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하게 털어놓으면, 이미 과제가 던져지기 전에 영화를 보러 갔었다. 과제는 수업 내용에 맞춰서, 영화의 촬영 기술적인 측면들과 내용의 연계성이랄 지 하는 등의 것들에 포커스를 맞추어야 했다. 하지만 그 전에 말초적인 흥미삼아 미리 보았던 이 영화에서 그런 것들을 기억해내고 가늠해보는 것이란 쉽지 않았고, 또 아직 상영관의 한 켠을 차지하고 있는 이 흥행 영화를, 과제를 위한 분석을 하려는 목적으로 사비를 털어 또 보러 간다는 것도 사실은 내키지 않았음을 미리 밝힌다. 그러다보니, 과제의 내용을 어떻게 풀어가야 할 지도 막막했고, 수업시간에 배운 프레임이니, 컷이니, 샷이니, 몽타쥬니 하는 생소한 듯 하면서도 그렇지 않은, 그런 전문 용어들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말재간을 부려 중간중간 모자이크처럼 예쁘게 붙여넣기 하는 식의 글도 쓰고 싶지 않았다. 또한 지금까지는 영화든 연극이든, 예술이나 문학에 대한 감상문 내지 비평문을 작성해야 할 때는 작품에서 얻은 감동이랄 지, 필자의 생각등에 포커스를 맞춰서 해왔는데, 막상 닥쳐진 과제는 조금 난해했다. 무엇보다도 4학년이라는 무거운 짐 속에서, 일과 학과공부, 토익 시험 대비, 그리고 졸업 후의 진로를 위해 따로 또 다른 공부를 하고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 각 과목의 레포트 과제들에 예전처럼 세세하게 신경쓰기에는 그 동안 정신적인 여유가 너무 없었음에 우선 양해의 말씀을 올린다. 마지막으로, 그런 이유를 들어 이제 늦어버린 과제이기 때문에 내용이라도 다른 누구보다 충실해야 기본이라도 따고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지만, 사정상 그럴 수도 없었음을 밝히면서, 그동안 고민하면서 기억나는 장면들 몇 가지만 전문성을 배제한 채, 살펴보고 간단하게 글을 마치려 한다.우선 강렬하게 기억에 남는 장면은 바로 영화 도입부였다. 누군가의 신고를 접수하고 현장으로 도착한 듯이 보이는 껄렁한 시골형사의 시선이 배수로에 이르렀다. 송강호의 등 뒤에서 따라 들어간 카메라, 그리고 그의 시선에 따라 컴컴하게 형체만 보이는 시체, 다음 순간에는 후레쉬 빛을 받아, 클로즈 업된 시체의 모습. 주변에서 이런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와~! 저거 어떻게 촬영했냐~~?"컴퓨터나 사진 합성같지도 않았고, 시체를 실사처럼 제작한 것 같지도 않았다. 물론 그런 것들을 구별할 수 있는 시력이 대중에게는없겠지만, 적어도 그동안 보아온 영화속의 시체들에게서 느꼈던 오래된 딱딱함같은 느낌은 없었고, 정말로 배수로 안에 연기자가 들어가서 시체 연기를 한 듯 했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점은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눈과 코 입 주위에 기어다니던 벌레들이었다. 아무리 연기 투혼을 불살랐다고 하더라도, 여배우가 온몸에 희한한 각종 벌레를 붙이고서 그 지저분한 배수로 안에 반라의 몸을 하고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있었다는 사실. 과연 정말 연기였을까? 아니면 그 정도의 제작기술이었을까? 아무리 인터넷을 뒤져봐도 그에 대한 정보는 없다. 숏 컷이었지만 영화의 끝까지 긴장감을 잃지 않게 만드는 도입부였다.다음은 몇 번 째 시체였는지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시체가 나오고 난 뒤에, 생고기가 불판에 올려지는 장면이었다. 그 장면을 보는 순간 절묘한 편집에 혀를 내둘렀다. 시체를 보면 당연히 나오게 되는 구역질이 다음 장면까지 이어져, 한동안 그렇게 좋아하던 고기를 먹지 못하게 만든 장면이었다. 달리 생각하면 한쪽에서는 여인이 살해당하고 있는 판국에, 다른 쪽에서는 육식을 하며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인간군상을 직접적으로 찔러본 감독의 의도는 아니었을까? 어쨋든 시체와 붉은 핏덩어리 고기의 연속된 편집은 꽤 괜찮았다.그리고 세 번 째는 시골 형사 둘이서 실뜨기를 하는 장면이다. 서울에서 온 형사가 전경인지 의경인지를 데리고 넓은 갈대밭(?)을 시체를 찾아 수색하고 있을 때, 경찰차 뒤에서 세상을 관조한 듯, 다 포기한 듯, 서울경찰 욕이나 하면서 실뜨기를 하는 장면이다. 인터넷을 뒤져본 결과, 이 장면은 꽤나 고심했다고 한다. 80여 명의 의경들과 서울 경찰 김상경이 넓은 범위에 걸쳐 수색을 하는데, 그 와중에 시골 경찰 둘이 실뜨기를 하다가 시체를 찾았다는 소리에 현장까지 가야하는 시간까지 계산해야 했고, 그 수 많은 사람들이 한 장면 안에 모두 잡혀야 해서, 카메라 촛점과 공간이동의 문제가 꽤나 어려웠다고 한다. 하지만 그냥 별 생각없이 영화의 줄거리에만 집중해서 관람을 했던 필자로서는 위의 두 장면에서 느낀 충격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고, 아마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관객들에게는 그다지 카메라 기술에 대한 생각은 하지 못하게 하는 부분이 아니었나 싶다.네 번 째는, 범인의 시선에 따른 먹이감(?)을 고르는 장면이다. 범인이 밤에 야산에 숨어, 서로 마주치며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 두 여자에게 시선이 교차하면서 생기는 카메라 기법인데, 목표물을 아직 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두 명 중에 한 명을 골라서 살해하려는 미정된 긴장감을 극도로 고조시키는 장면이다. 