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 분석- 요한복음 11장 1~44절{. 目 次 .{Ⅰ. 들어서면서Ⅱ. 텍스트 분석1. 본문2. 내용 분석Ⅲ. 마무리하면서Ⅰ. 들어서면서성경만큼 함축적이고 비유적이며 총체적으로 이해해야하는 텍스트가 또 있을까 싶다. 필자는 성경 본문 중에서도 요한복음 11장 1절~44절에 나타나는 내용으로 텍스트를 분석하여 사건 집필의 의도를 밝혀 보고자 한다. 죽은 사람을 살린 사건 정도로 알고 있는 텍스트.본 내용은 기독교에 관심이 있는 자라면 대중적으로 알만한 내용으로, 나사로라는 죽은지 나흘 된 사람을 살려내는 사건이다. 필자는 이 내용이 이야기 텍스트 이기도 하여 소설 장르의 성격을 띄기도 하면서 분석 할 요소가 많기에본 텍스트를 선택하였다.먼저 화자를 정의 하는 일부터 새로 해야 할 것이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요한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적인 저자는 요한이 아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라고 하여 모든 성경의 집필자가 하나님임을 명시하였다. 따라서 본문의 집필자도 요한이 아닌 하나님임을 밝힌다.이야기의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자면 마리아와 마르다와 나사로는 남매간으로 예수와 절친한 사이이다. 많은 병든자를 고쳐낸 예수가 다른 지방으로 간사이, 나사로가 병에 들었고 나사로의 동생들인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에게나사로의 병듬을 전하였으나 예수는 일부러 바로 오지 않고 이틀후에 나사로에게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나 나사로는 이미 죽어 죽은지 나흘이나 되어서썩은 냄새가 나는 지경이었고 애도하는 무리속으로 예수가 나타나 함께 비통해한다. 그리고 "나사로야 나오너라"라고 나사로를 불렀고 나사로는 잠에서 깬듯 일어나게 된다.죽은자를 살렸구나! 라는 대강의 흐름을 알아챈 감동도 잠시 어렴풋하게 텍스트를 읽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에게 많은 의구심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읽는자마다 여러 의구심이 있겠지만, 일반적인 의구심을 기술해보면 다음과같다.첫째는, 왜 나사로의 병환 소식을 듣고 바로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지 이미 나흘이라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리쯤 되매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20. 마르다는 예수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24.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7.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나이다28.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형제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29.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30.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의 맞던 곳에 그저 계시더라31.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의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33.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34.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37. 그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을 씻긴 것이다. 마리아의 예수를 향한 진실한 사랑과 확고한 믿음을 볼 수 있다. (요한복음 12장 3절 :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 상호텍스트성을 발견할 수 있다.)3절 : 보조단위: 나사로의 병들었음을 알린다. 이로서 사건이 시작된다.4절 : 핵단위: 나사로의 사건이 범상치 않게 전개될 것이고, 그 전개 상황이 집필자인 하나님의 의도속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사건의 의도와 동시에 집필 의도도 알 수 있다. 