킴벨 미술관은 루이스 칸의 작품으로 일생을 건축에 대한 지극한 애정과 열정적인 탐구활동 및 교육에 몸바쳐 왔던 루이스 칸은 당시의 메마른 건축에 영감적 가치를 도입한 건축가였다.생애의 후반기에 세인의 주목을 받는 좋은 작품들을 집중적으로 남겼던 그의 건축은 자신의 건축사상을 그대로 입증하는 증거물들이었으며 모든 위대한 건축물들과 마찬가지로 시간을 초월한 아름다움은 지닌 작품들이었다. 내면의 사고의 깊이를 더한 건축활동을 한 그는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5년간 건축을 공부하였고 Paul Cret에게 영향을 받아 건축의 형태에는 역사를 통해 계속 되어온 내재적 원리가 있음과 새로운 형태는 과거의 것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고, 후의 작품활동을 통해서 이 내재적 원리를 발견하기 위한 탐구를 계속 했다. 공황기 였던 30년대에는 특히 공공 주택의 일을 많이 하였고, 이때 건축적 이상주의와 현실 사이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다.건축의 본질과 형태, 창작과정 등에 관하여 특히 관심을 갖고 탐구해 가는 과정에서 칸은 자신의 건축 철학을 핵심적으로 대표하는 개념들을 어휘들로 즐겨 표현하곤 했는데, 이 어휘들 중 가장 중심적이며 칸의 작품에서 뚜렷이 엿볼수 있는 것들은"Form-Order-Design", "Servant and Served Space", "Silence and Light"등 이었다.{{{킴벨 미술관은 루이스 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이러한 건축관을 잘 표현하고 있다. 킴벨 미술관은 기단상의 지상층 위에 30m×6.5m의 볼트를 길이 방향으로 3열로 잇고, 박공측은 6개의 사이클로이드 곡선이 이어져있다. 서측은 중앙으로 끌려 들어간 정면입구를 전면유리, 양 옆의 포치로 하여, 공원에 개방적으로 연속시키고 있는 반면 외관은 전체적으로 벽으로 막혀 있다. 미술관을 창고로 오인할 것 같은 공형이 수평으로 달리는데 반해 내부는 그것과 대비적으로 은은한 밝기에 충만해 있다. 볼트 중앙의 톱라이트는 그 곡면을 매끄럽게 부상시키고, 주광은 점점 늘어서 감 깊은 밝음과 같은 극히 친근한 초월성으로 볼 수 있다.서반트 스페이스(sevant space)와 서브드 스페이스(served space)가 음, 양의 상징성을 4차원적으로 번영하여 인간적 스케일을 이루고 있고, 킴벨 미술관은 일련의 둥근볼트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볼트는 옥외 중정이 띄엄띄엄 배치된 길다란 내부 갤러리를 형성하고 있다. 내부에서 외부공간으로의 흐름은 초점을 바깥쪽으로 확장시키며, 그에 따라 관람객들은 일반적인 박물관에서처럼 반복되어 나타나는 끝없는 듯한 복도로 인하여 지루한 경험을 하지 않게 한다.{{{{{루이스 칸은 시시각각으로 질적 변화를 수반하는 자연광만이 건물에 생명력을 줄 수 있는 진정한 빛이므로 생명력이 있는 자연광을 받지 못하는 공간은 진정한 의미의 공간이 아니다. 라고 주장하였다. 칸의 대부분의 작품이 이러한 그의 건축관을 잘 표현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킴벨 미술관은 빛에 관한 칸의 rosuadll 가장 잘 표현된 작품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미국 남부의 텍사스 주 포트워스에 위치한 이 미술관은 지름 6m, 길이 30m의 얇은 박판 콘크리트로 제작된 반원통형 볼트를 구조의 기본 단위로 하여 이를 6열로 병렬 배치한 단순한 형태를 갖고 있다. 전체 건물의 길이는 90m이다. 볼트를 여섯 줄로 병렬 배치하여 구성한 공간은 볼트의 접속 방법과 세 곳에 마련된 중정에 의해 분절된 여러 길이의 공간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다른 성격을 지닌 공간들로 조성된다.대부분의 미술관은 태양광 속의 자외선이 그림에 해를 끼치기 때문에 인공조명을 사용한다. 그러나 칸은 자신의 건축 철학대로 자연광을 이 미술관에 도입한다. 이 건물은 볼트의 길이 방향 접속부위의 채광, 중정을 통한 빛의 질적 변화의 효과 등과 더불어 볼트 상부의 틈을 통해 유입되는 빛이 반사판과 콘크리트 천장의 볼트 면에 2차, 3차로 반사, 확산되어 연출하는 빛의 효과로 인해 빛의 마술적 특성이 가장 잘 이용된 작품이다. 이 건물은 고전적인 단아함과 현대적인 느낌을 잘 조화시킨 건의해서 치수가 결정되며 인식된다. 일반적인 구조는 장방형이며, 건축은 3차원적인 크로스 워드 (Cross Word)와 같이 어느 부분은 비어 있고 어느 부분은 꽉차있어 이 양자간에는 명확한 선이 나타나게 된다.셋째, 관찰자와 매우 특수한 관계를 갖는 것으로 관찰자와 공간의 어느 한 쪽은 이동한다는 유동적 공간개념이다.{{{이상과 같은 공간개념과 형태구성원리을 기초로 하여 공간의 볼륨이 구성되는데, 공간의 볼륨을 구성항는 요소로 꼬르뷔지에는 벽을 선택한다. "공간은 빛을 받아 자신을 드러내는 벽에 의해서 연출되는 볼륨으로 형상화되며, 따라서 벽은 내부공간의 형태를 결정짓는 주된 요소"라고 했다.이처럼 벽이 내부공간의 볼륨을 결정하게 되면서 평면이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는데 그는 "평면이 매스와 표면의 구성에 질서를 부여 하는 생성자 Generator 로서의 역할을 함으로써 건물은 매스와 공간의 비례가 적절하게 조화된 감감과 더불어 만족감을 주게 된다"고 하였다.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비례라는 형태적 어휘가 공간에도 적용이 된다는 점이다. 공간의 3차원적 볼륨의 비례는 2차원적인 평면의 기하학적 원리에 의해 도출되는데 이러한 점은 꼬르뷔지에의 여러 작품에 일관된 흐름으로 유지되고 있다. 특히 꼬르뷔지에의 비례가 잡힌 매스와 공간을 규정해 주는 평면의 지배적 성격과 역할이 계속해서 발전하는 과정은 초기 주택에서 명확히 발견할 수 있다. "집은 살기 위한 기계"하고 하는 그의 유명한 명제는 자칫 꼬르뷔지에를 기능주의자로 규정짓는 오류를 범하게도 하지만, 실제로는 각 방들의 기본적인 배치와 그 규모가 기능상의 요구에 의해 결정되는 한편 그 이후의 단계에서는 벽의 처리에 의해 다양한 공간을 연출하게 된다는 점에서 건축의 가능한 한 모든 요소르 함축적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프랑스의 롱상교회는 이러한 꼬르뷔지에의 건축관이 잘 담겨있는 작품으로 그의 건축이념인 인간·자연·우주를 담아낸 종교 건축물이라고 볼 수 있다.교회의 외벽은 희고 직선이나 대칭구징하는 듯한 외벽 처리에서뿐만 아니라 창은 많지 않은 데다 천장은 높고 바닥엔 의자마저 적어 동굴처럼 신비롭게 느껴지는 내부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내부는 정말 환희의 공간 같다.