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단군신화그 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굴에서 살면서 항상 신인 환웅에게 빌어 사람이 되기를 원하였다. 신인은 곧 신령스러운 쑥 한 줌과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의 형상으로 변하리라. 고 일러주었다. 곰과 범이 그것을 얻어먹고 곰은 삼칠일을 기하여 여인의 몸이 되었으나 범은 능히 기하지 못하여 사람의 몸으로 되지 못하였다. 웅녀는 혼인할 사람이 없어 매일 신단수 아래에서 잉태할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 환웅이 사람으로 변한 뒤 혼인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단군왕검이라 불렀다.여기서 곰이 인간으로 변해가는 과정이 나오는데, 이 과정에 많은 단계가 설정된다. 이것은 곰이 인간으로 질적 전환을 하기에 필요한 관문들을 설정한 것이다. 그런데 이 여러 가지 단계를 환웅이 설정을 한다. 결국은 환웅이 아니라 우리 민족이 설정을 한 것이다. 여기에 나와있는 많은 단계들은 곰이 인간으로 질적 전환을 하는데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있었는가를 표현하고 있다. 이 단계들은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갈 때 치뤄야 하는 의식이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탈바꿈해 가는 통과의례인 것이다. 이런 단계를 거쳐서 결국은 곰은 인간이 된다.환웅과 웅녀의 혼례는 신부감인 웅녀의 요청에 의하여 성사된 것이다. 신단수는 웅녀집단의 공동체를 지켜주는 신이다. 여기서 여인이 성숙하여 결혼할 때가 되면 공동체의 신을 모신 곳에 나가서 결혼을 희망하고 이것이 부족원들에게 알려지면 신랑감이 나타나 그 여인에게 청혼하여 결혼한다는 혼속을 추론해 볼 수 있다.단군이 환웅과 웅녀의 혼인으로 출생하였다면 이는 천신숭배집단과 곰숭배집단의 결합으로 새로운 집단이 형성되고 단군이 새 집단의 통치자가 되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최근 들어 이 건국신화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으며 학자들마다 의미있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문제는 단군신화의 의미가 시대와 민족이 처한 환경에 따라 달리 해석되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단군신화를 실제로 발생 않았고 돼지에게 버렸으나 돼지 또한 먹지 않았다. 길에 버렸으나 소와 말이 이를 피하였고 뒤에 들에다 버렸는데 뭇새들이 털로 따뜻하게 하여 주었다. 부여왕이 쪼개려고 하였으나 깨뜨릴 수가 없어 그 어미에게 돌려보냈다. 그 어미가 물건으로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한 남자가 껍질을 깨고 나왔다. 성장하자 이름을 주몽이라고 하였는데 주몽이란 그 나라 속언에 활을 잘 쏜다는 뜻이다.신화의 주인공은 대체로 신성한 혈통을 드러내기 위하여 신성한 존재로서 부모가 소개된다. 주몽은 하백녀 유화가 일광을 받고 잉태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일광의 의인화된 신인 해모수의 아들로 되어 있다. 해모수로 나타나거나 태양으로 나타나거나 부계혈통을 태양신으로 한 점은 마찬가지다. 모계혈통은 하백녀라는 점에서 수신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주몽은 태양신인 아버지와 물의 신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존재이다. 그리고 고구려 역대 왕들은 시조 주몽의 이러한 혈통을 커다란 긍지로 생각하고 항상 자랑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광개토왕 비문을 비롯하여 국내의 기록은 물론 중국이나 일본의 역사서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이처럼 고구려의 역대 왕들이 태양의 아버지와 하백의 외손임을 내세웠다는 것과 주몽과 유화를 제향했다는 점은 고구려에서 태양신과 수신을 신성시하였다는 표지이고 고구려라는 국민이 해모수족과 하백족의 통합집단이라는 점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본다.