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를 사랑으로 맞서라’- 엘리자베스 타운 감상문갑작스러운 실패인생 최대의 실패라고 느끼는 것은 어쩌면 최대의 기회였는지도 모른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흔한 격언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것은 만고의 진리이다. 자살을 결심했던 사람이 이후에 더 뜻깊은 삶을 살 수도 있다. 한국의 어느 유명 시인은 몇 번씩 연거푸 자살을 하려다 살아난 에피소드를 남겼다. 현재 다작의 시를 쓰고 시낭송을 하며 왕성한 창작욕을 작품에 불사르고 있지만, 한때 그는 죽으려고 애쓰던 사람이다. 죽음을 결심했던 사람이 어떤 계기로 삶을 계획했을 때 그 삶의 가능성은 무한하다.영화 엘리자베스 타운은 큰 실패를 겪었음에도 실패 끝에 운명의 인연을 만난 한 청년에 관한 이야기다. 나이키로 보이는 유명 신발 회사에서 자신이 디자인한 신발이 처참하게 망한 결과를 낸 바람에 그는 오갈 데 없는 백수 신세가 된다. 집안의 짐을 모두 정리하고 자살하려던 그 순간 전화가 온다. 아버지의 부고이다. 그는 자살을 잠시 멈추고 고향을 찾는다. 일하는 동안 방문하지 못한 그 곳에는 많은 놀라운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 바로 혈연이다. 아버지의 사진과 시신마저 낯선 그는 그동안 자신이 너무 가족과 멀리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의 인생이 바닥과 닿은 시점에서 역설적으로 새로운 생각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일에서 완전히 실패해 동료들에게 배제 당했으나 그와 혈연관계를 맺은 이들은 달랐다. 물론 그를 성공 모델로 두고 칭찬하는 가운데에서 벌어진 일이긴 한다. 그는 원래 유명한 운동화 디자이너이고, 친척들은 그를 치켜세우느라 바쁘다.사랑, 상처를 치유하는 길남자 주인공 드류(올란도 블룸)는 아버지의 장례식장에 가는 길에 클레어라는 명랑한 스튜어디스의 연락처를 건네받는다. 매우 밝은 미소의 당당함이 매력이던 여자는 남자에게 새로운 대화상대로서 빛을 발한다. 여자와 남자는 처음 통화한 바로 그날 밤을 새며 얘기를 한다. 사소하고도 진지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오간다. 욕실에서도, 화장실에서도 그들의 대화는 멈추지 않는다다. 남자는 신이 난 듯 쉬지 않고 얘기하고 여자는 여유롭게 얘기를 받아넘긴다. 여느 여인의 첫 시작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이나, 그 대화 속에서 남자는 생기를 얻는다. 운명적인 사랑이라고 해야 하나. 둘이 통화를 나눈 첫 날 바로 밤새 얘기를 하고 해가 뜨기 전에 만나 일출을 본다. 둘의 연애의 시작은 그렇게 아기자기하고, 둘이 다시 만난 이후에도 설레는 만남은 계속된다. 아버지를 화장시킨 유해를 들고 온 남자는 자신의 착착함을 여자를 통해 푼다. 여자가 먼저 좋아한다는 고백을 하지만, 남자 또한 키스로 사랑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 날 밤에 들뜬 기분과 달리 다음날 남자는 떠나는 여자를 잡지 않는다. 여자를 잡고 하는 말이란 자신의 실패가 가장 끔찍하고 중요한 문제라고 털어놓는다. 여자는 그게 도리어 우습다. 실패에 사로잡혀 다른 것에 조금도 눈 돌리지 못하는 남자가 다소 실망스럽기도 하다.하지만 여자는 그를 놓으려 하진 않는다. 장례식 이후 남자에게 세심한 선물을 한다. 사진과 그림 , 메모가 가득한 여행 계획이다. 여자는 매우 친절하게 그가 여행할 장소와 구체적 경유지, 시간까지 꼼꼼하게 적어서 건넸다. 그리고 그녀가 종착지에 빨간 모자를 쓰고 기다린다. 남자는 여행을 통해서 자신이 잃었던 삶의 여유를 찾고, 실패로 인한 좌절감이 조금씩 여행과정에 희석된다. 