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학로 한쪽 골목 구석에 있는 한 칸짜리 작은 방에서 살고 있다. 처음에 방을 구할 때 방이 조용하고 넓어서 좋아했었다. 그러나 평화로운 시간도 잠시 뿐. 내가 입주하고 한 달 쯤 뒤에 중국인 종업원 3명이 옆방으로 입주했다. 그들이 오고 나서 이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계약을 맺은 이 방은 방음이 전혀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 노래를 흥얼거리는 소리, 심지어 잠잘 때 코고는 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었다. 이것은 사생활이 보장되는 것은 고사하고 편안하게 제대로 잠을 청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결정적으로 그들은 밤 늦게 일터에서 돌아와서 음악을 크게 틀어놓는 취미가 있었다. 음악을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는지, 그들의 오디오는 베이스음이 두드러지게 강조되는 것이었다. 이것이 신경에 더욱 거슬렸다. 결국 내가 선택한 해결책은 그들이 너무 시끄럽게 할 때마다 벽을 주먹으로 치는 것이었다. 내가 벽을 쳐서 쿵 소리를 내면 그들은 잠잠해지곤 했다. 그렇게 소음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루는 열 한시가 훨씬 넘어서도 그들이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있어서 항상 하던대로 벽으로 쿵 신호를 보냈다. 그런데 갑자기 벽이 튀어나올 정도로 반대쪽에서 벽을 때리는 것이었다. 나는 깜짝 놀랐고, 그 뒤로 나는 벽을 치는 것을 그만 두었다. 이후로, 그들은 다툼에서 이겼다고 느꼈는지 음악을 더 크게 더 늦게까지 틀어댔고, 반대로 나는 신경쇠약증에 걸릴 뻔했다. 요약하자면 이 문제는 음악을 듣고자 하는 그들의 욕망과, 소음에 방해받지 않고 편하게 집에서 쉬고 싶은 나의 욕망이 서로 충돌하고 있는 것이었다. 또한 이것은 힘든 노동후에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싶다는 그들의 기본적인 욕망과, 집에서는 안락하게 아무 방해없이 쉬고 싶어하는 나의 본능적 욕망이 충돌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서로에게 결코 양보하기 어려운 중요한 문제였다. 나는 이 문제를 중국인들과 내가 개인적으로 대면해서 풀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어서 상황을 설명했다. 다행히, 집주인은 나의 권리가 더 중요하다고 파악해서 그들에게 제재를 걸었고 나는 다시 소음 없는 밤을 찾을 수 있었다. 이 분쟁은 ‘집주인’이라는 쌍방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존재가 있었고, 상충되는 가치에 대해서 중요도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있기 때문에 쉽게 해결될 수 있었다. 이것은 사회에서 어떤 가치가 충돌했을 때 그것을 법이라는 기준으로 평가하고, 법적인 공권력을 가지고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상황과 유사하다. 그러나 이와 유사한 상황이 대학에서 벌어지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기가 힘들어진다.5월은 대학생들의 축제가 있는 기간이다. 대학생들은 축제를 위해서 여러 가지 행사들을 준비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고 인기가 많은 것은 ‘밴드 공연’이다. 현란한 전자기타소리, 고막을 두드리는 듯한 드럼소리, 심장을 울리는 베이스 소리들은 학생들이 대학에 입학해서 맞이하는 자유감을 고취시키고, 그들 스스로가 문화의 주체자가 되어 축제를 향유한다는 느낌을 갖게 만든다. 또한 이런 공연 문화들은 대학생들의 패기와 열정을 상징는 것이 되면서, 축제 내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빠질 수 없는 중요한 행사로 자리 잡았다. 요컨대, 대학교 축제에서 공연 문화라는 것은 대학생들의 양보할 수 없는 권리중에 하나이고, 여기에 관련된 욕망도 결코 양보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한편 공연문화는 대학 내에 있는 일부 사람들에게 큰 반발감을 일으킨다. 공연에서 발생하는 소음은 수업진행에 큰 방해가 되고, 중요한 시험을 앞둔 학생들의 집중력을 현저하게 약화 시킨다. 이 문제는 앞에 제시한 우리 집 벽 사이에서 일어나는 문제와 서로의 권리를 양보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집에서의 소음 문제처럼 벽을 두드리거나, 주인집에 전화를 하는 것 같은 간단한 시도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수업에 방해가 되었다고 교수가 공연을 하고 있는 대학생들의 마이크를 걷어찬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이 사건은 신문에 보도될 만한 이슈가 될 것이다. 대학생들이 축제기간 때 공연등을 통해서 발생시키는 모든 소리들은 암묵적으로 허용된다. 이것을 즉, 밴드의 멤버들은 그들의 앰프를 최고볼륨까지 아무런 제재없이 올릴 수 있는 행동으로 나타난다. 이 상황을 우리 집 벽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로 대치해서 생각해 보자. 옆방에서는 중국인들이 축제를 열고 있고 그들이 축제를 벌이는 행위는 그들의 정당한 권리이다. 앰프의 볼륨을 최고로 올리는 행위는 용인된 것이며, 그들은 음악을 즐기는 것이 자신들의 정당한 권리라고 생각하며 오히려 당당하게 소리를 높인다. 반면에 옆방에 살고 있는 나는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공부를 하고 있는 학생이다. 나는 벽을 두드릴 수도, 주인집에 전화할 수도, 법에 호소할 수도 없다. 그들의 큰 음악소리는 적어도 축제기간 동안은 ‘내가 소음을 듣지 않을 권리’보다 우선하는 가치가 될 것이다. 또한 여기에는 ‘주인집’같이 통제력을 가지고 쌍방을 조율할 수 있는 기관이 없을 뿐 아니라, 있다고 하더라도 주인집은 그들의 편을 들어줄 것이다. 