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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정치]중국정치에서 문화대혁명이 갖는 정치적 의미는 무엇인가?
    중국정치에서 문화대혁명이 갖는 정치적 의미는 무엇인가?권력투쟁으로 본 문화대혁명문혁의 격동이 처음으로 세계에 전해졌을 때 중국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 문혁은 노선투쟁이냐 아니면 권력투쟁이냐를 놓고 많은 논쟁이 일어났다. 그런데 어떠한 국가 특히 소련의 예를 들 필요도 없이 사회주의 국가에서 사상=노선=권력의 3자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 자체에는 무리가 있는 것 같다. 문혁의 실제 과정은 권력투쟁의 측면을 빼고는 이해할 수 없다.문혁때 주창되었던 각종 사상적?학술적?이론적 주장의 전부가 권력투쟁을 호도했다고는 할수 없다. 그러나 모택동과 임표, 조반파(造反派; 주자파(走資派)에 반대한 군중 조직 떠는 그 조직에 참가한 사람)와 실권파 등 무수한 사람과 집단이 연출한 권력쟁탈극이야말로 문혁의 커다란 특징이었다.문혁을 정치권력의 쟁탈이라는 각도에서 볼 때 우선 1959년의 국가 주석 사임 이후의 모택동이 유소기 등에 대해 차츰 불만을 더해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된다. 국가주석을 사임하고 제2선으로 물러난 것은 모택동 자신의 희망이었지만 모택동은 1960년대 전반의 사회주의 교육운동 등을 통해 권력의 奪回를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당시의 모택동의 위신으로 볼 때 국가주석으로 복귀하는 것은 부라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당조직내에서의 권력奪回가 아니라 문혁이라는 방법으로 실권파 타도와 새로운 혁명이라는 두가지 목적을 한꺼번에 달성하고자 했다.한편 문혁을 앞두고 군권을 장악하여 모택동의 최측근으로 등장한 임표는 죽곧 정치권력 자체에 지대한 관심을 품었다. 1966년 5월 팽진 등을 해임한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연설한 임표는 고금의 정변 사례를 들어 반혁명 쿠데타가 발생할 가능성을 강조했다. 위기감이 감도는 그런 분위기에서 심지어 군대를 동원하여 북경으로 귀환하는 모택동을 영접하기도 했다. 임표는 얼마 후 모택동의 후계자로 공인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주석의 취임을 저지당하자 군사쿠데타를 획책, 실패한 나머지 자멸했다는 것인데 오늘에 와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임표의 언동에는 강한 권력지향이 일관해서 엿보이고 있다.또한 임표 실각 후 사인방도 그 구체적 노선이나 정책은 극히 애매한 채로 앞으로 도래할 모택동 이후의 권력 장악에만 마음을 두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모택동 사후의 사인방 체포극도 그 자체만을 놓고 보면 고참간부 등이 8341부대를 동원해서 결행한 군사쿠데타였다.1982년에 채택된 ‘역사결의’는 현 지도부의 견해로서 문혁을 ‘지도자(모택동)가 잘못해서 일으켰으며’, ‘반혁명집단(임표와 사인방)에 이용당한’, ‘내란’이었다고 규정하고 있다. 모택동의 잘못이 무엇이며 왜 잘못이냐는 것은 차치하고 문혁의격동이 바로 모택동의 죽음으로써 끝난 것은, 문혁이라는 10년의 ‘내란’이 위대한 건국자의 사망을 앞두고 연출되었던 권력투쟁의 드라마이기도 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중국 최초의 통일왕조인 秦朝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은 남기면서 스스로는 단명이었다. 이편전쟁이래 1백년의 내우외환을 극복하고 2,000년에 걸친 왕조사에 종지부를 찍는, 거대한 변혁을 달성한 중화인민공화국은 그 위대한 건국자의 사망에 수반된 정치위기를 피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그 위기를 간신히 극복하고 근대국가로 발걸음을 내딛는 데 성공했노라고 언젠가는 말할 수 있을 때가 올른지도 모른다.중국정치에서 문화대혁명이 갖는 정치적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권력투쟁의 단면을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팽덕회의 명예회복을 도모하고 있던 요문원이 우한을 비판하여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을 평한다.”를 발표함으로써, 문제를 명확하게 사상?문화에서부터 정치로 발전시켰다. 모택동은 유소기등 소위 ‘실권파’에 대한 비판과 타도를 노렸다. 이렇게 문화대혁명은 모택동이 시작한 권력만회투쟁 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0년간의 대혼란 시기에는 모택동만의 권력회복투쟁이 아닌 임표, 사인방과 그외 많은 인물들의 복잡하게 얽힌 권력투쟁이 되어버렸다. 자의적이든 어떤 이해관계가 얽혀서인지 모르는 ‘홍위병’의 폭거로 주변의 수많은 ‘실권파’를 규탄, 타도 하고 당의 기구와 문화재를 파괴하였다. 이렇게 하여 유소기나 등소평을 포함한 ‘실권파’ 타도라는 모택동의 목표는 달성하였다. 그러나 그 ‘홍위병’이란 존재는 다시 모택동에게 짐이 되었고 이를 잠재운 임표는 당헌에까지 이르는 모택동의 후계자가 되었다. 이것은 사인방과 임표의 권력대결의 시작이었다. 사인방에 대한 견제와 모택동에 대한 불신으로 권력에 대한 조급함이 임표 스스로를 자멸의 길로 인도하였고, 사인방 역시 강청을 중심으로 中共十大에서 장악한 권력과 지위를 이용하여 黨과 국가의 최고권력을 찬탈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제4차 전인대에서 사인방은 내각을 독점함과 동시에 주은래와 등소평의 타도를 노리고 批林批孔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제4차 전인대에서 주은래와 등소평을 핵심으로 하는 국무원팀이 구성되어 사인방의 음모는 철저히 분쇄되고 말았다. 1976년 1월 8일 주은래가 서거하고 천안문 사태에 이어 1976년 9월 6일에 모택동이 서거한후에도 사인방은 광분으로 비춰지는 권력투쟁을 전개하였고 이는 화국봉이 권력을 쥐고 사인방의 체포로 마무리 되었다.