마음에 드는 의미있는 장소를 만났을 때는 아버지의 유해를 일부러 흩뿌리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점점 남자는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마지막 장소에서 기다리는 여자를 만나는 순간 기쁨은 절정에 이른다.드류의 아쉬운 독백남자 주인공의 절실한 실패의 고백에도 불구하고, 타인에게 그의 슬픔이 절실하게 와닿지 않는다. 감독은 가족의 끈끈한 사랑으로 남자의 실패를 감싸려한 듯 보이지만, 그것이 성공했는지는 의문이다. 특히 영화가 반지의 제왕 ‘올랜도 블룸’과 헐리우드 유망주 ‘커스틴 던스트’가 연인으로 나오는 러브스토리라고 강조했던 것에 비해 기대감은 상실됐다. 유난히 더 설레지도 슬프지도 않는 에피소드의 나열이 관객의 집중력을 흐린다. 압축미가 떨어진다. 두 남녀의 통화 장면, 남자가 여자의 선물대로 여행을 하는 장면이 그나마 둘의 사랑의 구체적인 그림이다. 아버지의 죽음은 극 중에서 남자의 실패보다 더 비극적일 것 같다. 그러나 이에 대한 드류의 대처가 너무 가볍다. 아버지의 유해를 옆에 두고 여자와 밀애를 속삭인다거나 아버지 유해를 여행지에 뿌리며 갈등을 푸는 방식은 문화적 차이인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다. 사랑에 빠지게 되는 계기들과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이 너무 가볍다. 여느 영화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남녀의 사랑이 아버지의 죽음과 맞물려 오히려 가벼워진 경향이 있다. 보편적인 사랑의 감정을 그리는 것은 성공했으나, 구체적으로 큰 부분을 차지하는 혈연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에서 관객을 설득하지 못했다.
불안의 과대 포장 이강백 파수꾼 감상문어떤 집단에서 가상의 적을 설정하는 것이 그 집단에게 도움이 될까? 이윤을 창출하는 기업 집단의 경우 경쟁 상대를 통해 얻는 정신적, 물질적 보상은 클 것이다. 그러나 이념 같은 정치적인 문제에 있어 적 설정은 ‘불안’과 ‘공포’를 초래하는 면이 크다. 1970년대 희곡 이강백의 은 바로 내부의 적 설정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한다.희곡의 주요 인물인 노인 파수꾼은 평생을 이리떼의 습격이 있다고 믿고 살아온 사람이다. 그는 망루에서 보초를 서는 남자가 이리떼가 왔다는 소리를 지르면 ‘북’을 치면서 사람들에게 알리는 역할이다. 노인은 그 일에 무한한 자부심을 느끼고 북소리에 긍지를 가진다. 그런 그에게 파수꾼을 자처하고 찾아온 소년이 있다. 노인은 파수꾼의 꿈을 갖고 망루에 온 소년을 반긴다. 혼자 있는 게 적적했던 듯 노인은 소년을 좋아하게 된다. 그리고 소년에게 매번 일의 중요성을 알린다.하지만 소년은 매우 겁이 많다. 이리떼가 습격할 것에 왠지 두렵기도 하고, 이리가 덤벼들면 꼼짝도 못할 것 같다고 노인에게 토로한다. 그렇지만 소년은 꼭 망루에 올라가보고 싶다. 망루에 올라가 있는 사람은 고정된 사람이라는 게 소년은 의아하다. 그러던 어느 날 노인과 망루에서 내려온 파수꾼이 잠든 사이 소년은 용기를 내 위로 올라가본다. 그런데 뜻밖에도 망루에서 내려다본 곳은 푸른 하늘이 있는 아름다운 곳이다. 이리떼란 없다. 흰 구름밖에 없는 광활한 곳을 바라보며 소년은 너무 혼란스럽다. 이렇게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에 이리떼라니, 하지만 자고 있던 파수꾼이 다시 올라와 어김없이 이리떼가 온다고 소리친다. 소년은 이리떼가 없는데도 기계적으로 파수꾼이 이리떼가 왔다고 외치고 또 갔다가 외치는 상황이 이상하다. 소년은 망루에서 내려와 노인에게 이리떼가 없다고 설득하지만 노인은 소년의 정신이 잠시 이상해졌다고 오해한다. 