나사로는 죽지 않을것이며 긍정적인 의도와계획아래 예상된 일 임을 알 수 있다. 의도성이 나타난다.5절 : 정보단위: 예수와 나사로와 그 동생 마르다, 마리아가 절친한 사이임을 알 수있다.6절 : 징조단위: 예수가 바로 나사로에게 가지 않음으로 인해 사건의 진행 방향이 일반적이지 않을 것을 알 수 있다.7절 : 보조단위: 예수가 드디어 나사로에게 가는 장면으로 핵심단위로 연결해주는 촉매의 역할을 하는 구절이다. 유대로 다시 가는 장면이다. 그런데 예수는 나사로가 있는 '베다니로 가자' 라고 말한것도 아니고 '나사로에게로 가자'라고 한것도 아니다. '유대로 가자'라고 하였다. 그런데그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지 이미 나흘이라는 것은 우리말 번역은 그렇게 되어 있지만 원어 성경에는 나사로라는 말로 되어 있지 않고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그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이렇게기록되어있다. 이 사건을 성경이 개인적인 나사로를, 나사로라는 사람을 다시 살려 놓은 사건으로 취급하지 않고 인류를 염두에 두고있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취급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베다니로가자'가 아니고 '나사로에게 가자'도 아니고 '유대로 다시 가자'고 하였다. 또한 '그'가 죽어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는 그런면에서 우리 모두일 수 있다. 상황성이 나타난다.8절 : 징조단위: 제자들의 두려운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유대인들이 그들을 돌로 치려하는데도 예수가 가자고 있다.18절 : 정보단위: 지역이 가깝다는 구체적인 사실 정보를 전달한다.19절 : 보조단위: 많은 사람들이 왔다는 것은 예수가 자신의 능력을 나타낼 사람이많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 상황은 예수가 의도한 것이며 기뻐한 것이라는 것을 15절을 통해 알 수 있다. 응집성이 나타난다.20절 : 핵단위: 마르다와 마리아의 예수를 맞이하는 행동의 차이를 나타낸다. 이는 이 둘을 비교하고자 함을 의도한다. 마르다가 마리아보다 더반갑게 티내며 맞이함을 알 수 있다.21절 : 보조단위: 그러나 호들갑스럽게 예수를 맞이한 마르다는 예수를 믿는 믿음이부족함을 보인다. 진정한 믿음은 예수가 어떤 장소에 있던 능력을행할 수 있는 자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믿음이 부족한 자를 상징하는 의미라 하겠다. 20절에서 마리아보다 더 반갑게 예수를 맞이하였지만 실상은 믿음이 부족함을 21절과 응집성을 이뤄 보여준다.22절 : 보조단위: 언뜻 보기에는 마르다가 예수를 전적으로 신뢰하는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24절에 가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응집성을 거쳐 보여준다.23절 : 핵단위: 나사로의 현재 죽음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다시 살리라고 말한다.이것은 베다니에 예수가 와서 한, 유대로 다시 와서 한 첫 번째선언이다. 예수가 베다니에 온 목적을 바로 보여주고 있다.24절 : 보조단위: 예수가 23절에서 나사로가 다시 살 것이라고 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12,13절에서 제자들이 바로 알아듣지 못한것처럼 마르다도알아듣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부족한 믿음탓에 귀가 어두움이다. 우리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할 때 상대방의 발화를 수용자 입장에서 수용자의 사고방식으로 이해하려 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발화자에게 온전히 마음을 주었을때에는 그 발화를 여과없이그대로 수용한다. 그 차이가 마르다와 제자들을 통해 발견되고있는것이다. 이는 무지한 인간을 또 한번 확인시켜주고 있다. 집필자가 재차 무지한 인간에 대해 강조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인간이 무지하고 의심많은 존재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도와 줄 방법이 없습니다. 우는 것 밖에 없습니다.) 불쌍히 여기고 그 처절함에 대해 안타까와 했다. 이것이 예수가 여기까지 오게 한 이유를 나타내는 구문이 되겠다. 