주몽은 잉태로부터 출산에 이르기까지 보통사람과는 다른 신이한 양상을 보인다. 나면의 성적 결합으로 잉태되고 태생으로 태어나는 것이 인간의 정상적인 탄생과정인데 주몽은 햇빛을 받고 잉태하였고 알로 태어났다. 햇빛과 같은 자연물과의 접촉으로 잉태되는 신화가 많이 나타나는데 이는 신화 전승집단의 신앙과 관련을 가진다. 바위나 수목과 접촉하여 임신이 되는 경우는 암석신앙이나 수목신앙과 관련이 있고 뱀이나 이리 등 동물과 접촉되어 임신하는 경우는 동물숭배와 관련을 가진다.주몽은 알로 태어나서 마구에 넣어지기도 하였고 산이나 들에 버려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소나 말보다도 더욱 원초적 생명체의 모습으로서 여러 가지 잠재력과 가능성을 갖추고 있으나 아직 발현되기 이전의 상태를 말한다. 생명체가 탄생하는 데는 난관이 따르게 마련이다. 알에서 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 자체가 커다란 난관이다.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한 자만이 스스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능력이 획득된다고 믿었던 것이다.주몽이 알로 태어나 동물의 보호를 받는 신이한 징표를 보이자 금와왕을 비롯한 동부여집단이 태양의 아들인가 여기고 유화에게 되돌려 주었다고 했다 이는 벌써 출산기의 시련을 극복하고 신성성을 인정받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햇빛이 유화의 몸을 따라가며 비춘 것은 하늘과의 연관이 지속되었음을 의미하며, 그 결과 알을 낳는데 알은 '세계'를 상징한다. 세계는 깨뜨려져서 하나의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는데, 그 창조자가 바로 동명왕인 것이다. 알을 새나 짐승이 보호하는 것은 신성한 존재임을, 활과 화살은 바로 제왕의 상징이 된다. 화살은 햇살과 같은 의미로 활을 잘 쏜다는 것은 해를 통제하는 존재, 즉 왕을 의미한다.고구려 성업을 이룩한 주몽의 건국 신화로 원초적인 여러 가지 신화소를 바탕으로 하여 위대한 영웅의 생애를 보여 주고 있다. 영웅의 생애는 고귀한 혈통, 비정상적 출생, 탁월한 능력 소유, 기아로 고난을 겪음, 보호자가 양육, 성장 후 위기를 맞음, 위기를 극복하고 위대한 승리를 한다는 형식을 따르는데 주몽은 천신과 수신이 연관되는 고귀한 혈통이며 알에서 태어나는 비정상적 출생을 하는 등 일련의 과정이 그에 일치하고 있다.3. 박혁거세신화박혁거세가 탄강한 탄강지는 양산(陽山) 나정(蘿井)이라는 우물 옆이다. 우물은 인류가 집단적으로 정착생활을 하면서 공동으로 만들고 관리하는 가장 중요한 시설이다. 우물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고 우물터에서 마을의 모든 소식이 알려진다. 또한 우물은 생명을 지속시키는 근원으로서 성스럽게 여기는 곳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시조왕의 탄생이 우물 옆으로 정해진 것은 인간 생명의 근원이 물과 관련됨을 나타내주는 점이다.하늘로부터 번다.그런데 이 같은 하늘과 땅의 결합과 출산에 백마(白馬)가 등장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백마는 천신의 사자로서 알을 운반한 성수(聖獸)로서 의미를 가진다고 본다. 전광만으로는 시조의 탄강이 확실하지 않아 운반자로서 말을 등장시켰다고 본다. 말의 색이 백색인 것은 광명신 사상의 영향이다. 즉 백마는 태양신의 후손을 운반하는 신성동물로 등장한 것이다. 백마는 태양을 상징하는 동물이면서 용과 마찬가지로 비를 내리는 등 기후를 관장하는 기능을 가지기도 한다.혁거세신화에서 혁거세가 박과 같은 알에서 태어났다고 한 것은 밝음의 원천 즉 태양의 후예임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생명의 기운은 열기이고 열(熱)의 원천은 불이다. 