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윤리학, 규범윤리학, 분석윤리학1) 記述 윤리학(descriptive ethics) : 이는 여러 민족이나 종족들이 지닌 풍습이나 관습들 중 특히 도덕에 관한 것을 기술하고 이를 비교, 분석하는 작업을 하며 이를 바탕으로 도덕 관념의 발생 및 변화 과정, 도덕 법칙의 형성과 상호 관련성 등을 다루는 분야로 엄밀하게 말하자면 철학의 분야라기보다는 문화인류학의 분야에 속한다. 하지만 기술 윤리학을 바탕으로 형성된 대표적인 윤리 이론이 있는데 바로 이것이 문화적 상대주의(cultural relativism)로서 모든 도덕 규범은 각 문화권에 따라 상대적이므로 어느 특정한 한 지역이나 종족의 문화나 도덕 관념을 기준으로 다른 문화를 일방적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는 것이 그 주된 주장이다.(2) 규범 윤리학(normative ethics) : 이는 고대 그리스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논의되고 있는 도덕 철학 분야를 지칭하는 것으로서 흔히 고전 윤리학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여러 고전 철학자(윤리학자)들은 자신들이 현실적으로 도덕에 관심을 지니는 까닭이 도덕을 과학적으로 기술하고 여러 도덕 현상들을 단순히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이상적인 도덕적 체계를 구축하고 이를 정당화하여 궁극적으로 보다 나은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하였다. 이런 생각에 근거하여 이들은 나름대로 도덕의 본질을 파악하여 이로부터 여러 도덕 원리들을 이끌어 내고 그런 원리들 사이에 내적 모순이 없는 체계를 마련한 후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들이 이에 따를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표적인 것들로는 공리주의로 대변되는 목적론적 윤리설, 칸트로 대변되는 의무론적 윤리설, 아리스토텔레스를 중심으로 한 덕의 윤리 등이 있다. 최고선이 무엇인가? 객관적이고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이며 이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어떤 행위를 하여야 하는가? 시공을 초월하여 보편적으로 우리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도덕 법칙은 무엇이며 그 근거는 무엇인가? 그리고 이를 실천하기 위하여 필요한 개인적, 사회적 요건은 바로 자신들의 도덕이라고 생각한다. 자기민족 중심주의는 쉽사리 불관용과 독단주의로 나아가게 되며, 또한 독단주의는 행동에 있어서의 독단주의라 할 수 있는 편협으로 넘어간다.그러나 기술적 상대주의자들은 (a) 구체적인 도덕적 표준과 규칙 (b) 궁극적인 도덕원리, 이 둘 사이의 차이점을 간과한다. 이들이 제시하는 사실은 오직 (a)만이 상대적이거나 문화제한적culture-bound이라는 것을 입증할 뿐이다. (a)가 상대적이라 하더라도, (a)의 다양성과 완전히 일치하는 (b)는 존재할 수 있다. 이 때 궁극적인 도덕원리란 모든 개인과 행동을 판단하는 기준으로서 어떤 표준이나 규칙이 사용되려면 반드시 성립되어야 할 조건에 관한 보편적 명제나 진술이다. 이러한 원리의 형식은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다: “표준 S 또는 규칙 R은 조건 C가 충족될 때 오직 그 때에만(if and only if) 한 개인 또는 행위에 적용된다." 만약 보편적인 궁극적 도덕원리가 존재한다면, 도덕률간의 실제적인 차이는 상이한 사회의 상이한 세계관, 전통, 물리적 환경 등에 의해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제 2절 규범윤리적 상대주의normative ethical relativism어떤 도덕규범은 그 규범을 받아들인 사회 내에서만 타당하게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 규범윤리적 상대주의자들의 주장이다. 