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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업무용승용차운행기록부
    【업무용승용차 운행기록부에 관한 별지 서식】"사업연도"" . . .~. . ."업무용승용차 운행기록부(안)법 인 명사 업 자 등 록 번 호1. 기본정보① 차 종② 자동차등록번호③ 자택④ 근무지⑤ 출퇴근거리(km)2. 업무용 사용비율 계산"⑥일련번호"사용자"⑩사용목적""⑪사용일자(요일)"운 행 내 역"⑦부서""⑧직책""⑨성명"출 발도 착"⑯주행거리(⑮-⑬)(km)""⑰업무용주행거리누계(km)""⑱비 고""⑫출발지""⑬출발시누적거리(km)""⑭도착지""⑮도착시누적거리(km)"- - -- - -- - -- - -- - -- - -- - -- - -- - -- - -"⑲총주행거리(km)""⑳업무용주행거리누계(km)""㉑업무사용비율(⑳/⑲)"- - #DIV/0!
    회사서식| 2016.03.28| 1페이지| 1,000원| 조회(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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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물] 후세인과 박정희
    후세인과 박정희의 개발독재와 외세1. 후세인에 대하여: 후세인은 1937년 이라크 중북부에 위치한 티그리트의 알 아우자 마을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유년시절은 가난하고 불우했다. 친아버지의 부재 속에서 '무능한 독재자'인 의붓아버지의 학대에 시달려야 했던 것이다. 의붓아버지 하산은 어린 후세인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일을 시켰다. 후세인은 아버지라는 '부당한 권력'에 착취당하거나 때로는 맞서면서 반항적 성격을 키웠다. 동시에 절망 속에서 생존해야 하는 '삶의 지혜'를 본능적으로 터득했다. 그 대신에 "남편을 압도했던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인 어머니 수브하에게선 부드러운 모성애와 잡초처럼 끈질긴 생활력을 배웠다.가난하고 불우한 유년시절은 나중에 후세인의 정치적 자산이 되었다. 그 시절의 아픔이 "인내심과 참을성, 강인함과 독립심"을 심어주었으며, 마음속 깊숙이 키웠던 분노의 씨앗이 되었다. 때로는 "내성적인 외톨이"가 되기도 했던 후세인은 너무나 일찍 "아이 같지 않은 아이"로 성장했다. 1970∼80년대에 후세인은 자신의 "비천한 태생"을 강조하며 국민의 인기를 얻기도 했는데, 이런 경우는 현대 아랍 국가 지도자 중 그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후세인은 그와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온 대다수 이라크 민중들의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했다."거리의 아이" 후세인에게 최초로 외부적 영향을 준 것은 외사촌 형제들이었다. 그의 집에 놀러온 그들이 읽고 쓰는 것을 보며 배움에 대한 동경을 키웠다. 학교에 가고싶어 했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의붓아버지의 욕설과 구타였다. 결국 열 살이 되던 해 후세인은 감옥 같은 집을 나와 외삼촌 카이르알라 탈파가 있는 알 샤위시로 갔다. 그리고 그의 첫 번째 모반이 된 '가출'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마침내 고대하던 학교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후세인의 첫 번째 영웅이었던 탈파는 육군 소위 출신으로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였다.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개화파 지식인'이었던 그는야심만만한 이 청년의 20대를 점철했다. 1958년 군부 쿠데타로 영국의 꼭두각시인 왕정을 무너뜨리고 카심 정권이 출범하면서 후세인의 본격적인 정치활동이 시작됐다. 그가 선택한 첫 번째 정치활동은 '암살'이었다. 1959년 카심 정권이 바트당을 탄압하자 대낮에 바그다드 도심에서 동료들과 함께 카심에 대한 암살을 기도한 것이다.그러나 '거사'는 실패로 끝났고 그는 망명객 신세가 됐다. 나세르가 통치하고 있던 '아랍혁명의 본고장' 이집트가 그의 망명처였다. 암살은 실패로 끝났지만 이 사건은 후세인이라는 청년이 대중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한 계기가 됐다. 한편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철저한 사전 준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다고 한다.카이로대학 법대에서 공부하며 절치부심던 후세인은 26세가 되던 1963년 귀국했다.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바트당이 연정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귀국과 함께 그가 맡았던 일은 카심 정권에서 일했던 관리들을 심문하는 것이었다. 