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 앤 드럭스’ 감상문- 목 차 -1. 들어가기에 앞서2. 진정한 약은 바로 ‘사랑’1. 들어가기에 앞서오랜만에 ‘정말 괜찮은 영화’를 보았다. 물론 괜찮다는 말의 의미는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맘껏 웃으며 기분전환을 할 수 있고,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영화가 있는가 하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눈물을 불러일으켜 잔잔한 감동을 주는 영화도 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는 정말 괜찮은 영화가 되기 위해 꼭 필요한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바로 영화를 통해서 ‘삶’에 대해 진지하게 반성하는 기회를 갖는 것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가상의 삶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것이다. 이번에 본 란 영화는 나에게 그런 기회를 제공해주었다.영화를 보기 전에 가장 우려했던 점은 나 자신이 로맨틱 코미디 장르를 좋아하긴 하지만 줄거리 자체가 워낙 뻔한 내용이다 보니 자칫 지루함을 느끼다가 끝나지는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나서 그런 나의 걱정이 쓸데없었다는 것을 알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장면 하나하나에 눈을 뗄 수가 없을 정도로 진행이 괜찮았다. 단지 조금 민망했던 점은 여자친구와 같이 관람하기에는 성관계 장면이 지나치게 많이 나왔다는 점 정도랄까.2. 진정한 약은 바로 ‘사랑’이 영화의 제목을 보면 ‘Love & Drugs’ 곧 ‘사랑과 약’이다. 과연 ‘사랑’과 ‘약’이 연관관계가 있을까? 영화의 여자 주인공 매기 머독(앤 해서웨이)은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환자로 나온다. 남자 주인공 제이미 랜달(제이크 질렌할)은 여자들과의 관계를 진정한 사랑이 아닌 하룻밤 상대로 생각하는 바람둥이였는데 매기를 만나 진정한 사랑을 하게 된다. 줄거리만 보면 참으로 뻔한 내용의 헐리우드 영화로 보인다. 그러나 내 생각에 이 영화가 다른 식상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와 다를 수 있었던 소재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약’이다.이 영화에서 시종일관 홍보되는 미국의 유명한 제약회사인 화이자, 그리고 그 회사로 이직한 제이미는 일류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잘나가는 영업사원이다. 그러다가 화이자에서 ‘비아그라’를 개발하여 판매하기 시작하면서 탄탄대로를 걷기 시작한다. 물론 비아그라는 이미 국내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끈 적이 있고, 지금도 꾸준히 인기를 얻고 있는 약품인 건 사실이지만, 그 약품을 만든 화이자라는 제약회사를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직접적으로 광고한 점은 아쉬운 부분으로 남는다.한편, 젊은 나이에 파킨슨병으로 고생하는 매기는 자신의 처지 때문에 사랑다운 사랑이 아닌 하룻밤 사랑을 쫓아다니다가 제이미를 만나게 된다. 물론 두 사람 모두 처음에는 그냥 호기심에 만나 가벼운 섹스를 즐기는 사이로 지낸다. 잘나가는 바람둥이였던 제이미가 매력은 넘치지만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매기에게 그런 가벼운 감정 이상의 묘한 감정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이 영화의 로맨스에 불이 붙기 시작한다. 그러나 매기는 자신의 감정이 스스로 절제되지 못함을 느끼면서 이별을 통보하기에 이른다. 이 부분에서 두 사람의 감정은 극에 달하게 되고, 자신의 감정을 참지 못한 제이미는 매기에게 자신의 진심을 고백하면서 결국 두 사람의 로맨스는 이루어지게 된다.이쯤에서 다시 한번 사랑과 약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영화에서 제이미를 잘나가는 영업사원으로 만들어준 비아그라라는 약은 남녀의 성관계에 많은 도움을 주는 약품이다. 진정한 사랑을 알기 전 제이미와 매기의 관계처럼 쿨한 만남에는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상대방의 아픔까지 치료해줄 수 있는 약은 아닌 것 같다. 파킨슨병으로 고생하는 매기 역시 다양한 치료와 약물을 복용하지만 상태는 좀처럼 호전되지 않는다. 그녀를 사랑하는 제이미 역시 안타까운 매기의 모습에 이리저리 방법을 찾아보지만 매기는 그런 제이미를 만류한다. 그녀 역시 치료와 약물의 한계를 알았기 때문이다. 단편적일 수도 있겠지만 약은 두 사람의 관계에 도움은 줄 수 있지만 진정한 사랑을 완성시키는 도구는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둘 사이에 가장 필요한 약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감독이 관객에게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바로 이것이지 않을까?