다른 사회에 속한 사람의 행동을 자기가 속한 사회의 규범에 따라 판단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l 외견상 모순되는 도덕판단들이 모두 참일 수 있다. “행위 X를 하는 것은 옳다”와 “행위 X를 하는 것은 옳지 않다”라는 두 판단은 서로 모순되지만, “행위자가 사회 S1의 구성원일 때 행위 X를 하는 것은 옳다”와 “행위자가 사회 S2의 구성원일 때 행위 X를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서로 모순되지 않기 때문이다. “행위 X를 하는 것은 옳다”라는 형식의 모든 도덕판단은 “행위자가 사회 S의 구성원일 때 행위 X를 하는 것은 옳다”라고 번역돼야 한다.2 도덕규범이 도덕판2) 방법론적 상대주의: 사람들은 문화권에 따라 각기 다른 추론방법을 가지고 도덕판단을 정당화한다는 주장이다. 도덕판단이 상대적이라면, 도덕판단이 도출해내는 도덕적 지식 역시 문화적으로 상대적이다. 도덕적 지식을 얻기 위한 어떤 단일하고 범문화적인 방법이나 또는 어떤 문화권에 속하는 사람이 올바르게 생각하는가를 말해 줄 단일하고 범문화적인 추론규칙이 없다면, 도덕규범의 보편타당성은 결코 주장될 수 없다. 이러한 방법론적 상대주의는 윤리적 회의주의 혹은 도덕적 지식에 대한 완전한 부정까지도 함축한다. 도덕적 지식을 범문화적 근거 위에서 정당화해 줄 검증 절차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어떠한 도덕적 지식도 그 정당화 과정에서 하나의 검증 절차가 끊임없이 또 다른 검증 절차에 의존해야만 하는 무한 소급의 오류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분석윤리학적 상대주의에 대하여 도덕철학자들은, 도덕판단의 진위를 결정하는 타당한 방법이 있으며 따라서 순수한 도덕적 지식을 얻을 수 있는 하나의 정당한 방법이 있음을 보여주려고 시도한다. 이는 도덕개념의 의미, 도덕언어의 용법, 도덕규범의 기능을 명백히 이해하고 있는 합리적인 사람이 어떻게 그의 사유를 이끌어가고 있는가를 고찰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도덕적 추론의 방법이 가지고 있는 논리적 원리는 어느 문화에 속하든 도덕문제에 관해 합리적으로 생각하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실상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제 4절 윤리적 절대주의도덕규범이 절대적이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1) 어떤 도덕규범은 범문화적 추리방법에 의해 확립될 수 있는 근거 위에서 정당화될 수 있으므로, 이러한 규범은 모든 인간의 행위에 올바르게 적용될 수 있다. 이는 윤리적 보편주의의 주장이다. 윤리적 보편주의는 논리적으로 규범윤리적 상대주의는 물론 분석윤리적 상대주의도 부정한다.(2) 도덕규범은 어떠한 예외도 갖지 않는다.(1)이 (2)를 논리적으로 함축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1)에서 주장하는 모든 사회의 모든 사람에게 타당한 도덕규범은, 특수한 상황이에게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규정하는가? 불가피한 행위를 할 수 밖에 없을 때, 당위진술은 아무런 의의가 없다. 윤리적 이기주의는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첫째,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함에 있어 항상 지성적으로 행위하는 것은 아니며, 또 가장 효율적인 수단을 사용하는 것도 아니다. 둘째, 사람들은 찰라적 쾌락에 동요되어 장기적으로 자신들의 복지와 행복에 반대되는 행위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비록 단기적으로는 이익이 없지만, 장기적으로는 행복할 수 있도록 선택해야 한다. 이 두 답변으로 유추해볼 때, 윤리적 이기주의는 계몽된 타산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이상적인 도덕적 성격을 변호한다.2절 심리적 이기주의에 대한 찬반 논의2.1 심리적 이기주의는 사람들이 얼마나 이기적인가를 보여주는 사실에 의거하며, 설혹 비이기적 행위가 있다고해도 그것은 자기이익의 측면에서 동기유발됐기 때문에 그것은 기만적 행위이거나 거짓말이라는 사실에 의거한다. (예컨대 사회적 지위를 높이기 위한 욕망 및 자기의 영달을 위한 수단적 행위들인 자선행위) 따라서 애타적인 것처럼 보이는 모든 행위의 배후에는 항상 자기 이익을 추구하려는 동기가 있다고 주장한다.2.2 심리적 이기주의자는 외견상 자기희생처럼 보이는 모든 경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1) 행위자는 신을 믿고, 신의 응징이나 신의 보상을 바라고 행위한다.