    사회과학| 2005.12.01| 2페이지| 1,000원| 조회(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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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문사학] 실크로드
    실크로드 속의 페이퍼 로드* 목차Ⅰ. 들어가는 글 ---------------------- 2Ⅱ-1. 종이 이전의 종이 ---------------- 4고대 중국과 서방 세계-2. 종이의 발견 -------------------- 6ⅰ) 채륜 ⅱ) 발명한 것인가, 개량한 것인가?-3. 실크로드를 따라 ----------------- 8ⅰ) 중앙아시아로 ⅱ) 다마스쿠스 종이 ⅲ) 유럽으로Ⅲ. 마치는 글 ------------------------ 11Ⅳ. 참고문헌 ------------------------- 12Ⅰ. 들어가는 글『종이를 의미하는 영어 ‘paper'의 어원은 'papyrus'에서 유래하지만 이 두 가지는 서로 아무런 관계도 없다. 기원전 3,000년경에 이집트의 파피루스는 파피루스라는 식물의 내피로 만들었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쓸 수 있는 얇은 판이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종이와는 전혀 다른 별개의 것이다. 종이는 중국인이 늦어도 기원전 2세기에 발명한 것이다. 오늘날의 종이는 주로 목재 펄프로 만들어진다. 그러나 고대의 종이는 목재 펄프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이 문제를 한층 더 혼란스럽게 한다. 그렇다면 종이란 무엇일까?종이란 섬유를 물에 적셔서 조각조각을 내고, 그것을 평평한 틀위에 내려놓은 다음, 그 침전물이 엉겨붙은 얇은 층을 물에서 꺼내어 건조시킨 것이다. 섬유는 어떤 섬유라도 무방한데, 가장 많이 사용된 것은 식물성 섬유이며,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나무 섬유는 오늘날의 제지업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유럽 최초의 종이는 목재 펄프가 아니라 리넨(linen))을 조각내어 두드려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비록 20세기에 인쇄된 책이 바스라졌어도, 그것은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종이는 1957년 한 고고학자가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 근교의 분묘에서 발견한 것이다. 크기는 10㎠ 정도이며, 연대는 B.C140~B.C87년경이다. 이 종이 혹은 다른 세기에 만들어진 동일한 종이 조각은 두툼하며 하여금 큰 혼란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되도록 범위를 축소하여 시작하려 한다. ‘종이’라는 범위에 고대부터 사용되던 갑골문(胛骨文)), 죽간(竹簡)) 등은 제외하고 채륜의 종이 발명 이전의 종이와 유사한 형태의 것들을 목차 Ⅱ-1에서 간단히 소개하기로 한다. 목차 Ⅱ-2부터 본론이 시작된다고 할 수 있는데, 종이를 발명한 채륜의 설명과 발명하게 된 계기 및 발전 과정, 그리고 목차 Ⅱ-3에서 이 주제와 가장 부합되는 ‘종이의 교류 상’을 설명하고자 한다. 종이의 전파시기로는 발표된 학설 중에 근거가 가장 확실하고 정설로 여겨지고 있는 ‘탈라스 전투 중 전파설‘을 기준으로 하였다. 목차 Ⅲ에서 중국에서부터 종이가 전파된 이후의 영향에 대해서 알아보고, 조사를 하면서 어려웠던 점이나 느낀 점을 서술하며 이해를 돕기 위해 부록 편에서 미흡하나마 수집한 시각적인 자료를 첨부하였다. 참고문헌은 가장 주가 되었던 것만 표시하였고 웹 사이트 상에서 본 부정확한 자료들은 생략하기로 한다.* 중국어 표기는 편의상 한자 독음을 사용하였고, 처음 등장하는 단어에는 괄호 안에 한자를 입력하고 뒤에 나오는 것은 생략함. 외국 인명 및 단어는 각국의 언어 발음에 따라 표기하거나 인용한 책에 나온 그대로를 사용함.Ⅱ-1. 종이 이전의 종이고대 중국과 서방세계중국 최고(最古)의 종이는 파교지(?僑紙)로, 1957년 파교(?僑) 부분에서 기와 공장을 건설하던 도중에 한 기(基)의 고분이 발견 되었다. 공사는 잠시 중단되었고, 섬서성(陝西省) 박물관의 고고학 팀이 급히 달려와 조사를 벌인 결과 한대(漢代) 초기의 무덤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적어도 무제(武帝, B.C147~87재위)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무덤이었다. 이 한대 묘에서는 동경(銅鏡), 동검(銅劍), 반량전(半兩錢), 석호(石虎), 도기(陶器)등과 함께 몇 조각의 마포(麻布)가 출토되었는데, 마포 밑에 수 편의 종이가 있었다. 이것이 ‘파교지’이며, 선제(宣帝, 무제의 증손자)때 것으로 추정되는 로프노르의 종이보다 다소 오래된 보다 더 뛰어난 필사 재료를 개발하라고 가신들에게 명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양피지(羊皮紙)였다. 짐승의 가죽을 물로씻어서 하루 밤낮으로 담가둔 다음 다시 석회수에 2주동안 담가둔다. 그런 후 털과 표피를밀어내고 다시 석회수에 담갔다가 이것을 틀에 팽팽하게 잡아매 말리면 완성한다. 양피지는파피루스에 비해 훨씬 쓰기가 쉬울 뿐만 아니라 매우 강했다. 다만 값이 너무 비싸다는 게문제였다. 성경 한 권을 옮겨 적는데 양 500마리의 가죽이 필요했다고 한다. 그래서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문서는 그 표면을 깎아낸 다음 재사용하기도 했다. 양피지는 영어로 '파치먼트(parchment)'라고 하는데, 이는 페르가몬 왕조의 이름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오늘날흔히 ‘파치먼트 지’ 라고 부르는 종이는 양피지를 흉내낸 반투명의 두꺼운 황산지(黃酸紙)를말한다.