{{{종교건축물 답게 장엄함이 느껴지고 성스러움과 신비함을 디자인과 외벽을 통한 조명으로 잘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남쪽 벽은 16cm두께의 보강 콘크리트 삼각형 수직 프레임으로 기관부 폭 3.7m에서 1.4-1.5m로 변한다. 이 육중한 벽면은 경사지어 올라가며 외부공간(세속적 공간)과 내부공간(신성한 공간)을 구분짓는 경계의 의미가 강조되어 있다.그런데 이 벽은 시멘트건으로 금속 메쉬위에 4cm 두께로 콘크리트를 뿌려 만들었고 다양한 형태로 뚫린 개구부로 남측의 일광이 채광되어 내부공간의 '시각적 음향'을 연출한다.벽과 지붕사이는 10cm의 틈이 있어 외부의 빛이 지붕 밑으로 흐르며 지붕이 구조체로부터 떠있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외부의 지붕은 좁혀진 벽에 의하여 돌출폭이 커지고 남측 탑과 함께 진입 공간을 암시하며, 이는 동쪽으로 만곡된 벽과 함께 높게 수렴되어 수직벽과 지붕이 거의 만나게 된다. 동측 벽은 남측 벽과 달리 순수한 조적벽으로 이루어져 있고 매우 작은 구멍을 통하여제단에 빛을 준다. 대신 남측 벽의 만곡된 연장사이의 벽 사이에 출입문과 상부에 놓인 상자안의 원색이 벽면에 부드럽게 확산된다. 역시 벽상부에 10cm의 틈이 나있어 지붕이 부유하는 듯이 보인다. 한편 북측의 개구부로부터 들어온 빛은 간접적으로 수용된다. 외부의 돌출된 지붕은 남쪽으로 상승하여 방향감을 가지며 제단 바닥과 함께 마치 극장이 무대 아치와 비슷한 공간의 막을 형성한다. 이 지붕과 만곡된 벽, 그리고 간격을 가진 남측 벽면에 드리워져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그림자는 외부 형태를 감지하게 하며 설교단과 외부 기둥을 둘러싼 하얀 둥근 벽체와 제대, 의자 등의 그림자의 교직과 함께 빛과 그림자의 유희를 느끼게 한다.서측 벽은 부드럽게 흐르는 곡선의 얇은 벽으로 남측, 북측과 다른 성격을 가진다. 않으며, 벽면이 주 형태 요소이다. 다른 쪽 벽과 달리 주 내부 기능이 관련된 북측 벽은 쌍둥이 탑이 서로 등을 대고 동·서로 향하고 있으며 그 사이의 요부로 부출입구가 자리한다. 탑들의 중심축은 주축에 대해 남측벽측과 각도는 수치적으로 약간 다르나 감각적으로 매우 대칭이다. 동쪽으로 돌출된 지붕의 평활한 측면을 제외하고 대부분 흰색 마감이며 이곳에 노출 콘크리트 계단이 자리잡아 강한 인상을 준다.이 외부는 늘 균일한 그림자 속에 있지만 이 계단은 오전에 햇빛을 받으며 제단 부근에서 약간 틀어진 벽체에도 빛이 조용히 빛난다.결론적으로 킴벨 미술관과 롱상교회는 자연채광을 잘 활용한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형태는 삼차원의 물체가 지닌 모양, 부피, 구조등을 말하는데 공간과의 관계가 매우 중요하다. 건축물에서는 외적인 모양이 형태가 되고 실내가 공간을 이루게 되는데 대부분의 건축물은 외형과 실내가 비슷한 구조를 이루게 된다. 건축물은 인체치수를 기준으로 목적에 따라 디자인하는 것이 중요하며 같은 형태라도 배치에 따라 느낌이 전혀 다르다.실내를 구성하는 형태는 직사각형이나 직육면체, 삼각형이나 피라미드 형태, 원형이나 구(球)의 형태로 구분지을 수 있다.사각형직사각형이나 직육면체는 실내공간에서 가장 많이 이용되는데 디자인이 비교적 쉽고 기계제작이나 목공작업이 용이하며 벽돌이나 블록 등 규격화된 재료의 이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짜맞추기가 쉽고, 90°를 유지하기 때문에 견고하며,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주고, 반복 베치하는 경우에 통일감과 리듬감을 준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직사각형이나 직육면체는 딱딱하고 지루한 느낌을 줄 수도 있기 때문에 크기, 색채, 장식, 배치등을 이용하여 변화를 주는 것이 좋다.{{{사각형을 이용한 건축물 - 대부분의 현대식 건축물은 사각형을 모티브로 하는 경우가 많다삼각형삼각형이나 피라미드 형태는 사각형이 많이 이용되고 있는 실내에 변화와 생동감을 주며 동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 이러한 형태는 지붕이나 경사천장, 창문 등의 거난다.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를 읽고교수님께 시오노 나나미의 얘기를 듣고 학교 도서관에서 로마인 이야기를 빌려보았다. 교수님 말씀도 있었지만 로마인 이야기가 워낙 유명한 작품인지라 언젠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나는 그날로 로마인 이야기를 보기로 했다. 물론 1권부터 봐야 하겠지만 도서관에 책이 없어 2권 한니발 전쟁 부터 읽게 되었다. 기존의 역사서와는 달리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는 나에게 너무나도 참신하게 다가왔다. 삼국지를 접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 그보다 더 참신했다. 나관중의 삼국지연의가 기존 역사에 소설적인 재미를 가미해 진행형의 역사전개를 기록하였다면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는 그것 뿐만 아니라 왜 역사가 그렇게 흘러갔는지, 그 때의 사람들은 어떠한 연유로 그러한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 그러한 행동들이 역사에 미친 영향은 어떤 것인지, 너무나도 자세히 기술되어 있었다. 게다가 독자들이 이해하기 쉬운 설명과 흥미를 유발시키는 전개로 단숨에 3권까지 읽게 만들었다. 그 두권의 중심인물인 한니발, 스키피오, 그리고 로마의 상징인 로마가도에 대한 것은 아직까지 마음 속 깊이 남아있다.이렇게 로마인 이야기에 매료된 나는 전권을 읽으려 했지만 4권이 대출중이었던 상황과 중간고사, 리포트 등이 겹쳐 로마인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루고 시오노 나나미의 다른 책을 읽어보기로 했다. 로마와 관련된 무수한 서적들이 있었지만 당시 수업시간에 마키아벨리에 대해 배운 것과 독특한 제목으로 인해 왜 마키아벨리를 친구라 했을까? 라는 호기심을 가지며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 를 읽게 되었다.나의 친구 마키아벨리는 프롤로그와 1, 2, 3부의 총 4개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흔히 3개의 부분으로 나누겠지만 마키아벨리로부터 500년이 지난 지금의 피렌체를 바탕으로 마키아벨리의 시대를 묘사하며 책을 읽는데 있어 어디에 중점을 두어야 하는지를 알려주기에 이 또한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고, 작가에게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작가의 시선으로 이 책에 몰입하게 해준다. 