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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류학]한국복식사
    한국 복식사 강의 개괄1. 의 강의 내용과 연구의 필요성1복식의 변천 양상과 그 의미를 이해하고2복식 유물을 감정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며3문화행사(연극,영화,재현행사 등)고증자료로 활용할 수 있는 지적 인프라를 구축하고4현대복식과의 접목 가능성 모색2.한국복식사 연구방법1) 문헌을 통한 연구1『조선왕조실록』,『경국대전』,『승정원일기』,『고려사』,『삼국사기』, 중국25사 등2『삼국유사』,『춘향전』,『흥부가』3 여행기록 : 『고려도경』,『조선부』,『연행록』,『행행총재』기록등4 어휘·사전류 : 『역어유해』,『노걸대』,『박통사』,『아언각비』등5 소설·신문·잡지류2)유물을 통한 연구 『문화재대관(문화재관리국 1985)』1출토복식류 보고서『한국복식(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 매년 5월 2일 전시 및 세미나『안동 정상동 일선문씨와 이응태 묘 발굴조사 보고서(2000, 안동대 박물관)』2불복장물『해인사 금동비로자나불 복장유물의 연구』『조선전기 불복장직물의 이해(1997,김영숙)』등3전세품(傳世品) : 『복식류명품도록(고대박물관)』,『복식(이대 박물관)』,『태사묘 소장 유물 복원을 위한 기초연구』등『안동지역 전통복식(안동대 박물관,1996)』3)회화(기록화)를 통한 연구1 궁중기록화 : 『조선시대 기록화의 세계(고대 박물관)』『조선시대 궁중기록화의 연구(박정혜)』,『조선시대 진연 진찬 진하 병풍(2000,서인화)』2 풍속화 : 『조선시대 풍속화(국립중앙박물관)』,『조선시대 음악풍속도』,『김홍도』,『신윤복』등3 인물화 : 『역사인물초상화대사전(2003)』, 『조선초상화 연구(1994,조선미)』등4)민속자료를 통한 연구文化公報部·文化 (1986),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韓國民俗綜合調査報告書』제1장 삼국시대의 복식1. 사회·문화적 배경1)문화의 형성과 발전(1)고유문화-민족이 갖고 있는 특유의 고유문화가 있을 것임. (한복) - 서민층(2)외래문화-침략·교류·무역 등의 방법을 통해 유입되는 문화 -상류층, 지배계층, 특권층이 누림. 현시대는 외래문화가 우세한 추세(양장,양복 한복복)7)신발 (=화,이)(1)종류-화:장화(높은 신목), 북방계열-이:낮은 신울 (신울:신발의 울타리)(2)재료 :가죽, 옷감, 실, 삼, 초가선풍속(1)귀천 구분없이 가선 사용(2) 유 에 가장 많이 사용, 포· 치마· 치마· 바지 등에 선장식 / 위치 : 깃, 섶, 도련, 수구(3)색상 : 붉은 색· 검정색이 가장 많은 (벽화에 나타난 경우에 그러함)(4)목적 : 1구성상 목적 2미적 표현 3추위로부터의 인체보호 4주술적 목적(장식적, 실용적-끝 매듭을 지을때 미적요소도 고려함)3.몸치레{(1)귀고리 ·목걸이· 팔찌· 반지귀고리는 접이부분과 수식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접이부분에는 세환과 태환으로 구별되고, 수식부분에는 입체형과 평면형 및 이 두 가지가 혼합된 형이 있다.(1)수식부분 :1평면형 : 행엽형, 죽엽형, 도릉형등의 금판을 수식한 것2입체형 : 구형, 산치자형, 화롱형, 보관형, 반구립형, 표형3혼형 : 평면형과 입체형 수식을 혼용하여 더욱 복잡한 수식형태.{{{{{{{{{{{{{목걸이는 목에서 가슴까지 보석을 연결하여 늘어뜨렸고, 수정· 마노· 호박과 같은 여러 종류의 구슬로 연결해서 만든 목걸이를 즐겨 사용하였다.팔찌는 백제나 신라에서 많이 사용되었으나 특히 신라시대에 절정을 이루었다. 반지는 한 개만 끼는 반지와 두개가 한 쌍으로 된 가락지가 있으며, 특히 시라인은 반지 끼는 것을 좋아하여 열 손가락에 모두 착용한 예도 출토되었다.(2)과대· 요패-대는 원래 가죽이나 직물로 만들어 매는 띠인데 후대에 와서 여기에 교구를 붙였고 또 무기나 기타 여러 가지 필수품을 매달기 위하여 고리르붙였으며 과판까지 부착하게 되었다. 이후 이것이 풍속이 되어 장식을 위해 과대와 요패를 달기 시작하였다.과대는 금속의 꾸민 조각을 붙여 장식한 허리띠 를 말하며, 오패는 허리띠에 늘어뜰니 여러 가지 장식물을 말한다.(3)머리모양-삼국시대의 머리모양은 자연스러운 머리에서 발달되었으며 남자는 상투를 틀고 여자는 쪽진머리나 얹은머리 및 기타 여러 가지 모양의 머리 형태를1말(버선): 능,시,면주,표 / 여자보다 수수2화 : 오경추문, 자피3화대: 은문백옥, 오서, 유, 철, 동 등4이: 피, 사, 마2)여자복식1관모2표의3반비4배당5단의6내의7표상8요,반9내상10.고11.표12.대13.말14.소,채15.옷감(포),색채A.관모1관모(형태X)-6두품녀 이상 비단, 관 사용-5두품녀 이하 관 없음, 무관2소재-머리장식품(소,채등), 진골녀 이하 슬슬전 금함 (슬슬전=녹송석=터키석)B.표의1형태: 대수포(직력,수령), 단령포 (중국남녀 공용)2소재 :계, 수, 금, 라 소문릉, 시, 견, 무문독직, 면주, 포신분이 낮은 여자 단령을 입음, 신분이 높으면 단령을 입지 않음{그림 반비 입은 토용(국립 중앙 박물관)C.반비남녀 공용, 평민녀1형태: 반팔에 앞트인 부분의 길이2소재: 겉옷이라 질 좋은 소재D.내의1형태-속옷2소재-계,수,금,라,야초라,소문릉,시,견,면주,포E.배당-반비보다 화려한 소재의 여성복 (평인녀 언급 없음) -당풍1형태: 소매 짧은 관두형 상의2소재: 계,수,금,라,포방라,야초라,금은니,협힐,농,견등-문양기법: 협힐,교힐,날힐G.표상1형태: 겉치마, 배당만큼 화려한 소재2소재: 계,수,금,라,세라,야초라,금은니,협힐,시,견,포H.요,반 : 표상의 허리말기, 어깨끈1요:치마재료와 동일2반:월라 이하I.내상1형태: 속치마, 5두품녀 이상만 착용 (4두품녀 이하 내상 없음)2소재:계,수,금,라,야초라,금은니,협힐J.고1형태: 내의와 동급(내의와 같은 소재)2소재: 계,수,금,라,세라,야초라,해,소문릉,시,견등K.표 (shawl)1형태: 직사각형, 곡선처리형태2소재:계,수,금,라,금은사,공작미,비취모,금은니,능,견등L.대금은사,공작미,비취모등 장식1포대: 야초라,송천라,월라,능,견등2도대: 조M.말,말요,이1말(버선): 계,수,금,라,세라,야초라,소문릉,시,면주,포등2말요(버선목): 계라,금라,세라,소문릉,무문(릉)등3이: 내의와 동일, 계수, 수라, 피등N.포: 여자 28승~15승이라 (남자 26승~12승)O.색채: 자황은, 태조 왕건 18년(935), 신라의 제56대 경순왕을 혼인정책(婚姻政策)으로 달래어 신라인의 인심을 얻어 그 항복을 받았으며, 1년 뒤 태조 19년(936), 후백제의 견훤의 아들 신검(神劍)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음으로써 고려는 후삼국을 완전히 통합하여 재통일을 이룩하였다. 신라, 후백제, 고려로 분열되었던 후삼국은, 태조 왕건 18년(935), 신라의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한뒤 후백제의 신검왕이 항복함으로 후삼국의 분열은 재통일된 것이다.고려(高麗)라는 나라는 대개 문화적으로 신라시대의 것을 계승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唐), 송(宋), 원(元) 등의 문화를 다각도로 흡수하였으며 정치적으로는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자처하면서 북방민족(北方民族)과 끊임없이 무력(武力) 또는 정신적(精神的)인 싸움을 계속하였다. 고려의 건국이후 국가주변의 정세는 거란족이 발해를 멸하고 중국의 진(晋)을 토벌하고 국호를 대요(大遼)라고 고치고 크게 발전하였다. 