인도에서는 옛날부터 ‘타라’라는 나무의 잎을 필사 재료로 사용했다. 종려나무 잎과 비슷한타라 잎은 폭 7.8cm에 길이는 약 60cm 정도 되는 장방형으로, 여기에 끝이 뾰족한 도구로글자를 새겼다. 그런 다음 그 위에 기름을 부어 글자 부분을 검게 만들었다. 그 각 소편들을 ‘파트라(pattra)’라고 불렀다. 이는 산스크리트어로 ‘잎’을 의미하는데, 한자로는 ‘패다라(貝多羅)’라고 적었다. 그리고 뜻과 소리를 합쳐 ‘패엽(貝葉)’이라고도 했다.삼장법사(三藏法師) 현장(玄?, 602~604)은 탈라스 전투가 일어나기 약 100년 전 사람이다. 그는 밟으면 무너져 내리는 모래땅(流沙)과 눈덮인 험한 준령을 넘어 천축(天竺, 인도)으로 갔는데, 이는 종이가 있는 있는 땅에서 종이가 없는 땅으로 간 것을 뜻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종이의 나라에서 패다라의 나라로 간 것이었다. 양피지나 패다라는 종이가 싼 값에 보급되자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종이가 “훨씬” 더 편리했기 때문이다. 현장이방문했던 무렵 천축에도 중국에서 수입해온 종이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값이 너무 비쌌기 때문에 불교 경문은 거의가 패다라에 쓰이 쌓인 결과이며, 그 중에는 물가에서 손이 터가면서 일을 했던 저 가난한 표모들의 손길도 더해졌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채륜은 거기에 개량을 더했지만, 그 후에도 이름 없는 후계자들에 의해 계속 개량되어 왔다. 채륜이 만든 ‘채후지’에 이어 ‘좌백지(左伯紙)’라는 종이가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좌백(左伯)은 산동(山東) 동래(東來) 사람으로 , 자는 자읍(子邑)이라고 하였다. 채륜의 제자로 스승에게 배운 제지기법을 더욱 발전시켰던 모양이다. 채후지나 좌백지는 모두 남아 있지 않아 잘 알 수 없지만 구분해서 부른 것으로 봐서 같은 종이가 아니었던 것 같다.좌백에 대해서는 채륜에게 사사(師事)받았다는 것 정도만 알려져 있다. 정사(正史)에는 그의 이름이 보이지 않고, 지방지(地方誌)에만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낳고 죽은 해는 알 수 없으나 채륜의 제자였다는 사실로 볼 때 2세기 후반까지는 생존했던 인물인 것 같다. 위탄은 위(魏)나라 태화(太和) 연간(227~232)에 명제(明帝)를 모셨는데, 이는 채륜이 종이를 바친 지 100년도 더 지난 시점이었다. 위탄이 “좌백의 종이”라고 한 것을 보면, 좌백이 개량한 종이가 꽤 오랫동안 사용되었던 것 같다. 좌백과 더불어 모홍(毛弘)이라는 인물도 종이를 개량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래도 이름만이라도 후세에 전해졌디는 사실이 그나마 행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좌백이나 모홍 이외에도 많은 무명의 개량자들이 우리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었을 것이다.cf) 낙양의 지가“낙양(落陽)의 지가(紙價)를 올렸다”는 말이 있다. 진(晉)나라 문인 좌사(左思, 205?~308)가 10년이나 걸려 완성한 가 걸작이라는 평판이 높아지자 사람들이 앞다투어 그것을 베꼈다. 인쇄술이 없던 시대였기에 사람들은 당연히 종이를 사다가 직접 베꼈던 것이다. 그 때문에 낙양의 종이 값이 높이 치솟았다고 한다. 지금 말로 하면 베스트셀러가 됐던 것이다.3세기 무렵, 종이는 대량으로 생산되나 티베트 왕이 자기 딸을 그곳의 왕비로 보낸 후부터는 반기를 들게 되었다. 소발률은 비록 규모가 작은 나라였지만, 중앙아시아 지역 20여 개국이 당으로 조공을 바치러 가는 길목에 있었다. 그런데 당으로 가야 할 조공품이 티베트로 흘러들어가는 일이 심심치 않게 있었다. 당으로서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고선지는 안서도호부가 있는 쿠차를 출발해 카슈가르)에서 파미르로 들어갔다. 여기서 그는 1,800미터나 되는 험준한 고산준령을 단숨에 타고 넘는 힘든 대원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오렐 스타인은 에서 고선지의 파미르 고원 등정과 다르콧 빙하지대를 통과한 것에 대해 한니발과 나폴레옹 그리고 스보로프에 이르는 알프스 등정을 능가하는 대단한 쾌거라고 높이 평가했다. 고선지는 이 전공으로 안서절도사(安西節度使)로 승진했고, 그로부터 3년 후인 570년에는 석국을 정복했다. 석국은 현재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에 있던 나라였다. 출병 이유는 석국이 속국의 예를 다하지 않았다는 것이었지만 이것은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 석국 정벌은 조정의 명령을 실행한 것이 아니라 고선지가 신청해서 허락을 받은 일이라고 한다. 그는 석국의 왕에게 잘못을 사죄하면 용서하겠다고 속이고 왕이 항복한 후에는 장안으로 압송해 와서는 죽여버렸다. 고선지는 석국의 보물인 ‘대슬슬(大瑟瑟)’을 수십 석이나 빼앗았다고 한다. ‘슬슬’이란 ‘벽주(碧珠)’라는 보석인데 에메랄드의 일종이다. 그 밖에도 황금과 명마를 비롯한 서역 지방의 여러 특산물 등 엄청나게 많은 재물을 빼앗았다. 석국의 왕자가 격노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는 이슬람 제국에게 당을 응징해 달라고 요청했다. 우마이야 왕조에서 아바스 왕조로 정권이 교체된 지 얼마 안 된 이슬람 제국으로서는 새로운 왕조의 위엄을 과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런 배경하에서 벌어진 전쟁이 바로 ‘탈라스 전투’이다. 탈라스에서는 양군이 5일 동안 대치했다고 한다. 하지만 카를루크족의 배반으로 고선지가 이끄는 당군은 협공을 받아 대패하고 말았다.