두 번째 해석은, 믿었던 마리아 마저도 오빠의 죽음 앞에서 예수를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연약하고우매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모습을 통탄하였음이다. 그러나결론으로는 두 번째 해석 역시 예수가 온 이유는 첫 번째 해석과 같다. 예수가 세상에 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리고자하는 집필 의도를 알 수 있다.34절 : 정보단위: 나사로의 위치를 확인하며 드디어 나사로에게 기적을 행할 것을암시한다. 주 사건으로의 접근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음을 의미한다.35절 : 징조단위: 32,33절과 응집성을 이룬다. 예수가 사랑하는 인간의 현실을 놓고 비통해함이다. 이는 앞으로 자신이 맞이하게 될 십자가 사건이반드시 필요함에 대한 인정과 피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수용이라고 필자는 별도 해석 해 본다.36, 37절 : 징조단위: 인간이 얼마나 이기적으로 해석하기 좋아하는 존재인지를 보여준다. 또 신앙인이 얼마나 이승에서의 이득 추구를 목적으로 신앙생활하는지를 보여준다. 진정으로 나사로를 사랑한것이라면 왜 죽게 내버려두었느냐는 것이다. 예수를 향한 원망이 고조에 달하고 있다.38절 : 징조단위: 예수 또한 비통함의 고조에 달했다. 자신을 온전히 믿는자가 없으며 믿을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철저히 느낀다.39절 : 보조단위: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예수가 왜 돌 문을 통과해서 가지 않고번거롭게 문을 열라고 했을까. 그것은 앞서 설명했듯이 전시효과때문이다. 최대한 많은 사람이 자신의 능력을 믿게하기 위한 의도 때문이다. 이렇듯 집필자의 의도를 알 때 모든 기적의 행위가사람들이 자신의 능력을 믿게 하는것에 목적을 둠을 알 수 있다.예루살렘에서 나사로가 있는곳까지 순간이동 하면 될 것을 걸어온 이유는 제자들에게도 보이고자 함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또, 마르다의 부족한 믿음을 확인할 수 있는 텍스트
청교도 사회1. 들어서면서신의 말씀을 최고로 여기며 엄격하게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는 생활을 했다는 청교도인들... 그때 그 청교도 사회는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어떠한 관념으로 세상을살고 있었는지 알아 보도록 하자.2. 청교도의 배경영국의 청교도들은 엄격한 도덕, 주일의 신성한 엄수, 향락의 제한 등 투철한 개혁을 주장하였다. 영국에서 종교적 박해를 피해 최초로 미국에 이주해온 사람들이바로 Pilgrim Fathers들이다. 했다. 이들은 신대륙의 특수한 환경에 의해 미국적인특성을 가진 청교도 정신을 발전시켰다. 이 청교도 정신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등을 지배하게 되었으며 미국의 기본 정신이 되었다. 이들은 종교와 정치에 불만을 품었던 사람들이 신대륙으로 이주해 왔기 때문에 종교개혁 정신에 투철하였다.3. 청교도의 교리'퓨리턴(Puritan) 이라고도 한다. 1559년의 엘리자베스 1세가 내린 통일령에 순종하지 않고 국교회 내에 존재하고 있는 로마가톨릭적인 제도 의식(儀式)의 일체를 배척하며, 칼뱅주의에 투철한 개혁을 주장하였다. 엄격한 도덕, 주일(主日:일요일)의 신성화 엄수, 향락의 제한을 주창하였다. 제임스 1세, 찰스 1세 때에 비국교도로서 심한 박해를 받고 네덜란드와 기타 지역으로 피해 갔다. 그 중에서도 신대륙의 플리머스에 식민지를 개척한 메이플라워호(號)의 필그림 파더스 는 유명하다.청교도는 점차로 절대왕정에 대한 정치적 요구와 결부하여 의회에서 유력해지고,1642년에 일어난 청교도혁명의 주체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청교도 내부에서도크게 장로파(長老派)와 독립파(獨立派)로 분열하였다. 청교도 문학으로는 밀턴의《실낙원(失樂園)》이 대표적이다. 미국에서는 1620년-1800년 사이에 NewEngland의 사상을 지배하여 청교도 도덕관을 형성하게 되었다.식민지 시대에서 19세기 초까지는 인간의 영혼과 정의를 열렬히 탐구하여 개인생활이 도덕적 검토에 열중했다. 개인의 죄악을 문제시했기 때문에 전체적인 사회의 의무에 무관심하는 것이 문제점이었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New England의청교도는 프랑스의 휴머니즘에 영향을 받아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노예제도, 음주 등을 폐지해야 한다는 사회적 개혁운동이 발생하였다. 