(2) 행위자는 타인의 비난을 피하거나 호평을 받기 위해 행위한다.(3) 행위자는 자아고취로 생각될 수 있는 자만심을 가지고 행위한다.(4) 양심적 가책에 시달리지 않기 위해, 즉 불쾌한 감정을 피하려고 행위한다.(5) 만일 이상에서 언급된 어떠한 동기도 작용하지 않았다면, 행위자는 자신의 무의식적 욕구나 소망을 만족시키고 있는 것이다.2.3 다섯 번째의 경우, 이는 어떠한 윤리체계와도 관계가 없다. 왜냐하면 윤리학은 오직 사람들의 자발적이고 의식적인 목표나 목적을 다루기 때문이다. 만일 한 사람의 의식적 사고가 그의 동기와 행동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도덕행위에 그는 모든 행위를 이런 식으로 기술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종료의 행위, 즉 사람이 실제로 하기를 원하는 것과 실제로 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해야만 한다고 믿는 것 사이에 구별이 있을 수 없게 된다. 심리적 이기주의자는 “우리는 실제로 하기를 원하는 것을 함”이라는 구절을 모든 행동에 적용하지만, 그는 그 구절의 의미를 상실케 한다. 왜냐하면 이 구절이 한 종류의 행위를 다른 행위와 비교하는데 사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심리적 이기주의자가 사람들은 항상 실제로 하기를 원하는 것을 한다고 주장할 때, 그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유일한 증거는 사람들이 그런 행위를 하려고 선택한다는 사실임을 알았다. 그러나 이는 동어반복적 진술, 즉 “모든 사람은 항상 그가 하려고 선택한 것을 하려고 선택한다”는 진술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진술은 인간 행동에 어떠한 정보도 제공하지 못한다.3절 윤리적 이기주의3.1 몇몇 윤리적 이기주의자들은 사람들이 각자 자기이익에 반대된다고 믿는 행동을 하도록 동기유발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윤리적 이기주의자들은 첫째, 자신들 이론이 규범윤리학의 궁극적 원리이며, 둘째, 이 원리가 모든 사람에 의해 일관성있게 실천되면 다른 어떤 규범보다 더 좋은 결과를 가질 것이라고 말한다.3.2 두 번째 주장의 경우, 예컨대 모든 사람이 “나의 행동에 의해 영향받을 모든 사람들의 이익을 최대한 증진시킬 것을 행하라”는 규칙을 따르는 것이, “나의 이익을 최대한으로 증진시키는 것을 행하라”는 규칙을 따르는 것보다 모든 사람의 자기이익을 실제로 더 많이 성취시킬 경향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이 경우 윤리적 이기주의는 공리주의의 원리와 같다.(공리주의는 4장에서 논의될 것임)3.3 홉스는 각 개인의 자기이익의 증진은 단지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윤리학의 최고규범 또는 궁극적 원리라고 주장한다. 자연상태는 인간-관계를 통제하는 법이나 제도가 없는 삶의 조건이다. 그러한 조건에서는 법률위반이 없는데, 위반할 아무런 법률도 없기 때문이
- 헨리 지루의 를 읽고 -1. 교사는 왜 지성인이어야 하는가?이 책의 제목처럼 교사가 지성이어야 함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제목을 보고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교사는 당연히 지성인이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이런 의문을 가지고 이 책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이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교사가 존재한다. 바로 기능인 교사와 지성인 교사이다. 교육이 '관리와 통제'의 담론에 휘둘리는 한, 교사는 누군가가 정해준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학생들을 관리하고 통제하면서 그렇고 그런 하루를 보내게 되며, 이런 교사가 바로 기능인 교사이다. 이런 기능인 교사는 교사 양성 과정과 교사 연수 과정을 통해 끊임없이 만들어 진다.