공포영화나 스릴러 물에서 공포감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추격자의 시선에 카메라를 두고, 피추적자를 숨어서 따라가거나 하는 등에서 비슷하게 쓰이는데, 똑같은 방법이긴 하지만, 각각 독특하고 개성있는 시선으로 또 다른 느낌들을 주고 있다. 카메라의 주관적인 시선 처리에 의해, 대체로 관객들은 그 시선의 주인공에게 심리를 동화시키게 마련인데, 살인의 추억에서 이러한 시선처리기법의 시도에서 느껴진 색다른 공포감과, 시선의 주인공에 대한 열정적인 경멸감이 드는 것은 단순한 동화를 넘어서 관객에게 역으로 한발 물러서서 객관적인 감정을 이끌어낼 수 있는 힘을 부여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다섯 번 째는 누구나가 한 번 씩은 언급했을 장면이다. 엔딩으로 가는 마지막 중요한 장면. 기차 터널 앞에서 세 명의 주인공이 모여서 비를 맞으며 열연을 했던 잊을 수 없는 장면. 이 장면을 자연스럽게 연출하기 위해 비가 올 때 까지 기다릴 정도로 촬영에 신경을 썼다고 한다. 마지막에 용의자가 범인이 아님이 과학적으로(?) 밝혀지고, 터널을 통해 이 편이 아닌, 반대편으로 피를 흘리며 다리를 절며 돌아서 가던 그 롱 테이크는 잊을 수가 없다. 세 배우의 각각의 개성적인 열연과, 그러면서도 서로 충돌하지 않는 깔끔한 어우러짐, 그리고 주변의 모든 배경은 환하지만 터널속으로 사라져가는 마지막 용의자의 배경만은 검고 깊은 암흑속으로 빨려드는 듯 한 블랙홀. 이제 형사들에게 마지막 어두운 미래를 제시하는 듯, 영원히 풀 수 없게 될 거라는 연쇄살인의 비극을 말해주는 듯, 그렇게 깊어만갔다.
고도를 기다리며...연극을 내가 언제 보고나서 그쳤는지 잘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입니다. 사실 현시점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연극보다, 좀 더 기술적으로 세밀한 작업을 거쳐서 만들어지는 영화를 더 많이 보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습니다. 현란한 기술적 장치들과 배우들의 여러 번에 걸친 연기수정작업 및 편집 등을 통해 보다 많은 대중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내는 미디어가 바로 영화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물론 그것이 연극을 감상하는 것보다 경제적으로도 이익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나도 그런 대중들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연극을 비롯한 모든 예술 분야에 대한 뛰어난 식견이라든 지, 견해라든 지 하는 것들은 거의 없다고 표현해야 될 것 같습니다. 다만 학점을 받기 위한 전형적인 레포트 형식에 구애받기를 싫어하는 한 명의 대학생으로서, 수업의 일환으로 꼭 연극 한 편을 지금 당장 억지로 보고 여기저기 인터넷을 뒤져서 짜집기 하는 식의 날벼락 레포트는 쓰지 않는 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몇 달 전에 시간과 마음의 여유와 경제적 여건이 적당히 맞아 떨어져 친구와 함께 보았던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식자들이 유명하다고들 평하는 연극 한 편에 대한 기억을 살려서 감상을 작성해보고자 합니다. 그래도 제가 보았던 몇 안되는 연극중에서 가장 어려웠고(?) 가장 철학적인 물음을 많이 드리워주고, 생각하게 해주었던 연극이어서 나의 기억 세포들에 오랜동안 각인이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또한 갑작스런 억지 감상이 아니라서 좀더 솔직한 글을 작성할 수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부득이하게 내용적인 면에서 그 때의 나의 기억을 좀더 생생하게 재생시켜줄, 줄거리자료를 찾아서 참고했음은 미리 붙여두겠습니다. 몇 달 전이라, 실은 주인공 이름도 잘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그냥 A, B, 그리고 포주와 락키라고 해두겠습니다. 포주와 락키라는 이름은 이상하게 저절로 기억에 남더군요.연극을 한 5년 만에 보았는데,가장 먼저 느낀 것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의 정적이었습니다. 왠지 나는 그 어둠이 좋았습니다. 차라리 연극을 진행할 때보다 그 어둠 자체가 좋은 것 같습니다. 이러한, 연극 시작전의 어둠이 앞으로 내가 말하게 될 '고도의 의미'와도 통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주인공 두 명의 익숙한 얼굴도 인상에 남았습니다. 이름은 모르지만 얼굴은 많이 알려진 배우더군요. 무대 장치는 아무 것도 없고, 달랑 모조 나무 하나. 과연 이런 소품과 배경으로 연극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있었습니다.조명이 다시 켜지면서 두 주인공 A, B의 등장. 사실 대화 내용은 생각나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그저, A가 "가자.", B가 "안돼.", 다시 A가 "왜?", B가 "고도를 기다려야지." 하는 대사만 한 가득 생각납니다.