이제 나에게 남은 희망은 그들의 축제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 뿐이다.이 상충하는 가치에 대한 완벽한 해결은 어렵다. 다만 우리는 이해 당사자의 권리를 최대한 보호하는 차원에서의 대안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결국 이 문제는 공연에서 소리를 높이는 행위를 어떻게 통제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로 귀착된다.강제력을 행사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공연의 당사자가 자율적으로 소리를 낮추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공연을 하는 밴드는 소리를 키우기 위해서는 안간힘을 쓰지만 소리를 줄여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조그만 자성도 보이지 않는다. ‘목소리가 크면 장땡’이라는 생각이 공연기획자들에게 만연해 있다. 소리가 작으면 자신들의 공연이 다른 사람들의 공연에 묻힌다. 언플러그드로 공연하고 있는 춤패탈의 북소리는 그 맞은편 동아리의 큰 앰프소리 마이크소리에 묻혀서 잘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소리를 키워야 한다. 가능한 최대한으로. 그 결과 대학생들은 학교 어디에 있어도 공연소리를 들을 수 있다. 때로는,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몇 개의 라이브 밴드 소리가 한꺼번에 들릴 때도 있다. 이것은 대학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소음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를 빼앗기 때문에 폭력적이다. 자신들은 좋아하는 음악을 열심히 하고 있을 뿐이고, 아무런 폭력도 행사하지 않았는데 왜 폭력적이라고 하는가? 라고 반론할 수 있다. 그렇지만, 주먹을 휘두르는 것만이 폭력은 아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폭력의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자신이 폭력의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거의 자각이 없다. 축제니까 ‘당연히’ 락 밴드가 있고, ‘당연히’ 큰 소리로 라이브 공연을 해도 된다’라는 생각에서 폭력성이 생긴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타인의 권리를 상당부분 침해하면서 누리는 권리이고, 따라서 공연은 이 사람들을 최대한 배려한 상태로 이루어져야 한다. 당위에 대한 반성이 공연당사자들에게 필요하다.
1997년 복제양 돌리의 탄생은 전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몰리의 탄생은 성숙한 개체의 체세포로부터 독립된 하나의 개체를 인공적으로 발생시킬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인간의 성숙한 체세포로부터 복제 인간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러한 생명공학계의 비약적인 기술성장으로 인해 인간복제가 사실상 가능해졌고, 이것은 또한 생명윤리와 관련된 거센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인간복제를 찬성하는 사람들은 생명공학이 인간에게 가져다 줄 유용성과 경제적 가치를 내새웠다. 반면에 인간복제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것은 생명의 존엄성을 해치기 때문에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현재 법조계에서는 인간복제를 반대하는 측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는 듯하다. ‘생명윤리기본법의 인간복제 등의 금지’에 관한 조항을 보면, '누구든지 체세포복제배아를 자궁에 착상시켜서는 아니되며, 착상된 상태를 유지하거나 출산하여서는 안된다'라고 제시하면서 인간 복제를 전면적으로 금지하고 있다.인간복제에 대한 격한 논쟁은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계속되고 있다. 각측의 주장이 현재 당면한 문제에 대해서 자신들의 입장만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 복제에 관한 입장의 차이는 종교적 차원이나 사상적인 근거에 있기 때문에 합의점에 도달하기 어려운 이유도 있다. 그러나 생명복제의 영역의 확대는 필연적이다. 만약, 생명복제가 먼 미래까지 허용되지 않는다면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에 의해 음지에서 생명복제 기술에 관한 거래가 이루어질 것이고, 그것은 사회적으로 큰 해악이 될 것이다. 따라서 인간 복제의 문제는 생명윤리의 문제와 함께 그 영역을 어디까지 확대하는 것이 적당한가에 관한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위해서는 인간복제가 허용된 미래의 상황을 가정하고 생각해보는 것이 효과적이다.생명윤리를 떠나서 생각할 때, 생명복제가 인류에게 주는 혜택과 가능성은 막강할 것이다. 생명복제는 화학약품과 기계적인 수술에 의존하고 있는 현재의 의학수준을 비약적으로 향상시켜줄 것이다. 이를 테면, 골수암에 걸려서 시한부인생을 선고받은 환자가 있다고 하자. 그럼 이 환자의 체세포 중 건강한 세포를 골라내서 배양한다. 그래서 배양한 객체가 성체가 되면 그 객체의 골수를 환자에게 이식할 수 있다. 이때 이식되는 골수는 자기자신의 유전정보와 동일한 객체에서 얻는 것이므로, 거부반응이 없는 이상적인 장기가 될 것이다. 또한 인간복제는 인간이 살아가면서 직면하게 되는 병과 죽음, 노화에서 자유로워 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예를 들어, 인간의 뇌이식이 완벽하게 이루어진다고 할 때, 체세포 복제로 개체를 발생시킨 후에 뇌를 이식한다면 인간은 노화와 죽음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미래의 복제인간은 실제로 누구의 필요성에 의해서 만들어질까? 또 이들이 복제인간을 만들어 낼 정당성을 가지고 있을까? 현재 법 규제 완화를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 두 가지 유형을 살펴보기로 하자.