남북전쟁 이후 청교도는 도덕적 설교보다는 엄격한 법률 제정을 통해 사회 개혁을 하려고 하였다.4. 청교도의 세계관 및 정치관청교도의 이론에 의하면 진실한 지식은 신의 계시의 결과이고 인간 노력의 소산이 아니라고 한다. 인간의 지식이란 애매하고 연속성이 없고 모든 면에 철저하지못하기 때문에 신앙만이 우주를 이해하려는 인간을 만족시킬 수 있다고 본다. 선택받은 자는 부귀, 능력, 가문 등은 신이 내려준 것이므로 선택받은 자로부터 사회적 정치적 지배권을 빼앗는 것은 신에 대한 저항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성장한 청교도는 강력한 중앙집권 정부를 조직하여 범죄를 엄격히 단속하게 하였다.5. 청교도 정신과 Frontier18세기 말에 이르러 New England 사람들이 서부로 진출하여 Frontier(미국 역사상 서부의 개척지) 의 자연 환경과 사회적 조건에 접하였을 때 청교도 정신은변화되었다. 프런티어의 존재(또는 소멸)가 미국 사회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광대한 프런티어는 땅의 입수를 용이하게 하여 농업발달에 기여함과 동시에, 공업제품에도 충분한 국내시장을 제공하였다. 그리고 여기에는 자립의 기회가 열려 있었기 때문에 동부의 과잉노동인구를 흡수하는 안전판의 기능을 다함과 동시에, 미국사회의 유동성(流動性)을 높여 그 중산계급화를 촉진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 정치면에서도 기존(旣存)의 사회적 제약이 적은 프런티어는 자유 평화라고 하는 이념(理念)에 제대로 들어맞아 보통선거운동 등에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을 끼쳤고, 자치의식도 높였다. 그리고 대자연에 맞서 살아 나가야 하는 냉혹한 상황 속에서 프런티어 스피릿 이라 부르는 개척정신의 기풍이 배양되어 그것은 미국 국민의 국민
정약용 문학관 정리- 21C 글로벌 문학, 정약용 문학관으로 열어야{{. 目 次 .{Ⅰ. 정약용 문학관의 배경1. 출생2. 신앙3. 윤리Ⅱ. 정약용 문학관의 내용1. 문학보다 실학 중시2. 소설을 배격, 한시 주장3. 리얼리즘 정신으로의 문학 주장Ⅲ. 21C 글로벌 문학,정약용 문학관으로 열어야Ⅰ. 정약용 문학관의 배경1. 출생다산은 1762년 6월 16일 광주의 마현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명망 높은 관료 학자였으며 모친은 실학자요 화가인 윤두서의 손녀였다. 근방에는 남인 학자들이 많이 거주하였고 서학과 깊은 관련을 가진 주위 환경이었다. 한강 줄기를 오가며 많은 남인계통의 학자들이 서학과 실학 그리고 국정에 관하여 많은 토론을 함으로써 사상을 폭넓게 굳혀 나갔을 것이다.2. 신앙다산은 천주교 신봉의 이유로 18년동안 귀양을 살며 기구한 삶을 살았다. 다산은 16세때 경세치용에 학의 뜻을 두었으며, 천주교리 연구회를 열고 신앙 생활을 하였으며, 23세에는 한강 배안에서 천주교리를 논함으로써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이에 다른 견해도 있으나 핵심사항이 아니니 넘어가기로 한다) 그러나, 다산은 천주교를 신앙으로써 받아들인것이 아니라, 사상의 폭을 넓히는 새로운 학문으로서 받아들인다는 견해가 일반적이다.3. 윤리다산은 "仁"이란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그 할바를 다하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仁의 실현을 목표로 삼았다. 민중을 향한 지배자의 횡포가 심했던 조선후기의 시대적 상황은 다산으로 하여금 민중적 의지로 살아가면서 진실되고도 사실적인 시를 짓게 했다. 다산은 자기 시대의 사회가 "하나도 병들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하면서 자기 시대의 문제르 새롭게 개혁해 보려는 의지를 가진 실학자였다. 그는 이러한 정신에 입각해 2446수라는방대한 양의 시를 지었다.옛 선비의 얼굴은 셋이라고 한다. 정치가로서의 얼굴, 학자로서의 얼굴, 문인으로서의 얼굴이 바로 그것이며, 이 세 얼굴은 道라는 것으로 종합된다. 이와같은 세 얼굴과 유향인 시문집은 남이 쓰이지 못하는곳에 쓰이고 남이 말하지 못하는 것을 말할 때 그 향기를 낸다. 우리는 그 향기를 다산 정약용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방대하고도 다양한 시 세계를 보여준 다산은 서학을 통해 서양의 학문과 접목시켜 보려는 시도를 하였다. 비록 그 시도가 빛을 발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필자는 정약용의 사상이 21C 글로벌 문학의 길을 여는데에 반드시 고찰해야 할 사상으로서 다루고자 한다. 아래에서 살펴보도록 하자.Ⅱ. 정약용 문학관의 내용1. 