일단 먼저 위의 대사 위주로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겠습니다. 위의 대사들의 수많은 반복, 이것은 내생각에 고도가 사람이라고 묘사되긴 했지만, 어찌되었건 아무리 여러 날을 기다려도 오지 않는 어떤 것(그것이 사랑하는 사람일 수도, 절대자일 수도, 믿음이나 행복, 사랑이라는 등의 추상적인 어떤 것일 수도 있습니다.)에 대한 보통 인간의 허망한 기대감이라고 할까? 아무튼 그렇게 보여집니다. 처음엔 고도를 그냥 B의 아는 친구일거라 생각을 했는데, 극이 진행될 수록, 주인공 둘 다 모르는 존재인 듯 했습니다. 어찌 보면 그것은 죽음인 것도 같습니다. 왜냐면 그들은 어김없이 날이 저물어 헤어질 때쯤 되면, 죽음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고도가 오늘도 오지 않을 건데, 그냥 목을 매어 자살을 하자는 생각 말입니다. 그럼 고도가 오면 죽음을 면할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해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극에서는 마지막에 B가 그렇다고 한 걸로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고도는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그 무엇인가이며, 그것은 거지같은 그들의 삶에 어떤 희망이라고 생각되어지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고, 다만 죽음을 바란다는 말은, 어쩌면 그 고도 자체가 구원과 죽음이라는 정반대의 의미를 가진 두단어의 복합적 이미지로 보여진다는 것이지요. 즉 그들은 현실의 삶 속에서 죽음을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죽음이 바로 구원이었던 것입니다. 그게 구체화되어 고도라는 사람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물론 보이지는 않지만... 그리고 아무리 기다려도 죽음이 선뜻 오지는 않지만...다음으로 A씨의 좀처럼 벗겨지지 않던 구두가 생각납니다. 그것도 일맥상통하는 표현인 것 같습니다. 늘 그는 친구를 만나 구두를 벗어놓지만, 다음 날이 되면 기억을 상실한 채, 다시 구두를 신습니다. 그리고 다시 벗어놓고, 다시 다음 날 맨발로 나타나서는 구두를 신습니다. 발이 큰 것인지, 구두가 작은 것인 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는 답답하고 발이 아파서 자꾸만 구두를 벗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다시 찾게 되죠. 그것은 벗어날 수 없는 현실. 일순간 벗어난 듯 해도, 또다시 무거운 현실을 벗어났다는 그 기억을 상실하고, 언젠가부터 다시 찾아드는 현실을 상징하는 듯합니다. 즉 구두를 벗는 행위는 아까 말한 고도를 향한 기다림, 또는 목을 맨다는 상징성과 유사한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소품이 고도와 발음이 비슷한 구두가 되었는지도 모르겠군요.^^;같은 인간이지만,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을 종처럼 부려먹습니다. 1막에서의 포조와 락키는 인간간의 대화단절, 약육강식의 험난한 현실세계를 극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둘 사이의 대화는 일방적인 명령이면서, 기계적인 움직임을 일으키고, 그리고 목에 맨 끈과 채찍이라는 연결체를 둡니다. 역시 이 끈도 A와 B가 목을 매달아 현실을 벗어나려고 하는 끈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락키에게는 기계적이고 노예적인 가혹한 현실을 벗어나게 할 수 있는 바로 그 고도라고 표현해도 될, 그 끈이 자기 목에 채워져 있음에도 실행에 옮기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현실 속에서 고도같은 존재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그건 아이러니컬 하게도 바로 그 자신을 부려먹는 포조입니다. 이와 반대로 포조에게도 락키는 나중에는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고도가 됩니다. 실은, 둘은 서로에게 필요한 눈이자, 입이었기 때문입니다. 포조는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고, 락키는 말을 할 수 없는 노예였던 것입니다. 그것이 현실에 어쩔 수 없이 안주하며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이, 현실 속에서 찾아낸 인간끼리의 고도라고 한다면 좀 과장된 표현일까요? 어쨋든 그들은 현실 속에서 고도를 찾아냈던 것일 지도 모릅니다.그리고 한 꼬마아이의 하얀 의상이 생각납니다. 그 꼬마 아이는 고도라는 존재의 전령사이죠. 긴 대화는 하지 않습니다. 간단한 대답만 할뿐이며, 간단한 답장만 다시 고도에게 전할 수 있을 뿐입니다. 고도라는 존재를 죽음으로 본다면, 그 아이는 현실의 삶을 다시금 일깨워주는 그 어떤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고도는 오지 않는 다고, 그러니까 다들 집에 돌아가서 쉬라고. 하지만, 고도에 대한 완전한 포기는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 스스로의 선택이자, 의지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는 그 말을 늘 남기는 것입니다. "고도님은 오늘은 못 오신대요. 