첫 번째는, 위에서 언급했던 불치병 환자들이다. 이들은 자기와 똑같은 유전자구조를 가진 복제인간의 장기를 직접적으로 이식받음으로써 병을 치료할 수 있다. 이 경우에 장기를 이식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복제인간의 생명은 자신의 생명보다 열등하다'는 것과 '복제인간은 수단으로써 사용될 수 있음'을 전제로 한다. 이 경우에 복제인간은 생명으로서 동등한 인격체가 아니고 단지 걸어다니는 장기 은행이라고 생각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미래에는 장기매매가 '슈퍼마켓'과 같은 곳에서 공공연하게 이루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두 번째는, 사고로 죽거나 불치병에 걸린 자식을 둔 부모들이다. 이들은 자식의 체세포를 복제하여 발생시킴으로써 자식의 유전자 구조와 동일한 아이를 얻을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복제인간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아야 한다. 우선 체세포를 복제해서 모체와 동일한 유전자 구조를 갖는 복제 인간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둘이 동일한 인간인 것은 아니다. 일란성 쌍둥이의 경우, 각각의 개체는 할구에서 동일하게 분할되었기 때문에 유전자 구조가 완전히 같다. 그러나, 모두가 알고 있는 것 처럼 이 둘은 전혀 다른 존재이다. 그들은 다른 인격을 가지고 있고 다르게 사고한다. 마찬가지로 복제인간도 완전히 독립된 개체이다. 또 한가지 간과하고 있는 점은 복제인간의 정체성이다. 복제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스스로의 존재이유가 누군가를 대신하는 것이고 자신이 자연적으로 태어난 인간과 다르다고 느낀다면 엄청난 혼란을 겪게 될 것이다. 현재 '청소년기의 자아정체성과 그 해결방법'이라는 문제의식이 있는 것처럼, 미래에도 '복제인간의 자아정체성과 그 해결점'이라는 새로운 문제의식이 대두될 수도 있을 것이다.복제인간이 현행인류와 전혀 다른 종류의 인성을 가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며칠 전 신문에서 체세포 복제 기술을 이용해 발생시킨 늑대 스눌푸들이 늑대들의 사회적인 약속을배우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동료 무리들에 적응하는데 실패해서 격리 수용하고 있다는 기사를 보았다. 이것은 복제된 객체가 원래의 종이 가져야 할 특성을 가지지 못할 수도 있음을 말해준다. 인간 복제에 적용해서 생각해 본다면, 복제된 인간은 인간 자체의 속성을 온전하게 지니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만약 복제인간들이 양심과 사회성같은 인간 고유의 본성을 갖지 않는다면 그것은 큰 문제이다. 심지어 복제인간의 본성이 자연적으로 태어난 인간들을 공격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생물을 기술적으로 복제한다는 것이 그 생물 모체의 생물학적 잠재력까지 완전하게 복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여기서 파생될 문제들에 대해서 완전하게 예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가?0241241 전기전자공학부나 도 원1. 진리와 자유의지“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32) 이 구절은 성경에 나와있는 말씀이지만, 성경을 안 읽어봤더라도 연세대학교 학생들에게는 낯설지 않게 느껴질 것이다. 이 성경구절은 연세대학교의 이념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어서 학교 내에서 자주 인용될 뿐만 아니라, 백양로 삼거리에 있는 비석위에 큰 글씨로 누구나 볼 수 있게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학문을 깊이 있게 연구하고 탐구하는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위와 같은 성경구절을 대학의 이념으로 차용한 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으로 보인다. 즉, 학문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진리와 가까워질 수 있고 그것은 우리의 정신을 자유롭게 한다는 것이다. ‘진리’와 ‘자유’는 인간이 논의할 수 있는 최상의 가치들 중에 하나이기 때문에, 이 두 개의 가치를 긴밀하게 연관시킨 위의 진술은 기독교인들 뿐에게만 아니라 비종교인들에게도 큰 무리없이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그러나 ‘진리’와 ‘자유’의 속성을 좀 더 숙고해보면 ‘진리’와 ‘자유’가 정말 상관관계가 있는 것인지 우리는 혼란스러워진다.‘진리(眞理)’라는 단어의 한자를 풀이해 보면 ‘참된 이치’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진리라고 하는 것은 절대적인 것이고, 한 개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다시말해, 진리가 아닌 것은 ‘거짓’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리는 진리가 아닌 것에 대해서 배타적이다. 또한, 진리는 모든 것에 적용되는 총체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진리라는 기준에 의해서 세상의 모든 것들은 (그 중에서 특히 이치와 원리에 관한 것) ‘진리’와 ‘진리가 아닌 것’ 두 가지로 나누어 질 수 있다. 논의를 인간의 행동에 구체적으로 적용해서 생각하면, 진리가 진술하는 범위안에서 인간의 행동은 ‘선’이되고 진리 밖에서의 그것은 ‘악’이 된다.이제는 ‘자유(自由)’에 대한 논의로 넘어가 보자. 한자의 뜻을 해석해본다면, 자유는 ‘스스로에게 말미암는다’라는 뜻이다. 