이후로 25년간 걸쳐 고려를 침범하여 결국 7대 현종 때에 국교를 맺었다. 고려 13대 선종 이후에는 말갈족이 강성해져서 금(金) 을 건국하고 17대 인 때 외교관계를 맺었다. 또한 중국의 오대(五代)와 우호관계를 맺었으며 송과도 우호관계를 맺었으나 주변정세로 외교관계가 끊기기도 하고 중립을 지키기도 하였다. 몽고와는 징기스칸이 원을 건설한 후 30년간 6차에 걸쳐 고려를 침입하여 결국 고려 23대 고종때에 항복하게 되어 원의 간섭에 적지 않은 변혁을 겪게 되었다. 또한 고려 말에는 원이 쇠퇴함에 원을 배척하고 명나라와 친교를 가지게 되었다.고려는 건국 초기부터 사회 전반에 걸쳐 남아 있던 신라의 구제도를 따랐기에 복식에서도 통일신라적인 우리 고유복식과 중국복식의 2중구조가 공존하였다. 이러한 고려의 복식제도를 「고려사(高麗史)」'여복지 서문(與服志 序文)'에서 살펴보면 3기의 변천과정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제1기인 고려 초기 중기는 우리 고유의 복식 위에 오대(五代) 송(宋) 복식의 영향을 받은 시기이며, 제2기인 고려 왕비, 신하에게 준 의복중에 옥대 (玉帶), 탑자포 (塔子袍), 금탑자 (金塔子), 표리 (表裏), 금포(金袍), 금단의 (金段衣), 주사표리 (注絲表裏) 등이 있는데, 이것은 무늬가 있는 비단옷감의 일종으로 모두 원나라의 전형적인 복식이다. 원의 복식을 상징하는 것으로는 이 밖에도 충렬왕이 공주를 위하여 원으로부터 가져온 진주의 (眞珠衣)가 있다.몽고궁정의 의식에 쓰인 질손(質孫)과 몽고풍의 영향질손은 원사(元史) 여복지에서 보면 한문으로 일색복을 말하는 것이며, 내정대연(內庭大宴)에서 입었다고 한다. 궁정의 대신(大臣)이나 내시들도 이를하사 받아 입었는데 아래로 궁중 악공(樂工) 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옷을 입는데 있어서 상하의 구별이 있었다고 한다. 고 사회 진출로 일어난 영향인 것이다. 천자는 질손으로 조복(朝服), 공복(公服)을 삼았고, 백관의 질손에는 동복(冬服), 구등(九等), 하복(夏服), 십사등(十四等) 이 있었다. 몽고 풍속이 우리 나라에 유행한 것을 몽고풍이라고 했던 반면에 고려 풍속이 원나라의 상류 사회에 전파되었음을 간과할 수 없는데, 이를 당시 몽골에서는 고려양(高麗樣)이라고 대대적으로 유행하였으며 그 가운데에는 두루마기 등 우리나라 고유의 의복 양식이 몽고 상류층에 흡수되기도 했다. 이것은 고려가 정치적으로 몽고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동안 양국 민족교류가 필연적으로 이루어진데서 온 수 많은 고려인의 몽고 사회진출로 일어난 영향인 것이다.고려 말기 - 명(明) 복식의 영향기고려 말기 즉위임금인 공민왕은 원(元)나라가 쇠퇴하기 시작하자 고려는 자주성을 발휘하여 명(明)과 친근을 도모하여 원(元)의 지배에서 벗어나려했고 31대 공민왕 때에는 복구적인 중흥정책을 행하였다. 복식에 있어서도 예외는 없었는데 공민왕 자신은 제복(祭服)인 면복(冕服)에 있어 구류면구장복(九旒冕 九章服)이란 것을 중국황제와 동격의 12류면(旒冕) 12장복(章服)을 착용하기도 하였다. 그 밖에 문무백관은 흑의(黑衣), 청립(靑笠)으로 하고 승복(僧服)은 흑년간.
    생활/환경| 2005.12.30| 24페이지| 1,500원| 조회(1,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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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이사열전을 읽고- 이사의 탄식 -
    이사(李斯,?~208)의‘歎息’-『이사열전』을 읽고 -{【목차】1.들어가며2.이사의 첫 번째 탄식-창고 속의 쥐가 되다3.이사의 두 번의 위기-축객령逐客令과 한비자韓非子4.진의 통일 정책5.이사의 두 번째 탄식-분서갱유焚書坑儒와 호화로운 생활6.이사의 세 번째 탄식-사구성沙溝城의 야합7. 이사의 네 번째 탄식- 진秦과 이사李斯의 최후8.나오며-진秦과 이사李斯의 업적과 의의1.들어가며창고 속의 쥐가 되고 싶어 진을 택한 이사. 자신의 재능을 널리 펼치며 구주를 하나로 통일시킨 장본인. 하지만 물러갈 때를 알지 못하고, 진시황이 영원히 살고자 했던 것처럼 그도 영원히 권력을 유지하려 하였다. 그것은 그가 이룩한 공을 무너뜨리기 충분한 욕심이었으며, 그가 죽은 후 후세사람들의 비난을 면치 못한 이유가 되었다. 하지만 이사는 순자(荀子/BC 298?~BC 238?)의 제자답게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터득하고 있었으며, 탁월한 지략으로 중국을 지금의 중국으로 있게끔 한 초석을 다진 재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광활한 중국은 그의 머리에서 기초된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만큼 그의 역할이나 비중은 상상을 초월한다.사마천은 「이사열전」에서 이사가 네 차례 탄식한 일을 자세하게 묘사하여 이사의 성격을 쉽게 알 수 있도록 했다. 즉 이사는 화장실에서 사는 쥐와 창고 속에서 사는 쥐의 다른 환경을 보고 탄식했고, 승상이라는 귀한 신분이 되었을 때 탄식했으며, 진시황이 남긴 조서를 고칠 때 탄식했고, 오형을 받을 때 탄식을 했다. 이 네 차례의 탄식을 통해 이사는 진시황을 도와 권모와 술수만으로 출세를 향한 끊임없는 도전을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사마천 저/ 김원중 옮김, 『사기 열전』(上), 「이사 열전」, 을유문화사, 1999, 496p.2. 이사의 첫 번째 탄식 - 창고 속의 쥐가 되다.이사는 원래 초楚나라에서 태어났으며 젊은 시절에는 작은 마을의 말단 관리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어느 날 관청의 변소에 갔는데 불결한 찌꺼기를 먹던 쥐가 깜짝 놀라 달아나는 것을 정은 축객령逐客令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그 추방자 명단에는 이사도 들어 있었다. 이에 이사는 장문의 상서를 올려 축객령의 부당함을 설파하였다. 그것의 요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들리는바, 축객 논의는 심히 잘못된 것입니다. 옛적 목공은 인재를 구함에 있어 서융에서 유여를 채용하였고, 동쪽에서 백리해를 구하고, 건숙을 송에서 맞이하고, 비표와 공손지는 진에서 오게 하였습니다. 이 다섯 사람은 진에서 나지 않았으나 목공은 이들을 중용하여 20개국을 병탄하고 서쪽의 패자가 되었습니다.효공은 상앙의 변법을 채용하여 풍속을 개량한 까닭에 국가가 부강해지고 영토는 천 리나 확장되었습니다. 혜왕은 장의의 계략을 채용하여 합종맹약을 깨뜨려 6국이 진을 섬기게 하였습니다. 또한 소양왕은 범휴를 중용하여 양후와 화양군을 비롯한 대신의 세력을 제압하고 진의 제업을 이루었습니다.이러한 사실로 보건대, 타국인이 진을 배반한 일이 무엇입니까?태산은 한 줌의 흙이라도 사양하지 않아 저렇게 커졌으며, 하해는 한 줄기의 세류라도 가리지 않고 받아들여 저토록 깊어진 것입니다. 무릇 왕자는 어떠한 백성이라고 물리치지 않아야 덕을 천하에 밝히며, 춘하추동은 아름답게 순환하여 복을 내립니다. 오제, 삼왕 시절에 적이 없었던 건 바로 이런 까닭이었습니다.무릇 물자는 진에서 나지 않아도 보배로운 것이 많으며, 인재는 진에서 태어나지 않아도 충성스러운 인물이 많습니다. 따라서 지금 타국인을 추방하면 적국을 이롭게 하고, 백성을 들어 원수에게 보태 주어 스스로 공허하게 될 터이니, 오히려 국가를 위태롭게 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이사 열전」, 499~503p.