내일 오신대요." 벌써 그 말을 여러 번 전해 들어서 고도가 내일이 되어도, 또 그 다음 날이 되어도, 오지 않는 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의 두 주인공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선택이자 의지이니까요.그리고 또 인상깊었던 장면이 있습니다. 네 사람의 주인공이 모두 어딘가에 넘어져서 일어나지 못하던 장면. 위에서 내가 말한 대로 생각한다면, 락키와 포조는 서로에게 현실 속의 고도였습니다. 즉 둘이서 서로 눈과 입이 되어주면서, 그 어떤 멋지고 신비로운 고도라는 존재보다도, 더 멋지고 숭고한 인간적인 고도의 대체물이 서로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던 나에게 충격적인 장면이었습니다. 결국 그 둘이서도 할 수 없는 부분이 드러난 것입니다. 바로, 혼란입니다. 죽음을 상징할 수도 있다는 고도조차도 해결할 수 없는 어떤 그런 것. 그런 혼란입니다. 결국 네 사람이 다 넘어져버리고, 그들은 혼란에 빠집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그들 중 A와 B는 스스로의 힘으로 벌떡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그 둘은 분명 절대적이건 현실적이건 간에, 그 어떤 고도도 만나지 못했는데도 서로에게 현실 속의 고도가 되어준 듯한 포조와 락키가 하지 못한 일을 이루어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얘기하자면, 인간은 고도라는 영원하고 절대적인 안식을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는 미약한 존재이지만, 또한 거꾸로 생각하여, 인간 스스로 고도라는 절대적 대존재에 상당히 근접하여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갑자기 이 연극을 같이 보았던 영문과 친구가 한 말이 떠오릅니다. 초월주의 작가 에머슨이 말했다던, [인간은 쓰레기더미 속의 진주], [나는 커다랗고 투명한 안구이다]라는 표현. 인간 내부 속에 인간 스스로의 신적 영혼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길버트 그레이프]는, 어느 한적한 시골 마을의 평범한 한 가정을 무대로, 가장으로서 가족을 이끌어야 하는 한 젊은이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휴먼드라마이다. 아버지의 자살, 형의 가출, 삶에 대한 충격과 그에 따른 엄청난 비만으로 거동이 불편한 어머니를 대신하여 집안일을 돌보는 누나와, 사춘기의 반항적인 여동생, 정신지체아인 남동생, 필자도 비슷한 나이 또래의 젊은이로서 이 모두를 위해 자신의 미래와 꿈도 없이 매일 같은 일상을 반복하며 살아야 하는 우리의 불쌍한(?) 주인공에게 동정이 간다. 하지만 어쨋든 그 어려운 속에서도 가족을 팽개치지 않는 따뜻한 가족애가 있기에 그렇게 갑갑하고 불쌍하지 만은 않을 지도 모른다.가족이라는 것, 인간의 역사에 있어서 삶의 가장 기본이 되는 중유한 개념이다. 세상 모든 것들로 부터 버림받아 찾아갈 곳이 없는 어떤 인간에게 마지막 보루인 것이 바로 가족이다. 그렇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이니, 다양성이니, 관점주의니 하는 등의 어지럽고 머리아픈 단어들은, 개개인의 개성과 소수의견을 존중해야 하는 이런 현대의 무질서한 패러다임속에서 이미 기성의 모든 질서적 개념들을 비판하고 무너뜨릴 위험을 가진 지도 모른다. 자유주의 국가안에서의 법과 질서, 개성과 소수의견을 존중하는 흐름속에서의 개인의 정체성의 혼란과 몰개성화는 현대의 시대적 흐름속에서 아이러니가 되어온 지 오래이다. 그 중에도 가족과 결혼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인간의 자연적이자, 법적인 질서도 현대에는 그 개념을 달리하거나 부정하는 사람들의 소수 단체가 늘어가고 있다. 이러다가 정말로 모든 사회의 질서가 무너지고 원시적인 폭력의 시대로 돌아가는 것은 아닐까? 내 말도 맞고, 네 말도 맞고, 제 3자의 말도 맞으니, 나의 정체성은 온데 간데 없고, 오직 나는 나 혼자서만 존재하고 가족도, 반려자도, 친구도 필요없게 되어 모두 따로인 찢어진 사회가 되지 않을까?좀 극단적이고 터무니없긴 하지만, 최첨단의 과학기술의 화려한 문명속에 살면서, 가끔씩 진정한 의미의 인간적 커뮤니케이션의 부재를 느끼면서 필자는 그런 고민을 진지하게 해본 적이 있다. 언젠가 영문과에 다니는 필자의 친구와 간단한 술자리를 가지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그 친구가 그런 말을 해주었다. 그 때는 '저 것이 또, 잘난 척이네.' 하고 생각했었지만, 지금은 이 글을 쓰면서 나에게 문득 떠오르는 말이다. '예이츠'라는 유명한 영국시인의 역사관에 대해 설명해주었는데, 두 개의 원뿔을 서로 반대방향으로 옆으로 교차하게하여, 마치 장구처럼 보이게 그리고서는 침까지 튀겨가며 설명을 하였다. 두 원뿔의 양 끝이 바로 어떤 패러다임의 종말이며, 그 종말과 함께 새로운 반대개념의 패러다임은 크게 붐을 일으켜 성장하기 시작한다고. 한 쪽 원뿔의 꼭지점이 다른 원뿔의 원부분의 중심에 닿아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은 인류가 멸망할 때까지 반복적으로 계속된다고... '하나가 시작되면 하나는 사라진다' 지금의 혼돈의 시기가 점차 극단으로 치닫으면서 이제 앞으로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다시 독일의 나치즘같은 무서운 패러다임이 생겨나 세계는 하나로 통합되어버릴 지도 모른다.