생명체는 태양의 열기를 받아 싹이 트고 성장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태양은 거대한 알로서 생명의 원천이라는 성격을 가진다. 혁거세가 알에서 나와 가장 먼저 한 일은 목욕이었다. 동천(東泉)에 몸을 씻자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춤을 추고 천지가 진동하고 일월이 청명하였다고 하였다. 동천은 동쪽에 있는 샘물이다. 태양이 동쪽에서 처음 돋아 오르며 태양의 빛으로 지상의 생명체가 약동하는 생명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생명의 기운이 넘쳐 빛으로 발산되고 살아있다는 표시로 움직임이 시작된 것이다. 혁거세의 탄생은 바로 생명선의 탄생을 의미한다.4. 석탈해신화탈해는 용성국의 용왕인 함달파와 적녀국의 왕녀 사이에서 출생한 인물이다. 용성국의 용왕이란 바다의 신이면서 수신을 가리킨다. 함달파는 용성국의 국왕인데 용성국은 바다에 있는 섬나라 중에 하나라고 본다. 섬에서는 주민들이 바다에 나가 물고기를 잡아 생활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물고기를 잡기 위해서 배를 부릴 줄 알아야 하고 수신 또는 해신에 대한 신앙을 가졌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처럼 탈해의 표면적인 부계혈통은 어로족(漁撈族)이 숭앙하는 수신으로서 용왕의 후예로 설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적녀국(積女國)의 왕녀로 되어 있는 모친은 어떤 신성혈통을 말하는 것인가. 적녀국은 여성어난 것을 불길한 징조로 생각한 부왕에 의하여 궤에 담겨 바다에 띄워진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풀이할 수 있다. 알은 태양신의 혈통을 말한다. 주몽이나 혁거세나 수로가 모두 난생이고 이들의 부계혈통은 태양신, 또는 천신이었다. 그런데 천신이나 태양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적녀국의 왕녀가 태양시의 혈통을 출산한 것이다. 이는 부계혈통의 번혁을 의미하는 것이다.그러면 함달파의 부인인 적녀국 왕녀가 함달파의 혈통이 아닌 다른 족속의 남성과 접촉하였다고 의심받았으리라고 보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적녀국 왕녀는 함달파의 왕비가 된 뒤 오래도록 아들이 없어서 기도하여 아들을 구하다가 칠 년만에 큰 알을 낳았다고 하였다. 어느 신에게 기도를 드렸는지는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지 않으나 칠 년이란 오랜 기간 기도를 드렸다면 용신이나 해신뿐만 아니라 천신이나 일신, 월신, 산신 등 여러 신에게 기도를 드렸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알을 낳았고 이를 불길한 징조로 판단했다는 것은 함달파 집단이 신성시하는 혈통과는 다른 혈통의 남성과 관계를 맺어 임신하고 출산했다는 의미라고 볼 수밖에 없다. 함달파 집단이 용신의 후예를 자처하는 용신숭앙집단이라면 이와 다른 신성혈통은 태양신이거나 천신일 가능성이 있다. 결국 탈해의 출산과 기아과정에서도 주몽신화에서 발견되는 부계혈통의 상위(相違)로 인한 주인공의 박해를 발견할 수 있다.탈해는 용성국 함달파 집단에게 상서롭지 못한 존재로 판단되어 버림을 받았다. 그런데 동명이나 주몽이 박해를 받은 것과는 다르게 칠보와 노비를 배 안에 가득 실어 인연 있는 곳에 나라를 세우라는 축원을 받고 바다에 띄워진 것이다. 이는 탈해의 집단이 새로운 삶의 터전을 개척하기 위하여 배를 타고 항해하였음을 의미한다. 탈해의 집단은 정치적으로 함달파 집단에게 밀려나나 집단이었다고 본다 .그러나 싸우다가 패하여 도망친 집단이라기보다는 재물과 노비를 주어 분가시키는 것과 같이 생장지를 떠난 집단으로 볼 수 있다. 붉은 용이 배를 호위하였다는 것은 떠나는 탈해를 안전하게 보냈것이다.