그래서 나는 프롤로그도 이 책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프롤로그를 읽고 아무런 감흥이 없다면 정작 중요한 본문을 읽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테니 말이다.제 1부 마키아벨리는 무엇을 보았는가 에서는 마키아벨리가 관료가 되기 전까지의 피렌체를 설명하고 있다.당시는 르네상스 시대로 피렌체는 메디치가를 중심으로 하는 부흥기였다. 이 부흥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메디치가의 로렌초가 20살이 되던 해인 1469년에 마키아벨리가 태어났는데, 이는 동시대인이라 봐도 지장이 없을 것이다.마키아벨리가 출생한 지 얼마지나지 않아 메디치가는 몰락을 하게 되고 수도사 사보나롤라가 등장했다 사라지는 과정 중에 피렌체 역시 과거의 명성을 뒤로한 채 몰락하게 되는데, 마키아벨리는 관려가 되기 전에 이러한 과정을 눈으로 보고 체험하며 자라게 된다. 이는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쓰게 되는 밑바탕이 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얘기했던 시급한 상황이란 바로 이러한 피렌체를 두고 얘기한 것임이 틀림없다.제 2부 마키아벨리는 무엇을 보았는가 에서는 마키아벨리의 관료생활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마키아벨리는 제 2서기관의 직책을 맡고 있었는데 대통령 비서관의 임무도 겸직을 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외교의 업무도 담당하면서 마키아벨리는 피렌체 정보의 중심에 위치하게 되었다. 반면 권력은 전혀 가지고 있지 못했는데, 피렌체인들은 그의 능력은 인정하면서도 권력의 중심에 위치하기 위해서는 출신을 중시하지 않았나 싶다. 마키아벨리가 관료일을 할 때의 피렌체는 국력도 약할뿐더러 이탈리아 내에서의 권위도 바닥에 떨어진 상태였는데, 이러한 정부의 뒤치다꺼리를 마키아벨리가 모두 떠맡은 듯 싶다.이러한 상황속에서 정부의 우유부단함과 무력함에 실망하는 것은 당연하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경험과 정보의 습득을 통해 당시 피렌체를 가장 잘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며 그것을 바탕으로 군주론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그렇지만 많은 사상가들이 명성에 걸맞는 지위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키아벨리의 지위가 그렇게 보잘 것 없었다는 점은 의외였다. 그정도 되는 사상가라면 당시에도 그에 걸맞는 명성과 지위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위적 측면에서 본다면 그가 군주론을 쓰게 된 직접적인 이유는 관직으로의 복귀를 위한 지위상승의 욕구가 상당히 관여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마키아벨리도 그 시대를 살아가는 시민으로써 공직생활을 통한 경제적 안락함에 안위하고 싶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아마도 그의 공직생활이 15년으로 끝나지 않고 평생 지속되었다면 그의 훌륭한 저서인 군주론, 정략론, 전략론 등은 태어나지 못했을 일인지도 모른다.어찌되었든 바쁜 공직생활을 하던 중 마키아벨리는 당시 강한 세력을 지니고 있던 체사레 보르자와 교섭을 위해 만나게 되는데, 체사레 보르자를 군주론의 모델로 삼을 만큼 상당한 영향을 받게 된다. 영향을 받는다기 보다는 매료된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저자인 시오노 나나미도 매료되었음은 물론이고 나조차도 체사레 보르자에 관해 언급된 짧막한 부분만을 읽고 매료되었다. 삼국지를 좋아하는, 그 중에서도 조조라는 인물을 좋아하는 나는 체사레 보르자에게서 조조를 보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마키아벨리가 체사레 보르자에게 매료된 이유에 대해 시오노 나나미는 피렌체의 우유부단함에 질려서라고 설명학 있는데, 그 이유 역시 중요하겠지만 내 생각에 마키아벨리의 개인적 품성이나 사상 또한 그가 체사레 보르자에게 매료되는 이유인 것 같다. 자세하게 집어서 설명하지는 못하겠지만, 내가 조조를 좋아하고 유비를 탐탁치 못하게 생각하는 것과 같은 이유가 아닌가 싶다. 로렌초 메디치가 군주론의 주인공이 되지 못하고 체사레 보르자가 주인공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이후에도 2부에서는 면직이 될 때까지의 마키아벨리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이는 군주론이 탄생을 있게 만든 경험의 축적이라 할 수 있다. 이로 미루어 그의 관료생활은, 특히 체사레 보르자와의 인연은 매우 중요함에 틀림없다.사람이 어떠한 생각, 사상을 갖게 되는대는 환경의 영향을 받고 경험을 통해 정립되게 되는데, 시오노 나나미는 환경과 경험의 부분을 1, 2부에서 다루어 주고 그를 바탕으로한 마키아벨리의 사상을 3부에서 마키아벨리는 무엇을 생각하였는가 라는 제목으로 다루게 된다.관료를 그만두게 된 마키아벨리로서는 생각하는 것과 글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게 된다. 그리하여 마키아벨리로서는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때의 그의 2대 저작은 군주론과 정략론인데 이것은 당시의 이탈리아인들이 몸소 느끼며 크게 관심을 가졌던 테마를 찌른 작품으로서 그의 사상이 매우 잘 나타나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전략론도 마찬가지이다.