일본의 대한제국 국권침탈과 조약강제-한국병합의 불성립을 논함--목차-. 序言-신선한 충격, 성립인가 불성립인가? 무엇이 이 논쟁을 이끌었는가?-. 本言1. 논문의 저자소개2. 논문의 내용요약3. 기존의 연구 성과와의 차이, 논지소개4. 내용비평5. 참고문헌. 結言-일제 강점에 대한 보상의 문제와 그로 비롯된 조약의 문제를 논하며-. 序言-신선한 충격, 성립인가 불성립인가? 무엇이 이 논쟁을 이끌었는가?한국의 역사에는 일제에 의해 강점된 시대가 있다. 그렇기에 한국과 일본 양국간의 관계는 결코 좋은 편이 아니다. 두 나라는 1965년 한일협정을 체결하면서, 역사상의 문제를 일단락 지은 듯 보였지만, 실제로는 그 문제를 유야무야 덮어둔 채로 넘어가고 말았다. 이는 일제에 대한 보상의 문제가 제기되면서 일본과 대한제국 사이에 맺었던 조약의 효력을 가지고 논쟁이 시작되었다.이태진 교수의 이 논문은 우리에게 대단히 신선한 충격을 준다. 이태진 교수의 이 논문은 기존의 연구 성과를 종합하였고, 우리에게 새로운 논점을 제시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는 무엇인지 파악할 필요가 있고, 이 논지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심도 있는 고찰을 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태진 교수가 말하는 성립, 불성립의 논의가 무엇인가? 왜 그러한가? 에 대한 문제를 저자의 논문을 요약하고, 논지를 파악함으로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에 대한 비평을 통하여,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찰해 보기로 하겠다.. 本言1. 논문의 저자소개이태진(李泰鎭)은 1943년 10월 14일 경북 출생으로 현재 서울대학교 인문대 국사학과 교수와 역사학회 회장을 겸하고 있다. 1965년 서울대학교 한국사 학사, 1969년 서울대학교대학원 사학 석사학위를 땄고 다음과 같은 경력을 갖고 있다.1973. ~ 1977. 경북대 전임강사. ~ . [現]서울대 인문대 국사학과 교수1997.07 ~ . [現]한국국가기록연구재단 설립준비위원2000.01 ~ . [現]제3대 한국18세기학회 회장2000. 一潮閣, 1987.〈高麗後期 인구증가 要因 生成과 鄕藥醫術 발달〉《韓國史論》19, 1988.〈조선시대 野史 발달의 推移와 성격〉《金龍德博士停年紀念史學論叢》, 1988.〈朋黨政治 성립의 歷史的 배경〉《제18회 東洋學學術大會講演 》, 1988.〈安廓〉《韓國史 市民講座》5, 一潮閣, 1989.〈17 8세기 香徒조직의 分化와 두레 발생〉《震檀學報》67, 1989.〈15 6세기의 低平 低濕地 開墾 동향〉《國史館論叢》2, 1989.〈New Tendencies in the Korean Socio-Economy in the 15th and 16th Centuries: Population Increase and Cultivation of the Lowland〉 (Tenth International Economic History Congress, Session B-3, Louven, Belgium), 1990.〈[日省錄]刀削의 실상과 경위〉(공동연구)《韓國文化》10, 1989.〈15 6세기 韓國 사회경제의 새로운 동향 : 低地 개간과 인구증가〉 《東方學志》64, 1989.〈사화와 붕당정치〉《한국사특강》, 서울대출판부, 1990.〈농업기술의 발달과 문화변천〉《한국사특강》, 1990.〈해방후 45년간 남북이 모두 잃은 것〉《씨 의 소리》8, 1990.〈朝鮮王朝의 儒敎政治와 王權〉《韓國史論》23, 서울대 국사학과, 1990.〈新羅 村落文書의 牛馬〉《碧史李佑成敎授定年退職紀念論叢 : 民族史의 展開와 그 文化》上, 창작과비평사, 1990.〈朝鮮初期의 火耕禁止〉《李載 博士還曆紀念韓國史學論叢》, 한울, 1990.〈18세기 南人의 정치적 쇠퇴와 嶺南地方〉《民族文化論叢》11, 1990.〈Economic transformation and Socio-political trends in the sixteenth century East Asia〉《Seoul Journal of Korean Studies》, Seoul National University, 1991.〈17세기 朋黨政治와 中央軍營의 兵權〉財團, 1998. 4〈16세기 국제교역의 발달과 서울 상업의 성쇠〉《서울상업사연구》, 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 1998."Meteor Falling and Other Natural Phenomena During 1500-1750 as Recored in the Annals of Choson Korea", Celestial Mechanics and Dynamical Astronomy 69-1 2, Kluwer Academic Publisher, Netherland; Dynamics of Comets and Asteroids And Their Role in Earth History, ed. by Shin Yabushita and Jacques Henrard (Eds.), Netherlands, Kluwer Academic Publisher, 1998〈韓國倂合は成立しでいない〉上 下 《世界》7月號, 日本 岩波書店, 1998. 3(〈일본의 대한제국 국권 침탈의 불법성〉번역)〈《鄕藥集成方》 편찬의 정치사상적 배경〉, 震檀學會 제26회 고전심포지움({鄕藥集成方}의 종합적 검토) 발표문, 1998. 11.〈조선중기의 정치와 경제 개요〉,《한국사》30 , 국사편찬위원회, 1998. 12.〈자연재해 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한국사》30, 국사편찬위원회, 1998. 12.〈상평창 진휼청의 설치 운영과 구휼문제〉,《한국사》30, 국사편찬위원회, 1998. 12.〈인구의 감소〉, 《한국사》30, 국사편찬위원회, 1998. 12."Was Korea Really a 'Hermit Nation'?", Korea Journal Vol. 38 No. 4, Korean National Commission for UNESCO, 1998. 12.〈大韓帝國 皇帝政과 民國 정치이념의 전개 -國旗 제정·보급을 중심으로-〉,《韓國文化》22, 韓國文化硏究所, 1998. 12.〈韓國倂合不成立再論 -韓國侵略に關連する諸條約だけが破格であつた-〉,《世界》659號, 岩波書店, 1999. 3. (《전통과 현실》 황이 유리하게 전개되자 1905년 7~8월 사이 미국, 영국 등과의 밀약을 통해 한국 보호국화를 용인 받은 후, 이를 실행하는 단계에 들어갔다.이 협정 역시 무력시위 및 위협 아래 강요되었다. 일본은 철저한 군사적인 사전준비를 했고 이는 물론 모두 실천에 옮겨져 1905년 11월 17일 협정일에 일본군은 황제가 거하고 있는 慶運宮(현 덕수궁)을 포위하고 회담장에도 직접 들어가 한국 측 대신들을 위협했다. 일본군은 중무장 상태로 서울 전역 요소요소에 배치되어 한국인들을 감시, 제압하였다.이 협정은 사안의 중대성에 걸맞는 협정의 격식을 제대로 결정 못해 형식과 절차에 많은 결함을 남겼는데 일본정부는 처음부터 보호국화에 대한 한국 측의 동의를 받아내기 어려울 것을 예상하고 강압적 방식으로 일을 처리할 방침을 세웠다. 일본정부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는 방향에서 준비를 했고, 협정문안 역시 정식 조약(Treaty)보다는 약식 조약인 협약(Agreement)의 형식으로 준비되었다. 