어쨋든 영화는 책임감과 가족이라는 통합개념과, 개인의 정체성과 자유의 추구 사이에서 갈등하는 성실하지만 무능한 한 개인의 자아를 들여다보는 것이 주가 된다. 그 와중에 주인공의 갑갑한 현실이 벗어날 수 있는 무게라는 것을 인식시켜주고, 서로의 내면의 아픔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순수한 사랑을 나누는 존재가 떠돌이 소녀 베키이다. 그녀와 함께 새로운 삶을 찾기 위해 가족에 대한 책임감을 버리고 떠나는 주인공, 하지만 그는 돌아왔다. 결국은 그에게 있어서 삶이란 자신 만의 것이 아니었기에. 가족과 함께 있는 것이기에, 그는 자유와 새로운 삶을 버리고 돌아왔다. 그리고 중요한 또 한 명의 주연급 조연, 정신지체장애인인 그의 남동생. 물론 단순하고 유아적인 정신능력 때문이기는 하지만, 어쩌면 늘 높은 곳만을 찾아 집착하는 그에게는 갑갑한 이 현실세계를 벗어날 구원의 손길을 땅이 아닌 높은 곳으로 보았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새무얼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연극을 보며 느꼈던 오지않는 고도에 대한 지루하리만큼 처절한 기다림과 연관지어 생각해보았다. 극중 비참한 거지, 방랑생활의 현실속에서 두 주인공이 매일매일을 구원의 손길인 고도를 기다리지만, 끝내 고도는 오지 않는다. 그 극에서 고도라는 존재는 구체적인 어떤 존재가 아니고, 아마 신이나 죽음, 새희망같은 추상적인 개념들의 집합체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어쨋든 그의 18번째 생일은 다가왔고, 그 생일의 의미는 그가 성년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비록 정신은 아이지만, 신체적으로는 별탈없이 이제 어른이 되어버린 아들을 보면서 어머니는 아마도 자신의 삶에 있어서 가장 큰 소원을 성취하였던 것인지, 죽음을 맞이한다. 집을 태우는 주인공. 그 의식의 의미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흔적과 고통스러웠던 지난 과거를 청산하는 것이었다. 이젠 각자가 개인의 '고도'를 찾아서 길을 떠나면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주인공이 베키와 남동생과 함께 길을 떠나는 장면은, 대부분의 평론에서 모든 어려움과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가 사랑밖에 없음을 의미하는 장면이라고 한다. 하지만 약간은 염세적인 필자의 비판적 시각으로 본다면 여전히 그 사랑이 또 다른 형태로 삶을 옥죄어 올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며 비디오 플레이어의 정지버튼을 눌렀다.
연극의 이해에 대한 연구영어영문학과 9712005 김성일우선 안티고네의 전체적 줄거리를 대략적으로 살펴보자.크레온은 에테오클레스(오이디푸스의 두 아들중 테베를 방어한 이)의 유해만을 후히 장사지내고, 역적인 폴리네이케스(테베를 침략한 아들)의 시체는 들에 버려 매장을 금했다. 안티고네는 인간이 임의로 만든 법보다 신에 의한 보편적이 법이 먼저라는 생각과 오빠에 대한 연민으로 그 명령을 무시하고 폴리네이케스의 시체에 흙을 뿌리는 의식을 행했으나, 곧 크레온의 병사들에게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지하에 있는 감옥에 갇혔다. 크레온은 직접 손을 대어 안티고네를 죽이기가 두려워 가옥에서 굶어 죽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 크레온의 아들로 안티고네와 약혼했던 하이몬은 아버지를 비난하며 안티고네를 변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스메네도 언니 안티고네와 운명을 같이하겠다고 했지만 안티고네는 이를 거부했다. 이스메네는 폴리네이케스를 매장하려했을 때의 안티고네를 도우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때 테베의 장님 예언자인 테이레시아스가 나타났다. 그는 나라가 더렵혀지고 있다는 징조를 여러가지 보았다. 죽은 자를 더이상 두번 죽게 만들지 말고 후하게 매장하고 산 자를 지상으로 되돌아오게 해야 한다고 고했다. 아들과 그 예언자의 말에 조금씩 두려워지기 시작한 크레온은 그 말에 따라 폴리네이케스를 후히 매장하고 안티고네가 갇혀 있는 감옥을 직접 찾아갔다. 그러나 그곳에는 안티고네와 하이몬이 함께 있었는데, 안티고네는 이미 목을 매어 죽어 있었다. 하이몬은 아버지를 저주하며 안티고네의 시체 위에서 자살했다. 크레온의 아내도 자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살했다.다음으로 작품속 주요인물들에 대해 살펴보자. 먼저 크레온은 오이디푸스왕의 외친이면서 현재 왕위에 올라있는 인물이다.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이 죽고 나서 실질적인 왕권을 가진 인물이며, 전형적인 왕권중심사상에 사로잡혀있는 인물이다. 절대신에 대한 믿음보다는 현재의 자신의 위치를 돌아보는, 현재의 시각에서 보면 상당히 세태변화에 적응을 잘 하는 현실에 적합한, 유능한 인간이라 볼 수 있다. 그는 물론 독선적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꽉 막힌 답답한 인간은 아니었다. 