{풀메탈자켓 (Full Metal Jacket, 1987)줄거리조커와 로렌스, 카우보이 등은 베트남 전에 참전하기 위해 입대한 신병들이다. 신병훈련소에서 해병대 교육을 받은 후 베트남으로 파견될 인물들로 전쟁이라는 것에 대한 개념이 없는 이들은 전투 베테랑인 하트만 상사의 교육하에 철두철미한 해병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훈련을 받는다. 뚱뚱하고 약간은 지능이 모자라는 로렌스는 신병 교육대 최고의 고문관.이들이 입소한 첫날부터 하트만 상사는 이들을 혹독하게 훈련시킨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무기는 해병과 그의 총이다. 라는 구호 아래 인간적인 모습을 잊고 단지 살상 무기가 되기 위해 고된 훈련을 겪는 이들은 로렌스로 인해 자신들이 얼차려를 받게 되는 사실이 싫다. 주인공 조커는 언제나 로렌스의 곁에서 그를 도와 훈련을 받는다.하지만 그로 인해 동기들이 수시로 기합을 받게 되자, 동기들은 그를 괴롭히기 시작하고, 복창 한번 제대로 못하던 로렌스는 하트만의 다그침에 정신을 차린 듯이 1급 사수로 변신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로렌스는 자신의 총과 대화를 나누고, 조커와 카우보이 등 같은 훈련생들은 그가 어딘지 모르게 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느낀다. 8주간의 훈련이 거의 끝나갈 무렵,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조커는 마지막 불침번 근무를 서게 된다. 윗 침대에서 자고 있어야 할 로렌스가 사라진 것을 알게 된 조커는 화장실에서 그를 찾아낸다. 로렌스는 실탄이 장전된 소총을 들고 이미 제정신이 아닌 채로 구호를 복창한다. 소란을 들은 하트만 상사는 로렌스에게 인격 모독적인 말을 던지며 총을 반납할 것을 요구하지만, 로렌스는 하트만의 가슴에 총구를 겨누어 그를 살해한다. 그리고 곧 자신의 입에 총구를 물고 자살한다.시간이 흘러 모두 자대로 배치를 받는다. 입대전 신문반 활동을 했던 조커는 종군기자로 스타즈 앤 스트라이프 에 배치되고, 다들 전장을 찾아 흩어진다. 후방인 다낭에서 취재 활동을 하던 조커는 전방에 나가보고 싶어하는 라프터만 일병과 함께 격전지인 훼이로 출동한군인으로서 적을 섬멸하고 승리를 획득해야 한다는 한 가 지 목적을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그러므로 집단성을 특징으로 한 군조직 구성원들은 유기적 일체감을 공유하며 스스로 그 외의 집단과는 다른 성격의 집단으로 의식하게 된다. 이러한 집단의식은 내무생활을 통한 장기기간의 규율습득과 훈련과정에서 공통된 유대를 바탕으로 형성되며 통일된 가치체계를 형성하 게 하고 강한 단결심을 유발시킨다. 기초훈련을 통해 개인이 몇 소대, 몇 분대 내의 구성원의 한 사람이 라는 더 큰 의미를 갖게 되며, 이때부터 개인의 가치보다도 집단규범과 집단의 가치에 강제된 동조가 이 루어진다.이러한 집단 생활과 전쟁의 상황 속에서 보통의 우정을 뛰어넘는 특별한 전우애가 생긴다. 군 대에서는 일부러 군 조직 내에서 특별히 친한 3~4명의 소집단을 만드는데 이는 힘든 상황을 더 잘 이 겨낼 수 있도록 하고 군대 조직 내에 더 잘 적응할 수 있게 한다. 실제로 영화에서도 이지중대 내에서도 특별히 친한 사람들이 있으며 그들끼리 고민을 나누고 공습이 끝난 후에는 서로의 생사를 확인하는 모 습이 보인다.{이론적용1. 등장인물 소개 분석 : 개인차의 이해인물들의 성격이나 능력, 태도, 가치관등의 분석과 그로 인해 같은 상황에서 어떠한 차이를 보이는가를 알아봄1) 조커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관찰자의 역할도 담당한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한 것이라면 위에서의 압력에도 꿋꿋하게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는, 자의식이 강한 성격이다.훈련소에서는 분대장으로서 군대라는 조직에 적응을 잘 하지 못하는 로렌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고 자 기가 알고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세심히 가르쳐주며 부대생활에 적응해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 러한 점에서 조커는 자신을 따르는 분대원인 로렌스에게 할 수 있다는 동기를 유발시키며 남들보다 뒤 처지던 지각 능력, 행위 등을 어느 훈련병과 비교해도 뒤쳐지지 않게 해주었다는 것을 보면 현대 사회 에 비춰보면 관리자의 세 가지 능력 중에서 효과적으로 리더십을 발휘하고 종업원들의 동기를 유발시키 며 다고 생각뛰어난 살인병기를 길러내는 것에 가장 커다란 가치를 부여함- 성격{구 분조커로렌스하트만5대 성격유형- 성실성- 정서적 안정성- 경험에 대한 개방성- 친화성- 외향성성실하고 믿음직함여유롭고 차분함유연하고 높은 호기심동정심이 많고 잘 보살핌사교적이며 활발절제력 부족정서적 불안비개방적조커에게만 친화적내향적강한 자기 절제차분하지 못함보수적독불장군활동적이고 확신적A/B형B겉보기에는 B형실질적으로 A형A통제위치내부통제자외부통제자외부통제자※ 로렌스의 경우 관찰자의 입장에서 보여질때는 B형이라고 볼 수 있으나, 섣부른 판단과 인식과 빠른 결 심 등으로 자살로 치닫게 되는 과정을 통해 A형의 인간임을 알 수 있다.- 지각 (귀인이론) : 귀인이론의 일반모델 + 켈리의 귀인이론{선행요인귀인결과로렌스하트만의 모욕 (외부요인)나약한 정신 (내부요인)믿었던 동료의 따돌림자살조커동료의 따돌림에 참여 (내부요인)로렌스의 자살 목격 (외부요인)인간의 이중성에 대한 고찰정의로운 마음가짐고통에서 힘겨워하는 배트공을 죽임으로써 고통에서 해방시켜 줌하트만자신의 태도 (내부요인)로렌스에 대한 동료들의 따돌림 (외부요인)로렌스의 심경변화피살※ 인간의 이중성 이란 조커가 로렌스의 자살을 겪게 되면서 바뀌는 태도나 가치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로 영화에서는 헬멧에는 킬러 라고 쓰고, 가슴에는 평화의 배지 를 다는 모습으로 나타나며, 사단장 의 질문에 대답하는 장면으로 표현되는데, 간략히 말해 겉으로는 웃으면서 속으로는 욕을 할 수 있는 인간내면을 꿰뚫어보고 로렌스를 자살로 몰고간 것에 대한 자기반성을 나타내어 크게는 겉으로는 베트 남의 자유를 위해 싸운다는 대의를 내세우고 자신의 이익 내지는 살육을 일삼는 미국을 비판하는 영화 의 주제와도 일맥상통한다.※ 켈리의 귀인이론에 따르면 내부요인이란 개인의 능력이나 기술 등 개인내적 요인을 말하며 외부요인이 란 업무의 특성이나 상급자의 특성 등 개인외적, 환경적 요인을 말하는데 합의성, 특이성, 일관성의 세 가지 차원에서 귀인관계를 형성한다고 보았다.행동이나 군대 생활 패턴에 따라 자연적으로 하게 되는 행동(처음에는 의식적인 행동이었으나, 습관화 되면서 반사적인 행동으로 변함), 전쟁터에서 총소리에 놀라 총을 놓치거나, 바로 응전하는 것은 반사적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하트만 상사에게 구타나 모욕을 듣지 않기 위해, 훌륭한 군인이 되고자 하는 행동, 로렌스의 경우 동료에게 따돌림 당하지 않기 위해 훈련을 잘 받고자 하는 행동, 조커의 경우 집단에서 이탈당하지 않기 위해 로렌스 구타의 동참하는 행동 등은 조작적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d. 인지론인지론에 따르면 학습자에게 문제의 본질을 부각시키고 효과적으로 탐색할 수 있도록 학습과제를 구 조화하는 것이 중요하며, 사람의 인지능력에 따라 학습성과는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인지능력에 맞는 학습을 할 때만이 학습성과는 보다 효과적으로 증대될 수 있다고 한다. 