즉, 어떤 전히 외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어쩌면 인간의 불완전성에 대한 상징일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진리가 생기는 순간부터 인간에게 자유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자유의지를 ‘선택의 자유’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판도라의 상자를 열 수 밖에 없는 아주 무지하고 어리석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결국 ‘금기를 지키는 것이 진리’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는 애초에 불가능했던 것임에 분명하다. 그렇다면, 신이 상정했던 ‘자유’란 악을 행하지 않을 ‘자유’(이것은 선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구속’을 의미하기도 한다.)내지는 ‘의지’를 의미한다. 이 명제는 결국 ‘진리 안에서의 자유’라는 통제된 ‘자유’라는 전제 위에서 증명되어야 한다. 이 명제를 다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진리는 일종의 ‘진리가 아닌 것에 대한 금기’이다. 그렇다면 진리는 일종의 악을 선택하지 말라는 하나의 ‘구속’이다. 그렇지만, 이 ‘구속’ 안에서의 자유만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유이다.2. 인간으로서의 진리종교적인 관점에서 진리의 문제는 논의하기 편하다. ‘진리’는 인간의 이성을 뛰어넘어서 당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당위성은 ‘진리’에 관한 논쟁에 방어적이고, 차단적이다. 즉, 인간의 이성과 종교에서의 진리가 대립하는 곳에서, 인간은 신의 의지를 알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논쟁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진리의 관점에서, 진리는 ‘무조건’ 옳은 것이고, 그것을 제외한 모든 것은 옳지 않기 때문이다. 진리의 절대성은 ‘인간 이성의 합리성’에 대해서도 배타적이다. 따라서 진리에 대한 논쟁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영역에서만 논의 될 수가 있는 것이고, 나는 인간으로서 진리에 대해 첫 번째 질문을 던진다.진리는 과연 존재하는가?혹자는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진리는 없다고 얘기한다. 진리라는 단어는 너무 이상적이고 포괄적이기 때문에, 실체가 없는 추론하기 어려운 개념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진리를 확고하게 추론하긴 어렵지만, 추론하기 어렵다고해서 실체가 없는 것라고 믿고 있는 것들도 어떤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관점에 따라 혹은 시대에 따라 바뀔 수 있는 상대적인 것이다. 사물에 적용되는 진리에 대해서 인간은 끊임없이 연구하고 알아가지만 결국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선 의문이다. 나아가서, 인간에게 적용되는 진리가 존재하는가에 대한 문제로 들어가보면 이 논의는 더욱 복잡해진다.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인간은 어디서 왔고 왜 존재하는 것일까? 이것은 종교인이고 아니고의 여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한번쯤은 숙고해 봤을 인생의 의미심장한 주제임에 틀림없다.인간에게 적용되는 진리에 대한 문제는 필연적으로 죽음이후의 문제로 넘어가기 때문에 이것은 일종의 종교적인 논의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 문제를 신의 의지와 관련된 진리로 설명하는 것은 논외로 하기로 한다. 우리가 관심있는 것은 인간으로서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서 탐구하려는 순간에 바로 직면하게 되는 단 하나의 문제가 있다. 인간은 죽음이후의 문제에 대해서 전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신의 입장을 빌리지 않고 인간으로서 이 문제에 대해서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죽음 이후의 문제는 오직 죽음을 경험해 본 사람만이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죽음을 경험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또 죽은자는 정작 말이 없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신을 매개로 해서 죽음 이후의 문제들을 탐구한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인간이 단독으로 신의 의지를 탐구할 수는 없으며 신의 진리에 관해서 알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절대진리는 존재하기는 하지만 인간으로서 알 수 없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요컨대 진리는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순수하게 인간으로서 여러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예컨대 신이 없는 상태를 상정해보는 것은 인간에게 진리가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시도가 될 것이다.신이 없다면 인간에게 적용되는 보편타당한 규칙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진리는 존재하지생각은, 자신들이 남을 배척‘할 수 있고’ 심지어는 처벌‘할 수 있고’, 더 나아가서는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는 것을 정당화시킨다. 때로는 인간은 ‘진리’라는 이름에 권한을 맞긴 채 잔인한 학살도 서슴지 않는다. 역사를 살펴보면 이와 관련된 수 많은 예를 접할 수 있다. 중세시대의 마녀사냥은 대표적인 예이다. 인간이 말하고 알고 인지하는 모든 것들은 ‘절대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것은, 이러한 근거없는 배척과 대치가 없어지기 위한 필요조건이 될 것이다.