문학보다 실학 중시다산은 五學論에서 "文章之學은 우리 道에 큰 해가 된다"고 단언 하였다. 유학의 도를 실학으로 정립하는것을 평생의 과업으로 삼으면서, 실학과는 어긋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문학에 대해서 신랄한 비판을 계속하는 것이 정약용이 문학의 문제를 다루는 기본적인 자세였다고 하였다.다산은 자기 시대에 와서 특히 문학이 더욱 어지럽게 되었다고 생각한 사람이다. "다산에 의하면 문학은 표현을 중요시 할 수 없는것이다. 나약하고 미세한 말을 교묘하게 늘어놓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문학은 사람의 뜻을 굳게하고 건강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음란하고 추하고 간사하고 허황하고 괴상한 감정을 가지도록 해서 문학은 물리쳐야 할 재앙 이라고 했다.자기 자신도 문인이 아니었던 것은 아니고, 자기 시를 중심으로 시에 관해서는 깊은 이해력을 보여주고, 주목할 만한 주장을 펴기도 했지만, 문학은 원래 그리 긴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특히 자기 시대의 문학은 그대로 버려둔다면 구제할 수 없이 타락하게 된다는 위치의식을 절박하게 느끼면서 문학을 비판하였다.정약용은 농촌 출신이고 도시 市井人과 맥락이 닿았던 사람이 아니었으며, 농민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농민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핵심적인 과제로 삼았다. 농민의 사고방식을 가지면 문학이니 예술이니 하는 것들은 건실한 생활 태도를 해치는 풍조를 낳았으므로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다가 정약용은 쓰라린 고난을 겪으면서 자기 사상을 굳힌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욱 한편으로 기운 사상이 나왔는지 모른다.2. 소설을 배격, 한시 주장다산은 소설의 시대에 사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소설을 배격하였다. 정조의 문체반정을 지지하면서 잡스럽고 문장을 금하고, 문장의 규범을 확립할 것을 왕에게 진언하였다. 실학은 당시 사회를 근본적으로 비판하고 역사 발전의 새로운 방향을 선명하게 제시할 수 있었다.박지원은 문학이야말로 이러한 과업을 수행하는데 특히 중요한 구실을 한다고 했는데 정약용은 문학의 저해 작용은 제거하지 않고서는 이러한 과업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했다. 사회를 교화하는데 있어서 소설의 기능과 효과를 이해하지 못한 점은 그의 문학에 대한 인식에서 나온것이라고 볼 수 있다.다산은 소설처럼 과장이 있는것을 배격하고 정도의 길로서 한시를 택했고 여기에서 모든 문학의 도가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었던것 같다. 강진에서의 유배시절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보면 자신 시의 세계에 대해 자세히 밝혔는데, 처음 임금곁에서 관직 생활을 할때에 지은 시는 자신의 감정에 치우치게 되어 시가 슬프게 되었고, 장기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에는 자신의 처지가 민중의 처지와 같아 더욱 비통하게 되었고, 강진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부터는 개인적인 처지에서 벗어나 민중의 아픔을 인식하고 그 아픔이 하나의 공통점으로 승화되어서 고난 극복 의지가 있게 되었을 때 마음이 넓어졌고 슬픔이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그러나 그 주장을 널리 알리지 못한 한계점을 가지고 있다 하겠다. 정약용은 자기 시대 문학의 전반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것일 수는 있었어도, 구체적인 작품활동이나 문학운동과 직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3. 리얼리즘 정신으로의 문학 주장다산의 시는 조선후기 사회의 무순을 비판하면서 고난을 극복하려는 리얼리즘의 정신이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산의 그의 문체책에서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문장이란 물태나 인정이 변함에 따라 문체로 변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물태나 인정이란 것은 시대와 사회에 따라 변하는 것인만큼 문체도 응당 시대와 사회가 변화함에 따라 변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산은 그 시대에 벌써 현대에서 말하고 있는 문체의 변용 즉 내용의 변화에 따라 장르가 변형된다고 하는것을 인정하고 이를 주장하였던 것이다. 