우리는 이런 기능인 교사를 단호히 거부하고 민주적 교사 교육을 통하여 아이들이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있도록 양질을 교육을 제공하고 그런 교육환경을 만들어가는 지성인 교사를 만들어 내야 한다. 지은이는 신자유주의 교육이 요구하는 교사의 보수화를 단호히 거부하고 사회적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학교교육을 혁신하기 위해서는 연대와 가능성을 확인하는, 교사를 위한 새로운 교육학, 교육활동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교사는 스스로 변혁적인 지성인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며 그들만의 목소리로 의견을 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오늘날 문제시 되고 있는 공교육을 살릴 수 있는 하나의 방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동안 타성에 젖어 안일했던 생각으로 버리고 그들이 사회적,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제대로 된 공교육이 될 것이다.2. 나의 학교생활은 어떠하였는가?헨리 지루의 글을 읽으면서 그동안 교육에 대해서 별다른 생각이 없던 나에게는 많은 생각할 거리와 고민들을 안겨주었다. 그 동안 12년의 교육을 받아오면서 교육이 권력과 결탁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오지 못했던 나는 ‘교사는 지성인이다’를 읽으며 다시금 나의 학창 시절을 떠올리게 되었다.그동안의 학생과 교사의 관계는 수평적인 관계라기보다는 수직적인 관계에 가까웠다고 말할 수 있다. 그도 당연한 것이 한 교실에 50명씩 앉아서는 제비새끼마냥 선생님의 얼굴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 반에 들어가는 학생의 수를 줄인다고는 하나 현 교육체제로는 무리가 있는 듯 하다. 내가 중학교 2년생이었을 때 우리 반의 학생수는 28명 이었다. 교탁 앞에 옹기종기 모일 수 있는 학생 수였다. 생각해보면 그때의 수업은 선생님과의 많은 질문과 대답 속에서 지낸 것 같다. 50명씩 앉아서 하던 수업과 비교해보면 선생님과 학생의 관계가 훨씬 수평적이었다.수업 방식 또한 학생 스스로 반성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수업이 아닌 교사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는 수업이었다. 학생의 참여는 겨우 선생님의 물음에 웅얼웅얼 혼자 대답을 하는 것뿐이었다. 학교교육은 학생 하나하나가 문제의식을 갖고 모순 된 구조에 저항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닌 이미 조직된 사회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인간이 되도록 만든 것 같다.하지만 교육이 정치의 연장이라는 지루의 말은 약간 공감이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진보적 교육자들은 학교의 교육이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계급적 상황에 맞는, 지배계급 위주의 교육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 나는 학교교육을 받아오면 그런 느낌은 받아본 적이 없었다. 선생님들은 수업시간에는 수직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으나 학생들을 피지배계급과 지배계급으로 만들기 위한 교육을 한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성적에 의한 보상은 학생들 간에 거리감을 조성하고 서로 경쟁 관계에 놓여지게 함으로써 공동체 의식의 결여를 가져오며 서로를 화합의 대상이 아닌 경쟁의 대상으로 여겨지게 만드는 것 같다.3. 나는 어떤 교사가 될 것인가?이 책을 읽는 동안 한국 교육의 현실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 하는 뜻 깊은 시간을 가질 수 있게 해 주었다. 교실 붕괴와 공교육 위기에 대한 우려는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지만, 요즘처럼 심각한 적은 없었던 듯 하다. 공교육 보다 학원을 더 믿으려고 하고, 공교육의 붕괴를 막기 위해 정부에서는 또 다른 사교육인 EBS 교육 방송 시청이라는 대안까지 내놓게 되었다.