이것이 그 유명한 『간축객서』의 일부이다. 적절한 비유와 선례로 빚은 대단한 문장이었다. 상서를 받아 본 진왕 정은 축객령을 철회하였고, 복직한 이사는 천하 병탄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 첫 번째 대상은 축객령의 빌미를 제공한 한나라였다.한나라에서는 공자 한비를 보내 이를 무마하고자 하였다. 한비는 이사와 더불어 순자 문하에서 수학한 사이였다. 모든 것을 새롭게 제정하고 정비해 나갔다. 승상 왕관은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은 다스리기 어려우니 황자들에게 봉국으로 주자고 했다. 하지만 정위 이사의 의견은 달랐다.천하가 고통받는 것은 제후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나라가 처음에 공신과 일족들에게 분봉하였으나, 해가 거듭될수록 친분이 약해져 종국에는 서로 원수처럼 여겨 전쟁을 일삼았습니다. 다시 제후를 봉하는 것은 전쟁을 조장하는 것이니, 만세의 안녕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실로 이상적인 그의 생각이었다. 역시 이상적인 자신의 제국을 완성하고자 했던 시황제의 뜻에 부합한 말이기도 했다. 이사와 시황제는 궁합이 꼭 맞는 동반자였던 것이다.시황제는 이사에게 힘을 더 실어주기 위해 승상에 임명했다. 이사는 자신이 미리 계획한 대로 천하를 36개 군으로 나누었다. 이른바 군현제였다. 군에는 수를 두어 행정을 담당하게 하고 위로 하여금 군사를 관장하게 했다. 그들은 모두 중앙에서 파견하고 통제하였으니, 굳건한 중앙 집권제의 발로였다.진의 통일정책 중에 높이 평가되는 것이 법제와 더불어 도량형을 통일한 것이다. 도량형의 통일은 천하를 하나의 상권으로 묶어 경제 흐름의 일관성을 갖게 한 치적이었다. 더불어 한자의 서체도 소전과 예서로 지정하여 그것만 사용하게 했다. 이 두 가지 정책은 차후의 중국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문화적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대토목 공사도 엄청난 것이었다. 시황제는 즉위하면서 여산에 자신의 무덤을 조성하였는데, 더욱 크고 화려하게 꾸미기 시작했다. 또한 진의 수도 함양으로 이어지는 전국의 도로도 정비하였으며, 동시에 수레바퀴의 치수와 바퀴와 바퀴 사이의 거리를 통일하였다. 또한 만리장성의 축조도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치적이다. 이 보호막 덕에 한족들은 북방 이민족의 위협에서 비교적 안전하게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이러한 치적은 말할 것도 없이 백성들의 강제 노역에 의한 것이었다. 이때 동원된 장정이 무려 350만 명이었다. 귀족 사대부를 뺀 거의 모든 집의 장정이 동원된 셈이었다. 백성들에게도 혜택우기를 원하는 자가 있으면 관리로서 스승으로 삼으시면 됩니다.{「이사 열전」, 504~505p.역시 시황제와 이사는 찰떡궁합이었다. 시황제는 이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시행하였다. 이것이 분서焚書이다. 그 이듬해, 시황제는 70만 인력을 동원하여 아방궁 건축을 시작하였다. 민심은 이반되고 선비들은 함양을 떠나기 시작하였다. 영화를 누리는 자는 이사와 황제에게 아부하는 측근들뿐이었다. 태수가 된 이사의 아들들은 공주와 짝을 지었고, 딸들은 모두 황자들에게 시집갔다. 이사는 창고 안의 쥐답게 영화로운 생활을 만끽했다.스스로를 진인이라 부르면서 영생 불사를 희구하던 시황제는 50대로 접어들면서 더욱 광기를 드러냈다.시황제는 천성이 고집이 세고 사나워 남의 말을 듣지 않소. 어느 누구도 감히 간언을 할 수 없을 지경이요. 어찌 이런 자에게 불사약을 구해 줄 수 있단 말이오.노생과 후생을 비롯한 연나라 선비들은 이런 의논 끝에 도망쳐 버렸다. 오래 전부터 장생 불사약을 찾아다녔으나 성과가 없자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문책에 대한 회피였다. 노생과 후생은 진인의 설로 시황제의 마음을 부풀려 놓은 장본인이었다. 그런 그들이 도망치니 시황제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나는 천하에 쓸데없는 책은 모두 불살랐다. 그럼에도 문학에 종사하는 선비들과 방사들을 불러모아 태평 성세를 일으키고, 방사로 하여금 선약을 구하게 했다. 그런데 선비란 자들이 나를 배신하고 비방만 일삼다가 도망치다니, 나를 비방하는 모든 선비를 잡아들여라!황제의 명이 떨어지자 은밀하게 어사들이 움직였다. 법령이나 황제를 비방한 선비 460명이 검거되었다. 시황제는 그들을 모두 함양에 생매장해다. 이것이 갱유坑儒사건이다. 분서와 더불어 분서갱유라 일컫는데 시황제와 이사의 잔혹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철저한 이상주의에 빠져있던 그들이었기에, 그들의 사상에 반하는 것들은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분서갱유의 비난은 면할 수 없다.시황제의 장자 부소는 분서갱유에 간하다가 변방의 축성 감독으로 쫓겨났다. 그런데 이십니까?나는 모두 몽염만 못하오. 그런데 당신은 어째서 이다지도 심하게 따지시오?그동안 진나라에서 파면된 승상이나 공신들 가운데 봉토를 2대에 걸쳐 이어받은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결국 목이 베어져 죽었습니다. 맏아들 부소는 강직하고 용맹스러우며 남을 믿고 선비들을 떨쳐 일어나게 하는 분입니다. 만일 그가 즉위하면 반드시 몽염을 기용하여 승상으로 삼을 것입니다. 그러면 승상께서는 결국 통후의 인수를 내놓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저는 칙명을 받들어 호해를 가르치고 몇 년 동안 법을 배우게 하여 그가 잘못을 저지르게 한 적이 없었습니다. 진나라의 여러 공자들 가운데 그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군주의 뒤를 이을만한 참 인물입니다. 승상은 잘 생각하셔서 결정하십시오.당신은 제자리로 돌아가시오. 나는 군주의 조칙을 받들어 하늘의 명에 따를 뿐이오. 어찌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있겠소?편안한 것을 위험으로 돌리 수도 있고, 위험한 것을 편안한 것으로 돌릴 수도 있습니다.나는 상채라는 시골의 평민이었으나, 다행히도 황제께서 발탁하여 승상이 되고 열후로 봉해졌으며 자손들도 모두 높은 지위와 많은 봉록을 받게 되었소. 이것은 나라의 존망과 안위를 나에게 맡기려고 한 것인데, 어떻게 그 뜻을 저버릴 수 있겠소? 충신은 죽음을 피하려 요행을 바라지 않으며, 효자는 부모를 섬기는 데 부지런히 힘쓰고 위험한 일을 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신하가 된 자는 저마다 자기 직책을 지킬 따름이오. 당신은 이 이상 말하지 마시오. 나에게 죄를 짓도록 할 셈이오?제가 듣건대, 성인은 변화하여 정해진 태도가 없으며, 변화에 따르고 시대에 호응하며, 끝을 보고 근본을 알며, 지향하는 바를 보고 귀착되는 바를 안다고 합니다. 사물이란 본래 이런 것입니다. 어찌 변하지 않는 고정된 법칙이 있겠습니까? 이제 천하의 대권은 호해에게 달려 있으며, 저는 그의 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가을에 서리가 내리면 잎과 꽃이 떨어지고 얼음이 녹아 물이 흐르게 되면 만물이 일어납니다. .