처음에 아들 하이몬의 말을 들을 때나 안티고네를 끌고와 말을 들을 때는 물론 왕의 권리와 자존심을 세우며 자신의 힘을 신격화시키거나 혹은 그 이상으로 여기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의 이기적이고 불쌍한 인간이었지만, 실은 한 국가의 통치자로서는 충분히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다만 인간보다는 신에 더 치중한 삶을 살았던 그리스 로마 시대의 작품이기에, 그에게서도 마지막에는 인간적인 동정심과, 신에 대한 믿음 따위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현대처럼 공산주의의 지독한 독재정권의 정수리에 서있던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다음으로 작품의 주인공격인 안티고네에 대해 살펴보자. 안티고네는 여자이다. 여자는 아주 예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현실에서나 문학 작품속에서나 대부분 여리고 힘없는 나약한 존재로 인식되어져왔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아닌 경우도 많지만. 그리고 감성이 풍부한 감정적 동물로 여겨져왔다. 안티고네는 신이라는 거대한 힘을 빌려 왕권에 도전하는 인간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신에게 빌린 힘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었다. 쉽게 흔들리고, 나약한 것이 여자의 마음이었던가? 안티고네는 오빠의 죽음에 차별을 두는 왕의 행위와 명령에 분노를 느낀 것이고, 두 오빠는 서로 반대의 세력으로 싸운 것이지만, 인간적인 면에서는 두 사람 모두 그녀의 사랑스런 오빠였던 것이었기에, 동생된 도리로서 둘다 함께 보살피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긴 것이었다. 물론 그녀가 인간적이고, 선의의 인물로 나오기 때문에 이 작품이 비극이라고 불리워질 수 있겠지만, 실은 그것은 쉽게 생각하면, 전쟁에서 죽은 적국의 군사를 장사지내주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는, 비판받아질 소지가 있는 인물이었을 수도 있겠다. 어쩌면 주인공이 여자이기에 가능한 스토리 전개였는 지도 모르겠다. 극적전개와 비극의 극대화 때문에 그녀는 끝내 목숨을 끊었지만, 실은 오히려 크레온왕보다 더 자기 뜻을 굽힐 줄 모르는 완고한 인물이었는 지도 모르겠다.다음으로 크레온 왕의 아들, 하이몬을 살펴보자. 그는 마찬가지로 언뜻보면 작품속의 대부분의 인물들이나, 대사 한 마디 없는 시민들처럼 아주 인간적이고, 선하며, 신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따르는 이상적인 인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위의 안티고네의 경우처럼 크레온 왕보다 더 완고한 바보같은 인간으로 보일 수도 있다. 젊은 날의 사랑은 한 때라고 했다. 그도 역시, 신이라는 힘을 빌려서 안티고네와 그녀의 행동에 편을 들어주었지만, 그것은 그녀가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함께 목숨을 끊어가며 지키고자 했을까? 필자의 대답은 아니다이다. 사사로운 인간의 감정에 얽매여 신이라는 절대 개념을 아무렇게나 갖다 붙이는 안티고네와, 충분히 그녀의 남편이 될 자격이 있는 그였다.안티고네의 여동생 이스메네는 그런 측면에서 가장 찬사받아질 인물이다. 우선 자신의 현재의 위치를 잘 파악하고 있는 인물이며, 왕권에 당장 저항하지 않았다. 물론 그 전에 오빠를 묻어주자던 언니의 말을 거절하는 인간적이고 감정적인 죄를 저질렀지만, 그건 위에서 말한 산 사람은 산 사람이고,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라는 말의 현실적 관점에서라면 그다지 비판받아질 수는 없다고 보고, 아직은 살아있는 언니의 편을 목숨을 걸어 들어주는 중립적인 인물이다.예언자 테이레이아스는 한 마디로 신의 대변인이다. 그는 작품속에서 안티고네나 크레온, 하이몬만큼의 많은 대사는 아니지만 작품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바로 왕이라는 한 인간의 절대적인 불변의 신념을 깨뜨릴 수 있는 일을 한 것이다. 즉, 인간의 세계에서는 절대적인, 왕이라는 인물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은 신만이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작품의 시대 사상적 배경을 암시하는 인물인 것이다.필자는 실제로 안티고네나 오이디푸스의 연극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음향효과 무대효과, 배우와 관객과의 공감, 무대의 분위기등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언급할 수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회곡에 나온 대사와 행동을 중심으로 인물들의 좀더 세부적이고 부가적인 의미를 찾아보고자 했다. 그러면서 저절로 이끌어지는 사항들이 있다면 조금식 언급할 것이다."넌 안 할려고 했잖아? 나 혼자 한 거야. 나 하나만 죽으면 돼. 넌 죽으면 안 돼." 안티고네가 동생 이스메네에게 도움을 청했다가 거절당한 후, 함께 끌려온 이스메네에게 한 말이다. 