《중국근대의 정치와 사회》 2004. 11. 17사학과 200210011 김경덕輪船招商局의 설립과 官督商辦의 경영방식을 보고洋務企業活動의 성격을 규명해 보자!1870년대 들면서 그동안 군사사업에만 한정되었던 양무운동을 확대하여 상무(商務)진흥의 양무기업에도 투자하도록 하였다. 방적, 광산, 방직, 기선, 전신전보 등 여러 분야에 관심을 가졌다. 운영방법에 있어서는 군사부분은 완전히 국영으로서 관판기업이었지만 양무기업들이 등장하면서 민간으로부터 자본투자를 구하는 관독상판기업도 나타나게 되었다. 대표적인 예로 이홍장이 1872년 상해에 설치한 윤선초상국이 그것이다.윤선초상국은 그 발족에 임하여 해관수입으로부터 관비(官費)가 190만냥 출자된 것에 민간자본 73만냥이 보태어졌고 더구나 관비에서 온 부분은 조미(漕米)등 官의 물자를 수송해 줌으로써 상환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경영의 실권은 어디까지나 이홍장계 관료의 손에 장악되어 그 개인적 축재수단으로 이용되었다.어쨌든 1870년대 이후부터 양무운동의 성격은 군사부분에서 상공업활동으로의 변화가 일어났다. 변화가 일어난 이유는 군사부문의 재정적 유지를 위해서 그리고 양무파 각 집단의 사병적 군사세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거금의 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군사공장의 운영은 사실상 비생산적·비영리적이고 소비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이익을 낳을 수 있는 부분으로 진출을 시도한 것이었다.또한 높은 이익을 올리기 위하여 양무파 관료들은 정부 내에서의 발언권을 행사하여 민간기업의 설립·발달을 억압하였다. 그 예가 윤선초상국이 이홍장의 힘으로 강소·절강 양성의 조량(漕糧)을 적하(積荷)하는 특권을 확보한 점이 그렇다.
《중국근대의 정치와 사회》 2004. 11. 19사학과 200210011 김경덕1884년의 中佛戰爭에 관하여어떤 역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이전까지 청은 타협정책을 취하였으나 1883년 8월 6일에 정식으로 프랑스에게 선전하여 육로로 군대를 신속하게 베트남으로 이동시키는 한편 연해의 해군에 대하여 프랑스의 공격을 철저하게 방어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프랑스군의 공격아래1884년 2월에 변경의 요지인 진남관(鎭南關)이 함락되었다가 풍자재(馮子才)군의 힘으로 겨우 수복하였으며, 해로의 경우도 전세가 중국에게 유리하지 못하였으며 프랑스에게도 유리한 편이 되지 못하였다.이때 영·미·독일이 조정에 나섰는데, 특히 영국은 총세무사인 하트를 이용하였다. 하트는 영국정부로부터 위임을 받고 중국해관의 영국런던사무처의 캄벨을 4월에 파리로 파견하여 중·프 간명조약이 유효하다는 전제아래 프랑스와 정전협정을 체결하였다. 그리하여 청·프전쟁은 끝났으며, 6월에 이홍장과 프랑스공사의 파더너 사이에 천진에서 중·프 신약을 체결하였다.그 중요한 내용은 중국이 베트남을 프랑스의 보호국으로 인정하고 중국과 베트남의 변경에 두 곳의 통상장소를 정하기로 하는 한편 프랑스 화물은 베트남과 광서변경에서 세율을 감하기로 하고 이후 중국에서 철도를 건설할 때에 프랑스와 협상하도록 하였다.
고려인들은 어떻게 교육하고 문화생활을 했나?200210011 김경덕 200215003 김지혜 200215004 김화림 200215009 최운영고려시대의 교육과 문화생활1.교육제도 1.관학(官學) 1) 유경습업과 권학관제도 2) 국자감(國子監) 3) 학당(동서학당 5부 학당) 4) 향교(鄕校) 2. 사학(私學) 1) 십이공도 2) 서당(書堂) 3.과거제도와 교육 1) 과거제도 2) 과거제도와 교육 2.고려시대의 문화생활 1.문학의 발달 5.공예 2.건축과 조각 6.회화 3.석탑 7.음악 4.인쇄술고려시대 교육제도 변천태조 개경, 서경에 학교를 설치 신라계통의 학자등용 광종 과거제 실시 성종 국자감 설치 교육 조서 발표 문신월과법 실시 12목에 경학박사, 의학박사 파견(권학관) 문종 (私學 발달) 최충이 문헌공도에 9재학당을 설치 관학 쇠퇴, 문벌 강화고려시대 교육제도 변천예종 국자감을 국학으로 개칭 7재를 설치(9재학당 모방), 실패 양현고(養賢庫) 설치 인종 경사 6학 설치 향학 설치 (지방 중등 기관) 충렬왕 국학을 성균관으로 개칭 공민왕 교육, 과거제도를 정비교 육 제 도과거제도(科擧制度) 교육목적 우수한 관리 양성 立身揚名 교육내용 및 방법 과거시험을 위한 유교경전이 될 수 밖에 없었으며, 교육방법 또한 암기식 주입식 교육방법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유경습업과 권학관제도유경습업(留京習業) 성종 - ”주,군,현에 영(令)을 내려 자제를 선정하고 경(京)에 들어와 학업을 닦게 하라” 권학관(勸學官) 제도 성종 - 전국 12목에 경학박사와 의학박사 각 1명씩을 파견하여 지방 자제를 교육하였는데, 즉 권학관을 각 주에 파견하였던 것이다. 