소년은 진실을 알려야겠다는 의무감에 촌장에게 이 소식을 알리려하고, 편지를 들고 가던 운반자는 마을 사람에게 이리떼가 없다고 소문을 낸다. 촌장은 망루에 직접 찾아오고 뒤이어 마을사람도 오게 된다. 촌장은 애초에 이리떼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는 듯 소년을 설득하는데, 자신은 거짓말을 했고 사람들에게 살해를 당할 것이라고 연민에 호소한다. 이리떼가 있다는 말이 도리어 마을을 잘 유지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재차 강조한다. 마을 사람들이 도착했을 때 소년은 결국 이리떼는 있다고 다시 말하고, 마을 사람들은 그 말을 믿어버린다. 노인은 소년이 이리떼가 있다고 외칠 때 원래 모습대로 북을 친다. 노인은 그 곳을 떠나는 촌장에게 양철북을 치는 자신의 모습이 멋있지 않느냐고 물으며 은근 흡족해한다.소년과 망루의 파수꾼과 노인, 이들은 겉으로는 마을의 안전을 위해 모인 사람들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쓸쓸한 사람들이다. 마을 사람들과는 유리된 공간에서 오직 이리떼가 올 것이라는 위협 속에서 한 평생을 그 곳에 지켜야 한다. 소년의 경우, 무한한 꿈을 안고 망루에 오지만, 실제로는 별 커다란 위협이 없다는 사실에 놀란다. 소년은 젊은 세대를 상징하듯 변화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알리려 시도한다. 그러나 그도 결국 현실에 순응하고 마는데, 그것은 촌장의 설득에 그대로 넘어간다는 것이다. 촌장은 마을 사람들에게 허위의 공포심을 가공해, 사람들을 조종하는 인물이다. 마을 사람들은 언제나 이리떼가 올 것이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일상을 살아야 한다. 이리떼가 왔다고 북소리가 들릴 때면 사람들은 이리저리 도망가느라 정신이 없고, 그 와중에 범죄나 혼란은 가중된다. 그럼에도 촌장은 그것이 마을의 안전을 위해 좋다고 소년을 설득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촌장은 독재에 길들여진 비합리적인 지도자를 표상한다. 촌장은 마을 사람들이 진실을 아는 게 두렵고, 진실을 알았을 때 자신의 안전을 걱정한다. 이리떼가 있다는 허위 정보가 마을 사람들을 뭉치게 하는 게 아니라, 촌장의 생명을 위협하지 않는 게 된다는 말이 된다. 사람들은 이리떼에 정신이 팔려 촌장이 거짓으로 마을 사람들을 다스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노인도 바로 그러한 꼬임에 속아넘어간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노인은 한평생 양철북을 치는 파수꾼으로 살았다. 노인의 인생은 그저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데 충실했던 삶이다.이 희곡이 1970년대 씌어진 희곡인 만큼 안보를 강조했던 군사정권에 대한 비판임을 알 수 있다. 북한을 적으로 설정한 뒤 내부의 공포를 합리화시켰던 정권을 우화적으로 꼬집은 것이다. 주민들이 겪은 공포는 실제보다 과장된 감정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필요에 따라 외부 정보를 취득할 수 있었지만, 내부 검열에 의해 그것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삶의 질은 도리어 황폐해질 수밖에 없다. 정보는 오직 몇 명, 이리떼가 온다는 말을 하고 북을 울리던 몇 명처럼, 적은 수에게 독점됐기 때문이다.이러한 공포심은 비단 우리나라 군사정권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끝없는 갈등도 사실은 이러한 공포심 때문에 더욱 더 커지고 있다. 