    인문/어학| 2005.09.19| 12페이지| 1,000원| 조회(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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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인문] 중국의 장례문화 평가A+최고예요
    중국의 유교 사상과 죽음공자의 제자인 계로가 공자에게 “죽음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니 공자가 대답하기를 “태어나는 것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리오” 라고 하였다. 이처럼 중국의 유교는 내세관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죽음관도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공자도 경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유가는 죽음 자체의 의미나 죽어서 시작하는 또 다른 세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삶과 죽음을 대자연의 법칙에 의한 신귀과정으로 봄으로써 형이상학적 문제로 돌렸다. 그러므로 그들은 삶과 죽음 때문에 앞뒤로 연장될 수 있는 상념을 처음부터 단념하고 거의 일회적인 인생 자체에 몰두하게 되었다. 공자가 한 것처럼 귀신과 죽음의 질문을 뿌리치면서 사람과 삶에의 정열적 관심과 사랑을 나타낸 것이 유가였다. 죽음은 인생을 시작해서 엮어가다가 마치는 엄숙한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생사에 대한 생물학적 또는 종교적 관심에서 벗어나서 자기 책임 아래 인생을 엮어간다는 자율의 도덕론적 관심으로 정착된 것이다.중국의 도교 사상과 죽음도교는 중국 고대의 민간 신앙을 바탕으로 삼는 신선설을 중심으로 불로장생을 주목적으로 하는 현세 이익적인 자연종교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도교는 죽음을 문제시하지 않고 죽음을 단지 자연 변화의 일부로서 동에 의하여 지배되는 것으로 이해했다.장자의 도교적 입장의 죽음관은 특이하다. 그는 죽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삶은 죽음의 동반자요, 죽음은 삶의 시작이니, 어느 것이 근본임을 누가 알랴? 삶이란 기운의 모임이고 기운이 모이면 태어나고 기운이 흩어지면 죽는 것인데 디간이 사와 생이 같은 짝을 만나면 무엇을 조심하랴. 내 생애를 잘 지냈으면 죽음 또한 의연하게 맞이해야 한다.”중국의 장례법일반적으로 중국의 전통적인 장례는 중국은 민족(56개 민족)에 따라 장례식의 형태도 다양하나 일반적으로 토장이 성행되었는데 1950년대 중반 이후 국가의 장례로 대도시부터 토장보다는 화장을 권장하여 간소화하고 있다. 대도시의 경우 90% 이상이 화장을 하고 있으나 농촌지역에서는 화장율이 상당히 낮다고 한다. 최근 농촌, 도시의 돈이 많은 계층에서 옛 장례풍속이 되살아나고 있다고 한다. 전통적으로 중국인들은 사람들의 영혼은 죽지 않는다는 관념이 있어서 장례식을 특히 중시했다. 민간에서는 천수를 다하고 대청에서 죽는다는 수종정침을 중시하여 병세가 위급하면 속히 목욕시키고 옷을 갈아입힌 다음 대청으로 옮겨 식구들이 보는 가운데 운명하게 한다. 장례절차로는 사람이 죽으면 그의 직장이나 친족이 죽은이의 동료와 친척, 친구들에게 부고를 보내고 유해를 화장터로 옮겨 화장시킨 다음 아주 간단하게 유해 고별의식을 행하는 것으로 우리나라와 비슷하다. 아이들 세배 돈,돌,결혼등의 경사에 사용하는 봉투도 모두가 붉은 색을 사용한다. 그러나 장례 조의금을 낼 때에만 흰 봉투를 쓴다. 그런 일이야 없겠지만 중국인의 결혼식에 아래위로 흰 옷에 흰 구두까지 신고 간다면 상대는 아마 크게 오해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토장, 화장이외에도 수장, 천장, 현장, 조장, 이장 등등 많이 있다. 전장은 일명 조장, 야장이라고도 부르는데, 물론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사람이 죽으면 사체를 깊은 산속으로 옮겨 맹수들의 먹이로 삼는 것이 공통적인 풍속이라 하겠다. 중국 대륙의 서남 지역에 사는 귀꾸족과 일부 먼빠족 그리고 서북지역에 사는 몽골족은 천장을 고집하고 있는 민족이다. 먼빠족은 사람이 죽으면 아무런 장례 의식 절차도 없이 사체를 산속으로 메고 가서 사페를 어른들 주먹만한 크기로 하나하나 토막내서 버린다. 오직 버리지 않는 것은 남자일 경우 남근을, 여자일 경우에는 유두를 잘라 항아리에 담아 집으로 가지고 와서 집 부근에 묻는다. 이러한 이유에 대한 확실한 근거는 없지만 아마도 이것 또한 남근 숭배 사상에서 기인되는 것으로 보인다. 서북 지역 내몽골 자치구의 몽골족은 사람이 죽으면 사체를 양젖으로 씻은 다음 고인의 목에 흰 수건으로 두 겹씩 묶고 다시 목에다 질긴 끈을 달아 잘 달리는 말의 안장 뒷부분에 묶는다. 그런 다음 고인의 친구 가운데 말 타는 솜씨가 비교적 뛰어난 사람이 말에 올라타고 고인의 가족들이 나뭇가지로 말의 엉덩이를 때리면 말은 기수와 함께 사체를 달고 질주 한다. 이렇게 한참 달려 어느 지점에선가 사체가 떨어지면 장례 의식은 끝난다. 또 어떤 부락에서는 알몸의 사체를 수레에 매달고 두 마리의 말이 경마 하듯 질주하여 사체가 떨어진 곳에 버리면 장례의식이 끝나기도 한다. 사체는 늑대와 독수리, 그리고 여우의 먹이가 되게 한다. 사체를 내다 버린 지 15일이 지나면 맹수들이 먹어치웠는지를 확인하는데 고인의 가족들이 말을 타고 가서 이를 직접 확인한다. 사체를 맹수들이 남김없이 먹어치웠으면 집안의 길조로 여기고, 그러지 않았을 경우는 이들의 이동식 가옥인 ‘겔’을 뜯어 먼 곳으로 옮겨간다. 위꾸족은 사람이 죽으면 바로 들판으로 메로 가서 사체를 아주 잘게 토막 내 야생 동물들의 먹이로 던져 주는 야장을 하고 있다. 이들 민족은 들판에 사체를 옮겨다 놓고 크고 작은 칼 두 자루와 조그마한 나무판자를 들고 가서 생선 토막 내듯 사체를 잘게 토막 내 야생 조류의 먹이로 던져 준다. 청해성과 감숙성 접경 지역의 산악 지대에 사는 위꾸족은 사람이 죽으면 사체의 장기를 끄집어내 돼지의 먹이로 주고 남은 사체는 몇 개로 나누어 숲 속에 내다 버린다. 사람의 두개골을 어린아이들이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기도 하고, 어떤 집에서는 사람의 정강이뼈로 만든 등긁이도 볼 수 있다. 