군대라는 조직에서는 항상 문제의 본질(전쟁의 목적과 임무의 중요성 등)을 부각시키고, 그 결과는 개개인의 인지능력의 차이에 따라 다른 성과로 나타나게 되는데,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로 전(훈련소),후반(전쟁터)을 통틀 어 임무와 역할의 중요성 등을 수시로 부각시키며, 조커와 로렌스의 차이(혹은 다른 동료와의 차이) 처럼 상황을 인지하는 차이에 따라(혹은 로렌스가 인지하는 방식에 따라 - 자신이 놓인 상황을 초반 다소 가볍게 인지하고 있다가 동료들의 구타를 계기로 상황을 다르게 인지(식)하게 됨) 그 결과가 얼마나 다르게 나타나는지를 보여준다.e. 사회적 학습이론사회적 학습이론에 따르면 학습은 대리학습, 자기통제, 자기효능감 등의 상호작용에 의해 이루어지 는데, 조커가 입대직후 하트만에게 웃으면서 말대꾸하다가 구타를 당하는 것을 보고, 로렌스 역시 군대라는 조직에서, 특히 상급자 앞에서 웃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학습하게 된다. 또한 다 른 훈련병들도 타인의 행동과 그 결과를 관찰함으로써 학습을 하게 된다. 그리고 하트만 상사가 조 커로 하여금 로렌스를 가르치도록 하는 과정에서 조커는 로렌스에게 여러 가지 한 통제의 예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는데 특히 군대라는 조직의 특성상 상급자는 하급자에게 벌을 가장 많이 사용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벌은 바람직하지 않은 구체적 행동에 대하여, 그러한 행동이 있고 난 직후에, 행동의 부정적 결과에 상응하는 강도로, 상대방의 자존심을 손상시키지 않는, 상대방이 납득할 수 있는 범위에서 행해져야 한다. 하트만 상사는 비록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가장 사용하기 쉬운 방법이지만 너무 과한 벌을 사용함으로써 로렌스에게 원한을 사게 되고 결국 죽게 된다. 즉, 벌의 부정적 기능(반감, 반발심 등)을 최소화하지 못하고 효과적으로 사용하지 못하면 벌이라는 강화법칙은 사용하지 않는 것이 조직을 위해 더 바람직할 수도 있다.3. 훈련소 전쟁터라는 시간의 경과 : 집단발달 단계※ 입소, 훈련소, 전쟁터(후방, 전방)라는 시간의 경과와 상황변화를 집단발달 단계에 맞추어 설명하고, 원인을 살펴봄1) 집단과 팀a. 집단미 해병대의 훈련소 집단으로 훈련소 조교가 리더이며 훈련병들을 강압적 권력을 통해 통제하고 있 다. 명령집단과 유사함, 목표는 훈련과정을 수료하여 미 해병이 되는 것이다. 훈련병들끼리, 조교와 훈련병이 서로 갈등과 협조 속에서 서로 상호작용을 함. 훈련병들이 훈련소에 입대한 이유는 미 해 병대가 가지고 있는 집단에 대한 매력 때문이다. 훈련병들은 미 해병이 가지고 있는 명예로운 구성 원 자격을 갖기 위해 훈련소에 입대하여 힘든 훈련과정을 겪는 것이다.b. 팀훈련소 과정을 마치고 베트남전에 참전한 병사들은 각각 기자부와 전투병 팀에서 각각의 역할을 수 행 함으로 팀단위에서의 가장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도록 함.팀의 유형으로 살펴보면 조커의 경우 기자부에서 기능팀으로써 팀의 역할을 수행하다 기자부 병사들 이 전투임무에 투입되어 전투병들과 임무수행.(테스크포스)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 유형은 사슬형이 다. 훈련소에서는 하트만에게 권한이 집중되어 있으며 위계적이다. 하트만은 훈련병들에게 각각의 임무를 직접적, 공식적으로 제시하였으며 그에 맞는 피초래함.
국가주의를 넘어서/ 일본지식인과 한국 을 읽고교과명 : 일본정치론담 당 : 한상일 교수님학 과 : 정치외교학과학 번 : 9991098이 름 : 윤병준들어가며코모리 요우이치 외 여러명이 저술한 와 한상일 교수님의 이라는 책을 읽었다. 일단 이 두 권의 책을 읽은 느낌에 대하여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상일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일본은 과거사에 대한 비판적 자기성찰에서부터 시작하지 못한 전후사가 왜곡되어 나타났고, 과거사에 대한 책임과 사과문제를 명확하게 처리하지 않고서는 일본의 왜곡된 전후사는 바로잡히지도 않을 뿐더러, 현재와 미래의 평화에 대한 일본의 기여와 이웃과의 연대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고, 내가 몸소 느끼기에는 현재의 일본을 볼 때에 그들의 의식이 변화하리라고 기대한다는 것은 거의 무리에 가깝다는 것이다.먼저 책을 이해하고, 현재의 일본의 실권자들을 이해하려면, 자유주의 사관 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쉽게 말하면, 극우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자유주의 사관 과 일본인들의 한국관 을 연결하여 보면 현재 일본인들의 사고를 좀 더 쉽게 이해할 수가 있는데, 에서는 한국관 을 설명하기 위해 원형 과 변형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원형 이란 현재도 일본인들의 심층에 자리잡고 있는 한국관 으로써 일본의 국부(國父)처럼 대접받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메이지(明治) 일본의 국가정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대동합방론 의 타루이 도키치(樽井吉藤),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의 사상적 지도자로서 '민본주의'의 틀과 이론을 제시했던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 한국 민족과 예술을 존경하고 사랑했던 일본 지식인사회의 '이단'이고 희귀한 존재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등 4인의 한국관 을 '원형'으로 구분하여 분석하였는데, 앞의 3명과 뒤의 야나기 무네요시는 다른 원형을 제시한다. 그러나 한일관계 개선의 여지에 발목을 잡는 것은 앞의 3명의 한국관 인 식민사관이다. 여기에서 변형된 것이 변형 으로써의 한국관 인데, 그 근거로써 세카이(世界)라는 잡지를을 알 수 있다. 두 권의 책은 공통되는 부분이 매우 많으며, 이 한국인의 입장에서 일본의 부정적인 한국관 에 대한 비판을 꾀하고 있다면, 는 일본인의 입장에서 일본의 부정적인 한국관 을 비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두 권의 책을 읽고 느낀 것은, 개인적으로는 일본을 좋아해도, 국민으로써는 도저히 일본을 좋아할 수가 없으며, 일본의 그릇된 시각은 과거청산의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 것이다.