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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현대사] 근현대사의 이해 친일파 인물 유치진에 관하여 평가C아쉬워요
    유치진 (柳致眞. l905.11.19~l974.2.10)아직도 연극문화가 일반대중의 생활 속에 자리 잡고 있지 못한 우리의 현실에서 연극 한 편 제대로 보지 못하고 일생을 보내 면서도, 희곡 작가 하면 으레 유치진을 떠올리게 된다. 왜냐하면 학창시절 국어 교과서에서 3.1 운동에 참여한 학생 정도와 그 어머니를 주인공으로 하는 희곡 [조국]이나, 신라의 삼국통일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바 있는 김유신의 아들 원술화랑을 주인공으로 한 [원술랑]을 누구나 한 번 쯤은 읽었을 것이기 때문이다.유치진(아호 동랑)은 1905년 경남 통영에서 아버지 유준수(柳俊秀)와 어머니 박우수(朴又秀)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21년에 도일하여 호우야마(豊山)중학에 편입한 이후 1931년 릿교(立敎)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기까지 10년여 동안을 일본에서 지낸 그는, 1931년 귀국하자마자 신극운동 단체인 극예술연구회를 조직하여 활동한다. 이후 그는 [토막](1932), [소](1935)를 비롯하여 [조국](1946), [흔들리는 지축](1947), [나도 인간이 되련다](1953)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희곡을 발표하여 근대연극사 제일의 희곡작가로 인정받게 된다. 또한 그는 1974년 고혈압으로 운명하기까지 연극 연출을 비롯하여 연극평론 발표, 극단 운영, 드라마센터 건립 등 다방면에서 연극문화의 발전에 공로가 큰 인물이다. 이렇듯 근대연극의 발전에 공로가 크고, 그것도 3.1 운동을 희곡화한 작가 유치진에게 친일 작가 운운하는 것은 얼른 보면 부당하게 생각될지도 모른다. [조국]만을 읽고서 자란 세대에게 유치진은 민족적 양심을 지닌 작가로서만 기억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조국]은 해방 이후, 즉 이 땅에서 일제가 물러간 후 누구나 애국을, 독립을 운운하던 바로 그 시절에 창작된 작품이다.·1931년 김진섭, 서항석등 해외문학파 동인들과 극예술 연구회 창립·1938년 극예술 연구회 해체후 극연좌 조직·1940년 조선 연극 협회, 조선 연극 문화 협회 결성·1941년 극론 . 연출론 등을 배워 희곡을 창작하거나 번역하는 일을 했고 사업부는 연기자를 배출하거나 그밖의 사업을 기획했다 .또한 직속 극단 인 실험무대도 만들어 신인 연기자를 뽑아 교육시키기 도 했다.l932년 5월 창럽공연으로 조선극장에서 홍 해성이 연출한 고골리의 을 공연해 성공을 거 두었다 .이를 당시 신문에서는 '토윌회 공연 이후 10 년 만에 보는 최대의 수확'이라고 호평하기도 했다.그뒤 입센의 , 체홉의 , 유치진의 ,등을 공연 했다.주로 동인들이 번역하고. 홍해성과 유치진이 연 출을 맡았다.초기에는 번역극을 주로 공연했으나 차 츰 동인들이 '조선감정에 맞지 않는' 외국극올 공연하 는 것올 비판하고 나서자 창작극에 더 정열을 쏟았다그래서 이무영 . 이광래 이서향 등의 신인 극작가들을 배출하여 이무영의 . 이광래의 등 창작극을 주로 공연했다.1934년에는 기 관지 을 창간하고 동인들의 연극에 관한 비평 을 실었다.일제 말기 검열이 심해져 동인들을 투옥 . 소환하는 사건이 잦아지자 1938년 3윌 해산했다.※극연좌 劇硏座l938년 4월에 조직된 연극단체.같 은 해 3윌 일제에 의해 해체된 극예술연구회의 후신이 다.극예술연구회의 주요회원이었던 문인과 교수 등은 탈퇴하고. 유치진 . 서항석을 비롯한 극작가 . 