후세인은 이 과정에서 고문을 하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이때부터 벌써 잔인한 독재자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한 셈이다.그러나 좋은 시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듬해에 바트당에 반대하는 새로운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거꾸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된 것이다. 그렇게 두 해가 흐른 뒤에야 후세인은 탈옥에 성공했고, 바트당 내에 보안조직을 만드는 일에 앞장섰다. 권력을 잡기 위해서 정보기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절실하게 깨달았던 것이다.후세인은 31세가 되던 1968년 마침내 '권력의 2인자'가 됐다. 군부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바트당 지도자 바크르는 마침 후세인의 장인 탈파의 사촌이었다. 탈파의 적극적 천거로 후세인은 혁명지휘위원회 부의장을 맡을 수 있었다. 권력의 실세가 된 후세인은 치안을 책임지면서 정치적 능력을 한껏 발휘하는 한편 강력한 개발정책도 추진했다. 대규모 문맹퇴치 사업을 시행하는 동시에 학교와 병원을 지었고, 공공주택을 건설하고 도로도 닦았다. 그러나 후세인이 추진한 개발정책은 어디까지나 ' 객관적 사실에 있다. 이름대로 그는 지 난 68년 자신이 속한 바트당의 무혈쿠데타를 성공으로 이끌며 제2의 권력자로 부상했다. 그는 73년 석유 국유화 성공과 지휘하의 보안군 세력을 바탕으로 절대적인 권력 기반을 확대했다. 후세인은 이라크 선진화를 통한 "아랍의 지도자"로서의 지위를 목표로 삼아, 문맹퇴치 등 강압적인 방법을 동원하는 무리수도 뒀지만 70년대 후반만 해도 이라크를 보건.교육 등 사회기반 면에서 중동에서 가장 선진국가로 만드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80년대 들어 이란-이라크전쟁, 90년 쿠웨이트 침공 등을 주도하며 미국 등 서방국가들로부터 "독재자"의 악명을 쌓기 시작했다. 그는 국내정치면에서 수천명의 반대세력을 처형하고 강압적이고 무자비한 보 안군을 동원, 해외망명 세력에 대해서도 거침없는 암살을 자행하는 등 공포정치 로 더욱 미움을 샀다.특히 90년대 전후해서는 아들인 우다이와 쿠사이간에 권력후계를 둘러싼 암투 가 진행되면서 전형적인 세습독재의 길을 걸었다. 특히 91년 유엔의 경제제재는 이라크 경제와 국민에게 심대한 타격을 줬고, 이 로 인해 그의 독재체제는 급속히 와해됐다. 그의 두아들 우다이와 쿠사이가 지난 7월 모술 은거지를 급습한 미군에 의해 사 살된 데 이어 후세인 본인이 체포됨으로써 미국에 의해 알카에다에 맞먹는 국제 테러지원세력으로 꼽아온 후세인 세력은 주요 구심점을 모두 상실, 사실상 붕괴 를 맞게 됐다.2. 후세인의 개발독재 전형: 후세인은 문맹퇴치 사업과 동시에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해서도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새롭게 학교에 입학한 여성의 수가 기존의 여학생 수에 비해 3배로 늘어났을 정도로 효과는 대단했다. 사관학교에 여성을 받아들인 것이 얼마 되지 않는 우리의 현실과 비교해 보더라도 후세인의 개발정책이 얼마나 선진적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실제로 후세인은 문맹퇴치와 여성지위 향상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유네스코로부터 '크로페스카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서방 세계가 그를 '중동 근대화의 총아'로 주목하기 시자비한 공포정치는 이렇게 개막됐다. 그리고 그는 아랍권 전체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 지난 44년 동안 두 차례의 침략 전쟁을 치렀다. 물론 그의 뒤에는 호메이니로 상징되는 반미정권을 누르기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은 미국과 서방의 나라들이 있었다. 후세인은 때로는 서방을 교묘하게 이용하고 때로는 정면으로 맞서면서 부국강병을 꽤했고, '아랍의 영웅'이 될 수 있었다. 그랬던 그가 44년만에 미국으로부터 침략을 받은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3. 박정희에 대하여: 1917∼1979 군인·정치가. 제5·6·7·8·9대 대통령. 경상북도 구미 출생.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40년까지 문경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42∼44년 만주 신경(新京:지금의 長春)군관학교를 거쳐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하였다. 그 뒤 관동군에서 근무하다 일본이 패망하자 한국군에 들어가, 46년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전신) 2기생으로 졸업하고 육군 대위로 임관하였다. 49년 여수·순천반란사건과 관련되어 공산주의 혐의로 군법에 회부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군선배·동료들의 구명운동으로 석방·예편되었다. 