상당히 의롭고 명예로운 얘기처럼 들릴 지 모르나, 위에서도 안티고네에 대한 비판적인 해석을 한 필자로서는 달갑지 않게 받아들여졌다. 한 가정의 비극속에서 마지막 남은 핏줄이라도 살려두어야 겠다는 이기적(?)인 생각으로 비춰질 수도 있고, 결국 자신과 생각을 같이 하지 못한 동생을 속으로는 미워하는 감정이 있으면서도,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생각만을 고집한 말처럼 들린다. 자신의 의로운 행동에 대한 자기파멸적인 자신감이라고 표현하면 적당할 것인가?"아니, 모든 사람들에게 큰소리로 말해. 만약 너 입 다물고 있으면, 난 널 더 미워할 거야." 이 부분은 동생이 언니를 걱정해서 시체를 파묻는 것을 들키지말고 잘 처리하라고 충고하는 말 다음에 이어진다. 이 말 속엔 무슨 의미가 들어있을까? 만약 신의 위대한 자연법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조용히 하든 밝혀지든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 행위 자체로 그냥 인간적으로 순수하고 정당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그 일이 만천하에 알려져서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고 싶어한 것이고, 연약한 여자 혼자의 몸으로 저지르게 될 인간의 실정법에 대한 대항으로 받게될 형벌을 두려워한 것은 아닐까? 그래서 신을 들먹거리며 자신을 정당화시켰지만, 실제로는 신보다는 인간이 알아주었으면 하는 역설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는 것이다.더군다나 안티고네는 시체를 땅에다 정식으로 묻지도 않았다. 단지 그녀는 시체 위에다 마른 모래를 뿌리는 상징적인 절차로 이를 대신했을 뿐이었다. 물론 그녀는 이 모래들이 손쉽게 걷혀질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죽은 자에게 후한 장례식이 아닐 것임을 알면서도 모래만 뿌리고 그쳤다. 아니 실제로 그녀는 시체의 편안한 매장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의지와 행동이 궁극적으로는 다른 목적에 향해져 있었음을 알게 하는 또 하나의 증거다. 그 목적이라고 하는 것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건 권력이었던 것이다. 선왕에서부터 이미 저주받은 비극적 집안에서 자란 그녀였지만 선왕의 핏줄을 그래도 제대로 계승하고 있는 것은 자신과 동생뿐이라는 사실을 마치 입증이라도 하는 듯이... 위에서 말한, 신보다는 인간이 알아주었으면 하는 권력 지향적인 입장, 바로 그것인 것이다.안티고네는 올가미로 목을 매어 자살했다. 이런 식의 자살은 그리스인들 뿐만 아니라, 현대에서도 자기 자신의 수치심에 의한 자살인 경우가 많다. 목을 매는 자살은 불경을 저지른 자가 스스로를 몰살하고 부정해버리는 행위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이 사실이다. 하이몬 왕자와 에우리디케는 검으로 스스로를 찔러 자살했다. 이런 자살방식은 그리스인들에게는 명예로운 자살방식으로, 단지 가혹한 운명의 희생양일 뿐이었던 그들에게 매우 어울리는 자살방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안티고네가 여자였기에 명예로운 자살을 하지 못하고 수치스런 자살을 했다고 말한다면 더이상 할 말은 없겠지만, 목을 맨 자살의 의미를 중심으로 살펴본다면 분명 극중의 다른 죽음들과는 뭔가 다른 구석이 있는 것이 확실히 보이는 것이다. 그건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자신의 가족에 신이 내린 가혹한 운명에 대한 반항이었을 수도 있고, 권력에 대한 욕심을 채우지 못하고 죽어야만 하는 한 인간의 수치스런 표출이었을 수도 있겠다.
오아시스!!영어영문과(주) 9712005 김성일먼저 이창동이라는 감독에 대한 소개와 얘기는 수업시간에 그의 여러 작품을 다루면서 이야기 되어졌으므로 굳이 필자의 글에 포함시키기지 않겠다. 그보다는, 수업시간에 교수님께서는 이 작품이 이창동 감독의 영화 흐름에서 방향을 벗어난 좀 이상한 작품이라고 정의내렸으나 필자는 너무나도 감동깊게 보았다. 초록물고기와 박하사탕에 버금가는, 어쩌면 그 두 작품보다 더 뛰어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보았던 한국영화중에서 첫손가락에 꼽을 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작품을 골랐다.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에 대한 인터뷰가 실린 인터넷 싸이트를 검색해보았다. 다음은 그 내용이다."`박하사탕'을 찍으면서 솔직히 지겨웠다. 이 영화에 `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난 `꿈 깨'라고 말한다. `오아시스'는 그냥 사랑 이야기다. 가능한 군더더기 없이 두 남녀의 사랑에만 초점을 맞출 생각이다. 특별한 계기가 뭐 있었겠나. 예전부터 사랑 이야기를 해 보고 싶었고, 그런 사랑을 해보고 싶은 내적 욕망이 있었다. 또 처절함 속에서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국제 영화제에 나가려고 했으면 멜로 영화를 찍으려고 했겠는가. 세계적인 보편성을 띠는 영화를 만드는 것은 내 역량 밖이다. 난 한국 관객들과 소통하고 싶다."솔직히 이창동 감독이 정말로 이런 말을 하였다고 믿을 수는 없다. 