이 민족은 말을 타고 짐승을 잡는 경마 대회를 자주 하는데 말에 붙어 있는 작은 장신구들은 모두 인골로 만든 것이고 최근에는 말을 타고 두 시간 정도의 거리에 칠기 공장이 생겨 칠기 만드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인골을 수집하여 공장에 갖다 주면 수입이 톡톡하다고 자랑들이다. 하루 종일 인골을 주워 모으면 한 자루에 대개 우리 돈으로 150원쯤 되는데 사냥하는 시간 외에는 모두가 자루를 베로 나가 인골을 수집한다고 한다. 풍수지리 사상의 원조인 중국대륙은 모택동이 공산주의 혁명을 완수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거대한 묘지”라고 불릴 정도로 어디를 가나 묘지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1933년 중국 남경 금릉대가 전국 22개성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당시 중국 묘지의 총면적이 10만 3천㎢ 로 남한 면적보다 넓었다. 세계 인구의 20%가 넘는 12억의 인민들이 세계 경작지의 7%밖에 안 되는 땅에서 먹고 살아야만 하는 현실에 비춰볼 대 묘지 문제는 무엇보다 심각한 것이었다. 연간 평균 사망자수가 6백만 명에 달해 매년 엄청난 규모의 땅이 묘지 터로 면하고 있었다. 결국 모택동이 이끄는 혁명정부가 1956년 화장을 법으로 정하고 시신을 관에 넣어 매장하는 토장제도를 금지시키는 “장묘문화혁명”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40년이 지난 현재 중국은 눈에 뛸 만큼 달라졌다. 이제는 전국 어디에서나 봉분을 한 무덤은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현재 중국에서 토장을 고집하는 소수민족은 회족뿐이다. 실제로 심양시 동부 외관 따뚱취에는 회족들만 이용하는 성경침원이라는 이름의 “영구성회족공묘”가 약 3㎢ 정도 조성돼 있다. 물론 정부에서 인정하는 곳이다. 이곳에는 전통적 회족 풍습에 따른 묘지가 봉분 형식으로 조성돼 있다. 성경침원의 한 관리자는 “최근 회족 사회에서조차 반드시 시신을 관에 넣어 토장하는 것이 전통은 아니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며 “멀지 않아 최족공묘도 상당히 축소될 것으로 보고 자리를 옮길 계획으로 있다” 고 밝혔다. 아직까지 당국의 감시를 피해 경작지 한구석에 몰래 봉분을 만드는 사람들이 가끔 있기도 하지만 중국의 장례 문화는 이제 토장에서 화장으로 바뀌었다. 정부의 공식 발표는 화장률이 100%다. 우리나라보다 1백배나 큰 국토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국토의 효율적 이용”을 위해 40년 전부터 “장묘문화혁명”을 시작해 오늘에 그 결실을 맺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우리와 같은 문화권으로 장묘제도도 비슷했던 중국이 정부의 강력한 정책과 지도층의 솔선수범에 힘입어 심각했던 묘지문제를 해결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인문/어학| 2005.09.19| 3페이지| 1,000원| 조회(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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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미관계] 중국과미국관계
    중 ? 미관계 발표보고서9?11테러 이후 중?미관계의 변화 및 향후전망-목 차-Ⅰ. 최근 중 ? 미관계의 개요Ⅱ. 중 ? 미간 4대 현안Ⅲ. 향후 중 ? 미관계 전망2004. 4. 2들어가는 말중국 외교정책론 수업을 듣는 첫날 우리는 발표주제를 놓고 치열한(?) 거수의 순서로 각자 주제를 맡게 되었다. 그리고 발표자는 중 ? 미관계를 하게 되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수업시간 동안 많은 자료들을 읽고 미국이란 존재에 대해서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시각, 일련의 환상들이 깨짐과 동시에 그 동안에 국제사회를 얼마나 순진하게 인도주의적 사고로 보았는가에 대한 반성과 철저한 자본주의에 입각한 국익에 기인한, 너무나도 냉혹한 국제사회의 참 모습을 보는 시각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우리는 먼저 발표스케줄의 순서를 들여다본 후 왜 중미관계의 순서가 가장 처음인가의, 교수님의 의도에 대해서 작은 의구심을 가져야 한다. 발표준비를 위해서 읽었던 자료들- 비단 중미관계뿐만이 아닌 국제정세에 관한 글을 많이 접하게 된 것에서 그 답을 찾는다. 우리는 과연 미국을 어떻게 생각하며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아마 앞으로의 발표들에서도 중국과 그 어떤 나라와의 관계를 알아본다 하더라도 미국이란 거대한 나라의 존재를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의 외교관계를 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미국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운이 좋게도 우리는 정치론에 이어 외교공부를 하는 시점에서 수많은 ‘자료’와 ‘예’를 제공하는 일련의 사건들이 터져주고 있다. 그런 연유로 처음 개강 첫 수업부터 지금까지 “중국”외교 정책론 시간에 오히려 미국의 이야기가 더 많이 나오는 것은 이런 이유일 것이다. 단기간에 양국간의 외교문제와 현안을 이해한다는 것은 정말 머리를 쥐어짜는 느낌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와중에서 미국의 철저한 자본주의적 외교와 이해득실을 따지는 국제문제의 개입에서 약간은 ‘정’떨어지는 초강대국 미국의 패권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모든 외교정책은 국가의 지도자가 결정하고 지도자의 성향에 따라 외교적 목표도 결정된다는, 수업시간에 들은 사실을 입증하듯 클린턴 정부와 부시정부의 외교정책에 대한 큰 차이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IT업계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클린턴 정부의 안정적 외교(지금 생각해 보면 미국 대선에서 엘 고어가 당선되는 것이 현재 국제정세에 있어서 우리에게는 좀 더 안정적인 방향으로 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북핵문제에 있어서는 더없이 그렇다.)