다산은 종래의 시의 개념에서 탈피하여 시대를 대변하는 것이 시라는 생각을 가지고 강진 유배 시절에 아들에게 보낸 편지는 시인의 사명을 이야기하는 듯하다.'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지 않는것은 시가 아니다. 시대를 아파하고 퇴폐한 습속을 통분히 여기지 않는 것은 시가 아니다. 옳은 것을 찬미하고 잘못을 풍자하여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하려는 뜻이 없으면 시가 아니다. 그러므로 뜻이 확립되지 못하고 배움이 순정치 못하고 대도를 듣지 못하고 임금을 바르게 인도하고 백성들에게 혜택을 베풀려는 마음이 없는 자는 시를 지을 수 없다'다산의 이 말은 시를 지나치게 공리적으로 생각했다는 비난을 받을 소지가 있긴 하지만 시를 쓰는 사람이라고 해서 현실을 외면할 권리가 없다는 사실을 준엄하게 일깨워 주는 말이라고 송재소는 말했다' 개인적인 감흥 보다는 객관적인 사실의 입장에서 사회의 절실한 현실문제를 올바로 이끄는 주된 역할을 시가 해야 된다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4. 서학 연구실학의 개혁의지와 관련하여 근대 지향의 성격을 엿볼 수 있겠다. 정약용은서학을 받아들였다는 명목으로 길고 긴 유배 생활을 하였다. 정약용이 서학을종교로서 받아들였느니, 학문으로 받아들였느니에 대한 견해는 다양하다. 그시점 또한 다양하다. 그러나 실학을 종교로서 받아들이고 학문하였던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학문으로, 서양의 것이기에 더욱 새로운 학문으로 받아들이고 연구하는 자세로 수용하였다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정약용은 무조건적인 수용이아닌 비판적인 수용자세를 가졌다. 서학의 사상이 우리 문학에 어떤 비교점이될지 연구하는 자세로서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 자세와 연구를 세상에 널리알리지 못하고 지연, 인맥을 통해 전달하는데에 그쳤다는 것이 한계점이다. 그러나 그 시도에서 의의를 가진다 하겠다.Ⅲ. 21C 글로벌 문학, 정약용 문학관으로 열어야지금까지 정약용의 문학관을 살펴 보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21C 글로벌 사회를 살아가면서 지향해야할 문학관은 무엇일까. 바로 서양 문학에 쓸려가는 것이 아닌 우리 문학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면서 서양의 사조 또한 흘려버리지 않는 정신, 비판적이면서 조화롭게 수용하는 정약용 문학관일 것이다.우리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이 주어진 서구 문화적 유산의 수용문제가 있다. 서구 문화적 유산을 거부하고 우리 전통(고려가요,향가 등)으로 회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선택할 수는 없다. 문제는 어떻게 서구적 유산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우리 고유의 문화적 동질성을 유지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구 세계를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주체적인 관점이 필요하다.
귀신. 어떻게 바라 볼 것인가- 봉화산 도당굿 관람{. 目 次 .{Ⅰ. 한옥마을로 향하며Ⅱ. 봉화산 도당굿 소개1. 유래2. 사제무와 악사3. 순서 (열여섯마당의 의미)4. 소감Ⅲ. 귀신, 어떻게 바라 볼 것인가Ⅳ. 한옥마을을 떠나며Ⅰ. 한옥마을로 향하며민소매 원피스를 입은 것이 뿌듯할 만치 달콤하게 따사로운 5월 어느 토요일 오후! 설렘 반 두려움 반으로 한옥마을을 향한다. 숙제라서 가서 관람을하긴 해야할텐데 공포영화에서 본 한 서린 날카로운 눈빛이 자꾸만 아른거린다.귀신.. 과연 있을까? 필자는 귀신이 있다는 것에 한 표를 던지고 싶다. 비록내가 귀신을 본 적도 없고, 가위를 눌려 본 적도 없지만 그 존재에 대해서는인정한다. 다만 그 귀신이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 또 얼마나 그 능력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다. 그래서 수업 시간을통해 아주 오래전부터 여러 사상가들이 귀신에 대해 고찰해 왔다는 내용은나로선 아주 새로움이었다.이제 그 현장으로 간다. 에서의 귀신 이야기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치며 오싹해져 옴을 느낀다. 