    인문/어학| 2005.06.11| 14페이지| 1,000원| 조회(1,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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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사] 조조, 영웅의 리더십 평가A+최고예요
    - 영웅의 리더십 -Ⅰ.들어가기삼국지의 세계라는 수업을 들으면서 리더의 자질과 그에 따른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인물에 대한 평가는 그 인물의 됨됨이와 더불어 어떤 전략을 펼치느냐와 어떠한 조직 경영을 실현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삼국지에서 후한 예교, 명교가 낳은 인물이자 사회에 딱 맞는 인물로 평가되고 있는 유비는 인물 평가에서 후자보다 전자에 더욱 치우친 평가로 점수를 얻고 있는 것이다. 반면 간교와 잔꾀의 화신으로 평가되고 있는 조조는 인간 됨됨이에서 그 점수를 잃은 것 일 테다. 역사의 흐름에 따라 인물을 평가하는 기준은 상대적으로 변하기 마련인데, 이제는 사회를 개혁하고 변화의 물결에 발 맞출 수 있는 인물이 주목받는 시대이다. 즉, 냉정하게 말하면 유비의 시대는 가고 조조의 시대가 왔다고 할 수 있다.카리스마 리더, 조조의 전략과 조직 경영을 통해 그를 재조명해보고, 또한 많은 영웅들의 발자취를 거슬러보며 진정한 리더십에 대해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다.Ⅱ.인물 소개조조(曹操, 155-220년)는 누구인가?조조는 자가 맹덕(孟德)이며 어린 시절 길리 또는 아만이라고도 불렀다. 지금의 안휘성 지역인 패국 초현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조는 유방을 도와 한나라를 세운 개국 공신이자 후에 정승을 지낸 조참. 그리고 조부 조등은 환관으로서 황제의 시종관과 대장추 벼슬을 지냈으며 환제의 즉위에 공을 세워 제후에 봉해졌다. 조조의 생부인 조승은 바로 조등의 양자였으니 집안은 권문세가였다고 하겠다. 조조가 태어난 때는 환제의 영수 원년, 한나라 조정의권력 장악력이 매우 약화디고 정치는 문란하였으며 지방 호족 세력이 발호하여 토지의 겸병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 조조는 이런 어수선한 가운데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기지와 총명함이 넘쳤으나 멋대로 놀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십대 후반 이후 조조는 법가와 병가의 서적을 탑독하여 학식을 쌓고 무공을 연마하였다. 그는 나쁜 짓도 많이 했으나 여러 사람과 교제하였는데, 당시의 유명 인사로 인물 잘보기한 정부군은 처음에 고전을 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황건 무리는 지휘관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는 데다 우수한 장비를 갖춘 정부군에게 밀리고 있었다.때마친 조조가 기병대를 이끌고 황건의 배후를 쳐 상당한 공을 세웠고 힘을 잃은 그들은 항복하였다. 조조는 하남에서의 공으로 덕에 제남(산둥성)의 상이 되었다. 조조는 부임하자 즉시 탐관오리를 파면하였다. 또한 백성들의 곡식을 빼앗아 사치생활을 하는 제사를 폐하였다. 이 제사는 전한 이래 국가에 공로가 있었던 자들을 모시는 제례였지만 실제로는 가렴주구의 온상이었고 미신을 전파하는 폐단도 있었다.제남을 다스리는 동안 그의 시책은 엄격하고 합리적이어서 일대는 평온을 유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성망은 나날이 높아 갔다. 오랫동안 피해를 입은 백성들 입장에서 볼 때에는 조조야말로 기다려 마지않던 이상적 관리였다.Ⅳ.인재등용사람을 관찰하는 데는 오시(五視)가 있다. 평소에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보고, 높은 자리에 있을 때 어떤 인물을 천거하는지를 보며, 부유할 때 어떤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는지를 보고, 가난할 때 어떤 행동을 하는지를 보며, 미천할 때 재물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는 것이다. 이중에 가장 어려운 것은 사람을 천거하는 일이다. 당신은 군주인가, 신하인가. 군주인데도 신하 노릇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신하이면서 군주연하는 자도 있다. 여불위는 장사꾼이었지만 정치를 경영했고, 관우는 용맹하기만 한 장수에 불과했다. 큰일을 할 인재가 따로 있고 그 인재는 인재가 알아보는 법이다. 하지만 이도 저도 때와 사람을 잘 만나지 못하면 이룸은 어렵다.그렇다면 여기서 간웅과 명신으로서 일세를 풍미했던 조조와 제갈량이 인재등용이라는 점에서는 어떤 관점을 가졌는지 알아보도록 하자.유재시거(唯才是擧: 오직 능력 있는 자만 기용한다)의 조조(曹操)조조를 거론함에 있어서 그의 인재등용에 대해 빠트릴 수가 없다. 아니, 그의 경영의 전부이자 최고의 효과를 거둔 판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중원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던 군웅들 중 조 천거하는데 품행에 구해 받지 말라. 옛날에 이지(伊摯) · 부설(傅說)은 천민 출신이고 관중(管仲)· 환공(桓公)의 적이었지만 모두 그들을 등용하여 나라가 흥성하였다. 소하(蕭何)· 조삼(曹參)은 현의 말단 관리였고 한신(韓信)·진평은 오욕의 이름을 뒤집어쓰고 비웃음을 당하였지만 마침내 왕업을 성취하여 명성을 천고(天鼓)에 드러났다. 만약 속세의 글에 밝은 말단관리로서 높은 재주와 특이한 자질이 있어 장수가 됨직하나 오욕의 이름을 뒤집어쓰고 비웃음을 당하는 사람이나 어질지 모하고 효성스럽지 못하지만 나라를 다스리고 지휘할 능력이 있는 자라면 천거하여 빠뜨림이 없도록 하라 { 『三國志』, 卷1. 