50년 6·25가 터지자 소령으로 군에 복귀하여 육군 정보국 작전정보과장, 제 9 사단 참모장 등을 거쳐 53년 준장으로 승진하였다. 그 뒤 미국 육군포병학교에 유학하였으며, 56년 제 5 사단장, 58년 제 7 사단장을 거쳐 소장으로 승진하였다. 59년 서울군관구사령관, 60년 부산군수기지사령관을 역임하고, 2군부사령관으로 있던 61년 김종필(金鍾泌)을 비롯한 육사 8기 장교를 중심으로 5·16군사혁명을 일으켰다. 군사혁명위원회·국가재건최고회의를 설치하고 의장에 취임한 박정희는 2년 7개월간 군정을 실시하여 정치·사회개혁, 경제개발계획 관철 등 조국 근대화의 전기를 마련하였다. 63년에는 대장으로 예편하고 민정에 참여하여 민주공화당 총재로 제 5 대 대통령선거에서 민정당 후보 윤보선을 근소한 표차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그는 한국의는 노동운동, 학생운동과 중산층의 민주화 요구, 야당의 약진, 외채상환에 따른 경제적 어려움, 닉슨독트린을 둘러싼 주한미군 철수문제, 북한의 모험주의적 대남전략 등 국내외적 위기를 맞게 되었다. 72년 10월 정당 및 국회를 해산하고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한 뒤 유신헌법을 국민투표에 부쳐 확정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 8 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유신시대>에 들어갔다. 그는 개인자유의 제한, 언론 및 야당에 대한 탄압, 사법제도 및 대학 통제 등으로 반독재를 부르짖는 국민의 저항이 거세어지자 <대통령긴급조치>를 발동하여, 민주화 요구와 경제적으로 소외된 국민들의 생존권 요구를 억압하였다. 74년 8월 15일 조총련계 문세광(文世光)의 저격으로 부인 육영수(陸英修)를 잃었고, 77년 박동선(朴東宣)의 코리아게이트사건 등 국제적 스캔들에 휘말렸으며, 70년대 후반에는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주국방을 위해 독자적인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였다. 그의 군인적인 우국충정, 상의하달식(上意下達式) 강권지배와 국가재건국민운동·새마을운동 등은 경제성장에 큰 힘을 발휘했으나 장기독재로 인해 부정부패·빈부격차 등 사회적 모순과 갈등은 갈수록 심화되었다. 79년 박정희가 유신체제를 비판한 김영삼(金泳三) 신민당총재의 의원직을 박탈하자, 김영삼의 지지기반이던 부산·마산지역을 중심으로 부마항쟁이 일어났다. 부마항쟁 처리를 놓고 벌어진 강경파 차지철(車智澈)과 온건파 김재규(金載圭)의 갈등 끝에 그는 오랜 측근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격으로 생애를 마감했다. 박정희는 개발독재의 그늘 아래 정경유착과 일그러진 군사문화 유산을 남기는 등 한국 사회·경제구조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억압하였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있으나, 한국근대화와 경제적 성장을 위한 일념으로 고뇌한 대통령, 경부고속도로를 뚫고 포항제철을 세우는 등 조국발전의 탄탄대로를 닦아 오늘의 세계 속 경제강국 한국이 있게 한 위대한 지도자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저서에 《우리 민족의 나아갈 길》 《국가와 혁명과 나》 《민족의 저력》 이다.
    인문/어학| 2004.12.13| 6페이지| 1,500원| 조회(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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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흥선대원군
    흥선대원군 이하응1. 흥선대원군의 생애: 인조의 셋째 아들인 인평 대군의 6대 손인 남연군의 넷째 아들이다. 남연군이 어릴 때 사도세자의 둘째 아들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되었기에 촌수로 따지면 흥선대원군은 영조의 고손자가 되는 셈이다. 그의 이름은 하응이며 자는 시백, 호는 석파였다. 12세 에 어머니를 여의고 17세에 다시 아버지를 여읜 뒤 사고무친의 상태에서 불우한 청년 기를보냈다. 21세가 되던 1841년 흥선정이 되었고 1843년 흥선군에 봉해졌으며 1846 년 수릉천장도감의 대존관이 된 뒤 종친부의 유사당상, 오위도총부의 도총관 등의 한 직을 지내면서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하에서 불우한 시절을 보냈다.철종 시대에는 안동 김씨가 권력을 독점하며 왕실과 종친에 갖가지 통제와 위협을 가 했으므로 호신책으로 천하장안이라고 불리는 시정의 무뢰한인 천희연, 하정일, 장순규, 안필규 등과 어울려 파락호 생활을 하였다. 