위에서 논의된 것을 진리와 자유에 관한 짧은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진리를 인간으로서 알 수 없다’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3. 실존하는 인간신적인 진리가 인간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인간 존재에 대해서 실존이라는 개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샤르트르의 말을 빌려서 써보자면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인간에게 본질이 있다면, 그것은 신의 의지이거나 자연의 이치 즉, 진리가 적용되는 인간의 고유한 성질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인간은 본능이 정해진 채로 태어났다기 보다는 하이데거가 한 말처럼 인생에 “내던져진 존재”에 가깝다. 즉, 인간은 태어나고, 눈을 뜨고 ,호흡하고, 살아간 후에 자신을 발견한다. 즉, 인간은 본질이 정해진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에 의해서 발견되는 존재이다. 인간의 본성은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각자가 스스로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다는 환상에 젖을 수 있다. 인간은 자유가 구속되는 모든 압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고, 스스로 임의적으로 모든 행동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인생은 자신의 의지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살면서 점점 드러나고, 자유의 문제는 곧 한계에 부딪힌다. 아주 큰 것으로부터 세세한 것까지. 인생의 모든 부조리를 맞이하면서 인간을 구속하는 압제는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낸다. 우선 인간은 육체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다. 육체 안에 한 생이 끝나고도 다시 영원히 살 수 있다는 말은 아찔할 정도로 인간에게 매혹적이다. 모든 물질은 사라진다. 인간도 사라진다. 인간이 영원하길 바라는 것은 모든 인간의 바람이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영원히 사는 것은 인간으로서 불가능하지만 신의 영역으로 넘어간다면, 인간은 어쩌면 영원히 살고 싶다는 바람을 버리지 않아도 될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존재가 사라진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끔찍하고, 우리가 영원히 살 수 있다는 바람이 사라진다면 절망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계약을 맺는다. 신의 이름으로 아래서 우리는 영원히 살 수 있다는 바람을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 종교를 갖는 것은 신의 진리라는 관점을 떠나서 볼 때 한없이 인간적인 행동이다.‘신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는 진실’을 마주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것은 우리의 영원성에 대한 희망을 빼앗아 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자유의 문제는 ‘우리가 신의 진리 아래에 있다’는 것으로 피해갈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은 ‘신이 존재한다’(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우리가 알 수 있는 단 하나의 명제는, ‘우리가 죽는 것은 진리이고 그것을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그래도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인가?궁극적으로 우리는 생의 구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다. 따라서 생 안에서의 자유란 진정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자유롭다고 느낀다면, 그 사람은 자유로운 것일까? 그가 느끼는 감각이 나쁘지는 않겠지만, 그 사람이 자유롭다는 것에 대해서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다. 감정은 일시적인 것이고 쉽게 변한다. 우리는 한순간 우리가 자유롭다고 느끼다가도 다음 순간 완전히 부자연스러움을 느낄 수 있는 존재들이다.자유란 또한 단순한 감각의 문제가 아니다. 자유란, 자유의 상태에서 지속성이 있는가의 문제도 포함하고 있다. 즉, 우리 안에서의 감정적으로 느낄 수 있는 자유뿐만 아니라, 우리가 어떠한 구속이 없는 자유로운 상황에 있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한다.동물원의 원숭이가 자신이 다.
얼마 전 유명한 사진전에서 상을 받은 한 작품은 특이한 소재를 이용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사진에서 사용한 소재는 사람의 똥이었다. 사진속에는 백인 황인 흑인이 등장하고 다른쪽에는 그들이 싸놓은 똥이 보인다. 즉, 인종이 달라도 똥은 같다는것을 보여줌으로써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참신한 발상으로 인간은 인종여하를 막론하고 모두 보편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인간의 보편적인 속성을 인간이 가지는 종의 특성에만 국한해서 설명함으로써 인종의 분리를 넘어서는 인류의 보편성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간단히 말해서 ‘똥개나 달마시안이나 같은 개다’라는 말로는 똥개와 달라시안을 가르는 혈통의 귀천을 없앨 수 없다. 