연출가 . 배우들이 남아 이 단체를 조직했다.극예술연구회가 연극 연구에 치중했다면. 극연좌는 연극공연에 치증했 다.1938년 5월 김진수의 (4막)과 자넷 막스의 를 공연한 뒤, 7윌에는 클리포드 오데츠의 (3막 6장) 를 공연했다.이무렵 동경학생예술좌 출신인 김동혁 . 이해랑 이진순 등이 신인연기자로 가입했다.l939년 5윌에는 단성사에서 ,,을 공연했다.그러나 일제의 계속되는 압력과 운영상의 어려움으로 조직된 지 l년 만에 해체되었다·매일신보 1941년 1 월 3일자에 [국민연극 수립에 대한 제언]을 발표·1941 년 2월 [춘추]에 [신체제하의 연극]을 발표·친일 극단인 현대극장 발족·총독부의 만주이민정책에 호응하는 내용의 자작 [흑룡강]을 공연·[ 회원들이 중심이 되어 일본을 위해 경의선 군용철도의 부설에, 혹은 군수품의 수송에, 혹은 러시아 국내에 잠입하여 적정(敵情)을 탐색하는 등, 일부 배일파(排日派)의 치열한 박해와 매도 속에 서도 과감하게 일한 양국의 합병에 헌신하는 모습"과 '대동합방론'이라는 '고매'한 사상을 가지고 일진회를 이끌었던 이용구*야말로 "한국을 열국의 세력쟁탈장에서 구하고, 동양 영원의 평화를 확립하기 위해서 는 조선은 그 동맹국인 일본과 친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외친 선각자"로 인식시키려는 내용으로 되어 있 는 일종의 역사극이다.([북진대], {삼천리}, 1942. 7) 이 공연을 기획한 경성대화숙은 "이 연극은 내선일체의 심화철저를 기하고, 대동아전쟁하에 있어서의 반도청년의 궐기를 촉하려고 한 작품으로, 내선일체의 철저는 일한병합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서 출발해야만 한다는 의도로 기획된 것으로서, 이 연극을 보면, 당시 조선반도가 남진하는 러시아의 호구(虎口)에 놓여 있었던 것과, 반도민중이 일한병합을 얼마나 열망하고 있었는지, 또한 일한병합이 무력 압박에 의한 것이 아니라 반도민중의 자발적 열망을 일본이 용인한 것이었음을 명료하게 보여 준다"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북진대를 기획하고], {국민문학}, 1942. 6)'국민연극'의 대표주자 현대극장을 주도 이처럼 당시에 훌륭한 국민연극으로 평가받던 [북진대]가 상연된 표면적 계기는 경성대화숙의 기획에 의 한 것이었지만, 실제 창작에 있어서는 유치진 스스로 몇 개월에 걸쳐 작품 구상을 한 결과라 한다. 그 사연 인즉, 1941년 여름, 유치진이 이끌고 있던 극단 현대극장의 사무실이 견지정(堅志町)에 있는 시천교(侍天 敎) 교당으로 옮겨 왔는데, 그 곳은 다름아닌 대동일진회(일진회의 후신)의 본산이었다. 그 곳에서 유치진 은 러일전쟁 때 철도부설에 참여하였던 구일진회 간부들로부터 직접 당시의 추억담을 듣곤 하였는데, 그 에 감동을 받고서, 들을 때마다 "존경스러운 체험담을 주제로 작품을 쓰고자 욕망"(유치진, [북진대 여화]勳),서항석(徐恒錫), 주영섭(朱永涉), 이원경(李源庚), 함세덕(咸世德), 등과 이백수(李白水), 강홍식(姜弘植), 전옥(全玉), 김양춘(金陽春), 김동혁(金東爀), 마완영(馬完英), 이해랑(李海浪) 등 "전일의 극예술연구회와 동경학생예술좌, 토월회, 그리고 일부 상업극단과 영화인들로 구성되어 마치 예술계 전반의 대동단결로 보여진다"(박영호, [예술성과 국민극], {문장}, 1941. 4)고 하였다. 현대극장의 창립공연은 유치진 작 [흑룡강](5막)이었다. [흑룡강]은 "만 2년에 걸쳐 5차의 퇴고를 거듭한 조심루골()의 야심작"으로서, "소박하고 거칠고 야성적인 것을 리얼한 면에서 취하여 대륙기질의 다이나믹한 박진력을" "비열(沸熱)된 이념의 승화"로 이끌고자 하였다는 것이 작자의 말이다(유치진, ['흑룡강' 상연에 제(際)하여, {매일신보}, 1941.6. 5). 