「魏書·武帝紀」.고 하였다.조조가 명령한 일련의 정령은 양한 사백년 이래 한번도 실시한 적이 없었다. 양한황제들은 여러 차례 걸쳐 명을 내려 현자를 구하였으나 그 내용은 모두 선덕후재(先德後才)의 방법으로 도덕설교가 충만하였다. 그것은 효렴(孝廉)· 현량방정(賢良方正) 등 과목이 모두 도덕 신조의 발현으로 한말 사인들을 거짓과 천박함으로 가득하게 하고 화려하나 쓸모 없는 무능한 폐단을 양성케 하였다.믿을 수 있는 사람을 취한다. 제갈공명제갈공명의 인재 선발 기준은 능력과 도덕성을 함께 보는 것이었다. 인재를 보는 공명의 시각은 그가 촉의 후주 유선에게 올린 에 잘 드러나 있다.…만약 간사한 죄를 범한 자나 충성되고 선한 일을 행한 자가 있으면, 마땅히 담당 관리에게 맡겨 그 형벌과 상을 밝힘으로써 폐하의 공평하고 밝은 다스림이 명백히 나타나게 해야 합니다.…시중시랑 곽유지, 비위, 동윤 등은 모두 진시뢰고, 뜻과 헤아림이 충성되며 순수합니다. 이러한 까닭에 선제(유비)께서는 이들을 가려 뽑아 쓰시고 폐하께 전하신 것입니다.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궁중의 일은 크고 작음을 가리지 말고 모두다 그들에게 물으십시오. 그런 연후에 행하신다면, 필시 그들은 폐하를 보좌하여 빠지거나 새는 일이 없도록 보필하여 널리 이로움이 있게 할 것입니다. 장군 상총은 성품과 행함이 맑고 곧으며 려하지 않는 탓으로 인해 그의 주변에는말썽 많은 인물들도 많았던 것이다. 그 예를 들어보자. 정욱은 조조의 빼어난 모사 중 하나였는데 성품이 강하고 사나워 사람들과 자주 불화를 일으켰다. 그리고 그런 성격탓에 모반을 꾀한다는 모함을 받기까지 했다. 그분이 아니다. 에 의하면, 정욱은 고향 마을을 약탈하여 조조의 군량을 조달하기도 했는데 이때 그는 사람을 죽여 그 고기로 부족한 군량을 대신했다고 한다. 정욱이 저지른 만행으로 인해 백성들의 민심이 조조를 떠나게 되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이렇듯 도덕성을 고려하지 않는 조조의 인재 기용에서 오는 폐단을 청나라의 고염무는 이렇게 지적했다.조조는 오점이 있거나 비웃음을 받을 짓을 한 자, 그리고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는 자라도 나라를 다스리고 병사를 다룰 줄 알면 기용해 썼다. 그리하여 간사한 자들이 드나들고 반역자들이 쏟아져 나왔다.조조의 생전에는 그의 강력한 카리스마 때문에 이러한 문제들이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조조가 죽고 조비와 조예를 거치면서 위나라의 왕실이 나약해지자, 결국 왕조 자체를 뒤엎는 일이 터지고 말았다. 바로 사마의의 쿠데다였다. 사마의는 전형적인 권모술수형의 인간이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점은 조조와 너무도 닮아 있었다. 그것은 도덕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능력 만을 중시하는 조조의 인재 기용 방식이 부른 화(禍)였다.Ⅴ.영웅들의 리더십5000년이 넘는 중국 역사에서도 문무(文武) 양면에서 뚜렷한 공적을 남긴 임금으로 칭송받는 당(唐)태종은 어진 인재들을 두루 등용하고 그들의 간언을 성심으로 받아들인 것으로 유명하다. 또 그는 잘못이 있으면 즉각 고치는 행동을 보여주었다. 예를 들어 고구려 정벌에 실패했을 때도 이를 한사코 만류했던 간의대부(諫議大夫) 위징(魏徵)과 같은 현신의 말을 듣지 않은 점을 깊이 반성했다고 한다.조조도 이와 같이 부하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군주였는데, 그는 어떻게 부하를 관리했는지에 대해 또 다른 영웅들과의 비용하고 계략을 중히 여기는 등 월왕 구천과 닮은 비범함을 갖춘 인물이었다. 진수 역시 재능에 맡기고 계략을 숭상하는 손권의 자세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229년에 손권은 스스로 황제라고 칭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신하들을 신뢰하지 않고 점점 독단에 빠지게 되었다. 인재등용의 측면에서 이러한 변화는 오나라에서 손권의 지배력이 점차 쇠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수는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그는 의심 많은 성격이어서 가차없이 사람을 죽였는데, 그러한 경향은 나이가 들수록 심해졌다."{똑똑하지만 남을 믿지 못한 제갈량조조의 부하 사마의가 소심해서 전장에 나서지 못한다는 소리를 듣고 제갈량이 부인네 의복을 담은 선물을 보내 놀렸다. 분을 삭이면서 사마의가 제갈량의 부하에게 물었다. “승상께선 어떠신가?” “매일 밤늦게 일하십니다. 곤장 스무 대가 넘는 형벌에 관한 일은 손수 처리하시지요.” 사마의가 웃으며 말했다. “제갈량이 충신이요 뛰어난 전략가인 것은 사실이나 남을 믿지 못하는 것은 커다란 흠이지. 지나치게 세심해서 모든 일을 자신이 직접 챙기려 드는 것이 문제야. 남을 믿지 못하는 것은 윗사람이 가져야 할 자질이 아니지.' 이 천재는 결국 마흔이 겨우 넘은 나이에 과로를 이기지 못하고 병사하고 말았다.-변경 (양장본) / 렁청진(冷成金) / 더난-옳은 말이면 부하의 말도 따르는 조조조조라는 냉혹하고 자기 본위이지만, 부하의 좋은 의견은 서슴치 않고 받아들인다. 그 일화로, 청주군에서 항복해온 장군의 한 사람인 모개가 이렇게 진언한 일이 있었다."천하를 취하려면, 다음과 같은 원칙을 필요로 합니다.첫째, 천자를 받들어 모실 것. 이로써 군병을 일으켜 거사하는 대의 명분이 섭니다. 두 번째, 농민 출신자를 병사로 쓸 것. 이로써 인심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백성의 대부분은 농민이며, 농민이야말로 강한 병역의 원천입니다.세 번째, 영내의 농업을 진흥시킬 것. 이로써 경제력을 높이며, 군비를 강화할 수가 있습니다.이 세 가지 원칙에 충실하는 한, 어르신네처럼 영명한 자질다.