또 이때 그는 안동 김씨 가문을 찾아다니며 구걸도 서슴지 않았기에 궁도령이라는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시정잡배와 어울려 지내는 호신 생활을 통하여 서민 생활을 체험했으며 민간의 바람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러던 흥선군은 1863년 12월 자신의 아들 명복이 왕위에 오르고 자신 또한 흥선대원군으로 봉해져 신정왕후로부터 섭정의 대권을 위임받자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서원 정리, 무명잡세 폐지, 법전 편찬, 비변사 폐지 등을 시행하면서 안동 김씨의 세력을 눌러 왕권을 강화하고 외부적으로는 철저한 쇄국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의 이러한 혁신으로 인해 조선 사회는 조금씩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지만 한편으론 경복궁의 무리한 중건과 지나친 쇄국 정책으로 인한 천주교 박해 등으로 말미암아 안팎으로의 어려움이 초래되기도 했다.그는 1873년 11월 고종과 명성황후에 의해 대권에서 손을 떼야 했다. 외척 세력을 두려워한 나머지 몰락한 양반 여흥 민씨 가문에서 왕비를 간택했지만 오히려 그녀에 의해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고종은 그 당시 여 마침내 최익현의 대원군 상소를 이끌어내게 한다. 그 결과 1873년 11월 창덕궁의 대원군 전용 출입문이 사전 양해 없이 왕명으로 폐쇄되었고 대원군은 하야하여 양주 곧은골에 은거하였다. 하지만 타의에 의해 축출된 그는 이때부터 왕비에 대한 악감정이 생겨 끊임없이 정계 복귀를 꾀하게 된다.1881년 '조선책략' 반포를 계기로 민씨 일파의 개화 시책을 비난하는 전국 유림의 척사상소운동이 격렬히 전개되자 대원군 계파인 안기영은 고종의 이복형 재선을 옹립하여 민씨 척족 정권을 타도하려는 국왕 폐립 음모를 꾸몄다. 대원군은 재집정을 위해 이 계획에 가담하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오히려 척사상소운동을 탄압할 빌미를 제공하였고 대원군 자신의 입지도 더욱 위축되었다.그러나 1882년 구식 군대 폐지와 봉량미 문제로 일어난 임오군란 때 난병들에 의해 정국 개입을 요청 받아 왕명으로 사태 수습을 위임받고 재집권하였다. 이 때 그는 명성황후의 사망을 공포하고 다시 정국을 주도하려 했지만 명성황후의 요청으로 원세개가 이끄는 청국군이 개입함으로써 사태는 반전되어 청국으로 연행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는 청에 연행되어 3년 동안 중국 바오딩에서 유수 생활을 해야 했다.그는 1885년 2월 조선통상사무전권위원으로 부임하는 원세개와 함께 귀국한 후 여전히 정계 복귀를 노리다가 1886년 민씨 정권이 조. 러 조약을 체결하자 불만을 품은 원세개와 결탁하여 큰 아들 재황을 옹립하고 재집권하려다가 실패하고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농민 세력과도 연합하려 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동학 농민운동이 실패로 돌아가 실현되지 못하였고 청. 일 전쟁 이후 온건개혁파가 갑오개혁을 추진할 때 영입되어 군국기무를 총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이 바라는 것과 달리 그가 자신의 소신대로 개혁을 추진하려 하자 은퇴를 강요당했고 김홍집 내각에 의해 경장 사업 추진이 진행된다.이 이후에도 그의 정계 복귀 노력이 계속되자 그의 행동을 제약하는 대원군 존봉의절이 제정되어 사람들과의 접촉을 제한 받았을 뿐 아니라 외의 요청에 따라 입궁하여 왕비 민씨가 죽은 후 일시적으로 재집권하였으나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옮겨감에 따라 다시 실각하여 곧은골로 내려와야 했다. 그리고 3년 후인 1898년 79세를 일기로 마침내 생을 마감하였다. 죽은 뒤 부대부인 민씨와 함께 공덕리에 안장되었다. 1907년대 원왕에 추봉 되었다.2. 대원군의 정책: 당색과 문벌을 초월하여 인재를 고루 등용하고 당쟁의 근거지가 된 사원을 철폐하는 한편 토색을 일삼아 주구로 전락한 탐관오리들을 처벌하고 양반과 토호의 면세 전결을 철저히 조사하여 국가 재정을 충당했다. 이밖에 민간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무명잡세를 없애고 궁중에 특산물을 바치는 진상제도를 폐지했으며 은광산을 개발하는 것을 허용하여 경제에 도움이 되도록 했다. 또한 사회의 악습을 개선하고 복식을 간소화했으며 군포세를 호포세로 변경하여 양반도 세금을 부담하도록 했다. 한편 '대전회통', '육전조례', '양전편고' 등의 법전을 편찬하여 법질서를 확립시켰고 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 를 부활시켜 삼군부를 두어 군국기무를 맡게 함으로써 정무와 군무를 분리시켰다.3. 대원군의 실정: 우선 왕의 위엄을 세우고자 경복궁을 중건하는 과정에서 원납전을 징수하고 문세를 거두는 것도 모자라서 소유자 의 허락 없이 전국에서 거석과 거목을 징발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또한 천주교도들에 대한 지나친 박해로 인해 자신의 정치 생명에 타격을 입기도 했다.4. 대원군의 개혁 정치: 철종이 아들이 없이 세상을 떠나게 되어 자기의 둘째 아들 명복(고종의 어릴 때 이름)이 왕위에 오르자, 실권을 잡고 대신 정치를 보살폈다. 대원군은 권력을 잡게 되자 안동 김씨의 세력을 몰아 내고, 부패한 관리들을 처벌하였으며,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뽑아 썼다. 그리고 귀족과 평민을 가리지 않고 세금을 내게하며, 사치와 낭비를 금하여 백성들의 생활 안정을 꾀하였다. 