와 석유재벌 출신의 군산복합체의 배를 채우기 위한 강경적 외교인 것이다.중미관계에 있어서도 對중국정책에 대한 이 둘의 차이는 판이하게 드러난다. 클린턴은 중국을 전략적 동반자로 여기고 견제를 하면서도 경제적인 협력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동반자적 입장에 서있었다. 그리고 부시의 정권창출 후에 그는 클린턴의 對중국정책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표명하면서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부정하고 전략적 경쟁관계로 전환 하게 되었다. 물론 클린턴 정권에서 중국과의 마찰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경제적 협력을 위해서 갈등국면으로 가기보다는 화해-협력국면으로 빠르게 전환 하였던 것이다. 현재 중국은 부시의 MD체제에 강경한 입장을 굽히지 않으며 위협적인 미국의 외교에 반발하고 있다. 부시의 MD계획은 한국, 일본, 러시아, 그리고 대만까지 포함하는 것이기에 중국의 절대 “不容”입장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우리는 중미관계를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봐야 하며 어떤 방법으로 다가가야 하는가? 그것은 현재 중국과 미국이 처한 외교적 현안과 현재 부시 행정부의 성향을 이해하는 것이 중미관계를 알 수 있는 가장 정확한 ‘KEY' 인 것은 분명하다. 발표자는 현재 부시 행정부의 중국에 대한 외교정책과 전인대를 통해 새로이 출범한, 여전히 강택민의 간섭아래 있는 후진타오(그는 향후 5년간 자신의 권력입지 강화를 위한 노력과 중국 내에 처한 경제성장을 위한 수많은 당면과제와 미국에 대한 외교를 어떻게 펼쳐 나갈지 정말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와 새로이 취임한 “미국通” 리자오싱의 對 미국 외교정책을 배우는 학생의 입장에서 조심스럽게 전망 해보고자 한다. 시점을 9?11 테러 이후로 정한 것은 두 거대국가의 외교적 역사가 짧다 할 수 없고, 또한 그 기간동안에 일어났던 수많은 사건을 모두 다 들여다보기에는 능력의 부족함과 주관적인 시각을 좀 더 반영하기에는 상대적으로 자료가 적은 가장 최근의 것을 선택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발표자는 새무얼 헌팅턴의 예견처럼 문명의 충돌적 시각이 아닌 좀 더 현실적인 이해관계에 중점을 두고자 한다. 아울러 노엄 촘스키처럼 유일한 초강대국의 패권에 날카로운 칼날을 들이댈 만큼의 지식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변명이랄 수도 있지만 발표준비 기간이 길지 못했던 점과 아직까지는 부족한 지식 탓에 정확하지 못한 분석과 전망이 될 수 있고, 또한 이것은 전적으로 발표자의 생각임을 명시하며 조금의 뒷길을 열어두고자 한다.Ⅰ. 최근 중 ? 미관계의 개요■ 미국의 정권 교체 후 부시의 對중국 정책 변화- 『전략적 동반자관계(strategic partnership)』에서 『전략적 경쟁관계(strategic partnership)』 로 전환? 부시는 대선기간 중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클린턴 정부의 對중정책에 회의적 입장을 표명하며 동반자 관계의 전제로서 양국간 기본적인 정책기조의 유사성이 필요한데 중미 간에는 인권문제, 대만문제 등의 이견이 많아 동반자 관계가 부적절하다고 판단? 미국의 미사일 방어계획(MD), 천수이볜 대만 총통과 달라이 라마의 방미 허용 등으로 양국간 갈등국면 확대■ 미 정찰기 충돌사건으로 양국관계 급속 냉각- 2001년 4월에 발생한 양국간 항공기 충돌사건은 중미관계의 불안정성을 극명하게 표출함? 이 사건은 중국이 부시행정부의 ‘전략적 경쟁관계’의 심각성을 파악하는 계기로 미국역시 중국에 대한 외교정책을 제고하는 계기가 됨■ 미국 테러 사건으로 인한 미국의 국제정치 변화와 외교정책 급선회- 2001년 9월 발생한 세계무역센터 테러사건 후 부시의 ‘악의 축’ 지명과 ‘테러와의 전쟁’ 선포? 이를 계기로 MD의 적극추진과 이란, 이라크, 리비아, 북한 등 대량 살상무기개발 의혹이 있는 소위 불량국가들에 대한 압박을 통한 중국견제■ 2003년 3월 10기 전국대표대회 새로운 지도체제 출범- 후진타오 주석과 원자바오 총리의 새로운 지도체제 출범? 리자오싱의 외교부장 임명과 우의, 류화추, 양제츠 등의 ‘미국통’들의 부상은 향후 중국이 대미정책을 최우선시 할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음■2003년 3월의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폐기 및 무장해제를 이유로 UN을 무시한 미국의 일방주의에 대한 중국의 입장은 다소 미온적으로 반전과 전쟁의 조기 종결을 촉구하는 선에서 입장표명? 지리적으로 중국에 더 중요한 북한에 대해 미국이 공격하지 않는 조건으로 이라크 침공을 묵인하겠다 라는 일종의 뒷거래 후 전쟁이 발발하자 세계적인 반전여론을 의식, 반전입장과 전쟁의 조기 종결을 촉구하는 목소리를 조용히 내는 것은 도광양회(韜光養晦)의 속셈으로 간주됨Ⅱ. 중 ? 미간 4대 현안대만문제MD문제이라크 침공문제북핵문제■ 대만문제- 대만에 대한 양국의 입장은 비단 현재뿐만이 아닌 오래전부터 상존해온 문제? 대만문제에 대한 중국의 입장은 ‘하나의 중국원칙’을 강력히 주장하면서 미국이 중국과 대만 관계에 끼어드는 것은 ‘내정간섭’으로 규정하며 철저하게 반대함? 이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하나의 중국원칙’을 인정하면서도 중국 견제와 군사적 이득이 충분한 대만을 포기할 수 없는 입장이며 MD계획과도 연관됨■ MD문제- 미국의 MD계획은 세계평화에 가장 위협이 되는 북한과 중동지역의 미사일 공격을 조기에 격추하기 위해 미국이 주둔하는 지역에 배치한다는 계획? 중국은 미국의 MD계획에 대해 이는 북한이 아닌 중국에 대한 견제로 인식하며 철저하게 반대하고 있는데 MD계획 지역에 대만까지 포함되어 있어 ‘절대不容’입장? 미국은 MD계획을 실현함으로써 군사적으로 중국을 견제하며 무장해제 시키려는 의도로 아시아에 대한 패권을 장악하고 나아가 부시의 지지기반인 ‘군산복합체’의 이익을 챙기려는 속셈■ 이라크 문제- 미국의 일방주의에 대해 중국은 조용히 지켜보며 간간히 목소리를 내는 입장? 미국은 에너지원 확보를 위해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를 명분으로 전쟁을 감행하여 세계적인 반전여론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지속시킴? 중국은 올해 2월 24일 방문한 파월 미 국무장관과의 일련의 회담에서 미국의 이라크 전쟁을 묵인하고 대신 북핵 문제에 대해 미국이 선제공격 등의 강경대응을 하지 않는 조건의 ‘바터비밀합의’가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으나 언론을 통해 이라크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변함없이 노력하고 있으며 여전히 전쟁에 강력히 반대한다는 입장을 표명함