기록에 나타난 전국적인 규모의 지방 교육을 담당한 권학관 제도의 시초로서 주목할 만한 교육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국자감(國子監)고려 국초에 개경에 국립대학으로 국학(國學)이 있었으나, 992년(성종 11)당, 송의 제도를 참작하여 종합대학인 국자감으로 개편하였다. 국자감의 구성 돈화당(敦化堂)+문묘(文廟)국자감(國子監)의 직제학박사국자박사대학박사사문박사유학학정(學正)학록(學錄)학유(學諭)행정직승(丞)주부(注簿)말단사무직서사(書史)기관(記官)학부편성 및 입학자격입학을 허가하지 않는 경우 잡로(雜路), 공·상·약·명(工·商·藥·名)에 종사하는 자의 자손 대소공친(大小攻親)의 죄를 범한 자의 자손 가도(家道)가 부정한 자의 자손 반역을 범한 자의 자손 천향 부곡인(賤鄕 部曲人) 등의 자손교 과 과 정유학부(儒學部) 교양필수과목:《논어》와《효경》 전공선택과목:《상서》《공양전》《곡양전》《주역》《모시》《주례》《의례》《예기》《좌전》의 9경(經). 산술과 시무책(時務策)을 익히고 매일 한장씩의 습자를 함. 《국어 國語》《설문 說問》《자양 字樣》《자림 字林》《삼창 三倉》《이아 爾雅》교 과 과 정기술학부(技術學部) 율학(律學) - 율(律:刑法), 영(令:行政法) 서학(書學) -《설문 說問》《오경자양 五經字樣》과 진서(眞書),행서(行書),전서(篆書),인문(印文) 등 글씨에 대하여 교육. 산학(算學) -《구장 九章》《철술 綴術》《삼개 三開》《사가 謝家》교 과 운 영교수방법 박사 또는 학유 한 사람에게 학생 5인 내외를 배당. 학생 한 사람에게 2문(問) 정도를 질문하게 하여 의혹을 풀게 하였다. 박사 또는 학유가 책임을 지도록 하여 수강하는 학생이 그 수강과목을 종강할 때까지는 다른 관직으로 자리를 옮기지 못하도록 하였다.국자감(國子監)의 재정재정의 근원은 토지(土地) 수조체제(收租체制)가 무너지면 학교가 큰 재정난을 겪게 되고 학교의 운영도 부실. 예종:양현고(養賢庫)를 설치 충렬왕:섬학전(贍學錢) 설치국자감 생(生)들의 특혜고려의 과거-예시,감시(監試),본시(3) 국자감의 학생에게는 과거응시 특혜 3년 수학(修學)-예비시험 면제 학업성적이 우수한 자-감시까지 면제 학업성적이 특별히 우수한 자 과거 본시험의 3단계 중 2단계까지 면제 국자감의 교육을 장려하기 위함.국자감 명칭사(名稱史)성종 : 국자감 설치 예종 : 국학 개칭 충렬왕24년 : 성균감 개칭(1298) 충렬왕34년 : 성균관 개칭 공민왕5 이후 조선시대로 계승동서학당 5부학당설립:원종2년(1261) 2월 강도에서 “동·서학당을 설립하여 별감(別監)을 두어 교학교도하였다.” 원종13년에 다시 동·서학당을 두어 김궤와 김열을 별감으로 삼아 교육. 공양왕3년, 정몽주가 성균관 대사성으로 있을 때 흥학정책의 일환으로 기존의 동·서학당 이외에 3개의 학당을 증설하여 5부학당으로 문풍을 일으켰다.학당의 교육제도지방의 향교와 대등한 위치 교육내용-중등 정도(향교와 비슷) 향교와 다른 점 문묘제 없이 교육기능만 담당 조선조에서 사학에 영향 교육대상:국자감에서 교육받짐 못한 개경의 학도. 유교 중심 교육향교(鄕校)지방교육기관으로서 관학 설립:인종5년(1127) “제주(濟州)는 학교를 세워 널리 교도하라” 교육수준:중등정도 성적이 우수한 자는 국자감 등극 특색:문묘의 제를 두고 있는 것 조선조의 향교에 계승됨.십이공도(十二公徒)12공도란 고려시대의 교육기관으로서 가장 유명한 사학 열둘을 일컬음. 12도의 시초는 1055년(문종 9) 문하시중(門下侍中:首相)으로 있다가 퇴관한 최충(崔)이 설립한 구재학당(九齋學堂:후에 문헌공도)에서 비롯한 것. 당시 국학이 시설·교육면으로 유명무실하여 학업 지망생이나 과거응시자가 권위 있는 유학자가 세운 사학으로 모여들어 성황을 이룸으로써 다른 현관(顯官) 퇴직 유학들도 사숙을 설립하게 된 것이다.십이공도(十二公徒)문헌공도(文憲公徒)홍문공도광헌공도(匡憲公徒)남산도(南山徒)서원도(西園徒)문충공도(文忠公徒)양신공도(良愼公徒)정경공도(貞敬公徒)충평공도(忠平公徒)시중 최충시중 정배걸복야 김무채시중 은정평장사 김의진참정 노단제주 김상빈유감평장사 황영정헌공도(貞憲公徒)서시랑도(徐侍郞徒)귀산도(龜山徒)시중 문정미상시랑 서석12도의 교육방침9경과 3사(史記, 漢書, 後漢書)와 시문을 짓는 것이 중심. 