최근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성인 10명 중 4명 이상이 자녀 교육을 위해 외국으로 이민을 가고 싶어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학력이 높을수록 교육 미래를 비관적으로 보고 있으며, 특히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자녀 조기유학 보내기에 적극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교육에 파고든 시장경제논리는 능력 있는 이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준다는 미명 아래 빈익빈 부익부를 심화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반발을 사고 있다. 현장의 교사들은 7차 교육과정 시행, 정년단축, 자립형사립고 도입, 중등교사의 초등교사 임용방안, 성과급 차등지급 등 준비 없이 시행된 조처들에 집단적 반대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1. 들어가는 말처음 ‘서머힐학교’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나는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라 생각했다. 누구나 ‘서머힐’이라는 문구는 한번쯤 정도 들어본 일이 있을 것이다. ‘서머힐유치원’, ‘서머힐학원’ 등으로 등장하는 것은 그만큼 학부모나 아이들에게 신뢰성이나 흥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서머힐’이란 ‘서머힐학교’에서 따온 이름인 것이다. 마치 연세대학교의 이름을 따서 지은 연세학원이란 상호처럼 말이다. 책을 읽은 후, 다시 ‘서머힐학교’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열린교육의 표본처럼 느껴졌고, 실제로 그러했다. 책을 읽기 전에는 잘은 모르지만 어느 CF에서 보았던 숲 속에서 자연 친화적 수업을 하는 외국 아이들이 떠올랐다.이 책의 내용은 '충격' 그 자체였다. ‘서머힐학교’의 존재와 대략적인 정보는 전부터 들어 왔지만 책을 읽으며 자세히 알게 된 대안 학교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이 ‘서머힐학교’의 파격적인 교육 내용과 니일의 교육 사상은 정말 충격이었다.몇 해 전 TV 에서 "서머힐" 이란 다큐멘터리를 본적이 있었다. 지금 기억에 남는 장면은 남학생, 여학생 구분 없이 나체로 수영을 같이하는 장면이었다. 그때는 그 화면을 보고 어린 마음에 세상에 이런 것도 있구나 하는 놀라움 뿐 이었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는 니일의 행동과 사상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듯 하다.2. 본 문(1) '서머힐학교'란?그렇다면 ‘서머힐’이란 무엇인가. ‘서머힐학교’의 교육원리는 “자유”이다. 이것은 아주 긍정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 중에 “공부도 자기가 하려고 해야 하지 남이 시킨다고 되나”라는 말이 있다. 바로 이것이다. 학습의 자유를 줌으로써 아이 자신이 흥미를 갖고 학습에 임하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를 하는 아이는 일반학교에서 강제적으로 몇 년에 걸쳐 할 공부를 2년 만에 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경험으로도 내가 원해서, 혹은 필요로 해서 공부를 할 때와 누군가 시켜서 억지로 책상에 앉아있을 때의 학습의 깊이가 다르다. 막 공부를 시작하려 했을 때 “너 공부 안하니?”란 고함소리를 들어 갑자기 공부하기가 싫어진 경우는 누구나 있었을 것이다.또한 학습의 자유 말고도 이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다양한 자유를 누리는데 놀이의 자유가 그러하다. 아이들은 할 일 없이 명상에 잠기기도 하고 유리창을 깨기도 한다. 아이들에게 최대한의 자유를 줌으로써 성인이 되었을 때 모든 에티켓과 사회적응도 가능하다는 니일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서머힐’의 자료로 보아 신뢰할 수 있을 것 같다. 가장 마음에 드는 점은 “부모의 권리와 아이의 권리가 동등해야 한다.”