외교권 이양과 같은 중대 사안에는 1) 국가 원수가 대표(전권위원)를 임명하는 위임장, 2) 양국 대표가 서명한 조약문, 3) 조약문에 대한 국가원수의 비준서 등이 모두 갖춰져야 한다. 하지만 일본정부는 대한제국정부의 완강한 반대와 이에 대한 대비책까지 마련하고 있었으므로 그들 스스로도 이것을 모두 받아낼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고, 그런 이유로 그들은 처음부터 정식 조약의 문안이 아닌 약식 조약인 協約급의 문안을 준비했다. 그러나 협약은 결코 외교권 이양과 같은 중대 사안에 걸맞는 형식이 아니며, 乙巳勒約은 협정문만 있을 뿐 전권위원 위임장이나 협정문에 대한 황제의 비준서가 발부되지 않아 외교권 이양과 같은 중대한 외교협정으로서는 요건 미비이다.그런데 이 협정은 일본 측이 형식 결정에서 당위(정식조약)와 편법(협약) 사이를 왕래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협약으로 결정하여 처리되었으나 미처 제목을 써넣지 못하는 결함을 남겼다. 하지만 일본 측은 이 협정의 ‘체결’ 사실을 미국, 영국 정부에 알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일본은 러일전쟁 후 議定書(1904년 2월 23일자) [ 일본명칭 : 日韓議定書, 영문번역 : Protocol ], 協定書(1904년 8월 22일자) [ 일본명칭 : ‘제 1차 日韓協約’, 영문변역 : Agreement ], 乙巳勒約(1905년 11월 17일자) [ 일본명칭: ‘제 2차 日韓協約’ 또는 ‘日韓新協約’, 영문번역 : Convention ], 한일협약(1907년 7월 24일자) [ 일본명칭: 日韓協約, 영문번역: Agreement ], 合倂條約(1910년 8월 22일자) [ 일본명칭: 韓國倂合에 관한 條約, 영문번역: Treaty Regarding the Annexation of Korea to the Empire of Japan ]의 협정들로 영토사용권, 외교권, 내정권과 군사권, 그리고 병합의 순서로 한국의 국권을 차례로 빼앗았다. 최근의 연구에서는 위협을 받으면서 강요된 상황 외에도 이 협정들의 절차와 형식에 더 많은 문제점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그렇다면 어째서 대한제국은 이러한 강제적인 국권 침탈을 방치할 수밖에 없었을까? 저자는 고종이 1982년 親政에 나선 직후부터 군대 양성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임오군란 후 내외정의 혼란 속에 조그마한 시도조차 성과를 거두지 못할 정도로 상황이 어렵게 진행되었고, 대한제국 출범 후에야 비로소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 시작했다. 하지만 1900년대에 접어든 시점에서도 군대다운 병력은 14,000 명 정도의 시위대뿐이었고, 1903년 5월 드디어 황제가 육해군 창설을 목표로 징병제 시행을 위한 준비를 지시하는 조칙을 내렸다. 그러나 이해 후반 일본의 동정은 이미 심상찮게 돌아가고 있었다. 고종이 외교에 의존하는 성향이 높았던 이유는 바로 국방력의 취약성이 중요한 원인이었다. 하지만 일본은 러일전쟁을 일으켜 결국 강제로 한국의 국권을 침탈했다. 고종은 이에 대해 무효화운동을 펼쳤으나 그가 신뢰하던 미국조차 공화당정부가 들어서며 대외정책의 기본방향을 바꿈에 따라 한.
흑사병과 그로인한 농업구조의 변화목차Ⅰ. 서론Ⅱ. 흑사병Ⅲ. 농업구조의 변화Ⅳ. 결론Ⅰ. 서론중세 전성기가 “축복의 시대”였다면 중세 말기는 “기근의 시대”였다. 1300년경에서 15세기 중반, 또는 후반에 이르기까지 무시무시하고도 끈질긴 재앙이 서유럽 전체에 덮쳐 왔다. 맨 처음 기근이 만연하게 된 까닭은 지력이 고갈되고, 날씨마저 추워지고, 게다가 갑작스런 호우 등으로 말미암아 농업이 황폐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나서도 이러한 “신의 행동”위에 가장 끔찍한 자연 재앙이 또 덮치게 되었으니, 그것은 엄청난 숫자의 유럽 인구를 살육한 “흑사병”)이라는 이름의 가공할 질병이었다. 많은 지역들이 처첨하게 황폐해진 나머지 늑대들이 들판을 버젓이 배회하고 심지어는 도시 외곽에까지 침입해 들어왔다. 간단히 말해서 평화로운 동정녀 마리아가 중세 전성기를 상징했다면, 히죽이죽 웃는 해골의 모습은 중세 말기를 상징하는 것이었다.흑사병으로 인한 농업구조의 변화는 중세봉건사회의 해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모든 것을 황폐하게 만들어버린 흑사병의 영향은 이제 중세라는 세상을 허락하지 않았다. 실로 엄청난 재앙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흑사병의 살육에서도 중세의 사람들은 불굴의 노력을 보여 주었다. 하늘의 재앙앞에서 자포자기하는 대신에 그들은 변화된 상황에 적응하며 살기위해 몸부림쳤다. 그렇다면 당시 사람들은 흑사병의 재난속에서 어떠한 변화를 겪었으며 어떻게 적응해 나갔을가? 지금부터 서양 봉건사회의 해체의 첫걸음인 흑사병과 그에따른 동?서유럽에서 나타나는 농업구조의 변화를 중심으로 당시의 변화를 알아보도록 하자.Ⅱ. 흑사병파멸적인 전쟁이 기근과 합세하여 수많은 목숨을 앗아갔음에도 불구하고 유럽은 14세기 중반까지도 인구 과밀 상태에 있었다. 그 이유는 인구의 증가가 여전히 식량 공급을 능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곡물 생산은 줄어든 반면에 인구는 계속 증가했으므로 모두에게 돌아갈 식량이 충분치 못했다. 따라서 곡물 가격이 치솟았고 유럽 전지역의 빈민들은 굶주림의 형벌을 음으로 전유럽에 걸쳐서 창궐했으며, 그후 100년 동안에 걸쳐서 시간적 간격을 두고 반복했다. 이 재앙은─죽음과 혼란, 그리고 그것이 야기한 공포로 미루어 보아─실로 20세기의 두 차레에 걸친 대전에 견줄 만한 것이었다. 전염병의 임상적 결과는 소름 끼치는 것이었다. 일단 벼룩에 의해서 페스트에 흑사병에 걸리기만 하면 환자는 겨드랑이 밑에 종기가 걷잡을 수 없이 생기게 되며, 팔다리에 검은 반점이 생기고, 설사를 하다가 결국에는 3일 내지 길어야 5일만에 죽음을 맞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건강한 몸으로 침대에 들어갔다가 밤새 고통에 시달린 후 다음날 아침에 시체로 발견되기도 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선원들이 모두 이 병에 걸려 죽는 바람에 시체를 실은 배들이 바다에서 정처 없이 표류하기도 했다. 