그러던 중이 곳 한옥마을에 당도하였다.오후 4시. 아직은 뜨거움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는 그곳에서 몇겹의 옷을껴 입은 당주가 보인다.Ⅱ. 봉화산 도당굿 관람대략 100여명쯤 될까? 자리를 비집고 들어가 맨 앞줄에 앉아본다. 무척이나 온화해보이는 저 분이 당주이신가보다. 우선 도당굿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아래에서 살펴보도록 하자.{1. 유래가. 도당굿의 성격한국 각 지역의 마을들에서는 마을의 신전인 당에서 마을 제의를 지낸다. 이 마을 제의는 자정의 유식형태의 제의와 밝은 낮에 가무를 수반하는 무속의례를 들 수 있는데이 무속의례를 마을굿이라고 한다. 이 마을 제의들은 모두 한 마을의 평안과풍농, 풍어 등을 기원하고 마을 사람들의 무병과 복을 기원하는 신앙적 의식이다. 엄숙한 제사의식 뿐 아니라 굿 자체의 연희성과 마을 전체의 축제성을지닌다. 마을굿은 역사성과 전통성을 지니면서 마을 나름대로의 굿 형태와 구조를 지닌다. 이것 또한 마을굿과 개인굿의 다른 점이다. 마을 굿의 명칭은 동해안이나 남해안 지역에서는 별신굿, 호남지역에서는 당산굿, 서해안 중북부쪽에서는 대동굿이라 불린다. 우리가 어제 치룬 대동제도 대동굿에서 이름을따온 것이다.지금 관람하는 도당굿은 경기도 지역에서 행해지는데, 근래에는 서울의 일부 마을에서도 도당굿 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고 있다. 도당(都堂)이란 명칭은그 마을에서 가장 큰 당, 큰 당굿이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한강 위쪽은 강신무가 굿을 주도하나, 한강이남은 화랭이라는 남무와 강신무(무녀)가 합작하여 화랭이가 굿을 주도한다. 화랭이는 세습되어지는것인데이와는 판이하게 이질적인 양편의 무당이 합작하여 굿을 진행하는 사제무 편성형태는 한강 주변의 인근에서만 볼 수 있는 것으로 무당의 지역적 분할 형태의 또 다른 독자적이고 독특한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이러한 점들로 인해 같은 경기도 도당굿이라도 한강을 기준으로 위쪽과 아래쪽의 형태가 다른것, 또한 굿 일과 굿 패의 주도권을 화랭이가 지닌다는 점역시 독특하다고 보는 것이다.나. 유래와 역사그 기원이나 유래에 대해 구체적으로 전해지지는 않는다. 서울시청, 중랑구청 중랑 문화원 중화동 향토사연구소 등에서 발간한 자료집들에서 보면 한결같이 봉화산도당굿의 역사가 400년쯤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당과 당집의 발전 단계 및 다른 지역 상황등을 고려해 볼 때 봉화산 도당은 그 역사가 오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400년 남짓으로 보려는 것은희박한 근거나마 그 근거에 의거하려는 것인데, 위에서도 밝힌바와 같이우리 민족의 제의 습속은 이미 삼국시대에 그 근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봉화산 도당의 제외와 제당도 어떤 형태이든 이미 400년 이전에 존재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2. 사제무와 악사{봉화산 도당굿의 사제무는 세습무가 자기의 사제 지역인 단골판을 이어 받듯 도당굿 사제 권한을 이어 받는다.이곳에서는 도당굿 사제 권한을 가진 무녀를 당주 또는큰 당주라고 하며 , 당주 밑에는 작은 당주를 두어 큰 당주로부터 사제권을 이어받게 되어 있다. 오늘 굿을 진행{하는 사제무는 신위행 만신이다. 첫인상인데 무척 푸근하다.굿에서 악사는 사제무 못지 않게 중요하다. 악사 김광수 는 현역으로 30여년간 봉화산도당굿의 잽이 당주로 일해왔었다. 악사당주는 악사와 만신을 관리할 뿐 아니라 굿의 흐름을 원활하게 음악을 연주해야 한다.3. 순서가. 죽동부정 : (거리부정, 주당)도당에 올라오는 길에서 온갖 잡귀들의 부정을 씻겨주는 곳나. 불사부정 : (당안에서) 소식소채를 차려놓고 온갖사람들과의 관계가 있던 당안에서 부정을 씻겨 내는 굿다. 도당거리 : 먼저 도당의 신과 팔도의 산신을 청배하고 축원을 드리고 대신할머니, 산말명, 산제장, 굴막제장등을 놀리는 굿으로 윗대의 만신, 당지기 등돌아가신 모든 분들을 놀면서 농수를 주고 각자의 씨족 후손들과 태어난 곳을 위해 보살펴 달라는굿라. 산제석거리 : 마을의 모든 부정을 막아주고 무병장수와 만복을 기원하는굿. 개인굿은 안당제석거리와 같다.마. 상산거리 : 높은 신령을 맞이하고 대접하고 잘 보살펴 달라며 기원바. 별성거리 : 군웅별성은 사도세자, 금성대군을 말하고 또는 마마신을 상징하고 있으며, 마을 주민의 안녕과 복락 및 질병을 막아달라 기원하는 굿사. 신장거리 : 잡신들을 다스려 마을 주민을 해하지 못하도록 기원아. 