는 점이다. 한국의 가정은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경향이 강해서 아이의 권리가 종종 무시된다. 그리고 그것이 효도로 포장되어 당연시 여겨지고 평생을 그 영향으로 의기소침하게 살아가는 아이들도 있다. 그러나 니일의 이 말처럼 한다면 정말 인간은 평등한 것 아닌가.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어른들의 인내가 많이 필요할 것이다. 아이들을 존중해주는 것은 참으로 어렵지만 필요한 일이다. 한 사람의 평생을 좌우할 인성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니 만큼 자중해야한다. 니일의 ‘서머힐학교’는 이런 면에서 이상적인 학교이다.하지만 ‘가장 자유로운 학교이야기’에 의하면 아직까지 ‘서머힐’은 교직원의 부족과 교직원의 수준이 학구열이 높아진 학생들을 감당할 수 없다고 서술되어있다. 물론 이것은 재정난에 의해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재정난이 해결되어진다면 이 문제도 해결되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서머힐’의 재정난은 아직 해결될 방안을 찾은 것 같지 않다.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학구열이 높아진 학생들에게 많은 량의 학습을 하도록 이끌어 주고 교과목적인 수업들을 통해서 대학진학을 위한 학습을 하기에는 일반학교가 적당한 것 같다. 한 예로, ‘서머힐’에서 프랑스어와 불어를 공부하기로 한 여학생에게 교사의 지도가 부족했던 점을 들 수 있다.(2) 우리의 현실은?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한 책에서 발췌한 초등학교 교실 모습은 그야말로 니일이 비판하던 교육 모습 그대로이다. 아이들의 권리와 성인의 권리가 동등하다기 보다는 권위로 강압하는 엄격한 훈육 현장이 우리들의 학교 모습이다. 초등학교 1학년 학생이 엄마의 갑작스런 체벌과 선생님의 엄격한 체벌에 당황하여 학교에 와서 엄마와 선생님이 밉다고 울음을 터뜨린다. 어떤 선생님이 좋은가에 대해 아이들에게 한 조사에서는 1위로 차별하지 않는 선생님이 뽑힌다. 과연 현 교육상황에서 모든 학생들에게 공평한 사랑을 나눌어 줄 수 있는 선생님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러기엔 학생과 선생님의 비율이 너무 불균등하다. 초등학교 3학년생들이 점수화 되서 컨닝을 해서라도 점수를 높이려고 안간힘을 쓴다. 너무나 삭막하다. 인성의 개발과 교육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 볼 수가 없다. 정말 안타까운 현실이다. 초등학교가 이러하니 중학교, 고등학교는 오죽하겠는가.현재 우리나라의 초등?중등교육과정은 대학입시에 맞춰져 있기 때문에 다른 나라에 비해 더욱 교과중심적인 교육을 행하고 있다. 사회적 지위가 어느 대학을 가느냐에 따라 많이 영향을 받고, 대학 이름을 통해 사람의 수준을 결정해버리는 사회 구조가 이러한 교육에 한 몫을 하고 있다. 물론 사회 구조를 바꿔서 정말 아이들을 위한 교육, 그리고 아이들이 하고 싶은 학습을 선택해서 하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차츰차츰 사회적인 경향이 직업의 다양화로 바뀌어가고 있지만 “직업에 귀천 없다.”는 말이 현실화되고, 대학을 가지 않은 사람을 보고 “공부 못하나 보네”라는 생각보다 “대학갈 필요가 없는 다른 꿈이 있나보네”라는 생각이 먼저 들기에는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우리나라에서도 현재 운영되고 있는 대안학교들이 있다. 이러한 대안학교들이 지금은 문제아집단이라는 시각에 비춰지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는 이러한 대안학교들이 꾸준한 교육 신념을 가지고서 그 신념을 실천해 나가서 '서머힐학교'같은 학교가 되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의 교실제도 등을 그대로 수용하기 보다는 교사진들이 인내를 가지고 교육방식에 대해 고민하고 아이들의 입장을 들어보고 받아들이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또한 그 대안학교가 쉼터가 되기보다는 하나의 ‘학교’로 자리 잡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