만주에서의 조선 농민이 일본영사관의 보호 아래 복지 만주(福地滿洲)의 터전을 닦아 나가는 것을 내용으로 한 [흑룡강]은 본격 '국민연극'으로서 첫 테이프를 끊은 것이라 할 것이다. 이후 현대극장은 함세덕 번안의 [흑경정](黑鯨亭, 1941), 유치진의 [북진대](1942)와 [대추나무](1942), 함세덕의 [에밀레종](1943)과 [남풍](1943), [황해](1943), [청춘](1944), [백야](1945), 조천석(朝天石)의 [셔어멘호](1944) 등 '유수한' 국민연극을 상연하였다. 유치진은 희곡 창작보다 연출을 위주로 활동을 했는데, 해방이 되던 1945년 8월 15일에도 약초(若草)국민극장(지금의 스카라극장)에서 박재성(朴在成) 작 [산비둘기](4막)를 공연중이었다 한다. 그런데 유치진은, 현대극장을 조직한 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총독부의강제에 의한 것이었다고 훗날 자서전에서 술회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유치진은 현대극장이 창립되기 이전에 이미 국민연극 지도기관인 조선연극협회(1940. 12)의 이사로서 국민연극의 주요 사업을 제안할 정도로 국민연극에 적극적이었다. 의 교도와 지상 개척을 책(策)해 봄도 좋을 듯하고, (4) 연극상제도(상금은 많을수록 좋음)를 제정하여 연 1회 그 해에 가장 우수한 업적을 남긴 연극인(협회에 소속된 극작가나 배우나 무대미술가나 기타 연극종업자)에게 상을 정여(呈與)하여 연극기술의 장려와 연극의 질적 향상을 꾀하였으면 좋겠고, (5) 연극종업자의 공제회 같은 것을 만들어서 실업한 혹은 병환에 신음하여 일하지 못하는 협회원의 생활개척의 일조를 삼으면 어떨까 한다. (유치진, [신체제하의 연극----조선연극협회와 연관하여], {춘추}, 1941. 2) 그리고 그는 "연극협회가 조직되어 문화통제의 일익으로서 연극통제가 실시되게 되자", "연극은 종전과 다른 의미에서 진흥의 기운을 보이고 있다"는 점을 언급하면서, "세계연극사를 들쳐보더라도 연극이 국가적인 보호를 받았을 때에 보다 왕성했던 전례를 지적할 수 있다"며 국민연극이야말로 연극의 발전을 의미한다고 강변하고 있기도 하다(유치진, [원칙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 {조광}, 1941. 6). 이로 보면, 유치진은 조선연극협회의 결성에 대해 문화신체제라는 시국적 요구에 대한 대응 외에도, 연극 부진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적극적 지원 ?장려의 기회로까지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유치진에게는 조선 신극사에서 처음으로 당국의 탄압 없이, 나아가서는 당국의 '지원' 아래 연극활동을 마음껏 할 수 있는 기회로까지 인식되었기 때문에, '암흑기'의 사업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연극학교, 연극잡지, 연극상 제도, 연극인 공제회의 조직 같은 장기적이고 안정적인사업 구상을 펼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조선연극협회와 현대극장의 결성이 단지 일제 당국의 강압과 강요에 의한 것만은 아니고, 당시 연극인들의 '자발적' 참여 과정과 결부되었음을 부인하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전시국민의자세《싸우는 국민의 자세》 - [국민문학] l943년 6월호 -이번 조선문인 보국회 (報國會) 의 결성에 즈음하여 나는 추천으로 소 설.희곡부 회장의 자리를 .
    사회과학| 2003.12.09| 8페이지| 1,000원| 조회(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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