주아지의 삶, 그에 대한 실제적 ‘knowledge'의 부재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기본적인 생활의 차이, 엄밀히 말하면 경제적인 차이를 토대로 하여 나의 계급적 아비투스는 쁘띠 부르주아의 모습으로서 그에 따른 구체적인 문화적 행동의 범주를 형성하게 됨을 엿볼 수 있다.우리 집에 남는 방 하나. 그것을 활용하는 데에 임했던 나의 모습을 되짚어 보면 ‘상류층 문화에 대한 외경'(reverence))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남는 방 하나는 옷방으로 활용하기로 했다. 사실 드라마에서 멋지게 거울에 쌓여, 수많은 옷가지들이 단정하고도 길게 펼쳐진 곳에서 이것저것 선택해서 입는 모습들이 부러웠던 적이 있었는데, 이사오자 마자 남는 방은 그렇게 하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드라마에서처럼은 아니지만 어쨌든 우리 집에도 뭔가 특별한 공간이 생긴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런 것이 아마 쁘띠 부르주아지의 근접한 정통성에 대한 만족감이 아닐까 싶다. 실로 그런 정통적 문화를 접해서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또, 재즈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모르면서도, 카페나 인터넷을 통한 적은 자본으로 관람할 수 있는 기회가 공지되면 부리나케 시간에 맞춰 등록하고 후에 관람하며, 문화인인 것 같은 모습에 뿌듯해 하기도 했었다. 특별한 날에는 크고 화려한 곳에서 식사를 할 때 느끼는 기쁨도점차 나의 모습을 돌아보면서 부르드외의 ‘구별짓기’의 구체적인 진단의 모습이 내 안에 확실히 내재한 것 같아서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 두려움의 이유인즉, 이런 나의 모습이 나의 전 생애의 평균적인 모습이 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그래서 보다 긍정적인 쁘띠 부르주아지의 모습을 위한 차이와 희망을 도출해내야 했다.우선, ‘지금 이 때를 참으면 언젠가 입을 수, 먹을 수, 누릴 수 있어.‘라는 식의 형식적이고 금욕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차이를 둘 수 있다. 즉, 돈을 쓰든, 모조한 문화 생활을 하든지 간에 즐길 것은 그 때 그 때 나의 상황에 맞게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단지, 상류층의 문화를 모방한 모조품의 상품이나 문화를 사는 것만이 아니라 실제로 상황이 될 경우에는 실제를 가지기도 한다는 면도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구두쇠가 맛있는 생선을 천장에 닳아두고 보면서 맨밥을 먹으면, 결국 생선은 썩고 만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쓸 것이 주어졌을 때 모으기만 하고, 쓸 줄 몰라서 가치 없는 것으로 두기 보다는 상황에 맞게 사용할 줄 아는 센스가 더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또, 누군가에 의하거나, 특별히 나의 자식을 통하여 내 꿈을 실현할 날을 고대하며, 나의 현재와 시간을 갉아먹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전혀 없다. 이러한 특성은 쇠퇴하는 부르주아지나 실행부르주아지의 모습과는 다른 부분인데, 여기에서 나의 계급에 관해 보다 세밀한 진단이 나오게 된다. 바로 ‘신흥’ 쁘띠 부르주아지라는 개념이다. 신흥 쁘띠 부르주아지는 자기들의 이상이 실현된 모습을 발견하고, 즐기지 않는 것을 하나의 실패나 자존심에 대한 위협으로 만드는 의무감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젊은이들이 유식한 듯 외치곤 하는 'carpe diem'(현재를 즐겨라)는 표현이 있다. 구식의 쁘띠 부르주아지는 삶에서의 고통과 기쁨의 현재 중 고통을 인내하는 것으로서 현재를 참는 즐김에는 익숙한 사람들일지 모르지만, 삶에서의 진정한 기쁨과 자연적인 쾌락을 즐기는 것에는 서투른 것 같다. 이러한 점에서도 신흥 쁘띠 부르주아지는 그 차이를 더욱 극명하게 한다.