자유주의 사관(역사 수정주의)과 그릇된 역사해석자유주의 사관은 단순히 교과서 개정만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본의 대국화와 내셔널리즘 이데올로기 재건이라는 어려운 과제를 내면에 숨기고 있다. 역사문제란, 과거의 시간을 그 시대가 지니고 있는 필연성에 의해서 리얼하게 표현하는 것이지 결코 지금의 선악관 의식에서 도덕적으로 평가되는 대상이 아니다. 라고 보는 것이 자유주의 사관인데 이것은 표면적으로는 일본의 역사를 새롭게 쓴다는 뜻으로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원형의 침략사관, 식민사관을 계승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이러한 자유주의 사관은 현재 과거청산의 걸림돌이 되고 있는, 조선민족 구제론(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은 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침략전쟁이었음에도 청과 러시아가 조선을 침략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막아내어 조선민족을 구제하여 주었다는 논리), 조선병합 합법론(일본은 을사조약 등 조약이라는 형식을 통하여 조선을 강점하였기 때문에 일본의 조선지배는 국제법적으로 합법이라고 이들은 주장하며 더 나아가 일진회의 합방청원서 를 근거로 당시 조선 민족이 합방 을 청원하였고, 일본 천황이 조선 민족을 구제하기 위하여 이를 받아들였다는 주장), 식민지 시혜론(식민지 지배를 통하여 일본은 많은 분야에서 좋은 일을 많이 하였고 그 덕택에 해방이후 한국은 이처럼 발전을 이룩하게 되었다는 주장으로 철도를 부설하였고 민둥산에 나무를 심어주었으며, 학교를 만들어 교육시키고 근대적인 제도개혁을 단행하였으며, 심지어는 공업화시켜 한국의 경제발전을 도모하였다는 식의 논리 전개), 비식민지론(적인 선택이며, 목격자나 증거가 없기 때문에 소수인 피해여성의 주장은 인정할 수 없다는 논리) 등의 문제가 되는 사관을 굳건히 해주고 있으며 이처럼 겉으로는 합당한 근거를 내세운 것처럼 보이게 하며, 과거의 잘못을 정당화 시키려는 의도를 담고 있는 것이 일본의 자유주의 사관인 것이다.또한 일본지도자의 망언이나 신사참배, 교과서 왜곡, 독도분쟁 등은 이전부터 계속 제기되어온 문제이지만, 자유주의 사관은 그럴싸한 근거로 이 문제들에 대해 힘을 실어주었다. 망언이나 신사참배 문제는 해방이 된 이후로 계속 제기되어온 문제이다. 과거의 망언과 신사참배는 침략사관에 근거하여 나타난 형태이지만, 자유주의 사관은 역사를 새롭게 해석한다는 의미를 부여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과거의 잘못을 더욱 정당화하여, 망언이 아닌 정당한 발언이라는 해석을 낳고 있다. 이것은 일본내에서만 통용되는 것이지만, 이유는 교과서 왜곡으로 인해 일본의 국민들은 잘못된 역사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그동안 계속해서, 교과서 개정을 요구하였고, 일본에서는 순응하는 듯 보였으나, 여전히 교과서는 왜곡되어 있는 상태이다. 그러나 일본은 자유주의 사관에 근거하여, 일본에는 여러 종류의 역사교과서가 있으며, 일본국민은 자신의 의사에 따라 교과서를 선택하여 역사를 공부할 수 있는 반면, 한국은 국정교과서로 역사를 배우기 때문에, 독재정부의 주입식 세뇌를 받고 있다고 역으로 주장하고 있다. 또한 독도분쟁 역시 마찬가지로 자유주의 사관에 근거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해석으로 인해 문제가 제기 되고 있다. 일본은 우익단체 등에서 독도영유권을 주장해왔으나 70년대 후반부터는 아예 총리와 외무장관 등 당국자가 나서 공식·비공식 발언을 통해 독도영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한국은 역사적 문헌을 통한 고유영토권을 주장하는 반면 일본은 한국 문헌들의 오류를 지적하며 역사적으로 한국의 영토가 아님을 주장하고있고, 일본의 독도편입조치와 관련하여 한국은 일본이 국제법적 요건을 갖추지 못한 영토탈취라고 주장하는 반면 일향하는 사상이나 운동이다. 일본은 명치시대에 가족적 전체주의 형태의 내셔널리즘을 나타내고 있었는데, 이것이 구체화되어 나타난 것이 자유민권운동 등이다. 이것은 식민지시대까지 이어져, 쇼와기에 이르러서는 비합리적이고 정서적인 경향이 강해지고 군부의 정권장악으로 비합리적 내셔널리즘은 국민을 전쟁체제에 동원하기 위한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데, 가족적 전체주의 라고 할 수 있으며, 이데올로기적 면에서 명치국가와의 연속성을 가진다. 이 시기의 내셔널리즘은 국가가 개인의 내면까지 지배하는 절대성을 가지는 초절대군주제적 측면을 지니고 있는데, 패전과 동시에 급속도로 붕괴하였다. 이유는 일본 내셔널리즘이 무력에 있어서의 우월을 기반으로 한 점과 국가의 독자성은 국체에 있고, 그것은 일본적 가치의 총합체이며, 그에 뿌리내린 국민적 사명감은 전체적인 것만큼, 그 붕괴가 초래한 정신적 진공은 컸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내셔널리즘은 침략전쟁의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는데, 패전이후에는 원래 의미의 내셔널리즘인 듯 보여지던 것이 최근들어 냉전구조의 붕괴를 신내셔널리즘이라는 용어로 변모하여 다시 부활하게 되었다. 바로 구소련을 가상적국으로서 대치해 왔던 전통적 우익의 붕괴와 재편을 기반으로 등장한 것이다. 내셔널리즘을 선전해 오던 중심세력이 우익단체로부터 기존 좌익성향의 평론가 및 방송언론 관계자로 바뀌게 되었다. 오늘날 이 신내셔널리즘이 대중적 갈채를 받게 된 근거의 하나는, 바로 지식인들이 이전의 과격하게 표현하던 우익론자들을 대신하여 새로이 내셔널리즘을 선전하는 세력으로 갱신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내셔널리즘은 '종군위안부'가 주제화되었던 것처럼 국민국가와 가부장제 가족이라는 근대의 두 억압정치를 고수하고자 하는 욕망을 노골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민족차별과 성차별이 연결되는 주장이 공공연하게 강조되며, 국익중심이라는 이기주의 하에 반일이라는 대상을 일반화시켜 '국민'과 '비국민'의 경계선을 긋는 움직임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신내셔널리즘은 근대적본의 우익 세력들은 그들을 반일로 규정지으면서, 자작극이라는 언론보도까지 나올 정도이며,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국익을 위해 할복하라는 말도 서슴없이 나왔다. 게다가 자위대 파병에서 보여지듯 군국주의 시대로의 복귀를 꿈꾸고 있다.