그의 과감한 개혁 정치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어 국민 생활의 안정에 이바지하기는 했다.그러나 경복궁의 재건으로 병인양요와 신미양요가 일어나게 되어 카톨릭교를 박해하는 등, 쇄국 정치를 고집하다가 며느리인 명성 황후에게 정권을 빼앗겼다. 1907년(광무 11년)에 대원왕에 봉해졌다.5. 대원군의 대외 정책: 두 차례에 걸친 서양의 침입을 물리친 흥선대원군은 서양 세력을 배척하는 데 더욱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게다가 병인양요 이후에는 독일인 오페르트가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무덤을 도굴하려다 실패하고 달아난 사건이 일어나, 서양인을 배척하는 기운이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이에 흥선대원군은 " 서양 오랑캐가 침범함에 싸우지 않음은 곧 화의하는 것이요, 화의를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내용의 척화비를 전국 각지에 세우고, 통상·수교의 거부 의지를 더욱 굳게 하였다. 서양관의 통상·수교를 거부하는 정책은 일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은 그 즈음 메이지유신을 이미 단행하고, 서양의 근대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새로운 근대 국가로서의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세력을 넓히고자 조선에 수교를 요청하여 왔다.그러나 흥선대원군은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도 서양과 똑같은 오랑캐라 생각했으며, 그들의 수교 요구도 서양 세력의 침범과 같은 것이라 여기고 이를 거절하였다. 서양 및 일본과의 수교를 거부하고 그들을 배척하려는 조선의 대외정책은 외세 침략의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한 자주적 성격을 띠는 것이었다.그러나 이러한 대외 정책은 외세의 침략을 일시적으로 막아내는 데에는 성공하였으나, 우리나라가 서양의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시기를 그만큼 늦어지게 하여, 결국은 근대화를 지연시키는 결과를 맞게 되었다.6. 흥선대원군 정권의 특징: 흥선대원군 정권의 수립은 변칙적으로 수립된 정권이었다. 정권의 정당성은 오로지 흥선대원군 본인이 임금의 친부라는 점뿐이고, 실질적으로 종친이 정사에 관여할 수 없는 것이 원칙이었음을 고려한다면 그야말로 월권행위를 자행하는 것이 흥선대원군이었다. 이 점에 비추어 볼 때, 대원군 정권은 본질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기반을 가에서 철저 배제되고 있던 세 세력을 부각시켰다. 첫째가 바로 종친이고, 둘째가 무신이며, 셋째가 남, 북인 세력이다. 이 세 세력이 부각됨으로서 대원군 정권은 불안하나마 친위세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그러나, 이 세력들을 모두 활용하더라도 기존의 기득 권층을 완전히 배제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기본적인 주요 관료층 인사현황은 전주 이씨와 안동 김씨가 거의 같은 비율을 유지하는 상태가 되었다. 이는 철종조에 비해서 전주 이씨는 약 3배 증가, 안동 김씨는 40%가량의 감소 추세였다. 또한 무관의 중시는 대원군 집권기간 내내 전에는 척신들이 독점해왔던 도성 각군영 대장과 주교사(舟橋司) 당상을 무관으로 임명하는가 하면, 병조판서직 역시 문무관이 번갈아 맡도록 하게 되었다. 또한, 이전에는 같은 품계의 무관은 문신보다 낮은 반열에 서게 했던 것을 동등한 선에 서게 만듦으로서 무관의 사기를 크게 높이기도 하였다.그리고 남인과 북인의 기용은 비록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지는 못하였다고 하나, 그것은 남북인이 지난 과거에 지나치게 탄압을 당하고 힘이 약하여 인재가 부족했던 탓이지, 결코 대원군이 그들을 홀대한 것은 아니었다고 보아야 한다. 실제로 1871년 이후에 주요 관직에 등용된 사람들 중에서는 예전에 비해 훨씬 많은 남인과 북인이 등장하고 있고, 이들 중 상당수는 새로이 육성된 신진 관료이다.그러나,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듯, 대원군은 기존 기득권 세력과의 연합정권 성격이 매우 짙었기 때문에 그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대원군 및 대원군을 추종하는 개혁세력의 의견을 무조건적으로 밀어붙일 수가 없었다. 무관의 중시를 통해 실질적인 무력 행사에 이점을 가지게 되긴 하였으나, 정작 조선을 실제로 움직이는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유림 및 구 관료층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지지를 얻어내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더구나, 대원군이 내세운 왕권 강화책의 일환인 경복궁 중건은 당백전 파동과 청전 파동으로 이어지면서, 국내 통화량이 한순간에 이전의 150~170%, 최대 200%까지 폭증했.