그렇다고 구세대적 쁘띠 부르주아지아의 특성이 부정적 의미로서의 구식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실 그들도 처음에는 새로운 특성의 계층이었음은 분명하고, 세월이 흐르면서 정립된 나름대로의 전통적 규범과 도덕성에 대한 프라이드는 문란한 사회에 좋은 예와 기준들로써 본받을만한 가치가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자녀들에 대한 극진한 사랑과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교육적 헌신의 면모를 들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나의 현재 모습을 통한 계급적 진단과 더불어 보다 바람직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검토하고 재정립해 보아야 할 모습은 무엇일까.계급적으로 바람직한 삶에 대한 고민상류 계층과의 차이, 쁘띠 부르주아지와의 세분화된 구별에서 나의 계급적 아비투스를 진단해 보았지만, 실상 부르드외의 말처럼 딱히 구분되는 면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닌 것같다. 앞에서는 내가 속한다고 생각지도 않았던 프롤레타리아의 특성이 그 가운데 존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쁘띠 부르주아지는 부르주아지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프롤레타리아의 모습에서 출발한 것으로 볼 수 있음이다.)현대의 많은 사람들이 가장 어려워하고 중요시하는 문제는 바로 지나친 개인화로 인한 이기주의, 혹은 구속성과 결집력 없는 단체의 부재, 그로인한 소속감의 욕구 불 충족을 들 수 있다. 즉, 인간적인 관계의 단절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면서도, 그리워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인간적인 관계 즉, 부르주아지들이 중시하는 사회적 자본에 대한 중요성도 매우 커져가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속할, 함께 할, 그리고 후에 돌아가거나 이용할만한 사람에 의한 네트워크, 그로 인한 연대성, 이점을 원하고 있다. 비빌만한 언덕을 말이다. 이러한 면은 실상 자신들의 모습을 그대로 노출하고 마음껏 ‘함께’ 향유하는 프롤레타리아의 연대성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구세대의 쁘띠 부르주아지의 생활 속 엄격주의는 프롤레타리아의 문화에서 나타나는 성역할의 고정 관념, 그들만의 언어 사용 등과 같은 고정적인 문화적 특성과 유사하게 대치되기도 한다. 하지만 완전히 동일한 특성이 아니라는 견지에서 부르드외의 구별짓기에 모순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쁘띠 부르주아지라고 계급적 진단을 한 나 또한 친구들과의 연대를 중시하는 편이다. 하지만 깊은 내부에서는 내가 우선시 되는 경우가 많고, (나는 이것을 아름다운 개인주의라고 표현하곤 한다.) 프롤레타리아 사이에서 튀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동일화하려는 노력은, 적어도 내 주변의 인간 관계에서는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또, 쁘띠 부르주아지의 특성으로 든 상승을 위한 관계의 단절도 현재에서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본다면 각 계층의 모습은 그 각기의 상황에 맞게 계급과 특성이 매치되면서 계급 간에 대치를 이룬 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된다.내 안에는 여러 가지 모습이 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다‘는 노래의 비유를 들어, 실제로 내 안에는 모든 계급적 특성을 가지고 있고, 가질 수 있다는 약간은 절충적인 입장을 취하고 싶다. 단지 경제적인 뒷받침의 차이일 뿐이라고 말하고 싶다. 쁘띠 부르주아지라고 상류 계층이 하는 것을 못하라는 법은 없다. 부르드외가 구분하며 나타내고자 했던 바는 그들의 욕구와 필요가 자체적인 내부로부터의 순수한 특성을 발현해주는 것이 아닌 모방적인 행태라는 것, 그리고 그에 따른 특성 없음과 사실 왜곡의 부분에 문제가 있지 않을까하는 것을 짚어주려 했던 면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로 하여금 그에 따른 회의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깊게 생각해볼만한 주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