또한 이러한 내셔널리즘은 역사교육에 있어서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첫째로, 신내셔널리즘은 전쟁에 의해 생명을 잃었던 아시아 국가의 2천만명이 넘는 사망자와 일본의 3백만이 넘는 사망자를 기억으로부터 말살하고자 하는 욕망을 노골적으로 지니고 있다. 그 대표적 상징이 '종군위안부=매춘부'라는 공격이고 '남경대학살'에 대한 회의적인 발언이다. 이러한 발언과 행동이 역사를 왜곡한 '수정주의'라 부르는 것은 '위안소'에 있어서의 강제적 성적 폭행의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남경 성내의 사망자를 한정함으로써 '남경대학살' 그 자체에 대해 회의를 표명하고 있다는 점 등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역사의 본질이 사자(死者)의 기억속에 있다고 본다면, 그 기억을 말살하고자 하는 신내셔널리즘의 주장은 바로 역사 그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둘째로, 신내셔널리즘의 역사는 전쟁을 다양하게 체험한 개인의 구체적ㆍ생생한 체험담으로서의 역사가 아니라 그들 개개인의 복수적인 역사를 '국민'일반으로 추상화한 역사이다. 여기서도 '종군위안부'를 둘러싼 문제는 상징적이다. '종군위안부'의 존재는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자명한 사실이다. 자명화인가? 추상화인가? 하는 문제의 벽을 타파해 버린 것이 김학순이라는 고유명칭을 가진 개인의 증언(1991년) 이었다. '종군위안부'가 개인의 이름을 걸고 증언하는 행위를 통해 비로소 국가의 사죄를 요구하고 전쟁책임을 추궁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근년에는 구일본군 병사들도, 침략 또는 살육ㆍ강탈이나 강간했었던 전쟁책임을 개인이름으로 증언하는 상황이 속속 나타나고 있다. 그들도 자신들의 전쟁범죄를 직시하여 사죄하는 행위를 통하여 그들을 전쟁범죄로 인도했던 국가의 책임을 묻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개인의 이름을 건 전쟁체험담이야.
제1차 세계대전과 베르샤유체제/워싱턴체제교과명 : 국제정치사담 당 : 권무수 교수님학 과 : 정치외교학과학 번 : 9991098이 름 : 윤병준제1차 세계대전사라예보사건과 1차 세계대전 발발사라예보 사건은 오스트리아의 황태자인 페르디난트 대공 부처가 1914년 6월 28일 제국 내의 보스니아에서 시행되는 오스트리아의 육군 대훈련을 참관하기 위해 가던 도중 대세르비아를 신봉하는 비밀결사인 흑수단(Black hand)에 속하는 프린치프라는 젊은 보스니아의 국수주의자에게 암살당한 사건을 말한다. 이에 격분한 오스트리아 정부는 남슬라브 민족주의운동의 중심지인 독립국 세르비아를 격멸하기로 하였는데(당시 오스트리아에서는 민족주의 운동이 한창이었는데, 이 사건은 다민족으로 구성된 오스트리아의 와해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에 있어 큰 위협이자 치명적 문제였다.), 세르비아와 결전도 불사한다는 각오로 3국 동맹에 근거하여 즉각 독일에 사전 협의하여 원조를 요청하였다. 이에 독일은 어떠한 조치를 취하더라도 전면적 지지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하였고(백지위임장/Blank check), 오스트리아는 모든 책임을 세르비아에 돌려 48시간 이내에 회답하라는 최후통첩을 1914년 7월 23일에 베오그라드에 보냈으나(최후통첩의 주요내용은 1반오스트리아적 출판물의 금지와 애국적 단체의 탄압 2범슬라브주의의 비밀결사 해체 3학교교육에 있어서 반오스트리아적 선전의 중지 4 반오스트리아 선전을 한 관리의 파면 5 사라예보 사건의 범인에 대한 재판개최와 이 재판에 오스트리아 대표의 참석 6 세르비아 정부의 공식적인 사죄 등이다.) 세르비아는 대부분의 조항을 승낙한 반면 오스트리아 판사로 하여금 세르비아 내의 범죄수사에 참여케 해야 한다는 조항이 헌법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수락을 거부하는 한편, 러시아의 지지를 믿고 군사동원령을 내렸다. 오스트리아는 이를 최후통첩의 거절로 보고 7월 28일 국교단절과 함께 전쟁선포를 하였고, 이에 유럽 각국이 다투어 동원령을 내리게 되어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결정적으로 루마니아가 연합국으로 참전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고 또한 연 합국이 제시한 헝가리의 일부인 트란실바니아 지방 할당은 루마니아가 완전히 연합국쪽으로 돌아서게 하는 역할을 하게 됨.포르투칼-포르투갈에서는 1910년 총선거 후 공화파(共和派)의 혁명이 일어나 마누엘 2세가 퇴위하고 공화제가 성립하였다. 그러나 그 후 에도 쿠데타가 되풀이되고 노동운동도 격화하였다. 따라서 국내문제를 해결하고자 1916년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물론 연합국 의 끈질긴 설득도 커다란 영향을 끼침.그리스-그리스는 지리적인 전략적 위치와 터키에 대한 전통적인 적대감으로 인해 전쟁 시작부터 연합국측으로 기울어져 있었음.일본-일본은 1914년 독일에 대해 선전을 포고하며 전쟁이 참가하는데 독일측은 일본이 동맹국에 합류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지만 태평양 지역에서의 영국의 영향력이 우세했고 이번 기회를 통해 태평양과 중국지역의 독일 이권과 식민지를 차지하기 위해 연합국에 합류.동맹국측독일-오스트리아의 동맹국으로서 오스트리아가 전쟁에 뛰어들고 러시아가 선전포고하자 독일은 즉시 전쟁에 개입하게 된다. 이 독일의 개입은 지금도 많은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데 독일이 일부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와의 전쟁을 바라고 오스트리아를 설득하였다는 설 과 어쩔 수 없이 전쟁에 개입했다는 설인데 현재는 전자가 정설로 되어 있지만 요즘 새로이 밝혀지는 자료에 따르면 후자도 점차 설득력을 더해가고 있음.오스트리아-사라예보 사건을 계기로 1차대전의 발발원인인 세르비아 침공을 결정.불가리아-1912년 제 2차 발칸전쟁에서 세르비아에게 패해 많은 영토를 잃고 대불가리아 창설에 실패한 불가리아는 1914년에 일어난 제 1차 세계대전때 독일, 투르크 쪽에 서서 세르비아, 그리스 공격을 위한 독일군의 진주(進駐)를 허가.오스만투르크-청년투르크당 내각하에서 이토전쟁, 1차발칸전쟁을 치루었으나 모두 패배하고 많은 영토를 빼앗긴다. 따라서 제1차 세계대 전이 발발하자 독일측에 접근한 후 동맹국으로서 독일측에 서서 싸움.독일이 채택한 병력이 합동으로 공격하자 러시아는 연전연패 하였고, 독일은 9월에 리투아니아와 폴란드를 점령하였다. 