    인문/어학| 2004.12.13| 5페이지| 1,500원| 조회(1,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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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방요리] 매실 한방요리
    ◈ 매실의 효능 ◈1. 피로회복에 좋다.매실에는 구연산, 사과산, 화박산 등 유기산이 많이 함유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구연산이 특히 풍부한데 구연산은 우리 몸의 피로 물질인 젖산을 분해시켜 몸 밖으로 배출시키는 작용을 한다. 구연산이 몸 속의 피로물질을 씻어내는 능력은 무려 포도당의 10배. 피로물질인 젖산이 체내에 쌓이게 되면 어깨 결림, 두통, 요통등의 증상이 나타나는데 이럴 때 매실이 좋다. 매실을 장복하면 좀처럼 피로를 느끼지 못하고 체력이 좋아진다.2. 체질 개선 효과가 있다.육류와 인스턴트 음식을 많이 섭취하면 체질은 산성으로 기운다. 몸이 산성으로 기울면 두통, 현기증, 불면증, 피로등의 증상이 쉽게 나타난다. 매실은 신맛이 강하지만 알칼리성 식품. 매실을 꾸준히 먹으면 체질이 산성으로 기우는 것을 막아 약 알칼리성으로 유지할수 있다.3. 간장을 보호하고 간 기능을 향상시킨다.우리 몸에 들어온 독성물질을 해독하는 기관은 간이다. 매실에는 간의 기능을 상승시키는 피루부산이라는 성분이 있다. 따라서 늘 피곤하거나 술을 자주 마시는 사람에게 좋다. 또한 술을 마시고 난 뒤 매실농축액을 물에 타서 마시면 다음날 아침에 한결 가뿐하다.4. 해독작용이 뛰어나다.'매실은 3독을 없앤다.'는 말이 있다. 3독이란 음식물의 독, 피 속의 독, 물의 독을 말하는 것. 매실에는 피크린산이라는 성분이 미량 들어있는데 이것이 독성물질을 분해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식중독, 배탈 등 음식으로 인한 질병을 예방 치료하는데 효과적이다. 또한 매실에는 암을 예방·치료하는데 도움이 되는 각종 비타민과 무기질이 아주 풍부하게 들어있다. 최근에는 항암식품으로서의 매실의 기능이 부각되고 연두고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5. 소화 불량, 위장 장애를 없앤다.매실을 장복한 사람들은 매실이 위장에 좋다는 것을 실감한다. 매실의 신맛은 소화기관에 영향을 주어 위장, 십이지장 등에서 소화액을 내보내게 한다. 또한 매실즙은 위액의 분비를 촉진하고 정상화시키는 작용이 있어 위산 과다와 소화불량에 모두 효험을 보인다.6. 만성 변비를 없앤다.매실 속에는 강한 해독작용과 살균효과가 있는 카테킨산이 들어있다. 카테킨산은 장 안에 살고 있는 나쁜 균의 번식을 억제하고 장내의 살균성을 높여 장의 염증과 이상 발효를 막는다. 동시에 장의 연동운동을 활발하게 해 장을 건강하게 유지시켜 나간다. 장이 건강해지면 변비는 자연히 치료되는법.7. 피부미용에 좋다.매실을 꾸준히 먹다보면 피부가 탄력 있고 촉촉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매실 속에 들어있는 각종 성분이 신진대사를 원활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각종 유기산과 비타민이 혈액순환을 도와 피부에 좋은 작용을 한다.8. 열을 내리고 염증을 없애준다.매실에는 통증을 줄여주는 효과가 있다. 매실을 불에 구운 오매의 진통효과는 에도 나와있다. 곪거나 상처 난 부위에 매실농축액을 바르거나 습포를 해주면 화끈거리는 증상도 없어지고 빨리 낫는다. 놀다가 다치고 들어온 아이에게 매실농축액 한 두 방울이면 다른 약이 필요없을 정도다. 감기로 인해 열이 날 때도 좋다.9.칼슘의 흡수율을 높인다.매실 식품은 임산부와 폐경기 여성에게 매우 좋다 매실 속에 들어있는 칼슘의 양은 포도의 2배, 멜론의 4배에 이른다. 또한 매실 속에는 칼슘도 다량 함유되어 있다. 체액의 성질이 산성으로 기울면 인체는 그것을 중화시키려고 하는데 이 때 칼슘이 필요하다. 칼슘은 장에서 흡수되기 어려운 성질이 있으나 구연산과 결합하면 흡수율이 높아진다. 따라서 성장기 어린이, 임산부, 폐경기 여성에게 매우 좋다.10. 강력한 살균, 살충 작용이 있다.음식물을 통해 위로 들어온 유해균은 위 속의 염산에 의해 대부분 죽지만 위의 활동이 원만하지 못할 때는 살아서 장까지 내려간다. 소장은 약알칼리성으로 살균효과가 거의 없다. 이때 발생하는 것이 배탈, 설사, 식중독이다. 그러나 매실농축액을 먹으면 장내가 일시적으로 산성화되어 유해균이 살아 남지 못한다. 또한 매실농축액은 이질균, 장티푸스균, 대장균의 발육을 억제하고 장염 비브리오균에도 향균작용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염병이 유행할 때나 전쟁터에서 매실이 유용하게 쓰였던 것도 이러한 살균효과 때문이다. 특히 오매는 간티스토마에 효험이 있다.◈ 매실 장아찌 ◈※ 청매 과육1kg, 설탕600g1. 단단하고 상처가 없는 푸른 매실(청매)을 골라 깨끗하게 씻어 물기를 뺀다.2. 물기를 뺀 청매를 길이로 6등분하여 칼집을 넣어 씨를 발라낸다.3. 