    인문/어학| 2005.06.11| 7페이지| 1,000원| 조회(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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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역사] 위대한 폭군, 진시황
    위대한 폭군 진시황‘벌처럼 높은 코, 긴 눈, 새가슴, 승냥이 같은 목소리’ 위(魏)나라 사람으로 진의 국위(무관의 하나)가 된 위로(慰瀘)의 진시황제에 대한 인물평이다.중국 역사에 있어서 진시황제는 시비가 끊이지 않았던 인물이다. 그 오랜 옛날, 기원전 221년에 전 중국을 정치적으로 통일하였고, 그 이후로 중국인들은 통일된 중국을 정상으로 보고 분열된 중국을 비정상으로 보게되는 관념을 낳았다는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진시황의 중국통일은 역사상 중요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진시황은 진나라의 왕으로써 여불위(呂不韋){ 여불위(呂不韋, ?∼기원전235년)원래는 상인으로 조나라에 왔다가 조나라의 인질이 되어있는 진나라의 공자(자초)를 만나, 자초가 진나라에 돌아갈수 있도록 노력한다. 여불위의 몸을 모시고 있던 여성을 자초가 이어 받는다. 그러나 이 여성은 이미 여불위의 자식을 임신하고 있었다. 이 아이가 후의 시황제가 된다. 진나라에서는 왕이 죽고, 자초가 장상왕에 즉위하지만, 3년만에 죽고 정(시황제)이 13세의 나이로 즉위한다. 아직 소년이기에 진나라의 실권은 여불위에게 넘어갔다. 후에 시황제가 장성하고 직접 정치할 능력이 되자 여불위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이에 여불위는 "주살을 당할바에야 차라리 자살을 택하겠다."라며 독배를 마시고 죽는다.를 통해 13세에 왕위에 올라 20세에 친정을 시작하면서 전국 통일의 계획을 세우고 불과 19년 만에 그 계획을 완성한다. 진시황제는 황제가 된 후 역사에 남을 많은 일을 하였다. 군현제의 실시, 문자의 통일, 사상통일, 도량형 통일, 흉노정벌 등 그 밖의 여러 가지 업적에도 불구하고 폭군으로 비쳐진 것은 분서갱유(焚書坑儒:B.C.213) 등과 같은 희대의 사건들을 저지른 대가가 아닐까한다.이런 역사적으로 길이 남을 삶을 살았던 진시황제의 생애와 그 업적을 살펴보고자 한다.1)처음으로 황제라는 칭호를 쓰다.시황제가 세계에서 처음으로 황제라고 칭한 경위에 관해서는 사마천의 『사기』「진시황본기(秦始皇本記)」의 26년(B.C.2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대체로 복희(伏羲)씨, 여와(女蝸)씨, 신농(神農)씨 세 사람의 지도자를 말한다. 이들은 백성들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친 왕으로 전해진다. 이들은 백성들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친 왕으로 전해진다. 오제(五帝)는 황제, 전욱, 곡, 요, 순이라는 다섯 사람의 성군을 가리킨다. 따라서 '황제'라는 말에는 진시황 자신이 3황 5제의 덕을 겸비한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었다.2) 중앙집권 제도의 확립시황제는 그때까지 각 왕조가 하고 있었던 것처럼 목(木)·화(火)·토(土)·금(金)·수(水)의 덕이 잇따라 돌아온다고 하는 종시오덕(終始五德)의 설을 채용하여 주가 화덕(火德)인 것을 이어받아, 지금까지 금덕(金德)이라 칭하던 것을 정식으로 수덕(水德)으로 고쳤다.수덕은 음이고 형벌은 음의 시기에 행하는 것이었으므로 모든 것은 냉혹하고 사정이 없는 법률에 의해 다스린다고 하는, 이를테면 법률과 형벌을 만능으로 하는 ‘법가주의(法家注意)’의 정치를 했다.광대한 영토를 지배하는 방법에 관해, 재상 왕관(王 )은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 은 황제의 아들들을 봉건하여 왕이 되게 다스리는 것이 좋다고 말하여 군신의 찬동을 얻었으나, 이사만이 반대하여 분규를 빚었다. 이사의 주장은 이러했다. 제후를 봉건하면 다시 전쟁이 일어나 백성이 시달리게 될 것이 뻔하므로, 그 보다는 중앙집권체제의 군현제(郡縣制)를 전국에 펴는 것이 좋다고 주장했다. 시황제는 결국 이사{이사(李斯, ?~BC 208)초(楚)나라 상채(上蔡:河南省 上蔡縣) 출생. 순자(荀子)에게 배운 법가류(法家流)의 정치가로서, 진(秦)나라로 가 승상(丞相) 여불위(呂不韋)에게 발탁되어 객경(客卿)이 되었다. 정국거(鄭國渠)라는 운하를 완성하는 데 노력하였으며, 시황제(始皇帝)가 6국을 통일한 후에는 봉건제에 반대하고 군현제(郡縣制)를 진언하여 정위(廷尉)에서 승상(丞相)으로 진급하였고, 분서갱유(焚書坑儒)를 단행시켰다.통일시대 진나라의 정국을 담당한 실력자로, 획기적인 정치를 추진하였다. 시황제가 죽은 후며, 그 당시는 모두 금속을 썼다. 훌륭한 사람은 금, 그 다음 사람은 은이나 구리를 썼다. 이것을 끈으로 매서 목에 걸었다. 전시에는 이것이 인식표(認識票) 역할을 했다. 전사한 유체(遺體)를 판별할 수 없을 때에는 목에 걸었거나, 혹은 어딘가에 지니고 있는 금속의 인장에 의해서 그가 누구인가를 알 수 있었다. 이 인장에는 읽을 수 없는 문자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것이 육국문자 즉 진시황제에 의해서 폐지되었던 문자였던 것이다. 같은 문자가 전국에서 통용된다는 것은 전국적으로 의사소통을 도모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단순히 국토통일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참된 뜻으로의 천하통일을 이루게 된 것이다.4) 도량형(度量衡)의 통일진시황은 도량형을 통일시켰다는 점도 아주 중요하다. 한 홉[合], 한 되[升], 한 말[斗]이라든가, 길이의 단위인 보(步), 장(丈) 등이 각 국에서 약간씩 달랐다. 되나 말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한 말이 어느 나라에서는 한 말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생겼다. 그래서 전국의 도량형을 엄격히 통일시켰던 것이다. 이것은 천하를 통일했던 바로 그 해에 실시되었다. 한 홉이라는 표준 용기를 제작하여, 전국에 그것을 따르도록 명령했다. 중앙에서 보내온 한 홉짜리 용기가 동북 지방 근처에서 출토(出土)된 것으로 보아 사실상 전국에 배당되었던 사실을 반증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산업과 경제가 발달했다. 이제까지는 각지에서 다시 하나하나 환산해야만 했던 것이 그러한 수고를 면하게 되었다. 화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진(秦)의 화폐가 전국에서 통용되었다.5) 동궤(同軌)-차륜(車輪) 폭의 통일진시황의 통일정책으로 또 하나 유명한 것은 '동궤(同軌;궤(軌)를 같이 한다)' 즉 바퀴 폭의 통일이다. 당시 각 국은 제각기 다른 나라의 수레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바퀴의 폭을 달리 하고 있었다. 수레는 대부분 전차(戰車)였다. 말이 끄는 전차는 도로에 깊은 바퀴자국을 만들고 그것이 레일같이 되어 있었다. 그 레일에 차륜을 넣어서 수레를 달리게 했던 것이다. 전차는 은 진나라의 시황제가 길을 개척했으니 다시 만들 필요가 없으며 진나라는 그 때문에 멸망한 것이라고 말했다. 시황제가 죽자 갑자기 나라가 멸망한 것은 도로 건설로 시달렸던 백성들의 원한이 컸기 때문이며 한나라는 그것을 모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진나라가 멸망한 지 30년이 지난 때였으므로 그 당시는 시황제가 만들었던 길이 남아 있었다. 