이에 러시아는 1916년 브루실로프 장군을 새로 사령관에 임명하여 많은 승리를 했으나 서부전선에서 독일의 대부대가 도착한 후 각처에서 패배하였다.당시 러시아는 수차례의 패배와 독일의 집요한 책동으로 1917년 3월에 페트로그라드에서 폭동과 파업이 크게 일어났고, 군대마저 반란을 일으켰으며, 결국 15일 황제 니콜라스 2세를 퇴위시키고 임시정부를 수립한 3월 혁명이 일어났었는데, 집권자 중 1명을 제외한 대부분이 입헌주의자들로 각료들은 전열을 재정비하여 총공격을 가하기로 결정하였다. 임시정부의 국방상 케렌스키(A. Kerensky)의 격려를 받은 브루실로프 장군은 최후의 결사적인 대공격을 감행하였으나 갈리시아 전투에서 또 패하였으나, 1917년 11월 7일 볼셰비키가 정권을 장악하자(11월 혁명) 11월 21일에 페트로그라드 주재 연합국 대사를 통해 정식으로 강화조약을 제의하였고, 이때 소비에트 정권은 전쟁을 더 이상 수행할 수가 없어 평화선언 을 발표하고 평화조약체결조건으로 무병합, 무배상,민족자결의 3대 원칙을 제안하였다. 독일은 하루빨리 동부전투를 끝내고 서부전선에 대한 대공세를 펼칠 계획을 가지고 있어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 후 러시아가 무병합,무배상을 기본으로 하는 6개 강화원칙을 다시 제시하였으나 독일은 이를 거절하고 폴란드, 리투아니아, 쿠르랜드의 할양을 요구하면서 러시아를 대거 공격해 들어갔다. 결국 1918년 3월 3일 매우 불리한 조건으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조약(많은 볼셰비키 당원들이 반대하였으나 레닌의 주장에 의해 성립되었고, 이 조약으로 러시아는 60억 마르크의 배상금을 지불하게 되었고, 폴란드, 발틱제국, 핀란드,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보장하고, 백러시아의 일부, 베사리아, 트랜스코카시의 일부를 잃었고 동남쪽 코카사스 횡단지역은 터키에 양도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영토들의 양도로 인해 러시아는 인구의 1/4, 제조공장의 1/3, 철로의전을 불러오는 계기가 되었다.주요해전잠수함작전유틀란트해전-1916.5.31도거뱅크해전-1915.1.24헬리고랜드만해전-1914.8.28미국의 참전미국은 먼로 독트린에 입각하여, 1914년 8월 유럽에서 전쟁이 터지자 즉각 엄격한 중립을 선언하였으나 국민의 대부분은 인종적,문화적,정서적으로 연합국측에 호의적이었다. 윌슨 대통령은 전쟁확대를 막아 평화를 조기에 실현코자 노력하면서 미국은 절대로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 했으나, 독일의 무차별 잠수함 작전으로 미국민이 희생을 당하자, 참전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고, 미국의 참전은 연합군측에 승리를 가져다 주게 되었다.미국의 참전요인은 5가지의 이유가 있는데, 첫째 가장직접적인 원인은 독일의 무차별 잠수함 작전이었고, 둘째, 독일이 미국과 개전할 경우 독일은 멕시코와 동맹을 체결할 것이며 미국에 빼앗긴 영토를 돌려준다는 독일외상 짐머만(Zimmermann)의 극비전보때문이었다. 셋째, 러시아의 혁명과 미국선박의 계속적인 격침이었고, 넷째, 독일 비밀공작원들이 미국에 침투하여 군수품 공장의 파업을 선동하고, 폭파사건을 야기시켜 여론이 참전쪽으로 흘러갔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 전쟁은 전제주의와 민주주의 대결 로 볼 수 있는데 독일이 승리하면 미국의 지위가 위태로와지고 자유,민주정치를 지향하는 세계질서가 파괴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1917년 4월 6일 미국이 참전을 선언하자 전황은 급격히 변하였는데, 병력뿐 아니라 경제적인 원조의 영향이 지대하였다. 미국은 민간차관 외에 1백억 달러 이상의 차관을 연합국에 제공하였고, 연합국은 이 자금으로 군수물자와 식량을 주로 미국으로부터 사들였다. 미국은 즉시 전시경제 체제를 확립하여 민간산업을 군수산업으로 전환시켜 막대한 량의 포탄, 비행기, 철강, 선박, 식량을 제공함으로써 전력을 급속히 증강시켰다.미국참전이후 독일군은 1918년 3월 21일부터 서부전선에서 마지막 총공세를 감행하였지만, 미군의 영향으로 후퇴하기 시작하게 되었고, 당시 독일은 더 이상의 전쟁수행능력이 없었다.대전했지만, 회의는 평화 14개 조약 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각국이해로 인해 난항을 거듭하면서도 베르샤유 조약에 평화 14개 조항 의 정신을 충실히 반영시키고자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5개월에 걸쳐 완성된 베르샤유 조약은 1919년 6월 28일 15부 446조에 달하는 방대한 내용으로 구성되었다.평화 14개 조항 은 전후문제를 해결하고 세계평화를 구현코자 하는 윌슨의 이상주의적인 정치사상을 기반으로 하고, 계몽사상과 프랑스 대혁명의 이념인 자유주의 및 민주주의 그리고 국제평화주의와 민족자결주의 등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이 조항은 열렬한 환영을 받았지만, 이것은 오래된 유럽적 관행을 타파하는 혁신적인 것이기 때문에 베르샤유 조약에 반영하기란 쉬운일이 아니었다. 또한 국가간의 연합기구 설치에 대해서도 유럽정치가들은 부정적이었다. 각종 국제문제들과 자국의 이익으로 인해(특히 영국과 프랑스는 막대한 손실로 인해 독일에 자비롭고 관대한 평화조약을 체결할 마음은 전혀 없었음) 그것이 지나치게 이상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독일과의 베르샤유 조약과 기타 4개 동맹국과의 강화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전후의 새로운 국제질서로 이른바 베르사유 체제가 성립되었다. 베르샤유 체제는 약 15년간 지속되는데 그 목적은 표면상 전쟁방지, 민족자결의 원칙의 구현, 세계평화를 확립하는데 있었지만, 실제로는 전승국들의 우월권 유지, 경제부흥, 독일의 재기를 막고 군군주의의 부활을 저지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러한 베르사유 조약는 크게 국제연맹 창설, 영토문제, 배상금 문제의 3가지로 나타난다.국제연맹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은 세계평화의 확립과 인류문화의 창달을 목적으로 하는 역사상 최초의 국제적 상설기구이다. 설립 당시는 제1차 세계대전의 전승국과 초청된 중립국을 포함한 42개국이었고, 추가로 가입하려는 국가는 국제의무의 준수와 군비축소를 수락 조건으로 총회의 2/3 이상의 다수결로써 가입하였다. 가맹국 수가 가장 많았을 때는 63개국이었으나 이 중에는 에티오피아·라이베리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