십이공도의 교육은 국가가 감독 학풍을 형성하여 고려 문교와 유학교육에 많은 공적을 남겼다. 고려가 개경환도 후 국학부흥에 힘쓰자 국학에 흡수되고, 공양왕3년(1391)에 폐지됨.12도의 성격과 의구를 목적으로 모여 가르치고 배우며 장기간을 두고 전통적으로 계승되어 하나의 학벌로서 형성됨.(의의) 관학인 국자감이 부진하고 향교와 학당이 수립되기 전의 고려의 문교와 유학교육에 지대한 공적을 남겼다.서당(書堂)사설 초등교육기관 『고려도경』- “미혼자제가 무리로 모여 스승에게 경을 배우고 좀 성장하면 끼리끼리 벗을 택하여 절간, 도교의 건물에 가서 공부하고, 아래로는 졸오ㆍ동치들도 역시 향선생에게 배운다” 조선조 서당제로 계승과 거 제 도광종9년(958) 과거제 채택 의의 국초의 중앙집권에 수반된 호족, 개국공신의 합리적인 도태와 제거를 위하고 문호개방을 통한 광범위한 인재선발로 새로운 중앙귀족의 편입이라는 국가, 사회의 필연성에 결부되어 나타난 현상 인종14년(1136)에 과거시행법인 과거절목이 제정과 거 시 험응시자격 및 시험절차제한을 두지 않는 것이 제도상의 원칙이었으나, 5역,5천, 불충,불효, 향·소·부곡, 악공 및 잡류의 자손들은 응시자격을 주지 않았다. 시험절차 예비시험 국자감시(國子監試) 동당감시(東堂監試) 제술업-갑(甲)·을(乙) 명경업에서는 갑·을·병·정의 4과과거제도와 교육인재선출 방식인 과거제도 인격완성이나 성인군자를 목적으로 하는 본래적 목교-주객전도 유교적 교육문학의 발달고려전기 향가-불교의 교리를 일반인들에게 쉽게 이해시키기 위한 것. 『보현십원가』11수-균여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어려운 불경을 향가로 풀이한 것 한문학-과거제,문치주의가 성행함에 따라 한문학은 필수교양이 됨 초기:중국과 다른 독자적 중기:귀족화, 당의 시와 송의 산문을 숭상하는 풍조 '박인량', '정지상'을 비롯한 우수한 시인들이 등장문학의 발달무신집권기 무신의 난으로 한 때 시들어졌던 고려의 문학은 최씨 정권 이후로 다시 일어나기 시작 내용:자신과 민족의 어두운 면을 표현 패관문학(稗官文學) 임춘의『국순전』 이인로의『파한집(破閑集)』문학의 발달고려후기 신진사대부 경기체가:향가의 형식을 계승한 새로운 시가 어부가:전원생활의 한가로운 모습을 그려낸 처사적 문학 패설화문학:사물을 의인화하여 일대기로 구성 한시:자유로운 문체를 구사하여 새로운 문학세계 추구 민중문학-장가(속요)의 유행으로 대부분은 서민의 생활감정을 대담하게 자유분방한 형식으로 드러냄. 대표작품-『청산별곡』,『가시리』,『쌍화점』등.건축-고려전기사원 중심 궁궐건축 경사진 면에 축대를 높이 쌓고 경사진 면에 건물들을 계단식으로 배치 사원건축주심포식과 다포식건축-고려후기봉정사 극락전부석사 무량수전건축-고려후기석 탑승탑(부도)승탑(부도)고달사지 승탑신륵사 보제존자 석종승탑(부도)불 상고려 전기 강원도:통통하고 풍만한 형태 충주,광주(경기도):거대한 철불이 조성 충남,전북:토착적, 민간신앙과도 상통하는 거대한 몸체에 관을 쓴 석불 고려 후기 원으로부터 라마교가 들어와 이국적인 요소가 보이는 불상들이 조성되었으나, 대체적으로 고려 초기의 양식을 지니면서 부드럽고 온화한 불상이 만들어졌다.불상별 특징공 예공예의 발달배경 고려 귀족들은 자신들의 사치생활을 충족하기 위하여 다양한 예술작품을 만들어 즐겼다. 고려시대의 미술분야에서 돋보이는 분야로 귀족들의 생활도구와 불교의식에 사용되는 불구 등을 중심으로 크게 발전한 것이 특징이다.고려자기금속 공예은입사청동향완청동정병인 쇄 술목판 인쇄술의 발달 : 고려에서는 여러 차례 대장경을 새기는 등 목판 인쇄술이 발달 금속 활자의 발명 : 목판 인쇄술을 발달은 금속 활자의 발명으로 이어지면서 활판 인쇄술도 발달 최초의 금속 활자 : 고종 때 금속 활자로 '상정고금예문'이라는 책을 간행(1234) → 서양보다 200여 년이나 앞서는 것 직지심체요절 : 현재 남아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로 인쇄된 책으로, 1377년에 흥덕사에서 간행회 화고려 전기 고려 후기음악과 가면극음악 아악 : 송에서 수입된 대성악이 궁중음악으로 발전된 것으로 주로 제사에 쓰임. 향악 : 한국전래의 궁중음악, 향악곡으로는 동동, 대동강 등이 있음 악기 : 우리 전래의 악기에 송의 악기가 수입되어 거문고, 비파, 가야금, 대금, 장고 등 (약 40종) 가면극ow}