비록 몇몇 지방이 피해를 면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염병이 미친 전반적인 인구 통계학적 피해는 엄청난 것이었다. 몇몇 사례를 살펴보도록 하자. 툴루즈의 인구는 1335년의 약 30,000명에서 1385년에는 26,000명으로, 그리고 1430년에는 8,000명으로 줄어들었다. 동부에 있는 노르망디의 전체 인구는 1347년에서 1357년 사이에 30%가 줄어들었으며, 1380년이 되기 전에 다시 30%가 줄어들었다. 피스토이어의 외곽지에서는 1340년에서 1404년 사이에 인구의 약 60%가 줄어들었다.)흑사병은 사람이건 짐승이건 가리지 않고 생명체라면 닥치는 대로 쓰러뜨렸다. 사람들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언제 어디서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와 불안에 휩싸여서 다른 사람들과의 잋레의 접촉을 피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떠나 고립적인 생활을 모색했다. 도시 거주자들은 병균이 떠다니는 공기를 직접 마시지 않으려고 흰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농촌으로 떠났고 농촌 사람들은 그들대로 서로를 피하며 도망쳤다. 이 중에는 환자를 위로하고 죽은 영혼을 달래줄 의무가 있는 사제, 수도원장 등 성직자들도 있었다. 심지어 교황도 궁정의 내실에 꼭꼭 틀어박혀서 그 누구의 출입도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같은 모습은 당시 흔하게 표현되던‘죽음의 춤’)에서 발견되고 있다.흑사병은 유럽에 떨어진 재난 가운데 가장 큰 것이었다. 그것은 삶의 모든 면에 영향을 미쳐, 이미 시작되고 있던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문화적인 변화를 촉진시켰다. 사실 처음의 흑사병만으로도 사회?경제적 구조를 부수어버리기에 충분했다. 들판이 방치되고 교역이 중지되었다. 촌락의 유대관계와 종교의 유대관계, 심지어는 가족간의 유대관계도 죽음의 공포앞에서는 산산이 깨어졌다.) 그 같은 재난에 대하여 유럽은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다. 앞서의 성직자들의 모습처럼 교회도 적절한 설명을 하지 못했다. 비난을 유대인이나 외부인에게 돌리려는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은 신 이외에는 누구도 책임을 질 수가 없었다. 새로운 사회에서 새로운 나를 세워야 했다. 이제 사회와 경제, 그리고 사상까지도 이전의 모습들이 붕괴되고 있었다.Ⅲ. 농업구조의 변화흑사병이 휩쓸고 지나간 후 살아남은 사람들은 흑사병이야말로 새로운 삶을 위한 분수령이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노동력의 부족으로 영주와 농민, 수공업자와 노동자 사이의 관계가 크게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노동력 부족에 즉각적으로 반응한 것은 농촌과 도시의 노동자들로, 그들은 예전보다 훨씬 높은 임금을 요구했다.) 이에 대응하여 지배계층은 그같은 요구에 위협을 느껴 그들을 규제할 방안을 모색했다. 영국의 경우 1349년 6월에 왕령으로 노동자조례(Royal Ordibance of Labourers))를 발표하여 “흑사병 이후 터무니없이 높은 임금을 받지 않으면 게으름을 피우고 일하기 싫어하는 노동자들의 악의에 대처하기 위하여”)노동자들의 임금을 흑사병 이전 수준으로 동결하려 시도했다. 또 영주가 필요로 할 경우에는 언제나 그에게 봉사하도록 하여, 노동을 강요하려 하였다. 그러나 영주들이 저임금을 유지하며 지대를 올리고 부역을 강화하려던 계획은 실현 불가능한 것이었다. 농민들의 저항이 너무 거세었기 때문이었다. 농민들은 공한지와 폐촌이 대. 이는 엄연한 도전이었으나 영주는 막지 못했다. 결국 영주들은 농민들의 요구를 수용해 지대를 낮추고 부역을 경감하거나 폐지했다. 농노제를 둘러싸고 전개되었던 영주와 농민 사이의 계급투쟁에서 농민들이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14~15세기가 지나는 동안에 농민들은 한편으로는 농노제의 질서에서 벗어나며 도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경제적으로 계층분화를 겪기 시작했다. 그들사이에서 요먼으로 불리는 부농과 빈농으로 분화되기 시작하며 새로운 위계질서가 형성되었다.그러나 14~15세기 동안 서부 유럽에서 농노제가 붕괴되는 동안에 동부 유럽에서는 오리혀 농노제가 강화되는‘제2의 농노제’가 시작되고 있었다. 동부 유럽에서 전개된 영주와 농민들 사이의 투쟁은 서부 유럽에서와는 상이한 결과를 낳았다. 그 결과 양 지역의 사회발전과정 역시 서로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양 지역에서 계급투쟁이 상이한 결과를 낳았던 것은 농민의 단결력과 국가와 영주와의 관계, 그리고 도시의 발달 상태가 서로 달랐기 때문이었다. 서부 유럽의 경우 농민들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영주의 세력에 비해서 농민들의 단결력이 더 강하였고, 단결력이 강하였던 것은 농촌 공동조직체의 발달 때문이었다. 그에 비하여 동부 유럽의 경우는 서부 유럽으로부터 식민된 비교적 자유로운 촌락들이 많아 강한 촌락공동체를 형성하지 못했다. 영주와의 갈등이 적었던 관계로 농민들의 간결력이 미약하여 촌락공동체의 형성이 미미했고, 또 강한 촌락공동체를 조직할 만한 역사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동유럽의 농민들이 영주와의 투쟁에서 패배했던 또 하나의 원인은 국가와 영주계급 사이의 상이한 관계 때문이었다. 서부 유럽의 경우 15~16세기 동안 국가의 권력이 강화되고 영주의 권력은 약화되었다. 그 결과 영국이나 프랑스는 영주의 수탈을 억제하고 농민들을 보호하는 정책을 수행할 수가 있었다. 반면 15세기 동안 동부 유럽의 국가들은 왕권이 쇠약해지고 영주권이 강해지는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났다. 