대감거리 : 도당대감, 살륭대감, 군웅대감, 봉화산미륵대감을 청해 위해주고 제수를 주며, 마을을 잘 돌봐달라고 기원자. 창부거리 : 모든 굿에서 한해동안 마을과 주민이 무사하게 지내달라는굿차. 군웅거리 : 군웅(장수신)을 모셔 대접하고, 마을과 주민에 잡귀를 물리치고 해가 없게 해달라고 기원카. 상황,사망돌뒷전 : 도당굿의 끝의식으로 청패했던 신들을 돌려보내며,온갖 잡귀를 풀어 먹이는 일{{{3. 소감처음 이곳으로 향할때의 두려웠던 마음은 어느새 흥에 겨워 있었다. 귀신을 부른다라기보다는 하나의 제의로, 마을의 풍요와 화복을 기원하는 축제로 보였다. 특히 뒷전때에 음식을 나누며 복채를 받는 모습은 더욱 그러하였다. 복채를 내라고 부추기는 당주의 모습이 상업적이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흥겨움과 자기 위안적 성격으로 받아들인다면 문제되지 않을 것 같다.헌데 이렇게 복채를 주고 빌어주면 정말로 복이 들어올까? 그럴 능력이 있는귀신이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것일까. 다음에서 우리 사상가들의 생각을 엿보도록 하자.Ⅲ. 귀신, 어떻게 바라 볼 것인가주희는, 귀신에 관한 문제는 본래 (공부에 있어) 첫 번째로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형태도 그림자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어렵다. 따라서손쉽게 그것을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먼저 일상의 긴요한 사실들에 대해 공부를 해야 한다. 논어에 나오듯이, 아직 사람을 섬기는 일에도 밝지 못한데어찌 귀신을 섬기는 일에 관심을 가지는가? 아직 삶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면서 어찌 죽음을 알려고 하는가? {라고 하였다.공자는, 보아도 알아볼 수 없고, 들어도 알아들을 수 없으나, 모든 물에 남김없이 있고, 천하의 사람으로 하여금 몸을 깨끗이 하고 옷을 차려 입고 제사를 지내게 한다 고 했다. 귀신은 섬겨야 할 대상이라는 생각과 사물에 내재해있는 기운이라는 생각을 함께 나타냈다고 할 수 있다.우리나라에서 귀신이야기가 시작된 것은 아주 오래되었겠으나 귀신에 대한논의를 심각하게 하게 된 것은 고려말 이래의 일이다. 에 보면 고려말에 신흥 사대부 출신의 관원들이 귀신 섬기는 풍속을 타파한 사례를 거듭소개했다.성현은 귀신은 있다라고 하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면 유익하다 하였다. 그러나 귀신은 종류가 많으니 마땅히 제사지내야 할 귀신을 분별해야 한다고 했다. 또 재래의 민간신앙과 유교의 이념, 하층의 전승과 상층의 규범 사이에서양쪽을 다 인정하면서 조화를 찾으려고 하였다. 귀신을 논하면서 귀신이 실제로 있고 오려 모습을 갖추어 나타난다고 믿으면서 대인군자가 나서면 물러가게 할 수 있다고 했다. 사람이 귀신이 되어 서로 기를 지니고 행동하며 大理구현에 참여한다는 사고방식을 구현하면서, 그것이 신유학의 이기철학과 합치되는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남효온 기존의 신앙.무속.점술.풍수.불교 등에서의 구신관을 비판하였다. 理와 氣의 관계를 논거로 해서 자기의 귀신관을 제시했다. 귀신이 제사를 지낼때 흠향하고, 화복을 내리고, 점괘를 일러준다고 하는데 대해 해명했다. 무당은 천자가 아니면서 하늘에, 제후가 아니면서 신천에 제사를 지내니 잘못이라하였다. 제사 해우이의 위계질서를 어겼다는 말인데, 논리적인 설득력을 갖추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사람의 병은 원기가 고르지 못해 생기고 화복은 자기행동의 선악에서 나오는데, 무당은 병이나 화복의 귀신 탓이라 하면서 재물을허비하게 하니 해독이 크다고 했다. 귀신이 회복을 좌우하지 못한다고 하는근거를 남효온은 성현과는 다르게 찾아 귀신이 능동적인 작용을 하지 못하기때문이라고 했다.김시습은 귀신은 바르고 진실된 기 라 하고, 그런 기가 하늘과 땅 사이에서 움직이고 변화해 아래로는 백성을 돕고 위로는 천지에 순응하는 까닭에 사당을 세워 기도한다 했다. 위세 있는 신령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그 공덕에감사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고 했다. 기의 움직임을 귀신이라고 일컬을 따름이고, 지각과 행동의 주체가 되어 화복을 내리는 귀신은 존재하지 않지만, 기의 움직임이 순조로워 백성이 살게 하는데 감사하느라고 제사를 지낸다고 했다. 감응과 행동의 주체가 되는 귀신을 인정하는 말은 하지 않았으며, 조상에대한 제사는 언급하지 않았다.Ⅳ. 한옥마을을 떠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