《동양과 서양》- 최영진, 지식산업사, 1993.이 책에서는 동·서양의 환경에 영향을 받아서 사상이나 문화적인 면에서 동양과 서양의 차이점에 대해서 알아보고 아울러 서양인이 보는 동양의 관점이 아니라 동양인의 관점에서 동양을 어떻게 봐야 할지도 생각해 보게 한다. 책이 쉽지 않지만 다루는 내용이 흥미로운 것들이 많아 이 책을 보게 되었다.이 책은 네 가지 주제로 엮어져 있다. 그 안에 또 세부적으로 소제들이 다루어져 있다. 큼직한 주제들을 보자면 동·서양의 환경: 닫힌세계와 열린세계 , 동·서양문화의 기반 , 동·서양이 본 인간성 , 동양인과 서양인 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에서 내가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이 과제의 강의와 관련되어 있는 일본이다. 첫 번째 주제 안에서 일본의 어원성이라는 소제목이 있다. 그 점에 대해서 보면...동양문화를 대륙문화로, 서양문화를 해양문화로 볼 경우, 일본은 특수한 위치에 처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일본은 한국이나 중국 대륙에서 생성 발전된 유교, 도교, 대승불교 등 정신·물질문명을 전래 받고 상호 영향을 끼쳐왔다. 그러나 일본은 여타 다른 동양국가와는 달리 서양과 비슷한 해양환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본 특유의 이원성을 띄게 된다. 일본은 19세기까지 중국 대륙문화의 배타적 영향아래 있었을 뿐 아니라 국가로서의 기초를 다져 가는 시기에는 중국과 한국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6세기 때 한국을 통해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불교는 일본의 사회, 경제, 군사면 에서까지 깊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일본은 대륙문화 위에 기초하고 있었다. 일본은 지속적으로 중국 대륙문화를 흡수 소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그것을 자신들만의 것으로 만들었다.역사적으로 일본은 이처럼 중국 대륙문화의 압도적인 영향 아래 있었으나, 일본열도의 지리적 여건은 일본으로 하여금 해양성을 가지도록 해주었다. 실제로 일본열도는 동아시아 대륙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대륙에서는 볼 수 없는 독자적인 '해양성'을 키울 수 있었다. 이러한 특성들은 일본을 아시아의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서양과 비슷한 국가로 만들었고, 해양문화에서 볼 수 있는 활력을 가지고 있는 나라로 만들었다. 특히, 서양의 봉건제도와 절대 왕정 후기의 여러 제도의 발전시기가 일본의 그것과 일치하고 있는 것은 일본의 해양성 을 뒀받침 해주는 근거가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대륙문화라는 인문환경과 해양성이라는 자연환경이 일본의 이원성의 원천이다. 다시 말해서, 일본은 그 특수한 지정학적 위치에 힘입어 대륙·해양의 이원성을 갖추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문화적 측면에서 일본은 순수한 동양의 대륙문화권으로 분류되는 것도 무리이며, 그렇다고 서양의 해양문화권으로도 분류될 수 없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대륙문화는 일본에 유입되면서 일본 특유의 해양성에 의하여 변화를 겪었고, 또 반대로 일본 고유의 해양성은 중국 대륙문화에 의하여 변형되었다.일본의 이원성, 이중성, 양면성은 일본적 특성의 원천이다. 그리고 일본의 특성 가운데 제일 중요한 것은 놀랄 만한 적응력이다. 