특히 부시 미국 대통령이 테러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 있다. 테러에 대한 공포심을 적절히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얼핏 보기에는 안전성이 높아질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불안한 감정은 삶의 질을 떨어뜨린다. 현재 미국이 반이민법으로 불법이주노동자를 추방하려는 움직임이나 영국이 이슬람청년들에 대해 과잉진압을 하는 등의 행위는 모두 공포를 촉발한 정치에서 시작된 것이다. 문제를 평화적으로 접근하려는 노력보다, 정권 유지와 이권 다툼에 그치다보니 싸움은 점차 커진다. 파수꾼 노인을 쉽게 비판할 수 없는 것은 그는 언제나 이리떼가 있다고 삶에서 믿게 된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테러의 가해자, 피해자들은 그 위에서 조종하는 정치인들의 희생양처럼 평생을 그 이념에 얽매이게 된다. 그것이 과연 행복인지는 의문이다. 이강백의 파수꾼은 테러나 군사정권 등 공포를 수단으로 하는 정치적인 행위들에 대해 누가 희생양이고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생각해볼 기회를 주는 작품이다.
청계천 단상 (작문)어젯밤 SBS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을 보는데, 그 커플이 잠시 청계천의 연인으로 깜짝 변신했다. 청계천 돌다리를 건너는 재희(전도연)과 상혁(김주혁)은 연신 방긋방긋 웃기만 한다. 서로 손을 잡아주며 돌을 건너는 그들, 다리가 마치 오작교의 까막까치라도 된 것 같다. 요새의 유행 코드를 그대로 반영하며 디지털 사진 한 장도 찰칵이다.영국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는 꼭 런던브리지가 나온다. 최근에 본 영화에서는 'A Lot Like Love',와 ‘윔블던’, ‘If Only', '브리짓존스의 일기’ 등이 있었던 것 가다. 밤 야경에 불을 밝힌 런던브리지는 비추는 것만으로도 멋진 사진 한 장이 된다. 그 곁에 선 한 쌍의 연인은 그야말로 로맨틱한 풍경이 된다.T.S 엘리엇은 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런던 브리지 위를 흘러간다’고 표현했는데, 우리 서울도 청계천에 도시 속 익명의 대중이 흘러가고 있다. 너무 많은 사람이라 셀 수도 없다. 마치 경보마 마라톤에 출전한 선수들의 행렬마냥 사람들을 일제히 청계천변을 걷는다. 그들의 걸음이 그대로 서울의 문화가 되고 있다.청계천에는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많은 고뇌와 아쉬움이 숨어있다. 공사 과정에서 다툼을 빚었던 시장가의 사람들, 문화재의 세밀한 복원에 실패해 낙담한 학자와 시민단체 활동가들, 보이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청계천과 관련해 한숨을 쉬었다. 그들의 웃음을 모두 끌어안기에는 아직 청계천 다리는 너무 비좁은 것일까?프랑스 하면 퐁네프의 연인, 퐁네프 다리가 떠오르고, 런던 하면 런던 브리지가 떠오르는 것처럼 우리나라도 언젠가 서울 하면 청계천이 자동반사적으로 생각날 수 있다. 서울의 아름다운 풍경, 문화 자체가 되기 위해서는 해결할 과제들이 많다. 청계천이 연인의 사랑, 영화 속 클리셰로 되는 것도 바라지만 군중의 희망도 담아야 한다. 도시 속 생태 공간, 걷는 문화의 여유, 이런 것들을 가꾸는 것 이상으로 청계천의 인공미가 자연미로 거듭나도록 시민들과 정책자들이 신경써야 한다. 퐁네프 다리에 얽힌 퐁네프 연인의 아름다운 에피소드처럼 우리 청계천에도 수많은 사연과 추억이 어릴 테니 말이다.