특히 폴란드의 경우 1410년과 1466년 투턴 기점차 영주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고, 또 법률적으로까지 농노 신분으로 전락하게 되었다.)16세기를 통하여 농민들이 토지를 상실하고 농노신분으로 전락했던 반면에 강대해진 영주들은 직영지 경영과 곡물 수출을 통하여 번영하기 시작했던 것이다.동?서 유럽을 갈라놓은 또 하나의 원인은 도시에 있었다. 흑사병이 끝나고 농업의 침체 속에서도 서유럽의 전체 인구는 증가하고 있었다. 특히 영국의 양모 수출이나 모직물 제조와 연관된 도시들처럼 활력을 잃지 않고 번영하는 도시도 많았다. 이들 도시는 농촌인구에 대한 흡인력을 가졌으며, 그것이 영주와 농민 사이의 계급투쟁에서 양 계급의 대응 자세에 영향을 미쳐서 농노제의 쇠퇴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면, 농민들은 그들의 요구를 영주가 묵살할 경우 다른 촌락이나 도시로 도주하거나 이주를 할 수 있었다.)도시는 농민들의 이주 및 도주처였던 것이다. 반면에 동부 유럽의 도시들은 서부 유럽의 도시들에 비하여 전반적으로 발전의 수준이 낮아, 서부 유럽의 도시같은 기능을 하지 못했다. 더구나 서부 유럽처럼 도시의 활력을 유지해주는 모직물 제조업이 발달한 도시가 동부 유럽에는 없었다. 또한 동부 유럽의 도시들은 홀란드와의 해상경쟁에서 패배)하여 15세기 말경에는 한자(Hansa)도시들)도 소용이 없어졌다. 서부 유럽의 영주들처럼 노동력이 절감되는 양모산업으로의 전환 기회가 없었고, 토지에 대한 노동력의 부족이 더 심각했던 동부 유럽의 영주들은 결국 농민들의 권리를 파괴하고 그들을 예속상태로 전락시키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에 농민들을 강하게 억압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정책에 위협이 되는 도시의 자율성과 활력을 소멸시킬 필요가 있었다. 폴란드는 외국 상인과의 직접거래를 위하여 지방의 집산 시장을 없애고, 공산품의 최고가격을 도입했다. 더 나아가서 도시인의 토지소유를 금지하고, 도주한 농노를 도시가 받아들이는 것을 금지했다. 그 같은 모든 조치들은 도시경제의 존립을 어렵게 만들었다. 15~16세기를 거치면서 동유럽의 농민들이 점
피와 투쟁으로 이룬 근대의 쟁취 :혁명과 반동의 19세기Ⅰ. 서론 ⅳ. 왕정복고Ⅱ. 혁명과 반동의 19세기 ⅴ. 제2공화정ⅰ. 세기의 시작 ⅵ. 제2제국ⅱ. 산업사회로의 이행 ⅶ.제3공화정ⅲ. 계속되는 기득권(명사들) Ⅱ. 결론Ⅰ. 서론19세기의 프랑스는 혁명과 반혁명을 통한 진보와 반동의 변증법적) 시기였다. 프랑스는 1789년 대혁명의 인권 선언)을 통해 자유와 평등의 이념을 선포 하여 앙시앵 레짐의 붕괴와 부르주아지의 주도의 근대의 이행이 이룬다. 하지만 이러한 시대의 변화와 쟁취는 그냥 이뤄진 것이 아니다. 혁명을 완수 하려는 세력과 이를 저항 하려는 세력 간에 끊임없는 투쟁과 타협의 역사인 것이다. 다양한 정치적 구성원들의 이해관계가 어떻게 충돌, 타협하며 혁명의 정신을 계승해 근대국가를 완성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Ⅱ. 혁명과 반동의 19세기ⅰ. 세기의 시작1789년 이후 국민공회, 공포정치, 나폴레옹 제정성립)으로 19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까지 빠른 호흡으로 달려온다. 나폴레옹은 1799년 쿠데타로 통령정부를 수립했으며, 마침내 1804년 황제로 등극하면서 제1제정은 시작된다. 그는 법전의 편찬 중앙집권화, 유럽과의 전쟁의 승리로 대륙의 지배가가 된다. 하지만, 영국과의 트라팔가 해전의 패배는 대륙 봉쇄령을 선포하게 된다. 나폴레옹의 정복 전쟁은 그에게 정복되거나 굴욕을 맛보게 된 국민 사이에 민족주의를 낳게 하고 그것은 나폴레옹 몰락의 주된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1808년 에스파냐의 봉기와 러시아와 전쟁에서의 패배는 그를 벼랑으로 몰고 갔다. 1814년 그는 연합군에 퇴위당하고 엘바 섬에 유배를 당한다. 그 후 다시 재기 하는 듯 했으나 워털루 전투의 패배로 백일천하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19세기 초 의 나폴레옹 프랑스의 정복과 군사적 승리는 프랑스의 혁명의 이념을 전파시켜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심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 한다.ⅱ. 산업사회로의 이행대륙봉쇄로 인한 해외무역은 대부분 파괴 되었지만, 왕정복고는 평화와 정치적 안정으로181 형성은 생산성의 증가, 교역의 증가로 상업화를 가져왔다. 물론 프랑스는 영국과 같은 나라와 비교하여 후진성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점진적 이었으며, 1840년대에 가서야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공업의 경우 19세기 전반기의 낮은 성장률, 이후 후반의 52~57년의 급성장기 이후 불황과 호황의 경기 순환 속에 성장을 했다. 이러한 성장률에 미치는 주요한 요소는 기술개발과 자본 투자였다. 이러한 산업사회로의 이행은 점진적으로 열린 공동체로의 전환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1840년대 공업이 농업을 추월하며 자본집약적 생산방식의 확산되 나갔다. 공장의 기계화는 높은 생산성의 증가를 가져오기 시작한 것이다. 대규모 사업체의 번성과 더불어 소규모 사업 또한 고도의 전문화를 통해서 시장에서 생존해 나갔다.이러한 산업사회로의 이행은 사회혁명을 불러왔다. 경제구조의 변화는 생활수준을 대폭 개선시키고 삶에 대한 태도를 변화 시켰는데, 그 영향은 사망률과 출산율의 하락에서 명백히 나타난다.) 19세기 중반이후의 급성장기를 거치면서 농촌 인구의 도시유입이 크게 일어 나난다. 서유럽의 다른 지역에 비해 완만했지만 촌락과, 소도시들의 괄목한 만한 발전이 일어났다. 특히 이는 파리의 발전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농업적인 생산 형태가 점차 북부와 동부 외각중심으로 중공업의 발달을 가져 왔으며 이는 도시인구의 유입과 더불어 하층민의 변두리 구역으로 이주를 가져왔다. 농촌의 빈곤은 이러한 이주를 가져왔다. 