그렇지만, 이브의 일곱딸에서 밝히는 인류의 기원을 생각해보면, 그들의 부끄러운 사진을 굳이 이용하지 않더라도 모든 인종(인종을 비롯한 모든 잣대)은 결국 하나의 모계조상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며, 따라서 피가 이어진 형제 자매들 같은 존재들이라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이브의 일곱 딸’은 한 저명한 유전학자가 과학적인 사실과 논리적인 추리를 통해서 유럽 전체 인구가 일곱명의 어머니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밝힌 책이다. 이 책의 추리는 ‘미토콘드리아의 DNA는 모계로만 유전된다’는 과학적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그렇다면 두 사람의 DNA 구조가 같을 때, 이들의 유전경로를 모계로만 따라가면 공통의 모계조상에 이르게 될 것이다. 유럽인의 DNA 샘플을 분석해 본 결과, 총 7가지의 패턴이 나타났다. 이것은 현재의 유럽인들이 단 일곱명의 모계조상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DNA서열은 임의적인 돌연변의에 의해서 변하고, 1개의 돌연변이는 약 1만년의 시간을 의미하므로 이것을 일종의 시계로 사용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DNA의 돌연변이 개수를 알아냄으로써 경과시간을 추정할 수 있다. 이 일곱 명의 공통 조상이 만나는 지점이 또한 나머지 세계의 사람들과 연결된다. 따라서 여기서 세계 전체를 포괄하는 훨씬 더 큰 모계 가계도를 구성할 수 있다. 이렇게 각각의 대륙의 공통 조상들을 찾을 수 있다. 이 공통 조상들은 전세계적으로 33개의 씨족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 중에서 13개가 아프리카에서 비롯됐다. 많은 고고학적인 증거와 함께 이제는 유전학적인 증거 또한 아프리카에 전 인류의 유전적인 뿌리가 있음을 뒷받침한다. 결국 모든 씨족들은 아프리카인의 어머니이면서 전세계 모든 씨족의 어머니인 단 한사람의 조상이 남을 때까지 하나의 가지로 모아진다. 이 한명의 사람을 미토콘드리아 이브라고 명명한다. 이것으로 전세계 모든 씨족의 가계도가 결정된다. 이것은 모든 인류를 서로 다른 종족으로 나눌 수 있는 유전적으로 순수한 분류법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이 과학적인 추론이 나타내는 많은 것들 가운데서 특별히 의미가 있는 한가지는, 인류는 한명의 어머니로부터 발생했으며 하나의 뿌리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현행의 인류에게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 과거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볼 때,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수많은 전쟁으로 점철되어 있다. 전쟁을 일으키는 원인에는 여러 가지 것들이 있겠지만, 그 전쟁을 정당화하는데는 오직 한가지 구실만이 이용된다. 즉, 적군은 부정한 행동을 한 나쁜놈들이며 우리편이 그들을 공격하고 그들에 대해서 적개심을 갖는 것은 정의롭다는 것이다. 이러한 배타성은 때로는 왜곡된 민족주의를 통해서 강화된다. 이러한 종류의 민족주의는 다른 민족들은 타 민족과는 다르다는 생각과 자기 민족은 타 민족보다 우수하다는 생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두 집단이 서로에 대해서 유대감을 갖고 배타심을 없애려고 할 때 과거에 그들이 하나의 뿌리로부터 발생한 한 핏줄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이 사실은 그들이 서로 이해하고 서로를 존중할 수 있는 근간이 되는 최소한의 필요조건을 제시한다는 것에서 의의가 있다.그렇지만, 배타적인 두 집단이 아주 옛날에 같은 모계 조상을 가진다는 사실 만으로 서로에 대한 완전한 유대감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내전이나, 집안끼리의 전쟁과 다툼에서 보이는 것처럼 어느 집단내에서도 인간은 자기가 속한 집단과 자기가 속하지 않은 집단 사이에 선긋기를 하고 있다. 자기가 속한 집단을 심리학적인 용어로 ‘내집단’이라고 부르고, 자기가 속하지 않은 집단을 ‘외집단’이라고 부른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아주 쉽게, 때로는 비합리적인 기준으로 내집단과 외집단을 가른다. 영화 ‘익스페리멘트’(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를 보면 인간이 ‘내집단’ ‘외집단’을 규정하는 것이아주 임의적으로 이루어지며, 내집단의 사람들과 외집단의 사람들이 서로 배치되는 상황에서 두 집단 사이에 강한 적개감이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화에서는 제비뽑기를 통한 임의적인 기준으로 피험자를 간수와 수감자로 나눈다. 실험 설계자들은 두부류의 사람들에게 서로의 합의하에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선택권을 준다. 이를테면 이들은 정해진 시간동안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담배를 피우면서 서로 시간을 보내다가 실험참가비만 받고 헤어질 수도 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간부측의 사람들은 실제의 간부처럼 수감자를 완전히 통제하려고 했고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는 강한 폭력행사도 서슴지 않았다. 반면에 수감자측은 실제의 수감자처럼 죄의식에 시달리고 대부분의 사람이 정신병에 걸릴 정도로 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결국에는 처음에 예정한 종료 시간 이전에 몇 명에 사상자가 발생함으로써 영화는 파국적으로 끝이났다. 여기서 보이는 것처럼 인간은 특별한 기준 없이 언제나 내집단과 외집단을 가르려고 하며, 상대집단에 대한 차별성이나 배타심 따위를 통해 자신이 속해 있는 집단의 우월감을 강화시키려고 한다.이런 편 가르기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전쟁이나 분쟁만은 아니다. 사회적 편견과 차별, 인종분쟁, 노예제도를 비롯한 각종 신분제, 여성의 권리에 대한 남성의 억압등이 나타난 원인은 인간이 서로 다르고 서로 구별될 수 있는 존재-또는 구별해야만 하는 존재-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류를 가를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일까? 