    인문/어학| 2005.09.19| 8페이지| 1,000원| 조회(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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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학] 중국의 파벌정치란 무엇인가
    중국의 파벌 정치란 무엇인가?1) 派閥의 사전적 정의어떤 사회적 조건을 공유하고 있는 구성원들이 세력을 확대 ?유지시킬 목적으로 의제적 동류의식(擬制的同類意識)을 가지고, 같은 목표를 가진 다른 사람들에게 불이익이 되는 부조리한 배척활동을 하는 집합체.2) 파벌 연구의 범위사전을 보면 파벌의 정의는 이렇듯 약간의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우리역시 파벌이라 하면 정치적으로 좋지않은 이상적인 정치의 걸림돌적인 뉘앙스로 생각하고 있다.아마도 파벌이란 것은 정말로 이상적인 정치의 걸림돌이라 할수 있는 것 같다.파벌은 정치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도 역시 지역적인 파벌이 분명히 존재한다. 대선때마다 후보들은 지역감정 타파를 외치면서도 역시 지역적인 혜택을 노리고 유권자들에게 호소하며 지역감정을 조장하기 일쑤이다.그렇다면 중국의 파벌정치란 무엇인가. 파벌은 중국정치연구에서 절대 빠질수 없는 연구과제임에 분명하다. 예전부터 수많은 중국 정치연구가들이 수없이 연구하고 정의내림이 그 증거이다.우선 파벌을 알기위해서는 중국의 정치엘리트에 대한 연구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파벌을 조장하는 그 주역들이 중국의 정치엘리트들 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여러 가지의 형태로 비공식적인 집단을 형성하는데 이를테면 과거의 공통된 경험을 통해 유사한 성향을 공유한다거나 현재의 특정 정책 혹은 특정 노선에 대한 입장차의 형태를 예로 들수 있겠다.중국의 비공식적 측면을 가장 포괄적으로 표현하는 용어는 ‘비공식 정치’ 이다. 이는 공식적인 黨?政 조직 및 구조, 제도적 권위 및 비개인성에 기초한 ‘공식 정치’에 대비되는 개념으로서 일반적으로 개인적 영향력 및 위상, ‘후견인-피후견인 관게’, 개인적 혹은 ‘특수한’ 이익에 기초한 정치적 측면을 지칭한다. 중국의 비공식 정치의 측면을 대표하는 가장 기본적인 문화적, 사회적 개념은 ‘關係’로서 개략적으로 개인간의 호혜적 유대 혹은 연계라고 할수 있는데 엘리트 개인간의 關係는 ‘정치파벌’로 변모 할 수 있고, 이국 파벌연구의 대표적인 학자들간에도 파벌의 개념에 대한 상당한 견해차가 존재한다. 중국파벌 이론화의 선구적 연구자인 네이선(Andrew Nathan) 교수는 파벌을 지도자와 추종자(혹은 후견인과 피후견인)간 ‘1인 대 1인’의 계서적 구조를 갖춘 일종의 ‘조직화된 여론집단’으로, ‘권력관계’나 ‘교환관계’와는 다른 특수한 개인적 관계로 보았다. 또한 네이선은 중국파벌의 주요 특징을 규모, 추종자의 공약 및 안정성이 제한적이고, ‘1 대 1’관계의 층이 크게 확산되지 않는 속성을 갖고 있으며 혈연관계, 직업적 또는 전문적 관계, 혹은 ‘의형제 집단’과는 구분되는 2인간의‘지도자-추종자 관계’로 파악 하였다.중국 정치엘리트 연구의 주요 학자인 쩌우(Tang Tsou) 교수는 네이선의 파벌모델에 대한 대표적인 비판논문에서 네이선이 지칭하는 ‘파벌’ 개념이 사실상 특정 조직의 이념을 일부라도 공유하고 있고 이 조직 역시 보다 큰 체제의 일부이기 때문에 ‘파벌’의 목표가 무엇이든지 간에 파벌이 속해있는 조직과 체제의 공식적 목표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파벌의 행위나 행동도 조직과 체제의 ‘공식적, 규범적 규칙’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쩌우 교수는 이같은 이유로 ‘파벌’보다는 ‘비공식 집단’ 이 정치엘리트의 행위를 보다 잘 설명하는 개념이라고 보고, 아울러 네이선 교수와는 대조적으로 공식 관료조직이나 공식적 정치제도가 ‘파벌’과 ‘비공식 집단’에 미치는 제약이 시기별로 크게 변화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 제약은 ‘비공식 집단’과 ‘파벌’의 규모 및 영향력과 반비례 관계에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한 파벌이 다른 파벌에 비해 절대적 우위의 권력을 보유하지 못한다는 가설을 제시한 네이선 교수와는 정반대로 쩌우교수는 “중국공산당 정치의 기본적인 가정의 한 집단이나 집단의 연합이 주요 경쟁집단이나 연합을 결정적으로 패배시킬 수 있고, 또한 (실제로) 패배시키고, (궁극적으로) 제거한다는 것이다.”라고 역설하였다.중국정치 연구에 있어 파벌분석의 중요성은 근접한 접근법이라고 주장하였다. 파이교수의 연구는 중국정치를 파벌모델로 분석하고 이를 문화적 해석, 사례제시, 그리고 제한적인 인터뷰를 통해 중국정치의 ‘파벌’ 현상과 비공식 측면을 가장 종합적으로 접근한 연구로 평가되고 있다. 자신의 저서에서 파이교수는 파벌이 경력보장 및 권력보호라는 목적을 추구하기 때문에 생성되는 것으로 보았는데, 특히 중국의 파벌은 정책, 관료적 이익, 세대, 출신지역 등의 요인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또한, 파이교수는 중국정치의 일반적 원칙과 유형, 즉 파벌정치는 기본적으로 중국의 정치문화에 의해 형성되기 때문데 “중국정치에 있어 파벌주의가 지속되는 것은 거의 불가피하다”거 역설하였다.3) 파벌 분석의 종류 및 방법파벌분석의 종류 및 방법은 엘리트 개인, 혹은 엘리트 집단에 대한 분석으로 나눌 수 있으며 이외에도 고려해야 할 변수의 수와 복잡성 여부에 의해 분류될 수 있다. 