6등분하여 잘라낸 청매과육 1kg에 준비한 설탕의 2/3을 뿌려 고루 잰다.4. 설탕에 잰 청매과육을 병에 담고 맨윗부분에 나머지 설탕을 1~2cm 두께로 덮어 공기가 통하지 않도록 한다.5. 15~20일 정도 서늘한 곳에 보관하면 아삭거리고 쫄깃한 맛이 살아 있는 매실장아찌가 완성된다.◈ 매실주 ◈※ 청매나 황매1kg, 소주3.6리터1. 흠집이 없고 과육이 단단한 청매나 황매로 담는다. 매실 1kg에 소주 3.6리터가 필요하 다. (소주는 알콜도수 30도의 과실주 전용이 좋다.)2. 매실을 깨긋이 세척한 후 물기를 완전히 빼고 유리병이나 항아리 에 넣는다.3. 취향에 따라 감초를 3 잎 정도 넣어 준다. 밀봉해서 3개월 이상 둔 다음 마신다.1년이상 숙성시켜야 떫은 맛이 없는 제 맛을 느낄 수 있다.참조) 떫은 맛을 제거하려면 물에 하루 밤동안 물에 담가두었다 건져서 술을 담그면 된다.◈ 매실 식초 ◈※ 황매(노랗게 익은매실)1kg, 흑설탕600~700g1. 노랗게 익어 과육이 부드러워진 황매를 흠집이 없는 것으로 골라 깨끗이 씻어 물기를 완전히 뺀다.2. 황매를 유리병이나 옹기항아리에 담은 다음 윗부분에 흑설탕을 두껍게 덮어 꼭 밀봉을 해 놓는다.3. 한달 후 밀봉한 황매를 꺼내 삼베나 가제에 받쳐 발효된 물을 걸러낸다.4. 걸러낸 물을 약한 불에 올려 살짝 끓인다. 끊일 때 위로 떠오른 불순물을 깨끗하게 걷 어낸다.5. 그릇째 찬물에 담그거나 냉장고 등에 넣어 가능한 한 빨리 식혀서 매실식초의 향이 날 아가지 않게 한 다음 유리병이나 옹기 항아리에 넣어 보관해 수시로 먹는다.◈ 매실 잼 ◈※ 매실과육(매실엑기스 만들 때 나온 것) 1kg, 매실즙 50kg, 흑설탕700g1. 매실엑기스를 만들 때 나온 과육에 매실즙 50g을 넣는다.2. 1에 물을 50cc쯤 부은 다음 약한 불에 올려 과육이 부드러워질 때 까지 끊인다.
    생활/환경| 2004.11.24| 4페이지| 1,500원| 조회(1,0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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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어 ] 영어 대화문(콘서트장에서)
    In The Concert★ PART 1Mi-Ju(신미주) : DO you have any plan for tonight? (오늘 저녁에 뭐 할 꺼 있어?)Sun-Yeong(신선영) : Im free for tonight. (저녁시간에 괜찮은 데..)Ju-Yeong(한주영) : I am fine.. (나도 괜찮은데..)Mi-Ju(신미주) : Good, you wanna go to concert tonight? (우리 콘서트 보러 가자?)Sun-Yeong(신선영) : whose concert? (누구 콘서트?)Mi-Ju(신미주) : Lee, Soo-Young concert. (이수영 콘서트야.)Ju-Yeong(한주영) : Wow, Wonderful! I hope really! (와, 멋지다.! 정말 가고 싶었는데!)Sun-Yeong(신선영) : Oh, I heard. Advertisements are put in many newspapers and televisions and so on.(아, 나도 들었어, 신문이랑 텔레비전 여기저기에서 홍보가 대단하던걸.)Ju-Yeong(한주영) : However, is concert ticket available? (근데 콘서트 티켓은 있는거야?)Mi-Ju(신미주) : Yes . Received 3 free tickets from somebody.(응. 아는 사람한테 공짜표 3장 받았거든..)Sun-Yeong(신선영) : Yes . good. (그래. 잘됐다.)Mi-Ju(신미주) : Do you go together then? We must start now.(그럼, 같이 가는거지? 지금 출발 해야돼.)Ju-Yeong(한주영) : I see. Let's hurry up. (알았어. 빨리 가자.)★ PART 2Ticket agent(송재진) : Welcome . Are you 3? (어서오세요. 3명이서 오셨나요?)Mi-Ju(신미주) : Yes . we are. (네. 그런데요.)Ticket agent(송재진) : Yes . Will you buy a ticket? (네. 표 사실 건가요?)Mi-Ju(신미주) : No . We have them. Here you are .(아니요. 티켓 가져 왔어요. 여기 있어요.)Ticket agent(송재진) : Yes . I see . Come inside and take the seats.(네. 알겠습니다. 안으로 들어 가서 자리에 앉으세요.)Mi-Ju(신미주) : Thank you. Let's go in. (감사합니다. 우리 안으로 들어가자.)★ PART 3Ju-Yeong(한주영) : Wow! There are so many people. I am a fan, but there are many other Lee, Soo-Young fans too.(와! 사람들 진짜 많다. 나도 팬이지만 역시 이수영 팬이 많나보다.)Mi-Ju(신미주) : You're right. I like Lee, Soo-Young's songs so much.