국가?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 같은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 어떤 기준을 당신이 제시하더라도, 당신이 선을 가르는 순간 당신의 상대편에 서있는 것은 아주 오래전에 피를 같이 했던 형제, 자매들이다. 당신이 적개심에 찬 눈으로 당신이 배제한 집단을 바라볼 때, 우리의 미토콘드리아 어머니는 서러운 울음을 터뜨릴 지도 모른다. 인류 공통의 어머니인 ‘이브’의 상징성에 주목해 보자. 이브라는 인물은 인류 최초의 여성을 말할 때 자주 거론되는 것으로 종교적인 느낌이 강하다. 과학적인 추론에 의하면 최초의 인간은 단독으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이브’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 같다. 작가는 과학적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상징성을 가진 어떤 최초의 인간의 이름을 빌려서, 모든 인류가 하나의 뿌리로 이어지는 기적적인 사실이 갖는 의미가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만든다.영화 ‘피아니스트’에서 보면, 히틀러의 지위아래서 유태인들을 차별하고 심지어는 가차없이 처형하는 비이성적인 상황에서 나치간부 한명이 유태인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듣고 그를 한명의 인간으로 다시 돌아보게 되고 처형하지 않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음악에 대한 인류전체가 가지는 존중감과 그 음악이 일으키는 감동들은 인류 스스로가 정한 기준을 넘어서서 보편적으로 존재한다. 피아노를 연주하고 같은 음악을 감상하는 것으로 서로에 대한 편견과 배타성을 넘어설 수 있다. 일본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가졌던 어떤 사람이 여행중에 한명의 일본인을 만나 인간적인 교감을 나눔으로써 서로에 대한 유대감을 가지게 됐고, 일본 전체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는 들었다. 여기서 보이는 것처럼 집단과 다른 집단 사이의 편견이 없어지는 것은 아주 개인적인 차원에서부터 비롯된다. 즉, 내집단이 외집단에 대해서 가진 배타성을 없애는 것은 집단적인 선동이나 계몽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저 사람도 나와 다르지 않구나’하는 개인적인 경험과 깨달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런 유대감은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예를들면, 당신이 외집단으로 규정한 집단 내에서도 사람들은 비슷한 농담을 하면서 웃을 것이고, ‘오늘 내일 치를 시험’처럼 사소한 걱정거리들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이런 유대감을 나눌 수 있는 개인적인 경험이 많아질 수록 서로를 구분하고 배척하는 일이 줄어들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여기서 모든 인류가 한명의 어머니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주는 함의는 매우 가치있다. 모든 인류가 조상을 따라가보면 같은 어머니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은, 그것을 듣는 순간에 아주 먼 곳에 시베리아 산맥 꼭대기에 살고 있는 소녀에서부터 아주 오래전에 살다가 죽은 많은 사람들까지 모두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하는 감동적인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이것은 개인이 규정하는 내집단과 외집단의 한계를 무한이 넓혀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이타적이게 되는 가장 기본적인 동기를 부여한다.
아프리카 아이가 허리를 잔뜩 구부리고 웅켜 앉아 있다. 뼈가 앙상한 그 아이는 곧 숨을 거둘 것처럼 위태로워 보인다. 그 아이 뒤로 독수리 한 마리가 먹잇감이 죽기만을 기다리고 상을 받은 이후로 전례 없는 비판의 홍수가 쏟아졌다. 즉, 아이가 죽을 지경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소녀를 도와주지 않고 카메라의 셔터를 먼저 누른 것은 비윤리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이 사진작가는 비판의 목소리에 시달리다 못해 수상 3개월 후에 목숨을 끊는다. 사진작가가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비난여론에 대한 스트레스가 그 원인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한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할 정도로 치명적이지는 못하다. 퓰리쳐 상은 사건을 보도하여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친 기자에게 주어지는 상인데, 모든 기자들이 받기를 염원하는 영예로운 상이다. 퓰리처 상은 저널리즘의 정신을 기리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런 동시에 퓰리처 상의 수상자에게는 1만달러의 상금이 지급된다. 이 사진작가가 사진을 찍는 순간에 염두에 둔 것은 무엇이었을까? 현실을 고발하고 사회변화의 촉구를 하려는 동기였을까, 아니면 퓰리처 상의 영예와 상금이었을까? 작가가 끝내 자살했음을 미루어 볼 때, 사진을 찍은 경위에 퓰리처상을 받아서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 동기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은 곧, 언론매체가 객관적인 사실을 보여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며 또 그것에 인간의 동기가 개입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영화 ‘라쇼몽’에서 우리는 한 사건에 대한 네 가지의 진술을 듣게 된다. 