어차피 우리가 직접 그와 인터뷰를 한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내용 그 자체대로 믿는 다면, 의외가 아닐 수 없다. 초록물고기와 박하사탕에서 시대 정신과 역사에 대한 반추, 그 속에서 힘없는 소시민의 끝도 없고 진보도 없는, 투쟁과 파멸을 통해 보여주던, 그의 진정한 작가정신과 한국영화에 대한 심각한 고찰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하지만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 질문은 의미가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가 그냥 별볼일없는 사랑이야기라고 하며 내놓은 오아시스에서 개인적으로 박하사탕이나 초록물고기에서 느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감동을 느꼈고, 더 심도깊은 문제의식(사회와 개인의 문제)를 엿볼 수 있었고, 나아가 자아 성찰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이 영화는 로맨스영화가 아니라 스릴러영화라는 점을 먼저 주장하고, 이 생뚱한 주장에 대한 근거로 보편성이 결여되어있긴 하지만, 나름대로의 의견을 피력하려 한다.다음은 어느 영화 소개 싸이트에서 따온 영화 소개 문구이다.감독 이창동출연 설경구 , 문소리 , 류승완 , 손병호 , 박명신개봉 2002/08/15등급 18세 이상시간 132 분장르 드라마,로맨스중증뇌성마비 장애인 문소리와 전과 3범의 인간쓰레기라고 취급되어지는 설경구의 사랑이야기인데, 문제는 바로 장르였다. 디아더스, 씩쓰 쎈쓰, 유주얼 써스팩트 등을 위시한 수 많은 헐리웃판 반전영화는, 분명히 우리에게 소름끼치는 스릴과 써스팬스를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이런 스릴러물은 진정한 의미의 반전 영화가 아니었다. '스릴러물이니 영화의 중간 중간에 나오는 반전에 소름이 돋을 준비를 하십시오.'하고 예고해주는, 영화 내용 상의 반전이 있는 이런 영화들과는 완전히 느낌이 다른 이 영화는, 영화가 다 끝나도록 영화 내용 상의 반전은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반전 영화이다. 왜 반전 영화인 지에 대한 대답은 아직 기다리라. 이 영화의 감동은 기다림에 있다.왠지 모자라 보이는 전과 3범의 설경구, 그는 출소 후에 별 뜻 없이 자신에게 전과를 씌우게 해준 사람에게 인사를 가게 된다. 거기서 우연히 만나게 되는 여성 중증장애인 문소리, 그녀는 우리 사회에서 여성과 중증장애인이라는 이중의 올가미에 갇혀서 어렵게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인간이다. 이 둘의 첫 만남은 어설픈, 장애인 강간 미수였다. 그래도 처음으로 자신에게 관심과 애정을 가져준 남자에게 조금씩 끌리게 되는 여자. 데이트 자금을 구하기 위해 형의 돈을 훔치고, 손님의 차를 몰래 빌려 타며, 절대 행복할 수 없는 상황안에서 그들 둘 만은 너무나 행복했다. 주변 사람들의 불편한 시선과, 가족에게까지 냉대를 당하는 이 둘의 사랑이 눈물겹도록 숨막히는 아름다운 휘날레의 절정에 이르게 되는 순간, 여자의 가족이 잠시 들른 여자의 아파트에는 장애인 강간범으로 몰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이 펼쳐져 있었고, 결국 남자는 경찰에 또 다시 잡혀간다. 말 한 마디 제대로 못하는 중증뇌성마비 장애인의 말과 행동을 누가 들어주겠으며, 전과 3범의 말을 누가 믿어주겠는가? 이 때부터 드디어 영화의 시선은 그 둘을 바라보는 관객을 포함한 우리 모두의 편협하고 옹졸한 그 무지막지한 객관성의 최절정으로 치닫게 된다.이 마지막 부분에서 필자는 특히 소름끼치는 반전을 느꼈다. 물론 전반적으로 이 둘을 바라보는 가족을 포함한 일반(?) 사람들의 시선들을 보면서 나도 일반인이지만, 그들에게 가슴저린 반감을 가지기도 했고, 마지막으로 치닫을 수록 아니, 영화가 끝나고 나서 밀려오는 현실에 대한 갑갑함을 토로할 곳이 없어 가슴을 쥐어뜯게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영화 내용 상의 유치한 반전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흔하게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일반 사람들의 모든 일반적이고 객관적인 지식과 권위와 사례와 감각과 판단에 대한 반전이었다. 우리 모두가 A라고 밖에 볼 수 없는 너무도 당연한 상황인데도, 사실은 B였던 것이다. 우리는 강요된, 또는 습득된 보편성에 의해 진실을 왜곡시켜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의 거의 끝 무렵, 남자는 경찰서에서 취조를 받는 중에 도망쳐 나오는데, 여자의 방 벽에 붙어져있던 오아시스 그림에 드리워진, 흔들리는 나뭇가지의 그림자를 유난히 무서워하던 그녀를 위해 그는 나무 위에 올라가 울부짖으며 가지치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힘겹게 라디오로 기어가 볼륨을 최대로 높이는 것으로 답을 하고 있었다.이 영화를 보고나면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필자를 포함한 이 시대의 모든 일반인(!!)들에게 지독한 반감을 갖게 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A만을 보고, B를 보지 못하는 현대의 모든 인간군상들에 대한 완벽한 반전 영화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