(진짜 그러네. 나도 이수영 노래 너무 좋아해.)Chairman(방윤섭) : Everybody! I welcome to Lee, Soo-Young concert. I ask you shamans. I introduce Lee, Soo-Young.(여러분! 이수영 콘서트에 오신걸 환영 합니다. 다들 많은 박수 부탁 드립니다. 이수영씨를 소개 합니다.) - 주영, 미주, 선영 박수!Lee, Soo-Young(유남영) : Hello . This is Lee, Soo-Young. I thank really for coming to my concert. Will sing my songs for 2 hours from now.I ask many supports.(안녕하세요. 이수영 입니다. 제 콘서트에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지금부터 2시간에 걸쳐서 노래를 부를 겁니다. 많은 성원 부탁 드립니다.)Chairman(방윤섭) : I will call I BELIEVE that is collected in the first album. (첫 곡으로 첫번째 앨범에 수록된 I BELIEVE를 부르겠습니다.)Lee, Soo-Young(유남영) : (♬ 그대 그 약속을 기억하고 있을까요 I BELIEVE, I BELIEVE,)Mi-Ju(신미주) : That song really good isn't it? (저 노래 정말 좋지 않니?)Sun-Yeong(신선영) : Yes . I like Goodbye and light. What song do you like?(그래. 난 굿바이하고 빛이 좋던데. 넌 무슨 노래 좋아하니?)Ju-Yeong(한주영) : Lee, Soo-Young song is all good, but wheel lily and Kkume are so good. (이수영 노래 다 좋지만 휠릴리하고 꿈에가 너무 좋아.)Mi-Ju(신미주) : Lee, Soo-Young is really great. She has singing ability and is cheerful although she grew up an orphan and her effort is so beautiful. (이수영 정말 훌륭해. 가창력도 있고 고아로 자랐으면서도 명랑하고 항상 노력 하는게 아름다워 보여.)Sun-Yeong(신선영) : Yes . Because she sings well and is humble, there are always a lot of popularity. (그래. 노래도 잘 부르고 겸손해서 항상 인기가 많은거야.)Chairman(방윤섭) : Do you feel good? The next songs are wheel lily, Kkume, light, and RaRaRa. (잘 들으 셨나요? 다음으로 빛, 라라라, 휠릴리, 꿈에를 차례로 들려 드리겠습니다.)Lee, Soo-Young(유남영) : (♬ 꿈에 어제 꿈에 보았던 이름 모를 너를 나는 못잊어.)Mi-Ju(신미주) : The girl shown in Kkume music video is so pretty.(Kkume 뮤직비디오에 나왔던 여자아이 너무 이쁘지 않니?)Sun-Yeong(신선영) : Yes . Be pretty but scary. (응. 이쁜데 좀 무섭더라.)Ju-Yeong(한주영) : You're right. I feel so too. (나도 그래. 소름 돋더라.)Chairman(방윤섭) : Finally, I will call Deonggeureoni.(마지막으로 덩그러니를 부르겠습니다.)Lee, Soo-Young(유남영) : (♬ 아쉬운 것 없이 무딘 사람인 척 미련없이 보내놓고)Mi-Ju(신미주) : It is already the last music. I like to listen more.(벌써 마지막 곡이네. 아쉽다.)Sun-Yeong(신선영) : Yes . I'll come again. So good .(응. 다음에 또 와야 겠다. 너무 좋다.)Lee, Soo-Young(유남영) : Everybody! Were you delightful? Thank you for being with us until late time. I'll try more. Good bye.(여러분! 즐거우셨나요? 늦은 시간까지 있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심해서 돌아 가세요. 앞으로도 열심히 노력하는 이수영이 되겠습니다. 여러분! 사랑해요.)Mi-Ju, Sun-Yeong, Ju-Yeong : Sister, we love you. Encore ! Encore !(언니 사랑해요. 앵콜! 앵콜!)★ PART 4Mi-Ju(신미주) : Were you delightful today? (너희들 오늘 즐거웠니?)Sun-Yeong(신선영) : I was really delightful today thanks to you. Thank you .
    인문/어학| 2004.11.11| 3페이지| 2,000원| 조회(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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