치도는 정말 훌륭한 도로였다. 폭이 67m, 그리고 6m마다 큰 가로수가 심어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북쪽으로는 구원(九原), 만리장성 근처에서부터, 동쪽으로는 황해 연안까지, 남쪽은 양자강(揚子江)에 이르기까지 길이 뚫려 있었다. 그래서 어느 곳이든지 하나의 수레로 갈 수 있게 길이 연결되어 있었다. 진시황 이전에는 강소성(江蘇省)이나 절강성(浙江省)까지 가려면, 한(韓)나라에서 수레를 바꾸어 타고, 위(魏)나라에서도 바꾸어 타야만 했다. 그 외에도 곳곳에서 바꾸어 타야 했지만 진시황에 이르러서는 그러한 번거로움이 없어졌고 한 대의 수레로 전국 방방곡곡을 갈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도로로 인해 각지의 교역(交易)이 번창하게 되었고 산업경제가 활성화되는 데도 큰 힘이 되었다.7)분서갱유(焚書坑儒)천하통일이 이룩된 후 진시황의 통치 기간 중 이사는 승상이라는 최고의 벼슬에 올라 막강한 권세는 누렸다. 이사는 황제가 천하를 몸소 다스리는, 서른 여섯 개의 군으로 나라를 구분하고 그 밑에 현을 두어 조직적으로 일사분란하게 통치하는 제도를 추천했다. 그러나 이사는 학자들이 사사로이 학문을 전수하며 법을 비난하고 자기가 배운 것만을 기준으로 시비를 따진다고 모함하여, 또한 황제를 비방하는 말을 퍼뜨린다고 하여 학자들을 난관에 빠뜨렸다. 결국 사관이 갖고 있는 자료 중 진나라의 기록이 아닌 것은 모두 불태우고 개인이 『시경(詩經)』{ 시경(詩經)황허강[黃河] 중류 주위안[中原] 지방의 시로서, 시대적으로는 주초(周初)부터 춘추(春秋) 초기까지의 것 305편을 수록하고 있다. 본래 3,000여 편이었던 것을 공자(孔子)가 고 하나, 진(秦)나라의 시황제(始皇帝)의 분서(焚書)로 산일(散逸)된 후 한(漢)나라의 문제(文帝) 때 복생(伏生)이 구승(口承)한 것을 당시 통용되던 예서(隸書)로 베껴 《금문상서(今文尙書)》라고 한다. 그 후 경제(景帝) 때 노(魯)나라의 공왕(恭王)이 공자의 구택(舊宅)을 부수고 발견한 진(晉)나라의 문자로 쓰인 것을 《고문상서(古文尙書)》라고 한다. 《고문상서》는 일찍 없어지고 현재는 동진(東晉)의 매색(梅康)이 원제(元帝)에게 바친 《위고문상서(僞古文尙書)》가 《금문상서(今文尙書)》와 함께 보급되었다.그리고 제자백가의 책은 모조리 몰수되어 불태워 졌고 옛것을 언급해 현실 정치를 비판하는 모든 사람은 처형당했다. 분서갱유라 일컬어지는 이 사상 탄압은 말하자면 시황제에 대한 백성의 불만이 점점 높아가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8)불로장생(不老長生)의 꿈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룩한 진시황도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어떻게든 죽음을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진시황은 서시(徐市)에게 어린 소년 소녀 3천명과 많은 보물을 실은 배들을 거느리게 하여 동해에 있다는 신선이 사는 섬에 가서 불로장생의 약초와 약을 구해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서시는 몇 년이 지나도록 약을 구하지 못하자 돌아와 거짓말로 둘러댔다. 그러나 서시일행은 끝내 영약을 구하지 못하고 일본 쪽으로 도망쳐 버렸다. 그 후 진시황은 서시 이외에도 연나라 사람 노생(盧生)과 한종(韓終), 후공(侯公), 석생(石生) 등에게 명하여 선인의 불사의 약을 찾았으나, 모두 구하지 못했다.9)아방궁(阿房宮)과 능묘의 건설진시황은 죽음을 그렇게 피하려 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열 세살 즉위 할 때부터 자기가 죽어서 들어갈 묘 자리를 파고 있었다. 시황릉(일명 여산릉)은 높이가 116m, 주위의 길이가 2.5m, 사방이 각각 600m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로 무려 70여만 명의 죄수가 동원되어 공사를 했다. 관은 동으로 주조하였으며 무덤 내부는 궁전과 누각 등의 모형과 각종 진귀한 보물들로 가하였다.
    인문/어학| 2005.06.11| 7페이지| 1,000원| 조회(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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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조선의 중앙관제
    조선의 중앙 관제들어가며"내가 일찍이 송도에 있을 때 정부(政府, 의정부)를 없애자는 의논이 있었으나, 지금까지 겨를이 없었다. 지난 겨울에 대간(사간원과 사헌부)에서 작은 허물로 인하여 정부를 없앨 것을 청하였던 까닭에 윤허(允許)하지 않았었다. 지난번에 좌정승이 말하기를 '중조(中朝, 중국의 왕조)에도 또한 승상부가 없으니, 마땅히 정부를 혁파해야 한다.'고 하였다. 내가 골똘히 생각해 보니, 모든 일이 내 한 몸에 모이면 진실로 재결(裁決)하기가 어렵겠으니, 그러나 이미 나라의 임금이 되어서 어찌 노고스러움을 피하겠느나?" 태종실록조선 초기의 왕권 강화는 태종 때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태종은 왕위에 즉위하기 전에 이미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개편하였다. 도평의사사는 고려 후기 지배층이었던 권문 세족의 합좌기구로서, 왕권을 유명무실하게 할 정도로 국정 전반을 관장하였따. 조선 왕조 개창 이후에는 신진 사대부 세력이 여전히 도평의사사를 장악함으로써 왕권은 크게 제약당하였다. 태종은 이러한 도평의사서를 의정부로 개편하였고, 그 권한 가운데 행정권만을 의정부로 이관하였다. 따라서 이 자체만으로도 이미 왕권은 전보다 강화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의정부의 비대화와 그로 인한 왕권의 불안을 걱정한 태종은 의정부 아래에 있던 6조(吏, 戶, 禮, 兵, 刑, 工)를 의정부로부터 독립시켜 6조 직계제를 실시하였다. 즉, 6조에서 결정한 행정 사항을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왕에게 직접 결재를 받게 함으로써, 의정부의 행정 결정권을 박탈하였다. 그 후에도 왕권이 약해지면 의정부가 강해지고 왕권이 강해지면 의정부가 약해지는 현상이 여러 차례 되풀이되었다. 조선의 중앙 관제는 의정부와 6조 이외에도 언관(言官)과 언로(言路)의 역할을 수행하는 삼사가 있었다. 각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인데, 여기서는 의정부와 6조를 비롯해 삼사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의정부(議政府)-조선시대에 백관을 통솔하고 서정을 총괄하던 최고의 정치기관.정1품 아문으로 낭묘(廊廟)·도당(都堂)·묘당(廟堂)·정 비변사 기능 가운데 외교·국방을 제외한 모든 업무를 의정부에 귀속시킴으로써 의정부의 옛 기능을 거의 회복했다. 그러나 1894년 이후 일본의 영향력 증대에 따라 유명무실해졌다. 의정부는 각 시기에 따라 영향력·빈도수에 있어서 신축성이 있기는 하나 조선 전시기에 형정·노비·경제·군사·의례·복제·입법·인사·교육·과거·풍속·부역·축성·진휼·구료(救療)·사행·통교·불교·국도경영·진봉(進封)·공신책록·역사편찬 등의 모든 국정에 참여했다. 이러한 활동들은 크게 국왕으로부터 명을 받아 행하는 수명(受命) 활동, 상언·상소 등을 통한 계문(啓聞) 활동, 국왕의 지시를 받아 정사를 논의하는 의의(擬議) 활동의 방법으로 수행되었다. 