도시화와 산업화는 농민들의 임금노동자로 편입을 가속화 시켰다. 교육을 통한 대중의 문자해독능력이 향상이 크게 일어나고 있었다. 이것은 교육을 통해서 대중을 문명화시키고, 엘리트의 권력을 안전하게 보장해 주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다.)ⅲ. 계속되는 기득권(명사들)대혁명으로 신분적 특권이 붕괴되면서, 부가 사회적 우월성을 가늠하는 최고의 기준이 되었다. 혁명기 이전의 기득권을 가지고 있었던 전통적 지배세력인 귀족과 비 귀족 지주들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관료 및 과거 정부에 봉사한 경의 영광의 제정의 시대를 거쳐 다시 왕정으로 복귀 하게 된다. 외국 군대의 마차에 실려 돌아온 부르봉 왕가는 1814~15년에 충분한 양보를 했기 때문에 부르주아지에 의해서 받아드려 졌다. 그들은 혁명의 주요한 성과들을 유지했으며 황제에 의해서 폐지된 몇 가지 자유조차도 재확립했다.)하지만 대혁명기간동안의 망명한 귀족들의 지위와 재산권이 존중되면서 반대파가 서서히 일어난다. 점점 왕당파대 자유주의자들, 귀족 대 비귀족 등 정치적 양극화의 과정이 가속화 되었으며, 1824년 샤를 10세가 즉위하면서 높아져 갔다. 샤를10세의 의회는 5분의 3이 귀족이었으며, 절반은 망명경험을 가진 자들로, 군주정으로 바꾸려 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현상은 앙시앵 레짐으로 복귀가 진행된다는 두려움을 낳았다. 점점 반동에 대한 혁명의 세력들인 결집이 이뤄지기 시작 했으며, 흉작과 식품가격의 앙등 실업과 빈곤의 문제가 위기감을 고조 시키고 있었다.1830년의 선거결과는 반대파의 다수파 등단으로, 왕은 의회를 해산시켰으며, 대립의 칼날은 높아져 갔다. 대다수의 귀족은 왕의 편에서 부유한 지주, 제국관리, 지유직종 종사자들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자들은 끝내 유혈 충돌하게 된다. 샤를10세의 엘리트의 일부인 귀족집단만을 과도하게 선호함으로써 1789년 이래 다른 명사들이 누려온 지위를 위협했다.) 샤를10세는 물러나게 되며, 자유주의자들이 승리를 쟁취하게 된다. 하지만 입헌 군주제의 원칙은 수호 되며 7월 31일 루이 필리프에게 왕위가 이양된다.이러한 7월 혁명은 귀족을 배제한 대부르주아의 지배권을 확립한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목적을 달성하자 정치적 보수주의자들의 되어서 개인적인 자유와 사유재산을 보호하는데 관심을 기울였다.) 7월 혁명을 통하여 유권자의 기준은 300프랑에서 200프랑으로 낮춰 졌지만 하층 중간계급, 농민 노동자 시민의 대다수는 제외 되었다. 또한 공화주의자)들은 여전히 소수였지만 자신들의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이와 더불어 파리 노동자들도 정치무대위로 올라오기 시작한다대표하는 듯이 보이는 이 체제로부터 느꼈던 다른 사회집단들의 소외감을 명백히 분출시킨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 정부는 수상을 바꾸며, 개혁의 의지를 표명해, 시민군 진영을 기쁘게 했다. 그러나 , 노동자 구역의 바리케이트가 건설되고 있었으며, 발포명령 없는 사격이 이뤄져 분노한 군중의 대대적인 저항에 부딛친다. 2월 24일에는 1500개의 바리케이트 세워 왕을 대항한 대중봉기가 일어난다. 이는 제2공화정의 성립을 가져왔다.ⅴ. 제2공화정정부요직의 경험이 없는 중소 부르주아지들은 미숙함을 드러내며, 온건파의 연속성 유지와 파리 군중들의 남성 보통선거권, 국민방위군의 민주화, 출판과 집회의 자유 주장으로 서로 상반된 입장을 드러낸다. 새로운 시대에 대한 기대감은 커져만 갔다. 2월 25일 임시정부는 노동권을 인정했지만, 그들의 정책은 군대에 의존적이며, 사회 엘리트에 대한 의존을 강화시키며 대중의 지지로부터 멀어져 갔다. 세계 주요국가로서는 역사상 최초로 남성 보통선거가 1848년 4월, 84%가 참가하는 높은 참여율 속에 이뤄진다. 하지만 이러한 꿈의 실현은 실망으로 돌아온다. 조직된 정당이 부재한 상황에서 대부분의 지역, 특히 농촌 선거구에서 어느 후보를 선택하는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정치적 경험이 풍부한 소수집단인 명사들이의 활동여부에 좌우되었다.) 보수파의 조직과 선전은 우위에 있었으며, 유권자들은 성직자를 포함한 지역공동체에서 부와 교양이나 기능에 의해 지위가 보장된 후보를 뽑은 것이다.) 선거 결과는 명백히 반동적이었으며 “자유 아니면 죽음을!”외치는 6월 항쟁을 벌이지만 집단적인 지도력이 부재인 민중은 부르주아와의 계급투쟁에서 무참히 무너진다.정치활동이 철저히 규제된 가운데, 1848년 12월 10일 루이 나폴레옹는 74%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 된다.) 보나파르트의 내각은 보수주의자로 채워졌다. 제헌의회 의원들은 스스로 해체하고 5월 13일 선거에 집중한다. 급진적 공화주의자, 반동적인 보수주의자로 명백한 분열을 나타낸 선거에서 좌파적 급진파의 대한 두려움과, 자신들의 특권을 지키기 위한 엘리트의 적극적 폭력진압을 보여 주는 것이다. 또한 남성 보통선거권의 획득을 통해서 대중에 정치화를 가져온 시기였다.ⅵ 제2제국황제는 전권을 쥐고 권력을 곤고히 만들어 간다. 이와 더불어 독재는 자유를 탄압하였다. 언론과 통제하며, 교육을 엄격히 규제 하였다. 하지만 정치와 언론은 크게 위축 되었지만, 경제번영과 외교적 승리를 거둬갔다. 제2제국은 초기 몇 년 동안 강한 정부와 정치적 안정이 경제적 번영과 결합체 강화를 가져온다. 55년의 파리 대 박람회 개최, 영국과의 우호수립, 크리미아 전쟁의 승리 등 많은 성과를 국민에게 가져다준다.하지만 사회의 혁명적 봉기의 가능성이 사라지며 질서가 회복되자 명사들은 자신들의 특권을 주장할 수 있는 의회제도의 재수립의 압력을 가했다.의회제도는 명사들이 정치적 결정 과정에 참여해 그들 자신의 이해관계를 적극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커가는 황제의 권력으로 자신들을 보호 하는 움직임은 보수적인 자유주의자부터 공화주의자에 이르기까지 권위주의적인 지배로부터 벗어나려 했다. 공화주의자들도 조금씩 규합해 자발적 결사를 이룬다. 하지만 60년대부터 정치상황은 더 이상 권위주의적으로 바뀌지 않았다.루이 나폴레옹은 의회의 기능을 환원 시키며, 예산에 대한 의회의 통제력을 강화 시킨다. 황제는 자유주의자 공화파마저 그의 체제로 포섭하고자 한다. 또한 좌파에게도 화해의 제스처를 보내는데 1864년 파업의 합법화, 조합 활동을 점차 허용한다. 초기의 억압적 제정이, 경제적 호황기와를 맞으며, 자유주의적 제정으로 전환을 나타내는 것이다. 황제는 산업 부르주아지들의 대변자 역할을 한 것이다. 산업 부르주아지들은 철도의 확장, 군대와 건설 분야의 수요는 금속업의 판로를 넓혔고, 생활수준의 상승은 대 직물업자들의 이익을 증진시켰으며, 과학적 발견과 기술의 진보는 화학 산업 선구자들에게 길을 열었다.하지만 이러한 가시적 성과에 불구하고, 의회 내에 반대파들이 성립된다. 공화파, 독립적 자유주의자, 비