이 진술들은 결국 한 남자가 살해되었다는 결론 말고는 서로 일치하는 부분이 거의 없다. 주인공들은 사건의 경위와 그 사건이 일어나게 된 각자의 동기를 묘사하는데에 있어서 거의 상반되는 진술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진술들을 판단하는 과정에서 나무꾼은 혼란스러워 한다. 이것은 언론매체들의 다양하고 편중된 관점들이 그것을 보는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현상과 유사하다. 언론매체들을 타지오마루, 남편, 아내로 대치시켜 보고 그것을 보는 사람들을 재판관 또는 혼란에 빠진 나무꾼으로 생각해보자. 여기서 사건을 판단하는 데 있어서 두 가지 관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다양한 진술을 들은 후에 혼란을 느끼는 나무꾼의 관점이고 둘째는 영화에서는 등장하지 않은 ‘현명한 재판관’의 관점이다. 나무꾼은 등장인물들의 진술‘속’에서 진실을 찾으려고 한다. 사건들을 진술하는 각각의 관점들 속에는 나름대로의 인과관계가 있고 모두 그럴 듯 해 보인다. 결국 나무꾼은 점점 더 혼란에 빠지게 되고, 이러한 ‘기묘한 이야기’를 해결하지 못한 채 화면 너머로 사라지고 만다. 나무꾼이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은 등장인물들의 진술이 모두 각자의 진실을 표현하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것은 언론을 접하는 시청자가 언론속에서 진술된 사실들이 객관적인 것이라는 오해를 가지는 것과 비슷하다. 영화속의 나무꾼과 마찬가지로, 언론매체를 보고 듣는 사람들이 그 언론의 교차하는 진술 ‘안’에서 진실(객관성)을 찾으려고 하면 할수록 혼란만 가중된다. 그러나, 언론에서 진술하는 것들이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에 불과하다. 이 글은 언론매체에서 객관성이 해체되는 과정을 단계적으로 생각해보고, 정보의 수용자가 ‘현명한 재판관’으로 존재할 때에만 미디어가 현실을 바라보는 하나의 창으로서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다.언론매체에서 기자들이 정보를 모으고 구성하는 과정에서 객관성은 처음으로 해체된다. 언론매체가 다루는 하나의 사건이 객관적이지 않은 일차적인 이유는 그 사건을 일으킨 당사자가 그것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 있다. 사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의 말을 빌려 그것을 기술한다고 해보자. 그 당사자의 말이 진실인가 아닌가를 비판적으로 생각해 볼 여지가 있지만 그것을 제쳐놓고 생각하더라도, 기자가 그 당사자의 말을 인용하고 변용하고 발췌하는 과정에서 진실은 더욱 요원해진다. 또한 문장을 구성하고 문단을 구성한다는 것은 (이것은 시청각자료에서도 마찬가지다) 완전히 계획적인 것이며 여기에는 주관성이 필연적으로 개입될 수 밖에 없다. 또한 사건을 묘사하는 어휘나 그것의 종결어미, 문장어투 등에서도 작가의 주관이 개입된다. 영화에서 스님의 태도를 주목해 보자. 스님은 인간을 믿어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모든 사건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도 자신의 믿음에 입각해서 그 사건을 이해하고 해석하려고 한다. 마찬가지로, 기자 본인의 신념과 믿음에 의해서 사건은 변용될 수 있다. 설사 주관성을 최대한 배제한다고 하더라도 타지오마루가 여자의 동기를 완전히 이해 할 수 없는 것처럼, 완전히 다른 존재가 하나의 사건이나 대상에 대해서 같은 견해를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객관성은 그것을 총괄하는 언론매체에서 편집되면서 다시 한번 왜곡된다. ‘게이트키핑’이라는 개념이 있다. 이것은 뉴스나 기사를 편집할 때 최종적으로 그것을 내보낼지 말지를 평가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기준 이외에도 언론이 보도하는 것은 ‘사실 그 자체’가 아니고 편집되고 재구성된 내용이라는 점에서 객관적이지 못하다. 또한 언론매체는 사건이 가지는 의미와 중요성을 기준으로 그것들의 순서를 배치한다. 즉, 중요한 사건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신문의 1면 혹은 뉴스의 가장 첫 머리에 다루어진다. 그러나 보도되는 순서가 언론사마다 전부 다르다는 점에서 언론매체가 주관적임을 알 수 있다. 언론매체는 각자가 가진 정치적 성향을 유리하게 하기 위해 혹은 자신들이 지지하는 세력을 옹호하기 위해 사건이 가진 의미를 교묘하게 조작할 수 있다.언론매체를 보는 시청자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에 있어서 객관성은 한번 더 해체된다. 물론 이 과정에는 개인의 경험과 지식이 그 사건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을 방해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언론 매체에서 다루어지는 사건의 전체를 현실에서 일어나는 것의 전부로 보는 시청자들의 성급한 도식이다. 이러한 태도가 견지된다면 시청자들은 언론매체가 만들어 준 허황된 이미지로부터 세계관을 구축해 나갈 것이다. 북한 사회를 예로 들어보자. 북한은 미디어를 철저히 통제함으로써 북한 주민이 다른 나라를 보았을 때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될 것을 막았다. 만약 북한 주민이 느끼는 궁핍감에도 불구하고 행복하다면, 그것은 미디어가 만들어낸 허황된 이미지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고 또한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세계가 현실의 전부라고 인식하는 도식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런 왜곡은 진실 그 자체를 왜곡할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이 인식하고 있는 현실 전부를 왜곡시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