그리고 이 활동은 왕권이나 의정부, 6조의 기능과 관련되면서 의정부의 기능이 강력한 시기에는 계문 활동이 중심이 되고, 6조의 기능이 강력한 시기에는 의의활동이 중심이 되었다.〈경국대전〉에 의하면 의정부의 직제는 정1품 영의정·좌의정·우의정 각 1명, 종1품 좌찬성·우찬성 각 1명, 정2품 좌참찬·우참찬 각 1명, 정4품 사인(舍人) 2명, 정5품 검상(檢詳) 1명, 정8품 사록(司錄) 2명을 두었다. 이후 〈대전통편〉 편찬 이전에 사록 1명이 감소되고, 1865년(고종 2)에 비변사의 혁파와 관련되어 공사관(公事官) 11명(참상 7명, 참하 4명)이 증치되면서 계승되었다. 한말에는 1894년 7월 관제개혁에 따라 의정부 아래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도찰원(都察院)·중추원(中樞院)·기록국(記錄局) 등을 두었고, 아울러 의정 이하가 총리대신 1명, 좌찬성·우찬성 각 1명, 도헌(都憲) 5명, 참의 5명, 주사 31명 등으로 개편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내각으로 개칭되면서 폐지되었다가 이듬해에 내각이 의정부로 개칭되면서 의정 1명, 내부·외부·탁지부·군부·법부·학부·농상공부 대신 각각 1명, 찬성 5명, 참찬 1명 등으로 편제되었고, 1907년(순종 1) 다시 내각제로 개편되면서 폐지되었다. 이속(吏屬)은 〈경국대전〉을 보면 의정부에는 아전 보필하면서 의정부의 일에 참여했고, 때때로 의정을 대신하여 서사(署事)를 행하는가 하면 부의 업무에 관한 논의에도 광범히 참여했다. 사인·검상·사록은 가문이 좋은 문과출신 중에서 엄선했는데, 대개 사인은 〈경국대전〉의 규정을 토대로 검상이 승자되면서 제수되었고, 검상에는 같은 품직인 삼사관·정랑이 제수되었다. 의정뿐만 아니라 찬성·참찬·사인·검상·사록도 정랑·좌랑·주서와 함께 재직기관이 만료되면 승자·체직되는 관직이었다. 특히 검상은 정5품관이나 정4품관인 사인에 결원이 생기면 재직기간을 따지지 않고 사인으로 승직되었다. 사인·검상직은 최단기간에 참상관에서 당상관에 진출하는 지름길이 되어 정랑·좌랑과 함께 관인 모두가 선망하는 주요직이었다. 조선시대 정치는 국왕을 정점으로 한 의정부나 비변사와 6조·승정원·삼사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중 의정부의 기능은 대개 조선 전기에는 왕권과 관련되었는데, 왕권이 강화되면 6조 중심으로 국정이 운영(육조직계제)되고, 왕권이 약화되면 의정부 중심으로 국정이 운영(의정부서사제)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비변사의 대두와 함께 유명무실해졌다.6조조선시대 행정실무기관인 이조(吏曹)·호조(戶曹)·예조(禮曹)·병조(兵曹)·형조(刑曹)·공조(工曹)를 일컫는 말로 '조'(曹)는 치사(治事:일을 처리함)를 뜻하는 말이며, 오늘날의 부(部)에 해당한다6조의 사무는 의정부를 거쳐 왕에게 보고되었으나, 때로 6조가 왕에게 직접 보고하는 6조직계제(六曹直啓制)가 시행되기도 했다. 6조의 서열도 처음에는 고려의 서열을 따랐으나 세종이 즉위하면서 '주관'대로 이·호·예·병·형·공의 순서로 바꾸었다. 6조의 관원으로는 정2품 판서(判書), 그 아래 종2품 참판(參判)과 정3품 참의(參議)가 있었으며, 이들을 3당상(三堂上)이라고 했다. 그 아래 낭청(郎廳)이라 하여 실무에 종사하는 정5품 정랑(正郞)과 종5품 좌랑(佐郞)이 3명씩 있었는데, 병조와 형조에는 4명씩을 두었다. 호조와 병조에는 수학과 법학을 전담하는 종6품 산학교수(算學敎授)와 율학교수 (版籍司):호구(戶口) · 전토(田土) · 부역(賦役) · 공헌(貢獻) · 농상(農桑) · 권과(勸課) · 풍흉고험(豊凶考驗) · 의창(義倉) 및 진제(賑濟) 담당 회계사(會計司):조부(租賦) · 세계(歲計) · 권형도량(權衡度量) · 경외(京外)의 저비(儲備) · 지조(支調) 담당급전사(給田司):영업전(永業田) · 구분전(口分田) · 원택(園宅) · 직전(職田) 및 각종 공해전(公**田) 담당4) 형조(刑曹)고율사(考律司):율령(律令) · 안핵(案**) · 형옥 담당장금사(掌禁司):문궐(門闕) · 진량(津梁) · 도로의 금령(禁令) 담당도관사(都官司):공사(公私) 노비의 부적(符籍) 및 소송을 담당5) 예조(禮曹)계제사(稽制司):의식 · 제도 · 조회(朝會) · 경연(經筵) · 사관(史館) · 학교 · 과거(科擧) · 도서(圖書) · 책명(冊命) · 천문(天文) · 누각(漏刻) · 국기(國忌) · 묘휘(廟諱) · 상장(喪葬) 담당전향사(典享司):연향(燕享) · 제사 · 의약 담당전객사(典客司):외국사신의 영접과 조공(朝貢) · 사여(賜與) 담당6) 공조(工曹)영조사(營造司):궁실(宮室) · 성지(城池) · 공해(公段) · 옥우(屋宇) · 토목공사 담당공야사(攻冶司):백공(百工)의 제작 · 선야(繕冶) · 도주(陶鑄) 담당산택사(山澤司):산택(山澤) · 진량(津梁) · 원유(苑權) · 초목 · 시탄(柴炭) · 목석(木石) · 제언(提堰) · 선읍(船揖) · 조운(漕運) · 둔전(屯田) · 어염(魚鹽) 담당1 이조(吏曹)승령부(承寧府) · 공안부(恭安府) · 종부시(宗簿寺) · 인령부(仁寧府) · 상서사(尙瑞司) · 사선서(司膳署) · 내시부(內侍府) · 내시원(內侍院) · 공신도감(功臣都監) · 차방(茶房) · 사옹방(司甕房)2 병조(兵曹)중군(中軍) · 좌군(左軍) · 우군(右軍) · 십사(十司) · 훈련관(訓練觀) · 사복시(司僕寺) · 군기감(軍器監) · 의용순검사(義勇巡檢司) · 충순호위사(忠順扈衛司) · 별시위(別侍衛) · 응양위(鷹揚衛) · 인가방(론, 일반 관료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탄핵의 대상으로 삼을 만큼 활발했다. 조선 사회에서는 언론활동을 직접 담당했던 관청이 있었는가 하면, 일반 민중들이 자신의 의견을 왕에게 올릴 수 있는 장치도 마련되어 있었다. 요즘도 신문에 독자 투고란이 있어 일반인들이 의견을 표현할 수 있지만, 조선의 그것은 훨씬 광범위하고 효과적이었다.1)사헌부공무원의 비리를 지적하고 국가의 정도를 세울 목적으로 운영되는 감사원과 유사한 기능을 지녔던 조선의 사헌부는 정치의 시비에 대한 언론활동, 백관에 대한 규찰, 풍속의 교정,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살피는 일, 외람되고 거짓된 행위를 금하는 일 등을 담당했으며, 상대(霜臺), 오대(烏臺), 백부(柏府)등으로 불렸다. 또한 사헌부는 고려시대의 직제를 수용했다가 태종1년(1401), 낭사와 분리되면서 독립되었다. 이는 언론의 발전과정에 있어서 제도적으로 진일보한 현사이다. 사헌부의 관원은 대사헌부터 감찰까지 직책이 구분되어 있었다. 태종1년, 기구가 독립되면서 개정된 직제가 「경국대전」에 반영되었는데, 총인원은 대사헌(1),집의(1),장령(2),지평(2), 감찰(24)등 30명이었다. 이들은 높은 정치적 식견과 불의,부정과 타협하지 않고, 강경한 언론을 행사할 수 있는 인격을 지녀야 했으며, 감히 가까이 하기 어려운 권위를 갖추고 있어야 했다. 그리하여 대간의 선발시에는 언론이 강개한 자를 널리 구했으며, 다른 중요한 관서와 마찬가지로 본인과 집안을 살펴서 하자가 없는 인물이라야 선발될 수 있었다. 부정축재자의 자손이 선발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사헌부의 기능은 매우 광범했다. 먼저 정치 참여기관으로서의 기능이다. 사헌부의 관원들은 의정부, 육조의 대신들과 함께 왕이 중신을 접견하여 정치적 보고와 자문을 받는 자리인 조계(朝啓), 상참(常參)등에 참여할 수 있었다. 조계는 왕이 대신, 근신들을 접견하여 정치에 대한 의견을 듣고 자문을 구하는 자리이다. 따라서 당시 정치의 향방을 가듬할 수 있는 중요한 자리였다. 대간이 조계나 상
    인문/어학| 2005.06.11| 8페이지| 1,000원| 조회(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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