프랑스의 대숙청-비시정부의 숙청을 중심으로-서론 - 프랑스가 집행한 숙청은 선인가, 필요악인가? -2차대전 후에 치러진 프랑스의 대숙청은 지금의 프랑스를 존재하게 한 위대한 업적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프랑스와 달리 민족반역자의 숙청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한국에서는, 드골이 이룩한 대숙청이 많은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동서고금에 등장했던 여러 나라들도 이처럼 대대적인 숙청이 많이 일어났었다. 실제로 건국초기에 과거의 잔재를 청산하고 대폭 물갈이를 한 국가가, 오랫동안 번성하여 강대국을 이루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그러나 이처럼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하는 일이 과연 정당한 일인가? 정의의 이름으로 사람목숨을 좌우하는 이러한 처사가 무조건 옳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우선 비시정부의 대해서 살펴보고, 무자비하게 이루어진 프랑스의 대규모 숙청을 비판하는 방향으로 내용을 전개해갈 것이다.1. 2차 세계대전과 비시정권의 성립1939년 9월 1일 히틀러는 폴란드를 선전포고도 없이 침공해 들어갔다. 이틀 후 영국과 프랑스는 나치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9월 10일에는 캐나다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해 영·불 연합군과 합세했다. 이렇게 해서 제2차 세계대전은 유럽대륙에 폭발했다.독일은 27일 만에 폴란드의 항복을 받고 일차 승전고를 올렸다. 그러나 연합군이 포진한 프랑스 간 국경선은 양측이 엄청난 인명피해를 내지 않으면 승패를 가르기 힘들만큼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독일과 프랑스사이의 서부전선에는 프랑스가 난공불락이라고 자랑하는 마지노선의 요새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8개월 후인 1940년 5월10일, 독일군은 마지노선을 직접 공격하지 않고 북쪽으로 우회해서 침공하였다. 프랑스가 자랑하는 마지노선의 요새는 히틀러가 베네룩스 3국을 전격전으로 돌파함에 따라 무용지물이 되었다. 나치독일군의 빠른 진격속도로 인하여, 프랑스정부는 파리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게다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까지 프랑스로부터 전리품을 얻어내기 위해 전쟁을 선포하고 나섰다.어쩔 수 없이 프랑스 정부는 나치독일과 휴전조약을 체결한다. 북부 프랑스는 나치 독일군이 직접 점령하고, 남부 프랑스는 중부휴양도시 비시에 페탱원수를 중심으로 하는 휴전파가 정부를 구성해 통치하게 되었다. 이시기에 만들어진, 페탱을 국가원수로 하는 괴뢰정권을 비시정권이라고 한다.2. 비시정권의 특징페탱은 새로운 체제의 기초가 ‘일, 가족, 조국’이 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는 프랑스를 더욱더 전통적이고 가부장적이며 권위적인 가치 위에 다시 세우기를 원했다. 이 당시 파업과 노동조합은 금지되었다. 그리고 비시정부의 청소년들은 청년 운동 단체에서 “남자다운 사람이 되라.”라고 교육받게 된다. 또한 동성연애에 반대하는 강력한 법을 도입시켰고, 이혼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법도 만들어졌다. 낙태 금지법도 더욱 강화되었다. 프리메이슨 단원)들과 유태인들은 심한 탄압을 받았다. 이러한 가치들의 주입이 나치 지배의 공포로부터 프랑스 민족을 보호한다고 페탱은 주장하였다.그러나 프랑스의 경제가 독일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이 명백해질수록 나치 체제와 공동의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다. 페탱의 ‘방패’는 이러한 현실을 저지하게엔 터무니없이 무력하였다. 프랑스는 독일에게 필요한 전쟁물자의 최대 공급지가 되었으며, 인력 공급 면에서도 폴란드에 이어 세 번째였다. 비시는 수동적 협력관계를 넘어서 프랑스의 군사, 경찰, 통신, 사법 기구들 전체를 독일군 멋대로 주무를 수 있게 해 주었다. 이로 인하여 비시 정부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을 중심으로, 레지스탕스 세력이 서서히 형성되게 된다.3. 전쟁 종결, 드골의 등장과 숙청의 준비비시 프랑스에서 레지스탕스는 결코 대중운동이 아니었다. 기껏해야 인구의 1% 정도가 적극적으로 참여했을 뿐이다. 레지스탕스에게 부족했던 것은 총체적인 조직력이었다. 결국 이 조직력은 외부로부터, 즉 전직 전쟁 차관이었던 샤를 드골로부터 왔다. 드골은 1940년 패배의 와중에 영국으로 탈출하여, BBC 라디오 연설을 통해 항전을 계속할 것을 호소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 그를 드러내 놓고 지지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드골과 그의 임시정부인 자유 프랑스 위원회는 내부의 레지스탕스 세력과 맺고 있던 긴밀한 관계의 이점을 십분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레지스탕스는 연합군과 공조하며 전쟁을 수행하였다. 2차 세계대전은 연합군의 승리로, 드골은 파리의 샹젤리제로 개선할 수 있었다.드골은 종전 후 숙청을 최우선 과제로 설정해 실천에 옮기고 있었다. 