가장 단순한 방법은 특정 엘리트 개인에 대한 집중분석으로서 한 엘리트의 출생지 및 출생년도를 포함한 성장과정, 학력, 경력, 친분관계, 성향 등 개인의 신상자료를 조사하여 그 엘리트의 정책 선호도, 업무능력 및 정치적 위상 심지어는 개인의 실제적, 잠재적 영향력을 추론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엘리트 개인에 대한 집중적 연구로서 엘리트 집단의 성향 및 특정 정책, 조직과의 관계 혹은 정치체제의 변화와 같은, 보다 거시적인 문제와 연계될 경우 상당한 오류의 폭을 갖고 있다는 단점이 있다. 그러므로 이같은 엘리트 개인에 대한 미시적 연구는 중국의 정치체제나 특정 분야에서 영향력이 잘 알려진 주요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한 경우 유용하며 모택동 유소기 주은래 등소평에 대한 연구가 이에 속한다.엘리트 개인이 아니라 유사한 성향 혹은 목표를 가진 엘리트 집단, 즉 ‘파벌’에 대한 조사는 개인에 대한 집중적 분석보다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띄게 된다. 이에는 크게 이분적 분류와 3개 이상의 분류가 있다. 이분적 분류로는 전통적인 紅-惠문제, 문화혁명기 江靑’등이 있다. 이분적 분류는 중국의 파벌정치를 가장 단순화한 방법이나 사실상 자료 및 정보의 한계를 노정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이분법 분류는 정치현실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흑백논리로서 행위자의 이중적 목표나 두 집단에의 동시적 소속 가능성이 배제되어 있다. 보다 심각한 문제는 각 파벌 소속인원의 확인 및 변화추적이 용이하지 않다는 점이며, 사실 한 개인도 매우 짧은 기간에 다양한 파벌에 소속되는 경우도 있다.파벌연구에는 이분적 분류보다 3개 이상의 파벌분류가 더욱 보편화되어 있다. 다양한 파벌연구의 분류기준은 기본적으로 현재의 특정 정책 혹은 노선에 대한 파벌간의 성향과 입장차이를 중시하는 연구와 혹은 파벌 소속원간 과거 경험의 공유에 초점을 둔 연구로 대별할 수 있는데, 후자에는 동향, 동창, 동직 이외에도 혁명, 야전군 및 黨?政 업무등 공통된 경험을 통해 유사한 성향을 공유하고 있는 경우가 해당된다.현재의 특정 정책 혹은 특정 노선에 대한 입장차에 의한 파벌분류는 상당히 많은 학자들이 채택하는 방법이다. 문화혁명기 중국의 엘리트 파벌을 딩(Ting Wang)교수는 정치적 성향차 및 개인적 관계를 기준으로 과격파, 온건파, 외에 軍을 추가 하였고, 리버설(Kenneth Lieberthal)교수는 이슈 및 파벌의 소속을 기준으로 ‘북경집단’, ‘상해집단’ 및 ‘軍집단’으로, 폰태나(Dorothy G. Fontana)교수는 1970년대 말 화국봉이 모택동 사후 권력승계에 실패한 원인분석으로부터 정치적 성향을 기준으로 ‘정치 좌파’, ‘중간 좌파’, ‘정치 우파’로, 구리고 챙(Paris H. Chang)교수는 노선상의 차이 및 권력기반을 기준으로 ‘범시파’, ‘석유파’, ‘원로파’ 및 ‘독자파’로 구분하였다. 이외에도 天安門사태 이후부터 1990년대 초까지 鄧力群을 중심으로 한 ‘보수?관료집단’ 및 등소평의 ‘개혁집단’ 이 3개 이상 파벌분류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한편 엘리트간 과거 경험의 공유는 파벌형성의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는데 1949년 이전 혁명는 보다 세부적인 경험에 따른 분류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일부 특정 경험은 매우 오랜 기간 파벌형성의 중요한 요인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윗슨(William Whitson)교수는 출신 야전군(즉, 경력) 및 세대차이를 기준으로 당과 군의 엘리트를 분류하였다. 그는 야전군 소속시 형성된 혁명원로간의 비공식적 관계가 훗날 黨 및 政 요직의 인사, 국내외 정책 및 파벌의 규모와 영향력에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고 주장하였느네, 윗슨의 야전군 모델은 1990년대 초까지 중국 黨-軍관계 연구의 주요 분석요인으로 작용하였다.중국의 군은 淸末 이후부터 현재까지 전쟁수행 기능 이외에도 국가유지 및 건설, 당과 국가의 안전, 사회화, 정치적 기능 등 개도국의 근대화 혹은 공산화 과정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매우 다양한 역할을 수행해오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 모택동, 등소평과 같은 최고지도자들과 기타 혁명원로원들은 당과 군의 원로이자 1949년 건국의 공로자로서 공식직함의 유무에 관계없이 국가지도자로서 당, 정, 군 업무에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권력 최상부의 제도적 업무분장 부재, 혁명원로의 당, 정, 군 업무경력 및 당 간부의 정?군 보직제는 당 원로의 군 업무, 그리고 역으로 군 원로의 정치업무 관여를 낳았고, 이같은 혁명원로들의 ‘군인-정치인’역할은 특히 문화혁명기와 모택동 사후 권력투쟁시에 광범위한 군의 정치적‘연루’ 혹은 ‘관여’를 초래하였다.더욱이 모택동과 등소평과 같은 최고지도자 겸 군 원로의 사망은 중국 당-군관계의 주요 변화요인이로 작용하는데, 이는 중국의 당-군관계는 당과 군의 제도적 관계라기보다는 당 최고지도자 개인의 정치적 위상, 그리고 군 내부에서의 위상 및 영향력이 중국의 당-군관계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기 때문이다. 이같은 중국 당-군관계의 특성은 중국체제의 미래와도 깊은 관련이 있는데 예를 들어 강택민의 1989년 당 총서기겸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취임 이후 권력승계 문제, 당과 군지도자들의 세대교체 및 분리현상있다.
    인문/어학| 2005.09.19| 6페이지| 1,000원| 조회(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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