사회 기득권의 부도덕성을 질타 ! 호질 감상문‘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하여 사회지도층 인사들에 대한 엄중한 책임감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이는 과거나 지금이나 다름없다. 로마 시대에는 기마병이 일반 보병보다 먼저 앞에 나서서 싸웠는데, 말을 탈 수 있는 사람은 대부분 귀족이었다. 호질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지키지 못하는 양반에 대한 풍자로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말하고 있다. 인성을 갖춘 지성인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다들 뒤로는 부도덕한 짓을 일삼는다는 설정이 참으로 톡 쏘는 풍자를 하고 있다.호질의 줄거리는 이러하다. 한 마을에 굉장히 도학이 높아 칭송받는 북곽 선생이 있다. 그런데 북곽 선생은 청상 과부 집에서 밀회를 즐기고 있던 것이다. 이 광경을 몰래 지켜보게 된 여자의 아들 다섯은 북곽 선생일리 없다고 생각한다. 이 때 더 재미있는 사실은 그 아들 다섯도 모두 성이 다르단 사실이다. 이는 동네에서 열녀문을 갖고 있다는 청상과부 또한 뒤로는 호박씨를 뿌리고 있었단 증거다. 이 아들들은 집 안에 몽둥이를 갖고 쳐들어간다. 북곽 선생은 깜짝 놀라 일부러 요상한 몸짓을 하면서 도망 간다. 겨우 그들을 피해 도망쳐오고 보니 큰 호랑이 한 마리가 입을 벌리고 그를 맞는 것이다. 그러더니 똥보다 구리다며 도리어 북곽 선생을 잡아먹지 않고 꾸짖고 사라진다. 날이 샌 뒤 농부들은 북곽 선생을 보며 의아한 듯 왜 땅바닥에 있는지 묻자 그는 마치 하늘과 땅에 예를 갖춘 듯 또다시 허위의식에 찬 행동을 한다.조선 영정조 시대의 문인이자 실학자인 박지원은 북학파로서 청나라 문물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며 문학으로써 양반 계층의 허위허식을 비판했던 사람이다. 문체 또한 사실적이고 비판적으로서 호질 또한 그러한 멋이 그대로 드러난다. 호질은 박지원의 열하일기 중 관내정사 속에 수록된 한문 소설이다. 이 소설은 당대 양반 계급을 풍자하며 사회지도층의 도덕성이 땅바닥에 떨어졌음을 느끼게 한다.북곽 선생은 인격이 고매하기로 남이 따라올 수 없을 것처럼 소문났고, 동리자는 수절 과부로 이름난 인물이었으나 둘 다 그 소문은 거짓이다. 가식적인 인물인 것이다. 북곽 선생과 동리자가 밀회를 즐기는 게 바로 결정적 증거이다. 도덕이 높다고 칭송받던 북곽 선생도 결국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몰래 즐기며 남들에게는 도덕적이라는 말을 듣는 이중적 캐릭터였던 것이다. 끝까지 솔직하지 않게 그것을 발뺌하기까지 한다. 작가는 파렴치한 인간으로 북곽 선생과 동리자를 보여준 것이다. 당대 관점에서 유학자와 열녀의 밀회는 비판받았던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관점에서 보자면, 작가의 관점에 따라 아름다운 로맨스, 이재용 감독의 스캔들같은 영화가 나올 테지만 조선 시대 관점에서는 그들은 위선자이다. 도덕적이라는 이유로 국가의 녹을 받고 살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진 위신만큼 요구되는 조건은 까다롭다.
새로운 국적법2005년 5월 4일, 국회는 홍준표 의원 대표 발의로 새 국적법을 통과시켰다. 개정 국적법은 엄밀하게 국적법 제12조 제1항 단서를 개정하고, 제3항을 신설했다고 할 수 있다. 제12조 제1항에 따르면 병역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자로서 병역법 제8조의 규정에 의하여 제1국민역에 편입된 자는 편입된 때부터 3월 이내에 대한민국 국적에서 이탈할 수 있다. 입법 취지는 17세 이전 국적이탈 신고를 미처 하지 않은 상태에서 제1국민역에 편입된 자는 외국 성인 기준 연령을 고려해 성인의 나이에 국적 선택 기회를 제공하자는 것이다. 