명치유신의 성공은 우연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이원성으로부터 비롯된 적응력에 힘입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즉, 일본은 그 '해양성'으로 인해 이미 서양문화에 적응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일본의 이원성은 일본 내부사회에 관한 한 큰 혜택이 되었고, 동양문화와 서양문화의 융합이라는 측면에서 많은 가능성을 시사해 주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외부사회에 대해서는 커다란 불안정 요인으로 남아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그에 상응하는 대외관계를 뒀받침 해줄 철학과 국민 의식를 개발하지 못한다면 21세기의 태평양시대에는 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또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동양과 서양이 인간을 인식하는데 있어서 각기 다르게 출발하였다는 점이다. 먼저 동양을 살펴보면 공자의 인은 예수의 사랑과 같은 것이며 마호메트의 형제애는 불교의 자비와 맥락을 같이 하는 인간사이의 조화를 이루라는 인류의 유일한 도그머적 가르침임을 알았다.유대·기독교와 도가·유가의 교훈과 지향하는 바는, 유대·기독교가 지중해를 중심으로 생성되었고, 도가·유가가 중국 대륙을 중심으로 생성되었다는 전혀 다른 배경으로 인하여 큰 차이를 나타낸다.해양문명의 특색인 자연과 인간의 분리현상은 유대·기독교의 신·구약에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다. 인간은 자연과 분리되는 특별한 존재이며, 자연을 정복하고 지배할 사명과 권리를 가지고 태어난 것으로 파악된다. 인간은 진취적이나 동시에 극단적이 된다.도가·유가의 도덕경·논어 등에는 농경문명의 특색인 자연과 인간과의 조화 현상이 기본개념으로 파악되고 있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며 자연 속에서 인간의 초 자연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인간은 중용적이나 동시에 소극적이 된다. 바꾸어 말해면 인간이 중용적 소극적일 수밖에 없는 자연조건과 농경문화의 환경 아래서 이에 대한 합리화가 시작되는 것이다.유교와 도교가 음양으로 조화를 이루며 대표하는 동양사상은 철두철미 인본주의다. 인간으로서 자연의 도를 따라야 한다는 인간의 숙명적 존재에 대한 의식과 그 한계 안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인간 이외의 힘을 빌리지 않고 철저히 인간 위주로 한다는 의지의 결합이 동양철학이다. 반면 자연과 인간, 정신과 육체 너와 나의 분리·투쟁은, 서양의 해양문명에서 창조론·진보사상 등에 의하여 보편화·절대화되었으며, 유럽의 신학과 형이상학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이 책을 통해서 동양과 서양에 대하여 서로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동양과 서양을 나누어서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 인터넷의 발달로 인하여 예전의 해양으로만 통해 전달되는 문화가 아닌 지금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세계를 직접적으로 느끼고 있는 현실이다. 그래서 서양과 동양이라고 나누어서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동양문화와 서양문화의 발달은 서로 다르게 되었지만 지금은 서로의 문화에 바로바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회적 여건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굳이 나누어서 생각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서양의 문화가 동양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비중이 높아져 가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에 서양의 과학적인 문화를 동양인들은 우선적으로 받아들이고 활용하면서 서양문화에 더욱 익숙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동양인으로서 동양의 문화를 더욱 발전시킬 필요성을 느낀다. 즉 서양의 좋은 문화는 빠르게 받아들이되 불필요한 부면은 빠른 판단력으로 배제시켜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