그러나 이 작업이 여론의 지지를 어느 정도 받을지는 의문이었다. 왜냐하면 프랑스본토에서 나치독일 점령시기를 살았던 절대다수의 국민들은 나치에 협력하지도 않았지만, 저항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많은 프랑스국민들은 페탱원수에 대한 존경심도 버리지 않고 있었다. 페탱은 연합국에 선전포고를 하지 않아 프랑스를 중립지대로 남아 있게 했고 히틀러의 동반자라는 오명에도 불구하고 연합군과 전쟁을 피하는 슬기로운 면을 보였다. 특히 미국은 비시정권말기까지 수교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해방된 후 프랑스는 드골과 페탱, 2개 세력의 프랑스로 불리기도 했다.대숙청은 비시정권을 동정하는 여론을 잠재우고 그들에게 나치협력 민족배반자라는 낙인을 확실히 찍기 위한 드골의 전략이 있었던 것이다. 페탱에 대한 드골의 민족반역자 규정은 나치독일과 휴전협정을 통해 프랑스를 구출했다는 비시정부의 선전을 정면으로 뒤집는 논리였다. 실제로 파리해방 후 페탱숙청에 관해 여론조사가 실시되었는데 32%만이 숙청에 찬성했을 뿐 다수인 58%가 반대한 것으로 나타났다. 1차대전의 영웅인 페탱에게 국가반역자라는 낙인이 찍힌다면 수많은 프랑스인이 정신적으로 상처를 입을 가능성이 많았다. 그래서 프랑스 우파는 페탱과 드골의 화해와 협력을 은근히 기대하는 분위기마저 형성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우파 간 화해분위기는 여론으로 표면화될 수 없었다. 반나치 저항단체들과 공산당의 존재 때문이었다. 프랑스 해방의 가장 큰 기여를 한 그들을 무시하기는 어려웠고, 결국 숙청은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드골은 ‘페탱의 계승자’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사회당과 공산주의자들을 애국자로 평가해 좌파의 동반자가 된 것이다.4. 1차대전의 영웅 페탱의 운명드골이 샹젤리제 대로를 개선장군으로 행진하고 있을 때 중부도시 비시에서는 괴뢰정권 비시정부의 이사준비가 한창이었다. 페탱은 독일의 강요에 의해 철수하는 독일군을 따라 동쪽으로 피신해야만 했다. 나치독일은 페탱을 납치해 망명정부의 수립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그는 히틀러의 망명정권 수립요구를 거절하고 제 발로 프랑스에 귀환한다. 그것은 드골과의 합작의사를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페탱은 프랑스로 돌아가면 국민이 모두 단결해 과거처럼 자신을 지지할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국내 상황은 페탱의 희망과는 전혀 다르게 진행되었다. 저항운동세력이 연합군보다 먼저 파리를 해방시키는 등 정세가 급변하고, 저항운동에 큰 기여를 한 공산당의 세력이 만만치 않았다. 결국 이러한 환경이 드골에게 페탱을 민족반역자로 숙청재판을 하게 만들었다. 우파 간 합작 시나리오는 실현되지 않았고 그래서 페탱은 나치협력자로 역사적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페탱은 재판소에서 자신을 변호하는 성명서를 낭독한다.) 성명서의 핵심논리는 자신이 프랑스 국민을 보호하는 것만을 생각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형선고에 대한 투표결과는 반대 13표에 찬성 14표였다. 1표 차로 페탱의 사형이 결정된 셈이다. 드골은 재빨리 형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했으나, 페탱은 오래 살지 못하고 5년 후에 감옥에서 생을 마감한다.5. 정치혁명 성공시킨 대숙청드골은 해방된 후 정치적 권위를 어떻게 세우느냐의 문제를 갖고 고심하였다. 미국이 시민폭동 등에 따른 무질서를 구실로 군사정부의 설치를 준비하고 있어, 자칫 잘못하다가는 프랑스가 미국의 밑에 들어갈 위험마저 있었다. 또한 드골에게 최악의 시나리오는 비시정권이 연합국의 승인을 계속 받는 것이다. 이러한 위협들을 피하기 위해 합법적인 공화정을 조속히 수립해야만 했고, 한편으로는 대독일 전쟁을 수행하면서 국가를 재건해야만 했다. 나치협력자에 대한 숙청은 신속해야만 했고 전시적으로 집행될 수밖에 없었다.당시 숙청으로 희생된 공직자는 12만 여명에 이른다. 관료와 자유직업사회의 대숙청 결과 무려 1백만 여명이 직장에서 추방됐다고 하는 주장도 있다. 경제계도 마찬가지였다. 대기업의 회장이나 사장들은 기업인숙청에 벌벌 떨었다. 나치점령시절에 대기업들은, 독일의 경제와 군수물자를 지원하기 위해 자의든 강제든 동원됐기 때문이다. 드골의 국유화 정책은 경제부문 대숙청이라는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전후 폐허화한 경제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대기업을 국가가 소유해 관리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드골은 판단한 것이다. 이것은 개인이 희생하더라도 국가를 먼저 수호해야한다는 논리이다. 드골은 우파에 속하는 지도자임에도 대기업 국유화라는 사회주의정책을 선택하게 된다.프랑스 정계는 다른 부문보다 가장 혹독한 숙청을 경험했다. 전쟁전의 국회의원들 가운데 전쟁 후에 살아남은 정치인은 10%도 되지 않았다. 정계의 완전한 변화는 저항운동출신이 아니면 선임될 수 없는 새로운 정치관행이 만들어졌다. ‘합의에 의한 독재자’로서 군림한 드골은 이처럼 과거와 철저한 단절을 통해 새로운 정치무대를 창출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6. 숙청의 불안어느 누구도 깨끗하지 않았다. 비시의 몰락 및 독일군의 퇴각으로 발생한 권력 공백기를 틈타, 끔찍한 보복의 물결이 휩쓸고 지나갔다. 몇몇 과격한 자경단원들은 독일 병사와 동침했다는 이유로 창녀들의 옷을 벗기고 머리를 삭발시켰다. 심지어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치협력자로 모함을 받아서 감옥에 들어가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곳곳에서 ‘숙청은 복수가 아니다.’ ‘숙청이란 이제 하나의 코미디에 불과하다.’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