다만 새로 시행되는 제3항에 따라 병역의무를 이행해야 하는 자는 병역 의무를 이행한 이후거나 면제된 때부터 2년 이내에 하나의 국적을 선택하도록 했다. 국내에서 뜨거운 논란이 된 것은 바로 제12조 제3항의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직계존속이 외국에서 영주 목적 없이 체류한 상태로 출생한 남성의 경우 ‘현역, 상근예비역 또는 보충역으로 복무를 마치거나 마친 것으로 보는 때’, ‘병역 면제 처분을 받은 때’, ‘제2국민역에 편입된 때’에 한하며 대한민국 국적 포기가 가능하게 했다. 이 때문에 2005년 5월 24일 대통령의 개정 국적법을 공포하는 효력 발생일 이전까지 대한민국 국적을 포기하려는 사람들이 출입국관리소에 폭증함으로써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본래의 새 국적법은 국적법 자체보다 우리 사회에 군대 기피 문제와 사회 기득권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문제가 더하면서 공론화 됐다.개정 국적법을 대표 발의한 홍준표 의원은 이 문제가 불거지자 국적 포기자를 외국인 취급할 수 있도록 권리를 제한하는 재외동포 관련법과 고등교육법 개정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 개정안이 통과되면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과 외국인의 경계는 확실히 뚜렷해질 것이다. 새 국적법에 대한 모순은 바로 국적 포기를 둘러싼 논란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국적 선택을 위해 개정하려던 법이 도리어 왜 국적을 버리는가에 대한 비난으로 방향이 틀어진 것이다. 무엇보다 한국 사회의 특수한 배경 하에서 병역 형평성 문제가 개입된 까닭이다. 권리는 누리되 책임은 지키지 않으려는 기득권에 대한 분노와 비난 또한 병역 문제와 얽혔다. 실제로 법무부가 관보에 공개한 바에 따르면 지난달 6일부터 개정 국적법 시행 전날인 23일까지 국적 포기신고자는 1차 고시된 1077명을 포함해 2032명이다. 이들 중 1036명은 국내에서, 726명은 재외공관에서 국적포기를 신고했고, 이들 중 국내 226명, 재외공관 24명 국내외 통틀어 250명은 국적포기가 사회 문제로 부각되자 국적포기를 철회하기도 했다. 1036명의 국내 접수자 중 남성이 1288명이고 여성이 18명에 불과해 국적 포기가 곧 병역 기피와 관련됐음은 짐작 가능하다. 이처럼 예민한 병역 문제로 새 국적법 문제가 논의의 틀로 마련된 것이다.게다가 고시된 명단을 분석하면 18명의 여성 중 16명이 동일한 가정 내 남성과 함께 국적을 포기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 중 오자복 전 국방부 장관의 손자, 손녀도 포함돼 있었다. 1천59명이 남자(98.3%)인 반면 여성은 18명(1.7%)에 불과했고, 고시된 명단을 분석한 결과 18명의 여성 중 16명은 주소와 호주 등이 동일한 남성, 즉 '남자형제'와 함께 국적을 포기한 것으로 확인돼 남동생이나 오빠가 국적을 포기하며 함께 국적포기를 한 것으로 보인다. 국적 포기자 연령이 18세 이상은 7명, 15세 미만은 958명, 1세에서 2세 유아가 114명으로 국적 포기가 곧 부모 결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국적 포기자 부모의 직업은 상사원이 643명, 대학 교수 등 학계 351명, 공무원 11명인 것으로 전해졌다. 대부분 사회 지도층 인사라고 할 사람들이 국적을 포기함으로써 엄격한 도덕성이 요구되는 공직자 자격 시비에 휘말리게 됐다. 위법 여부를 따지기 전에 어긋난 공동체 의식을 드러냄으로써 도덕적 지탄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이 시점에서 공직자의 도덕성 시비와 병역 문제와 아울러 냉정하게 개정 국적법 자체를 돌아보고 사태를 분석해야 한다. 병역 의무라는 우리 사회의 특수한 환경 상 국민 정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충분히 논란의 소지는 되지만 국적법 개정이 너무 국가지상주의로 가서는 안 된다. 재외국민의 삶의 실체를 법이 너무 간과할 수 있다는 점이다. 재외국민을 껴안아주는 선진국적인 법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이다. 전현직 고위 공무원의 국적 포기는 악의적 의도가 다분해 합리적인 제재가 제기도리 수 있지만, 그 외에 재외국민에 대한 고려는 있어야 한다. 이 점이 너무 도외시되고, 새 국적법의 논의가 진행돼서는 안 된다. 혹자는 이중 국적자가 증가한 것이 원정출산 문제보다 해외 근무 증가 원인이 크다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IMF 이후 유학 자체를 목적으로 한 유학생보다 교육부가 ‘파견동행’으로 분류한 유학생들이 더 잦아졌다는 것이다. 해외 근무 부모 하에서 현지 출생아가 늘고 이중국적 자녀들이 많아졌단 얘기다. 원정출산으로 애를 낳은 것도 아닌 사람을 무조건 비난하는 것도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서울중앙지검 석동현 형사1부장은 “원정출산 수효는 극소수여서 이중국적 허용 논의의 본질을 흐릴 수 있다." , "좀 더 합리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공식적으로 우리나라가 해외에 내보내고 있는 인력은 연간 40명에 달한다. 교육인적자원부 주관 국비 유학생은 민간 재단 한 곳이 보내는 인원에도 미치지 못하고 한국 학생의 해외 유학 지원은 외국 민간 기업의 지원보다 저조하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의 강일규 연구위원은 재외동포에 대한 지원과 활용이 경제발전과 세계화 전략에 활용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밝혔다. 한국화를 강요할 게 아니라 오히려 현지화를 강요해야 한다는 견해다. 재외동포에 대해서는 ‘선 지원, 후 활용’ 정책이 우선돼 재외동포가 현지에 잘 적응할 수도 있도록 해 유연한 국적 제도를 시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지를 펴는 입장에서는 대만이 우리와 비슷한 병역 조건에서도 훨씬 관대한 국적제도를 시행하고 있다는 근거를 든다. 이처럼 재외 동포인 해외 인재를 국가적으로 지원하는 해외 사례에 비추어 국가 인재 양성을 위해 국적법이 고려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이중국적을 허용하는 OECD 국가 상당수의 사례에서도 좋은 점을 취할 수 있으며, 특수한 한반도 상황 외에도 세계적인 차원에서 국적법을 바라봐야 하는 이유이다. 병역 논의로 묻힐 수 있는 부분을 간과해선 안 된다.헌법은 개인의 행복 추구권을 최상의 가치로 인정한다. 공동체의 가치에 위배되는 병역 면탈은 비난 받아야 하지만, 국적 포기와 관련한 논란이 드센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아직 매력적이라거나 건강하지 못하다는 반증이 될 수도 있다. 홍준표 의원이 국적법을 발의한 것도 시장 출마를 위한 진대제 장관 견제용이라는 의혹이 제기될 만큼 정치적 논쟁으로 번지는 것도 유감스러운 일이다. 지난 2000년 진 장관 아들이 국적을 포기하고 병역을 면제받았던 것이다. 개정 국적법이 군대 문제가 걸린 정치적 이슈로만 번질 게 아니라, 각 정권마다 제대로 풀지 못했던 재외국민 관련 정책으로 귀결되어야 한다. 대한 민국 국민의 권리와 의무의 대립 지점을 엄밀하게 재단하면서도, 한국의 빗장을 여는 데에 발전적인 법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